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3-06-18 18:27:13
소수자 감정, 정말 이게 다인가요?
〈엘리멘탈〉 리뷰

6★/10★
물, 불, 흙, 공기 4개 원소가 ‘함께’ 살아가는 엘리멘트 시티. 이곳에 불끼리 모여 살다가 재난이 발생해 삶의 터전을 잃은 앰버네 가족이 이주해온다. 가족은 불을 주 손님으로 하는 가게를 꾸려 생계를 이어왔고 앰버네 가족은 여기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 그런데 우연한 계기로 앰버는 엘리멘트 시티 공무원으로 일하는 웨이드(물)을 만난다. 둘은 처음에는 '불법’ 증축된 앰버의 가게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지만 이내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결국에는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물은 불을 꺼뜨리고, 불은 물을 증발시킨다. 둘은 이 난관을 넘을 수 있을까?


영화에서 각 원소가 상징하는 바는 명확하다. 물은 백인이고 흙과 공기는 물(백인)과 적당히 어울릴 수 있는 존재의 은유이며, 불은 물과는 만나서는 안 되는 유색인의 은유다. 영화는 서로 만났을 때 큰일이라도 날 줄 알았던 물과 불의 접촉에서 파생되는 긍정적인 변화를 강조하며 인종 간 화합을 요청한다. 이민자 가족의 설움과 분노를 중간중간 녹여내기도 한다. 캐릭터도 매력적이다. 적당한 완성도를 가진 영화다. 하지만 ‘인종 간 접촉(그리고 사랑)을 통한 변화’라는 메시지는 2023년에 말하기에는 다소 고루하다. 인종에 따라 서로 다른 위계화된 공간에 살아가고, 그 경계를 넘는 일이 금기였던 시대에나 적합한 메시지다.
영화에서 앰버는 자신의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다. 영화는 ‘다혈질’인 앰버가 감성적이고 다정한 웨이드를 만나 사랑에 빠지며 성격이 바뀌어가는 과정이 나온다. 그러나 유색인/소수자인 앰버의 화가 고작 편견 없는 백인 기득권과의 사랑으로 해소될 리가 없다. 앰버의 화에는 인종 정의의 복잡한 맥락이 담겨 있을 테니까. 그러나 영화는 여기에 주목하면서도 이를 제대로 해소하지는 못한다. 2023년에 인종 간 공존과 사랑을 이야기하려면 메시지와 질문이 조금 더 치밀하게 고민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무언가 비밀이 숨겨 있을 듯 암시되다가 어느새 ‘해소’되고야 마는 소수자 감정(분노)을 더 밀도 높게 풀어냈다면 어땠을까 싶다. 이민자 2세가 부모에게 느끼는 애정‧존경과 부담감의 공존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하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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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줄거리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한 하루미. 그녀는 병원에서 만난 '레이코'라는 친절한 간호사와 가까이 지낸다.
퇴원이 다가오고 재활치료를 앞두고 있는 하루미에게 레이코는 일을 그만두려 하는데 함께 살면서 월세를 반씩 아끼는 게 어떻냐고 제안한다. 마침 일을 못 하게 된 처지의 하루미는 레이코를 룸메이트로 받아들인다.
어느 날인가부터 하루미는 이상한 일을 겪기 시작하면서 레이코를 의심하게 된다. 결국 하루미는 레이코를 미행하게 되는데...
감상포인트
1. 동물 죽는 장면 나오니 그런 장면 못 보는 분들은 미리 참고하시길.
2. 초반 전개가 약간 지루할 수 있으나, 일본식 이름은 나중에 헷갈릴 수 있으니 집중해야 한다.
3. 전형적인 일본식 전개라고 할까.
감상평
영화는 사건이 일어난 시점으로부터 과거로 돌아가 현재까지의 일을 짚는 액자형 구조의 서사다. 초반에는 굉장히 잔잔 바리로 흘러가기 때문에 조금 지루할 수도 있다. 책이든 영화든 일본 작품의 가장 큰 단점은 이름을 기억하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가끔 책 읽다가 앞으로 돌려서 '아, 얘가 얘였지.'하고 확인해야 하는 일도 있는데, 이 영화는 잔잔하다 보니 얼굴도 딱 기억하기가 힘들다. 인물이 그리 많지도 않은데... 그냥 내가 집중을 안 한 걸 수도.
전형적인 일본식 전개다. 내가 생각하는 일본식 전개란, 차근차근 상황을 전개시키면서 아주 세세하게 복선을 깔고 마지막에 결말을 '얹는다'라는 느낌이다. 최근 작품들은 굉장히 스피드하게 전개한 후 마지막에 결말을 마지막에 뻥 '터트린다'라는 느낌인데 반해, 정적이고 느린 감이 있어서 아무래도 호불호가 많이 갈릴 것 같은 영화.
스피드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예스러운 전개 방식 때문에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 같이 쌓음의 미학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괜찮은 영화. 폭풍우가 몰아치기 직전의 고요한 바다처럼 음산한 기운을 가득 품고는 있지만, 절대 거세게 몰아치지는 않는다.
이런 스타일은 특히 도서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에서 도드라지는 것 같다. 책이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한국에는 정식 출간을 하지 않은 모양이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 영화 자체는 2014년도 작품이긴 한데, 아무래도 원작 소설은 그것보다 훨씬 더 오래되지 않았을까 싶다. 메모리 카드 나오는 것 보고 굉장히 반가웠던... ㅋㅋㅋ
*여기부터는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영화는 '스릴러'에서 '공포'로 전환되는 지점이 확실하다. 바로 하루미가 거울을 볼 때다. 레이코의 행동이 단순히 집착이라고 생각했다가, 알고 보니 이중인격자였다는 걸 알게 되고, 마지막에 그 이중인격자 즉, 레이코와 마리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걸 알았을 때.
약간 아쉬웠던 점은 이렇게 몇 번 의심을 하게 만든 후에 중요한 사실을 밝히고 나니 충격이 좀 덜하다는 느낌이다. 내용이 꺾이는 지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보니 긴장감이 오히려 느슨해지는 감이 있다. 그래서 마지막에 진실을 알았을 때도 뻔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건 좀 아쉬웠다. 같은 이야기라도 글자로 읽었을 때와 영상으로 시청할 때는 굉장히 다르다. 원작에 너무 충실했던 건 아닌가, 조금 각색했으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이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아마 원작이 다루는 사회적 문제를 그대로 가져오고 싶어서 원작을 파괴하지 않은 것 같다.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학대 당하던 하루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또 다른 자아를 형성한다. 한 명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로 나타난 레이코, 한 명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공격하는 마리. 극단적으로 치우친 마리라는 자아는 하루미를 넘어 에리에게까지 손을 뻗는다.
"괴로웠지? 도망칠 수 있는 방법 알려줄게.
자신에게 다른 이름을 하나 지어 줘."
"그럼, 마리."
"그래, 마리라는 이름을 줄게."
언뜻 보면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에리라는 여학생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하루미에게 '마리'라는 자아를 부여받는 듯한 장면은 특히 그렇다. 하지만 하루미가 고통받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엄마를 죽인 지 몇 년이 지났음에도 사회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그들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린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의 울타리는 무너진 채로, 어떤 어른도 이런 상황에 대해 책임지지 않은 채로 하루미와 에리의 지옥 같은 나날들은 반복되고 있었다. 영화는 이런 사회적 문제를 적나라하게 짚어내며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동시에 어린 학생을 저지한 것이 경찰이 아닌 하루미라는 사실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에리에게 마리라는 자아를 주었던 하루미 자신이 말이다. 마리는 에리가 자유로워지길 바랐다. 하지만 하루미와 레이코는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어머니를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이었을지도 모른다. 지옥 같은 삶을 견디기 위해 만들어낸 자신의 자아가 했던 행동을 자기 자신이 부정해야 하는 아이러니함. 잘했다고도, 잘못했다고도 할 수 없는 이 상황에 마음이 쓰라렸다.
손금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고 하던가. 에리를 막아서며 남은 칼자국은 하루미가 받았던 상처 때문에 레이코와 마리라는 인격이 새로이 만들어졌다는 것에 대한 상징이다. 더불어 이제는 이 칼자국을 보며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다행이에요. 당신은 제 상상이 아니라서."
영화 내내 하루미를 쫓아다니는 구도는 처음 교통사고가 날 때부터 하루미 안에 있는 또 다른 인격들을 다 보았다고 말한다. 그게 사실인지 그냥 로맨틱하려고 하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 말은 하루미에게 남은 아픔의 흔적들을 그는 알아보았다는 뜻이다. 자신을 알아봐 주고 상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난 하루미는 이제 다른 인격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 혼자가 아니니까.
"하지만 그 애는 아직도 에리라고 불리기 싫어해요. 자기 이름인데도."
"그렇겠죠. 그놈이 나쁜 짓을 하면서 계속 귀에 속삭였을 테니까요."
다만 영화는 여전히 이런 사회 속에 피해자가 남아있음을 상기시킨다. 하루미는 기적적으로 누군가를 만나 치유되었지만, 에리는 그렇지 못한 상황이다. 영화가 마냥 해피엔딩으로만 끝난 게 아니라, 이런 여지를 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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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리포터가 가진 '진짜' 마법의 비밀
우리는 종종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자 할 때, <구체적으로 바뀌는 것의 실체>는 무엇인가.
'무엇이 바뀌어야'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인가
해리포터 시리즈의 완결편, <해리포터 : 죽음의 성물>에서, 해리포터는 볼드모트를 무찌르고 드디어 '새로운 세계'를 여는데 성공한다.
해리는 어떻게 볼드모트를 무찌를 수 있었을까. 해리가 가진 그 어마어마한 힘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이었나.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해리포터의 '진짜 마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부활의 돌'을 어떻게 깨웠는지부터 살펴야 한다.
'부활의 돌'이 담긴 '스니치'
부활의 돌은 세 가지 죽음의 성물 가운데 하나이다.
1) 천하무적 지팡이, 2) 투명망토, 그리고 3) 부활의 돌,
이 세가지 성물을 가진 자가 가장 막강한 마법의 힘을 갖게 된다고 알려져 있다.
지팡이나 투명망토는 일단 얻기만 하면 사용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지팡이는 휘두르면 되고, 망토는 뒤집어 쓰면 된다.
그런데 부활의 돌은 다르다.
부활의 돌이 '작동'이 되려면, '나는 끝에서 열린다(I open at the close)'라는 말을 이해해야만 한다.
나름 작동설명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작동설명서를 이해하지 못해 해리포터는 오랫동안 부활의 돌을 작동시키지 못하고 스니치 안에 보관만 하고 있었다.
해리포터 힘이 완성되는 핵심 키는 바로 이 부활의 돌을 깨우는 것이다.
세 가지 성물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야 가장 강력한 마법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지팡이, 투명망토의 사용은 쉽지만, 부활의 돌의 사용은 가장 까다롭게 되어 있다.
그래서 부활의 돌을 깨우는 것이 해리포터 마법의 완성에 가장 핵심 열쇠가 되는 것이다!!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 해리포터는 드디어 부활의 돌을 작동시킨다!
해리가 '나는 끝에서 열린다'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기 직전, 무슨 일이 있었나.
해리포터는 어느 지점에서 이 까다로운 부활의 돌 작동 설명서를 이해하게 되었나.
죽기 직전 해리포터에게 자신의 '눈물'을 담아가게 하는 '스네이프'
해리포터는 스네이프와 오랜 원수지간이었다. 해리포터는 스네이프를 진심으로 증오하고 있었다.
볼드모트에 의해 스네이프가 죽게 되는 장면을 지켜보던 해리포터는, 스네이프의 소원대로 죽어가는 스네이프의 눈에서 눈물을 담아간다.
스네이프의 '눈물'을 '펜시브'에 넣어 스네이프의 '기억'을 보게 되는 해리포터
해리포터는 원수같은 스네이프지만, 죽어가는 스네이프의 마지막 부탁을 모른척 하지 않는다.
해리포터는 스네이프의 눈물을 펜시브에 넣어, <스네이프 관점의 이야기>를 오롯이 체험하게 된다.
(*펜시브 : 특정 사람의 기억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마법 도구, 그 사람의 머릿속에서 직접 추출한 기억이나 눈물 등을 넣으면, 그 사람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가게 된다)
해리포터의 엄마 릴리를 진심으로 사랑한 스네이프
해리포터는 '스네이프의 이야기'를 체험하게 되면서,
스네이프가 자신의 엄마 릴리를 얼마나 진심으로 사랑했는지,
자신이 절대 선이라고 믿고 있던 아빠 제임스가 스네이프와의 관계에서는 악당이었다는 것,
스네이프가 자신의 엄마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걸고 가장 어려운 임무를 맡고 있었다는 것,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해리포터를 항상 지켜주고 있었다는 것 등을 알게 된다.
해리는 자신이 지금까지 진실을 왜곡해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보이는 것만을 전부라고 믿으며 그 속에 감춰진 또 다른 진실에 대해서는 외면해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지금껏 스네이프와의 관계에서 고수하고 있던 '관계에 대한 이해 체계'를 완전히 바꾸게 된다.
스네이프와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하게 된 것이다.
상대방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 체계에 '왜곡'이 일어났음을 알아차리고, 그 왜곡을 '수정'했을때, 비로소 자신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 새로운 세계가 열릴 수 있는 길에 대한 '확신'이 서게 된다.
부활의 돌을 깨우고, 볼드모트에게 자발적으로 '죽임'을 당하러 가는 해리포터
해리포터의 죽으려는 결심, 스스로 볼드모트 앞에 나아가겠다는 결심은 ‘좌절'이나 ‘절망'이 아니었다.
그 길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죽음이 아닌 새로운 삶임을 증명하는 일인 것이다.
해리포터는 스네이프의 기억을 통해, 스네이프의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이 볼드모트를 무찌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신이 서게 된다.
해리포터가 그토록 미워하고 증오하던 '스네이프'의 이야기를 통해,
볼드모트를 무찌르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진짜 힘을 얻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면서도 의미심장하다!
'진실'을 알아볼 수 있는 힘,
더이상 진실을 왜곡하지 않을 힘,
진실을 감당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어디로부터 기인하는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해리포터가 가진 진짜 힘의 비밀, 바로 '원수라 여기는 사람의 이야기를 왜곡없이 온전히 이해하고,
그 관계에 대한 부정적 측면을 넘어서 새로운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던, "진짜 사랑"이다.
해리포터와 덤블도어
언젠가 덤블도어는 해리포터에게 말했었다.
너의 가장 큰 힘은 바로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그것이 너와 볼드모트의 결정적 차이라고.
해리포터는 실망했었다. '무슨 사랑이 나의 가장 큰 힘이란 말인가'. 어떻게 사랑으로 볼드모트를 무찌른단 말인가.
해리포터는 아직 몰랐었다. '진짜 사랑'이 얼마나 하기 어려운 것인지! 그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장 근본 힘이 된다는 것을!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 호감가는 사람, 나와 문제가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 사람에 대해서는 나는 얼마든지 그 사람의 사정, 그 사람 관점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문제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다. 내가 비호감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 이야기는 듣기 싫다. 관심도 가지 않는다. 궁금하지 않다. 입을 떼기도 전에 비하하고 싶다. 의심하고 싶다. 평가절하하고 싶다.
왜곡시키고 싶다. 어떻게든 나쁜놈으로 몰고가고 싶다.
보이는 것만 보아서는 '진짜 사랑'할 수 없다.
내 눈에 보고 싶은 것만 보아서는 '진짜 사랑'할 수 없다.
내 눈에 보이지 않던 것, 내가 보고 싶지 않던 것, 내가 외면하던 것,
그것을 볼 수 있는 용기가 있을 때, '진짜 사랑'도 가능해 진다.
부정적인 측면을 넘어서 새로운 경지를 볼 수 있을 때,
관계 속 '부활의 돌'을 작동시킬 수 있을 때,
'진짜 사랑'을 할 수 있을 때, 새로운 세계도 열린다.
-
- 다른 버전의 내가 되고 싶어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
나는 아직까지도 종종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도 '나'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생각하고 느끼는 내가 모두의 마음속에 하나씩 있다니.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나는 또 '나'라는 것으로 태어나서 지금과 같이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무언가가 될까. 지금 나의 이 비루한 영혼(같은 게 있다면)이 다시 태어나도 또 내가 될까.
(이 주제와 관련하여 존 페리,『개인의 동일성과 불멸성에 관한 대화(2017)』를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
어릴 적에는 내가 갖지 못하여 소망했던 것들, '피아노를 가진 나'라든지, '공놀이를 잘하는 나'라든지, '가출한 나' 같은 모습들을 상상하곤 했다. 내 상상 속에서는 내가 빛이 들어오는 거실에서 피아노를 땡땡 치고 엄마는 옆에서 책을 읽고, 발야구를 할 때 저 멀리까지 공을 뻥 차고, 밤거리를 헤매는 내가 있었다. 현실의 나는 피아노도 없고 소위 말하는 '개발'이지만.
닥터 스트레인지는 <어벤저스: 엔드게임>에서 수억 가지의 경우의 수를 보고 왔다. 그 이후로 각자의 유니버스에 살고 있던 스파이더맨이 어쩌다 한 자리에 모였고, 로키는 여러 모습의 로키를, 완다는 다른 삶을 사는 완다를 만났다. MCU는 멀티버스가 전 세계 어린이들의 마음속에 하나씩 있었음을 간파한 듯하다.
그러나 나는 히어로도 아니고 초월적인 힘을 가지지도 않은 평범한 인간이다. 마블의 멀티버스는 특별한 존재들만의 우주이니 나같은 미물과는 관계없는 이야기다. 특별한 존재들이 세상을 구할 때 나는 행인1로 지나갔다가, 우주가 뒤바뀔 때는 또 사라졌다가 하는 NPC에 불과하다.
한편, A24의 영화들은 그 행인1들을 조명한다. MCU에서 우주괴물이 지구를 괴롭힐 때 으악 소리 한번 못지르던 행인1들은 A24의 영화에서 방황하는 레이디 버드가 되기도 하고, 미국으로 이민가서 미나리를 키우기도 하고, 집도 절도 없어 아이를 입양보내야만 하는 플로리다의 미혼모가 되기도 한다.
멀티버스가 이제는 흔한 소재가 되어버린 데다 너무 긴 제목 탓에 큰 기대 없이 영화관에 앉아 있었다. 나는 '이제 울어라!'하는 장치만 나와도 쉽게 울어버리는 울보긴 한데 멀티버스 액션 코믹 영화를 보면서 울 생각은 없었다.
어쩌면 망한 버전의 나
미국에서 코인세탁소를 운영하는 에블린과 웨이먼드 부부가 있다. 이들은 홍콩에서 무작정 이민을 온, 이를테면 <첨밀밀>의 소군과 이요 같은 사람들이다. 에블린의 앞에는 수만 개의 영수증이 펼쳐져 있다. 국세청에서는 이들의 비용처리를 문제삼아 세탁소가 문을 닫을 판이다.
아들을 원했던 에블린의 아버지는 에블린이 태어날 때부터 실망했다. 웨이먼드와 결혼한다 하여 또 실망했다. 이제는 늙고 병들어 그렇게 싫어했던 딸과 함께 살아야 하는 형편이다. 에블린은 언제나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었지만 사업가로 성공한 모습을 보이지도 못하고, 딸 조이는 몸에 문신이 있는 동성애자라 아버지 앞에 떳떳하게 내놓을 수가 없다.
사업은 망하기 직전인데다 딸은 엇나가고, 에블린 혼자서 동분서주하는 마당에 웨이먼드는 왜 이리도 태연한가. 치열하게 사는 에블린의 눈에 허허실실 웃기만 하는 웨이먼드는 한심하기만 하다. 빨래주머니에 장난스럽게 눈알 스티커를 붙이는 것마저도 꼴보기 싫다.
이 부부와 달리 미국에서 나고 자란 딸 조이가 국세청에 따라가 통역을 해주기로 했는데, 할아버지 앞에서 애인과 자신의 관계를 '친한 친구'라고 설명하는 에블린을 보고 조이는 집을 나가버린다. 아버지에게 그렇게 인정받고 싶었으면서 정작 자신도 딸을 인정하지 못하는 도돌이표.
불안한 마음으로 국세청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 웨이먼드는 갑자기 에블린의 귀에 이상한 장치를 꽂고 핸드폰으로 뭔가를 설정한다. 이상한 행동을 하라는 쪽지까지 써서 준다. 쪽지를 쓴 종이는 사실 웨이먼드가 준비한 이혼서류였다. 웨이먼드도 에블린에게 상처를 받아 이혼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다.
웨이먼드의 알 수 없는 행동, 깐깐하기로 소문난 국세청 직원 디어드리의 으름장, 에블린은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그때, 웨이먼드는 자기가 남편 웨이먼드가 아닌 다른 우주에서 온 웨이먼드, '알파 웨이먼드'라고 밝힌다. 우주에는 수많은 에블린과 웨이먼드가 있고, 다른 우주의 에블린에 의해 흑화된 '조부 투파키'가 우주를 망치고 있으니, 이 세계의 에블린이 조부 투파키를 없애라는 것.
다른 우주의 에블린에게 접속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평소에 하지 않을 이상한 짓을 하는 것. 여러 멀티버스 영화에서 학습하였듯 멀티버스는 선택에 의해 갈라진다. 이후 등장인물들은 평소에는 죽어도 하지 않을 기묘한 짓거리들을 하며 다른 우주의 자신에게 접속한다.
다른 우주의 디어드리는 에블린과 웨이먼드를 공격한다. 알파 웨이먼드는 남편 웨이먼드와는 다르게 싸움도 잘하고 책임감도 있다. 왜 수만 명의 에블린 중 이 에블린이어야 했나. 그 질문에 알파 웨이먼드는 답한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실패만 한 유일한 에블린이기 때문에. 바꿔 말하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선택의 가능성이 너무도 많은 에블린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다른 버전의 수많은 나
노벨문학상을 수상자인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가 쓴 <선택의 가능성들>이라는 시가 있다. '무엇보다 무엇을 더 좋아한다.'라는 구절이 반복되는데, 선택이란 아주 작은 차이들과 아주 짧은 순간의 결정들로 이루어지는 게 아닌가 싶다. 때로 그 찰나의 순간들로 인한 나비효과는 어마어마하다.
에블린이 웨이먼드를 따라 가는 택시를 타지 않았다면?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영화는 에블린이 했을지도 모를 수많은 선택의 가지에서 살아가는 에블린들을 소환한다. 웨이먼드를 따라가지 않은 에블린은 배우가 되고, 가수가 되고, 요리사가 되고 쿵후 마스터가 되고, 피자집 광고판을 돌리는 아르바이트생이 되고, 어떤 물건이 되고... '모든 것(everything)'이 된다.
에블린은 빠르게 다른 에블린이 되는 방법을 습득한다. 이마에 검은 동그라미를 찍고 다니는 디어드리와 싸우며 배운 적도 없는 쿵후로, 요리사의 칼질로 악의 세력들을 무찌른다. 그리고 마침내 조우한 조부 투파키. 조부 투파키는 다름아닌 딸 조이였다.
아시아인인 엄마 에블린은 조부 투파키를 보자마자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 딸이 참 착한데, 나쁜 것이 우리 딸을 조종하는구나!
조부 투파키는 에블린의 혹독한 훈련으로 정신이 분열되면서 순식간에 이 우주, 저 우주로 다니며 모습을 바꾼다. 에블린은 딸의 모습을 한 조부 투파키를 없앨 수가 없다. 그렇다면 싸워보자. 싸워서 설득하자. 원래의 착한 내 딸 조이로 돌아오도록.
에블린은 조부 투파키의 정신이 깨진 방법과 동일하게 수없이 많은 나를 헤집고 다닌다. 정신을 분열하는 데 성공한 에블린은 이제 어떤 버전의 에블린도 될 수 있다. 더 이상 참고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에블린. 요리사 에블린은 부정하게 손님을 끄는 경쟁자를 고발하고, 다른 버전의 웨이먼드에게 상처주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조부 투파키는 에블린을 데리고 '베이글'로 간다. 베이글이란 모든 것을 흡수하는 검은 원이다. 디어드리의 이마에 찍혀있던 검은 원은 베이글의 상징이었다. 조부 투파키가 우주를 어지럽힌 이유는 에블린을 만나서 같이 죽기 위해서였다. 죽고 싶은데 너무 많은 나로 살아가느라 죽지도 못했으니, 같이 사라지자고, 이 무한히 반복되는 우주에서 이제 벗어나자고.
그러나 엄마 에블린은 딸을 보낼 수 없다.
할리우드식 인드라망
다시 원래의 세탁소 에블린. 한창 파티가 열려 흥겨울 때 국세청 직원 디어드리가 찾아온다. 세탁소는 이제 압류될 것이다. 온갖 버전의 에블린이 되어 본 에블린은 모든 것이 환멸스럽다. 야구 배트로 창문을 때려 부수고, 될 대로 돼라 싶다.
웨이먼드는 디어드리와 몇 마디 나누더니 다 해결됐다며 에블린을 위로하는데, 어떻게 했냐고 하니 그냥 부드럽게 말했을 뿐이란다. 디어드리도 그의 방식대로 에블린을 위로한다. 아, 지금까지는 온갖 버전의 에블린이 되어 힘으로, 또는 분노로 일관했는데 싸움에서 이기는 다른 방법도 있었다. 마치 매서운 바람이 아닌 햇볕이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처럼.
그토록 싫어했던 웨이먼드의 눈알 스티커를 이마에 붙인 에블린. 이 눈알 스티커는 '제3의 눈'이 되어 초월적인 힘을 발휘한다. 에블린은 조부 투파키와 함께 모든 우주에서 싸우고 싸운다. 모든 생물 버전의 에블린과 조부 투파키와 다 싸우고 나니 이제 무생물인 돌이 되기에 이른다.
돌이 된 조부 투파키는 절벽 끝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을 선택한다. 그때 에블린은 조부 투파키가 굴러떨어진 낭떠러지에 같이 떨어지는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모든 우주의 에블린이 되어 선택한다. 에블린이 상처 준 웨이먼드, 경쟁자였던 요리사, 애인이었던 디어드리... 에블린 없이 혼자서 베이글로 들어가 소멸되고자 하는 조부 투파키.
조부 투파키는 묻는다. 이제 그 어떤 모습의 에블린으로 살 수도 있는데, 속썩이는 딸 조이도, 망하기 직전의 세탁소도, 답답한 웨이먼드도 없는 인생, 화려한 배우, 가수, 요리사, 쿵후 전문가, 무엇도 될 수 있는데 왜 다시 돌아왔냐고. 영화 포스터에 쓰인 문구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이다. 그 어떤 인생을 살아도 나는 너를 구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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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다라를 형상화한 포스터에서 알 수 있듯이, 영화는 무척이나 불교적이다. 멀티버스가 우주괴물의 싸움터가 될 수도 있는 한편 무척이나 철학적인 소재이기도 하다. 불교 용어인 인드라망은 우주의 무한한 하늘나라 중 제석천(인드라)에 쳐진 구슬 그물을 말한다. 구슬에는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비친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에 불교에서 나는 하나의 내가 아니라 모든 것이다. 유일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을 부처로 본다.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부처가 되어야 한다. 무아지경이라는 말처럼, 실체가 있는 '나'는 없다. 색깔도 모양도 형식도, 기쁨도 슬픔도 없다. 고로 나의 실체는 없고 세상 모든 것이 '나'이니, 타인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것은 결국 나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것과 같다.
나는 늘 내가 아니고 싶었지만 나는 내가 아닐 수 없었다. 뭔가를 잘하는 나, 바보같은 나, 칭찬받는 나, 못된 나, 괄시받는 나를 한 사람의 나로 통합하여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어떤 모습의 '나'는 갖다 버리고 싶을 정도로 끔찍하다.
그래도 어떤 우주에는 대학을 안 간 버전, 다른 전공을 한 버전, 취업을 한 버전, 결혼을 한 버전, 부자가 된 버전, 뭔가를 이뤄낸 버전, 좋아하는 사람에게 나쁜 말을 하지 않는 버전 등등의 내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왠지 조금은 덜 외로워진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모든 것, 모든 곳에 동시에 내가 있으니.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감독 : 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
주연 : 양자경, 스테파니 수, 키 호이 콴, 제이미 리커티스
상영시간 : 139분
개봉일 : 2022년 10월 12일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시사회에 참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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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을 요리하라, 이들처럼
요리는 정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드는 것이 웬만한 마음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저도 누군가에게 요리를 해주고 나서야 깨달았는데요. 마음을 다해야 한다는 점에서 요리는 사랑과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요리에 사랑이 더해진 영화는 어떤 모습일까요? 트란 안 홍 감독은 <프렌치 수프>라는 영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았습니다.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프렌치 수프>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프렌치 수프>는 2024년 6월 19일 국내 개봉작입니다.
프렌치 수프
The Taste of Things
Summary
20년간 최고의 요리를 함께 탄생시킨 '외제니'와 '도댕'. 그들의 요리 안에는 서로에 대한 존경과 배려, 그리고 사랑이 있다. 인생의 가을에 다다른 두 사람, 한여름과 자유를 사랑하는 '외제니'는 '도댕'의 청혼을 거절하고, '도댕'은 오직 그녀만을 위한 요리를 만들기 시작한다. (출처: 씨네21)
Cast
감독: 트란 안 홍
출연: 줄리엣 비노쉬, 브누아 마지멜 외
이 영화의 한국어 제목은 <프렌치 수프>, 영어 제목은 <The Taste of Things>입니다. 제목에서부터 요리에 관해 작정하고 이야기하겠다는 다짐이 느껴지는 듯한데요. 코스 요리를 만드는 과정을 섬세하게 담아낸 오프닝 시퀀스는 그 다짐을 현실로 만들어 버립니다. 밥을 먹고 영화관에 들어갔기에 망정이지, 밥을 먹지 않았더라면 분명 제 뱃속에서는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요동쳤을 겁니다.
10초 건너뛰기가 당연해진 오늘날이지만, <프렌치 수프>는 건너뛰는 것 하나 없이 요리의 과정을 차분히 보여줍니다. 식기들이 부딪치는 소리, 물이 팔팔 끓는 소리, 재료들이 지글지글 구워지는 소리로 가득한 '외제니'와 '도댕'의 부엌은 고요하면서도 소란합니다. 쉼 없이 움직이며 음식을 만들어내는데도 부산스럽기보단 우아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긴 세월을 이 부엌에서 보내왔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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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치 수프 같은 연애의 맛
'외제니'는 '도댕'이 상상한 레시피를 최상의 맛으로 구현해 내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지난 20년간 환상의 파트너로서 지내왔죠. 그 과정에서 사랑도 꽃폈습니다. 두 사람은 인생의 가을을 지나는 나이에 이를 때까지, 부엌과 인생에서 서로와 함께해 왔습니다. 언제나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신뢰하는 두 연인의 사랑은 마치 프렌치 수프와도 같습니다. 한 번 걸러 불순물을 제거한 수프는 맛이 다소 약해지지만, 맑고 부드러우며 색이 진한 수프가 됩니다. 그들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뾰족한 부분은 모두 걸러내고, 부드럽고 다정하게 서로를 대하죠.
미디어 전체를 통틀어 어른의 '어른다운' 연애를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근래 나는솔로, 결혼지옥, 고딩엄빠와 같이 자극으로 점철된(혹은 얼룩진) 사랑들, 또는 현실에서는 절대 없을 우연과 구원과 운명의 연속인 사랑들만 봐왔기 때문이겠죠.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극에 무뎌지기 마련입니다. 처음에는 '저래도 되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저런 사랑도 있으니 나 정도는 괜찮아.', '저런 사랑이 어딨어? 이런 게 현실이지.' 싶어집니다. 불순물을 거른 듯이 순하디순한 사랑이라니, 참으로 낯설고 반가웠습니다.
요즘 세상은 너무 강한 맛만을 선호해서 서글픕니다. 그 맛에 익숙해지는 저 자신도 싫습니다. 부드럽고 진한 수프를 더 많이 맛보고 싶은데, 머지않아 그런 수프를 먹어도 '에잇, 밍밍해!' 할까 봐서 걱정이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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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요?
극 중에서 '도댕'은 여지없는 사랑꾼입니다. 언제나 애정을 표현하고, 한없이 상대방을 걱정하며, 청혼하고 또 청혼합니다. 그러나 '외제니'는 조금 다릅니다. '외제니'를 사랑하는 모습이 분명하게 묘사되는 '도댕'과 달리 그렇다 할 애정 표현이 없습니다. 유독 등을 돌리고 있는 '외제니'에게 다가가는 '도댕'의 모습도 자주 보입니다. '외제니'는 선뜻 뒤도는 법이 없죠. 몇 차례의 거절 끝에 '도댕'의 청혼을 받아들인 이후에는 몸이 거부라도 하는 듯이 지병이 악화되기도 합니다.
반추 끝에 이런 질문이 남습니다. ''외제니'는 '도댕'을 진정으로 사랑한 걸까?' 누군가는 '도댕'에게 아내보다는 요리사로 남길 바란다는 '외제니'의 사랑을, 사랑을 나누고자 방문을 두드리는 '도댕'을 진심으로 맞이한 것은 단 두 번뿐이었다고 말하는 '외제니'의 사랑을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외제니'는 '도댕'보다는 요리를 더 사랑했을지도 모르지요. 요리를 더 자유롭게 사랑하기 위해, '도댕'과의 사랑을 선택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외제니'가 '도댕'을 분명히 사랑했다고 생각합니다. '외제니'는 '도댕'을 뼛속까지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도댕'의 음식은 오직 '외제니'에 의해서만 진정한 맛을 냈거든요. 상대를 뼛속까지 이해하는 마음은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합니다.
제 결론이 너무 단순하고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제게 사랑은 완전한 이해인 걸요. 서로 다른 답을 마음에 둔 채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영화를 보는 재미지요. 영화를 보신 분들께 묻고 싶습니다. 당신의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요? 당신은 '외제니'의 사랑을 어떻게 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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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인물들은 사랑을 요리하고, 사랑을 먹습니다. 눈으로 보았지만, 오감으로 사랑의 맛을 느낄 수 있는 따뜻한 작품입니다. 다만, 사랑과 함께 입맛도 돋우는 영화이니 꼭 식사하고 보시길 권합니다.
One-Liner
사랑은 프랑스 부엌에서 만나, 프렌치 수프를 먹으며, 매일 같이 요리를 하다가 온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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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결국 타인에게 이해를 구하는 것
난 두드러기가 있다. 자세히 말해보자면 '콜린성 두드러기'라고 한다. 다들 아우터 입는 4월에 나만 반팔에 얇은 겉옷을 입는다. 이 간지러움은 시도 때도 없이 겹친다. 가령 버스를 타고 갈 때나 매운 짬뽕을 먹을 때도 몸이 불편하다. 안그래도 잘 타는 더위 두드러기까지 겹치면 두배로 고통스럽다. 겨울에는 더울 일이 없어서 괜찮냐고 한다면 그것도 아니다. 히터를 빵빵하게 틀면 꼼짝 없이 몸이 간지러워진다. 그럼 한 3분동안 밖에 나가있어야 한다. 얼핏보면 일 땡땡이에 가까운 모습이겠지만 이건 어쩔 수 없다. 근데 이건 나만 그러지는 않을거다. 사람마다 말 못할 일상생활의 애로사항은 다들 있다.
이게 성격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도 두드러기때문에 운동하는게 한동안 싫을 때가 있었다. 이건 내 소심했던 모습과 관련이 있다. 몸이 간지러워도 남들이 보면 아무것도 아닐 것 같아서 병원에 안 갔다. 콜린성 두드러기 자체가 약이 없어서 병원에 가는게 큰 의미는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어느만큼의 찜찜함은 남아있다. 그 때 미리 잡았다면 뭐가 달라졌을까? 미리 내가 겪는 불편함에 말하고 다니던 사람이었으면 20대 중반의 내가 살기가 편했을까. 지금이야 이 문제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말하고 다닌다. 인터넷에 '온도 알레르기'라고만 검색해도 관련정보가 쉽게 나오기 때문에도 있지만 이게 남에게 피해주는 피부질환이 아닌게 큰 이유다. 따지고 보면 키가 작은것보다 훨씬 더 내 삶에 지장을 주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나를 이해하고 사는 수밖에. 나름 살다보며 느낀건 나를 이해해야 남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병이야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지는 오래 됐으니 이제 타인을 이해하며 살면 될 것 같다. 별거 아니라면 별게 아니고 심각하면 심각한 이 애로사항에 일상생활에 난감함이 많다. 에잉. 이 리뷰를 쓰면서도 두드러기가 올라오는 것 같다. 왼쪽 팔로 오른쪽 팔꿈치 쪽을 벅벅 긁었다. 이건 어쩔 수 없다. 이게 그냥 나인가보다. 안그래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못하는 나는 이런 사소함 하나때문에 점점 겁대가리를 상실하고 있다. 인정해야 한다. 나는 많은 이해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란걸.
<펀치 드렁크 러브>는 이해와 사랑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주인공 배리는 여자 형제가 7명이나 있다. 직업은 그냥 사업장을 운영하는 중소기업의 사장님이다. 얼핏 보면 그냥 평범한 20, 30대 남자 중 한명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크게 틀린건 아니다. 가족이 많긴 하지만 또래 남자들과 유별나게 다른 건 없다. 그에겐 문제가 있다. 인생의 재미를 못 찾고 영 기를 못피면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첫 장면에서도 부하 직원이 주인공 배리를 쪼는 모습이 나온다. 한 20분쯤 지나면 배리가 여자 형제들의 집들이에 가는 장면이 있다. 다 큰 베리지만 누이들은 베리를 그렇게 생각 안하는 것 같다. 여자 형제 중 한명이 배리를 보자마자 느닷없이 '너 게이니?'라고 묻는다. 이 뿐일까? 비듬 많다는 지적부터 뜬금없는 망치 이야기까지 배리는 누이들에게 사람이 아니라 장난감 완구같은 느낌이다.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엄청 화가 나겠지? 배리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주인공은 느닷없이 유리창을 깨부순다. 배리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그냥 소심한 남자처럼 보였지만 사실 많이 다른 사람이었다. 주인공은 분노조절이 서툰 사람이었고 이 덕에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해 외로운 주인공은 말동무를 찾는다. 신문을 보다 찾은 말동무 프로그램(?)에 전화를 건다. 처음엔 사는 곳도 속이고 이름도 속이지만 결국 다 들통난다. 말동무 프로그램의 사장 트럼벨은 겉으로는 가구점을 운영하는 아저씨지만 사실 조폭 사장님이다. 트럼벨은 배리와의 통화내용을 바탕으로 조금씩 조금씩 배리의 신상정보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이 트럼벨의 추적기가 영화의 클라이맥스로 이어지기 전까지 영화는 남, 녀 주인공의 러브스토리를 중심으로 이어진다. 주인공은 서로를 알아가며 점점 변해간다. 레스토랑에서 대화만 했을 뿐인데 서로의 벽을 넘어 키스한다거나, 푸딩 마일리지로 비행기를 산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보여주며 '이 사람들은 제정신인가' 싶은 영화를 보여준다. 이런 클리셰를 비튼 플롯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공감이다. 공감을 위해 캐릭터를 뒤집고 연출이 그걸 뒷받침하게 도와줬다.
우리라고 다를까? 거의 대부분의 우리는 사랑에 빠지면 제정신이 아니다. PTA는 연출법으로 플롯과 장면 연출이 절묘한 영화를 만들어 냈다. 핵심 주제 '사랑에 빠지면 제정신이 아닌 우리들'을 연출하기 위해 폴 토마스 앤더슨이 만든(내가 생각하는) 중요 포인트 몇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주인공 배리에 대한 성격 제시다. 배리는 집들이 장면 처음에 이상한 말을 듣고 바로 화를 내지 않는다. 그 대신 감독은 배리가 무언가를 참고있고, 분노조절이 서툴러 사고를 치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준다. 집들이 모임에서 배리를 비추는 카메라가 고정되어있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는 감독이 배리가 지금 불안정한 상태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이런 연출을 짰다고 생각한다. 또 화면 구도상에서 주인공이 딱 정가운데에 있다. 여자주인공이 함께 있는 경우나 트렘벨과의 대면같이 영화의 주요인물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면 보통 혼자서만 장면에 나온다. 나는 이것이 영화가 배리가 정신적으로 불안함에 처할 때 그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뭐 이뿐만 아니라 두 주인공의 의상도 그렇다. 파란색 수트를 입는 주인공과 빨간색 옷을 입은 여자주인공은 빨간색과 파란색처럼 별개의 존재처럼 보이지만 서로에게 솔직해지며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런 상징에 의한 내용전개는 하나 더 있다. 도입부부터 와장창 보여주는 피아노는 사랑에 대한 간접적인 은유라고 생각한다. 어느날 갑자기 주운 사랑이지만 아무 음이든 눌러도, 그러니까 함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한게 사랑이라는 감독의 의도가 담겨있는 셈이다. 영화는 보편적인 로맨스코미디 장르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있다. 그리고, 이런 연출법과 플롯전개를 통해 우리의 삶과 아주 가까이에 있는 사랑이야기를 보여준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이 문단을 쓰면서 느꼈다. 단어 몇글자만 바꾸면 배리의 이야기가 내가 된다는 것 말이다.
영화는 이런 방식으로 나의 공감를 샀다. 이건 내 웃어 넘길만한 짝사랑 흑역사와 어떤 목표를 향한 전진 둘 다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전자의 경우를 보자. 10대 때 나는 단순히 누군가를 예뻐서 좋아했던 적이 있다. 사진과 실물이 차이가 나는 여학생이었지만 아무튼 나는 사진을 보면서 '쟤 귀엽다'라고 생각해 본 적 있다. 고3때는 걸그룹 마마무의 팬이었다. 내가 이 사람들을 실제로 본 적이 있는것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이 마마무를 위해 음원 플랫폼을 처음으로 정식 결제했다. 유투브로 마마무 나오는 영상은 다 찾아볼 정도로 덕후였다. 마찬가지로 굳이 이성을 좋아한다는 관점이 아니어도 된다. 누군가를 존경하게 될 때, '이 사람이 이래서 멋있어'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었나'라고 생각하게 되면 나만 손해다. 그 사람은 그 사람 자체고 나에게 잘 보일 이유가 단 조금도 없다. 멋지면 그냥 그 사람이 멋있으니까 따르게 된다. 이는 내 삶의 많은 순간들과 비슷했다. 누군가를 멋있다고 따르게 될 때도 아니면 발로 이불 뻥뻥 차는 흑역사를 만들때도 나에겐 이유가 필요 없었다. 무언가에 사랑에 빠지면 나는 거진 대부분 미친놈이 됐다. 나는 이래서 이 영화를 통해서 이런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더 나아가서 PTA는 이 영화에 나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인 공감을 받을거라는 확신이 있었을 것 같다. 누구나 자기 기를 죽이는 요소가 있을 것이고 또 둘이 함께이기 때문에 강해졌던 지점이 있었을 테니까.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가 사람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명제를 아주 쉽게 받아들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각본과 영화라고 생각한다. 나도 언젠가 사랑이 찾아오겠지? 꿈꾸게 되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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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명만 하다 끝내 펴지 못한 날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최근 마블 영화의 현주소를 알기 때문에 기대보다는 조금이라도 옛 모습을 되찾을 수 있는 여지가 있는지 체크하는 것에 방점을 뒀다. 그럼에도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는 아쉬움이 남는다.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를 통해 멋진 신세계를 열려고 했던 마블의 야망과 자신감은 그 자체가 동력 아닌 족쇄가 되어버린다. 힘찬 날갯짓으로 비상(飛上)하려던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의 첫 비행은 아쉽게도 비상(非常)을 알린다.
팔콘 아니다.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다. 스티브 로저스로부터 방패를 물려받은 샘 윌슨(안소니 마키)은 팔콘 시절 날개를 무기 삼아 자신만의 캡틴 아메리카의 길을 연다. 어느 날, 그는 차기 팔콘 ‘호아킨 토레스’(대니 라미레즈)와 함께 ‘아다만티움’을 탈취, 불법 거래를 시도하려던 일당을 소탕한다. 그 노고를 인정받아 대통령이 된 ‘새디우스 로스’(해리슨 포드)의 초청으로 슈퍼 솔져 이사야(칼 럼블리)와 함께 백악관 만찬에 초대된다. 기쁨도 잠시, 어디선가 노래 소리가 들리고 갑자기 총소리가 들린다. 이시야가 대통령을 향해 총을 쏜 것. 체포된 이시야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배후를 찾아 나선 샘은 뜻밖의 사실을 마주한다.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증명’이다. 샘은 캡틴 아메리카로서 많은 이들 앞에서 증명해야 한다. 더 이상 팔콘이 아닌 어벤져스의 리더이자 미국과 세상을 구하는 히어로로서 준비, 앞으로 그 역할을 맡겠다는 결심은 약 2시간 내내 이어진다. 이를 위해 영화는 캡틴 아메리카가 되기 위한 통과의례처럼 샘 스스로 단계별 증명을 하는 과정을 오롯이 담는다.
좀 더 고난과 역경을 보여주기 위한 방법으로 샘은 스티브 로저스와 다르다는 걸 인지시킨다. 특히 슈퍼 혈청을 맞지 않은 인간으로서 방패와 비브라늄 날개 슈트로 세상을 구해야 하기에 더 큰 노력을 하고. 그만큼 더 많은 자기 검열에 쌓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스승이자 우상으로 여긴 이사야가 다시 감옥에 들어가고, 자신과 손을 잡자던 대통령은 테러 이후 ‘넌 스티브 로저스가 아니야’라는 말을 하며 적대 관계를 유지하는 등 샘은 자신을 향한 믿음과 신뢰를 깨뜨리려는 챌린지에 시달린다. 유독 이 영화에 빌런 수가 많은 이유도 여기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증명은 대통령이 된 로스도 해야 한다. 과거 닉네임인 ‘썬더볼트’에 걸맞은 과오, 특히 헐크를 잠재우기 위해 어보미네이션 만들거나 소코비아 협정을 제시하며 어벤져스를 분열시켰다. 그런 그가 국가를 책임지는 대통령이 되었고, 그 자리에 맞게 변모한 자신을 증명해 내야 한다. 샘처럼 로스 또한 거하게 챌린지를 당하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증명할 기회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의 모습은 샘과 마찬가지로 공감대를 형성한다. <인크레더블 헐크> 때 와해된 딸 베티(리브 타일러)와의 소원한 관계를 개선하려는 아비의 마음도 보여주는 등 샘 보다 더 공감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과하면 넘친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 증명을 계속해야 하는 이야기는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떨어진다. 특히 배후에 위치한 빌런이 공개되고, 로스가 레드 헐크로 변하는 이유, 이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샘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범위내에서 진행된다.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저>와 비슷한 결의 (정치) 첩보 장르를 택하며 숨겨진 배후를 계속 찾아가는 재미, 새로운 광물 아디만티움을 놓고 겨루는 강국들의 패권 다툼 등 현실 정세를 녹인 부분도 있지만, 짜임새가 너무 헐거워 긴장감이 덜한 건 아쉬운 부분이다.
마블 영화를 기다리는 이유 중 하나는 역시나 액션. 이번 작품의 뷰 포인트는 역시나 활공 액션이다. 비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의 새로운 액션 스타일은 시선을 사로잡는데, 후반부 일촉즉발의 순간에서 전투기 공격을 막아내는 액션은 큰 스크린에서 볼거리를 선사한다. 차세대 팔콘과의 협동 공격도 굿! 다만, 지상 공격에서는 심심하다. 활공보다는 스피드와 파괴력이 잘 살리지 않아 둔탁한 느낌도 드는데, 이를 상쇄하기 위해 방패, 날개 등 아이템을 활용하지만, 그럼에도 관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쉽지 않아 보인다. 이로 따라 후반부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레드 헐크와의 대면 액션도 확실한 볼거리를 주긴 하지만, 기대보단 평이한 수준으로 그친다.
이게 다 마블 때문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다. 워낙 높아진 눈높이에 과거 찬사를 받은 전작들의 아성을 뛰어넘는 것 자체가 신작들의 챌린지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 증명해 내야 하는 게 제작진들의 숙명. 어쩌면 극 중 증명 챌린지를 찍는 듯한 샘과 로스의 모습에서 그동안 어벤져스 시리즈 이후 관객들에게 외면당한 마블 영화의 과오를 반성하고 이를 발판으로 더 높은 곳으로 비상하겠다는 제작진들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캡틴 아메리카가 누구인가. 포기를 모르는 남자 아니던가. 쿠키에서도 나오지만 세상은 또 한 번 위기에 처했고, 캡틴 아메리카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 이야기가 계속되는 한 더 멋지게 돌아온 캡틴 아메리카와 마블 영화를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한다. (그동안 쏟아부은 티켓값이 아까워서라도 꼭 멋지게 돌아와야 한다.)
사진 제공: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평점: 2.5 /5.0
한줄평: 더 멋진 마블 영화는 ‘다음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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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1주 최신 개봉영화(돈룩업, 마이 뉴욕 다이어리, 캅샵, 몬스타엑스 더 드리밍, 이상존재)
[WEEKEND CHOICE MOVIE] 2021년 12월 1주차 #개봉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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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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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론칭 예고편
양자경이 양자경과 양자경으로 세상과 가족을 구하는 영화? 화제의 멀티버스 액션 코미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10월 12일 개봉 확정 & 론칭 예고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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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더 패뷸러스> 티저 예고편
까이고,치이고,흔들려도 우린 오늘도 직진! 치열하고 뜨거운 청춘들이 온다? 뜨겁게 빛나는 밀레니얼 라이프 《더 패뷸러스》 11월 4일,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