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2021-11-03 01:16:10
담백하게 그려낸 우정의 곡선
영화 <퍼스트 카우> 리뷰
퍼스트 카우 (First Cow, 2019)
개봉일 : 2021.11.04. (한국 기준)
감독 : 켈리 라이카트
출연 : 존 마가로, 오리온 리, 린 어벌조노이스, 토비 존스
담백하게 그려낸 우정의 곡선
최근엔 역동적이거나 무게감 영화를 주로 접하며 감정과 체력을 쭈욱 소모해왔는데, 오랜만에 정말 고요하고 부드러운 영화, <퍼스트 카우>를 만났다.
<퍼스트 카우>는 19세기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한, 두 남성의 순도 높은 우정을 그린 영화다. 처음 영화 정보를 접했을 때, 19세기 서부 개척 시대가 배경이라기에 나는, 당연하게도 카우보이와 총, 사나이들의 대결, 무법자들. 그리고 <장고:분노의 추격자> 같은 영화의 분위기를 떠올렸다. 내가 서부 영화를 잘 모르는 탓도 있겠지만, 보통 서부영화라 하면 이런 느낌을 떠올리지 않나?..
근데, <퍼스트 카우>는 진득한 발차기로 내 예상을 저~멀리 걷어냈다.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지옥의 격언> 중 일부인 “새에게는 둥지, 거미에게는 거미줄, 인간에겐 우정을”이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주인공 쿠키와 킹 루의 우정을 아주 진하고 담백하게 담아낸다.
퍼스트 카우 시놉시스
19세기 서부 개척 시대, 사냥꾼들의 식량을 담당하는 쿠키는 표적이 되어 쫓기는 킹 루를 구해준다. 몇 년 후 정착한 마을에서 재회한 이들은 마을의 유일한 젖소의 우유를 훔쳐 빵을 만들어 돈을 벌기로 하는데… “우리에게는 지금이 기회야”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영화 중 첫 번째
<퍼스트 카우>는 켈리 라이카트 감독 작품 중, 국내에 정식 개봉하는 첫 번째 작품이다. 사실 처음 <퍼스트 카우>라는 영화에 눈길이 가게 된 건, <문라이트>,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제작사로 유명한 A24가 제작한 신작이라는 문구 때문이었다. 감독의 이름은 다소 낯설었지만, 소위 ‘영화 보는 눈이 좋다’는 평가를 받는 제작사에서 나온 영화라 하니 일단은 기대가 됐다. 그리고 이 영화는 나의 기대감을 제대로 충족시켜 주었다. 무해하고, 부드럽고, 따뜻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든 생각인데,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작품도 연이어 더 많이 수입되었으면 좋겠다. 셀린 시아마 감독이 <타.여.초>를 통해 한국 관객들에게 이름을 알린 후, <워터 릴리스>, <톰보이>, <걸후드>가 연이어 개봉했던 것처럼 말이다. 구석진 곳까지 훑어내는 꼼꼼하고 따뜻한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시선이 참 좋아서, 그녀의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졌다. 현재 네이버를 통해 구매가 가능한 작품도 2편 있던데.. 올해 안에 꼭 보는 걸로.
새로운 서부영화의 매력
서부영화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총과 인물들의 대결구도, 액션 요소들을 깔끔하게 털어낸 <퍼스트 카우>는 서부 영화라기보단 서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인간의 우정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4:3의 다소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화면과 움직임 없는 카메라. 그 안을 가득 채우는 푸릇한 자연의 풍경과 인물들의 숨소리. 영화가 끝났을 때 옆좌석 어딘가에선 “이거 완전 자연 다큐멘터리다.”라는 감상평이 들리기도 했다. 그만큼 이 영화의 모든 순간이 자연스럽고 또 아름답다.
<퍼스트 카우>는 아슬아슬한 사건과 신경 써 만들어낸 리듬감 같은 것에 힘을 주지 않는다. 작품 밖의 인물이 앞서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려고 한다기보단, 그저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다. 특정한 배경 안에서 살아 숨 쉬는 두 주인공은 아주 천천히 극을 이끌어가고, 나는 서서히 그 안으로 스며들었다.
척박한 개척지에서 피어난 우정과 신뢰
이제 막 새로운 개척지가 생겨나고, 내가 살아갈 자리 하나를 꿰차는 게 모두의 목표였던 '서부 개척 시대'. 친구와 우정 같은 것을 챙길 틈 없이 부지런히 내 이득을 주워 담고 다녀야 했던 그 시대적 배경 속에서 우연한 기회에 만난 쿠키와 킹 루는 서로에게 대가 없는 선의를 베풀고, 요란하진 않지만 깊은 우정을 나눈다.
결과를 위해 과감하게 행동하고 투자하는 킹 루와 한 수 앞을 더 대비해야 한다며 신중을 기하는 쿠키. 중국 출신으로 그 당시 오리건 주 근방에서 생활하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도전이었던 킹 루와 가족의 부재를 딛고 성공하기 위해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는 유대인 쿠키. 킹 루와 쿠키는 사회적으로 큰 파워를 갖지 못하는 출신을 가졌지만, 꼭 성공해 호텔과 빵집, 농장을 갖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킹 루가 벼랑 끝에 몰렸을 때, 우연히 짧은 만남을 갖게 된 두 사람은 차후 새로운 정착지에서 운명적으로 다시 마주하게 된다. 둘은 그렇게 동거를 시작하고, 아주 각별한 친구 사이가 된다. 쿠키와 킹 루 사이에 많은 말이 오가진 않지만, 그들의 군더더기 없는 몸짓에서, 불안함 없이 고정되어 있는 눈빛에서 깊은 신뢰를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엔 두 사람 중 누구든 언제든 떠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들의 우정은 내 예상보다 두터웠다.
지금도, 앞으로도 함께. 변치 않는 우정
이야기는 천천히 흘러가고 인물들은 감정을 나눈다. 그들을 둘러싼 자연과 시간은 정직하게 흘러간다. 그 사이 킹 루와 쿠키는 도망쳐온 과거를 터놓고, 함께 이뤄나갈 미래를 이야기한다. 과거엔 사회적 약자이자 쫓기는 처지였지만, 각박한 사회 속에서도 서로를 이해해 줄 친구를 만난 쿠키와 킹 루는 새로운 기회를 잡으려 한다.
마을 유일의 소는 두 사람이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이자 위험한 도박이었다. 성공이, 새로운 개척지로의 출발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순간, 팩터 일행에게 쫓기던 두 사람은 절벽 앞에서 탈출의 갈림길을 마주한다. 의외였다. 이대로 끝인가 싶었는데, 그들은 다시 함께 살았던 오두막으로 돌아와 어깨를 맞대고 새로운 길로 향한다.
꿈을 이루는 것도,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는 것도 해내지 못했지만, 품고 있던 꿈만큼이나 빛나는 우정을 가슴에 품고 두 사람은 그대로 잠이 든다. 그리고 그들의 흔적은 변치 않고, 아주 먼 훗날까지 남아 꽃과 함께 아름답게 장식된다.
서로를 향했던 조용한 시선, 뚝뚝한듯하지만 배려가 담겼던 손길, 친구의 지친 어깨를 끌어올려 주던 팔, 맞잡은 손. 우정을 표현하는 이 모든 것들이 잔잔하게 빛나던, 따뜻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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