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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수2021-10-28 08:53:36

욕망의 해방만이 답은 아니다.

살색의 감독 무라니시 리뷰

경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결론: 실패한 피카레스크

넷플릭스 드라마 <살색의 감독 무라니시>(약칭: 무라니시)의 주인공은 무라니시 도루라는 실존인물이다. 그는 1980년대 ~ 1990년대에 일본 안에서 AV 산업을 주름잡았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드라마를 보면서 이런 의문이 들었다. 왜 제작자들은 넷플릭스를 통해 그의 행적을 되살리려고 했던 걸까. 그리고 그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

 

<무라니시>는 무라니시 도루(야마다 타카유키)의 명암을 드러내는 피카레스크를 표방한다. 흡사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처럼 말이다. 그에 맞게 <무라니시> 시즌 1은 무라니시의 빛나는 성공을, 시즌 2는 무라니시의 잘못과 몰락을 그린다. 무라니시뿐만 아니라 AV 산업에 숨어 있는 명암도 드라마가 다루는 소재다.

 

하지만 <무라니시>가 놓쳐버린 것이 있다. 바로 피카레스크가 전달해줘야 하는 감정이다. 피카레스크는 악인들의 이야기를 그려야 한다. 그런 만큼 평면적인 등장인물들이 나오는 작품들보다 만들기 더욱 어렵다. 이들은 보통의 주인공들에게 느끼는 공감과 악인들의 잘못으로 인해 몰락하는 결말을 동시에 선사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시학>에서는 등장인물의 불행이 그의 악행 때문에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불행이 실수나 판단 착오 때문에 일어나야 등장인물들에게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악인이 주인공이라면 이 감정과 함께 그의 몰락으로 인한 카타르시스도 같이 선사해야 한다.

 

무라니시란 캐릭터의 문제점

<무라니시> 속 무라니시에게는 주인공으로서 선사하는 공감이 있다. 하지만 악인으로서 선사하는 카타르시스는 없다. 무라니시는 드라마 내내 인간의 욕망을 해방시키겠다는 목표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욕망에 동조한 주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시즌 1의 매력은 마침내 그 욕망을 성취하는 데 성공한 무라니시의 모습으로 만들어진다.

 

분명 무라니시의 목표는 잘못되었다. 그럼에도 무라니시에게 공감을 했던 이유는 그 목표를 이루려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는 <하우스 오브 카드>의 주인공 프랜시스(케빈 스페이시)에게 느꼈던 감정과 비슷하다. 그래서 시즌 1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무라니시의 성공은 성취감과 씁쓸함을 동시에 전달했다.

 

하지만 시즌 2가 되면 이러한 모습은 정반대의 감정을 전달한다. 드라마가 그에게 면죄부를 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그의 실책을 드러내면서도 그 실책이 출발부터 잘못된 목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애써 회피하려 한다. 그 이중성이 드라마를 혹평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요소다.

 

그 이중성은 결말에서 격화된다. 무라니시는 몰락한 뒤 길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거지로 전락한다. 어느 날 그는 예전 동료와 함께 바다로 가게 된다. 무라니시의 폭주를 보다못해 그와 결별했던 사람이었다. 무라니시는 그에게 해변가의 돌을 파는 퍼포먼스를 한다. 그리고 다시 재기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내비친다.

 

이 모습은 무라니시의 불행이 그의 욕망을 알아주지 못했던 세상 때문이라는 뉘앙스를 전달한다. 무라니시가 가지고 있는 욕망은 순수했지만 세상이 그걸 알아주지 않아 몰락했다는 이야기다. 이 탓에 카타르시스는 완전히 증발해버리고 말았다.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도 표면적으론 악인의 승리로 끝나지만 이 카타르시스는 확실히 챙겼다.

 

의혹

결국 <무라니시>의 어정쩡한 태도는 욕망을 해방시키면 안 된다는 기괴한 결말로 끝나버렸다. 어쩌면 <무라니시>는 무라니시의 여러 면을 보여주는 척하면서 그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게 아닐까. 물론 그의 욕망이 실현될 가능성은 없어보인다. 여전히 올바른 삶을 살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한.

작성자 . 박지수

출처 . https://brunch.co.kr/@komestan/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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