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니엘2022-11-21 13:52:07
사연 있는 청춘들의 묵묵히 살아가는 이야기
영화 <창밖은 겨울> 리뷰
공석우는 버스 운전기사이며 소심한 성격으로 친한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 터미널에서 누군가 고장 난 mp3를 놓고 간 것을 보고 주인을 찾으려 유실물 보관소에 가지만 여기 있는 물건들은 주인이 버리고 간 것이라는 매표소 직원인 양영애의 말을 듣는다. 하지만 그 mp3의 주인을 꼭 찾으려는 공석우는 양영애와 함께 수리점을 여러 곳 찾아다닌다. 둘의 사이는 예전보다 가까워지고 서로가 가진 사연을 털어놓는 사이가 되는데... 과연 무슨 사연들이 있길래 그러는 걸까?
공석우와 양영애는 둘 다 사연이 있었다. 결국 이 둘이 친해지기 전까진 몰랐을 뿐...
각자마다의 사연이 있지만 묵묵히 살아가는 청춘들을 위한 영화!
공석우는 버스 운전기사 일을 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영화감독을 꿈꾸는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자신이 수집한 영화 DVD들은 방에 보관해놓고 있었다. 그런 공석우에게는 사연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졸혼을 했고 전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잠시 꿈을 접어두고 버스 기사로 일하면서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한다. 양영애도 학창 시절에 탁구 선수로 활동했고 자신의 아버지가 엄격한 훈련을 강조해서 탁구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런데 이 둘은 탁구를 치면서 자신들이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대회까지 나간다. 그러나 공석우는 대회 첫날에 온 전 여자친구의 문자로 괴로워하면서 출전을 포기한다. 심리적으로 불안한 그에게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다는 건 얼마나 괴로웠을지 이해가 간다. 왜 보통의 청춘들이 꿈을 포기하고 현실에 타협하여 살아가는 걸까? 마지막에 공석우가 영화와 관련된 수집품들을 버리는 것처럼 과거의 사연이 자신을 옭아맸나 보다.
그렇게 청춘은 묵묵히
살아갈 뿐이다.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ive contents
-
- 지금의 '정의'는 안녕한걸까?
수많은 범죄가 발생하고, 이를 추적하는 경찰이 있다. 범죄자가 잡히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사회적 상식이다. 살인을 저지르면 살인에 맞는 형량을, 성폭행을 저지르면 성범죄에 맞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 일반 시민들은 이를 재판하는 판사와 사법부를 믿고 신뢰하려 하지만, 종종 판결이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형량이 약하다고 느낄 때마다 사람들은 분노하며, 사회적으로 그 부당함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온라인을 통해 퍼져나간다.
피해자들은 평생 불안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 공포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지만, 죄를 지은 범죄자들은 자신의 형량을 채우고 나면 죗값을 다 치렀다고 착각한다. 이런 괴리가 사람들의 분노를 자극한다. 범죄자가 더 이상 사회적 제재를 받지 않음에도, 피해자는 여전히 그 공포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부조리하게 느껴진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조두순의 출소 사건이 있다. 그의 출소 직후 집 앞에 몰려든 유튜버들과 취재진은 지금의 사회가 느끼는 불안과 분노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런 장면은 수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해왔다. 시리즈 <비질란테>, <노웨이아웃 더 룰렛>, 영화 <무도실무관>, 그리고 최근 개봉한 <베테랑2>에도 비슷한 장면이 묘사된다. 이러한 출소한 범죄자들에게 분노를 표출하고, 그들에 대한 응징을 선포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이 사회적 현상은 이제 단순한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범죄와 처벌에 대한 깊은 불신을 드러내는 문제로 자리잡았다.
[첫번째 감정] 서도철의 정의감
서도철(황정민)은 사실 단순히 올바르기만 한 경찰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는 강력계 형사로서 수많은 범죄자들과 맞서왔고, 그 과정에서 다소 거친 언행과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범죄자들에게 “잡히면 죽는다”는 협박이나 욕설을 서슴없이 내뱉으며, 남들에게 강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특히 자신의 가족에게도 "만만하게 보이면 안 된다"는 식의 말을 자주 한다. 이러한 발언들은 서도철의 내면에 깔린 세계관을 보여주지만, 그가 항상 법을 준수하며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관객들은 이러한 그의 말과 행동을 보며 그가 과연 진정한 정의의 구현자인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서도철의 정의는 단순한 폭력의 정당화가 아니다. 영화 속에서 그는 범죄자를 체포하고 제압하는 과정에서 적당한 선을 유지하려 한다. 물론 분노에 휩싸여 때로는 과격한 행동을 취하지만, 그의 팀원들이 그를 제지하며 그가 극단적인 폭력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준다. 이는 서도철이 제도 내에서 허용된 범위 내에서 정의를 실현하려는 인물임을 보여준다. 그의 강한 언행과 행동 뒤에는 법과 질서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지키려는 노력이 숨어있다. 서도철은 자신의 감정에 휘말릴 때가 많지만,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범죄자들을 합법적인 방식으로 처벌하는 것이다.
서도철의 정의는 때로는 삐딱하고 비뚤어져 보일 수 있다. 그는 완벽하지 않으며, 때로는 자신의 감정에 휘둘려 폭력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모습은 오히려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다. 서도철은 이상적인 정의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우리 일상 속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불완전한 정의를 구현하는 인물이다. 그의 거친 정의는 때로는 불안정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가 법의 테두리 안에서 범죄자들과 맞서 싸우려는 모습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서도철은 결국 제도 내에서 정의를 실현하려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투박한 방식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그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두번째 감정] 해치의 정의
해치(정해인)는 서도철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정의를 실현한다. 그는 경찰이지만, 그가 경찰로서의 공권력을 사용하는 목적은 범죄자를 체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복수를 실현하기 위함이다. 해치는 사법 시스템의 허점을 이용해 범죄자들을 찾아내고, 그들을 직접 처단한다. 그가 추구하는 정의는 법의 테두리 안에 있지 않다. 그는 범죄자들을 법에 맡기지 않고, 자신의 방식으로 그들에게 죗값을 치르게 한다. 이런 모습은 서도철의 방식과 대조적이며, 해치의 정의는 더욱 극단적이다. 그러나 해치는 단순히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범죄자들을 처단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사회적 약자를 대신해 복수를 실천하며, 그 자신 또한 정의의 편에 서 있다고 믿는다.
해치가 처단하는 범죄자들은 모두 사회에서 적은 처벌을 받고 풀려난 자들이다. 해치는 그들이 다시 사회로 나와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기 전에 그들을 없애기로 결심한다. 관객들은 해치가 처단하는 장면을 보며 그 잔혹성에도 불구하고, 범죄자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처벌을 해치가 대신해주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해치의 처단은 우리가 실제로 법적 제재가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는 범죄자들에게 통쾌한 대리 복수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치의 행동은 때로는 불법적이고 잔인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의 정의는 많은 관객들이 느끼는 감정과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해치의 정의는 과연 정당한가? 그의 방식은 법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사법적으로는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해치의 정의는 단순한 복수를 넘어선다. 그는 개인적인 원한을 넘어, 범죄자들에게 직접적인 처벌을 가함으로써 자신이 피해자를 대신해 그들에게 정의를 실현한다고 믿는다. 관객들은 그의 처단에 통쾌함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이 올바른 정의의 방식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해치의 정의는 법적 시스템의 허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허점을 어떻게 보완할 수 있는지를 질문하게 만든다. 그의 잔인한 복수는 우리가 바라는 정의와 어긋나지 않지만, 그 방법론은 쉽게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세번째 감정] 관객들이 느끼는 정의
<베테랑2>는 관객들에게 두 가지 상반된 정의의 방식을 제시하며, 관객들로 하여금 어떤 정의가 더 옳은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서도철은 법과 질서를 지키면서 범죄자들을 처단하려는 인물이고, 해치는 법을 무시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인물이다. 관객들은 처음에는 해치의 복수가 더 통쾌하고 직관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특히나 약한 처벌을 받고 사회로 돌아온 범죄자들이 다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현실에서, 해치의 처단은 일종의 대리 만족을 제공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관객들은 서도철의 방식이 더 현실적이고 바람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해치의 복수는 사법 제도의 허점을 파고들어 범죄자들을 처단하는 방식이지만, 그가 처단하는 범죄자들도 결국 법적으로는 처벌을 받았다. 해치는 그 처벌이 약하다고 판단해 스스로 판사이자 집행자가 되기로 결심하지만, 이는 사법 체계의 붕괴를 의미할 수도 있다. 해치가 지속적으로 범죄자를 처단할수록, 그가 범죄자들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는 법을 무시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정의를 실현하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의 정의 역시 범죄가 되어버린다. 따라서 관객들은 해치의 처단이 통쾌할지라도, 그것이 정당한 정의인지에 대해서는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영화는 결국 서도철의 정의가 옳다는 결론을 내린다. 서도철은 때로는 법의 경계를 넘나들지만, 그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범죄자들을 처단하려고 노력한다. 해치가 기괴한 방식으로 범죄자들을 처단하면서 사법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동안, 서도철은 그 시스템을 지키며 범죄자들과 맞서 싸운다. 영화는 관객들이 해치의 처단에 일시적으로 마음이 기울게 하면서도, 결국에는 서도철의 정의에 더 큰 힘을 실어준다. 이는 영화가 궁극적으로 사법 시스템 내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의 연출과 배우들의 연기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2>는 범죄자들에 대한 형량 문제와 출소 이후의 사회적 반응에 대한 깊은 화두를 던진다. 이는 1편에서 권력자와의 대결을 주제로 삼았던 것과는 다르게, 이번 2편은 더욱 현실적인 사회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신선하다. 범죄자들의 처벌과 형량에 대한 불만이 커지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영화는 다양한 정의의 형태를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이번 영화의 연출은 이전 작품보다 더 현실적인 문제에 집중하여, 서도철과 해치의 대립을 통해 사법 시스템 내에서의 정의와 사적 복수 사이의 경계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배우들의 연기 역시 훌륭하다. 황정민은 서도철이라는 인물을 거칠지만 인간적으로 그려내며, 그가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정의에 대한 고민을 깊이 있게 표현해낸다. 반면 정해인은 해치라는 인물을 통해 복수와 정의의 경계에 서 있는 인물을 차갑고 날카롭게 연기한다. 그의 연기는 관객들로 하여금 그가 실현하려는 정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든다. 두 배우의 연기력은 이 영화의 긴장감을 높이고, 관객들이 이들의 정의에 감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게 만든다.
<베테랑2>는 단순히 범죄자들을 처단하는 액션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범죄자들에 대한 처벌이 과연 정당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관객들로 하여금 현재의 사법 시스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든다. <범죄도시> 시리즈가 빌런을 점점 더 강력하게 그려내는 것과는 다르게, <베테랑> 시리즈는 보다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며 차별화된 메시지를 전달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a976nBHtEaY
-
- <아야와 마녀>로 6년 만에 돌아온 스튜디오 지브리, 사상 최초 한국어 더빙 오디션 개최!
일본 애니메이션하면 가장 먼저 지브리가 떠오른다. 돼지로 변해버린 부모님을 되돌려 놓고 인간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모험을 펼치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마녀의 저주로 할머니가 되어버린 소녀 소피가 마법사 하울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 도시를 떠나 시골로 이사온 두 자매가 숲속에 살고있는 신비로운 생명체 토토로와 만나는 <이웃집 토토로>까지. 지브리만의 생명력 있는 캐릭터들은 늘 우리의 마음 속에서 동심을 자극하고 기분 좋은 활력을 불어 넣어준다.
이처럼 언제나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그림체와 개성넘치는 스토리로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지브리가 이번엔 사상 첫 3D 애니메이션 <아야와 마녀>로 우리 곁에 돌아온다는 소식이다.
<아야와 마녀> 티저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아야와 마녀>는 미스터리한 마법 저택에 발을 들인 10살 말괄량이 소녀 아야의 판타지 어드벤쳐다. 6년만에 돌아온 스튜디오 지브리의 신작으로 기대감을 모으고 있는 가운데, 주인공 아야의 한국어 더빙 목소리를 오디션을 통해 선발할 계획으로 밝혀 더욱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일명 '아야와 마녀 성우 챌린지'로 불리고 있는 이번 오디션은 대한민국 대표 온라인 서점 YES24와 함께 진행되는 것으로 지난 4월 2일부터 진행중이다. YES24 홈페이지에 공개된 대본 속 주인공 아야의 대사를 녹음하거나 녹화하여, 필수 해시태그인 '#아야와마녀성우챌린지'와 함께 인스타그램에 업로드 하면 참여할 수 있는 것으로 4월 16일까지 접수된 응모작 중 심사를 거쳐 50인을 선발하고, 이들에게는 비대면 미션이 추가로 진행된다. 이 단계에서 선발된 10인은 차후 '대원방송' 성우 녹음실에서 실전 테스트를 거치게 된다.
이미지 출처: YES24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원작자이자 세계적인 판타지 소설 작가인 '다이애나 윈 존스'의 [이어위그와 마녀]를 원작으로 한 <아야와 마녀>는 스튜디오 지브리 최초 제 73회 칸영화제 오피셜 부문에 초청된 작품이자 최초 FULL CG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으로 주목 받고 있다.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기획을, 미야자키 고로가 연출을 맡은 이번 작품은 지금까지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개성 강하고 당돌한 캐릭터와 더불어 영화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락 스피릿 짙은 OST까지 신선한 매력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을 전망이다.
한편, 그동안 2D 애니메이션으로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던 지브리 스튜디오의 첫 3D 작품인만큼 기대감과 함께 걱정의 목소리도 들린다. 본래 지브리 스튜디오만의 개성과 특색이 사라지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나오는, 모두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다. 2D와 3D는 시각적으로 명확한 감정선의 차이를 보일 뿐만 아니라, 이번 작품에서 지브리만의 감성을 살리지 못한다면 '지브리 스튜디오'라는 타이틀을 걸고 나온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다.
그러나 지브리의 새로운 첫 도전이라는 점과 6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이라는 점,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와 그의 아들 미야자키 고로의 합작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주목할만한 작품임은 분명하다. '처음'이라는 단어가 가져다주는 긴장감과 설레임을 모두 안고 우리 곁에 찾아올 사랑스러운 악동 '아야'가 과연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된다.
씨네랩 에디터 Jade.
-
- 웬디는 왜 네버랜드를 떠났을까, 영화 <웬디>
-
웬디 (Wendy, 2020)
제작 : 미국, 드라마·판타지 │ 감독 : 벤 자이틀린
출연 : 데빈 프랑스(웬디), 야슈아 막(피터) 외
등급 : 12세 관람가 │ 러닝타임 : 111분‘피터팬의 눈부신 재창조’ - New York Post
피터팬 탄생 110주년 기념, ‘피터팬’ 진짜 주인공 ‘웬디’의 시점으로 펼쳐지는 새로운 모험
네버랜드. 그곳은 영원히 늙지 않는 섬이다. 어릴 적 디즈니 만화영화로 본 <피터팬>은 피터팬과 친구들이 네버랜드에 가서 경험하는 재미난 이야기들을 담고 있었다. 하늘을 날아 환상의 섬에 도착하고, 공동의 적 후크를 물리치고, 팅커벨은 웬디를 질투하고.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보았던 그때의 <피터팬>에는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한 감정을 느낄 새가 없었던 것 같다.
그에 비하면 벤 자이틀린 감독의 <웬디>는 조금 더 어른들을 위한 버전의 피터팬이 아닐까 싶다. 어느 날 창가로 날라든 피터팬을 따라 소녀 웬디와 쌍둥이 형제가 네버랜드에 간다는 것까지는 같은 설정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포커스는 아이들이 얼마나 그곳에서 재미난 경험을 하는가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이후에 대해 조명하고 있다.
지루한 집을 떠나 어른들의 잔소리가 없는 아름다운 섬에 온 아이들은 처음에는 신이 나서 섬을 휘젓고 다닌다. 하지만 영원히 집에 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웬디는 어쩐지 두고 온 것들에 대해 계속 생각한다. 영원히 늙지 않는다는 네버랜드 섬 밖의 것들 말이다.
섬 밖에는 사라진 아이들을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엄마가 있고, 걱정과 근심을 동반하지만 자신의 시간에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 ‘나이 듦’이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대장 피터팬은 끝까지 늙는 것은 안 좋은 것이라고만 외친다. 처음엔 함께 아름다운 섬을 활보하던 웬디는, 시종일관 늙는 것을 거부하는 피터를 보면서 점점 대항하기 시작하는데.
이 영화의 제목이 ‘웬디’이고, 그러므로 웬디의 시선을 따라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점은, 기존의 피터팬과 이 영화가 다른 정수를 지니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가장 큰 요소였다. 디즈니 영화에서 보았던 것과 달리 웬디는 수동적인 조연의 역할에 머물지 않는다. 거침없고 주체적이며, 피터가 꿰뚫어 볼 수 없는 것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바로 웬디였다.
“늙는 게 꼭 나쁜 건 아니야”
웬디가 피터에게 건넨 이 한 마디가 이 영화를 대변하는 가장 큰 울림이 아니었을까.
동심을 지키는 것은 물론 중요한 일이다. 딱딱해지지 않고 아이처럼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 보다 투명한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어른으로서 잃지 말아야 할 좋은 자세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의 영혼을 채워 마땅한 것들이 과연 그런 순수함과 투명함 뿐일까.
웬디는 영원히 늙지 않을 수 있는 섬으로부터 벗어나 친구들과 함께 현실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대학을 가고, 아이를 낳고, 결국엔 늙어가면서 현실의 어른이 되기를 선택했다. 그 삶에는 피터팬은 끝내 알지 못했던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부딪치고 울고 실패하고 보다 냉정해지면서, 결국엔 세상을 통찰하게 되는 힘 말이다. 그 깨달음과 통찰을 통해서 영혼의 반쪽을 완벽히 채울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네 인간의 삶이라는 걸, 웬디는 알았던 것이다.
어른의 삶에 대한 풍부한 통찰로 마무리되던 이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엔딩이었다. 영화의 말미에 어른이 된 웬디의 모습은, 어쩐지 나의 바람과는 달리 ‘타성에 젖은’ 어른의 모습이다. 찌들고 피곤한 어른의 삶. 동심도 즐거움도 없이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어른의 삶. 그런 웬디의 앞에 어느 날 피터가 다시 찾아온다. 영원히 늙지 않는 소년 피터는, 웬디의 아이들을 데리고 네버랜드로 떠나면서 웬디에게 이렇게 외친다.
“웬디는 (같이 가기엔) 너무 늙었어!”
그 엔딩에서 다시금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과연 어른이 되고 늙는다는 것은, 값진 선물인 동시에 끊임없이 돌아보고 경계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일러주는 것만 같아서.
이 영화는 어린아이다운 순수함과 어른의 고리타분함 사이에서 우리가 어떤 조율을 이루며 살아야 할지를 너무도 강력하게 시사한다. 유연함과 투명함을 잃지 않되 무기력하고 우울하게 나이 들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우리의 영혼을 가다듬고 정비해야만 한다고.
나는 어떤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가. 희망보단 절망을 학습하고 있진 않은가. 가능성보다는 불확실함에 초점을 두는 어른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겁고 활기차게 남은 내 삶을 바라보는 건강한 어른이 되려면, 내 안의 웬디 그리고 피터와 어떻게 지내야 할지, 이 영화를 보고 깊이 생각해보게 된다.
-
- [JIMFF 데일리] ‘듣는 영화'가 제천에 떴다! 국내 최초 한국 영화 오리지날 필름콘서트의 현장 속으로
제18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8월 12일, 한 주 내내 쏟아지던 빗방울이 거짓말처럼 뚝 그쳤습니다. 제천 의림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따사로운 햇살과 선선한 바람으로 가득 찼죠.
화창해진 날씨에 사람들은 삼삼오오 무리 지어 제천 의림지 야외무대를 찾았습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최초의 필름콘서트를 즐기기 위해서였는데요. 필름콘서트는 영화 상영과 동시에 영화에 삽입된 음악을 처음부터 끝까지 오케스트라 라이브로 연주하는 공연 형식입니다. 영화와 만난 콘서트는 전 세계 곳곳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영화 음악을 선보이고 있죠.
제천국제음악영화제는 한국 영화 음악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고자 국내 최초로 한국 영화의 오리지날 필름콘서트를 제작했습니다. 아름답고 감미로운 영화 음악으로 유명한 ‘봄날은 간다’가 바로 그 위대한 첫걸음의 주인공입니다.
⊙ ⊙ ⊙
한국 오리지날 필름콘서트의 역사적인 첫 공연을 위해 <봄날은 간다>의 음악을 만든 조성우 음악 감독과 서울그랜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재즈 아코디어니스트 제희가 무대에 올라섰습니다. 공연 시간이 다가오자 연주자들은 대형 스크린 아래에 마련된 무대에 하나둘씩 자리했는데요. 설레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제 귀엔 악기를 조율하는 저마다의 소리마저 아름다운 선율처럼 들렸습니다.
영화 상영과 함께 시작된 그들의 연주는 순식간에 의림지를 거대한 영화관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음향을 자랑한다는 여느 영화관도 이곳 ‘의림지 영화관’의 사운드를 따라올 순 없었죠.
연주자들은 영화의 모든 장면에 집중하며 완벽한 필름콘서트를 선보였습니다. 10초 안팎의 짧은 삽입곡까지도 모두 라이브로 소화해냈죠. 음악이 흘러나와야 할 정확한 순간에 연주하기 위해 수도 없이 ‘봄날을 간다’를 보았을 그들의 노고에 시도 때도 없이 깊은 감동이 몰려왔습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음악이 흘러나오는 줄도 모르게 영화를 감상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 번 반복해 감상하고 나서야 사운드에 귀를 기울이곤 하죠. 음악은 관객의 마음을 좌지우지하는 핵심 요소인데도 말이에요. 그러나 필름콘서트의 관객은 스크린 바로 아래의 무대에서 펼쳐지는 라이브 공연 덕분에 음악이 삽입되는 영화의 모든 순간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 음악의 힘을 몸소 느낄 수 있었던 특별한 체험이었습니다.
필름콘서트는 그야말로 ‘듣는 영화'입니다. 오케스트라의 라이브 공연과 영화 속 배우의 말소리 및 현장음을 조화롭게 재생한 스태프들의 노력은 영화의 듣는 매력을 극대화하죠. 이런 면에서 영화 음향과 깊은 연관이 있는 사운드 엔지니어를 주인공으로 하는 ‘봄날은 간다’가 국내 최초 오리지널 필름콘서트 작품으로 가장 적합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젊은 시절의 배우 유지태와 이영애를 대형 스크린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는 점도 정말 특별했답니다.
⊙ ⊙ ⊙
색다른 영화 경험을 할 수 있는 한여름 밤의 필름콘서트는 8월 13일과 14일에도 이어집니다. 13일에는 젊은 거장 이지수 음악 감독의 ‘마당을 나온 암탉’ 필름콘서트가, 14일에는 아카데미 수상자 존 윌리엄스 음악 감독의 ‘E.T’ 40주년 기념 필름콘서트가 개최되니 절대 놓치지 마세요!
-
- 누구를 위해 총은 울리나.
이 글은 영화 [355]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 이제 뭐해?"
영화 [무뢰한]에서 자신의 분량 촬영을 마친 대배우 전도연이 울먹이며 한 말이라 했다.
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 연기력을 가진 그녀에게 마저도 충무로는 쉽사리 작품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성이라는 것이 21세기인 지금도 이렇게 장벽이 된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에피소드였다.
그러나 PC(Political Correctness)는 영화판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여성 영화라는 타이틀을 가진 많은 작품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여태까지 억눌려 있던 여성들의 서사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런 흐름은 조금씩 목소리를 높여 자신들의 파이를 키우기 시작했다.
이제 남자가 없어도, 혹은 남자들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액션 영화들에서도 여성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이미 [미스 슬로운]과 [제로 다크 서티]에서 액션뿐만이 아니라 지략까지 확인받은 제시카 차스테인을 앞세운 것만 봐도. 영화 [355]가 얼마나 이 흐름에 정점을 찍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다.
세계 5개국의 요원들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 모였다는 설정에서 시작하는 영화 [355]가 가진 세 가지 포인트들을 리뷰로 정리해 보았다.
지킬 자격이 없는 자들의 공허한 총성.;과연 무엇을 지키는가.
사진출처:다음 영화정확하게 케이퍼 무비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팀을 이뤄 무언가를 탈취해 내는 영화의 특징답게, 영화 속 주인공들은 각각의 포지션에서 최고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로 이뤄져 있다. 단지 자신의 주특기에 따라 전방에 나서는가 아닌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그리고 이런 역할의 차이는 각 캐릭터의 "지켜야 할 존재"의 유무에서 온다.
명백하게 지킬 것이 있는 그라시엘라(페넬로페 크루즈)와 카디자(루피타 뇽오)는 현장에서 은퇴해 더 이상 "총질"을 하지 않거나 상담 정도의 역할을 맡고 있고, 자신만이 지켜야 할 전부이자 무기인 마리(다이앤 크루거)와 메이스(제시카 차스테인)은 무차별 공격 캐릭터에 가까운 것을 통해 알아챌 수 있다.
그러나 총을 들지 않으려 하던 카디자가 연인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 총을 잡고, 자신의 성향과는 맞지 않지만 어쨌거나 함께한 동료를 지키기 위해 겨우 흉기를 사용하는 그라시엘라를 보면. 그녀들이 자신의 일생을 바쳐 지키려 하는 것이 얼마나 한 사람의 캐릭터를 잘 바꿔놓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문제는 이 지켜야 할 "무언가"의 리스트에 팀 355가 스며들게 하는 과정이 그다지 자연스럽지 않다. 너무 급작스럽다는 표현이 좀 더 알맞을 것 같다.
마리와 메이스는 만나기 전에도 각자가 속해있던 단체에서 황소고집으로 유명했으며, 서로 죽인다 해도 그 어떤 어색할 것도 없는 사이인 채로 만나게 된다. 팀 355에 합류한 과정까지는 세계 평화를 위해서라고 치부하며 넘어갈 수 있겠으나. 그녀들이 작은 임무 후 펍에 모여 맥주와 함께 개인적인 수다를 떠는 장면은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서로에 대한 믿음을 급속도로 쌓아 올렸다고 퉁치기엔 그들 사이의 서사가 너무 가볍고 형식적이라. 오히려 영화 앞부분에 공들여 쌓아올린 갈등이 모래성처럼 허망하게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또한 지켜내겠다고 다짐한 세계 평화는 영화 내에서 조금은 부가적으로 느껴진다. 위기의 크기나 심각성을 주인공들이 오롯이 견뎌내며 파이널 빌런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기에, 마지막 전투에서 느껴야만 했을 비장함은 팀 355의 완전체가 모이는 속도만큼이나 느리고 산만하기만 하다.
세계 평화는커녕 영화 한 편마저도 지켜내지 못할 듯한 그녀들의 활약을 보며, 차스테인이 갈겨대는 총소리가 참으로 공허하게 느껴졌다. 대체 누구를 위해 총은 저렇게 울어야만 했을지는 알 수 없다.
여성 영화?;그 자격도 없다.
사진 출처:다음 영화여성들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
혹은 남성에게 "뒤지지" 않는 액션 영화를 보여주겠다는 다짐은 영화 전반에 잘 녹아 있다. 차스테인도 훌륭하지만 영화 [355]에서만큼은 다이앤 크루거의 압승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마치 터미네이터처럼 목표를 위해 돌진하고, 방해하는 모든 것은 지게차로 밀어버릴 배짱도 가지고 있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그녀의 능력 또한 영화에서 십분 발휘되기에 영화가 진행될수록 심리적인 축이 차스테인에서 다이앤에게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덕분에 액션 시퀀스에서 질 것이다. 혹은 밀릴 것이라는 생각보다는 든든하다는 믿음이 마음 두둑이 쌓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이들의 염색체에 들러붙어 절대 떼어 버릴 수 없는 성별을 꼭 한 번은 보여줘야 한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은 것만 같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남자에게"배신 당해 울고, 그들을 모이게 한 요소가 배신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을 너무 쉽게 믿으며, 높은 힐을 신고 뛰어다닌다. 드레스를 입어 반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미인계도 빼먹지 않는다.
무엇을 말하려는지는 알겠으나, 문제는 그 어떤 것도 입 밖으로 꺼내 시원하게 말하지 못하고 입안에 맴도는 어린아이의 투정 마냥 임팩트가 없다. 그들이 헤어지는 마지막 장면에서 후련함이나 뭉클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점이 영화가 지닌 어정쩡함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 더불어 후속편을 암시라도 하는 듯한 주인공들의 대사는, 마음 가득 말라붙기 시작한 눅진하기 짝이 없는 탄산음료 같은 찝찝함을 선사한다.
그 어떤 여성을 대변할 수 있는 영화도, 후속편이 만들어질 만큼의 후련함을 주지도 못한 영화이기에 이 거북함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페어플레이 하자;그게 무엇이든
사진 출처:다음 영화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자신이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선생님이 알고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청중이 안다 했다.
부족한 언어 실력 때문에 분량이 적을 수도 있고, 그나마 있는 대사마저도 어색할 수는 있다. 하지만 존재감이 너무 부풀려져 청중, 아니 관객들이 영화를 보기 전 부터도 왜 나오는지 알 수 없는 캐릭터가 영화에 존재한다.
극 중 린미셩(판빙빙)은 세계 제3차 대전을 일으킬 수도 있는 위험한 물건의 암호를 푸는 정도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할은 카디자도 충분히 해 낼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으므로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니다.
또한 (흑화 한) 세바스찬 스탠은 그 물건을 얻기 위해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쏘아 죽일 만큼 잔인하지만, 어째서인지 이미 장치가 활성화되어 쓸모없는 역할이 된 린미셩을 곱게 방에서 내보내는 자비를 베푼다.
마치 동양의 모든 신비가 거기에 담겨 있는 듯한 급작스러운 차(Tea) 문화의 전파와 독(Poison)의 효능 검증도 영화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팀 355가 들이닥쳐도 아무 문제가 없었을 정도의 보안 상태가 엉망인 세바스찬 스탠의 집이었다면 총알 한발씩으로도 이미 그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이렇게 린미셩은 단지 결승전에서 가장 가까운 곳부터 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버젓이 포스터에 등장하고 있다. 포스터 상으로 보면 다이앤 크루거와 같은 위치에 놓인 그녀가 곱게 보일 리가 없다.
영화를 위해 노력한 모든 사람들의 그 애쓰는 마음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등장하는 것만으로 다른 인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은 불공평하다. 영화에 "끼워 넣기" 위한 안간힘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 믿겠지만, 애석하게도 그 생각은 머리부터 숨기고 보는 닭들이나 하는 생각일 뿐이다. 결국은 이 모든 아집의 합이 자신이 출연한 영화의 품격마저도 함께 떨어뜨리는 것을 왜 매번 모르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그것이 영화이든 겨울 운동회이든 상관없이.
페어플레이하자.
청중들이 외치는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면, 그나마 유지했던 연주자의 자리에도 앉을 수 없을 것이다. 아니면 혼자만 남게 되던가.
마치면서
영화를 보는 내내 차여신의 절규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모든 것을 끝낼 것처럼 치명적이고 전투적이었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녀의 고군 분투는 영화를 살리기 위한 안간힘의 향연임이 너무도 자명했다.
게다가 다이앤 크루거가 이렇게 홀대받는다는 느낌을 주는 영화는 난생처음이라 많이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그 어떤 요소 하나 제대로 자기주장하지 못하는 영화 속에서 배우들이 해 온 노력에만큼은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손뼉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니 속편 생각은 속 편하게 접어두시길 바란다.
[이 글의 TMI]
1. 다이앤 크루거 진짜 멋있었음.
2. 그 와중에 다이앤이 하는 독일어 들려서 신났음.
3. 그렇게 그 신남이 영화에서 신나는 마지막 포인트였다고 한다.
#최신영화 #영화리뷰 #영화355 #제시카차스테인 #다이앤크루거 #페넬로페크루즈 #루피타뇽오 #액션영화 #네이버인플루언서 #브런치작가 #영화추천
-
- 황폐한 인간의 엇갈리는 역사, 닮고도 다른 찬란한 외면
※영화 〈피닉스〉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945년 베를린, 칠흑 같은 밤 검문소를 지나는 차의 조수석에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넬리가 앉아있다. 군인들은 레네의 만류에도 끝까지 붕대에 감춰진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자 한다. 회유와 설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붕대 속 넬리의 얼굴을 본 군인은 사색이 되어 그제야 빗장을 열고 두 사람을 보내준다. 넬리를 포함한 그의 모든 가족이 죽은 줄만 알았던 레네는 재산을 대신 관리하던 중 생존한 넬리를 데려와 돌본다. 소식을 알 수 없는 남편 조니를 찾아 도시를 헤매던 중 클럽 ‘피닉스’에서 잡일을 하는 그를 발견한다. 하지만 전쟁이 아니었다면 살아있었을 다른 사람의 얼굴을 가진 넬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조니, 혹은 요하네스는 아내의 재산을 노리고 넬리에게 아내인 척 연기를 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넬리는 이를 수용한다.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궤적에는 익숙한 몇 개의 발자국이 반복된다. 간절한 사랑은 누군가의 정처 없는 방황을 이끌고, 오인과 엇갈림, 배회의 이미지는 일관된 메시지를 내포하면서도 과거와 현재, 인간과 시간에 관한 우화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정중동의 서사가 진행되며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뻗어가는 영화의 생명력은 독일 영화의 부흥기를 이끄는 하나의 경향으로 자리매김했다. 기꺼이 자신을 던져버릴 듯 간절한 사랑의 감정과 알아보지 못하는 상대방 사이의 불협은 과거의 표면에서 배회하는 인간과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한 공간에 들여놓으며 경계를 흐리게 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역사의 고통을 돌아보지 못하고 과거의 인간으로 남은 군인들은 현존의 외형만으로 세상을 판단한다. 영화에서 넬리가 처음 마주하는 이들이 과거의 흔적인 전쟁을 암시하는 군인인 점도 눈길을 끈다. 하지만 넬리는 다르다. 영화 속 가장 연약한 존재에서 빛을 따라가 모든 경계와 고민을 응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된 그는 외면 外面을 외면한 채 과거의 역사와 사랑, 억압을 모두 껴안은 채 당당히 해방의 길로 나서는 가장 강한 인간이 되어 세상을 박차고 나간다.
공포와 불신의 혼돈을 파고드는 악의 정체
인류를 혼돈에 빠뜨린 구체제를 청산하기 위한 법정에 선 아이히만을 바라본 한나 아렌트는 희생자를 향한 증오와 분노가 집단 학살의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악한 의도나 동기가 없었고, 단지 수직적인 명령에 불복종했을 때의 ‘잘못’을 하지 않기 위한 일이므로 ‘잘못’이 아니다.
자신에게는 누군가를 죽일 배짱도 없을뿐더러 그러한 끔찍한 일을 막을 어떠한 힘도 가지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공무를 수행하는 하급 관료의 평범한 책임의식으로부터 끔찍한 살인이 벌어질 수 있다는 모순을 아렌트는 ‘생각 없음’으로 초래한 ‘악의 평범성’이라고 명명했다. 근대적 이성의 준칙으로 완성된 정언명령은 그 본래 목적과는 달리 인간이 만든 ‘보편적 입법’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히틀러는 주어진 절차에 따라 집권당 총수가 되고, 헌법을 고쳤고, 법질서를 준수하며 20세기 가장 잔혹한 독재자가 되었다. 그리고 무해한 사람들은 기계적 순응과 제한된 선택지로 합리적인 악의 탄생을 함께 만들고 손뼉 쳤다. 관료주의의 폐해는 여기에 있다. 시민들은 자신의 행동에 어떠한 감정적 인식도, 이성의 비판도 없이 주어진 절차에 맞으면서도 가장 바람직한 변수의 배열을 찾아내는 데 급급하다. 영화 속 넬리는 왜 자신을 연기해야 하는 비상식적인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을까. 남편 조니가 그의 재산을 획득하는 가장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방법은 죽은 줄만 알았던 넬리가 살아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으로 정한 순위와 절차와 재산상 이득을 모두 취하기 위해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아이러니는 최고 수준이라고 여겨졌던 근대 관료제의 합리성과 효율성이 만드는 공백에서 비롯된다. 여기에 진리로 믿었던 우리의 근대적 이성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히틀러가 아우슈비츠를 만들 때도 그랬다. 타인의 적당한 고통과 불편으로 다수가 행복하다면 그 희생은 별 저항 없이 용인되었다. 그렇게 인간이 만든 악은 같은 인간을 향해 극악한 범죄와 살인이라는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폭격을 맞은 베를린의 거리는 어느 하나 성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시민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광기의 나치즘에 휘말려 피해자와 가해자, 동조자와 방관자로 구분되었다. 유대인을 비롯한 소수자의 박해와 인종주의적 차별은 시민들이 오늘의 생존을 위해 어제의 이웃을 신고하고, 이분법적 논리에 사로잡혀 비인간적 행위를 아무렇지 않게 자행하도록 만들었다. 영화는 전쟁 이후 독일 사회의 인간 단면을 멜로드라마의 형식에 녹여낸다. 〈피닉스〉의 의도적인 기억의 공백은 방관자와 공모자가 가해자로 변모하는 과정이 상처받은 신뢰로 터져 나온 공포를 극복하거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가른다.
전쟁이 끝나자 독일의 시민들은 모든 걸 잊은 것처럼 행동한다. 얼굴을 되찾은 넬리를 마주 선 주변인들은 하나같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방관, 침묵, 동조를 해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얼버무리며 그를 위로하고, 자신도 피해받았음을 성토하고, 더는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에 자리를 피한다. 그들은 나치의 통치에 얽힌 시대의 가해자이며 피해자이다. 잡혀가는 유대인을 묵인하며 신고하는 대신 일상을 평온하게 유지했던 끔찍한 시절에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굴레는 베를린의 전 시민에게 씌워진 비극이다. 적어도 공포를 당당히 대면하지 못하는 영화 속 사람들은 지배구조의 억압에 동참하는 행위자들이라는 과거로부터 능동적인 자기 형성을 이루지 못한다. 조니 역시 마찬가지다. 역사를 잊고 과거의 영광에 남겨진 나치의 부역자와 피해자의 현현처럼 보이는 조니와 넬리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를 허물고 더 깊은 이해의 단계로 넘어선다.
영화에서 전쟁의 피해와 고통을 이야기하는 주체는 넬리와 레네 뿐이다. 하지만 같은 유대인으로 둘의 인식은 사뭇 다르다. 넬리는 끔찍한 수용소의 삶에서 겨우 벗어난 생존자다. 조니가 일반화된 대상으로서의 피해자성을 주장할 때 넬리는 자신이 겪은 경험을 전달하며 과거의 기억을 딛고 스스로의 정체성과 가치를 찾아간다. 하지만 레네는 박해를 피해 베를린을 떠나 영국으로 이주하여 살아남았다. 인간의 처참한 기억을 간직한 넬리와 같은 처지에 놓이지 않았던 레네의 선택은 기억의 공백에 스미는 새로운 악의 탄생을 예고한다. 1945년 그는 유대인이라는 피해자 정체성을 늘 강조하면서도 넬리와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계획을 세운다. 우리는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한 유대인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을 세웠는지 알고 있다. 그들은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성경의 가르침을 빌미로 팔레스타인을 침공한다. 학살과 억압을 되돌리는 미래의 결론은 위치만 바뀐 전쟁범죄의 반복이다. 전쟁이 초래한 불신의 벽에서 좌절하는 레네는 목표를 채 이루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외출할 때마다 핸드백 안에 늘 권총을 지니던 레네는 평범한 악의 공포를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자주와 민족주의로 승화한다. 나치 정권과 그 부역자를 향한 강한 저항과 분노에도 외로움을 이기지 못했던 레네는 타인과 자신마저 신뢰하지 못했다. 누구든 아무 이유 없이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공포는 이렇게 또다시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든다.
삶을 향해 걸어가는 찬란한 외면의 커튼콜
조니가 법의 허점을 악용해 과거의 배우자를 가장한 연극을 꾸미는 범죄를 저질렀다면, 아이히만은 자신의 평안과 태만, 일상적 행위의 반복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었다. 전자와 달리 후자의 행위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겠지만, 법적으로 책임을 부여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여기에는 아렌트가 간과한 본질이 빠져있다. 그는 아이히만의 범죄사실을 사유 능력의 상실이라는 책임의 부재에도 반인륜적 범죄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죄를 주장했지만. 실제로 아이히만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범죄사실을 숨기기 위해 평범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관료로 자신을 변호했지만, 수사 과정에서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그는 유대인 학살에 능동적인 임무를 수행했고, 반유대주의 신념을 철저히 지켰던 인물이었다. 최소한 아렌트가 보았던 법정 연극은 그를 속이기에 충분했다. 인간이 만든 악이라는 불가항력은 들키지만 않는다면 언제든 자신의 행동을 숨길 수 있다. 다수가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언제든 악은 모습을 감추고 서서히 몸집을 불릴 것이다. 넬리는 조니와 함께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가며 거짓으로 조니가 원하는 넬리의 모습을 만들어간다. 걸음걸이와 필체를 연습하고, 새로운 알리바이를 만들며, 기차에 내리고 지인들을 만나는 장면을 만들고자 그 전날 다른 지역에서 하룻밤을 묵는 정성까지 들인다. 누군가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많은 진실이 가려지고 거짓은 커진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난 부분에서만 유효하다. 영화는 외면의 교체와 상실을 경험한 주인공을 내세워 역설적으로 이를 극복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크리스티안 페촐트가 보여주는 오인의 테마는 이름이나 얼굴과 같은 외적 표상을 부정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자기인식의 도달을 유도한다. 넬리는 집도의에게 자신의 원래 얼굴로 복원해 주기를 요청했지만, 의사는 아무리 똑같이 얼굴을 고치려고 해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며 거절한다. 이미 영화는 덧씌워진 얼굴에 남겨진 시간을 망각하려는 어떤 시도도 무의미하다는 예고된 결말을 암시한다. 어떤 얼굴이든 그것이 시간의 궤도 안에 들어선 인간의 것이라면 누구나 과거의 기억에 머무를 수 없다. 조니는 과거의 기억 속 넬리의 대상화된 이미지를 제시하여 이를 이용해 앞으로의 미래를 살아가고자 한다. 겉치레의 변화만으로 타인과 제도를 속일 수는 있더라도 인간의 기억과 내면, 그 안의 본질을 바꿀 수는 없다. 틀어지는 계획을 인정하지 못하는 조니는 점차 과거의 넬리와 겹쳐 보이고 마는, 살아있는 넬리를 의식하면서도 외면한다.
아이히만의 가짜 연극의 피해자가 된 아렌트처럼, 넬리 역시 조니가 제작하는 연극의 공동주연이 되어 그의 배역이 진정한 자신의 얼굴이라고 착각한다. 재산을 차지하려는 목적하에 그들은 연극의 배우이자 관객이 된다. 브레히트는 서사적 연극론에서 관객이 연극을 이해하는 세 단계의 과정을 제시한다. 처음은 연극과 배우를 가장 가깝게 동일시하고, 다음은 관객과 배역을 냉정한 자세로 소외시키며, 마지막으로는 둘 사이의 통합적 인식의 발현으로 연극의 사회적 의미를 포착하는 것이다. 〈피닉스〉는 연극의 변증법적 작품해석론을 달성한 넬리와, 그렇지 못한 조니를 나란히 세운 뒤 과연 인간은 역사를 딛고 넘어설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 그리고 그 안에 작지만 강력한 희망을 숨겨놓는다. 계획의 주 무대인 조니의 방은 한정된 공간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등장인물 간의 합으로 연극적 상황을 연출한다. 넬리 본인을 연기해야 하는 넬리는 조니의 상상 속 자신의 이미지를 연기하며 조니의 상상 속 대상에 깊이 이입한다. 넬리의 인식이 바뀌는 순간은 남편이 자신을 고발하고 대신 풀려난 것이라는 의심에서부터 시작한다. 감추어진 진실이 드러나면서 배역과 끊임없는 소외를 통해 대상과 조니, 그리고 자신에게까지 거리를 둔다. 이 과정을 통해 인간 상호 간의 관계와 그 관계를 둘러싼 사회적 상황을 직시하고 억압받는 자신을 발견한 넬리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마지막 시퀀스에서 스스로 무대와 관객을 만들어 ‘세 번째 연극’을 거행한다.
조니의 패착은 첫 단계를 의도적으로 건너뛰어 버렸다는 점에 있다. 그는 처음부터 넬리의 재산을 갖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어차피 이만 달러 정도 주고 떠나보낼 생각이었을, 죽은 넬리를 연기하는 이 여자와 깊은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 배우의 첫 번째 조건인 몰입을 애초에 상정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 관객에게는 저 여자는 넬리처럼 보여야 한다. 넬리는 대상화된 본인을 연기하면서도 끊임없이 조니에게 자신이 그의 진짜 넬리라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하지만 조니는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넬리의 존재를 의심하고 인지하면서도 그가 넬리가 아님을 애써 상기해야 하는 이상한 관계를 형성한다. 그리하여 이 몰입 없는 연극의 거리 두기를 계속한다면, 세상은 절대 조니의 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마지막 순간, 이 연극에서 넬리는 처음으로 제작자의 자리에 선다. 조니의 극본대로 만들어진 자신의 삶을 자신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던 그는 상처와 트라우마를 벗어나, 조니가 지휘하던 연극의 지휘봉을 빼앗아 자신이 깨달은 바를 게스투스적으로 표현한다. 영화 속 연극은 낯선 나와의 대면으로 역사를 직시하게 만든다. 넬리가 전하는 마지막 노래 ‘Speak Low’는 너무 빠른 순간을 한탄하다 어느 순간 너무 늦어버린 시간을 이야기한다. 넬리와 조니에게는 자신을 돌아보고 멀어지는 모든 순간을 받아들일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한 사람은 이를 성실히 이겨냈고, 다른 한 사람은 피하기만 급급했다. 그리고 커튼콜의 시간은 그렇게 그들에게 다가왔다. 넬리는 진정으로 자신을 발견하며 조니를 떠난다. 두렵고 낯선 나와의 대면은 지배적 담론에 고착된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완벽한 장면인 마지막 시퀀스는 배우로 하여금 무대 위의 말과 몸짓으로 스스로 깨어있음을 강조하는 자기 반영적 메타 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성경 속 욥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에 이유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신은 명확한 근거 대신 믿음이라는 무기로 모든 상황을 이해하라고 말한다. 모든 것을 바꾸는 결정은 너무 신속하고, 예측할 수 없다. 자연이라는 이름의 악은 그렇게 인간의 삶을 어떤 의도도 없이 바꾼다. 욥은 끊임없이 내 삶의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에 관해 질문한다. 하지만 완벽한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인류의 역사에는 수많은 우연이라는 악이 존재한다. 전쟁 역시 그중 하나다. 인간이 증오와 분노로 같은 인간을 살해하는 끔찍한 행위는 필연적으로 고통이 주어지지 않은 평범한 이들에게 마치 자연재해와도 같이 아픔을 남긴다. 한 사람의 얼굴을 바꾸는 선택 또한 레네의 단순한 실수로 우연히 만들어진다. 피아노를 치던 조니가 마침내 넬리를 알아보는 순간은 그의 노랫소리와 팔뚝의 일련번호, 겉으로 드러난 옷가지나 얼굴이 아닌 감춰져 있던 것들이었다. 자신과 타인, 그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역사를 아우른 후에야 비로소 인간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것들, 예를 들자면 상대를 외면할 수 있는 넬리의 용기 같은 것들이 삶에 다가온다. 과거에 매여 현실을 외면한 채 주어진 삶을 바꿔보려 했던 조니에게는 절대 찾아올 수 없는 순간을, 넬리는 밝은 빛을 향해 걸어가며 당당히 증명한다.
-
- [2021 CINEPICK AWARDS] 최고의 외국영화를 pick하라!
? 씨네픽 연말 EVENT!
2021 국내 개봉 외국 영화 중
최애 3편에 투표하면
커피 기프티콘이???
영화 정보도 얻고 상금도 받고!
영화를 즐기는 새로운 방법, 씨네픽!
? 기간 : ~ 12월 31일
? 응모는? 씨네픽 어플에서 부탁드려요
? 씨네픽 큐큐(Quote Quiz) 절찬리 진행중!! ?
? 씨네픽 숏-퀴즈 절찬리 진행중!! ?
아이폰 다운로드 https://apps.apple.com/kr/app/%EC%94%...
안드로이드 다운로드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
#씨네픽 매주 목요일 밤 11시 59분 오픈
#CINEPICK #영화 #추천 #박스오피스 #예측 #상금 #20만원 #클릭비 #김태형 #오윤희
TRANSLATE with xEnglishTRANSLATE withEnable collaborative features and customize widget: Bing Webmaster Portal
-
- [Movielog #18] 아동학대를 막는 가장 좋은 방법
영화 고백 시사회에 다녀왔습니다.
아동학대를 다루도 있는 영화여서 어둡고 슬픈 영화인데요.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사회 제도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면서
주변의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긎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도 알려주는 영화입니다.
박하선 배우의 연기와 하윤경 배우의 연기가 좋아요.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영화여서 많은 분들이 불편하겠지만 꼭 보면 좋을 것 같아요,자세한 내용은 영상을 참고 하세요.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
-
- 영화 <낫아웃> 메인 예고편
고교 야구부 유망주 광호는 프로야구 드래프트 선발에서 탈락한다.
야구를 계속하기 위해 대학 진학을 원하는 광호.
하지만 광호의 선택은 동료들과 보이지 않는 갈등을 만들고,
기댈 곳이 없어진 광호는 친구 민철과 함께 가짜 휘발유를 판매하는 불법적인 일에 가담하게 된다.
-
- 영화 <루시드 드림> 예고편
제작자에게 잔소리를 듣던 감독은 조명사고로 인해 쓰러지게 되고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여러 장르의 꿈을 꾸게 된다.
기쁜 날을 빙자해서 돈을 사기 치려는 세계, 분노로 직장 상사를 죽이는 범지진, 사랑으로 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엄마, 기사가 실종되는 노선을 운행하게 된 아총의 공포가 즐거움으로 뒤바뀌는 꿈.
감독은 이 네 가지의 꿈을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