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st2021-02-24 00:00:00
라스트 레터
22년 만에 도착한 답장
이와이 슌지 감독는 이 영화를 <러브 레터, 1995>의 정식 속편은 아니지만, <라스트 레터>을 집필할 당시에 러브레터를 어느 정도 의식했다고 한다. 다 보고 나면 <러브 레터>에 대한 답장처럼 도 느껴진다. 왜냐하면 <라스트 레터>가 감정을 쌓아가는 과정은 <러브 레터>와 아주 유사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초반부와 죽은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후반부의 격차에서 애절함을 발생시키는 구조부터가 그렇다. 손 편지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도 그렇다. 세상을 떠난 첫사랑, 차마 전할 수 없었던 진심이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누구에게나 찬란했을 학창 시절의 추억을 꺼낸다. 순수한 청춘의 비밀이 밝혀지며 공감대를 넓혀간다. 피아노 건반에 발맞춰 아름다운 영상미로 감수성을 한껏 끌어올리는 연출도 동일하다. 이렇게 ‘남겨진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방식’으로 죽은 존재를 부활시키는 것도 <러브 레터>와 닮았다. 물론 세상을 떠난 사람과 닮은 인물이 등장하는 것도 동일하다.
그밖에 대학시절 사귀는 과정은 생략한 채 그 직전까지의 고교 생활만 다룬 것은 <4월이야기>에서, 그리고 두 소녀가 여름방학을 함께 보내며, 불꽃놀이를 하는 장면은 <하나와 앨리스>에서 가져왔다. 이렇듯 자신의 전작들을 적절히 재활용하면서 이와이 슌지다운 카메라워킹과 기법들을 선보인다.
그러나 <러브 레터>의 극적인 형식을 활용했으나 <라스트 레터>는 동어반복을 하지 않는다. 전작처럼 죽은 이를 추억하며, 후반에 이르러 진실을 드러내는 구조를 취하지만, 계절을 ‘겨울’에서 ‘여름‘으로 바꿔 <러브 레터>를 부정한다. 이를 알 수 있는 것이 <러브레터>의 두 주인공인 나카야마 미호와 도요카와 에츠시를 어떤 모습으로 등장했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와이 슌지의 어두운 면을 끌어들인다.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이와이 슌지가 말하고 싶은 것은 ’첫사랑의 추억‘외에 다른 게 있다.
이 영화는 쿄시로(후쿠야마 마사하루)와 유리(마츠 다카코), 두 사람을 내세워 번갈아가며 내면의 심리를 드러낸 방식이다. 중년의 남녀가 그들의 학창 시절을 추억하고 노인세대의 삶도 다루고 부부관계, 동창회, 폐교 직전의 학교건물까지 다루고 있다. 결말에 이르러서는 2세들에게 무언가를 전해주려는 다소 복합적인 구조를 취했다. 그럼에도 초반의 정신없던 이야기가 중반쯤부터 정리되면서 안정적으로 끝맺는다. 감독의 연출은 때로는 산문처럼 느린 호흡으로, 어떨 때는 운문처럼 최소한의 장면으로 천천히 관객을 설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쿄시로가 왜 죽은 미사키와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살아가는지가 와닿지 않는다. 그래서 <라스트 레터>의 구성이 느슨하며, 어느 부분에서 조금 억지스럽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어쩌면 이 영화는 아무래도 머리로는 ‘첫사랑 멜로’를 하고 싶었으나 가슴으로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의심이 졸업식 축사를 전면에 내세운 포스터를 본 순간 확신하게 됐다. 졸업 축사에서 ‘꿈을 이루거나 혹은 이루지 못한 사람도 있을 테지만, 자신의 꿈과 가능성이 무한하게 여겨졌던 이 장소를 몇 번이고 떠올릴 것’이라며 감독은 '사랑'보다 '꿈'에 무게를 실는다.
가만보면 이 영화에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인물들로 가득 차다. 짝사랑하는 또래의 학생을 피해 전학을 갈까 고민하는 소요카, 20년 넘게 차기작을 쓰지 못하는 소설가, 엄마를 잃은 슬픔으로 자신의 내면으로 천착해 들어가는 아유미, 유리 또한 덤덤해 보이지만, 첫사랑에 대한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그런데 노인들은 앞날은 모른다면서 힘차게 전진한다. 바로 '고희(70세)가 넘어 영어를 공부하는 할머니'와 그녀의 영어선생님이다. 이 분들은 일본의 고령층 즉, 미국과 패권 경쟁을 했던 ‘단카이 세대(団塊の世代)’를 상징한다. 이로 미루어 봤을 때 <라스트 레터>는 초식화된 중년의 '빙하기 세대(마츠 다카코, 후쿠야마 마사하루)'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졸업 '축사'를 통해 새로운 희망을 일본의 10대들(히로세 스즈, 모리 나나)에게 품고 있다.
이 3세대 간의 애틋함은 단순한 첫사랑으로 해석될 수 없는 복잡한 성격을 지닌다. 다시 말해 이와이 슌지는 <러브레터>의 첫사랑 멜로 형식을 빌려 일본의 현주소를 안타까워하며 과거의 일본을 추억하고 있는 것 같다. 고로 미사키의 정체는 '80년대 잘 나갔던 일본 고도성장'일지도 모르겠다는 합리적 추론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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