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작가2022-06-03 01:38:53
[메이의 새빨간 비밀] 초간단 3분 리뷰
디즈니플러스 [메이의 새빨간 비밀]
줄거리
학교에서는 쿨한 척하지만 집에서는 엄마한테 꽉 잡혀사는 13살 소녀 메이.
악몽을 꾸고 일어난 날 아침, 거울을 봤더니 자신이 레서판다로 변해버렸다!
감상포인트
1. 사춘기 소녀들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레서 판다'라는 소재로 풀어냄.
2. 결말은 진부하긴 하나, 소재와 전개 면에 있어서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했음.
3. 논란이 있는 것이 흠결, 아예 없었으면 좋았을걸.
감상평
처음 봤을 때는 신기했다. 동양권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그것도 '동양인 소녀' 이야기를 다루면서 갈등을 친구들과의 우정으로 풀어 냈다는 점에서. 솔직히 디즈니에서 동양권 문화를 다룰 때는 가족 이야기로 눈물 짜내겠다는 선전포고이기 때문에 '오? 제법 발버둥 쳤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결말은 역시나 싶다. 따지고 보면 메이가 앞 세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이 가장 전통을 지키는 방향인 것이다. 레서판다가 되었던 선조가 메이를 끌어안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장면이 그러하다. 메이는 오히려 전통성을 지키는 방향을 택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내면의 욕구를 그대로 인정하고 표출하는 것'이다.
결말뿐만이 아니다. 동양인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표현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여전히 달라지는 게 없다. 영화의 감독이 동양인이라고 해서 색다른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증명을 한 셈. 왜냐하면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하고, 디즈니에서 일하면 디즈니의 법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디즈니 룰'을 적용하고 지켜야만 영화가 제작될 테니 당연한 이야기다.
동북공정에 대한 부분은 아쉽다. 항상 언급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조금만 신경 썼다면 논란이 생기지 않게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뭐, 그렇다고 엄청 아쉽지는 않다. 그렇게 애정 쏟아부을 만큼 매력이 넘치는 영화는 아니었던 것 같다. 디즈니 플러스 구독자인데, 저녁 먹을 때 뭐 볼지 고민되면 한 번쯤 보라고 할 만한 정도니까.
별점
★★☆(2.5 / 5.0)
바짓가랑이 붙잡고 꼭 보라고는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소매 걷어붙이고 보지 말라고도 못하겠는 그런 영화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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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담 웹 | 소니 스파이더맨 유니버스를 코마에 빠뜨리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위험에 빠진 시민을 구하기 위해 뉴욕 시내를 바쁘게 가로지르는 구급대원 '캐시 웹'(다코타 존슨). 여느 때처럼 교통사고 때문에 다친 시민을 돕던 그녀는 강물에 빠지는 사고를 당하고, 동료 '벤 파커'(아담 스콧)의 도움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구한다. 하지만 그날 이후 캐시는 미래에 일어나는 일을 먼저 보는 환영에 시달리고, 미래의 사고와 비극을 먼저 알았지만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빠져든다.
그러던 중 그녀는 거미처럼 천장을 기어 다니는 적 '이지키얼 심스'(타하르 라힘)가 세 여학생 '줄리아'(시드니 스위니), '아냐'(이사벨라 메르세드), '매티'(셀레스터 오코너)를 죽이는 미래를 목격한다. 그들을 구하려다가 싸움에 말려든 캐시는 미처 몰랐던 이지키얼과의 악연을 발견하고, 그를 막기 위해 '마담 웹'으로 각성한다.
<마담 웹>, SSU 최악의 자충수
<아이언맨>과 <어벤져스>로 슈퍼 히어로 영화의 전성기를 열어젖힌 MCU. 이에 다른 스튜디오들은 MCU의 성공 방정식을 허겁지겁 벤치마킹했다. 그 결과 2010년대 할리우드에는 시네마틱 유니버스 열풍이 불었다.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을 앞세운 DCEU, 고질라와 킹콩을 내세운 몬스터버스, 프랑켄슈타인이나 드라큘라 같은 고전 괴물을 엮어 만든 유니버셜의 다크 유니버스 등이 연달아 출범했다.
SSU(소니의 스파이더맨 유니버스)도 후발주자 중 하나다. 소니 픽처스는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이 MCU에 출연하는 상황을 활용해 스파이더맨의 빌런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세계관을 꾸렸다. 시작은 좋았다. 톰 하디의 <베놈>이 월드와이드 8억 달러가 넘는 흥행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포문을 열었다. <베놈 2>와 <모비우스>로 MCU와의 연계를 시도하며 세계관도 확장했다.
하지만 SSU의 전망이 밝지만은 않았다. <베놈> 시리즈와 <모비우스>의 경우 비주얼은 화려하나 서사의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졌다. 또 MCU와의 연계에만 목을 맬 뿐, 스파이더맨을 언제 어떻게 등장시킬지 확실한 로드맵도 보여주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개된 신작 <마담 웹>은 끝내 SSU를 혼수상태에 빠트렸다. 히어로 영화로서도, SSU의 일원으로서도 무엇 하나 확실한 장점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녀들의 보호자를 꿈꾸다
히어로 영화의 구성요소는 크게 세 가지다. 영웅으로 거듭나는 서사, 빌런과의 대립, 액션을 비롯한 볼거리. 안타깝게도 <마담 웹>은 셋 중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 우선 <마담 웹>은 새 히어로의 당위성을 제시하지 못했다. 물론 히어로 영화로서의 콘셉트는 존재한다. 모성애를 중심으로 여성 서사를 풀어나간다. 그러나 콘셉트의 설득력이 부족했다.
입양아로 자라난 캐시는 평생 친엄마를 원망했다. 그녀가 아마존에서 만삭의 몸으로 거미 연구를 진행하다가 출산 직후 사망했기 때문. 하지만 캐시는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의 기원을 파헤치던 중 미처 몰랐던 진실을 발견한다. 엄마가 자기 희귀병을 고치기 위해 거미 연구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는 사실을. 이에 그녀는 엄마의 모성애와 희생정신을 본받고, 거미에게서 받은 예지 능력을 활용하기로 결심한다.
더 나아가 캐시는 자기처럼 가족 문제로 고통받는 소녀들을 보살피고, 그들이 히어로로 거듭나는 길을 알려주는 멘토로 거듭난다. 그렇게 그녀는 엄마가 정신병원에 갇힌 줄리, 부모가 불법이민자라 추방당한 아냐, 사업가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매티와 한 가족이 된다. 이러한 여성 서사를 강조하는 장치도 여럿이다. 캐시의 아버지에 관한 언급이 전무한 점, 이지키얼 심스와 벤을 제외한 모든 캐릭터가 여성인 점이 대표적이다.
설득력 없는 시나리오
하지만 <마담 웹>의 헐거운 각본은 영화의 콘셉트와 히어로의 신념을 뒷받침하지 못한다. 캐시와 나머지 세 캐릭터가 한 가족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순전히 우연이다. 캐시는 미래에 히어로가 될 세 캐릭터가 이지키얼 심스에게 살해될 미래를 '우연히' 목격하고, 이에 그녀들을 구해준다. 도망치던 중 캐시는 셋 모두와 '우연히' 마주친 인연이 있고, '우연히도' 셋 모두 가족 무제가 있음을 깨닫는다.
계속되는 우연 외에 캐시가 이들에게 그토록 강한 책임감을 느끼는 이유, 세 소녀가 캐시를 엄마처럼 신뢰하는 이유는 제시되지 않는다. 그들이 서로 유대감을 쌓는 서사도 얕다. 식당에서 다른 남자애들과 눈이 맞아 노는 장면, 캐시가 CPR를 알려주는 장면 정도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의 유지, 희생정신울 계승하겠다는 결심은 공허해진다.
그 결과 <마담 웹>은 러닝타임 116분 중 첫 20분만 흥미롭다. 캐시가 예지 능력을 처음 깨닫고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은 플래시백과 포워드를 오가는 편집 덕분에 꽤 신선하다. 그녀가 예견한 비극을 못 막았다며 자책하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캐시와 벤 파커의 티키타카도 다른 세 소녀와의 대화에 비하면 합이 잘 맞는다. 기승전결 중 기가 가장 눈길을 끄는 부작용이 발생한 셈이다.
역할이 없는 빌런
이에 더해 빌런 이지키얼은 별다른 존재감이 없다. 히어로 영화에서 빌런은 히어로를 위기에 빠트린다. 그는 히어로를 정신적으로, 물리적으로 피폐하게 만든다. 하지만 비 온 뒤에 땅이 굳듯이, 히어로는 빌런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더 굳은 신념을 지닌 영웅이 된다. 배트맨이 조커를 만난 후에 다크나이트가 되듯이. MCU의 스파이더맨이 그린 고블린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사람들의 선함을 믿고 싸웠듯이.
이지키얼의 경우 마담 웹의 아치 에너미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예지 능력을 갖고 있는 마담 웹은 자기 능력을 활용해 미래를 바꾼다. 반면에 이지키얼은 예지 된 미래를 바꾸려고 발버둥치지만 끝내 실패한다. 즉, 그들의 운명과 자유 의지의 차이점을 대조하는 식으로 이야기에 깊이를 더할 수 있었다.
물론 미래를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히어로 영화에서 신선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데드풀 2>,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엔드게임> 모두 같은 문제를 다뤘기 때문.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이지키얼 때문에 캐시의 엄마가 죽었으니, 둘의 대립을 감정적으로 격화시킬 수도 있었다. 자유와 통제라는 가치의 충돌을 배경으로 우정 싸움을 다뤘던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처럼.
하지만 <마담 웹>은 이지키얼에게 이렇다 할 플롯을 전혀 부어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가 왜 캐시의 엄마에게 접근해서 거미를 훔쳤는지, 훔친 거미를 어떻게 활용해서 뉴욕을 주름잡는 거물이 됐는지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 이 모든 이야기를 관객이 직접 추측하고, 유추해야 한다. 이처럼 빌런이 평면적이고, 플롯 상의 도구로만 느껴지다 보니 <마담 웹>은 긴장감이 현저히 부족하다.
볼품없는 액션
심지어 세 번째 구성 요소인 볼거리도 미흡하다. 히어로 영화에서 액션을 기대하는 것은 사실 단지 화려함 때문이 아니다. 액션은 히어로와 빌런의 대립이 절정에 달했음을 암시하고, 또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서 영화와 관객이 맺은 암묵적이고 장르적인 약속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액션 대신 원더우먼의 일장연설로 클라이맥스를 채운 <원더우먼 1984>가 당혹스럽다고 실망스럽다는 혹평을 피하지 못했던 이유기도 했다.
<마담 웹>의 액션은 일단 분량이 부족하다. 기차역, 식당, 뉴욕 시내와 부두에서 펼쳐지는 시퀀스 4개가 전부다. 액션의 구성도 인상적이지 않다. 캐시가 먼저 본 미래를 피하는 전개가 되풀이되기 때문에 긴장감이 없다. 캐시를 제외한 나머지 세 주인공이 히어로로 각성해 능력을 보여주는 장면도 없고, 전작인 <베놈>과 <모비우스>에 비해 CG도 어색하다. 종합하면, 히어로 영화에 기대하는 최소한의 액션도 보여주지 않는다.
어찌 보면 이 대목이야말로 <마담 웹>의 가장 큰 문제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SSU에 대한 기대는 크지 않았으니까. 사실 <베놈> 시리즈나 <모비우스>에서도 영웅이나 안티 히어로가 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은 부족했다. 빌런과 싸워야 하는 동기나 원인도 뚜렷하지 않았다. 배우들의 열연과 CG에 힘입은 액션과 비주얼만이 강점이었다. 그런데 <마담 웹>은 SSU의 마지막 미덕조차도 갖추지 못했다.
SSU에 비수를 꽂다
더 나아가 <마담 웹>은 존재 의의조차 의문이다. 쿠키 영상조차 없기 때문. <베놈 2>는 <스파이더맨: 노 웨이홈>과 연결되는 쿠키 영상으로 기대감을 키우며 실망스러운 완성도를 상쇄한 바 있었다. <모비우스>도 벌쳐와 모비우스의 만남을 보여주며 SSU의 미래를 궁금하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마담 웹>에서는 쿠키 영상도 없고, 극 중에서도 스파이더맨이나 다른 빌런을 암시하려는 시도를 전혀 찾을 수 없다.
이쯤 되면 소니가 극장 개봉을 선택한 이유도 의문이며, 자연히 SSU가 치러야 할 대가도 꽤나 가혹해 보인다. SSU를 향한 얼마 안 되는 신뢰와 기대치마저 무너뜨렸으니, 다음 주자인 <크레이븐 더 헌터>와 <베놈 3>의 전망은 밝으래야 밝을 수가 없다.
Dreadful 끔찍한
지금이야말로 OTT를 활용할 타이밍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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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이라는 상속자에게 들려주는 편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석유 터져 나온 오세이지족 보호구역, 미국 서부 오클라호마. 오세이지족이 부자가 된 이 땅에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 ‘어니스트 버크하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나타난다. 오세이지족의 친구로 명성을 쌓은 삼촌 '윌리엄 킹 헤일(로버트 드 니로)'의 사업을 돕기 위해서.
택시 기사로 오클라호마에서의 삶을 시작한 어니스트. 어느 날 그는 ‘몰리 카일리’(릴리 글래드스톤)를 승객으로 만나고, 곧장 사랑에 빠진다. 몰리 역시 어니스트에게 첫눈에 반하고, 그들은 부부의 연을 맺는다.
하지만 그들의 결혼 생활은 이내 난관에 부딪힌다. 윌리엄이 조카를 통해 몰리와 그녀 가족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으려는 음모를 실천에 옮겼기 때문. 몰리의 어머니와 자매가 하나 둘 죽어 나가는 가운데, 어니스트는 아내와 유산을 두고 잔인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스코세이지가 스코세이지 하다
<플라워 킬링 문>은 1920년대 오클라호마에서 발생한 오세이지족 살해 사건을 다룬 영화다. 1870년대에 오세이지족은 캔자스 보호구역에서 강제 이주를 당했고, 결국 오클라호마에 보호구역을 매입했다. 이후 1890년대에 오클라호마 보호구역에서는 석유가 발견됐고, 석유 채굴권을 오세이지족 전체가 공유함에 따라 오세이지족은 벼락부자가 됐다.
하지만 오세이지족은 이내 자기 재산을 강탈당했다. 미국 정부가 도입한 후견인 제도 때문. 백인 남성이 오세이지족 은행 계좌를 관리하고, 미국 정부가 석유 로열티를 대신 맡으면서 오세이지족 자본을 노린 범죄가 난무했다. 이 난리통 중에는 백인에게 가족 모두를 잃은 오세이지족 여성의 사연도 있었다. 마틴 스코세이지는 데이비드 그랜의 동명의 논픽션에 기반해 그 비극의 시작과 끝을 차분히 비춘다.
소재만 봐도 <플라워 킬링 문>은 스코세이지다운 영화다. 그는 <갱스 오브 뉴욕>, <택시 드라이버>, <아이리시맨> 등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다. 그들의 흥망성쇠를 통해 미국 역사의 역설을 성찰했다. '아메리칸드림'이 과연 자랑할 정도로 떳떳한지 질문을 던지면서. 이는 아메리카 원주민과 백인의 관계를 다루는 작품이 가장 스코세이지다운 이유이기도 하다. 가장 근본적인 시작점으로 되돌아간 셈이므로.
사랑과 상속의 줄다리기
<플라워 킬링 문>의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오클라호마에 온 어니스트가 몰리를 만나고, 삼촌 빌의 지시 하에서 몰리의 가족을 살해한 후 유산을 차지하는 이야기가 전반부다. 이후 FBI가 등장해서 어니스트와 빌의 범죄 행각을 추적하고 법정에 세우는 이야기가 후반부를 채운다. 이때 스코세이지는 전반부에 힘을 준다. 범죄 스릴러의 쾌감 대신 백인과 원주민의 드라마에 주목한다.
특히 어니스트와 몰리의 멜로가 핵심이다. 어니스트가 몰리를, 몰리가 어니스트를 사랑한 것은 분명하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영화는 두 남녀의 사랑 기저에 다른 감정을 깔아 둔다. 욕망과 두려움이다. 돈을 욕망하는 남편, 그런 남편에 대한 두려움. 부부가 사랑을 지키기 위해 각자 내면의 괴물과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이 3시간 넘도록 반복된다. 영화는 그들이 마지막 선택을 내리는 찰나에 비로소 대미를 장식한다.
더 나아가 영화는 이뤄질 수 없는 부부 관계를 통해 미국이라는 국가의 근간을 드러낸다. 사랑, 욕망, 두려움의 근원에는 '상속'이 있다. 오세이지족의 유산을 상속받겠다는 빌과 어니스트의 야욕. 영화는 그 야욕이 단순히 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이는 지난 세월 스코세이지의 필모그래피를 채운 문제의식과도 일맥상통한다.
'미국'이라는 공동체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정작 공동체이자 가족의 일원이 된 사람들을 짓밟는 모순. 그에 힘입어 만들어 낸 '미국'이라는 사회적 자본. 그 자본을 상속받은 지금의 미국까지. 영화는 미국의 자본축적이 피와 불의의 역사였다고 가감 없이 말한다. 그래서일까? 오세이지족 사람들이 만들어낸 꽃과 미국의 첫 번째 성조기가 겹쳐 보이는 마지막 장면은 아름답지만, 처연하다.
미국인도, FBI도 아닌 오세이지족의 눈으로
물론 <플라워 킬링 문> 속 자성의 메시지는 자칫 뻔할 수도 있다. 미국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는 작품은 한 둘이 아니니까. 그러나 이 영화의 메시지는 유달리 날카롭게 폐부를 찌른다. 오세이지족의 관점을 빠뜨리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어니스트가 화자인 것과는 별개로, 영화는 범죄자와 형사 사이에서 자칫 가려지기 쉬운 피해자를 조명하고자 노력한다. 그 덕분에 메시지에도 최대한의 진정성이 담겼다.
오프닝이 대표적이다. 영화는 오세이지족 구역의 생활상을 비춘다. 오클라호마에서 석유가 터지고, 부유해진 이들. 양복을 입은 그들은 백인 기사를 거느리며 자동차를 타고, 백화점에서 쇼핑을 즐기며, 골프를 치며 시간을 보낸다. 이 몽타주는 이질적이라서 더 의미심장하다. 필름 속 오세이지족은 다른 미디어에서 흔히 접한, 통념 속에 갇힌 아메리카 원주민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석유라는 행운 덕분에 손에 쥔 부를 미국인다운 방식으로 즐기는 모습일 뿐이니 지극히 자연스럽다. 하지만 논리적 귀결과 달리 이 몽타주는 여전히 이질적이다. 나도 모르게 아메리카 원주민을 '미국인'에서 배제하는 편현합의 발로 대문이다. 이는 스코세이지의 의도처럼 느껴진다. 영화가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 백인들의 익숙한 이데올로기를 파괴하면서 앞으로 들려줄 이야기의 진수를 암시한 셈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영화는 잊혔고, 잊힐 수밖에 없는 오세이지족의 생활상을 가능한 자세히 기록하려 한다. 템포를 과하게 잡아먹는 게 아닌가, 극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인가 싶을 정도다. 예를 들어 오세이지족 언어는 날 것 그대로 영어 자막 없이 삽입됐다. 그들의 장례, 결혼, 유아세례 비슷한 기념 풍습도 스크린 위에 재현된다. 심지어 오세이지족이 믿는 사후세계도 등장한다.
필연적인 호불호
다만 <플라워 킬링 문>은 결코 상업 영화라고 할 수 없다. 영화의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모든 부분이 대중성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러닝타임만 해도 그렇다. 3시간 26분에 달하는 분량 덕분에 영화는 어니스트, 몰리, 빌의 변화를 사냥개처럼 포착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 분량 때문에 영화의 접근성은 자연히 높아진다. 후반부에 FBI가 등장하며 템포를 끌어올리는 등 탁월한 완급조절을 자랑하지만, 한계도 분명하다. 스코세이지 영화를 많이 접했다면 전제적인 스토리텔링과 구성, 주제가 익숙하기에 더 지루한 느낌도 있다.
기술적인 측면도 마찬가지다. 와이드 한 촬영법, 롱테이크와 이동하는 카메라 장면 덕분에 인물의 감정선과 영화의 주제에는 힘이 실린다. 다만 그로 인해 고전 영화와 현대 영화가 섞인 느낌도 든다. 자칫 올드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시나리오가 변경됨에 따라 배급권이 파라마운트에서 애플 티비로 넘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영화를 보고 나면 파라마운트의 결단을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다.
배우들의 연기도 호불호가 갈린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로버트 드 니로는 안정적이다. 다만 충격적이지는 않다. 특히 디카프리오의 경우 본인이 극을 주도할 때 빛나는 배우이기는 하지만, 이번만큼은 <장고: 분노의 추적자> 속 '캘빈 캔디' 같은 역할을 맡는 게 좋지 않았을까 싶다. '어니스트' 역을 선택한 디카프리오 대신 FBI 형사 '톰 화이트'를 연기한 제시 플레먼스의 존재감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래도 조연을 보는 재미는 쏠쏠하다. 누구보다도 '몰리'를 연기한 릴리 글래드스톤이 눈길을 잡아끈다. 사랑과 두려움이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지만, 그 싸움을 숨기려 최대한 애쓰는 인물을 표정만으로 표현해 낸다. 그 감정선을 따라가기 위해 얼굴을 보다 보면 마치 모나리자 그림을 보는 것처럼 신비롭고 매력적이다.
끝내 기대치를 넘어서는 엔딩
하지만 예상을 벗어나는 엔딩 덕분에 <플라워 킬링 문>의 호불호는 이내 잊힌다. 영화는 남은 이야기를 에필로그 형식으로 보여주려 한다. 주요 인물이 재판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여줄 차례이므로. 대부분의 영화는 이 순간을 익숙한 방식으로 처리한다. 실제 자료 화면이나 사진에 자막을 더하는 식으로.
스코세이지는 다르다. 그는 직접 영화에 출연한다. 단순히 모습을 비추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무대 위에 올라 낭독극의 화자가 된다. 감독 본인의 음성으로 인물들의 남은 이야기를 직접 들려준다. 낭독을 통해 영화가 보여준 이야기를 다시 한번 강조하는 듯하다.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지난날을 반성하는 이야기. 앞으로도 같은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시작점을 잊지 않겠다는 이야기.
이에 더해 스코세이지다운 방식으로 영화의 위기에 스코세이지가 대처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영화는 결국 이야기라고. 설령 달라지는 일은 없더라도 이야기를 만들고, 들려주고, 보여주는 게 이야기꾼의 유일한 역할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마블 영화를 테마파크라고 지적하며 서사를 들려주는 '시네마'의 공간이 줄어드는 세태를 비판했던 것처럼. <플라워 킬링 문>의 끝이 어느 때보다도 노장의 진심으로 가득한 마무리인 이유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마지막 낭독 덕분에 완성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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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라는 가면
줄거리
의문의 병을 앓고 있는 엄마 대신 수하물을 부치는 어린 소년 엘리아스.
아들의 도움으로 가발과 선글라스로 자신을 무장하곤 주사를 맞은 뒤 비행기에 타는 나디아.
평화로운 비행기 안은 갑자기 칼과 총을 들이미는 테러범들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고,
비행기가 반대로 돌자, 나디아는 초조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감상 포인트
1. 처음 보는 장르인 듯, 그동안 봐 왔던 장르인 듯 신선한 영화.
2. 잔인함 지수 매우 높음 주의!
3. 강렬한 악역 등장!
감상평
영화에 대한 정보 없이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해서 예고편만 보고 튼 영화. 처음에는 좀비를 기대했는데 초반부를 좀 보다 보면 뱀파이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완전히 좀비가 아니라고 하기엔 비슷한 특성을 가진 독특한 흡혈귀를 만든 것 같다. 알고 보니 이미 넷플릭스에선 유명한 영화라고 한다.
"여인은 생존 싸움을 시작한다. 그간 힘겹게 숨겨온 어둠의 힘을 뿜으며."
이게 네이버에 등록된 영화 소개인데, 마지막 구절이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생존하기 위해 어둠의 힘을 빌린다는 듯한 느낌이지 않은가?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의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 고군분투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런 재난 영화의 치트키인 가족, 모성애나 부성애를 등장시키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영화에서는 어김없이 어린 빌런이 등장한다. 내 생각엔 처음부터 엘리아스가 가만히 있으라는 엄마 말만 잘 들었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 같다. 어쩜 처음부터 끝까지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하고 일을 다 그르치는지... 뒷목 잡고 쓰러질 뻔.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영화는 오히려 실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비행기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극한의 상황이 펼쳐진다면 인간은 어디까지 이기적이고 잔인해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뱀파이어라는 형태로 화답을 하는 것처럼.
"네 안에 사악한 힘이 있어. 넌 그걸 통제할 수 없어."
뱀파이어의 모습은 인간 내면의 악한 본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이 악함을 극대화해 절정에 치닫게 만든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뱀파이어라는 존재는 '악함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좀비가 원초적 본능만 남은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는 조금 다른 맥락을 가지고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로는 아무래도 승무원으로 위장했던 테러범, '에이볼트'를 꼽을 수 있겠다. 그는 나디아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자 겁에 질리거나 도망가기는커녕, 혈액을 채취하는 미친 사이코패스다. 그 피를 취하기 전부터도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데에 능숙한 천부적 또라이. 에이볼트는 나디아의 피를 스스로 주사한 후에 본격적으로 미쳐 날뛰기 시작한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VS 내면에 가두어놓은 악한 본질
영화를 한 줄로 정리하자면 그렇다. 나디아와 에이볼트가 대립하는 것은 사실 나디아 내면의 악함과 싸우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과도 같다. 나디아는 계속해서 인간으로서, 엄마로서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으려 발악한다.
둘의 가장 큰 차이는 피를 마시는 장면에서 나온다. 나디아가 수하물 칸에서 어떻게든 인간의 피만은 마시지 않겠다고 개의 피를 마시는 것에 반해, 에이볼트는 자신이 살기 위해 한때 동료였던 자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장면에 있다. 이 장면도 본질적으로 인간과 동물에 대한 부분을 떠올리게 하지만... 어쨌든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게 아닐 테니 지금은 잠시 넘어가겠다.
나디아는 피를 마시고 이성을 잠시 잃어도 아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곧장 마음속의 동아줄을 붙잡는다. 그러나 에이볼트는 본능적인 움직임을 마다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인간의 피를 마신다. 나디아의 얼굴이 변해가는 과정이 매우 더뎠던 것에 비해, 에이볼트는 곧바로 이빨이 돋고 귀가 뾰족해졌던 것을 생각하면 쉽다.
나디아에게 아들이라는 존재는 굉장한 아이러니다.
아들 때문에 악한 본성을 억누르지만,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마찬가지로 어둠의 힘이 필요하다. 그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나디아는 자신이 엄마라는 사실만은 잊지 않으려 애쓴다.
비행기에서 에이볼트를 물리친 후, 엘리아스는 엄마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피를 나디아의 입속에 떨어트린다. 하지만 깨어난 나디아는 다가오는 아들을 뿌리치며 거세게 저항하고, 이내 도망쳐 버린다. 악한 본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더 이상 말도 할 수 없으면서, 자신의 이런 모습을 아들에게 보이는 것이 창피하단 듯.
그러나 마지막에 비행기에서 내렸을 땐,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뛰어오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앞에서 아들을 뿌리치는 장면보다 아들을 먹잇감으로 인식하고 달려드는 모습이 더욱 슬펐다.
이 영화에서 또 한 명의 중요한 인물은 바로 파리드다.
파리드는 미국의 컨벤션에 참가하기 위해 비행기에 탄 물리학자다. 하지만 알고 보니 열리지도 않는 컨벤션에 초대받은 것으로, 테러범들이 나중에 중동인인 파리드를 테러리스트로 몰아가기 위해 수를 쓴 것이었다. 그를 데려가 성명서를 읽게 한 것까지, 모든 것이 계획의 일부였던 것. 그 때문에 파리드는 마지막까지 아이를 구하고 한 쪽 팔을 잃었는데도 테러범으로 오해를 받는다.
영화 중반에서는 비행기를 돌리자는 그의 말에 백인 남성이 반대하는 것도 그렇고, 끝까지 그를 체포하려 드는 경찰들도 그렇고, 편견에 사로잡힌 인간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들이 뱀파이어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성악설을 주장하지 않는다.
파리드는 뱀파이어에게 물리고도 끝까지 멀쩡한 유일한 인간이다. 손을 물렸지만 곧바로 잘라냈기에 인간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 이는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스스로 뱀파이어에게 물려 영생의 길을 택했던 환자와 대조된다. 마음속에서 계속 피어나는 악의 뿌리를 잘라내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다. 이렇게 사는 것은 내가 이렇게 살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정 내 마음속 악의 뿌리를 잘라내려고 노력하고 있을까?
어쩌면 우리의 악한 본성은 인간이라는 가면으로 가려지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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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치의 투명함
<힘찬이는 자라서>(2022, 김은희)
<윤시내가 사라졌다>(2020, 김진화)
<세기말의 사랑>(2023, 임선애)
<살인자ㅇ난감>(2024)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2023)
* 위 작품들의 장면과 결말 포함
손수현을 보기 위해 재생한 단편 <힘찬이는 자라서>, 노재원은 뜻밖의 수확이었다. 주인공 정희의 친구의 남편 강석, 적당히 내향적이고 친절한 남자인 그는 대화의 주제가 달랐다면 예의바른 미소로 일관하다 퇴장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영화가 만들어질 까닭도 없었겠지.) 정희가 쓰는 시나리오가 테이블에 올라오며 두 사람은 부딪힌다. ‘이퀄리스트’적 논리를 따박따박 나열하는 강석의 언행에 딱히 악의는 없다. 그는 모르고 또 알려 하지 않으므로 ‘억울’해 하는 게다. 강석은 현실을 반영해 구성된, 특정적인 동시에 보편적인 인물이었다. 배우는 역할에 충실했고, 나는 강석이 밉고 갑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직설이 차라리 반가웠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저리도 솔직한 표정을 짓는 저 배우는, 주어진 대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저이가 정희의 시나리오를 이해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왠지 그럴 것 같다. 그건 노재원의 연기를 앞으로도 지켜보고 싶어졌다는 신호였다.
첫 만남부터 눈길을 사로잡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서서히 스며들게 되는 이도 있다. 노재원은 말하자면 후자였으나, 어느 정도 전자이기도 했다. 타 배우를 염두에 두고 관람한 작품들에서 그를 목격할 때마다, 매번 새로이 놀랐다.
자주 길을 잘못 들거나 가다 멈추곤 하는 로드무비 <윤시내가 사라졌다>. 운시내=준옥은 완벽한 두 번째 만남이었다. 반짝이는 재킷을 걸친 그가 카메라에 잡힌 순간, 노재원의 이름을 기억했고, 좋아하게 되리란 것을 예감했다. “원조 가수랑 똑같기만 하면 매력이 있나, 저는 그냥 저 마음가는 대로 부르거든요. 그래서 일이 안 들어와요.” 그 자조 섞인 담백한 대사에 준옥의 태도가 담겨 있었다. 그의 공연은 본인의 설명대로다. 힘주지 않아도 깊이가 느껴지는, 차분한 ‘엣지’를 품은 목소리. 섬세한 선을 그리는 움직임. 노재원은 단지 노래를 할 줄 아는 것을 넘어- 음으로 관객의 심장을 울릴 줄 아는 공연자였다, 꼭 운시내처럼. 무대 위의 옅은 웃음기는 후에 화장을 지우고 거울을 보며 짓는 미소와 닮아 있다. 미묘한 카타르시스. 겸손함, 당당함, 자만하지 않는 자신감. 삶의 지혜를 터득한 사람 특유의 아우라가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운시내’가 노래하는 자세는 ‘정준옥’이 살아가는 자세와 닮았다. 식탁 밑에 있는 하다(=처음 보는 사람)를 동그란 눈으로 응시하다 한쪽 이어폰을 슥 빼 제 귀에 끼우는 그 독특한 붙임성. 당황한 하다가 식탁에 머리를 박자 튀어나오는 진심어린 감탄사 “아이고.” 그 마주침부터 줄곧, 하다는 무례하고 준옥은 스스럼없다. 준옥의 친절은 형식적 예의 이상이다. 어머니 뻘인 순이를 ‘친구’라 부르며 벽없이 훅 다가가는 그는 하다의 말처럼 “선을 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단 ‘선을 잘 넘는 법을 아는’ 이였다. 꿍꿍이가 없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 내면의 깊이마저 갖춘. 그 넓은 마음 씀씀이는 절로 은은한 향기를 내뿜는다. 스스로 투명하므로 타인의 속도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걸까. 그는 하다의 셈과 위악을 어느 정도 간파하면서도 섣불리 평가해버리지 않고 조용히 지켜본다. 은근히 끼고 싶어하는 속내를 눈치채고 보내는 눈웃음, 삐딱한 행동을 관찰하는 진지한 눈길. 준옥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인형과 함께 모녀의 갈등을 터트린 것은 글쎄, 아마도 의도적이다. 가운데 끼어 욕을 먹고 눈치를 보며 기어이, 중요한 이야기를 던지고야 만다. 하다의 케케묵은 감정을 자꾸만 건드린다. 일부러 걸림돌이 되고 기꺼이 거슬린다. 노재원의 자잘하고 천연덕스러운 제스처들은, 준옥의 신묘한 중재자(!)적 능력을 의심케 했다.
그런 그가 살짝이라도 차가워지면 이쪽에서 눈치를 보게 되고, 단호해지면 더욱 귀기울이게 된다. 준옥의 위로는 빈말이 아니고 그의 조언은 불쾌한 맨스플레인이 아니다. 그가 ‘실패한’ 과거를 꺼내 보여주지 않았더라도 와닿았을 것이다. 군더더기 없는 진심을 체화한 노재원, 그가 간직한 아름다움은 드문 종류의 것이었다.
<윤시내가 사라졌다>는 굳이 말하자면 하다와 순이의 영화이기에, 준옥은 도중 하다에게 버려지며 화면을 빠져나간다. 화내거나 패닉하는 대신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고 마는 것마저 그답다 싶었다. 그렇게 흐지부지 퇴장하는 그를 ‘메시지의 의인화처럼 보이는 존재’라고 해버리면 편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리 갈무리하기엔 너무나 아쉬웠다. 노재원을 만나 생명력을 얻은 준옥, 그의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평안 정도는 빌고 싶어진다. 한편으로는 안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그는 잘 살아가리라 짐작하게 된다. 법 없이도 살 듯한 남자. ‘관종’과 ‘짝퉁’들의 언더월드에서 운시내=준옥은, 우아한 미스핏, 골목길의 귀인, 사랑하지 아니할 수 없는 도인이었다.
<윤시내가 사라졌다>(2020)
여기 ‘법 없이도 살 듯한 남자’가 또 있다. <세기말의 사랑> 속 도영이다. 모순된 묘사로 들릴 것이다, 그는 회사 돈을 횡령한 범죄자이니. 가출한 조카가 위장결혼한 와이프 명의를 도용해 만든 카드값을 혼자 메꾸려다 그렇게 되었다. 앞 두 문장의 설명은 틀리지 않았으나 완전히 맞는 것도 아니다. ‘위장결혼’의 자간에는 사랑과 배려가 묵음처리돼 있다.
영미와 도영은 조금은 동족이다. 사랑하는 이의 범죄를 덮으려 밤새 부업을 하고 형까지 산 영미, 기다려달라는 영미 말을 따르다 그런 건지 뭔지 자수도 못하고 체포된 도영. 뒤늦게 꼬박꼬박 돈을 갚는 그를 미워할 수 있는 관객은 별로 없었으리라. 캐릭터의 사연도 성격도, 껍질을 하나씩 벗겨내는 방식으로 풀어가는 <세기말의 사랑>, 도영의 껍질은 투명했다. 스쳐 지나갈 법한 소재를 클로즈업해 인물을 표현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는데, 그런 순간은 도영과 만나 유독 빛났다. 비엔나 소시지에는 타인에게 일말의 불편함도 남기지 않으려 애쓰는 배려심이 묻어 있었다. 모기 물린 자국에 찍은 십자가에는 살짝 엉뚱한 유머감각과 순수한 설렘이 눌려 있었다. 도영의 스크린 타임은 짧았으나, 그의 됨됨이를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유진과 도영이 마주하는 시퀀스는 겨우 둘이었고 개중 하나는 화상면회 씬이었으나, ‘위장 결혼 상대’를 향한 도영의 사랑을 짐작하기엔 충분했다. “좋아해요”를 뱉어버리고는 웃음기가 사라지는 입가에, 호텔 창문 너머 반짝이는 관람차를 보며 (혹은 보지 못하며) 섬세하게 일그러지는 뺨에, 작품이 생략한 이야기들이 함축되어 있었다.
도영은 그럴듯하게 멋져 보이는 법을 모르는 듯한 사람이었다. 어쩐지 노재원도 그런 사람일 것만 같았다. 수줍은 손끝과 내리깔린 눈꺼풀, 자주 흐리는 말끝에 가득 담긴 진심이 그대로 전해졌다. 도영에겐 그런 드문 자질이 있었다. 그는 이상한 사람이고, 노재원은 이상한 배우다.
<세기말의 사랑>(2023)
최근 노재원은 넷플릭스를 누비며 존재감을 넓히고 있다. <D.P> 시즌2에 군복을 입은 실루엣을 비추었고, 최근에는 <살인자ㅇ난감>에 출연하며 ‘범위’를 증명했다. ‘하상민 역에 노재원’이라니, 뜻밖의 캐스팅이었다. <힘찬이는 자라서>까지를 포함해도, 앞뒤가 다른 하상민은 그가 이제껏 보여준 이미지와는 한참 먼 캐릭터로 느껴졌다. 허나 곧 (정이서와 더불어) 꽤나 영리한 캐스팅이었음을 깨닫게 됐다. 노재원은 어떤 전형을 따라하는 대신 저만의 스타일로 보통의 악인을 소화했고, 결과적으로 시청자가 극에 더욱 몰입하도록 도왔다.
움츠러든 어깨, 차마 피하지 못하는 눈, 머뭇거리는 말투, 하상민은 매혹적인 젠틀맨이 되기보단 유약함과 무해함을 가장해 상대의 경계심을 해제한다. “혹시 연락을… 해도 되나?” 수락을 해도 반대로 거절을 해도 괜찮을 듯한 톤이다. 그 탁월하게 균형잡힌 딜리버리에 감탄했다. 경아에게 ‘너는 나와 동류’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건, 꾸며낸 피해 서사 자체보다는 그것을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는 (배우의) 태도이고 마스크다. 악의라곤 없어 보이는 노재원의 눈빛에, 원작의 전개를 알고 있음에도 속아넘어갔다. 거울 앞에서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하상민에게 이유있는 싸함을 느끼면서도, 거기 속셈은 없다고 믿고 싶었다. ‘이번엔 믿어봐도’ 될 법한 분위기를 풍기는, 최우식과는 또다른 방향으로 ‘위협적이지 않은 남성성’을 두른 배우. 그렇게 노재원은 성공적으로 경아와 시청자의 의심을 풀었고, 배신감을 극대화했고, 최후의 순간에는 이희준과 만나 더없이 보잘것없어졌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평범하여 더 유해한 비겁자 하상민. 송촌 앞에서 벌벌 떨고, 울며 애원하고, 먹어 들어가는 발성으로 죄를 고백할 때보다- 경아에게 욕하고, 소리지르고, 이내 이성을 잃고 목을 조를 때, 그는 가장 약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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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다행이었다, 그 직후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를 시청한 것은. 노재원의 대중적 인지도를 높인 이 작품을 최근에야 보게 됐는데, 이미 목격한 매력과 범위를 놀라운 형태로 재확인하는 경험이었다. 서완은 일단, 조심스럽고 순하고 해맑다. 날카로운 눈매와 맑은 눈동자가 안경과 만나 완전한 조화를 이룬다. 쭈뼛거리는 눈가와 입가, 어깨. 말투는 정중하고, 발걸음은 자유롭다. 스토리텔링을 장황하게 늘이다 끝을 흐리는 점, 몸을 슬며시 뒤트는 점, 시선을 허공이나 바닥에 두는 점, 그러한 디테일은 대사와 맞물려 서완의 ‘컨디션’을 암시한다. 허나 캐릭터성 또한 나타낸다. 그 흐름에는 개성이 있다. 다은이 떠온 “암브로시아”를 공손히 받아드는 제스처에 뱃속이 간질간질해 진 이는 (이미 배우를 좋아하는) 나뿐이 아니었으리라.
작품은 서완의 스크린 타임을 영리하게 조절했다. 은은한 잔상을 남기고 박보영과 연우진에게 포커스를 넘기며 슬금슬금 퇴장했다가, 동네 주민처럼 가끔 얼굴을 비추며 독보적인 그림자를 흘리는 서완. 인자하고 어색하게 유유자적하던 그는, 자신의 견고한 세계가 외부 자극에 의해 깨질 위기를 감지하자 공격적으로 돌변한다. 노재원은 그 간극을 설득하고, 인물의 사연을 더 궁금하게 만든다. 4화에선 조심스러운 선의로 주위를 밝히고, 5화에선 시청자의 심장을 잔뜩 졸인 끝에 허탈한 웃음을 선사한다. 그 다음 화에서, 우리는 서완의 이야기를 들은 직후 그를 떠나보내게 된다.
자신이 구성한 판타지 월드 안 서완은 지쳐 있지만 단단하다. 발음과 말씨도 분명한 편이다. 그 세계가 스스로 해체되는 것을 지켜보는 서늘한 눈동자엔 공허가 있다. 고요하고 무기력한 수긍이 이어진다. 유하고 공손한 그의 언어가 날카롭게 꽂히는 유일한 대상은 자기 자신. 입원 전, 속상할 만큼 이성적인 자각을 털어놓는 상태와, 병 인지 후 조바심과 자책감에 어쩔 줄 몰라하는 상태는 닿아 있다. (그런 상황에서도 다은의 멍든 손을 보고 제가 더 아파하는 이다.) 노재원은 누르고 파고들고 덜어냄으로써, 공시를 준비하던 서완의 마음을 드러냈다. 참고 참아 무뎌져 괜찮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 성마른 입술을 통해 뱉어내는 자조에 여러 해에 걸쳐 어마어마한 밀도로 압축된 응어리가 언뜻 비쳤다. 노재원은 쌓이고 뒤엉켜 본래의 색을 잃은 인물의 내면을 신중하게 내보이는 법을 아는 배우였다.
저마다 개성있고 훌륭한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로 가득한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노재원은… 조금 달랐다. 무엇이 더 낫다고 비교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조금 달랐’다. 엉망으로 울게 했고, 기습적으로 웃게 했고,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그리고 서완의 마지막 순간, 노재원은 모조리 비워냈다. ‘차 한 잔’을 청하던 떨리는 목소리가, 허탈하고 자유로워 보이던 미소가,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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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세기말의 사랑>을 관람하며, <힘찬이는 자라서>를 돌이켰다. 노재원에게 받은 첫인상과, 현재 머릿속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의 이미지를 번갈아 떠올렸다. 각이 예리하게 두드러지는 얼굴은 일관성을 유지하며 다채롭게 변했다. 그는 부드러운 피부를 입고 단단한 중심을 잡을 수 있었고,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한없이 약해질 수 있었다(하상민). 전부 내려놓거나 무너뜨리는 것도 가능했다. 무던한 듯 통통 튀는 손수현, 예민함과 유함이 공존하는 노재원. 두 배우의 에너지가 보다 친밀하게 엮이는 작품을 보고 싶다는 욕심이 났다. 이주영, 이유영, 스치듯 화면을 공유했던 최우식까지- 관심을 보다 먼저 두었던 배우들과 노재원이 다른 세계에서 다르게 얽히는 모습을 은근히 그려보게 되었다.
(특히 한국에서) 남자 배우가 선뜻 내보이기 어려울 수도 있는 이미지를 노재원은 스스럼없이 둘렀다. 힘주지 않고 깊이를 담는 연기자. 노재원의 인터뷰들을 읽으며, 자주 준옥이 겹쳤다. 일에 대한 사랑과 겸손한 자신감이 진중하고 솔직한 언어에 실려 있었다. “이 정도면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스포츠경향]는 그는 현명한 걸음을 저답게 내딛고 있다.
“당신의 다정함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일본 TV 시리즈 <그래도, 살아간다> 속 대사다. <세기말의 사랑>, 도영을 보며 그 문장이 떠올랐다. 도영만이 아니었다. <윤시내가 사라졌다>의 준옥,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서완, 그들은 웃는데 이쪽은 자꾸 울먹이게 됐다. 이들의 살갗에 안착한 배우가 노재원이 아니었다면 내 눈물샘이 이토록 왕성하게 활동할 일은 없었으리라 확신한다. 노재원은 이상하고 소중한 배우다. 그가 수줍게 뿜어내는 무해한 아우라에 속수무책으로 감염되었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영제는 “Daily Dose of Sunshine하루치의 햇빛(멋대로 의역. 배경이 병원이니 ‘복용량’을 살려 번역하는 게 더 맞을 테다.)”. 스크린 위 노재원을 보면, 하루치의 투명함을 보충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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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는 몰랐고, 지금은 어렴풋이 짐작하는 슬픔
올해 몇 편의 영화를 보았을까? 하고 생각했을 때, 극장 개봉작 이외에도 넷플릭스나, 디즈니플러스, 쿠팡플레이 오리지널까지 한번에 떠오르는 걸 보면, 이제는 정말 극장과 OTT를 넘나 들며 다방면으로 콘텐츠를 소비하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올해 최고의 영화는 무엇이었나? 하고 생각해보면 순서대로 떠오르는 영화들이 모두 극장에 찾아가서 본 것들이다. 분명 OTT오리지널도 좋은 영화들이 많았을텐데, 최고의 영화란 극장에서 본 것 중에서 정해야 한다고 나의 뇌가 무의식적으로 떠올려 버린 것인지 아니면 게으른 마음과 온갖 변명을 헤치고 나아가 기어코 극장까지 찾아가서 본 영화들이 더 좋은 기억으로 남았던 것일지 잘 모르겠다.
올해 내가 본 영화들은 굉장히 극단적이다. 너무 세고 자극적이거나, 지나치게 고요하거나.
세고 자극 적인 것들은 대부분 OTT에서 많이 보았고, 고요한 영화들은 극장을 선택했던 것 같다. 적막이 흐르는 공기 속에서 큰 스크린 가득 채워진 주인공의 상황에 같이 울고, 같이 슬퍼하고, 같이 미소지었다. 때로는 그들 처럼 멍하니 바다의 잔물결을 함께 바라 보기도 했다.
내가 네가 되어 보는 시간을 완벽히 선사 했던 것은 영화 <애프터썬>이었다. 서른 한 살 소피가 되어 열한 살 소피의 기억을 함께 더듬 더듬 짚어 나갔다.
“11살때 아빠는 지금 뭘 할 거라 생각했어요??”
영화는 아빠의 모습을 담은 캠코더에서 소피의 질문으로 시작한다. 소피와 아빠는 지금 여행중이다. 아빠는 언뜻 남매 처럼 보일만큼 젊은 아빠다. 소피의 아빠와 엄마는 이혼했고, 이혼 후 런던으로 이주한 아빠와 방학 동안 튀르키예 여행을 떠나왔다. 트윈베드를 예약했지만, 더블베드로 배정이 나고, 리조트는 공사중이라 시끄럽다. 돌발상황이 벌어지는 여행에 아빠는 신경이 날카로워졌지만, 이국적인 풍경 속 여름의 빛은 아름 답고 소피는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아빠의 생일을 맞아 다른 사람들과 이벤트를 준비하고 노래도 불러주는 등 휴가를 즐기는 소피와 다르게 아빠의 상황은 어쩐지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열한 살 그때의 소피처럼 관객 역시 모든 걸 알 수 없지만, 우울감과 아픔, 경제적인 어려움 여러가지가 뒤섞여 삶을 견뎌내고 있음을 짐작할 뿐이다. 이겨내고 싶지만, 이겨내기 어려운 마음을 가지고, 깜깜한 어둠 속에 있지만, 함께 있는 딸을 향해 웃고, 춤추고, 사랑을 표현하던 아빠의 모습이 가슴 한쪽에 켜켜이 쌓여 묵직하게 남았다.
여행이 끝나고, 출국하러 가는 소피의 마지막 모습을 캠코더로 찍는 아빠. 소피가 출국장으로 들어가자 캠코더를 내리고 소피가 들어간 곳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문 밖으로 나간다. 영화는 거기서 끝이 난다.
그 이후의 삶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의 끝이 새드엔딩일것이라고 짐작한다. 서른한살 소피가 떠올린 이 여행은 소피의 그리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며, 어린 시절, 늦은 밤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식탁 밑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던 엄마의 모습이 갑자기 떠올랐다. 엄마가 우는 것은 아닐까 궁금했지만, 모른척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들킬새라 다시 방으로 돌아갔던 기억. 그때의 엄마는 지금의 내 나이 즈음이었는데, 아이둘을 이미 십대까지 키워놓았다. 이십대 초반에 엄마가 되어서 어떤 시절을 지나 왔던 걸까? 나는 그때의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본 적이 있었을까?
열한 살 소피의 시선으로 서른한 살 캘럼을 바라보는 이 영화를 보며, 어릴 때는 알 수 없었던 어른들의 삶의 무게에 대해 곱씹어 보았다. 그 때는 몰랐고, 지금도 어렴풋이 짐작밖에 할 수 없는 슬픔. 끝도 없이 깊고 무거운 감정에 갇히지 말고, 부디 살아 남아 함께 위로하고 안아 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떠난 사람의 슬픔에 남은 사람의 슬픔이 더해져 무척이나 오랜동안 마음이 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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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CFF 데일리] 사과의 무게
[SICFF] 사과의 무게
영화 <라스는 웃음버튼> 리뷰
감독] 에이릭 새터 스토르달
시놉시스] 11살 아만다는 새로 전학 온 다운증후군이 있는 라스를 특별히 돌봐야 하는 임무가 주어진다. 놀랍게도 아만다는 라스와 특별한 우정을 쌓아가지만, 친구들 사이에 속하기 위해 라스를 배신하게 된다. 이로 인해 아만다는 라스와 다른 친구들까지 모두 잃게 된다. 용서 받기 위해, 아만다는 용기내어 자신을 드러내고 진정한 자신이 되어야 한다
#스포일러 유의#
그의 시각으로 세상을 함께 바라보는 것
영화 라는 웃음버튼에서 아만다는 새로운 학기를 맞이해 고학년으로써 신입생과 짝꿍이 될 것을 기대한다. 하지만 선생님으로부터 색다른 제안을 받는다. 다운증후군을 가진 라스라는 친구가 전학을 오는데 아만가가 짝꿍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처음에 아만다는 이 상황을 탐탁지 않아 한다. 또래 집단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이 시점에서 자신과 조금은 다른 라스가 자신의 짝꿍이 되었을 때 자신에게 벌어질 미래의 일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친구들 앞에서 라스의 짝꿍을 아만다라고 소개하며 아만다와 라스는 공통점이 있다면서 해리포터를 좋아하니 친해지기 쉬울 것 같다고 말해준다. 그렇게 서로 짝꿍이 된 라스와 아만다. 아만다는 라스에게 곁을 내주려 하지 않지만 라스는 천천히 아만다에게 다가간다. 조심스럽게 자신의 집에서 같이 놀자며 집을 초대를 하고, 그곳에 라스의 아빠와 라스의 행복한 마법 놀이를 보며 아만다도 그들과 함께 즐겁게 어울리기 시작한다.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어버린 라스와 아만다. 아만다는 라스에게 마음의 문을 열면서 라스의 언어인 마법언어로 라스와 소통을 시작했고, 라스의 세계에서 라스의 시각으로 그와 함께 놀이를 시작한다. 영화 라스는 웃음버튼은 아만다와 라스가 친해지는 이 모습을 통해 우리가 누군가와 친해질 때 각자의 세계가 융합되어감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사과의 무게
서로에게 편안하고 함께 있을 때 즐거운 존재가 된 라스와 아만다. 하지만 라스는 자신의 마법 언어를 학교에서도 사용하길 바랐고, 아만다와 이 과정에서 조금씩 부딪히게 된다. 아만다의 입장에서는 마법 언어가 학생들의 놀림을 받을 것이라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이 난 라스는 춤을 추다가 마법언어를 외쳐버리고, 흥분한 라스를 진정시키기 위해 아만다는 어쩔 수 없이 자신 역시 마법언어를 쓰고 만다. 그래서 모두의 웃을 사버리게 되고, 이 보든 상황이 영상으로 녹화되고 있었다. 아이들은 완지라는 폐쇄형 블로그에 그동안 라스의 모습을 올리고 있었다. 사이버불링이 시작된 것이다. 아만다는 이를 알게 되자 선생님에게 말을 하겟다며 당장 그 블로그를 없애라고 하지만 오히려 그들은 라스와 함께 노는 아만다의 사진과 영상을 게시하겟다며 협박을 한다. 또래집단으로부터의 배척이 무서웠던 아만다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진과 영상을 그들에게 넘기게 되고, 결국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신이 찍은 라스의 웃긴 사진이 공개되며 라스에게도, 학교의 모든 이들에게도 실망을 안기게 된다.
완전히 혼자가 되어버린 아만다. 그녀는 오랜시간 라스에게 전화도 하고, 집에도 직접 착아가지만 제대로 된 사과조차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자신의 진심을 전할 방법은 라스의 언어로 라스의 방식대로 그에게 진심을 다해 사과하는 것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를 위해 일단 아만다의 오랜 친구들에게 찾아가 그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연극을 준비하고, 성탄제에서 라스가 만든 마법의 언어로 된 공연을 하면서 라스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한다.
영화는 이 과정에서 얼마나 진심 어린 사과가 중요한지 잘 보여주고 잇었다. 그저 말 뿐인 ‘미안해’가 아닌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그 표현의 방식을 어떻게 해야 할지 등 잘못에 대한 반성과 사과의 무게에 대해 잘 보여주고 있었다.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실수를 하고 잘못을 저지를 수 있기에 사과의 무게를 알려주는 좋은 작품이었다.
영화 라스는 웃음버튼은 어린 아만다의 진심어린 사과를 보면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고, 되려 이 사회를 살아가는 어른들의 뻔뻔함에 부끄러운음 느끼게 만들었던 작품이었다.
<상영시간표>
2024. 9. 5. (목) 19:00 롯데시네마 은평 1관
2024. 9. 8. (일) 14:00 롯데시네마 은평 6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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