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dong2021-12-04 15:54:48
왕따가 말하는 왕따 이야기
<릴리 슈슈의 모든 것>
남자는 허리가 아파 침대에 다시 누웠다. 심하게 아프거나 그런 건 아니다. 그냥 적당히 신경만 쓰이는 정도다. 근데 허리디스크 초기 진단이 아니었다면 그냥 아무것도 아닌 일상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폰을 가져와 인스타를 켰다. 인스타도 매번 올라오는 것들만 뜨는 것 같다. 휴대폰은 다시 유튜브로 돌아간다. 내가 웃기 위해 했던 것들. 이동진 평론가님이 나와서 작품 해설을 한다던가. 좋아하던 유튜브가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는 장면을 본다던가. 잠깐 웃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금세 허무한 느낌이 들었다.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있을 수도 있다. 있을 수도 있을까? 맞아. 없진 않아. 몇몇의 얼굴들이 떠오른다. 근데 몇몇은 떠오르다 말았다. 그리고 아까 봤던 인스타그램 속의 얼굴들이 스크린 사진을 찍었다는 게 생각난다. 나 스크린 사진 찍은 지 얼마나 됐지? 남자는 갑자기 눈물이 나는 것 같다. 떠나간 사람들. 그 사람들이 생각나 괴로웠던 것이다. 뭐 나름대로의 죄책감도 그에게 의미가 있었겠지만 사실 더 크게 다가오는 건 '지금의 내 편은 누구쯤 있는가'라는 것이다. 갑자기 믿을만한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 본인 삶의 가장 큰 위기가 된 다는 것이 피부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에 가장 큰 비극은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아니면 없는지가 아니다. 여는 법 자체를 모른다는 것이다. 이래서도 될까. 아니면 그렇지 말아야 할까. 좋은 기회가 그렇게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과연 그를 사랑하기에는 너무 어렵다. 갑자기 그의 업보들이 떠올랐다. 노트북을 켜 키보드를 잡기 시작한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사람들에게 무언갈 전해주기 위해. 수도 없이 되뇌었던 철학을 다시 마음에 돌이켜본다. 눈물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혼자구나. 난 혼자구나. 세상에게 무얼 전해준다고 하기엔 너무 씁쓸하다. 그것도 혼자서만 하니까.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비극에 관한 영화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필모그래피 하면 떠오르는 작품 세 편이 있을 것이다. <하나와 앨리스>, <러브레터>, 그리고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다. 사랑의 잔상에 관한 <러브레터>나 <하나와 앨리스>같이 사랑스러운 작품도 좋아하는 분들이 많은 것으로 알았다. 또 내가 보진 않았지만 <4월 이야기>도 영화 좋아하는 분들이 많이 알고 있지 않나? <러브레터>나 <하나와 앨리스>의 다른 이야기들을 계속 만드는 게 좀 1절만 하고 끝내지 못하는 느낌이 들어서 그렇지 그는 좋은 감독이라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일본의 시네마 감성을 형상화한 느낌? 미야자키 히야오나 호소다 마모루의 애니메이션 작화도 기억나지만 이와이 슌지의 개성도 '일본'하면 생각나는 부분이다. 적당히 과한 느낌.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처럼 담백한 작품도 분명 많겠지만 적당히 과하다는 것이 내가 봐온 일본 시네마의 특징이다.
적당히 과하다. 이 적당히 과하다는 정서는 우리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원래 감성적이라는 것이 과하지 않으면 드러날 수 없는 것 아닌가. 예술가에게 과한 건 거의 필요충분조건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과도기라는 게 있어야 한다. 우리가 엄청 저는 작품을 봤을 때 굉장히 높은 확률도 그걸 만든 이에게도 중2병이라고 욕먹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근데 이건 사실 예술가들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불행해봐야 행복했던 시간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런 시기가 올 수밖에 없다. 삶에서 내 선택만으로도 어두운 그림자를 피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그냥 거짓말이다.
혼자 남는다는 것은 삶의 그런 불가항력을 조명해주는 좋은 소재다. 또래들이랑 어울리고. 누군가에게 좋은 친구이자 동생, 멘토가 되고. 그런 좋은 인간관계는 거의 대부분 나의 선택과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물론 당연히 힘을 많이 준다고 해서 인간관계가 다 맺어지고 그런 건 아니다. 근데 좋은 사람들은 보통 내가 선택을 잘해서 만들어졌던 것 같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혼자 남는다는 것은 내 선택과 연관이 없다. 누군가를 사귄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다. 혼자가 되는 수많은 이유들 중 왕따라고 하는 것은 이런 사람들을 더 깊게 고립되게 만든다. 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떠나가는 것에 무슨 원인이나 책임이 있을까? 변하니까 떠나는 거고 선천적으로 인간은 악하니까 계급을 나누는 것이다. 100명이 있으면 99명이 비호감이라고 생각할만한 인물들도 잘 들여다보면 멋지고 존경할만한 구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났다는 이유로 정을 무작정 때리는 게 사람이다. 무슨 말이냐고? 당신이 욕먹을 만한 구석이 있든 없든 어차피 세상은 우리를 혼자가 되게 만든다는 뜻이다. 물론 단점을 개선하는 삶은 극찬받아 마땅하다. 왕따의 기억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것이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터널을 떠나 행복해졌다 하더라도 불행의 루틴을 피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왕따이든 아니든 불현듯 찾아오는 우울함은 피할 수 없다. 이 우울함은 혼자가 된 시간과 합쳐져 사람들에게 더 큰 상처를 만든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우리를 도와주느냐. 그것도 아니다. 떨어진 사회성 덕인지 더더욱 혼자가 되기 쉬워진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화법이나 의상, 생활 패턴 같은 감이 안 잡히니까 더 소외되기 쉽다. 상처라고 하는 건 그렇게 삶에 어두운 영향을 끼친다. 나 역시 이 패턴에서 한동안 고생했다. 날 선 말도 가슴에 담기 어려웠지만 앞으로도 계속 외로울 것이라는 막연한 비관이 나에게 더 감당하기 힘들었다. 내 삶을 돌아봤을 때 난 이것을 좋은 사람들을 만나 빠져나왔다고 생각한다. 아픈 과거를 핑계로 외로워지는 걸 합리화한다는 걸 깨닫게 되면 자기 자신을 극도로 혐오하게 된다. 나 역시 그런 깨달음이 있어 피해의식을 벗어날 수 있었으니 나름대로 풍운아의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근데 피해의식에서 벗어나고 느낀 건 냉정한 현실이었다. 피해의식을 자각해 벗어나서 맞이한 건 나라는 인간이다. 난 왕따였다. 굳이 세상의 누군가와 사이가 좋든 비호감 세례를 받지 않던 상관없다. 난 그런 악재가 없더라도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 서툴렀다. 이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받지 않아도 난 나를 왕따로 만들고 있었다. 내가 배운건 그것뿐이었다. 완벽하게 혼자가 되는 법이다. 내가 션택할 겨를도 없이 언제나 혼자였다. 그 누구도 내 편이 되어준 적이 없다. 알고 보면 나의 내면이 그렇게 사람들과 다를 것도 없고 세상에게 위로해줄 말도 많았음에도 마음 한 구석을 열어본 기억이 몇 번 없다. 이러니 내 모난 부분이 아니더라도 혼자가 되는 게 당연하다. 밝은 사람이 아니니까. 사랑스러운 사람이 아니니까. 난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벗어날 수 없는 무언가에 갇혀 있는 듯하다.
그래서 낸 결론은 영원히 마음이 만든 지옥도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다는 것이다. 왕따로 살았기 때문에 마음을 여는 게 익숙하지 않으니 혼자가 되고 사랑받기도 어렵다. 마음을 못 열고 못 다가가면 그게 혼자가 되는 거 아닌가? 다 내가 선택해서 만든 결과 같더라도 나 자신은 그것들을 꺼낼 용기도 방법도 모르니 자의 속에 숨은 타의가 되는 셈이다. 그렇게 점점 나는 구멍을 파고 깊게 들어간다. 혼자가 되면 당하는 일도 많아지고. 그리고 설상 그렇다 하더라도 털어놓을 구석이 없으니 쓸쓸하고 괴로워진다. 애초부터 인간에게 감당할 수 있는 슬픔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 그게 슬픔이 아니고 그냥 아무 일도 아닌 무덤덤함이겠지. 그게 지나서 단단해져도 사실 그렇게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비 온 날에 땅이 굳어도 2주 후에 태풍이 부는 게 자연의 섭리니까. 삶은 지긋지긋하게도 우리를 놔주지 않는다. 난 과연 어떤 잘못을 했기에 필연적으로 왕따로 살 수밖에 없는가. 나 자신에게 반문한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이 삶의 지긋지긋한 루틴에 관해 다룬다. 다른 글처럼 영화의 연출 지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만 이 영화의 불친절함으로 인해 플롯 분석이 어렵다는 것은 독보적이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을 것 같다. 뭐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뽑고 싶은 것은 츠다의 자살이다. 고통스러운 삶을 보낸다는 걸 그녀의 주변인이면 다들 앎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슬퍼하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이런 상황을 그녀가 만들었을까? 어느 정도는 맞을 수도 있다. 근데 그녀는 단지 중학생의 아이일 뿐이다. 많은 것들을 경험하기 이전에 이 세상이 그렇게 그녀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또 성매매 피해자로서의 삶을 벗어났다고 해서 곪은 마음이 치유될리는 없기에 그녀가 그런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내면을 오롯이 꺼내보인 방식이 죽음이었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장치다. 또 엔딩신을 봐도 집단 따돌림을 시키고 당하는 사람들이 온라인 상에서는 둘도 없는 베프였다는 아이러니가 나오지 않는가. 인간이기 때문에 왕따를 당하든 범하든 삶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이와이 슌지의 냉소가 서려있는 듯하다. 둘은 화해하는 게 아니라 그냥 만나고 끝난다. 아니 사실 화해했다고 하더라도 상처가 사라진다는 건 근원적으로 불가능해 관계의 수습을 조명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될 것이다. 한번 다친 마음은 수습하기 어렵다. 상처가 나 곪은 마음을 열고 소통한다는 것은 아픔이 많으면 많을수록 두려워진다. 그럼 계속 반복되는 거겠지. 왕따의 굴레가.
영화는 이 굴레에 대한 이야기다. 근데 명확한 서사로 전하는 게 아니라 넌지시 전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마치 옆에 있는 사람의 기분을 느끼게 도와준다. 배운 것이 혼자가 되는 것 밖에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왕따일 수밖에 없다. 인생 세상 뭐 같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행복한 적이 과연 몇 번이나 있었나? 도와주는 건 없는데 세상이 바라는 건 맞으니 인간들이 너무나도 싫어진다. 나 역시 그 과정 한가운데 있다. 내가 배운건 혼자가 되는 것 빼곤 없다. 낯 안 가리는 성격이 되고 옷 이쁘게 입고 다녀도 난 힘이 들 때 마음을 여는 방법을 모르겠다. 인간관계도 세상도 나에겐 두려움의 연속이다. 이런 내가, 나와 비슷한 이들에게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따뜻한 위로와 공감을 주고자 글을 쓴다지만 그것마저도 혼자기 때문에 와닿을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염치 불고하고 글을 더 써본다. 우리는 왕따다. 세상이 우리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반대로 어쩌면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을 모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야 한다. 앞으로 어떤 세상이 우리를 기다릴지 모른다. 예쁘고 멋진 배우자들 만나 행복해질 수도 있고 좋은 친구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 수도 있겠지. 근데 불행이 우리를 피해 간다는 건 그냥 미친 개소리다. 불행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진 않으니까. 근데 우리는 더 버티고 버텨서 살아남아야 한다. 근거가 뭐냐고? 앞으로 행복할 거라는 걸 약속하면 되지 않냐고? 아니다. 영화같이 행복해지는 상황은 전적으로 영화에서만 일어난다. 미래는 불행할 것이다. 항우울제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기분까지 닿을지도 모른다. 근데, 이것과 별개로 할 말이 있다. 고맙다. 살아줘서. 그동안 힘든 세상을 이겨줘서. 단지 그 말 뿐이다. 세상의 승리자가 여러분이라는 말 하지 않겠다. 언제는 승자고 패자가 되는 게 삶이니까. 근데 내가 세상에게 하고 싶은 말은 쓸쓸한 이런 굴레야 말로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느끼는 인생의 과정에 대해 썼고 이 영화를 골랐다. 앞으로의 순간을 보장할 수 없다면, 혼자가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다. 살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살아야 하는 이유 같은 거 찾지 못하더라도 무작정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행복해지고 가끔 불행한게 우리의 삶 아닌가. <꿈의 제인>의 엔딩신이 떠오른다. 우리 어쩌다 있을 행복할 순간을 위해 죽지 말고 오래오래 살자. 잠깐 있는 행복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더 버티자. 왕따라서 고맙고 당신이라 다행이다. 이건 빈말 아니라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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