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노라마 2023-02-01 22:02:32
딸은 아버지의 애프터썬이었을까
(애프터썬 시사회 리뷰)
** 이 시사회는 씨네랩으로부터 초대받아 참석한 시사회입니다.
애프터썬 2월 1일 수요일 개봉작
감독 / 샬롯 웰스 데뷔작
포스터를 먼저 살펴보았을 때, 아빠와 딸의 여행을 소재로 한 밝은 영화일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영화는 밝은 톤의 장면들 속에서 각 인물들간의 어딘가 불안한 내면을 비춘다. 샬롯은 이혼한 후 딸과 아내와 튀르키예에서 따로 살고 있다. 31살인 아버지 샬롯은 11살인 소피와 함께 일주일동안 튀르키예 여행을 한다. 그 과정을 서로는 캠코더로, 사진기로 담는다. 이 순간들을 큰 소피가 회상하듯이 연출된다.
성인이 된 소피의 회상으로 시작하는 <애프터썬>은 스코틀랜드 출신 샬롯 웰스의 데뷔작으로, 감독이 자신의 아버지와 실제로 겪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데뷔작이라 하기엔 믿기 어려울 정도의 뛰어난 스토리 구성과, 절제되었지만 깊이 있는 연출력을 선보인다. 부녀간의 애틋하면서도 감동적인 이야기를 그린 <애프터썬>은 올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처음 소개되었으며 관객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었던 작품 중 하나다.
출처 :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램 노트
여행하는 동안 샬롯은 소피를 챙겨주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어딘가 우울함이 감돈다. 혼자 춤을 추거나, 카펫을 바라보거나, 밤바다에 뛰어들려고 하는 등 다양한 장면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소피는 11살이지만 그 나이에 비해 성숙하다. 아빠를 챙겨주려고 하는 모습이라거나 소피보다 나이가 많은 오빠와 언니들과 살갑게 같이 지낸다. 또한 아빠가 상황이 여유롭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최선을 다해 챙겨준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영화는 파편적으로 나뉘어져 있어 매끄럽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부분이 이 영화의 매력포인트이다. 파편 파편이 모여 중간에는 의문이 들을 수 있지만, 영화관을 나갈 때는 기분이 오묘해진다. 나는 마지막 장면이 왜인지 조커의 마지막 장면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얀 방에서 문을 닫는 모습이 비슷해서 그럴까?
영화의 전체적인 색감과 분위기는 정말 아름답고 눈부시다. 역시 믿고보는 A24.. 독립, 예술영화의 느낌을 좋아한다면 이 애프터썬이 취향에 잘 맞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 맞다. 애프터썬은 뜨거운 햇빛에 지친 피부를 위해 바르는 크림이다. 소피가 샬롯의 애프터썬이었을까.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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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녀(魔女) Part2. The Other One
** 영화 <마녀2>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마녀(魔女) Part2. The Other One (2022)
감독: 박훈정
출연: 신시아, 박은빈, 서은수, 진구, 성유빈, 이종석, 조민수, 김다미 등
장르: SF, 액션, 스릴러
상영시간: 137분
개봉일: 2022.06.15
구자윤을 잇는 또다른 마녀의 등장
한바탕 살상이 벌어진 듯한 아크. 피칠갑을 한 '소녀(신시아)' 하나가 겨우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선다. 소녀는 주변의 모든 것들을 하늘로 띄울 수 있는 초능력을 가졌지만 부상이 심한 상태. 도로를 걷다가 조직 폭력배들이 탄 밴에 발견되어 차에 타게 되고, 그 안에서 납치된 '경희(박은빈)'를 만난다. 소녀의 정체도 모르고 덤빈 납치범들은 그의 움직임 한번에 초박살이 나고, 그렇게 목숨을 건진 경희는 소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한편, 2세대 실험체인 소녀의 탈출을 알게 되자 '백총괄(조민수)', '장(이종석)'은 각자의 방식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백총괄은 본사 요원 '조현(서은수)'를 시켜 소녀를 제거하도록 지시하고, 상해 지부에서 온 4명의 토우, 경희와 소녀에게 한바탕 당한 후 앙갚음을 위해 다시 나선 '용두(진구)'의 조직까지 같은 목적지로 향하며 경희와 소녀는 사면초가에 이른다. 조현의 작전이 예상되로 흘러가지 않게 되자 경희와 동생 '대길(성유빈)'의 희생을 막지 못하게 되고, 이를 알게 된 소녀는 아무도 감히 막을 수 없는 폭주를 시작한다.
스케일 커진 액션과 CG, 그것이 전부
전편과 비교했을 때, 제작비의 규모가 큰 차이로 커진 것은 아니지만 세계관의 확장으로 인해 액션신과 그래픽이 훨씬 화려해지고 스케일도 커졌다. 1편은 '구자윤'이 각성하기 전에 벌어지는 사건들도 비중있게 다루는 반면 2편은 '소녀'가 등장할 때부터 탈인간의 능력을 가진 것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강화인간 유니온, 중국 상해에서 온 2세대 실험체 토우 등 <마녀> 세계관에 속한 존재들이 대거 등장한다. 전작에서는 설명이 부족했던 설정들을 하나씩 풀어내고, 초인들 간의 대립 구도로 인해 볼거리와 이야깃거리 모두 풍성해졌다.
하지만 탄탄한 서사 없이 현란한 그래픽으로만 치장한 판타지 액션물은 화려한 포장지로 둘러싼 빈 깡통에 불과하다. 전편보다 액션신의 비중도 커졌고, 특수한 능력을 가진 초인들의 난립으로 볼거리도 많아졌지만 단지 그뿐이다. '소녀(신시아)'에 대한 스토리라인이 부족하고 상해 지부의 토우들은 강력한 캐릭터임에도 위압감을 전혀 드러내지 못하는 연기를 펼쳐 큰 규모의 전투신들이 긴박하지도, 흥미진진하지도 않다. 화면 구도 또한 인물들을 클로즈업하는 형태를 많이 취해 동작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고, 빠른 속도로 이뤄지는 액션들의 속도감이 즉각적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마치 이 영화가 CG와 액션신을 얼마나 실감나게 잘 구현했는지 기술적인 부분을 자랑하는데 도취된 느낌이다. 이야깃거리가 많아졌음에도 이를 촘촘하게 연결해서 스토리라인을 유기적으로 만들기보다는 흩뿌리는데 그쳐 전개가 엉성하고 산만해졌다.
최고의 신스틸러, 서은수와 저스틴 하비
'마녀'로 칭해지는 '소녀(신시아)'가 주인공인 작품이지만 인물의 특성상 대사가 거의 없고, 작중 최강자답게 스펙터클한 액션신을 주도적으로 이끈다. 사실 그마저도 그래픽을 활용한 요소가 많다보니 전편을 이끈 '김다미'처럼 주인공으로서의 존재감이 크지 않다. 1편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등장인물의 수가 많다보니 캐릭터에 대한 시선이 분산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2편에는 유니온, 토우 같은 새롭게 출현한 미지의 대상들이 많기 때문에 주인공에게 관심이 집중되지 않는다.
의외로 작중 최고의 매력을 발산한 건 소녀를 쫓는 유니온 '조현(서은수)'와 '톰(저스틴 하비)'의 버디 케미다. 톰은 작중 유일한 개그 캐릭터로 까칠하고 시크한 조현과 투닥거리는 장면들을 만들어 작품의 무게감을 덜어준다. 조현과 함께 다니는만큼 액션신에서도 큰 비중으로 등장하는데, 특히 혼자서 자동차 문짝을 방패 삼아 미행하던 요원들을 상대하는 장면은 마치 '캡틴 아메리카'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서은수'는 그동안 출연했던 작품들에서 연기력으로 좋은 반응을 얻었던 적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마녀2> 출연진 중에서도 제일 기대를 안했던 배우인데, 뛰어난 전투력과 회복 능력을 보유한 '조현'이라는 캐릭터를 만나 연기 변신에 완벽하게 성공했다. 그동안 드라마를 주무대로 활동했던 그는 밝고 명랑한 캐릭터를 많이 연기해 왔는데, 오히려 어둡고 강렬한 역할이 본인에게 잘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개선된 연기력을 보여준다. 토우들을 상대하느라 죽음의 문턱까지 가기는 했지만 생존에 성공했고, 일반인은 다치지 않게 하려는 원칙과 양심을 가진 인물인만큼 후속작에서 어떠한 포지션으로 등장하게 될지 궁금증을 유발한다.
시리즈를 잇는 교두보의 역할
2편은 독립적인 작품으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다기 보다는 3편을 예고하는 교두보로서 기능하는 부분이 매우 크다. 감독의 시선이 2편을 건너뛰고 이미 3편에 도달해 있다보니 2편인 본작은 후속작에 대한 떡밥을 대거 투척하기만 하고, 깔끔한 스토리라인을 정립하는데는 실패했다. 그럼에도 많은 등장인물들을 바탕으로 후속작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는데는 일부 성공했기에 2편이 실망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3편을 보려는 관객들이 줄어들 것 같지는 않다.
후반부에 특별출연으로 등장한 1편의 히로인 '구자윤(김다미)'가 사실 소녀의 쌍둥이 언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두 사람은 함께 일행이 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토우 하나쯤은 쉽게 뭉개버리는 언니와 약물에 의지해야 한다는 약점조차 없는 동생이 엄마를 찾겠다는 공통의 목적으로 뭉쳤기에 작중 가장 강력한 조합이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구자윤과 마찬가지로 특별출연 정도의 분량이었던 '장(이종석)'의 정체도 아직 완전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2편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지만 아크를 관리하고 소녀를 쫓는 책임자인만큼 후속작에서 메인 빌런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장'의 능력은 아직 등장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3편에서 초인 자매에게 위협을 가하는 존재로 충분히 등장할 법 하다. 단, 2편에서 <마녀>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을 크게 깎아먹은 터라 액션신과 그래픽에 욕심을 내기보다는 스토리라인을 보완하는 게 작품의 호불호를 결정 짓는 핵심 요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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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드러운 거부로서의 애도,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2015년 퓰리처 희곡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Marjorie Prime』은 유족의 기억을 통해 망자의 정체성을 재현하는 인공지능 홀로그램, ‘프라임’을 중심으로 디지털 시대 죽음과 애도의 의미를 날카롭게 질문하는 작품이다. 동명의 희곡을 각색한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Marjorie Prime> 또한 기억이라는 삶의 요소가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맞물려 다양한 애도의 방식으로 분화되는지 다룬다.
그러나 '디지털 부활'은 더이상 픽션의 영역이 아니다. 2016년, 러시아 기자였던 Eugenia Kuyda는 사랑하던 연인을 잃고 그와 나눈 메시지를 모두 모아 구글 기반의 신경 네트워크(neural network)를 활용하여 그를 챗봇으로 부활시켰다. 챗봇 버전의 연인은 정말 사람 같아서 Kuyda는 챗봇과 과거와 미래에 관한 얘기를 나누며 연인을 잃은 슬픔을 해소했고,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쓸 수 있는 대화형 챗봇, ‘Replika’를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2020년부터 매년 사망한 가족을 딥페이크, VR, 인공지능 등의 기술을 활용하여 ‘부활’시키는 <VR휴먼다큐멘터리-너를 만났다>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2025년 현재, 구글 플레이 스토어 기준 ‘Replika’의 다운로드 수는 천만 회를 넘어섰고, <너를 만났다> 프로그램 시즌 1 유튜브 클립 영상 조회 수는 3천 6백만 회를 기록하는 등, 디지털 부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망자를 시청각적으로 재현하는 '디지털 부활'이 점점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고인이 된 이후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닿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디지털 기술을 통한 부활을 가속화하고 있다. 조형래는 “망자를 기리는 첨단의 기술적 방식이 막대한 규모의 사회적 정동의 재구성을 초래하고, 죽음에 대한 사회적 태도 및 문화적 관행 전반에 영향을 초래할 것임이 분명”하다면서, “이러한 초혼(招魂)의 테크놀로지가 프로이트적 의미의 애도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유족들에게 끊임없는 추모의 고통을 유발”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반면 디지털 시대 죽음의 의미를 연구하는 심리학자인 일레인 카스켓은 디지털 기술을 통한 애도가 지속적 결속(continuing bonds)의 한 종류라고 주장하면서, 고인과 유대 관계를 끊지 못하는 이들을 우울증 환자로 취급하는 경향을 문제시한다. 카스켓에 따르면, 고인과 유대 관계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사랑하던 고인과 맺은 심리적, 정서적 유대를 소중히 하거나 심지어 더 강화하고자 하는 오래된 충동에 따르는 것뿐이다.
영화는 마조리가 월터 프라임, 그러니까 15년 전 사망한 자신의 남편을 홀로그램으로 재현한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월터 프라임은 자신이 청혼하던 날 함께 봤던 영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얘기를 꺼내고, 치매에 걸린 마조리는 이를 기억하지 못한다. 중요한 기억을 잊어버린 자신을 원망하던 마조리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대신 “<카사 블랑카>를 보고 돌아온 날 청혼했다면?”이라고 묻고, “다음에 우리가 (청혼) 얘기를 나눌 때는 이게 사실이 되는 거야.”라고 말한다. 어차피 거짓된 기억을 말해도 치매로 인해 사실 여부를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마조리는 이후로도 종종 월터 프라임에게 왜곡된 기억을 요청함으로써 망상적 위안을 얻는다.
생의 끝자락, 기억을 왜곡해서라도 숨기고 싶은 과거는 월터 프라임이 예전에 키우던 강아 지인 토니 얘기를 꺼내면서 분명해진다. 월터 프라임은 마조리에게 ‘자식이 없던 한 연인이 토니라는 이름의 검은색 푸들을 키웠는데, 토니가 죽고 나서 낳은 딸-테스-도 검은색 푸들을 골랐다’라는 이야기를 해준다. 마조리가 두 번째 푸들에게 ‘토니 2세’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설명하자, 월터 프라임은 두 번째 푸들도 금방 ‘토니’라고 불렸다며, 두 강아지가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음에도 나중에는 토니와 토니 2세를 구분하는 의미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여기서 토니는 -2막에서 등장하는 앵무새와 마찬가지로-망자와 망자를 재현한 프라임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첫 번째 토니를 죽이고 자살한 마조리의 아들, 데미안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월터 프라임이 토니의 죽음을 설명할 때 마조리가 흘리는 눈물은, 키우던 강아지에 대한 그리움이라기보다는 아들의 자살이라는 트라우마를 대면한 자의 눈물로 해석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애도(슬픔)와 우울 Trauer und Melancholie」에서 애도를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 규정하고, 여기에는 “사랑하던 사람을 대신할 새로운 사랑의 대상을 찾지 못하는 것, 그리고 사랑하던 이를 생각나게 하는 어떤 행동도 금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라고 설명한다. 달리 말해, 상실을 경험한 사람은 ‘자아의 억제’를 통해 상실 그 자체 외에 다른 곳에는 관심을 둘 수 없는 상태가 된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슬픔(애도)이 “사랑하던 대상이 더는 존재하지 않음을 인식하고 그 대상에 부과되었던 리비도를 철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반발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발이 너무 강하게 되면 상실을 경험한 사람이 아예 “현실에 등을 돌리는 일이 일어나게 되고, 환각적인 소원 성취의 정신병을 매개로 예전의 그 대상에 집착”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이렇듯 정상적 애도에 실패한다면 상실이 자아를 잠식하고 이것이 자기 혐오적 우울증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하지만, 대상의 상실이 극단적인 트라우마인 마조리의 경우, 자기 혐오적 우울보다는 오히려 그 대상을 무의식적으로 격리하려는 억압(repression)에 가까운 행동을 보인다.
“정신적 트라우마 현상의 핵심은 기억(표상)과 정동”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트라우마를 유발한 사건에 대한 강한 정동적 반응이 있었는지다. 달리 말해, 외상적 사건이 유발한 정동을 언어, 또는 행동으로 수행하지 않으면 정동의 잔여가 정신적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히스테리 환자들은 주로 트라우마적 사건의 상기(회고)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 데미안의 죽음이 마조리에게 트라우마를 유발한다면, 이는 데미안에 대한 애도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미안이 사랑했고, 데미안이 죽인 토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조리는 강한 정동을 경험한다. 이러한 반복적인 표상(기억)의 회고는 마조리에게 고통을 줄 뿐이다. 그래서 마조리는 데미안을 충분히 애도하는 대신, 데미안의 죽음이라는 표상의 억압을 택한다.
마조리는 지난 50년 동안 데미안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그와 관련된 모든 사진을 집에서 치운 채 살아왔다. 하지만 치매에 걸린 마조리는 데미안이 죽었다는 사실을 잊고 테스에게 “데미안은 지금 자?”라고 묻는다. 마조리가 치매를 앓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데미안의 행방을 물은 직후 월터와 공원 벤치에 앉아 사프란 색의 깃발을 바라보던 기억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마조리의 모습은 모순적이다. “(벤치에서) 일어나기 싫었어.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라는 마조리의 대사는 데미안의 죽음 이후에도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 마조리의 처참한 심정을 대변한다. 이것은 데미안의 죽음이라는 표상 (기억)이 사라진 이후에도 지속되는 정동의 잔여를 의미한다.
존은 마조리가 해준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월터 프라임에게 마조리가 사프란 깃발을 바라봤던 날의 추억을 전해주지만, 영화는 플래시백 장면을 통해 마조리가 사실 공원 벤치가 아닌, 거실 소파에 앉아 TV에 나온 장면을 봤던 것임을 밝힌다. 테스의 주장처럼, 마조리는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 마지막 기억을 기억하는 것이며” 따라서 기억은 “되풀이될수록 희미해지는 복사본”과 같은 것이 된다. 결국 프라임에게 주입되는 기억은 “실제 기억이라기보다는 마조리가 기억하거나, 기억하고 싶은 과거”이다. 이렇듯 마조리와 월터 프라임을 통해 재구성되는 기억은 특정 시선에 의해 오염된 기억이며, 따라서 데미안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을 방해한다.마조리에게 데미안의 죽음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기억이기 때문에 마조리는 본능적으로 이를 억압하려 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억압이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확연한 간극이 생길 때 발생”한다며, “억압의 본질은 자아를 위협하는 본능(충동)을 의식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억압의 동기와 목적은 본능이 만들어낸 “불쾌를 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트라우마가 해소되기 위해선 “억압의 극복과정을 통한 기억의 회복”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들의 자살이라는 트라우마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치매에 걸린 마조리는 월터 프라임의 외형을 아들이 자살하기 전인 젊은 시절로 설정하면서 아들 죽음 이전의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충동을 보인다. 아들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들의 죽음을 잊고자 하는 마조리의 태도는 현실 도피적 성향을 띤다는 점에서 월터 프라임이 제공하는 망상적 위안을 통해 유지된다.
월터 프라임을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마조리조차도 망자와 망자를 재현한 인공지능 사이의 간극이 촉발하는 ‘두려운 낯섦’을 겪는다. 두려운 낯섦은 “공포감(또는 기이한 불안)의 일종으로,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오래전부터 친숙했던 것에서 출발하는 감정”이다. 이정환은 프로이트가 말한 ‘두려운 낯섦’이라는 개념이 로봇 공학과 관련된 논의에서 흔히 들을수 있는 “불쾌한 골짜기”와 연관이 있다고 설명한다. 두려운 낯섦에 대한 프로이트의 주장 처럼, 불쾌한 골짜기에 대한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비인간에 대한 인간의 무의식적 두려움”이 명백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프라임이라는 ‘기술’에 호의적이든, 그렇지 않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이 사랑 하는 사람을 재현한 프라임과 마주했을 때, 프라임이 자신이 생각했던 망상적 위안을 충분히 제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왜곡된 기억을 그대로 흡수하고, 젊었을 적 외형이 데미안의 죽음 이전을 상기하는 월터 프라임을 통해 데미안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적 사건을 억압 하는 마조리조차도, 월터 프라임이 월터 그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에 불쾌감을 느낀다. 자신이 생각한 실재의 이미지를 프라임이 충분히 재현하지 못할 때, 프라임은 망자의 말을 의미 없이 반복하는 앵무새에 불과한 존재가 된다.
이정환은 대상의 기억을 주입하면, 프라임을 통해 그 사람의 존재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지 만, 이 기억은 살아 있는 자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실재 망자와는 다른 결핍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생전에 사랑했던, 친숙한 망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망자와는 다른 프라임의 모습은 유령과도 같은 두려운 낯섦을 유발한다. 허구의 작품뿐만 아니라 현실속 디지털 부활 또한 두려운 낯섦을 유발하는 건 매한가지다. 조형래는 디지털 기술을 통한 망자의 재현은 늘 “고인에 대한 추모와 의미 부여를 둘러싼 다양한 상호작용을 거스르는 미묘한 위화감을 수반한다”라고 설명한다. 이렇듯 작품 안팎에 무관하게, 기술적 한계는 감각적인 측면에서도, 인지적인 측면에서도 대상을 완벽히 재현해낼 수 없다는 점에서 늘 기이한 불안, 두려운 낯섦, 즉 불쾌감을 유발한다.
테스에게도 데미안의 죽음은 평생의 트라우마이다. 마조리는 평생 데미안의 이름 한 번 꺼낸 적 없지만, 테스는 늘 데미안의 죽음으로 인해 마조리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신적 외상은 테스의 자아에도 영향을 미쳐 영화 내내 테스는 “예민하고 성마른 성격의 소유자이자,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으로 묘사된다. 테스는 월터 프라임에게 질투를 느낄 정도로 프라임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결국 마조리가 사망하자 치유의 도구로서 마조리 프라임을 소환한다.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토니 데리고 해변에 갔던 거 기억하니?’라고 묻는다. 테스는 기억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존이 개를 키우자고 제안했다면서, ‘카타훌라’를 고려하고 있다고 말한다. 생전 마조리는 ‘카타훌라’가 무엇인지 몰랐으므로, 마조리 프라임 또한 테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자 테스는 마조리에게 “‘카타훌라’를 검색해 보라”고 요청한다. 이는 프라임이 진정한 ‘대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의 환상이 필수적임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이것은 프라임의 ‘이용자’가 프라임이 환상에 불과함을 인지하고 있는 한, 프라임과의 대화가 어떠한 치유 효과도 산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라임이 환상에 불과하다면, 프라임과의 모든 상호작용 또한 결국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의 요청에 따라 카타훌라 하운드의 사전적 지식을 로봇처럼 읊고, 테스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며 ‘(마조리 프라임이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사실, 즉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모른 척을 더는 못하겠다’라고 말한다. 테스는 이어 ‘(마조리 프라임이) 정말 엄마 같다가도, 어떨 때는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도 확연하다’라고 말한다. 이미 지와 실재의 간극은 이렇듯 과거가 아닌 현재의 기억으로 인해 명확해지며, 테스로 하여금 ‘엄마처럼 친숙하지만, 엄마가 아닌’ 두려운 낯섦을 느끼게 한다. 이어지는 장면은 이 두려운 낯섦으로 인해 프라임이 어떻게 치유의 실패로 이어지는지 묘사한다.
표면적으로 테스는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지만, 그의 근원적인 트라우마는 마조리와 마찬가지로 데미안의 죽음이 원인이다. 마조리 프라임은 ‘진짜 엄마 같지 않다는’ 테스의 불만에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더 해달라고 말하고, 이는 자연스럽게 테스가 엄마의 기억을 회고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결정적인 질문을 던진다. 마조리 프라임이 ‘테스 말고 다른 자식이 있었냐’고 묻자, 테스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없었다’라고 대답한다. 생전 마조리가 평생 데미안을 언급하지 않았던 것처럼, 테스 또한 데미안에 대한 기억을 숨기면서 자신의 트라우마를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반드시 생생한 정동적 경험을 포함하여, 망각된 외상적 사건을 기억해 정확히 말로 표현”할 때야 비로소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트라우마의 심리적 치유를 위해선 단순한 외상적 사건의 재현을 넘어선 생생한 재경험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프라임은 얼마든지 남아있는 자들에 의해 왜곡된 기억만을 선별적으로 저장할수 있으므로, 치유의 ‘도구’로서 프라임은 제 기능을 다 할 수 없다. 기억의 선별과 왜곡된 기억이 유발하는 이미지와 실재의 간극, 즉 두려운 낯섦은 심리적 치유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라깡은 “욕망의 중심에 놓여있는 결여”를 ‘'대상 a'’라고 지칭하면서, 상상계적 질서 속에서 이 대상은 어떤 욕구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테스는 마조리 프라임을 형성하기 이전부터 자신이 원하는 어떤 환상을 프라임에게 투사한다. 이 환상은 데미안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래서 자신에게 늘 다정하고 충분한 사랑을 주는 엄마이다. 그러나 마조리 프라임이 정말 테스에게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다정한 말을 건네자, 테스는 ‘덜 웃어야 엄마 같아 보인다’라고 충고한다. 테스의 '대상 a'-엄마의 사랑이라는 욕망의 결여-를 충족하기 위해서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생전에 주지 못했던 사랑과 다정함을 주어야 하지만, 동시에 사랑을 주면 줄수록 ‘진짜’ 마조리와는 멀어진다는 점에서 테스의 환상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애증의 대상이자 환상 속 '대상 a'인 엄마의 상실은 테스를 우울로 이끈다. 프로이트는 우울과 슬픔의 차이를 ‘자애심의 추락’으로 설명한다. “우울증 환자는 대상과 관련된 상실감으로 고통을 겪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을 들으면 그것이 자아와 관련된 상실감이라는 것이다.” 테스는 계속해서 마조리와 존의 입을 빌려 자기 자신을 ‘무너졌다’거나, ‘엄마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었다’고 표현한다. 마조리에게 향해 있던 애증의 리비도가 마조리의 죽음 이후 갈 곳을 잃고 테스의 자아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눈치라도 챈 듯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자기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게 굴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조리 프라임과 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애도의 실패-우울증은 결국 테스를 자살이라는 파괴 충동으로 이끈다.
프로이트가 정상적인 애도, 달리 말해 상실을 극복하고 애도를 마무리하는 ‘작업’을 중시했던 까닭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이 자아를 좀먹고 파괴 충동으로 이끄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데리다는 정상적인 애도와 비정상적 애도를 구분하는 프로이트의 애도 이론을 비판하면서, 죽음이 타자를 잊는 여정의 시작이 아니라, 타자를 기억하는 여정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데리다가 보기에 프로이트의 정상적인 애도가 갖는 문제는 타자의 타자성을 말살하려 한다는 데 있다. 성공적인 애도 작업을 통해 내면화가 가능해지면, 타자는 나의 일부가 되는데, 그렇게 되면 타자는 더는 타자가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마조리에 대한 테스의 정동-상실감으로 인한 우울, 사랑, 증오-은 너무 강력해서 테스는 자신의 편협한 시선에서 기억하는 마조리의 모습-약간 허영심이 있고, 까칠하며, 자신에게 한번도 사랑한다고 해준 적이 없을 만큼 데미안을 사랑한-만을 회고한다. 마조리 프라임은 이렇듯 테스의 내면화된 타자를 온전히 재현할 수 없다는 점에서 테스에게 두려운 낯섦을 유발하고, 프로이트식의 ‘정상적인 애도’를 완수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애도의 실패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애도는 “가능성과 불가능성, 성공과 실패의 반복적 진동 속에서 수행 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테스의 자살 이후, 존 또한 테스 프라임 앞에서 두려운 낯섦을 느낀다. 평소에도 프라임에 호의적이었던 존은 테스 프라임을 더 진짜 테스처럼 만들기 위해 적어두었던 테스의 특징들을 테스 프라임에게 읊어준다. 하지만 존 또한 이내 ‘(프라임은) 반사판 (Backboard)에 불과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나는 지금) 혼잣말을 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테스 프라임과의 대화에 회의를 느낀다. 그러나 데리다에 따르면, 이러한 ‘좌절된 내면화’는 “타자를 타자로서 존중하는 것, 즉 부드러운 거부의 자세”를 의미한다. 프라임에게 아무리 왜곡된 기억을 주입한다고 해도, 프라임이 환상 속 ‘대상 a’를 완벽하게 충족하는 것은 아니다. 남아있는 자는 필연적으로 이미지와 재현의 간극으로 인한 두려운 낯섦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려운 낯섦이 초래하는 애도의 실패는 동시에 ‘타자를 타자로서 받아들이는’ 애도의 시작이 된다.
데리다는 “기억을 통한 내면화”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자아를 잠식하는 멜랑콜리아를 긍정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멜랑콜리아는 타자를 버려두고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일종의 나르시시즘적 퇴행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애도의 가능성과 불가 능성이 만나는 지점, 애도의 성공과 실패가 같아지는 지점, 애도와 멜랑콜리아가 중첩되는 공간”에 주목한다. 즉, “애도는 타인의 세계가 끝날 때, 타인을 위해 그 끝을 내 안에 담는 것이며, 동시에 관념화, 내면화, 그리고 식민화에 저항”해야 한다. “타자를 관념화하는 내사 (introjection)가 망각의 시작 지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멜랑콜리아는 극복해야 할 질병이 아닌, 내사에 저항하는 힘이 된다.
존이 테스 프라임에게 느끼는 두려운 낯섦은 이러한 멜랑콜리아를, 자기혐오의 감정을 유발한다. 그러나 이 두려운 낯섦이야말로 테스 프라임을 ‘존의’ 테스로 만들려는 시도를 무화하고, “살아남은 자인 존에게 허락된 삶 자체”를 끊임없이 인식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존의 삶 속에 공거(cohabitation)하는 테스 프라임은 “우리 안에 사는 ‘목격자’”이다. 존은 마조리처럼 죽음을 망각하는 망상적 위안에 의존하지도, 테스처럼 멜랑콜리아를 견디다 못해 자살에 이르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자신의 시선에서 바라본 테스를 내면화하고, 테스와의 기억을 회고하며, 동시에 프라임의 본질적인 두려운 낯섦을 인식하고 절망하기를 반복하면서 테스의 죽음을 애도한다.
데리다는 “타자가 타자성을 유지하면서 우리와 대화 관계에 있는 ‘생각하는 기억’을 애도의 본질”로 보았다. 따라서 데리다는 멜랑콜리아와 애도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인식하려는 애도, 달리 말해 애도 가능성과 애도 불가능성 사이의 진동이 애도하는 텍스트의 직물을 짜고, 애도의 성공과 실패 사이의 아포리아가 길을 여는” 멜랑콜리한 애도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애도라고 주장한다. 인류 탄생 이래, 현실적으로 망자의 발언이 가능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최근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망자의 발언을, 망자의 부활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데리다가 만약 살아 있다면, 망자의 동의 없는 기계적인 디지털 부활을 경계했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디지털 부활은 오직 남아있는 자의 나르시시즘적 멜랑콜리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만 제작되고, 이용된다는 점에서, 기계적 디지털 부활은 너무도 쉽게 프로이트적 애도 작업의 완수를 위한 도구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프라임이 어떻게 “멜랑콜리아를 ‘극복’하는” 애도의 실패를 전제하는지 살펴보았다. 특히, 프라임은 남아있는 자가 주입한 ‘기억’과 새롭게 형성된 ‘지식’, 그러니까 다른 프라임과 대화하거나 인터넷에 검색함으로써 얻어낸 지식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애도의 실패와 성공을 오간다는 점에서, 데리다적 멜랑콜리한 애도를 체현한다. 존이 손녀를 테스 프라임에게 소개하는 장면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멜랑콜리한 애도를 예증하는 장면이다. 존이 테스 프라임에게 ‘손녀가 분류학을 공부하고 있다’라고 설명하자, 테스 프라임은 ‘이분법(Dichotomous)을 이용하지’라고 대답한다. 자연스럽게 분류학에 관한 대화를 이어 나가는 테스 프라임과 달리, 존은 테스 프라임이 분류학에 관한 지식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존의 시선에서 바라본 테스의 기억과 테스 프라임이 새롭게 얻은 지식의 혼합은 이전 에는 ‘말할 수 없던 것’, 즉 손녀와의 예측할 수 없는 상호작용을 존이 인식하게 한다. 존은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테스 프라임에게 ‘입양이 무슨 뜻인지 알지?’라고 묻다가도, 이분법을 말하는 테스 프라임에게 놀라면서 애도의 성공과 실패를 경험한다. 테스 프라임은 그런 의미에서, 존의 내면에 식민화될 수 없는 테스의 이미지를 새기고, 테스의 죽음을 인식함과 동시에 존의 내면에 의해 식민화되지 않은 테스 그 자체를 기억하고, 애도하도록 돕는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프라임의 가장 큰 의미는 ‘내면화되지 않는 지속적 기억’에 있다. 프라임은 남겨진 자들의 기억에 의존하지만, 동시에 그 기억은 인간과 달리, 프라임의 내면에 잡아 먹히지 않고 영원히 그 상태를 유지한다. 인간의 기억은 꺼내면 꺼낼수록 희미해지거나 왜곡되지만, 프라임의 기억은 처음 상태 그대로 지속되며, 프라임 자신의 내면에 의해 오염될 가능성도 없다. 인간이 되고 싶은 욕구를 드러내긴 하지만, 프라임에게 인간과 같은 완전한 자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러한 프라임의 기억을 영화에서 다양하게 변주되고 반복되는 ‘물’의 이미지를 통해 시각화한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희곡인 원작의 특성을 반영하여, 한정된 인물과 배경을 활용한, 절제된 미쟝센을 사용한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프라임 외에 다른 기술적인 특징은 눈에 띄지 않으며, 심지어는 기본적인 가구 이외의 소품조차 얼마 등장하지 않는 미니멀리즘적 미쟝센은 프라임과 인물들의 관계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미니멀리 즘적 집 내부와 대조적인 과잉 생산되는 물의 이미지는 영화의 주제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메타포다.
월터와 마조리의 집이자 테스와 존의 집인 영화의 주된 배경은 바닷가에 위치한다. 그래서 영화는 해변가를 걷는 테스와 존의 모습이라든가, 인물 없이 파도치는 장면이 종종 삽입하거나, 계단 옆에 걸린 파도 그림을 클로즈업하기도 한다. 토니가 해변가 달리기를 좋아했다는 마조리의 대사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데미안을 상징하는 토니가 사랑했던 바다는 영화 내내 ‘죽음’, 또는 일종의 상실을 상징한다. 마조리, 테스, 존이 사망한 이후 파도-또는 파도를 그린 그림-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죽음을 재현한 이미지인 프라임이 등장할 때는-집이 바닷가에 위치함에도- 어둡고 꽉 막힌 실내나, 또는 커튼 뒤로 희미하게 비치는 나무만이 등장한다. 하지만 세 프라임이 모인 마지막 장면에서는 거실 밖 커튼이 활짝 젖혀있 으며, 잔잔한 바닷가의 모습이 포커싱되도록 인물을 모두 같은 방향에서 촬영된 것을 알 수있다. 이는 궁극적인 영화의 주제인 죽음과 애도를 인간이 모두 사망한 뒤에도 프라임이 이어가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연출로 해석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중요한 메타포는 ‘비’인데, 영화에서 딱 두 번 등장하는 폭우는 영화의 두 번째 주요 키워드인 ‘인간의 기억’과 연관성이 있다. 희미해지는 인간의 기억처럼, 비는 끊임없이 흐르고, 또 쉽게 휘발되고 만다는 점에서 인간의 기억을 상징한다. 따라서 프라임 뒤에 켜켜이 쌓이는 포근한 눈의 이미지는 인간의 기억처럼 흘러가지 않고 차갑게 냉동되어 켜켜이 쌓이는 프라임의 기억을 시각화한 것이다. 이는 영화 속 첫 번째 폭우 장면에서 존과 테스가 기에 대해 나눈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한다. “되풀이될수록 희미해지는 복사본”같은 인간의 기억과 달리, 프라임의 기억은 “뇌 안의 퇴적층”처럼, 모든 기억을 원본 그대로 냉동시켜 저장 한다는 점에서 눈과 닮았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얼마가 흘렀는지조차 알 수 없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월터, 마조리, 테스 프라임은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그들 뒤 넓은 창에는 눈 내리는 바닷가의 풍경이 있다. 켜켜이 쌓이는 눈과 파도치는 바닷가가 보이는 통창 앞에서 프라임은 데미안의 죽음을 끄집어 낸다. 유일하게 데미안에 대한 기억을 들은 월터 프라임이 데미안의 죽음을 언급하고, 데미안에 대해 알지 못했던 테스와 마조리 프라임도 월터 프라임과의 대화를 통해 데미안을 추억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특히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니 얼마나 좋아’라는 마조리 프라임의 마지막 대사는 수 세기가 지난 뒤에도 바래지 않고 타자를 기억하는 애도의 자세를 체현한다. 그러므로 세 프라임 뒤로 펼쳐진 ‘눈 내리는 바닷가’는 테스, 월터, 마조리뿐만 아니라 데미안과 존까지 프라임이 모든 ‘타자’의 죽음을 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영원히 기억하고 있음을, 서정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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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명하지 않는 <그레타 툰베리>
오는 6월 17일 개봉을 앞둔 <그레타 툰베리>는 제77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를 시작으로 해외 다수의 영화제뿐만 아니라 전주국제영화제, 서울환경영화제, 서울구로국제어린이영화제 등 국내 영화제들에서도 상영된 스웨덴의 15세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를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현존하는 인물을 다룬 다큐멘터리인 만큼, 이 다큐멘터리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그레타의 모습은 어떤 부분이었을까. 2019년, 유엔 본부에서 열린 기후 행동 정상회의에서 연설을 하며 국내에도 잘 알려진 그레타 툰베리는 역대 타임지 올해의 인물 최연소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녀가 스웨덴의 환경운동가인 줄은 알았지만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그녀의 명확한 행보는 알지 못했었다. 영화는 기후 변화 법안 마련 촉구를 위해 금요일마다 의회 앞에서 홀로 결석 시위를 하며 '미래를 위한 금요일(Friday For Feature)’을 외치던 평범한 소녀부터 시작한다. 이때부터 그녀를 향한 반응은 갈리기 시작한다. '어떻게 이런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니?'부터 '그래도 학교는 가야지'라는 차가운 시선까지. 만약 그녀가 후자의 말대로 결석 시위를 그만두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면 기후변화 대응 촉구 시위를 위해 역대 최대 규모인 31만 명이 캐나다 몬트리올에 모이고 전 세계 106개국에서 청소년 기후 활동가들을 움직이도록 할 수 있었을까.
영화에서 나의 눈에 가장 돋보였던 점은 그레타의 집요함과 섬세함이었다. 일정의 압박과 우호적이지 못한 여론 속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지키는 모습, 때로는 아버지와의 갈등을 일으킬 정도로 가족들의 마음을 어렵게 만들지만 본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서 포기하지 않는 그레타의 모습에선 여느 전문가과 다름없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영화는 그레타를 둘러싼 논란에 해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그레타 툰베리의 외침, 그리고 그녀의 명성을 뒷받침해줄 전문성을 보여줄 뿐이다.영화에서 나의 눈에 가장 돋보였던 점은 그레타의 집요함과 섬세함이었다. 일정의 압박과 우호적이지 못한 여론 속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지키는 모습, 때로는 아버지와의 갈등을 일으킬 정도로 가족들의 마음을 어렵게 만들지만 본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서 포기하지 않는 그레타의 모습에선 여느 전문가과 다름없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영화는 그레타를 둘러싼 논란에 해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그레타 툰베리의 외침, 그리고 그녀의 명성을 뒷받침해줄 전문성을 보여줄 뿐이다.
'유능한 환경운동가가 되려면 남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하고 보기 싫어하는 행위를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요. 풍파를 일으키고 사람들을 열 받게 해야 되죠. 그러지 않으면 제 역할을 못하는 거예요.' 그린피스의 공동 창립자이자 시셰퍼드의 창립자인 폴 왓슨 선장의 말처럼 세상을 바꾸기 위한 그레타 툰베리의 외침이 다수에게 불편한 소리가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녀에 대한 이 기록물은, 환경을 생각하지 못했던 이들부터 자신만의 외침을 가지고 있는 청소년들에게까지 귀감이 되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그레타의 행동들이 설사 퍼포먼스라 할지라도 그 행동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일으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생각만 많고 용기 없는 어른들보다 먼저 소리를 낸 그레타 툰베리에게 찬사를 보내며 앞으로의 행보를 응원하다.
**사진출처: 다음영화,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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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절대 내 뒷모습을 볼 수 없었다
하... 글을 몇 번이고 지웠다. 일 하기 싫다. 공부하고는 싶다. 근데 들인 노력에 비해 올라가지 않는 실력에 또 나 자신에게 좌절했다. 이 세상에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생각에 앞이 깜깜했다. 나지막하게 입에서 욕을 하려다가 참았다. 오늘은 하루 종일 잠만 잤다. 방구석에 앉아서 게임을 하지 않았다. 주체적으로 주말을 보냈고 나름 성공적이었다. 새벽 두 시에 자서 오후 4시에 일과를 시작했으니 게임만 하던 예전의 나보다는 더 발전한 셈이다. 어제는 강박인지 재미인지 나 스스로도 구분 안 될 게임을 접으려고 했다. 그럴 시간에 공부를 해서 나의 어떤 점수를 올리는 것이 도움된다는 걸 진작에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패했다. 오늘도 이랬다. 열심히 살고는 싶지만 내 생각 외의 무언가가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어차피 인생이 다 정해져 있는 무언가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이런 노력들 다 할 필요 없는 것 아닌가. 이 루틴의 끝이 어디쯤에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알 수 없었다. 이 수많은 뻘짓거리의 끝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돈 얼마 벌어도 결국 어떻게 쓸지 고민하게 되고 그에 따른 후회가 온다. 아빠 노트북을 사 주면 후회하지 않게 될까. 맥북을 새로운 걸로 갈면 후회하지 않게 될까. 아주 사소한 인생의 질문들이 머리 위를 뱅뱅 맴돈다. 그럴 수 있지라는 대답과 그래서는 안됐었다는 답이 나온다. 금세 나는 지금 나에게 없는 것들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 누군가의 얼굴도 떠오르고 어떤 물건들도 생각난다. 그게 나에게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렇게 수도 없이 되묻다 보면 한 정답에 수렴한다. 원인과 결과에 대해 머릿속에서 수천번 따진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나는 보이는 것만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만 결론을 내린다. 누가 나에게 말을 건네주어 위로라도 해주길 원하지만 사실 아무 의미 없다. 애초부터 이 지긋지긋한 루틴에는 답이 없었다. 인생은 이렇게나 뭐 같은 순간의 연속이었다. 생각 외의 너머를 알 수 있을까. 갑자기 이 세상에서 친절한 건 무엇일까, 하는 의문점이 든다. 진짜 내 편인건 과연 무엇일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인생은 이렇게 외로운 게 맞다 하더라도 인간에게는 뒤를 돌아볼 구석이 필요하다. 내가 아는 세상은 너무나도 잔인하기 때문이다.
<하나 그리고 둘>은 영화에 관한 영화다. 주인공은 8살 소년 양양이다. 양양의 카메라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가족들의 얼굴을 찍는다. 가족 구성원들이 처한 상황은 가지각색이다. 일단 가족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하기 이전에 배경으로 설명되는 가족 행사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아빠 NJ의 처남 아디의 결혼식이 영화 초반에 제시된다. 평범한 가족 행사 같아 보이지만 사실 이 결혼에는 비밀이 있다. 결혼의 계기가 혼전임신인 것도 모자라 아디는 불륜 중이었기 때문에, 이 불륜의 대상이 된 여자가 갑자기 튀어나와 결혼식에 개입한 것이다. 이 일로 마음이 불편해진 할머니는 가족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영화는 가족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느릿느릿 보여준다. 첫 번째 아빠 NJ의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아빠 NJ에게 결혼식 도중 옛사랑이 찾아온다. 당연히 싱숭생숭해지는 아빠 NJ. 또 이것과는 무관하게 계속해서 벌어지는 인생의 좌절에 엄마 밍밍은 절로 떠나버린다. 딸 팅팅과 할머니 사이에도 사건이 있다. 팅팅이 버리지 않은 쓰레기를 버리러 가다 할머니가 심장발작으로 쓰러진 것이다. 할머니의 건강 악화가 자기 탓일 거라 믿으면서도 한편으론 친구 패티의 전 남자 친구와 눈 맞기 5분 전에 놓인다. 아들 양양은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사진을 찍는 게 아니면 사실 학교에서 썩 적응을 잘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영화는 이런 식으로 각자의 인물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엄청나게 느린 화법으로 전달한다. 아마 러닝타임 세 시간 중 거의 2시간 30분이 느린 템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위의 단락도 내용을 잠깐 요약해서 저 정도인 거지 영화 1 회독이 그렇게 쉬운 편은 아니다. 난 이 작품 초반 1시간에서 하차를 두 번이나 했다. 템포만 문제인 게 아니다. 느릿느릿한 화법에 등장인물이 많다는 것도 이것을 유발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 인물의 관계 때문에 영화 안에서 갑자기 혼란스러워지는 지점이 있는데, 패티는 말랐는데 뚱보라고 불린다던가, 갑자기 느닷없이 패티가 팅팅에게 화를 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난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화를 내는 장면을 몇 번이나 더 봤다. 잔잔한 템포에 갑자기 화를 내니까 이건 뭐지 싶었던 것이다. 영화 자체가 하나의 키워드를 통해 줄거리를 이끄는 형식이 아닌 주인공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조명한다. 말이 영화지 다큐보다 더 심심한 영상이었다. 근데 이건 후반부 끝까지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작품의 종반부에서 모든 게 다 정리된다. 패티가 느닷없이 한 명을 죽이는데, 이는 리리와 리리의 어머니 둘 다 함께 부적절한 관계이던 영어 선생님이었다. 아무 뜬금없이 이 사실이 드러나진 않겠지? 난 살인사건과 후에 할머니가(환상이었지만) 살아 계신 듯한 연출을 보고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가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을 하나만 비틀어서 은유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딱 아는 것만 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건 애초부터 알 수 없다. 우리는 그걸 알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 그걸 다 알고 살았으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 영화도 이런 우리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팅팅이 패티에게 받은 편지에는 어떤 내용이 있을까? 근데 그게 좋은 내용이었든 나쁜 내용이었던 팅팅이 결과를 바꿀 수 있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다른 문제. 그래서 할머니가 진짜 쓰러진 이유는 뭘까? 진짜 팅팅이 버지 않은 쓰레기 때문일까? 셰리는 재결합을 원했는데 왜 연락 없이 떠났을까?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철저하게 감춘다. 할머니가 쓰러진 이유는 팅팅에게 굉장히 중요하다. 셰리가 갑자기 튀어나온 이유? NJ에게 역시 중요할 것이다. 양양은 수영을 하는 같은 반 여학생에게 마음이 있어 따라 해 보지만 물에만 풍덩 빠지고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한다. 가족 구성원들은 목적에 따라 살아가지만 이 사람들에게 이 목표는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 목적만큼 중요했던 건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영화는 '내가 뭘 하러 온 거지?'나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어'와 같은 대사로 '살아있는 증거는 무엇인가?'에 대해 조명한다. 할머니 앞에서 하는 이야기들, 엄마의 실신으로 울부짖으며 했던 대사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했던 잡생각들. <하나 그리고 둘>은 삶의 목적이 아니라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것에 다룬다. 마치 인생의 의미에 욕망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처럼.
어쩌면 이건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가 삶의 목적이나 실패, 성공 그런 것 때문은 아니지 않은가. 난 내 원래 취지에서 굉장히 어긋난 인생을 살고 있고, 하루에도 몇 번은 후회한다. 근데 더 웃기고 슬픈 건 이런 일들이 내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난 내가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쉬운 대로 원인을 찾기 시작한다. 아. 그래서 그게 그렇게 됐지. 그때 걔가 그렇게 말했을 때 이랬었으면 어땠을까. 사실 이 생각에 답은 없다. 어차피 인생은 잔인하고 목적이 분명하다고 해서 행복을 갖다 주지는 않기 때문이란 걸 우리 스스로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있다고 느끼는 건 나른함에서 왔다. 공익근무요원을 하며 버티는 지루한 하루하루. 사랑하는 사람들의 슬픔 속에 꼭 표현하고 싶은 내 마음. 토익 책을 사려다가 엄마 아빠와 맛있는 걸 먹을 때의 쾌감. 뭐 그런 것에서 나는 생의 의미를 느꼈던 것 같다. 항상 이것들은 내가 알고 있는 것 너머의 무언가를 알려줬다.
그래서 나는 영화를 본다. 영화는 보이는 것 너머에 대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카메라로 사람들을 관찰한다. 가끔 내레이션도 나오고 CG도 나온다. 이런 요소들 때문에 우리는 주인공의 마음을 알 거라고 믿는다. 감정이입이란 이걸 근거해서 나타난다. 내가 저랬으니까. 저 사람도 그러겠지. <이터널 선샤인>이 좋은 작품인 이유도 여기에서 온다. 우리가 아는 사랑의 의미를 공유하는 공통분모를 정확하게 건드리기 때문이다. 근데 사실 우리가 이 <이터널 선샤인>에 공감하는 이유가 찰리 카우프먼의 해설을 들었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기억 속에 있는 사랑을 바탕으로 리액션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참 웃긴 것이다. 나는 저 사람이 아닌데 주인공의 감정에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의 내면이 보이는 것이 아닌데도 우리는 영화를 보고 공감한다. 보이는 것 너머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삶도 비슷하다. 나는 내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착각 때문에 누군가를 진심으로 존경하며 존중하고 또 사랑을 주려고 한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그 사람의 앞과 뒤지 내면은 알 수 없다. 또 근데 웃긴 건 인간의 이런 속성을 우리가 모르고 있을까? 위험부담? 이미 알고 있다. 애초부터 삶이 분명하게 제시는 게 하나도 없는데도 우린 무언가를 본다고 믿고 있다. 예상하지 못한 결과로 항상 쓴 대가를 치르면서, 다 알면서도 난 인생에게 계속 속는 셈이다. 삶은 이 지점에서 영화와 비슷하다. 뜬금없는 반전이 튀어나올 수도 있고 예상을 뒤엎지 않은 채로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목적이 애초부터 정해져 있지 않았는데 영화의 결말을 예상하다 뒤통수를 맞는 것처럼 삶은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지배받는 것투성이다.
그래서 삶이 아름답다. 또 내가 앞에서 서술한 영화를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삶이란 예상치도 못한 것에 지배받는 것이 아닌 모르는 것투성이 속에서 내가 알 수 있는 걸 넓혀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영화를 보고 각자 느끼는 감상이 다르기 때문에 영화가 아름다운 예술이기도 하다. 이게 내가 살면서, 또 몇 년간의 (자칭) 시네필로서 느낀 결론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 이외의 요소로 인해 삶이 결정된다는 걸 잘 안다. 이 요소가 전부는 아니더라도 절반쯤은 될 것이다. 근데 우리는 행복해진다. 왜?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 사실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 사실을 천천히 따라가는 예술이다. 현실과는 다르게 정해진 틀에서 보는 예술이다. 이 영화에 대한 해석이 각자 다른 것처럼 우리는 다른 것들을 믿어 행복해진다. 어차피 불행할 것이라는 걸 다 알면서도.
그러니까 너무 애쓰지 말자. 지금을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 우리에겐 정말 좋을 것 같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우리 스스로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그것도 우리의 극히 일부분에 대해서만 안다. 근데도 어찌어찌 살아진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자아의 특성은 반대로 생각하면 모르는 것 투성이에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이렇게나 많다니!로 귀결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이유. 우리는 모든 것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고 이 예술은 이것을 너무나 훌륭하게 구현해낸다. 특히 <하나 그리고 둘>이란 작품은 삶을 통제하는 것이 아닌 흘러가는 대로를 보여주며 삶의 본질을 그려냈다. 우리는 우리의 뒷모습을 애초부터 볼 수 없다. 근데 뒷모습을 볼 수 없어 행복해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반쪽짜리 진실에 목 메달 필요 없다. 아니, 우리는 반쪽짜리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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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시감만 넘치는 오컬트 활극
강동원 주연의 캐주얼한 오컬트 활극. 작년 추석 시즌에 개봉한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이하 ‘<천박사>’)가 내세운 무기다. 하지만 기대만큼 이 무기는 관객들에게 먹히지 않았다. 결국 191만 명을 동원하는데 그쳤다. 손익분기점은 240만 명을 넘기지 못한 것. 다양한 장르적 쾌감을 믹싱했음에도 왜 이렇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까?
퇴마사로 활동하는 천박사(강동원)는 귀신을 믿지 않는다. 퇴마는 곧 인간의 마음을 보살피는 과정이라 생각하는 의사이기 때문. 가짜 퇴마의식은 천박사의 뛰어난 연기와 멀티 플레이어 조수 인배(이동휘)의 기계장치 트릭이 합쳐져 만들어진다. 천박사가 잘생겨서인지, 아님 연기를 잘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의뢰자들은 모두 속는다. 그러던 어느 날 천박사에게 귀신을 보는 능력자 유경(이솜)이 찾아온다. 동생 유민(박소이)에게 빙의 된 귀신을 쫓아내 달라는 것. 설마하는 생각에 유경의 집으로 가서 기존 방법대로 퇴마를 진행한 천박사는 뜻밖의 인물을 만난다. 바로 무당이었던 할아버지와 동생을 죽인 장본인 범천(허준호). 천박사는 그동안 갈아왔던 복수의 칼을 뽑아든다.
<천박사>는 원작 웹툰 ‘빙의’를 각색해 영화적 상상력, 특히 무속신앙을 기반으로 한 오컬트적인 재미와 액션 활극을 더했다. 오컬트 장르가 주는 신비롭고 독특한 느낌,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와 귀신과의 호쾌한 대결은 그 자체로서 구미를 당긴다. <천박사> 또한 이 두 가지 요소를 믹스하고 코믹함을 더해 관객들을 향한 어필을 시작한다.
초반 이야기는 궁금하다. 천박사의 과거 일과 범천과의 악연, 그리고 부제인 설경의 비밀 등 계속해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가 등장하고, 이를 동력삼아 마지막 대결까지 나아간다. CG의 힘을 빌려 오컬트와 판타지 요소 가득한 액션 비주얼은 취향을 타긴 하지만, 극의 재미를 더해주는 역할은 충분히 한다.
하지만 이내 재미가 반감되는 건 이 영화만이 가진 오리지널리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요소가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이 든다. 퇴마의식이나 무속신앙의 활용도는 여타 비슷한 장르의 영화와 차별화 포인트 없이 사용된다. 특히 귀신을 가두는 ‘설경’의 비주얼은 마블 영화에서 나올법한 이미지로 구현된다. 이렇듯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와 이미지의 범람은 초반 영화의 호기심마저 잡아먹는다. 마지막 대결 장면도 긴박감이 떨어져 힘이 떨어지는 양상이다. 캐릭터 또한 이 기시감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천박사와 인배의 관계는 셜록과 왓슨 박사의 잔향이 그대로 살아있다. 변주 아닌 변주를 했음에도 그 향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나마 영화가 관객을 멱살 잡고 끌고 가는 건 강동원의 몫이다. 이 배우의 매력은 영화의 모든 단점을 메우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관객들을 주저 앉혀 천마사의 퇴마의식과 복수극을 마주하게 한다. 허준호, 이솜, 이동희, 김종수 등도 각 역할에 최선을 다해 연기를 펼치지만 워낙 스테레오 타입의 캐릭터라는 점에서 매력이 분출될 여지는 좁다. 다만, 특별출연을 한 박정민의 연기는 발군이다.
<천박사>는 명절 대목 가족 단위 관객을 주요 타깃으로 한 기획물로서의 한계를 보여준다. 물론, 이 영화가 킬링 타임용으로 즐길만한 구석이 아예 없는 영화는 아니다. 그럼에도 기대치를 넘지 못하는 기획 영화로서 머물렀다는 아쉬움은 남는다. 마치 멋지게 설경을 만들고, 그 안에 갇힌 듯한 느낌이다. 쿠키 영상을 보면 영화는 시리즈물로서 나아가려는 계획을 가진 듯한데, 기대보다 우려가 더 앞서는 건 필자만은 아닐 것 같다.
사진 제공: CJ ENM
평점: 2.5 / 5.0
한줄평: 무색무취 퇴마굿판!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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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세대의 과오를 거침없이 꼬집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45년 봄,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무렵. 독일 탈영병 ‘하인리히(로베르트 마저)’는 '폰 스탄펠드 중령'(알렉산더 셰어)이 이끄는 나치 친위대(SS)에게 붙잡혀 죽을 위기에 처한다. ‘엘자(마리 하케)’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살아난 그.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엘자의 동생이 SS에 붙잡히고 만다. 이에 하인리히는 엘자와 함께 SS의 뒤를 쫓기 시작하고, 그들은 유대인이 숨긴 금괴를 찾아 헤매는 SS와 지독한 혈전에 휘말린다.
뼈아픈 반성을 비틀어 담다
일본과 과거사 문제가 생길 때마다 소환되는 나라가 있다. 독일이다. 특히 1970년에 빌리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 추념비에서 무릎 꿇고 사죄한 사건은 늘 모범예시로 거론된다. 이처럼 일본도 독일처럼 반성하고 사죄하라는 요구가 끊이지 않는다. 현재 독일 내에서는 나치나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우호 발언도 법적으로 금지됐다. 나치 휘장이나 하켄크로이츠를 공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독일 사례도 한계가 있다. 엄밀히 말해서 독일은 전쟁 범죄를 사죄했을 뿐, 식민 지배를 사죄한 적은 없다.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서구 열강과 크게 다르지 않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일례로 약 7만 5천 명이 죽은 나미비아 학살에 대해서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다. 정부 차원에서 성명을 내기는 했지만, 배상도 하지 않았다. 지원금을 줬을 뿐이다.
피터 쏘워스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블러드 앤 골드>는 이 간극을 담아낸다. 일단 독일인의 죄책감을 잘 보여준다. 얼마나 2차 대전 당시의 만행을 잊고 싶어 하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하지만 뼈를 때리는 지점도 있다. 과연 참회와 반성이 순수한 이유로 이루어졌는지 곱씹어 보게 한다. 그 간극을 풀어내는 방식은 이 액션 코미디 영화를 더 흥미롭게 만든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그림자가 눈과 귀를 사로잡기 때문이다.
탈영병이 되고픈 독일인
<블러드 앤 골드>는 시작과 동시에 하고픈 말을 쏟아낸다. 폴란드, 프랑스, 이탈리아, 러시아 땅까지 밟아본 독일 군인 하인리히는 탈영했다. 아내와 아들은 죽었고, 하나 남은 딸을 만나기 위해서 부대를 떠났다. 폰 스탄펠드 중령은 이 탈영병을 뒤쫓는다. 그를 붙잡아 반역죄 혐의로 교수형에 처한다.
이때 하인리히의 대사는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전쟁을 원한 적이 없다." "억지로 군복을 입혔고 그저 싸웠을 뿐이다." "6년이나 무의미하게 싸웠다." 그는 자유를 쫓는다. 민족을 위해 개인을,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라는 나치즘에 반기를 든다.
탈영병 입에서 나온 말이라 더 의미심장하다. 당시 독일 사람들은 자기 손으로 나치와 히틀러를 뽑았다. 나치는 자국민을 수탈하고 강제로 동원하고, 폭압을 일삼았다. 그들은 나치 때문에 그들은 가족과 재산, 그리고 생명을 잃었다. 그러나 당시에 독일 사람들은 나치에 저항하지 못했다.
하인리히는 다르다. 그는 탈영을 선택했다. 독일 사람들 대다수가 가지 못한 길을 선택했다. 그의 대사가 특히 인상적인 이유다. 영화는 탈영병 입을 빌려 수치스러운 역사를 꺼내 들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나치에게서 벗어나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독일이라는 공동체의 집단적 트라우마를 영화로써 극복하는 셈이다. 근래 독일에서도 극우 정당이 많은 표를 받는 상황을 고려하면 시의적절한 메시지 같다.
현실과 판타지 사이
솔직함이라는 미덕도 하인리히의 대사에 힘을 실어준다. 카메라가 나치 치하 독일 모습을 가감 없이 담았기 때문이다. 폰 스탄펠드 중령이 금을 찾아 도착한 독일 마을이 대표적이다. 이 마을은 작은 독일 같다. 마을 사람들은 나치와 전쟁에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누군가는 이기적인 욕망에 굴복하고, 또 누군가는 소시민적 태도로 일관한다. 영화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독일인 모두가 나치에 부역했다는 사실을 고발한다.
폰 스탄펠드 중령은 악한 독일인을 대표한다. 특히 자기모순과 잘못된 신념에 휩싸인 광기를 잘 그려냈다. 그는 엘자를 보면서 이미 죽은 약혼녀를 떠올린다. 둘이 너무 닮았기 때문에. 엘자와 시간을 보내면서 자기 과거를 이야기한다. 그는 약혼녀를 사랑했지만, 그녀가 유대인이라서 결혼하지 못했다. 대신 그녀를 직접 죽였다. 그가 기괴하게 간직한 반지를 엘자에게 선물하는 장면은 잘못된 신념이 괴물을 낳는다는 말을 실감케 한다.
'리차드 시장'(슈테판 그로스만)과 '소냐'(외르디스 트리베)처럼 선악을 구분하지 못하고 눈앞의 이익에 매몰된 사람도 있다. 시장은 나치 정권에 동조해 유대인들을 내쫓는다. 소냐는 유대인들이 남긴 재산인 황금을 몰래 빼돌려 한몫 챙긴다. 이들은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을 잘 보여준다. 전체주의 체제 밑에서 선악의 경계가 흐려진 사람들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체제에 순응하고 인종학살 같은 범죄에 참가하거나 무감각했던 독일인의 잘못을 과감히 풍자한 대목이기도 하다.
반면에 같은 마을에서 선한 이들은 실제 역사와 다른 일을 이뤄내기도 한다. 성당과 사제가 대표적이다. 2020년에 독일 주교회의는 과거 독일 가톨릭교회가 나치에 협력했다고 인정했다. 실제로 당시 교회 자산과 성당은 군사병원으로 활용됐고, 수녀들은 간호사로 파견됐으며, 사제들은 전선에서 독일군의 영적 지도를 맡았다.
하지만 영화 속 사제는 다르다. 그는 적극적으로 나치에 맞선다. 유대인의 금을 탈취하려는 소냐의 음모를 미연에 차단하는가 하면, 금을 찾아낸 나치 친위대에게 역습을 가하기도 한다. 이처럼 <블러드 앤 골드>는 역사의 가정법을 통해 역사적 과오를 지워내고, 역사를 영화로써 치유하려 노력한다.
피 묻은 금은 어디로 가는가
<블러드 앤 골드>는 한 발 더 나아간다.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도 반추할 기회를 마련한다. 그 중심에는 금이 있다. 결말에서 유대인의 금은 미군 손에 들어간다. 미군은 몰래 금을 빼돌린 소냐의 차를 폭파하고 그녀가 흘린 금괴를 가져간다. 얼핏 보면 이 장면은 역사를 반영한 유머 같다. 나치 독일은 유대인을 탄압했다. 이에 많은 유대인이 미국으로 건너갔고, 다양한 분야에서 미국의 발전과 진보를 도왔다. 아인슈타인처럼.
그런데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작중 금은 유대인의 유산이다. 독일인은 그 금을 탐내다가 자멸했다. 소냐는 자기도 모르게 미군에게 금을 가져다 바쳤다. 그러면 미국은 금의 온당한 주인인가? 아니다. 미군이 금괴를 가로채는 대신, 유대인에게 제대로 돌려주는 것이 합당한 처사라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피 묻은 금이 진짜 피해자에게 돌아가지 않는 한 사죄와 배상은 끝나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작중 금의 행방은 독일의 사죄와 배상에 숨은 국제 역학 관계를 암시한다. 독일은 힘 있는 유대계와 이웃 서방 국가들에게만 선택적으로 사과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러시아)처럼 독일 재통일을 위하여 자세를 낮춰야 하는 대상에게만. 또 폴란드처럼 청산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 주변국에게만. 나미비아 같은 다른 피해자는 잊혔다.
독일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가 과거 식민지 국가에게 배상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강대국들은 아직 피 묻은 금을 돌려주지 않고 챙기기 바쁘다. 국제 사회는 여전히 미국과 유럽 열강이 짜 놓은 판 안에서 돌아가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치의 잘못을 반성하는 독일의 참회는 순수한 의도라고 할 수 있을까? 미군이 최종 승자인 <블러드 앤 골드>의 결말은 '아니오'라고 말하는 듯하다.
타란티노 향기가 난다
<블러드 앤 골드>의 메시지는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를 보는 듯한 길티 플레져 덕분에 강렬해진다. 타란티노 영화는 폭력적이고, 피를 많이 쏟기로 유명하다. 그렇다고 단순히 잔인하지는 않다.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을 희화화하는 데 능하기 때문이다. 잔인한 와중에도 관객들이 웃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특히 벌 받아야 할 대상을 정확히 지정하면서 죄책감이나 동정심을 최소화한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는 히틀러와 나치,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는 악덕 노예주,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는 찰스 맨슨 일당이 그 대상이었다. 이들은 두말할 여지없는 악인이다. 그러다 보니 영화에서 그들이 잔인한 대우를 받을수록 쾌감도 커진다. <블러드 앤 골드>도 마찬가지다. 엘자의 농장에서 성당 종탑에 이르기까지 나치와 기회주의자들이 처절하게 죽을수록 카타르시스는 극대화된다.
예상을 벗어나는 장르의 변주 덕분에 피 튀기는 액션은 더 짜릿하다. 엘자의 농장을 배경으로 한 초반부는 서부극 같아 보인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는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한 평범한 전쟁 영화 같다. 폰 스탄펠드 중령이 정체를 드러내는 장면은 좀비 영화 같기도 하고, 전반적으로는 한 편의 블랙 코미디 같은 인상을 준다.
장르가 계속해서 변주되다 보니 분명한 선악구도도 뻔하게 흐르지는 않는다. 덕분에 긴장을 놓을 수 없기도 하다. 거칠 것 없는 액션과 코미디의 향연 덕분에 무거운 역사적 배경과 주제를 떼 놓고 봐도 매력이 넘친다. 종합하면 <블러드 앤 골드>는 철저히 독일의 시각에서 작은 규모로 그려낸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같아 보인다.
Acceptable 무난함
일관된 재미와 교훈으로 무장한 채 시작부터 끝까지 내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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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망에 사로잡힌 남자의 파국을 담은 영화 나이트메어 앨리
기예르모 델토로 감독의 나이트메어 앨리가 개봉했어요.
항상 괴물이 등장했던 그의 영화에 이번에는 괴물이 등장하지 않는데요.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야기입니다.
한 인간의 욕망이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이 담겼기때문에
보이지 않는 괴물을 담았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참 아름답고 몰입감있는 영화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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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 영화정보
제작사: 20세기 폭스, 마브 스튜디오, 클라우디 프로덕션
배급사: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모션 픽처스,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장르: 액션, 스릴러
감독: 매튜 본
제작: 매튜 본, 데이빗 리드, 애덤 볼링
각본: 매튜 본, 칼 가이듀섹
원안: 매튜 본
출연진: 해리스 디킨슨, 레이프 파인스, 젬마 아터튼, 다니엘 브륄, 자이먼 혼수, 스탠리 투치 외
음악: 헨리 잭맨
개봉일자: 2020년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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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흩어진 밤> 티저 예고편
“그냥 같이 살면 안 돼?”
갑자기 집에 찾아드는 낯선 사람들.
엄마와 함께 공부에 집중하는 오빠.
일주일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아빠.
그리고 원치 않게 떠맡게 된 힘든 선택.
어둠 속에서 흩어지는 마음들을 바라보는 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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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3차 예고편 - 현실 편
“시작은 막차였다”
집으로 가는 막차를 놓친 스물한 살 대학생 ’무기’와 ‘키누’는
첫차를 기다리며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좋아하는 책부터 영화, 신고 있는 신발까지 모든 게 꼭 닮은 두 사람은
수줍은 고백과 함께 연애를 시작하고 매일매일 행복한 시간을 쌓아간다.
“내 인생의 목표는 너와의 현상 유지야!”
하지만 대학 졸업과 함께 취업 준비에 나선 두 사람은 점점 서로에게 소원해지고
꿈과 현실 사이의 거리 만큼 마음의 거리도 멀어지기 시작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