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2-12-12 16:41:31
12월 3주 차, 최신 씨네 뉴스
안녕하세요.
영화/ OTT 전문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최근 국내외 영화 / OTT계에 어떤 소식이 있었는지 정리하는
최신 씨네 뉴스 타임이 찾아왔습니다!~!
그럼, 최근에 어떤 이슈가 있었는지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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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교섭>, 1월 18일 개봉 확정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리틀 포레스트> 임순례 감독의 신작이자 황정민과 현빈의 첫 동반 주연 영화 <교섭>이
2023년 1월 18일 개봉을 확정했다. <교섭>은 최악의 피랍사건으로 탈레반의 인질이
된 한국인들을 구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한 외교관과 현지 국정원 요원의 교섭
작전을 그린 영화이다.
전종서, <웨딩 임파서블> 긍정 검토 중
ⓒ 네이버 영화
<웨딩임파서블>은 동성애자인 재벌 후계자와 위장 결혼을 준비 중인 무명 여배우, 그리고 그 꼴을
두 눈 뜨고 볼 수 없는 야망덩어리 예비 시동생이 만나며 벌어지는 욕망 충돌 결혼 반대 로맨스를
그린 드라마이다. 전종서 배우는 극중 무명의 단역 배우 오다정을 연기한다.
<이두나!>, 수지·양세종 출연 확정
ⓒ 매니지먼트 숲, 블러썸 엔터테인먼트
넷플릭스에서 시리즈 <이두나!> 제작 더불어 배우 수지와 양세종의 출연을 공식화하였다. 넷플릭스
시리즈 <이두나!>는 평범한 대학생 원준이 셰어하우스에서 화려한 K-POP 아이돌 시절을 뒤로하고
은퇴한 두나를 만나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로맨스 드라마다. 동명의 원작 네이버 웹툰을
원작으로 한다.
해외
<퀸카로 살아남는 법>, 뮤지컬 영화로 제작
ⓒ 네이버 영화
하이틴 영화의 대표작 <퀸카로 살아남는 법>이 뮤지컬 영화로 새롭게 제작된다고 한다. 영화에는
앵거리 라이스, 아울리이 크라발리오, 르네 랩, 자켈 스피베이를 비롯한 배우진들이 참여한다.
테일러 스위프트, 장편 영화 감독 데뷔 예정
ⓒ 네이버 영화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가 영화사 서치라이트픽처스와 함께 장편 영화를 제작할 예정이라고 한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지난 11월, 자신의 노래 'All Too Well(10 Minute Version)'을 배경으로
단편 영화 <All Too Well: The Short Film>을 직접 집필 및 감독하며 인기를 끌었다.
씨네랩 에디터 Hizy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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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소년과 초여름을 기다리는 어느 소녀의 이야기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스프링 블라썸> 시사회를 관람한 후 작성한 리뷰글입니다.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
<스프링 블라썸>은 수수한 블라우스를 입고 광장을 배회하며 한 소년과 초여름을 기다리는 '수잔'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프랑스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랑에 빠진 수잔을 바라보다보면 어느덧 그녀의 마음에 동요되어 몽글몽글해진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수잔(수잔 랭동)'은 학교와 또래 친구들에게 재미를 못 느끼고 하루하루가 지루하다는 생각을 하는 16살의 여자다.
거리와 광장을 배회하던 수잔은 우연히 한 극장 앞에서 '라파엘(아르노 발로아)'을 발견한다.
라파엘에게 첫 눈에 반한 수잔은 그가 연극배우라는 것을 알아챘고, 자꾸 그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다.
수잔은 극장에 몰래 들어가서 그가 연극 연습을 하는 장면을 지켜보기도 하고, 부모님께 대뜸 연극 보러 갈 생각은 없냐고 질문하기도 한다.
그리고 라파엘이 빵에 딸기잼을 발라먹는 모습을 본 뒤 집에 돌아와서 엄마께 빵에 딸기잼을 발라달라고 하기도 한다.
어느 날은 고장난 스쿠터를 고치고 있는 라파엘의 모습을 발견하고 집에 돌아와 아빠께 고장난 스쿠터는 고칠 때 오래 걸리냐, 와 같은 질문도 한다.
또한, 아빠께 남자들은 치마 입은 것을 좋아하냐, 바지 입은 것을 좋아하냐, 라는 질문을 던진 뒤 아빠가 치마라고 대답하니까 바로 치마를 입고 라파엘을 만나러 가기도 한다.
항상 모든 시선은 그를 향해 있고, 부모님께 대뜸 그와 관련된 질문을 던지고, 하지만 자세한 상황은 얼버무리고, 그가 하는 행동을 그대로 따라해보고.
모두 내가 한 번쯤은 겪어본 행동들이어서 수잔을 보며 그저 웃음이 났다.
그리고 수잔의 마음에 100% 공감이 되었다.
수잔의 서툴지만 또렷한 행동에서 그녀의 순수한 마음이 비춰져서 그 모습이 너무 예뻐 보였다.
한편, 라파엘은 같은 연극을 계속 반복해서 하면서 점점 연기에 재미를 잃어가던 35살의 남자다.
그리고 연기하는 것을 잊어버릴까봐 항상 걱정하는 사람이다.
라파엘 역시 수잔에게 끌렸다. 그녀에게 호감을 가졌다.
어느 날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 라파엘에게 수잔이 책을 들고 다가왔다.
그런 수잔을 보고 라파엘은 책을 좋아하냐, 등의 질문을 던지면서 먼저 말을 건넨다.
이때 수잔은 소설을 주로 읽지만 극작품도 좋아한다는 답을 한다.
극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함으로써 연극배우인 라파엘과의 공통점을 형성하려는 수잔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지만, 한편으로는 좋아하던 사람과 닮은 점이 많다는 사실을 어필하고 싶어하던 예전의 내 모습이 비춰져서 조금은 부끄러워졌다. 이 순간만큼은 정말 어딘가로 숨고 싶었다.
이후 라파엘은 수잔이 시킨 석류 레모네이드를 맛보더니 자신도 같은 음료를 하나 주문한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함께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라파엘은 스쿠터를 가지고 수잔의 집에 왔다.
하지만 수잔은 아직 미성년자여서 부모님이 스쿠터를 못 타게 하시기 때문에 결국 라파엘은 이 스쿠터를 힘겹게 끌면서 다녔다.
이 영화는 이렇게 소소한 웃음포인트가 곳곳에 가득한 작품이다.
이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가졌다.
특히나 수잔은 남자에게 큰 호감을 가졌지만, 35와 16이라는 큰 나이차라는 현실의 벽을 깨닫게 되었다.
이 감정이 북받칠 정도로 커진 어느 날, 수잔은 펑펑 울면서 엄마께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는다.
너무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고, 그런데 그 남자와의 나이차가 너무 크다고.
엄마는 딸을 안아주며 조용히 그녀를 위로해준다.
이 장면을 보자마자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마지막 즈음의 엘리오와 엄마의 장면이 떠올랐다.
첫사랑과 현실을 마주하고 처음으로 느껴보는 북받치는 감정들로 인해 펑펑 우는 아들을 조용히 위로해주는 엄마.
자식의 서툴지만 진심이었던 감정을 이해하고, 조용히 토닥여주는 엄마.
시간이 지난 뒤, 수잔의 뜨거운 감정과 짝사랑은 점점 식어갔다.
날 것 그대로였던 감정은 점점 그 뚜렷한 형태를 잃어갔다.
라파엘을 사랑하는 수잔의 감정은 자연스레 사그라들었고, 영화의 마지막, 항상 그의 근처를 배회하던 그녀는 그의 극장을 그저 바라본 뒤 자신의 길을 떠났다.
그런 영화가 있다.
독특한 전개나 색다른 내용이 담긴 것은 아니지만, 영화가 지닌 분위기 자체만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그런 작품.
이 영화가 바로 그렇다.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영화가 지닌 분위기만으로 관객을 홀리고, 관객을 설레게 하고, 살풋 웃음이 나오게 만든다.
또한, 러닝타임 내내 관객도 영화 속 공간에, 영화에 담긴 봄과 여름 사이에 있는 선선한 날씨의 순간에 살게끔 만든다.
이 영화를 보는 순간에는 나도 내가 좋아하는 셔츠나 블라우스를 입고 내 온마음을 줄 수 있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프랑스의 거리와 광장을 배회하는 경험을 했다.
이 영화의 또다른 매력 포인트는 바로 영화의 곳곳에 있는 뮤지컬 요소였다.
뮤지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처럼 수잔이 거리를 걷다 갑자기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도 하고, 라파엘과 수잔이 극장에서 음악에 맞춰 조화롭게 함께 춤을 추기도 한다. 그리고 라파엘이 수잔에게 자신의 헤드셋을 씌워준 뒤 같은 동작으로, 같은 호흡으로 함께 춤을 추기도 한다.
처음에는 조금은 느닷없게 느껴져서 놀라기도 했지만, 이러한 요소들로 인해 오히려 영화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장면들로 인해 영화의 낭만적인 분위기가 더 깊어졌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감독이자 주연 배우인 수잔 랭동의 노래가 나오며 끝이 난다.
나는 봄과 여름 사이의 날씨였던, 기분 좋은 선선함이 가득한 날에 이 영화를 봤다.
리뷰를 쓰는 이 순간, 그 날의 기억을 되짚어보면 매우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분위기와 딱 맞는 날씨에 이 영화를 관람하다니.
수잔은 자신을 한 소년과 초여름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이 영화를 보다보니 어느덧 나도 초여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완연한 여름이 다가오기 전에 이 낭만적인 영화를 꼭 관람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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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씬 레드 라인 the thin led line - 테렌스 멜릭
씬 레드 라인 the thin led line - 테렌스 멜릭
'천국의 나날들'을 연출하고 무려 20년의 시간이 지나서 맬릭 감독은 새로운 영화 '씬 레드 라인'을 공개했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후 서너 번을 더 봤다. 처음 보고 쓴 리뷰는 아래 있으니, 이번에 새로 보면서 느낀 부분을 정리해보자.
영화에서 '물'은 매우 중요한 상징이다. 물은 곧 '생명'이다. 영화의 시작, 중간 부분의 전투, 영화의 끝에서 물이 등장한다. 처음과 끝에 등장하는 바다는 만물의 생명이 탄생하는 근원으로 보인다. 평화로운 남태평양의 섬에 주민들이 살아가고,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물에서 헤엄치며 행복하게 놀고 있다. 이 평화 속에서 군인인 주인공은 주민들이 군인을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평화로운 바다에서 나와 숲속으로 들어가면서 전투가 벌어지고, 병사들은 물이 부족해 힘들어 한다. 고지를 점령하기 전에도, 고지를 점령하고도 지휘관은 계속 물을 보급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물'은 갈증을 해갈하는 물질로써의 '물'이기도 하지만, '물' 그 자체가 생명을 상징한다.
여러 명의 주인공 시점으로 발화하는 나레이션은 그 상황에 맞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주인공들의 독백처럼 들리는 이 나레이션은 영화를 끌어가는 힘이기도 하다. 주인공 각자가 놓여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내면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객관적 상황 - 전과의 전투 - 속에서 이질적이지만 근본적인 질문들이다.
이 영화가 다른 전쟁, 전투영화와 다른 점은, 전투를 '액션'으로 소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쟁, 전투'라는 소재를 다루면서 멜릭 감독은 이 영화가 '전쟁 액션, 전투 액션' 영화가 되지 않도록 의도한다. 그렇다고 전투 장면이 적거나 대충 찍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어떤 전투 영화보다 뛰어난 장면들이 많고, 생생하며, 실감나는 전투 장면은 관객이 몰입하게 되는 힘이 있다.
그럼에도 전투의 사실성을 드러내면서도 관념화 하지 않으려는 장치를 곳곳에 넣고 있다. 총이나 폭탄에 맞아 죽거나 다치는 병사들의 비명이 거의 들리지 않고, 하반신이 사라진 군인의 처참한 모습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며,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의 모습을 희화화하지 않고 있다.
전투에서 이긴 쪽이나 진 쪽 모두 피해를 입었으며, 미군이나 일본군이나 군인의 생명은 다르지 않고, 누군가의 총과 폭탄에 죽어가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그것이 정의인지 묻는다. 이 회의적 태도는 전쟁을 객관으로 바라보려는 것이며, 개인에게 생명은 오로지 단 한 번이라는 것에서, 전쟁이 인간을 소모품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고든 대령은 이 전투에서 공을 세워 장군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병사들의 죽음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직업군인이다. 제임스 대위는 중대장으로서 자기 중대의 병사들이 적군의 총탄에 죽는 것을 최대한 막으려 하고, 고든 대령과 대립한다. 이때 군인으로서 논리적인 주장은 고든 대령이 승리한다. 결국 눈앞에 있는 적과 싸워야 하고, 고지를 점령해야 하는 지상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터무니없는 공격 명령에는 따를 수 없다는 것이 제임스 대위의 생각이었다. 전투가 벌어지는 전쟁터에서 지휘관들의 생각과 사고방식이 어떤가를 보여줌으로써, 전쟁 또는 전투를 지휘하는 고위 장교들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들은 승진에 관심을 두고, 병사의 죽음을 외면하며,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믿는다. 여기에 반발하거나 회의하는 지휘관은 제임스 대위처럼 중간에 군복을 벗어야 한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위트 일병은 6년 동안 군인으로 복무하고 있음에도 계급은 일병이다. 그는 여러 번 근무지 이탈을 했고, 징계를 받아 진급이 안 되고 있는 것이다. 위트 일병의 태도는 관조적이고 집착과 욕망을 버린 초탈한 인물이다. 무엇이 그를 무심한 인간으로 만들었을까. 오랜 전투를 통해 위트는 삶과 죽음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을 수 있다. 그는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전투에서 가장 위험한 임무를 자청한다. 그는 자신이 살아돌아 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거나, 살아남는 걸 포기했는지 모른다. 그는 가장 위험한 전투에서 살아남았지만, 정찰을 나가서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사살당한다.
위트 일병의 죽음으로 이 영화가 '영웅'을 만들 의지가 없다는 걸 분명히 하고 있다. 전쟁에서는 누구나 죽을 수 있으며, 살아남는 것은 오로지 '운'이 좋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즉, 전쟁, 전투에서 총알이나 폭탄은 우연한 작용이며, 그것은 개인의 의지, 희망, 계획 따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이,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 삶과 죽음이 결정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곧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의미 없는가를 말한다. 인간의 주관적 의지는 마치 바다의 물방울처럼 거대한 파도의 한 부분일 뿐이어서, 외부의 조건 즉, 시대와 역사, 시간과 공간의 어느 순간에 놓여 있는 인간은 그 한계를 절대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제목이 늘 궁금했다. '씬 레드 라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무슨 뜻일까. 얇고 붉은 선이라니.
'나무위키'에서 설명한 것을 보니, '크림 전쟁' 때 영국군의 붉은 군복을 빗댄 별명이라고 한다. 러시아군과의 전투에서 영국군은 두줄로 가늘고 길게 늘어서 승리를 했고, 이 전투를 본 종군기자가 "A thin red streak tipped with a line of steel"이라고 쓴 데서 이 단어가 나왔다고 한다.
이 영화에서 사용된 제목의 의미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일 수도 있고, '이성과 광기의 경계선'을 상징할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테렌스 멜릭 감독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상징하지 않았을까? 이 영화는 매우 잘 만든 전쟁영화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전쟁을 통한 인간의 광기와 성찰을 위한 영화이기도 하다.
원작이 있는 책을 바탕으로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과 주인공이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을 느리지만 깊이 있게 보여주는 이 영화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어떤 전쟁영화와 비교해도 결이 다르다.
주인공과 그의 전우들, 중대장 스타로스 대위, 연대장 고든 대령으로 대표되는 인물은 이 전쟁을 바라보는 중요한 시각을 반영한다. 실제 전쟁의 상황으로만 봐도 미군이 과달카날 섬을 점령하지 않고, 지속적인 함포사격과 비행기 폭격만으로도 얼마든지 일본군을 전멸시킬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일본은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에게 선제 공격을 했지만, 그것이 미국을 이기겠다는 전술이 아니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일본은 미국을 상대로 지기위한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유럽에서는 독일이 유럽연합군에 의해 패퇴를 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쏘련과 독일의 전쟁으로 이미 승패는 어느 정도 결정된 상황이었다.
독일과 일본은 추축국이었지만 그들끼리 연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리적으로 연합이 불가능했고, 미국이 초기에는 전쟁 군수물자를 엄청나게 유럽으로 보내면서, 초기에 독일에게 밀리던 유럽의 연합국은 군수품의 압도적인 우위로 인해 독일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좀 의아하겠지만, 미국은 쏘련에도 군수물자를 퍼부어 주었다. 미군이 비행기로 떨어뜨린 많은 군수물자가 독일군 진영으로 떨어지는 웃지 못할 일도 많이 발생했지만, 어떻든 쏘련군은 미국이 보내 준 다양한 군수품으로 인해 전투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고, 병력 손실도 상당부분 막을 수 있었다.
과달카날 전투에서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 가운데 사상 최대의 피해를 입는다. 이 영화에서도 미군의 피해가 막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 원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지휘관의 무능과 탐욕이었다는 것을 감독은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는 고든 대령이 자신의 진급을 위해 끊임없이 중대장을 몰아부치지만, 사실 지휘부는 고든 대령 위에 있는 똥별들이다.
그들에게 병사들은 그저 소모품에 불과할 뿐이다. 그들은 애국심을 내세우지만, 정작 자신들은 가장 안전한 곳에서 지도 위에 빨간선을 그리는 것으로 전쟁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 전쟁터는 참혹한 장면들 뿐이고, 똥별과 똑같은 생명이 죽어가고 있지만, 전쟁의 논리는 지배자의 논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주인공 위트 일병은 전쟁터에 나온 군인이지만 그는 종종 무단으로 병영을 뛰쳐나와 혼자 돌아다니거나 원주민들과 어울린다. 보통의 경우 이런 병사는 당연히 군법회의에 회부되고 영창에 가게 되지만, 그를 이해하는 웰쉬 상사 덕분에 큰 문제 없이 군대생활을 하고 있다. 다만 진급을 못하는 것이 유일한 벌이다.
하지만 위트가 바라보는 전쟁터는 총탄과 대포가 날아다니고 군인의 몸이 갈기갈기 찢기거나 터져나가는 참혹한 현장이 아니라, 아름다운 풍경과 싱그러운 바람과 구름과 따가운 햇살과 아름다운 원주민들과 고요한 바다가 있는 곳이었다. 그는 전쟁터의 가운데에서 오히려 평화와 고요를 느끼며 시간을 보낸다. 역설적이다.
전쟁영화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장면이라고 생각하는 전투장면이 있는데, 처음 이 장면을 볼 때, 내 심장 박동이 쿵쿵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실제 전투 현장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테렌스 멜릭 감독의 연출은 탁월하다. 이 장면만으로도 이 영화는 전쟁영화의 걸작으로 남을 수 있을 테지만, 이 영화를 빛내는 장면들은 전투 장면보다는 전투와 전투 사이에 보여주는 위트 일병의 일탈과 풍경들이다.
역시 전쟁영화 가운데 명장면의 하나인 '서부전선 이상없다'에서 마지막 장면이 평화로운 새소리와 함께 소리 없이 날아 온 총탄이었음을 떠올린다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보여주는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풍경은 전투를 겪는 군인이 가장 원하는 평화로운 풍경이며, 그것은 살아서는 만날 수 없는 비현실의 풍경이라는 점에서 위트 일병의 환상일 수 있다.
과달카날 전투는 많은 미군이 사망한 격렬한 전투였고, 이 섬을 탈환하면서 남태평양에서 일본까지의 제공권과 제해권을 미군이 장악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영화에서는 미군의 희생도 중요하게 다루지만, 적군인 일본군의 참혹한 상태도 보여주고 있다. 적군이니까 당연히 죽여도 좋다는 심리적 동조를 테렌스 멜릭 감독은 분명히 거부하고 있다.
일본군의 악명은 당대에도 이미 유명했지만, 그들 역시 전쟁의 피해자이자 소모품으로 전락한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참혹한 장면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일본군은 미군에게 포로로 잡히기 전에 자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또한 참호에서 기관총을 난사하는 일본군의 발목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이것은 일본군 개개인을 세뇌하고 강제한 일본 군국주의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또한 그들이 미군에게 포로로 잡혔을 때, 예상보다 훨씬 강렬하게 저항하는 것은, 미군들이 포로가 된 일본군의 피부를 산 채로 벗긴다는 말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일본군인 개개인의 전쟁범죄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일본 군국주의의 강제였든, 세뇌였든, 빗나간 애국심이었든 자유로운 개인이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책임을 방기한 것은 분명 잘못한 것이다. 그 당시 많은 일본 군인들은 잘못된 애국심으로 군국주의를 받아들였고, 군국주의의 체제를 내면화했다. 그것은 히틀러를 선택한 독일 국민의 정서와 결코 다르지 않으며, 국가의 범죄에 동조하고, 힘을 실어주었다는 점에서 단죄를 면할 수 없는 심각한 범죄행위임에 틀림없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군국주의, 집단체제에 맞서는 개인의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미군과 일본의 군대 조직은 개인의 의지를 용납하지 않는다. 위트 일병의 일탈은 이런 집단에 맞서는 개인의 항의이며, 폭력을 만들어 내는 집단(그것이 미군이든 일본이든 상관 없다)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위트 일병이 보았던 아름다운 풍경과 평화로운 사람들은 그가 바라던 세상의 모습이었지만, 그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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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미국/2004)
(이미지 출처: 네이버 이미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
멜 깁슨이 배우라기보다 감독으로 내 머릿속에 각인된 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는 극장개봉 전에 이미 유명해진 영화다. 반유대주의 영화라고 하여, 헐리웃을 점령한 유대인들로부터 미국의 엘리트 계층, 자본가 계층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유대인들에 이르기까지, 은근한 혹은 노골적인 반감이 표출되었다. 영화가 상영되고 난 후 그 유명세는 더 한층 상승되었다. gory 하다, 따라서 horror 장르로 분류해야 한다는 비아냥이 쏟아졌다. 심지어 수위가 높은 잔인한 고문장면 때문에 약한 심장을 가졌던 관객은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더욱이 이제 멜 깁슨은 유대인들의 왕국인 헐리웃의 영화에 캐스팅되기는 글렀다는 말들이 공공연하게 오갔다. 아마 그 예측은 옳을 것이다.
영화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와 동고동락했던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가롯 사람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반과 당시 유대 종교 엘리트 계층인 바리새인들의 음모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한 후 예언대로 사흘만에 부활하기까지, 즉 구약의 예언이 완벽하게 성취되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다룬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기독교 구약과 신약성경의 텍스트에 매우 충실하다.
하나님이 창조한 첫 번째 인간 아담으로 인해 인류에게 죄가 들어왔다. 하나님은 죄와 상관할 수가 없다. 그의 거룩함으로 말미암아 죄지은 자들은 죽을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죄 없고 흠 없는 외아들을 인간으로 세상에 보내 인간들이 당해야할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당하도록 '상관'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인류가 당할 모든 저주를 혼자 감당한 뒤 인간으로 죽었다. 그리고 역시 예언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 그리하여 인류구원을 위한 고난의 사역을 완전히 성취했다.
멜 깁슨이 가톨릭(구교) 신자여서 그랬겠지만 영화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에 대한 경외심이 배어있다.
그러나 구교와 신교를 초월한 복음의 정수를 전달하고 싶었던 감독의 의도는 고대 유대인들과 로마 군인들이 사용하던 그 언어로 영화를 제작했다는 것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기독교가 여러가지 종파로 나뉘기 전, 인간의 이데올로기가 섞이기 전의 예수 수난사건과 그의 부활이라는 복음의 핵심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
그리고 멜 깁슨은 영화를 전 세계에 배급하면서 더빙이 가능한 원고가 아닌 자막용 원고만을 만들었다. 영화를 더빙하지 못하도록 M/E (Music and Effect) 트랙도 아예 만들지 않았다. 이쯤되면 그의 의도가 더욱 분명해진다.
이 영화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정관사 the와 함께 대문자로 시작하는 Passion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난을 당하고 죽음'을 뜻함을 알았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신(하나님)과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온 신(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인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여 그들에게 스스로를 계시함으로써 그가 창조한 인간들과 교통하며 신의 뜻에 따라 통치되는 아름다운 국가를 세워 그 주변의 이방사람들에게 본을 보이고 모두 그 아름다운 국가를 따라 살기를, 즉 모든 인류가 신의 자녀가 되기를 바랬다. 그러나, 신의 계획안에서, 그것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래서 약속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신실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한 약속을 했다. 내가 메시아를 보내리라. 그가 너희들을 구원하리라... 그리고 내 뜻으로 통치되는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구약성경의 핵심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을 지켰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의 약속대로 이 땅에 왔다. 그는 이스라엘 땅에 태어난 성육신(인간의 몸으로 온 신)이다. 예수는 구약성경 곳곳에 예언으로 주어진 말씀대로 메시아로서 감당해야할 모든 것을 빠짐없이, 그리고 정확하게 성취한다. 그는 말로는 도저히 옮길 수 없는 고난을 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당했다. 예언을 이루어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기 위해. 그것은 인류 역사에 다시없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며 순종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구약성경의 한 구절,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도다." (이사야서 53장 5절)는 메시아에 대한 대표적인 예언이자 이 영화의 주제이다.
이제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모두 구원을 얻게 되었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한다면. 그가 인류의 생명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하였다는 것을, 그리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이루었다는 것을 믿기만 한다면.
영화에 그려진 인간들의 모습은 어떤가.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잘 아는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를 통해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고통으로 지켜본다. 그 곁에는 예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요한과 예수의 가르침을 좇았던 막달라 마리아가 늘 함께 있다. 그들은 아무 힘없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안타까움과 아픔으로 지켜보는 무력한 자들이었다.
예수와 함께 먹고 자며 전도하였던 제자 중 하나였던 유다는 물질이 탐이나 돈에 스승을 판다. 반역자다. 그리고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흥분한 사람들이 자신을 해칠까봐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한다. 그는 비겁했다.
당시 구약을 믿고 암송하며 가르쳤던 유대교 종교 엘리트이며 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은 난데없이 나타난 천한 목수의 아들 예수가 가르치는 말씀의 권위와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는 그의 기적의 능력을 질투했으며,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공공연히 비판하는 예수를 두려워했다. 아니, 예수 때문에 그들의 인기와 권위가 실추될까봐 무서웠다. 그래서 거짓증거를 날조하여 신성모독으로 예수를 죽였다. 야비한 살인자였다.
그리고 예수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로마의 군인 빌라도. 그는 예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유대인들 사이에 민란이 나면 로마황제의 눈 밖에 나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의 정치생명은 끝나고 말 것을 두려워한 비겁한 출세주의자였다.
그리고 그 무력함, 비겁함, 야비함, 두려움 등의 어두움은 모든 인간에게서, 나에게서 늘 찾아지는 것들이다. 예수의 십자가 보혈로 깨끗하게 되지 않는 한.
인간은 세상에서의 안락한 삶, 즉 세상을 사랑하고, 속이는 자 사탄은 세상의 재미로 인간을 미혹하며 죄를 짓게 함으로써 신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는다.
그러나 신은 위대한 사랑이다. 인간은 늘 하나님을 배반하나 하나님은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 인간에게 예수를 보냈다. 그리고 온갖 사탄의 책략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죽음, 즉 사탄을 이김으로써 다시 한 번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기회를 인간에게 주었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메시아이며 예수의 보혈로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죄의 종, 즉 사탄의 종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그 신분을 바꿀 수 있다. 그것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며 이 영화의 요지이다((©2021. 최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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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티 크라이스트> - ‘성경의 실수를 되짚는 이브의 광기’
안티 크라이스트 (Antichrist)
개봉일 : 2011.04.14 (한국 기준)
감독 : 라스 폰 트리에
출연 : 윌렘 대포, 샤를로뜨 갱스부르, 스톰 아체체 살스트롬
‘성경의 실수를 되짚는 이브의 광기’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올해의 가장 폭력적인 경험을 한 영화는 <사울의 아들>이라고 생각했다. 흐리게 처리되긴 했지만 충분히 폭력적이고 충격적이었던, 영화를 통해 경험한 그 시대의 한 조각이 내 마음을 흠씬 후려 팬 영화였다. 근데, <안티 크라이스트>를 보고 생각을 바꿨다. 올해.. 아니 어쩌면 내 20대의 가장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영화는 이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영화의 뜻과 장점들을 제외하고 온전히 ‘영혼에 입은 대미지’만 따진다면 <안티 크라이스트>가 1등이다.
지난여름이던가, 메가박스에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전을 할 때, 이 감독님의 작품에 입문을 해볼까 고민했다. 그때는 ‘마니아층은 있으나 호불호가 극히 나뉘는 스타일의 감독’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과감하게 다른 기대작들을 먼저 감상하고, 감독전을 포기했던 기억이 있다. 다시 생각해 보니 현명한 결정이었다 싶다.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봤다면 더 큰 대미지를 입고 울상으로 집에 돌아왔을지도 모르겠다. <미드 소마>를 보고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던 멘탈인데.. <안티 크라이스트>는 힘들었다. 유리 멘탈이신 분들은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영화를 피해 가시라고 경고하고 싶다. 궁금하다고 막 볼만한 작품 색은 아닌듯하다.
음울함이 감도는 색들을 한계점 없이 풀어놓은 영화 <안티 크라이스트>는 제목처럼 반기독교적인 요소가 있는 영화다. “성경은 말도 안 돼!”라는 식의 반감을 표했다는 건 아니고, 과연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성스러운 그 이야기에 눈치채지 못한 또 다른 힘이 있지 않았는지.. 결함이 있진 않은지 등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주인공의 이름은 아담과 이브가 아니지만 두 사람이 갈등하는, 고통으로 가득 찬 장소의 이름은 ‘에덴동산’이다. 고통을 모두 정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그와 마녀가 되어버린 그녀는 에덴동산에서 각자 다른 방법으로 고통과 삶을 정의하려 한다. 이들은 실존에 의미에 맞서고 또 무너진다.
욕망으로 인해 시작된 고통 속에서 그녀는 서서히 어두움에 눈을 뜨고 욕망의 시작점을 잘라내려 한다. 그는 그녀의 고통을 자신의 방식으로 정의하고 억제하기 위해 손에 더 강한 힘을 준다. 실존하는 고통, 욕망으로 인해 잃어버린 것. 그리고 결국엔 폭력적이고 일방적으로 끝을 맺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써 내려간 에덴동산의 이야기. 여전히 해석되지 않는 부분도, 상당히 폭력적으로 다가오는 부분도 존재하지만.. 언젠가.. 새로운 질문이 떠오르고 마음의 준비가 되면 한 번쯤은 다시 보게 되지 않을까.
안티 크라이스트 시놉시스
눈발이 아름답게 흩뿌려지고 있는 깊은 밤, 그와 그녀는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고 있다. 그들의 어린 아들은 잠에서 깨어나 열린 창가로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다 창밖으로 추락하고 만다. 아들을 잃은 그녀는 깊은 슬픔과 자책감으로 점점 병들어 가고 그는 그녀를 구원하기 위해 그들의 '에덴'으로 함께 떠난다. 그러나 그녀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 현대판 아담과 이브의 애증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경악스러운 결말이 그들 앞에 펼쳐지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그와 그녀가 격렬하게 사랑을 나눈다. 마치 성스러운 의식처럼 느껴지는 장면들이 흘러가고, 잠에서 깬 아이가 엄마 아빠의 눈에서 벗어나 집안을 누빈다. 책상을 지키고 있던 PAIN, GRIEF, DESPAIR. 고통, 슬픔, 절망의 이름을 가진 3개의 장식품을 손으로 밀어낸 아이는 창밖으로 떨어져 죽음을 맞이한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비탄에 잠긴다. 그는 슬픔과 비탄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녀의 말을 낚아채 모두 괜찮아질 것이라 포장한다. 슬퍼하는 그녀를 비추던 카메라는 그가 슬픔의 무력함을 강요할 때마다 그의 힘에 강제로 이끌리듯 시점을 바꾼다. 심리 치료사인 그는 슬픔에 빠진 그녀를 치료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녀는 가족은 치료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며 그의 치료를 은근히 거부하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는다.
“두려운 게 뭔지 모르겠어.”
슬픔에 빠져있는 그녀에게 그가 묻는다. 무엇이 가장 두렵냐고. 쉽게 특정 대상을 떠올리지 못하던 그녀는 아이와 함께 머물며 논문을 준비했던 ‘에덴동산’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꼽는다. 그는 두려움을 깨 부셔야만 그녀의 슬픔이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고 그녀를 에덴동산으로 데려간다.
그녀는 에덴동산에 머물며 논문의 주제인 인간의 본성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마녀사냥에 대해 자세하게 알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면, 여자의 본성도 악할 것이다.’라는 결론을 얻는다. 그녀는 그렇게 에덴동산에서 악에 물들고 미쳐간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에 손을 댔던 이브처럼.
그녀는 고통, 슬픔, 절망이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들이 오면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의 죽음과 동시에 고통, 슬픔, 절망을 모두 떠안게 된 그녀는 점점 병들어가고 다음으로 다가올 죽음의 제물을 고르듯 그를 속박한다. 그녀는 그가 숨어들어간 나무뿌리를 미친 듯 파헤치고 발목에 무거운 돌을 단다. 그리고 아이를 죽게 만들고 고통, 슬픔, 절망을 불러온 욕망의 시작점(성기)을 짓이기고 잘라내며 광기를 표출한다.
“혼돈이 지배하리라.”
고통, 슬픔, 절망.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야 한다며 일방적으로 쏟아낸 강요와 폭력. 에덴동산에 머물던 그와 그녀는 광기와 폭력에 휘청이다 결국 혼돈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모든 것이 파멸한다. 그는 결국 그녀를 목졸라 죽이고 마녀를 처리하듯 화형을 진행한다. 슬픔으로 인해 먼저 미쳐가기 시작한 건 그녀였지만 슬픔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는 그녀에게 슬픔으로부터의 도주를 강요하고 결국 마지막까지 자신의 뜻대로 그녀의 운명을 정리한다.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무신론자)으로서 성경에 대한 악감정은 없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지만 여전히 배우고 따를만한 점들이 많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성경을 근거로 행해지는 폭력들도 있다는 것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의 이름을 걸고 폭력을 정당화했던 십자군 전쟁과 성경 구절의 예언서를 기준으로 재판을 진행하고 죄 없는 여성들을 화형 시켰던 마녀사냥. 그리고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여성 억압과 동성애 혐오 등.. 예수에 대한 그릇되고 광적인 믿음으로부터 발생한 폭력들을 언제까지나 부정할 수만은 없다.
<안티 크라이스트>는 에덴동산에 떨어진 그와 그녀를 통해 이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며 마녀사냥이라는 여성 폭력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악한 감정을 품은 그녀를 마녀처럼 화형 한 그와 에덴동산으로 모여드는 수많은 얼굴 없는 여성들, 나무뿌리 밑에 깔려있는 수많은 손들을 보며 완벽할 것만 같았던 성경의 오류를, 그로 인한 죽음을 한 번 더 되짚어본다.
우울하고 기운 빠지는 색채와 그녀의 광기에 휩쓸려 무릎을 꿇고 있다가 마지막 불꽃이 타오를 때가 돼서야 희미하게 정신이 들었다. 찾아보니 <안티크라이스트>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 작품 중 그나마 약한 축(?)에 속한다는데.. 대체 약하지 않은 작품은 어느 정도일지 기대되고 두렵다. 솔직히 연달아 볼 만한 작품들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지금껏 겪어본 적 없는 충격이라.. 또 다른 작품이 궁금해진다. 멘탈이 짱짱하게 회복되었을 때 그의 다른 작품에 슬쩍 발을 담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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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명적 사랑 이야기라고만 하기엔,
넷플릭스 인공지능 님께서 안보겠다고 무시하는 나를 무시하고, 꾸준히 추천해주던 드라마가 있었다. 사실 넷플릭스에 포진해있는 중국드라마는 너무 터무니없는 설정에 로맨스 부어버리기가 주요 플롯인 드라마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하는 편견이 있었기 때문에 왜 넷플릭스는 나에게 보지도 않을 드라마를 추천하는지 너무 짜증이 나려던 찰나에 하다하다 유튜브까지 이 드라마를 추천하기에 도대체 뭔데? 하며 짜증스레 시도한 이 드라마, 굉장히 흡입력 있었다. 이쯤되면, 인공지능 정말로 무섭다. 내 취향을 정말 잘 파악하는구나, 이녀석......
상견니, 한국어로 해석하면, "널 보고 싶어" 인만큼 이 드라마는 로맨스다. 내 글을 한 번 이상 읽어주신 분들이 계시다면, 나는 로맨스를 정말 못본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특별한 특징이 없이 멜로이기만 한, 드라마는 못본다. 이것은 드라마의 웰메이드 여부를 떠나, 내 성격의 지랄맞음 때문이며, 드라마에서 오글거리는 장면을 단 10초도 못 보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일례로, 현재 내 친구들, 지인들은 모두 보고 있는 갯마을 차차차는 친구들의 권유로 8화까지 억지로 보다가 포기했다. 와, 김선호 배우를 꽤 오랫동안 좋아했음에도 로맨스의 벽을 뚫을 수는 없었다. 친구들이 정말 아까워했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끝까지 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우선 첫 째, 이 드라마가 타임루프물이기 때문이었고, 일종의 추리물이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에 범인을 찾고, 그 범인의 행동을 유추하는 것만 해도 충분히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추리물 덕후이기에 가능했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만큼 주인공들의 로맨스 감정을 덜 부담스러워하면서 따라갈 수 있었던 데에는 이 드라마의 스릴러적인 요소들이 한 몫 했다.
따라서 내가 이 드라마를 추천하는 것은 많은 이들의 동의를 받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대부분 이 드라마의 인물들 간의 로맨스 기류 때문에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본 사람들이 대다수인 것 같고, 나같이 스릴러 부분에 집중해서 본 사람은 크게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1. 운명론적 로맨스 클리셰의 변주
이 드라마를 보면서 생각난 우리 나라의 드라마가 있었다. 찾아보니, 무려 2013년작이었던 드라마 '나인'이다. 두 드라마의 공통점이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나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을 기반으로 전개되는 시나리오라는 점이다. 하지만 상견니에서 시간 여행을 하는 매개체는 음악이지만 나인에서는 주인공이 향을 피우면, 과거로 돌아가는 내용이었던 만큼 그 매개체가 향이었다.
시간여행을 하는 매개체가 음악이든 향이든 결국 이 드라마의 로맨스 장르적 요소를 극화시키는 부분들이다. '다음 생에, 다른 시간에 존재해도 이 세상에 내 짝은 온리원 너 하나'라는 타임루프적 세계관은 운명론적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키기는 하지만 그것마저도 현 시점에서도 많이 익숙한 플롯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드라마도 굉장히 특이한 드라마인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운명론적 사랑을 논하는 클리셰가 참 많다.
하지만 클리셰에는 수많은 변주가 가능하기 때문에 이 드라마가 약간의 변주를 꾀한 부분이 있다면, 도플갱어의 존재였다. 천윈루와 황위쉬안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성격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같은 상황이어도 인격이 천윈루냐 황위쉬안이냐에 따라서 상황이 달리 흘러갈 수 있는 긴장감을 조성하기 때문에 같은 몸을 두 인격이 공유한다는 설정이 이 드라마를 비단 운명론적인 클리셰에 갇히지 않게, 덜 진부하게 만드는 포인트였다고 생각한다.
2. 천윈루를 죽인 것은 사람일까, 마음일까
세대는 다르지만 나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살아가는 다른 인격이 있다는 설정이 이 드라마의 또다른 흥미 요소인 이유는 각기 다른 인격은 각기 다른 주체적인 행동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드라마 상에서는 같은 얼굴로 태어났지만 상반된 두 여자, 황위쉬안과 천윈루가 등장한다. 황위쉬안은 인기도 많고, 사회성도 좋은 커리어우먼이지만 천윈루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학교에서도 친구 없이 자발적 왕따로 살아가는 컴플렉스 덩어리이다. 그런데 황위쉬안이 천윈루의 몸에 들어가면서 갑자기 학교에서 인기가 많아지고, 자신이 좋아하던 리쯔웨이의 사랑을 받는 황위쉬안의 모습을 보면서 어딘지 모를 공간에 갇혀있던 천위루의 정신은 황위쉬안에 대한 질투에서 비롯된 자괴감을 느낀다. 드라마를 꾸준히 보면서 천윈루가 황위쉬안을 비교하는 데에서 온 자괴감이 결국 언젠가 큰 사단을 낼 것이라는 예상을 하게 만드는데, 그렇다면, 그 자괴감이 천윈루를 죽인 것인지, 아니면 그 자괴감과 상관없이 그녀는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인지 궁금증을 끝까지 자아낸다. 바로 이 부분이 내가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보게 된 내용적 요소였다.
네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것은 세상에게 실망했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 기대가 많기 때문이란 걸
이 드라마를 시공간을 뛰어넘은 운명적 사랑 이야기로만 보지 않은 나에게 이 드라마가 추구하는 궁극적 메시지는 시공간을 뛰어넘은 운명적인 사랑의 구현이 아니라 자존감이 낮은 한 여학생의 삶에 대한 관점 바꾸기 프로젝트의 실현이라고 생각했다. 천윈루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 천윈루 자체로도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였는지 천윈루 내면의 삐뚤어진 시선을 자각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그 시선을 지적하고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저 지켜보는 이가 있음을 알게 하는 것만으로도 천윈루는 더 이상 우울의 터널 깊숙이 들어가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천윈루를 죽인 범인을 추적하는 것보다 이런 황위쉬안과 천윈루 사이의 관계성은 모든 캐릭터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드러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작가는 황위쉬안의 몸과 정신을 빌려, 한 인간의 불안한 청춘의 삶을 응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3. 총평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의 주요 로맨스가 열린 결말로 끝나서 아쉽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마도 열린 결말이다 보니, 우리가 드라마 상에서 봐온 로맨스 씬들이 결국 의미없는 씬들로 소비되고, 내 눈앞에서 주인공들이 꽁냥대는 실체적 로맨스가 없으니, 허탈해서 그런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나는 주요 커플의 로맨스가 끝난 것이 아니고, 내 눈앞에서 이 사람들이 사랑하고 있는 모습을 눈으로 보고 있지 않아도 모든 캐릭터들이 행복한 상황 속에서 이들이 다시 만나 사랑할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더 긍정적이지 않나 생각했다. 많은 관객들이 바라는 것처럼 주요 인물들의 사랑에는 천윈루의 죽음과 모쥔제의 죽음과 같은 크나큰 희생이 따르기 때문이다. 모쥔제까지 포함된 세 사람의 우정이 비극으로 끝나는 것보다는 미래에 새로운 사랑을 그려나갈 그들의 긍정적인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더 낫지 않나 그렇게 정리했다. 그렇게 크나큰 희생을 감수해야할 만큼 대단한 사랑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드라마의 마지막 오토바이씬에서처럼 결국 이들은 어떻게든지 각자의 방식대로 사랑할 것이라는 암묵적 메시지를 넌지시 던져준 결말이 덜 슬퍼서 좋았다.
난 이게 문제다. 모든 사람들이 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다. 현실은 그럴 수가 없으니, 영화에서조차 모든 이들의 공평한 해피엔딩을 바라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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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또 다른 영화적 실험
넷플릭스 신작 <히트맨>이 화제를 모은 건 단연 글렌 파월이다.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스타 중 한 명인 그는 왜 자신이 수많은 제작사에서 러브콜을 받는지 이 영화를 통해 보여준다. 하지만 이 작품이 글렌 파월만의 영화는 아니다. 메가폰을 잡은 이가 다름 아닌 <비포> 시리즈 <보이후드>의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기 때문. 그의 필모그래피 중 대중성을 많이 고려한 영화임은 틀림없지만,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보여주며, 전작에 이은 실존주의 실험을 진행하고 이를 증명한다.
| 실화, 그리고 <잠복근무>?
딱 봐도 평범한 대학 심리학 교수 게리(글렌 파월). 하지만 특별한 점이 하나 있으니 뉴올리언스 경찰서에서 히트맨(살인 청부업자)으로 활약한다는 점이다. 원래는 엔지니어로 이 작업에 참여한 그였지만, 우연히 히트맨 역을 맡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숨은 재능을 발견하고, 불법인 청부 살인을 의뢰한 이들을 잡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주위에서 잘한다고 하니 자신도 더 잘하고 싶어 청부 살인 의뢰자들의 SNS을 참고, 그에 맞게 매번 다른 히트맨을 연기한다. 그런 그가 단 한 번 삐끗한다. 가정 폭력에 시달려 남편을 죽여달라는 의뢰를 한 매디슨(아드리아 아르호나)를 만난 그는 첫눈에 반한다. 그리고 매디슨에게 살인 보다 이혼을 택하라 얘기한다. 임무 실패! 하지만 그 인연으로 개리는 매디슨과 연인으로 발전한다. 물론 게리가 아닌 히트맨 ‘론’으로 말이다. 그러나 거짓말은 언제나 들통나는 법. 그의 인생에 최대의 위기가 닥친다.
<히트맨>의 시작은 심리학 교수이자 오랜 시간 동안 60여 명을 체포하는 데 도움을 준 언더커버 경찰 게리 존슨의 이야기가 담긴 기사였다. 오디오, 비디오 장비 전문가이자, 새를 좋아하고 선불교 신자이기도 한 그는 영화처럼 사건에 맞춰 다른 인물이 되는 데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이 기사를 접한 글렌 파월, 그리고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이 실화를 기반으로 그들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느와르와 스크루볼 코미디의 요소를 접목한 <히트맨>은 사랑하지 말아야 할 의뢰인과 사랑에 빠진 킬러의 이야기라고 축약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보고 1987년 작인 존 바담 연출, 리처드 드레이퍼스, 에밀리오 에스테베즈, 매들린 스토우 주연의 <잠복근무>가 생각났다. 교도소를 탈출한 흉악범을 잡기 위해 애인인 집 근처에서 잠복근무한 경찰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인 이 영화는 액션, 서스펜스, 로맨스, 코미디가 조화를 이뤄 흥행에 성공, 이후 속편까지 제작되었다.
감독은 실화를 바탕으로 기존에 사랑받았던 장르적 외형을 가져와 믹싱하는 데 성공한다. 초반부터 따라가는 게 큰 무리 없었다면 이 공략이 제대로 먹힌 것. 본 게임은 이후부터다. <히트맨>의 장점은 장르 영화로서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감독은 장르적 재미를 추구하면서도 이 부분에 변주를 가한다. 그 예로 장르영화에서 마주했던 ‘킬러(또는 빌런)’의 이미지를 살짝 비튼다. 게리가 연기한 킬러의 모습은 우리가 영화에서 봤던 킬러의 이미지를 그대로 차용한다. 게리는 <아메리칸 사이코>의 패트릭(크리스찬 베일), <자칼의 날>의 자칼(애드워드 폭스), <킬링 소프틀리>의 잭키(브래드 피트) 의 느낌으로 변하는데, ‘이 모습이 바로 킬러지!’ 라고 말하는 것처럼 의뢰인은 게리의 이 모습에 신뢰하고 의뢰비를 준다. 이후 의뢰인들은 경찰에 수감된다. 마치 자신이 믿고 있는 이미지에만 현혹되어 실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을 비꼬는 느낌이랄까. 장르 영화임에도 이런 비트는 구석이 있는 걸 보면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선댄스 대표 감독이었다는 걸 상기시킨다.
| 세상은 변해도 나는 변하지 않는다!
감독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그동안 꾸준히 실험하고 증명했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또 한 번 내놓는다. 전작을 살펴보면 극 중 주인공들은 시간과 공간이 변함에도 인간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줘 왔다. 특히 영화 내외적으로 물리적인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에 따른 장소와 환경이 변했음에도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인물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는 <비포 선라이즈>부터 <비포 선셋>까지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줄리 델피)를 통해, 실제 12년 동안 촬영한 <보이 후드>의 메이슨(엘라 콜트레인)을 통해 잘 보여줬다. 시간이 흘러 나이를 먹고, 외형이 변해도, 삶의 환경이 달라져 생각이나 감정 표현이 달라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정체성은 고스란히 남겨져 있는 것. 제시와 셀린의 변하지 않는 사랑처럼, 메이슨의 긍정적 삶의 태도처럼 말이다.
감독은 다양한 인물(혹은 정체성)을 연기하는 게리를 통해 그 역이 게리인가 아닌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극 중 메디슨이 사랑하는 인물은 게리가 아닌 게리가 연기한 론이다. 그럼 섹시미가 듬뿍 담긴 이 킬러를 좋아하는 메디슨은 너드미가 철철 넘치는 게리를 좋아할 수 있느냐에 대한 물음에 다다른다. 감독은 그가 바라는 자아를 쟁취했을 뿐, 그 주체가 게리인 것은 변함이 없다고 말한다. 이런 의도에 편승하듯 메디슨 또한 시행착오를 겪지만 론을 연기한 게리를 사랑한다. 물론, 그가 사랑하는 건 론의 매력이 합쳐진 게리의 모습이긴 하지만 말이다.
감독은 실존주의에 입각해 각자의 현실은 시간에 따라, 장소에 따라, 누구를 만나냐에 따라 변화하는데,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바라는 자아를 쟁취하라고 강조한다. 마치 게리가 론의 캐릭터를 쟁취한 것처럼 말이다. 그에 맞춰 달라진 모습이 생경하다 하더라도 그 주체는 변함이 없으니까 걱정말라고.
| 글렌 파월의 연기에 흠뻑 빠지다!
감독의 이런 영화적 실험이 좀 더 흡입력 있게 다가올 수 있었던 건 글렌 파월의 팔색조 연기다. 왜 이제야 빛을 보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이 영화에서 펄펄 난다. 직접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제작에도 참여한 그는 그동안 자신이 연기해 보고 싶었던 강렬한 캐릭터를 매번 바뀌는 히트맨 역할로 대신하는 느낌이다. 보는 눈이 즐겁다. 특히 여성 관객들에게는 선물과 같은 연기일 듯.
그와 호흡을 맞춘 아드리아 아르호나의 연기도 일품이다. 어리숙하면서도 섹시한 느낌을 전하고, 어떤 행동을 할지 가늠이 가지 않는 팜므파탈 연기를 능숙하게 해낸다. 특히 게일의 감춰진 자아인 론을 끄집어 내어 세상에 빛을 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남성 캐릭터를 돋보이는 여성 캐릭터로서 소비되지 않는다. <6 언더그라운드> <모비우스> 등 다수의 작품을 거처 이제야 자신의 연기를 잘 보여줄 수 있는 대표작을 만난 듯 보인다.
극 중 ’세상에 맛없는 파이는 없다’는 대사가 반복적으로 나온다. 이는 영화의 주제로도 활용되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새로운 파이(혹은 세상)를 마주했을 때 두려워 말고 도전하라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은 쉬이 사라지지 않으니 걱정 붙잡아 두라고. 어쩌면 이 말은 새로운 장르에 도전한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리고 이 영화를 넷플릭스로 만날 전 세계 관람객들에게도.
사진제공: 넷플릭스
평점: 3.5 / 5.0
한줄평: ‘세상에 재미없는 영화는 없다’는 1960년생 감독의 의미 있는 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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