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진 작가가 집필한 동명소설을 드라마로 제작한 애플TV+ '파친코'는 공개된 뒤, 국내에서 많은 이목을 끌었다. 그동안 한국 근현대사 중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다룬 국내 미디어물은 많았으나, 국외 제작진과 글로벌 OTT 플랫폼(애플TV+) 속에서 한국(+한국계) 배우들이 중심으로 담아냈던 사례는 '파친코' 이전에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시즌 1에만 무려 1000억 원이라는 엄청난 액수의 제작비를 투입한 '파친코'는 공개되자마자 단번에 화두로 떠올랐다. 3월 25일 유튜브로 공개된 1회는 조회 수 천만 뷰를 가뿐히 넘어섰고, 4년 전에 한국어 버전으로 발간된 원작 소설은 절판을 앞두고 역주행하며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한국서 접할 수 있는 OTT 중에선 후발 주자 격인 애플TV+ '파친코'로 틈새를 공략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파친코'를 향한 인기와 호평은 한국에서만 국한되지 않았다. 해외 주요 매체들은 '파친코'의 수준 높은 연출력과 서사, 연기력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어 로튼 토마토 신선지수 98%, 메타크리틱 점수 87점을 기록하는 등 작품성을 검증받았다. 이에 힘입어 애플TV+ 측은 '파친코' 시즌 2로 확장했다.
'파친코'가 화제의 콘텐츠로 떠오르면서 자연스레 제작 비하인드도 대중에게 알려지고 있다. 4대에 걸쳐 80년간 일본에서 살아가는 재일교포의 삶을 다룬 '파친코'에 영화/드라마 제작에 손을 내민 곳은 애플TV+ 이외에도 많았다.
그러나 원작자 이민진 작가는 다른 러브콜을 거절하고, 애플TV+와 계약을 맺었다. 제일교포인 주인공을 다른 인종(백인)으로 바꾸자고 제안한 다른 곳들과 달리, 유일하게 애플TV+만 이 작가의 요구사항에 따라 원작 그대로 따라갔기 때문이다.
최근 '킹덤', '기생충', '미나리' 등 웰메이드 작품들이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으면서 아시아인의 위상이 예전과 달라지긴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미국을 포함한 서양 주류사회는 의도적으로 아시아인을 배척해왔고,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아시아인을 위축시킬 수밖에 없었다. 선자(김민하/윤여정)를 비롯한 주요 인물들을 백인으로 설정하려고 했던 이유도 여기서 비롯된다.
단순히 백인으로 각색해야 무조건 돈벌이가 되고 먹힌다는 의미로 접근한 건 아닌 것 같다. 한국의 아픈 근현대사부터 1980년대가 주요 시대적 배경인 '파친코' 속에서 다른 문화권에도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는 요소들이 쉽게 드러났다.
'파친코'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이름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 선자의 남편 백이삭(노상현)과 그의 형 백요셉(한준우)부터 선자의 두 아들 노아와 모자수(소지 아라이), 그리고 선자의 손자이자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진하)까지 성경에 언급된 핵심 인물들의 이름을 차용했다. 그렇다, '파친코'는 기독교 코드를 한국 근현대사에 녹여낸 것이다. 원작자인 이민진 작가 또한 성경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래서인지 '파친코' 속에 기독교적 메타포가 눈에 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시작되면서 점점 조선인들이 먹고살기 힘들었던 1910년대, 선자의 모친 양진(정인지)은 선자가 태어나기 전 무속인을 찾아간다. 당시 태어난 아이들의 사망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 이때 무속인은 "아가 생길 기다. 이 아는 살려 주실 기다. 꼭 살아가 대를 잇고 손을 이을 기다"라고 말을 건네는데, 이 장면은 성경의 누가복음 1장을 떠올리게 한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누가복음 1장 31절~33절-
다시 첫 회 도입부를 장식한 양진과 무속인의 대화 장면으로 돌아가면, 이 장면 구성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수태고지'와 닮아있다. 언뜻 샤머니즘으로 아이가 점지되길 비는 것처럼 보이나, 기독교적인 메타포가 깔려 있는 셈이다. 동시에 양진은 신으로부터 아이를 선물 받은 성모 마리아, 예언된 아이 선자는 신과 사람 사이에 중개자 역할을 하는 '선지자'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이를 기점으로 '파친코'의 메인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선자네 가족 4대는 성경 속 인물들의 이름을 빌려 쓴 것을 넘어 행적도 상당 부분 투영되어 있다. 한 예로 한수(이민호)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 선자는 죽을 뻔한 이삭을 살린 뒤, 그와 남녀관계를 뛰어넘어 종교를 기반 삼은 동반자 관계를 맺으며 함께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다. 이는 막달라 마리아의 행보를 떠올리게 만든다.
동시에 이삭은 소설에서 호세아의 삶을 살겠노라고 이야기하며 자신을 구해준 선자를 정죄하지 않고 사랑으로 감싸준다. 세속적인 면을 버리고 종교적인 용서와 믿음을 실천하는 것까지 호세아가 갔던 길을 그대로 답습한다.
선자와 이삭의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 모자수(모세)와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도 그렇다. 고대 히브리인을 이집트로부터 독립하게 만든 모세처럼 조선인들을 일본에서 탈출시키진 못했으나, 파친코로 부를 축적한 자이니치들을 대변하는 인물 격으로 등장한다. 모세가 당시 고대 히브리인을 대표하는 리더였던 것처럼 말이다.
이스라엘 왕국의 흥망성쇠를 동시에 맛봤던 솔로몬을 닮아, 백솔로몬은 1989년 최절정을 찍었다가 버블경제로 인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일본을 살았던 인물을 대변한다. 또 그가 유학생활을 했던 미국은 그 시기에 중산층이 몰락하던 시기를 맞이했다. 그 격동기를 경험한 세대들이 솔로몬으로 압축된 셈.
드라마로 제작돼 한국에서 관심받기 전, 소설 '파친코'는 미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전미도서상 최종후보작까지 진출했다. 이는 이민진 작가가 한국의 근현대사를 미국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성경과 이민의 역사를 적절하게 녹여내 큰 공감대를 형성한 공이 컸다.
특히 한국인 이름을 가지고 한국에서 나고 자란 선자는 한국과 기독교 가정을 연결 짓는 인물인데, 이는 미국인이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아이덴티티(기독교, 원주민, 뿌리를 중시, 이민자 출신)에 모두 부합하고 있다.
이어 선자와 이삭 부부가 종교 때문에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다는 설정은 17세기 기독교 원리주의 목적 하나만으로 영국을 떠나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바다를 건너 신대륙에 발을 디딘 청교도들, 그들의 후예가 건국한 미국의 건국사와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여기에 선자 가족을 포함해 나라를 잃고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인들에게 핍박받고 착취당하는 수난기는 구약성경 내용과 같은 결을 띤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들이 더럽다고 여긴 자이니치들이 꿋꿋이 버텨내며 뿌리를 내리는 건 고난과 역경을 거쳐 탄생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후예들을 암시한다. 이러니 한국 근현대사를 따르지 않고, 서양인으로 각색하려는 제안들이 들어왔던 것이다.
결국 '파친코'가 한국을 넘어 다른 문화권에서도 통하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건 오직 한국인들과 재일 교포 만이 공유할 수 있는 아픈 역사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도 일어났던 역사와 사건 등이 여러모로 겹쳐 보였던 것이다.
그 지점을 이민진 작가가 영리하게 성경을 차용해 '파친코'의 서사 속에 녹여낸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살았던 당시, 재일교포들이 겪는 차별을 고발하고 싶었고, 이것이 '파친코'의 출발점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 문제를 한국인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리고 이해하고 공유해 같이 분노하기 위해 다른 문화권 코드를 잘 융합시킨 셈이다. '파친코'를 읽는 모든 이들이 한국의 역사와 재일교포에 과몰입시키고 싶었던 그의 목적은 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