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4-06-17 23:06:05
원숙한 사랑의 계절, 그 아름다움
영화 <프렌치 수프> 리뷰
SYNOPSIS.
20년간 최고의 요리를 함께 탄생시킨 외제니와 도댕. 그들의 요리 안에는 서로에 대한 존경과 배려, 그리고 사랑이 있다. 인생의 가을에 다다른 두 사람, 한여름과 자유를 사랑하는 외제니는 도댕의 청혼을 거절하고 도댕은 오직 그녀만을 위한 요리를 만들기 시작한다.
POINT.
✔️ <그린 파파야 향기>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신인이었던 트란 안 훙(사실 발음은 쩐안훙에 가까워요..) 감독이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게 한 그 작품.
✔️ 다시 말해... 타협 없이 담아낸 영상미가 보장되는 작품!
✔️ 줄리엣 비노쉬 & 브누아 마지멜 두 주연배우는 실제 부부였던 사이. 이별하고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서로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안고 이 영화에 출연했다고 해요. 뭐랄까 오래 끓인 국물 같은 느낌입니다. 프리마(?) 풀어서는 흉내낼 수 없는.
✔️ 영상미를 부정할 수 없지만 전 사실 이 영화에서 영상보다도 대사들이 유독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빛 고운 영상 안에서, 아름다운 관계를 고스란히 녹인 대사들이 풀어집니다. 정말 아름다운 영화.

'진짜' 요리로 보여준 것
이 영화는 밭에서 야채를 고르고 다듬는 외제니의 모습을 비추는 것으로 시작한다. 시작부터 선포하는 셈이다. 이 영화의 요리는 진짜일 것이라고. 얼기설기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 정말 시작부터 끝까지 깊이 보여줄 거라고.
촬영에 최적화하기 위해 가짜 음식을 적당히 섞어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는 진짜 요리들을 활용해 담아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요리가 '진짜'라고 느껴진 건 그 때문만이 아니다. 현장의 배우들이야 눈앞의 요리가 진짜인지 아닌지가 생생하고 중요하겠지만, 사실 촬영을 위해서라면 꼭 진짜 요리가 베스트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시간이 가면서 변형되고 빛이 바뀌는 진짜 요리에 비해 어쩌면 정교한 가짜 요리가 더 나은 선택지일 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필요한 그 이상으로 공을 들인다. 마치 요리의 재료를 준비하는 외제니의 손길처럼, 영화 바깥의 요소들이 섬세하게 준비되었다. 우선 미슐랭 3스타 셰프인 피에르 가니에르가 직접 '요리 감독'으로 참여해 음식을 직접 감수했다. (중간에 왕세자 옆의 셰프 역할로 출연도 한다.) 영화에 나오는 모든 음식에 그의 손이 닿았고, 마치 도댕과 외제니처럼, 실제로 오래 함께 일한 동료가 그 작업을 함께 했다. 줄리엣 비노쉬와 브누아 마자엘 사이에 감도는, 한때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은은한 존중 또한 마찬가지다. 이렇게 영화의 '밑작업'들이 영화 속 요리를 통해 표현되는 관계를 더욱 '진짜'로 만든다. 오래 끓인 국물처럼, 입에 톡 튀는 재료 없이도 깊은 맛으로 배어난다.
이 맛이 빛을 발하는 장면이 바로 영화 초반 외제니와 도댕의 요리 장면이다. 아주 긴 시퀀스로 비춰주는, 합이 탁탁 맞는 이 장면은, 아무 말도 없이 두 사람의 관계를 모두 설명한다. 조수 역할을 하는 비올레트와, 비올레트를 따라왔다가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하고 요리에 흥미를 느끼는 소녀 폴린까지, 네 사람이 부엌에서 움직이는 장면은 높낮이 없는 협력과 존중 그 자체다. 고기를 굽고, 가재를 데치고, 소스를 끓이고, 야채에서 물기를 짜내고, 무거운 냄비를 나르고... 자신 있게 경쾌하게 움직이는 그 모든 동작에는, 각자의 전문성과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다. 성별과 연령이 지금보다 극명히 갈리던, 20세기 초를 배경으로 한 영화임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정갈하게 섞여 협력하는 주방, 햇빛이 따스하게 들어오는 주방은 아름답기만 하다.

사랑의 계절이 보여준 것
영화 속 도댕과 외제니는 이미 다른 사람이 끼어들 수 없는 둘만의 교감 세계를 완벽하게 구축하고 있지만, 외제니는 도댕의 청혼을 거절한다. 외제니를 위한 요리를 준비하는 도댕과, 그런 도댕을 바라보는 외제니. 두 사람은 이미 서로 사랑하고 있지만, 그 사랑은 가볍게 들뜨거나 설익지 않는다. 요리도 사랑도, 원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두 사람은 눈빛으로 보여준다.
때로는 과일을 후숙시켜야 하고, 때로는 반죽을 숙성시켜야 하고... 요리를 하면서 두 사람은 적절한 타이밍을 기다리는 법과, 모든 것에 때가 있다는 사실을 잘 배웠다. 사람들을 초대한 테이블에서 도댕이 하는 대사는 그래서 유독 아름답다. 그들은 이미 계절마다 무엇이 찾아오고 또 떠나가는지, 자연이 그들에게 허락하는 것들의 범위를 명확히 알고 있다. 요리도 사랑도 원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들이 이미 그 계절을 돌고 돌아 원숙해진 사람들임을 떠올린다면, 모든 계절을 함께 축제처럼 즐기고 싶어하는 도댕과, 늘 한여름의 태양 볕을 사랑하고 싶어하는 외제니의 서로 다른 계절관 또한 원숙해진 어떤 지점에서 맞물릴 수밖에 없다. 천진한 첫사랑의 기쁨은 이내 계절을 돌고 돌아 단단해지므로.

외제니는 단어를 신중하게 고르는 사람이고,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며, 나서서 손님을 대접하고 요리를 해체하는 도댕과 달리 주방에서 식재료와 요리를 통해 손님들과 대화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동시에 작열하는 태양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외제니 안에 이미 온 계절이 있다. 온 계절을 사랑하는 도댕과 외제니의 사랑은, 그래서 더욱 풍부하고 깊고 아름답다.
외제니가 있는 부엌은 늘 빛으로 가득하다. 두 사람이 나누어 가졌던 밤과 그렇지 않았던 밤들을 모두 내면에 머금은 채로, 두 사람의 사랑은 아름답게 빛난다.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을 영화에서 본 것도 참 오랜만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홀린 듯이 한참을 바라보고 싶어진다.
결혼에 대한 생각의 차이. 도댕은 외제니에게 청혼을 하고 외제니는 그 청혼을 거절한다. 두 사람의 사랑은 명확함에도. 이런 이야기를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한쪽이 답답한 이야기로만 소비해온 것 같다. 그러나 이 생각의 차이, 그 안에서 느껴지는 각자의 성숙함, 생각의 차이를 빚어낸 것들까지도 존중하는 사랑으로 더욱 아름다워진 관계를 바라본다. 일치하는 생각만이 아름다운 건 아니다. 어쩌면 차이를 이해하고 끌어안는 것이 더 아름다운지도.

예술가의 언어로 보여준 것
영화가 전개되면서, 처음부터 아름다운 협력의 합을 보여준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풍성하게 풀어진다. 두 사람의 사랑뿐 아니라 이해 또한 관객에게 깊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예술가로서 서로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 도댕의 말마따나 "하나의 맛이 완성되려면 문화와 기억이" 필요하다. 요리에도 인생에도, 영화에도 예술에도, 배움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도댕과 외제니에게 요리는 사랑이었고 협력이었으며 예술이었고 이해였다. 그 모든 것을 말보다 더 뚜렷한 영상으로 보여준 이 영화는, 그야말로 예술가의 언어였다. <그린 파파야 향기>에서 오래 응시하고 공기까지 느끼게 만들던 그 실력 그대로, 트란 안 훙 감독의 언어는 빛을 발한다. 아름다운 영화였다. 오래오래 끝나지 않았으면 싶은, 시간이 아주 오래 흐른 뒤에도 다시 꺼내 보고 싶은 그런 아름다움이었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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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정을 넘어선 완벽의 강박.
익숙한 공간에서 낯설고 축축한 공간으로 이어지는 한 사람의 시선은 한 곳에 머문다. 최고가 되기 위한 되뇜은 왠지 모를 집착처럼 느껴지며 여유로움보다는 강박에 가깝다. 자신의 목표가 아닌 타인을 바라보며 열정을 조각조각 채워간다. 최고가 되기 위한 몸부림에도 타고난 것 앞에서 일정한 한계를 맞닥뜨리며 자기 파괴가 극으로 달하는 순간까지 도달한다. 알렉스는 무엇을 위해 열정을 쏟아 내는 걸까.
알렉스의 강박은 ‘최고’라는 이름으로부터 시작하여 ‘신중함’, ‘노력’에 의해 지속되어 왔다. 자신과는 거리가 먼 일에 도전하여 목표한 바는 어떻게든 이루어 내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내고야 마는 알렉스는 고통으로 빠뜨려서라도 목표에 도달하려 한다. 그러한 방식은 가혹하기까지 한데, 주변인의 만류에도 꼿꼿하게 자신이 갈 길만 바라본다. 한계에 다 달았음에도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불안은 내부로 스며들어 알렉스를 이루고 있는 모든 부분들을 갉아먹는다. 정해진 목표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던 알렉스의 욕망은 이루어 냈다는 생각이 들고나서야 멈춘다.
팀의 화합이 무엇보다 중요한 조정과 타인과의 교감이 중요한 사랑을 하는 알렉스에게서 이질감을 느꼈다. 타인을 배제하고 타인이 배제하며 자신의 욕망, 감정에 충실한 알렉스에겐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었다. 주변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지만 완전한 변화를 아우르지는 못하는 알렉스의 내면은 상처가 휩쓸고 간 멍투성이었다. 뒤늦게 조정과 사랑에 대한 사랑을 깨달았지만 자신을 파괴함으로써 이루어낸 결과는 끊임없이 이어질 어떤 것을 조명한다. 알렉스만이 홀로 남아 배 위를 유영하고 있었다.
영화 <위플래쉬>와 영화 <블랙스완>이 생각나기도 했지만 타인의 관계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것과는 조금 다른 영화 <더 노비스>는 자기 파괴적인 성격이 강했다. 영화의 공간은 로런 해더웨이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에서 시작되어 더 숨 막히는 듯하다. 다른 스포츠 영화와는 결이 다르지만 미묘함이 열정을 이루는 이야기가 잔잔함에도 강렬하게 느껴진다. 자신의 목표에 다다를수록 점점 피폐해져 가는 알렉스의 감정을 느껴보고 싶다면 '더 노비스'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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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샷건 웨딩(2022) 리뷰>
영화 <샷건 웨딩(2022)>는 <피치 퍼펙트(2012)>로 유명한 제이슨 무어 감독의 신작으로, 결혼 직전의 달시(제니퍼 로페즈) & 톰(조쉬 더하멜) 커플에게 갑작스레 닥친 재난을 코믹한 액션과 결부시킨 영화이다. 사실 제목에서부터 두 사람의 결혼식이 심상치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샷건 웨딩이라니! 미국 문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단어가 거친 서부 개척시대에서 유래한 말이라는 것을 기억할 터다. 현대에 와선 속도위반 등으로 인해 급히 치러야만 하는 결혼식 정도로 희석되었다고는 하지만, 최초의 의미든 현대의 의미든 단어가 갖는 기본적인 방향성은 동일하다. 당사자의 의지가 우선시된 다기보단 외부의 압력 혹은 필요에 따라 진행되는 결혼식이라는 것. 이런 점에서 제목만으로도 우리는 영화관에 들어가기 전부터 우리는 많은 상상과 기대를 하게 된다. 두 사람을 둘러싼 외부 갈등은 무엇일까, 왜 생겼을까, 그리고 둘은 그 갈등을 어떻게 넘어서서 행복한 결합을 이루어 낼 것인가?
※스포일러 주의
<샷건 웨딩>의 초반부는 비교적 타 로맨틱 코미디 영화와 다르지 않다. 결혼식을 앞둔 커플이 있고, 둘을 둘러싼 말 많고 문제 많은 가족이 있다. 사실, 커플 사이의 갈등조차 터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하다. 서로를 끔찍하게 여기는 듯 하지만 식전 파티에서 손을 놓지 말아 달라는 달시의 부탁조차 곧바로 지켜지지 않을 만큼. 어디 그뿐인가? 이혼 후 애인과의 애정을 과시하며 등장하는 부유한 달시의 아버지 로버트(치치 마린)는 자신이 제시한 럭셔리한 호텔 결혼식을 물린 딸과 예비 사위를 탐탁지 않아 하고, 달시의 어머니 레나타(소냐 브라가)는 달시에게 로버트의 애인 해리엇(다르시 카덴)이 자신에게 웃어 보이는 것도, 다소 점잖지 않아 보이는 톰의 어머니 캐롤(제니퍼 쿨리지)이 다가오는 것조차 끔찍하다며 토로한다. 심지어 캐롤은 집안의 전통이라며 다 녹슨 칼을 결혼 선물로 주고, 달시가 조금도 원치 않았던 구식 웨딩드레스를 입게 권하는 데다가, 톰의 아버지 래리(스티브 콜터)는 끊임없이 비디오만 찍다 축사를 하는 동안엔 고개를 꾸벅이며 졸기까지 한다. 이렇듯 <샷건 웨딩>의 등장인물은 결혼식을 앞둔 커플과 그 두 사람을 둘러싼 가족 관계 등으로 깔끔하게 정리되는 도식이고, 이 갈등을 푸는 것에 100분 이상을 할애해도 유쾌한 로맨틱 코미디가 될 것도 같다. 하지만 액션 요소를 한 스푼 추가함으로써 이 영화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필리핀의 어느 섬에서 열리기로 한 결혼식은 사실 예비 신부 달시가 원했던 스몰 웨딩과는 전혀 다른 류의 것이고, 부족한 재력과 장래의 불투명성으로 달시의 부모님에게 제대로 어필하지 못했다는 초조함을 지닌 예비 신랑 톰 사이엔 바쁘다는 이유로 회피하기만 한 불안이 자리한다. 이 갈등은 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점차 고조된다. 게다가 달시의 아버지 로버트가 초대한, 달시의 전 약혼자이자 사업 후계자와 다름없이 예뻐한다는 숀이 도착하는 바람에 달시와 톰 사이의 분위기는 한없이 냉랭해졌다. 그렇다 한들 어쩌겠는가? 본국과 한참 떨어진 태평양의 섬까지 와준 하객들을 생각한다면 갑작스레 모든 걸 멈출 순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당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참으려 했다는 달시와 ‘당신을 위해서’ 완벽한 결혼식을 준비하고자 했던 톰 사이의 말다툼은 점차 수위가 높아지고 달시는 끝내 반지를 손가락에서 뺀다.
그러나 이때 피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거대한 위기가 당도한다. 바로 해적이 섬을 포위한 것. 결혼식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된다. 하객은 모두 인질이 되었고, 로버트는 거의 모든 재산을 잃기 직전이다. 말다툼을 하고자 인적이 드문 곳에 있었던 달시와 톰이 이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희망이 된다. 결혼식을 물리니 마니 했던 두 사람이 결국 다시 뭉친다. 피는 물론 벌어진 상처만 봐도 졸도할 듯한 달시가 수류탄을 들게 되고, 높은 탑에 오르는 것조차 무서워하던 톰이 낙하산에서 하강하게 되는 데엔 상대방을 지키고 둘을 아끼는 하객을 구하겠다는 선의와 사랑이 존재한다. 결혼 직전 터졌던 갈등을 전우애로 다시금 봉합한 두 사람이 행복한 결혼을 하는 건 당연지사다.
<샷건 웨딩>을 코믹 액션버스터로 소개했지만 영화에 몇 번이고 등장하는 결혼식의 의미 변화를 떠올린다면 이 영화는 액션 장르로 포장했을 뿐,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문법을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처음 등장한 결혼식은 ‘오로지 행복만으로 칠해내고 싶었던 환상적인 결혼식’이나, ‘단 하나뿐인 반려자와 나누는 흠 없는 일생’이란 미숙한 판타지의 상징이며 철저히 부서진다. 이후 영화는 이혼하지 않고 큰 갈등 없이 산 것처럼 보였던 톰의 가정조차 실은 울퉁불퉁한 현실을 얼렁뚱땅 봉합하며 살고 있었다는 것을 밝히고, 인생이란 대단히 매끈한 아스팔트 도로를 빠르고 행복하게만 질주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털어놓는다. 달시와 톰은 이토록 엉망진창이 된 결혼식조차 소중한 인생의 일부라는 것을 배우며, 정신없는 인생을 몇 번의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서로를 구하고자 몸을 내던질 줄 아는 상대와 함께 꾸려나갈 수 있다면 더없이 기쁘리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렇게 영화 말미의 결혼식에서 두 사람은 결혼이라는 서약의 의미를 되새기고, 진정한 결합을 완성한다.
결혼이 연애 과정에 쌓아 올린 낭만의 최종점이 될 수 없다는 것, 사랑의 최종점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힌다는 점에서 <샷건 웨딩>을 고전적 로맨틱 코미디와 완전히 동일선상에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 영화가 최종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건 사랑의 완성도 아니다. 감독이 유쾌하게 풀어나가는 것은 삶의 복잡다단함이다. 단 하나의 일반적인 결말을 원할 뿐이더라도 뜻밖의 상황이 펼쳐져 엄청난 사투를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경쾌한 경고라 여겨도 좋다. 혹은 뒤죽박죽, 알쏭달쏭한 인생 속에서 함께 웃을 수 있는 동반자 한 명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공한 결혼(혹은 삶)일지 모르겠다는 으쓱임 하나 정도이지 않을까.
<샷건 웨딩>은 정말이지 여러모로 뻔하고 가벼운 영화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속속 등장하는 소품의 활용과 다채로운 사투만큼은 일품이다. 전투뿐만 아니라 달시와 톰의 티키타카나, 범상치 않았던 하객의 대응 역시 웃음을 적지 않게 자아낸다. 참을 수 없는 진지함으로 가득한 일상에 지쳤더라면, 당신의 100분을 마법처럼 채워줄 <샷건 웨딩>을 감상해 보는 건 어떨지.
★★★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한 후, 주관적 견해에 따라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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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지 말아야 한다. 언젠가 누군가를 가족으로 꾸릴 때, 그런 나도 결국 누군가의 가족이었음을.
지나고 보면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말. 너무도 많이 들어본 거 같아 좀처럼 듣기도 싫고, 잔소리로만 느껴지던 그 말들이 어쩌면 그 횟수만큼 중요했기에 반복되었음을 왜 난 미처 알지 못했을까. 결국 닥쳐야만 깨닫는 못난 자신이 밉고 싫어진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집 가(家)자에 족 족(族)자로 이루어진 말로, 한 집에 모여 사는 무리를 의미한다. 하나의 집에서 무리를 이루며 짓는 사람들. 세상 누구보다도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되어주려는 사람들이지만, 그래서인지 더 소홀해지고 무뚝뚝해지는게 가족이라는 사실을 스크린 속 비춰지는 허상의 가족을 보며 깨닫는다. 결국 나도 누군가의 아들이었음을 그리고 나에게 말 한 마디라도 더 걸고 싶었으나 차마 당신도 받아본 적이 없어 결국 손 내밀지 못했다는 사실이 생각에 잠기게 한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누구나 경험했을 평범한 가족의 독특하지 않은 순간을 비범하게 다루어낸 걸작이다. 나약하고도 위태로워보이는 가족의 모습에서 스스로를 찾을 수 있고, 겉으로는 연약해보이기만 한 영화의 모든 씬들이 결국 스크린 속에서 부끄러워하고 반성하는 나를 발견한 관객에게 지울 수 없는 울림을 선사한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를 제작하는 데에 있어 로케이션 헌팅에 '집' 만큼이나 고심을 기울인 곳은 계단이 아니었을까. 영화가 시작되고 음식을 준비하는 엄마 '토시코'와 첫째 딸 '지나미'를 뒤로한 채 산책을 떠난 할아버지 '쿄헤이'는 계단의 아래로 향해갔다. 계단 그리고 육교의 밑으로만 내려가던 그는 저멀리 바다를 보게 되고 금세 자리를 뜨고야 만다.
영화는 아래로만 향하는 쿄헤이를 촬영하는 데에 있어 익스트림 롱쇼트로 담았는데, 그 결과 쿄헤이의 움직임 속에서 그의 연약함을 눈치챌 수 있게 한다. 더군다나 그가 일본의 한 시골 동네 의료원을 운영하다 이제는 그만둔 전직 의사라는 점은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인상깊은 점은 본 장면과 닮아있는 나머지 씬들도 모두 같은 방식으로 촬영되었다는 점이다. 같은 계단을 둘째 아들인 '료타'와 손자인 '아츠시'와 내려가던 장면 속 느릿하게 걷던 지난 씬들과는 달리 가족의 보폭에 맞추려 힘겹게 디디는 노인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그러나 영화를 모두 보고난 후라면 그것이 그만의 사랑법이었음을 눈치챌 수 있게 된다. 더불어 영화의 종반부, 1박2일 동안 함께했던 료타 내외를 바래다주고, 쓸쓸히 집으로 항하던 쿄헤이와 할머니 '토시코'의 뒷모습에서는 아쉬움과 애틋함이 느껴진다. 어쩌면 그 축 쳐진 어깨와 등을 볼 기회가 이번이 마지막일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들던 찰나, 뒤따라 나오는 료타의 보이스 오버는 그렇게 두 노인이 3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화면은 잠시 어두워진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특유의 카메라 각도는 교과서대로 각 인물들을 객관적이고도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한다. 하지만 그 효과는 책 속 이야기와는 달리 그 인물에게서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어쩌면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괴물> 등의 그의 필모그래피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작품들의 선조격인 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그의 이러한 다큐멘터리적이면서 실험적인 카메라 앵글의 첫단추였을지 모른다.
영화는 어린 소년을 구하려다 결국 자신이 바다에 빠져 익사하게 된 장남의 기일에 맞춰 모두 모인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가족의 모습이 비단 명절 겸 오랜만에 모인 여느 평범한 가족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료타의 가정은 전 남편과 사별한 후 아이와 함께 가정을 꾸린 '유시코'와 료타 그리고 아들 아츠시로 이루어졌지만 영화는 본 요소를 영화의 반전이나 플롯의 핵심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그저 한 대가족의 특이사항 정도로 치부하는 듯하다.
특별하고 혹은 특별하게 연출해 관객의 이목을 사로잡는 방법이 있는 반면, 너무도 평범히지만 그 속에서의 변주와 공감을 통해 관객을 이끄는 방법이 있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후자의 속하며, 그 변주는 배우의 열연과 이를 지탱해주는 각본에 있다.
영화의 모든 순간 배우들의 연기는 매우 비범했지만 특히 뜨개질을 하던 토시코와 료타가 나눈 장면 속 토시코의 연기는 가히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장남인 '준페이'는 물 속에 빠진 어린 '유시오'를 구하려다 그만 소년을 살리고 자신이 사망케 된다. 사고 이후 매년 준페이의 기일이 되면 토시코는 유시오를 불렀고, 그런 유시오가 고통스러워 보였던 료타는 그만 부르자고 말한다. 하지만 토시코는 유시오가 고통스럽길 원하기 때문에 부른 것이라 웃으며 대답하고 다시 정색하며 숨을 한번 삼킨다.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결국 떠나보낸 아들에 대해 차마 원망할 없어 그 대신 살아남은 이에게 고통을 함께 느껴보라며 부르던 그녀의 표정 속에서 안타깝게도 통쾌함을 찾을 수 없었다. 본인의 선택이 분명 잘못되었음을 알면서 차마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아 터져나오는 양심의 숨을 토시코는 힘겹게 삼켜낸다. 단 한 방울의 눈물도, 고함도, 괴성도 없이 고통스러움과 애절함, 비통함을 표현해낸 이 장면은 경이롭다.
토시코의 연기만큼이나 할아버지인 쿄헤이의 연기 또한 관객에게 여러 질문을 던진다. 가족들이 모두 거실에 있고, 그런 가족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싶으나 해본 적이 없어 방에 혼자 있던 쿄헤이는 딸이 오는 듯하자 급하게 두리번댔다. 이제 남은 아들이라고는 하나 뿐인 료타와 이런 저런 대화를 하고 싶으나 결국 그에게 가장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을 고른 쿄헤이에게서 가부장적이지만 그런 그도 결국 사랑하는 법을 몰라 그저 서툴렀던 우리의 아버지들을 보는 듯했다. 그런 그가 자신의 대를 이어 의사가 되었던 장남을 잃은 바다를 가지 못해 지켜만 보다 돌아선 것은 아버지의 슬픔이었다. 영화의 후반부, 손자가 바다로 가자고 하자 아들과 함께 바다를 보러갔던 것 또한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이후 료타 내외가 떠나자 다음 명절에나 볼 수 있겠지 하며 아들 부담스러우니 다음부터 손을 잡지 말라는 둥 핀잔을 주던 말은 아버지의 그리움이었다. 쿄헤이는 말수가 적은 인물로 작중 대사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쿄헤이의 연기는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눈빛, 한 번의 행동이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추측하건대 영화관 속 작품을 관람하던 모든 관객들은아마도 료타의 모습을 보면서 제3자의 입장에서 '부모에게 저러면 안 되지'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스스로 되돌아보며 부끄러움 내지는 반성을 느꼈을 것이다. 부모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꿈을 향해 집을 나갔지만 결국 전전긍긍하며 살아가게 되고 차마 그런 모습을 부모 앞에 보일 수 없어 거짓말하던 료타의 모습 속 우리가 보인다. 인상적에이게도 료타는 그토록 싫어하고 어렵던 부모의 모습, 특히 아버지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별 말 않다 터뜨려버린 고함과 손짓의 모습은 당신의 모습이요, 공유하는 추억이 많지 않아 운동 이야기만 줄곧 늘어놓는 모습도 아버지의 모습이다. 더불어 호랑나비를 보며 아츠시에게 호랑나비에 관련된 이야기를 전하는 료타의 모습은 이전 장면 속 어머니와의 대화 장면을 오버랩된다.
작품 속 료타의 위치는 굉장히 애매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의미있다. 죽음으로 인해 가족이 모인 자리에 죽음으로 인해 결성된 가정이 찾아온다. 역설적이다. 친아들이 아닌 아들에게는 쩔쩔매며 이름조차 '료짱'이라 불리는 것을 넘기지만 친아버지에게는 한 없이 방어적이다. 역설적이다. 의사가 되고 싶어했던 어린 시절과 달리 결국 미술을 하겠다며 집을 나간 료타는 미술품을 복원하는 나름의 '의사'가 되어있다. 역설적이다. 영화는 쿄헤이와 토시코의 모습에서 부모의 감정, 가족으로서의 연민을 느끼게 한다면 료타를 통해서 가족의 역설과 아이러니를 풀어내는 듯하다.
아츠시는 영화의 초반부 죽은 토끼를 보며 토끼를 쓰자는 친구들의 제안에 웃었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 사망한 이에게 편지를 써봤자 어차피 모를 것이라며 대답한다. 그런 아츠시가 시골 생활을 마치며 자기는 생부의 직업이었던 피아노 조율사가 될 것이며, 만약 안 된다면 할아버지의 직업이자 새 아버지의 어린 시절 꿈인 의사가 되겠다고 밖에 나가 누군가에게 전하듯 말한다. 아마도 그 누군가는 생부였던 것으로 추측되며, 이는 결국 아츠시가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법, 즉 영화가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전한 것이라 생각된다. 영화는 그 자체로 끝이 아닌 남은 이들의 가슴 속으로 삶의 흔적이 이전되고 이로 인해 새로운 삶이 생겨나는 것이라 말하는 듯하다. 장손의 죽음으로 인해 새로운 삶이 이어질 수 있었고, 그로 인해 가족이 때되면 모일 수 있었으며, 누군가의 죽음 덕분에 새로운 가정이 생겨날 수 있었다.
영화는 이처럼 가족의 의미, 부모와 자식 간의 미묘한 감정과 틈 그리고 삶과 즉음에 관한 자신만의 이야기를 대단히 유기적으로 담아내 관객을 설득시킨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는 요란스럽다기 보다 조용하기에 설득하지 않고, 관객을 이해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은 전혀 저항조차 못한 채 영화의 감동과 여운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게 된다.
필자에게 누군가가 전한 "영화를 통해 역사를 알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말이 아직 뇌리에 남아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닐 수 있지만 영화를 사랑하는 필자에게는 아직도 큰 충격이다. 영화는 관점의 예술이기에, 아무리 진실에 기반해 객관적으로 역사를 다루어도 주관의 개입이 필연적이다. 그러나 역사를 배운다기 보다는 그 역사를 바라보는 당시 사람들의 관점을 배운다고 생각한다면 영화는 훌륭한 교본이 되지 않을까. 실제로 우리가 직접 경험하기 전까지의 그것을 진실이라 부를 수 있을까. 또한 나의 경험이란 관점의 결과인데 그렇다면 과연 경험을 신뢰할 수 있을까. 역사를 진실로서 다루고자 한다면 그 진실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과연 찾을 수 없다면 그 사실을 바라보는 수 많은 시각 속 자신의 관점을 찾는 과정이 덜 어리석은 짓이 아닐까?
영화를 통해 인생과 가족을 배운다. 누군가는 영화로 인생과 가족을 배우는 건 새삼 어리석은 짓이라 비난할 수 있다. 하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라면, 그 중에서 특히 <걸어도 걸어도>라면 그건 어리석은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똑똑한 방법일 것이라 확신한다. 인생과 가족에 대해 수 없이 많은 작품들 속에서 갈고 닦은 감독의 마스터피스를 관람한다. 그의 작품 속 세상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 가족의 연대와 '가족이니까' 넘어가고 무심해지며 미처 깨닫지 못했던 점들을 일깨운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이에 대한 교본이다.
작품은 죽음을 다루면서 신기하게 단 한번도 눈물을 드러내지 않는다. 어쩌면 그들의 눈물은 무더운 날씨 묘비에 뿌려지는 물로 대체되었을지 모른다. 영화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를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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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누구도 보여주지 않은 '조커'와 '아서'의 내면세계
<조커 : 폴리 아 되>와 <조커>에 대한 강력한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설왕설래가 굉장하다. CGV의 에그지수는 진작 박살 난 지 오래고, 로튼토마토 지수도 예상외로 낮게 나오고 있다. 일부 평론가들은 영화 안에서 아서가 취한 태도가 빌런 '조커'와 상충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는 '조커;를 인질 잡아 토드 필립스가 객기 부린 것에 불과하다는 유튜브 속 평론가도 있다. 그들의 주장은 간단하다. '조커' 보러 왔으면 악랄하고 강력한 빌런을 보고 싶어 하지 이런 내용을 원하는 게 아니다는 점이다. 관객들이 기대한 건 자신의 악함을 깨달은 조커가 사회를 뒤집어 1편과 유사하게 반향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조커 : 폴리 아 되>는 충격적인 플롯을 띄고 있다. 그 충격의 방향이 <조커> 1편의 형태가 아니다. 그 <조커> 1편의 위에서 아서의 뇌를 들여다보는 듯한 플롯으로 많은 팬들에게 충격을 선사하는 줄거리를 띄는 것이 이 <조커 : 폴리 아 되>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글쓴이는 위에서 언급한 이 영화 <조커 : 폴리 아 되>에 대해 '1편의 후속작이 아니다'라는 비판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완벽하게 조커가 된 아서 플랙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첫 번째 근거. 두 영화의 플롯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우선 <조커>의 플롯부터. 아서 플랙은 어머니와 함께 사는 남자다. 인생에 재미라곤 없다. 우울한 아서 플랙. 번듯한 직업이나 모아놓은 돈 같은 거 없다. 대신 있는 건 정신질환이다. 느닷없이 하하하하 웃는 아서 플랙. 뜬금없이, 그것도 기괴하게 웃는 터라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 취급한다. 이런 아서에게도 꿈이 있다. 바로 코미디언이 되는 것이다. TV에 나오는 인기 스타 머레이 프랭클린(로버트 드 니로)을 동경하는 아서. 사실 아서는 머레이가 자기의 두 번째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첫 번째 아버지는 누구냐고? 바로 고담 시의 실력자 토머스 웨인이다. 어머니가 말해준 바에 의하면 아서는 웨인 가의 숨겨진 아들이었다. 꿈속에 사는 아서. 아니 꿈속에서 나오기 싫은 아서. 비참한 현실에 혹시?라는 희망이 점점 아서의 망상장애로 발전한다. 내가 대단한 코미디언이라는 망상. 도시의 실력자가 내 아버지라는 망상. 그리고 사랑도 마음대로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망상이 아서를 지배한다. 영화 <조커>는 아서의 망상에 대해 다룬 영화다. 망상이 끌고 가는 대로 도착하다 보면 지옥 같은 세상이 펼쳐져 있고 우리는 그 엔딩에 각자의 의견을 내놓는다.
이 과정에서 영화가 전면에 배치한 것은 아서의 자의식이다. 존재감이 없던 아서. 유리 자동문을 지나갈 때도 문에 부딪힐 정도로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영화는 이렇게 존재감이 없는 아서가 세상에게 자기 자신을 알리는 과정을 핵심으로 삼았다. 소위 말하는 '자의식 과잉'과 '인정욕구'의 표출이 이야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초반부. 아서의 굽은 등을 보여주며 주인공의 위축된 내면을 보여준다. 주인공 뒤의 라디오 방송에선 '청소 노동자들이 쓰레기를 치우지 않아 전염병이 창궐한다'라는 뉴스가 나온다. 시각적으로 아서의 정신상태를 보여주면서 청각적으로는 이 사회가 노동권에 있어 약자를 존중하지 않다는 걸 암시한다. 연이어 조커가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상담치료 과정에서 상담사에게 "내 얘기를 듣지 않는군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상담사가 입 밖으로 꺼낸 말. "사회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어요"라는 대사다. 앞 장면과 연이어 아서 플랙은 개인적으로도 사회구조적으로도 구제받지 못한다. 그럼 희망을 품어야 한다. 뭐 같은 현실에 희망이 없으면 안 된다. 아서가 생각한 해결책은 코미디다. 머레이 프랭클린 쇼에 출연하는 걸 목표로 삼은 아서. 혼자 일기장에 끄적이며 농담거리를 만든다. 공연에 대한 경험을 하나 둘 쌓다 보면 언젠가 성공해서 멘토인 머레이의 쇼에 나올 거라고 희망을 품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서가 웨인의 회사에 근무하는 직원 세 사람을 총으로 살해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사건이 내면에 있던 분노를 세상 밖에 드러냈다는 사실도 굉장히 중요하다. 본질적으로 코미디언 같은 예술가들은 자신이 체화한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이 직업이다. 따지고 보면 아서 플랙이 코미디언 '조커'로서 처음으로 성공한 것은 이 살인사건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앞에서 안 웃기다고 온갖 조롱을 다 듣고 총기가 바닥으로 떨어져 해고당한 공연에 비하면 홀가분한 마음에 춤까지 춘다. 조커의 자의식이 처음으로 상승한 사건이다. 심지어 고담 시의 언론사에 보도도 되고 사회가 이 살인마를 칭송하기까지 한다. 조커의 퍼포먼스가 처음으로 먹힌 것이다. 이 춤은 후반부 계단에서 춤을 추면서 내려가는 장면에서 반복된다. 아무 관객이 없는 야외무대다. 아니 모든 관객이 지켜보고 있는 야외무대에서 계단을 내려가며 춤을 춘다. 이 춤의 리액션 중 하나는 경찰이다. (이후의 사건이지만) 어머니 페니 플랙을 살해해도 쫓아오지 않았던 경찰이 양아치 세 명 죽였다고 아서를 따라온다. 일부 시민들은 조커 가면을 쓰고 아서를 지지하기까지 한다. 이제 사회를 움직이는 인간이 됐다. 그리고 여기에 힘입어 들리는 소식. 머레이는 아서의 과거 스탠딩 코미디 이력을 보고 조롱한 바 있는데, 이 아-무도 웃지 않았던 영상을 보고 토크쇼에 초대한 것이다. 서서히 팽창하는 자의식. 바람만 맞췄던 첫 번째 아버지 토마스 웨인과는 다르게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초대한 것이다. 토크쇼에 초대된다. 이후 토크쇼에서 광대 분장으로 나타나 "나를 조커로 불러줄래요?"라고 부탁한다. 이 질문에 읽히는 가장 강력한 의도는 '조커'라고 부르는 것이 굉장한 의미가 있고, 나는 그런 굉장한 사람이라는 자신감이다. 이후 토크쇼가 진행된다. 아서는 머레이에게 "당신은 무례하군요"라며 머리에 총알을 겨눈다. 세상이 뒤흔들린다. 슈퍼스타 머레이의 바닥을 방송에 노출시키고 살인까지 했으니 당연하다. 조커의 자의식이 폭발한다. 조커가 벌인 퍼포먼스에 세상이 열광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돌아보면 <조커>는 재능 없는 예술가가 사회를 병들게 하는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보여줘 병든 사회를 담은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조커 : 폴리 아 되>는 이 1편의 플롯을 그대로 가져왔다. 2편의 초반부. 여전히 자존감이 낮은 아서. 낮은 자존감이 사람 살인한다고 채워질 리가 없다. 본질적인 문제도 있지만 사실 환경 문제도 크다. 아캄 수용소의 모든 교도관들이 아서를 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담배도 그냥 주면 되는데 "오늘은 농담 없냐?"면서 강아지 손 내밀라고 하듯 사람을 아래로 깔본다. 감옥에는 화장실도 없다. 양동이 같은 곳에 볼일 보고 정해진 시간이 되면 비워야 한다. 사람 사는 환경이라고 보기 어렵다. 당연히 위축된다. 글쓴이는 이 설정, 초반부가 보여주는 영화의 배경이 1편 초반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아예 겹쳐지는 장면(마르고 굽은 등을 보여주는)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인물의 내면이 그대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이렇게 무기력한 아서는 어떤 계기를 만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희망에 부푼다. 그 계기는 할리 퀸젤이다. 혼자가 아니라는 희망으로 가득 찬 아서. 여기서부터 자존감이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한다. 농담을 하고 싶어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던 아서에게 살아갈 의미가 생긴다. 글쓴이는 이 할리퀸(레이디 가가)이 안겨주는 희망이 1편의 코미디와 유사한 맥락이라고 본다. 아서에게 코미디는 미래다. 코미디를 사랑한다. 그래서 미래에 코미디로 먹고사는 걸 꿈꾸고 있다. 이 코미디에 대한 사랑이 할리퀸에게 옮겨온 것이 2편이다. 이 공통점은 아서가 코미디와 사랑에 서투르다는 점에서도 유사성을 띤다. 또 결정적으로 아서가 품고 있는 사랑이 어떻게 커지는가가 두 영화가 공유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공통점이다. 그건 바로 망상이다. <조커> 초반 머레이가 관객석에 앉아있는 아서를 불러 '자네 같은 친구가 있어 다행이야'식의 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 또 다른 장면에선 아서가 혼자 스탠딩 코미디를 하고 있는데 소피만 혼자 흐뭇하게 웃는 장면이나 갑자기 하하 호호하고 웃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조커> 1편이 아서가 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망상은 중요하다. 아서가 후반부까지 코미디를 놓을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이 이유(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이기 때문이다. 이 코미디에 관한 망상은 후반부에 해체되면서 아서의 무리수로 이어진다. 코미디를 보며 혼자 흐뭇하게 웃던 소피라는 애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아서는 코미디에 재능이 없었다. 현실을 받아들인 아서는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머레이를 살해한다. 이 부정적인 현실 - 망상과 사랑 - 부푼 자아를 충족하기 위한 무리수라는 구조는 2편에서도 이어진다. <조커 : 폴리 아 되>에서도 아서의 희망인 리와의 관계가 망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번에는 '폴리 아 되'라 아서 혼자만의 망상이 아니다. 하지만 망상은 망상이다. 그 망상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느냐. 이번엔 뮤지컬이다. 현실에서 뮤지컬 같은 상황이 벌어질 리는 없다. 뮤지컬 신은 전체적으로 영화 같은 상황이다. 감옥에 갇혀 한정적인 동선 때문에 나눌 수 없는 사랑을 음악과 춤으로 망상을 공유한다. 이미 전에 꿈꿔왔던 망상이 시간이 지나 더 영화적이고 깊어진다. 후반부 아서가 조커를 포기하자 그의 망상이 해체된다. 망상 속 공연에서 리는 아서를 쐈고 현실 속 할리퀸은 조커를 차버렸다. 조커로서의 이름도 잃고 자아까지 포기한 아서. 하지만 이 1편에서 이 과정을 겪고 아서 플랙의 조커가 탄생했던 것처럼 새로운 빌런이 등장한다. '넌 죽어도 싼 놈이야'라는 말과 함께 악의 축을 살해하는 남자가 영화 후반부를 마무리짓는다. <조커 : 폴리 아 되>의 후반부를 적어도 <조커>와 겹쳐지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조커 : 폴리 아 되>가 진짜 <조커>의 후속작이 맞냐는 비판에 동의하기 어렵다. 플롯이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아니 이 <조커 : 폴리 아 되>는 뮤지컬이라는 비현실적인 시퀀스를 넣어서 망상의 깊이를 더 진득하게 뽑아냈다. 1편에서 작동했던 핵심 모티브 사랑과 망상 그리고 빌런의 탄생을 2편에서 그대로 이어 더 발전시켰다. 여기서만 그치는 게 아니다. 플롯의 내밀한 부분까지 들여다보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세 가지 특성 역시 전작 1편을 그대로 승계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세 가지 특성 중 첫째. 정체성에 관한 부분이다. 이 <조커 : 폴리 아 되>에서는 할리퀸이 등장한다. 첫 번째 할리퀸은 할리 퀸젤이다. 할리퀸은 조커에게 '당신은 조커예요'라며 조커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말라고 강조한다. 처음부터 리는 아서로 접근하지 않고 조커로 접근한다. "나 당신이 주제인 영화 20번은 봤어요"라는 말, "머레이 프랭클린 쇼에서 머레이의 머리를 날렸으면 했다"는 말이 그렇다. 결정적으로 리는 아서를 처음 만날 때 머리에 총을 겨누는 제스처를 보여준다. 리는 아서를 만날 때 아서에 대한 이야기를 별로 안 한다. 하더라도 "나 당신 만나서 기뻐"라는 식의 감상만 드러내는 말만 한다. 심지어 몇 마디는 거짓말이다. 조커를 만나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사랑에 서툰 아서. 리의 존재 때문에 조커와 아서 사이에서 조커를 고른다. 후술 할 리와 메리언 사이의 대립으로 보여주는 정체성의 충돌이 서툰 사랑 때문에 이도저도 아니게 됐는데, 이 요인에 리가 있는 것이다. 이 정체성 대립이라는 측면에서 반대편의 할리 퀸이 등장한다. 바로 변호사 메리앤(캐서린 키너)다. 메리앤이 직업인으로서 펼친 주장은 간단했다. 아서는 인격이 분리됐고, 조커로서의 자아가 사람을 죽이고 다녔다는 점을 강조하는 일종의 심신 미약 논리다. 메리앤은 변호사로서만 아서를 돌본 것이 아니라 진짜 진심으로 그를 위하기도 했다. 교도관들이 아서에게 우산을 씌워주지 않는 것을 보고 "우산 안 씌워주면 누가 죽냐"라고 핀잔 섞인 한마디를 건네는 것이 그렇다. 또 아서와 조커가 분리됐다는 논리에 근거를 덧붙이는 작업도 했었다. 인터뷰를 잡는다거나 의사와의 상담이 그랬다. 법정에서도 하비 덴트의 논리를 공박할 때 '당신이 아서에 대해 뭘 아느냐'라는 식의 논리를 펼친다. 리가 아서를 버린 것과 반대로 매리앤은 진정성 있게 아서를 대한 것이다. 단지 아서는 리가 부풀린 조커로서의 자아 때문에 무리수를 뒀을 뿐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아서가 현실적인 걸 고르지 않았나? 아니다. 매리언은 할리퀸이 극에 끼친 영향처럼 아서가 후반부에 선택하는 데 있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할리퀸이 조커에게 '당신은 조커예요'라고 말하듯 아서에게 '당신은 아서예요'라고 말했던 것이 효과가 있던 셈이다. 이 두 할리퀸이 가로지르는 정체성의 딜레마는 <조커> 전작이 가졌던 딜레마기도 하다. 아서 플렉, 그러니까 조커는 어떤 존재일까? "당신은 죽어도 싸!"라는 논리 하에 유명하면서도 무례한 사람만 골라 처단하는 인물일까? 아니다. 조커는 그냥 자의적으로 죽이고 싶은 사람을 죽여야 세상에게 내가 인정받을 수 있다고 믿는 인물이다. 하지만 조커는 살인마와 소시민 사이에서 널뛰기한다. 단지 후반부에 아서가 조커를 골랐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두 명의 아버지를 경유한다. 이 <조커 : 폴리 아 되> 역시 <조커>와의 유사성을 띤다. 두 명의 아버지가 조커와 아서 사이의 정체성을 널뛰기하다 1편의 아서로 귀결 짓듯 두 명의 할리퀸이 2편의 아서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세 가지중 둘째. 망상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 영화에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부분은 뮤지컬 파트다. <조커: 폴리 아 되>에서 아서 플랙의 망상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렇다. 전작 조커에서 아서는 망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점차 자신의 어두운 본성을 드러낸다. 그가 망상과 현실을 구분하는 기점이 있다. 후반부에 이르러 어머니 페니를 살해하며 아서 본인이 망상이 심하다는 것을 자각한다. 이 과정에서 아서는 자신이 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을 어느 정도 인지하게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사실(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을 알면서도 망상을 현실같이 표현할 필요 있을까? 글쓴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망상을 망상답고 더 내면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영화의 '폴리 아 되'를 표현하는 핵심 키워드다. 아서가 현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지 않더라도, 영화 내에서는 아서가 여전히 망상 속에 빠져 있다는 점을 뮤지컬 형식으로 명확히 시각화한 것이다. 이를 통해 감독은 아서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망상의 정도를 표현하면서 얼마나 아서가 허황된 꿈에 취해있는지를 암시하는 것이다. 관객도 처음부터 그가 망상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뮤지컬 장면이 아서의 캐릭터성을 설명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누군가는 이런 장치가 지나치게 직관적이라는 비판을 할 수 있다. <조커>에서 망상과 현실사이를 널뛰기하는 플롯으로 '뭐가 진짜지?' 토론하는 재미도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영화 속 망상 장면을 뮤지컬로 표현한 것은 단순히 아서의 망상을 설명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조커: 폴리 아 되>는 아서가 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전제를 이미 깔고, 그 구분이 없는 아서의 내면을 관객이 더 직관적으로 체험하게끔 뮤지컬을 사용했다. 그 결과, 이런 방식의 연출은 아서의 심리를 보다 생동감 있게 전달하며, 오히려 아서가 망상 속에 얼마나 깊이 빠져 있는지를 더 확실히 보여준다. 이 선택은 1편의 플롯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아서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드러낸 좋은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세 가지중 둘째. 이 영화가 가진 문제의식이다. 우선 영화 <조커>가 다룬 문제의식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 있다. 전작 <조커>가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이유 중 하나는, 이 작품이 한 사회의 단면을 가감 없이 다뤘기 때문이다. 아서 플랙이 조커로 흑화 하게 된 이유는 (행위의 악함과는 별개로) 인간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머니 페니의 학대로 인한 망상장애, 노동환경의 열악함, 사회구조적으로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그의 처지, 그리고 조커를 조커로 만든 사람들이 그 예다. 이 모든 요소를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는 '미디어'다. 미디어는 아서가 '웨인 엔터프라이즈' 직원 세 명을 살해한 사건만 보도하고, 페니의 죽음 같은 일은 전혀 주목하지 않는다. 또한 아서가 코미디언으로서의 자아를 포기하는 사건인 '머레이 쇼'의 방송분 역시 미디어를 이용한 폭력이다. 셋째로 영화의 첫 장면에서 "청소부들이 쓰레기를 안 치워서 쥐가 들끓는다"는 대사는 미디어가 노동 현장에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보여주는 대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미디어는 성실하지 못한 존재다. 페니의 죽음에 대해 취재하지도 못했고 아서를 조커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미디어의 악영향이 아서의 개인적인 불행들과 시너지를 이루어, 조커라는 캐릭터가 관객 입장에서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전작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은 조커: 폴리 아 되에서도 미디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은 아서, 조커 둘 다 카메라를 통해 비치는 장면이 있다는 점이다. 매리언이 아서에게 '당신은 조커가 아니라 아서예요. 아서를 보여주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면 이 과정을 카메라로 녹화한다. 아서를 진짜 위했던 매리언조차도 보이는 이미지를 신경 쓰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녀는 미디어를 통해 재판 승소를 노린 것이다. 법정 장면에서도 아서는 판사가 아닌 카메라를 의식한다. 굳이 따지자면 판사에게 '나는 조커가 아니다'라고 말해야 설득력이 있다. 판결 내리는 건 판사니까. 그런데 아서는 카메라에 대고 굳이 말한다. 조커라는 존재가 인정받았던 계기가 미디어였다는 걸 아서가 스스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내린 행동이다. 아서가 "난 할리를 사랑해"라고 말할 때, 할리 퀸이 TV를 보며 유리창을 깨고 TV를 가져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아서에게 연락을 하는 게 아니라 TV를 가져가는 것이 할리퀸이 조커를 사랑하지 아서를 아끼는 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이 미디어의 존재에 따라 갈리는 인물들의 리액션은 극후반부의 폭탄 테러와 아서가 군중들에 의해 탈출을 시도하는 장면에서 명확해진다. 아수라장이 됐다. 조커는 정신을 잃은 채로 길을 배회한다. 지나가던 조커 추종자가 차에 탑승해서 아서를 탈출시키려고 한다. 여기서 아서는 조커로서 선택받게 된다. 하지만 아서가 내린 판단은 전적으로 아서의 것이다. 군중들이 원하는 조커라면 법정을 탈출해서 사람들을 조종해야 하는데 냅다 도망가버린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미디어를 통해 보이는 것과 관객이 알고 있는 실제 현실 사이의 괴리를 명확하게 그린다. 가짜 조커들이 아서에게 기대한 모습이 '폴리 아 되(망상)'이었더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이 괴리가 발생한 이유? 아서는 처음부터 관객들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 영화 세계관의 군중들은 아서를 미디어를 통해서가 아니면 접할 수 없다. 카메라를 통해, 미디어를 통해 보이는 모습이 인물들의 행보를 가른 걸 단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셋째. 전작을 승계하면서 전적으로 부정하는 이미지들이 <조커>와의 연속성과 차이점을 불어넣는다. 전작 조커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는 계단을 내려오며 춤추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조커의 추락을 직관적으로 표현한 장면이면서, 그의 홀가분함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조커: 폴리 아되>에서의 계단(장소도 같은) 신은 다르다. 이번엔 계단 장면에서 더 이상 무겁거나 상징적인 춤도 없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고된 과정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저 할리 퀸이 계단에 서 있고 아서는 할리퀸을 좋아하니까 아무 생각 없이 올라간다. 이 영화처럼 조커 내면의 아서 플랙을 그리고 싶었다 하더라도 계단 신에 의미를 부여해도 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전적으로 그걸 거부한다. 전작에서 그렇게 상징적인 장면으로 성공을 거뒀는데, 이번에는 그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어버린 것이다. 전작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은 조커의 추락과 흑화의 이유를 면밀하게 보여주는 하강의 이미지를 상징했는데, 이번에는 상승에 이유를 붙이지 않는다. 아서가 범죄를 저지르는 데는 많은 이유가 필요할지 몰라도, 우리가 행복한 이유에는 그리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느낌이랄까.
영화는 이런 식으로 전작의 이미지를 비튼다. 예를 들어, 전작에서 아서가 두들겨 맞았던 길거리를 전속력으로 질주해서 조커로서의 자아를 할리 퀸 앞에서 표출하는 장면도 있었다. 아서의 이야기가 처음 시작됐던 곳에서 조커의 자아가 붕괴된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또 생방송 중에 조커 분장을 하고 "아캄의 돼지 같은 교도관들"이라고 외친 후 굳이 두들겨 맞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도 전작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부정하는 요소다. 전작 <조커> 1편에서도 생중계되는 방송에서 머레이를 공격했다 아무 지장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아서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묘사했다. 이렇게 영화는 전작의 연속성과 차이점을 동시에 표현하면서 스스로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굉장한 창의성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 대해 쓰고 싶으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바로 조커의 캐릭터성을 영화 안에 구현했다는 점이다. 기존에 조커가 미디어에 나온 경우를 생각해 본다. 히스 레저가 연기한 <다크 나이트>의 조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였지. 조커가 전하는 가족 이야기는 매번 달랐고, 목표가 돈인 것도 아니라 악행을 펼치고 사회를 혼란시키는 것이 캐릭터의 욕망이었다. 캐릭터를 규명하지 않는, 즉 어디로 튈지 모르는 느낌이 조커의 본질이었지. 팀 버튼의 '배트맨' 시리즈의 조커(잭 니콜슨)는 유희적인 면모가 강조된 인간이었다. 그저 자기가 재밌으니까 나쁜 짓을 하는 인물이다. 죽을 때도 까르르 웃고 죽을 정도로 이상한 면모가 가득한 캐릭터였다. 맷 리브스의 조커 역시 그가 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설명 없다. 배트맨과의 대화 장면만 짧게 보여줄 뿐이었다. 나는 조커라는 캐릭터의 핵심이 바로 규명할 수 없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기존에 조커를 실사화한 영화들이 그랬듯 말이다.
하지만 이 '조커' 시리즈는 전적으로 다르다. 아서 플랙에게 명백한 이유가 주어지고, 그가 악당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상세히 보여준다. 이미 이 영화의 조커는 처음부터 기존과는 다르다. 완벽하게 대치된다. 그 대신 우리가 아는 조커의 이미지를 구현해야 제목과 캐릭터에서 배트맨 세계관을 빌려온 근거가 성립된다. 이걸 어디서 찾았을까? 글쓴이는 1편과 2편 사이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기존 '조커'와 판이하게 다른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 그러니까 전통적인 조커의 특징을 뒤엎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1편의 조커가 그려왔던 2편의 망상이 원인을 뭉개버린다는 점에서 전형성을 거부하는 '조커'의 전통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또한 이야기 내적으로 망상에 빠져있는 아서 플랙의 캐릭터성을 살리는 데에도 생동감을 부여한 선택이었다. 영화가 1편이 있어 2편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1편의 상황이 망상이 되어 2편이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두 영화의 연속성을 처음부터 망상으로 이은 것이다. 이것이 기획의도라면 사실 굳이 조커의 캐릭터를 강조할 이유가 없다. 기획의도에 충실할 것이라면 아서에 집중하는 쪽이 합리적이다. 이것은 할리퀸이 언급하는 '조커가 주인공인 영화'에서도 심화되는 지점이 있다. 사실 이 영화에서 이 대사 굳이 필요 없다. 조커가 나온 뉴스 40번 읽었다고 해도 이야기상의 결함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 굳이 영화였어야 했던 이유. 영화가 상상에서 그린 예술이라는 점을 상기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1편에서 조커 추종자들이 그린 악의 이미지가 허상이었던 것처럼 <조커>라는 영화에서 그린 조커의 이미지를 극 중 극의 형식으로 통렬하게 조롱한다는 단면이 여기서 읽힌다. 이 망상으로 1편과 2편을 이으면서 충돌시킨 선택은 영화가 악을 보여주는 데 있어 아주 좋은 선택이기도 했다. 1편에서 꿈꿔온 2편, 1편에서 기억하는 대중들의 조커에 관한 이미지, 할리퀸에 대한 아서의 생각, '이렇게 하면 먹힐 거야'라는 법정에서의 안일함 등 1편에 근거한 2편의 판단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를 보여주는 장치였다.
이런 점에서 엔딩은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보이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규명할 수 없는 악이 조커라면서, 영화의 마지막에 조커가 죽는 건 명확한 결말 아닌가?"라고. 하지만 난 이 영화에서 조커가 의인화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규명할 수 없음 / 조커의 정체성 둘 다 동시에 살렸다고 본다. 마지막 아서를 살해하는 남자는 초반부부터 소름 끼치게 웃는다. 여기서부터 아서와 공통점을 가진다. 결정적으로 마지막 장면에서 “넌 죽어도 싸!”라고 말하면서 아서를 살해한다. 영화가 고의적으로 아서와 남자를 겹치게 보여준 것이다. 글쓴이는 이 남자가 아서 플랙의 후임, 즉 또 다른 조커라고 생각한다. 그는 조커 추종자가 아닌 아서 플랙의 계승자가 된 것이다. 이 장면은 아서가 머레이와의 토크쇼에서 자살을 시사하다가 결국 머레이를 살해했던 장면과 오버랩되면서, 영화가 두 사람을 통해 "공유된 광기"를 조커라는 캐릭터로 보여줬다고도 읽을 수 있다. 결국, 영화는 악을 의인화하기보다는, 조커라는 이름 아래 공유되는 광기와 혼란 그 자체를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이 영화는 조커가 아닌 아서의 이야기를 다뤘지만, 그 방식은 전례를 따르지 않았고, 조커처럼 규명할 수 없는 캐릭터를 새롭게 정의했다는 점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 되는 것이다.
불호평이 압도적으로 많은 영화다. 누군가는 진짜 조커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전작의 장력을 스스로 거부했다면서 영화에게 야유를 보낸다. 글쓴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전작만큼은 아니지만 이 영화는 충분히 현대사회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면서 감정적인 폭이 넓고 조커의 캐릭터성이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뮤지컬 시퀀스들이 그렇게까지 완성도가 높지는 않아보인다는 점과 난해한 플롯, 느린 템포가 대중영화로서 합격점을 가지기 어렵다는 점은 동의한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영화가 충분히 좋은 후속작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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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 위로 흩어지는 광기 어린 숨결
더 노비스 (THE NOVICE , 2021)
"물 위로 흩어지는 광기 어린 숨결"
개봉일 : 2022.05.25.
등급 : 15세 관람가
장르 : 스릴러
러닝타임 : 97분
감독 : 로런 해더웨이
출연 : 이사벨 퍼만, 에이미 포사이스
개인적인 평점 : 3.5/5
쿠키 영상 : 없음
더 노비스 줄거리
대학 신입생 ‘알렉스’는 교내 조정부에 가입한 후 동급생 ‘제이미’에게 경쟁심을 느낀다. 늘 최고를 갈망하는 ‘알렉스’는 팀 1군에 들기 위해 훈련을 거듭하고, 스스로를 극한으로 내몰기 시작하는데···
네 미친 짓으로 최고를 증명해 봐!
우리는 평생 다른 이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감과 동시에 그들과 끊임없는 경쟁을 벌인다. 노력형이든 타고난 천재든 상관없이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그 분야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 1등, 우승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사람뿐이다.
<더 노비스>는 선천적인 재능이 없는 대신 흔히 말하는 악바리 근성이 넘치는 주인공 '알렉스’의 질주를 담은 영화다. 알렉스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 대학에 입학한다. 고등학교에선 가까운 동네 친구들끼리만 경쟁을 펼쳤고, 그는 교내에서 1등을 놓치지 않는 수재였다. 하지만 대학교에 오니 알렉스처럼 수재라고 불렸던 학생들이 바글바글한 거다. 알렉스는 더 노력하지 않으면 1등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보다 더 큰 불안감을 느끼게 되고 새롭게 가입한 교내 조정부에서 타고난 재능을 가진 동급생 '제이미’를 만나며 그 불안감은 독기로 변하게 된다.
다시 만나보고 싶었던 배우 이사벨 퍼만
<더 노비스>는 개봉을 앞두고 올해 전주 국제영화제에서 선공개되었다. 영화제에서 무슨 영화를 볼까~ 한참 고민하던 찰나, "<오펀: 천사의 비밀> 그 여주인공이 나오는 신작도 상영한대!" 하는 소문을 듣고 이 영화 근처를 기웃기웃거렸는데 도저히 스케줄이 나오지 않아 만약 정식 개봉을 한다면 꼭 챙겨보자고 다짐했었다. (그 당시엔 정식 개봉 소식을 나만 몰랐었다..)
<더 노비스>를 기대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이 영화를 통해 데뷔한 로런 해더웨이 감독이 스스로 이 작품을 "조정을 소재로 한, <블랙 스완>의 느낌이 드리워진 <위플래쉬>"라고 소개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이사벨 퍼만이라는 배우 때문이었다.
대략 10년전 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필모를 훑어보다 그가 <오펀: 천사의 비밀>이라는 영화의 제작에 참여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어? 레오가 제작한 거면… 볼만하지 않을까?" 하며 용감하게 이 영화에 도전했었다. 그리고 아주 많은 관객들이 그러했듯 큰 충격에 빠졌고 이사벨 퍼만이라는 배우에게 의구심을 가졌었다. "이 사람… 나이 속인 거 아냐?"하고. 분명 아이 같은데, 아이가 맞는데… 아이가 아닌 것 같은 그의 연기에 충격을 넘어 의심이 들었던 거다.
이사벨 퍼만은 그 이후로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왔지만, 국내에서 크게 이슈가 되었던 작품이 많이 없었기에 나에게 이사벨 퍼만의 이미지는 '오펀 그 배우’였다. 근데 그런 그가 <위플래쉬> + <블랙 스완> 같은 영화의 주연으로 나온다니. 이번엔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스로의 목을 조이며 나아가는 경주
광기와 독기. 그리고 약간의 호흡곤란. <더 노비스>라는 영화를 짧게 표현하자면 이 세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물 위에 떠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결승선을 향해 손을 갈고 위안에 든 모든 것을 토해내는 주인공 알렉스의 모습은 멋지다 못해 지독하게 느껴진다.
아무리 해당 종목을 사랑한다 해도 끝없는 극한의 경쟁 속에서 부담감,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는 선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의 팀에서도 1군이 있고, 2군이 있고, 또 대표가 있다. 알렉스는 학교를 대표하는 대표 선수가 되기 위해 훈련에 매진한다. 하지만 알렉스는 다른 선수들에 비해 체구가 작았고, 그만큼 힘도 약했다.
그런 그의 옆에 있는 제이미는 알렉스보다 체구도 크고 어릴 때부터 여러 운동을 접하며 자라 뛰어난 운동 신경을 자랑하는 팀의 에이스다. 이미 자신의 입지를 확보한 제이미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훈련에 참여한다. 알렉스는 제이미에 대한 열등감, 1등에 대한 열망을 불태우며 타고난 그의 재능을 이기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갈아 넣는다.
대표팀 멤버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제이미와 예비역으로 대기하다 겨우 기회를 잡은 알렉스. 같은 훈련 과정을 밟고 있지만 두 사람의 표정과 행동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타고난 천재와 노력형 수재. 겉으로 보기엔 같은 배에 앉아 같은 박자로 노를 젓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알렉스는 제이미와 함께 대표팀 자리에 앉기 위해 숨 쉴 틈 없이 달려왔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같지만
제이미와 알렉스는 마치 달리기 경주에 참여한 토끼와 거북이 같다. 타고난 달리기 실력으로 여유롭게 결승선을 향해가는 토끼 제이미와 제이미가 푹 자고 있을 시간에도 열심히 훈련하는 거북이 알렉스. 근데 <더 노비스>에서 볼 수 있는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는 우리가 알고 있는 우화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영화의 초반, 열등감을 갖고 있는 알렉스가 열심히 훈련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노력해서 결국 제이미보다 더 팀에서 촉망받는 선수가 되려나?' 싶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알렉스의 목표가 팀의 1군, 대표 선수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알렉스는 그저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 팀에서도 1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하고 싶은 사람처럼 보인다.
알렉스의 목표는 팀의 단합, 팀의 우승보단 어찌 됐든 내가 젓고 있는 배가 1등으로 결승선에 통과하는 것이다. 팀의 단합보단 나의 1등을 향해 달려가는 그의 모습에 누군가는 훈련을 열심히 한다며 박수를 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혼자만 아는 재수 없는 놈이라며 욕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그 사이에서 몇 번의 감탄과 탄식을 내뱉었다.
영화의 장단점
<더 노비스>는 알렉스의 불안감과 초조함을 시각, 청각을 이용해 탁월하게 표현한다. 알렉스의 몸에 흐르는 땀과 그의 눈빛, 마치 세상에 홀로 남은 것처럼 느껴지는 훈련 장면, 조각난 채로 환각처럼 지나가는 순간들, 긴장감을 끌어올려줌과 동시에 관객을 더욱 지치게 만들기도 하는 음악의 사용까지. 마치 알렉스의 불안한 마음속에 발끝을 몇 번 담가보는 느낌을 선사하는 탁월한 화면 구성이 이 영화의 최대 장점이다.
그에 반해 최대 단점이라면 이 이야기는 감탄과 탄식을 불러오긴 하지만 커다란 짜릿함을 주진 못한다는 것이다. 영화 내내 학교에선 공부로 경쟁하고, 새벽, 늦은 밤 할 것 없이 훈련을 반복하고, 숨쉴틈 없이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넣는 알렉스의 일상이 이어진다. 주인공의 치열한 일상을 함께 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그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게 되기 마련인데, <더 노비스>의 엔딩엔 그런 보상이 없다. 상쾌한 해방이라든가, 끝내 승리하는 모습이라든가. 아니면 광기에 절여진 비극적인 결말이라든가. 딱 정해진 무언가가 있으면 탁! 정신이 환기되는 느낌이 들 텐데 어째 영화 내내 알렉스의 광기에 이리저리 휘둘리다 끝나버리는 느낌이랄까. 알렉스가 결승선을 끊으며 주체적으로 만들어낸 엔딩이긴 하지만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다.
* 위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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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잡은 내 손에 흉터가 있을지라도
맞잡은 내 손에 흉터가 있을지라도, <태어나길 잘했어(2022)>
필름소피_김희연
주인공 춘희는 중학생 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외삼촌 가족이 사는 집에 얹혀살게 된다. 춘희는 괜한 혹 하나를 달게 되었다는 듯한 외삼촌과 외숙모의 티 나는 눈치와 구박, 동갑내기 사촌 유라와의 불편한 마찰을 뒤로하고 다락방 한 칸을 겨우 쓸 수 있게 된다. 좁은 계단을 오르면 있는 창문과 깔고 잘 이불 하나를 겨우 펼칠 수 있는 공간은 곧 춘희의 안식처가 된다. 난방도 되지 않아 옷을 껴입어야 하는 다락방이지만 나름 춘희가 꾸민 장식들로 채워지고 빛을 낸다. 처음엔 애정을 가지고 개인적인 공간에 대한 표현으로 다락방을 꾸미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더 보다 보니 애정보단 이런 곳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의지였던 것 같다. 옆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곳에서 민달팽이 한 마리를 만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등에 껍데기를 이고 있는 달팽이가 아니라 굳이 민달팽이로 연출한 이유는 민달팽이와 춘희 모두 집이 없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 통하지도 않고 도움이 되지도 않지만 옆에 자신과 비슷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존재만으로도 아마 춘희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민달팽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을 쳐다보는 메인 포스터 속 춘희의 모습이 모든 것을 거스른 채 자신만의 우주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저는 좀 쩔어있어요, 땀에’ 춘희는 어렸을 때부터 다한증이 있어 언제나 손뿐만 아니라 발에도 땀이 흥건하다. 친척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구박과 미움을 사는 이유에는 춘희의 땀도 포함되어 있었다. 중학생이라는 어린 나이에 견디기 힘들었을 타인의 따가운 시선에 스스로 이것을 오점이라 생각하고 활활 타고 있는 불에 손을 가까이 대어 흉터를 남기기도 하였다. 어른이 된 춘희는 마늘을 까 사촌 오빠의 식당에 가져다 주고 받은 돈을 모아 다한증 수술을 하려 한다. 어느 날 우연히 지나가면서 보게 된 상담 센터에서 다양한 사연과 고민거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각자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을 보게 된다.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춘희는 모임에 참석하게 되고 그곳에서 주황을 만난다.
주황은 어렸을 때부터 당한 가정폭력으로 인해 말을 더듬는 버릇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주황에게 말을 잘한다고 말해준 유일한 인물이 바로 춘희였다. 둘은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된다. 하지만 계속해서 ‘제가 춘희 씨 지켜드릴게요.’라며 마음을 표현하는 주황에게 춘희는 ‘주황 씨, 누군가를 지켜준다는 말은 그렇게 쉽게 하는 게 아니에요’라고 거절하며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 자신이 겪었던 아픔이 컸던 만큼 지켜주겠다는 주황의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도, 누군가에게 완전히 의지할 수도 없었던 춘희의 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주황의 말이 결코 쉽게 뱉은 가벼운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주황은 가정폭력을 겪은 인물로 폭력과 위험으로부터 자기 자신 하나만 지키는 것도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달았을 것이다. 그런 주황이 춘희에게 지켜주겠다는 말을 꺼내기까지는 많은 생각과 결심을 거친 진심 어린 위로였다는 생각이 든다.
비 오는 날 우연히 번개를 맞게 된 춘희는 어린 시절 자신을 만나게 된다. 계속해서 눈앞에 나타나는 어린 시절의 본인을 보는 춘희의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 기대지 못하고 가라앉은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따뜻한 말은 따로 있었지만 항상 말은 마음과 같이 나가지 않는다. 내가 쏘아붙인 모진 말들은 결국 나에게 돌아오고 우리는 모두 흉터를 안고 살아간다. 이렇듯 맞잡은 내 두 손에 흉터가 크게 느껴질 때쯤 이 영화를 한번 봤으면 좋겠다. 잘 커주셔서 감사하다는 최진영 감독님의 말씀에 이 영화에도 봄이 찾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씨네랩 크레이터로서 시사회 초청받아 참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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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시내가 사라졌다 리뷰 - 이미테이션 가수 연시내의 진짜 윤시내 찾기 어드벤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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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리뷰영상은 홍보마케팅사를 통해 저작권 협의가 진행되어 제작된 영상입니다
영원한 디바 `윤시내`가 고별 콘서트를 앞두고 사라졌다?!
전설적인 가수의 실종으로 대한민국이 떠들썩한 가운데,
20년 간 이미테이션 가수 `연시내`로 활동해온 순이(오민애)는
`윤시내`와 함께할 뻔한 꿈의 무대도, 일자리도 잃어 좌절에 빠진다.
한편, 사람들의 관심이 고픈 유튜버 `짱하`(이주영)는
라이브 방송 중 우연히 찍힌 엄마 `연시내` 영상의 조회수가 떡상하자
대박 콘텐츠를 꿈꾸며 `윤시내`를 찾는 여정에 따라 나서는데…
동료 가수 `운시내`(노재원)와 함께 가시내, 윤신애, 윤사내까지 모두 만나며
사라진 `윤시내`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시작한 동상이몽 두 모녀는 과연 `진짜`를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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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컨스피러시> 메인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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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로빈의 소원> 스페셜 예고편
2014년 8월 11일. 할리우드의 명배우이자 코미디언인 로빈 윌리엄스가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했다.
특유의 익살스러운 연기로 관객을 울고 웃게 하며 꿈과 희망의 아이콘 같았던 배우였기에 전세계 영화 팬들은 충격이 더 컸다.
하지만 언론 매체를 통해 알려진 무성한 소문과 다르게 그는 자신과의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가 바라던 진짜 소원은 무엇이었는지 이제 그의 죽음에 둘러싸인 소문과 진실에 대한 그의 이야기가 밝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