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2022-05-15 13:41:52
멀어져야 손에 닿는 것들
때로는 포기가 도움이 된다
<파리, 13구>의 주요 캐릭터는 단 세명이다. 할머니의 집에서 머물며 타인의 애정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에밀리(루시 장 분), 직업과 연인을 바꾸어가며 정착하지 못하는 카미유(마키타 심바 분), 삶의 주도권을 잡으려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번번이 놓치는 노라(노에미 메를랑 분). 많은 청춘 영화들이 그렇듯 파리 13구의 청춘들은 원하는 것을 단숨에 손에 넣지 못한다. 인생은 항상 생각지 못한 대로 흘러가게 마련이고 얻고자 하는 것은 잡으면 사라지고 잡는 순간 진정 원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많은 이야기에서 주인공들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방식대로 얻지 못하지만 결국에는 무언가 다른 것을 얻곤 한다. 13구의 청춘들은 결국에는 원하던 것을 손에 넣지만 어느 시점에서는 목표물 획득을 포기한다. 그리고 포기함으로써 얻게 되는 청춘의 아이러니를 흑백 화면에 진하게 담아낸 영화가 <파리, 13구>다.
돌비 시네마가 발달해 관객에게 다양한 색채 경험을 시켜줄 수 있는 현대에도 굳이 흑백을 고수하는 영화들이 있다. 가장 최근에 개봉한 <벨파스트>의 경우 감독 케네스 브래너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과거에 대한 향수를 극대화시키는 장치로서 흑백 화면을 사용했다. 청춘 영화 중에서는 그레타 거윅이 뉴욕을 배경으로 길잃은 청춘을 연기한 <프란시스 하>가 흑백 화면을 고집했다. 청춘을 다룬다는 점, 거대 도시를 배경으로 한 현대 영화라는 점에서 <파리, 13구>는 <프란시스 하>의 파리 버전처럼 보이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프란시스(그레타 거윅 분)는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청춘이었던 반면 에밀리, 카미유, 노라는 인간관계에 대해 깊이 고민한다. 아마도 자본주의가 짙게 배어 제대로 된 밥벌이가 삶의 방향에 있어 중차대한 역할을 하는 미국과 상대적으로 복지가 발달해 직업보다는 인간관계에서 정체성을 찾는 유럽이라는 배경에서 나온 차이점으로 보인다. 따라서 <프란시스 하>의 흑백 화면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공허감이 <파리, 13구>에서는 화면을 가득 메운다. 현대 문물인 스마트폰이 이질적으로 보일 만큼 <파리, 13구>의 정서는 고전 영화에 더 가까워 보인다.
에밀리의 이야기는 홀로 거주하는 큰 아파트에서 시작된다.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아파트가 버거워 룸메이트를 구하던 에밀리는 남자라는 이유로 처음에는 카미유를 거절한다. 하지만 이내 카미유를 초대하고 연인과 친구 사이를 방황하다가 결국에는 카미유가 떠나가게 만든다. 직업도 일정치 않은 에밀리가 전전하는 직업들은 공통적으로 서비스직이다. 텔레마케터일 때는 고객의 사생활에 대해 묻다가 선을 넘어 해고당하고, 식당에서 웨이터로 일할 때는 다른 종업원들과 어울리다가 식당 한가운데서 춤을 춘다. 마지막으로 잠시 카미유의 부동산 중개업소에서 통역사로 일할 때조차 의뢰인의 사생활을 캐묻다가 카미유에게 저지당한다. 에밀리는 끊임없이 사람을 갈구하지만 직업을 바꾸었듯이 누구에게도 정착하지 못한다. 그 와중에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된 할머니는 모르는 세입자에게 맡긴 사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할머니를 포기했던 에밀리는 카미유를 포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카미유에게 선택권을 넘겨준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토록 매달렸던 카미유에게서 거리를 둠으로써 에밀리는 카미유를 돌려받게 된다.
카미유는 거절을 받아들일 줄 모른다. 남자라서 안된다는 에밀리의 룸메이트 거절에도 직장 때문에 위치가 좋다고 사정하고, 선 넘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노라의 부탁에도 결국에는 노라와 연인이 된다. 에밀리의 아파트에 월세를 살면서 자신이 없는 동안 여자친구가 에밀리와 있도록 내버려 두기도 하고, 에밀리와 인연을 끊은 것처럼 보이다가도 연락을 유지한다. 겉으로는 에밀리가 카미유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끊임없이 타인의 애정에 목말라는 건 카미유 쪽이다. 하지만 에밀리와는 달리 카미유는 자신의 애정욕구를 드러내지 못하고 짐짓 쿨한 것처럼 행동한다. 혼자서도 어떻게든 잘 지내는 에밀리나 노라와는 달리 카미유는 누군가를 하염없이 찾아나선다. 카미유가 에밀리와의 관계에서 혼란스러워했던 이유는 서로가 서로를 원하면서도 에밀리는 그것을 거리낌없이 드러내는 반면 카미유는 감정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밀리로부터 선택권을 넘겨받은 카미유는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고 에밀리에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쿨해 보이려던 겉멋을 포기한 카미유가 돌려받은 것은 그토록 원하던 정착이다.
늦게서야 대학에 돌아온 노라는 사람들 틈에 끼어 자연스럽게 사는 삶을 갈망한다. 하지만 자신과 닮은 포르노 배우 앰버 스위트(제니 베스 분)로 인해 가십의 주인공이 된 노라는 꽉 찬 강의실에서 동업자 카미유와 소수의 고객만이 공존하는 좁은 공간으로 이동한다. 카미유에게 경고를 했음에도 연인이 되지만 노라의 진정한 연인은 카미유가 아닌 앰버처럼 보인다. 노라는 앰버를 미워하는 대신 포르노 사이트에 접속해 말을 건다. 그리고 자신이 몰랐던 세계에 대해 배우면서 친밀감을 나누고 오프 공간에서 만나기에 이른다. 노라와 앰버가 겹치게 된 매개체인 금발 가발은 오프라인 공간에서는 삭제당한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 자기 자신보다는 집단 안에서의 익명성을 갈구하던 노라는 카미유와 헤어지고 공원에서 앰버를 만나는데 이 공간에서는 노라와 앰버가 전혀 비슷해 보이지 않는다. 새로이 얻은 현실에 휘청하던 노라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앰버에게 입을 맞추는데 이 장면은 흡사 앰버가 아닌 노라 자신에게 키스하는 것처럼 보인다. 꽉 찬 강의실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한적한 공원에서 마무리되며 익명성을 놓고 자기 자신을 마주한 노라에게 돌아온 선물은 그 자신이다.
대학 졸업 후 만난 후배들에게 직장을 다니는 선배들도 끊임없이 진로 고민을 한다고 말해 주었더니 후배들이 당황한 얼굴로 쳐다본 적이 있다. 방황하는 청춘이라기엔 에밀리, 노라, 카미유는 직장을 오가는 자리잡힌 성인들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에밀리는 직장을 전전하며 가족에 대해 고민하고, 노라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마지막까지 질문하며 카미유는 원하는 모습의 가면을 쉽사리 벗어던지지 못한다. 죽을 때까지도 방황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우리 모두는 죽을 때까지 청춘인 건 아닐까.
*본 리뷰는 씨네랩 시사회 초청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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