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2-07-07 13:42:55
걷잡을 수 없이 흩어진 마블, 사라진 토르에 대한 존중.
영화 <토르: 러브 앤 썬더>
주인공이 바뀐 듯 마블 영화 같지 않은 시작과 내가 바라던 토르의 모습과는 다르게 펼쳐진다. 영웅으로 살수록 공허해지는 마음이 토르에게 있어서 이때까지 보여주었던 토리와는 정반대로 흘러가는 걸까. 넓어질수록 기대감을 높였지만 얕아지는 캐릭터들로 인해 한없이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웃음도 스토리도 놓쳐버린 영화는 토르는 실없는 바보가 되어 알몸으로 영화를 돌아다니는 것 같다. 부끄러움은 관객의 몫이다. 겉모습이 낯설게 바뀌어도 마음만은 변하지 않는 토르는 여전히 많은 이들을 담고 있었다. 이런 마음을 반영한 듯 토르에게 사랑을 주입하지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꽉 낀다. 영화에 계속해서 흐르는 음악이 과하게 제멋대로 흐르는 것처럼 이 영화도 제멋대로 만화에서 튀어나온다. 상실을 바탕으로 한 치유가 정신없고 산만한 형태로 다가와 진지함이 다소 사라진다. 마블이 그릴 앞으로의 MCU가 진심으로 걱정된다.
신의 오만함으로 인해 끝끝내 구원받지 못한 고르의 분노는 다른 신을 향해 솟구친다. 다른 신을 해치는 것에 멈추지 않고 뉴 아스가르드를 습격하여 아이들을 납치한다. 갑자기 나타난 옛 애인과의 재회도 잠시 세상을 구하기 위해 떠나는 토르는 신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광란의 파티’에 참여한다. 하지만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옴니포턴스를 탈출하고 어둠의 도시 섀도 텔름에 가 아이들과 세상을 구하기 위하여 갖은 힘을 쓴다. 그 과정에서 펼쳐지는 광란의 액션은 움직임보다는 번쩍이는 것에 집중하여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을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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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4주 차, 최신 씨네 뉴스
고딕 호러 명작 <노스페라투>1922 리메이크 소식!
<그것> 페니와이즈 역, <존윅 4> 빈센트 드 그라몽 후작 역으로 얼굴을 알린 빌 스카스 가드가
주인공 오를로크 백작 역을 맡았다고 하는데요.
뿐만 아니라 니콜라스 홀트, 릴리 로즈 뎁, 윌렘 대포, 애런 테일러 존슨 등
화려한 라인업과 <더 위치> <라이트 하우스>로 이름을 알린 호러
영화 전문 감독 로버트 애거스가 연출을 맡아 호러 영화 팬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이번주 씨네뉴스 함께해요
<노스페라투> 트레일러 공개
1922년 개봉한 역사상 최초의 장편 흡혈귀 영화 <노스페라투>가 리메이크로 돌아옵니다.
원작을 연출한 독일 표현주의의 거장 F.W 무르나우 감독의 <노스페라투>는 호러 장르를 포함한 좀비물, 크리처물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명작으 로버트 에거스 감독이 연출을 맡았습니다. 감독은 호러 영화 <라이트 하우스>로 높은 호평과 더불어 칸 영화제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을 수상하여 많은 호러 팬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소니 픽쳐스 <스트리트 파이터> 실사판 2026년 개봉 예정
소니 픽쳐스가 세계적 인기를 얻은 대전 격투게임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의 실사 영화화를 발표했습니다. 소니는 캡콤과 공동 개발, 제작 및 배급을 맡을 예정이며 개봉일은 2026년 3월 20일로 확정되었습니다. 현재까지는 <톡 투 미>를 연출한 대니, 마이클 필립푸 쌍둥이 감독이 협상 중에 감독직에서 물러나 새 감독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고 있습니다.
시민단체 ‘영화티켓 담합 인상’으로 공정위 신고
26일 시민단체가 ‘영화티켓 담합 인상’을 이유로 멀티플렉스 3사를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했습니다.
"멀티플렉스 3사가 최근 한두 달 사이에 주말 기준 1만 2000원짜리 티켓을 1만 5000원으로 인상했다"면서 "티켓 가격 폭리가 관객에게 부담을 주고 영화계를 위기로 내몰고 있다”라고 주장했으며, 영화관 측은 사업 특성을 이유로 가격이 비슷해진 것이라며 의혹을 전면 부인했습니다.
박찬욱 <동조자>, 부천 국제판타스틱영화제 전편 특별 상영
제28회 부천 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의 <동조자> 전편이 특별 상영됩니다.
<동조자> 특별 상영은 퓰리처상을 수상한 베트남계 미국 작가 비엣 탄 응우옌이 집필한 동명의 원작 소설로 제3회 부천 디아스포라 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합니다. ‘동조자’는 오는 7월 11일 10시 30분부터 20시 30분까지 총 7부를 4회(1~2부 / 3~4부 / 5~6부 / 7부)로 나눠 부천 CGV 소풍 5관에서 전편 상영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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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은 사건이 아니라 통제에서 오는 것
이게 무슨 허황된 얘기인가 하겠지만 행복은 뭘까. 분명히 돈이 많아보이는 삶은 아닌데 그렇게 불행해 보이진 않는다. 히라야마의 삶이 그렇다. 그의 삶이 대단해보이지도 않는데 대단해보이는 이유가 뭘까. 행복에 돈은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 건지 궁금해졌다. 오히려 행복에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통제력이 아닐까.
1. 극단의 미니멀리즘 그리고 루틴
그의 삶을 몇 가지 단어로 규정지어본다면 '미니멀리즘'과 '루틴'인 것 같다. 그의 삶은 쓸데없는 물건이 없고 항상 자신의 루틴에 맞는 물건들만 소유한다. 그럼에도 그의 삶은 언제나 온전하다. 가끔 타인들이 그의 삶에 들어와 그의 루틴을 망가뜨릴 때도 있지만 다음날이 되면 다시 그는 자신의 루틴으로 돌아온다. 모든 순간이 미니멀하고 극단의 효율이 지배하는만큼 쓸데없는 시간은 쓰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현실에 순응한 삶이지만 하루 자체는 옹골차다.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삶에서의 특별한 일이 있어야 행복하다기 보다는 나의 삶을 긍정하는 마음이야말로 그게 곧 행복일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그의 삶은 극단의 공무원적 삶이다. 내일 무엇인가 특별한 일은 없을거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가 오래전 헤어진 가족을 만난 후 오열하는 것을 보면 그도 언젠가 과거에 큰 감정적 부침이 있었겠거니 생각이 든다. 큰 실패를 겪고 힘들어하다 뭔가 실패한 인생이어도 긍정할만한 거리를 찾아낸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뭔가 큰 꿈을 꾸지 않으니 더 성공할 기회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더 무너지지 않는 방법을 택한 것일지도 모르다. 이런 그의 모습을 현실에 굴복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의 삶을 재단하는 것은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저 그가 보여주는 긍정적인 모습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의 일에 대한 열정, 소소한 취미, 매일 먹는 음식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자세 이거 말고 삶에 더 필요할 게 있겠는가. 있어봐야 번뇌만 쌓일 뿐이겠지.
2. 일상의 균열
항상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던 어느 날, 조카가 찾아온다거나 돈을 빌린 후배가 관둔다거나 단골집의 비밀을 알게 되는 등 새로운 사건이 그의 인생에 끼어든다. 그렇게 그의 일상의 루틴이 깨지면서 그는 약간의 혼란을 느끼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가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올 거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의 삶은 더 윤택해질지도 모르겠다. 그의 삶은 안정적이긴 했지만 빈틈이 없어 생기는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가끔 이런 균열도 있어야 비로소 삶다운 삶을 사는 거겠지 싶다. 하지만 지루해보였던 루틴이 있어야 그의 삶이 중심을 잃지 않고 온전히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삶이란 개인이 정한 취향, 규칙으로 점철되면서도 가끔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는 일상의 균열 때문에 비로소 삶다운 삶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라도 부족해서는 안된다. 그런 점에서 그의 삶은 다분히 인간다운 삶일 것이다. 우연만 가득한 삶은 줏대가 없는 것이고 루틴만 가득한 삶은 생기가 없는 것이니 우연은 그의 인생에 생기가 되어줄 것이다.
3. 마지막 장면의 의미
나는 그의 울듯말듯하면서도 웃는 그 장면에서 과거에 대한 회한,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가 복합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나이가 들어가는 자신에 대한 서글픔도 함께 느꼈달까. '인생이란 이런거 아니겠냐, 좋았다가도 슬퍼지는 게 인생이지, 그래서 삶이 살아볼만한 거겠지' 싶다. 그를 보면 난 맘붙일 직장의 중요성이 중요함을 느낀다. 직장은 자아를 실현하는 곳은 아니고 내 성향에 맞는 곳이어야 오래 정붙일 수있겠구나 생각한다. 그나마 질리지 않아서 오래 붙잡을 수 있는 업무를 찾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처럼 일상의 루틴을 좀 정하고 싶어졌다. 오늘 하루 쓸모없게 보냈다는 생각은 좀 덜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오늘 하루 내 루틴을 완료했으니 나는 아직 쓸모있다는 인증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내 삶인데 누구보다도 나만의 인정이 가장 중요한 것이니까. 세상이 몰라줘도 내가 날 알아줘야 세상을 긍정할 수 있을 테니까. 그는 그런 걸 실행하는 사람이어서 화장실을 청소해도 행복한 것이다. 그게 참 부러웠다.
그가 여행을 나중에 가자고 하는 걸 보고 큰 꿈을 꾸지 않는구나 싶어서 야망이 없네 싶다가도 인생이 로또가 아님을 깨닫고 나의 길을 묵묵히 가는 삶도 나름 멋있어보이기도 했다. 지조가 있는 삶이 멋있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알고 삶을 살아내는 것 뿐만이 아니라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지는 것조차 본인의 몫인 것을 수용하는 태도까지 보이기 때문이다. 우연한 사건에 기대지 않고 온전히 내가 내 인생을 통제할 수 있다는 마음, 히라야마의 그런 마인드는 확실히 눈여겨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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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경 운동을 하면 사랑도 할 수 있다고? <디피컬트>
힘들다. 매년 나아져야 하는데, 매년 더 나빠지고 있는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경제 성장은커녕 유지만 해도 감지덕지고, 오르지 말라고 기도하는 물가는 청개구리처럼 점프를 해댄다. 이런 상황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저 멀리 프랑스도 매년 위기를 맞이하고 더 힘든 상황을 반복한다. 이를 배경으로 한 <다피컬트>는 채워도 채울 수 없는 소비사회 속 대출과 빚의 늪에 빠진 이들을 전면에 내세운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해가다가 삐끗한 이들에게 남은 거라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공허함과 외로움. 영화는 이들에게 위안을 건넨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방식은 환경보호 운동을 통해서 진행된다.
블랙프라이데이 당일, 오픈런을 위해 백화점을 찾은 알베르(피오 마르마이)는 입구 앞에서 환경 보호 운동가인 캑터스(노에미 메를랑)와 대치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람들은 저마다 갖고 싶은 물건을 향해 몸을 던지고, 알베르 또한 그 무리에 편승해, 자신이 원하는 TV를 얻는 데 성공한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 TV를 중고 시장에 되팔아서 차액을 남기기 위함이다. 하지만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 법. 어렵게 구한 물건 구매자 집에 도착한 알베르는 쇼핑 중독에 의한 파산으로 자살 시도를 한 브루노(조나단 코헨)를 발견해 가까스로 살린다. 이날 이후, 이것도 인연인지 빚더미에 앉아 파산 직전인 이들은 우연히 공짜 맥주의 유혹에 이끌려 환경 단체 모임에 참석한다. 그곳에서 알베르는 캑터스의 연설을 듣게 되고, 엉겁결에 환경 단체 일을 돕는다.
<디피컬트>는 과잉 소비로 인해 인간도 환경도 위협받는 현실을 일깨우는 영화다. 일종의 계몽영화처럼 무겁게만 느껴질 수 있자만, <언터처블: 1%의 우정> <세라비, 이것이 인생!> 등 연출을 맡은 올리비에르 나카체, 에릭 토레다노 감독의 전작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코믹함과 긍정성이 작품 전반에 깔려 있다.
<언터처블: 1%의 우정>의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만 봐도 한 명은 전신 불구고, 한 명은 무일푼 백수다. 희망보단 절망에 더 가까운 삶을 보내는 이들의 만남과 우정은 그 자체로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자학 개그처럼 느껴지는 영화의 코미디 요소는 마치 ‘진정으로 웃으려면 고통을 참아야 하고, 나아가 고통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찰리 채플린의 명언을 영상화한 듯한 느낌이 든다.
그 연장선상으로 <디피컬트> 또한 힘든 상황 속 이들의 웃픈 코미디를 계속해서 보여준다. 환경 보호보다는 캑터스에 반해 환경 운동에 앞장서는 알베르와 못마땅한 표정으로 어쩔 수 없이 그와 함께하는 브루노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환경 운동 최전선에 서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 상반된 모습은 그 자체로 웃음을 유발한다. (물론, 환경 보호가 아닌 다른 목적이 껴 있지만) 특히 바보 듀오 알베르와 브루노의 코믹 티키타카는 긍정적 나비효과처럼 러닝타임 내내 계속 쌓여가며 극의 재미를 부여한다.영화는 이런 기조 아래 과소비 행태와 환경 보호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극 중 주요 인물들이 만나게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과소비 때문이다. 알베르와 브루노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저마다 행복을 위해, 공허함을 위해 더 많은 소비를 하고, 시장경제는 이를 더 부추긴다. 무분별한 소비로 인해 환경은 파괴되고, 기후변화까지 이어져 결국 인간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메시지는 그 자체로 생각할 거리를 전한다.
특히 영화는 캑터스를 통해 변하는 알베르의 모습, 그리고 서로 다른 지향점을 가진 이들이 사랑이란 감정을 통해 함께 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연대의 중요성을 전한다. 감독은 입으로만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만 하는 국가와 사회에 기대기보다 힘든 상황 속에서 색안경을 벗고 따뜻한 마음으로 손을 잡고, 포옹하고, 춤을 출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그 힘으로 버티며 살아갈 수 있다고 거듭 강조한다. 후반부 파리 도심에서 캑터스와 알베르가 함께 춤을 추는 장면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하지만 비극 속 피어나는 코믹함과 과소비 행태가 부른 사회 문제 심각성 사이의 균형감은 아쉽다. 특유의 긍정성이 사회 문제의 심각성까지 먹어버린 듯한 느낌이랄까. 해결되지 않은 사안이 많음에도 사랑과 연대의 힘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듯한 급작스러운 마무리로, 영화가 제기한 소비, 환경 문제가 흐릿해진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계속 지켜보게 하는 건 국가가 다름에도 우리의 모습이 엿보이는 배우들의 연기 덕분이다. 피오 마르마이와 조나단 코헨의 연기는 한 번쯤 돈 때문에 힘들었던 기억을 새록새록 떠올리게 만들고, 노에미 메를랑의 연기는 환경 보호에 노력하지만, 그만큼 실천하기가 어렵다는 걸 깨닫게 한다. 여기에 과소비 방지를 목적으로 활동하는 자원활동가 앙리 역에 마티유 아말릭은 과소비 방지 원칙을 소개하지만, 그 또한 도박의 유혹에 시달리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공감대를 형성한다.
아마 영화를 본 후에도 우리의 삶은 변함없이 힘들 다. 하지만 그 힘듦에 주저않기보다는 뭔가 행동으로 옮기려는 마음은 생길 터. 필요한 물품만 사고, 쓰지 않는 물건은 나눠주고, 이를 통해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과 대화하며, 친분을 쌓으면 더 나은 사회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보자. 그게 단 1%라도 말이다.
사진 제공= (주)블루라벨픽쳐스 / TCO(주)더콘텐츠온
평점: 3.0/ 5.0
한줄평: 경제도, 환경도, 사랑도 힘든 이들과 나누는 위안의 연대
* <씨네랩〉 초청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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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댕겨진 불씨는 반드시 타오른다
DIRECTOR. 모함마드 라술로프
CAST. 마흐사 로스타미, 세타레 말레키, 소헤일라 고레스타니, 미삭 자레
SYNOPSIS. 꿈에 그리던 수사판사 승진을 하게 된 ‘이만’, 때마침 테헤란에서는 대규모 히잡 반대 시위가 일어나고 ‘이만’은 가족의 안전을 위해 총을 지급받는다. 그러나 딸들과 논쟁을 벌인 어느 날, 총이 집에서 감쪽같이 사라지고 가족의 믿음에는 균열이 생긴다. 지금 반드시 목격해야 할, 올해 가장 용감한 걸작.
POINT.
✔️ 2022년 히잡 시위를 둘러싸고, 이란의 국가폭력을 비판하는 영화입니다. 감독과 두 딸 역할의 배우는 이 영화 이후로 망명했고, 함께 나오지 못한 엄마/아빠 역할의 두 배우 사진을 높이 올려든 채 레드카펫에 섰습니다. 어머니 역할을 맡은 배우 소헤일라 고레스타니는 2022년 당시 시위에 연대하여 수감되었고, 현재 자택 연금 상태라고 합니다. (해당 내용을 비롯, 영화 외부적 이야기는 배급사 그린나래미디어 SNS에서 참고했습니다.)
✔️ 의미 있는 영화인 동시에, 재미있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인데 전혀 길다고 느껴지지 않았어요. 집안에서 없어진 총을 둘러싼 가족 간의 이야기가 아주 잘 짜여 있는 구조라서, 다음을 궁금해하면서 끝까지 따라가게 만드는 흡입력 있는 영화입니다.
✔️ 영화는 6월 3일 개봉합니다.
체호프의 총이라는 개념이 있다. 1장에서 총이 등장한다면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그 총이 반드시 쏘아져야 하며, 쏘지 않을 총이라면 이야기에 등장시켜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를 역이용해 신경 쓰이는 위치에 놓여 있던 아이템이 별 의미 없는 맥거핀으로 판명되는 경우도 있지만, 집안에서 총이 사라진 이 영화에서 총은 맥거핀일 리 없어 보였다. 총을 쏘지 않는다 해도 최소한 관객은 총의 행방에 대해 좀 더 알게 되겠지.
이 영화에서 총이 맥거핀일 리 없다는 생각을 한 이유는 하나 더 있다. 맥거핀으로 장난을 치기엔 이 영화가 너무 절박한 메시지를 직설적으로 담고 있었다. 모함마드 라술로프 감독은 체제 비판 영화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감시와 탄압을 받는 상황에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 감옥이냐 망명이냐, 다소 극단적인 두 가지 선택지만 남아있던 상황에서 감독은 망명을 택한다. 칸영화제는 <신성한 나무의 씨앗>에 '심사위원 특별상'이라는, 기존에 없던 상을 만들어 수여했다. 한 해가 지난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은 다른 이란 감독인 자파르 파나히 감독에게 돌아갔다. 심사평에는 "저항과 생존"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어, <신성한 나무의 씨앗>도 함께 떠오른다. 무함마드 라술로프 감독은 "수년간 이어진 노력, 인내, 그리고 저항 끝에 이슬람 공화국 체제 아래에서 썩고 텅 빈 검열의 체계는 마침내 밀려나기 시작"했다며 '검열을 거부하는 영화'들이 "보다 단단한 기반 위에 올라섰"다는 내용이 담긴 축사를 보냈다. 히잡에 대한 검열은 2022년 이전의 이란으로 돌아갈 수 없고, 영화에 대한 검열 또한 2025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1. 이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이 영화의 배경이 된 사건은 2022년 마흐사 아미니라는 이름의 여대생이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고 '도덕 경찰'에게 끌려가 구금 끝에 의문사한 사건, 그리고 거기서 촉발된 대규모 히잡 시위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성, 삶, 자유"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수만 명이 구금되었고 사망자도 (사망 사유와 숫자는 제각각 다르게 밝히고 있지만) 수백 명에 달한다. 의문사에서 시작된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공개 처형까지 불사하면서, 이란은 '신정일치' 즉 종교와 정치를 접붙인 시스템을 공고히 하려 애썼다.
이 '신정일치'의 나라는 1979년 혁명으로 들어섰다. 이란의 마지막 왕조였던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시위였는데, 당시 왕조의 급격한 서구화 정책과 경제적 어려움이 맞물리면서 군주제에 누적된 불만이 폭발한 사건이었다. 비밀경찰이 돌아다니고 반대파가 '정치범'으로 탄압받는 사회를 끝내고자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르짖은 시민들이 예상하지 못한 것은, 당시 혼란과 의견 차이의 우여곡절 끝에 설립된 국가가 이슬람 교리와 정치를 내세우면서 도덕 경찰이 돌아다니고 정치적 탄압이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그 과정에서 여성 인권은 그야말로 추락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남성과 동등한 투표권을 누렸고 이란혁명에서도 굵직한 역할을 여성들이 해냈는데, 혁명 끝에 여성들에게 남은 것은 히잡을 뒤집어쓰고 다니라는 강요, 히잡을 쓰지 않고 운전하다가 벌금을 물거나 차량을 압수당할 수도 있다는 현실이다. 시위 이후 수많은 여성들이 히잡을 벗어던지는 시민 불복종을 이어가고 있지만, 이란 정부는 여전히 강경하다. 히잡은 여전히 법령으로 강제되고 있고, 공개 처형과 구금은 셀 수 없으며, 심지어 카타르 월드컵에서 국가를 부르지 않던 남자 축구 선수들에게까지, 선발 제외 소문부터 사형 선고까지 다양한 탄압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짓밟아도, 외치고 버티고 항의하는 목소리는 죽지 않는다. 끝내 살아남아 우리에게 도달한다. 검열과 탄압이 아무리 이어져도 이 목소리는 제 갈 길을 간다. "1명을 죽이면 1,000명이 일어난다!" 하고 분연히 일어났던 이란의 여자들처럼. 검열 시스템은 "공포와 위협으로 마치 모든 걸 감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종의 섬광탄 같은 효과"일 뿐 "실질적으로 모든 걸 볼 수는 없다"는 무함마드 모술라프 감독의 말처럼.
#2. 우회하여도 반드시 길은 이어진다
이 영화에서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세대와 성별에 따라 다른 미디어를 활용하고 있는 점이다. 불안한 시위의 소식 앞에서 엄마는 텔레비전을 켜 보지만, 텔레비전은 엄마에게 아주 간단하고 정제된 뉴스 이상의 정보를 주지 못한다. 마치 세상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한 드라마까지 보고 나면 텔레비전을 끄는 것밖에 도리가 없다. 체제의 수호자인 동시에 체제의 피해자인 기성세대 여성은 가장 혼란스러운 자리에 놓여 있다.
딸들은 SNS로 다양한 소식을 접한다. 온라인에 게재된 영상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자매는 방 한구석에 앉아서도 거리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안다. 마치 히잡이나 부르카처럼, 두껍고 검은 커튼으로 자신을 가린 채 창 밖을 내다보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자체 검열'의 집안에서도, 자매는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인다. 그뿐 아니라 통제 안에서 우회하는 법을 이미 알고 있다. 빨간 하트로 이름을 저장해 두면 남자친구인 걸 들킬 테니까 하얀 하트를 쓴다든지. 이들에게 미디어는 양방향이고, '모바일'하다.
반면 아버지는 그 어떤 미디어도 접하고 있지 않다. 그에게 그나마 미디어라고 부를 법한 것은 직장 동료와의 대화가 전부이며, 그 또한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대화는 아니다. 그의 공간은 눈도 귀도 막혀 있다. 복도 가득 '굳은 믿음'을 보여주는 손동작을 한 이들은 사람이 아니라 등신대이며, 눈을 가리고 손을 묶인 채 고요하게 끌려 다니는 이들의 존재만이 이 공간에서 유일하게 생명을 갖고 움직이는 이들이다. 죽은 공간에서 이들은 자신의 폭력이 자승자박의 미련 일로를 걷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심지어 총이 사라진 후로 "내 집인데도 안심이 안된다"며 불안과 혼란을 체험하고도,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와중에 자신의 혐오와 억측만큼은 확신을 갖고 밀어붙인다.
이 미련의 핵심에는 언어의 혼탁이 있다. "여성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 히잡을 써야 한다고 하는 이들의 언어 논리 그대로다. "가족의 믿음을 회복"하고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가 가족에게 가하는 행동은 이 나라의 여성들이 겪는 일상의 폭력을 여실히 느끼게 한다. 보호라는 귀한 단어가, 명예라는 아름다운 단어가, 이토록 해악밖에 남지 않은 방향으로 혼탁해지고 무너졌다. 이렇게 깨지고 더럽혀진 언어로 짜인 지배구조는 시스템 안의 모든 사람을 옭아매는 폭력밖에 되지 못한다.
#3. 반쪽은 피와 어둠 아래 있어도, 나머지 반쪽은 빛 아래 있기에
이 영화에서 인상 깊은 것은 단연 여성들의 얼굴이다. 과연 셋 중에 누가 총을 가져갔을까 궁금해지는, 어머니와 두 딸뿐 아니라 잠깐 등장하는 큰딸의 친구까지 이들 모두 폭력적인 구조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솔직히 영화 보기 전부터) 관객이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영화에서 이들의 얼굴은 이따금 절반씩 나뉘어 다른 빛 아래 놓인다. 친구의 다친 얼굴은 처참한 피범벅이 되어 있는데, 코를 기점으로 반대쪽에서 보면 그 상처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 말끔하다. 그 얼굴을 영화는 햇빛 아래 공들여 오래 보여준다. 마치 보라는 듯이. 현실의 참혹한 이 상처를, 보라는 듯이. 이 느낌은 이후 캠코더 앞에 선 큰딸과 엄마의 얼굴에서 재현된다. 캠코더 화면 안에서 이들의 얼굴 절반은 어둠 속에 가려져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머지 반쪽 얼굴은 빛을 받아 새하얗게 드러난다.
이는 살뜰한 시중 손길을 받던 아버지의 얼굴과 매우 대조적인데, 그의 얼굴은 아내의 세심한 손길을 받지만, 물로 씻고 머리를 빗어 넘기고 잔털 관리까지 꼼꼼하게 이루어지지만, 역실 불빛 아래 클로즈업된 그의 얼굴은 분명 밝은 빛 아래 있음에도 살아있는 신체보다는, 마치 명화 속에 이미 베어버린 목처럼 보인다. 이는 어둠과 피에 절반이 묻히고, 눈물 혹은 불안을 감추지 못한 채로도 생명력이 하얗게 빛나던 여자들의 얼굴과 대조적이다.
어쩌면 이 얼굴이 이란이라는 나라의, 그리고 기본권 수준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모든 국가 폭력과 싸우는 나라들의 얼굴이 아닐까 생각한다. 베어버린 목처럼 보이는 얼굴들이 지배구조를 짠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어둠과 피에 짓밟혀도 빛 아래 생명력이 형형한 얼굴들이 일어나고 있다. 권위적인 반지를 낀 손은 그 빛나는 얼굴들을 결코 파괴할 수 없다.
체호프의 총이 반드시 쏘아져야 하듯이, 불씨가 댕겨진 혁명은 반드시 타올라야 한다. 이란의 여자들도 영화들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 주요한 분기점을 함께 숨 쉬고 있는 이 순간, 이 '신성한 나무의 씨앗'이 어떻게 피어나 무엇을 뒤덮고 자라나는지 지켜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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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빛으로 전하는 감사의 순환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지난 97회 아카데미 시상식을 비롯해 각종 영화제에서 장편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한 영화 <플로우>가 지난 19일 수요일 관객들을 찾아오게 되었다. <플로우>는 고양이X골든리트리버X카피바라X여우원숭이X뱀잡이수리라는 독특한 라인업을 캐치프레즈 삼아 홍보해온만큼 개봉 전부터 그 내용에 있어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바 역시 있다. 그렇게 영화관에서 만난 어느 고양이의 특별한 여정은 기대 이상으로 더 깊은 메세지를 내포하고 있었다.
인간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더 이상 그들이 살아있지는 않은 어느 자연. 우리들의 주인공 ‘고양이’는 영역동물답게 자신의 영역에서 때로는 물고기를 잡고, 때로는 개들에게 쫓기며 일상을 살아간다. 드문드문 보여지는 고양이 관련 상징물들은 이곳에 체류했을지 모를 인간에게 고양이가 존재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듯 보여지나 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과 공생하는 동물들 만이 삶을 이어 나가고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건은 본격적으로 해수면이 차오르며 벌어진다. 이미 오래전 떠난 이들을 기다리는 것인지 아님 그저 자신의 삶을살아가고 있었는지 모를 고양이의 모험은 물에 잠길 위험을 몇 번이나 거듭한 끝에 저 멀리서 떠내려온 배 한 척에서부터 비롯된다.
하지만 이미 배에는 낯선 존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관객은 하고 많은 동물 중 왜 고양이가 그 주인공 되었는지 짐작이 가능해진다. 경계심과 겁이 많고 영역에서 생활하는 동물, 물을 꺼리고 무엇이든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동물이기에 대사를 비롯한 장치가 굳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고양이라는 주인공에게 모험은 그 자체로 시련이 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물과 친근하지 않은 고양이의 특성을 십분보이며 그 모험이 쉽지 않을 것을 예고하기도 한다. 무던하지만 의젓하게 키를 잡는 카피바라, 물건을 수집하는 여우원숭이 그리고 다시합류하게 된 골든 리트리버까지 이 만남은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찾아온 홍수라는 재해에 운명적으로 찾아오지만 뱀잡이수리와의 만남 이후부터 이는 필연이 되기 시작한다.
누군가에게 구해진다는 것은 다른 말로 삶을 계속해서 이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동물의 삶은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단순하다. 생존아니면 놀이이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몸부림치면서 동시에 자신들이 처하게 된 상황에 비관하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거울에, 낮잠에, 공에, 반짝거리는 것에 눈을 빛내며 순간을 즐기기도 한다. 그런 고양이에게 찾아온 첫번째 구원의 순간은 리트리버로부터이나 아직은 이를 인식하지도, 특유의 관계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하지만 두번째 구원의 순간부터 고양이는 이를 인식하기시작한다. 거대한 몸집으로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고래는 물 속으로 가라앉던 고양이를 수면 위로 꺼내줌으로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게해준다. 단순 우연이었을지는 모르나 고양이는 그러한 도움을 점차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세번째, 뱀잡이수리가 고양이를 구하기 위해무리의 우두머리에게 대든 결과로 날개가 뜯겨 나가고 무리로부터 방출 당한 것은 자신을 구해준 행위 그 이상으로 여겨진다. 뱀잡이수리는 더 이상 날지 못해 그들과 함께 배에 오르지만 고양이는 그렇게 한 가지 경험을 체화하게 된다. 누군가에 의해 삶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말이다. 이는 후반부 고양이의 변화, 즉 성장과도 이어진다. 속절없이 물 밑으로 가라앉기만 하던 고양이는 이젠 처음 보는 물고기로 가득한 물 속에 뛰어들어 사냥감을 낚기도, 이를 뱀잡이수리와 나누기도 한다. 더 나아가 사이가 딱히 좋지만은 않았던 고향의 개들을 구해주자 뱀잡이수리를 설득하기도 하고 위기의 순간에서 카피바라를 구해주기도 끝에는 자신들과 달리 지상에서는 살 수 없는 고래를 다시 물로 돌려 줄 순 없지만 그를 기억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는 고양이에게만 찾아온 것이 아니다. 특유의 남다른 친화성을 가진 카피바라를 제외하고 모든 이들은 동료 내지는 생존의연대를 깨닫는다. 여우 원숭이들 사이에서는 보물과도 같이 취급되는 거울을 포기하고 고양이를 따라 나서기도 하고 골든 리트리버는 동족들보다 여정을 함께 했던 이들 곁에 남기도 한다. 집단을 이루게 되며 이들은 도움에 대한 개념을 깨닫는다. 이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인간이 애초에 공동체를 형성하고 서로 돕게 되며 점차 개념들을 깨우쳐 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그런 인간보다 더욱이 특별한 이유는 뱀잡이수리 무리와 마찬가지로 같은 종족만으로 꾸려진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들을하고 우연, 아니 이제는 필연에 의해 가족이 되어감에서부터 비롯한다.
뱀잡이수리와 고양이의 이별 장면은 해당 영화에 있어 남다른 지점이 되어준다. 인연을 맺은 상대와의 이별, 그리고 여전히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나와 소임을 다했다 여기는 이와의 차이는 그렇게 빚어진다. 뱀잡이수리와 고양이는 무언가를 공유했지만 가야 할 길은 결국달랐다. 마치 일종의 목적지로 보였던 높은 봉우리는 사실 목적지가 아니라 그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한 이별의 무대였다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영원한 목적지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굴곡만이 존재할 뿐, 그렇게 뱀잡이수리는 만남과 이별 통해 고양이에게 가장 값진 선물을 준 뒤 멋지게 날아오른다.
밀물과 썰물이 광범위하게 반복되는 이 행성 안에서 서로가 도우며 그 삶을 이어 나갔기에 특별했던 것처럼 영화도 아주 다정한 방식으로 고래의 끝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쿠키영상에서 등장한 바와 같이 분명 지금도 어떤 고양이는 배 위에서 용감히 모험을 이어 나가고있을 것이고 또 어느 고래는 마음껏 바다를 누비며 거대한 자연의 순환 속에서 살아 나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 자연 앞에 순응하고 살아간다는 것앞에서 아마 인간이 이룩한 문명은 아주 작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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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인간성의 대척점엔 무엇이 있나
DIRECTOR. 드니 빌뇌브
CAST. 루브나 아자발, 멜리사 디소르미스 풀린, 막심 고데트, 레미 지라르 외
SYNOPSIS. 쌍둥이 남매 잔느와 시몽은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을 듣고 충격에 빠진다. 바로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와 존재조차 몰랐던 형제를 찾아 어머니가 쓴 편지를 전하라는 것. 남매는 아버지와 형제를 찾기 위해 어머니의 과거를 쫓기 시작하고,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되는데…
POINT.
✔️드니 빌뇌브의 명작으로 이미 너무 유명한 작품, 6월 25일에 4K 리마스터링 재개봉했습니다.
✔️한국 제목은 <그을린 사랑>이고 원제는 Incendies, 그을렸다는 뜻과 함께 큰 화재를 뜻하기도 하는 단어입니다. 두 제목이 다 너무 적절한 영화입니다.
✔️ 자 그럼 이제부터 아무것도 찾아보지 말고 그냥 보기. 꼭. 꼭.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영화를 보신 후에 읽어주세요.
이 영화는 제목과, 붉은 메인 포스터, 그리고 아무것도 찾아보지 말고 그냥 보라는 사람들의 추천사가 모두 강렬하다. 기대감 속에서 영화가 시작되면, 라디오헤드의 노래 You and whose army? 가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아름다운 풍경과 느른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은 곧 날카로운 눈빛에 찢긴다. 아마도 한때 교실로 쓰였을 듯한 곳에서, 머리를 밀리며 관객과 눈을 맞추는 아이의 눈빛이 그렇게 알처럼 영화의 도입부를 깨뜨린다. 이 장면은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전혀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마치 오프닝 시퀀스가 없었던 것처럼 이야기는 흘러간다. 난민 출신인 연인을 형제들의 손에 잃고, '명예 살인'을 겨우 피한 여인 나왈의 여정. 그리고 아끼던 비서가 사망하자 그 쌍둥이 자녀들에게 공증인이 읽어준 유서. 제각각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는 조각들은 이내 이야기 안에서 조금씩 맞추어진다. 차곡차곡 맞춰지던 퍼즐의 마지막 조각에 이르면, 참담한 충격과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다. 사실 이 거부감이 충격을 더 강화하는 것 같기도 하다.
기이하게 뒤틀린, 불꽃으로 쓴 시간
나왈의 전 생애는 마치 불꽃으로 쓴 시간처럼 느껴진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주체적으로 걷고 있다. 가족이 반대하는 무슬림 난민의 아이를 낳았고, 모두가 피난을 위해 빠져나가는 남부의 도시로 저벅저벅 걸어갔으며, 비명 소리가 퍼지는 곳에서 노래를 불렀다. 언제나 사람들의 흐름과 정반대로, 눈을 부릅뜨고 천천히 걷는 듯 살았다.
그 시간의 동력은 오직 사랑이다. 가까스로 살아남을 때에도, 잔혹하게 짓밟힐 때에도, 세상을 등지고 떠나겠다는 의지를 결연히 보인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의 동력에는 사랑이 있다. 비록 그 와중에 알아버린 진실이 관객 이전에 그를 충격에 빠뜨려도.
모든 이야기의 시작과 끝에 놓인 두 통의 편지는, 신기할 정도로 둘 다 진실임이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의 결말을 보고 엔딩 크레디트를 보는 동안, 절대 내가 연민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유형의 인간에게까지 연민이 어리고 만다. 그리고 깨닫는 것이다. 전쟁이 만드는 비인간성이 얼마나 기이하게 뒤틀린 모양새인지. 이 영화 속에 나오는 어떤 인물들의 어떤 모습들은, 비인간성의 인간화 같은 모습을 하고 있기에.
전쟁의 비극, 분쟁의 잔혹함. 이 말은 언제나 아주 뼈아프게 피부로 느껴지거나 아니면 막연하게 그려지거나 둘 중 하나로만 이해될 수 있다. 전쟁을 겪어보지도 않았고, 전쟁 걱정을 해보지도 않은 이들에게는 그저 교과서 속 단정한 단어들처럼 고요하다. 반면 전쟁을 아는 자들에게는 언어를 넘어 통각으로 느껴지는 말이다.
그리고 이 영화, <그을린 사랑>은 그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자, 전쟁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처절하게 비극적인지를 문자로만 어렴풋이 감지한 자들에게, 피비린내와 녹슨 쇠 냄새와 매캐한 탄내를 맡게 하고, 그 뒤에 더 끔찍하고 참담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영화가 아니라면 알 수 없었을 감정을.
궤적을 밟는, 혼자가 아닌 시간
이 영화의 주인공이 나왈이라고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유서에 남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엄마의 궤적을 그대로 밟는 딸의 여정이 그 뒤를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 나왈이 다녔던 학교를 딸 잔느도 찾아가고, 사진이 주는 힌트를 찾아 엄마가 있던 곳을 하나씩 따라 밟는다.
이 여정이 가리키는 곳은 잔느 입장에서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을 진실이다. 그러나 나왈은 자식들을 사랑하면서도 그 여정을 밟게 한다. 침묵을 깨고, 진실을 밝히도록. 그건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눈을 부릅뜨고 천천히 걷던 나왈의 삶의 태도다.
충격과 슬픔에 여러 차례 덮이고, 좌절과 혼란을 경험하는 여정이지만... 잔느는 그 길에서 혼자가 아니다. 그가 밟은 길은 모두 이미 나왈이 밟았던 길이며, 함께 태어나고 자란 쌍둥이 시몽도 있다. 여정을 거치며 그는 "함께 있다는 건 참 멋진 일"이라는 걸 알게 된다. 마음에서 사라질 수 없을 나왈의 존재감과 함께, 이후로 잔느는 자기만의 궤적을 만들어 갈 수 있겠지.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는 시간
이 영화에서 나왈의 여정을 찾아다니는 쌍둥이가 차를 얻어 마시는 장면이 여러 차례 나온다. 시골 지역의 여인들에게서 차를 얻어 마시며 어설픈 현지어로 나왈의 행방을 묻는 잔느, 대놓고 '차를 좋아하는지' 질문을 받은 후 티 타임을 통해 정보를 얻는 시몽 둘 다 그렇다.
영화 속에서 딱히 따뜻하게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아니 어쩌면 그다지 공들여 따뜻하게 그리지 않은 평이한 일상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인상 깊었다. 이 영화에서 전몰되어 버린 인간성의 빈자리, 그러니까 비인간성의 대척점에 무엇이 있나 묻는다면 나는 그렇게 함께 앉아 차를 마시는 사람들을 들어 대답하고 싶다.
한참 오랜만에 만났고 또 헤어질 사이여도 일단 열 일 제치고 앉아 차를 마시며 무슨 도움이 필요한지 묻는 것. 낯설고 우리말도 못하는 이더라도 일단 앉혀 차를 한 잔 내밀고 대화를 시작하는 것. 환대란 어쩌면 유난스럽게 다정하고 녹아내릴 듯 달콤한 태도라기보다는, 덤덤하게 차를 내밀며 함께 앉아있고 그 시간을 별스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더 느껴지는 것 같다.
전쟁이 만든 비인간적인 모양새가 얼마나 잔혹하고 기이하게 뒤틀려 있는지를 보게 만드는 이 영화 끝에, 역시나 전쟁은 없어야 할 것임을 역설하게 만드는 이 영화 끝에, 찻잔을 나누는 평화로운 일상이 깨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남는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 서서 참담한 잿빛 마음으로 고개를 떨구지 않아도 되는 일상. 비명을 노래로 받아치지 않아도 되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 나란히 찻잔을 들고 싶다. 비인간성의 대척점에 가장 푹신한 방석을 깔아 두고, 누군가와 나란히 앉아 있고 싶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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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1] 사랑과 계급에 관한 이탈리아 영화 마틴 에덴 을 관람하고 왔어요!
이탈리아 영화 마틴 에덴 이 궁금하신 분들는 영상 참고 부탁드려요.
간단한 리뷰도 넣어두었습니다.
좋아요와 구독 부탁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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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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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 요원들 손에 떨어진 일급비밀. 4월 1일 Apple TV+에서 '슬로 호시스' - Slow Horses를 감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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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텐도와 일루미네이션이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의 세계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애니메이션 영화를 선보입니다. 아론 호바스와 마이클 제레닉(틴 타이탄스 고! 및 동명 영화의 공동 작업자)이 감독을 맡고 매튜 포겔(레고 무비2, 미니언즈2)이 각본을 맡았습니다. 출연진은 마리오 역에 크리스 프랫, 피치공주 역에 안야 테일러 조이, 루이지 역에 찰리 데이, 쿠파 역에 잭 블랙, 키노피오 역에 키건 마이클 키, 동키콩 역에 세스 로건, 크랭키콩 역에 프레드 아미센, 마귀 역에 케빈 마이클 리차드슨, 블랭키 역에 세바스찬 매니스캘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