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2022-05-04 00:26:46
그 우연의 마법들은 바로 감독의 상상이었다.
하마구치 류스케 <우연과 상상> 시사회 리뷰
제71회 베를린국제영화제(2021년)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고 현재 <드라이브 마이 카>로 칸 영화제, 오스카(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다수 부문에서 후보로 오르며 한국에도 더욱 많은 팬들을 만든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다. <우연과 상상>은 40분 내외 단편 세 편으로 구성된 옴니버스 형식의 단편 프로젝트로 <드라이브 마이 카>와는 또 다른 느낌을 준다.
‘단편’과 ‘장편’의 차이가 있다면 인물과 플롯 모두 단순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감독은 이 점을 잘 활용하여 심플하고 흥미로운 플롯 라인에, 그 과정을 긴 호흡으로 보여준다. 또한 이런 연출 스타일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강점이라는 의견이다. 그냥 ‘만났어. 안 잤어. 또 만날 거 같아'가 아닌,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했고, 그때의 감정은 어떠했고, 다음 만남을 위해 이렇게 얘기했어'라는 그 과정을 얘기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 2부 중간쯤, 나오는 세가와가 지은 소설을 세가와 앞에서 읊으며 소설에 왜 이런 부분을 넣었냐고 질문한다. 나오의 질문에 세가와는 '이 부분을 통해 독자의 관심을 끝까지 끌고 가는 거죠'라는 식의 말을 건넨다. 도발적인 도입부를 시작으로 묘한 긴장감을 주며 끝까지 관객들의 관심을 쥐고 있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연출작이다.
등장하는 세 편의 이야기는 모두 두 인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1부, <魔法: よりもっと不確か/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
모델 메이코(후루카와 코토네)는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스타일리스트이자 절친 츠구미(현리로부터 거래처에서 만난 새로운 남성과의 인연에 대해 듣는다. ‘달리는 택시 안’이라는 조명, 카메라 각도 등 연출이 제한적인 상황에서는 텍스트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빠른 컷 전환이 아닌 원 쇼트를 보는 듯한 긴 호흡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상 이야기의 대부분이자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부분 모두 택시 안에서 대화로 이루어진다. 꽤나 긴 대사임에도 연기를 하는 듯한, 다음 이야기를 알고 대화를 주고받는 연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관객도 프레임으로 하여금 같은 공간에서 츠구미의 ‘썰’을 듣는듯한 느낌을 준다. 이후 나오는 이야기들도 다른 주제이지만 비슷한 느낌의 연출 형식으로 진행한다.
2부, <扉は開けたままで/ 문은 열어둔 채로>
사사키(카이 쇼우마)와 파트너 관계를 맺고 있는 기혼 대학생 나오(모리 카츠키)는 사사키의 부탁에 담당 교수인 세가와(시부카와 키요히코)의 명성을 추락시키려 한다.
3부, <もう一度/ 다시 한 번>
동급생 이름조차 제대로 생각나지 않는 나츠코(우라베 후사코)는 20년 만에 고향의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한다. 돌아오는 길, 유일하게 가장 친했던 아야(카와이 아오바)를 마주치게 된다.
세 편의 이야기에는 모두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마법이 작용한다. 이러한 마법들은 우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일들이지만 그로 인한 주인공들의 반응과 결과는 제각각이다. 또한, 마법은 각기 다른 위치에서 작용한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마법은 중간, 두 번째는 말미, 세 번째는 초반에 작용한다. 영화의 구조를 보자면, 1부는 앞서 말했듯 ‘나의 친구’ 츠구미의 이야기를 메이코와 흥미진진한 연애 이야기를 듣는 듯하다. 2부는 좀 더 높은 성적 긴장감을 가지고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다. 이 긴장감을 가지고 3부를 들었을 때, 묘한 위로를 받게 된다. 마치 2부에서 세가와의 작문법처럼 말이다. 영화의 가장 첫 장면인 ‘모델 츠구미를 촬영하는 사람들을 보는 관객(카메라)'이라는 시선에 시선을 통해 순식간에 몰입도 높이며 시작한다. 그리고 1,2부의 감정구축 덕분에 긴장도가 좀 풀리는 듯한 3부는 오히려 힘을 받을 받게 된다.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이들의 관계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감독의 상상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때로는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도 있고, 묘한 긴장감 속에 긴 대화에도 관객의 관심을 놓지 않는 능력이 있는 감독이라는 생각이 좀 더 확실해지는 영화다. 영화를 보고 있자면 중간중간 웃음이 나오는 장면들이 있다. 되돌아 생각해보면 인물들의 솔직함이 나온 순간들이었다. 우연과 상상 속에서, 우리의 솔직함이 우리를 웃음 짓게 만들 것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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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 구심점 없이 흩어지는 이야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깊은 숲에서 펜션을 운영하는 '전영하'(김윤석). 그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의 소원이 담긴 펜션을 소중히 운영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앞에 께름칙한 손님 한 팀이 나타난다. 어린 남자아이와 함께 펜션을 예약한 '유성아'(고민시). 그녀는 아이에게 지나치게 무관심하고, 묘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영하를 불편하게 만든다.
다음날 아침, 영하는 유성아가 새벽 일찍 떠났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관심을 보이던 LP판에는 혈흔을 묻혀 놓고, 화장실은 락스로 깨끗하게 청소했으며, 수장 두 건을 없앤 채로. 직감적으로 유성아가 데려 온 아이를 살해했음을 눈치챈 영하. 하지만 그는 남은 증거를 불태우고 모른 척하기로 결심한다. 혹시나 소문이 나면 펜션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르니까. 1년 뒤, 유성아가 그의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보상받지 못한 호불호
작품성과 대중성. 영화, 드라마 제작진이 언제나 고민할 딜레마다. 다른 예술도 다르지 않지만, 특히 영상 매체는 막대한 제작비를 필요로 하기에 항상 대중성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대중성이 언제나 옳은 길인 것도 아니다. 안정적으로 보이는 선택이 그 반대인 경우도 많다. 대중은 언제나 새로운 자극을 원하니까.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OTT의 성장은 반가울 수밖에 없다. OTT가 불러온 긍정적인 변화 중 하나는 작가와 제작자의 두려움이 줄었다는 것. 크리에이터의 비전에 크게 개입하지 않으니 이전까지는 관객 수나 시청률, 대중의 호불호를 우려해 제작하지 않던 작품이 빛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부작용도 나오고 있다. 대중성과 괴리되는 작품이 늘어나면서 OTT의 파급력도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이 적지 않다.
<부부의 세계>의 모완일 감독이 연출한 넷플릭스 드라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실험적인 스릴러다. 관련 없어 보이는 과거와 현재를 느린 호흡으로 교차하다가 마지막에야 모든 감정선을 폭발시킨다. 서스펜스보다 메시지에 초점을 맞춘 듯 보이고, 대중적으로 익숙한 작법이 아니니 호불호도 필연적이다. 하지만 호불호를 불사한 선택이 역으로 드라마 전체의 만듦새를 무너뜨린 나머지 실험은 무위에 그쳤다.
돌 맞은 개구리 이야기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간단하다. 우연히 범죄자와 마주쳐 피해자가 된 이들의 사연이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범죄자가 던진 돌에 맞은 개구리가 그 상처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비춘다. 과거 모텔 사업을 하던 '구상준'(윤계상)은 연쇄살인범 '지향철'(홍기준)을 만난 후 가정이 무너진다. 현재 펜션을 운영하는 영하도 사이코패스 살인자 유성아를 고객으로 만난 뒤 일상이 파괴될 위기에 처한다.
이에 더해 개구리에게 돌을 던지는 또 다른 사람들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살인자뿐만 아니라 기자나 경찰, 자극적인 이슈에 몰입한 이들 또한 돌을 던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극 중 기자와 경찰 모두 그럴듯한 대의나 정의감 대신 특종이나 자기만족을 위해 상준과 영하를 이용하니까. 신문사 기자는 지향철 관련 특종을 잡으려 상준과 인터뷰하려 하고, '윤보민'(하윤경/이정은)도 연쇄살인범을 만나보고 싶다는 마음에 상준을 이용한다.
이 상황에서 개구리에게는 두 선택지가 있다. 상준처럼 과거에 갇힌 채 무너질 것인지, 아니면 상준의 아들인 '기호'(박찬열)처럼 자기 방식으로 과거와 맞서 싸워 트라우마를 이겨낼 것인지. 이 지점에서 무관해 보이는 과거와 현재는 접점이 생긴다. 아직 유성아와의 악연이 끝나지 않은 영하는 상준이 될 수도 있고, 기호가 될 수도 있으니까. 따라서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영하가 어떤 결정을 할지 쫓는 심리극이라 할 수 있다.
잘못된 역할의 부작용
그러다 보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일반적인 스릴러와는 느낌이 다르다. 중반부까지는 미스터리 드라마에 가깝다. 두 주인공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전개돼야 비로소 그들의 공통점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 그들의 접점을 눈치채기 전까지는 전체적인 흐름을 종잡을 수가 없을 정도로 모호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스릴러를 기대한 시청자 입장에서는 필연적으로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다.
여기서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악수를 뒀다. 각 캐릭터에게 역할을 잘못 부여하면서 이질감을 극대화한다. 사실 상준과 영하의 시점으로 나뉜 이야기를 접합하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다. 윤보민이 그 접착제다. 과거 신참 형사로서 상준 사건에 참여했고, 지금은 새로 부임한 소장으로서 영하 사건에 개입하는 윤보민. 드라마는 그녀를 매개로 접점이 없는 두 아버지의 이야기를 엮어내려 한다.
그런데 정작 윤보민은 철저한 관찰자다. 그녀가 주도적으로 두 사건을 해결한다기보다는, 두 주인공이 어려움을 겪을 때 옆에서 조망할 뿐이다. 여기에 더해 그녀 자신의 이야기도 과거와 현재 두 시점에서 따로 펼쳐진다. 그 결과 윤보민이라는 캐릭터 때문에 드라마는 오히려 구심점을 잃어버린다. 두 이야기를 엮기 위해 만든 인물 때문에 오히려 서로 다른 세 개의 이야기가 동시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 결과 후반부로 갈수록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가지가 너무 많아진다. 각 플롯이 각자 할 말만 한다. 영하와 유성아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려고 하면 상준의 이야기가 끼어든다. 성인이 된 기호가 등장하면서 상준의 플롯은 더 복잡해지고, 기호와 영하의 접점을 묘사하는 동안에는 유성아가 잠시 잊히는 느낌마저 든다. 차라리 철저히 윤보민의 시점에서 과거와 현재를 오갔다면 난잡함이 덜하지 않았을까 싶다.
미진한 캐릭터 활용
이에 더해 반전을 주려고 전개를 꼬는 중에 메시지와 스토리의 모순도 노출하고 만다. 그 중심에는 유성아가 있다. 사실 시청자 입장에서 그녀는 좀처럼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그녀가 동기가 뭔지, 그녀가 왜 아이를 살해했는지, 왜 영하의 펜션에 집착하는지. 그녀의 행동과 표정 하나하나가 이해할 수 없어서 두렵다. 그러다 보니 영하가 돌 맞은 개구리가 되는 과정에도 몰입하기 쉽다. 영하만큼이나 시청자도 영문을 알 수 없기 때문.
하지만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사족을 덧대 매력을 스스로 가린다. 재벌가 출신 사이코패스라는 개인사가 드러는 순간, 유성아는 개성을 잃는다. 그녀는 이제 익숙한 한국형 악역이다. 그러니 그녀에 대한 신비감이나 공포감도 일순간 사라지고, 그녀가 원우먼쇼로 지탱해 온 서스펜스도 단숨에 사라진다. 그녀가 그린 그림, 펜션 인테리어, 고민시의 연기가 어우러지며 자아낸 답답한 분위기마저 불친절한 과시로 보이기 십상이다.
결국 드라마의 주제마저 모호해진다. 사고와도 같은 범죄자와의 만남이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의 핵심 소재다. 그런데 유성아의 가족사는 그 사고를 통속적인 가족극으로 뒤바꿔 버린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딸, 유성아가 아버지 영하의 사랑을 받은 딸, '의선'(노윤서)을 노리는 꼴이다. 즉, 메시지를 집약하고 있는 상준과 영하의 접점 대신 유성아와 영하의 딸의 차이만 부각되면서 평범한 범죄 드라마로 귀결된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충분히 흥미로웠다. 범죄자나 형사의 시점이 아니라 피해자 관점에서 진행되는 스릴러라는 특징이 확실했다. 범죄 사건 피해자의 고통보다 사건의 자극성에만 열광하는 세태를 지적하는 의도도 시의적절했다. 그저 일관된 방향성을 잡지 못한 나머지 주요 플롯이 중구난방으로 흩어졌을 따름이다.
결국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애매한 스릴러, 평범한 넷플릭스 작품 중 하나로 남는다. 캐릭터가 인상적이지도 않고, 특별한 메시지가 뇌리에 꽂히지도 않는다. 전달 방식이 독특하지도 않다. 그나마 고민시라는 배우의 필모그래피에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라는 사실이 수확이라면 수확이지 않을까.
Poor 형편없음
산해진미도 요리사가 레시피를 잘못 선택하면 무의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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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태일, 그리고 이름없는 여자들
<미싱타는 여자들>은 다큐멘터리 영화이나, 본문에 영화 전체 내용을 포함합니다.
*1.
올해도 훌쩍 가버렸다. 크리스마스를 보름 조금 넘게 앞두고, 청계천변에는 오색찬란한 등을 밝힌다. 일 년에 한 번, 청계천변은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한다. 종교에 대해 말하는 건 아니고, 나는 언젠가 가장 낮은 자의 모습이란 뭘까 생각했다. 마굿간에서 태어났을지언정 백인 남성의 지위는 너무 높은 자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소설가 박태원의 작품 <천변풍경>에서는 한국전쟁 직후 대규모 판자촌을 이루며 살아갔던 청계천변 사람들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박태원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로도 유명하지만, 이제는 봉준호 감독의 외조부로 더 유명해진 듯하다.
그리고 시인 김종삼의 시 <장편2>에서도 청계천변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주 짧으니 인용해본다.
조선총독부가 있을 때
청계천변 십전 균일상 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 짜리 두 개를 보였다.
이야기가 다른 길로 빠졌는데, 하여튼 청계천은 그런 곳이다. 복개된 청계천을 따라 동대문에서 시청을 거쳐 광화문까지 이어진, MB의 업적으로 칭송되는 바로 그 하천. 그 하천이 시작되는 동대문 평화시장은 아직도 뜨개며 자수, 캔들, 커튼, 봉제 등등 오만가지 부자재들을 사러 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더 지난 시절에는,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 꽃나비 담장 위를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돌았던 평화시장 피복공장이 있었다.
2.
우리는 전태일을 기억한다. 노동자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해달라고 요구했으나 빈번히 거절당한 그의 몸에는 휘발유가 뿌려졌다. 불 붙은 그의 몸을 그 누구도 덮어주지 않았다. 불에 타들어가며 평화시장을 뛰었다. 결국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치료도 못 받고,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에게 후일을 맡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 이후 무엇이 바뀌었을까. 전태일이 분신까지 해가며 외쳤던 '근로기준법 준수'가 지켜졌을까?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안다. 그러나 그 뒤에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나도 그중 하나이다.
한강의 기적을 말할 때, 흔히들 중공업과 국가기간사업을 떠올리지만 그전에 가발공장과 봉제공장이 있었다. 여자는 공부시키는 게 아니라는 말이 통용되던 시절, 어린 여자아이들은 공장으로 향했다. 아들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딸들을 갈아넣는 일은 특별하지도 않았다. 우리 엄마와 이모들도 그랬다. 그렇게 공부한 아들들은 사무원이 되고 은행원이 되고, 대학에 가고, 판검사가 되는 동안 공장에 다니면서 살림 밑천을 대고, 달러를 벌어들이던 딸들의 이름은 지워졌다.
3.
청계피복노조는 전태일의 죽음 이후 결성되었다. 노동교실을 만들어 어린 시다와 미싱공 등을 교육시켰다. 그들은 교복 입고 학교에 가지는 못했지만, 노동교실에서 배움을 이어간다. 그러나 지배계층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피지배층이 똑똑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것도 몰라야 돈을 떼먹어도, 최저임금을 준수하지 않아도, 사람 취급을 안 해줘도 아무 말도 못하니까.
결국 노동교실을 지원하기로 한 사업주는 9월 10일까지 짐을 싸라고 통보한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 노동교실을 지키기 위해 9월 9일에 농성을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죽고, 다치고, 구치소에 갇히고, 구속되는 일들이 발생한다.
<미싱타는 여자들>은 청계피복노조의 노동교실을 지키고자 했던 어린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이다. 신순애, 이숙희, 임미경은 구속까지 당했다. 아주 오랜 세월 가슴에 묻고 살았던 이야기를 영화를 통해 세상 밖으로 풀어낸다. 세 인물은 각각 그시절에 함께했던 인물들과 대화 방식으로 그때를 회상한다. 회상의 단서는 주로 편지, 사진과 같은 사적인 기록물들이다.
이제와 돌아보는 사진 속 그들의 모습은 너무도 어리다.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소녀들은 공장에서 잠도 못 자고 밥도 겨우 먹으며 일했다. 근로기준법은 개나 줘버린 시절이다. 전태일이 분신까지 하며 세상을 바꾸어보려 했지만 세상은 바뀐 게 없다. 그것도 모자라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까지 구속되기에 이른다.
여공들은 이소선 여사가 구속되었던 구치소 앞에서 밤마다 "어머니!"를 외친다. 어머니를 풀어달라고. 그런데 어머니, 어머니 소리 한다고 빨갱이란다. 이북에서는 김일성을 아버지라고 하는데, 이소선 여사에게 어머니라고 하니 빨갱이가 아니겠냐고.
거기다 9월 9일에 농성을 하니 빨갱이란다. 9월 9일이 무슨 날인지 아냐고. 누가 알겠나. 학교도 못 다닌 어린 여자아이들인데. 김일성 생일이란다. 그리하여 그들은 별안간 빨갱이가 된다. 빨갱이라고 이름붙이는 순간, 모조리 잡아넣는 건 일도 아니었던 시절이다.
4.
여자의 일은 너무도 쉽게 지워진다. 얼마 전 계단청소를 하다 돌아가신 노동자가 '고된 노동으로 인한 산재'를 인정받지 못했던 일이 있었다. 결국 한 남성변호사가 노동체험을 하고, 그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증명해낸다. 독립운동을 했던 수많은 여성들이 있고, 노동운동, 인권운동을 한 여성들이 분명히 존재하나, 그들의 존재는 미미하다.
가발공장인 YH사건은 부마민주운동의 불씨를 당겼다. 그 역시 여성노동자들의 일이다. 그러나 누가 그들을 기억하는가. 뼈 빠지게 일한 아버지는 불쌍하지만, 그 집안을 돌보아온 어머니의 노동은 쉽게도 잊힌다.
<미싱타는 여자들>의 미덕은 과거를 재현하거나 동정하기 보다, 그동안 이름 불리지 않았던 이들의 이름을 호명하고 기억하는 데 있다. 그시절 여공들은 그토록 뜨거웠던 젊은 날의 자신을 기억해낸다.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고생 많았다고, 잘 했다고.
얼마 전 한 대선후보가 최저임금보다 낮은 조건으로도 일할 사람 널렸다는 발언을 해서 뭇매를 맞았다. 국가의 역할이란 최저임금보다 적게 받아도 돈을 벌어야만 하는 절박한 사람과, 최저임금도 주기 싫은 업주가 매칭되지 않게끔 하는 것이 아닐까.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싸워온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아주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니고, 고작 30년 전 이야기이다. 그들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인물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미싱타는 여자들>을 보는 관객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더불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태일이>도 12월 1일에 개봉을 했다. 잘 되었으면 좋겠다.
캐롤도 없고 거리두기로 모임도 없는 조용한 연말이다. 가장 낮은 자의 모습이란 어떤 모습일까 다시금 생각해본다. 올겨울도 청계천에는 빛초롱축제가 문전성시를 이루고, 청계천을 따라 반짝반짝 빛나는 등불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씨네랩으로부터 초청 받아 시사회에 참석한 후 남기는 개인적인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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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 인간다움을 만드는가?
* 본 포스팅은 많은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를 감상하신 후에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셰이프 오브 워터, 포스터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는 어른들의 동화라는 소문대로 정말 아름다운 우화였다. 회화적인 장면들이 인상적이었다. 물속에서 끌어안은 서로 다른 종의 연인의 모습은 그야말로 환상적. 음악 선정도 적절하다. 아름답다.
인간과 비인간의 결합에 대해 다룬 영화는 많았지만, 이 영화는 뭔가 특별하다. 기존의 작품들이 지극히 인간중심적이었다면, 이 영화는 그러한 '인간 중심'의 사고 바깥을 들여다보게 해 준다.
작품 속의 '어인(수륙양용(?)이니 양서인이라고 불러야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편의상 어인이라고 부르겠음.)'은 우리와 다르다. 이질적이다. 그에게는 아가미와 비늘과 지느러미가 있고, 두 눈은 물고기의 그것처럼 크고 둥그며, 사람과는 달리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인간의 감정과 언어를 이해하며, 그들의 문화를 즐길 줄 안다. 엘레이자와 교류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관객은 혼란에 빠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필자는 그랬다. 영화 초반까지만해도 끊임없이 한 물음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이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이들의 사랑을 응원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
우리는 지금껏 많은 비인간과 인간의 사랑에 대한 서사를 경험해 왔지만 돌이켜보면 이토록 이질적인, 그러니까, 인간의 외모, 인간의 유머, 인간의 문화와 동떨어진 존재와의 결합은 그다지 빈번하게 목격하지 못한 것 같다. 미녀와 야수의 야수도 결국은 언어를 구사하고 옷을 입는 존재였고(사실 원래부터 인간이었으니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슈렉은 인간들이 혐오하는 오거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의 사정 역시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즉, 인간인 관객이 보기에 그다지 큰 거부감이 없도록 만들어진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커녕 기괴한 꺽꺽거리는 소리만 내는 이 생물은 인간과 너무나 다르다. 때론 사납게 으르렁거리고 친구(?)의 애완 고양이를 잡아먹는 그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과연 이 존재를 인간과 같은 선상에서 보아도 좋을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엘레이자의 절규에 찬 대사는 이러한 고민에 대한 훌륭한 해답을 제시한다.
'나도 그 사람처럼 입을 뻥긋거리고 소릴 못 내요. 그럼 나도 괴물이에요?'
그녀의 이러한 발언은 '무엇이 인간을 정의하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답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스트릭랜드는 인간을 '신에 가장 가까운 존재'로 정의 내린다. 그리고 어인을 인간과 구별되는 야만적인 짐승으로 치부한다. 이러한 구분은 우리에게 그다지 낯선 것이 아니다. 이러한 서열화 혹은 자기우열화는 우리 인간 내부에서도 다시금 되풀이 되기 때문이다. 그의 세계에서는 흑인보다는 백인이, 여성보다는 남성이, 성소수자보다는 성다수자가 우월하고, 더 '신의 모습에 가까우며' 따라서 더 '완벽한 존재'이다. 그에게 '인간답다'는 것은 요약하자면, '서구 가부장 사회의 백인이자 헤테로 섹슈얼인 남성답다'라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서열화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우열을 가린다. 그 악독한 스트릭랜드도 결국 호이트 장군의 아래에 있다. 호이트 장군의 위에 또 누가 있을지 모를 일이다. 누군가를 끝 없이 자신의 아래에 놓고, 위로는 끊임없이 '더 인간다운', '더 완전한', '더 그럴싸한' 삶을 갈구하는 그들(스트릭랜드와 호이트 장군을 비롯한 많은 인물들)의 삶은 강박적이고 피로하며, 속에서부터 썩어들어있다. 결국 썩어버린 스트릭랜드의 두 손가락처럼.
반면 엘레이자와 그 친구들은 앞선 인물들과는 다른 시각에서 '인간'(혹은 인간에 비견되는 지적 생명체)을 바라본다. 엘레이자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자일스는 늙은 게이이며, 젤다는 흑인 여성이며,드미트리는 냉전시대의 러시아인 스파이이자 과학자다. 이들은 모두 냉전시대 미국 사회에서의 사회적 약자로, 스트릭랜드의 정의에 따르자면 열등하거나 배척되어야 할 대상들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불완전한 존재'로 정의될 수 있을지도 모를 이들이야말로, 우리가 '인간성 혹은 인간애(humanity)'라고 부를 만한 어떤 관념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엘레이자와 자일스의 나이와 성별을 초월한 우정을 보라. 그리고 엘레이자와 젤다의 끈끈한 유대감과 의리를, 어인을 살리고자 했던 드미트리의 노력을 보라. 이들은 불합리한 권력에 저항하는 동시에, 선뜻 타인을 위해 손을 내밀고 그를 돕기 위해 애를 쓴다. 그것이 가장 '인간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언어와 감정을 이해하는' 어인이 이들에게 하나의 아름답고 경외로운 지적 생명체이자,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시각에서 비롯된다. 어인이 처한 상황은 그들이 처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엘레이자와 어인의 결합은 이들에게 그다지 꺼림칙한 일이 아니다. 두 존재는 정신적인 교감을 하는 것에서 나아가 육체적인 결합까지 이루어내지만, 그것은 두 지적 생명체가 서로의 고독을 이해하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장면이다. 엘레이자와 어인 본인은 물론, 드미트리도, 젤다도, 자일스도 이들의 사랑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 그 바깥으로 눈을 돌리면, 우리는 비로소 인간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 이 작품은 어인과 여인의 사랑을 다룬 우화를 통해 인간 군상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러나 아름답게 그려냈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인물들의 선악구도가 매우 명확한 편인데, 극 중 스트릭랜드는 지독하게도 악랄하면서도 현실에 최소한 하나쯤은 있음직한 악역이라는 점에서 소름이 돋았다. 화장실에서 손 안 씻고 나오는 데다 부하 여직원에게 추악한 시선을 던지는 남자, 다른 인종, 성별, 성소수자 등을 열등하게 여기는 편협한 우월주의자, 멀쩡하게 평범한 가정에서 잘 살고 있으면서 더 나은 삶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허영덩어리... 작품 속에서는 소련과 미국이 살벌하게 경쟁하는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글쎄, 오늘날 우리나라의 사정도 크게 달라보이지는 않는다. 세계 어느 곳을 가도 이런 사람은 꼭 있으니까.
4. 어인이 자일스의 고양이를 잡아먹은 장면이 정말 충격적이었다. 필자는 자일스가 충격에 휩싸여 어인을 비난할 줄 알았다. 그러나 자일스의 태도는 이 얼마나 관용적이었던가. '그는 야생이니 고양이를 먹은 건 어쩔 수 없어.'라고 이야기하는 자일스의 모습은 작품이 추구하는 '인간성'에 대한 관념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그는 엘레이자와 마찬가지로 문화적인 우월성을 가지지 않고 어인을 대한다. 그에게 어인은 좀 다른 문화를 가진 대상일 뿐이다. 그는 어인을 용서했고, 어인은 그에게 사죄한다. 진정한, 성숙한 문화와 문화 간의 교류다.
이 장면은 언젠가 시끄러웠던 한 네덜란드 선수의 '개고기를 먹는 한국인들'에 관한 발언과 비교된다. 자일스에 비하면,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다름을 '틀림'으로 섣불리 단정짓고 비난했던 그 선수의 태도는 이 얼마나 편협하고 오만한가. (필자는 개고기를 먹지 않지만, 개고기 문화 자체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데에 동의한다. 비판받아야 할 것은 비윤리적인 도축과 유통 과정이지, 문화 그 자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5. 엘레이자는 정말 사람이었을까? 강에서 발견되었다던 그녀의 목에 있던 아가미같은 흉터는 극의 후반부에서 정말 아가미로 변한다. 그녀의 조상 중에는 어인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단순히 어인의 전지적인(??) 능력으로 바다 생활에 적합하게 변하게 된 걸까? 오픈 엔딩이니 상상의 여지가 있어 좋다. 확실한 것은, 그 둘이 행복했으리라는 사실이다. 그 둘은 더 이상은 고독하지 않을 것이다.
6. 생각의 여지를 많이 남겨주는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간만에 정말 좋은 영화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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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노란색을 설명해보라 한다면
! 해당 리뷰는 씨네랩 초청 시사회 관람 후 작성되었습니다 !
감독) 야마다 요지
출연) 다카쿠라 켄, 바이쇼 치에코, 타케다 테츠야, 모모이 가오리
1977년 존 G. 아빌드센 감독의 <록키>가 세계적으로 흥행을 기록하고 있을 때, 일본에선 한편의 로드무비가 개봉한다. 야마다 요지 감독의 <행복의 노란 손수건>이다. 이 영화는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과 키네마 준보상을 휩쓸만큼 큰 인기를 끌었으며, 2011년 드라마로 리메이크 될 정도로 오랫동안 회자된 작품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았고, 드디어 올해 이 영화를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일본 아카데미상, 키네마 준보 ‘1위’
최근 <아노라>, <브루탈리스트>와 같은 미국 아카데미 후보작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작품성이 보장된 영화들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 하지만 아카데미 시상식은 미국, 영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 아카데미상은 자국에서도 인정받는 권위 있는 시상식이며, <드라이브 마이 카>, <괴물> 등의 작품들이 수상하였다. <행복의 노란 손수건>은 제 1회 일본 아카데미상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을 휩쓸며 총 8관왕에 올랐다. 키네마 준보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 잡지로, 1929년부터 매년 시상을 해왔다. <행복의 노란 손수건>은 일본 국내 영화 1위에 선정되었고, 해외 영화 1위가 바로 앞서 언급한 <록키>였다. 그만큼 이 영화는 대중성, 작품성을 모두 인정받은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로드무비의 매력을 한껏
우리가 드라이브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익숙함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빠른 속력으로 새로운 풍경을 마주하며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다. 영화의 한 장르인 ‘로드무비’는 등장인물의 여정에 동참하여 그들이 지나치는 곳들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델마와 루이스>, <그린북>을 대표적인 로드무비로 볼 수 있다. <행복의 노란 손수건>에서도 삿포로로 향하는 빨간 자동차를 볼 수 있는데, 익스트림 롱샷으로 촬영된 장면들을 보면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가 연상되기도 한다. 로드무비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인물들의 상황, 감정에 몰입하기 쉽다는 점이다. 극 속 인물들과 함께 동행하면서 그들에 대해 알아가고, 그들이 향하는 목적지에 잘 도착하기를 내심 바라게 된다. 이 영화 또한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전사(前事)를 자연스럽게 녹여내 인물과 관객 사이의 거리감을 금세 좁힌다.
누군가 노란색을 설명해보라 한다면
‘열정, 사랑, 뜨거움’의 빨강. ‘냉혈, 우울, 차가움’의 파랑. ‘어둠, 악, 권위’의 검정. 색이 주는 느낌은 개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이미지는 존재한다. 그러나 ‘노랑’을 설명하고자 하면 상대적으로 쉽지 않다. ‘유채꽃’, ‘경고 표지판’ 등 사물이 주로 떠오른다. 이 영화에선 ‘노란색’이 핵심으로 다뤄지며, 정확히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노란 손수건’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화의 색을 강조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 색을 영화의 전반에 녹여내는 것과, 중요한 장면에서만 사용하는 것이다. 전자는 키에슬로프스키의 <세 가지 색> 시리즈, 후자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 영화는 후자에 가깝다.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영화에서 ‘노란색’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제목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그러다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노란색의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 제목은 다시금 머릿속에 자리 잡는다. 여태까지 멀리서 잡아왔던 익스트림 롱샷은 노란 중앙선을 비추는 시점샷으로 변화되고, 비로소 관객은 그들의 뒷좌석에 탑승해 함께 흔들리게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순간에 다다랐을 때, 노란 풍경이 주는 그 모든 것을 인물의 눈이 된 관객의 시선에 담아낸다.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듯이, 흔들리지 않고 말이다. 영화를 보고도 말로써 표현하기 힘든 노란 감정에 대해 누군가 설명해보라 한다면, 대답은 이 영화로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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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z세대의 첫사랑 집합소, 지브리
필자는 96년생이다. 소위 사회에서 규정 지은 MZ 세대의 일원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태어난 연도를 기준으로 세대를 나누는 것은 정말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MZ 세대는 80년생부터 2002년생까지를 정했던 것이던데, 인터넷이 빠르게 발달하고, 다른 나라보다 최소 1.5배는 빨리 흘러가는 우리 나라에서 80년생과 2002년생을 비슷한 시기를 살아가는 세대라고 규정짓는 것은 너무 오차범위가 큰 분류라고 본다. 80년생은 인터넷의 태동을 지켜봐왔겠지만 90년대생만 하더라도 누군가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아서 삶에 인터넷을 녹여 일상화시킨 세대라서 누군가에게 인터넷에서 어떻게 뭘 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다. 하물며, 2000년대생은 어떠했겠는가. 90년대 생은 최소한 MP3를 알고 있는 세대이지만 2000년대생은 MP3도 모르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세대를 규정하는 기준을 인터넷의 태동으로 규정지어, MZ 세대는 디지털 원주민이고, 90년대 생은 사회적으로 어떠하고, 하는 것은 어른들의 만들어놓은 프레임에 MZ 세대를 가두려 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MZ세대를 인터넷의 발달과 그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자라온 세대로 규정짓는 것은 어른들의 관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MZ세대에게 인터넷은 그저 당연하게 있어왔던 생활과도 같은 것이라 같은 또래 사람들 사이에는 인터넷 때문에 특별함을 느낀 적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만의 특별함, 동질감을 느끼기에는 인터넷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만화 영화를 보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이야기들이 같은 또래끼리 더 먹힌다.
80년대생부터 2000년대생의 일부가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과거에 히트했던 만화 영화에 대한 향수를 공유하는 순간일 것이다. 그에 대한 파생효과로 mz 세대들 사이에서 2000년대 초반에 인기가 많았던 애니메이션 주제곡 플레이리스트가 유튜브에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그만큼 수요가 많은 컨텐츠라는 것이다.
그 당시의 인기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회사 중에서 쌍두마차를 달리는 두 회사가 있었으니, 미국 애니의 대표 주자, 디즈니와 일본 애니의 대표주자, 지브리가 있다. 그 중에서 나는 오늘 이 글에서 지브리에 대해서, 아니, 나와 같은 세대의 여자라면, 공감할 지브리 속 각자만의 첫사랑 찾기를 실현할 수 있는 글을 써보고자 한다. MZ세대 간의 공감대를 찾기 위해서, 그리고 내 사심을 채우기 위해서.
1. 하울
MZ 세대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던 영화들의 남주들은 소년미가 돋보인다. 그 소년미의 대표격인 캐릭터가 바로 하울이다. 여린데, 전장에서 싸우기도 하고, 다정한데, 예민하기도 이 남자는 여성들의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판타지적 인물이다. 지브리에서 노리고 미남으로 캐릭터 설정을 했다고 하던데(진짜인진 모르겠다) 그런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소피만 바라보는 순정파에 전쟁 후 돌아왔을 때에 보이는 안쓰러움까지 겹쳐 꽤 많은 여자들을 노예로 만들기 십상인 성격이다.
2. 하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등장하는 하쿠는 치히로가 마녀의 늪에 빠져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가지 않도록 치히로를 돕는다. 하쿠 자신도 센처럼 이름을 잊고, 유바바의 노예로 살아가는데, 하울과 비교해 보호해주고 싶은 사람이라기 보다는 나를 보호해줄 믿음직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줄 만큼 야무진 캐릭터이다. 센은 하쿠가 없었다면, 꽤 오랫동안 마법세계에서 해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센을 탈출시키려고 노력하는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판타지스럽다. 성격으로만 보면, 하쿠가 가장 속깊고, 의지하고 싶어지는 캐릭터라서 나에게는 원픽 첫사랑 캐릭터였다.
3. 아시타카
모노노케 히메에 등장하는 아시타카는 산을 보자마자 반한 사람처럼 행동하는데, 이 점은 조금 이해할 수 없었다. 첫 눈에 반하는것을 믿지 않는 내가 너무 비관적인 것일까. 하지만 자연을 대표하는 산과 인간의 발전적인 욕구를 대표하는 에보시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한다. 자연과 인간의 개발의 공존을 주창하는데, 인간의 생존에 기술이 필요하다면, 과도한 욕심은 지양되어야 한다고 외친다.에보시에 협력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산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연을 지키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아니, 왜 남주가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건지 이해가 잘 안갔었는데, 영화를 다보고 나니, 그저 중립적인 캐릭터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산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점, 무의식중이긴 했지만 산에게 직접적으로 고백하는 장면에서 굉장히 사랑 표현에 있어 솔직한 점이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내 사람을 확실히 지킬 줄 아는 평화주의자 같은 느낌이랄까.
4. 작화적 관점
미술에 대해서는 전문적으로 아는 지식은 없지만 지브리의 작화는 참 세심하다. 디즈니의 작화는 해가 갈수록 입체적으로 살아움직이는 듯한 작화가 특징이지만 지브리의 작화는 손으로 그린 티가 확연하게 난다. 2D 만화책을 그냥 움직이는 형태로 만들어놓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특징이 극대화된 장점으로 표현된 영화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었다고 생각한다. 동화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영화 배경에 하울의 여리여리함은 정말 잘 어울렸다.그런 아날로그적이면서도 세심한 작화는 독자들의 상상의 여지를 제공해 관객만의 관점에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작화를 더 판타지스럽게 받아들이는 데에 한 몫 했다고 생각한다.
아시타카는 작화가 정말 미남으로 잘 생겼는데, 아시타카가 개인적으로 가장 공들여서 그린 티가 났다고 생각한다. 외모적으로는 가장 취향 저격으로 생겼었다. 하울도 미남이기는 하지만 뭐랄까 여리여리함보다는 조금 더 의지가 확실해보이게 생긴 상을 좋아해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성격 상으로는 아시타카가 조금 별로였는데, 그 이유는 그의 중립적인 모습은 달리 말하면, 우유부단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성격으로는 하쿠가 가장 취향이지만 외모 상으로는 잘생긴 얼굴을 망치는 앞머리가 있는 단발이 이상하게 보일 때가 많았다. 그래서 항상 잘생긴 얼굴을 가리는 답답한 앞머리를 가진 캐릭터라고 생각해왔었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친구들과 지브리 얘기를 할 때, 캐릭터들의 작화에 대해 누군가는 산이 취향이네, 소피가 취향이네 하면서 긴 시간 동안 얘기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각기 캐릭터들이 모두 개성있게 생겼음은 확실한 것 같다.
** 지브리에 대한 추억이 있는 동년배들이 있다면 댓글을 달아주셔도 좋을 것 같다. 나와 비슷하게, 또는 다르게 생각하는 자신만의 지브리 첫사랑이 있는지, 내가 제시한 지브리 첫사랑들 말고도 다른 캐릭터들을 좋아한다라든지. 의견은 대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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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탑건 2> 만큼 재미있고 <헤어질 결심>처럼 진하게
"작가님, 수고하셨습니다!" 유명 아나운서가 나에게 인사를 한다. "작가님 준비 많이 해오셨어요? 1시간 녹화가 20분이 걸렸네요? 늘 느끼는 거지만 진짜 영잘알이세요." 내가 대답한다. "아, 아닙니다. 그냥 무식하게 시간만 보냈던 것뿐인데요." 대답하자 휴대전화에 카톡 몇 개가 온다. 어느 날에 어떤 영화가 개봉한다는 누군가의 말이다. 어? '어느 날'에 개봉한다고? 구체적으로 정해진 게 아니라? 별 것 아니겠거니 싶어서 그냥 넘어간다. 습관적으로 휴대전화를 켜 조회수를 확인해본다. 정말 감사하게도 2만이 찍힌다. 언제부턴가 바라왔던 순간이 현실로 이뤄지고 있었다. 다만 그게 몇 개월째 내내 반복되고 있다는 건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다. 프로그램 담당 작가가 나에게 말을 했다. "작가님! 출연료는 다음 주에 입금될 거예요. 금액은 얼마입니다!" 엥? 출연료가 '얼마'라고? 무슨 소리야? 내가 대답한다. "그 얼마가 어느 정도 될까요?" 작가가 대답한다. "그 금액은..."
라는 꿈을 꾸었다. 그럴 리가 없지. 가끔 언제까지 이 글을 쓰는 일에 재미를 붙일 수 있을까 생각한다. 내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몇몇 분들의 의견에 편승해서 쓰는 글이 아닌, 내 생각을 오롯이 내 마음대로 표현하는 그런 일이다. 나 자신이 '이 정도면 그래도 글 쓰는 사람이라 부를 수 있지' 싶은 것들은 이미 얻었지만 내가 원하는 건 저 멀리 있었다. 이 영화를 보고 자서 그런 꿈을 꿨던 걸까? 어느 멀티버스 중 하나에는 내가 작가로 명성을 많이 얻은 세계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이름이 알려지면 내 안에 있는 어떤 문제들은 해결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런 나(우리)에게 알파버스의 웨이먼드가 느닷없이 나타나 "아니야"라고 답한다. 준비물은 없다. 단지 모든 것을 모든 곳에서 받아들일 태도만 있으면 된다. 올해 개봉작 중 또 다른 마스터피스가 등장했다. 에블린과 함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라는 멀티버스 속으로 떠나보자.
빈 세탁기처럼 돌아가는 일상
분명히 해야 할 일이 벌어야 할 돈 말고 뭐가 있었는데 말이다. 미국으로 이민 와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는 에블린은 일상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홍콩에서 태어난 에블린. 첫사랑이었던 웨이먼드의 설득에 넘어가 타지 생활 중이었다. 잘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쉽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실패만 지속했던 그녀. 어느새 정신 차려보니 지금 현재다. 짜증이 나는 오늘. 남편 웨이먼드는 착할지 몰라도 무능력한 사람이었다. 딸 조이는 틱틱대는 일이 많았다. 아버지 공공은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어서 에블린과 함께 살고 있다. 쌓여가는 빨래물처럼 풀지 못했던 마음속 응어리가 점점 더 높아져간다. 이런 에블린의 일상은 점점 더 그녀를 괴롭하는 중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어느 날. 평소처럼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남편 웨이먼드는 타향살이를 시작한 보람도 없이 갑자기 이혼 서류를 들이밀었다. 딸 조이는 여자친구를 데려와 가족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고 있었다. 정말 진절머리가 나는 일상이다. 그런데 세상이 이런 에블린을 딱히 봐주지는 않았다. 국세청은 에블린의 세탁소에 세무조사를 예고했다. 영수증 속에 쌓여있는 에블린. 영업정지와 생계유지의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신경이 예민하다. 이 빈 차를 타고 국세청이 아니라 다른 우주로 날아가면 좋으련만. 세상은 야속하게도 에블린의 일상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한숨이 가득한 얼굴. 에블린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남편 웨이먼드와 같이 있었던 에블린. 멍하니 있던 와중이었다. 갑자기 남편 웨이먼드의 눈빛이 변한다. "여보. 잘 들어. 지금 당신은 위험해. 난 다른 우주에서 왔어. 이유는 묻지 말고 내가 적어 준 쪽지대로 해." 뭔 뚱딴지 같은 소리야? 안 그래도 나사가 좀 빠져 있는 것 같은 웨이먼드. 마침내 미쳐버린 것인가? 에블린은 어리둥절한다. 금세 에블린의 귀에 이어폰을 꽂아주는 웨이먼드. 갑자기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다양한 우주 속의 에블린. 에블린은 당황한다. 웨이먼드는 이내 자기를 소개한다. 자기는 다른 우주에서 온 알파 웨이먼드이며, 지금 세계가 굉장히 위험하다는 말을 전한다. 마냥 헛소리로 치부하기엔 이어폰을 꽂고 겪었던 경험 때문에 안 믿기도 어렵다. 이 색다른 경험 덕에 국세청 직원 디어드리 앞에서도 멍 때리는 시간이 많아지는 에블린. 에블린은 디어드리 앞에서 웨이먼드가 전한 지시사항을 수행한다. 지시사항은 그냥 헛소리가 아니었다.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 에블린. 그 다른 차원에서 에블린과 웨이먼드는 조우한다. 알파 웨이먼드는 에블린에게 세상이 왜 위기에 처했는지를 말한다. 그것은 바로 조부 투파키가 멀티버스를 싸돌아다니며 세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모든 운명의 조부 투파키는 온갖 세계의 에블린을 살해하고 있었다. 꿈꾸는 소리가 아니다. 에블린 눈앞에 벌어진 상황은 전부 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조부 투파키를 제지해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강력하고 빠르게
이 영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엄청 정신없다. 일단 핵심 키워드가 너무 많다. 가장 우선은 코미디. 두 번째는 액션. 세 번째는 가족 드라마. 네 번째는 오마주. 다섯 번째는 멀티버스 구현이다. 키워드만 다섯 가지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후반부까지 영화를 보다 보면 이 영화가 운명에 관한 작품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영화는 이런 키워드를 1분 1초가 아까울 정도로 사정없이 다 때려 박는다. 이렇기 때문에 아마 이 영화를 본 많은 분들이 ‘정신없다’라는 것에 동의하실 것이다. 단기간에 많은 정보를 쑤셔놓는 것은 도박이다. 일례로 <프렌치 디스패치>를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 영화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대사가 쉴 틈 없이 쏟아지지만 감독 웨스 앤더슨은 이런저런 설정을 무리 없이 이해한다. 특유의 섬세한 미장센을 중심으로 대사를 받아들여도 이야기 전개에 큰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반대의 측면도 있다. 바로 <외계+인> 1부다. 현재의 MCU는 많은 영화들로 이뤄져 있다. 글쓴이는 다른 글에서 최동훈 감독이 마블의 영화들이 쌓아놓은 빌드업을 너무 쉽게 바라본 것이 아닌가라는 의견을 냈다. 이를 보여주듯 너무 많은 떡밥이 있는 <외계+인>. 산만한 줄거리 때문에 호평보단 혹평을 많이 받았다.
이 영화는 확실히 전자다. 이 영화가 이해가 어려운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의 많은 요소들은 단적으로만 휙 쓰이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는 영화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도 쓰이고, 또 주제적인 측면과도 이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정보가 산발적으로 와다다 쏟아지긴 해도 영화를 보는데 큰 무리가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 대신 중반부로 흘러가는 이야기를 집중할 필요는 있다. 영화에서 원형의 이미지는 굉장히 중요하다. 이 원형의 에너지가 어떤 이유로 중요한가?라는 것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 중 하나일 것이다. 이때 설명이 후반부에 반복되긴 하지만 대충 보면 중반부에서 이를 놓치기 쉬울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글쓴이는 이 영화를 보지 않은 관객분들이 무언가를 마시지 않은 채로 보는 것을 추천한다. 영화 중간에 화장실을 간다? 그럼 영화의 재미가 급전직하하는 단점이 느껴질 수도 있다. <프렌치 디스패치>가 섬세한 방식으로 영화의 이해를 도운 것과 유사하게 이 영화는 광기의 에너지로 관객을 밀어붙이는 것이다.
가장 강력한 강점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영화는 다방면으로 강점을 가진 영화다. 일단 기본적으로 시각적인 쾌감이 엄청나다. 이 쾌감 중 하나는 액션이다. 전체적으로 액션의 비중이 가장 높은 인물은 주연 양자경이다. 우선 양자경이 그동안의 필모그래피에서 액션 연기를 펼치는 역할을 많이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상영작들을 찾아봤을 때 여러모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영화도 있다. 바로 <와호장룡>이다. 장첸, 주윤발, 장쯔이, 양자경이 출연한 이 영화. 웅장한 맨몸액션이 많은 이들에 기억에 남았다. 영화는 이 시절의 홍콩영화를 재현하듯 화려한 맨몸액션을 선보인다. 일단 양자경의 액션 연기는 정말 대단하다. 극에서 일대 다수의 연기를 펼치는 부분이 있다. 템포가 굉장히 빠르고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수직적 운동능력을 선명하게 잘 드러낸다. 이는 연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 에블린의 액션 신에서 싸움을 잘하는 에블린이 되는 계기가 있다. 영화는 이 에블린이 왜 쿵후의 달인이 될 수밖에 없는지 잠깐 보여주고 이를 편집술로 보여준다. 이는 편집 능력과 시너지가 있어서 관객으로 하여금 보는 재미를 선사한다. 구체적으로 상대방과의 액션 주고받기와 이 능력이 구현되기 위한 전제가 엇나가듯이 편집되며 시각적 쾌감을 선사하는 것이다. 이는 멀티버스라는 키워드를 관객들에게 설득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가 아는 지식 안에서 멀티버스란 것은 없다. 심지어 이 멀티버스의 묘사가 이 영화처럼 이뤄진다면 좀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글쓴이는 이를 관객들에게 경제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액션을 삽입했다고 생각한다. 상황 자체를 많이 만들어서 그 룰대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만든 것이다. 그럼 이야기에 통일성이 생긴다. 이런 토대의 튼튼함은 영화의 설득력으로 이어진다. ‘아. 그래서 그렇구나’라는 이해가 용이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에블린의 액션은 단적으로 시각적인 쾌감만을 전하려고 제시되지 않았다.
또 웨이먼드 역을 맡은 조너던 키 콴의 액션 연기도 굉장하다. 이 웨이먼드 캐릭터가 맡은 역할의 액션 신은 비교적 초반부에 나온다. 어떤 행동을 하고 전투를 시작하는 웨이먼드. 이때 매고 있던 가방을 휘리릭 흔들며 전투태세에 돌입한다. 엥? 이거 어디서 봤는데? 갑자기 성룡이 생각난다. 역시 이 웨이먼드의 액션신에서 무언가를 오마주하고 있다. 바로 성룡의 쌍절곤 액션이다. 이는 그냥 얻어걸린 효과가 아닌 듯하다. 배우 조너던 키 쿠안이 성룡을 닮기도 했다. 또 원래 주인공을 양자경이 아닌 성룡을 계획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아무튼 이 액션은 영화의 가장 첫 번째 액션 시퀀스이기도 하다. 가방 끈을 쌍절곤 쓰듯이 두들겨 패는 웨이먼드. 극초반부에 유약한 모습만 제시됐던 이 캐릭터이기 때문에 이런 액션 신이 대비되는 느낌이 있다. 이는 앞에서 쓴 문단과 비슷한 맥락에서 좋은 효과를 낸다. 이 역시 멀티버스에 대한 설명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 측면에서도 기능한다. 영화를 끝까지 보다 보면 이런 멀티버스를 통한 액션신이 웨이먼드라는 인물의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다고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영화의 연출이 멀티버스라는 모티브를 단순히 설정으로만 쓴 게 아니라 주제적인 측면과도 이어지게 설정했다. 똑똑한 연출의 힘이었다. 아, 이 두 주인공을 빼고 다른 액션 연기를 보여주는 인물들도 있다. 이 인물들의 액션도 잘 뽑았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서 강렬하게 기억에 남을 것이라 생각한다. 진짜 웃긴다. 이런 생각을 하는게 정말 또라이같다.
타율 높은 코미디
또 이 영화는 정말 웃긴 코미디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코미디로서 사용했던 소재는 두 가지다. 멀티버스를 통해 다중우주를 보여줬던 시각화와 영화의 핵심 아이디어다. 우선 이 영화가 장르적인 특성이 아닌 선에서 뽑을 수 있는 강점은 설득력이라고 생각한다. 에블린이 각각의 우주 속에 한 명씩은 있을 테니 각자가 온갖 직업을 다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럼 이 직업인으로서의 광경 묘사에 있어서 구체적이지 않은 부분이 없다. 이 꼼꼼함 묘사가 ‘각종 직업의 에블린’에서 굉장히 강력한 코미디가 작동한다. (영화에 나오지는 않지만) 만약 글을 쓰는 에블린이 있다고 해보자. 그럼 글을 쓰는 특징 중 하나를 뽑아 영화에서 어떤 원동력으로 사용한다. 또 그림을 그리는 에블린이 있다고 해보자. 그럼 그림을 그릴 때 자기의 내면세계를 섬세하게 그려야 하기 때문에 감성적으로 풍부한 사람이 유리할 것이다. 영화는 탄탄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왜 멀티버스의 에블린이 필요한지를 빼먹지 않았다. 영화의 설정을 단단히 하는 연출이 코미디 소스로도 작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직업인으로서의 에블린을 가지고 코미디를 만들 때 절대 잊히지 않는 시퀀스가 있다. 바로 어떤 영화를 차용하는 것이다. 이 영화가 어떤 작품이고, 어떤 식으로 차용했는지를 쓰면 강력한 스포일러가 될 것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서술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본 영화의 리뷰를 하는 것을 하는 사람이 이 부분을 언급하지 않으면 왠지 직무유기처럼 느껴진다; 또 어떤 멀티버스 중에서 우리가 아는 인간의 물리법칙 외의 것도 있다. 이 부분 역시 골 때리게 잘 설정했다. 쓸데없이 상상력이 고퀄리티라서 놀랐다.
그리고 아마 영화에서 정말 중요한 아이디어가 됐을 키워드 ‘전환’이다. 영화의 메인 세계관은 주인공 에블린이 이끄는 시간대다. 그럼 다중우주 사이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코미디 요소를 하나씩 추가한다. 제일 첫 번째 전환 방식은 적당히 상식 선에서 상황에 안 맞는다. 그런데 이 이후부터의 이야기는 생각하는 수위를 전부 뛰어넘는다. 단 하나 빼고 전부 예상외로 흘러갔다(그리고 이 ‘예상대로 간 코미디’도 정말 웃긴다). 당연히 이렇게 전형성을 탈피한 방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 말하면 재미가 없어진다. 이런 이유로 구체적인 소재가 뭐였는지는 쓰기 어렵다. 단지 분명한 것은 하나하나 다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전개하기 때문에 관객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을 것이다. 난 배우들이 제일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웃겼을까? 자기들도 엄청 웃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저비용 고효율의 코미디 요소로 사용하는 전환이지만 이것도 단지 웃기려고만 넣은 것은 아니다. 후술하겠지만 이 작품에서 전환이라는 키워드는 영화의 다양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지점이 있다. 우리는 (글쓴이 포함) 보통 세상 사람들을 판단하는 게 쉽다. 왜 저 사람은 저러고 있을까? 에 대해서 각자의 답을 내놓는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세상에만 살고 있기 때문에 단면적인 모습만 볼 수밖에 없다. 영화는 이 판단의 오류를 꼬집는다.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색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에 신선하다고 느낄 관객 분들이 많을 것 같다.
다양성에 관해
영화에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설정이 있다. 바로 딸 조이의 퀴어 설정이다. 다양성은 우리 문화예술 매체에서 참 피곤한 소재다. 이른바 PC라고 불리는 이 것은 들어가기만 하면 왓챠피디아에서 투기장이 열린다. 피곤하다. 혹자는 ‘PC 묻었네’라고 영화나 드라마의 가치를 깎아내리기도 한다. 억지로 이런 코드를 집어넣었기 때문에 극의 흐름을 깨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음 한 편으로는 그런 생각을 해 본다. 멀티버스 안의 수많은 세상이 있다고 해보자. 거기에는 아시아 인이라는 인종이 아예 없다. 무조건 백인만 있는 우주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화양연화>를 볼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헤어질 결심> 역시 마찬가지다. <공조 : 인터내셔날>에서 사람들이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까? 아닐 것이다. 이는 문화예술매체의 다양성에만 국한 짓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영화에서 웨이먼드 역을 맡은 키 호이 콴이라는 배우는 경력이 중간에 끊겼었다. 유년시절 아역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 사람은 아시아인 역 빼고는 아무것도 맡을 수 없다는 제약 때문에 배우로서의 커리어가 끊겼었다. 할리우드라는 큰 판에 단지 인종이라는 이유로 주류에 끼지 못한다는 것, 아니 낄 기회조차 없다는 것은 많이 불공평한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PC’라는 것이 무조건 예술을 해친다고 볼 수 있을까? 글쓴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다. 단지 레즈비언이란 이유로 가족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과연 어떤 문제가 있어서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 걸까? 그 사람도 인간일 뿐인데. 역시 이런 측면에서도 이 사람들이 이런 대우를 받으라는 법은 없는 셈이다. 이 지점에서 이 PC라는 ‘정치적 올바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 우리가 소수자들에게 좀 더 친절하고 따뜻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윽박지르는 선 끝난다면 우리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알고 보면 그 사람의 우주를 전부 들여다봐야 하는 일인데도 말이다.
당신의 운명을 사랑할 수 있나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살아온 인생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글을 더 많이 써왔으면 어땠을까. 공부를 열심히 해 좋은 학교에 들어가면 어땠을까. 막연한 질문은 끝이 없다. 이 질문은 나에게 또 다른 세상을 연다. 삶의 관문에서 막힐 때마다 이 지점으로 돌아와 나 자신에게 묻는다. 그때 왜 그렇게 하지 않았어? 되묻는다. 세상에. 내 운명이란 왜 이따위란 말인가. 지긋지긋한 멍청함 덕에 나 자신을 향해 한숨을 내뱉는다. 이 한숨은 다른 사람에게 향한다. 왠지 잔소리를 하고 싶어 진다. 에블린처럼.
하지만 그런 이들에게 잊히고 있는 부분이 있다. 바로 지금 현재의 우리도 각자가 생각했던 어느 순간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비단 글쓴이만 해도 그렇다. 지금 여기서 글을 쓰고 있는 순간도 어렸을 때의 내가 바라왔던 모습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아직도 미련이 남는 지점이 있다. ‘그러면 안 됐는데’라는 생각으로 긴 시간 동안 후회하며 보냈다. 막상 이 글을 쓴다고 해서 그런 미련이 완벽하게 사라질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런데 이미 알고 있다. 그 선택을 했던 평행세계의 나도 맞이해야 할 필연적인 사건이 있다는 것을. 단지 그 일을 그렇게 보냈다고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리는 없다. 가능성이란 그런 것이다. 더 이상 꿈꿀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 어떤 선택을 하든 ‘통계적인 필연성’에 앞서 지금 없는 것에 가능성을 갖고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 삶의 의미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이 가능성과 희망에 대해서 말한다. 아무 의미 없는 인형 눈알도, 세탁소에 찌들어 보내는 일상도, 밝게 웃는 딸의 웃음도 우리가 어떤 것을 꿈꿀 수 있는 개연성이 된다는 말과 함께 전한다. 모든 것을 모든 곳에서 경험할 수 있다고 하면 지금의 내가 느끼는 즐거움이 없었을 것이다. 인생은 그렇게 풀어야 하는 미스터리의 연속인 걸 너무 잘 아니까 우리는 영화를 보는 것 아니겠어?
메버릭의 박력을 멀티버스로
이렇게 다양한 키워드와 래퍼런스를 때려박은 이 영화. 앞에서도 썼듯 '이걸 다 머릿속에 주워 담아야 영화가 이해되는 거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니다. 영화는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인력이 어마어마하다. 일단 초반부 세탁소 시퀀스부터 BGM이 들어간다. 빠른 템포로 전개되는 이야기. 알파 웨이먼드가 에블린을 만나 이어폰을 꽂아주기까지 긴 설명을 하지 않는다. 바로 액션 삽입하고. 액션 중간에 코미디 요소도 있다. 다 짬뽕처럼 다 넣는다. 그 대신 이야기 전반적으로 멀티버스의 인물들마다 갖는 공통점이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전개하기 때문에 이야기는 사실 간단하다. 후반부에 주인공 중 어떤 인물이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올해 5월에 <탑건 : 메버릭>이 개봉했다. 8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이때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좋아했던 이유가 톰 크루즈를 위시로 한 힘찬 에너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비행기로 활주로를 활공하는 듯한 갈등 구성이 영화가 다이내믹하게 느껴졌던 주요 연출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탑건 : 메버릭>만큼의 박력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미지가 나오면, 바로 그다음 정반대의 무언가가 나온다. 또 그 정반대를 대칭 찍고 완벽히 반대 측면에 있는 무언가가 나온다. 또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화장법이나 의상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어디서 본 적 없는 헤어스타일을 따라와서 보여준다. 그런 이상한 코디법을 받쳐주는 미장센까지 영화는 소재 하나하나가 신선하기 때문에 딸려오는 힘찬 에너지로 2시간 20분 내로 질주한다. 이 영화가 상영관을 얼마만큼 받을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가 <탑건 : 메버릭>보다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후반부의 하이라이트 신에서 볼 수 있는 뭉클함, 코미디 요소로만 국한 짓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탑건 : 메버릭>이 이뤘던 성취를 더 크게 돌며 이뤘다고 생각한다. 색다른 경험이다. 분명 스포일러를 없이 쓰는 것 같은데 쓸 내용이 계속해서 나오기 때문이다. 올해 말 <아바타 : 물의 길>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극장가의 허리케인이 되어 많은 관객을 흡수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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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대한민국에 던지는 질문 / 시빌 워: 분열의 시간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시빌 워: 분열의 시간"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따로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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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1주 최신 개봉영화(이터널스, 세버그, 시그널X, 크림, 퍼스트 카우)
[WEEKEND CHOICE MOVIE] 2021년 11월 1주차 #개봉영화
#최신영화#영화추천 #영화예고편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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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동백> 30초 예고편
3대째 국밥집을 운영하는 괴팍한 노인 ‘순철’.
하지만 불경기로 인해 식당의 존폐 위기가 찾아오고,
착하기만 한 아들과 철없는 손주는 도움이 되질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식당에 한 낯선 손님이 방문한 후
거짓말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데…
‘속상한 기억들, 같이 펄펄 끓이는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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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한국이 싫어서> 메인 예고편
‘내 행복도 어딘가에 있을 거야’✨ 행복을 찾는 당신이란 청춘에게! [한국이 싫어서] 메인 예고편 대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