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록2025-07-15 15:35:08
[BIKY 데일리]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을 빼앗는 이는,
영화 <곰을 기억하다> <나는 이르핀에서 죽었다> <나를 그려줘> <양> <할아버지> 리뷰
제20회 BIKY 기획기사 [유스 단편 5]
<곰을 기억하다>
장 & 나이트
United Kingdom
2024
Cast Anna Calder Marshall, Lewis Cornay
시놉시스
영국 시골 마을에서 정체 모를 금속음에 집착하는 소년 피터는 소리를 따라 녹음하게 됩니다. 그리고 소리가 담긴 장면을 노인에게 보여주자, 그는 어린 시절 곰이 언덕을 떠돌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감각적인 사운드의 디자인, 교차 편집의 스타일을 통해 세대 간의 감정을 연결하고, 과거와 현재를 영화적인 동시에 서정적으로 연결해 냅니다. 환상과 현실의 교차하는 세대 간의 공감을 일으키는 단편.
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소음인가? 언젠가부터 그레이힐에 쇠와 같은 무언가가 부딪히는 마찰음이 울려 퍼진다. 마을 전역에 메아리처럼 퍼진다. 창문을 매트리스로 막고, 더 큰 노래로 잠재워보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귀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방송사에서 취재하러 올 정도로 사안이 커질 즈음, 유일하게 신이 난 듯한 소년 ‘피터’가 등장한다. 자신이 들고 있는 드론 카메라보다 훨씬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취재진들에게 말을 건다. 저 엄청난 영상을 찍었는데, 보여 드릴까요? 그들에게 대답을 듣기는 커녕 무시 받았음에도 여전히 장난기 넘치는 눈빛을 보인다. 그런데, 마을의 흥밋거리를 찾아 온 외지인들 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 또한 소년에게 큰 관심이 없다, 마을의 골칫거리인 ‘소음’의 원인을 파고들고 해결할 만한 유일한 인물임에도.
마을과 묘하게 동떨어져 있는 인물은 피터 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는 곳에 남아 있지 말라는 관리인의 말을 듣고도 저항하지 않는 인물이 보인다. 건물 청소부 ‘에바’,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홀로 남아 있던 피터는 갑작스레 들리는 라디오 소리에 그가 지내는 곳으로 이끌려 온다. 자신은 남동생과 함께 정당한 돈을 지불하고 이곳에 거주하는 거라며 반사적으로 해명하는 에바는, 그저 예전에 불에 타 사라진 마을의 유물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공간에 매료되었을 뿐인 피터의 모습을 보고 한층 경계를 푼다. 그리고 피터가 계속 자랑해 마지 않았던 어떠한 영상을 함께 본다. 계속 희미하게 들려오던 쇠 마찰음. 사람과 비슷한 형상을 한 무언가가 만들어내는 소리는 가까이서 마주하니 무언가 다르다. ‘곰의 정령’이 돌아왔음을 에바는 바로 알아챈다.
이미 사라진 마을을 찾아 헤매던 곰의 정령은 다함께 춤을 췄던 기억을 더듬으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나, 아주 오래전에 이곳에 이미 있었던 소리. 그 소리에 집중하고 추억을 기억해 준 건 피터와 에바 뿐이다. 화재가 일어난 이후 마을의 이름도, 위치도, 모든 게 바뀌어 버린 지금에 와서는 에바와 정령 또한 춤을 온전히 기억해내지 못한다. 그들을 이루던 근간을 잊는다. 이 땅 위에 분명히 있었던 시간들을 뒤로 하고, 곰의 정령은 떠난다. 소리와 함께 기억도 사라진다.
<양>
하디 바바이파르
Iran
2024
Cast Rose Tabatabaei(Gelavij Alam)
시놉시스
테헤란에 사는 10살 소녀 로즈는 축제에서 사용을 양들을 구하기로 결심합니다. 그것은 이란의 전통에 맞서는 과정이 되고, 전통의 엄격함이 지배하는 분위기에서 어린 소녀의 선택과 결정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양을 구하기 위한, 어쩌면 소녀를 닮아 있는 양을 둘러싼 모험은 어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요. 희망은 어떻게 피어나는 것일까요.
<할아버지>
콩스탕스 들로름, 에르완 딘
France
2024
시놉시스
<양>과 <할아버지>는 <곰을 기억하다>와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약간의 몽환적인 이미지를 곁들여 작품의 주제를 표현해낸다. 그리고 인간 이전부터 존재했던 동물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양>은 특히나 아이의 시선을 통해 성경 구절 중 하나를 꼬집는다. 어른들이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성경을 차용한다. 이기적인 마음을 성스러운 행위로 탈바꿈하여 양을 죽인다. 수많은 양을 마당에 데려와놓고 그들의 앞에서 동족을 죽이는 모습을 목격한 ‘로즈’는 그날부터 고기 반찬을 입에 대지 않는다. 대신 집에 있던 채소를 한껏 챙겨 그 마당에 들어가 양들에게 나누어준다. 그리고 줄곧 조용하던 로즈는 엄마에게 이웃집에 대해 질문한다. 양을 제물로 바치는 거라며 별 일 아니라는 듯 차분하게 설명하는 엄마에게 다시 묻는다. 성경이 우리에게 양을 직접 도살하라고 시켰어요? 엄마는 대답하지 못한다. 사사로운 감정과 이해관계에 물들지 않은 아이의 순수함은 무언가 옳지 않다는 강렬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고민하던 로즈는 어느새 세 마리의 양 밖에 남지 않은 마당으로 다시금 몰래 들어가 자신의 집에 데리고 온다.
새를 집에 박제해두고 새에 관련된 영상만 보는 ‘할아버지’의 집에 네 명의 손주가 놀러온다. 그리고 다시금 현실과 환상이 교차된다. 어쩌면 극의 첫 시작부터 환상 속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아이들이 집에 들어올 때부터일까? 아이들과 즐겁게 대화하고 TV를 감상하던 할아버지는 손주들에게 밥을 챙겨주려는 순간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다. 외마디 소리와 함께 일순간 정적이 흐른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죽음을 모르는 건지, 외면하는 건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할아버지에게 음식을 먹여준다. 아무 일이 없다는 듯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고, 할아버지인 척 문자를 보내고, 박제된 새의 깃털을 뽑고 꼬리를 부러뜨린다. 그리고 깃털이 마구 뽑힌 새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몸에 깃털이 듬성듬성 붙어 있는 할아버지가 아이들의 앞에 나타난다. 아이들은 당연히 할아버지가 돌아올 줄 알았다는 듯 다같이 놀고 TV를 본다. 아이들을 멀쩡히 보내주고 새의 모습을 한 할아버지는 집 난간에서 도약한다. 동시에 나무에 앉아 있던 실제 새도 날아오른다.
새는 할아버지의 손에 박제되어 거짓된 생명을 유지한다. 얼마나 더 생생하게 살아 있어 보이게 만들까, 하는 욕심 뿐이다. 할아버지는 날지 못해 죽었고, 새는 죽은 순간 날지 못하게 되었다. 상반된 죽음이 한데 모이며 환상 속 존재를 만든다. 아이들의 눈에는 두 존재가 겹쳐 보였을까? 죽음을 앞두고 있던 세 마리의 양은 과연 살아 남았을까?
<나는 이르핀에서 죽었다>
아나스타시야 팔릴레이예바
Czech Republic, Slovakia, Ukraine
2024
시놉시스
우크라이나 전쟁을 다룬 애니메이션인 동시에 기억의 다큐멘터리. 2022년 2월 키이우에서 이르핀으로 피신하여 열흘 간 고립되었던 상황을 회상한다. 컷아웃 기반의 흑백 연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여 애니메이션 특유의 간결함을 취하는 동시에 전쟁의 공포를 사실적으로 표현해 낸다. 전쟁의 상처와 죽음의 무게를 교차하면서, 개인의 기억을 앞세운 빼어난 작품.
<나를 그려줘>
코헤이 키야스
Japan
2024
Cast Kobayashi Momoko(Koyori Edogawa), Takizawa Erika(Kiriko Asai)
시놉시스
고등학교 만화가 지망생 코요리는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친구 키리코로부터 “너의 만화가 최고였어”라는 말을 듣게 된다. 또한 키리코는 “나를 그려 줘”라고 요청한다. 소녀들의 성장담을 바탕으로 외면과 내면 사이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학원영화의 감성을 건드리면서 진짜 모습이란 무엇인지를 묻는, 풋풋한 감성의 드라마.
<나는 이르핀에서 죽었다>와 <나를 그려줘>는 감정의 정적인 표현과 과장된 표현이 대비되어 함께 감상하면 각 작품의 매력이 더욱 뚜렷하게 보인다. 또한 애니메이션과 그림만이 할 수 있는 표현의 장점을 극대화시킨 부분 또한 집중할 만한 부분이다. <나는 이르핀에서 죽었다>는 감독 자신의 경험담을 독백으로 다루고 있는 자전적인 작품이다. 역사 속에서 종식되어 다시는 일어나지 않으리라 믿고 있던 전쟁이 발발했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국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특징이 적극 활용되어, 자신이 경험한 모든 부분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절제하고 비워두고 관객에게 상상의 틈을 열어주면서 세세한 감정을 완성시킨다. 전쟁에 대한 경험이 한 작품으로 만들어지고 관객들에게 그 감상을 전달할 만큼, 개인의 시간이 죽고 또 죽을 만큼 우크라이나 전쟁이 오랫동안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다.
<나를 그려줘>는 극영화로서, 주인공 ‘코요리’의 성장담을 코믹하게 담고 있으나 <나는 이르핀에서 죽었다>와 주인공이 지닌 ‘사실’을 그림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어느정도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선생님과 학생들을 캐릭터화하여 자신에게 일어나는 은근한 따돌림을 만화로 그려 승화시킨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코요리가 왜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 궁금해하지 않고 그만두기를 강요한다. 그럴수록 코요리는 그만둘 수 없다. 그런 주인공 앞에 학교 내 유명인사 ‘키리코’가 나타난다. 모든 이들에게 비난 받던 만화를 전적으로 응원한다며 칭찬의 말을 건넨다. 하지만 그 속내는 금방 드러난다. 자신을 그려달라고 요구한다. 자신의 완벽해보이는 가면을 벗기고 망가트려 달라고 한다. 코요리는 유일하게 호의적으로 다가와준 인물의 특징을 어떻게든 잡아보려고 하지만, 가득하다 못해 넘쳐나는 악의로 구성된 그림으로는 키리코를 그려낼 수 없다. 그를 향한 자신의 감정은 선망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갈등이 극에 달하는 순간, 코요리는 키리코를 그린다. 키리코는 코요리의 그림 속 진실된 자신과 마주한다. 한번도 미소를 잃은 적 없던 그가 포효한다. 만화적인 이미지로 주인공의 감정을 여과없이 표출해내는 장면에서 독특하고 독자적인 연출 방식이 눈에 띈다.
두 작품 모두 각 주인공만이 경험할 수 있는 성장을 다루고 있다. 주변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의 결정으로 삶을 이끌어갈 수 있는 능력,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그들의 성장담이 탁월하게 그려진다.
상영일정
BIKY 2025. 07. 08. (화) ~ 2025. 07. 19.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