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노라마 2021-11-10 15:13:30
구교환의 무명 배우생활을 그대로 투영한 영화 : 왜 독립감독은 DVD를 주지 않는가?
영화리뷰에 앞서 스포를 주의해주세요!
영화를 만들다 변해버린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무명배우는 기환은 자신이 출연한 독립영화들의 CD를 구하러 다니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렇게 많은 영화했던 사람들을 만난다. 그는 아마 예전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 여정을 시작했지 싶다. 하지만 그에게 세상은 냉혹했다. 그가 만난 독립감독들은 모두 변해있었다. 밤낮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는 자신에게 있어 숨이라고 했던 선배는 그에게 치약을 파느라 숨도 쉬지 못하고 홍보성의 말들을 늘어놓았고, 영화에 열정을 가지고 팀워크를 자랑하던 삼형제 감독은 어느새 한명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자 "다 각자의 같잖은 사연이 있었겠지 형은 진짜 사연이 있잖아" 라며 친구는 위로의 마디를 던졌다. 그렇게 다시 CD를 찾아 나서지만 각자의 사연으로 이미 모두 변해있는 독립감독들. 아직 영화판에 남아있는 기환이 보상받은 것은 각자의 추억과 노력이 담긴 CD들 뿐이었다. CD가방을 지하철에 잠시 잊어버린 기환. 다시 지하철에 돌아가지만 가방은 이미 쓰레기로 가득차 있었다. 아무도 그의 노력을 인정해 주지 않았고, 그는 그저 무명의 배우일 뿐인 것이었다.
느낀 점 : 정말 재미있지만 웃을 수 없는 작품. '웃프다'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영화같다. 학생으로써 나의 진로를 고민하게 하는 영화여서 좋았고, 다큰 어른의 입장으로 볼 때도 자신의 추억을 되새길 수 있을 것 같은 영화라서 잘 만들었다고 느꼈다. 또한 거의 완전히 옆으로 기울여 찍은 샷이나, 좌우대칭을 맞게 한 샷 등을 이용해서 재미있는 볼거리를 주었고, 분위기를 너무 슬프지도, 너무 익사이팅 하지도 않게 적당한 무게감을 갖추었다. 구교환 감독만의 톤앤매너도 눈에 띄었다. 삭막한 세상에서 홀로 희망을 가지는 듯한 노란색CD가방이나, 과거와 현재를 섞어 보여주는 연출기법이 눈에 띄어 좋았다. 또한 이 영화는 누가봐도 배우 구교환이 자신의 삶을 투영해서 보여주는 배우 주인공의 영화라고 느꼈는데 그만큼 진정성 있는 이야기, 자신이 잘 아는 이야기를 만들어서 영화가 깊은 감성을 가지게 할 수 있었다고 보였다. 지금은 인기 드라마에 출연하며 유명세를 (과거에 비해서) 얻은 그는 이 영화를 어떻게 회상하고 있을 지 궁금했다. 제목또한 알맞았다. 왜 독립감독은 DVD를 주지 않을까? 생각하게 하며 여운을 남긴다.
파노라마_에디터 OREHFILL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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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이유가 있진 않지만 일단 다 준비했어
<범죄도시 4>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괴물 형사 마석도(마동석)다. 수사 중인 마석도. 마약 유통업자를 일망타진하기 위해 팀과 노력하고 있다. 딱 봐도 이상해보이는 남자를 쫓는 마석도. 열심히 달리니 도착한 곳은 어떤 건물의 옥상이다. 문을 열고 유통업자들의 본거지에 도착한다. 문이 철창으로 되어 있었다. 철창을 부수는 마석도. 악한들을 때려눕히고 나서 범죄자들이 쓰던 휴대전화를 관찰했다. 그 휴대전화에는 범죄자들이 마약을 유통하는 방식에 대한 힌트가 있었다. 어플을 개발해서 마약을 판매하던 업자들을 잡고 싶다는 목표가 생긴다. 동시에 마석도에겐 과제가 있었다. 어느 날 발견된 시체가 있는데 그 피해자의 어머니와 했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석도의 눈빛이 반짝인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마석도가 나쁜 놈들을 싹 쓸어버린다!
가장 처음으로 써볼 수 있는 건 이 영화의 핵심이다. 글쓴이가 생각했을 때 이 영화는 경찰에게 바치는 러브레터다. 고된 노고로 치안에 힘쓰는 경찰들에게 ‘감사합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 아이디어가 좀 생뚱맞게 보일 수 있다. 아니 ‘범죄도시’ 시리즈는 그냥 마동석이 나쁜 놈 때려잡는 게 전부 아니었어? 물론 맞다. 하지만 이 시리즈의 가장 첫 번째 영화 <범죄도시> 1편에서 엔딩 크레디트가 다 끝나고 나서 올라오는 자막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글쓴이의 기억 상으로는 ‘모든 한국 경찰들을 응원합니다’였다. 실제로 <범죄도시> 1편은 경찰의 인간적인 모습을 강조하기도 했는데 전일만(최귀화)나 강홍석(하준)의 서사를 이야기 전면에 배치시켜서 캐릭터 무비로서 장점을 추가했다. 경찰이 우리 일상에서 푸근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본편 <범죄도시 4>는 이 1편의 아이디어를 그대로 가져오려고 한 것처럼 보인다. 이 점에서 이 영화의 기본, 그러니까 정말 보여주고 싶었던 부분이 시리즈 1편에서 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 영화는 기존 시리즈의 계승과 그 변주를 통한 쾌감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글쓴이는 이 부분, 그러니까 ‘계승과 변주’에 대해 써볼 것이다.
우선 가장 첫 번째로 써볼 것. 이 영화의 사실상 진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는 장이수(박지환)의 존재는 영화의 가장 기본적인 기획의도와 닿아있는 인물이다. 코미디라는 장르적인 특색과 영화의 핵심을 보여주는 과제를 수행하는 캐릭터가 장이수다. 그 과제가 뭘까? 바로 관객의 관점에서 경찰의 노고를 직접 확인하는 것이다. 아예 낯선 캐릭터들이 많았던 <범죄도시 3>의 쿠키영상에 등장한 장이수. 이 장이수는 1편과 2편에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4편에 다시 나타났다. 이 시리즈 중 4편 중 3편에 등장한 캐릭터는 마석도 제외 장이수가 유일하다. 이 특징은 곧 장이수가 우리들에게 친근한 캐릭터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친근함을 바탕으로 영화는 인물의 시점에서 여러 장면들을 비춘다. 이 연출의 의도는 중후반부에서 더 두드러진다. 왜? 마석도가 장이수를 데려온 것 치고 둘은 따로 논다. 오롯이 장이수만을 보여줘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의 근거는 장이수가 플롯에서 차지하는 비중에서도 찾을 수 있다. 글쓴이는 장이수가 이야기 내적으로 이 역할에 100% 걸맞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장이수의 설정이 본작에서 효과적으로 활용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원래 경찰이 꿈'이나 '도박업체를 운영한 적 있다'라는 점을 4편이 되고 나서야 부랴부랴 제시한다. 심지어 이 인물의 행보를 보면 마석도가 데려온 것 치고 주인공과 따로 논다. 하지만 이 장이수는 명예경찰이 되어 악당들을 소통하는데 기여하는 행보를 보여준다. 마석도와의 캐미보다 이 검거 과정을 감독이 선택한 것이다. 이 선택의 화룡점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이수의 대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찰들 목숨 내놓고 사네!”다. 이 대사는 일반인이 경찰이 되어 겪은 경찰들의 노고를 관객에게 떠먹여 준다는 점에서 이 인물의 기획의도를 드러내는 문장이었다.
이 장이수가 등장한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는 캐릭터가 있다. 변주를 둔 캐릭터에 속하는데, 바로 서울지방경찰청(권일융)의 등장이다. 이 캐릭터가 등장한 배경이 아주 흥미롭다. 마석도와 장태수(이범수)가 둘의 상사(정인기)를 만나 설득한다. 이번엔 1,2,3편과는 다르게 실패한다. 일단 이 상황 자체가 변주인데 그것이 한번 더 일어난다. 우리가 아는 실제 경찰이 영화 안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상황 자체도(권일융 교수의 발연기 때문이 아니라;) 변주지만 이 인물의 입에 나오는 대사도 역시 마찬가지다. “경찰이 범인을 잡는 시기가 예상보다 늦을 수 있다”는 말과 “경찰은 이런 맛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경찰청장. 글쓴이가 주목하고 싶은 건 이 경찰청장의 캐스팅이다. 그냥 모르는 아저씨가 짠하고 나타나서 이런 대사를 해도 이야기의 흐름에 큰 영향이 없다. 하지만 이 영화가 굳이 권일융이라는 프로파일러를 캐스팅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영화 밖에서 찾을 수 있다. 권일융 프로파일러는 대한민국 1호 프로파일러다. 이 인물이 대중매체에 자주 노출됐기 때문에 이 사람의 권위를 우리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이런 인물이 굳이 영화에 들어와 경찰청장을 연기한다. 그럼 당연히 경찰로서의 권위가 영화 안에서 맥락으로 사용됐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현실과 영화 밖을 흐려 관객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방식은 이 장면을 어떻게 구성하고 있느냐에도 근거가 있다. 마석도 역할을 맡은 마동석 배우는 현재 명예경찰 경위다. ‘범죄도시’ 시리즈의 흥행에 힘입어 경찰청에서 명예직을 수여한 것이다. 이 마동석 배우가 ‘범죄도시’ 시리즈를 찍을 때 마석도를 연기하지 않나? 그럼 명예경찰인 배우가 경찰을 연기한다는 삼중 구조의 상황이 연출된다. 글쓴이는 이것을 경찰과 배우의 중간단계라고 생각한다. 이 마동석 배우를 기준으로 실제 경찰인 사람(권일융 교수)과 직업이 배우인 사람(정인기 배우)이 한 컷에 있다. 그리고 이 인물들이 ‘경찰이 지켜야 할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연출은 곧 “영화라는 틀(배우)을 넘어 경찰 베테랑이 영화와 현실 한가운데에 있는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문단을 종합하면 ‘경찰 베테랑의 입을 통해 영화와 현실 한가운데에 있는 관객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윗문단에 쓴 장이수의 활용법과 겹쳐지는 점이 있다. 인물의 활용이 현실의 관객과 연결하는 매개체가 된다는 점이다.
다음은 이 영화의 어떻게? 에 대한 부분이다. 이것에 있어 가장 먼저 이야기할 수 있는 캐릭터는 한지수(이주빈)다. 이 ‘범죄도시’ 시리즈는 기본적으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기 어렵다. 이 시리즈는 마석도의 핵펀치로 나쁜 놈들을 때려잡는 것이 가장 재미있는 부분 아닌가? 하지만 이 장점은 반대측면에서 단점으로 돌아온다. 여성 캐릭터가 나오기 어렵다는 점이다. 아마 마석도와 여성 캐릭터가 맞대결을 펼치기엔 블랙 위도우정도는 돼야 싸움이 가능하다. 시리즈의 기획의도가 이야기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다양성을 방해하는 것이다. 이 특징은 치명적이라 영화가 다른 노선을 취하기가 어렵다는 단점과도 이어진다. 성별이 영화 밖의 맥락에서 균형을 이룬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자그마한 요소 하나로 이야기의 결은 아예 달라질 수 있다. 그럼 시리즈 중 하나의 배경에 여성 경찰이 등장할만한 일을 깔면 되지 않을까? 글쓴이는 이 영화가 이 과제에 대한 답으로 사이버 범죄를 선택했다고 본다. 사이버 범죄라는 것이 물리적으로 내지는 면대면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인터넷상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물리력이 그렇게까지 필요하지 않다. 그럼 한지수가 등장하는 것이 필연적이다. 한지수는 강남수(김신비)라는 부사수와 함께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로서 이야기를 이끄는 원동력 중 하나가 된다. 이 필연에 근거한 캐릭터 한지수는 주체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초반부에 마석도가 한지수에게 “방검복 입혀!”라고 말하자 그녀가 이 제안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장면을 필두로 인물이 마냥 끌려가지는 않는 연출인 것과 동시에 직접적인 액션은 없이 인물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이 영화의 악당들에 대한 부분도 영리하게 변화구를 둔 지점이 있다. 여러분은 권사장(현봉식) 캐릭터를 어떻게 봤는가? 글쓴이는 이 영화가 기존의 시리즈와 다르게 1대 다수의 구도를 만들려고 했다고 생각하는데 그 선택의 일환이 권사장이라고 느꼈다. 이 영화가 기존에 유지했던 1대 1 혹은 1대 2의 구도라는 클리셰에서 벗어나 1대 3의 그림을 만들기 위해 권 사장을 등장시킨 것이다. 이것의 첫 번째 근거로 물리적 비중을 이야기할 수 있다. 권사장이 사전에 광고된 바와는 다르게 물리적 비중도 크고 장동철(이동휘) 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 영화가 중간에 광고된 것 그 자체라면 장동철이 판을 이끄는 흑막으로서 극을 이끌 것 같지만 백창기(김무열)의 곁에서 사건을 지휘하는 일은 권사장이 맡았다. 이 단적인 사실만 놓고 봐도 이 영화의 빌런은 2명이 아니라 3명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영화 안에서 이 빌런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도 이 영화를 설명할 때 중요한 부분이다. 전작 <범죄도시 3>을 생각해 보자. 리키(아오이 무네타카)와 주성철(이준혁)은 시시건건 대립한다. 그러다가 플롯이 하나로 정돈되며 마석도와 리키의 대결구도가 만들어지는데 길다면 길다고 볼 수 있는 액션 신을 통해 ‘외국인’과 ‘검객’ 빌런의 개성을 나름대로 살리려고 노력했다. 권사장 역시 본작 <범죄도시 4>에서 3편에서 리키가 받은 대우를 오마주 하는 듯한 장면이 있다. 바로 마석도와의 대결 장면이 있는 것이다. 이 대결이 주먹 세 방에서 끝나서 그렇지 이 영화의 핵심인 ‘마석도와의 맞대결’이 이뤄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빌런으로 둔 변화구는 후반부 마석도와 백창기의 맞대결에서도 볼 수 있는 변주다. 백창기의 옆에 조력자로 나오는 캐릭터가 마석도와의 대결에 참여한다는 점은 이 영화가 빌런의 물리적인 수를 통해서도 변화를 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윗문단에 적은 걸 보충하고 싶다. 이 영화는 현재 경찰들의 헌신을 보여주기 위해 이 영화가 변주하고 또 계승한 것이 있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가장 첫 번째 계승과 변주는 하이라이트 액션이다. 원래 범죄도시 시리즈의 하이라이트 액션은 합을 길게 주고받는다. <범죄도시 3>에서 주성철과 마석도는 넓은 경찰청 안의 방과 방을 움직이며 온갖 구조물을 부수고 다닌다. 본작에서도 비행기 안에서 공간을 바꾸는 액션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글쓴이는 마석도가 1,2,3편처럼 종합기술로 백창기를 제압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주먹을 몇 대 더 때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왜? 연속기로 백창기를 두들겨 패면 그 전의 상황을 보여줄 수 없다. 그전 상황이 뭐게? 바로 백창기가 뛰어난 무력으로 마석도의 몸에 칼을 꽂는 장면이다. 또 2대 1의 구도를 맷집으로 버티는 상황을 보여줄 수 없을 것이다. 또 여기에 대사 한 줄을 더 추가한다. "외롭지"라는 대사다. 액션 신의 두 상황과 대사 한 줄을 덧붙이면 경찰 마석도가 직업인으로서 겪는 애환을 보여주는 셈이다. 혼자라서 알아주지도 않지만 위험한 일을 감수하는 경찰로서의 삶을 단면으로 잘라 보여준 것이다. 이 단면을 보고 느끼는 것. 혹시 이 전 장면에 마석도의 헌신과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은 없을까? 조성재와 관련한 감정선이 영화에서 중요하기는 하다. 인물의 동기가 되니까. 하지만 전작처럼 그냥 나쁜 놈이니까 두들겨 패고 잡아넣어도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이 영화에선 다른 선택지를 골랐다. 시민의 안전을 위해 부상당하고 노력하는 마석도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납작하다 못해 평평한 마석도라는 캐릭터에 입체성에 부여해서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한 선택이 됐다.
물론 영화는 이 '경찰의 헌신'이라는 소재를 마석도에만 국한 짓지는 않았다. 김만재(김민재)가 백창기와 대결을 펼치는 장면, 양종수(이지훈)의 팀이 필리핀에서 악당들을 체포하는 장면은 경찰들이 직업인으로서 '열일'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이 영화의 엔딩도 이 직업인으로서의 경찰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마석도와 한태수가 팀을 이끌고 조성재 모녀를 추모한다. 그리고 그다음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이 교통경찰이고, 그 인물은 장이수에게 "Police 지 Folice가 아니다!"라고 일갈한다. 영화의 마무리를 경찰로 끝내고 그 마저도 영단어의 스펠링을 보여주고 끝낸다는 건 분명히 이 장면을 강세를 두고 말하고 싶다는 의미겠지? 심지어 오프닝에서 경찰이 습격당해 죽는다는 걸 생각해 보면 통일성까지 생긴다. 영화의 처음과 끝의 주인공이 경찰이라는 점, 그리고 그 자체를 강조했다는 것이 이 <범죄도시 4>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역설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 따라오는 수많은 단점들은 이 선택에 따라 딸려오는 것들이었다. 글쓴이는 장이수의 등장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장점으로 언급한 부분은 반대로 돌아와 이 영화의 단점이 되기도 한다. 그 씬, 그러니까 필리핀 경찰이 "넌 왜 머리가 길어?"라고 말하는 장면이 굳이 필요했을까? 더 나아가 FDA를 보고 장이수는 왜 인터넷 검색을 하지 않았던 걸까? "마 형사"라고 대놓고 언급하는 장면을 겪고 나서도 마석도는 왜 장이수와 협업하지? 갑자기 틈입하는 '원래 꿈이 경찰'이라는 설정이 굳이 필요했을까? 이 설정이 인물의 동기에 있어 중요하기는 하지만 마석도가 다른 말로 설득했다 하더라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권일융 프로파일러가 경찰청장으로 나온 장면에서 헛웃음이 나오지 않은 관객을 세는 건 굉장히 어려울 것 같다. 현실적인 문제들을 고려해서 그 장면은 그게 최선이었겠지만 어떤 장면은 특정 영화의 전체적인 퀄리티를 헤치기도 한다.
사이버 범죄라는 선택지를 골라 여성 캐릭터를 등장시킨 것도 약간 불필요하게 느껴지는 장면이 있었다. 글쓴이가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하며 본 장면은 장이수와 합심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한지수는 이주빈 배우의 빼어난 미모를 바탕으로 수사를 진행한다. 여기서 하나 더 덧붙인다. 한지수가 액션을 보여줄 것 같았지만 마석도가 "뻥이야"라면서 불필요한 대사를 친다. 이 두 장면은 여성 캐릭터를 고전적으로 사용했다는 점/한지수가 액션을 보여줄 수도 있지 않나라는 점에서 연출 의도가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전자가 꼭 필요한 장면이었다 하더라도 한지수가 주체적인 모습이 없으니 여성 캐릭터가 그냥 존재만 하고 인상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하다못해 이 캐릭터가 사이버 범죄 전문가라는 설정이 빛을 발하지도 않는다. 한지수가 뭔가를 하는 건 그 하는 것 자체만 보여주지 그 디테일은 장이수가 채우니 내실이 부족한 것이다. 그리고 이 단점의 표면, 그러니까 '사이버 범죄'라는 기본적인 배경은 영화의 핵심과는 멀어 보인다. 물리적인 범죄가 아니다 보니 치밀한 수싸움을 기대하는 관객이 많았을 것 같다. 하지만 문제 해결 방식은 우리가 아는 범죄도시 시리즈 그 맛이다. 이 무의미한 설정은 본 작의 코미디 요소와도 이어지는 단점인데 글쓴이는 '클라우드 동기화'같은 이상한 개그를 왜 들어야 하나 싶었다.
빌런으로 1 vs 다수의 구도를 설정한 것도 깊게 파면 단점이 많다. 가령 김무열 배우가 맡은 백창기만 봐도 그렇다. 김무열 배우가 굉장히 뛰어난 배우라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백창기 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도 잘 안다. 특히 하이라이트 신에서 허허허허허 웃는 장면은 굉장했다. 하지만 이 연기력에 비해 물리적인 비중이 부족했다. 단지 돈 받고 말고 가 인물의 동기다. 1편의 장첸, 2편의 강해상과는 다른 행보다. 1편의 장첸은 동기를 예측할 수 없어서 무서운 놈이었고 2편의 강해상은 동기 같은 게 없어서 악함이 드러나는 빌런이었다. 그런데 본 작의 백창기는 그냥 사람 죽이고 건물 부수는 게 전부다. 심지어 중간에 굉장히 의아한 선택을 보여준다. 청소부 아주머니를 공격하는 장면에서 글쓴이는 당연히 아주머니와 김만재를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서 영화는 대중성을 선택하며 두 사람이 죽지 않는 선택지를 고른다. 이 사건이 빌런의 악함을 대놓고 드러낸다고 볼 수 있을까? 여기서 두 사람을 공격해야 후반부에 카타르시스를 더하는 것 아닐까? 단지 허허허허 웃는 게 빌런의 악함을 드러내는 방식인 걸까? 왜 이런 연출이 들어갈까 생각해 봤다. 왜?를 거세하고 그냥 현상 그 자체만 담기 위해 이런 각본이 들어간 게 아닐까라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빌런으로 권사장을 등장시키는 선택지엔 사실 큰 위험부담이 있다. 장동철 캐릭터가 평면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 인물이 초반에 이야기를 이끌고 퇴장한 다음 후반부에 권사장이 이끄는 플롯에 쾌감이 생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것을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장동철의 역할을 있는 최소화 시킨다. 이 최소화는 이야기의 흐름에 치명적으로 작용하기도 하는데, 이 장동철이 백창기가 사람을 언제든 죽여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대비를 부실하게 한다는 점이나 권사장과 백창기의 내통 가능성을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의아했다.
그리고 글쓴이가 생각하는 영화의 가장 큰 단점은 이야기의 얄팍함이다. 이 얄팍함이 단지 시리즈의 전통만 계승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야기의 핵심인 '경찰의 헌신'을 보여주는 방식의 문제다. 이 영화의 흐름은 전부 다 말이 된다. '왜?'를 철저하게 설명하고 넘어가는 플롯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영화의 기획의도가 '실제의 경찰'에게 바친다는 점에서 두 특성은 상호 충돌한다. 대표적으로 경찰서에 구금해 있는 범죄자를 수많은 배달원에 가려 죽게 놔둔다는 설정은 명백한 무리수다. 이것만 있을까? 갑자기 업체를 순식간에 후다닥 만들어진다는 설정, 특수경찰이라는 소재까지 영화는 생경한 것들로 가득 차 내내 삐끄덕거린다. 이런 설정들이 말이 아예 안되게 연출되는 것은 아니라 그냥 넘어간다 치더라도 이건 그냥 단지 이야기만의 문제지 현실로 끌고 오기엔 무리가 있다. 이런 지엽적인 이야기 흐름은 영화가 전체적으로 삐걱거린다는 점에 있어 치명적이다. 영화가 지나치게 대중성만 고려했다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의 메시지의 측면을 쭉 썼지만 사실 이 영화의 액션은 굉장히 훌륭한 편이다. 글쓴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마석도의 액션이 아니라 백창기의 것이다. 이야기 중반에 건물 하나를 철거하며 보여주는 나이프 파이팅, 김만재와의 대결 같은 것들은 <아저씨>의 차태식(원빈)이 연상되는 부분이었다. 이 액션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는 몸값을 톡톡하게 해낸다. 기술적인 부분에 있어 사운드와 촬영을 잡은 영화의 내실 중 하나인 것이다. 하지만 이 액션이 아닌 나머지 부분에서 영화는 기술적인 성취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중 최고는 편집이다. 이 편집은 영화의 두 번째 단점으로서 허명행 감독의 경험부족을 여실히 드러냈다. 가령 "뻥이야"같은 장면 굳이 들어가야 할 이유가 있을까? 아니면 길게 뺄 필요가 있을까? 어디 장면에서 어느 게 들어가야 할지를 고민하지 못한 채로 그냥 무작정 이야기만 전개하려니까 완급조절에 실패한 것 아닐까?
글쓴이는 이 <범죄도시 4>가 이번에도 천만 관객을 넘길거라 생각한다. 단점을 적긴 했지만 나의 총평은 '재밌었다'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가 시리즈의 경고음을 울리는 단적인 예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시리즈의 매력을 재가공하는 것이 아닌 표면적인 것만 좇는, 지엽적인 영화의 태도가 아쉬움처럼 느껴진다. 글쓴이는 이 장점에도 불구하고 상기한 단점 때문에 5편에서 더 본질적인 변화를 두지 않는다면 지겹다고 느낄 거라고 생각했다. 시리즈의 최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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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이야기의 공명, 이야기로 묻고 삶으로 답하다
소통의 부재는 영혼의 부재
우리 집에는 네 명의 인간과 두 마리의 개가 함께 살고 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같은 종의 동물이라도 각각 전혀 다른 소통방식을 구사한다. 이를테면, ‘네가 먹고 있는 것을 줘.’라고 표현하고 싶을 때도 “달라”라고 부탁하는 인간이 있고, 손으로 뺏어 먹는 인간이 있다. 개는 엎드려서 침을 흘리거나 양손(앞발)을 사람에게 올리기도 한다. 각각의 종은 서로 같은 언어 체계를 공유하지만, 같은 소통방식을 구사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손이 먼저 나가는 인간은 앞발을 올리는 개와 가까운 소통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개도 인간도 종과 언어를 막론하고 저마다 소통하는 방식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의 진정한 언어는 침묵일 수도 있고, 육체적 관계일 수도 있고, 운전 방식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한국어와 같은 언어 체계는 진정한 소통방식을 번역한 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언어를 뛰어넘어 소통하기 위해서 우리는 각자의 진정한 소통방식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히로시마 연극제의 상주 예술가에게 배정되는 운전사 와타리 미사키(미우라 토코)는 말수가 적지만 차와 상대를 세심하게 배려한다. 그가 밟는 액셀과 브레이크 역시 하나의 소통 수단이다. 미사키는 이를 통해 차 안의 공기와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미사키의 운전은 중력도, 운전하는 사람도 잊게 할 정도로 부드럽다. 이 무저항의 운전은 미사키의 고향 가미주니타키무라에 내리는 눈송이처럼 고요하다. 자신의 존재를 지우며 상대를 편안하게 해 준다. 미사키가 배워야만 했던 소통방식은 그런 것이었다.
배우이자 연극 연출가인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는 자신의 진짜 마음을 숨기는 방식으로 소통한다. 그의 언어는 침묵 또는 회피라고 할 수 있다. 가후쿠와 드라마 각본가 오토(키리시마 레이카)는 이상적인 부부처럼 보인다. 블라디보스톡 연극제의 항공권 예약이 미뤄져 집으로 돌아간 가후쿠는 아내 오토의 외도를 목격하고 아무 말도 없이 뒤돌아 나간다. 가후쿠가 외면한 진실은 아내의 외도만이 아니다. 그들의 결혼 관계는 사실상 끝났고, 두 사람은 함께할 수 없다는 진실을 그는 끝끝내 마주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토의 죽음으로 가후쿠는 자신의 마음과 진실이 마주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단 한 번의 식사 장면이 등장한다. 히로시마 연극제 담당자 윤수(진대연)가 마련한 저녁 식사 자리에는 유나(박유림), 가후쿠, 미사키 그리고 래브라도 리트리버 한 마리가 함께한다. 이 식사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대부분 번역된 말이다. 전혀 다른 언어들이 오가고 누군가의 입을 빌려 다시 변환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지만, 영화의 어떤 장면보다도 따뜻하고, 안정적이며 소통과 공감이 느껴진다. 이 장면은 언어를 뛰어넘는 따뜻한 소통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우리가 소통의 부재를 겪는 것은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영혼이라 부르는 그것이 언어 안에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언어와 텍스트의 관계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언어와 텍스트는 닭과 달걀 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 가후쿠 부부는 4살 딸을 폐렴으로 잃은 후로 관계를 통해 이야기를 잉태하기 시작한다. 오토의 음성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가후쿠의 번역을 거쳐 오토에게 전해진다. 다시 오토에게 돌아온 이야기의 잔상들은 각본, 즉 텍스트로 태어날 준비를 하게 된다. 이렇게 탄생한 이야기는 단순히 캐릭터와 플롯이 아니라 무의식과 욕망의 집합체와 같다. 오토의 음성과 그것을 양분 삼아 만들어진 이야기는 오토의 창조물이지만, 독립된 생명체처럼 타인에게 다른 모습으로 뿌리내리게 된다. 가후쿠에게 오토의 이야기는 진실이 드러나기 직전의 두려움과 불안의 기척을 품은 채 마무리되었지만, 다카츠키(오카다 마사키)에게 그 이야기는 불길한 고요함으로 가득 찬 세상의 모습이다.
각본으로 만들어진 텍스트는 결국 발화함으로써 완성된다. 그렇기에 오토는 자신의 이야기와 무의식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완성해줄 누군가를 찾았고, 그가 바로 다카츠키였다. 가후쿠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며 감동하고, 오토의 열렬한 팬인 다카츠키는 ‘바냐’라는 인물에는 쉽게 이입하지 못한다. 다카츠키는 체호프의 ‘바냐’보다 오토의 이야기 속 칠성장어의 전생을 가진 소녀를 닮은 인물이다. 그는 체호프의 성실하며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세계보다 무의미한 기다림과 충동과 욕망의 세계에 끌린다. 불가해하고 불길한 무언가로 가득한 오토의 텍스트야말로 다카츠키의 삶을 담을 텍스트다. 그는 오토와 같은 언어, 즉 같은 소통 방식을 공유하고 있는 인물이다. 다카츠키는 오토의 텍스트를 완성했으나 바냐가 되어 체호프의 텍스트를 완성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이와 반대로 이성적이며 통제적인 가후쿠는 오토의 텍스트를 똑바로 마주할 수 없다. 가후쿠가 오토에게서 듣는 것은 오직 이야기뿐이다. 자기 안의 진실을 마주하지 못한 가후쿠는 이야기 안의 오토를 외면한다. 가후쿠가 오토의 목소리로 듣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녹음된 ‘바냐 아저씨’의 대본이다. “대사를 입에 올리면 나 자신이 끌려 나와” 오토의 음성으로 울리는 체호프의 텍스트는 가후쿠에게 계속해서 진실보다 깊은 것을 묻는다. 가후쿠는 체호프와 오토가 자신에게 걸어오는 말을 애써 피하고 있다.
오토의 죽음으로부터 2년이 지난 후 히로시마 연극제에 초대된 가후쿠는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의 연출을 맡는다. 가후쿠의 연극은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 그리고 한국 수어까지 서로 다른 언어가 한데 어우러진다. 이 특별한 공연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대본 리딩이다. 어떤 감정도 없이 아주 천천히 대본을 읽는 것이다. 배우들은 불완전한 언어를 뛰어넘어 소통하는 동시에 온몸으로 체호프의 텍스트를 체득해야 한다. 언뜻 이해하기 어렵고 지루한 이 과정을 가장 먼저 이해한 것은 수어를 사용하는 유나다. 자신의 언어가 타인에게 닿지 않는 것이 평범한 일인 그에게 보고 느끼며 공감함으로써 기능하는 연기는 몸에 잘 맞는 옷과 같다. “체호프의 글이 내 안에 들어와 움직이지 않던 몸을 움직이게 해 줘요” 체호프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유나와 소통하고 있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하루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졌지만, 영화의 영혼은 체호프의 텍스트에 담겨있는 것처럼 보인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는 ‘바냐’가 한때 누이동생의 남편이자 존경하는 학자였던 교수 세레브랴코프를 원망하고, 교수의 두 번째 부인 옐레나를 사모하게 되며 겪는 갈등을 다룬다. 체호프는 우리가 갈등과 절망, 적의와 증오를 넘어서 계속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의 고난과 슬픔보다 미래의 희망과 기쁨을 꿈꾼다. 체호프의 텍스트는 하마구치 류스케가 선택한 많은 인생을 담을 수 있는 넓은 그릇과 같다.
대본 리딩이 주를 이루는 연극 연습과 오토의 목소리로 녹음된 ‘바냐 아저씨’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붉은색 사브 900을 오가며 영화는 체호프의 텍스트를 반복한다. 체호프의 텍스트는 대사뿐만 아니라 이야기로도 반복된다. 누이동생을 잃고, 존경하던 교수에게 실망을 거듭하며 바냐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인다. 바냐가 교수를 위해 바쳤던 청춘은 이미 흘러갔고 옐레나에 대한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소냐의 사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든 것은 여전히 엉망이지만 바냐와 소냐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일을 계속한다. 딸과 아내를 잃은 상처를 마주하게 되는 가후쿠 뿐만 아니라 아이를 잃은 상실을 견뎌내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된 유나와 애정과 증오의 대상이었던 엄마를 잃은 미사키의 삶 역시 체호프 텍스트의 또 다른 변주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언어의 불완전함을 뛰어넘어 공명을 시도하는 이야기의 작동방식을 보여주는 영화다. 이는 일견 언어의 무용함을 말하는 듯 하나 각자의 언어와 이로 만들어진 텍스트는 호응하는 삶과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가깝다. 감독은 언어의 가면을 쓴 이야기를 단지 텍스트가 아닌 독립된 생명체처럼 마주 보게 한다. 그렇게 언어와 텍스트는 계속해서 삶과 사람에게 호응을 시도하고 영화는 그 순간을 담아낸다.
삶과 사람을 담는 그릇
가후쿠와 미사키가 지나온 터널처럼 우리가 지나온 궤적을 이해하기 위한 이야기가 모두에게 필요하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이처럼 불완전한 언어와 불가해한 텍스트에 사람과 삶을 담음으로써 이야기에 힘을 불어넣는다. 언어와 텍스트가 사람과 삶을 만나는 순간 발생하는 에너지는 영화 안팎으로 퍼져나가 관객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다카츠키와 가후쿠가 차의 뒷좌석에서 대화를 나누고 헤어진 후 가후쿠는 처음으로 미사키의 옆에 앉는다. 차 안에서 흡연을 피하던 가후쿠는 미사키에게도 담배를 권한다. 차 위를 향해 뻗은 두 사람의 손에서 담배 연기는 망자를 위한 향처럼 피어오른다. “넌 엄마를 죽였고, 난 아내를 죽였어” 오래된 죽음을 놓지 못하고 있던 두 사람은 도망치고 미뤄왔던 애도를 시작한다. 카메라는 나란히 피어오르는 연기에서 멀어져 익스트림 롱숏으로 이리저리 얽혀 있는 도로와 어찌 됐든 앞으로 나아가는 차들을 바라본다. 그 속에서 점처럼 작아진 사브 900도 앞으로 나아갈 거라고 믿으면서.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가도록 해요.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는 거예요. 운명이 가져다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마음의 평화가 없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이 든 후에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이 오면 얌전히 죽는 거예요. 그리고 저세상에 가서 이야기해요. 우린 고통받았다고, 울었다고, 괴로웠다고요.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어여삐 여기시겠지요. 그러면 우린 기쁨에 넘쳐서 미소를 지으며, 지금 우리의 불행을 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우린 평온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소냐 역의 유나가 바냐 역의 가후쿠를 감싸 안고 수어로 전하는 연극의 마지막 장면은 연극을 보는 듯한 롱숏으로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 이를 응시하는 미사키의 곧은 정면 얼굴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체호프의 텍스트에 대답한다. 체호프의 텍스트와 유나의 언어 그리고 미사키의 삶이 만난 이 장면 하나로 <드라이브 마이 카>는 그 역할을 다한 것이다. 감독이 전작 <해피 아워>(2015)에서 사람들이 서로에게 무게를 기대며 중심을 맞추는 소통에 집중했다면,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는 사람과 텍스트가, 이야기와 이야기가 마주하는 소통에 집중한다.
가후쿠가 히로시마로 향하는 도로 위에서 시작했던 영화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는 미사키의 뒷모습을 보며 끝난다. 도망치듯 떠나왔던 가미주니타키무라를 뒤로 하고, 멈춰 설 수밖에 없었던 히로시마를 벗어나 새로운 땅에서 미사키는 앞으로 향한다. 사브 900을 타고 한국 부산의 도로를 달리는 미사키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며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드라이브를 즐긴다. 끝없이 이어진 도로처럼 삶은 계속 이어지고, 언제나 또 다른 슬픔이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멈추지 않는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마침내 텍스트와 언어에 담긴 사람과 삶은 “길고 긴 낮과 긴긴밤의 연속을” 살아가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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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렌시아가와 H&M, 두 세계를 오가는 롤러코스터
2017년, 〈더 스퀘어〉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에게 또 한 번의 황금종려상을 선사한 〈슬픔의 삼각형〉은 한 모델 오디션장에서 시작된다. 상의를 탈의한 채 오디션을 기다리고 있는 남성 모델 무리 사이로 한 방송 진행자가 들어선다. 그는 재치 있는 입담으로 몇몇 모델을 인터뷰한 후, 개중 몇몇을 벽 앞에 세운 뒤 짓궂은 제안을 건넨다. ‘발렌시아가’ 포즈와 ‘H&M’ 포즈를 취해보라는 것. 둘 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류 브랜드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전자는 명품이고, 후자는 저가의 패스트 패션이다. 방송 진행자가 말을 잇는다. 발렌시아가 모델은 다소 거만한 표정으로 거들먹거리며 네가 우리 제품을 사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이 굴어야 하고, H&M 모델은 백인, 흑인, 아시아인이 나란히 서서 밝은 얼굴로 ‘우린 행복해! 우리는 평등해!’라고 외치며 환하게 웃어야 한다는 것. 설명을 마친 진행자가 발렌시아가와 H&M을 번갈아 외치면, 앞에 선 모델들은 그에 따라 오만한 표정과 밝은 표정을 교차로 짓는다. 진행자는 두 브랜드의 이름을 점차 빠르게 바꿔 부르고, 모델들 역시 그에 맞춰 재빨리 포즈와 표정을 바꾼다.
모델들의 몸짓과 표정으로 재현되는 두 브랜드의 교차는 〈슬픔의 삼각형〉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 이 영화는 롤러코스터처럼 두 세계를 오가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힘껏 풍자한다. 오디션에 참가한 모델 칼과 그의 인플루언서 애인 야야는 야야에게 협찬된 티켓으로 호화 크루즈에 탑승한다. 승객은 대부분 큰 부자들이고 승무원들의 서비스는 완벽하다. 돈을 낸 사람과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사람 사이에는 분명한 위계가 있고, 탑승객과 승무원은 모두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탑승객은 발렌시아가의 세계에 살고, 승무원은 H&M의 세계에 산다.
그런데 한 탑승객이 ‘우리는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승무원이 기뻐했으면 좋겠다며 모든 승무원이 거대한 미끄럼틀 튜브를 타고 놀며 즐기는 모습을 보여 달라는 것. 그리하여 모두가 함께 기쁨을 느껴 ‘평등’해지자는 것. 그러나 H&M의 세계에 사는 우리는 승객의 요구가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안다. 두 집단이 발 디디고 있는 세계를 그대로 둔 채 같은 행위를 하고 감정을 느끼는 것 만으로 평등해지자고 외치는 건 어불성설이다. 요컨대, 발렌시아가가 H&M 홍보 문구를 읊는 우스운 꼴이다. 발렌시아가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황당한 요구는 계속 이어진다. 웃통 벗은 승무원이 불편하다는 탑승객의 말에 해당 승무원이 단번에 배를 떠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바다 한 가운데를 항해하는 크루즈의 돛이 더러워 경관을 해친다며 청소를 요구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H&M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이들의 요구를 모두 충실히 수행한다. 두 세계가 기울어져 있고, H&M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발렌시아가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변곡점이 찾아온다. 선상 파티를 하던 중 폭풍이 찾아와 크루즈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크루즈의 흔들림은 곧 탑승객과 승무원이 자리한 세계의 흔들림을 의미한다. 탑승객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우아하게 고급스러운 요리를 고상하게 먹으려 하지만 욕지기는 점점 더 강해진다. 그리고 도저히 ‘눈 뜨고는 못 볼’ 구토 장면이 연달아 이어진다. 비싸고 화려한 옷을 입은 탑승객들이 자신들이 먹은 일품요리를 끝도 없이 토해내는 장면과 그 옆에서 승무원들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탑승객을 배려하며 서빙과 청소를 이어가는 장면은 무엇을 시사할까? 이 장면은 세계가 ‘뒤집히면’ 누가 혼란을 느끼는지에 대한 대답이다. 구역질 날 정도로 적나라한 구토(심지어 설사)는 발렌시아가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몸속에 무엇이 쌓여 있는지를 폭로한다. 수류탄을 만들어 전 세계에 판매하는 무기회사를 운영하는 한 노부부가 UN 규제 때문에 힘들었다며 불평하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 화려하고 비싼 명품으로 치장된 탑승객들의 외면이 실은 몸속에 쌓인 토사물과 설사(즉 추악한 자본 축적)를 감추기 위한 속임수였다고 고발하는 것이다.
폭풍이 지나간 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해적이 배를 습격하는 사건마저 발생해 일부 탑승객과 승무원이 ‘무인도’에 표류된다. 이제 기존 권력관계는 별 의미가 ‘없다’. 무인도에서는 돈보다 생존 능력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에 맞춰 새로운 위계가 구축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발렌시아가’와 ‘H&M’의 영향력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조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물건은 이들과 함께 떠내려온 프레츨 스틱과 물, 즉 식량이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죽은 부인에게서 다이아몬드를 뺀 후 몰래 주머니에 넣는다. 무인도에서 건설될 세상은 결코 완전히 새로울 수 없다. 새 세상은 결코 기존 세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도 없다. 영화 전반부에서 신랄하고 날카롭게 활개 치던 계급 사회 풍자가 다소 길을 잃는 듯 맥이 빠지는 건 이 때문이다. 배가 난파당하기 직전, 미국의 공산주의자와 러시아의 자본주의자가 만취해 우리 세계를 두고 토론하던 장면이 보여주듯,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발디딘 곳에 제한된 상상력만을 가질 수 있다. 그 어떤 새 출발도 ‘백지’에서 시작할 수는 없다. 우리의 현실은 우리의 상상력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무인도에서 젠더 위계가 뒤집히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전반부, 평범한 모델인 칼과 인플루언서 모델인 야야가 데이트 비용을 두고 갈등하는 장면이 있다. 우리 시대는 전통적 남성 부양자 모델이 더는 작동하지 않는 사회다. 그러나 기존 젠더 관념은 현실이 달라졌는데도 우리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칼은 데이트 비용을 하나하나 계산하느라 초조하고, 데이트 비용에 무관심한 야야에게 화가 난다. 반면 야야는 여자라는 이유(임신, 출산 등)로 언제든 자기 경력이 끝장날 수 있는 불확실성 속에서도 자신이 안전하게 기댈 수 있는 남자를 찾는다. 둘의 현실과 현실 인식이 내내 충돌하는 것이다. 젠더 권력의 복잡성은 크루즈에서도 이어진다. 진상 승객과 만취한 선장을 대신해 크루즈를 완벽한 상태로 유지하는 여성 매니저 폴라, 크루즈에서 화장실 청소를 담당했으나 무인도에서는 뒤집힌 세계의 꼭대기에 자리하는 아시아계 여성 애비게일은 세상을 굴러가게 하고 우리를 생존하게 하는 재생산 노동이 ‘여성의 일’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세상이 뒤집혀도 재생산 노동은 여성이 담당하는 현실을 비꼬듯 풍자해 영리하게 활용하기도 한다.
계급과 젠더의 얽힘, 그리고 뒤집힌 세계에서도 완전히 새롭게 출발할 수는 없는 사람들. 영화 제목인 ‘슬픔의 삼각형(Triangle of Sadness)’은 미간의 주름 모양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우리가 슬픔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느껴 얼굴을 찡그릴 때 생기는 주름의 이름인 것이다. 영화는 이 주름을 야기하는 감정이 ‘자연 발생적’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여러 위계가 교차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시시때때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며 미간을 찡그리곤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억눌린 역능을 되찾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다음의 대사가 말하듯, 〈슬픔의 삼각형〉은 세상이 뒤집혀야 된다고 말한다. “여기선 내가 캡틴입니다. 자, 내가 누구라고요?”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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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날에 봐야하는 영화는 단연 이거지
다음 주 목요일, 신나는 어린이날이다! 난 지금 26살 사회복무요원이다. 일개 공익인 나. 어린이 었던 적이 거의 13년 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날은 왠지 신난다. 노예 생활 도중 하루 꽁으로 쉬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냥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 항상 어린이날에 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간단하게 옷을 입고 제주 동쪽 바다를 구경 가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이 재미나게 노는 걸 구경하면 행복해진다. 사람이 행복한 걸 구경하기만 해도 즐거운 게 사람 마음이었던 것 같다. 한편으로는 '나도 결혼할 수 있을까' 아득해지지만 그래도 즐거운 건 즐거운 것이 아닐까? 하하.
그런데 보기만 해도 즐거운 것과는 별개로 아이들을 기른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나도 나 초등학교 때 어떻게 엄마 아빠가 감당했지? 싶은 부분이 있다. 가령 아이들이 생일파티랍시고 예고도 없이 우리 집에 무작정 찾아온 적도 있다. 예고도 없었어서 엄마는 맛있는 걸 준비해야만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솔직히 좀 짜증 날 것 같다. 이처럼 집에 아이가 있는 집안은 감당해야 할 게 많아지는 것 같다. 그런데, 각자가 맞이하는 짜증남이 다 다른 것처럼 아이들도 아이들 나름의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성적이 그렇게까지 중요하진 않은 초등학교. 인간관계가 중요한 비중인 학교에서 아이들의 고충을 이해하는 것은 참 어려운 것 같기도 하다. 아이들의 관점에서 폭넓게 우리들을 이해하는 영화가 2015년에 있었다. 우리나라 독립영화 <우리들>이다.
우리가 되고 싶은 우리, 둘
주인공 선우는 깍두기 같은 존재다. 체육 시간 피구 하다 주장들에게 선택받지 못한 선이. 선의의 학교 생활은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은 것 같다. 선을 밟지 않았음에도 아무튼 금을 넘었다고 우기는 아이들. 주눅이 든 선이는 그냥 수그리고 만다. 선이는 왕따다. 그것도 많이 외로운 왕따다. 어느 만큼이냐면, 생일파티에 들어간다는 핑계로 애들의 청소를 죄다 독박 써서 하는 정도다. 그런데 마음이 아프게도 단순히 그냥 혼자 다니기만 하고 끝나지 않는다. 무리에 어울리고 싶어 비굴한 행동까지 하는 선이. 선 이에겐 친구가 필요하다.
그렇게 전학생 지아가 눈에 들어왔다. 금세 한 두 마디를 나누며 친구가 되는 지아와 선. 오래 지나지 않아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친구가 된다. 전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던 지아. 마음에 그늘이 있다는 상처를 나누니 인간관계도 어렵지 않은 것 같다. 좋아하면 퍼주는 것 밖에 몰라 직진밖에 모르는 선이지만 그게 뭐 나쁜가. 고작 그렇다고 해서 인간관계가 서툴다 말다 나누기에는 어폐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친해지는 둘. 여름방학을 지나 개학이 된다. 뭔가 예전 같지 않다. 지아의 마음이 변한 것 같다. 개학을 하고 따돌림을 당하는 선을 보고도 지아는 선을 거리 두게 된다. 같은 상처가 반복되는 두려움이 작동한 것이다. 이 이후 선이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위태위태한 인간관계가 영화의 소재라고 볼 수 있다.
아이들의 시선에서
모두가 다 그렇지만 꼰대라는 말은 정말 정말 싫다. 나도 꼰대 되기 싫다. 젊은 꼰대라는 말도 생긴 요즘이다. 나는 젊은 사람이고 싶지 꼬장꼬장하게 사는 건 아무래도 싫다. 그렇게 살아본 적이 있었어서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무언가가 있다. 이런 아이들을 소재로 한 영화는 자칫 아이들이 너무 어리숙한 존재로만 묘사될 수도 있어서 '고통과 아픔이 장난이냐?' 싶을 수도 있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 윤가은은 왠지 영화를 만들 때 꼰대의 마음가짐으로 감독한 게 아닌 것 같다. 이에 대한 근거로 이 영화는 리액션이 많이 나온다는 걸 뽑고 싶다. 아이들의 얼굴 클로즈업이 자주 나온다. 이는 아이들의 감정을 전달하는 게 우선이었다는 뜻으로 통할 것이다. 아이들의 성장 서사를 통해 멋진 사람이 되는 걸 묘사했다면 지나치게 교훈적인 게 된다. 그러면 아이들의 부족함에 대해 오롯이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 사람 입장은 그 사람만 아는 것이다. 어른이랍시고 '그냥 이렇게 해라'라고 말하는 건 그 사람 생각이다. 그 솔루션이 그 사람 인생 전부를 관통하는 해결책일 수도 있지만 어느 한 편으로는 고통을 이해하는 키다리 아저씨를 원할 수도 있다. 영화는 이런 태도를 내내 견지하며 아이들의 마음에 사려 깊게 다가간다. 이에 덧붙이듯 선의 어머니 캐릭터를 비롯한 어른들이 직접적으로 이야기 전개에 엄청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전적으로 아이들의 이야기를 제시하는 건 객관적인 시선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좋은 연출 의도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꼰대라는 말을 떠나서 이 영화의 주인공인 어린이들은 다른 역할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이야기가 성인인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라는 점이다. 극의 내용 전개는 간단하다. 왕따인 선이 지아를 만나서 인간관계에 닳고 닳는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선이가 갖고 있는 고유의 정서는 외로움이고, 이를 받아들이는 것도 쉽다. 간단한 이야기가 간단하게 감정이입을 돕는 것이다. (심지어 러닝타임도 짧다) 이는 곧 이 외로움이라는 정서에 집중하니 사람이 공감하기가 쉬워진다. 쉬운 내러티브로 관객에게 공감대를 쉽게 갖다 주는 좋은 한 수였다.
원래 혼자 살다 혼자 가는 거야
난 왜인지 '네가 그렇니까 친구가 없지'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어느 한 구석에는 반 사회적인 행동을 하던 나 자신에게 파운딩을 꽂아버리고 싶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말을 들어도 된다는 건 아니다. 스무 살, 스물한 살에 유치원생처럼 따돌림을 하고 뭐 알지도 못하면서 정의로운 척하던 내 대학생활의 누군가가 생각난다. 이런 내면의 외로움은 무엇으로도 위로받을 수 없었다. 계속해서 피해의식이 쌓이면 앞, 뒤가 안 보인다. 근데 가만 세상을 들여다보면 이 것에 예외인 사람은 없었다. 나에게 이런 말을 했던 사람들 몇몇을 들여다보면 지금 생사도 모른다. 영화는 이 감정, '삶을 지나 보며 바뀌는 인간관계에 대해' 다뤘다고도 생각한다. 이는 종반부에 나타나는 인물의 처지와도 관련이 있다. 또 제목이 <우리들>인 것과도 관련 있다. 이 영화의 목적지가 외로움에 대한 위로라면 <벌새>와 비슷해진다. 그러나 이 영화는 <벌새>와는 살짝 다르다. 결말부에는 <벌새>와는 다른 부분이 분명 있다. 또, 제목이 <우리들>인 것도 '우리'의 범주가 어디까지인가?라는 이야기를 적용시킬 수 있다. 우리가 되고 싶은 선과 지아의 이야기인 건 두말하면 입 아프다. 그러나 쉬운 이야기를 전개했던 이 영화다. '친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안 친했음'이라는 정서가 반복되는 이 영화. 이런 박탈감과 외로움은 나이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무슨 말이냐? 이 영화는 우리 마음을 작게 묘사하기도 했다. 영화 제목 해석의 클리셰(?) 같긴 하지만 이 <우리들>은 성인인 우리에게 적용되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이거 다큐 아냐?
이 영화의 배우들은 완~전 신인 아역 배우들이다. 선의 어머니 역을 맡은 장혜진 배우 말고는 2022년이 된 지금까지도 익숙하지는 않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연기 잘했다. 간단하고 깊게 이야기를 쓰는 거랑 쉽게 연기하는 거랑 다른 차원의 문제일 텐데 반복되는 박탈감에 대한 표정연기가 좋았다. 극에 쉽게 이입한다는 건 그만큼 극에 매끄럽게 잘 스며들었다는 뜻도 되니 아역 배우들의 발연기는 아예 없는 편이다. 사실적이라서 오히려 다큐 같은 느낌이 있을 정도다;
또 촘촘한 연출이 장점이었던 영화다. 일단 주요 소재 피구의 속성을 생각해보면, 이 구기종목은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운동이다. 공을 맞춰 사람이 아웃되면 피해자의 입장이 될 일이 없다. 이건 한 무리에 속하면 무리 지어 피해자를 양산시키는 인간관계에도 적용되는 다른 비유다. 이 구기종목의 속성으로 영화의 연출을 잘 녹여든 섬세한 연출이었다. 또 다른 설정으로는 자격지심에 대한 묘사다. 이 자격지심에 대한 묘사는 휴대폰이라는 소재에서 나타난다. 선과 지아 중에서 지아만 휴대전화가 있다. 그래서 부모님이랑 직간접적으로 통화할 수 있다. 근데 이렇게만 소통하는 소도구로만 쓰이는 게 아니다. 지아의 상처를 묘사하는 기능으로도 휴대전화가 쓰이는데, 이 상처가 공개되고 지아가 했던 말들이나 표정을 보면 이런 꼼꼼함에도 아이들의 마음을 곳곳이 박아놓았으니 과연 따뜻한 작품이다.
어린이날에 봐야 할 영화
이 글을 쓰는 나에게 어려운 게 뭘까. 난 잊히는 게 두렵다!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냥 단적으로 이 글도 잊히는 게 두렵기 때문에 쓰는 것도 있다. '짠! 나 이렇게 잘 나간다!'식의 자랑을 하고 싶은 마음도 0.1% 정도 있는 것이다. 아 아이들도 뭐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나이가 들었고 겪어온 세월이 깊다고 해서 비슷한 마음이더라도 내가 더 무게가 있는 건 당연히 아니다. 애들은 애들 나름대로 고통스러운 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사려 깊은 태도로 아이들이 지니는 삶의 무게에 대해, 그리고 어른에게도 적용되는 외로움과 소외감에 대해서 다뤘다. 단순히 인간관계에 대한 공감만 얻을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입장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어린이날에 과연 최적화된 영화다. 연휴에 <닥터 스트레인지 2 : 대혼돈의 멀티버스>를 보고 할 일이 없는 왓챠 구독자 분들에게 이 영화 추천한다. 아마 아이들에게, 동생에게 폭넓은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왓챠영화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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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들의 앙상블을 확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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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8년 청룡영화상에서 한지민에게 여우주연상을 선사한 영화 <미쓰백>. 한지민의 연기는 언제나 실망한 적이 없지만 과격한 배역을 맡았던 것을 본 기억이 별로 없어서 과연 교도소도 다녀오고 사회에 버림 받은 역할을 잘 소화할 수 있을 것인가 의문이 들기도 하면서도 여우주연상을 받았다니 그 연기가 궁금하다는 생각에 보기 시작했다.
영화 <미쓰백> 시놉시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매 순간 날 배신하는 게 인생이야”
“이런 나라도, 같이 갈래?”스스로를 지키려다 어린 나이에 전과자가 되어 외롭게 살아가던 백상아. 누구도 믿지 않고 아무것도 마음에 두지 않던 어느 날 나이에 비해 작고 깡마른 몸, 홑겹 옷을 입은 채 가혹한 현실에서 탈출하려는 아이 지은을 만나게 된다. 왠지 자신과 닮은 듯한 아이 ‘지은’을 외면할 수 없는 상아는 지은을 구하기 위해 세상과 맞서기로 결심한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미쓰백>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배우들의 앙상블
영화 <미쓰백>을 보면서 좋았던 부분은 배우들의 앙상블이었다. 타이틀롤로서 영화를 이끌어가는 한지민과 그런 한지민이 지키고자 하는 아이 김시아. 그리고 이 둘을 보살피는 조력자로서이 이희준. 이렇게 3명의 배우들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캐릭터를 잘 표현해서 부담스럽지 않게 영화를 볼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한지민 보다 훨씬 눈에 가는 배우가 있었다. 아동학대범 주미경 역을 맡은 권소현 배우였다. 솔직히 진짜 아동학대범 데려다가 영화를 찍은 줄 알았다. 영화를 보면 배우들이 영화 캐릭터로만 보인다기 보다는 현실 속 배우와 캐릭터가 겹쳐서 보이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간극이 영화 <미쓰백>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아서 좋았던 작품이었다.
아동학대의 사회적 환기
영화 <미쓰백>의 목적은 아마도 아동학대의 사회적 환기일 것이다. 그래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아동학대 사건을 모티프로 해서 영화를 제작했다. 그런데 이것이 모든 영화의 한계인데 이런 아동학대가 있다!!를 보여줄 뿐 뭔가 직접적인 해결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흡한 초동대처로 인해 분노를 느끼지만 그 분노는 영화가 끝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다 사라지고 만다. 정치성이나 사회성을 디는 모든 영화 작품이 갖는 한계를 영화 <미쓰백>에서 다시금 느껴 더 안타까웠던 것 같다.
드라마 <마더>와 너무 비슷했던 작품
배우들의 연기력이 너무나도 뛰어났고 연출 역시 답답하지 않아서 부담스럽지 않게 볼 수 있었지만 안타까웠던 점은 드라마 <마더>와 이야기 구성이 굉장히 비슷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새로운 작품을 보는 느낌이 아니라 리메이크작을 보는 것 같았다. 사건의 구성과 연결이 비슷하다보니 장면장면마다 마더의 장면이 겹쳐보여서 오히려 아동학대라는 주제를 제대로 환기시키기 보다는 다음에는 저런 장면이겠구나, 그 다음에는 이렇게 진행될테고, 하면서 머릿속에서 자동 스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아동학대범에 대한 분노보다는 드라마 <마더>와 완전 똑같구나 하는 감상평이 먼저 나왔던 것 같다.
비슷한 작품 때문에 집중도가 떨어진 건 사실이었지만 영화 <미쓰백>은 배우들의 앙상블 만큼은 완벽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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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MZ DOCS] 제일 조선인들에 대한 비극과 공포를 보여주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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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금선희
출연진: 제일 조선인들
시놉시스
일본에 살던 제일 조선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갔지만 당시 한반도에서는 북한과 남한의 이념 대립으로 인해 북한에 있던 제일 조선인들은 일본으로 돌아오게 된다. 일본에서도 차별과 편견으로 인해 살기 힘들었으나 북한을 탈출한 이들에게는 제대로 머물 곳이 없다. 그 모습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가 여기 있다. 이 작품은 금선희 작가가 만든 작품으로 식민지 시대의 조선인들부터 지금의 제일 조선인들로 오기까지 여러 차례의 고난을 겪어왔단 것을 3중 스크린으로 통해 볼 수 있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 혼란스럽지만 하나만 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시선을 고려했기에 3개로 된 장면들이 영상에 나타났다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과연 금선희 작가가 전해주는 메세지는 어떤 것일까?
제일 조선인들의 슬픔과 비극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금선희 작가가 보여주는 작품들은 여러 개가 있다. 타국의 하늘(Foreign Sky)이라는 작품과 비스트 오브 미(Beast Of Me)가 대표적인 예시인데 제일 조선인들처럼 소외받는 소수자들이나 약자들을 영상으로 표현해낸다. 그들이 가진 역사적 아픔과 겪어왔던 고난들을 금선희 작가는 영상으로 재현해낸다. 일본에게 식민 지배를 받던 조선인들과 6.25 전쟁이 일어났던 일들을 영상으로 담아 파운드 푸티지라는 영상 기법으로 관객들의 공포감을 조성하면서 이런 역사적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숨은 의도의 메세지를 공개한다. 북한으로 돌아간 제일 조선인들이 탈출을 결심할 정도로 북한이란 나라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조차 반역죄로 여길 만큼 자유가 없는 곳이다. 그래서 가족들과 함께 북한에서 도망쳐 갈 곳 잃은 이들을 보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준비된 역사의식이 필요한 것 같다.
제일 조선인들에 대한 비극은
그들이 갈 곳 없는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2022.09.24 (토) 메가박스 백석 컴포트 4관
DMZ다큐멘터리영화제 기간: 09월 22일 - 09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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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다 대한민국 스타트업의 초상 리뷰 - 누군가의 혁신이 불법으로 되버리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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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다금지법 이후 6개월 간의 악전고투 이야기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한국의 우버로 불리며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모빌리티 플랫폼 타다(TADA).
출시한 지 9개월 만에 100만 유저를 확보하며 승승장구하던 중 택시업계의 반발로 법적 공방에 휘말린다.
뜨거운 논란 속 치러진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날, 모든 팀원들은 함께 모여 ‘종이컵 와인 파티’로 자축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단 14일 뒤, ‘타다금지법’이 통과됐다는 청천벽력의 소식이 들려오는데...
그들은 이 최악의 위기를 뚫고 타다를 새롭게 부활시킬 수 있을까?
모빌리티 플랫폼 타다의 이야기로 세상에 공개되는
‘스타트업’에 대한 국내 최초의 다큐멘터리 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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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블쟁이] 인피니티 워 NG 모음! & 춤영상까지?!
안녕하세요 마블쟁입니다!! 오랜만에 돌아왔습니다!
일단 손풀기로 아주 짧게 영상 하나를 올립니다.
영상 이제서야 올리는데 성의 없다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곧 좋은 영상으로 다시 돌아올 테니 그냥 재미있게 영상 즐겨 주세요~
감사합니다!
2018. 00. 00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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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스마일> 압도적 공포 예고편
#스마일 의 압도적 공포를 보이기엔 30초면 충분. 10월 6일, 너도 곧 웃게 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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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선 브라더스> 공식 예고편
피는 못 속인다. 강력한 대만 삼합회 수장이 의문의 암살자에 의해 총격당하자 그의 장남 찰스(저스틴 첸)는 곧바로 로스앤젤레스로 향한다. 그곳에 자신이 보호해야 할 어머니 아일린(양자경)과, 가족의 실상은 전혀 모른 채 온실 속 화초처럼 살아온 순진한 남동생 브루스(삼송 리)가 있기 때문. 하지만 타이베이의 무시무시한 조직들과 신흥 파벌들이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해 정면 대결을 벌이는 상황. 찰스와 브루스는 누군가의 손에 처치당하기 전에 형제애와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 한다. 2024년 1월 4일 스트리밍 시작.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