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your bunny2022-02-16 19:57:17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상실을 겪은 사람들에게 건네는 인사말
사랑하는 존재를 먼저 떠나보낸 사야카가 이별을 인지하게 되는 성장과정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 시사회를 관람한 후 작성한 리뷰글입니다.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
살면서 우리는 내 삶 속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이들과 이별하곤 한다. 이 이별의 순간이 잦을수도, 혹은 아직 경험을 못했을 수도 있다.
'이별', '상실'이라는 단어는 언제 마주해도 항상 낯설고 슬프기만 하다. 만약 이 단어가 '가족처럼 소중한 이', '내가 사랑하는 이'를 가리킬수록 그 슬픔은 배가 된다.
영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반려견인 '루'를 떠나보내면서 처음으로 '이별'을 겪은 8살 소녀 사야카(닛츠 치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다.
일본 나오키상 수상 작가 이주인 시즈카의 동명의 단편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사야카는 운명처럼 '루'를 만났다. 길을 걷다가 '꽥꽥-' 소리에 이끌려 간 곳에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는 강아지 루가 있었다.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놀림을 받던 사야카는 루를 보고 동질감을 느낀다.
루를 데려오고 싶다고 말하는 사야카에게 부모님은 '강아지는 사람보다 적게 살기 때문에 강아지와의 이별까지 모두 감당해야 한다'라고 신신당부했다.
마침내 사야카와 루는 함께 살게 되었고, 그렇게 둘은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언제나 루는 사야카에게 선물을 선사해주었다.
루와 함께하는 모든 시간들이 행복했고, 소중했다.
사야카와 루는 함께 전철이 지나가는 것을 한참이나 멈춰서서 지켜보기도 했고, 루가 발견한 비밀통로를 통해 엄청나게 넓은 초원을 발견하기도 했다. 함께 여름밤에 불꽃놀이를 보기도 했고, 지나가는 비행기를 빤히 올려다보기도 했다.
사야카가 혼자 하던 것들을 루와 함께 하고, 혼자 보던 것들을 루와 함께 보는 모든 시간들이 즐겁고 새로웠다.
루와 함께 하는 순간들은 벅찰 정도로 항상 행복하고 따스했다.
하지만 따스한 봄날, 사야카가 체험학습을 간 사이에 루는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야카의 세상에서 너무나 큰 빈 자리가 생겼다. 루와 함께 산책하던 길을 혼자 걷고, 텅 비어버린 루의 집을 가만히 쳐다보고, 루와 함께 뛰어놀던 초원을 혼자 가고, 루와 함께 보던 하늘을 혼자 바라봤다.
루가 제일 좋아하는 행위는 지나가는 전철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사야카는 혼자서 그 전철을 바라보며, 이 자리에는 없는 루를 기다리곤 했다.
모든 풍경이 다 그대로인데 루만 없었다.
그러던 중 사야카는 루를 통해 알게 된 비밀 장소에서 새로운 강아지인 '루스'를 만나게 된다.
루스를 따라간 곳에는 후세 할아버지(오이다 요시)가 있었다.
후세 할아버지는 동네의 작은 음악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루를 떠나보낸 사야카처럼 사랑하는 존재인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상실'이라는 같은 상처를 간직하고 있던 둘은 각자 그리워하는 이를 만나기 위해 루스와 함께 가까운 바다로 소풍을 떠난다.
바닷가에 도착한 사야카는 루와 함께 보냈던 시간을, 후세 할아버지는 아들 고이치로와 함께 보냈던 시간을 떠올렸다.
실은 허상에 불과하지만, 이들은 각각 루와 고이치로를 직접 만나서 함께 따스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사야카가 현실에는 없는 루를 떠올리며 산책을 했던 것처럼 후세 할아버지는 아들 고이치로를 떠올리며 어릴 때 즐겨했던 캐치볼을 했다.
그리고 후세 할아버지는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아마도 사야카와 후세 할아버지가 떠난 이 짧은 소풍은 먼저 떠난 사랑하는 존재와의 '완전한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루가 찾은 비밀공간에서 사야카와 루는 짧은 철로를 발견했다.
왜 이 철로는 짧은지, 왜 끊어져 있는 것인지, 사야카는 도통 알지 못했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에서 사야카는 마침내 깨닫게 된다.
어느 날 밤, 철로에서 사야카는 반대편에 서 있는 후세 할아버지, 고이치로, 루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고자 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일까? 사야카는 도저히 그쪽으로 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빨간색의 열차가 하나 들어오기 시작했고, 후세 할아버지와 고이치로, 루는 그 열차에 탔다.
사야카도 가고 싶은데 갈 수가 없었다. 무언가가 자꾸 사야카를 막기 때문에.
주위를 둘러보니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엄마, 부인을 떠나보낸 남편, 할머니를 떠나보낸 할아버지의 모습들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열차에 타 있는 먼저 떠나보낸 이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후세 할아버지와 고이치로, 루도 사야카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사실 그 열차는 저승으로 가는 열차였다. 루와 사야카가 발견한 곳은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태워가는 간이역이었다.
죽은 이들이 떠나는 역, 산 자가 죽은 이를 배웅하는 역.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모두 이 역을 안다.
그렇게 열차는 보이지 않는 저 너머로 멀리멀리 떠났다.
'훗날 내가 사랑하는 존재를 잃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라는 사실만큼 아픈 문장은 없는 것 같다.
이별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보편적인 사실이지만 너무 가혹하다.
이 영화는 '사랑하는 존재의 상실'과 '상실(이별)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존재를 보내주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고 있다.
어린 소녀인 사야카는 사랑하는 반려견인 루의 이별을 겪고, 루의 빈 자리를 느끼고 그리워하는 과정을 통해 마침내 완전한 이별을 인지하게 된다.
이 점에서 한 소녀의 성장과정을 다루고 있는 이야기라고 봐도 될 것 같다.
동시에 이 영화는 사야카와 후세 할아버지처럼 사랑하는 이와의 상실을 겪은 관객들을 토닥여주기도 한다.
열차 안에서 눈빛으로 마치 '난 이제 괜찮아', '먼저 가서 기다릴게'라는 인사말을 전하는 듯한 먼저 떠난 이들을 통해,
그리고 간이역에서 먼저 후세 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던 '어린 소년'으로 남아 있는 고이치로를 통해 (상실을 겪은)관객들을 간접적으로 위로해준다.
이 장면들을 볼 때 실제로 먼저 떠난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내게 따스하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 나는 그저 펑펑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간이역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며 루를 보내준 사야카는 '루스'라는 강아지와 함께 현실을 살아간다.
사랑하는 존재를 '보내주는' 것은 단순히 그 존재를 '잊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존재와의 이별을 받아들이고, 그와의 추억들을 마음 속에 간직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생 그 추억만을 잡고 산다는 것이 아니다. 그 추억을 마음 깊이 새기고,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들에 간간히 웃으며 지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실의 순간이 매우 아프고, 슬픈 기억으로 남아있을 테지만 어쨌든 우리는 열심히 현실을 살아가면 된다.
기억이 흐릿해지면 흐릿해지는대로, 또렷이 기억나면 또렷하게 기억나는대로 그 추억들을 마음 속에 새기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
사야카도 앞으로 그럴 것이고, 나도 그럴 것이고, 다른 이들도 그럴 것이다.
따스한 봄날 같은 영화 <역으로 가는 길을 알려줘>는 2월 17일에 개봉한다.
점점 겨울이 걷히고, 봄이 다가오기 시작하는 이 시점에서 이 영화를 꼭 관람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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