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니엘2022-07-04 22:39:23
더 이상 희생하는 엄마는 그만!
<로스트 도터> 시사회 영화 후기
레다는 자식들을 두고 그리스로 혼자 휴가를 떠난다. 그리스 휴양지에서 친절하게 맞이해주는 펜션 주인인 라일을 만나고 평온한 휴가를 보내려는데 그때 니나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는 어디서 왔고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는데 레다는 이탈리어 비교 문학 교수이면서 보스턴에서 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니나의 딸이 실종이 되고 니나와 그녀의 가족은 큰 슬픔에 빠지지만 레타가 니나의 딸을 찾아 니나에게 데려다준다. 그리고 레타는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아이들과 함께 있어주지 못했던 기억들을 떠올린다. 젊은 시절의 레타는 두 딸에게도 놀아주지도 않고 자신이 하는 일에 몰두하느라 잘 챙겨주지 않았다. 그렇게 기억을 회상하고 난 뒤 레타에게는 두 딸의 의미가 어떻게 다가왔을까?
레타에게 두 딸은 어떤 의미였을까?
자식들을 위해 살아온 게 아니고 자신의 인생을 위해 살아온 희생적이지 않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준다.
무자식 상팔자라더니 맞는 말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의 레타는 오로지 자신이 인정받는 논문을 쓰느라 두 딸에게 사랑을 주지 않았고 상처를 주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녀가 비교 문학 교수가 되기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녀가 쓴 논문이 인정을 받자 두 딸에게 사랑을 주지만 자신에게는 내연남이 있었고 남편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그 이후로 집을 나오면서 속이 시원했다고 한다. 자신을 구속하는 것 같이 느껴진 레타는 자유를 찾은 것이다. 그래도 두 딸은 20대 초 중반이 되었고 해수욕장에서 니나의 딸이 잃어버린 인형을 자신이 가져가면서 숨겨놓고 가끔씩 꺼내면서 인형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다. 왠지 모르게 내가 느꼈던 것은 부모로서 자식들을 지키려고 하는 모성애가 없는 것을 인형을 통해 대리만족을 했었던 게 아니었을까? 자신의 인생을 자식들에게 바치지 않는 부모였던 레타에게 두 딸은 큰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자식들에게 희생하고 싶지 않은
레타의 심정을 보여주는 영화!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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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섹스 앤 더 시티의 계보를 잇다, 미드 <더 볼드타입>
미드 <더 볼드 타입> 포스터
더 볼드타입 (The Bold type, 2017-2021)
제작 : 미국, 코미디·드라마, 시즌5 완결
연출 : 빅터 넬리 주니어, 에리카 던튼 │ 각본 : 세라 왓슨
출연 : 아이샤 디(캣), 케이티 스티븐스(제인), 메간 페이(서턴), 멜로라 하든(재클린)
등급 : 전체 관람가<섹스 앤 더 시티>의 계보를 이을, 여성 우정 드라마
<더 볼드타입> 스틸컷
친구들과 브런치 타임을 즐기고 자유분방한 사랑을 경험하는 뉴욕의 전문직 여성 이야기는, 언제나 나의 감성을 촉진하는 단골 소재다. 이를 활용한 가장 성공적인 드라마는 단연 <섹스 앤 더 시티(1998-2004)>일 거다. 그간 ‘섹스 앤 더 시티’를 떠올리게 하는 드라마들은 종종 있었지만, 오늘 말할 드라마는 그중 가장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제의식을 잘 가져온 드라마가 아닐까 싶다. 직업, 패션, 우정, 성 담론, 그리고 거기에 밀레니얼 세대의 공감대가 아낌없이 더해져 있으니 말이다.
젊은 세대가 주 시청층인 미국의 채널 ‘프리폼(Freeform)’에서 방영이 됐기 때문에 관람 등급은 전체 관람가로 낮아졌고, 주인공들의 연령대도 20대 중반으로 훨씬 영(yong)해졌다는 게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다. 섹스 앤 더 시티가 농염한 언니들의 과감한 섹스 라이프를 다뤘다면, 이 드라마는 사회초년생인 20대 여주인공들이 전문직 여성으로서 어떻게 경력을 쌓아나가는지, 여성으로서 자신을 어떻게 정체화 해나가는지를 집중적으로 비춘다.
화려한 잡지사의 일상, 개성 강한 캐릭터들
<더 볼드타입> 스틸컷
‘섹스 앤 더 시티’의 숨은 관전 포인트였던 화려한 패션센스 또한 놓치지 않았다. 30대 중후반이었던 ‘섹스 앤 더 시티’ 언니들보다는 경제적으로 빠듯한 20대 주인공들이기에 화려한 의상을 매일같이 휘감을 수는 없었지만, 나름의 막강한 대체 요소가 있었으니. 세명의 여주인공이 몸담은 회사이자 이 드라마의 주요 배경인 ‘스칼렛(Scarlet)’이 바로 여성잡지사라는 점이다.
직장이 ‘잡지사’라는 설정 덕에 매회 화보 촬영과 기념 파티 그리고 셀럽들이 등장하느라 한시도 눈이 지루할 틈이 없다. 심지어 주인공 제인, 캣, 서턴이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대나무 숲처럼 찾는 곳은, 화보 촬영에 쓰일 각종 장신구와 의상이 모여있는 ‘패션 클로짓(의류창고)’이라는 거.
세 명의 여주인공 캐릭터도 ‘섹스 앤 더 시티’만큼이나 확실하고 개성 있다. ‘제인’은 스칼렛의 기자로서 ‘발 각질 관리법’ 같은 가벼운 기사에서 여성의 정치와 권리를 다루고자 하는 뚝심 있는 기자로 묘사되고, 패션 어시스턴트인 ‘서턴’은 사랑보단 자신의 경력을 우선시하는 진취적인 여성으로 묘사된다. ‘캣’은 젊은 나이에 소셜 미디어 디렉터를 맡고 있는 능력잔데, 여성 사진작가와 사랑에 빠지면서 자신의 성적 지향을 깨우쳐간다.
각자 뚜렷하게 생동감이 넘치는 캐릭터 덕분일지, 매 에피소드는 세 주인공이 펼치는 각기 다른 라이프 스타일과 주제의식으로 빼곡하고 또 신선했다.
이 드라마의 숨은 주인공, 편집장 재클린
<더 볼드타입> 스틸컷
과거의 여성잡지가 그러했듯 드라마 속 가상의 잡지사인 ‘스칼렛’은 구시대적인 여성관에서 출발했다. 남자를 유혹해야 하고, 여자라면 갖춰야 할 온갖 관리법이며 기술이며 하는 기사들을 담는 잡지였다. 그런 잡지사에 여성 편집장 ‘재클린’이 오면서부터 ‘스칼렛’은 바뀐다. 정치기사를 싣고, 건강한 여성의 몸을 비추고, 이사진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는 진취적인 여성관을 제시하면서 새롭게 재창조된다.
재클린은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는 끊임없이 쇄신한다. 인쇄소에 맡기기 직전까지도 이 콘텐츠가 여성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할 수 있는지를 의심하고 또 고민하는 편집장이다. 단순한 리더에 그치지 않고 여성을 향한 대의를 품은 그녀만의 방향성은, 스칼렛의 직원들에게 매 순간 용기를 불어넣는다. 또한 올바른 저널리즘을 추구함으로써 편향되거나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직원들을 채찍 하는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드라마의 표면적 주인공들은 20대 여성 제인, 서턴, 캣이지만 드라마가 거듭될수록 느껴지는 게 있다. 성장하는 그녀들을 이끄는 중추적인 인물은 단연 ‘재클린’이고, 그녀가 숨은 주인공이라는 것 말이다. 재클린은, 실제 ‘코스모 폴리탄’의 여성 편집장이었던 ‘조안나 콜스’를 모델로 했다고 전해진다. (*조안나 콜스는 이 드라마의 제작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세 친구의 우정은 당연히 디폴트고요
<더 볼드타입> 스틸컷
새로운 주제의식이 더해지면서도 이 드라마가 근본적으로 ‘포스트 섹스 앤 더 시티’로 불리는 가장 큰 이유는 3인 여성의 ‘우정’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인과 서턴, 캣은 잡지사의 조무래기로 시작해 어엿한 각자의 역할을 해내기까지, ‘스칼렛’의 동료이자 영혼을 나누는 솔메이트 친구 사이다. 그들이 ‘패션 클로짓’에 모여, 안 풀리는 연애사와 업무 고충에 대해 무한한 공감과 위로를 나누는 건 매 에피소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이다. 그녀들은 여느 20대의 친구들처럼 싸우기도 하고, 서로 다른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도 있지만, 결국엔 서로가 없으면 안 되는 톱니바퀴처럼 이빨을 맞추며 사랑스러운 우정을 이어나간다.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매번 잠자리 파트너를 바꾸던 ‘사만다’와 동화 같은 사랑을 꿈꾸던 ‘샬롯’이 친구를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20대라고 덜 성숙하지도, 더 유난하지도 않은, 여성들의 우정은 여기 이 드라마에서도 디폴트 값이다.
볼드타입으로 표현되는 이 드라마의 정수<더 볼드타입> 포스터
‘볼드(Bold)’는 보통 활자체보다 선이 굵은 활자체를 뜻한다. 하지만 이를 사람을 수식하는 데에 쓰면 ‘개성있는, 특이한’이라는 뜻이 된다. 이 드라마의 제목으로 쓰인 ‘더 볼드 타입(The bold type)’은, 발랄하지만 경박하지 않으며 당당한 여성관을 표방하고 있는 이 드라마의 정체성을 잘 함축한 단어가 아닐까.
2-30대 여성이라면 호불호 없이 즐길 수 있을만한 이 드라마는, 참고로 미국의 영화/TV 리뷰 집계 웹사이트 ‘로튼 토마토(Rotten Tomatoes)’에서 신선도 100%를 기록한 바 있다. 시즌5로 완결되었으며, 넷플릭스에서는 현재 시즌3까지 시청 가능하다. 나는 시즌 4를 기다리느라 현재 현기증을 겪는 중이다. 이 드라마를 보는 모든 여성들에게, 재클린의 용기와 격려가 깃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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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한다는 이유로 다 용서해야만 하는가
어릴 적 봤던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의 집 앞에서 하루종일 기다리는 것을 낭만적으로 연출하는 경우가 종종 보고는 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낭만적인 상황도 아니며 설렌다고 느껴서도 안된다. 사랑은 상호 의사소통이며 서로를 이해하는 행위인데 상대의 의사를 무시하고 무조건적으로 나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사랑이 아닌 집착이다. 또한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았으며 거절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연락하는 것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명백한 스토킹이며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공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매체에서 이런 구애 행위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았는지 그리고 이것을 보며 과거의 나는 왜 그것을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매체의 힘은 상당히 강하다고 생각한다. 일방적인 구애행위를 통해 끝끝내 상대방이 나의 사랑을 받아줬다고 생각했을 때 그것이 과연 건강한 사랑, 건강한 의사소통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만약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공포심을 느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의 범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영화 미저리에서는 폴에 대한 애니의 표현을 옳지 않은 방식, 왜곡된 사랑으로 표현했는데 나는 이처럼 미디어에서 스토킹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 때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며 스토킹에 대해 알아보다가 현재 한국에서는 스토킹이 법적 용어가 아니기 때문에 스토킹 자체만으로는 범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연인과 같은 친밀한 사이에서 일어나는 폭력, 살인과 같은 범죄가 스토킹의 연장선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간 나는 이런 친밀한 사이, 혹은 일방적인 구애행위가 범죄로 이어지는 뉴스들을 접하면서 피해자의 입장이 아닌 가해자의 이야기, 가해자의 목소리에 더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닌가 반성하게 되었다. 이런 범죄의 피해자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굉장히 어렵고 쉽게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영화 미저리를 보면서 스토킹이 얼마나 심각한 범죄행위인가를 알 수 있게 되었고 성범죄 교육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것처럼 스토킹에 대한 교육, 건강한 사랑은 무엇인가에 대한 다양한 교육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하루빨리 스토킹과 관련된 법을 제정하여 피해자를 보호하고 이것이 2차 범죄로 이어져 더 많은 피해자가 발생하는 일이 없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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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라랜드>의 뉴욕 버전!
“Do You Remember~” 우연히 듣게 된 음악은 기억과 추억을 싣고 온다. 그 당시 계절과 시간, 그리고 함께한 사람과의 추억까지도. 상대방이 연인이었다면, 그 기억은 더 아름답게 떠오를 터. 애니메이션 <로봇 드림>은 서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과거 함께 들은 음악을 들으며, 사랑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을 담는다. 영화는 마치 꿈처럼 아스라이 사라지는 그 순간을 담기 위해 달려온 것처럼, 짧지만 마법 같은 시간을 관객에게 선물한다. 마치 말하지 않아도 이런 사랑의 기억을 하나쯤 갖고 있지 않냐는 무언의 메시지처럼.
뉴욕 맨해튼에서 사는 도그는 외롭다. 언제나 혼자 해야 하는 게 매일 돌려먹어야 하는 레트로 음식처럼 못마땅한 도그는 우연히 TV를 보다 발견한 반려 로봇을 주문한다. 마침내 조우한 도그와 로봇은 둘도 없는 단짝이 되어 뉴욕 곳곳을 누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은 해수욕장에 놀라 가는데, 예기치 못한 상황에 놓인다. 로봇이 방전되어 움직일 수가 없는 것. 도그는 어쩔 수 없이 로봇을 홀로 남겨놓고 집으로 간다. 다음 날, 도그는 일어나자마자 연장통을 들고 해수욕장을 찾는데, 하필 운영이 종료되어 해변을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에 놓인다.
<로봇 드림>을 관통하는 주제는 ‘그리움’이다. 원치 않은 이별을 하고, 언제 만날 줄 모르는 기다림을 견뎌야 하는 도그와 로봇은 물리적인 거리만큼 서로를 그리워한다. 보고 싶지만, 볼 수 없는 이들은 하루 하루 비슷한 일상을 버티며 만날 날을 기다린다. 하지만 운명은 이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특히 홀로 해변에 남겨진 로봇은 불청객의 습격을 받고 추운 겨울을 나야 하는 등 물리적인 고통을, 도그는 또 다시 찾아온 외로움에 사무치는 심리적인 고통을 부여받는다.
서로를 향한 그리움은 꿈으로 치환되는데, 제목이기도 한 로봇의 꿈은 매번 함께 들었던 Earth, Wind & Fire의 ‘September’를 휘파람으로 불며 도그의 집으로 가는 그의 여정이 그려진다. 물론, 만나기 일보직전에 항상 실패한다. 그리고 깨 보면 잔혹한 현실의 장벽에 놓여 있다. 로봇은 도그를 향해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현실에 부딪히며 그리움은 켜켜이 쌓인다. 도그 또한 꿈에서 로봇과 재회하지만, 현실에서 더 큰 외로움을 느끼는 등 여파가 크게 밀려온다.
지난한 이 상황에서 이들은 각자의 세상에서 새로운 경험과 다른 이들과 인연을 맺는다. 이별 후 죽을 것 같은 통증에 더 이상 내 인생에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내 다른 사랑을 찾는 현실처럼, 이들 또한 그리움은 가슴 깊이 묻어두고 이 외로운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선택을 한다. 영화는 이 과정을 통해 한 단계 성장하는 도그와 로봇의 모습을 비춘다. 어쩌면 이게 바로 우리의 삶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에 가서야 우리는 그리움을 통한 애절한 감정의 순간과 그 감정을 자양분 삼아 현실의 사랑에 더 충실하려는 이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결은 다르지만 <라라랜드>의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과 미아(엠마 스톤)가 떠오른다. 서로 사랑을 하고 아쉬운 이별을 한 후, 각자의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간 이들의 마지막 재회. 그 찰나의 순간에 담긴 이들의 성숙한 로맨스 그리고 그 눈빛은 이 작품에서 오버랩된다. 이 부분을 두 눈으로 확인한다면 이 작품을 <라라랜드>의 뉴욕 버전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007년 동명의 그래픽 노블을 영화화한 <로봇 드림>은 오직 그림으로만 구성된 특징을 가져온다. 대사 없이 캐릭터의 몸짓과 표정만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이 작품은 무성영화를 방불케 하는 것처럼 캐릭터에 집중하게 하는 환경을 조성한다. 이를 바탕으로 상황에 따라 기민하게 변화하는 캐릭터의 감정선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데, 집중한 만큼 느껴지는 감정의 폭은 깊다. 시의적절하게 ‘September’, 'You Raise Me Up' 등도 삽입되어 가사의 의미를 통해 이들의 숨겨진 마음을 전한다. 특히 ‘September’를 들으면 도그와 로봇이 생각날 정도로 감정의 동요가 크다. 손수건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애니메이션상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받았다. 하지만 이 영화와 함께 후보에 오른 <로봇 드림> 또한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영화가 담은 의미와 감동은 보는 이의 가슴을 울린다. 이젠 기억 속에 어렴풋이 자리 잡은 1980년의 뉴욕 문화를 재현한 것처럼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영원히 사라진 줄 알았던 그리움과 사랑의 기억을 복원한다. 보는 이로서 그 자체가 103분의 달콤쌉싸름한 꿈이라도 행복했던 지난날에 취하고 싶다. 현실로 돌아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칠지언정.
사진 제공: 영화사 진진
평점: 4.0 /5.0
한줄평: 지금 나를 성장시킨 건 그 때의 우리였다는 걸
*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 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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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은 나아간다 새로운 세계로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8년 후, 영국은 고립되었고 그것들은 진화했다.
영화 제목 그대로 23년만에 관객을 찾아온 <28일 후>의 속편 <28년 후>는 보다 방대해진 스케일과 서사로 극장을 찾아오게 되었다. (감독이 다른 <28주 후>는 해당 글에서 배제) 무엇보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바로 감염자 커뮤니티이다. 통칭 '알파' 라고 불리는 대장 감염자를 필두로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넓히고 침입자들을 사냥하며 자신들의 커뮤니티를 공고히 한다. 이들이 주로 경계하는 것은 비감염자 커뮤니티인 '홀리 아일랜드 연합'으로 이들은 밀물과 썰물을 이용해 본토를 넘나들며 물자를 확보하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어떻게 보면 늘 비감염자의 일방적인 생존기로 그려지던 대다수의 좀비물과 달리 <28년 후>는 위와 같이 두 세력이 공존하고 있음을 보이며 세계관을 이끈다.
아픈 어머니와 다수의 사냥 경험이 있는 아버지를 둔 소년 '스파이크'는 분노 바이러스 사태 이후의 세대이다. 영화 중 침몰한 감시선 해병 '에리크'와의 대화에서 유추할 수 있듯 그는 핸드폰도 필러도 택배의 존재도 모른다. 그가 익혀야 하는 것은 오로지 감염자는 심장과 머리를 쏘아야만 죽는다는 것, 그리고 알파를 상대하지 말 것이 전부이다. <28년 후>의 세계관은 섬나라인 영국을 유럽연합으로부터 격리시켜 전세계적인 팬데믹을 막고자함을 그 배경으로 한다. 새로 태어난 아이들은 수렵과 채집을 익히는 반면 바로 옆나라에서는 여전히 택배를 배달하고 현대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한정된 곳에만 찾아온 멸망에 이질적인 기분이 드는 것도 잠시 12살 소년 스파이크에는 과업이 존재하기에 도리어 에리크가 보여준 신기한 문물들은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한다. 현대 문명은 스파이크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버지 '제이미'를 따라 느린 감염자를 처치하는 법을 익히거나 아픈 어머니를 돌보는 것만이 스파이크의 삶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 영화가 보이는 전개 방식이 눈길을 끈다. 바로 영화가 다름아닌 좀비물을 보이기보단 한 소년의 성장서사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스파이크의 여정은 아버지의 불륜을 기점으로 초반과 후반으로 나뉜다. 초반 스파이크는 아버지로부터 생존의 방식을 배우게 된다. 그간 비감염자 커뮤니티가 자신들을 지켜온 방식일 것이며 그 다음 세대로 되물려줄 전통이었을 것이다. 12살 소년에게 가혹하더라도 아버지는 그에게 끝까지 사냥의 기회를 주며 알파와 맞닥트린 위기 상황에서도 그에게 절대 해서는 안되는 일들을 지속적으로 언급하며 소년을 성장시킨다. 따라서 커뮤니티를 지켜야만 한다는 가장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 스파이크의 도주는 무척이나 쉽게 이루어진다. 아버지의 불륜은 그러한 내적 외적 커뮤니티에 대한 배신으로 받아들여지며 한 차례에 지날지 몰라도 이미 다음 세대로의 계승은 이루어진 상태였기에 아직 소년일지라도 그는 단순히 커뮤니티 속 안정만을 추구하지는 않게 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공고하게 지켜왔던 커뮤니티만의 안정이 그에게는 다름아닌 허상이었으니 말이다. 아포칼립스보단 판타지 장르에서 더욱 자주 등장했던 이러한 소년의 성장은 마치 하나의 설화이자 전설처럼 내려오는 어머니를 낫게하는 의사를 찾고자 하는 그의 첫 목표로 이어지게 된다.
좀비가 다루어지는 아포칼립스물에서의 단독 행동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다수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고 그럴수록 커뮤니티가 안겨주는 안정성은 더욱 높아진다. 하지만 스파이크는 과감히, 아픈 어머니와 함께 그녀를 고쳐줄 의사를 찾아 새로운 여정을 떠난다. 이렇게 시작된 후반부에서 소년은 아버지가 알려준 생존의 방식과는 다른 삶의 계기를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소년은 아버지로부터 생존을, 어머니로부터 삶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28년 후>라는 영화가 무엇보다 빛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사실 그간 감염자가 커뮤니티를 이룬다는 설정은 마냥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윌 스미스 주연의 <나는 전설이다>에서 볼 수 있듯 이미 감염자와 비감염자의 전쟁으로 이어지는 설정 자체는 한 번쯤 접할 수 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폭력의 되물림 속에서 태어난 소년이 어머니와의 여정에서 보게 된 것은 바로 '죽음을 바라보는 방식' 이다. 죽음을 막기 위해 떠난 여정은 도리어 죽음을 기억하게 된 여정이 되었지만 이는 그간 가장 생명이 경시되는 좀비물에서 찾아보기 힘든 형태의 메세지였다.
좀비물은 감염으로 인해 반시체가 된 괴물들을 상대로 생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다시 말해 소수의 생존을 위해서 다수의 감염자를 마구 쏴죽이는 것은 필연적이었으며 그들의 죽음은 생존자의 생존 가능성을 더욱 높혀주는 필수요소나 다름 없었다. 비극을 위해서라면 늘 생존자 중 한명이 비참하게 뜯어먹히기도 하였으며 처절하게 생존을 부르짖다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경우가 대다수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머니와의 기나긴 여정 끝에 소년이 맞이하게 된 것은 추정컨대 면역자인 아기, 즉 새 생명이며 또 하나로는 감염자와 비감염자를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죽음이다. 캘슨 박사는 좀비라 불리어지는 이들은 그저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들에 지나지 않았음을 자신이 만든 건축물로 하여금 강조한다. 생존을 위해 서로를 죽이는 것이 정당화 된다면 그들이 가지는 죽음의 가치도 같을 것이다. 한 차례 전세계적인 팬데믹을 거친 지금의 관객으로써도 공감이 가능한 부분이기도 하다. 감염된 자와 감염이 되지 않은 자일 뿐이다. 죽여 마땅한 좀비는 없으며 그저 서로의 커뮤니티를 형성한 채 지금의 영국은 영토 전쟁 중일 뿐인 것이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은 생명이 경시되던 장르에서 강조되기 쉽지 않다. 그야말로 홍수같이 죽음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몇 십년간 켈슨 박사는 챙길 수 있는 모든 시체를 수습해 그들의 뼈로 건축물을 형성한다. 토양 아래 뼈는 바스라질지라도 건축물은 시간을 통과하는 장소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 영화는 덧붙인다. 많은 이들이 죽어나가는 장르에서 등장한 이 뼈탑의 의미는 그러하다. 이 바이러스가 불러온 비극을 기억하고 살아가겠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스파이크는 그곳에서 어머니를 쌓아올린다. '메멘토 아모리스', 소년은 그렇게 죽음을 기억함으로 사랑했다는 사실 마저 기억에 남기게 된다. 직접적인 죽음의 경험이 아니었더라면 가능하지 않았을 성장이었을 것이다.
결말부 스파이크는 어머니의 이름을 딴 아기를 홀리 아일랜드에 넘겨주고는 다시금 모험을 떠난다. 이미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성장한 소년은 더더욱이 스스로가 경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스파이크는 영화 전반에 걸쳐 미스테리로 남은 '지미'와 마주하게 된다. 부모를 전부 잃으며 시작된 지미의 서사는 더욱이 이런 스파이크의 서사와 대비된다. 자신의 커뮤니티를 공고히 하기 보단 고독한 모험을 떠난 그와 달리 자신만의 독자적인 종교 커뮤니티를 형성한 지미가 추후 그와 어떤 마찰을 빚게 될지 속편을 기대시키며 말이다.
한편 영화는 <28일 후>의 오마주도 놓치지 않는다. 오프닝 시퀀스를 비롯해 스파이크의 첫 사냥까지 저예산으로 제작 된 <28일 후>에서 돋보이던 특유의 화면 질감이나 편집, 음악 사용 방식을 철저하게 따라간다. 이때의 효율적인 편집은 굳이 인물의 입을 빌려 세계관을 설명하지 않고 말 그대로 야생으로 회귀하게 된 영국의 상황을 보여주며 이들이 3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어떻게 생존해왔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정글북>으로 유명한 러디어드 키플링의 작품 <부츠>가 인용된 사냥 시퀀스의 음악은 <28일 후>를 떠올리게 하는 최적의 장치이자 주인공이 처한 배경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군화를 강조하며 '제대 할 수 없다' 라는 가삿말은 작중에서는 전쟁 이후에도 트라우마에 갇혀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던 군인들을 뜻했으나 영화 내에서는 지속되는 감염자와 비감염자의 대치 상황을 강조하는 동시에 대물림 되는 폭력을 보여주는 구간이기도 하다. 또한 감염자 역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는 집단인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단순 생존일 뿐만 아니라 양 진영간에 벌어지는 영원한 전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해당 곡의 사용은 지난 28년 간 이루어진 대치 상황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뿐 만 아니라 후반부 켈슨 박사를 찾아나선 스파이크의 여정은 지난 <28일 후>에서 짐이 보여준 경로와 유사한 점이 있다. 성당을 비롯해 철길, 생존 병사와의 만남 등은 지난 몇 십년 간 <28일 후>의 귀환을 기다렸던 이들에게 원작을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때 눈여겨볼만한 흥미로운 지점은 폭력을 되물림하던 아버지와 아들이 몰고온 것은 알파, 즉 진정한 폭력과 분노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엄청난 속도로 그들의 뒤를 쫓아오던 알파를 상기한다면 그의 모습은 침입자를 응징하고자 쫓아왔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이미 한 차례 스파이크와 제이미는 순록의 머리로 표시된 영역을 침범한 바 있으며 영토 침범은 전쟁의 선포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와 함께했던 여정 이후 스파이크는 그런 죽음과 폭력 속에서 태어난 새로운 생명을 갖고온다. 아이의 이름이 어머니를 따 만들어진 것을 생각한다면 아이는 그 자체로 '메멘토 아모리스' 기억된 사랑과 다름이 없다. 영화는 이렇게 말한다. 계속되는 전쟁과 폭력만으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고 그저 뺏고 빼앗길 뿐이라고, 하지만 그 안에 존재하는 존중과 기억은 세대를 다른 곳으로 이끌어주리라고. 스파이크는 서사 속에서 아주 노골적인 교두보 역할을 담당한다. 유약했던 소년은 두 차례에 걸친 부모의 전승으로 고립된 시대의 새로운 바람이 되어줄 것이다. 아직은 그 여정을 조금 더 지켜봐줘야 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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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궤도에서 벗어난 ‘탈주’, 도착만 하면 끝?
살아야 하는 이유
이 영화의 주인공은 북한군 군인 규남(이제훈)이다. 전역이 코앞이다. 10년간의 긴 레이스였다. 새로운 시작을 앞둔 규남. 북한사회라고 하더라도 내가 내 인생을 가로지를 수 있다는 것 하나만 믿고 지루한 시간을 견뎌왔다. 사실 규남은 혼자다. 어머니가 몇 년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규남이 이래서인지 동생 같은 동혁(홍사빈)에겐 진심이다. 멀리서 보면 형제 같은 두 남자. 언젠가 둘 다 군을 떠나기 때문에 이별이 아쉬울 것 같았다. 하지만 두 남자 규남과 동혁은 같은 속마음을 갖고 있었다. 바로 북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자유를 억제하는 북한에서 벗어나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었던 규남. 어머니가 보고 싶었던 동혁. 두 남자는 사실 자유에 대해 거대한 갈망을 품고 있었다. 비가 오던 날, 동혁과 규남은 탈주를 계획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쫓아가는 또 다른 주인공 현상(구교환). 처절한 탈주극이 남북의 군사분계선에서 벌어진다.
내가 주인공인데
이 영화에서 설명이 가장 필요하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은 소위 말하는 '주인공 버프'다. 사실 이런 장르에 있어 주인공 버프는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다. 당연히 추격전이라는 특성을 살려 1시간 40분 동안 끌고 가려면 두 주인공이 살아야 하지 않겠어? 팬데믹 시기에 개봉했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나 추격물의 근본이라고 볼 수 있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도 이 주인공 버프에 대해 나름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총이 등장하더라도 이게 언제 등장하고 퇴장하는지를 명확하게 표현한다던가 / 애초부터 두 주인공이 대립하는 걸 최소화하고, 그 나머지도 행운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전개한다던가 하는 방식으로 두 인물의 추격전을 강조했다.
이 글에서 정말 중요한 건 이 <탈주>에서 그걸 '어떻게 구현했냐'에 대한 부분이겠지? 이 영화의 주인공 버프는 좀 터무니없다고 생각하기 쉬울 것 같다. 영화의 중요한 공간적 배경이 군인 / 북한 두 곳이기 때문에 총격전이 등장한다는 건 스포일러가 아니라 당연하다(심지어 포스터의 구교환 배우가 총을 잡고 있다). 이 전제 하에 영화가 총격전을 잘 묘사했나?라고 묻는다면 난 아니오다. 그러니까 주인공 버프에 당위성이 떨어져 보이기 쉽다는 뜻이다. 대신 영화가 두 사람의 역동성을 강조한 연출을 보여줬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도자의 위치에서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해도 아-무 지장이 없는 현상이 자유로워 보이는 것을 먼저 생각해 보기로 한다. 다음으론 규남이의 캐릭터가 어떤 인물인지 볼 필요가 있는데, 틀에 갇혀 있는 것 같은 주인공이 공간이 바뀌고 나서 유달리 운동하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글쓴이는 이것이 어느 정도는 의도가 있을 거라고 봤다. 규남은 다른 캐릭터들과 다른 한 가지 특징이 있다. 이 특징에 대한 관점에서 보면 규남이의 주인공 버프가 그렇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영화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두 가지, 추격전과 자유로운 인물들이란 걸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는 이런 연출들을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여기에 깔려있는 영화의 맹점이 있다. <탈주>는 이종필 감독을 위시로 한 편집과 연출에서 속도감 있는 방식으로 화면을 보여줘서 몰입이 잘 되는 쪽이다. 추격전의 측면에서는 합격점을 잘 받았다고 보긴 어렵다. 왜? 앞에서 언급한 주인공 버프가 편의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영화의 액션들이 기본적으로 페널티가 있을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어떤 장면에선 노골적이라고도 볼 수 있을 만큼 장면을 보여주는 방식이 낡았다. 그리고 영화는 주인공 규남이 군인이라는 설정을 잘 활용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역이 코앞에 있는 말년병장이 맞나? 그렇다 보기엔 이 인물은 전투력이 너무 없는 것 아닌가? 단순히 큰 줄기의 추격극에만 천착해서 중요한 디테일들을 놓친 건 아닐까? 이야기가 꼼꼼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운 선택이었다.
현상 그 자체
글쓴이가 생각하는 탈주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현상이라는 캐릭터다. 여기저기 신경 쓸게 많은 규남과는 달리 현상은 단순하다. 그냥 규남과 동혁을 잡으면 그만이다. 이 간단한 설명 덕에 영화에서 해결할 것들이 별로 없다. 이런 이유로 이 인물은 북한사회를 표현하기에 최적화되어 있다. 그냥 극 중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며, 그러니까 두 사람을 추격하기만 해도 영화가 설명하고자 하는 바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데, 극 중에 묘사가 되기도 하지만 북한 사회는 개개인의 목표를 짓밟고 집단을 강조한다. 영화가 이걸 내내 강조하는데 정작 현상은 자유롭게 움직인다? 이건 영화가 대놓고 고위공직자들에겐 관대한 북한사회를 꼬집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부분은 후반부에 굉장히 구체적으로 보여주기도 하는데 지뢰에 대한 장면 이에 해당한다. 고위관리는 지뢰를 밟지 않지만 그 아랫사람들은 그것을 밟는다. 이 세계는 자유가 있는 사람에게 동력을 준다는 걸 두 인물의 대비로 묘사한 것이다. 그리고 화룡점정. 현상이 북한사회를 드러낸다는 묘사는 인물의 대사에도 직접적으로 나온다. 후반부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하는 말 몇 줄은 현재를 관통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영화가 북한사회를 블랙 코미디처럼 풍자한 것도 흥미로웠다. 대표적으로 휴대전화에 대한 부분이 그렇다. 영화 초반 동혁이가 처한 문제를 보여준다. 바로 연락에 관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중반즈음에 영화에서 스마트폰이 나온다. 그러다가 어떤 인물은 폴더폰을 갖고 다닌다. 후반부에선 라디오와 관련된 묘사가 나온다. 이런 식으로 영화가 특정 소재를 반복하면서 누구는 누리지만 누구는 못 느끼는 걸 영화가 보여준다. 어떤 장면에선 카메라로 이 인물들이 가진 우스꽝스러움을 강조하기도 하는데 어떤 인물은 집단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다른 부분에선 개개인을 집중적으로 들추며 조롱한다. 이 집단에 대한 부분도 영화가 기괴한 방식으로 인물들을 촬영했는데 조롱하듯이 북한사회를 공격하는 영화의 톤에 생동감을 더하는 선택이었다.
이상한 퇴장
윗문단의 연장선상에서 쓴다. 이 영화는 추격전이라는 장르적인 특성을 이으려다가 갑자기 포기한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첫째. 영화의 세 번째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는 동혁의 동선은 철저하게 비현실적이다. 이 인물이 이렇게 길게 나올 일인가? 일찍 나올 거면 기존에 이 인물에게 정해져 있는 분량보다 더 빠르게 퇴장하는 게 적당했다. 아니면 차라리 길게 오래 끌어서 이 인물이 왜 탈주해야 하고 절실한지를 설명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글쓴이는 이 원인이 단순히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이유만으로 영화를 만들어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관습적으로 영화를 봐왔던 습성에 기대 인물을 묘사하니 플롯에 구멍이 많았다. 이 구멍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추격하는 이야기라는 영화의 플롯에 전적으로 방해가 됐다. 이 사람이 쫓기는 이유, 쫓는 이유가 겉으론 분명할지 몰라도 어색하면 안 된다. '왜'의 필요성을 관객 스스로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면 장르적인 재미로는 생생하지만 밀도 높은 이야기가 만들어졌다고 보긴 어렵다. <탈주>는 여기에 어느 정도는 기댄 듯했다.
그리고 글쓴이가 이 <탈주>의 세계관에서 가장 큰 이물질이라고 생각했던 것. 두 특별출연이다. 이 영화는 사실상 북한이라는 시스템과 한 개인의 추격전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전작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에서 기업과 개인과의 대립을 보여준 것에서 더 큰 갈등을 묘사한 것이다. 그럼 정확하게 시스템과 인물만 있어야 영화 안에 장애물이 없다. 당연하지. 시스템을 시각적으로 대놓고 보여줄 수는 없으니 규모의 이미지든 뭐든 사실적으로 표현하려면 인물을 나누는 것도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다. 작위적이라고?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북한이라는 소재를 다룬 이상 그 세계의 경직이 작위적으로 느껴지게 그릴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글쓴이의 이런 관점에서 특별출연으로 나온 두 인물은 작위적이지 않기 위해 작위적인 것을 선택한 것처럼 느껴졌다. 특히 여성 캐릭터. 이 캐릭터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뭐가 됐든 간에 이런 일을 하는 인물들은 사실 원하는 바가 정해져 있다. 영화는 이걸 놀라울 정도로 무시한다. 단지 이야기에서 편향되지 않기 위해, 인물들의 행보에 윤활유를 덧붙히기 위해 사용한다. 글쓴이는 동혁이의 분량을 차라리 이 캐릭터에 줬으면 어떨까 생각한다. 이 인물이 하는 일이든 행보든 잠깐 조연으로 나올 만한 크기의 캐릭터가 아니다. 이 인물은 영화 안의 북한군 고위간부를 하나하나 암살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영화 안에서 받은 역할이나 활용법이나 마무리를 확실하게 짓지 못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엔딩은 너무 많은 걸 보여준다는 점에서 허점이 너무 많아 보인다. 어떤 인물이 특정한 판단을 보여준다. 그 판단에 대해 한 인물이 리액션을 보여준다. 그 두 행동은 반향이 클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이 상황을 해소하는 방식도 편의 적었지만 이 판단을 위한 인물의 내면도 어딘가 모순이 많다. '걔들이라면 원래 그렇지 않을까'라고 생각해야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장면 바로 다음도 인물이 가진 현실성이 굉장히 떨어져 보인다. 대신 한국 상업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던 마무리방식을 선택했다. 차라리 이 장면을 보여주지 않고 끝냈으면 이 영화만의 개성이 더 생겼을 듯하다.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
글쓴이가 이 <탈주>를 보고 나서 든 생각. 이종필 감독의 전작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한번 더 보는 것 같았다는 점이다. 힘이 빡 들어간 감상적인 부분. 따뜻한 감성. 은근히 트렌디한 감각까지 이 영화의 메가폰을 맡은 이종필 감독은 다시 한번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운명과 맞서 싸운다는 개개인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이야기를 만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엔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덕목이 있다. 운명이 좋은 운명인데 주인공이 맞서 싸울리는 없다. 당연히 한국사회가 낳은 부조리 중 하나와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럼 사실적인 묘사에 설득력 있는 플롯이 필요하지 않을까? <삼진그룹 영어 토익반>이 단점을 잘 소화했다? 글쓴이는 그렇다고 보지 않는다. 그럼 이번에 잘하면 그만이다. 이걸 생각했을 때를 관점으로 봐도 이 <탈주>는 단점이 더 많았다. 왜? 이야기에서 이 연출 의도를 견지하려면 사실적인 대한민국(이 영화에선 북한까지 포함)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북한의 모습에'만' 솔직하다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엔 운이 가장 크게 작동한다. 이거 하나만으로도 영화가 뭔가 새로운 걸 시도하려다가 만 느낌이 강한 이유가 된다. 그래서 영화가 반쪽짜리 성공처럼 느껴진다. 이제훈, 구교환, 홍사빈 세 사람이 연말 시상식에서 이름을 올릴 것 같다는 거 말고는 새로울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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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니메이션 영화 '치킨래빗: 잃어버린 보물을 찾아서' 리뷰
*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치킨래빗: 잃어버린 보물을 찾아서
(23.03.18 개봉 예정)
감독: 벤자민 모스퀫, 벤 스타센
더빙: 박시윤, 김용 등
CGV 회원 시사로 먼저 보고 온 '치킨래빗'!
주토피아 제작진이 참여한 작품이라고 해서,
그리고 동물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저라서
더더욱 보고 싶었던 영화인데요!
우선 총평을 내려 보자면... 개인적으로 제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공짜로 봤는데도 별점 2점... 정도??
15,000원 제값 내고 보기엔 아주 아까운 ㅠㅠ
그러나 미취학 아동은 아주 좋아할 거 같은 영화였답니다
머리 좀 크고 나니 애니메이션은 디즈니, 지브리 아님 못 보겠더라고요 하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주인공이 제목과 같이 토끼+닭 혼종이에요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데 아마 다문화 가정 등을 표현한 듯해요
'외적으로 어떤 모습이든 나는 나다'라는 명대사 아닌 명대사가 나오거든요
아무튼 주인공이 나라의 영웅이 되기 위해
보물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그린 애니메이션인데요
빌런이 삼촌이라는 점이 신박했고 주인공이 왕족이라는 점도 새로웠어요
보통 모험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은 하위 계층이지만 명랑한 행동파 캐릭터가 많잖아요
이렇듯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설정이 많은데 그걸 다 이용하지 못한 거 같달까요?
왕(아빠)-빌런(삼촌)의 이야기도 제대로 그리지 못했고
주인공이 왜 치킨래빗이 된 건지도 나오지 않고
주인공을 무시하는 친구들의 감정 변화도 제대로 그리지 못했던 거 같아요
영화 초반엔 주인공을 엄청 적대시하는데
영웅으로 등극하자 갑자기! 호의적으로 바뀌었거든요
친구들간의 감정선을 조금 더 그려 줬으면 하는 아쉬움...
그리고 스토리적으로 쪼이는 맛이 없달까요?
주인공이 모험을 떠났다면 그만 한 벽이 있고,
그걸 헤쳐나가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가는 길마다 너무 쉽게 열려요
주인공 무리가 낭떠러지에 갇혀 그곳을 벗어나야 하는 게 최종 관문이었는데요
친구의 명언에 갑자기 눈을 번뜩이더니 닭의 날개가 생기면서 날아오르는 주인공,,,,,,
본인의 정체성을 부끄러워하다가 닭이 된 거면 엄청나게 감동적인 장면인 거잖아요??
관객 울릴 수 있을 만큼 신파적인 장면인데도
감동은커녕 신기함조차 없는 지나가는 씬 1이었어요
또 악당 무리 말고도 한 번의 고난이 있었는데요
돼지족...? 들한테 잡혔을 때였어요
주인공 무리를 화산에 던지겠다며 가둬놨는데 한창 도망치던 주인공이
갑자기... 날아올라요 또...
지금 생각해 보면 점점 닭이 되어 가는 걸 표현하고 싶어 했던 거 같은데
그 표현이 굉장히 섬세하지 못하고,
본인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주인공이 역경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만든
하나의 장치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냥
게다가 주인공 앞길을 막으려던 악당 무리가
산사태를 본인들에게 일으켜 갑자기 죽더니
뒤에 가서 죽은 줄 알았지? 하면서 나타나요
허무+어이없음의 연속 . . .
맨 처음 말씀드렸듯이 미취학 아동까지는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시각적으로 재미있고 코믹한 그림이 많거든요
그러나 스토리는... 완성도가 낮았단 점!
*스토리: ★
*연출: ★
*영상미: ★★★
*연기: ★★★★
*O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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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들리 스콧 감독이 20년전에 원작의 판권을 사놓았다가 구찌 가문의 반대로 영화화를 못하다가 드디어 만들어지게 된거에요.
러닝타임이 길지만 캐릭터를 보는 재미가 있고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합니다 .
특히나 레이디 가가의 연기가 정말 훌륭하죠.
이 영화에 자레드 레토도 등장을 하는데요. 엄청난 연기변신을 보여줍니다.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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