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2-09-19 22:51:12
준비되지 않은 마음이 한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
영화 <케빈에 대하여> 리뷰

대비되는 붉은 색으로 가득한 주변, 겹치는 모습과 누군가 소외된 채로 웃음으로 가득한 집이 비친다. 계속해서 비춰주는 빨간 빛, 과거와의 연결 고리가 조금씩 좁혀진다. 뜨겁게 피어오르는 사랑과 한순간의 실수로 벌어진 결실, 그리고 불행의 서막을 번갈아 가며 보인다. 에바를 비추는 거울에 케빈이 있듯 오직 그를 남긴 채 모든 것이 사라졌다. 오직 그들만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순간에 피어오른 뜨거운 사랑으로 인한 계획되지 않은 임신과 고통스러운 출산이 이어지며 괴로움을 온몸으로 느낀다. 그리고 에바는 육아와 집안일 그리고 일을 동시에 하게 되며 그 감정은 극대화 된다. 모두 그가 한 선택이지만 괴로운 것도 사실이다.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 앞에서 "난 네가 태어나기 전에 더 행복했어"와 같은 말을 하며 후회 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반면 사회에서 바라보는 모성애를 주입한다.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이다. 툭하고 나오지 않은 사랑의 힘은 노력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사랑하지 않는 친절함은 독이 되었고 사랑하던 모든 것들은 사라졌으니 "나는 너에게 묻고 싶단다. 왜, 대체 왜 그랬니?"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모르겠어요." 이런 대화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케빈과 에바의 마찰은 평범하지 않은 성장 과정에 의해 더욱 극대화 된다. 아버지와는 원만한 관게를 유지하면서도 에바와는 전혀 그렇지 않은 모습에 혼란스럽기만 하다. 무미건조함이 가득한 가운데 케빈이 에바로부터 큰 애정을 느꼈던 순간이 찾아온다. 몸이 심하게 아파 간호를 받게된 케빈은 엄마의 품에 안겨 '로빈 후드'라는 책을 읽는다. 그 생각이 현재로 이어져 맞지 않는 어릴 때의 옷을 입고 활을 쏘는 취미를 가진다.

삐뚤어진 애정은 잘못된 방식으로 더해가 멀면서도 가깝고 싶은 마음이 극대화 된다. 그 예민한 감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던 마음을 읽었던 것이다. 몇년 전에 영화를 봤을 때는 망가져 가는 케빈의 모습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다시 바라보니 부정적인 무언가를 해서라도 애정을 갈구하는 결핍된 모습이 보였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에바도 케빈을 마주하며 케빈 자체의 모습과 자신을 바라보게 된 건 아닐까. 평범하지 않은 케빈에게도 거대한 애정이 쏟아졌다면 어떤 모습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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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각과 기억 사이에서 갈등하는 방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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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셰와 권총 사이;삶과 죽음, 그리고 두 가지의 꿈
사진출처:다음 영화
[리멤버]에서는 정 반대의 개념들이 많이 등장한다. 삶과 죽음이 그러하고, 기억과 망각이 그러하며, 친일파의 부(Richness)와 그렇지 않은 자 들의 궁핍도 그러하다. 이런 개념들은 그저 영화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이고 부딪치고 충돌하며 영화에서 갈등을 만들어낸다.
이 많고 많은 극단의 대립을 영화는 크게 포르셰(인규)와 권총(필주)의 모습을 빌어 설명한다.
붉은 포르셰는 누구나 가질 수 없다. 특히 인규(남주혁)에겐 허황되고 이뤄질 수 없는 꿈에 가깝지만. 행여 실수로라도(?) 포르셰를 사게 될지도 모르는 그 희소에 가까운 희망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영위해야 하는 삶의 결정체가 스포츠카이기도 하다.
이는 필주(이성민)에게도 어느 정도 비슷하다.
포르셰는 포기하고 싶지만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뛰고 있는 심장처럼 붉었고. 또한 누가 봐도 허무맹랑하지만 자신은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하는 목표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필주는 자신의 지리멸렬한 삶을 그저 놓아버릴 수 없었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잊고 싶었지만. 아직 그러기엔 너무 일렀다.
그에 반해 권총은 필주에게는 죽음이었고. 망각하려는 것이 아닌 망각의 과정 속에서도 잊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목표에 가까웠다. 잊음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삶에서도 몇십 년 묵은 응어리는 자신의 뇌리에서 잊힐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인규는 포르셰를 보며 열광한다. 그러나 필주에게 삶은 그저 자신의 목표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필주에겐 이런 총이 생의 후반부를 바쳐 이루고 싶은 꿈이었지만. 인규에게는 그저 위험해 보이는 낡은 목표에 불과했다.
번쩍번쩍한 삶은 자꾸 죽음과 과거의 기억을 잊으라며 빛나는 포르셰의 형태로 필주를 유혹하지만. 죽음마저도 초월한 남자의 의지는 결국 작동이 되는지조차 의심스러운 고대 유물 같은 총이 몇 번에 걸쳐 방아쇠를 당기게 만들었다.
방관자에게 찾아오는 대물림의 비극;지금의 우리도 겪고 있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필규는 점점 인규의 삶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인규의 삶은 (친일파로 대변되는) 악이 근절되지 않거나 불합리한 일을 좌시(외면) 했을 경우 역사는 반복되며, 그 속에서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대를 이어 고통받는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인규는 소외되었고 약했으며, 선택의 여지는 열심히 살 수록 줄어들고 있는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처음엔 안심시키는 말처럼 내뱉었던 문장이었다. 인규 너에게는 아무 피해 없게 하겠다는 말은.
그러나 인규에게 같은, 혹은 비슷한 뉘앙스의 문장을 몇 번이고 내뱉는 동안 필규는 점점 진심을 실어야 했다.
필주는 더 이상 방관자로서의 삶을 살지 않기로 마음먹었고. 인규가 그런 삶을 조금이라도 짧게 살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소명을 반드시 이뤄야 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적이라 할 수 있는 복수가 인규의 삶을 하루아침에 바꿔놓을 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악의 고리 하나쯤은 끊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나가 끊어지고 나면, 힘의 불균형이 이뤄져 늦더라도 결국은 완전히 이런 고통이나 악의 세습도 이뤄지지 않는 날이 올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2022년 현재에도, 슬슬 끊어지기 시작하는 악연의 고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노동자의 피를 흰 천으로 가린다 하여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무성의하게 진행된 보상 아닌 보상은 장례식장에 팥으로 만든 음식을 들이게 만들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머리를 조아린다 하여 사과했으니 이제 괜찮을 것이라며 생각하고 넘어갈 사건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방관자의 자세로 뒷짐을 진 채 이러다 사그라든다는 태도를 취한다면, 다음번에 기계에 빨려 들어가게 될 대상은 내가 될 것이다. 필주 또한 방관자가 견뎠어야 할 마음의 무게를 그렇게 인생을 바쳐 갚았다.
방관자가 치러야 할 대가는 그렇게도 길고 무거웠다.
결과와 과정의 딜레마;영화를 보며 속이 시원해야 하는가.
사진출처:다음 영화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바스터즈]에서는 가상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나치 독일을 말 그대로 불살라버리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런 가상의 처벌은 영화를 보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속을 시원하게 해 주는 카타르시스를 불러왔다.
그러나 리멤버의 어조는 조금 더 무겁다. 과정이 중요한지. 아니면 결과로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저울에 떡 하니 올린다. 그 어떤 곳으로 저울이 기울어진다 해도 두 덩어리의 생각이 마음 위에 올려진 것은 변함이 없기에 영화를 보며 마음이 조금씩 무거워진다.
문제는 영화가 메시지를 설명하는 방법이 불친절하다는 데 있다.
인물에 대한 그 어떤 설명도 하지 않으며, 모든 설정을 영화를 위해 이용하고 있다. 그러니 인규가 멋들어지게 포르셰를 몰아붙인다 해도 [베이비 드라이버]처럼 박진감 넘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병에 걸린 필주는 [메멘토]나 [살인자의 기억법]처럼 기억의 왜곡 한 번 없이 스스로의 임무가 완성될 때까지 그 어떤 것도 잊지 않는다.
그 결과, 직설적이다 싶을 정도로 명확한 메시지는 비겁하고 무책임한 전달 방식 때문에 너무도 빨리 관객의 마음속에 자리 잡아 버리고. 그 이후의 시간들은 그저 자신의 메시지를 재확인하는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영화는 최악의 케이스는 피했다. 바로 메시지도, 전달 방식도 최악인 경우 말이다.
책임을 지라는 것은 데이터 센터에 일어난 화재에 통감하며 사퇴하라는 뜻이 아니며. 사과의 형태로 만원도 되지 않는 포인트를 지급하는데 끝나는 것이 아닐 텐데도. 한국을 거의 독점하고 있던 귀여운 라이언을 필두로 한 이 회사는 메시지도, 방식도 최악인 형태의 사과를 했다. 위안부에게 사죄하라는 요구에 그 당시의 시세로 몇십 엔을 지불한 일본 정부와 다를 게 없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악의 실수를 저지른 담당자들은, 다음 세대의 피해자에 해당하는 인규의 대사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좋지 않은 결과에는 사퇴(필주의 경우는 죽음)가 아닌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시시하고 치사하게 등을 보이며 그 사태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이 영화처럼 메시지라도 마음에 와닿게 했었어야 했다.
마치면서
매번 말하지만.
나는 이성민 배우가 “뜨기”만을 죽어라 바란 사람 중 하나다. 분명 작은 역할이었던 그가, 점점 지변을 넓혀가며 변두리에서 중앙에 가까운 자리에 서는 순간을. 내 인생의 일부분을 할애하며 기다려왔고, 그렇게 맞이한 좀 더 밝은 곳에 서 있는 배우의 모습에 뿌듯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가운데 토막의 자리는 여러 이름의 책임감도 함께 요하는 자리였다. 주연으로 나선 영화들에서 거뒀던 성적들은 그다지 좋지 않았고. 나는 행여나 그가 밀려날까 봐 조마조마했다.
비록 배역이고 그 또한 연기의 일부였겠지만. 이성민 배우는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80대 노인이 되는 동안 거쳐야 했을 시간과 고난만큼 잘 씹어 삼켰고, 그 결과 영화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연기 내공의 변주를 보여준다.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내뱉는 말 한마디에도 눈물을 쏟게 만들 만큼.
물론 이번 영화가 훌륭한 영화냐라고 묻는다면. 애석하게도 좋고 나쁨의 경계에 있는 외나무다리에서 몇 번이고 양쪽으로 번갈아가며 빠질 영화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그의 연기는 이 불친절하고 비겁한 방법으로 메시지를 보여주는 영화를 멱살 잡고 끌고 간다. 그 모습은 때론 애처롭지만, 자신의 어깨에 놓인 짐의 무게를 완벽히 이해한 자의 책임감을 비추기도 한다.
완벽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영화의 말미에서 안도와 아주 조금의 행복이 섞인 얼굴로 입가에 미소를 흘리던 필주에게서 무언가를 이제 승화시킨 듯 한 이성민 배우의 홀가분함도 함께 보이는 듯했다.
[이 글의 TMI]
최근 참 많은 일이 있었다.
특히 주말에 있었던 이태원 참사는 아픈 마음과 함께 그런 사태에서 드러난 인간 양상에 대한 분노로 인해 정말 힘들었다.
이 사건 속에 존재한 방관자들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자신이 치러야 할 대가는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으며. 기대했던 모습보다 훨씬 더 처참할 것이라는 것을.
상처받고 힘든 모든 분들에게 평안이 조금씩이라도 빨리 오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리멤버 #이일형 #이성민 #남주혁 #한국영화 #영화추천 #최신영화 #영화리뷰어 #영화해석 #결말해석 #영화감상평 #개봉영화 #영화보고글쓰기 #Munalogi #브런치작가 #네이버영화인플루언서 #내일은파란안경 #메가박스 #영화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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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팝콘 계산이 서는 액션 오락 블록버스터
<모럴 센스>와 <더 버블>, 국가는 달라도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묶이는 두 작품은 결과물마저 실망스럽다는 것으로도 묶이는데요. 그런 점에서 이번 <야차>는 이를 한시름 덜어놓을 수 있는 것이 "넷플릭스 오리지널"이긴 하나 만든 작품은 아닙니다.
당초, 극장 개봉을 염두 했으나 모든 영화들이 그렇듯이 "코로나19"로 개봉이 연기되었고 결국 "넷플릭스 공개"로 선회했습니다. 하나, 그 사이에 "박해수"분이 <오징어 게임>으로 인지도가 확 상승했으니 "넷플릭스"로서도 꽤나 흥미로웠을 작품이었을 겁니다. '과연, 어떤 작품이었는지?' - 영화 <야차>의 감상을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기업의 비리 조사 과정에서 어그러진 검사 "지훈"은 징계성으로 "국정원 파견 검사"로 내려오게 됩니다. 그러던 와중에 중국 선양에서 "지강인"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블랙 팀의 보고가 허위였다는 것을 알게 된 본부는 진상 조사를 위해 "지훈"을 보내는데요. 하지만, "지훈"은 블랙 팀이 진행하고 있는 진짜 작전이 따로 있음을 알게 되는데...
계산이 되는 영화
1. 개명 부탁드립니다.
영화를 떠나 '제목'은 관객 혹은 독자들에게 해당 글과 작품이 어떤 방향성을 지니고 보여주겠다는 출사표입니다.그런 점에서 <야차>의 원제 'Yaksha: Ruthless Operations'를 직역하면, "무자비한 작전"쯤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저를 비롯한 관객들은 '해당 작품이 어떤 장르이며, 무엇을 보여주겠구나!'라는 저의를 알 것이고, <야차>는 125분 동안 이를 충실히 수행해 나갑니다. 손해 보는 느낌은 아니지만, '왜, "야차"라는 이름으로 지었는지?'에는 갸우뚱거리게 만듭니다.이름의 의미를 알까?
실명을 말할 수는 없지만, 저의 이름에도 뜻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뜻은 부모님께서 '그렇게 되었으면 혹은 살았으면'하는 바람과 같은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 <야차>의 "무자비한 작전"은 전혀, 눈에 띄지 않습니다. 분명히, 화려한 액션이 등장하지만 총알은 팔과 다리에 착지하며 머리들은 다 피해 가는 기적의 회피술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마무리에는 애써 눈(카메라)을 감거나 하늘 위로 올려버리니 "15세 이용가"임을 재확인하게 만듭니다.
2. 악당들도 세요?
이야기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야차"의 매력은 법과 절차를 무시하고, 시원시원하게 밀어붙이는 것일 겁니다. 뻔히, 예상되지만 아는 맛이 무섭다고 그렇게, 주인공 "야차"는 이를 보여주지만 어째 캐릭터가 모호하게만 느껴집니다. 이런 이유에는 이미, <존 윅, 2014-19>시리즈와 <노바디, 2021>외에도 여러 작품들에서도 다뤄진 진부함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와 필적하는 악당이 없다는 것입니다.상생하시죠.
<존 윅, 2014-19>시리즈와 <노바디, 2021>의 주인공들이 압도적으로 그려지긴 하나, 이를 상대하는 악역들의 세력도 만만치 않게 그려집니다. 레슬링 팬이 아니더라도,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의 주인공, '스톤 콜드 스티브 오스틴'도 이런 캐릭터로 한 획을 그은 선수입니다. 선역과 악역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피니시 "스터너"를 갈겨버리는 것이 그의 매력인데 이 중 가장 맛깔나는 상대는 자신의 회사 회장인 "빈스 맥맨"입니다. '회사의 대표'라는 타이틀도 있지만, 직원들에게 해고를 비롯한 폭언을 일삼는 그의 악독함 "스터너"를 맛깔나게 그려주었거든요. 그런 점에서 <야차>에선 "설경구"분에 필적할 악당이 있었을까요?
3. 경쟁보단 나만 할 수 있는 거!
사실, 이를 말하기엔 <야차>의 모든 캐릭터들의 매력을 살펴봐야 합니다. 먼저, "지강인"과 대립각을 세우는 검사 "지훈"은 수사를 하는 과정부터 모든 것들이 그와 반대점에 서있는 인물입니다. 여기에 "정의란 무엇인가?"를 주제까지 내미지만, 열띤 토론 대신 일방적인 설득으로 이를 성급하게 마무리 짓는데요. 이런 이유에는 영화 <야차>에는 이 2명 만이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까라면 까야죠?
그를 돕는 "련희(북한)"를 비롯하여, 가장 중요한 열쇠를 쥔 "수연", 그리고 악당 "오자와(일본)"까지 다양한 국가와 요원들은 이야기의 스케일을 키워나갑니다. 무엇보다 해당 캐릭터들은 각자 분담한 영역들이 확실하여 출연 당위성을 내세우나 "야차"의 블랙팀은 '공기'에 가까울 만큼의 비중과 매력을 보여줍니다. 으레, 이런 멀티캐스팅 영화에선 해당 캐릭터들의 매력들을 나눠가며 이들의 출연 당위성을 정립시키는데요. 이들의 역할 자체가 겹치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야차"도 보여줄 수 있으니 있어도 없는 캐릭터들이 되어버립니다. 결국, 영화 <야차>도 "넷플릭스 오리지널"의 징크스를 끊어내지 못했네요.
※ 엔딩 크레딧에 후속편을 예고한 쿠키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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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름은 혼자가 되는 이유가 아니라, 함께일 때 더 찬란해지는 이유
[랑데부] (2023)
감독: 박윤주
시놉시스: 누나는 남동생이 외계인에 빠져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이 신경 쓰인다. 동생의 생일날, 그 이유를 눈치챈 누나가 외계인과 만나겠다는 남동생의 계획을 방해하기 시작하면서 서로의 크고 작은 마음이 드러난다.
출처: 인디그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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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이 유독 풍부한 아이들이 있다.
나도 한때 상상 속 친구와 대화하고, 초능력을 믿고, 비밀 요원을 자처하던 시절이 있었다.
영화 <랑데부>의 주인공 역시 그런 기발한 상상과 믿음을 품고 살아간다. 자신이 외계인이고, 외계인과 소통한다고 진지하게 말하는데, 그 믿음의 시작은 아주 사소한 ‘다름’에서 비롯된다. 가족 중 유일한 A형 혈액형, 혼자만 쌍꺼풀이 없는 외모, 그런 자신이 어쩐지 남들과는 다른 존재라는 의문. 아이는 자신의 생일날 외계인들이 자신을 데리러 올 거라 확신하고, 그 신호를 보내기 위해선 ‘돌팔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팔찌는 누나가 가지고 있다. 팔찌를 돌려주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동생이 외계인이라고 믿는 걸 그저 허무맹랑한 장난이라 생각해서일까. 아니면 정말 동생이 떠나버릴까 두려워서일까. 누나는 처음엔 그저 동생이 엉뚱하고 장난기 많은 아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마음이 복잡해진다.
랑데부 - 서로 다른 세계가 만나는 순간
그러기에 동생이 더이상 외계인을 찾지 않도록 팔찌를 더 꽁꽁 숨긴다. 동생이 왜 우주로 떠나고 싶은지, 또 왜 자신을 외계인이라 생각하는지, 왜 ‘다른’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누나가 진짜로 이해해야 했던 것은, 우리 모두가 각자의 우주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편견을 깨고 동생의 세계와 함께하기를 선택한 누나. 외계 신호를 보내기 위해 함께 춤을 추며 외계어를 외치는 장면에서 바로 남매의 우주가 하나가 되는 반짝이는 순간을 볼 수 있었다. 사실 동생이 정말로 우주로 가버릴까 팔찌를 숨기고 걱정하는 누나는 이미 외계인을 믿는 동생의 우주에 한 발짝 들어와 있던 것 아닐까? 영화 제목인 ‘랑데부’(둘 이상의 우주선이 우주 공간에서 만나는 일)가 이토록 잘 어울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떠날 용기와 돌아올 이유
동생이 말하던 대로 외계인은 정말 UFO를 타고 남매의 집을 찾아온다. 동생은 그토록 꿈꾸던 우주 여행을 떠나지만, 누나는 동생이 영영 떠나버릴까 걱정된다. 그래도 결국 동생은 ‘가족’이라는 중력에 이끌려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소외감을 안겨줬던 이 지구로 돌아온 동생은, 어떤 마음으로 돌아오게 된 걸까? 우리가 살아가며 부딪히는 ‘다름’이라는 벽, 그럼에도 우리를 이 땅에 발 붙이고 살아가게 만드는 그 중력 같은 건,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랑데부>는 우리 모두가 각자의 세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 다름을 존중하고 축복할 때 비로소 진짜 유대가 생긴다는 것을 알려주는 영화다. 단순히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그 다름 덕분에 더 찬란한 순간들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영화가 참 따뜻하고 귀엽다.
궤도를 돌며 결국 만나게 될 우리 모두의 우주에게
입양가정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보고 싶었다는 감독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히 입양아나 입양가족만의 이야기를 넘어선다. 마치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처럼, 사회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소외감이나 이질감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 생각된다.
우리 모두 자신만의 우주를 뚝심 있게 잘 가꿔나가기를.
또, 그만큼 타인의 우주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축복할 수 있기를.
그리고 힘든 순간, 자신만의 세계로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중력이 어디서 오는지 곰곰이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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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르: 러브 앤 썬더 (2022)
** 영화 <토르: 러브 앤 썬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토르: 러브 앤 썬더 (2022)
감독: 타이카 와이티티
출연: 크리스 헴스워스, 나탈리 포트만, 테사 톰슨, 크리스찬 베일, 타이카 와이티티
장르: SF, 액션, 판타지
상영시간: 118분
개봉일: 2022.07.06
토르, 오락영화의 본질을 되새기다
MCU 영화 중 최초로 네번째 솔로무비를 갖게 된 '토르'.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이 각각 은퇴와 사망으로 하차한 이후 '어벤져스 빅3' 중 유일하게 현역 히어로로 잔류한 '토르'의 행보는 세대교체로 이어질지, 새로운 플롯과 함께 영광스러운 은퇴식을 거행할지 귀추가 주목되어왔다. 특히 '토르4'의 타이틀이 <토르: 러브 앤 썬더>로 확정되고, 과거 히로인으로 출연했던 '제인 포스터(나탈리 포트만)'의 복귀가 예고되면서 그녀가 연기하는 '마이티 토르'가 '토르(크리스 헴스워스)'의 뒤를 이어 히어로로 활약하는 작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쉬헐크'나 '케이트 비숍'처럼 현 시대상에 맞춰 젠더 스와프를 표방한 작품들이 MCU 내에서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적어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토르: 러브 앤 썬더>는 이러한 의미부여성 스토리에는 관심이 없다. 감독이 연출한 전작(토르: 라그나로크)처럼 스페이스 오페라의 화려한 영상미와 코믹스러운 연출에 포커스를 두며 마블 영화는 본래 어린아이들도 쉽게 즐길 수 있는 대중오락영화였음을 시사한다. 이는 다른 MCU 작품들과 달리 어린아이들을 스토리에 적극 활용한 부분에서 두드러진다. 극중 빌런 '고르(크리스찬 베일)'에 의해 납치된 아스가르드 아이들은 결말부에 썬더볼트로부터 힘을 얻어 괴수들과 직접 맞서 싸운다. 약자인 어린이들은 히어로들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클리셰를 깬 부분이다. 최근 개봉했던 마블 영화들이 극중 설정만으로 관객에게 피로도를 증가시켰던 것을 생각하면 현재 MCU의 흐름보다는 가볍게 볼 수 있는 액션오락영화라는 본질에 좀 더 비중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시리즈의 연장 속 답보 상태에 놓인 토르
마블 영화의 초심으로 되돌아가고자 함이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의 의도였다면 본작의 스토리 흐름과 기획 방향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현재 다면적으로 세계관을 확장 중인 MCU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토르: 러브 앤 썬더>는 페이즈4 내에서 아무 기능도 해내지 못한 채 그저 평이한 MCU 시리즈 홍보물에 가까울 정도로 보인다. 히어로물은 보통 트릴로지 정도로 구성되는 게 일반적인데, '토르'는 무려 4편까지 제작되었다. 이는 신화적 성격이 강했던 1-2편과 달리 <토르: 라그나로크>를 시점으로 '토르' 솔로 무비의 스타일이 '코미디+스페이스 오페라'로 완벽하게 변화하였고,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일행에 합류하면서 등장인물 중 가장 변화무쌍한 행적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 고향인 아스가르드는 소멸되고, 가족과 소중한 친구들을 잃었으며 '엔드게임'을 끝으로 소행을 다했기 때문에 '토르'라는 인물의 다음 페이지를 새롭게 써내려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본작은 '토르'의 성장도, 인상적인 행보도 이끌어내지 못하는 것은 물론 MCU 시리즈 내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가진 히어로 중 하나였던 '토르'의 본래 매력마저 선명하지 못하다. 지금까지의 <토르> 시리즈는 주인공의 성장을 이끌어내는 작품이었다는 점에서 매 편마다 기획의도와 명분이 뚜렷했다. 반면 이번 작품은 가만히 살펴보면 <토르: 라그나로크>의 구조를 그대로 가져온 채 오히려 지금까지 빌드업해온 시리즈를 퇴보시키는 행보를 보인다. 존재감 강한 강력한 빌런의 등장은 '헬라'에서 '고르'로 대체되었으며 부모를 잃은 것에 대한 슬픔으로 가득찼던 '토르'는 추가로 친구와 동생을 잃어 삶의 의미를 상실한 상태의 모습 그대로로 등장한다. 판타지적 배경으로 등장했던 사카아르 행성은 옴니포턴스 시티와 섀도우 렐름으로, 핵심 무기(?)를 손에 쥐고 있던 '그랜드마스터'는 '제우스'로 뒤바뀌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3편과 4편에서 겹쳐보이는 인물이나 장치들이 완벽하게 동일한 포지션에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전작을 떠오르게 하는 요소가 많다는 것은 변함 없는 사실이다. 스토리 면에서는 퇴보했고, '토르'의 서사보다는 히로인인 '제인'과 빌런 '고르'의 이야기가 영화의 중심이 되면서 주인공은 이렇다 할 역할도 하지 못한 채 내내 붕 떠 있기만 하다. '토르'라는 인물 자체로서는 더 이상 써내려갈 성장담이나 이야깃거리가 없는데, 시리즈물을 과하게 연장하다보니 발생한 문제점이랄까. 차라리 본작이 '토르'의 은퇴나 세대교체, 혹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멤버들과 함께 꾸리는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였다면 이렇게까지 맥없는 작품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탈리 포트만, 의미 있는 복귀였나
<토르: 러브 앤 썬더>에서 가장 주목받는 캐릭터는 단연 묠니르를 들고 9년만에 컴백한 '제인 포스터(나탈리 포트만)'이다. '나탈리 포트만'은 <토르> 1-2편에서 히로인으로 활약했지만 이후 제작진과의 의견 충돌로 하차하면서 시리즈에 등장하지 않았다. 작중 설정도 '토르'와 '제인 포스터'가 사귀었다가 결별한 것으로 일단락 되는 듯했다. 하지만 제인은 4편을 기점으로 다시 복귀하였고, 단순히 히어로가 보호해야 하는 여주인공이 아닌 적과 대등하게 맞서는 '마이티 토르'가 되어 돌아왔다. 천문학자인 제인이 묠니르를 들고 근육질 몸매가 되어 적에 맞서 싸우는 장면은 본작의 제일 큰 볼거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마이티 토르'는 결과적으로 제인의 다음 페이지를 기약하기 위한 장치는 아니었고, MCU와의 아름다운 이별을 기리는 일종의 선물 같은 존재였다. 이를 통해 갑작스러운 하차로 일전에 깔끔하게 마무리짓지 못했던 '토르'와의 러브스토리를 정리하고, 두 편이나 히로인으로 등장했던 '제인 포스터'라는 캐릭터를 허투루 쓰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다. 다만 '토르'와 '제인'의 9년 공백을 채우기 위해 등장한 회상 장면들은 관객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었던 두 남녀의 애정을 전달하는데 역부족이었고, 작중 투샷으로 비춰지는 장면들도 애인보다는 전투 콤비로서의 성향이 더 강했다. 또한 '사랑'이라는 핵심 소재가 '고르'와의 대립이라는 또다른 주요 소재와 맞물리지 못하고 충돌하면서 토르와 제인의 애틋한 관계가 생각보다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즉, 주인공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동적인 위치에 놓였던 캐릭터를 전투신에서 전면에 나서 싸우는 캐릭터로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나 그 이상의 의미를 끌어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나탈리 포트만'이 연기한 '마이티 토르'의 모습은 신선했다.)
황홀한 영상미, 그에 반하는 개그 남발
<토르: 라그나로크>로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우주 곳곳의 영역을 환상적으로 그려낸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은 이번에도 영상미로는 뒤지지 않는 연출력을 선보였다. 특히 토르 일행이 '제우스(러셀 크로우)'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옴니포턴스 시티'는 전지전능한 신들이 모인 쾌락의 공간답게 황금빛으로 물들인 장관으로 그려진다. (극장의 큰 스크린으로 본다면 그 시각적 감동은 좀 더 클 것이다.) 마치 십여년 전 MCU 영화에 '아스가르드'가 처음 등장했을 때 느꼈던 황홀감과 비슷했다. 후반부 '고르(크리스찬 베일)'와 전투신이 펼쳐지는 쉐도우 렐름을 피폐한 흑백으로 처리한 것도 빌런의 스산함과 공포스러움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기에 적절했다. 화려한 컬러로 대변되는 '토르'와 흑백으로 표현되는 '고르'의 선명한 대비는 애니메이션 속의 클래식한 선악 구도로 느껴져 이 부분에서도 어린이들을 핵심 타겟으로 잡은 감독의 지향점이 드러났다.
그러나 <토르: 러브 앤 썬더>는 영상미를 빼면 남는 것이 많지 않다. 감독은 <토르: 라그나로크>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개그성 장면들이나 대사들을 수없이 가미했는데, 문제는 의도한 코믹함이 재미있지 않다는 것이다. 본작의 핵심 플롯이 무엇인가. 병마와 싸우다 '마이티 토르'가 되어 마지막 생명력을 다 소진할 때까지 전투력을 불사르는 '제인', 그리고 신들의 외면으로 하나뿐인 딸을 잃고 신에 대한 증오에 사로잡혀 스스로 악당이 된 '고르'의 이야기다. 가볍고 유쾌하게 풀어내기보다는 진지하고 무겁게 접근해야 할 스토리라는 것이다. 제인과 토르의 사랑과 이별이 절절하게 느껴지지 않고, 고르의 결말이 어물쩍하게 이뤄진 것처럼 보인 것도 이 때문이다. 웃으라고 넣은 장면과 대사들이 웃기지도 않고, 영화의 전반적인 톤 자체를 흐렸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는 큰 실책이 되었다.
토르는 다시 돌아온다고 했다...
마지막 쿠키영상에서 보았듯이 '토르'는 다시 돌아온다는 예고편을 날렸다. 시리즈의 후속편이 나올 것이라는 쪽이 가장 가능성이 높겠지만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같은 다른 시리즈물에 등장할 것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잃은 토르에게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고르의 딸, '러브'가 생겼고 부녀가 함께 우주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돕는다는 스토리라인이 추가되어 토르의 후속편을 기약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의 영향일까. 더 이상 '토르'의 이야기가 크게 궁금하지는 않다. 한때 자신을 죽이려 했던 빌런의 아이를 갑자기 키우게 되고, 두 사람이 전투 콤비가 된다는 것은 지금까지 '토르'가 써내려온 이야기 중 가장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토르: 라그나로크>로 급상승되었던 시리즈에 대한 평가가 본작으로 인해 다시 급락하게 되었으니 다음 작품을 내놓을 생각이라면 명분과 방향성이 확실한 스토리를 반드시 갖춰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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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었던 '토르'마저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반응을 남김으로써 MCU의 향후 행보가 크게 위태로워질 듯하다. <닥터 스트레인지2>는 <완다비전>과의 연계성과 '멀티버스'라는 설정의 본격적인 도입으로 진입장벽이 높아졌다는 확실한 리스크가 있었고, <이터널즈>는 신생 시리즈라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크게 낮았다. 따라서 극명하게 갈렸던 두 작품의 평가는 어느 정도 이해할 여지가 존재하나 <토르: 러브 앤 썬더>는 많은 이들이 호평을 보장할 만한 시리즈였다. 페이즈3까지만 하더라도 마블 영화들은 절대적인 호평을 받는 추세였으나 페이즈4에 진입하면서 혹평이 지속되고 있다. 물론 계속해서 흥행에는 성공하고 있지만, 이전과 같은 완성도를 구현하지 못하는 현상이 장기화된다면 제아무리 MCU라 할지라도 하락세가 찾아오지 않으리란 법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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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가 죽었다 | SNS 사이로 진짜 범인을 찾아줘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고객이 맡긴 열쇠로 남의 집을 훔쳐보는 취미를 지닌 공인중개사 ‘구정태’(변요한). 그는 우연히 편의점에서 인플루언서 '한소라'(신혜선)를 만난 후 그녀의 삶을 지켜본다. 소시지 핫바를 사 먹으면서 비건 샐러드 사진을 포스팅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본능적으로 흥미를 느꼈기 때문. 때마침 이사를 결심한 한소라는 구정태에게 집 키를 맡기고, 구정태는 자유로이 그녀 집을 드나든다.
그러던 어느 날, 구정태는 소파에 죽은 채 늘어진 한소라를 발견한다. 그는 의심스러운 자기 행적을 지우기 위해 애쓰지만, 약점을 쥔 범인이 자기를 협박해 오자 그는 패닉에 빠진다. 설상가상으로 강력반 형사 ‘오영주’(이엘)의 수사망도 그를 향해 좁혀진다. 이에 구정태는 억울함을 밝힐 증거를 찾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소라의 SNS 속을 떠돌기 시작한다.
바뀐 시대와 인간을 담은 스릴러
스릴러는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장르다. <살인의 추억>과 <올드보이>부터 <추격자>와 <끝까지 간다>, 그리고 <잠>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관객을 사로잡았다. 다만 높은 인기만큼 스릴러는 정확히 정의하기 어려운 장르이기도 하다. 서스펜스가 중심인 플롯만 있으면 스릴러의 자격이 있으니까. 그나마 도망자 대 추적자의 구도가 한 기준점이 될 뿐이다.
이처럼 구분이 애매하다는 말은 곧 범용성이 좋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러 사건과 이야기를 자유롭게 결합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다 보니 스릴러는 신선함을 유지하기 어렵다. 다루지 않은 사건, 인물, 구도와 전개가 없으므로. 그래서 가장 쉽게 차별화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임시완과 천우희 주연의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나 손석구의 <댓글부대>처럼.
<그녀가 죽었다>는 그 연장선상에 위치한 작품이다. 인스타그램, 유튜브 같은 SNS의 영향력을 활용한 범죄 사건을 중심에 둔 스릴러다. 특히 단순히 범죄 수단이나 도구의 변화뿐만 아니라 시대에 발맞춰 달라진 사람들의 심리와 내면까지 통찰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 덕분에 <그녀가 죽었다>는 기시감과 개연성 부족 등 적지 않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힘 있게 달리는 데 성공했다.
내가 만든 '나'를 지키는 싸움
SNS의 파급력이 커지면서 우리는 이제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주는 내 모습대로 '가상의 나'를 꾸며낸다. 때로는 '현실의 나'보다 '가상의 나'를 가꾸고 유지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 허상은 내 본모습을 대신하기도 한다. 현실의 내가 어떻게 살고, 어떤 사람인지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해진다.
<그녀가 죽었다> 속 두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몸을 팔아 하루하루 살던 한소라는 선행으로 가득한 SNS 피드가 관심을 끌고, 돈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에 유기견과 길고양이 입양, 보육원과 요양원 봉사로 피드를 가득 채운다. 실상은 후원금을 빼먹는 사기꾼이지만, 그녀는 점점 그 허상 속에 빠져든다.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이 자기를 버렸기에 어쩔 수 없었다고, 스스로는 피해자라고 굳게 믿으면서.
구정태 역시 방패막이를 앞세워 본모습을 숨긴다. 그는 대한민국 최대의 부동산 카페에서 가장 잘 나가는 강사로서 받은 관심을 먹고 산다. 공인중개사로서 뛰어난 평판은 그가 범죄를 행하는 데 도움이 된다. 키를 맡기는 집주인이 많아질수록 집에 침입하기 쉬워지니까. 그래서 그는 평판과 겉모습을 유지하는 데만 애쓸 뿐, 자기 취미가 어디서부터 잘못되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녀가 죽었다>는 각자가 꾸며낸 세계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남의 관심을 받기 위해 활짝 열어둔 문은 자기 인생을 파괴할 지름길이 되니까. 남을 향한 관심은 자기를 찌르는 칼이 되어 돌아오고. 구정태와 한소라 둘 다 결국에는 자기가 판 자기 무덤에 빠지지 않으려 발버둥 칠 뿐이다.
붕 떠버린 캐릭터
다만 <그녀가 죽었다>가 이면에 숨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힘은 충분하지 않다. 이 이야기는 캐릭터가 핵심이다. 그들이 돋보일수록 갈등도 분명해진다. 각 인물의 세계에 관객이 공감을 많이 할수록, 그들에게 SNS와 타인의 관심이 갖는 의미나 그 세계가 무너질 때 닥쳐오는 위기감이 명확히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
그런데 영화는 정작 캐릭터에게 그리 공을 들이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콘셉트만 있을 뿐, 콘셉트를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은 부족하다. 자연히 주연을 포함한 대부분의 등장인물은 생동감이 없다. 그나마 개인사가 일부 밝혀진 한소라의 행적은 따라갈 수 있다. 피해망상이 섞인 사이코패스라고 본다면 큰 문제가 없다.
반면에 구정태라는 캐릭터는 최소한의 설명도 없다. 이야기 전개에 필요한 관음증 환자, 스토커를 한 인물에게 몰아준 설정만 있는 격이다. 그가 자기 기질을 깨닫게 된 계기나, 악취미를 갖게 된 동기 등은 조금도 설명되지 않는다. 결국 구정태라는 인물은 그가 소유한 거대한 창고만큼이나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그가 마지막에 얻은 깨달음이 큰 임팩트를 주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러닝타임 내내 흘러나오는 내레이션이 의도와는 달리 몰입을 방해하는 원인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내레이션은 두 주인공이 자기가 만든 세계와 현실 간의 괴리를 합리화하는 기제를 보여준다. 구성태와 달리 한소라가 자기 문제를 끝내 깨닫지 못하는 모습도 내레이션의 온도 차이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캐릭터가 설득력이 없다 보니, 특히 구정태의 내레이션은 붕 뜬 채 영화 분위기와 좀처럼 융화되지 않는다.
미처 지우지 못한 기시감
몰입감이 떨어지는 대목에서는 애써 감추려던 기시감도 흘러나온다. 예를 들어 <그녀가 죽었다>는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나를 찾아줘>와 매우 흡사하게 전개된다. 두 주인공의 관계나 직업만 다를 뿐, 피해자가 사실 가해자라는 플롯은 다를 게 없다. 자연히 <그녀가 죽었다>가 서스펜스를 유지하는 데 필연적으로 한계가 따른다. 스릴러를 좋아할수록, 예상이 쉽기 때문이다.
경찰을 활용해 한계선을 늘리려는 시도는 엿보인다. 영화는 피해자 한소라까지 의심하는 오영주와 기존 수사 관행에 의지하는 다른 경찰 간의 갈등을 은연중에 거듭 암시한다. 가리키는 방향이 충돌하는 가설과 증거를 보여주면서 관객을 조금이라도 더 현혹하고, 반전의 충격을 키워보려는 노력인 셈이다. 다만 경찰에게 주어진 분량이 절대적으로 적다 보니 큰 효과는 없다.
반면에 예측가능한 전개 덕분에 오히려 세밀하고 현실적인 아이디어가 힘을 발휘하는 대목도 있다. 공인중개사에게 도어록 비밀번호를 알려주거나 열쇠를 맡기는 상황이 대표적이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할 일이지만, 범죄에 활용될 수 있다며 신뢰를 잃는 순간 이는 예상 못한 스릴로 전환된다. 딥페이크와 유사한 범죄가 스쳐 지나가는 대목 역시 같은 맥락에서 꽤 흥미롭다.
배우의 힘
또 신혜선과 변요한, 두 주연 배우의 힘을 빌려 단점을 순간적으로 감추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소라가 피해자 행세를 하며 광기를 발산하거나, 어머니 유골함에서 범인이 숨긴 증거를 꺼내며 구정태가 오열하는 순간이 대표적이다.
이는 두 캐릭터의 시점으로 나뉜 편집에도 힘을 불어넣는다. 각 파트를 책임진 배우들의 열연 덕분에 두 이야기가 하나로 겹쳐지는 지점에서의 폭발력만큼은 결코 부족하지 않다. 그 덕분에 <그녀가 죽었다>는 숱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SNS 시대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스릴러로서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Acceptable 무난함
인생샷과 댓글 사이로 '나를 찾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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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 마침내 돌아온 영웅들
1. '슈퍼맨(헨리 카빌)'의 비명 소리가 온 세상에 울려 퍼진다. 지구의 모두가 슬픔에 잠긴 사이 '배트맨(벤 에플렉)'과 '원더우먼(갤 가돗)'은 앞으로 닥쳐올 위기를 직감한다. 지구의 수호자가 죽었음을, 자신을 저지할 최후의 보루가 사라졌음을 깨닫고 행성을 파괴할 무기 '마더 박스'를 차지하기 위해 지구를 침공할 '스테픈울프(키어런 하인즈)'와 그 흑막인 '다크사이드(레이 포터)'의 존재를 눈치챈 것이다. 이에 그들은 슈퍼맨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의 유지를 지켜내기 위해 새로운 영웅인 '아쿠아맨(제이슨 모모아)'과 '사이보그(레이 피셔)', '플래시(에즈라 밀러)'를 찾아 나선다.
팬들의 큰 기대 속에 마침내 공개된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에 대해 영화 리뷰 사이트인 로튼 토마토의 평론가들은 다음과 같은 총평을 내렸다.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는 감독의 비전에 맞게 확장되는 거대한 장면들로 제목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며, 이 영화가 존재할 수 있도록 노력한 팬들을 만족시킨다(Zack Snyder's Justice League lives up to its title with a sprawling cut that expands to fit the director's vision -- and should satisfy the fans who willed it into existence)."
평가대로 팬들이 만족할 장면, 확장된 거대한 장면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잭 스나이더 특유의 슬로 모션에 담긴 각 히어로의 능력과 역할을 최대한으로 부각하는 액션, <맨 오브 스틸>과 <배트맨 대 슈퍼맨>의 연장선상에 위치한 Junkie XL의 음악은 눈과 귀를 즐겁게 한다. 1.33 대 1의 화면비율을 통해 전달되는 감독 특유의 다크한 영상에는 수많은 스펙터클과 상징들이 빼곡하다. 기존에 <어벤져스> 속 히어로들의 코스튬만 바꾼 듯 보였던 등장인물들도 커진 분량 안에서 각각의 개성과 매력을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 새롭게 디자인된 빌런들 역시 거대한 위압감을 선사하며 선과 악 사이에서 적절히 균형을 유지한다.
2. 그렇다면 이 환상적인 볼거리들, 거대한 컷들이 성공적으로 구현해냈다는 잭 스나이더 감독의 비전은 과연 무엇일까? 이 답을 찾기 위해서는 잠시 시선을 전작인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으로 돌릴 필요가 있다. 영화가 슈퍼맨이 둠즈데이에게 찔려 사망하는 <배트맨 대 슈퍼맨>의 결말로부터 곧장 이어지는 만큼, <배트맨 대 슈퍼맨>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를 이해할 때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가 갖는 진짜 의미를 온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배트맨 대 슈퍼맨>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현대적으로 리메이크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한다. 가장 사랑하는 친구 파트로클로스를 잃은 아킬레우스는 그 분노를 거름 삼아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를 죽인다. 그의 시체를 전차로 끌고 다니며 모욕한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자신의 막사를 찾아온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를 만난 그는 변한다. 프리아모스의 용기와 부성애에 감명받은 그는 역시 아들을 사지에 내보낸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낀다. 이에 아킬레우스는 그리스와 트로이의 휴전을 제안하고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주며, '일리아스'는 헥토르의 장례식으로 끝난다.
'일리아스'의 흐름을 <배트맨 대 슈퍼맨>은 정확히 따른다. 고담시의 수많은 범죄자와 맞서 싸우다가 가장 친한 친구인 로빈을 잃은 배트맨. 그는 어느 날 하늘에서 나타나 도시를 파괴하는 슈퍼맨을 보며 그동안 쌓아온 분노를 폭발시킨다. 이에 그는 슈퍼맨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의 발목에 줄을 묶어 온갖 고통을 준 끝에 그를 죽이려고 한다. 그러나 단지 죽여야 할 대상으로 보던 슈퍼맨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목격한 그는 먼저 세상을 떠난 자신의 부모님을 떠올리며 슈퍼맨과 휴전하고, 더 큰 위험인 둠즈데이에 맞서 싸운다. 그리고 전투에서 사망한 슈퍼맨의 장례식에서 저스티스 리그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3. 약간의 순서만 바뀐 채 일리아스의 서사를 반복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나면 <배트맨 대 슈퍼맨>이 <저스티스 리그>를 위해 남긴 두 개의 주춧돌을 알아볼 수 있다. 하나는 <배트맨 대 슈퍼맨>이 사실상 분노에 가득 찼던 배트맨이 아킬레우스처럼 인간성을 되찾아 가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배트맨의 대적자였던 슈퍼맨은 헥토르와 프리아모스가 보여줬던 것처럼 사랑, 희생, 용기와 같은 고결한 인간성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슈퍼맨의 죽음을 계기로 배트맨이 저스티스 리그를 만든다는 결론은 곧 인간다움을 잃게 될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팀을 만들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는 단독 영화에서 언제나 사랑의 힘을 강조했던 원더우먼이 배트맨과 함께 하기로 결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로 돌아와 보자. 새로운 <저스티스 리그>가 기존 버전으로부터 가장 차이를 보이는 대목은 세 명의 히어로, 아쿠아맨, 플래시, 사이보그의 서사가 보충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잭 스나이더 감독이 전작부터 만들어 온 큰 그림이 온전해진 결정적인 이유다. 왜냐하면 세 히어로는 비록 정도는 다를지언정 전작에서의 배트맨처럼 제각기 분노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아쿠아맨은 자신을 버리고, 신경을 쓰지 않은 어머니이자, 아틀란티스의 왕 아틀라나에게 분노해 아틀란티스의 일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억울하게 쓴 누명을 풀기 위해 범죄학을 공부하는 플래시는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지 못하는 그에게 크게 실망한다. 사이보그 역시 일하느라 바빠서 자신의 미식축구 경기에 오지 않고, 어머니와 자신의 교통사고도 막지 못한, 심지어 자신을 끔찍한 기계와 결합시킨 아버지를 향한 분노를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배트맨과 원더우먼을 만나며 그들이 걸었던 길을 따라간다. 분노와 실망감을 떨쳐내고 슈퍼맨이 상징하는 인간에 대한 희망, 그리고 그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기 시작한다. 아틀란티스가 스테픈 울프에게 공격당한 후 아틀란티스인들의 간청으로부터 그들의 절실함을 느낀 아쿠아맨은 슈퍼맨의 유지를 받들겠다던 배트맨을 떠올리고, 어미니의 오지창과 함께 그에게 합류한다. 플래시는 화만 유발하던 "너만의 미래를 만들어라"라는 아버지의 말로부터 세상을 구할 기회를 잡는다. 사이보그는 아버지의 희생을 눈앞에서 목격하며 그의 사랑을 깨닫고, 그가 기대대로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한 영웅의 길을 걷는다. 이처럼 새로운 <저스티스 리그>는 <배트맨 대 슈퍼맨>의 결말로부터 곧장 이어지면서 전작의 서사를 계승함과 동시에 더욱 확장시킨다.
4. 그렇기에 잭 스나이더의 촬영본 중 4분의 1 가량만 활용된 조스 웨던 감독의 기존 <저스티스 리그>에서 각각의 플롯이 유기적으로 연계되지 않고, 영화의 짜임새가 부족해 보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잭 스나이더 감독이 가족사로 인해 중간에 하차했던 2017년의 <저스티스 리그>는 각 히어로의 서사가 부족하고, 6명의 히어로가 하나의 팀으로 묶이게 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으며, 슈퍼맨의 부활을 비롯해 중요한 에피소드들이 짜임새 있게 구성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반면에 5명의 히어로가 슈퍼맨을 바라보며 인간에 대한 분노와 실망, 그로 인한 비인간적인 면모로부터 벗어나는 서사로 연결된 이번 작품은 다르다. 그들만의 힘으로는 지구와 모든 인간을 말살하겠다는 스테판 울프를 막을 수 없었던 이유, 그들이 인간의 고결함과 희망의 상징인 슈퍼맨을 되살려야겠다고 결심한 계기, 히어로인 슈퍼맨보다 한 인간인 클라크 켄트를 잊지 않았던 로이스 레인이 부활한 그를 설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전개 등은 큰 그림 안에서 물 흐르듯 유려하게 이어진다.
이처럼 '일리아스'와 <배트맨 대 슈퍼맨>의 이야기를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반복, 변형하는 각 인물의 서사와 플롯이 제자리를 찾아 가자 잭 스나이더의 비전은 화려한 액션과 Junkie XL의 웅장한 사운드트랙과 더불어 큰 전율을 선사한다. 이에 더해 로이스 레인을 잃고 분노로 타락해 지구를 파괴한 슈퍼맨에 맞서 조커를 비롯한 빌런과도 손잡은 배트맨이 등장하는 에필로그는 반복, 변형, 확장되던 히어로들의 이야기가 전복될 앞으로의 이야기를 기대케 하며 취소된 속편에 대한 아쉬움과 일말의 희망을 동시에 자아낸다.
5. 물론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다. 우선 상술했듯이 전작인 <배트맨 대 슈퍼맨>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기에 미리 관람하지 않은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2017년에 개봉한 저스티스 리그를 보지 않은 관객의 입장에서도 어떤 장면이 편집되었고, 어떠한 내용이 달라졌는지를 비교하는 재미가 하나 줄어든다.
슬로 모션이 남발되는 경향은 호불호가 갈릴 여지를 남기고, 개그 씬처럼 흐름을 끊는 장면들이 있다 보니 총 6개의 에피소드와 한 개의 에필로그로 구성된 4시간 2분의 분량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플래시가 아이리스 웨스트를 구하고, 사이보그가 자신의 능력을 하나씩 시험해보는 것과 같이 영화 전개에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 장면들도 리듬을 잡아먹는다. 또한 배트맨의 악몽, 빌런들의 집합인 인저스티스 리그를 만들려는 렉스 루터의 음모, 새로운 캐릭터인 마션 맨헌터의 등장 등은 DC 영화와 코믹스 팬들이 아니라면 흥미를 느끼기 어려운 사족처럼 보일 수 있다.
6. 한편 영화 외적으로도 주목할 지점이 있다. 사실 제작 도중에 교체된 감독의 촬영본으로 완전히 재편집한 영화가 공개된 것은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DVD나 블루레이를 출시할 때 감독판 혹은 확장판을 공개하는 것과는 또 다른 경우다. 이는 소비자인 팬덤의 강력한 요청과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며, 앞으로의 반응에 따라 소비자와 제작자의 역학 구도가 뒤바뀌는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을 수 있다.
특히 스티븐 스필버그, 크리스토퍼 놀란과 같은 스타 감독이 아니라면 편집권이 제한되어 감독의 구상이 온전히 발현되기 힘든 할리우드 시스템에 균열이 가해진 사례라는 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영화 팬들에게 상업적인 블록버스터 영화에서도 단지 트렌드를 쫓는 것 대신 다양한 색깔을 지닌 감독들의 비전이 온전히 빛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심어주는 것이다. 그 결과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는 몇몇 두드러진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탕자로서 수많은 팬들에게 축제나 다름없는 귀환을 알린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고대하던 잭 스나이더와 DC의 명예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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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녀 파트2, 1편만한 영화가 나왔을까?
?Rabbitgumi 입니다!
마녀 파트2가 개봉했습니다.
김다미 배우의 데뷔작 마녀1이 꽤 좋은 반응을 보였었죠.
물론 그 영화도 호불호가 강하게 갈리는 편이었습니다.
이번 2편은 어땠을까요?
영화에는 다양한 배우들이 출연을 하고 있어요.
액션도 꽤 비중을 차지하고 있죠.
한국형 수퍼히어로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제가 영화가 어땠을지 알려드릴게요! :)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
그리고 제가 매주 일요일마다 영화에세이를 전달 드리는 Rabbitgumi 영화 이야기 뉴스레터에도 관심을 가져주시고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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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온킹 원작 총정리 #10
원작 라이온 킹에 관한 여러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라이온킹 #라이언킹 #lion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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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싱글 인 서울> 메인 예고편
한 마디로 설레는 타입 맞죠? 네 맞습니다 플러팅 장인들의 케미터지는 메인 예고편 공개! 현실 공감 로맨스 [싱글 인 서울] 11월 29일 극장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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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행복의 속도> 메인 예고편
꽃, 바람, 새 그리고 나뭇길...
해발 1,500미터 천상의 화원 ‘오제’
‘이가라시’와 ‘이시타카’는
산장까지 짐을 배달하는 ‘봇카’이다
70~80kg의 짐을 지고 같은 길을 걷지만
매 순간 ‘오제’의 길 위에서
자신의 시간을 채워가는 '이가라시'
반면 '봇카'를 널리 알리고 싶은 '이시타카’
닮은 듯 다른 두 사람이 건네는 이야기
지금, 당신은 어느 길 위에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