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LM2021-11-01 23:03:11
퍼스트카우 / First Cow
REVIEW
퍼스트카우 / First Cow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청 받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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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거리 /
19세기 서부 개척 시대,
사냥꾼들의 식량을 담당하는 쿠키는
표적이 되어 쫓기는 킹 루를 구해준다.
몇 년 후 정착한 마을에서 재회한 이들은
마을의 유일한 젖소의 우유를 훔쳐
빵을 만들어 돈을 벌기로 하는데…
“우리에게는 지금이 기회야”
- 네이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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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 /
이 영화는 처음 시작부터 관객을 사로잡는다.
긴 선박 한 대가 1.37 : 1 비율의 화면을 가로지르며 앞으로 나아간다.
인위적인 배경음과 효과도 없이, 화면에는 오로지 자연과 배 그리고 자연그대로의 소리들만이 나온다.
관객은 화면을 가로지르는 긴 선박이 오른쪽끝에 맞닿을때까지 숨죽이고 보게 된다.
이러한 오프닝은 이 영화의 배경인 '자연'을 극대화시키고, 오프닝과 엔딩의 시간을 가로지르는 메타포로서의 역할을 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배가 등장한 후, 소녀의 강아지가 두구의 유해를 발견하면서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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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핵심은 줄거리에 나와 있듯이, 서부개척시대, 우연한 만남으로 인연을 맺게 된 쿠키와 킹 루의 우정이다.
이 우정에서 주목해 볼 점은, 쿠키와 킹 루의 성격차이다.
쿠키는 친절하고, 여리고, 감성적인 타입의 사람이고,
킹 루는 쿠키보다 조금더 와일드하고, 쿠키보다 조금 더 이성적인 타입의 사람이다.
이 두사람의 묘한 성격차이가, 그들을 더욱 끈끈하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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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당연 그들의 우정도 있지만,
그 어떤 영화보다 자연을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 자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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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오프닝과 수미상관 되는 엔딩.
그리고 쿠키가 퍼스트카우를 소 주인인 영국인 집에서 '공식적'으로 만났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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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누가 나한테 이 영화 줄거리가 뭔데?
라고 물어보면 뭐라고 말할 만한 대단한 줄거리는 없지만,
그런 잔잔한 환경 속 그들의 삶이 너무 좋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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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척박한 환경 속 가장 따뜻한 것들 "
이게 내 한 줄 평이다.
10점 만점에 6.8 점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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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스트버스터즈 라이즈 / Ghostbusters: Afterlife, 2020
영화의 제목만으로 이 영화를 안다는 건 저처럼 나이를 많이 먹었거나 많은 영화들을 봐왔다는 것이겠죠.
하지만, 동명의 노래를 들어보신다면 '어! 이 노래가 이 영화에 나오는 거였어?'라고 깜짝 놀라실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 <고스트 버스터즈>는 84년에 첫 선을 보였고, 89년 2편을 마지막으로 나오지 않았으니까요.
물론, 흥행이 전혀 안되건 아니었습니다. - $296,578,797과 $215,394,738로 각각 제작비를 훨씬 웃도는 성적을 기록했으나 수뇌부의 기준에는 못 미쳤나 봅니다.
그리고 2016년 기존 남성 캐릭터들을 여성으로 바꾸며, '리메이크'를 강행했지만 평가와 흥행이 실패하며 그대로 '유령'이 돼버리고 맙니다.하지만, 이대로 멈추기에는 아쉬움이 컸을 겁니다.
이에 영화는 "제이슨 라이트만"감독을 선임하는데, 특이사항이라면 아버지가 "이반 라이트만"으로 대표작이 <고스트버스터즈>라는 것이죠.
이 소식에 '낙하산'이라는 말도 나오겠지만, <주노>를 시작으로 <인 디 에어>로 "아카데미"의 선택을 받아왔으며, 최근 "샤를리즈 테론"의 <툴리>까지 흥행은 아쉬워도 실력을 인정받은 그이기에 때아닌 기대를 끌어모았는데요.
그렇게, 아들이 만든 시리즈의 3편 <고스트버스터즈 라이즈>는 관객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으며 북미 박스오피스 1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재밌는 건 평론가의 반응과 관객들의 반응이 상반되는데, 이는 16년 버전과 정반대라는 것입니다.
'과연, 어떤 작품이었는지?' - 영화 <고스트버스터즈 라이즈>의 감상을 한 번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누군가로부터 도망치는 한 남성은 황급히 집으로 들어오지만, 끝내 목숨을 잃고 마는데요. 이에 연락을 받은 딸의 가족은 남겨진 그의 집에 들어와 살게 됩니다.
시골이고, 외진 곳에 있는 만큼 지루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던 가운데 '피비"는 집에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합니다.
그리고 하나의 물건을 발견하고, 지하실을 찾게 되며 자신의 할아버지가 "고스트버스터"였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내가 누군지 알겠니?
1. 30년도 더 된 영화들을 찾아봐야 하나요?
앞서 말했듯이 이번 <고스트버스터즈 라이즈>는 '시리즈'에 속하는 영화입니다.
이는 즉슨, 고정 관객층들이 있다는 것으로 이런 시국일수록 이런 영화들의 개봉은 불가피하지만 좋은 선택지로 보이나 문제는 전작 <고스트버스터즈>가 1984년에 나온 영화입니다.
그나마, 빠른 최근 작이 89년에 나온 작품이니 빨라도 32년 전에 나온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2016년에 나온 영화가 있지만 이는 전혀 상관없는 작품이 되었으니 이번 <라이즈>를 보려면 30년도 넘은 영화를 찾아봐야 하니 높디높은 진입장벽에 해당 관람을 포기하는 팬들도 존재할 겁니다.
무엇보다 30년이나 넘은 영화인만큼 요즘 같은 매끈한 시각효과를 기대하긴 어렵겠죠.그럼에도, 찾아봐야 할까?
저는 이에 "굳이, 안 보셔도 문제없습니다"라고 말할 겁니다.
이런 이유에는 이번 <고스트버스터즈 라이즈>가 '시리즈'에 속하지만 전작들과의 텀이 길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을 겁니다.
이를 영화에서도 하나의 과거담으로 적용시켜 역으로 "궁금증"을 자아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하나의 원동력으로 활용시킵니다.
여기에 어린 주인공들의 성장을 "귀신"과 접목시킨 <그것2017-19>의 사례대로 밟아가니 어색함은 느껴지지가 않아 하나의 작품으로 봐도 무방합니다.2. 그래도, 시리즈를 찾아본다면 달라질 거예요.
다만,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 일부 개연성이 아쉬운 장면들이 있습니다.
극 중 숨겨진 "고스트 트랩"을 발견하는 우연성 짙은 장면이나 보지도 못한 "먹깨비"의 존재와 등급을 유추하는 장면은 그러한데요.
특히, 이번 <고스트버스터즈 라이즈>의 러닝 타임은 124분으로 앞선 107분의 1편과 2편보다 더 많은 분량을 가진 것을 생각하면 아쉬운 "미스플레이"입니다.
이런 이유는 앞서 말한 길어진 시리즈의 텀을 정리하는 것과 새로이 소개할 "피비"와 같은 아이들의 설명으로 보이는데요.
이에 "시리즈를 챙겨봤어야 하나?"싶은 후회도 생기겠지만, 이는 예습을 못한 우리의 잘못은 아니잖아요.그래도, 찾아본다면 달라질 거예요.
이렇게, 본다면 <고스트버스터즈 라이즈>는 다소 평범한 범작에 그치겠지만 앞선 "시리즈"들을 챙겨본다면 흥미로운 영화가 될 겁니다.
앞선 84년 89년에 나온 영화의 분위기는 마냥 어둡지만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귀신"을 소재로 삼았음에도 영화는 내내 코믹스러우면서도 밝은 분위기를 유지했는데, 이를 보여주는 캐릭터가 "마시멜로맨"이죠.
여기에 "먹깨비"의 존재도 사람들을 해코지하는 것보다 먹는 것에 초점을 두었으니까요.
근데, 앞서 <그것>시리즈를 언급한 이번 <라이즈>에서는 그 분위기가 정반대로 흘러나갑니다.3. 기술의 발전에 비례하는 무서움?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펼쳐지는 "유령"과의 추격전과 대결부터 영화는 이전과 다른 다크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이런 이유에는 "점프 스케어"와 같은 공포 영화의 방식을 일부 차용한 것도 있지만, 보여주는 비주얼의 발전이 크더군요.
단연, 돋보이는 캐릭터가 "고저"와 '도사견'같은 하수인들입니다.
84년 영화에서는 기술의 한계로 옷과 섬광 효과, 그리고 점토와 같은 질감으로 표현되어 어설픈 감이 없지 않는데요.
이제는 강산도 3번이나 바뀔 만큼 세월이 흘렀으니 그 비주얼들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겁니다.발전하는 기술만큼 무서워진다.
앞서 말했듯이 '도사견'의 모습을 한 하수인들은 그 자체만으로 제법 무섭습니다.
특히, 마트에서 보여주는 추격전은 저라도 "꺄아!"를 극장에서 떠나가라 할 정도로 압도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고저"도 84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물론, 여성의 모습과 남성의 목소리는 외양만으로도 충분히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들 만큼 완벽했으니까요. (이에, '정치적 올바름'도 나오죠)
그런 점에서 이번 <라이즈>에서는 외양에 있어 합격점이나 그 안에 있는 이야기는 84년 영화에서 조금 더 뻗어나가지 못했습니다.
물론, 자신을 봉인한 "고스트 버스터즈"와의 관계가 존재하나 그를 부활시키려던 시장의 이야기는 정작 풀어내지 못했네요.4. 다음 고스트 버스터즈는 언제쯤?
그럼에도, <고스트버스터즈 라이즈>는 "세대교체"라는 시점에서 바라보면 만족스러운 영화입니다.
"스포츠"뿐만 아니라 어느 조직이든 "세대교체"는 정말 어려운 숙제인 것이 '나이'를 빌미로 삼자니 당장의 성적이 눈에 아른거리고, 영화나 드라마 같은 미디어는 "로다주가 아닌 아이언맨이 맞나?'라고 팬들의 반발심만 살 겁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다음 <고스트버스터즈 라이즈>을 기대케한다는 것은 이전 16년 작품과는 어떤 차이가 있던 것일까요?무릎을 꿇어 맞춰준다 한들...
이번 <라이즈>와 16년 작품, 모두 전작의 주인공들이 "카메오"로 나오는 것은 맞지만 보여주는 위상은 정반대입니다.
<라이즈>의 경우. 공식적인 후속작인 만큼 악당 "고저"와의 관계부터 보여주는 힘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집니다.
그러나, 16년의 경우. 극의 전개에 아무런 영향도 없는 캐릭터들로 축소되니 두 영화 새로운 주인공들을 위한 의도된 푸시라고 한들 느껴지는 감정은 다를 수밖에 없을 겁니다.
분명히, 아쉬운 점도 있지만 이번 <고스트버스터즈 라이즈>는 "일어나라"라는 부제만큼 쓰러진 팬심을 다시 기립시켜주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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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가 될 수 없는 어떤 과거
SYNOPSIS.
천재 피아니스트,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
보사노바 황금기를 책으로 담으려던 기자 ‘제프 해리스’.
우연히 감미로운 피아노 연주를 듣고, 그 주인공 ‘테노리우 주니오르’에 매료된다.
하지만 30년 넘게 음악 활동을 멈춘 그의 삶은 미스터리로 가득했다.
제프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여러 음악가들과 인터뷰를 거듭하며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는데...
밝혀진 충격적인 사실은 테노리우 주니오르가 아르헨티나 투어 중 실종되었다는 것!
POINT.
✔ <치코와 리타>에서 쿠바를 배경으로 재즈와 사랑을 얽어 보여주었던 바로 그 감독이, 이번에는 갑작스럽게 사라진 피아노 연주자의 실화를 담아 왔습니다
✔ 보사노바 재즈 아티스트를 좋아한다면 놓치기 아쉬운 이름들이 숱하게 지나가는 작품
✔ 화려한 색감과 보사노바 재즈 음악으로 우리의 감각을 두드리는 작품
✔ 동시에, 한 시대의 어둑한 이야기를 조망하는 작품
✔ (요즘 왜 자꾸 이런지 모르겠지만~ 알겠기도 하고~) 지금 이 시국에 보면 섬뜩해지면서 더 의미를 품고 다가오는 작품
✔ 1월 29일 개봉
한 장르가 가장 화려하게 피어났던 시절을 뒤돌아보는 것은 언제나 묘한 감정을 준다. 모든 부와 시선이 집중되어 미친 듯이 빛나는 시기를 보는 일은 눈이 즐거울 수밖에 없지만, 그 결말 혹은 명암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래의 입장에서 소위 황금기 혹은 전성기였던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단순 노스탤지어 이상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바빌론>, <맹크>, <헤일, 시저> 같은 작품들을 생각해 본다.
보사노바의 물결을 타고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는 제프 해리스라는 작가가 재즈 관련 칼럼으로 유명세를 얻고 새 책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들었던 앨범 속 피아노 연주자 테노리우 주니오르(Tenorio Junior)의 삶과 행적을 따라가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하계 올림픽/패럴림픽 마스코트 이름에까지 쓰였던 조빔이나 비니시우스의 명성에 비해 낯선 이름이지만, 그의 이름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브라질에서 태동한 보사노바 재즈의 물결, 그 원류를 마주하게 된다.
보사노바의 창시자처럼 여겨지는 작곡가 조빔과, <이파네마의 소녀> 작사가이기도 한 시인 비니시우스의 만남. <슬픔이여 안녕(Chega de Saudade)>라는 전설적인 곡의 탄생, 엘라 피츠제럴드가 자기 공연을 마치고 부리나케 달려가던 클럽의 존재까지... 브라질이 세계 음악의 중심지처럼 여겨졌던 그 시절. ('보사노바Bossa Nova'라는 단어 뜻 자체도 뉴웨이브, 누벨바그와 똑같다는 지점에서 더더욱) 영화로 치면 누벨바그 같은 시절이었다. (그 과정에서 엘라 피츠제럴드를 비롯한 아티스트들의 육성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과거의 영광과 기쁨과 위대함만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으며 보사노바가 널리널리 알려지던 그 전성기는 상처와 함께 이어진다. 1964년부터 1985년까지 20년 간 이어진 브라질의 군부 독재는 수많은 사람들의 살해와 실종으로 이어졌고,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독재 세력은 사람들이 함께 음악을 듣는 행위를 싫어한다. 예술가들도 탄압을 받았고, 많은 브라질 뮤지션들은 때마침 무르익은 보사노바 음악과 함께 북미권에 진출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살해당하고 실종당한 수많은 사람들 중에도 예술가가 있었다.
영화는 재즈 애니메이션에 담근 다큐멘터리로, 애니메이션 작화 이전에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말했을지 쉽게 연상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인터뷰가 들어 있다. 그들의 말은 다소 반복적으로 전개되는데, 그 부분이 내겐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무수한 피해 증언이 모자이크처럼 모여 거대한 국가 폭력을 고발하는 그림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동료이자 친구였던 테노리우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여전히 괴로워했고, 그를 그리워했으며, 그의 면면은 조금도 '정치적인 사람'이 아니었다고 강조한다.
정치적인 삶을 살지도 않았고, (거의 불교도 같았다는 주변인들의 증언과는 달리) 곧 태어날 아이까지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과 아내를 두고 애인을 동행해 투어를 떠날 만큼 그다지 도덕적인 현자도 아니었으며, 다만 그가 남긴 악보만으로도 너무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곡을 남긴 훌륭한 음악가였던 테노리우 주니오르는, 그의 삶이 아니라 그의 죽음으로 '정치적'이 되었다.
미래가 될 뻔한 과거를 타고
삶의 한 순간을 강렬하게 스친, 오래도록 좋은 기억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 살해되었다는 소식... 그것도 마땅히 국민을 지키고 삶의 기반이 되어야 할 국가가 주도하여 살해했다는 소식은 언제나 끔찍하다. 내 친구가 아무런 이유 없이 어딘가에서 학살 당하는 세상이라니. 독재 정권이란 뭘까. 왜 음악가와 학생과 시인과 주부와 어린아이를 죽일까.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기관총과 군인, 검열이 거리 곳곳에 깔려 있는 당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비니시우스와 피아졸라도 있었던 도시는 그들로 인해 "모퉁이를 돌아가더니 영영 안 돌아"오는 사람들의 도시가 되어버린 풍경. 그건 어쩌면 우리의 미래가 되었을 수도 있는 풍경이었다.
비록 국회와 시민들에 의해 막히기는 했으나, 우리도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하고,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으며, 누군가를 "계엄법에 의해 처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문건이 발표되는 것을 실시간으로 본 것이다.
"(...) 선량한 일반 시민들은 일상생활에 불편을 최소화"하겠다지만, 그런 도시에서 과연 무엇이 살아남을 수 있나. 음악도, 북적이는 사람들도, 예술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영화에서 테노리우의 죽음을 "브라질 음악의 죽음의 메타포"라고 언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권력으로 사람을 찍어 누르는 사회에서 예술은 온전히 피어오를 수 없다. 그래서 더없이 '예술'적인 이 영화의 화려한 색감과 리드미컬한 음악에도 불구하고, 거기 실려 전해진 지구 반대편 나라의 근대사가 단순한 과거로만 느껴지지 않아 극장에서 섬뜩함을 몇 번이나 느껴야 했다.
테노리우가 2024년 12월 3일 이야기를 들었다면 무엇이라고 말했을까? 알 수 없다. 영화에서도 몇 번이나 서술되듯, 그는 자신이 두고 간 아이들이 낳은 아이들을 비롯해 그 어떤 미래도 보지 못했으므로. 죽은 자를 떠올릴 때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이유다. 내 기억 속 그들은 너무 생생한데, 그는 모른다. 기후동행카드와 K-패스로 지하철을 타는 세상도, 한국에서 칸영화제와 오스카영화제를 석권한 영화가 나오고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왔다는 사실도, 그들이 없는 세상에서 이만큼 나이를 먹은 나의 모습도.
테노리우의 음악은 좋은 음악이 줄줄이 나오는 이 영화에서도 손 꼽히게 아름다워 전곡을 따로 듣고 싶어질 정도였으나, (들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테노리우의 죽음은 단순히 한 음악가의 죽음 혹은 한 장르의 죽음에 대한 메타포 이전에, 국가폭력의 희생자는 사실 "아직 우리 곁에 있었어야 할 사람"임을 깨닫게 한다. 이는 수많은 상상을 발휘하게 한다. 어쩌면 윤동주가 전태일에 대한 시를 썼을 수도 있는 것이다. 군부 독재에 희생된 젊은이들 중 누군가가 세월호를 생각하고 목소리를 내는 장면을 우리가 보았을 수도 있는 것이다.
무너진 자리에 우뚝 설 기록을 타고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서 내게 인상 깊었던 인물들은 기록을 남기는 사람들이다. 짧게는 국가가 행한 폭력의 기록을 보관하는 이들에서부터, (이와 비슷한 이들의 존재감은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도 두드러진다) 좀더 확장하자면 제프가 글을 쓰게 하는 뉴욕의 편집자 제시카와 브라질 현지 친구 주앙도 그렇다. 이들은 계속해서 제프에게서 글을 끌어내고 그를 조력하여, 제프가 글을 완성하게 한다.
독재 정권들이 마치 짠 것처럼 싫어하는 대상은 사람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 뿐만이 아니다. 폭력에 물들고 깨진 이들의 사고는 온건한 언어를 견디지 못하여, 언어를 무너뜨린다. 고문을 기다리는 통로는 "행복의 길"로 불리고, 영원한 실종은 "수송 작전"으로 불린다. 아이히만에 대해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지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미래가 되어서는 안될, 결코 미래가 될 수 없을 어떤 과거를 재현하지 않는 방법은 기록과 기억을 계속해서 이어가는 일에 많은 부분을 기댄다. 영화 속에서 테노리우의 죽음은, 죽음 이후 테노리우가 알지 못하는 세상은, 배턴을 이어받듯 여기까지 기록되어 왔다.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를 보는 당신을 통해, 또 한 번 기억되고 기록될 것이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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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강아름, 그는 왜 결혼했을까?
세상에나, 내가 30대라니. 무슨 일이야!?
“30대, 미혼, 여성”
이 사회가 나를 카테고리화하는 무시무시한 키워드들이다. 성별에 대한 만족도는 꽤나 높아 (아마도) 바꿀 일이 없어 고정값으로 상정하니, 시간이 지날수록 앞의 두 키워드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진다. 특히 10년간 익숙하게 나를 위로했던, 소위 ‘앞자리 수’가 변했을 때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게다가 코로나 팬데믹과 그 시기가 겹쳤다. 그 말인즉슨 어떤 ‘무뢰한들’의 무차별적이고 무심한 질문 폭격에 답 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다시 한번 해가 지났음에도 아직도 삼십이라는 단어가 입에 붙지 않는다는.. 말 못 할 어려움을(혹은 현실 부정 단계를) 겪고 있다.
<구글 이미지 검색 키워드 : turning 30 meme.. ㅎㅎ>
아니, 도대체 왜?
그동안 목소리를 높여 비판했던 '자존감 낮고 나이가 세상에 전부인' 그런 부류가 바로 나였단 말인가?
29.99였던 어제와 30.00이 된 그날의 나는 정말이지 혼란스러웠다.
“너도 이제 적지 않은 나이야. 피부도 잘 챙겨야 해. 나중에 나이 들어 후회한다.
선크림 하고 아이크림은 필수라고.”
막 잠에서 깨, 동생이 군대에서 신던 초록색 슬리퍼를 질질 끌며 담배를 사러 가면서도 고민은 깊어진다. (로션도 잘 안 바르는데.. 아이크림이 필수라니!! 너무해!!)
우리는 30대 인간에게 사회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수많은 미디어와 인간관계를 통해 배워왔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서도 30대의 지침서 따위는 받지 못했단 말이다!!
첫 30대를 살아보는 어른 아이의 패닉은 곧 나이듦에 대한 거부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일까? 불안과 혼란의 카오스가 오직 나만 겪는 현상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세상에는 너무 멋진 30대들이 넘쳐난다.
그에 비해 나는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들고, 아직도 모르는 것, 어설픈 것 투성이다.
심지어 누군가 집에 어른 계시냐고 물으면 어색하게, “어.. 엄마 안 계시는데요”라고 답하는 어리숙한 나라는 사람이.. 온전한 사회인으로 기능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인간이 30대가 되었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30대의 쓰나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큰 폭풍을 몰고 왔다.
우선 나는 한 번도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감격에 찬 얼굴로 모두에게 축복받으며 ‘버진로드’를 걷는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 비혼주의라고 굳이 나를 규정하지 않지만(가능성을 열어두겠다는 변명이다) 학생 신분이 지속되면서 나에게 이런 구체적인 상상은 사치에 가까웠다.
결혼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여성으로서 나의 신체와 그 선택은?
적지 않은 나이의 신체를 가진 미혼 여성이자, 도태된 사회적 동물로서 나는 이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인가? 꼬리를 무는 이후의 고민들은 한층 더 골치 아픈 문제였다.
미혼과 비혼은 적법한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한 달에 한 번 꼬박꼬박 자신의 존재감을 입증하는 나의 자궁, 난자들에 대한 고민도 끊이지 않는다.
역시 냉동난자가 유일한 답인가? 오늘이 앞으로의 삶에서 가장 젊은 날이 아니던가? 그런데 내 난자를 어디에 쓸 것인가? 아니 나는 난자 보관비용이나 부담할 수 있나?
그리고 이러한 고민에 난생처음 그리고 아주 ‘적나라한’ 선택지를 던지는 다큐를 보았다.
그리하여,
“<박강아름 결혼하다(Areum Married)>(2021)”
우리 사회에 시의성 있는 화두를 던져온 박강아름은 그의 전작 <박강아름 가면무도회>를 통해 잘 알려진 감독이다. 전통적인 관습과 가치관을 대물림하는 가부장에 대한 전복과 투쟁, 정형화되고 규정적인 여성상과 ‘미’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점철된 감독의 세계관에 난데없이 ‘결혼’이라니? 묘한 배신감이 느껴졌다. 결국 제도적 굴레 안으로 그 또한 편입하는 것인가! (물론, 필자는 결혼에 대해 아무런 악감정이 없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도 처절하게 거대 담론에서 소외된 두 개인의 결혼 생활과 더불어 완전히 새로운 하지만 한 없이 가까운 또 다른 개인의 탄생과 성장을 담아냈다.
그리고 이 노골적인 연대기, <박강아름 결혼하다>에서 그려지는 가장권의 전복,
여성 주도의 가모장(matriarchy)의 풍경을 보며 나름 진보적인 스탠스를 취한다고 자부하는 나의 편협함을 발견하곤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가계를 걱정하는 박강아름 감독의 우환과 '영수증' 그리고 그의 집사람이 누리는 3유로짜리(사실 박강아름 감독은 그 값의 절반도 안 되는 일반 커피를 마셨다. 이들의 참사랑은 영수증에서조차 드러나는가!!) 카페 프라페의 행복을 보며 내 안에는 분명 누군가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 것이다.
그리고 화들짝 놀랐다. 게다가 나라는 인간은 ‘결혼’의 이미지를 곧장 ‘웨딩 세리머니’와 연결시키지 않았던가? 순백의 드레스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아, 몇 초 가량 박강아름 감독의 연주와 행복한 미소 그리고 새하얀 드레스를 본 것 같기도 하다)
두 인간이 만나 한 집에서, 그것도 저 멀리 낯선 땅 프랑스에서 살아간다. 게다가 임신과 출산, 양육까지 줄줄이 이어진다. 박강아름 감독과 ‘집사람’. 이 두 사람은 나에게는 너무나 용감하고 무모했고 대단하고 절박했고 그리고... 투머치였다! 이 모든 상황이 한 씬에 들어와 있다니. 공포 그 자체였다.(물론 영화는 감독 특유의 유머감각을 놓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진짜 너무너무 앞 발을 꽉 깨물고 싶은 닥스훈트까지. 이것이야말로 30대 기혼자들의 진정한 카오스란 말인가!!?
아직까지는 여성의 신체로만 가능한 재생산의 기능을 수행하고 다시 바깥양반으로 돌아가는 박강아름 감독을 보며 나는 다시금 나의 신체와 생식 가능성을 가진 남은 난자들에 대해 생각했고 또 다른 가능성들에 대해 새로운 선지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감독이 몸이 좋지 않은 집사람을 끌고 덩케르크로 간 날은 바다를 보기에 그리 완벽한 날씨는 아니었다. 그러면 어떠한가? 낑낑거리며 유모차를 옮기는 바깥양반을 보며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집사람은 터벅터벅 돌아와 함께 둘 사이의 보리를 옮긴다. 여성과 남성 부인과 남편 바깥사람과 집사람. 이런 단어들로는 그들이 함께 걷는 그 길을 전혀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들 저런들 어떠하리? 그들은 서로의 균형을 맞추며 나란히 걷고 있지 않은가?
영화가 끝나고 생각했다.
"사실..
나도... 집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더 이상의 스포를 막기 위해 영화에 대해서는 이쯤 이야기해야겠다.
(하지만 가수 이랑의 잔잔한 목소리가 그리 녹록지 않은 자신의 그리고 우리의 현실을 써 내려가는 박강아름 감독의 에세이를 더욱 진하게 만든다는 것과, 곳곳에 삽입된 스톱모션 이미지와 그의 ‘하이퍼 리얼’한 다큐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살피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할 관람 포인트라는 정도는 공유해도 되겠지)
* 해당 리뷰는 씨네랩(CINE LAB) 크리에이터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 브런치 삐뚜로빼뚜로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ppeeppae/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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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애의 범위를 넓히다
인간의 선택: 박해와 공존
로봇이 인간 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보폭을 맞춰 걸어간다. 다른 로봇은 우는 아이를 품에 꼭 안고 달랜다. 승려복을 입은 로봇들은 반격 의사도 없이 미군의 총에 맞아 쓰러진다. <크리에이터>는 AI 로봇의 존재가 일상화되기를 넘어 정치적, 군사적 문제가 된 미래 사회를 그린다. LA에서 핵폭발 사건이 일어나고 미국은 이를 인간을 향한 AI 로봇의 공격으로 간주한다. 미국은 AI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거대한 미사일 함선을 지구 상공에 띄운 ‘노마드’라는 무기로 공격한다. 반면 뉴아시아는 AI와의 공존을 선택한다. 태국, 네팔과 같은 나라를 바탕으로 설정된 뉴아시아는 불교적 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는 듯 보인다. 불교적인 형태의 석상을 돌리자 AI로봇 연구소의 입구가 드러난다. AI로봇들은 뉴아시아의 전통과 문화를 받아들이고 적응해 살아가고 있다. 로봇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뉴아시아는 오히려 인간들이 로봇의 보호 아래 살아가고 있다.
미군 장교는 말한다. 사피엔스보다 독한 종이 나타나면 인간도 네안데르탈인처럼 멸종할 것이라고. 미국은 사피엔스의 멸종을 걱정한다. 다르게 보자면 이는 AI로봇을 사피엔스와 대응되는 하나의 종으로 인식한다는 이야기이다. 다만 인간에게는 선택지가 있다. 지구의 다른 모든 종이 악이 아니듯 AI로봇이 절대적 악은 아니다. 무엇을 선택하는지는 인간에게 달려있다. 미국에게 있어 인간의 범위는 미국인에 한정되어 있다. 미국의 전쟁은 인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닌 AI가 공존의 범주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싸움이다. 공존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선택의 의지다.
구원자의 등장
AI 로봇은 미국인들의 탄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원한다. 이들은 도구나 가축과 같은 노예 상태에서 벗어난 해방을 원한다. 혁명을 모의하고 구원의 메시지를 설파하는 로봇과 승려 로봇의 존재는 이들이 이미 만들어진 목적에 앞서 존재론적 의미를 탐구하는 주체로 우뚝 섰다는 의미다. AI 로봇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알파-오’는 만들어졌다. 자유와 사랑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비폭력으로 전쟁을 끝내고자 세상에 왔다. 이름 그대로 로봇들의 구원자다. 아이의 외형을 가진 로봇 ‘알파-오’는 모든 기계들을 원격으로 제어할 수 있다. 기계를 끄고 킬 수 있는 힘은 로봇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이고 기계문명에 바탕을 둔 미래사회에서 절대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니르마타의 소재에 접근했던 전직 군인 조슈아(존 데이비드 워싱턴)는 AI로봇의 창조자인 니르마타와 무기 알파-오를 제거하라는 명령에 따라 뉴아시아로 향한다. 하지만 조슈아는 AI 로봇과 미국의 전쟁보다 이전 작전에서 잃었던 아내 마야(젬마 찬)의 행방을 찾는 것이 우선이다. AI연구소에서 발견한 알파-오는 마야의 행방을 알고 있었고, 조슈아는 알피라 부르며 마야의 흔적을 따라간다. 알피는 니르마타인 마야에 의해 만들어진 ‘노마드’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다. 무기로 창조된 로봇이 구원자가 될 수 있을까? 감독은 인간과 AI의 공존을 이어주는 매개로 로봇의 창조자인 니르마타와 인간 배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중간자 알피를 내세운다. 니르마타가 인간으로서 로봇에 대한 사랑을 가진 존재라면 알피는 AI 로봇으로서 인간과 로봇에 대한 사랑이 입력된 존재다.
프로그래밍된 태도에 사랑이나 구원 같은 말을 붙여도 될까? 알피가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거나 손바닥을 갖다 대면 모든 로봇과 기계는 그의 통제 아래에 놓이는 기적이 행해진다. 인간의 증오와 그로 인한 공격은 기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 모든 공격을 멈추는 것이 니르마타의 뜻이라면 알피는 그 뜻을 행하는 자다. 알피의 의지는 인간이자 니르마타인 마야에 의해 계승되었다. 알피는 인간에 대한 증오가 아닌 사랑을 품고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알피는 로봇과 인간 모두에 대한 사랑을 지닌 구원자다. 알피의 사랑은 로봇과 인간을 아울러 가장 넓은 범위를 감싸 안을 수 있다.
왜 아이일까?
마야와 조슈아 사이에서 잉태된 태아의 배아 스캔을 통해 창조된 것이 알피다. 인간과 로봇의 중간자인 아이가 주인공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로봇을 완전하지 않은 아이의 형태로 만드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기술과 힘이 완전하지 않고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면 적절한 도구나 무기로 기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 아이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다. 알피의 힘은 어마어마한 성장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만 성장은 불확실하다. 로봇은 쓰이기 위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알피는 어디에 쓰일 것인지 분명치가 않다. 평화와 자유라는 목적지에 닿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조슈아의 도움으로 노마드를 격퇴했지만 전쟁의 흐름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는 일이다.
AI 로봇의 학습은 성장과 차이가 있다. 성장은 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시기를 지나야 한다. 알피의 성장은 원격 제어 영향력과 힘을 키우는 것뿐만이 아니다. 알피는 이미 미국의 자본과 기술의 집약체인 무기를 격파했다. 알피는 무기가 아닌 인격체로서 성장해야 한다. 인간과 로봇을 두루 경험하며 내면의 사랑을 키워야 한다. 절대적 힘을 가진 완전한 강자는 공동체를 규합하기 위해 힘을 내세우기 쉽다. 무력한 아이만이 오히려 공동체의 사랑과 보호의 필요성을 역설할 수 있다. 로봇의 보호 아래 유년시절을 보낸 마야는 알피 역시 이를 느끼기 바라지 않았을까. 알피가 어떻게 성장할지 확신할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정보가 프로그래밍되어 있기에 그 미래는 믿어볼 만하다. 바로 인간과 로봇에 대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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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숙한 사랑의 계절, 그 아름다움
SYNOPSIS.
20년간 최고의 요리를 함께 탄생시킨 외제니와 도댕. 그들의 요리 안에는 서로에 대한 존경과 배려, 그리고 사랑이 있다. 인생의 가을에 다다른 두 사람, 한여름과 자유를 사랑하는 외제니는 도댕의 청혼을 거절하고 도댕은 오직 그녀만을 위한 요리를 만들기 시작한다.
POINT.
✔️ <그린 파파야 향기>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신인이었던 트란 안 훙(사실 발음은 쩐안훙에 가까워요..) 감독이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게 한 그 작품.
✔️ 다시 말해... 타협 없이 담아낸 영상미가 보장되는 작품!
✔️ 줄리엣 비노쉬 & 브누아 마지멜 두 주연배우는 실제 부부였던 사이. 이별하고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서로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안고 이 영화에 출연했다고 해요. 뭐랄까 오래 끓인 국물 같은 느낌입니다. 프리마(?) 풀어서는 흉내낼 수 없는.
✔️ 영상미를 부정할 수 없지만 전 사실 이 영화에서 영상보다도 대사들이 유독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빛 고운 영상 안에서, 아름다운 관계를 고스란히 녹인 대사들이 풀어집니다. 정말 아름다운 영화.
'진짜' 요리로 보여준 것
이 영화는 밭에서 야채를 고르고 다듬는 외제니의 모습을 비추는 것으로 시작한다. 시작부터 선포하는 셈이다. 이 영화의 요리는 진짜일 것이라고. 얼기설기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 정말 시작부터 끝까지 깊이 보여줄 거라고.
촬영에 최적화하기 위해 가짜 음식을 적당히 섞어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는 진짜 요리들을 활용해 담아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요리가 '진짜'라고 느껴진 건 그 때문만이 아니다. 현장의 배우들이야 눈앞의 요리가 진짜인지 아닌지가 생생하고 중요하겠지만, 사실 촬영을 위해서라면 꼭 진짜 요리가 베스트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시간이 가면서 변형되고 빛이 바뀌는 진짜 요리에 비해 어쩌면 정교한 가짜 요리가 더 나은 선택지일 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필요한 그 이상으로 공을 들인다. 마치 요리의 재료를 준비하는 외제니의 손길처럼, 영화 바깥의 요소들이 섬세하게 준비되었다. 우선 미슐랭 3스타 셰프인 피에르 가니에르가 직접 '요리 감독'으로 참여해 음식을 직접 감수했다. (중간에 왕세자 옆의 셰프 역할로 출연도 한다.) 영화에 나오는 모든 음식에 그의 손이 닿았고, 마치 도댕과 외제니처럼, 실제로 오래 함께 일한 동료가 그 작업을 함께 했다. 줄리엣 비노쉬와 브누아 마자엘 사이에 감도는, 한때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은은한 존중 또한 마찬가지다. 이렇게 영화의 '밑작업'들이 영화 속 요리를 통해 표현되는 관계를 더욱 '진짜'로 만든다. 오래 끓인 국물처럼, 입에 톡 튀는 재료 없이도 깊은 맛으로 배어난다.
이 맛이 빛을 발하는 장면이 바로 영화 초반 외제니와 도댕의 요리 장면이다. 아주 긴 시퀀스로 비춰주는, 합이 탁탁 맞는 이 장면은, 아무 말도 없이 두 사람의 관계를 모두 설명한다. 조수 역할을 하는 비올레트와, 비올레트를 따라왔다가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하고 요리에 흥미를 느끼는 소녀 폴린까지, 네 사람이 부엌에서 움직이는 장면은 높낮이 없는 협력과 존중 그 자체다. 고기를 굽고, 가재를 데치고, 소스를 끓이고, 야채에서 물기를 짜내고, 무거운 냄비를 나르고... 자신 있게 경쾌하게 움직이는 그 모든 동작에는, 각자의 전문성과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다. 성별과 연령이 지금보다 극명히 갈리던, 20세기 초를 배경으로 한 영화임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정갈하게 섞여 협력하는 주방, 햇빛이 따스하게 들어오는 주방은 아름답기만 하다.
사랑의 계절이 보여준 것
영화 속 도댕과 외제니는 이미 다른 사람이 끼어들 수 없는 둘만의 교감 세계를 완벽하게 구축하고 있지만, 외제니는 도댕의 청혼을 거절한다. 외제니를 위한 요리를 준비하는 도댕과, 그런 도댕을 바라보는 외제니. 두 사람은 이미 서로 사랑하고 있지만, 그 사랑은 가볍게 들뜨거나 설익지 않는다. 요리도 사랑도, 원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두 사람은 눈빛으로 보여준다.
때로는 과일을 후숙시켜야 하고, 때로는 반죽을 숙성시켜야 하고... 요리를 하면서 두 사람은 적절한 타이밍을 기다리는 법과, 모든 것에 때가 있다는 사실을 잘 배웠다. 사람들을 초대한 테이블에서 도댕이 하는 대사는 그래서 유독 아름답다. 그들은 이미 계절마다 무엇이 찾아오고 또 떠나가는지, 자연이 그들에게 허락하는 것들의 범위를 명확히 알고 있다. 요리도 사랑도 원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들이 이미 그 계절을 돌고 돌아 원숙해진 사람들임을 떠올린다면, 모든 계절을 함께 축제처럼 즐기고 싶어하는 도댕과, 늘 한여름의 태양 볕을 사랑하고 싶어하는 외제니의 서로 다른 계절관 또한 원숙해진 어떤 지점에서 맞물릴 수밖에 없다. 천진한 첫사랑의 기쁨은 이내 계절을 돌고 돌아 단단해지므로.
외제니는 단어를 신중하게 고르는 사람이고,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며, 나서서 손님을 대접하고 요리를 해체하는 도댕과 달리 주방에서 식재료와 요리를 통해 손님들과 대화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동시에 작열하는 태양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외제니 안에 이미 온 계절이 있다. 온 계절을 사랑하는 도댕과 외제니의 사랑은, 그래서 더욱 풍부하고 깊고 아름답다.
외제니가 있는 부엌은 늘 빛으로 가득하다. 두 사람이 나누어 가졌던 밤과 그렇지 않았던 밤들을 모두 내면에 머금은 채로, 두 사람의 사랑은 아름답게 빛난다.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을 영화에서 본 것도 참 오랜만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홀린 듯이 한참을 바라보고 싶어진다.
결혼에 대한 생각의 차이. 도댕은 외제니에게 청혼을 하고 외제니는 그 청혼을 거절한다. 두 사람의 사랑은 명확함에도. 이런 이야기를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한쪽이 답답한 이야기로만 소비해온 것 같다. 그러나 이 생각의 차이, 그 안에서 느껴지는 각자의 성숙함, 생각의 차이를 빚어낸 것들까지도 존중하는 사랑으로 더욱 아름다워진 관계를 바라본다. 일치하는 생각만이 아름다운 건 아니다. 어쩌면 차이를 이해하고 끌어안는 것이 더 아름다운지도.
예술가의 언어로 보여준 것
영화가 전개되면서, 처음부터 아름다운 협력의 합을 보여준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풍성하게 풀어진다. 두 사람의 사랑뿐 아니라 이해 또한 관객에게 깊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예술가로서 서로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 도댕의 말마따나 "하나의 맛이 완성되려면 문화와 기억이" 필요하다. 요리에도 인생에도, 영화에도 예술에도, 배움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도댕과 외제니에게 요리는 사랑이었고 협력이었으며 예술이었고 이해였다. 그 모든 것을 말보다 더 뚜렷한 영상으로 보여준 이 영화는, 그야말로 예술가의 언어였다. <그린 파파야 향기>에서 오래 응시하고 공기까지 느끼게 만들던 그 실력 그대로, 트란 안 훙 감독의 언어는 빛을 발한다. 아름다운 영화였다. 오래오래 끝나지 않았으면 싶은, 시간이 아주 오래 흐른 뒤에도 다시 꺼내 보고 싶은 그런 아름다움이었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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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뻔하지만 계속 응원하게 되는 힘!
어디선가 본듯하다. 지방 학교에서 치어리딩이라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이들이 삼삼오오모여 오합지졸 팀을 만들고, 여러 부침을 겪은 후 멋진 한 팀이 되어가는 성장 드라마. <빅토리>는 여타 비슷한 청춘 성장 영화의 길을 무던히 걸어간다. 댄스는 ‘삘’일지 몰라도 치어리딩은 ‘삘’이 아니라 약속된 플레이를 해야 하는 것을 알려주듯, 영화는 신선한 느낌을 쫓아가지 않는 대신 진부하지만 익숙한 재미를 전한다. 뻔하다. 하지만 영화가 가진 응원의 힘을 간과하기는 힘들다. 놀라지 마라. 영화를 보다 보면 밀레니엄 걸즈를 포함해 극 중 등장하는 모든 이들을 응원하게 된다.
때는 바야흐로 1999년. 세기말을 앞두고 거제에서는 춤에 흠뻑 빠진 필선(이혜리)과 미나(박세완)가 있다. 공부는 뒷전이고, 오로지 춤만 추는 이들에게 필요한 건 댄스 연습실. 그러던 어느날, 서울에서 치어리더를 했던 세현(조아람)이 전학을 오고, 둘은 전학생을 내세워 치어리딩 동아리를 만들 계획을 세운다. 이유는 단 하나. 댄스 연습실을 얻기 위해서다. 계획은 대 성공. 하지만 자나깨나 축구 사랑인 교장의 바람에 맞춰 치어링딩 공연을 해야 하는 상황이 다가오고, 이들은 오디션을 통해 새로운 인원을 뽑는다. 그리고 ‘밀레니엄 걸즈’라는 팀명 아래 연습에 돌입한다.
치어리딩이라는 소재로 인해 <브링잇온>이 생각날 수도 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스윙걸즈>나 <치어 댄스> <훌라걸스>에 더 가깝다. 똑같다는 얘기는 아니다. 외형이 비슷한 것 뿐이다. <빅토리>는 치어리더 팀의 성장은 물론, 1990년대를 담은 향수와 스포츠의 재미, 여성들의 우정, 가족의 화해 등이 주로 다뤄진다. 앞서 소개한 일본 영화와 달리 좀 더 다양한 이야기가 들어가 있다. 심지어 조선소가 많은 거제도라는 지역적 배경을 통해 척박한 노동 현장의 단면도 비추며 응원이 스포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극 중 밀레니엄 걸즈는 첫 축구부 응원에 앞서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 운동장이 아닌, 시장, 경로당, 그리고 조선소 현장 등에서 치어리딩을 펼친다. 이들의 응원에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모습만 보더라도 영화가 가진 선의는 관객에게까지 확장된다. 물론, 조선소 상황 등 무거운 현실 이야기가 치어리더 팀의 성장 이야기에 착 달라붙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안무가 틀려도 계속 나아가는 극 중 인물처럼 영화 또한 이같은 단점이 있음에도 밀고 나아가 기여코 응원을 통한 울림을 전한다.
이처럼 끝내 관객이 이 영화를 응원하게 되는 건 소녀들의 에너지다. 후반부로 갈수록 멋진 치어리더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밀레니엄 걸즈의 퍼포먼스는 그 자체로 큰 재미를 전한다. 정말 많은 연습을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갖게 할 만큼 후반부 축구 3, 4위전 경기에 펼치는 이들의 움직임을 눈여겨 보기 바란다. 과하지 않은 소녀들의 유쾌함, 그리고 켜켜이 쌓아나간 각자의 전사들이 없었다면 감흥은 죽었을 터. 중간 중간 덜컹거리기는 하지만 크고 작은 소녀들의 이야기가 결국 한 몫 단단히 한다.
그 중심에는 역시나 혜리가 있다. 덕선이의 아우라가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이름도 필선이다.) 이 역은 혜리에게 착붙이다. 사투리는 물론, 춤, 연기 등 혜리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옷인데, 자신이 이를 아는 듯 그 옷을 입고 자연스럽고, 천연덕스럽게 연기한다. 여기에 엄마처럼 느껴지는 미나 역에 박세완, 서울 깍쟁이처럼 보이면서도 치어리딩에 진심인 세현 역에 조아람 등 소녀들의 캐스팅은 적중한 듯 보인다.
빼놓을 수 없는 거 하나. 1990년대 메가 히트곡 메들리다. 필선과 미나가 ‘펌프’ 퍼포먼스를 보여줄 때 나오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를 시작으로 ‘왜 불러’, ‘쇼’, ‘트위스트 킹’, ‘할 수 있어’ 등 선곡이 미쳤다. 그 시절을 관통했던이들이라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데, 그 곡에 맞춰 멋진 퍼포먼스를 보여주니 흥분의 도가니탕~~
<응답하라> 시리즈를 스크린에서 보는 것 같은 느낌도 있지만, <빅토리>는 작품 자체의 주요한 주제가 있다. 뭐든 간에 누군가를 응원한다는 건 참 아름다운 일이라는 걸 말이다. 복잡한 생각과 계산없이 누군가에게 응원을 받고, 또 상대방에게 응원했던 그 시절을 돌아가게 해준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큰 의미가 있다. 좀 틀려도 어떻고, 부족해도 어떤가! 그 마음만 전해지면 된거지. 고개 들고! 가슴 펴고~ 응원하자. 내를, 그리고 느그들을~~
사진제공: 마인드 마크
평점: 3.0 /5.0
한줄평: 아쉬움을 뒤로하고 응원하게 만드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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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풍운3> 예고편
두 영웅의 피할 수 없는 격돌!
가문의 해방을 위해 무술대회에 나선 임가의 ‘임동’과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임동’을 찾아온 광도무관의 ‘오운’
두 영웅의 엇갈린 운명이 격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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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즈니+ <사운드트랙#1> 티저 예고편
강아지상 대표주자 박형식? 고양이상 대표주자 한소희? 이들의 멍냥꽁냥한 캐미가 궁금하다면? 로맨스 뮤직? 드라마 [사운드트랙 #1] 3월, 디즈니+에서 확인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