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예슬2021-11-15 23:00:50
때로는 자신만의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 -<워터멜론우먼>
영화 워터멜론 우먼 리뷰
-워터멜론우먼
감독: 쉐릴 더니 / 배우: 쉐릴 더니,귀네비어 터너
이 영화는 흑인 레즈비언 감독이 만든 흑인 레즈비언 영화이다. 또한 감독님이 배우로도 출연하신 작품이다. 전체적인 내용은 영화 감독 지망생인 쉐릴이 과거에 흑인 가정부로 자주 나왔던 배우 이름 조차 명확히 찾을 수 없는 ´워터멜론우먼´의 흔적을 찾아 다큐를 만드는 내용이다. ´워터멜론우먼´은 알고보니 자신이 출연한 백인 여성 감독과 사귀는 레즈비언이었다. 쉐릴도 레즈비언이고 나중에는 백인 여성과 사귀게 된다. 근데 워터멜론우먼의 흑인 여자친구가 그 백인 감독은 워터멜론우먼에게 안좋았던 기억이라고 하는 증언을 듣는다. 그 후 쉐릴은 백인 여자친구와 인종의 벽을 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다. 쉐릴이 만든 다큐 속 워터멜론 우먼과 쉐릴이 비슷한 상황에 처하는 지점이 재미있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계속 보고 있으면 저 다큐 속 워터멜론우먼이 실제로 있는 인물인지 아닌지 계속 궁금증을 가지고 이 영화를 보게 된다. 그만큼 감독님이 실제 다큐 처럼 정말 잘만드셨다. 마지막에 이 워터멜론우먼이 허상의 인물이고 페이크 다큐라는 점이 밝혀진다. 이 영화의 연출이 다큐와 영화 그 경계선에 있는데 최근에 나온 영화가 아닌가 싶을 만큼 세련되고 소위 말해서 요즘 먹힐 것 같은 편집이었다. 쉐릴이 만든 워터멜론우먼은 허구지만 그렇게서라도 어딘가 있을법한 잊혀진 흑인 레즈비언 배우를 찾고 싶었던 감독의 마음이 담겨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또한 흑인 레즈비언 감독으로서 본인의 이름이 잊혀지면 누군가가 찾아주길 바라는 소망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감독님이 마지막에 말씀하신 것처럼 아무도 우리를 기억해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허구의 인물을 만들어서라도 자신만의 역사를 만들어 기록으로 남겨야 그 후대 사람들이 우리를 기억해줄것이다.
슬펐던 것은 이 영화에서 쉐릴이 그토록 찾고 싶어 한 워터멜론우먼의 이름이 지금 이 영화를 감상한 후 시간이 지나니까 내가 기억이 안난다는 것이다. 이름이 무엇일까 정체가 무엇일까 계속 몰입하면서 봤는데 영화가 끝난 후 내 기억 속에서 그의 이름이 휘발성처럼 날아가버려서 내 자신에게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워터멜론우먼의 이름이 있던 캡쳐본을 발견했다. 그의 이름은 페이 였다!!!
1990년대에 이런 센스있고 유쾌하고 재밌는 레즈비언 영화가 나왔는데 왜 아직도 이런 분위기에 영화가 적은지 아쉽다.
이제는 고통받고 비극을 맞는 레즈비언 서사가 아닌 이렇게 재밌게 풀어가는 워터멜론우먼을 이을 영화를 기대한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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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을 통째로 연기한 여자, 연기를 삶처럼 사는 여자
전에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유부녀인 선생이 13살의 제자와 바람을 피웠고, 감옥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슥 읽고 지나칠 때는 쉽게 평가할 수 있다. 누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에 대해 가볍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 <메이 디셈버>는 그러지 않는다. 그들의 관계를 오래도록 깊게 바라본다. 그리고 이내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이 과정의 호흡이 상당히 길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조금 지루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도 이렇게 디테일하고 섬세한 감정의 변화를 보여주는 영화는 조금 힘들긴 하다. 눈여겨둘 부분이 굉장히 많아져서.
제목이기도 한 <메이 디셈버>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연인을 칭할 때 쓰는 말이다. 이 제목의 주인공인 그레이시와 조가 자기들의 이야기를 영화화하겠다는 배우, 엘리자베스를 기꺼이 집에 초대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엘리자베스가 처음 그들에게서 본 모습은 가족과 이웃이 모여 뒷마당에서 즐겁게 어울리는 장면이다. 바비큐를 굽고, 핫도그를 만들어 먹고,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아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고... 아마 이것이 부부가 사회에 보여주고 싶었던 모습일 거라 생각한다.
"우린 행복해요! 우린 서로 사랑한다고요!"
분명 그들은 문제가 없어 보인다. 다른 이웃들도 그들에 대해 칭찬 일색이며, 아픔을 건드리지 말라는 충고까지 덧붙인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두드린 문은 의외로 쉽게 열린다. 그녀는 문 앞에 놓인 택배를 들고 가서 전해준다. 아마 부부의 관계를 모욕하는 혐오의 메시지가 담겨있을 택배를, 그레이시는 별거 아니라는 듯 버려 버린다. 하지만 그날 밤, 조는 침대에서 홀로 숨죽여 울던 그레이시를 안아준다. 여전히 그들은 괜찮지 않고, 완전히 행복하지만은 않은 것이다.
불편한 노크로 그들의 일상을 침범한 엘리자베스가 영역을 확장해나가자, 그레이시는 점차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다. 단단해 보였던 그녀는 자신의 케이크를 매번 주문해 주던 이웃이 이사를 간다고 주문을 취소해버리자, 어린애처럼 엉엉 울부짖는다. 단순히 사랑 앞에서 아이가 되어 버리는 건지, 그녀가 불안정한 상황인 건지 종잡을 수가 없을 정도로.
그 사이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이야기에 깊게 심취한다. 점차 그레이시와 비슷한 차림을 하고 비슷한 화장을 하며 말투, 손짓과 행동까지 비슷해진다. 게다가 놀라울 정도로 빼닮은 외모 탓인지 사람들은 엘리자베스를 볼 때마다 '닮긴 닮았네'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시종일관 멍한 상태로 하루를 보내는 조는 엘리자베스와 만날 때면 제법 또렷한 눈을 한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자의 젊었을 적을 보는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 걸까? 속마음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말이 없는 조는 엘리자베스에게 자기 직장을 보여주기도 하고, 산책을 하며 대화를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드디어 오랫동안 자신이 숨겨놓았던 그레이시의 편지를 건네기까지 한다.
이 과정에서 감정에 휩쓸린 두 사람은 관계를 맺지만, 이내 자기 인생을 '이야기'라고 부르는 엘리자베스에게 질려버린 조는 그녀를 떠난다. 그리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결국 그레이시와 말싸움을 하게 된다.
"왜 얘기를 못하는 건데?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사랑이 맞는다면 말이야!"
"무슨 소리야? 네가 날 유혹했잖아!"
폭발한 조의 외침에 그레이시는 교묘하게 조에게 탓을 돌린다. 그동안 그레이시 앞에서 한 번도 어린애 인적 없었던 조는, 어린애이고 싶은 마지막 발악에 대응해 주지 않는 그레이시에게조차 질리는 듯하다.
그 사이, 편지를 읽고 그레이시와 완전히 동화된 엘리자베스는 홀로 독백 연기를 한다. 그레이시의 편지를 마치 조에게 말하는 것처럼 읽으면서.
"사람들은 우리가 선을 넘었다고 해. 하지만 그 선은 대체 누가 그린 걸까?"
이 대사가 영화의 핵심인 듯 아닌듯한 중요한 맹점이다. 그레이시는 영화에서 시종일관 남들을 가스라이팅 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황을 이끌어가려는 것이다. 어린 학생이었을 조에게 '선'을 운운하며 '잘못된 것은 우리가 아니라, 내가 아니라, 사회다'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조가 생각해 봐야 했을 문제에 대해 덮어버린 것이다.
이제 그 메시지를 엘리자베스에게 주어버린 조는 철장 밖으로 나온 나비가 되었다. 한 번 진실을 바라본 순간부터는 다시 몰랐던 때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불안정한 사람들은 정말 위험하죠. 나는 아주 단단해요."
하지만 그레이시는 여전히 자신이 보고 싶은 모습만을 믿는 듯하다. 그 지점에서 우리는 영화 앞으로 되돌아가 엘리자베스의 대사 하나를 더 떠올리게 된다.
"그러다 보면 점점 헷갈려. 내가 좋아하는 연기를 하고 있는 건지, 싫어하는 연기를 하고 있는 건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배역을 맡아요?"
"회색 지대에 있는(도덕적으로 모호한) 게 훨씬 흥미로우니까."
성관계를 맺는 연기를 해봤냐는 짓궂은 질문에도 엘리자베스는 진지하게 대답한다. 나체로 부딪히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리듬이 생기는데, 그 리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편이라고. 연기인지 실제인지 헷갈리게 된다고. 그레이시와 조의 삶은 이러한 리듬에 맡겨진 연기는 아니었을까. 어떤 쪽이 진실인지는 생각하는 것보다는, 좋은 쪽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 것이 훨씬 쉬우니까.
더불어 엘리자베스 역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자기 자신을 뚜렷하게 정의 내리거나 온전히 안정적이고 싶지 않아 하는 심리 때문에. 영화 초반에 엘리자베스는 남자친구와 통화를 하지만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고, 사랑한다고 말을 끝맺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리는 등 관심이 없는 태도를 보인다. 반지는 끼고 다니지만, 아직 결혼 생각은 없다고 말한다. 이처럼 엘리자베스는 '연기'라는 매개를 통해 '도덕적으로 모호한' 사람 그 자체가 되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영화를 다 보게 되면 모호해진다. 누가 잘못을 했고, 누가 피해자인지. 사회가 말하는 대로 받아들이면 그것이 정답이 되지만, 그들의 화학작용을 그대로 보았을 때 판결은 더욱 어려워진다.
다만 나는,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서도 그레이시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치울 수 없었다. 그녀가 아동 성범죄자라서가 아니다. 조가 피해자라서도 아니다. 그녀가 조를 비롯한 다른 주변 인물들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가 성인이 될 때까지 이 비밀을 지켜야 해."
정말 조를 사랑했다면 성인이 될 때까지 비밀 연애를 할 게 아니라, 조가 성인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만나도 마음이 변치 않는지 스스로 확인할 기회를 주었어야 맞는 것이다. 물론 누구의 강요도 없이 조가 자발적으로 그레이시가 사회와 격리되어 감옥에서 지내는 시간을 전부 기다려주긴 했다. 하지만 자녀가 생겼고, 자녀를 조가 한 지붕 아래서 키웠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대목이다.
교묘한 가스라이팅의 대가인 그레이시보다 더 무서웠던 건 엘리자베스였다. 정확하게는 엘리자베스의 욕망이랄까. 그녀는 진심으로 그레이시가 되고 싶어 한다. 그건 연기에 대한 열정이 아니다. 그저, 그 도덕적으로 모호하고 법이라는 잣대로는 판단 내리기 어려운 그 인물 자체가 되고 싶었을 뿐. 실제로는 자신이 저지르지 못할 일들을 하며 즐기는 듯한 모습이 소름 돋기도 했다.
하지만 삶을 통째로 연기한 사람과 연기를 삶처럼 사는 사람, 두 사람 다 무섭긴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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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 마침내 돌아온 영웅들
1. '슈퍼맨(헨리 카빌)'의 비명 소리가 온 세상에 울려 퍼진다. 지구의 모두가 슬픔에 잠긴 사이 '배트맨(벤 에플렉)'과 '원더우먼(갤 가돗)'은 앞으로 닥쳐올 위기를 직감한다. 지구의 수호자가 죽었음을, 자신을 저지할 최후의 보루가 사라졌음을 깨닫고 행성을 파괴할 무기 '마더 박스'를 차지하기 위해 지구를 침공할 '스테픈울프(키어런 하인즈)'와 그 흑막인 '다크사이드(레이 포터)'의 존재를 눈치챈 것이다. 이에 그들은 슈퍼맨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의 유지를 지켜내기 위해 새로운 영웅인 '아쿠아맨(제이슨 모모아)'과 '사이보그(레이 피셔)', '플래시(에즈라 밀러)'를 찾아 나선다.
팬들의 큰 기대 속에 마침내 공개된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에 대해 영화 리뷰 사이트인 로튼 토마토의 평론가들은 다음과 같은 총평을 내렸다.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는 감독의 비전에 맞게 확장되는 거대한 장면들로 제목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며, 이 영화가 존재할 수 있도록 노력한 팬들을 만족시킨다(Zack Snyder's Justice League lives up to its title with a sprawling cut that expands to fit the director's vision -- and should satisfy the fans who willed it into existence)."
평가대로 팬들이 만족할 장면, 확장된 거대한 장면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잭 스나이더 특유의 슬로 모션에 담긴 각 히어로의 능력과 역할을 최대한으로 부각하는 액션, <맨 오브 스틸>과 <배트맨 대 슈퍼맨>의 연장선상에 위치한 Junkie XL의 음악은 눈과 귀를 즐겁게 한다. 1.33 대 1의 화면비율을 통해 전달되는 감독 특유의 다크한 영상에는 수많은 스펙터클과 상징들이 빼곡하다. 기존에 <어벤져스> 속 히어로들의 코스튬만 바꾼 듯 보였던 등장인물들도 커진 분량 안에서 각각의 개성과 매력을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 새롭게 디자인된 빌런들 역시 거대한 위압감을 선사하며 선과 악 사이에서 적절히 균형을 유지한다.
2. 그렇다면 이 환상적인 볼거리들, 거대한 컷들이 성공적으로 구현해냈다는 잭 스나이더 감독의 비전은 과연 무엇일까? 이 답을 찾기 위해서는 잠시 시선을 전작인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으로 돌릴 필요가 있다. 영화가 슈퍼맨이 둠즈데이에게 찔려 사망하는 <배트맨 대 슈퍼맨>의 결말로부터 곧장 이어지는 만큼, <배트맨 대 슈퍼맨>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를 이해할 때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가 갖는 진짜 의미를 온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배트맨 대 슈퍼맨>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현대적으로 리메이크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한다. 가장 사랑하는 친구 파트로클로스를 잃은 아킬레우스는 그 분노를 거름 삼아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를 죽인다. 그의 시체를 전차로 끌고 다니며 모욕한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자신의 막사를 찾아온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를 만난 그는 변한다. 프리아모스의 용기와 부성애에 감명받은 그는 역시 아들을 사지에 내보낸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낀다. 이에 아킬레우스는 그리스와 트로이의 휴전을 제안하고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주며, '일리아스'는 헥토르의 장례식으로 끝난다.
'일리아스'의 흐름을 <배트맨 대 슈퍼맨>은 정확히 따른다. 고담시의 수많은 범죄자와 맞서 싸우다가 가장 친한 친구인 로빈을 잃은 배트맨. 그는 어느 날 하늘에서 나타나 도시를 파괴하는 슈퍼맨을 보며 그동안 쌓아온 분노를 폭발시킨다. 이에 그는 슈퍼맨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의 발목에 줄을 묶어 온갖 고통을 준 끝에 그를 죽이려고 한다. 그러나 단지 죽여야 할 대상으로 보던 슈퍼맨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목격한 그는 먼저 세상을 떠난 자신의 부모님을 떠올리며 슈퍼맨과 휴전하고, 더 큰 위험인 둠즈데이에 맞서 싸운다. 그리고 전투에서 사망한 슈퍼맨의 장례식에서 저스티스 리그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3. 약간의 순서만 바뀐 채 일리아스의 서사를 반복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나면 <배트맨 대 슈퍼맨>이 <저스티스 리그>를 위해 남긴 두 개의 주춧돌을 알아볼 수 있다. 하나는 <배트맨 대 슈퍼맨>이 사실상 분노에 가득 찼던 배트맨이 아킬레우스처럼 인간성을 되찾아 가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배트맨의 대적자였던 슈퍼맨은 헥토르와 프리아모스가 보여줬던 것처럼 사랑, 희생, 용기와 같은 고결한 인간성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슈퍼맨의 죽음을 계기로 배트맨이 저스티스 리그를 만든다는 결론은 곧 인간다움을 잃게 될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팀을 만들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는 단독 영화에서 언제나 사랑의 힘을 강조했던 원더우먼이 배트맨과 함께 하기로 결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로 돌아와 보자. 새로운 <저스티스 리그>가 기존 버전으로부터 가장 차이를 보이는 대목은 세 명의 히어로, 아쿠아맨, 플래시, 사이보그의 서사가 보충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잭 스나이더 감독이 전작부터 만들어 온 큰 그림이 온전해진 결정적인 이유다. 왜냐하면 세 히어로는 비록 정도는 다를지언정 전작에서의 배트맨처럼 제각기 분노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아쿠아맨은 자신을 버리고, 신경을 쓰지 않은 어머니이자, 아틀란티스의 왕 아틀라나에게 분노해 아틀란티스의 일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억울하게 쓴 누명을 풀기 위해 범죄학을 공부하는 플래시는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지 못하는 그에게 크게 실망한다. 사이보그 역시 일하느라 바빠서 자신의 미식축구 경기에 오지 않고, 어머니와 자신의 교통사고도 막지 못한, 심지어 자신을 끔찍한 기계와 결합시킨 아버지를 향한 분노를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배트맨과 원더우먼을 만나며 그들이 걸었던 길을 따라간다. 분노와 실망감을 떨쳐내고 슈퍼맨이 상징하는 인간에 대한 희망, 그리고 그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기 시작한다. 아틀란티스가 스테픈 울프에게 공격당한 후 아틀란티스인들의 간청으로부터 그들의 절실함을 느낀 아쿠아맨은 슈퍼맨의 유지를 받들겠다던 배트맨을 떠올리고, 어미니의 오지창과 함께 그에게 합류한다. 플래시는 화만 유발하던 "너만의 미래를 만들어라"라는 아버지의 말로부터 세상을 구할 기회를 잡는다. 사이보그는 아버지의 희생을 눈앞에서 목격하며 그의 사랑을 깨닫고, 그가 기대대로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한 영웅의 길을 걷는다. 이처럼 새로운 <저스티스 리그>는 <배트맨 대 슈퍼맨>의 결말로부터 곧장 이어지면서 전작의 서사를 계승함과 동시에 더욱 확장시킨다.
4. 그렇기에 잭 스나이더의 촬영본 중 4분의 1 가량만 활용된 조스 웨던 감독의 기존 <저스티스 리그>에서 각각의 플롯이 유기적으로 연계되지 않고, 영화의 짜임새가 부족해 보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잭 스나이더 감독이 가족사로 인해 중간에 하차했던 2017년의 <저스티스 리그>는 각 히어로의 서사가 부족하고, 6명의 히어로가 하나의 팀으로 묶이게 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으며, 슈퍼맨의 부활을 비롯해 중요한 에피소드들이 짜임새 있게 구성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반면에 5명의 히어로가 슈퍼맨을 바라보며 인간에 대한 분노와 실망, 그로 인한 비인간적인 면모로부터 벗어나는 서사로 연결된 이번 작품은 다르다. 그들만의 힘으로는 지구와 모든 인간을 말살하겠다는 스테판 울프를 막을 수 없었던 이유, 그들이 인간의 고결함과 희망의 상징인 슈퍼맨을 되살려야겠다고 결심한 계기, 히어로인 슈퍼맨보다 한 인간인 클라크 켄트를 잊지 않았던 로이스 레인이 부활한 그를 설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전개 등은 큰 그림 안에서 물 흐르듯 유려하게 이어진다.
이처럼 '일리아스'와 <배트맨 대 슈퍼맨>의 이야기를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반복, 변형하는 각 인물의 서사와 플롯이 제자리를 찾아 가자 잭 스나이더의 비전은 화려한 액션과 Junkie XL의 웅장한 사운드트랙과 더불어 큰 전율을 선사한다. 이에 더해 로이스 레인을 잃고 분노로 타락해 지구를 파괴한 슈퍼맨에 맞서 조커를 비롯한 빌런과도 손잡은 배트맨이 등장하는 에필로그는 반복, 변형, 확장되던 히어로들의 이야기가 전복될 앞으로의 이야기를 기대케 하며 취소된 속편에 대한 아쉬움과 일말의 희망을 동시에 자아낸다.
5. 물론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다. 우선 상술했듯이 전작인 <배트맨 대 슈퍼맨>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기에 미리 관람하지 않은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2017년에 개봉한 저스티스 리그를 보지 않은 관객의 입장에서도 어떤 장면이 편집되었고, 어떠한 내용이 달라졌는지를 비교하는 재미가 하나 줄어든다.
슬로 모션이 남발되는 경향은 호불호가 갈릴 여지를 남기고, 개그 씬처럼 흐름을 끊는 장면들이 있다 보니 총 6개의 에피소드와 한 개의 에필로그로 구성된 4시간 2분의 분량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플래시가 아이리스 웨스트를 구하고, 사이보그가 자신의 능력을 하나씩 시험해보는 것과 같이 영화 전개에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 장면들도 리듬을 잡아먹는다. 또한 배트맨의 악몽, 빌런들의 집합인 인저스티스 리그를 만들려는 렉스 루터의 음모, 새로운 캐릭터인 마션 맨헌터의 등장 등은 DC 영화와 코믹스 팬들이 아니라면 흥미를 느끼기 어려운 사족처럼 보일 수 있다.
6. 한편 영화 외적으로도 주목할 지점이 있다. 사실 제작 도중에 교체된 감독의 촬영본으로 완전히 재편집한 영화가 공개된 것은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DVD나 블루레이를 출시할 때 감독판 혹은 확장판을 공개하는 것과는 또 다른 경우다. 이는 소비자인 팬덤의 강력한 요청과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며, 앞으로의 반응에 따라 소비자와 제작자의 역학 구도가 뒤바뀌는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을 수 있다.
특히 스티븐 스필버그, 크리스토퍼 놀란과 같은 스타 감독이 아니라면 편집권이 제한되어 감독의 구상이 온전히 발현되기 힘든 할리우드 시스템에 균열이 가해진 사례라는 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영화 팬들에게 상업적인 블록버스터 영화에서도 단지 트렌드를 쫓는 것 대신 다양한 색깔을 지닌 감독들의 비전이 온전히 빛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심어주는 것이다. 그 결과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는 몇몇 두드러진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탕자로서 수많은 팬들에게 축제나 다름없는 귀환을 알린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고대하던 잭 스나이더와 DC의 명예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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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 한가운데서 길을 잃어버린 별을 위해
사실은 위험해
이 영화의 주인공은 얼굴 없는 가수 그레타(키아라 나이틀리)다. 어느 날의 공연장. 친구 스티브(제임스 코든)가 노래를 끝냈다. 마이크를 넘기는 그레타. 사람 앞에 나서는 게 싫다. 싫다고는 말하지만 시선이 집중됐기 때문에 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노래를 부르는 그레타. 사람들은 그럭저럭 잘 듣는 것 같다. 군중들 속에 눈이 반짝이는 남자가 있었다. 그 사람은 다른 주인공 댄(마크 러팔로)이다. 음반 제작자인 댄. 예전에는 그래미 상까지 받았지만 현재의 그는 그냥 술주정뱅이다. 오늘을 받아들일 수 없는 남자 댄. 하지만 그레타를 바라보는 안목 자체는 녹슬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그레타에게 명함을 건네는 댄. "네 앨범을 만들어 줄게"라고 접근한다. 하지만 그레타는 음악에게 상처를 입었다. 거절하는 그레타. 하지만 댄과 술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니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음반 제작, 내일까지 고민하고 답 줄게요"라고 말하는 그레타. 그레타는 상처 입은 마음을 뒤로하고, 댄은 스스로를 위한 노래를 만들어야 한다. 다시 시작하는 음악에 뉴욕 시가 반응한다.
음악의 의미
글쓴이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좋았던 것. 음악의 의미를 영화가 플롯 안에서 구현했기 때문이다. 주인공 댄이 직접 “음악은 지루한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지”라고 말한다. 글쓴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의미를 부여한다'라는 점이다. 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일상과 인간과의 관계에만 국한 짓는 것이 아니다. 1차적으로 이 영화가 음악으로 뉴욕이라는 도시를 재구성하기도 하지만 인간과 인간사이에도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어떤 인물들은 음악으로 소통한다.
후자부터. 영화에서 중요한 관계 네 개만 뽑으라면 댄과 바이올렛 부녀, 댄과 그레타, 댄과 콜, 그레타와 세상과의 관계다. 이 네 관계가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단점은 서로를 잘 모른다는 점이다. 이 네 관계 중 단점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댄-바이올렛 부녀다. 댄과 바이올렛은 서로를 잘 모른다. 초반부에 나오는 장면을 보면 아버지는 딸의 나이조차 모른다. 딸도 아버지가 뭘 하고 다니는지 모른다. 돈이 있는지 없는지 몰라서 무기력하게 도망 다니는 장면도 있다. 이렇게 서로 멀리 떨어진 것 같은 부녀가 가까워지는 계기가 영화 안에 두 장면이 있다. 이 요소가 동일시되는 지점이 어느 순간 등장하는데 영화가 음악을 바라보는 관점을 그대로 보여준 장치라고 생각한다. 대화 대신 음악을 등장시키는 것이다. 음악이 아니라면 서로 아는 척도 안 했을 댄과 그레타가 처음으로 만나는 과정, 마음을 여는 계기 등등 영화 안에서 어떻게 묘사되는지도 이것의 연장선상이다. 그리고 가장 기본적으로 이 영화의 과제가 뭘까? 바로 프로듀서 댄이 그레타의 프로듀서가 되어 그녀가 세상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부터 그레타가 음악을 통해 세상과 대화하고 싶어 한다는 걸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설정이다. 영화는 이런 식으로 타인과 타인과의 관계를 음악으로 이어 낭만적으로 표현한다.
이런 설정은 영화가 장르적인 성격을 강화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 영화는 음악영화이기 이전에 영화다. 적어도 이야기가 들어가야 음악이 들어가는 데 있어 연출적으로 중점을 둘 수 있다. 영화는 이 연출을 위한 이야기를 잘 짰다. 인물도 섬세한 성격으로 설정해서 음악에 따른 리액션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줬고 노래하는 인물들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그레타와 콜이 교감하는 모든 장면이 그렇다. 음악으로 인물들이 교감한다는 전제 하에 예술을 받아들이는 캐릭터들의 리액션을 보여준다. 충분히 낭만적이고 사랑스러운 영화라고 부를 만 한 지점이다.
뉴욕 여행기
또 이 영화는 뉴욕 시의 일상을 보여주는 일종의 로드무비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 '그레타의 앨범 만들기'에는 특징이 있다. 바로 도심 한가운데에서 음악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 설정의 배경에 결함이 있어 보이는 거 같긴 하지만 이건 음악영화다. 도심 한가운데에서 음악 만든다면 멋있잖아? 실제로도 영화가 이 광경을 멋있게 그 의미를 충실히 구현한다. 그리고 어떤 논리적 결함을 감수하고서도 이 영화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게 있다. 뉴욕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그리고 사람에겐 누구나 마음속 하나 상처가 있다. 이 영화는 이 상처 가득한 도시의 일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배경을 뒤로하고 음악을 녹음한다. 그레타의 이야기를 담은 앨범인 것과 동시에 뉴욕 시민들을 위로하고 싶었던 댄(내지는 감독)의 의도가 들어간 것이다. 'A Step You Can’t Take Back'같은 삽입곡의 가사를 보면 지하철이 등장한다. 그리고 영화는 공교롭게도 일상적인 일들이 벌어지는 지하철을 수시로 등장시킨다. 심지어 세상에게 상처받고 지하철에 탑승한 댄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도 있다. 더 나아가 그레타와 댄이 함께 뉴욕의 시민들을 바라보는 장면까지 있다. 이 장면에서의 사람들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걷는다. 영화가 고의적으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을 비춘 것이다.
이것은 음악영화의 장르적인 특성을 하나 더 강화시킨다. 왜 영화가 뉴욕 시민들을 보여줬을까? 에 대한 당위성을 덧붙이는 것이다. 음악으로 무언가를 설명하는 것. 이것이 음악영화 장르에서 음악이 차지하던 방식이기도 하다. <사랑은 비를 타고>라는 영화를 본다. 이 영화는 시간적 배경이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전환되던 때다. 유성영화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인물들이 영화 제작을 위해 노래를 연습한다. 이것은 단지 극적 요소가 아니라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인물의 내면이 노래와 춤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시각적, 청각적으로 보다 색다르게 접근했다는 점에서 혁명적인 연출임과 동시에 이야기가 아닌 것이 어떻게 플롯에 틈입할 수 있는가라는 점에서 중요했다. '음악으로 인물의 내면을 보여주겠어!'라는 고민이 극 중 안으로 구현된 것이다. <비긴 어게인> 역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음악을 삽입했는지를 알 수 있는 장면이 몇 나온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그레타와 댄이 뉴욕 시민들을 바라보는 장면'이나 '생활소음을 영화가 활용하는 방식'과도 관련이 있다. 이 모든 뉴욕의 단면이 그레타 앨범의 하나라는 것, 이들의 일상 역시 예술의 한 단면이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후술 하겠지만 이런 도시, 일상, 예술을 한 번에 결합시킨 존 카니의 연출법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원스>도 더블린이라는 장소가 중심이다. 여주인공(그녀)의 집을 비롯한 더블린 구석구석을 보여주며 도시를 배회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준다. <싱 스트리트>도 음악을 통해 개인적 성장, 그러니까 살던 고향을 벗어난다는 성장서사를 플롯으로 삼았다(이것은 가장 최신작 <플로라 앤 썬>에서도 구현된다). 존 카니 감독이 잘할 수 있는 방식의 화법을 두 번째 영화에서 확립한 것이다.
복사+붙여 넣기?
글쓴이가 몇 년 만에 이 영화를 다시 보며 느낀 것. 기존 존 카니 감독 영화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이다. 우선 영화의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크게 세 가지다. 1) 아버지로서는 낙제점인 댄 2) 그레타의 앨범 제작기 3) 그레타와 댄의 관계다. 4) 도시 활용하기다. 1번. 최신작 <플로라 앤 썬>에서 주인공 플로라는 아이를 대하는 법을 몰라 전전긍긍하는 인물이다. 또 <싱 스트리트>에서 주인공의 친형으로 나오는 캐릭터는 내면에 거대한 상처를 품고 있지만 형제로서의 유대감이 극 안에서 강렬한 카타르시스가 된다. 2번. 그레타가 앨범을 제작하는 과정에 대한 부분은 <원스>라는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전작의 모티브를 <비긴 어게인>에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3) 그레타와 댄의 관계. 이 부분을 직접적으로 쓰긴 어렵지만 존 카니의 네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음악만 다르지 영화의 어떻게에 해당하는 부분이 자가복제 쪽에 가까운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규모든 대규모든 공연장을 활용하는 방식이 존 카니의 영화들과 크게 차이가 없다. 특히 <플로라 앤 썬>에서 사용된 연출이 <비긴 어게인>에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은 본작(<비긴 어게인>)이 평범해지는 계기가 된다. <원스>에서 'falling slowly'라는 불후의 트랙을 남긴 것 말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시선을 있는 그대로 섬세하게 묘사한 건 존 카니의 데뷔작이라 신선했던 걸까? <비긴 어게인>이 전작의 공식을 답습했고 이후에도 감독은 비슷한 화법을 구사했다는 것이 치명적으로 느껴진다.
부족한 상상력
글쓴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가장 아쉬운 점은 섬세함이다. 영화를 잇는 연결고리'만' 존재하고 나머지가 부실한 것이다. 그레타의 앨범 제작기가 영화의 가장 중요한 과제다. 그럼 이 방식에 있어 전문적인 지식이 조금 더 나왔어도 크게 이질감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이야기를 다룬 예술로서 창의성이 생겼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극후반부 그레타의 선택과 댄의 직업에 대한 부분이 그렇다. 그레타가 그런 선택을 고른 이유가 내적으로 다 근거가 있다. 그것까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다른 대안을 고른다거나 하는 방식은 없었을까? 단순히 내적 논리만 따라가기엔 현실적인 부분을 고려하지 않고 쉽게 판단하는 것 아닌가? 영화로서의 창의성을 고려하지 않고 낭만적인 음악의 속성만 강조하니 빈 부분이 많아 보인다. 부족한 상상력이 현실에 찌든 주인공과 낭만적인 영화가 충돌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또 댄의 직업에 대한 부분은 영화의 반을 포기한 듯하다. 이 영화에서 댄은 음악'만' 만드는 인물이다. 인간관계가 굉장히 좁은 인물로 묘사된다. 댄이 음악인으로 활동하면서 아는 아티스트와 행정가가 이렇게 적을 일인가? 영화에 나온 것처럼 이 <비긴 어게인>과 댄이 아예 한 길만 우직하게 팠으면 '이 인물이 이렇게 생각할만한 근거는 다 있다'라고 생각할 법하다. 그렇다기엔 이 영화는 그런 부분을 염두한 흔적이 보인다. 염두했으면 확실하게 그 길로 트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100%중 65%만 써 애매하게 마무리짓는다. 이 영화는 뮤지컬 공연이 아니라 전적으로 영화다. 러닝타임을 길게 가져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야기를 확실하게 끝낼만한 수가 있어야 이야기로서의 강점을 가질 것이다. 애매하게 끝낸 덕에 그냥 앨범에 대한 이야기'만'하고 끝낸 감이 있어 이야기가 전달하는 쾌감은 부족하다.
'Lost Stars'
이 영화에 대한 총평은 사랑스러운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레타라는 여성을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지만 괜히 그녀를 응원하게 된다. 또 어느새부턴가 비호감 그 자체인 댄에게 마음이 가고 입체적인 콜에 대해 여러 관점에서 생각하게끔 만든다. 사실 영화가 이거면 역할을 다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살아 넘치는 생동감으로 잠시나마 환하게 웃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런 우리를 'lost stars'로 데려다주는 것이 존 카니가 이 영화를 기획한 의도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이후 존 카니의 두 영화에 대한 예고편이 됐다는 점에선 아쉽지만 'Lost stars'를 위시로 한 수많은 명곡들을 품은 영화라는 점에서는 충분히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후에 호크아이가 되는 헤일리 스타인펠드와 이미 헐크인 마크 러팔로가 부녀관계로서 연기한다는 점 역시 소소한 재미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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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해, 새롭게 뭔가를 떠나보내고 싶은 당신에게
나는 올해를 '여러모로 개 같은 한 해'라고 규정하고 싶다.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게 썩 좋지 않은 해라는 뜻이다. 좋은 기억도 있었지만 그거 빼고는 다 구렸으니 다 액땜이라 생각하고 싶다. 안 좋은 일만 주구장창 있으면 다행인데 사실 올해는 생각이 많았던 기간이기도 하다. 두려움. 공포. 아쉬움. 뭐 그런 감정들이 1년 내내 들었다. 누군가에게 기가 막힌 해결책을 들었다고 해서 이게 나아질 거라는 보장이 없다. 이미 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생각이 든다. 매일매일 다가오는 두려움과 공포감에 점점 지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무서운 감정이 계속해서 들기 때문에 이 2021년을 견디기가 너무나도 힘들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진심인 건 아마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겠지. 근데 나는 점점 이 사람들에게 마음이 깊어져서 평범하게 잊히는 상황을 혼자 그리고 있다. 알고 있다. 이 두려움은 주위 사람들에 비해 내가 작아 보인다는 열등감에서 비롯됐다는 걸.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내 곁에 사람이 많았으면 좋았겠지? 근데 왕따를 심하게 당해 인간관계 능력이 정말 죽어버렸다는 변명이 무색하게 난 오늘도 혼자인 채로 하루를 보냈다. 내 일상에 많은 것에 만족하다가도 '그때 사람들에게 미안하단 말을 더 할 줄 알았더라면'과 같이 죄책감이 남거나 마음속의 누군가에게 화가 났으니 난 아직도 자기혐오의 늪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상처를 줬다는 무게감을 생각하면 이게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마음은 새 해가 된다면 정말 떠나보내고 싶은 것 중 하나다. 괴롭거든. 좋은 데 들어가서 멋진 사람 만나 꽁냥꽁냥 하는 삶 살아야 사라지지 않을까 싶거든. 난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다. 그러려면 모든 원인이 규명되어 아다리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선택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 나는 왜 이리 꼬였나. 어쩐지 2022년이 돼도 나를 일으키는 건 정말 어려울 것 같다. 세상이 날 버리면 어떡하지. 번뇌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어떡하지. 이런 기분이 들 때면 어느 영화 한 편이 생각난다. 그리고, 난 여러분들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이 작품을 보고 난 후의 마음가짐이 길게 가지 않아도 괜찮다. 29살의 감독 PTA가 제시하는 해결책에 대해 조금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1. 어떤 것에 관한 영화인가요?
자기혐오에 관한 영화다. 자기혐오를 나무위키에 검색하면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행위'라는 뜻이 나온다. 자기 스스로를 학대하는 행위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죄책감이 있을 수도 있다. 죄책감은 보통 과거의 일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다. 그때 내가 좀 더 용기를 냈더라면. 내가 그때 잘못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누군가에게 욕을 하지 않았더라면. 뭐 이런 식으로 과거의 본인에게서 잘못된 것을 찾는 것이 죄책감의 정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난 적당한 죄책감이야 말로 사람이 얼마나 올곧은지를 보여주는 굉장히 많은 척도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직접 느껴보고 경험했던 인간 군상은 대부분 '적당한 죄책감을 가진 사람이란 드물다'였던 것 같다. 보통 죄책감을 느낄 법한 사람이면 감정이 흘러넘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인간은 보통 자기에게 없는 걸 후회하니까. 그렇게 결핍에서 생긴 이 감정은 우울할 때마다 자기혐오로 변해 사람들을 괴롭힌다. 이렇게 사람을 괴롭게 만듦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절대 돌아갈 수 없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 과거는 절대 수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죄책감의 원인은 가지각색으로 다양하다. 과거의 누군가가 준 트라우마 뭐 그런 것 때문에 잘못된 가치관을 가진 것도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고, 떠나간 이들에게 잘해주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가능할 것이며 학교폭력과 같이 범죄까진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준 경험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행동으로 보여줘 그것에 상쇄하는 행보로 보여줬다면 용서받을 수 있겠지만 그게 전부 능사는 아닌 것 같다. 그만큼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줬다 하더라도 떨쳐내지 못하는 경우도 불가능한 사례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그렇게 시간이 지나도 사람을 괴롭게 만들기 쉽다. 그렇게 누군가를 못살게 구는 죄책감은 결국 자아존중감의 하락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이게 계기가 되어 사소한 일에도 마음의 우물에 들어가는 경우가 대다수다. 이 영화처럼 멍청한 실수를 하기도 하고, 마약 같은 자기 파괴적 행동으로 귀결이 나며, 메마른 자아를 숨기기 위해 화려한 직업을 갖는 등 가지각색으로 있을 것이다. 자기혐오는 이렇게 사람의 결핍에 찰싹 달라붙어 누군가를 피폐하게 만든다.
이 <매그놀리아>는 9명의 내러티브가 분리되어 자기혐오에 대해 다룬다. 죽어가는 남편에 대한 죄책감, 아들과 전 부인을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했다는 후회, 아버지에게 받은 핍박과 멸시, 소심한 내면을 꺼내기 어려운 아이와 엄한 아버지, 어릴 땐 잘 나갔지만 지금은 사랑을 나누는 법을 몰라 친구 없이 외로운 소시민 아저씨, 날 버린 아버지에 대한 원망, 딸에게 못쓸 짓을 했던 바보 같은 과거, 경찰 치고는 어쩐지 허당인 한 인물의 모성 격까지. 가지각색의 사연이 맞물려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 사람들 전부 다 과거의 한 에피소드에 붙박여 자기 스스로를 원망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감독 폴 토머스 앤더슨은 이런 다양한 인물을 제시하고, 각자의 내러티브를 한 지점으로 정교하게 맞아떨어지는 지점을 만들어 낸다. 가지각색의 자기혐오에 대해 한 지점 찍고 전환점을 만든 것이다. '아니 9명이 주인공인데 어떻게?'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근데, 이 9명이 극에서 중요한 포지션을 균일하게 잡고 있다는 점이나, 자기혐오의 다양한 인물상을 제시했다는 점이나 결말부의 한 지점의 개연성을 위해 무조건 들어가야 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이 글을 읽을 몇 안 되는 분들의 마음에 뭐가 있는지는 모른다. 또 여기 인물과는 다른 상처를 감당하고 있을 수 있다. 난 이 9명의 인간상에 속해있는 사람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나와 타인을 용서하지 못해 마음이 괴로운 이들이라면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도 좋다. 이 영화는 왜 자기혐오가 발생하며, 그게 어떤 영향을 주고 또 어떻게 해야 구원이 이뤄지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니까.
2. 러닝타임 180분에 주인공이 9명? 보는 게 어렵지는 않나요?
이야기 잘 만들어서 시간 체감이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나는 감독 PTA의 작품 중에서는 쉬운 축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마스터>가 잘 만든 작품인 건 맞는데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라면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또 <펀치 드렁크 러브>같은 경우 내용만 보면 로맨스 코미디라 슥 봐도 문제가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영화가 보여주는 다방면의 미장센이나 비유가 한 번만에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대신에 이 <매그놀리아>는 9명의 인물이 나오고 초입부에 이게 뭔 소리지? 싶은 오프닝 장면이 있어서 그렇지 크게 받아들이는 게 어렵진 않을 듯. 9명의 인물 그거 스토리 어떻게 다 이해하나요?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9명의 주인공들이 거의 서로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딸에게 못된 짓을 했던 아버지는 TV쇼 진행자인데, 소심해서 아버지에게 자기 내면을 못 꺼내는 아이는 그 진행자의 출연하는 패널이다. 이런 식으로 감독은 인물들의 자기혐오 원인을 최대한 다양하게 제시한 반면 이 사람들이 만나는 계기를 2~3개로 압축시켜 관객의 오해를 줄였다. 이렇게 그냥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니 내용을 이해하는데 크게 어렵지는 않을 듯. 또한 영화의 감정이 잔잔한 게 아니라 좀 센 템포로 진행되기 때문에 지루하다던가 그러지는 않을 것 같다.
3. 배우들의 연기 합은 어떤가요?
줄리안 무어. 톰 크루즈. 필립 셰이모어 호프만. 존 C. 라일리. 윌리엄 H. 메이시 등등. 이름만 봐도 든든한 국밥 배우들이 포진해 있다. 줄리언 무어나 톰 크루즈는 이미 연기 잘하는 거 다 알아서 아는 분들이 많을 것 같다. 또 영화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필립 셰이모어 호프만 모를 수가 없다. 감독도 PTA라는 할리우드의 빅 네임 아닌가? 영화의 전체적인 톤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우니 보는데 지장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 이 영화가 그냥 단순히 유명한 사람들이 나오고 거장 폴 토머스 앤더슨이 메가폰을 잡았다고 해서 연기력이 좋은 작품은 결코 아니다. 가령 줄리언 무어가 맡은 캐릭터는 죽어가는 남편에 대한 죄책감으로 서서히 미쳐가는 여성이인데, 이 복잡 미묘한 후회와 자기 자신에 대한 화가 이 인물이 만나는 사람에게 잘 느껴지도록 템포 조절을 잘했다고 생각한다. 또 톰 크루즈가 맡은 캐릭터는 잘생긴 외모와 입담 말고도 다른 내면을 묘사해야 했는데, 각본이 너무 좋아서 대사들이 사람의 성격을 표현하기에 아주 효과적이다.
4. 보기 전에 알고 가야 할 지식이 있나요?
읽고 나서 알아야 할 지식은 있다. 엔딩부의 한 사건에 대해 찾아보는 걸 추천한다. 그럼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될 듯.
5. 어떤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나요?
1번에서 언급한 바와 비슷한 말을 쓰고 싶다. 자기혐오에 고통받는 사람이라면 정말 추천해주고 싶다. 나는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다. 날 떠났던 사람들에게 돌아가 내가 변했다는 걸 증명하면 이 죄책감이 사라질까. 얼마 전까지, 아니 솔직히 지금도 고민인 내가 존경하는 분에게 평범해질 것 같다는 두려움이 사라질까. 근데 사실 이 질문의 답은 이미 알고 있다. 이건 다 내가 인간관계를 좁게 만들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걱정이라는 걸. 난 사람들을 사귀기에 적합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날 떠날 거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잊힐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원인들을 단적으로 해결한다고 해서 내가 행복해질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집착하는 것이야 말로 날 더 불행하게 만들겠지. 이 결론이 자기혐오가 있는 분들이라면 한번쯤 생각하게 되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원인과 결과를 명백하게 규정짓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걸 반박하는 작품이다. 자기혐오를 가지기에 충분한 인간이라 생각했다면, 단 찰나의 순간으로 감독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라고 답한다. 엔딩부의 한 지점이 그 기분을 느끼게 해 줄 것이라 확신한다. 이제 우리 한번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모두에게 자기 자신을 용서할 자격이 있다는 걸. 그리고 이제 그만하면 됐다. 보내 줄 것들은 보내주자.
6. 어디에서 볼 수 있나요?
왓챠에서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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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뜻하게 나를 안아줄 날 위한 한마디
지난 10여 년간 서울에 집중된 산업 인프라에 제한받지 않고 전주 지역을 대표하는 영화인으로 우직하게 개성 있는 작품들을 꾸준히 이어오며 유수의 영화제에서 많은 수상을 통해 그 역량을 인정받은 최진영 감독의 두 번째 장편으로, 죽었을 뻔한 여자가 자기의 자아와 마주하면서 자기혐오를 극복하고 벗어나 자신을 좀 더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다룬 태어나길 잘했어 리뷰이자, 시사회 후기입니다. 전주영상위원회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은 최진영 감독만의 독특한 개성과 메시지가 담긴 로컬 작품으로서, 주인공 춘희를 통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관객들을 향한 특별하고 따뜻한 위로를 담아내고 있죠. 더불어 2008년 ‘초감각 커플’로 데뷔한 이래 지난 많은 작품들을 거쳐 최근 ‘한강에게’에게서 인상적인 모습을 선사하며 독립·예술계 대세로 자리한 강진아 배우가 인정받은 연기력으로 주인공 춘희를 맡아 상처받은 개인이 치유되는 동화 같은 분위기 속에서 자신만의 간결한 색채를 드러냅니다. 이러한 장점들 때문인지 상당히 쉽고, 재미있었으며 상냥하게 풀어가는 전개 방식 또한 마음을 편하게 해줘서 즐거운 관람을 할 수 있었습니다.
※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 태어나길 잘했어 정보
저는 좀... 쩔어있어요...
‘봄에 태어난 기쁨’이라 부르고 싶었지만, 출생 신고 담당 공무원의 실수로 ‘봄에 태어난 여자’라는 이름을 가진 춘희, 1997년 중학생 열다섯 그녀는 부모님과 집을 한꺼번에 잃는 사건을 겪고 홀로 살아남아 외삼촌 식구가 사는 집으로 오게 됩니다. 달갑게 여기는 이 하나 없고, 모든 것이 낯설고 불편한 더부살이 다락방 인생은 그렇게 시작이 되죠. 이십여 년이 지나 외삼촌 식구들은 아파트를 얻어 이사했고, 그녀는 홀로 집에 남아 사촌 오빠의 식당에 마늘을 까서 팔며 생활을 이어갑니다. 한 푼 두 푼 모아온 돈으로 어릴 적부터 콤플렉스였던 다한증 수술을 하면 자신의 삶이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품은 채 말이죠. 그러던 중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날, 진짜 떨어진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고 과거 중학교 시절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데...
예고편│ Trailer
원제 : The Slug│감독·각본 : 최진영│출연진 : 강진아, 박혜진, 홍상표 외 │장르 : 드라마│상영 시간 : 100분│개봉일 : 2022년 4월 14일│국가 : 한국│등급 : 12세 관람가│평점 : 기자·평론가 5.5, 왓챠피디아 3.1, IMDB 6.0│수상 내역 : 제16회 오사카 아시안 필름 페스티벌(재능상)│시청 가능 서비스 : 현재 극장 상영 중(14일부터)
# 태어나길 잘했어, 어떤 이야기?
나를 온전히 구원하고 위로해 줄 사람은 나일뿐
작품은 바쁜 현대인들에게 위로를 전하려는 최근 독립영화계의 흐름을 이어가듯 여성 주인공이 자신과 화해하고 긍정적인 삶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찬실이는 복도 많지’, 오래된 가옥의 풍경과 그 주변의 인물들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남매의 여름밤’처럼 관객에게 기분 좋은 토닥거림을 선사합니다. 그래서인지 과거 유명한 한 장면이 떠올려지는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대사는 조금 진부할지라도 거짓처럼 들리지 않고, 20년 전 자신을 끌어안아 현재까지 남아있는 자신의 슬픔과 트라우마를 지워내며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강진아의 믿음직한 모습은 빛을 발합니다. 일반적이라기보단 엉뚱한 매력과 발랄함을 간직한 채 본인이 얼마나 아름다운 인물인지 모르는 춘희를 씩씩하고 사랑스러운 인물로 완성시켰다 볼 수 있죠. 더불어 이러한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데 있어서 어린 시절 춘희를 맡은 박혜진과 사랑으로 다가오는 주황의 홍상표는 그녀 옆에서 큰 힘이 되는 존재가 되어줍니다.
아마도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누군가에게 닿는 것을 기피하는 다한증을 가진 춘희를 통해서 현재를 살아가는 수많은 현대인들을 비유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고된 일상을 살아가며 끝까지 자신의 안식처를 지키려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은 힘겹게 살아가지만 남들과 비교하며 내가 못난 것처럼 느끼며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져가는 일반인들이 떠오르기 때문이죠. 그녀는 그렇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용기를 얻으며 끝끝내 모두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느끼며 겁먹었던 과거를 감싸 안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 과정이 극적이거나 주도적으로 빠르게 진행되진 않지만, 누구에게도 찾아올 법한 전환점을 담담하면서 조금은 유쾌하게 그려내주므로 꼭 빨리 가는 것이 정답이 아니고 자신의 속도에 맞춰서 가는 삶도 충분하다는 말도 덧붙이고 있죠.
사촌 오빠를 통해 집에서 쫓겨날 처지에 몰리면서 울분을 터트리며 쌓아왔던 분노를 표출하면서 과거의 자신을 한 번 더 밀어내지만 그것이 곧 자신을 올바르게 바라보고 안아주는 계기가 되어 스스로를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됩니다. 결국 남들의 시선, 주변의 도움이 아니라 올곧이 본인을 소중히 안아주고 용기를 줄 수 있는 존재는 자신뿐이여 음 깨닫게 되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매체에서 나오는 잘 나가는 이들을 통해 자괴감에 빠져 스스로를 깎아내리며 자존감을 잃어버리는 현재의 세태를 어느 정도 투영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아무리 못 났다고 생각한들 모두가 귀하게 태어나 누군가에는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운 사람이고,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인 걸 잊어먹었을 뿐이죠. 그렇게 영화는 우리가 잊었던 마음들을 춘희라는 인물을 통해 조금은 엉뚱하고 투박하지만, 그 바탕만은 다가온 봄처럼 따뜻하게 위로를 전달해 줍니다.
엔딩곡이에요 강진아 배우님이 부르셨어요 :) 가사가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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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벽한 일상의 물리적 증명
7★/10★
그림자는 물리적 존재를 환기한다. 실존하는 물질이 빛을 가로막을 물리적 질감을 가질 때만 그림자가 생긴다. 빔 벤더스의 〈퍼펙트 데이즈〉는 일상적 삶에도 물리적 질감이 있음을, 나아가 물리적 질감을 초과하는 서사와 의미가 깃들어 있음을 그림자의 이미지로 풀어낸다. 화장실 청소 일을 하는 주인공 히라야마는 일하는 중 벽에 비친 나무의 그림자만 봐도 웃음 짓는다. 화장실 통로 밖으로 나와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 무엇이 존재하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그림자로 포착하는 물질성은 물리적 사물을 넘어서기도 한다. 히라야마는 우연히 만난 삶에 낙담한 또래의 중년 남성과 그림자를 갖고 몇 가지 놀이를 한다. 먼저 두 개의 그림자가 겹치면 더 진해지는지를 실험해보고, 뒤이어 서로의 그림자를 좇는 술래잡기 놀이를 한다. 상대 남자는 두 개의 그림자가 겹쳐도 더 짙어지는 것 같지는 않는다고 말하지만, 히라야마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분명 더 진해졌다는 것이다. 히라야마는 ‘알고’ 있다. 그림자는 분명 어떤 물질의 실존과 그 실존에 깃든 서사, 의미를 대변하기 때문에 포개진 그림자는 보이는 것과 상관없이 더 짙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림자 술래잡기를 하는 두 사람의 해맑은 표정은 그림자가 증거하는 삶을 소환한다. 그림자가 물질로서의 인간의 몸뿐 아니라 그 몸에 담긴 삶 역시 담아낸다는 (히라야마가 남자에게 알려준) 사실이 두 사람을 즐겁게 한다.
그러나 그림자만으로는 물질의 구체적 형상을 그려낼 수 없다. 물질을 비추는 빛의 각도와 주변 환경에 따라 같은 물질이라도 여러 모양과 밝기의 그림자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히라야마가 화장실 벽의 나무와 중년 남자의 그림자에서 물질 그 이상을 감각하고 웃음 지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일상을 살아내는 태도에서 나온다.
영화는 매일 비슷하게 반복되는 히라야마의 하루를 반복해서 보여준다. 이웃 할머니의 빗자루 소리에 잠에서 깬다, 이부자리를 정리한다, 양치와 면도, 세수를 한다, 직접 분재한 화분에 정성스레 물을 준다, 작업복을 입는다, 신발장 선반에 차례로 정리된 물건들을 챙긴다, 집 앞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는다, 작은 봉고차를 타고 출근하며 음악을 듣는다, 동료에게 ‘왜 이렇게까지’라는 물음을 들을 정도로 깔끔하게 화장실을 청소한다, 퇴근 후에는 목욕탕에 들러 씻고 단골 식당에서 식사한다, 쉬는 날이면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을 인화하고, 헌책방에 들르며, 단골 술집에서 피로를 푼다.
아무것도 특별한 것 없는 일상이다. 기사가 운전하는 고급 승용차를 타고 온, 오랜만에 만난 여동생이 정말 화장실 청소 일을 하느냐고 묻는 것을 보아 히라야마가 지금 하는 일이 그의 과거 ‘사회적 신분’과는 잘 맞지 않는 일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때문에 괴로움, 열패감이 그가 느껴야 할 더 적절한 감정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히라야마는 그러지 않는다. 눈을 뜰 때마다, 일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설 때마다 조용히 미소 짓는다. 마치 오랫동안 오늘을,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가만히 웃음 짓는 히라야마의 얼굴은 그림자에 구체적 물질성과 그 너머의 의미, 서사를 상상하는 통로다. 영화는 히라야마에게 어떤 과거가 있는지, 그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하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히라야마의 표정이 이 설명을 대신한다. 별로 가치 없다고 여겨지는 일을 하며 종종 천대받아도 일터에서 스스로 세운 기준을 충족하려 노력하고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적당한 애정을 가질 때 나오는 표정으로 말이다. 여기서 빚어지는 단단함은 히라야마의 직업관과 과거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에 대한 조급증을 종식시키며 소박한 차이의 평온한 반복이라는 히라야마의 현재에 온전히 집중하게 해준다. 피곤한 날도, 기분 좋은 날도, 슬픈 날도, 예기치 못한 일이 있던 날도 히라야마는 같은 표정으로 일어날 것이고 하늘을 바라볼 것이며 화장실 벽에 비친 그림자를 바라볼 것이다. 이렇게 히라야마는 일상을 살아가는 동시대인이 잃어버린 표정을 복원한다. 하루를 마감하는 히라야마가 그날을 복기하며 꾸는 꿈속에서는 그저 불분명한 회색빛 형체였던 것들이 어느새 그가 서랍 속에 엄격하게 선별해 모아둔 사진처럼 분명한 형태의 물질성과 그에 담긴 서사, 의미로 확장된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영화가 그려내는 히라야마 캐릭터에 남성 판타지가 층층이 깃들어 있다는 점은 해소되지 않는 찜찜한 의구심을 남긴다. 조카, 점심을 먹을 때마다 벤치에서 만나는 여성, 동료의 애인, 술집 사장 등 영화의 여성 인물들은 히라야마가 구축한 일상이 매력적이고 살 만한 것임을 증명하고 보증하는 역할을 맡는다. 주체의 확립을 위한 여성 타자 없이는 완벽한 일상(perfect days)의 물리적 증명은 불가능한 것일까? 야큐쇼 코지가 놀라운 연기로 형상화한 아름다운 일상의 물질성 앞에서, 이 머뭇거림을 함께 마주할 수밖에 없는 당혹감을 ‘떨쳐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영화 속 그림자 이미지가 증명하는 ‘순수한 아름다움’은 아직 온전히 펼쳐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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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31]직쏘가 생각나게 하는 쏘우의 스핀오프 스파이럴 개봉!! 재밌다!
쏘우의 스핀오프 영화 스파이럴이 개봉했습니다.
배우 크리스락이 기획아이디어와 각본에도 참여했는데요.
주연 배우로도 활약하고 있죠.
코미디 배우라는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크게 어색하지 않게 연기하고 있어요.
영화도 쏘우 시리즈의 초기 영화들 처럼 너무 급하지 않게 서서히 발동을 걸어 마지막을 향해 달려갑니다.
너무 쏘우 시리즈와 동일한 구성으로 진행되긴 하지만 보는 재미는 있네요.
기존의 시리즈를 좋아하신다면 충분히 재미있게 보실 수 있는 영화에요.
감독은 대런 린 보우즈만 인데, 쏘우 2,3,4편의 감독이었죠. 다시 원래 잘하던 시리즈로 돌아왔네요.
그동안 공포영화들을 찍어왔지만 사실 거의 B급공포에 머물러 있었거든요.
자세한 리뷰는 영상 전체를 봐주세요.^^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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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즈니+ <문나이트> 티저 예고편
"내가 깨어있는 건지 꿈을 꾸는 건지 구분을 못 하겠어요."
MCU의 가장 미스터리한 세계로 여러분을 이끌 히어로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문나이트] Coming 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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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 메인 예고편
20세기 초 프랑스에 위치한 오래된 가상의 도시 블라제
다양한 사건의 희로애락을 담아내는 미국 매거진 ‘프렌치 디스패치’
어느 날, 갑작스러운 편집장의 죽음으로
최정예 저널리스트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마지막 발행본에 실을 4개의 특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당신을 매료시킬
마지막 기사가 지금 공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