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nymoushilarious2022-01-10 14:39:13
모두에게 착한 사람이 될 수 없어서
넷플릭스 오리지널 더 체어 리뷰
미국에서 거주하는 한국인 가정에서 태어나 영문과 교수가 된 지윤은 펨부르크 대학 영문과의 학과장이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지윤은 인종차별을 뚫고, 우아한 학과장 라이프를 누린 성공한 여성 같아 보이겠지만 펨부르크가 배출한 동양인 최초 여성 학과장은 영문학의 위기를 극복해내야 하는 과제에 맞닥뜨린다. 학생들은 날이 갈수록 트렌디해지는데, 펨부르크의 영문학 교수들은 영문학과를 살려보겠다고 방방 뛰어다니는 지윤에게 빅엿을 날려버린다. 게다가 영문학에 대한 인기가 하락하니, 학교의 윗대가리들은 지윤에게 끊임없이 압박을 넣어대는데, 아무래도 우아한 여성 학과장은 물건너 간 것 같다.
1. 꼰대에서 벗어났다고 광고해봤자 여전히 꼰대인
학교라는 집단은 교수와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다. 학생들은 일정 기간 잠시 머물고 가는 비둘기 같은 존재들이지만 대다수의 교수들은 그 학교에서 최소 정년까지 근무한다. 최소 정년까지라는 말은 교수는 종신 교수로 재직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학생들은 매년 최신의 유행을 흡수하고, 종신 교수들은 하루가 다르게 늙어간다. 사람이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살아온 삶을 바탕으로 형성된 편견이 많아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교수들처럼 하나의 전공만을 주구장창 파는 직종의 사람들, 특히 나이를 먹어가며 자신의 전공에 있어서 전문가가가 되신 분들은 더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들일 수는 있지만 시대의 변화에 유연한 사람들이라고는 평가할 수 없다. 그들의 삶을 바탕으로 형성된 편견이 젊은 사람들을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변화에는 유색인종에 대한 고려, 여성에 대한 인식에 대한 변화가 있는데, 이 드라마에서는 표면적으로는 문제를 해결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여전히 교수 집단 내부에서는 유색 인종, 여성에 대한 차별은 존재한다. 그저 표면적인 허례허식으로 학생들에게 학교가 한 단계 진보하고 있다고 마케팅하고 싶었던 것 뿐이다. 그 마케팅의 정점에 서 있는 이가 바로 지윤이었다. 표면적인 학교 개혁의 주인공.
그렇게 지윤은 학교의 최초 여성 학과장이라는 허울좋은 상징을 등에 업었지만 고참 교수들은 그녀에게 협조해 주지 않는다. 그녀의 상사는 인기없는 수업은 폐강시키라고 하지만 그녀는 동료들의 수업을 폐강시킬 수 없어 전도유망하고,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있는 여자 교수와 합동 수업을 제안한다. 하지만 백인 노교수와 흑인 젊은 여강사의 조합은 시너지보다는 역효과를 발생시킨다. 몇 명 있지도 않은 수업을 진행하던 나이든 교수가 은근히 무시했던 교수의 인기를 목격했을 때의 그 허탈한 표정은 지식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던 지난 시간들이 정작 현재를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절망을 표현한 듯했다. 또한, 한 교수의 지식적 발전이 그의 의식적 발전으로 이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던 포인트도 그 백인 남자 교수, 엘리엇이 교양있게 흑인 여자 교수, 야즈를 무시하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흑인 여자가 영문학 교수가 되기까지 백인 남자 교수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점이 이 남자 교수가 인격적으로 나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밉상으로 보이게 만들었고, 지윤의 좋은 사람이자 좋은 학과장이 되겠다는 부푼 꿈을 무너뜨리는 주요한 사건이 된다.
결국, 지윤은 학교는 꼰대 집단이라는 학생들의 편견을 깨부시기 위한 홍보 수단으로 개혁된 학교의 상징으로서 여성 학과장이 될 수 있었지만 개혁된 학교를 표방하기엔 그녀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겉만 번지르르하게 개혁한답시고 모여봤자 꼰대는 자신들의 삶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그저 꼰대로밖에 남을 수 없음을 지윤의 존재가 증명하고 있었다.
2. 놀랍지 않은, 어쩌면 당연했을 영문학의 위기
영문학은 백인들이 시작한 학문이다. 그것은 역사적인 사실이기에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과거의 학문인 것만은 확실하다. 아무리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젠더적 연구 등까지 저변을 확대해 오기는 했지만 과거의 죽은 자들의 역작을 연구한다는 사실만으로 이 학문은 현재성을 띌 수 없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그런지 이 학문의 발전은 다른 학문들에 비해 유달리 느리게 보이기는 한다. 우선, 완성된 문장보다는 단편적인 짤, 즉각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이미지적 메타포에 익숙해져 있는 젊은 세대가 보기에 초서나 셰익스피어, 바이런 등의 영문학 시인, 소설가들은 구시대적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이런 죽은 사람들의 역작을 평생토록 연구한 교수들과의 근본적으로 소통의 방식이 다르다. 그래서 노교수들의 한 우물을 판 전문성이 젊은 세대에게는 휴지조각으로 평가받는다. 그 휴지조각은 결국 강의평가로 표현된다. 교수들은 자신들의 학문에 대한 진심, 학문에 대한 전문성이 전문성 따위는 1도 없는 Undergraduate들에게 평가받아야 하는지 화가 나고, 학생들은 현재성이 없는 학문에 대해 비판적인 평가를 거침없이 쏟아낸다는 점에서 젊은 세대와 기성 세대의 소통 오류를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결국, 어느 쪽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현 세대와 소통을 거부하는 학문은 환영받을 수 없음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부분이었다. 필자도 학생으로써 강의평가를 해보았기 때문에 학생들의 입장을 잘 이해한다. 학생들에게 대학교의 강의는 순수하게 학문을 배워보고자 하는 열망보다는 어떤 수업을 들어야 더 재미있고, 점수를 잘 받을 수 있는지 등이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노교수님들의 순수한 학문에 대한 열정과 상충될 수 밖에 없다. 필자도 영문학 비스무리한 전공이었기 때문에 꽤 SF소설 수업부터 셰익스피어까지 다양한 수업에 발담가보았지만 현재 가장 핫한 문학적 이슈와 관련해 대해서는 수업받아본 기억은 없다. 아무리 영문학이 꾸준히 발전해왔다고는 하지만 현재의 트렌드에 익숙한 세대와 트렌드보다는 클래식을 중요시하는 교수들 간의 입장 차이가 좁혀지지 않는다면, 영문학, 아니, 인문학 강단의 미래는 밝을지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가 없다.
3. 애매하게 착한 사람은 왕관의 무게를 견딜 수 없다
지윤은 학과장으로서는 실패했다. 애매하게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착한 사람을 좋아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상대편의 욕을 먹더라도 정확한 위치를 고수하는 사람이 착한 사람으로 평가받을 때가 있다. 지윤에게는 학과장으로 당선된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자신의 노선을 확실히 정했어야 했다. 야즈를 위했다면, 엘리엇에게는 조금은 매정했어야 했고, 빌을 위해서도 더 매정한 모습으로 일관했어야 했다. 그래야 그녀의 왕관이 유지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왕관을 유지하는 것보다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고싶었기 때문에, 군중 심리에 휩싸인 학생들의 외면과 교수진들 모두의 외면을 받게 되었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일 수는 없다. 그래서 나쁜 사람보다 애매하게 착한 사람이 욕은 더 먹는 것이다. 그러니, 지윤도 억울할 수밖에. 지윤은 오히려 학과장직에서 내려온 현재가 가장 그녀답다. 그러니 달리 생각한다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자리 때문에 선천적인 성격까지 바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안될 사람이기에 달리 생각한다면, 지윤의 우당탕탕 학과장 도전기는 오히려 그녀의 내재된 선함이 학과장이라는 자리의 압박감 때문에 변화할 만큼 얄팍한 선함은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저 그녀는 학과장이라는 자리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착했을 뿐이다.
- 1
- 200
- 13.1K
- 123
- 10M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