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5-01-16 12:28:23
1월 3주 차, 최신 씨네 뉴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신작, 프랑스에서 촬영한다

현재 일본 영화감독 중 가장 주목받고 있는 감독인 하마구치 류스케의 신작 <Our Apprenticeship>이 프랑스에서 촬영될 예정입니다. 아직 구체적인 줄거리나 출연진에 대한 정보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일본 소녀가 파리에서 공부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프랑스-일본 합작 영화가 될 것으로 보이며, 곧 제작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더불어, 본 작품은 2019년 제작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지만, 2020년 팬데믹으로 폐기되었던 프로젝트를 부활시킨 것이라고 합니다. <Our Apprenticeship>는 하마구치 감독의 첫 비일본/비한국 제작 작품으로, 프랑스인 게이 커플, 시리아인, 벨기에인, 한국인, 일본 여성을 중심으로 한 젊은 출연진이 등장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 <미키 17>,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첫 공개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이 오는 2월에 열리는 제75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첫 공개될 예정입니다. 최근 워너브라더스에 의해 여러 차례 개봉일을 변경한 바 있는 해당 작품은 국내 개봉 2월 28일, 북미 개봉 3월 7일로 개봉 일자를 최종 확정 지었습니다.
한편, 주연 배우인 로버트 패틴슨이 1월 20일에 내한하여 푸티지 상영회, 무대인사 등 만남의 자리를 가질 것으로 알려져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클레어 드니 신작 <The Cry of the Gurads>, 이달 촬영 예정

클레어 드니의 신작 <The Cry of the Gurads>가 1월 세네갈에서 촬영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주연으로 예정되었던 ‘라일리 키오’가 하차하면서 영화 <하우 투 해브 섹스>로 신예로 떠오른 미아 맥케나-브루스가 새롭게 바통을 이어받았습니다.
영화는 세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성을 중심으로 진행되며 <살인마 잭의 집>의 맷 딜런, <죽음은 두렵지 않다>로 클레어 드니와 한 차례 호흡을 맞춘 바 있는 이삭 드 번콜도 함께 출연할 예정입니다.
아스가르 파르하디 감독, 뉴욕에서 차기작 촬영 예정

자파르 파나히와 더불어, 이란 영화계의 거장으로 칭송받는 아스가르파르하디 감독이 올해 뉴욕에서 차기작을 촬영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배경 외에 줄거리나 출연진에 대한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2024년 1월 Le Monde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40년 동안, 이란의 예술가들은 억압과 검열에도 불구하고 매년 창작을 이어왔다. 하지만 지난 1년 동안 특히 영화 제작 부문에서 생산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저 역시 더 이상 같은 조건에서 작업을 이어갈 수 없다."라며 현 정권에 대한 저항으로 당분간 이란에서 영화를 제작하지 않을 것이라 답했습니다.
아스가르 파르하디는 이전에도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각각 두 편의 영화를 촬영한 바 있습니다.( 스페인 <누구나 아는 비밀>, 프랑스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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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속도로로 무작정 달리는 것이 능사가 아니듯
잔인한 세상
고개를 숙인다. 어이구. 감사합니다. 오늘도 가장 기우는 바쁘다. 열일중인 기우. 가장의 책임감은 그런 것이다. 오늘도 사회생활에 여념이 없다. 그런데 이 사회생활은 다른 것과는 좀 다르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제가 장모님 댁에 가는 길인데, 지갑을 잃어버려서요. 혹시 2만 원만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집에 도착하면 바로 이체해 드리겠습니다." 돈을 빌리는 기우. 아니, 사실 기우는 돈을 구걸하고 있다. 지나가는 행인을 유심히 관찰해서 선해 보이는 사람에게 접근하는 것이다. "카카오페이 쓰시죠?"라는 질문은 휴대전화가 안 된다는 말로 넘어간다. 또 "고향이 어디예요?"라고 묻는 질문에는 "마산"이라고 얼렁뚱땅 대답한다. 사기를 칠 거면 똑똑하게 쳐야 한다는 말이 저절로 생각난다. 하지만 기우와 지숙 가족에게 그런 건 없다. 생존은 당장 내일 걸려있는 문제기 때문에. 집도 없고 휴대전화도 없다. 옷은 당연히 없다. 의류수거함에서 아무거나 주워 입을 뿐이다. 당장 받은 2만 원으로 사는 건 컵라면이다. 짜파게티, 신라면, 뭐 그런 것들로 일상을 보내는 기우네 가족. 아내 지숙은 위태로운 일상 속에서 희망 없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눈앞에 있었는데. 영선은 꿈속에서 깨어난 것 같다. "아들! 그 옷 별로야. 엄마가 셔츠 사놨으니까 그거 입고 가." "아냐. 싫어. 나 이거 입고 갈래" "야! 어디가!" 영선은 아들이 떠난 집에서 혼자 앉아 있었다. 분명히 다시 올 것이라고 믿었다. 없구나. 아니었구나.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 해주지 못했던 것이 해준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렇게 막연하게 기다리고 있으면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소리 없이 우는 영선. 아들을 기억할 수 있는 돌산에 올라 먼 곳에 시선을 옮긴다. 눈을 감는다. 떠오르는 건 일 생각뿐이다. 가구점으로 출근하는 영선. 영선은 중고 가구점을 운영하고 있는 CEO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다른 지역으로 원정을 나서는 영선. 한 휴게소에 도착했다. 어딘가에 앉아서 음식을 주문한다. 갑자기 어느 곳에서 따가운 눈빛이 느껴진다. 뭐지? 음식점 출구 유리문 앞에서 아이들이 눈 빠져라 영선을 구경하고 있었다. 뭐지? 아이들의 눈빛에 마음이 가는 영선. 자리를 정리하고 다시 차 문 앞으로 간다. 어떤 남자가 말을 걸었다. 머리는 길었고 수염도 제멋대로다. "선생님! 제가 사실 지갑을 잃어버려서요. 2만 원만 빌려주시면 집 간 다음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남자의 곁에는 아까 봤던 아이들이 있다. "아빠! 우리 배고파.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 아. 쟤들 아무것도 못 먹었구나. 시선이 가는 영선. 남자의 손에 2만 원을 쥐어주고 5만 원까지 줬다. 계좌번호 필요 없어요. 애들 맛있는 거 먹여요. 그렇게 잊고 집으로 가는 차를 탄다. 다음번에 만날 거라고 생각 못 했다. 마음에 담아눴던 응어리를 남자에게 푼 것뿐이니까. 그리고 머지않은 미래에 기우와 지숙 가족, 영선은 다시 만난다. 다시 고개를 드는 희망. 채워지지 않던 마음속 구멍에 조금이라도 닿을 것 같은 인연이다. 이 가족(들)의 행방은 어떻게 될까?
좋은 스타트
일단 영화 초반부가 훌륭했다. 기우가 지나가는 행인 아무나 붙잡는다. 근데 머리카락이 아주 길어서 눈앞을 찌른다. 또 의상도 여름에 입는 린넨 셋업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행인의 리액션을 카메라가 보여준다. '이거 뭐야'하는 눈빛. '빨리 드리고 오자'하는 말투까지. 이 가족의 과거 행적이 영화 후반부에 제시되기는 한다. 그런데 영화는 구구절절이 설명하지 않는다. '왜 알바를 안 구하고 저러고 있지?' '어떤 사연이 있어서 저럴까?'의 질문을 굳이 하지 않아도 깔끔한 설정으로 모든 이해를 구한다. 감독의 캐릭터 이해도가 빛난 부분이다.
또 라미란 배우가 맡은 영선 캐릭터도 적지 않은 분량을 줘야 하는 캐릭터다. 초중반부를 넘어서 극을 이끌어야 하는 인물이니 만큼 이 사람의 동기부여를 보여줘야 한다. 잠깐잠깐의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이 인물의 뒷배경을 보여주는 영화. 이 사람의 회한만큼이나 중요한 건 현재의 부부관계가 어떤가?라는 질문이다. 뻔해 보이지만 사실감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영화의 개성을 부여한다. 이를 위해 라미란 배우가 연기를 엄-청 잘했다. 어떤 산에서 아들을 그리워하며 슬퍼하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라미란 배우는 스크린관을 장악하며 왜 이 사람의 후의 행보가 합리적일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준다. 이 인물 영선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어두운 인물이다. 그동안의 세월 동안 아들을 잃었다는 미안함과 미련을 영화로 보여줄 수는 없을 것이다. 당연하지. 그러면 러닝타임이 한 6개월쯤 될 것이다. 감정적인 깊이가 느껴지는 건 전적으로 이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가 얼마나 이 감정을 드러낼 것인가? 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이 산에서 슬퍼하는 장면, 살짝 어두워 보이는 내면, 중후반부 특정 인물과의 하이라이트 신까지 라미란 배우는 영화의 설득력이라는 굉장히 중요한 과제를 아주 잘 소화했다. 구체적으로 쓰자면, 영화 전체적으로 '굳이..?' 싶은 인물의 행보가 반복된다. 이 부분에 균열이 가면 영화의 전체적인 몰입감이 전부 떨어질 것이다. 이를 먼길로 안 돌아도 각본의 흐름과 연기로 구현한 감독의 똑똑함이 돋보였다.
이 사람이 이 정도였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두 배우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첫 번째는 정일우 배우다. 내 기억 속 정일우 배우는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연기하던 모습이 가장 마지막이다. 이 분이 드라마에서는 굵직한 필모그래피를 유지하며 경력을 이어간 것 같다. 솔직히 윤시윤 배우와 얼굴 헷갈렸다. 그 말은 즉슨 이 배우 얼굴을 오랜만에 봤다는 뜻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느꼈던 점은 앞으로 정일우 배우를 선명하게 기억할 것 같다는 것이다. 정일우 배우는 많은 분들이 좋아할 것 같은 연기를 보여줬다. 이 캐릭터의 특징은 아동학대를 가하는 사기범죄자라는 점과 극에서 보여주는 굉장히 큰 단점이다. 전자의 경우를 생각하면, 이 인물의 사기 행적이 절대 똑똑해서 벌이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그러려면 뭔가 엉성한 행동이나 표정이 돋보여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정일우 배우는 말투 하나하나 나사 빠진 느낌을 보여준다. 그리고 후반부 이 인물의 행보는 이야기 전개에서 핵심 키포인트가 된다. 화려한 연기를 보여주며 이상한 후반부 전개에 기름을 붓는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뭔가 마음에 안 들었던 이야기 전개지만 이 배우의 연기 하나만으로도 조조할인 티켓 값이 충분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 김슬기 배우다. 초반부. 이 배우는 말을 그렇게 많이 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가장 기우가 이끄는 가족이다. 지숙은 수동적인 입장에서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다. 게다가 가장 기우는 '어떤 특징'으로 인해 휘청거린다. 남편이 막 나가는 사기꾼이 되고 아이들이 끼니로 라면을 때워도 싫은 말 하나 안 하는 지숙. 이 지숙의 유약함은 초반부에 천천히 보여주다가 중반부가 되고 나서 특정 계기를 통해 변한다. 이 이후부터 세상의 따뜻한 손길에 감회 되며 안에 품고 있었던 단단한 내면을 세상에게 보여준다. 전반부의 연기를 후반부가 반박하는 듯한 퍼포먼스가 필요했다. 이 김슬기 배우는 중반부 이후부터, 소심하면서도 선한 내면으로 깊은 인간이자 어머니로서의 힘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지숙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중요성은 영화의 메시지와도 관련이 있다. 여기서 인물이 관객과 극 중 다른 캐릭터들을 설득하지 못하면 영화의 몰입감이 떨어질 텐데, 이 배우는 모든 감정적인 비틀기를 설명하는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글쓴이는 하이라이트 신에서 소름 돋았다.
넓고 탁 트인 감옥
영화의 중요한 소재 중 하나인 고속도로는 영화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공간이다. 고속도로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곳이다. 당연히 자유롭다. 그런데 공간이 열려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자유를 느낄 리는 없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기우 가족은 이 범주에 속한다. 사실 이 고속도로 휴게소가 마음에 안 들면 딴 데 가면 그만이다. 차비가 없어도 두 다리가 있으니 걸어갈 수 있다. 그렇게 위치를 자주 바꿀 수 있는 인물들이지만 역설적으로 이 세팅은 인물들에게 갑갑함을 강조한다. '고속도로'에서만 먹고 잘 수 있다는 것이 인물이 처한 입장을 부각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물 내면에 속속들이 박혀있는 심리 묘사가 더 두드러지는 느낌이 든다. 예를 들어 영선이 뭔가를 먹는데 기우의 아이들이 눈이 빠질 것 같이 쳐다본다. 이런 묘사는 이 인물들이 자유롭기 때문에 더 답답한 게 두드러지는 설정이다. 뿐만 아니라 고속도로 휴게실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는 장면이 있다. 또 어떤 장면에는 드넓은 주차장에 텐트 하나 덩그러니 있다. 이런 공간 세팅이 가장 강화되는 부분은 기우 가족이 휴게실 화장실에서 무언가를 하는 장면이다. 이런 고속도로 휴게실이란 설정은 구걸이라는 행동을 묘사하는 선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내면까지 묘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런 공간의 대비는 영선의 가구점으로 치환된다. 영선의 가구점은 당연히 고속도로 휴게실보다 좁다. 또 한 장소에 중고 가구들도 다닥다닥 붙어있으니 뭔가 촘촘해 보인다. 또한 영선의 가구점의 어떤 공간에서 인물들이 굉장히 중요한 행동을 한다. 이 방도 그렇게 넓어 보이지 않는 곳이다. 그럼 당연히 답답해진다. 그러나 영화에서 고속도로 휴게실이 인물의 처지를 옥죄어오던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는 오히려 캐릭터들의 입장을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소재가 된다. 사람들이 어떤 공간에서 무얼 하는지를 보면 인간의 본능적인 부분과도 닿아있다. 이런 좁고 넓음의 아이러니는 영화의 주제적인 측면과도 닿아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혈연만큼이나 정서적인 유대감이 우리가 살면서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두 가족의 대비되는 상황이나 이미지가 계속 반복되는데, 영화에서 이를 빼먹지 않고 본다면 쉽게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닿지 않을까 하는 글쓴이의 생각이다.
그게 왜 거기서 나와
이렇게 좋은 점도 뚜렷한 영화지만 사실 아쉬운 부분이 더 크다. 일단 기우 캐릭터다. 이 기우 캐릭터는 특정 계기를 지점 찍고 1,2부로 나뉘었을 때, 첫 번째 장의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다. 이 1부까지 이어지는 캐릭터 세팅은 좋았다. 겉으로 센 척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대놓고 약한 인물의 대사와 서사로 잘 넘어간다. 중반부가 된다. 이 인물은 캐릭터에게 응당 정해진 섭리를 따라가는 듯하다. 그런데 갑자기 이를 거부한다. 이 거부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방식이 아무리 영화라도 그렇지 좀 너무했다. 핍진성이라는 단어가 있다. 이런 문화예술매체에서, 아무리 가상의 세계라도 수용자가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에 대한 단어다. 이 핍진성이 아예 무너지는 정도였다. 그렇게 인물은 어떤 행동을 여러 장소에서 돌아다니면서 계속한다. 그런데 이를 제지하는 시도 자체가 없다. 영화에서 특정 집단이 무능력하게 묘사되는 건 흔한 클리셰지만 이 정도면 뻔한 정도를 넘어서 단체로 태업하나? 같은 느낌이다. 아니 그렇게 전반부에서 온갖 방식을 보여줬으면서 이런 건 그냥 넘어가면 어떡해?
이 인물의 서사가 영화의 흐름을 깨는 건 후반부에 특히 그렇다. 인물들의 사정이 변하면서 각자 입장을 보여주는 선택을 한다. 여기까지는 굉장히 합리적이다. 또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보면 '그럴 수 있겠다' 싶다. 그렇게 영화가 같은 피만큼 끈끈한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았을 걸 괜히 사족을 붙인다. 영화 형식에서 가장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는 신이 있다. 이 신에서 한 인물이 벌이는 모든 행동이 다 이상하다. 그냥 단지 그 이미지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영화의 모든 이야기를 깔아뭉갠 것이다. 영화 사건의 인과관계도 어긋난다. 동선도 이상하다. 앞에서 썼던 핍진성의 측면에서도 아예 어긋난다. 영화 전개뿐만 아니라 주제적인 측면인 '유대감'이라는 것과도 잘 안 맞는다. 영화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볼 때 여러 답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가지각색으로 갈리는 영화의 역할이지만 분명한 것은 기우라는 캐릭터를 어떻게 설정해야 우리 사회에 더 도움이 될까?라는 부분이다. 글쓴이는 이 글을 쓰면서도 다시 생각해봤다. 이 기우 같은 사람이 우리 현대사회에 있을 때, 과연 이 영화의 방식이 합리적일까?를. 캐릭터를 가학적으로 사용한 것과는 다른 문제다. 정일우 배우의 호연으로 더 두드러지지 않았다 뿐이지 굉장히 과한 시선이 돋보였다.
가족의 의미를 되묻다
이 글을 쓰는 글쓴이나 독자분들이나 가족만큼 소중한 존재가 있을 것이다. 글쓴이도 있다. 오늘 특별한 초대장을 받은 것도 그 영향이다. 나 역시 그런 사람들에게 애정을 갈구하고, 또 그만큼 이 마음들을 베푸려고 한다. 반대 측면에서도 이를 바라볼 수 있다. 가족에게 굉장히 큰 상처를 받게 되면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특정 인물에게 깊은 신뢰를 보내게 된다. '영원한 인간관계는 없다'라는 말은 사실 내적으로 모순을 품고 있다. 그 마저도 영원한 명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관계에 대해 영화는 여러 번 생각하게 만든다. 내가 가진 상처는 무엇인지. 이 상처가 나의 어떤 행동으로 이어질지. 그리고 그 상처가 좀 더 나은 내가 되어 타인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따뜻한 손을 내민다는 것이 이 사회에 어떤 방식으로 작동할지. 약한 사람들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볼지. 영화는 두 가족을 병치시키며 관객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 이에 김슬기, 라미란, 정일우, 백현진 네 배우의 뛰어난 호연으로 사람들을 몰입시킨다. 그러나 이 영화가 새롭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았다. 올해 개봉한 <브로커>에서도 상현, 동수 캐릭터의 인과응보가 철저했고, 소영 캐릭터에 입체감을 부여하면서 유사 가족으로서의 유대감을 묘사한 것이 기억에 선명하다. 이 뿐인가? <매그놀리아>의 OST를 차용해서 용서와 회한에 대해 다룬 것도 영리한 선택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브로커>가 과연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보여줬던 클래스를 볼 수 있는가? 에 대한 의문이 있다. 이상한 연기 디렉팅. 몇몇 지나치게 자극적인 대사들, 막내 동생은 영화에서 하는 일이 무엇인가? 까지 그가 <어느 가족>에서 우리가 봤던 인물 세팅이라고 볼 수 없는 그런 조악함이 영화에서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쓴이는 <브로커>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가학적인 캐릭터 세팅이 아니더라도 영화는 하고자 하는 말을 더 전달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후반부를 들어내도 전체적인 흐름에 어떤 지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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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근대의 질곡, 그리고 근대의 ‘예수’가 된 여자
8★/10★
전근대와 근대 사이의 질곡, 누군가는 이를 끊어내야만 한다. 1838년 독일, 엘렌은 성적 환희에 젖은 표정으로 악마와 교합한다. 이날 이후, 엘렌은 악몽을 꾸고 심신미약에 시달린다. 한편, 엘렌의 남편 토마스는 거액의 부동산 계약을 위해 타지에 있는 올록 백작에게 향한다. 토마스가 떠나자 엘렌의 불안 증세는 점차 심해진다. 의사는 혈액순환에 ‘도움’이 되도록 엘렌에게 코르셋을 입으라 권한다. 발작 증세를 억누르기 위한 결박도 권한다. ‘예민한’ 여성에 대한 근대 의학의 일반적인 처방이었다. 그러나 엘렌의 증세는 악화일로다. 의사는 고민 끝에 한때 촉망받는 의료인이었던 미치광이 연금술사에게 엘렌을 데려간다. ‘현대식’을 표방하는 의사의 자기 패배 선언이다.
한편 엘렌의 고통이 점차 가중되는 동안, 토마스 역시 올록 백작과 만나 진이 빠지는 경험을 한다. 내내 그에게 끌려다니던 토마스는 마침내 올록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깨닫고 도망쳐 나온다. 올록은 그런 토마스를 뒤따른다. 올록은 오랫동안 때를 기다렸다. 엘렌을 비롯한 또 다른 수하가 있는 도시로 향해 자신의 절대적 영향력을 확립할 때를.
올록이 도착하자 도시에는 금세 전염병이 퍼진다. 엘렌의 증세를 처치할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번 패러다임의 충돌이 발생한다. 누군가는 이 전염병을 악마의 영향력이라 진단하고, 누군가는 그런 해석이 말이 되지 않는다며 거부한다. 그리고 이번에도 ‘현대적’이고 ‘합리적’인 해결책은 죽을 쑨다. 전근대에 대한 근대의 연전연패다.
이제 올록이 온 도시를 지배하기 직전이다. 엘렌이 나선다. 그녀는 내내 자신이 더는 올록을 섬기지 않는다는 점을, 이제는 올록이 아닌 남편을 사랑한다는 점을 강조했으나 결국 올록의 강요에 무릎을 꿇는다. 그러나 진심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만이 올록을 전근대의 세계로 완전히 퇴장시켜 봉인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안다. 연금술 대 의학, 악마의 재림 대 전염병. 즉 전근대와 근대의 패러다임 전쟁에서 후자는 번번이 패배했다. 전근대의 질곡으로 표상된 악에 완전히 잡아먹힐 위기다. 그러자 근대적 분류‧인식 체계에서 늘 뒤처져 있다고 모욕당해온 여성인 엘렌이 그 모욕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악마 올록과 성적으로 교합해 해가 떠오르면 올록이 돌아가야만 하는 관을 파괴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번다. ‘마녀(악마에 대한 성욕)’, ‘히스테리(불안하고 신경질적인 여성)’라는 낙인을 기꺼이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악마에게 소멸을 선사해 근대를 온전히 열어젖히는 예수로서 희생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엘렌이 숭고한 희생을 결심하는 결정적 동기가 남편에 대한 사랑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문, 경제적 필요에 얽매이지 않는 두 개인의 사랑이야말로 가장 근대적인 현상이다.
이 영화는 최초로 뱀파이어가 등장한 동명의 영화(〈노스페라투〉(1922))를 리메이크한 것인데, 100여 년이라는 시간이 주는 무게를 넉넉히 견딜 만큼 깊이 있는 상징을 적확하게 활용한다. 클래식한 연출을 동시대적으로 갱신해 몰입감을 유지하는 솜씨도 일품이다. 숨 막히게 몰아붙이거나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공포영화와는 거리가 있지만, 은근하게 장악하여 곱씹게 한다. 이전에 〈라이트하우스〉에서 본, 로버트 에거스가 그려낸 미지의 것에 대한 열망과 공포의 메타포가 더욱 세련되게 발전해 계승되었다는 데에 대한 반가움도 크다. 가히 ‘걸작’이란 평가를 받을 만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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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란 유리 같은 것
유리는 참 기이한 물질이다. 유리 저편을 고스란히 보여주지만 넘어갈 수는 없다는, 통과와 차단의 기능을 동시에 한다. 날아가는 새가 머리를 부딪힐 만큼 투명하면서도, 은칠 한 번에 자신만 비추게 만드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아름답게 빛나지만 깨어지기 쉽다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영화 <노웨어 스페셜>의 주인공 존은 매일 유리를 닦는 일을 업으로 하고 있다. 그는 투명하고도 차가운, 아름답게 빛나지만 깨어지기 쉽다는, 통과와 차단을 동시에 하는 유리의 속성을 매일 접하는 사람이다. 가끔 유리 벽 너머 단란한 가족을 보며 울적해지기도 하는 그는,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서른넷, 선고받기 전에는 누구도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나이. 유일한 가족인 4살 아들에게 새로운 가정을 찾아주려는 여정이 <노웨어 스페셜>의 줄거리다.
영화 도입부에는 세상의 다양한 유리창들이 비친다. 가게 통유리 벽, 유리창 너머 고양이와 눈 마주치는 집, 귀여운 장식물이 놓인 벽돌집의 아기자기한 창까지. 그리고 유일하게 닦여있지 않은 지저분한 유리창 너머, 아주 작고 귀여운 아이 마이클이 아빠 존을 기다리고 있다.
영화를 따라 관객은 존의 사정을 서서히 알게 되는데, 자기 자리에서 육아에 최선을 다하는 좋은 아빠라는 점도 그중 하나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지치고 힘들지만 나름대로 야무진 손끝으로 죄다 곧잘 해낸다. 그러나 그럴 수 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그는 유리창을 닦다 이따금 멍해진다. 유리창 너머 단란해 보이는 가족을 볼 때, 부유하고 편안해 보이는 사람들의 대화를 엿볼 때.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은 생의 시간을, 마이클에게 줄 수 없었던 안락한 가정의 모습을 볼 때면 슬퍼진다.
존이 자기 사후 마이클을 맡길 집을 직접 찾아 나선 것은 아이에게 최선을 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일반적이지 않은 루트다. 보통은 보호자가 없는 아이에게 보호자를 찾아 주지, 보호자가 함께 나서서 새로운 보호자를 찾아주는 경우는 드무니까. 그래서 마치 부동산 매물을 보러 다니듯이, 아이의 남은 생을 덜렁 넘겨야 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입맛을 쓰게 만든다.
존은 최선을 다한다. 일에 육아에 바쁜 와중에도 사회복지사를 대동하고 아이와 함께 새로운 집을 찾아다닌다. 사회복지사들에게도 아이에게 가장 좋은 조건의 집을 찾아주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그들의 '최고'는 규정과 외적 조건으로 이루어진다. 무엇이 최선일까. 정답 없는 질문 앞에서 존은 혼란스럽고 괴로운 여정을 계속한다.
그가 아이에게 주고 싶었던 건 유리창 안의 세계다. 안락하고 평안하고 다정한. 어딘가에서 끊어졌거나 버려졌다는 느낌이 없는. 설령 그 느낌을 위해 자신이 끊어지고 잊힌다 하더라도 그는 받아들일 마음이 있다.
유리창 안을 보며 슬퍼하는 그의 표정은, 아이에게 유리창 안의 세계를 주고 싶어 하는 그의 모습은 그의 삶에 어떤 전제가 깔려 있는지 짐작하게 한다. 그는 자신이 유리창 바깥에 있는 사람이라 믿으며 살았다는 것을.
그러나 영화를 보는 내내, 존과 마이클 사이에 오가는 작은 장면들은 그들 또한 유리창 안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남들의 유리창처럼 깨끗하게 닦여 있지 않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유리창의 존재는 더욱 선명하다. 아이에게는 아빠와 함께 있는 세상이 곧 유리창 안이었다. 병으로 평형감각을 잃어가는 존과 달리 아이는 도로의 실금 위로 곧잘 걸어가듯이, 유독 순하고 귀여운 아이가 유리창 안에서 행복한 매일을 사는 동안 아빠는 이 삶의 끝을 바라보고 있는 것. 그 동상이몽이 신파 하나 없이 이 영화를 슬프게 한다.
두 사람의 집에 놓인 "최고의 아빠" 컵이, 고사리 손으로 아빠에게 덮어주는 담요가, 더러워진 호랑이 잠옷이, 함께 벽에 붙인 그림이, 그런 일상적인 것들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난다.
어쩌면 그것이 상실의 속성인지 모른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나면 남는 자리에서 가장 괴로운 것은 거창하고 원대한 것들보다, 너무 일상적으로 함께 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자잘한 것들의 자리인지도. 그걸 알아버린 우리에게 이 영화의 소품 하나하나가 너무 슬프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삶의 많은 순간에서 경계를 느낀다. 세상은 유리처럼 얼핏 투명해 보이지만, 경계 안팎이 명확히 다른 팍팍한 곳이라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나를 차단하는 것만 같은데 누군가는 그 안에서 웃고 있을 때 느껴지는 박탈감도 있다.
그러나 세상이 그런 곳일지언정 하나하나의 삶은 유리 벽보다 스노볼에 가까울 것이라 믿고 싶다. 그 안에 놓인 것들의 물성과 기억이 따스함을 남긴다는 것을. 존에게는 어렴풋하게 들은 이야기로만 남은 자신의 어린 시절, 자신의 아버지의 기억은, 어쩐지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이 되어 아이 손에 늘 들려 있듯이. 사랑은 그렇게 유리 같은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노웨어 스페셜>은 이중의 여정이다. 아이가 앞으로 살아갈 집을 찾아준다는 시놉시스 상의 여정과 함께, 두 사람이 함께 나눈 사랑이 그저 헛된 것이 아님을 깨닫는 여정. 유리창 바깥을 서성이기만 한 것 같은 생애조차 실은 따스한 스노볼 속의 한 장면이었음을 깨닫는 여정. 가장 추운 날 코끝으로 떨어지는 햇살의 따스함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듯, 가장 가슴 아픈 이별에서 그 사랑은 더욱 선명하게 빛난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대받아 감상하고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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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돈》, 포스터만큼이나 색다른 내용이었으면 참 좋았으련만,,,
영화 《돈》은 정말 볼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던 작품이었다. 류준열도 좋아하고 원진아도 좋아하는데 유지태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에서나 캐릭터가 다 거기서 거기여서 작품 속에서 캐릭터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유지태로만 보여서 영화 집중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류준열의 연기가 보고 싶기도 했고 브로커의 모습을 어떻게 풀어냈는지 궁금해서 보기 시작했지만 그 궁금증은 딱히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영화가 크게 집중이 되지 않을뿐더러 반전도 없고 결말도 뻔해서 안타까웠던 작품이었다.
영화 《돈》 시놉시스
오직 부자가 되고 싶은 꿈을 품고 여의도 증권가에 입성한 신입 주식 브로커 조일현. 빽도 줄도 없는, 수수료 O원의 그는 곧 해고 직전의 처지로 몰린다. 위기의 순간, 베일에 싸인 신화적인 작전 설계자 번호표를 만나게 되고,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거래 참여를 제안 받는다.
위험한 제안을 받아들인 후 순식간에 큰 돈을 벌게 되는 일현. 승승장구하는 일현 앞에 번호표의 뒤를 쫓던 금융감독원의 사냥개 한지철이 나타나 그를 조여오기 시작한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어떠한 캐릭터에도 감정 이입이 되지 않았던
이것이 감독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필자는 딱히 영화 《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에게 감정이입이 전혀 되지 않았다. 악역과 선한역을 맡은 사람들이 존재하는데 어떤 이에게도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류준열이 맡은 조일현이 점점 돈을 잘 벌지만 불안함에 휩싸이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껴야 하는데 왜 저럴까...? 이런 감정이 먼저 들고, 유지태 악행에 대해서도 막 욕을 하고 싶어진다기 보다는 아니 왜 저러는거지...? 한지철이 이 둘을 쫓는 과정에서도 굳이 저렇게까지?? 하는 의문만 들었을 뿐이다.
캐릭터의 개연성 설명이 부족하고 사건들만 계속해서 터지다 보니 관객은 그 개연성을 영화 자체가 아니라 기존의 영화들에서 이뤄졌던 영화 문법 속에서 그 해답을 찾다보디 영화가 그저 형식적이고 따분하게만 다가왔던 것 같다.
옷에서 눈물이 뚝뚝
마음에 들었던 장면이 하나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눈에 딱 들어온 장면이 하나 있었다. 바로 조일현이 물에 젖은 수트를 다시 입고 나오며 물이 뚝뚝 떨어지는 장면이었다. 번호표에게서 받은 모멸감과 자신이 이제까지 한 행위에 대한 반성 그리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분노 등 다양한 감정이 섞여 흐르는 눈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물에 젖은 슈트를 통해 물이 흐르는 장면으로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 지점에서 순간적으로 비밀의 숲이 생각났다. 비밀의 숲에서 황시목 검사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검사로서 눈물을 흘리지 못하지만 손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통해 황시목 검사의 슬픔을 표현한 장면이 있었다. 그 부분과 겹쳐보이면서 굉장히 감각적인 연출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아이폰의 비밀을 알면 안되는 것이었다
영화 《돈》의 결말과 캐릭터의 특징을 바로 알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아이폰 때문이었다. 어느날 인스타에서 아이폰 협찬 조건이 악역은 아이폰을 쓰지 못한다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극 중에서 조일현이 중간중간 나쁜 짓을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악인이 아니라는 것을 아이폰을 통해 알고 영화를 보다보니 이미 스포를 당한 채로 본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 사소한 것이 흥미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어떤 캐릭터가 아이폰을 쓰느갈ㄹ 보다보니 이미 캐릭터의 선악 구조를 파악한 채로 영화를 보게 돼서 그런 것이었을까?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면서 이 캐릭터는 어떤 인물인지 고민을 하지 않고 보게 돼서 재미가 없었다.
중간중간 인상적인 장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굳이 찾아볼만큼의 영화는 아니었던 영화 《돈》. 배우의 찐팬이 아니라면 굳이 추천하지 않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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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를 살기 위해 오늘을 죽이는 사람들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플랜 75(Plan 75), 2022
일본 / 드라마 / 113분
감독: 하야카와 치에
미래를 살기 위해 오늘을 죽이는 사람들, <플랜 75>
75세 이상 고령자에게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지원하는 제도, ‘플랜 75’가 국회를 통과한다. “심각해지는 고령화 문제를 대처할 방안”이란 일본 정부의 덧붙임은 “넘쳐나는 노인이 청년의 앞길을 막고 있다”며 총으로 노인들을 죽이고 자살한 한 청년의 유언과 노인들에게 오랫동안 은밀히 분노의 손가락질을 겨눴던 사람들의 속마음이 합일되어 파생된 결과다. 플랜 75는 정부의 단독 결정이 아닌 국민 과반수의 직접적이면서도 암묵적인 동의로 탄생했다. 나의 죽음을 나보다 제삼자가 먼저 논의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인데, 이보다 더 소름 끼치는 건, 플랜 75를 전례 없는 문제 해결의 묘수로 믿는 과반수 안에 고령자가 적잖게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플랜 75는 간편하다. 가족의 동의나 건강진단 결과가 신청자의 발목을 잡지 않는다. 죽음 이후의 과정도 일사천리로 평범하게 진행된다. 신청자의 조건은 딱 하나, 자기 의사에 의한 결정(신청)이다. 신청 후엔 다양한 정부 서비스가 제공된다. 준비금 10만 엔을 받는데,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세세하고 단호한 필수조건들이 적용되지 않는다. 정부 감시 없이 신청자 마음대로 쓸 수 있다. 신청자를 위한 맞춤 콜센터도 운영된다. 심리상담소 역할을 하는 콜센터는 신청자의 마지막 날 전까지 함께 한다. 또한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신청을 취소할 수 있다. 신청과 신청을 취소하는 일 모두 본인의 자유다. 이미 죽을 날짜를 받은 한 할머니는 플랜 75 홍보 방송에 나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 선택할 수 없었지만, 죽을 때만큼은 선택할 수 있다. 나는 그 점이 좋았다”라고. 플랜 75는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미래를 지키기 위한 (저물어 가는) 세대의 숭고한 결정이란 순풍을 타고, 신청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출처: 영화 <플랜 75> 스틸컷(다음)
어떤 일이든 직접 경험해봐야만 그 일을 명확히 판단할 수 있다. 여기서 판단은 결정, 선택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도 판단하고 선택하려면, 플랜 75 안에 들어가 보는 수밖에 없다. 플랜 75를 샅샅이 해부하고, 이를 투명하게 전시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영화 속 인물들처럼 말이다. 서비스 대상자 ‘78세 미치’와 75세 이상 고령자들에게 신청받는 ‘시청 직원 히로무’, 신청자와 마지막까지 함께하는 ‘콜센터 직원 요코’ 그리고 죽은 자의 유품을 처리하는 ‘이주노동자 마리아’. 이들은 플랜 75의 뼈대가 드러난 설계도를 세상에 속 시원하게 내보인다. 그것이 자의였는지, 타의였는지는 중요치 않다. <플랜 75>에서 유일하게 강제 적용된 조치였다는 것만 알아두자.
플랜 75에 대해 고령자들의 의견은 다양하다. 인터뷰한 할머니처럼 긍정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격렬하게 부정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거리를 두고 일상을 사는 데만 집중하는 자가 있다. 78세 미치는 맨 마지막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호텔 객실 청소일을 하며 살고 있다. 미치는 삶을 긍정한다. 몇 장면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창문을 열고 떠오르는 해를 고스란히 마주하는 모습과 낙상사고를 당한 친구(이네코)로 인해 호텔에서 잘리고 모든 동료가 불만을 터트리며 떠날 때 홀로 개인 사물함 앞에 서서 정중히 감사 인사를 표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가족 없이 혼자 사는 삶이지만, 외로움도 충분히 안정적으로 소화하며 지내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꿋꿋하게 구직 활동에 힘쓴다. ‘일’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이 아니라 일상을 지키는 생존 수단이었다. 그러나 결국, 미치 또한 플랜 75에 가입한다. 마음을 나누던 친구(이네코)의 고독사를 직접 접한 탓이고, 집이 철거될 예정인데 구직 활동을 번번이 실패하는 이유가 고령이었기 때문이며, 결정적으로 굶주린 자신에게 시청 직원 히로무가 무료 급식(플랜 75 홍보 목적)을 건넨 탓이다. 미치는 과반수가 찬양하는 순리대로 준비금을 받고, 콜센터 직원(요코)을 배정받는다. 과반수 안에 포함된 미치를 통해, 일반화할 순 없지만 그들이 왜 자기 생을 내놓는 것에 동의했는지 엿볼 수 있는 지점이다.
출처: 영화 <플랜 75> 스틸컷(다음)
노숙자들에게 무료 급식을 제공하고 상담을 통해 직접 신청서를 받는 일 말고 직원 히로무에게 주어진, 특별한 다른 일은 없었다. 수천 장의 신청서를 받으면서 단 한 번도 신청서에 적히지 않은 그들의 삶의 이력을 궁금해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연락이 끊겼던 삼촌이 그의 앞에 앉아 상담도 없이 신청서를 불쑥 내민 순간 히로무의 가슴은 요동친다. 삼촌은 과거 건설업자였다. 전국을 다니며 터널과 댐을 만들었고, 시간이 날 때마다 헌혈을 했다. 길거리 청소를 하는 지금도 그에게 헌혈은 일과였다. 히로무는 뭔가가 단단히 잘못된 느낌을 받는다. 다량의 헌혈증은 그가 나이와 상관없이 국가를 위해 일했고, 여전히 일하고 있으며 모두를 위해 행동하는 국민, 한 사람임을 의미했다. 따라서 헌혈증이 쓰레기통에 버려져도 삼촌의 업적과 흔적은 세상에 고스란히 남을 게 분명했다. 그는 범법자도 악인도 아닌 평범한 본인과 같은 인간이니까. 그것은 관심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히로무는 플랜 75의 끝을 몰랐다.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자의 죽음이 무엇을 남기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가 아는 것이라곤 플랜 75의 신청 조건뿐이었다. 히로무는 광고판에 날아드는 토마토를 맞으며, 산업 폐기물을 처리하는 회사가 플랜 75의 유골을 취급한다는 사실을 마주하며 이루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기시감에 휩싸인다.
아픈 딸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시급이 센 유품정리사로 일하기 전, 이주노동자 마리아의 직업은 요양보호사였다. 과거엔 살아있는 노인들을 따뜻한 눈과 마음으로 보살폈으나 지금은 죽은 노인들의 옷을 벗기고 유류품을 수거하기 바쁘다. 현금이나 고급 시계 같은 것들을 자기 주머니에 넣으며 어차피 죽은 사람에겐 필요 없으니 이렇게 그들을 기억하자고 우기는 동료를 따라, 마리아 역시 떠난 자들의 것을 훔친다. 그리곤 어찌 됐든 본인은 ‘노인’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고 열심히 합리화한다.
콜센터 직원 요코도 별반 다르지 않다. 지정 좌석에 앉아 신청자 한 명당 15분 동안 감정은 배제하고 열심히 입만 움직인다. 지나친 감정적 대처와 신청자 대면 금지만 지키면 편하게 일할 수 있는 직업이다. 하지만 미치와의 통화를 특별하게 느낀 요코는 만나고 싶다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준다. 그리고 미치의 한결같은 삶의 태도를 대면한 순간, 동요한다. 긴 대화를 나눠주어 고맙고 잘 지내라는, 오직 미치만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인사엔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플랜 75의 보이지 않던 장막이 손끝에 닿는 순간이다.
출처: 영화 <플랜 75> 스틸컷(다음)
커튼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병실 침대에 눕는 히로무 삼촌과 미치. 담당 직원은 간호사 복장과 유사한 옷을 입고 두 사람에게 울렁증을 막아주는 약을 건넨다. 친절함도, 냉정함도 아닌 도통 모르겠는 직원의 미소가 미치가 보는 마지막 장면이 될 참이었다. 서서히 온몸에 힘이 빠지며 눈이 감기는 미치, 그 순간 커튼 사이로 히로무 삼촌과 눈이 마주친다. 또렷했던 그의 눈동자가 점점 흐릿해지더니 이내 툭 아래로 떨어지자, 미치는 극한의 두려움에 호흡기를 떼어내고 몸을 벌떡 일으킨다. 한발 늦게 온 히로무는 온기가 느껴지는, 그러나 더는 숨을 쉬지 않는 삼촌을 마주한다. 미치가 죽은 자들에게서 벗어날 때 히로무는 마리아의 도움으로 삼촌 시신을 빼돌린다. 마리아 또한 더는 견딜 수 없음을 깨닫고, 도망치듯 자전거를 타고 그곳을 빠져나온다.
플랜 75는 완벽한 통제와 촘촘한 계획, 그리하여 대부분 만족하는 결과를 끌어냈다. 청년들의 일자리는 늘어났고 고령화로 인한 사건·사고도 줄었다. 정부가 신청 조건을 65세로 낮추는 방안을 추가로 내놓을 정도니, 플랜 75는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영화는 처음부터 플랜 75가 잘못된 방식임을 노골적으로 노출했다. 자발적이며 비강제적이고, 자유로우며 신청자를 향한 따뜻한 지원들로 채워진 플랜 75는 묘수가 아닌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킬 악수란 사실을 말이다. <플랜 75>는 단순히 영화의 집중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청년의 유언을 총소리 전에 흘린 것이 아니다. 그의 자살로 인해 시작된 플랜 75가 결국 다시 우리에게 총을 겨눌 것임을 미리 경고한 것이다.
출처: 영화 <플랜 75> 스틸컷(다음)
인간은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계속 살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상황을 만든다. 그리고 그 상황을 지배한다. 동시에 앞선 목적과 같은 이유로 본인들이 만든 상황에 지배당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플랜 75는 인간의 나약함에서 탄생한 집단적 합리화가 계속 연장되었기에 흥행에 성공했다. 신청서를 받던 히로무에서 요코를 거쳐 유품을 정리하는 마리아까지, 그 누구도 75세가 기준이 된 이유와 왜 이들만 죽어야 하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본인들이 내는 세금으로 지급되는 준비금에 조건이 왜 붙지 않는지, 콜센터는 왜 대면은 금지하고 전화 서비스만 진행하는지, 진짜 이유를 다 알고 있으면서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돌리기를 하면서, 정작 폭탄을 미치와 같은 이들에게 넘겨버렸다. 끝까지 모르는 척하며 미치와 같은 이들을 플랜 75에 마구잡이로 집어넣었다. 과반수가 찬성했다는 명분을 앞세워 모두를 위한 결정이라 자위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자발적으로 지배당하길 선택했다. 그러나 아무리 부정해도 삼촌의 미래는 히로무의 미래였고, 미치의 뜀박질은 요코와 마리아가 이어받게 될 게 분명했다.
해서 영화는 타인의 일이 나의 일이 되는 순간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미치는 물론이고 세 청년, 이들을 훔쳐보는 관객까지 벼랑 끝으로 몰아붙였다. 마치 우리가 인류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라도 되듯 고집스럽게 장막을 둘러싼 거짓과 폭력을 응시하게 했다. 플랜 75의 균열을 대놓고 보여주며 인간이, 인간을 위해 직접 설계한 집단 살인 계획을 어긋나게 했다. 죽음의 장소에서 벗어난 미치가 다시 떠오르는 해를 마주하며 미소 짓는 순간이었고 어둡기만 했던 관객의 얼굴에도 빛이 스며든 때였다. 마침내 플랜 75의 장막이 내부에서 걷힌 것이다.
출처: 영화 <플랜 75> 스틸컷(다음)
<플랜 75>는 관객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면서도 희망이 깃든 안도를 전달한다. ‘3의 법칙’이 관객에게 제대로 작용했기에 가능했다. 숫자 3은 사회 심리학 측면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개인에서 집단으로 전환되는 기준점으로 세 명 이상이 되는 순간 개인들의 힘은 집단의 힘이 되어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친다. 감독은 처음부터 이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들고 확실하게 이용했다. 나약한 인간들의 움직임(플랜 75)이 아니라, 진짜 악수를 진짜 묘수로 바꾸는 방법에 더 집중했다. 그 방법을 행하는 자가 나약한 인간인 동시에 충분히 스스로 깨닫고 변할 수 있는 인간들임을 강조했다. 플랜 75의 탄생이 자연스럽게 이뤄진 것처럼, 소멸도 얼마든지 실행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오직 인간(나)만이 용기를 내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음을, 히로무와 요코, 마리아 그리고 미치를 통해 전달했다. 결국 우리의 현재를 바꾸고 미래를 지킬 수 있는 건, 당사자인 우리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구도 도망치거나 외면할 수 없는 시대에서, 유일한 강제조치가 유일한 해결책이 된 이때 영화는 묻는다, 우린 대체 어떤 인간인지, 어떤 집단에 속해있으며 어떤 개인으로 살고 있는지.
아, 미래를 위해 오늘을 죽이는 인간들의 끝은 굳이 묻지 않기로 하자. 답은 ‘히로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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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블패티 / double patty, 2020
최근 "넷플릭스"가 국내 콘텐츠에 5,500억원을 투자할 계획을 발표하면서, 향후 "디즈니 플러스", "HBO 맥스"와 같은 국내 론칭을 앞둔 플랫폼 경쟁에 밀리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는데요.
그런 점에서 국내 플랫폼들의 움직임은 어떨까요?
"티빙"은 작년 12월에 개봉하려던 <서복>을 오리지널 작품으로 가져오며 <사냥의 시간>, <승리호>가 겹칠 만큼 "넷플릭스"를 떠오르게 만들더군요.
근데, 'Seezn'은 전작 <큰엄마의 미친봉고>에 이어 다른 단독 콘텐츠를 선보이는 우직한 행보를 보여주었습니다.
허나 영화 <더블패티>는 공개도 하기에 앞서 많은 이들에게 영화 외적으로 주목을 받은 영화입니다.
"코로나19"로 극장 개봉에 위태로운 마당에 주연 배우의 "갑질 논란"에 휩싸이며, 정말 위태로웠거든요.
그렇게, 공개된 영화 <더블패티>는 13,643명(03.07 기준)으로 일반 영화와 비교하면 인상적인 반응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전 리뷰에서도 올렸듯이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영화 가운데 <프롬>만 2만명에 그친 것을 생각하면, "OTT 플랫폼"은 '극장 상영보다 얼마나, 온라인에서 언급되는지?'를 봐야 하는데요.
부정적인 소식이지만, 어찌 되었든 이미 화제의 중심인 <더블패티>는 영화적으로 재밌었는지? - 감상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각자가 원하는 것은 있지만, 씨름 유망주 "강우람"과 아나운서 준비생 "현지"에게 이마저도 힘들기만 합니다.
그런 와중에 만난 이들은 서로의 힘이 되어주길 약속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앞으로 나가는데...
1. 배우들과 비교하려 든다면...
전작 <큰엄마의 미친봉고>는 제목으로 관객들의 관심을 이끌었다면, 이번 <더블패티>는 그에 비해 주목이 덜 가는 제목입니다.
그러나 이를 보려는 이유에는 "레드벨벳"의 "아이린"분이 나온다는 이유도 있을 겁니다.
이미, 가수로 익숙한 그녀가 연기에 도전한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이들의 관심을 이끌기에는 충분하니까요.
근데, 한 편으로는 이런 문제도 지적될 겁니다.
"과연, 연기는 잘하기는 할까?"라는 계속해 지적된 "아이돌 배우"의 출연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 말이죠.
괜찮은가?
일단, "아이린"분이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웹드라마 <게임회사 여직원들>으로 이미, 경력이 있으니 방구석에서 이렇게 써 내려가는 저보다는 훨씬 나은데요.
근데, 다른 배우들과 비교하여 본다면 아쉬운 점들이 나타납니다.
상대역으로 나오는 "강우람"역의 "신승호"분과 비교하면 미세한 표정 변화나 뭉개지는 일부 발음이나 발성도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특히, 이런 문제는 마지막에 앵커로 나오는 "정영주"과의 현장 보도에서 비교되더군요.
이에 대해 지적하는 건, 그녀가 이번 영화에서 맡은 역할이 "아나운서 지망생"이기에 더더욱 아쉬움이 남는 장면으로 기억됩니다.
2. 왜, 내리시는 거죠?
정식적인 후속작은 아니지만, 영화 <더블패티>는 <큰엄마의 미친봉고>을 연출한 "백승환"감독의 신작입니다.
이는 즉슨, <큰엄마의 미친봉고>에서 지적된 문제들이 이번 영화 <더블패티>에서도 고스란히 지적된다는 이야기인데요.
먼저, 이야기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자면 앞서 말했듯이 <더블패티>는 각자의 위치에서 지친 두 남녀가 서로의 힘이 되어주는 게 이야기입니다.
근데, 이 이야기에 투입되는 캐릭터들은 넘치고 개연성은 주먹구구이기에 바쁩니다.
이 정도 배우를 이렇게 밖에...
첫번째, 캐릭터의 씀씀이가 너무 헤픕니다.
전작 <큰엄마의 미친봉고>에서도 메인 플롯으로 진출하지 못한 캐릭터들이 많았던 것처럼 이번 <더블패티>에서도 똑같이 반복됩니다.
갑작스레, 술집에 "성적 소수자"가 있지 않나 잘해줄 것만 같았던 사장님도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만 같은데 영화는 이를 "운동하는 얘가 엉뚱한 곳으로 힘쓰면 안 된다"라는 말로 무마시키며, 이들을 퇴장시킵니다. (여기서, 성적 소수자로 나오는데 "조달환"분인데도...)
여기에 각자 라이벌로 등장하는 캐릭터들도 뚜렷한 이야기가 없어 이들이 보여주는 "희열감"도 전무합니다.
3. 말랐다는 할머님의 말씀, 걸러들으세요.
두번째는 앞서 말한 캐릭터의 설명과 연결된 이야기의 연결입니다.
앞서 말한 술집 사장님의 이야기나 각자 라이벌로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소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은 이야기에도 고스란히 영향이 미칩니다.
특히, "씨름"을 내세운 이유에는 마지막에 보여주는 "뒤집기"장면으로 보입니다.
마치, 위기에 직면한 자신의 상황을 뒤집으려는 것처럼 많고 많은 기술들 중 하나 "뒤집기"를 보여주는 건 이런 의도 때문이겠죠.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캐릭터의 소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그냥 엄한데 화 푸는 것으로밖에 안 보이거든요.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들 겁니다.
영화 <더블패티>는 분량이 107분으로 결코, 적은 분량을 가진 영화가 아닌데도 '설명할 시간에 왜 설명을 못했는지?'에 대해 말이죠.
아무리, 먹는 게 남는다고 하지만...
영화 <더블패티>는 이들은 힘든 상황에 처했습니다.
보통 이야기에서 이런 이들이 행할 행동에는 먹는 것으로 보여주는 것이 주된 메타포이고 "클리셰"입니다.
세세하게 말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말해 이들에게 동일감을 주어 관객들의 흥미를 이끄는 것이 더 좋은 것이죠.
그런 점에서 <더블패티>는 관객들에게 자신의 의도한 바를 신비롭게 보여주는 것인데, 여기서 재밌는 건 하나의 차이가 있습니다.
극 중 이들이 무언가를 먹을 때마다 술이 올라오는데, 이는 이들의 고된 삶을 강조합니다.
취해야만 이들의 본심이 담긴 말이 나오는 것처럼 맨정신으로 살아가기에 어렵다는 것을 더 보여주는 것이죠.
근데, 문제는 이게 과하다는 것입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먹으려 하니 정작 하고픈 말이 있어도 음식으로 밀어 넣고 있거든요.
4. 거, 지방방송 좀 꺼라!
과하다는 기준이 저마다 다르겠지만, 영화 <더블패티>는 이런 장면을 시작 1시간까지 반복합니다.
달라지는 건 메뉴뿐이니 의미 없는 동어반복과 친절의 과잉으로 받아들어질 만큼 설명을 하니 관객들로써는 피로감이 쌓일 겁니다.
그렇기에 앞선 전개와 후반 전개에서 느껴지는 속도는 정반대로 다른데요.
앞서 먹는 장면만 나오는 전개에서는 지지부진했다면, 후반 전개는 빠르게 느껴질 겁니다.
이쯤만 하면, 후반 전개가 이를 상쇄할 만큼 좋겠구나 싶겠으나 앞서 언급한 필요한 설명들이 빠져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마치, 만두에 속 재료를 안 넣은 것처럼 밍밍하기 그지없습니다.
음향을 이렇게 넣어야만 하나?
이런 요소들로 온전히, 영화에 집중하기도 힘든데 영화 <더블패티>의 가장 큰 문제는 음향입니다.
노래가 좋다는 것은 알겠지만, 이를 뜬금없는 구간에서 나와 관객들이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는데요.
가령, 극 중 "우람"이 클럽에서 사람들을 관리하는 장면에서 특수 효과음이 그러하니 아쉬움이 이만저만이 아닌 영화입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확실하고 좋습니다.
앞에서 말한 "뒤집기"처럼 "현지"가 "아나운서"를 하고 싶어 하는 것에는 정해진 대본이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소리를 내고 싶다는 것이겠죠.
그런 점에서 메시지는 확실하고 쉬운데, 이를 전달하려는 편집은 이 영화의 운명을 쉽게 잊히게 만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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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돌구름 #완다비전 #마블예고편 #이스터에그
"마블쟁이는 산돌구름에게 폰트를 지원 받았습니다"*영상 타임라인*
00:00 인트로
00:45 신문 속 이름, 존
01:14 half sitcom, half MCU spectacular
02:18 하우스오브엠
03:20 쌍둥이, 위칸과 스피드
04:09 할로윈 코스튬
04:40 애거사 하크니스
06:18 멀티버스와 완다
08:02 아웃트로2020. 09. 23 영상입니다.
마블쟁이 인스타그램: @marvel_jeng2
마블쟁이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arveleroffi...* 영상에 사용된 모든 음악은 Epidemicsound 의 정식 라이센스 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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