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여론조작>을 발표했던 노엄 촘스키는 미국 정부가 베트남전에 부당하게 참전해왔다는사실을 알게 되면서 미국 정부의 행위를 크게 비판하는 한편으론 시민불복종이라는 개념을 강조했다. *“국가의 범죄를 막기위한 행동을 하는 것은 마땅하다. 살인을 막기 위해 교통 법규를 위반해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노엄 촘스키가 구체적으로 지정한 국가의 범죄란 당시 미국 정부의 베트남전 참전이었다. 한편 미국 정부는 베트남전이 시작된 이래로 군사적 개입은 일절 없을 것이라고 말했으며, 더 나아가 닉슨은 대외적으로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며 베트남에서 미군이 물러날 것처럼 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베트남에서 공산진영(북베트남)의 우세가 두드러지자, 미국은 수많은 장병들을 베트남으로 보냈고, 그 수는 점점 늘어만 갔다. 하지만, 결국 꼬리가 길면 잡히게 되는 법이다. 국가기밀로 덮어두기엔 베트남전에서 미국의 상황은 좋지 않았고, 베트남으로 파병간 장병들의 사기도 날이 갈수록 떨어져갔다. 그런 와중에 뉴욕 타임즈는 다른 언론사들보다 먼저 ‘펜타곤 페이퍼’라고 불리는 베트남전 기밀문서를 입수하게 된다. 이 문서에는 정부가 시민들에게 숨겨온 베트남전의 기록과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영화 <더 포스트>는 바로 이 시기, 정부의 거대한 거짓과 부정한 권력에 맞서 언론의 자유를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언론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 <더 포스트>는 출판의 자유와 권력에 대한 견제로 언론의 역할을 보여주는 영화인 동시에, 캐서린이 남성중심사회에서 최초의 여성 발행인으로서 당당하게 자신의 자리와 지위를 되찾기까지의 이야기도 담아내며, 위엄있고 우아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한편으론 다소 정적일 수 있는 소재를 속도감과 몰입감 있게 촬영하여 이야기 자체의 매력 또한 잃지 않고 있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어쩌면 미래에도 유효할 메세지를 담고 있다는 점, 영화속 인물을 입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도 높이 살만하며, 1971년이라는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도 가감없이 반영하고 있다는 점, 이야기 자체도 속도감 있고 흡입력있게 이끌어가고 있다는 점 등을 들어 전체적인 완성도가 높은 영화라고 하겠다.
감독인 스티븐 스필버그는 “오늘날과 비교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놀라웠고, 지금 당장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소회를 밝혔는데,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당시 트럼프 정부를 향한 것이 아니었을까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해볼 수 있겠다. 실제로 트럼프가 당선된 이후 미국 사회는 민주주의라는 체제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기도 했다. 물론, 국내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국내의 특정 언론인 혹은 특정 언론들은 진실을 보도하는 것보다도 자신들의 관심사나 이익을 위한 기사를 쓰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언론의 책임에 대한 메세지와 부정한 권력을 향해 경종을 울리는 영화 <더 포스트>는 꽤 오랜시간 회자될만한 수작이다. 언론인들뿐만 아니라, 누구나 정보의 제공자가 될 수 있는 정보화 시대에서 각 개인들에게도 ‘진실’의 의미와 사회 정의에 대해서 생각해볼만한 계기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두 언론인의 남다른 무게
여기, 이 영화를 이끌어 가는 정반대의 입장, 정반대의 성격을 보이는 <워싱턴 포스트>의 두 언론인이 있다. 워싱턴 포스트의 최고 경영자 캐서린 그레이엄과 편집장 벤 브래들리가 바로 그들이다. 영화가 시작된 이후 두 사람은 끊임없이 의견충돌을 겪는다. 우선, 백인 남성 중심의 전문직 사회에서 <워싱턴 포스트>의 편집장으로 자리잡은 미국인 남성 벤 브래들리는 자신의 일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언론인답게 특종을 잡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던 어느날 <뉴욕 타임즈>의 1면을 가득 채운 ‘펜타곤 페이퍼’에 대한 특종을 접하자마자 벤의 관심사 역시 그쪽으로 쏠린다. 다만, 주목해야 할 점은 벤이 펜타곤 페이퍼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특종을 놓치지 않으려는 언론인의 직업적 열정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는 점이다. 벤 역시 언론을 통제하려고 시도하는 닉슨 정부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으며, “출판할 자유를 지키기 위해선 출판이 답이다”라는 언론인으로서의 도덕과 책임감도 보이긴 하지만, 영화속 그에게서 보이는 상당 부분은 단순한 전문직 종사자의 직업적 열정에서 비롯되는 것들이다.
벤 : 케이(캐서린)만 용감한 건 아니지.
토니 : 당신이 잃을 게 뭐있다고.
벤 : 내 직장, 명성...
토니 : 벤, 왜 이래. 당신 명성은 광택만 더하게 될 걸 우리 둘 다 알잖아. 직장으로 말하자면 또 구하면 그만이고.
실제로 밴에겐 선택지가 많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케이의 선택을 용기있는 선택이라고 말한 토니와 벤이 나눈 대화를 참고해보면, 이 영화속 벤이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있다. 벤은 분명 언론인으로서의 열정과 도덕, 책임감을 갖고 있는 인물이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굳이 언론인이 아니더라도 전문직 남성들이 갖는 일에 대한 열정과 성공에 대한 욕망과도 같은 것들이 그에게선 언뜻 보이고 있다. 때문에,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진정한 언론인은 벤이 아니다. 자신을 억누르는 사회속에서 당당하게 일어서는 사람, 모든 것을 걸더라도 진실을 말하려는 사람. 사회의 압력으로 움츠러들었을 뿐, 강인한 내면으로 다시 일어서는 사람. 바로 캐서린이 이 영화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주인공이다.
캐서린은 <워싱턴 포스트>의 최고 결정권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은 그녀에게 걸맞는 대우를 하지 않는다. 당시 미국 사회의 전문직은 백인 남성들에게만 열려있었다. 때문에 백인 남성이 대다수인 사회속에서 전문직 여성들은 은근하게 차별받고 무시당할 수밖에 없다. 영화 <더 포스트>에선 정당하게 회사의 경영권을 이어받았음에도 끝없이 그녀를 무시하거나 소외시키는 태도를 보이는 장면들을 연출한다. 캐서린의 조언을 듣지 않는 벤, 캐서린이 듣는 앞에서 그 자격을 논하는 아서, 이사회가 끝나고 세남자들의 뒤에서 걷는 캐서린의 모습, 이사회에서 일어나려는 캐서린을 한손으로 주저앉히는 증권거래인 등. 벤의 말 한마디면 아무런 말도 못하는 사무실과는 대조되는 캐서린의 환경은 전문직 백인 여성이 감수해야하는 사회적 압력과 시선을 과장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캐서린이 자신을 자꾸만 주저앉히려고 하고, 깎아내리는 사회적 분위기속에서 자기 자신의 권리를 되찾고, 당당하게 일어서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때문에 캐서린의 성장담을 담아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 투쟁의 과정에서 캐서린은 우아하고 위엄있는 방식을 택했기때문에 이 영화의 문체는 캐서린의 숭고한 투쟁을 닮아 품위있는 어조로 읽힌다. 덧붙여 캐서린 개인의 감정에 지나치게 귀기울이지 않고 거리를 둔채로 그녀의 이야기를 적어가는 것으로 객관적인 시선에서 쓰고 있어서 이야기의 품격을 더하고 있다.
시민불복종과 언론인의 책무
베트남 전쟁이 한참이던 1971년, 미국 언론들이 다루었던 ‘펜타곤 페이퍼’의 내용을 읽게 된 미국 시민들이 받은 충격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1970년에는 캄보디아를 침공하기도 했으므로, 반전의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1971년 5월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중 61%는 베트남전 개입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1970년대에 이르면 군입대 거부도 늘어났고, 베트남에 주둔하는 부대에선 탈영하는 병사들도 늘었다. 명령에 불복종하는 병사들도 있었으며, 반전 시위의 규모와 인식은 점차 커져갔다.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일련의 움직임들은 미국사의 대표적인 시민불복종 운동의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상위 엘리트 계층을 제외한 각계 각층에서 반전(反戰)의 목소리가 터져나왔고, 시민불복종 운동의 최전선에는 바로 언론인들이 있었다. 영화속에서 보여지듯이, 시민들의 알 권리를 위한 언론인의 책무와 국가 기밀과 관련한 보안법을 지키는 일은 상충되는 것들이다. 시민들의 알 권리를 지키자면, 국가 보안법에 걸려서 불법적인 행위를 하게 되고, 합법적으로 말하는 것은 그저 침묵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딜레마에서 언론인은 어떻게 행동해야할까. 비단 언론인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 또한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일까.
이글의 시작과 함께 소개한 노엄 촘스키는 이런 딜레마를 헤쳐가기 위해서 시민불복종을 강조한다. 실제로 1971년에 한 네덜란드 방송에서 그가 비유한 것을 해석하자면, 국가의 범죄를 막기 위해 국민이 저지르는 범죄는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분명한 기준과 인간본성에 대한 진지한 탐구의 결과로 얻어낸 정의로운 대의가 있어야만 시민불복종은 정당화될 수 있다. 미국의 베트남전 같은 경우에는 충분히 정당화될 근거를 갖추고 있다. 1971년 한해에만 미국은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에 80만 톤의 폭탄을 떨어뜨렸다. 미국 정부가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상대로 벌인 일련의 무력시위는 학살에 가까웠다. 이런 상황이라면, 시민불복종의 권리를 행사해야 옳을 것이다. 우리의 국가가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면, 우리 정부가 불법으로 지정한 행위를 통해서라도 우리 국가의 범죄를 막아야 할 것이다. 그게 바로 노엄 촘스키가 강조한 시민불복종의 의미이다.
영화 <더 포스트>는 바로 그 점을 인정한다. 반전시위에서 한 청년은 미국이라는 열차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막기위해선 때론 몸을 선로에 던질 필요가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캐서린과 벤은 국가 보안법에 위반되더라도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진실을 신문 지면에 쓰기로 한다. 캐서린과 벤은 이를 통해서 언론의 자유를 지키는 것은 물론, 정부의 잘못된 선택을 교정하고자 한다. “헌법 제정자들이 언론의 자유를 준 것은 반드시 가져야 할 보호 장치이며, 민주주주의에 필수적인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이다. 언론은 피치자에게 봉사하는 것이지, 통치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바로 그 이유때문이다. 출판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통해서 권력기관들의 부패를 견제하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선 언론은 억압받지 않는 위치에서 진실을 이야기해야 한다. <더 포스트>가 말하는 언론의 자유를 위한 투쟁은 노엄 촘스키가 당시에 말한 시민불복종의 원리와 닮아 있다.
<더 포스트>의 화두, 언론인의 시민불복종과 일반 시민의 시민불복종
여기에 아직도 유효한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이론을 조금 빌려와서 말하자면, 행정부를 비롯한 국가 정책 결정권자들을 비롯한 국가 권력은 모두 시민에게서 양도받은 것들이다. 따라서 시민들에겐 자신들이 빌려준 권력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알 권리가 있으며, 그 알 권리를 수행하는 것이 바로 언론이다. 300년 가까이 되어가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내용은 아직도 유효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사회계약론>은 민주주의의 뿌리가 되었으니까 말이다. 현대사회에선 새로이 추가되는 것들-요컨대 새로운 권력으로 등장한 자본-은 있어도 그 뿌리가 흔들리는 법은 없다.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계속되는 한 언론의 역할과 책임, 그 중요성 역시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더 포스트>의 화두는 자유민주주의가 존속하는 이상, 그보다 더 나은 체제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유효할 것이다.
한편, “언론인의 책임과 의무”에서 조금 더 나아가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언론의 역할도 역할이지만, 언론인 역시 일반 시민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영화 <더 포스트>가 말하는 언론인의 역할을 다하는 행위와 노엄 촘스키의 시민불복종의 원칙에 접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영화는 비단 언론인 뿐만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부패하고 부정한 권력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2016, 12)되고, 영국의 브렉시트(2016, 06), 미국에선 급진주의자 트럼프가 당선된 시기(2016, 11)에 스티븐 스필버그가 “지금 이 영화를 꼭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