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2-06-03 15:59:43
마른 우산과 마르지 않은 마음 사이의 우리
영화 <어제 내린 비>
여름의 시작에서 바라본 영화 '어제 내린 비'. 윤혜리 배우님의 열연이 돋보이는데 아쉬울 만큼 여운 깊었던 영화였다. 분명 삶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다가오는데, 억지로 손아귀에 쥐려고 하는 우리의 모습들을 보여주며 얼굴을 찡그리게 만든다. 청량한 여름의 시원함보다 뜨겁고 끈적끈적한 현실을 보여주듯.
비가 와도 시원하지 않은 그때 여름의 민조는 아침엔 곤계란이, 점심엔 냉면 위의 계란과 남자친구가 뉴스에 나오는 일까지 겪게 된다. 혼돈 그 자체의 민조는 결혼을 없던 일로 만들기 위해 이별 통보, 예식장 취소, 신혼여행 취소, 캐리어 환불까지 동시다발적으로 해결하기 시작한다. 달력의 5월 18일을 가리듯 어쩔 수 없는 일들을 지우려 노력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 비는 이미 내렸고 마른 우산은 집으로 들고 들어와야 했다.
불안정한 마음이 가져다주는 갈등 사이에서 들려오는 어떤 말이 주는 영향력이 있었던 걸까.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던 민조가 마른 우산 대신 접을 수 없는 영환을 들여 시원한 바람에 시원한 수박을 먹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을 스쳐지나 보내며 그저 스치는 바람에 몸을 맡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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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에서 영화로 그리고 다시 현실로
꿈에 그리던 수사판사 승진을 하게 된 ‘이만’, 때마침 테헤란에서는 대규모 히잡 반대 시위가 일어나고 ‘이만’은 가족의 안전을 위해 총을 지급받는다. 그러나 딸들과 논쟁을 벌인 어느 날, 총이 집에서 감쪽같이 사라지고 가족의 믿음에는 균열이 생긴다. 지금 반드시 목격해야 할, 올해 가장 용감한 걸작.
<신성한 나무의 씨앗> 줄거리
영화는 슬로건을 내걸었던 히잡반대시위가 벌어졌던 2022년을 배경으로 한다. '여성, 삶, 자유'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시위는 여대생이었던 마흐사 아미니가 히잡을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끌려가 끝내 죽음을 맞이했던 사건을 기점으로 벌어진 대규모 시위이다.
영화는 이만이 수사판사가 되면서 시작된다. 그가 하는 업무는 범죄행위를 조사하고 내려온 판결을 확정하는 것으로, 사실상 시위를 하다 잡혀온 이들의 사형선고를 내리는 일이다. 그의 가족들은 수사판사인 이만에게 피해가 가지 않기 위해 조심하면서도 SNS를 통해 그리고 일이 벌어지는 거리를 직접 보며 시위대를 탄압하는 정부의 행태를 목격한다. 영화 중간중간마다 실제 시위 모습이 삽입되어 있어 당시 이란 정부가 시위대를 포함한 시민들에게 어떤 폭력을 행사했는지를 낱낱이 드러낸다. 이렇게 실제 영상을 보여줌으로써 영화라는 비현실에서도 현실이었던 정부의 잔혹한 탄압이 얼마나 무자비한지 체감할 수 있다.
중반부로 들어서며 영화는 초반부에 배치해놓은 히잡반대시위의 현장보다는 이만의 가정을 조명한다. 이 영화는 구시대의 불합리함에 맞섰던 모습을 다큐멘터리처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닌 한 가정의 갈등 과정을 통해 시대를 드러낸다. 정부에 의해 정제된 방송을 보며 남편인 이만이 일궈놓은 세상을 지키고 있는 '나즈메'. 정부가 막지 못한 그대로의 진상이 드러난 SNS 영상을 보며 시위에 참여하고 탄압의 대상이 된 친구들을 목격한 '레즈반'. 그리고 염색과 매니큐어를 하고 싶어하고 레즈반과 같이 날 것의 영상으로 정부의 탄압을 접하고 있는 '사나'까지. 각각 다른 세 여성은 한 가정 내에서 공동체로 묶여있다.
레즈반과 사나는 아버지 이만의 안위를 이유로 가정 내에서 사소한 행동까지 제제당한다. 하지만 이런 통제 속에서도 그들은 거리와 휴대폰으로 시위를 접하고 세상을 본다. 적극적으로 시위에 동참하진 않지만 그들은 국민을 탄압하는 정부에 의문을 갖고 진실을 들여다봄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마주하는 인물들이다. 반대로 나즈메는 이만의 가정을 지키고자 한다. 나즈메는 본인의 의지로 나즈메와 사나의 행동을 억압하고, 약간이라도 가정을 흔들만한 일이 발생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그는 정부가 유지하려 하는 옛 것에 동화된 인물로 시위대를 폭도로 칭하는 언론을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잔혹한 현실에 눈을 감는다. 하지만 동시에 정부의 폭력에 다친 레즈반의 친구를 치료해 주고, 경찰에 잡혀간 그의 행방을 수소문하기도 한다. 이런 나즈메의 모습은 구체제에 대한 의심은 없지만 눈앞에 보이는 폭력을 무시하지 못하는 인간성을 그리고 약한 연대를 보여준다.
반면 남편이자 아버지인 이만은 구시대 그 자체를 의미한다. 자신의 아내와 딸들이 그에게 어떠한 위협도 되자 않는, 순종적인 존재일 때는 그 역시 자상한 남편과 아버지이다. 하지만 자신의 가정이라 생각했던 곳에서 반항이 생기고 급기야 호신용 총이 사라지며 그는 변한다. 가족 중 누군가 가져간 거라 확신하며 실토하지 않는 가족 모두를 의심한다. 그는 이 상황 자체를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 반항으로 받아들이며 다정한 모습은 마치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가족 모두를 억압하고 거짓말쟁이라 칭한다.
이런 그의 모습은 히잡을 쓰지 않겠다는 선언이 자신들의 권위를 위협했다 판단한 이란 정부의 모습과 닮아있다. 정부는 여성들의 당연한 권리 주장까지 국가에 대한 반항으로 받아들이며 시위대를 포함한 시민들을 폭력으로 억압하고 폭도로 규정했다.
레즈반과 사나, 그리고 나즈메는 억압받는 자와 억압하는 자로 구분되기는 하나 권위자로부터 서로를 지키기 위하여 연대한다. 억압하는 자인 나즈메는 그들에게 가해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만이라는 권위자에게 오랜 기간 통제당해온 피해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들은 마지막까지 권위자와 타협하려는 자와 맞서는 자로 나눠지지만 결국 서로를 도와 다 같이 새로운 시대로 향할 수 있다.
하지만 자상한 아버지이자 남편인 이만은 다르다. 그의 자상함은 세 여성이 '자신'의 가정 아래 복종하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유지되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이 아닌 새로운 뿌리를 내리는 것을 목격한 이만에게 이제 세 여성은 불순분자로 권위에 위협되는 존재이다. 이만은 이란 정부처럼 국민, 즉 가족과의 재화합을 명목으로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통제를 시작한다. 억압의 주체이자 세 여성, 그리고 국민들이 반발한 구시대의 현현인 이만은 그가 구시대 자체이기에,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탄압을 자행했기 때문에 새 시대로 갈 수 없다.
모함마드 라술로프 감독과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 모두 반정부적인 영화를 찍었다는 이유로 이란 정부의 탄압을 당했다고 한다. 감독과 레즈반, 사나, 사디프 역의 배우는 이란을 탈출해 망명했다고 하며, 나즈메 역의 배우는 테헤란 자택에 연금된 상태이다. 영화의 배경인 2022년 히잡반대시위부터 <신성한 나무의 씨앗>이 만들어진 과정들, 그리고 그 이후의 상황들까지 생각하면 영화에서 보여진 일들이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에서 더 나아가 현실로 다시 이어진 <신성한 나무의 씨앗>이 무엇을 보여주고 어떤 미래를 희망하는지 생각하다 보면 이 영화의 무게를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씨네랩에서 초청받아 참석한 <신성한 나무의 씨앗> 시사회에서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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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고발 영화에서 중립적 자세가 가능한가? 혹은 필요한가
<마이클무어 화씨9/11>
마이클무어 감독의 <화씨 9/11>은 미국 2001년 9월 11일 911테러와 그 당시 미국 행정부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정권 비판을 담은 내용이다. <화씨 9/11>은 자극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정치 이야기로 가득하다. 초반에 영상을 볼 때는 음모론처럼 느껴질 정도로 편파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점점 다큐멘터리가 진행되면서 그가 내세운 이야기들에 공감을 하는 ‘나’를 보게 됐다. 그리고 비단 미국의 상황만이 아닌 우리 나라의 모습도 떠올랐다.
국가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이 다큐에서는 국민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 고민해볼 수 있었다. 국민은 국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국민들 대표해서 우리 모두 잘 살기 위해서 뽑은 대통령이지만, 국민보다는 자본에 의해 움직이게 되었다. 자본으로 움직이게 된 국가는 테러와 전쟁을 일으킨다. 그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명확한 실체를 향해 고민해보지 못한다.
이라크 전쟁에서 자신의 가족을 하루 걸러 장례를 치루면서도 알라신에게 복수해달라고 외칠 수 밖에 없었던 이라크 국민들이 있다. 그리고 빈곤한 마을에서 태어나 군대에 입대하면 더 많은 세계를 경험해 볼수 있다는 말에 입대를 하여 사람들을 죽이고 괴롭히며, 자신 또한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공포에 사로 잡혀 살고 있는 미군이 있다.
그리고 희생당한 사람들의 가족들은 끊임 없는 고통 속에 살아간다. 이 실체를 부시 행정부에 포커스를 맞춘 마이클 무어는 끊임없이 부시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의 정권이 잘못 되었다고 말한다.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고 많은 국민들에게 잘못된 이야기를 하며 전쟁을 일으킨 이유를 우리는 알아야한다.
<김일란, 이혁상 공동정범 >
김일란, 이혁상 감독의 <공동정범>은 용산 참사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참사 후의 이야기를 담았다. 인간의 도덕성, 신뢰, 믿음, 분노 등의 다양한 감정들을 느낄 수 있었고 트라우마를 어떻게 수용하며 살아가는 지에 대한 모습도 확인해볼 수 있다.
용산 참사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모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인생에서 가장 아프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하며 왜 화재가 났는가? 그리고 왜 그들은 사망했는가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대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쉽게 진실을 판명할 수 없다. 솔직히 진실을 판명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미 망루는 사라졌고, 남은 것은 화재 속 어둡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 화재의 불빛 속 기억들로만 조각난 기억을 맞추고 있다. 이것으로는 진실을 규명하긴 어렵다. 그렇기에 그들이 더 고통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이 망루로 향해야만 했던 이유는 남들이 보면 테러범들이자 폭동들이지만 그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신념이자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들이 다른 선택을 했었다면? 이라는 가정은 없다. 철거민들과 그의 연대는 화염병을 모으며 망루를 만들고 그 속에서 버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부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보다 없애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들을 물대포를 쏘고 억지로 끄집어 내기 보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들어줬으면 상황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정부는 무관용의 원칙으로 망루를 향해 물대포를 쐈으며 그 속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일어나고 사망자가 발생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공동정범으로 징역형에 처했다.
<두 다큐의 차별성과 공통점>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고 이끄는 역할을 하지만, 때로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 개인의 신념을 조작하거나 이용하기도 한다.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과 김일란·이혁상의 <공동정범>을 통해서 본다면 각기 다른 사회적·정치적 배경 속에서 국가가 개인의 믿음을 조작하고, 때로는 이를 이용하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하지만 이러한 신념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환경과 경험에 따라 변화한다.
두 작품은 미디어와 법을 통해 어떻게 국민을 통제하는 지 보여 준다. <화씨 9/11>에서 마이클 무어는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9·11 테러 이후 미국 국민의 애국심을 자극하고, 이를 이라크 전쟁 정당화에 이용하는 과정을 조명한다. 미디어를 통해 공포를 조성하고, 이를 통해 전쟁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는 방식은 전형적인 국가 권력의 선전 전략이다. 정부는 미디어를 장악하고 애국심을 강조함으로써 국민들이 비판적 사고 없이 국가의 결정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한다.
반면, <공동정범>은 한국 사회에서 국가가 법과 공권력을 이용하여 국민을 통제하는 방식을 보여 준다. 용산 참사 사건에서 철거민과 연대인들은 강제 퇴거 과정에서 여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국가 권력은 이 사건을 ‘폭력적인 시위’로 규정하며, 생존자들을 범죄자로 몰아갔다. 이처럼 한국에서는 법과 제도를 활용해 사회적 약자들을 배제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다.
두 사례를 비교하면, 미국은 패권국가로서 전쟁을 정당화하는 방식을, 한국은 소수자들의 사회적 갈등을 국가가 해결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를 탄압하는 방식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국가 권력은 개인의 신념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고, 이를 통해 국민을 통제하려 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가진다.
<화씨 9/11>에서 미군들은 애국심을 이유로 이라크 전쟁에 참전한다. 하지만 전쟁의 실상을 경험한 후 신념이 흔들린다. 이는 신념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경험과 새로운 정보에 의해 변화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국가가 조작한 정보만을 접할 때 신념은 쉽게 형성되지만, 시간이 지나고 다른 현실을 접할수록 개인은 자신의 믿음을 다시 검토하게 된다.
<공동정범> 또한 용산 참사 생존자들은 처음에는 국가의 폭력에 저항했지만, 법적 처벌을 받고 사회적으로 고립되면서 서로를 의심하고 갈등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사건을 회고하고, 과거의 진실을 마주하게 되면서 신념이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특히, 이 다큐멘터리는 단순히 사건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서, 인물들이 자신의 신념을 되돌아보고 재구성하는 과정 자체를 담아낸다는 점에서 차별점을 가진다.
정치고발 영화에서 중립적인 자세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보면서 관객 스스로가 판단하고 정립해나가야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가 정말로 맞는가, 아닌가, 찾아보고 고민해보면서 가꿔나가야할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여러가지 다양한 정보를 접하면서 자기 검열을 해나가야 한다고 느낀다.
이 두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참 정치인들은 취약 계층의 말은 들어주지도 않고 그저 무시하고 외면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는 미국이나 한국이나 또는 다른 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 움직인다고 말하지만 정작 국가를 움직이게 하는 국민이란 매우 소수라고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국가 속에서 살아가야한다.
그리고 신념을 가지고 살아간다. ‘신념’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 ‘신념’이 뭐길래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또 그것에 의해 살아가는 지에 대해 고민이 되었다. 언론에서 떠들어대는 정부의 말을 무조건 적으로 믿어서는 안되는것 같고, 그렇다고 모든 말을 무시하고 화염병을 만들고 망루를 세워서 폭력 시위를 하는 것도 안 될 것같다. 올바른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그리고 이 신념이 올바르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검열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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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어느 날, 영국 첩보국 일명 '서커스'의 국장, 컨트롤은 부하 짐 프리도에게 밀명을 내린다. 서커스 안에 숨어있는 러시아 스파이 '두더지'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헝가리 장군을 만나보라는 것. 하지만 짐이 만난 장군은 일종의 함정이었고, 그는 살해된다. 그 후, 사건에 책임을 지고, 컨트롤과 함께 물러난 조지 스마일리는 러시아의 첩보국장 카를라가 숨겨놓았다고 전설처럼 언급되곤 했지만 모두가 믿지 않았던 두더지 잡기 작전에 돌입한다. 그러던 와중에 변절했다고 알려져 있던 리키 타르가 그를 찾아와 자신에게 벌어졌던 자초지종을 토로하고, 자신의 보고를 묵살한 서커스를 의심하는 발언을 그에게 쏟아낸다. 이 때, 조지는 리키 타르의 증언을 토대로 서커스의 일원 4명 중에서 누가 스파이일까 고민하게 되는데, 과연 그는 러시아에서 보낸 스파이를 깔끔하게 잡아낼 수 있을까?
1. 액션 신이 없어도 긴장감 넘치는 장면들
"아무도 믿지 말게, 짐. 특히 수뇌부 사람들은 말이야."
짐 프리도에게 내려진 컨트롤의 밀명은 서커스 멤버 중에서 두더지가 있으니, 그를 찾아내라는 것이었다. 컨트롤은 짐에게 두더지가 앨러라인일 경우, 암호명으로 팅커, 헤이든일 경우에는 테일러, 블랜드일 경우, 솔져, 에스터 헤스일 경우, 푸어맨으로 지정해 주었다. 그나마 컨트롤이 신뢰하는 서커스 멤버였던 것으로 보이는 스마일리는 자신의 동료를 의심해야 했기 때문에 모든 일을 은밀히 진행한다. 단 한 번의 무력적인 충돌 없이. 그 결과, 그저 남을 믿지 않는 것만으로 스파이를 찾아낸다.
흔히 첩보 영화라면 시원한 액션을 기대하게 되기 마련이지만 이 영화는 액션 신이 없다. 하지만 충분히 긴장감이 있다. 특히, 스마일리를 돕고 있는 피터 길럼이 리키가 보고하던 날의 업무 일지를 빼돌려 오라는 지시를 행하는 장면에서의 배우는 문서를 유출하는 자신을 보호해야만 하는 그의 급박함과 침착함을 잘 표현해내었다고 생각하며, 그런 연기에 긴장감 넘치는 빠른 템포의 음악을 덧입히니, 급박한 상황을 잘 표현하는 음악과 그의 침착한 행동이 조화를 이루어 멋있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그만큼 이 영화는 제이슨 본, 007시리즈처럼 요원들의 멋있는 액션을 보고 쾌감을 느끼는 것을 타겟으로 잡지 않았다. 스마일리는 사람을 잘 이용하는 것이 가장 큰 무기인 캐릭터이다. 무표정 속에서 그는 동료를 수없이 의심하고, 정보원들이 물어다주는 정보도 철저히 그만의 검증 과정을 거친다. 그를 보고 있으면 첩보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보는 눈을 키우는 것이고, 믿을 만한 사람에게서 정확한 정보를 얻어내는 것이 액션보다 더 중요한 덕목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만 같다.
2. 변절자를 대하는 스마일리의 모습
"전 선택해야만 했어요. 도덕적 선택 못지 않은 미학적 선택이었죠. 하지만 전 그의 수하가 아닙니다."
영화 말미에 스파이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스마일리가 동료들을 추궁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때, 자신이 러시아 첩보국의 스파이가 된 것은 미학적인 이유였다는 대사가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 미학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혹시 이미 스파이라고 탄로난 상황에 썩을대로 썩은 서방 세계를 떠나 뜨고 있는 다른 국가의 스파이가 되는 것이 폼나지 않느냐 라는 것일까. 입을 삐죽거리며, 자신의 폼생폼사를 논하는 그를 보니, 조금 찌질해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관객의 입장에서 칙칙한 필터로 그려진 한 인간이 배신으로 몰락을 바라볼 때, 모호하지만 강렬한 감정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모호함이 짠함일 수도 있고, 경멸일 수도 있고, 오묘한 감정의 총합이었다. 관객의 입장에서 동료를 배신한 자가 이유랍시고 한 말은 그저 추해 보일 뿐이었는데, 그 추함은 아마도 자신의 변절을 멋있음으로 포장하고자 하는 그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마일리의 추궁은 감정적이지 않았다. 추궁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그는 호통을 치면서 추궁을 하고 있긴 하지만 크게 표정을 일그러트린다거나 동료의 배신에 눈물 흘리며 감정적 호소를 하지 않는다. '네가 어떻게 나를 배신할 수가 있어' 같은 신파적인 요소가 없다. 그저 건조하지만 힘있는 말투, 서늘한 눈빛으로 그저 질문할 뿐이다. 정보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한 자가 가질 수 있는 태도, 굳이 화를 내지 않고도 정보로만 승부를 보고, 차분히 취조하는 그의 태도에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두더지의 손아귀에
"실패와 추문만 난무할 뿐 쓸만한 요원이 없어요"
두더지가 잡혔지만 모두가 공범이었고, 결백함을 주장하기엔 너무 멀리와 있었다. 그들은 국가를 위해 충성한다는 명분 아래 정보를 유출시키고 있었다. 영국에는 믿을 만한 정보원이 없다면서 자국 디스를 했지만 결국 그들도 변절까지는 아니지만 국가의 막대한 손해를 끼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두가 두더지의 농간에 놀아나는 요원으로서 치명적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또한, 그들은 두더지가 짜놓은 판을 뒤집을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짐 프리도에게 조용히 살 것을 종용하고, 러시아 첩보원에 대해 아는 사람들을 해고시켜가면서 서커스를 곪게 만들었다. 그들의 의도는 영국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겠지만 말이다. 충성심을 역이용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나가다니, 카를라라는 캐릭터는 단 한 번의 얼굴 등장도 없이, 참 존재감이 크다.
그들의 충성심은 영화 막판에 두더지의 정체를 알게 되고, 두더지의 소재지에서 나오며 스마일리와 마주쳤을 때, 그의 '뒤통수 제대로 맞았다'는 한 실패자의 표정에서 알 수 있었고, 또다른 실패자는 스마일리의 추궁 장면에서 그가 울먹일 때, 조금 보이는 듯했다. 그들은 변절자가 아니라 속아넘어간 사람들일 뿐이었다는 것을.
그렇게 잘난 척들을 했지만 결국 스파이의 농간에 놀아난 사람들임이 탄로나버린, 작전에 실패한 요원들의 말로를 보니, 첩보 세계의 냉정함이 보였고, 첩보원들은 참 치열하고, 치밀해야 함을 느꼈다. 스마일리의 무표정하고, 치밀한 일처리가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다. 인간으로서 동정해주고 싶기도 했지만 이 영화는 인간적인 이해보다는 철저한 요원들의 세계를 보여주는 영화이기에 깊은 인간적 이해는 그만두도록 하자.
4. 총평
한국에도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를 보고, '공작'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는데, 정보 전쟁에서 우위를 점해야 하는 사람들의 삶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과 첩보원들에게 중요한 것은 액션을 위한 좋은 몸이 아니라 눈치와 머리 싸움이라는 것도 잘 보여주고 있는 영화라는 점이 비슷하다. 공작에서도 그렇고, 이 영화에서도 그렇고, 내부에 숨어있는 적을 색출해낸다는 점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첩보 세계에 대해 조금 더 현실적으로 그린 영화를 찾고 있는 이들에게 이 두 영화를 추천한다.
이런 영화들을 볼 때면, 애국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보게 된다. 누군가에게 애국은 다른 이들에게 변절일 수도 있는 첨예한 단어이기 때문일까.
※ 해당 영화는 Netflix에서 시청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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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타지일지도 모르지만 힐링이 된다면야
사실 이 드라마 볼 생각이 딱히 없었다. 잔잔하고 힐링되는 일본 특유의 감성 좋아하긴 하지만 워낙 많이 보고 살았어서 더 이상 구미를 당기는 장르는 아니었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꾸준히 이 드라마를 추천했으며 최근 심각한 서사만 봤었던 나는 잠시 아무 생각 없이 볼 만한 장르를 찾고 있었다. 그 때 마침 이 드라마가 눈에 띄었고 '보다가 중간에 이탈해야지' 하는 얄팍한 마음으로 이 드라마 정주행을 시작했다. 보다보니 주인공 키요가 항상 웃으며 요리하는 모습이 그렇게 예뻐보일 수 없었다. 찾아보니 소재에 대해 논란이 좀 있었나 본데 결과적으로 난 힐링받았다. 그래서 리뷰를 좀 쓰려고 한다.
1. 과도한 판타지를 현실화하는 매개체, 음식
드라마의 실질적 주인공은 마이코 준비생 스미레와 함께 마이코가 되고자 교토에 왔지만 숙소의 요리사가 된 키요이다. 드라마의 주요 내용은 '두 사람의 우정'으로, 한 줄로 요약 가능하다. 스미레가 마이코로서 인정받는데도 키요는 질투하지 않는다. 키요는 무용에 몰두하는 스미레와 같이 요리라는 예술에 빠져들어 자신만의 길을 걸어나간다. 각자만의 열정을 쏟아부을 분야를 찾아냈기 때문에 누가 더 외적으로 빛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둘은 각자의 방식으로 충분히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스미레가 좀 더 화려해 보일 뿐, 키요에게는 소박하지만 내면이 단단한 차돌 같은 매력이 있다.
그들의 우정을 지켜보는 관찰자 역할의 사람들 또한 삐뚤어지지 않은 모습으로 각자의 역할이 빛난다. 열등감에 매몰되어 남을 해하는 사람이 없고 모두들 스미레와 키요의 우정을 바라보면서 흐뭇해한다. 착한 사람들만 모여있는 기온이라는 동네, 모든 것이 비현실적일 만큼 판타지이지만 이 판타지를 현실에서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착각하게 만드는 요소가 바로 음식이다. 모두가 키요가 만들어내는 맛있는 음식을 맛보며 하나가 되어가는 모습을 통해 음식이라는 소재가 만들어내는 위력은 생각보다 대단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음식을 나눠먹는 행위는 픽션이든 현실이든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당연한 행위이기에 이 드라마가 훈훈함을 보여주기 위해 버려진 현실성을 밥을 먹는 행위를 보여주며 '어딘가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심어주는 것은 아닐까.
2. 전통과 폐습 그 어딘가에서
드라마에서 게이샤 문화가 가진 악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최근 마이코들의 착취 문제와 성 상품화, 희롱 문제 등이 대두된 것으로 보아 마이코, 게이코 소재는 분명히 미화할 만한 소재는 아니라는 점은 동의하기에 이 드라마가 일본의 전통 문화를 미화했다고 평가받을 소지는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우리 나라 드라마 중에서 '신기생뎐'이라는 드라마도 이제는 사라졌지만 성 상품화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기생 문화를 다시 수면 위로 올랐다는 점에서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다. 기생 문화는 사라진 문화이기에 그 드라마는 픽션으로 문제를 가릴 수 있었지만 교토 기온 거리 속 마이코, 게이코는 여전히 실존하기에 조금 더 엄격한 잣대로 평가해야 하는 것은 맞다고 본다. 시대가 변했으니 그 시대의 잣대에 맞게 어디까지가 전통이고 어디까지가 폐습인지를 정해야 할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도 그런 사회적 시선을 의식하는 듯하다. 특히 눈에 띄는 캐릭터가 있다면 돌싱으로 다시 돌아온 요시노 캐릭터이다. 요시노는 특유의 오버와 너스레로 기온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특별한 게이코라는 점을 보여준다. 모모코가 전통적인 게이코의 전형을 보여준다면 요시노는 게이코, 마이코를 향한 답답한 폐습들을 타파할 혁명적 캐릭터인 것이다. 게이코들이 지켜나가야 할 전통을 상징하는 모모코와 전통의 답답함을 비판하는 요시노의 은근한 대립이 전통 문화가 가진 딜레마를 보여주는 동시에 전통 문화도 이제는 조금 바뀔 때가 되지 않았나 조심스레 제안하는 듯하다. 요시노와 모모코의 다음 행보가 기대가 되는 것은 다음 세대인 스미레, 키요에게 전통 계승자와 현대인의 경계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것을 암시하기도 했다. 공연을 준비할 때에 마이코는 게이코들의 시중만 들고 무대에는 오르지 못한다는 규칙을 깨고 모모코가 모두 참여시키는 장면에서 모모코의 변화를 예감할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최고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전통이 요구하는 답답함을 그저 참아온 모모코가 결혼이라는 중대 사안을 두고 자신의 미래를 고민한 결과인 것으로 보인다.
3.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선사하는 힐링 메시지
영화 '카모메 식당', '리틀 포레스트'와 같은 힐링 장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리틀 포레스트'보다는 밝고 '카모메 식당'보다는 어린 연령의 주인공이 등장해 발랄하기까지 하다. 경쟁, 질투 등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일렁이는 현실 말고 긍정적인 관계들만이 가득한 동화를 보면서 잠시 정신에게 휴식을 주어도 될 듯하다. 그리고 보다보면 음식을 해먹고 싶은 욕구가 샘솟기도 한다. 뭐랄까 정성스레 음식을 해서 먹는 뿌듯함을 느끼고 싶다고나 할까. 그래서 난 카레를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또, 릴리 프랭키, 이우라 아라타 등 익숙한 배우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들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의 단골 배우들인데 다보고 나서야 이 드라마가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이들의 등장이 당연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쯤되면 릴리 프랭키 배우는 거의 이 감독의 지문과도 같은 배우인 듯하다. 이 배우가 없으면 왠지 허전할 것 같은 느낌이기도 하다. 스미레 역할의 배우도 너무 예쁘지만 키요 역의 모리 나나 배우의 맑은 얼굴이 너무 매력적이다. '어느 가족' 속 아들 역할의 죠 카이리 배우의 폭풍성장도 반가웠다.
나도 키요처럼 좋아하는 일을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그렇게 나만 느끼는 충만한 행복함을 느끼면서 살고 싶다. 지금도 충분히 순간의 행복함을 느끼면서 살지만 아직 내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만들진 못했기 때문에 키요에게 요리와 같은, 그런 일을 찾아내고 싶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할 수 있는 그런 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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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과 방 사이의 섬
온갖 유형 테스트가 범람하고 있다. 각종 심리테스트나 백문백답처럼 옛날 싸이월드에서 하던 것들이 여전히 0과 1의 세계에 돌아다니는 걸 보면 유행이 정말 돌고 도나 보다. 대부분은 시중에 돌아다니는 MBTI 테스트 변용이라 크게 새로운 내용은 없지만 가끔 해본다. 나도 뭐라고 언어화해본 적 없는 취향을 딱 표현하는 말을 찾아내기도 하고, 친구들이랑 공유하면서 내가 아는 그들의 성향과 내용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어서.
국내 유수의 영화제들도 ‘영화 취향 테스트’ 같은 걸 많이 하던데, 무의식 중의 취향을 확인하곤 한다. 지난 5월 전주에서 내 영화 고르는 기준에 ‘포스터’가 상당히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정확하게는 분위기. 포스터나 예고편 영상에서 풍기는 분위기나 느낌이 좋으면 일단 본다. 설령 시놉시스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시놉시스에 다 담기지 않는 감정이나 장점들을 발견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킬링 오브 투 러버스>도 포스터가 마음에 들었으나 시놉시스 읽고는 볼지 말 지 고민했다.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에 동의하고 별거 중인 부부, 결혼과 육아로 단절된 꿈을 되찾기 위해 다시 일을 시작한 아내,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새로운 애인, 그리고 거기서 펼쳐지는 감정의 자기장. 음, K-드라마로 다수의 삼각관계 클리셰에 단련된 K-유교걸은 이런 오픈 릴레이션십의 쿨한 면면이 편치 않다고.
그래도 포스터나 예고편 영상에서 풍기는 분위기 때문에 일단 보고 생각하기로 했다. 선댄스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점, 최근 <기생충>이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등 아트영화에서 손꼽히는 작품들을 계속 배급해온 북미 배급사 NEON에서 선택한 작품이라는 설명도 고민을 끝내는 데 일조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짧은 시 한 편의 전문을 떠올렸다.
<섬>,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내가 이 영화에서 본 건 오픈 릴레이션십 안에 놓인 세 사람의 쿨한 감정 놀음도 관능적인 육체 관계도 아니었다. 그보다 좀 더 초라하고 보편적인 인간 감정,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려는 노력과 그 실패에 대한 고민들이었다. 문이 굳게 닫힌 각자 마음의 방, 그리고 방과 방 사이 놓인 섬이었다.
영화는 기승전결을 천천히 쌓아 올리는 게 아니라, 긴장의 한복판에서 대뜸 시작한다. 잠들어 있는 아내 니키와 그 연인 데릭에게 총을 겨누다가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에 한숨을 푹 쉬고는 창문으로 집을 빠져나와 달리는 남편 데이빗의 모습에서.
흐리고 눈 쌓인 회색 지면에서 데이빗은 달리고, 음산하고 불안한 음악이 그 뒷모습을 따라간다. 흔히 생각하는 화성 악기의 느낌이 아니라, 일상의 소음들을 기묘하게 조합해 낸 느낌의 음악이다. 삐걱거리는 소리들이 무너져가는 관계를 드러내고, 차 문 닫는 소리들이 총소리처럼 쾅쾅 울린다. ‘체호프의 총’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그 법칙을 뒤집는 총이라는 생각도 든다. 첫 시퀀스는 그렇게 영화 전체를 멋지게 끌고 가며 영화의 짜임새를 단단히 한다. 시작된 긴장감은 영화 내내 사람을 콱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음악과 함께 사람을 영화에 가둬놓은 건 화면 비율이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4:3 비율의 화면이었다. 사실 나는 화면 비율이나 사운드 등을 예민하게 인지하는 사람은 아니다.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4:3 화면비는 모를 수가 없다. 옛날 텔레비전 드라마 비율이었으니까. 극장에서는 무성영화 시절에나 쓰던 비율이었고,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도 사용하지 않은 지 한참이라, 이제 와이드 스크린에 익숙해진 내 눈에는 화면이 좁다고 인식된다.
영화 배경으로 보이는 들판은 너무나 광활하여, 적막하고 쓸쓸할 만큼 넓게 펼쳐져 있는데, 정작 인물들은 운전석에 꽉 끼어서 대화한다. 영화의 많은 순간 운전석에서 같은 각도로 잡히는 데이빗과, 모처럼 잡은 데이트를 자꾸 뚝뚝 끊는 것 같은 아내 니키. 타이트하게 잡힌 얼굴로, 운전석에 고정된 옆얼굴로, 피로한 표정으로, 눈을 보지 않은 채로 하는 대화. 좁은 화면 비 안에서 좁게 멈춰 나누는 대화.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교착 상태가 두 사람의 관계를 고스란히 대변한다.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안정감이라곤 없이 불편하고 어긋난 두 사람의 삐걱거리는 관계 속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의 데릭은 비집고 들어서려 한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세 연인의 감정싸움이다.
이 영화를 전형적인 감정싸움 이상으로 넘어가게 하는 데에는 아이들의 존재감도 한몫한다. 어떻게 저렇게 딱 그 나이 아이들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지. 막내들의 옹알거리는 대화나 행동들, 사춘기에 맞아 엄마아빠의 분위기를 정확하게 파악한 큰딸의 혼란스럽고 짜증 나는 마음 같은 것들이 그들의 대사와 표정에 너무나 잘 들어가 있다.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겠다고 나온 공원에서, 로켓에 흥미를 보이다가도 잘 되지 않으니 토라지는 큰딸의 복잡한 마음도,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뒤돌아서는 누나를 보며 민망한 웃음을 지으면서도 아빠에게 “고마워요”라는 말을 잊지 않는 동생의 뻘쭘해진 마음도.
아이들이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고 돌아보는 그 순간들이 이 영화의 파편 같은 관계들을 끌어모은다. 니키와 데이빗의 전사가 자세히 묘사되지 않지만, 두 사람과 아이들 사이 몇 마디 대사에서 성긴 추측이 가능하다. 서로를 사랑한다 하며 어린 나이에 결혼했고, 아이를 넷 낳았고, 터울이 좀 있는 걸 보니 육아의 무한 굴레에 빠져 있었을 것이고, 당연히 힘들어 허덕이는 순간들이 있었을 테고… 그러다 보니 이 선택을 위해 기각되었던, 사랑에 비해 빛을 잃은 듯 보였던 다른 선택지들을 돌아볼 요량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게 된다.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에도 동의하는 기이한 행태의 별거를 시작한 데까지. 그 후로도 시간이 점점 소용돌이치며 위태로워질 때까지.
일상의 소리들이 음산하고 불안한 음악을 이뤄낸 것처럼, 불행은 그렇게 일상의 크고 작은 틈에서 쌓이는 것인지 모른다. 차 문 닫는 소리가 끝내 총소리에 이른 것처럼. 배려의 겉옷을 입은 그 마음은, 딱히 크게 누구 잘못도 아니었던 마음들은, 아이들만큼도 못했다. 아장아장 걷는 걸음을 이제 막 벗어난 아이만큼도 서로에게 이르지 못했다.
잘해보고 싶었던 마음들이 실패로 돌아갈 때, 이것이 최선이었나 돌아보게 될 때, 스스로가 초라해질 때, 구질구질한 마음들이 복잡하게 안을 메울 때, 차라리 지지부진한 관계에 깔끔하게 선을 긋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들 때. 더 잘해보려고 내린 선택이 회오리처럼 더 휘몰아쳐, 더 이상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그때 삶의 문제를 녹이는 실마리는 무엇일까.
긴장감에 휩싸여 보던 영화에서 한 줄기 미소 지을 수 있었던 순간은 아이들 때문이었다. 아이가 넷이나 있는 부부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보인 마음 때문이었다. 갑자기 화를 팩 내며 돌아가 버린 누나의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누나의 마음이 좋지 않음을 이해하고, 덩달아 마음이 좋지 않아진 아빠를 헤아려 “고마워요”라는 말로 어색한 공기를 뚫는 아이의 마음을 생각한다. 소용돌이치며 끝도 없이 높아져만 가는 긴장감의 끝, 보는 내내 궁금했던 결말에서 툭 터지던 마음도 함께 생각한다.
나의 방을 벗어나 서로의 사이에 있는 섬으로 나아가는 것. 더없이 차가운 온도일 것만 같았던 이 ‘트랜스픽싱(transfixing; 두려움이나 경악으로 얼어붙게 만드는)’ 로맨스의 끝에 발견한 건 초라한 마음까지도 내려놓고 문을 여는 마음, 사랑이었다.
영화 킬링오브투러버스 X 케빈오 Oh My Sun 콜라보 뮤비. 쓸쓸한 배경과 조용한 사랑이 잘 묻어나 있어 좋았다.
*영화사 블루라벨픽쳐스에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영화를 감상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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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영화를 위한 영화
영화 리뷰에 앞서, 인상 깊었던 이야기를 짚고 넘어가고 싶다. 우선 영화의 장르는 예상컨데 코미디이다. 근데, 뒷자리 앉은 관객이 영화가 끝나고 나서 "나 울컥했어. 너무 슬퍼" 라는 말을 했다. 왜인지 이해와 공감이 충분이 가는 대사다. 코미디인데 왜 슬프냐면, 이 영화는 누군가에겐 다큐멘터리다.
영화 감독 '000'
영화는 제19회 전주국제영화제 대상을 받은 '지석'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연출인 줄알았는데 실화였다고 한다.) '지석'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지만, 오래 사귄 여자친구의 아버님에겐 그저 '영화 감독이라는 꿈을 꾸는 능력 없는 남자친구' 일 뿐이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쓰고 또 쓴다. 이번 시나리오 주제는? '장인을 죽이는 사위' . 이 시나리오를 가지고 제작사에 찾아가본다. 제작사에서는 "돈이 되는 영화가 아니다." 혹은 "저예산으로 찍을 수 있는 시나리오가 있다. 그걸 찍어달라"라는 부탁만 한다. 이들에게 지석은 그저 영화제에서 대상 받은 가성비 감독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감독 모임에선 그저 '감독'에 대한 한탄만 있다. '요샌 개나 소나 다 감독' '영화제목과 배우만 기억하는 요즘' 이라는 키워드로 불평불만을 쏟아내지만 결국 유의미한 소득은 없다.
영화 감독 '지석'은 극단 출신이다. 극단 동기였지만 지금은 대스타가 된 '명성'이 '지석'의 영화만 같이 해준다면, 투자와 나머지 캐스팅은 쉬워진다. 하지만 극단 시절 여자를 사이에 두고 다툰 그들은 멀어진 상황. '지석'은 창피함을 감수하고 '지석'을 찾아가지만... 소득은 없다.
그녀의 등장
그러던 중, 등장한 '미란'. '미란'은 어디서 본 듯, 한 그런 조단역을 맡았던 여배우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미국에서 살며 배우의 꿈을 접고 행복하게 살던 중 시한부에 걸린 것. 그런 남편이 5억을 투자할테니 '지석'에게 영화를 찍어달라고 부탁한다. 나름(?)의 고민을 하던 지석. (사실 고민은 3초컷) 결국 '미란'과 함께 영화를 찍기로 한다.
스태프들도 구하고, 배우 오디션도 보고, 헤드들도 구하고. 예산이 넘쳐나니 로케이션 헌팅도 즐겁다. (지석의 전작품은총 예산이 3,000만원 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그들에게 시련이 생긴다.
눈이 즐거운 카메오의 출연
'어! 나 저 배우 아는데'의 연속이었다. 박호산·봉만대·모그·대도서관 등 화려한 카메오들로 구성되어있다. 인상 깊었던 카메오의 장면은 '잘나가지 않는 감독'들의 모임에서 실제 '모그 음악감독'이 출연해서 놀랐다. (아래 사진)
영화를 위한 영화
사실 영화를 전공해서 독립 단편영화를 촬영한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 영화를 보니 참 애틋했다. 심지어 대학생이었던 시절 영화 제작 PD를 맡았을 땐, 한끼 식사를 1,400원 야채김밥을 할 지 좀 더 무리해서 2,000원의 봉구스 밥버거를 할 지가 최대 고민이었다. 지금은 현장일을 하지 않았기에 잊고 있었는데 '영화로 만들려고'를 보니 마음이 아팠다. 아직 상업 영화가 아닌 현장은 이렇구나.
그럼에도 '영화' 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이 있기에, 지금 내가 있는 전주국제영화제가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이 영화에 주고 싶은 키워드는 영화를 위한 영화다.
정형석 감독님은 사실 이 작품으로 알게되었는데, 이 작품이 다섯 편째 장편 영화라고 한다. 정형석 감독님이 궁금해지는 영화다.
EDITOR_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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