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o2025-08-10 17:20:34
영화 <머티리얼리스트> 사랑이 사라져 가는 현실에서
조건과 배경을 따지는 더러운 어른과 순수한 사랑을 꿈꾸는 철부지 사이
순수한 사랑에 대한 낭만은 멸종해 버렸다. 사람들은 더는 사랑의 애정과 열정을 순수하게 바라보지 않는다. 2000년대 초 같은 로맨스 코미디 영화를 요즘 극장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사랑 노래도 자기 성장보다 연애를 우선시하는 세상 물정 모르는 낭만 서사가 되었다. 사랑에 대한 낭만은 한심한 환상 따위로 치부되는 현재가 도래해버리고 말았다.
나이를 먹으며 주변 사람들은 점차 앞으로 다가올 연애에 조건, 배경을 따지기 시작했다. ‘나 정도면 이 정도 조건의 사람을 만나고 싶어.’ ‘결혼하려면 이런 배경의 사람이면 좋겠어.’ 이렇게 사랑에 조건이 더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어른의 현실인 걸까? 순수한 사랑은 어린아이의 상상에 불과할까? 이런 고민이 한참이던 때, 셀린 송 감독이 영화 <머티리얼리스트 Materialists>를 들고 나타났다.
지난해,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Past Lives>(2024)를 선보임으로써 ‘사랑’으로부터 헤어 나올 수 없게 만들었던 셀린 송 감독이 이번에는 <머티리얼리스트>를 가지고 나타났다. 지난 영화는 과거의 아련히 반짝이던 사랑에 대한 향수를 갖게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를 과거로써 빛나는 채 남겨둘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번 영화는 오늘날 현대인이 마음속 깊이 품고 있던 사랑에 대한 욕망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 본 콘텐츠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머티리얼리스트>의 한국판 포스터와 주인공 루시 (C) 소니픽처스코리아
영화 <머티리얼리스트>는 뉴욕의 잘 나가는 중매 회사 커플매니저인 주인공 루시(다코타 존슨)가 동시에 나타난 두 남자 사이에서 갖게 되는 고민을 그린다. 한 남자는 연봉도 높고, 키도 크고 잘생긴 해리(페드로 파스칼), 다른 남자는 배우를 꿈꾸지만 현실은 출장 뷔페 아르바이트생인 전남친 존(크리스 에반스)이다. 평생 살면서 만날까 말까 하는 모두가 꿈꾸는 조건의 남자인 해리와 지독하게 사랑했지만 지독하게 어려운 형편에 헤어진 존 사이, 루시는 누구를 고르게 될까?
예고편을 보자면 밝은 로맨틱 코미디일 것만 같던 이 영화는 조금 더 무겁고 진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랑이 그렇듯 말이다. 그렇게 셀린 송 감독의 강점이 영화에서 배어난다. 환상적이다 싶다가도 치밀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주인공들의 대사와 흔들리는 카메라에 관객 스스로조차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스크린에 펼쳐진 영화 장면들과 함께 지난 사랑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다가올 사랑에 나도 몰래 품고 있던 불안감이 스며 나온다. 그렇게 이해하게 된다. 우리 모두 다른 경험을 갖고 다른 인생을 살지만, 같은 시대를 살며 같은 고민을 품고 살아감을.
영화의 세 주인공, 좌측부터 해리, 루시, 존 (C) 소니픽처스코리아
조건, 배경을 따지게 되는 건 어른들의 어쩔 수 없는 더러운 사정인 걸까? 커플매니저인 루시는 고객들이 원하는 조건과 배경에 따라 그에 부합하는 상대를 소개해준다.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조건을 제시한다. 누군가는 과한 조건을, 누군가는 최소한의 조건을 제시한다. 물론 살아가다 보면 본인에게 잘 맞는 사람, 잘 맞지 않는 사람을 조건과 배경으로 얼추 가려낼 수 있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루시가 외치듯이 사람은 원하는 대로 조합해서 만들 수 있는 주문 제작 상품이 아니다. 무언가 맞으면 무언가는 맞지 않을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람은 타인에 대한 연민과 이해, 포용을 품어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혹은 세상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자꾸만 더 많은 조건과 배경을 상대에게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순수한 사랑은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의 상상에 불과할까? 과거 디즈니 공주들의 사랑은 멍청하고 순진한 수동적 여성의 철없는 사랑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그들이 수동적이었을지는 몰라도 그들의 사랑 또한 마냥 환상에 불과했다고 치부해도 괜찮을까? 모든 짝사랑은 상대에 대한 어느 정도의 환상을 품고 진행된다. 모든 사랑은 콩깍지를 쓴 채로 시작된다. 그도 그럴 것이 완벽한 사람은 없는 만큼, 누군가의 모든 걸 알게 된다면 사랑은 시작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1990~2000년대 초의 로맨틱 코미디는 다소 비현실적이지만 낭만 가득한 사랑을 그렸다. 눈을 살포시 감은 채 미소를 띠며 고개를 가로젓게 되는 그런 사랑 말이다. 2025년에 그런 사랑을 꿈꾸는 어른은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인 걸까?
동굴에 살던 원시인들도 조건을 따지고 상대를 골랐을까? <머티리얼리스트>는 현대의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것과 상반되게 동굴 속 원시인들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원시인에게도 상대를 고르는 조건은 있었을 거다. 사냥을 잘하는 남자, 채집을 잘하는 여자가 좋은 조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들은 오롯이 조건으로만 상대를 골랐을까? 그들에게 사랑이란 무엇이었을까? 늑대는 자신의 반려에게 평생을 약속하고, 상대가 죽으면 남은 생을 홀로 살아간다고 한다. 짐승조차 사랑을 약속하고 이를 평생 품고 살아가는데,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조건과 배경만이 전부가 되어 버린 걸까. 혹은 조건 이전에 사랑을 택했던 이들은 이미 멸종해 버린 걸까?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사랑을 느낄까? (C) 소니픽처스코리아
어쩌면 현대의 어른들이 내세우는 조건과 배경은 그렇게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조건일지도 모른다. 마음 아프게도 사랑을 꿈꾸다 보면 상상보다도 더한 현실이 뛰어들고는 한다. 경제적 여건, 사회적 조건이라는 벽에 부딪히기도 하고, 사랑인 줄 알았던 것이 우리를 해치기도 한다. 그렇게 과거에 자신을 해쳤던, 사랑으로 착각했던 무언가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이 보고 자랐던 아픈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어른들은 조건과 배경을 방패처럼 앞세울 수밖에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모든 조건에 앞서 ‘사랑’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어야 하지 않을까? 루시는 물질주의자(materialist) 답게 ‘돈이 최고’라고 외치고 다녔지만, 결국 사랑이 전제되지 않는 관계는 무의미함을 깨닫는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누군가와 함께 마음을 나누고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러니 사랑이 부재한다면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배불리 밥 먹고 잘 수 있어도 어딘가 허전함을 느끼고, 어려움이 들이닥친 상황에서 그 복잡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게 된다. 그러니 연애와 결혼에서 조건을 따지는 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면, 사랑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C) 소니픽처스코리아
“왜 사람들은 결혼하고 싶어 할까?”
“왜냐면 외롭거든. 그리고 희망적인 걸지도.”
결혼은 현실이라지만, 사랑은 낭만이지 않은가. 낭만이 우리를 밥 먹여주지는 않겠지만, 인생은 결국 현실이면서도 낭만이어야 하지 않은가. 낭만이 빠진 인생을 무슨 재미로 살 수 있을까. 그러니 오늘도 물질주의 현대를 살아가는 낭만주의자로서 상대의 주름진 얼굴, 하얘지는 머리를 보고파지는 사랑을 꿈꾼다.
- 1
- 200
- 13.1K
- 123
- 10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