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필 K2022-03-29 11:59:02
의도는 감 잡히는데 결과적으론 글쎄올시다
<킬링> REVIEW
츠카모토 신야 감독은 1989년 "철남"을 통해 화려한 대뷔를 해 흥행, 비평적 성공을 거뒀다. 그 이후로 메이저 영화사를 통해 "요괴헌터 히루코"를 감독하고, 동경의 주먹, 총알발레, 쌍생아 등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런 그가 2018년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을 통해 "킬링"이라는 신작을 발표하면서, 그의 새로운 세계를 만날 생각에 관객들은 설랬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영화를 보니 생각나는 한 고사성어가 있다. "과유불급(過猶不及)". 본 영화에서 인간의 분노와 복수의 순환, 인물 사이의 갈등 등 여러가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는 알겠다. 하지만 이를 전부 포용하지 못하고 애매함만 보여주다가 끝이 난다. 차라리 하나의 주제의식이나 키워드에 집중했다면 더 좋은 영화가 나왔을 거 같다는 기대감이자 아쉬움이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츠카모토 신야 감독이 독창적인 작품 정신을 보여주는 감독이라는 것은 여전하며, 필자는 그의 새로운 영화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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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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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린 어째서 희망과 다정함을 잃은 혐오의 시대를 반복하는 것일까
우린 지금 혐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정치적 견해에 대해서도, 성별의 이슈에서도, 연예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서도, 심지어 아주 가까운 인간관계임에도 사소한 무언가를 꼬투리 삼아 비난하려 하는 우리의 관계에서도, 우린 타인 혐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생각해봐야 할 점은 혐오의 시대가 어쩌다 만들어졌는지, 그곳에 살고 있는 우리마저도 알지 못 한다는 것이다. 출처도, 신빙성도 없는 누군가에 대한 루머, 실수, 관념들은 우리의 귀까지 은닉하여 스며들어 마치 진실인 것마냥 자세를 취하고, 나만의 올바른 자세를 취하기 무섭게 그것들을 믿는 사람으로 나를 변모시킨다. 그럼 이런 혐오의 시대가 현재의 21세기에만 존재했을까? 가까운 근현대사로만 넘어가도, 냉전 시기가 만든 엄청난 정치적 혐오의 시대가 존재했고, 제2차 세계대전 유대인들을 향한 독일의 홀로코스트는 혐오를 넘어 무분별한 증오의 시대였다. 'Never Again' 다시는 반복하지 말자고 몇 번이고 우리 일류는 되내이고, 다짐하고, 결심했지만 결국은 'Do Again'을 들고 일어섰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속 "안나"와 같은,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속 "빌 펄롱"과 같은 희망이 이 혐오의 시대를 종식시킬 인류의 최고 무기임을 앎에도 어째서 우린 그 무기를 홀대하고 혐오를 택한 것일까.
영화 <화이트 버드>는 인류 세계사 중 어쩌면 가장 끔찍한 혐오의 시대라였던 제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속 희망과 희망 속에 피어나는 10대 청소년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직접적으로 나치군과 싸워 승리를 쟁취하는 식의 이야기가 아닌 평범한 인물들의 작지만 거대한 용기들이 한데 모여 서사를 이끈다는 점이 본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다.
영화는 액자식 구성을 취한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영화 <원더>에 등장했던 "줄리안"과 줄리안의 할머니 "사라"의 대화를 외화로 두고, 내화엔 "사라"가 "줄리안"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즉 영화의 본 이야기 "사라"와 "줄리안"의 서사로 진행된다.
내화의 초반부와 중반부 조금 그리고 종반부까지 "사라"의 나레이션을 통해 내화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과 사건의 진행을 소개하는데, "사라"가 "줄리안"에게 설명하는 거지만 마치 "사라"가 관객들에게 설명하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외화는 학교 폭력으로 퇴학당해 전학 온 새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의 잘못을 아직 뉘우치지 못한 "줄리안"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교훈을 주려는 "사라"의 대화 장면과 종반부 어둠을 극복한 "줄리안"과 연설을 통해 "줄리안"에게 전한 교훈을 관객에게 다시 상기시켜주는 장면으로 구성되었다. 영화는 내화와 외화를 정확히 구분짓지 않고, 오가는 식의 진행을 선보이는데, 외화와 내화를 번갈아가면 간혹 관객의 몰입도를 해칠 수 있어 위험성이 있는 연출법이지만, 영화 <화이트 버드>는 그런 점이 크지 않았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웠다. 또한 거시적 관점에서 영화의 구조는 어두웠던 소년이 할머니의 교훈을 통해 극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로서, 그렇기에 영화가 극의 대비감과 반전된 상황들을 살리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초반부 새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본인에게 호의적으로 다가오는 친구에게 차갑게 대하면서 동시에 그녀를 무시하고, 비하하는 일진에게 아무런 대응하지 못하던 "줄리안"을 종반부에서 180도 달라진 모습으로 변신시켜주었다는 점에서 영화가 매우 안정적이었고, 관람하는 데에 있어 편함만을 즐길 수 있었다.
파리와는 멀리 떨어진 프랑스의 한 고즈넉한 마을에 "사라"라는 소녀가 살고 있다. 화목한 가정, 평범해서 더욱 따뜻했던 "사라"의 집은 어느날 마을로 들이닥친 나치 군대의 점령에 혼란을 겪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대인이였기 때문이다. 하루 빨리 이민을 떠나려려 했지만 갑작스럽게 나치군이 학교로 쳐들어왔고, "사라"는 그런 나치군들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위기의 순간, 동급생이자 소아마비로 인해 한쪽 다리를 잘 쓰지 못한다는 이유로 왕따 당했던 "줄리안"에게 도움 받아 "사라"는 그의 곳간에 들어가 나치군의 포위망에서 벗어났다. 영화의 초반부와 중반부, 이 곳간이라는 한정적인 공간에서 영화는 "사라"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줄리안"은 어떤 식으로 그녀를 도와주는지, 두 청소년 남녀의 관계는 어떻게 변하는지를 다룬다.
영화 <화이트 버드>가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이런 주객전도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인기도 많고, 공주처럼 잘 커왔던 한 소녀와 장애로 인해 왕따 당하고, 무시받던 소년의 관계가 나치의 홀로코스트라는 상황으로 인해 역전되어, 무시와 홀대의 관계에서 도움과 구원의 관계로 바뀌었다는 점이 영화의 핵심이자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비유대인이더라도 유대인을 도왔을 경우 죽을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음에도 그녀를 구원하고, 자상함을 베풀 수 있었던 데에는 사랑의 힘이 있었다는 것을 영화는 지속적으로 관객에게 관계의 역전성을 통해 일러주었고, 또한 이를 성인의 사랑이 아니라 10대 청소년의 애틋한 사랑이었기에 더욱 가슴 따뜻해지고, 그들을 응원하고 싶게 했다.
작품의 초반부, 외화 속 "줄리안"이 등교하는 길, "줄리안"이 하교하는 길 등 영화는 "줄리안"의 행하는 길, 행하는 움직임 등에서 모두 '어울리지 못함', '혼란스러움'을 하강하는 시선을 통해 표현했다. 또한 유리창 사이 작은 공간에 비춰지는 그의 연약한 모습들을 비추곤 했는데, 이는 내화 속 창문틈과 벽 틈 사이로 보이는 바깥 풍경과 지붕 틈에 앉은 하얀 새를 표현하는 방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영화는 이 '틈과 벽'을 통해 마치 외화와 내화 간의 이동을 대화와 나레이션을 사용하여 영화의 구조에 있어 벽을 표현한 것처럼 "사라"가 곳간과 외부 간의 간극, 즉 "줄리안"의 보호와 희망으로 존재하는 공간과 나치의 혼돈과 공포만이 흐르는 공간을 구분지었고, 이는 비록 작은 틈, 얇은 벽이지만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역설적인 상황을 극대화시켰다. 이 점에서 인상적인 점은 "줄리안"과 "사라"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하는 놀이가 바로 '상상놀이'와 '영화'라는 점이다. 이 둘은 공통적으로 '현실이 아니다.' 현실이 아닌 것들을 통해 현실과 같이 즐기려 그들의 행위는 상상을 통해서라도 행복감을 구하려는 데에서 비롯되었고, 이는 결국 관객이 그들의 고통스러운 상황에 더욱 몰입하고, 그들에게 더욱 공감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영화는 초반부와 중반부까지 "사라"와 "줄리안"이 어떤 식으로 서로를 돕고, 이해하며, 자상함을 베푸는 지 풀어내고, 후반부에 도착하여 극의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데, 이 점만큼은 필자에게 있어 다소 아쉬웠다. 등교하는 길에 실수로 통행증을 안 가지고 와 나치군에게 "줄리안"이 붙잡히게 되고, 그로 인해 "사라"의 존재를 알게 된 나치군이 곳간으로 가 추격씬을 펼친다. "사라"는 늑대들에게 도움을 받아 살아남게 되지만, "줄리안"은 도망치던 와중 총에 맞아 사망한 것으로 암시한다. 물론 주연인 인물이 절대적으로 사망해서는 안됨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이야기의 메인을 담당했던 캐릭터가 사망하게 된다면 그에 마땅한 씬 소비를 했어야 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영화 <화이트 버드>가 "줄리안"이라는 인물을 관객들에게 설득시키기 위해 공들여 쌓아올린 탑을 생각한다면 영화가 그 탑을 허무는 과정도 소중히 대하는 게 서사적으로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데, 영화는 너무 한순간에 탑을 무너뜨려 소비시켰고, 그의 죽음이 희생이 되어 무언가 남는 것이라도 있었다면 영화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그런 점도 없었기에 좀처럼 영화의 그러한 선택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물론 영화의 이 모든 것들이 의도였고, 이를 통해 '어쩔 수 없는 그런 슬픈 상황'이라는 점을 살리고자 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점을 생각해보아도 어색함을 감출 순 없었다.
또한 내화의 초반부를 외화 속 "사라"의 나레이션을 통해 장식하고, 배경을 소개한 것과 마찬가지로 내화의 종반부를 외화 속 "사라"의 나레이션으로 마무리지었는데, 너무 이르게 결론짓고, 황급히 마무리 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비록 영화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사라"와 "줄리안"의 슬픔 속에 피어난 사랑이고, 결국 내화도 외화 속 변화의 매개체였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외화와 내화가 뚜렷하게 존재하는 작품에서 내화를 본 작품과 같이 끝내는 것은 무리였다고 생각한다. 또한 내화를 방점 찍는 과정에서 급작스럽게 의심되었던 이웃들이 사실은 유대인들을 돕고자 했던 가족이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어느날 갑자기 찾은 아버지와 함께 파리로 떠나게 된 "사라"의 뒷이야기를 설명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관객을 설득시키고, 이해시키는 방향이 아니라 관객에게 정보를 던져주는 식의 자세였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초반부와 중반부까지의 진행이 굉장히 편하고, 안정적이었어서 상대적으로 종반부의 완성도가 떨어져 보이는 것일지 몰라도, 결국 종반부의 완성도로 인해 영화 전체의 완성도가 다소 아쉬워졌다. 더불어, 초반부와 중반부마저도 극의 안정감과 완만함에 있어서 좋았다고 생각하지, 예술적 창의성이나 색다름의 측면에서는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고, 그렇기에 영화의 후반부와 영화가 결론짓는 방법이 매우 중요했다. 영화의 초반부 진행과 순서는 관객들 모두 예측 가능한 범주 내에서 일어났고, 그 단조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청소년 남녀의 사랑으로 장식하려 했지만 모두 채우기엔 무리가 있기에 영화의 후반부에 무언가 킥이 필요했지만 부실한 킥으로 인해 이 모든 계획이 다소 어긋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필자의 관점에서 종반부가 초반부와 중반부에 비해 너무도 아쉬워 혹평을 남겼지만, 그럼에도 영화가 전하고자 했던 이야기, 교훈, 메시지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에 중요한 이슈로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혐오의 시대를 다시금 반복하지 말자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반복하고 있는 우린 무엇 때문에 다정함을 잃었을까. 어째서 우린 인류의 가장 큰 무기인 다정함을 놓아버리고, 가장 큰 원흉인 혐오를 택한 것일까. 사랑으로 서로를 품을 순 없는 것일까. 많은 분들이 본 작품을 통해 이런 질문들을 생각할 시간을 가지실 수 있으면 좋겠다.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 씨네랩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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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 끓는 검투장만큼은 변함없구려
강산이 두 번 지났음에도 리들리 스콧의 콜로세움은 세월을 비껴간 듯하다. 20여 년 전 '글래디에이터'에서 느꼈던 웅장함과 위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가 만든 검투장을 보면 여전히 피가 끓는다.
13일에 개봉한 영화 '글래디에이터 2'는 지난 2000년에 개봉한 '글래디에이터'의 24년 만에 공개되는 후속편이다. 1편의 주인공 막시무스(러셀 크로우) 사후 20년, 게타(조셉 퀸)-칼리칼라(프레드 헤킨저) 쌍둥이 황제 치하 시절을 주요 배경으로 삼았다. 1편과 마찬가지로 '현대인의 고대 로마 판타지'를 구현한다.
게르만족과의 대전투로 1편이 포문을 열었다면, 2편은 로마군과 아프리카 누미디아 왕국의 해전으로 오프닝을 장식한다. 지중해를 건너온 로마군의 수십 척의 전함들이 누미디아 왕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공격일변도로 임하고, 누미디아군은 전력을 다해 이를 방어한다. 시원시원한 스펙터클을 선사하며 기선을 제압한다.
명장 아카시우스(페드로 파스칼)가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누미디아는 함락했고, 노예가 되어 로마로 오게 된 하노(루시우스, 폴 메스칼)는 야심가 마크리누스(덴젤 워싱턴)의 눈에 띄어 검투사로 발탁돼 아카시우스를 향한 복수의 칼날을 갈기 시작한다. '글래디에이터 2'의 메인 스테이지인 콜로세움으로 오기까지의 빌드업이다.
전편과 달리 관람등급을 '청소년관람불가'로 높여서인지, 신체 훼손이나 유혈 장면 등 폭력 묘사 수위를 높이며 로마 제국의 야만성을 강조했다. 이에 맞춰 콜로세움에서 펼쳐지는 검투사 경기는 코뿔소를 탄 거구의 전사와 대결, '살라미스 해전'을 재연한 해상전 등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를 극대화하며 심장 쫄깃하게 만든다. 제작비를 아끼기로 유명한 리들리 스콧이 이례적으로 3억 달러(약 4087억 원)를 쏟아부은 보람이 느껴진다.
외형적으로는 업그레이드된 대신에 캐릭터의 깊이나 서사는 다운그레이드된 느낌이다. 아내와 아들을 죽인 황제 코모두스(호아킨 피닉스)에게 복수의 칼날을 겨누며 무소처럼 밀어붙이던 막시무스와 달리, 루시우스는 비슷하게 아내의 복수로 일어섰다가 로마의 재건을 위한 '대의'로 바뀌면서 좀처럼 와닿지 않았다. 더군다나 영화가 공개되기 전부터 미국 현지 등에서 '루시우스가 막시무스의 아들'로 적극적으로 홍보해서였는지, 막상 그의 정체가 공개되는 부분도 감흥이 없었다.
루시우스가 대의를 앞세워 로마를 바로잡겠다고 각성함과 동시에 '글래디에이터 2'의 재미도 반감됐다. 거대한 충돌이 일어날 것만 같았던 후반부 시퀀스는 한껏 부풀린 스케일에 비해 다소 멕이 빠지는 전-결로 풀어낸다. 오프닝 시퀀스를 장식했던 해상전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기에 '글래디에이터 2'를 보고 나오면, 아마 2가지 반응으로 엇갈릴 것이다. 24년 전 느꼈던 웅장함과 열기로 가득했던 콜로세움과 전투신에 감동하는 관객, 묵직하고 입체적이었던 막시무스에 비해 얕아 보이는 캐릭터들을 보며 뭔가 아쉽다고 느끼는 관객으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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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만이 마에스트로를 할 수 있다?
- 6★/10★
1976년 프랑스가 발칵 뒤집혔다. 자국 와인에 큰 자부심을 가진 프랑스인들은 줄곧 미국 와인을 두고 ‘콜라 맛이 난다’며 혹평했다. 한 영국인이 재미난 이벤트를 기획했다. 프랑스와 미국의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 각각 10종을 두고 블라인드 테스트를 진행한 것이다. 테스트 결과 두 와인 모두 미국 와인이 1위를 차지했다. 심지어 심사 위원 10명 중 8명이 프랑스인이었는데도 그랬다. 일명 ‘파리의 심판’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심사에 참석한 콧대 높은 전문가들이 한동안 인터뷰를 피해 칩거해야 할 정도로 후폭풍이 거셌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테스트 결과를 폄하하는 시도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와인의 숙성 기간이 짧았다는 등의 주장이 근거였다. 그들은 미국 와인이 프랑스 와인보다 맛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역사와 전통을 가진 프랑스 와인이 언제나 최고라는 것만이 ‘사실’이고 ‘진실’이다.
비단 와인에 한정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클래식은 상류층의 음악으로 여겨진다. 존경받는 지휘자인 마에스트로는 백인 남자만이 할 수 있다고 으레 생각된다. 이민자 여성 청소년이 마에스트로를 꿈꾼다면? 불가능한 꿈을 단념하라는 조언이 쏟아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실’, ‘현실’이 구축되는 방식이다. 누군가를 배제하고 몰아낸, 아니면 처음부터 자격 조건을 암묵적으로 합의한 결과물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제시하며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이 거대한 착시 효과는 자격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누군가가 도전했을 때 균열을 맞는다. 그러나 단 한 번의 도전으로는 깨지지 않는다. 거짓 사실, 거짓 진실은 힘이 세기 때문이다. 반례가 존재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프랑스 와인만이 최고라고, 클래식은 백인 부르주아만이 진입할 자격을 가진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자연스러운 권위를 누려온 거짓 사실과 거짓 진실을 깨는 방법 중 하나는 집요하고 끈질긴 도전이다. 〈디베르티멘토〉는 이러한 도전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 중 하나다. 전 세계 여성 지휘자의 비율은 6퍼센트라고 한다. 심지어 프랑스에서는 4퍼센트다. 알제리 출신의 서민층 이민자 가정의 자히아가 여기에 들 확률은? 지극히 낮다. 개인 연주자로 성취를 내기는 조금 더 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휘자는 오케스트라의 리더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보여주듯, 단원들이 자히아를 지휘자로 인정하지 않으면 능력을 발휘하기가 어렵다. 반면 자히아의 경쟁자인 백인 남성 랑베르는 다르다. 그가 단상에 오르기만 해도 단원의 표정에는 진지한 긴장감이 돈다. 어딘지도 모르는 ‘변방’에서 음악을 배운 자히아가 ‘어디 해볼 테면 해봐’라는 단원들의 표정을 마주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자히아는 결국 꿈을 이뤘다. 자히아가 조직한 디베르티멘토는 실존하는 오케스트라로, 매년 2만 명 이상의 전 세계 청년을 대상으로 음악을 전파하고 수많은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디베르티멘토는 18세기에 유행한 다양한 악장과 편성의 악기를 사용하는 모음곡을 일컫는다. 자히아가 어렵게 꾸린 오케스트라의 여정, 그리고 다운 증후군을 가진 어린이나 도시 외곽에 사는 아이들에게 클래식을 가르치는 자히아가 추구하는 가치가 담긴 이름이다.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순 없어도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는 있다는 자히아는 자신의 음악으로 변화한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는 중이다. 귀가 즐거운 음악과 내내 함께하는 자히아의 여정은 잔잔한 울림과 기분 좋은 설렘을 남긴다.
루마니아 출신의 세계적 마에스트로 세르주 첼리비다케가 자히아를 인정한 것이 자히아가 꿈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세르주는 남자만이 마에스트로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인데, 자히아의 지휘를 보고는 단번에 마음을 바꾼다. 그녀가 만들어내는 화음이 좋았기 때문이다. 즉 세르주는 자히아의 피부색과 성별이 아닌 능력에 주목했다. 이후에는 그 재능을 꽃피우기 위해 엄격한 훈련과 진정성 있는 조언을 줄곧 제공한다.
세르주의 태도는 사려 깊고 인상적이지만 ‘공정’하지는 않다. 능력주의는 자히아가 ‘능력’을 확보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서 시작한 경쟁자보다 더 치열하게 고투했다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차분한 감동을 전하는 이 영화는 동시에 거짓 사실과 진실을 돌파하는 또 다른 방법을 고민하도록 촉구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 영화를 여성 지휘자가 주인공이라는 점만 같을 뿐 장르와 질감이 전혀 다른 영화 〈TAR 타르〉와 함께 봐도 흥미로울 것이다. 겉으로는 능력주의를 표방하나 실제로는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온갖 부정한 일을 일삼는 최고의 여성 지휘자가 몰락하는 과정을 담은 〈TAR 타르〉는 〈디베르티멘토〉처럼 클래식의 ‘상식’에 비추어봤을 때 ‘모순적 존재’일 수밖에 없는 여성 지휘자가 마주한 여러 딜레마를 두루 살피고 고민하는 데 밑절미가 되어준다. 능력주의와 보여주기식 할당, 전통과 도전, 실력 있는 개인과 무능한 기득권 등의 다층적 구도에서 여성들은 오늘도 거짓 사실, 거짓 진실을 거스르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두 영화가 대변하듯, 이 모순적인 질곡을 돌파하는 여성의 이야기는 다채로운 긴장감을 품고 있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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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분명히 톱스타였던 내가 갑자기 무명 재연배우?
안하무인의 톱스타
오빠 일어나! 누군가가 깨우는 소리에 박강은 부랴부랴 눈을 뜬다. 우리 기사 났어! 동침을 한 동료 여배우의 말에 눈이 뜨인다. 핸드폰을 키는 박강. 뉴스란에 박강의 스캔들이 대문짝 하게 걸려있다. 연말에 귀찮은 일 생겼네. 기사를 처리할 생각에 매니저부터 생각난다. 그런데 눈치 없이 박강은 매니저만 찾지 않았다. 파트너인 동료 여배우에게 이상한 소리를 한다. "이거 너네 회사가 낸 거 아냐?" 발끈하는 동료 여배우. 집에 크게 걸려있는 박강의 초상화에 커피를 뿌리고 집 밖을 나선다.
박강의 직업은 배우다. 배우라고 하는 것은 연기를 하는 직업이다. 그리고 박강은 톱스타다. 사생활은 더럽지만 연기는 곧잘 하는 박강. 한국영화대상이라는 시상식에서 상을 받을 정도였다. 올해도 후보 지명뿐만 아니라 수상까지 성공하는 주인공. 박강은 수상소감으로 감사한 사람들에 대해 언급할 것 같다. 하지만 아니다. 그동안 함께했던 회사 식구들이나 스태프들에게 고맙다고 할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초심 잃겠다'라는, 말실수 아닌 말실수를 해 실검에 등장한다. 안하무인의 톱스타 박강. 온 세상이 우습지만 특히 더 만만한 건 친구 겸 매니저 조윤이다. 회사가 대형 에이전트는 아닌 탓에 박강의 흥망성쇠에 조윤 가족의 일상이 달려있다. 분명 연극 같이 하던 친구이자 동료였는데 조윤은 박강이 하라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다니기만 한다. 자기가 했던 수상소감처럼 초심을 완벽히 잃은 박강. 이런 박강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이 도착했다. 택시 하나를 탔을 뿐인데 자기가 톱스타였던 세계관에서 무명 재연배우인 세계관으로 옮겨진 것이다!
왜 지금 개봉을?
영화에서 중요한 시간적 배경은 크리스마스다. 이 영화 전체적으로 기본적인 구색을 갖췄다고 느낀 것은 이 시간적 배경 덕분이다. 영화의 이야기에서 이 작품이 왜 이 시기로 잡았는지 설명하는 편이다. 일단 크리스마스가 있다는 것은 시기가 연말이라는 것이다. 연말이기 때문에 시상식이 있다. 이 시상식에서 박강이라는 인물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묘사하는 대사가 있다. 또 크리스마스 자체가 가족들이랑 보내는 시간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만큼 감독이 이야기의 완결성을 잘 생각했다고도 볼 수 있다. 또 크리스마스가 예수의 탄생이라는 상징적인 의미와도 연관이 있다. 이 상징적인 의미는 후반부에 어떤 대사와 이어진다. 각본을 쓴 마대윤 감독이 이 부분을 일부러 만들었을까?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또 영화 전체적으로 크리스마스라는 시각적 이미지를 이야기의 터닝포인트로 활용한 부분이 몇 개 있다.
이렇게 크리스마스라는 소재에 여러 키워드를 넣다 보니 좀 아쉬워지는 부분이 있다. 왜 개봉시기가 2023년 1월일까? 하는 생각이다. 2022년 12월에 <아바타 : 물의 길>이라는 자연재해가 있었기 때문일까? 그런데 글쓴이는 11월 말에도 개봉시기로 적합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물론 ‘새로운 인생의 탄생’이라는 관점이 극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 모티브이기 때문에 1월의 개봉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올빼미>나 <육사오>처럼 장르적인 개성을 어느 정도는 잡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후자의 영화(<육사오>)의 경우처럼 나름의 뚝심을 가질 수 있는 작품이 되지는 않았을까 생각한다. 적당히 좋은 작품이긴 하지만 후에 개봉하는 <유령>, <교섭>보다 더한 임팩트를 가질 수 있을 거라고는 예감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시기가 좀 아쉬운 영화가 됐다.
심심하면 만날 수 있어
영화의 소재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바로 작년 11월에 개봉했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다. 찡한 가족드라마이자 ‘당신의 운명을 사랑할 수 있나요?’라고 묻는 영화. <덩케르크>처럼 미니멀하게 접근하는 것이 아닌 넣을 수 있는 건 죄다 때려 박아서 내내 폭발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그 하나하나 빼곡히 넣은 소재가 영화의 주제 중 하나(‘모든 것을 경험하고 난 후의 삶’)과 이어져서 의미 없이 소모되는 것이 없었다. 이 <에브리씽~>은 이렇게 연출과 이야기가 맞아떨어지는 쾌감 덕분인지 많은 분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하려고 하는 말의 방식이 신선해서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이다. 이렇게 일상과 운명에 대한 이야기는 전 세계의 영화인들이 사골국같이 우려낸 소재다. 이제 <에브리씽~>의 연출방식이 아니면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비단 <소울>만 봐도 이런 소재 영화가 재작년에도 있었다.
이 <스위치>는 이렇게 익숙한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개성이 느껴졌다. 바로 영화에서 기본적인 구성이 어느 정도는 갖춰졌기 때문이다. 이는 <올빼미>나 <육사오>와 유사한 느낌이다. <올빼미>가 대체역사물과 스릴러라는 익숙한 맛을 살렸다면 <육사오>는 그냥 순수하게 웃기는데 집중한 영화다. 이와 마찬가지로 <스위치>는 가족구성원들의 캐릭터를 잘 살렸고, 가족의 유대감을 살려 코미디로 소화하는 연출이 몇몇 보인다. 대표적으로 아내 수현 캐릭터가 박강의 행보를 설명해주는 인물처럼 보인다는 것이 그를 설명할 수 있다. 수현이 어떤 캐릭터로 설정됐느냐에 따라 박강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데 영화는 좋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나름 잘 구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인물이 좋은 사람이라 마음이 간다. 그런데 아쉬운 부분도 있다. 수현의 몇몇 대사는 좀 오그라든다. “이렇게 예쁜 선물을 받아서 화가 난고야?”같은 대사는 아쉽다. 이 부분은 영화의 가장 큰 단점과도 이어진다. 수현에게 비교적 올드한 연출이 집중되기 때문에 거의 주인공쯤 되는 분량인 이민정 배우 부분이 약간 숙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서사 몰입에 집중이 안 되는 것이다.
다른 가족구성원으로 나오는 어머니, 아들/딸은 나름 연출로 잘 살렸다. 자녀가 되는 로이, 로하 역할은 살짝 아쉬운 박강의 감정선에서 관객을 설득하는 역할을 한다. 무슨 말이냐고? 아이들이 귀엽다. 특히 박소이 배우도 귀엽지만 그 동생으로 나온 분이 애가 이쁘다. 극 중에서 그렇게 잘생긴 아이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냥 귀엽다. 캐릭터를 살리는 인물 설정이나 촬영방식에서 이 둘을 살리는 연출이 주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캐릭터인 어머니 역은 두 인물의 차이를 보여주는 역할을 나쁘지 않게 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처음 등장할 때 어떤 위치에서 나왔고, 두 번째 등장할 때 어디서 만났는지를 보다 보면 가족구성원의 위치가 박강을 설명하는 좋은 매개체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스위치>에서 신파극적인 요소를 거의 찾을 수 없었다고 생각하는데, 이 부분의 근거는 중 후반부쯤에 어머니가 어떤 연기를 보여주는 신이 있다. 뭐 다른 분들은 글쓴이만큼 좋아하진 않겠지만 나는 이 장면이 감정적으로 찡했다. 어머니와 아들 간의 관계를 이렇게 엉엉 울지 않아도 표현할 수 있다. 좋은 연출의 예시였다.
살짝 새는 구멍
영화에서 가장 근본적인 세팅은 역시 멀티버스다. 영화에서 직접적인 '다중우주' 언급이 없긴 하지만 뭐 다른 평행세계의 삶을 그렸다는 점에서 멀티버스를 언급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영화 자체에서 이에 대한 설명을 깊게 안 하고 지나가는 것이 좋았다. 단순히 작년만 해도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 <닥터 스트레인지 : 대혼돈의 멀티버스>를 비롯한 다양한 영화에서 이에 대한 묘사가 나왔다. 이 이유의 연장선상에서 다중우주를 다룬 영화와 드라마는 많았다. 당연히 이를 두 번 세 번 설명하면 좀 지루하다고 느꼈을 것 같다. 영화는 이 설정을 과감히 생략하며 이야기의 선택과 집중을 강점으로 발휘시켰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 '가족영화적 특성'에 임팩트를 집중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집중하다 보니 아쉬운 부분이 살짝 보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박강이라는 인물을 곁에 둔 주변인들의 리액션이다. 영화에서 강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은 세계관이 바뀐 박강의 상태 묘사다. 박강은 다른 세계관에서 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당연하다. 다른 세계에서는 슈퍼스타였던 그가 서프라이즈 재연배우로 만족한다는 게 말이 쉽지 막상 내 입장이 되면 나 같아도 저렇게 행동한다. 여기에 물리적인 분량을 할당하고 인물의 서사를 쌓은 방식 자체는 코미디로서도 좋고 영화의 매끄러운 연결이라는 측면에서도 탁월했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다. 영화에서 어느 지점을 넘어가면 박강의 가까운 지인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묘사된다. 여기서 박강의 인물선은 입체적인데 주인공과 친한 인간관계의 감정선은 평면적인 쪽에 가깝다. 설정에 대한 설명 이전에 박강이 어떻게 이 사람들과의 관계가 이렇게 유지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있으면 좋지 않았을까? 인물 서사에서 이를 묘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후반부의 어떤 이야기전개는 숙제를 푸는 듯이 쉭쉭 넘어간다. 수현이 좋은 사람인 것에 의존하는 셈이다.
그리고 어떤 떡밥은 영화가 강박적으로 풀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영화 전체적으로 따뜻한 가족영화적인 특성을 살렸다. 이를 위해서 떡밥을 푸는 행동은 필연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방식 중 ‘와 이건 좋았다’ 싶은 부분도 있다. 가령 수현이 그림을 그리는 아티스트라는 것, 박강의 가족관계에 대한 부분이 그렇다. 수현이 그림을 그리는 부분은 이 부부에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소재가 된다. 박강의 가족관계에 대한 부분은 후반부까지 이야기를 나름 잘 챙겨서 이야기 서사에 굴곡을 부여한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이것이 ‘강박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영화의 엔딩 장면에 대한 이야기다. <헌트>의 엔딩에 대해서 써보자면, 이 작품의 끝 장면은 고윤정 배우가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이정재 감독이 나중에 인터뷰한 것을 바탕으로 ‘이랬겠구나’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반대다. 영화의 인물들이 뭘 어떻게 했는지를 너무 대놓고 다 보여준다. 만약 처음 만난 그 장면에서 끊었으면 여운이 엄청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가 지나치게 친절한 셈이다.
낡은 구석들
전체적으로 기본적인 이야기를 잘 갖춘 영화지만 나이 든 영화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있다. 바로 권상우 배우의 상의 탈의 신 몇 개다. 영화에서 권상우 배우가 상의탈의를 한 장면이 다섯 번 정도 된다. 여기서 두~세 번 빼고는 사실상의 탈의 안 해도 된다. 특히 찜질방에서 조윤과 대화하는 신은 이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권상우 배우 멋있는 걸 굳이 이 영화를 통해서 알아야 되는 건 아니다. 게다가 여기서 보여주는 코미디 신은 호보다 불호가 더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한 박강이 슈퍼스타인 자기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어떤 장소에서 어떤 행동을 한다. 아 진짜 싫다. 이걸 재밌어하는 분들도 있을 것 같다. 글쓴이는 진짜 너무 싫었다. 왜 저러지? 싶었다. 이후에 박강과 어머니의 대화 신에서 느껴지는 뭉클함이 인상 깊어서 이게 더 두드러졌다.
그리고 수현이라는 캐릭터의 연출 방식도 살짝 아쉽다. 수현 캐릭터는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다. 배우로서의 성과가 시원찮은 박강을 굳게 일으켜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 어머니로서도 두 아이들에게 좋은 어머니가 되어준다. 그렇다고 인물을 납작하게만 설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인물에서 몰입이 깨지는 느낌은 대사(들)에서 나온다. ‘나 같은 예쁜 선물을 받아서 기분이 나쁜 거야?’식의 대사는 이민정 배우가 처음 등장했던 <그대 웃어요>에서나 본 대사다. 이런 대사가 이야기가 잘 전개되다가 갑자기 등장해서 좀 의아해지는 부분이 있다. 이민정 배우의 사랑스러운 얼굴이 영화에 플러스가 되는 셈이다. 근데 수현이라는 캐릭터를 생각할 때 이것만 기억나는 거라면 이런 연출방식이 좀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직업은 배우
사실 권상우 배우에게 예술가적인 기대를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다. ‘옥상으로 따라와’와 ‘사랑은 돌아오는 거야’ 빼곤 20대 후반인 글쓴이에게도 뭔가 신선한 느낌이 없다. 저번 작품인 <히트맨>에서도 뭔가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이 <스위치>에서 권상우 배우는 굉장히 좋은 연기를 보여줬다. 왠지 불쌍한 무명배우와 슈퍼스타의 간극을, 어떻게 드러내야 할지를 잘 연구해서 표현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 극에서 굉장히 찡한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도 권상우 배우가 이렇게 감정적인 전달이 좋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연기를 보여준다. 안하무인 톱스타가 어떻게 이 어머니에게 감사함을 느끼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외로운 눈빛과 몸짓으로 풀어낸 것이다. 이 분이 새삼 직업이 셀럽이 아니라 배우인 것을 느꼈다.
그런데 이 권상우 배우의 최고작 갱신에도 불구하고, 오정세 배우의 퍼포먼스가 압도적이었다. 이 배우가 능력을 보여주는 것은 극 중 극 연기다. 이 영화 안의 드라마 연기와 영화 자체의 퍼포먼스를 비교하면 전자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또 조윤이 톱스타가 된 세계관에서의 연기도 나름 충실했다. 대놓고 조윤을 안 챙기는 박강과는 다른 대비되는 모습을 '어떻게 하면 인물들의 사각지대에 놓일 수 있지'를 연구하고 표현한 느낌이었다. 오히려 과시적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 절제된 인물로 톱스타의 오만과 미덕에 대해 연기하는 좋은 퍼포먼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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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7월 22일>, 영화가 고통을 재현하는 이유
넷플릭스 <7월 22일>, 영화가 고통을 재현하는 이유
2011년 7월 22일 오후 3시 반에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의 정부청사에 폭탄테러가 발생해 총리실 건물이 크게 파손되고 7명의 사망자와 19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같은 날 오슬러 북서쪽 30km에 위치한 우퇴위아 섬에서는 총기난사 테러가 발생했다. 우퇴위아 섬은 당시 집권 여당인 노동당 청년캠프 행사가 열린 장소였고, 700명이 넘는 10~20대 청소년이 캠프에 참여 중이었다. 고립된 장소에서 테러의 범인인 아네르스 브레이비크는 아무런 방해 없이 68명의 청소년을 죽였다. 2018년에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7월 22일>은 바로 이 노르웨이 테러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7월 22일>처럼 비극적인 사건을 소재로 하는 영화들은 언제나 해당 사건을 얼마나, 또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에 대한 딜레마에 빠진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관음증적인 성격을 지닌 엔터테인먼트라고 할 수 있다. 관객들은 철저히 제 3자의 시각에서 카메라에 담긴 인물들의 삶의 단면을 감상한다. 문제는 스크린에 펼쳐지는 인물들의 삶이 아픔과 고통으로 가득할 때다. 카메라는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을 뿐, 그들이 도움을 필요로 하더라도 결코 도울 수 없다. "누군가의 상처를 엔터테인먼트로써 바라만 보는 것이 윤리적인 일일까?"라는 의문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특히 그 상처가 가상이 시나리오가 아닌,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라면 해당 사건을 재현해서 관객들에게 오락으로 제공하는 영화의 윤리성에 대해서는 더더욱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전쟁 영화의 걸작이라고 평가받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오프닝 시퀀스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상황을 가장 완벽히 구현해 강렬한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평가받는다. 영화는 관객들이 이 장면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느끼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전쟁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고 조국을 위해 희생하는 주인공들의 행동에 개연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재현의 윤리를 잊었다는 비판도 받는다. 꼭 제2차 세계 대전이 아니더라도 전쟁터에 복무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오프닝 시퀀스는 보는 것만으로도 트라우마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리 철저히 고증을 하고 생생한 카메라 구도로 당시의 상황을 보여줄지라도 관객들은 결코 전쟁터를 실감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러한 재현은 철저히 기만이라고 볼 수도 있다. 비처럼 쏟아지는 포탄과 총을 맞고 다리가 잘려 나간 군인들의 비명소리는 스크린 속의 가상에 불과하다. 영화를 보면서 다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기에 의자에 앉아서 고통스러운 이미지와 음성을 접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그 현장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고, 이는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타인의 고통과 아픔을 다루지 않는다면 그 또한 문제다. 영화의 존재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극 예술을 카메라에 담은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극 예술의 시작이 등장인물의 고통과 비극에서 비롯된 강렬한 페이소스와 카타르시스에 기반을 둔 그리스 비극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다. 실제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길을 그 어떤 미디어보다 생생하고 쉽게 열어준다는 점은 영화의 가장 뛰어난 장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7월 22일>은 왜 영화가 때로는 비윤리적이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재현해야 하는지에 대해 적절한 답변을 내놓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초반부만 놓고 보면 이 영화 역시 재현의 윤리를 잊은 듯 보인다. 테러를 준비하는 범인의 모습, 테러가 발생한 정부청사, 범인이 우퇴위아 섬에 들어가는 과정과 그 안에서 벌어진 학살극, 무방비로 죽고 부상당한 학생들과 수많은 유가족들의 눈물과 비명까지 영화는 감독 특유의 핸드헬드 기법을 활용해 결코 길지 않지만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전달한다. 이 대목에서 <7월 22일>은 분명 반인류적 범죄를 오락으로 소비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영화의 구성은 테러 사건의 고통스러운 이미지와 음성을 왜 되살려야만 했는지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7월 22일'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고, 테러의 전후 사정과 흐름을 구체적으로 짚는 것과 별개로 영화의 초점은 테러가 아니라 테러 이후 피해자들의 삶에 맞춰져 있다. 실제로 작중 테러를 묘사하는 장면은 2시간 중 첫 30분을 넘기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총격을 당해 뇌수술을 받은 '빌야르(요나스 스트란 그라블리)'와 그의 가족이 살아가는 모습과 범인인 '아네르스(아네르스 다니엘센 리)'가 재판을 준비하는 과정을 번갈아 비추면서 그 이후 러닝 타임을 가득 채운다.
이러한 구성은 보는 것만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를 실감은 못할지언정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주며, 더 나아가 영화의 메시지를 강조한다. 힘겹게 법정에서 증언하는 빌야르는 이렇게 말한다. "(범인이) 나를 죽일지 살릴지 알 수 없었어요. 그러나 지금 저는 선택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제게는 아직 가족이 있고 친구들, 추억, 꿈, 희망, 그리고 사랑이 있어요.(...) 저는 살기로 선택했어요." 세상에 끔찍한 일이 많지만 이를 피해서는 안된다고, 두려움과 공포가 뺏지 못한 것을 믿고 이겨나가야 한다며, 가해자에게 그가 성공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힐난하는 이 대사는 물론 그 자체로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친구들을 잃고, 재활 과정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삶을 포기하려고 했던 빌야르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모습을 옆에서 보며 최소한의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인상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영화가 참극을 굳이 재현하는 이유다.
한편 <7월 22일>의 재현은 테러 당시와 현재 상황이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유의미하기도 하다. 사건의 범인인 아네르스 브레이비크는 극우적인 이념의 소유자로, 늘어나는 무슬림 이민자들이 유럽을 망치고 있으며 백인들을 위한 유럽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유로 테러를 일으켰다. 그리고 2020년 현재 모든 인류의 공통된 위기인 판데믹 상황에서 우리는 아네르스의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민족주의가 흑인과 동양인을 대상으로 여전히 살아있음을 목격한 바 있다. 이러한 차별과 억압의 결과가 어떤 모습일지 <7월 22일>은 9년 전 사건의 재현하면 일깨워 주고 있으며, 이는 과거의 아픔을 재현하는 작품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또 하나의 답이다.
E(Exceed expectations, 기대 이상)
때로는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영화가 고통을 되살려내는 이유
* 본 콘텐츠는 브런치 DAY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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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거운 기억만 하겠습니다
이일형 감독이 연출과 각본을 맡았던 데뷔작 <검사외전, 2016>은 천만 영화에 불과, 30만명이 모자랐다. - 데뷔작으로 천만 관객을 넘긴 감독은 <변호인, 2013>의 "양우석"감독과 <범죄도시 2, 2022>의 "이상용"감독이 있다!
국내 영화로는 가장 적은 수치이지만, 가장 적은 격차는 <보헤미안 랩소디, 2018>가 기록한 994만명이다. - 재개봉 안 해주나?
시작부터 제대로 흥했기에 그의 차기작에 거는 기대치도 있는 이번 영화 <리멤버>에서도 연출과 각본을 맡았다.
근데, 오리지널은 아니고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출연했던 <리멤버: 기억의 살인자, 2015>의 리메이크이다.영화는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점차 잃어가는 80대 노인 "필주"가 과거, 자신의 가족들을 파멸시킨 친일파들에게 복수한다는 내용이다.
1. 익숙한 영화들이 많이 보이는데...
먼저, 원작 영화가 있다는 <리멤버>에는 익숙한 영화들이 겹친다.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점차 잃어가는 "필주"의 모습에는 <메모리, 2022>의 리암 니슨", 문신을 새겨 복수의 대상을 잊지 않으려는 모습 또한 <메멘토, 2001>의 "가이 리치"가 생각나며, 그의 운전을 도와주는 "인규"와의 합은 <콜래트럴, 2004>이 연상되니 잘 짜깁기만 하면 새롭진 않더라도 재밌어 보인다.
무엇보다 "복수극"을 띄우는 이야기의 뻗어나가는 이야기의 힘이 상당히 좋다!물론, 준비 자세를 갖추는 데에 어려움이 있지만 '오랫동안 준비했다'라는 말과 함께 "플래시 백"으로 정리해 동기들을 설명하나 전개의 개연성을 따진다면 한없이 파고들 수 있겠지만 개의치 않음으로 "고구마"로 정리되는 답답한 전개를 없앤다.
결국, 폭발이 예고됐음에도 좋아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2. 역사 책과 다른 게 없더라!
그렇다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aka. 반민특위)"은 뭘까?
1910년 경술국치를 시작으로 1945년 광복까지 지난 35년간 일제 치하에 충성과 다른 시민들에게 위해를 끼친 인원들을 조사하는 조직위이다.
1948년에 조직해 집행유예 5인, 실형 7인, 공민권 정지 18인 등 총 30명에게 법원 명령을 내렸지만, 결과적으로 처벌받은 이들은 없다. - 이후 1949년, 1년 만에 해산되었다.
이는 지금까지도 일부 친일 세력들이 대한민국 사회 구조의 위에 있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영화 <리멤버>, 역시 처단해야 하는 대상들이 "초대 국방부장관"과 "기업 대표", 그리고 "작가" 등. 사회에서 위치를 차지하는 것과 달리, 주인공 "필주"는 레스토랑 아르바이트생에 불과하다.
극 중. 법원이 해결해 주지 못하는 것들을 앞서 언급한 예고된 폭발로 보여줘 관객들에게 시원함을 안겨주는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 활극이 좀 더 시원하게 느껴지지 않는다.3. 역사는 바뀌지 않는다.
이런 이유에는 "필주"를 비롯해 복수의 대상이 되는 캐릭터들의 이미지와 설명이 스크린 너머 "국사책" 혹은 뉴스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설명이 쌓기도 전에 캐릭터들이 자꾸만 퇴장하니 난감할 상황이긴 하다.
그렇기에 "필주"의 옆에서 도움을 주는 "인규"의 모습은 역사를 대면하는 "젊은 세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 "꼭 이래야만 하느냐"라는 "인규"의 말에 총으로 응수하는 "필주"의 장면이 그러하다.
마지막 할아버지의 치부를 듣는 손녀 딸의 표정은 그 간격을 줄여줄지도 모른다!· tmi. 1 - 본 작품의 원작 "크리스토퍼 플러머"의 <리멤버: 기억의 살인자2015>의 각본가 '벤자민 어거스트'는 '나이 든 배우들이 주연을 적게 맡는다고 느꼈고, 그래서 나이 든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를 쓰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 tmi. 2 - 영화 <암살2015>의 "염석진"이 "내가 독립운동가였다!"라며, 항변하는 장면이 "반민특위"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 tmi. 2. 1 - 재밌는 건 "염석진" 자신을 재판에 넘긴 검사의 멱살을 잡고서 "이 친일파 아들놈의 새끼가 니가 지금 와세다 법대 나와서 꽃방석에 앉았다고 내 앞에서 떵떵거려? 니 애비도 우리 암살 리스트에 있었어, 이 새끼야."라고 소리치는 것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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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기는 티키타카! 류승룡이 다시 돌아왔다! 장르만 로맨스!
류승룡 배우가 주연을 맡은 영화 장르만 로맨스가 개봉했습니다.
배우인 조은지 감독의 상업장편 영화 데뷔작이죠.
주요 등장인물들의 티키타카가 매력적이고, 특히 류승룡 배우의 코믹연기가 돋보이는 영화입니다.
물론 진중한 연기도 같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흥미롭고 따뜻하게 볼 수 있어요.
가족이나 친구들과 보기에 좋은 영화입니다.
사람들간의 관계에 대한 영화이니 주변 관계들을 생각하며 보시면 더 흥미롭게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세한 리뷰는 전체 영상을 봐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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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부기> 메인 예고편
언젠가 NBA에서 활약할 날을 꿈꾸는 농구 유망주 ‘알프레드 부기 친’(테일러 타카하시)은 대학 진학과 장학금 문제로 부모님과 대립하기 시작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시아계 2세대로서의 정체성 고민, 라이벌과의 실력 차이, 여자친구와의 갈등까지 겪게 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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