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1-10-29 16:35:35
서부극의 새로운 템포
영화 〈퍼스트 카우〉 리뷰
황량한 벌판, 결투, 피스톨, 말, 선술집 등등. 미국 개척시대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 장르 서부극을 떠올릴 때 생각나는 것들이다. 무엇보다 비장한 분위기를 빼놓을 수 없다. 사막 위에서 말과 권총에만 의지한 채 삶을 이어가는 서부극 주인공들의 모습은 ‘내던져진 삶’이라는 인간의 고독한 실존과 닮은 데가 있다. 대부분의 서부극이 쓸쓸한 비장함을 뿜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조금 다른 결의 서부극이 있다. 영화 〈퍼스트 카우〉는 누군가의 표적이 되어 쫓기는 중국인 남성 킹 루를 유대인인 쿠키가 구해 주면서 시작된다. 그들은 몇 년 후 정착촌에서 만나고, 돈을 벌 방법을 궁리하다가 마을의 유일한 젖소의 우유를 훔쳐 빵을 만들어 팔기로 한다. 그리 특별하지 않은 줄거리 임에도 왜 〈퍼스트 카우〉는 수많은 전문가들의 극찬을 받았을까? 이 영화가 기존의 서부극과 다른 점을 두 가지 측면에서 짚어 보자.
우선, 두 주인공이 너무 ‘귀엽다.’ 귀엽다는 말처럼 서부극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있을까 싶지만, 어쨌든 두 주인공 쿠키와 킹 루는 너무 귀엽다. 두 성인 남성이 우악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세심하게 서로를 배려하며 우정을 쌓아 가는 장면들이 나올 때마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몰래 우유를 짜는 와중에 젖소에게까지 다정하게 말 거는 쿠키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서부극의 두 남성 주인공에게서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다는 게 정말 놀랍고 새로웠다(물론, 서부극이 아니라도 영화에서 이토록 귀엽고 사랑스러운 표정을 가진 남성 주인공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두 번째는 〈퍼스트 카우〉의 주제다. 대부분의 서부극은 개인의 강함과 탁월함으로 고난을 헤쳐 나가는 남자가 주인공이다. 여기서 우정의 자리는 없거나, 부차적이다. 주인공은 타인과 관계 맺는 대신 자기 내면에 침잠해 삶의 무게를 외로이 견딘다. 그러나 “새에게는 둥지, 거미에게는 거미줄, 인간에게는 우정”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로 시작하는 〈퍼스트 카우〉는 인간이 인간임을 느끼게 하는 온기의 공간으로 우정을 그려 낸다. 고뇌하는 얼굴 대신 서로에게 기댄 두 남자의 표정이 영화의 전면에 등장하는 이유다. 〈퍼스트 카우〉는 혼자 고뇌하며 답을 찾는 서부극의 유산 위에서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자고 말하는 용기 있는 영화다.
〈퍼스트 카우〉가 서부극의 전통을 비틀기 위해 사용한 건 템포의 변주다. 영화는 지독할 정도로 느리다. 빠르고 빈틈없는 장면의 연속으로 전개되는 영화에 익숙해진 우리에게는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지루함의 순간을 견뎌 내고 쿠키와 킹 루의 미묘한 표정을 마주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때부터 내내 행복한 즐거움으로 영화를 볼 수 있다.
집에 놀러 온 자신을 대접하기 위해 장작을 패는 킹 루를 보며, 나는 무얼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바닥을 쓸고 나뭇가지로 친구의 집을 장식하는 쿠키의 표정은 〈퍼스트 카우〉가 지독히 느렸기에 포착할 수 있는 장면이다. 즉 영화는 느린 템포로 대상을 천천히 비춤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두 남자가 우정을 만들어 가는 긴 호흡에 동참케 한다. 〈퍼스트 카우〉의 느림은 섬세한 배려가 깃든 머뭇거림, 서로를 위하는 따뜻한 마음을 보여 주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해롭지 않은 남성성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들 때가 있다. 이런 질문에 회의적인 사람이라면 〈퍼스트 카우〉를 꼭 봤으면 좋겠다. 우리는 그저 해로운 남성성이 과잉 노출되어 필요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상에 살고 있을 뿐,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쿠키와 킹 루가 각각 유대인과 중국인이라는 점도 마찬가지다. 희망은 ‘중심’에서 떨어진 저 먼 곳으로부터 이미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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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심한 밤, 다섯 대의 택시에서 벌어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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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
다섯 개의 도시 그리고 다섯 대의 택시. 야심한 밤, 각 택시에서는 특별한 일이 벌어지는 중이다. 옴니버스 형식으로 이어지는 영화 속 기묘한 사건들은 따뜻하면서도 어딘가 풍자적인 웃음을 자아낸다.
먼저 로스앤젤레스. 거친 느낌을 지닌 소녀 배우를 찾는 데 애를 먹고 있는 캐스팅 디렉터가 택시를 탄다. 캐스팅 문제로 여기저기 통화하며 골머리를 썩는 중, 내내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택시 기사가 보인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그녀는 제작자가 애타게 찾던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다. 캐스팅 디렉터는 드디어 적임자를 찾았단 안도감에 기사에게 캐스팅을 제안하지만, 정작 그녀는 자신은 정비공이 되는 게 꿈이라며 이를 거절한다. 그리고 허탈한 웃음. 할리우드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는 대신 정비공의 꿈을 추구하는 게 누군가에게는 바보 같은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어린 택시 기사에게는 일확천금의 기회보다 자신의 꿈을 성실히 좇는 게 더 중요하다.
다음은 뉴욕이다. 택시가 잡히지 않아 애태우다 간신히 탑승한 택시 기사가 어딘가 이상하다. 영어도 할 줄 모르고, 심지어 운전도 제대로 할 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손님과 기사가 자리를 바꿔 목적지로 향한다. 승객은 동독에서 서커스 단원으로 일했다는 기사에게 친근감을 표하면서도 그를 다소 우습게 보는 듯한 기색도 보인다. 그러나 정작 마지막에 편안한 웃음을 짓는 건 영어도, 운전도 할 줄 모르는 뉴욕의 택시 기사다. 때로는 내면의 단단함이 모든 것을 압도한다.
매너가 엉망인 손님들을 태운 후 기분이 상한 상태인 파리의 택시 기사. 그의 택시에 시각장애인 여성이 탑승한다. 기사는 무지가 깃든 호기심으로 승객에게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할 수 없는지를 구체적으로 캐묻는다. 여자는 자신이 보지 못하는 대신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고 의연하게 대답한다. 택시 기사는 믿지 못하는 눈치다. 그에게 시각장애인은 무언가를 ‘결여’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팡이에 의지해 안전하게 목적지로 걸어가는 그녀와 달리, 택시는 그녀를 내려준 후 곧바로 사고가 난다. 이제 보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네 번째 이야기는 장난스러운 수다쟁이가 주인공인데, 그는 로마에서 택시를 운전한다. 심심하던 차에 때마침 신부가 택시에 오른다. 택시 기사는 다짜고짜 고해성사를 하겠다며 자신이 호박에 자위한 일, 양과 수간했던 일, 동생의 아내와 부정한 일을 저질렀던 일을 털어놓는다. 그러나 기사가 자기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끝없이 수다를 떠는 동안, 뒷자리의 신부는 약을 제때 먹지 못해 숨을 헐떡이다 이내 사망하고 만다. 수다스러운 택시 기사의 방정맞은 고해성사를 감당하지 못하는 신부. 보편적‧도덕적 권위의 담지자인 신부가 진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모습이 처연하면서도 우습다.
마지막 택시는 헬싱키에 있다. 만취한 친구를 포함한 세 명의 남자가 택시에 탄다. 그들은 술에 뻗은 친구에게 아주 딱한 일이 있었다며 기사에게 푸념을 늘어놓는다. 차가 망가지고, 회사에서 해고당하고, 딸이 임신하고, 아내에게 이혼 통보를 받아 술을 진탕 들이켠 후 쓰러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내 무뚝뚝한 표정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기사가 그 정도면 감당할 만한 슬픔이라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승객들은 딸을 먼저 떠나보낸 기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울먹이고, 그의 고통과 자신의 현재를 견준 후 큰 위안을 얻는다. 정작 가장 큰 위로가 필요했던 남자는 내내 뻗어 있느라 아무 위로도 받지 못했지만 말이다. 마지막 이야기는 가장 필요한 이에게 가 닿지 못하는, 가장 필요한 이가 소외당하는 위로와 연대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영화 도입부에서 톰 웨이츠가 걸걸한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Back in the good old world〉)의 가사처럼, 우리 삶은 기껏해야 무덤 위 꽃다발밖에 남기지 못한다. 덧없는 허무함으로 점철된 삶에도 기억할 만한 순간이 있다면, 아이러니와 따뜻함을 동시에 품어 엷은 미소를 자아내는 사건들, 즉 영화 〈지상의 밤〉이 보여주는 장면을 닮았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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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불허전 리들리 스콧, 세련되었지만 아쉽다
'라쇼몽 효과', <라스트 듀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50년 영화인 <라쇼몽>은 새로운 영화 기법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른바 라쇼몽 효과라고 불리는 기법은 하나의 사건을 두고 여러 시선으로 바라보는 군상극을 기본 골자로 하여 사용됩니다. 통일되지 않은 여러 관점으로 사건을 각각 바라보고 있기에 각 관점별로 그 사건을 설명하고 묘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왜곡이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동일한 사건을 여러 화자가 각자의 왜곡된 시선으로 여러 번 반복하여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이 점차 그 사건의 진상과 사실에 다가갑니다. 동일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주기에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야기가 반복될수록 밝혀지는 진상과 예상치 못했던 요소 또는 반전의 등장 등 분명히 동일한 이야기임에도 매번 새롭게 느껴집니다. 이 기법의 의미를 알고 있거나, 혹은 <라쇼몽>을 감상한 상태이면 <라스트 듀얼> 또한 라쇼몽 효과를 사용한 군상극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라스트 듀얼>의 그것은 원작과는 조금 다르게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카루주, 르 그리, 그리고 마르그리트가 전하는 진실이란 제목으로 크게 세 장으로 나뉜 <라스트 듀얼> 역시 결투 재판을 진행하게 된, 세 등장인물 사이에서 벌어진 한 사건을 각자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때 카루주와 르 그리가 술자일 때에는 라쇼몽 효과에 따른 각자의 관점의 차이를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축하연에 참석한 두 친구가 화해를 하는 시퀀스에서 카루주가 술자일 때에는 본인이 먼저 손을 내밀면서 화해의 말을 건네고 르 그리가 이를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르 그리가 술자일 때에는 반대로 르 그리가 먼저 화해의 말을 건네고 카루주가 이를 받아들입니다. 그 외에도 르 그리와 마르그리트 간의 입맞춤을 두고, 1장에서는 화해의 의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행위로 묘사하는 데 그칩니다. 하지만 2장에서는 르 그리의 마르그리트에 대한 연모를 중점적으로 묘사하는 등 연출에서도 둘의 차이를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두 장 간에 존재하는 차이들로 인해 관객들은 사실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직접 추리를 벌이게 되고, 그 과정에서 서스펜스도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영화에 몰입하게 됩니다.
군상극과 라쇼몽 효과, 그리고 <라스트 듀얼>
1장과 2장까지는 정석과 같이 흘러가고 있다.
마르그리트의 '진실', 장르적 재미는 반감되지만 괜히 거장이 아닌
하지만, 3장 마르그리트가 전하는 진실에 이르고 나면 이전과 분위기가 상당히 달라집니다. 앞선 두 장과 달리 3장이 시작할 때 '진실'이란 단어만이 화면에 오래 남아있음으로써 3장의 이야기가 진실, 혹은 진실을 넘어선 사실임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라쇼몽 효과를 활용할 때 어떤 사건이 가지고 있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그 사실이 명확히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그 대신 사실을 확정 지을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들을 각 화자들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본 사건의 곳곳에 메타포로 숨겨놓고 있습니다. 관객들은 이러한 단서들을 찾아내고 추리함으로써 군상극이란 장르가 가지고 있는 장점과 재미를 적극 활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라스트 듀얼>은 3장의 이야기가 진실임을 밝혀버림으로써, 두 장에 걸친 추리와 추측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즉 장르적 재미를 감소시키고 클라이맥스는 허무해집니다.
다만 3장의 방향을 이렇게 설정한 데에는 어느 정도 참작의 여지가 있습니다. 현대에는 아직 약자의 위치에 존재하고 있는 여성들은 여전히 수난을 겪고 있으며, 그에 대한 해방의 일환으로 소위 '미투'로 일컬어지는 운동이 있습니다. 이러한 수난이 명백히 존재하고 가장 극심하던 시기인 야만적인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하여 그들의 투쟁기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강인하고 진취적인 여성상의 등장인물을 자신의 영화에 자주 등장시킨 리들리 스콧의 특성상 이러한 급작스럽게 노선을 변경하는 듯한 전개는 노골적으로 보일 수는 있을지라도 놀랍지는 않습니다. 그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이렇게 노골적이고 명백한 주제의식을 관객들에게 전파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라쇼몽>과 같이 진실이란 존재에 관해 다루고 있습니다. 마르그리트가 주장하는 진실이 사실로 받아들여졌지만, 이는 본인이 쟁취해 낸 게 아닌 결투 재판을 통해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더군다나 마르그리트가 주장하고 있는 진실 또한 본인의 관점이 적용되었기에 남성들에 비해서는 사실에 더 가깝긴 하겠지만 왜곡이 존재하고 있음에는 틀림없습니다. 즉, 진실이란 무엇인지·진실이 어떻게 성립되는지에 관해서도 다루고 있는 점을 통해, 괜히 리들리 스콧에게 거장이란 명칭이 붙여진 게 아니란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물론, 3장의 시작에서 '진실'이란 단어를 오래 노출시키는 노골적인 연출로 주제의식을 관객들에게 주입시키는 행위는 더 훌륭하고 완벽해질 수 있었던 <라스트 듀얼>의 만듦새를 제 손으로 깎아먹은 행태라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페미니즘이란 주제로 급 드리프트 시킨 3장, 그럼에도 진실이란 존재에 대해 섬세하게 다루고 있는 감독의 능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꼭 페미니즘을 썼어야 했나?
비주얼리스트, 그리고 섬세하고 미묘한 차이를 완벽하게 구현해낸 배우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장기를 논할 때,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능력이 하나 있습니다. 극의 상황별로 적절하고 어울리는 아름다운 비주얼 활용 능력, 다시 말해 리들리 스콧은 비주얼리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능력의 일환으로, 리들리 스콧의 사극 영화 중에서 극한에 가깝게 고증을 따라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라스트 듀얼> 또한 철저한 고증으로 이뤄진 영화입니다. 판타지 풍이 아닌 실제 중세 시대의 복식을 비롯해, 화살은 갑옷을 종잇장처럼 관통하지 않으며 튕겨나갈 때에는 언제든지 튕겨나갑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체인 메일을 손에 휘감아 적의 얼굴을 향해 수없이 내려치는 장면이라든지,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두 기사의 결투 또한 아름답게 그려내지 않고 목숨을 걸고 진행하는 만큼 처절하고 묵직하고 차갑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때 <라스트 듀얼>은 진실에 관해 다루고 있는 만큼 철저한 고증을 통해 감독이 진실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는 요소 중에 하나가 아닌가 하는 재밌는 생각도 듭니다.
그 외에도, <라스트 듀얼>이 지닌 강점 중의 하나로, 배우들의 섬세하고 뛰어난 연기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동일한 사건을 반복하여 보여주지만 그 사건의 화자가 모두 다르기에 모든 상황이 동일하게 비칠 수는 없으며, 동일하게 비친다면 결코 좋은 영화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라스트 듀얼>의 배우들 모두 그러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아주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대표적으로 르 그리가 마르그리트를 무작정 찾아와 강간하는 씬에서, 2장과 3장의 배우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미묘하게 유사하면서도 명백히 다르게 그려냈습니다. 2장에서 르 그리의 고백은 아름답고 우아하며, 마르그리트는 형식적으로 저항하며 그녀도 즐기는 듯이 묘사되었습니다. 하지만 3장에서 진행되는 대사는 2장과 다를 바가 없지만 상황은 정반대입니다. 르 그리의 고백에서 아름다움은 온데간데없이 뜬금없고 어색함 가득한 고백이었으며, 마르그리트는 진심으로 저항하며 처절하게 절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눈에 띄게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씬 외에도 1장과 2장이 시작하는, 강을 건너 적을 향해 달려가는 시퀀스가 있습니다. 둘은 동일한 상황을 비추고 있지만 미묘하게 차이를 보이는 아담 드라이버의 표정은 1장과 2장에 큰 차이가 있으리라고 누구나 예측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로서 아주 훌륭했습니다. 이처럼 미묘한 차이를 섬세하게 묘사해 낸, 배우들의 명연기를 아낌없이 칭찬하고 싶습니다. 번외로, 조디 코머는 <프리 가이>와 동일한 배우가 맞는지 눈을 의심할 정도로, 이 영화에서 정말 아름답게 등장했습니다.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는 단연코 <라스트 듀얼>의 백미. 그리고 비주얼리스트 리들리 스콧의 아름다운 비주얼 활용 능력, 철저한 고증은 영화의 주제와도 연관되어 있는 건 아닐지?
1장과 2장을 거치면서, 영화가 빌드 업해 나가는 양상은 정말 좋았고 더할 나위 없었습니다. 하지만 3장의 도입부가 쌓아올린 빌드 업을 스스로 무너뜨린 느낌입니다. 분명히 진실을 말하고 있음에도 김이 팍 새 버렸고, 흥미 또한 떨어졌습니다. <라스트 듀얼>은 좋은 영화이면서 동시에 아쉬운 영화입니다. 아무리 포장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치명적인 그 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들은 모두 좋았기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이 영화의 감상을 추천합니다 :)
본인 결정은 본인이 해야죠.
결과도 본인이 책임지는 거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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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후의 초상화 밖으로 뛰쳐나간 여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영화 <코르사주>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이름을 날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후 '엘리자베트(비키 크립스)'. 그런 그녀에게 남편인 '프란츠 요제프(플로리안 테히트마이스터)' 황제는 인형과도 같은 황후의 역할만을 요구한다. 이에 엘리자베트는 답답한 코르사주(코르셋)를 조인 채 무거운 머리를 지탱하며 그저 우아하게 앉아있을 뿐이다. 하지만 마흔 살이 넘어가면서부터 그녀는 아들인 '루돌프(아론 프리즈)' 황태자의 경고도 무시한 채 여행, 불륜, 마약에 손을 대며 한 명의 여성이자 개인의 삶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
2022년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공식 초청되어 최우수 연기상을 받았고, 2023년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 부문 오스트리아 공식 출품작으로 선정된 영화 <코르사주>. <코르사주>는 흔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후이자 ‘시씨’라는 애칭으로 잘 알려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사실 엘리자베트 황후의 이야기는 뮤지컬 '엘리자베트(엘리자벳)'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녀는 자유분방한 소녀였지만 황후가 되었고, 전통과 관습이 지배하는 궁정 생활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아름다운 미모로 전 유럽 사람의 찬사를 자아냈지만, 미모를 관리하던 중 거식증에 걸리는 등 온갖 고초를 거쳐야 했다. 그러면서도 궁전을 벗어나 자유를 갈망한 비운의 황후였다. 마치 다이애나 스펜서의 선배처럼 보이기도 한다.
<코르사주> 속 엘리자베트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영화는 그녀의 일대기를 그려내는 대신 '마흔이 된 황후 엘리자베트’의 변화에 주목한다. 특히 그녀가 어느 시점부터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착안해 왜 그러한 선택을 내렸을지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렇게 영화는 황후라는 이미지에 가려진 한 인간 엘리자베트의 얼굴을 세상에 내보인다.
영화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 숨을 참는 엘리자베트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목욕을 마친 그녀는 코르사주로 허리를 동여맨다. 준비를 끝내고 황제와 함께 미술관 개장 행사에 참여한 그녀는 코르사주를 지나치게 세게 묶은 나머지 돌연 정신을 잃고 기절한다. 하지만 그 후로도 그녀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녀는 계속해서 아름다운 인형으로 남아야 한다. 일례로 그녀의 식단은 만찬과 연회 중에도 철저한 관리 대상이다. 그녀는 남들이 먹는 화려한 음식들에 손조차 댈 수 없다. 황후에게는 황제 옆에 서서 인형처럼 웃는 것 외에 다른 일이 없으므로, 조금이라도 인형의 외관에서 벗어나는 일은 허락되지 않았다. 마흔 살 생일을 맞이하자 더 많은 압력이 가해진다. 황실 소속 화가가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자 주치의는 여성의 평균 수명이 마흔이니 더 각별히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충고한다.
오프닝은 엘리자베트라는 역사적 인물의 삶을 빌려 영화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 하는지를 명확히 암시한다. 여성에게 요구되는 '아름다움'이라는 미적 기준이 개개인을 억압하고, 삶을 피폐하게 만들며, 수동적인 존재로 격하한다고 비판한다. 이전에 비해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고 권리가 보장되었는데도 여전히 아름다움이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고, 엘리자베트를 구속한 악습이 오늘날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탈코르셋’(탈코) 운동처럼도 보인다. 사회구조적 외모 강박 혹은 여성성 강요에 저항하려는 목적으로 화장이나 긴 머리, 여성적 옷차림 등 ‘사회적 여성성’을 부정하는 시도가 엘리자베트의 삶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는 한 개인으로서 엘리자베트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포기하는 선택과 황후로서 엘리자베트가 자신을 옥죄는 규범을 어기며 자유를 갈망하는 모습을 같이 위치시킨다. 그녀는 코르사주를 벗고, 길게 늘어뜨린 머리를 단발로 잘라버린다. 동시에 황제의 부인이라는 지위를 거부한다. 황제에게 정부를 소개하고, 영국인 승마 선수 조지 베이나 사촌 루트비히 2세와는 사랑과 우정 사이의 관계를 유지한다. 한편으로는 황후로서 참석해야 할 공무를 외면한 채 자유를 즐긴다. 또 고정된 이미지로 남아야 하는 초상화 작업은 거부하지만 자유롭게 들판을 거니는 순간을 기록할 수 있는 동영상 촬영에는 적극적으로 협조한다.
황후의 삶을 포기하고 여성으로서의 자유를 추구하는 엘리자베트의 노력은 그녀가 갖고 있던 또 다른 가능성 때문에 더 인상적이다. 그녀는 우울증에 시달린 자기 경험을 투사하며 정신병 치료와 정신병원 시설 개선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림을 그리는 예술적인 면모도 지녔고,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발칸반도 진출과 관련해 전황을 판단할 줄 아는 식견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만약 그녀가 미모를 가꾸는 데 열중해야 했던 시간과 노력을 다른 데에 투자했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하는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화의 지향점을 생각하면 꽤 의미심장한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영화는 황실의 모습을 비추면서도 화려한 궁전 내부를 기대보다 자주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각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칙칙하고 어두운 통로들을 더 자주 비춘다. 마치 겉보기에는 화려하나 실제로는 생기가 없는 엘리자베트의 외관과 내면을 한 공간에 담기라도 한 듯이. 또 그렇기에 <코르사주>가 완성한 황후 엘리자베트의 새로운 초상도 인상적이다. 황후로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바닷속에 몸을 던져 자유를 얻는, 비극적이면서도 엄청난 해방감을 선사하는 결말의 순간에 그 어느 때보다 살아 숨 쉬고 있는 엘리자베트를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미인과 황후라는 고정된 이미지에서 벗어나려는 엘리자베트의 변화를 <코르사주>가 과연 적절히 전달하는지는 의문이다. 영화는 엘리자베트라는 실존 인물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요소만 부각해 원하는 인물상을 만들어낸다. 실제로 마리 크로이쳐 감독은 "영화적 내러티브로 전환하면서 내용과 형식적으로 많은 자유를 부여했다"면서 "이야기하거나 묘사하는 것에 있어 모든 역사적 ‘실수’는 모두 예술적 결정이었다. 나는 멋지고 깔끔한 전기 영화를 만드는 데 관심이 없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코르사주>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둘러싼 역사적 배경 또한 조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선택은 그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스트리아의 황후라는 지위가 얼마나 부담되고 무거운 자리였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엘리자베트의 고난과 시련이 구체적으로 와닿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쇠락기에 접어든 제국이었다. 1866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오스트리아를 통치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제국이 붕괴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헝가리의 요구를 일부분 받아들여 1867년에 오스트리아 황제가 곧 헝가리의 군주를 겸임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군주제 체제를 구축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나름 동등한 위치로 제국을 구성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제와 황실의 존재는 붕괴 위기에 빠진 제국을 지탱할 몇 안 되는 도구 중 하나였다. 마치 엘리자베스 2세와 영국 왕실이 영국이라는 국가와 영연방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어 유지한 것과 유사한 역할을 맡아야 했다. 즉, 당시 황제와 황후, 그리고 황실은 서로 다른 민족과 국가를 하나로 묶는 상징이자 실질적 제도로서 기능해야 했다. 실제로 엘리자베트의 막내딸 발레리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제국의 통합을 상징하는 공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아름다운 황후의 이미지를 유지하는 것은 단순히 미모를 관리하는 것 이상으로 무거운 책임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나 맥락을 알 수 있는 장치는 많지 않다. 특히 오스트리아 관객이 아니기에 더욱 부족하게 느껴진다. 그 결과 엘리자베트가 겪은 여러 어려움은 그저 막연하다. 짐작하고 동조할 뿐, 설득될 수가 없다. 황후로서 역할이 얼마나 막중했는지, 그녀의 역경이 얼마나 큰지, 또 그녀의 고통이 얼마나 강한지 명확히 드러날수록 해방되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큰 쾌감이 느껴질 것이고, 그녀에게 자유가 의미하는 바가 더 절실히 느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왜 승마를 그토록 사랑했는지, 왜 그토록 손쉽게 마약에 빠져들 수박에 없었는지 그 동기와 계기도 더 잘 설명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듯 보이기도 한다. 다음처럼 이해될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엘리자베트가 황후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다면, 그에 합당한 책임도 져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전자를 누릴 뿐, 후자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다. 배경이 어떻든 간에 작중 엘리자베트가 결국 무책임한 인물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몸이 약한 막내딸을 굳이 새벽에 외출시켜서 감기에 걸리게 하는 것, 그토록 엄중한 상황에서 자신의 스케줄을 마음대로 거부하는 것, 평생 여행을 다니며 황후의 역할을 회피하는 것도 마냥 동정을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제목인 코르셋(코르사주)이라는 상징에 담긴 <코르사주>의 메시지는 여전히 시의적절하다. 그 메시지를 현현한 엘리자베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도 충분히 흥미롭다. 하지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다소 부적절한 것도 사실이며, 그 결과 과연 이 영화가 원하는 대로 수용되거나 해석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다. 결국 <코르사주>는 황후와 여성 사이에서 길 잃은 엘리자베트만큼이나 모호한 인상을 남긴 채 막을 내리고 만다.
A(Acceptable, 무난함)
평범한 여성이 되고 싶었던 황후. 실존적 불안과 치기 어린 불평 사이에서 길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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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거리트의 정리] 너 자신을 알라
[마거리트의 정리]
2보다 높은 짝수, 그러니까 ‘4 6 8 10 ~’는 두 개의 소수의 합으로 표시할 수 있을 것이다. 1742년, 프로이센 수학자 골드바흐는 오일러에게 편지로 자신의 추측을 전달했다. 4는 2+2로 표현할 수 있고, 6은 3+3, 8은 3+5와 같이, 1과 자기 자신만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1보다 큰 양의 정수로 짝수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갑자기 뜬금없이 영화 리뷰에 짧은 수학 지식을 가져온 이유는 이번 ‘마거리트의 정리’ 영화 내내 주인공 마거리트가 세계의 난제인 ‘골드바흐의 추측’을 연구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아쉬운 점은 이것이다. 관객에게 어떤 수학적 정보나 이해를 도울 예시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마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마작을 해본 적이 없는 내게는 똑같이 어려운 비유였다. 마작이란 게임을 알고 계신 관객은 중간마다 놀라움을 표현하시기도 하셨다. 부끄럽지만 수학을 놓고 산지 아주 오래전이라 영화 속에 나오는 다양한 수학 기호와 설명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리뷰를 써야 편할지 걱정된 적은 또 처음이다. 공포영화는 온 힘을 다해 부술 텐데.
하지만 수학적 설명을 하지 않은 이유도 알고 있다. 영화에서 ‘무엇을 설명한다’는 것은 굉장히 늘어지는 작업이자 붙잡고 있던 서사의 긴장감을 끊어버리는 행위다. 영화가 굉장히 어려운 난제를 어떻게 관객들에게 보여줄지 고민을 한 흔적이 이곳에서 느껴졌다. 애초에 수학적 지식을 나열하는 단순함은 짧게 보여준다. 대신 주인공 ‘마거리트’에게 벌어지는 드라마에 가까운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서사를 부여한다. 즉, 수학을 싫어하는 사람이나 평소 수학과 밀접한 연관이 없는 사람도 영화를 충분히 즐길 수 있는 훌륭한 영화다.
사실 조금 걱정했다.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확인하고 주인공 마거리트의 모든 행적을 걱정했다. 상업 영화가 아니며, 칸 영화제와 세자르영화제에서 수상을 받은 작품이라면, 주인공의 갑작스러운 돌변에 매번 긴장한다. 독특한 소재로 관심을 얻었으나 눈이 피곤할 정도로 선정적이거나 이야기와 전혀 상관없는 PC요소로 재미가 반감하는 경우가 많았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애초에 처음부터 각오하고 보았기에 놀라운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내가 말하는 건 정말 갑작스레 행동하거나 튀어나오는 억지스러움이라는 것이다.
나의 걱정과는 다르게 ‘마거리트’는 스스로 위대한 행보를 걷는다. 늦은 사춘기를 맞이한 것처럼 격정적인 감정에 휩쓸리기도, 매혹적인 상대에게 집중하기도 한다. 마치 울타리 안에서만 살아가던 암탉이 담장 밖 세상에서 다양한 생물과 환경을 만나는 것처럼 ‘마거리트’는 세상을 경험한다. 재밌는 점은 마거리트가 경험하는 일들은 이미 익히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성인인 마거리트는 이미 클럽에서 춤을 춘다는 정보는 알고 있는 상식이다. 수학 천재 마거리트는 도박은 불법이며 도박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위험하다는 점을 알고 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본 마거리트는 믿음, 배신, 사랑이란 감정들에 대해서 머리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모르는 것은 ‘골드바흐의 추측’을 해결할 열쇠지, 인생이 아니었다.
이 부분에서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이 떠올랐다.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연기한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도 누구나 경험했을 일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그저 수학과 암호 해독을 좋아해서 일반인이 자주 하는 일상을 보내지 않은 것과 똑같았다. 보통 영화에서 묘사하는 천재들의 공통적인 문제점은 ‘강박’이다. ‘마거리트’는 수학에 대한 강박을 가졌고, 이것은 자연스레 오로지 학교 안에서 모든 생활을 하는 단순함으로 이어진다. ‘실내화 신은 수학자’라는 별명을 가진 여인이 일련의 사건으로 학교 밖을 자의적으로 나간다.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앨런 튜링이 세상에서 군부대 안으로 들어가 조안, 휴 같은 친구를 만나는 것과 반대로 말이다.
마거리트는 실내화 대신 운동화를 신으며 앞서 언급한 다양한 사건을 경험한다. 심지어 수학 천재답게 머릿속으로 마작의 모든 수를 세며 도박판의 실력자로 급부상하기도 한다. 반드시 연구 논문을 마치고 교수님의 애제자로서 성공해야 했던 그녀에게 이런 일상은 가혹한 일탈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사춘기 늦바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오로지 숫자에만 매몰된 그녀의 눈을 뜨게 해주는 휴가였다고 생각한다. 최근 하루키의 여행 에세이 ‘먼 북소리’를 읽으며 든 생각이 있다. 제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도 정보를 알고 있지 않다면 바보와 똑같다는 것이다. 그런 경험해본 적 있을 것이다. 책이나 대중 매체로 알고 있던 미술 작품이나 자연경관을 실제로 마주했을 때의 경이로움 말이다. 그래서 마거리트가 음습한 수학 천재 모습 대신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파리의 대학생 같은 행동을 할 때 반가웠다. 의외로 많은 관객이 그녀의 엉뚱한 행보에 웃으셨다.
드라마 ‘퀸즈갬빗’은 1950년대 체스 천재 베스가 세계 정상에 올라가는 과정을 다룬다. 천재가 어떻게 주목을 받으며, 어떻게 무너지고, 어떻게 부활하는지에 대해 주인공을 극한으로 내몰며 뼈저리게 알려준다. 이번 ‘마거리트의 정리’도 마찬가지다. 113분이라는 시간 동안 주인공 마거리트에게 무수히 많은 시련이 몰아친다. 퀸즈갬빗에서 느꼈던 ‘드라마 자체가 하나의 체스 경기’와 같이 이번에도 ‘영화 자체가 하나의 수학적 증명 과정이다’라고 느꼈다. 영화 초반부 증명에 실패한 마거리트가 몇 걸음 물러나 머리로만 알고 있던 정보를 온몸으로 경험하며 하나하나 다시 인생 전체를 증명하는 것 같았다. 관객으로서 증명 과정 전체가 독특해서 즐거웠다. 그녀에게 주어진 시련을 독특한 방식으로 하나하나 배워가며 흔들리는 것에서 인간적인 공감을 느꼈다. 비록 그녀가 어떤 난제를 풀어가는지 그 과정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미치도록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고 싶은 마거리트의 욕망, 결심, 뛰어남을 이해했다. 마지막으로… 아마 전국에 계신 수학 선생님들이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 전, 남는 시간에 틀어주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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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 옆에서 피워내는 예술
해당 리뷰는 씨네랩의 시사회 초청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사진작가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들이 으레 그러하듯 이 영화 역시 낸 골딘의 사진에 어느 정도 빚을 지고 있다. 낸 골딘이 자신의 과거를 담담히 풀어놓는 동안 스크린 위로 사진 슬라이드 쇼가 펼쳐진다. 한 장 한 장의 사진이 갖는 에너지는 음악과 음성이 더해져 시대의 저항이 들끓었던 그곳으로 관객을 오롯이 데려간다. 낸의 유일한 언어는 사진이었고, 소외와 배척은 예술로 향하는 길이 되어 주었다. 낸 골딘의 삶은 세상과의 부딪침으로 이루어져 있다. 불안정한 가정환경과 언니 바버라의 자살, 성소수자, 폭력, 약물 중독. 사회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던 골딘의 주위에는 친구들과 예술이 흘러넘쳤다. 모두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소리 높여 외치던 그곳에서 낸 골딘은 자신을 믿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 사회와의 충돌과 투쟁 그리고 우정은 빛과 필름을 투과해 이미지로 온전히 남았다.
영화는 과거의 사진들과 현재 낸이 속한 시위단체 ‘P.A.I.N (처방 중독 즉각 개입)’의 활동을 병치한다. 낸 골딘은 2017년부터 옥시 중독 문제인 ‘오피오이드 위기‘에 목소리를 높였다. 옥시콘틴 약물의 위험성이 대두되지 않았던 시기 낸 골딘은 약을 처방받고 중독되어 죽음 직전에서 살아 돌아왔다. 약물 중독 문제를 방조한 제약사 퍼듀와 그 배후에 있는 새클러가의 기부를 받고 그들의 이름을 드높이고 있는 미술관들이 P.A.I.N의 무대다. 약통과 처방전 그리고 피 묻은 돈을 흩뿌리며 죽음을 재현하는 시위는 또 다른 예술이다. 골딘은 카메라를 들지 않고 직접 약통에 스티커를 붙이고 바닥에 누우며 육신으로 메시지를 전한다. 이런 낸 골딘에게 카메라를 비추는 이는 로라 포이트라스 감독이다.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는 스스로 예술이 되기로 한 예술가를 담아낸다.
P.A.I.N은 미술관에 걸려 있는 새클러의 이름과 평판이 끌어내리려 한다. 옥시콘틴의 중독 위험성을 알면서 판매와 마케팅을 지속한 새클러가에 대항해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높이는 활동은 과거에 낸 골딘이 해왔던 투쟁들의 연속선상에 있다. 그러나 낸 골딘의 슬라이드 쇼를 영화화한 것 같은 과거 부분에 비해 현대 P.A.I.N의 활동은 지닌 의미에 비해 다소 밋밋한 인상을 남긴다. 성기게 나뉜 P.A.I.N의 활동은 낸 골딘의 사진 한 장에 담긴 압축된 에너지에 부수적이거나 밀려나는 것처럼 보인다. 낸 골딘이라는 개인과 그의 시각이 아니라 P.A.I.N이라는 단체로 시야와 집중력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매’라는 소제목을 가진 마지막 챕터는 흩어졌던 집중력과 힘을 다시 가져온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바바라의 의무기록과 그가 세상을 등졌던 공간에서 관객은 낸 골딘의 그리움과 슬픔, 애증을 목격한다. 언니의 죽음으로 시작한 낸 골딘의 이야기는 투쟁과 죽음을 지나 다시 이 기찻길에 다다른다. 기찻길은 3개의 화면으로 분할되어 나란히 놓인다. 낸 골딘이 촬영한 과거의 푸티지가 이어지며 언니의 유품 중 조지프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 한 구절을 어머니가 낭독한다.
영화는 다시 시간을 넘어 현재로 돌아온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을 비롯하여 많은 미술관들은 새클러의 이름을 끌어내렸다. 80년대에 에이즈 전시를 큐레이팅하고 국가기금의 반대에 부딪혔던 낸 골딘은 이제 자신의 권위와 명성을 이용해 미술관을 압박할 수 있는 독보적인 예술가가 되었다. P.A.I.N의 활동은 소기의 목적을 이루었다. 여전히 누군가는 부조리한 죽음에 맞닿아 있고 사회는 시리도록 무관심하다. 그러나 그곳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언어와 예술을 꽃피우는 이들이 있다. 가장 개인적이고, 정치적이며 역사적인 한 예술가는 그렇게 낮은 곳에서 자신을 언제나 드높인다. 자신의 언어인 사진과 예술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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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공간
SYNOPSIS.
안정된 주거 환경을 꿈꾸던 레즈비언 커플 선우와 희서는 영혼까지 끌어모아 작은 아파트를 마련한다. 하지만 선우가 불황으로 일자리를 잃고 다리까지 다치게 되면서 전적으로 희서가 대출금과 이자를 떠안게 되자, 둘 사이는 삐걱대기 시작한다. 집에서 쉬게 된 선우는 일자리를 찾지만 쉽지 않고, 설상가상으로 아랫집에서 올라오는 악취로 두 사람의 스트레스는 극에 달한다.
PROGRAM NOTE.
한 동성 커플의 갈등이 한국 사회의 구조 안에서 발현되는 과정을 담은 <럭키, 아파트>는 한국 퀴어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작품이며, 소수자를 대하는 우리의 민낯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뛰어난 사회 드라마다. 제약회사 직원인 희서와 계약직으로 일하다가 직장을 잃은 선우는 9년 차 동성 커플이다. 객관적으로 경제적 차이가 나는 상황이지만 서로 크게 티를 내진 않는다. 하지만 아파트에 입주하게 되면서, 아파트 구매 자금 대부분을 부담한 희서와 기여도가 거의 전무한 선우 사이 갈등은 점차 커지기 시작한다. 아래층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는 커플의 간극을 더욱 키운다. 냄새의 근원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선우가 아파트 가격 하락의 주범으로 찍히며 동 대표 등 주민들과 갈등을 겪는 반면, 직장에서 겪는 성차별로 스트레스를 받는 희서는 커플 관계가 주변에 알려질까 두려워하며 선우의 행동을 비판하고 둘의 관계는 악화일로에 처한다. <럭키, 아파트>의 또 다른 미덕은 갈등과 배제라는 이야기 속에 사랑과 연대라는 희망의 싹을 집어넣는 점이다. 아래층에 살던 할머니의 사진을 갖고 싶어 하는 친구분의 소망을 들어주기 위해 무단침입까지 감행하는 선우는 “왜 그랬냐”는 희서의 질문에 “남 일 같지 않아서”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감동적인 대사는 아름다운 마지막 장면으로 이어진다. <이태원>(2016), <시국페미>(2017), <우리는 매일매일>(2019) 같은 여성주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온 강유가람 감독은 첫 극영화에서도 놀라운 역량을 보여준다. (문석)
몇 년 전 <이태원>을 보고 받았던 충격이 생생하다.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도 들여다볼 수도 없는 세상의 이야기를, 이토록 섬세하게 연출하여 가져다 주는 영화라니. 강유가람 감독의 이름을 그렇게 알았고, 그 후 다큐멘터리 작품만 만나다가, 첫 극영화 연출작이라고 해서 고민 없이 선택했다. 그리고 역시나 이번에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았다.
공간: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영화는 희서와 선우가 나란히 앉아 있는 푸른빛 자동차에서 시작하여, 이내 푸른빛 침구와 소파가 놓인 두 사람의 아파트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부동산 문제는 한국 사회의 머리 아픈 과제이자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기회여서 도무지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 보이고, 이 영화 속에도 집값을 우려하는 사람들이나 대출이자에 한숨 짓는 희서를 통해 그런 문제의 면면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 영화 속 아파트에서 내게 가장 먼저, 가장 깊이 각인된 것은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집안일에 필요한 도구들은 정갈하고 생활감 있는 위치에 표현되고, 운동 기구도 깔끔히 놓여 있으며, 설거지하는 선우 뒤로 걸려 있는 와인잔 같은 것들은 두 사람이 각자의 삶과 함께하는 삶, 일과 관계의 낭만까지 허투루 하는 구석 하나 없이 열심히 사는 사람들임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집은 사는 사람을 드러내니까.
그런데 그 공간에 자꾸 퍼지는 냄새가 있다. 쓰레기를 비우고 박박 문질러 닦고 락스를 부어 봐도 사라지지 않는 냄새. 문제를 올곧게 직면하며 정공법으로 해결하려는 선우와, 적당한 불편함을 삼키면서 피할 수 있는 갈등은 최대한 피해 가려는 희서의 방법은 냄새를 두고도 계속 부딪게 된다. 시작부터 두 사람의 갈등은 진작 지나간 일, 이미 어쩔 수 없는 일들을 논하고 있고, 우리 모두 가까운 사람과 싸워 봐서 잘 알듯 그건 필연적으로 '탓'이 된다. 쌓이는 쓰레기를 내어 버리고 바닥을 박박 문대어 닦듯, 좋지 않은 감정도 주기적으로 그래 주어야 하는데, 두 사람에겐 그럴 여유가 없다.
자격: 더 필요한 자에게 더 문턱이 높은
아파트는 한국 사회에서 공간인 동시에 거의 어떤 정체성의 일부처럼 기능하고 있다. 어느 동네 산다는 것으로도 모자라 어느 아파트에 산다는 것을 꼬리표로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고, 이들 중 일부는 집값 하락에 대한 우려를 심어주는 '부적절한' 입주자를 걸러내고 싶어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임대주택이 단지 내에 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차별하면서, 차별이 아니라 차이라고 말한다든지. 이들에게 아파트는 자본으로 거래한 재화보다는 오히려 봉건시대의 성직이나 성기사직처럼 거의 부여받은 자격에 가깝다.
주거지의 위치나 입지뿐 아니라, 주거지를 획득하기 위한 과정 또한 마찬가지로 자격을 요한다. 고공행진이라는 말을 쓰기도 머쓱할 정도의 매매 비용으로 인해, 노동소득만으로 매매할 준비가 되는 사람이 거의 없이 사회에서, 빚도 재산으로 인지하는 이 사회에서, 대출 또한 일정한 자격을 필요로 한다.
사실 고정비를 줄일 필요성이 더 절실한 이들에게 이 문턱은 더 높다. 빈곤은 단순히 돈의 많고 적음 혹은 그 돈을 획득하기 위한 개인의 노력 정도로만 얄팍하게 재구성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에도, 이 사회의 천민 자본주의는 너무 쉽게 문턱 아래 있는 사람을 업신여긴다. 게다가 빈곤 문제만 엮여 있지도 않다. 번듯한 직장에서 돈 잘 버는 희서는 물론, 대출 자격을 받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선우도 배우자의 존재를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어 이 문턱 앞에서 더욱 불리하다.
당연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은행이 공짜 장사를 하는 것도 아니니, 일정한 자격이 필요하고 좋은 아파트 사는 게 잘못도 아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악의조차 없이, 타인에 의해 존재가 흐릿해지는 경험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파트를 중심으로 모인 이 영화 속 인물 다수가 그렇다. 명백한 성차별 혹은 업무상 클라이언트라는 이유로 갑을 관계처럼 대우하는 의사 앞에서 표정을 마음껏 굳히기도 어려운 희서, 배우자가 있냐는 질문에 말문이 막혀야 하는 사람들.
가진 자가 나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숱하게 부정당하는 순간들을 마주했던 인물이지만, 모르는 척 개인정보 유출이라도 해달라는 선우까지도 타인의 존재를 흐릿하게 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사회 전체가 거대한 아파트처럼, 서열화되고 파편화되고 서로를 볼 수 없는 이 사회에서는, 우리 모두 알게 모르게 타인의 존재를 흐릿하게 만드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다만 유독 중첩되어 그런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이 영화는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도 떠오르게 만든다. 꼭 동성애 커플만 해당되는 이야기도 아니기 때문에 질문은 자연스레 확장된다. 원가족과 연결되어 있지 않거나(혹은 그렇지 못하거나), 원가족이 찬성하지 않는 결혼으로 새 가정을 이루어 인정받지 못했거나, 1인 가정을 이루어가는 사람... 이 모두가 사후 장례나 청소조차 이루어지기 어려운 얄팍한 세상을 밟고 살아야 한다니. 최대한 모두를 촘촘히 보호할 망을 짜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자격을 부여받은 사람들만 보호하는 법으로 남겨두기엔, 그 자격 부여받지 못하거나 걷어차고 나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세상이니까. 1인 가구가 갈수록 증가하고, 가족의 형태와 개념과 사회적 합의가 많이 변해 가는데, 언제까지 저출생 염불만 외고 있을 것인가. 이런 고민들을 자연스레 하게 된다.
사랑: 남는 건 그저 소중하게 빛나는 마음뿐
사회의 자장에서 매우 투박하게 다뤄지며 변죽만 울리는 이 문제들을 영화는 섬세하게 담아낸다. 그리고 이 문제와, 그 안에서 심화되어 가는 인물들 간의 갈등이 뒤엉키며 영화는 점점 심란하게 흘러간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사람을 피로하게 혹은 절망하게 하지 않는다. 시의적절하게 작고 소소하게 기웃거리는 희망은 마지막에 뽀얀 빛을 발한다.
아무도 이 영화에서 법과 제도를 들어엎는 식의 해결을 기대하지는 않겠지만 (이 영화의 국적이 인도였다 해도, 요즘 인도 영화도 그 정도는 안 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사랑과 희망의 이름을 빌려 우리에게 반짝반짝 빛나는 마음을 가득 안겨준다.
희망이나 연대는 아주 거대한 단어 같지만 이 영화는 아주 사소한 순간에서 그것들을 보게 한다. 거드는 말 한 마디, 지키는 말 한 마디, 공감의 감탄 하나. 사소한 이웃의 대화. 그런 말이 놓인 자리라면 거기야말로 럭키, 가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랑. 언젠가는 우리 모두 죽고 스러져 결국 낡은 사진으로만 남을, 그러나 그 사진이 낡아가도록 바라보는 마음. 다친 데를 감싸 주며 사는 게 결국 사랑일 것이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말과 법도에 지치고 밀려 스스로 손톱을 뜯을 때, 손톱을 뜯은 사람을 타박하는 게 아니라 그 손톱을 뜯게 된 과정이 결국 타의에 의한 상처임을 함께 아파하며 감싸 주는 것.
상처는 언젠가 낫는다. 부상도 그렇다. 다만 남는 건 그저 사랑이다.
2024. 05. 02. 21:30 CGV전주고사 3관 (상영코드 157)
2024. 05. 04. 13:30 CGV전주고사 3관 (상영코드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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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나더 라운드 스포일러 없는 리뷰 - 권태로운 삶에 위스키 한 잔을 더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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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역사, 체육, 음악, 심리학을 가르치는 같은 고등학교 교사 니콜라이, 마르틴, 페테르, 톰뮈는 의욕 없는 학생들을 상대하며 열정마저 사라지고 매일이 우울하기만 하다. 니콜라이의 40번째 생일 축하 자리에서 “인간에게 결핍된 혈중 알코올 농도 0.05%를 유지하면 적당히 창의적이고 활발해진다”는 흥미로운 가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마르틴이 실험에 들어간다. 인기 없던 수업에 웃음이 넘치고 가족들과의 관계에도 활기가 생긴 마르틴의 후일담에 친구들 모두 동참하면서 두 가지 조건을 정한다.
[언제나 최소 0.05%의 혈중 알코올 농도 유지할 것! 밤 8시 이후엔 술에 손대지 않을 것!]
지루한 교사, 매력 없는 남편, 따분한 아빠, 최적의 직업적, 사회적 성과를 위해 점차 알코올 농도를 올리며 실험은 계속되는데… 과연 술은 인간을 더 나은 상태로 만들 수 있을지, 도전의 결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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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가 만든 23 아이덴티티
23 아이덴티티(Split)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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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ey (feat. Celeste Collins) by P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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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1회 베니스 영화제 황금 사자상 수상작 올 가을 놓칠 수 없는 마스터피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틸다 스윈튼 X 줄리안 무어 [룸 넥스트 도어] 국내 개봉 확정 기념 1차 예고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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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레드 원> 1차 예고편
🚨속보🚨 산타💪 납치! 사라진 산타를 찾아 크리스마스를 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