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2-07-21 22:53:49
사라져도 기억될 영화와 마음, 좋아하는 마음으로도 충분하니까.
영화 <썸머필름을 타고!> 리뷰
영화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주인공은 영화 이야기가 나오면 세상을 다 가진 얼굴을 하며 열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자신이 속해있는 영화 동아리는 카린을 중심으로 로맨스 영화만 촬영한다. 사무라이 이야기를 담고 싶었던 맨발은 불만을 품지만 <무사의 청춘>을 만들겠다는 마음만큼은 절대 져버리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담고 싶은 영화의 주인공과 닮은 린타로를 만나게 되면서 꿈을 현실로 만들 기회가 눈앞에 다가온다. 과거를 아는 것보다 미래를 아는 게 더 희망적일까. 불확실함에서 확실함을 찾아가야 하는 현재는 용기를 내기가 어렵고 또 겁난다. 자신의 현재이자 미래를 바꿀 영화를 찍기 시작한다. “영화는 말이야, 스크린을 통해 현재랑 과거를 이어준다고 생각해. 난 내 영화를 통해 미래를 연결하고 싶어” 오해와 어려움을 거쳐 성장해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알지 못하는 사실을 아는 것보다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영화를 통해 마주하게 된다. 기록에는 남지 않아도 기억에는 남을 열정과 영화 그리고 마음은 여전히 그대로다.
영화관에서 만나기 전에 재팬 필름 영화제에서 만난 작품 중 하나로 어느 것도 쉽지 않은 현실에서 만난 착한 영화였다. 그때는 봄이었는데 지금은 뜨겁고 끈적이는 여름이 되어 그 자체가 싫어지는 와중에 다시 이 영화를 마주하게 되었다. ‘여름이었다’ 라는 흔한 말과 ‘청춘’이 그대로 담겨있는 이 영화는 민낯의 청춘들을 사랑하고 있다. 성공, 인생의 목표, 뚜렷함과 같은 것들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지만 나 자신을 잃어버리게도 만든다. 그런 나를 위로하듯 활활 타오르는 열정을 영화에 한가득 담아낸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간절히 원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맨발은 좋아하는 것을 영화에 진심을 담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끊임없이 자신의 두려움의 감정보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만들어내는 단어들이 떠오르고 뒤보다는 앞을 바라보게 만드는 용기를 얻어갈 수 있었다. 내가 진심으로 마주하고 바라보고 있는 영화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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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2주 최신 개봉영화!
9월 2주차에는 어떤 영화가 개봉을 하는지 한번 볼까요?
9월 2주 개봉영화 5편!
건파우더 밀크셰이크 Gunpowder Milkshake , 2021
자비없는 액션과 강렬한 타격감 + 화려한 미장센과 음악
영화 "건파우더 밀크세이크"는 남다른 유전자와 조기교육으로 완성된
‘샘’과 그녀의 엄마이자 레전드 킬러 ‘스칼렛’ 그리고 비밀스러운 도서관의 ‘킬’사부일체가
자신들의 운명을 찢어 놓은 놈들을 향해 달콤한 복수를 그린 영화입니다.
'늑대들'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총애를 받은 나봇 파푸샤도 감독의 작품으로
전작을 통해 인정 받은 강렬한 액션과 쿨한 유머가 어우러져 쾌감을 선사합니다
'킹스맨' 이 평범한 양장점을 근거지로 활약하는 스파이들의 활약을 통해 호기심을 자극하고 클래식한 매력을 극대화시켰다면
"건파우더 밀크셰이크"는 ‘지식은 곧, 가장 강력한 무기’를 은유하며 정적인 도서관 사서로 위장한 킬러들과
그곳에서의 폭발적 액션으로 이질감을 더한 신선한 매력을 배가시킵니다.
'어벤져스' 시리즈의 카렌 길런, '왕좌의 게임' 시리즈의 레나 헤디,
'블랙 팬서'의 안젤라 바셋, '메카닉: 리크루트'의 양자경, '샌 안드레아스'의 칼라 구기노!
한 자리에서 보기 힘든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들이 뭉친 통쾌한 복수서사!
첫번째 추천영화 "건파우더 밀크셰이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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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미더고스트 Show Me the Ghost , 2021
내집 사수 셀프 퇴마 코미디!
영화 "쇼미더고스트"는 집에 귀신이 들린 것을 알게 된 20년 절친 예지와 호두가
귀신보다 무서운 서울 물가에 맞서 귀신 퇴치에 나서는 내집 사수 셀프 퇴마 코미디입니다.
내집 사수 셀프 퇴마 코미디라는 독특한 설정과 예측불가의 흥미진진한 스토리 전개와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의 매력과 케미로 색다른 매력을 뿜어내는 작품입니다.
카라의 멤버에서 '청춘시대', '학교기담-응보' 등 연기로 활동 영역을 확장하며 안정적인 연기를 선보여온 한승연,
'어쩌다 발견한 하루', '나빌레라' 등 화제의 드라마에서 활약하며 대중들에게 눈도장을 찍은 라이징 스타 김현목,
꼰대인턴, 복수가 돌아왔다, 이판사판 등 다양한 드라마를 통해 다채로운 캐릭터를 소화하며
잠재력과 가능성을 입증한 신예 배우 홍승범
세 배우의 케미와 청춘들의 현실을 담은 영화!
두번째 추천영화 "쇼미더고스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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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펙트 Respect , 2021
레전드 뮤지션, 스크린으로 화려한 귀환
영화 "리스펙트"는 소울의 여왕으로 불린 전설의 보컬리스트 아레사 프랭클린의 빛나는 무대와 삶을 그린 영화 입니다.
'18번의 그래미상 수상, 타임지 선정 '20세기 문화예술인 20'’과
롤링스톤지 선정 '역대 가장 위대한 가수 10인'에 이름을 올리며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은 가수죠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던 재능 많았던 어린 소녀에서 히트곡 하나 내는 것이 꿈이었던 신인 가수 시절을 거쳐
'RESPECT', 'Think' 등 최고의 명곡들로 시대를 위로하며 세계 최고의 디바가 된
아레사 프랭클린의 삶을 따라가며 빛나는 공연과 그 뒤의 진솔한 이야기를 함께 담아냈습니다.
세상을 바꾸고 영혼을 위로한 환상의 디바 아레사 프랭클린!
세번째 추천영화 "쇼미더고스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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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사람 Good Person , 2020
누가 좋은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가?
영화 "좋은 사람"은 교실 도난 사건과 딸의 교통사고, 의심받고 있는 한 명의 학생 ‘세익’ 그리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교사 ‘경석’이 의심과 믿음 속에 갇혀 딜레마에 빠지고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지난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에 CGV아트하우스상, 한국영화감독조합상-메가박스상 등 2관왕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입증해 예비 관객들의 기대를 높이고 있습니다
또한
데뷔 20년 차,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넘나들며 60여 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해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선보여온 김태훈의 복귀작으로 밀도 높은 감정 연기를 선보입니다.
보통의 질문을 통해 공감과 여운을 선사하는 영화
네번째 추천영화 "좋은사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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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날부를때 我的姐姐 , Sister , 2021
2021년 중화권을 뒤흔든 흥행 신드롬 무비!
'고질라 VS 콩'을 제치고 박스오피스 11일 연속 1위!
흥행 수익 1,520억 원과 2,300만 관객 사로잡은 웰메이드 화제작 "내가 날 부를때"가 개봉을 합니다.
영화 "내가 날 부를 때"는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떠나보내고 어린 남동생을 맡게 된 ‘안란’이
인생의 두 갈래 길에서 진정한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성장 드라마로,
올해 4월 중국에서 개봉했을 당시 폭발적인 관객 반응을 끌어내며 신드롬을 일으킨 화제작입니다.
그 이유는 국가 차원에서 가족 구성원 수와 출산을 계획적으로 조절하기 위해 시행되었던
중국의 ‘한 가정 한 자녀 정책’이 폐지되면서 일어난 사회적 변화와 그로 인한 갈등,
그리고 그 안에서 ‘딸’로 태어난 여성들이 경험해야 했던 암묵적인 차별이 고스란히 영화속에 녹여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과 비슷한 또래인 2030 여성들이 열렬한 지지를 보내며
중국 내에서 젠더 이슈부터 가족 문화, 사회 정책까지 다층적인 논의를 이끌어냈던 영화
다섯번째 추천영화 "내가날부를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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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의식, 혐오의 자기합리화
일반적으로 꿈이란, 인간의 무의식을 기반으로 하거나 이러한 무의식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억압된 욕망이 투영되어 만들어진다. 즐겁고 행복한 꿈보다 어딘가 어긋나 있고 이상한, 불쾌하거나 불안한 꿈을 더 많이 꾼다. 불쾌한 꿈은 깨어난 이후 행복한 꿈보다 기억이 더 오래 지속된다. 이런 명제를 두고 보면 무의식은 의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의식이 있을 때 역시 우리는 행복한 기억들보다 불쾌하고 불안한 기억들이 더 자주 상기되고 더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꿈은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고 현실에서는 불가능할 법한 일들을 경험하게 한다. 이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폴이 다른 사람들의 꿈속에 등장해 비현실적인 방법으로 꿈의 주인을 죽이는 것처럼 말이다. 이야기의 초반, 폴은 자신의 딸을 시작으로 주변인들의 꿈에, 더 나아가 얼굴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타인들의 꿈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사람으로 반복해서 등장하게 된다. 그들의 무의식 속 폴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일까? 사실 우리는 이 꿈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 ‘폴’이라는 인물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혹시나’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만약 폴이 사람들의 꿈속에 처음처럼 그냥 가만히 서 있는 사람으로 등장했다면 호기심에서 그쳤을지도 모르겠다. 꿈속에서 자신을 죽이는 사람으로 처음 마주한 폴에 대한 두려움이 형성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할 수 있다. 이 사람이 평소에 어떤 행실을 가지고 살았던 그것은 우리가 상관할 바 아니라는 것처럼 말이다. 강렬한 꿈은 좀처럼 잊을 수 없기에 불쾌함은 오랫동안 지속되고, 꿈에서 나를 죽인 사람이 실제로 눈앞에 나타난다면 불쾌함이 자연스레 표출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는 잘 아는 사람을 좀처럼 증오하지 못한다.’는 윌리엄 해즐릿의 신조는 다르게 말하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증오하기 수월하다는 뜻으로 읽히기도 한다.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상상하는 것은 더욱 쉽다. 그렇다면 현실이 아닌 꿈에 나타나 나를 비현실적으로 죽이는 사람을 현실 속에서 혐오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일까? 즉, 인간의 무의식을 통해 나타난 꿈이 현실 속 혐오라는 폭력의 수단으로 사용되며 과연 이것이 합리화될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대해 우리는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겠다. <드림 시나리오>(2024)는 이렇게 납득이 되지 않는 이유(무의식)를 빌미로 꿈을 이용해 비현실적인 혐오가 난무하는 현대 사회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는 영화다.
영화 속에서도 나왔듯 원래 모든 밈은 꿈이 된다는 말이 있고, 인터넷에 도배가 된 폴의 꿈을 꾸는 건 쉬웠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전부 폴에 대한 꿈을 꾸는데, 어떻게 자신만 꾸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반면 과연 정말 전 세계 사람들이 폴에 대한 꿈을 꾸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기도 한다. 사람의 욕망과 심리라는 것은 자신은 특별하게 보이고 싶고 유행에 뒤처지는 것을 기피한다. ‘사람들은 꿈의 내용을 의미 있는 어떤 내용으로 대체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낀다.’고 이야기한 프로이트의 말처럼 자신의 꿈이 사람들에게 주목받으며 공감받기를 원하고, 유행하는 것들을 따라가고 싶어 한다. 일명 도파민이라는 핑계로 자극적이면 자극적일수록 세상에 더욱 관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하다. 자극적인 꿈의 내용에 폴을 집어넣어 실제 자신이 꾼 꿈이 아닌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 사람들이 존재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꿈의 유행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역시 트렌드에 합류하여 주목받기를 바라는 욕심에 눈이 멀어 폭력에 가담한 것이 아니겠는가. 허구의 이야기는 누군가를 몰아가기에 아주 적합한 수단이다.
폴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채로 등장했던 이전과는 다르게 몰리의 꿈에 그녀의 무의식 속 잠재되어 있던 성적 욕망을 드러내 보이는 역할로 나타난다. 이는 폴이 타인의 꿈속에서 처음으로 ‘행동’하는 순간이다. 이를 시작으로 가만히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폴이 점차 학생들의 꿈을 시작으로 이외 사람들의 꿈에 꿈의 주인을 죽이거나 몰리의 꿈과 비슷하게 성적인 욕망의 사람이 된다. 트라우마가 트렌드라는 폴의 말에 수긍하는 듯 트라우마라는 원인을 내세워 폴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사회의 암묵적인 룰이 된 셈이다. 현실에서는 아무런 짓도, 타인에게 해를 가하는 짓도 하지 않은 폴은 꿈으로 인해 가해자가 되어있다. 현실에서는 그를 죽이기 위한 조증 환자가 집에 침입하여 피해자가 된 폴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꿈속에서는 꿈의 주인을 죽이는 가해자가 된다는 말인가. 이는 다수의 사람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보다 한 명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 더욱 쉽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한 사람을 평가하는 말이 같다면 실제의 ‘나’는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그런 사람이 되어 있다. 악몽의 시작인 동시에 폴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합리화하는 것의 시작일 것이다. 입소문은 빠르고 꿈만큼이나 왜곡되기 쉽다. 꿈을 검열하고 왜곡하도록 강요하는 심리 상태 역시 무의식에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매주 수업에서 보는 교수가 꿈속에서 자신에게 위협을 가한다면? 나를 죽이려고 달려든다면? 꿈의 주인은 불안하고 실제로 ‘나’를 죽일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인다. 이러한 꿈을 꾼 학생이 친구에게 꿈 이야기를 전파했다면 ‘혹시나’하는 불안으로 인해 다른 학생들에게는 자신을 죽이는 꿈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점차 다수의 사람 꿈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실제로도 폴은 위험한 존재가 된다.
앞서 이야기한 과연 정말 전 세계 사람들이 폴에 대한 악몽을 꾸었을까에 대한 궁금증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자신을 죽였다는 정확한 꿈의 내용이 주변인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존재하지 않고 대부분 그저 ‘죽이는 꿈’을 꾸었다는 허황된 말들뿐이다. 정확한 근거가 없다는 뜻이다. 꿈에 근거가 어디 있겠는가. 자신이 꾸었다고 하면 꾼 것인데. 누가 이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까. 이로 인해 꿈으로 인한 선동은 다른 것들보다 선동되기 훨씬 수월하다. 개인의 말이 곧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질투는 타인의 성취나 유리한 입장에 배가 아프거나 괴로워하는 마음이다. 특별해 보일 것 없는 사람인, 존재감 없고 제대로 된 연구 논문 하나 내지 않은 채 여전히 명성 없는 대학교수인 폴이 갑자기 사람들의 꿈에 나타나게 되고 인기를 얻게 되는 것은 몇몇 사람들 입장에서는 질투가 나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고작 많은 사람들의 꿈에 나왔다고 해서 한순간에 인기를 얻은 폴이 어떻게 눈엣가시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얼룩말처럼 무리에서 벗어나 혼자 튀었기 때문에 타깃이 되기도 쉬웠다. 어째서 사람은 현실이 아닌 가상의 꿈을 통한 개인의 상상과 생각을 가지고 한 사람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는가? 우리는 왜 이렇게 쉽게 혐오에 휩싸이는가. 꿈이라는 가상을 현실까지 끌고 와 상대방에게 해를 가하는 것에 대해 그 누구도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이때 그로테스크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학생들의 악몽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해 정서적 격발 기제를 푸는 심리 치료를 진행하지만, 트라우마를 치료하기는커녕 오히려 트라우마가 더욱 악화한다. 꿈으로 인한 불쾌감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도 지속되기 때문에 학생들은 폴에게 자신들과 같은 불쾌감을 쥐여 주고 싶었다. 이후 폴의 차에 학생들은 낙서를 해 두고, 폴에게 욕설을 날리는 등 폴에게 실제로 위협을 가하며 이 상황을 핸드폰으로 찍거나 구경한다. 마치 이런 폴의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학생들을 향해 격분하는 모습이 폴의 실체임을 이미 알았다는 듯 비아냥거리기에 바쁘다. 인간은 악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어서 나쁜 짓을 하며 이를 통한 만족을 얻게 된다는데,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방법은 혐오밖에 없다는 말일까. 어쩌면 학생들은 트라우마를 옳은 방법으로 치료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 혐오가 그들이 원했던 치료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악몽으로 인해 폴은 교수로 있던 학교에서 정학을 당하고, 가족의 불화가 생기고, 학생들에게 조롱을 당하는 등 폴의 주변 사람들이, 심지어는 폴이 모르는 사람들 모두 폴에게 등을 돌린다. 더 이상 폴은 꿈과 상관없지 않다. 꿈속의 ‘남자’가 자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폴과 달리 사람들에게 꿈속의 ‘남자’는 ‘폴’이 되었다. 누가 폴을 피해자라고 생각하겠는가. 사람은 자신이 피해자가 되는 건 쉬우며 가해자가 되는 것은 어렵다. 자신이 가해자의 입장에 설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한다. 어떤 경우에서든 자신을 보호하고 싶어 하며, 심지어 자신이 실제로 타인에게 해를 가하고 있음에도 자기합리화를 하기에 바쁘기 때문에 진짜 피해자를 구별해 낼 인지가 부족하다. 이렇게 폴은 무의식으로 인한 의식의, 피해자의 의견은 묵살되는 사회의 완벽한 피해자가 되었다.
사람의 상상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누군가를 벼랑 끝으로 내몰 수 있는 것도 전부 사람의 상상이다. 타인을 조롱하고 혐오하는 것은 끝이 없다. 심지어 다수의 사람이 한 사람을 향해 같은 비난을 쏟아내면 그것을 오롯이 받아내는 폴은 어떻게 될까. 폴은 자신이 자신을 죽이는 악몽을 꾼다. 폴이 현실에서 손가락질받으며 가해자라는 인식이 지속되고, 결국 폴마저 이러한 인식 속에 잡아먹힌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자기 내면이, 그 내면의 어두운 부분이 있지 않을까에 대해 스스로 의심하게 되고, 이는 무의식 속 잠재되어 있던 불안이 폴의 꿈을 통해 나타난다. 결국 폴은 이런 사회적 혐오에 처참히 무너진다. 그리고 이는 겉잡을 수없이 번져 끝내 자기혐오로 다가온다. 자기혐오는 자신을 죽이는 일이고, 자신을 죽이면서까지 자기를 혐오하는 무리에 들어가기 위해 애쓴다. 상상이 상상에서 그치지 않고, 무의식이 무의식에서 그치지 않은 결과인 셈이다.
꿈속 누군가를 위협하는 존재로 등장했던 폴은 결국 현실에서마저 자신을 포함한 타인에게 위협을 가하는 존재가 된다. 단 한 번의 사고로 폴은 완벽한 피해자에서 예정되어 있던 완벽한 가해자로 변한다.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위협을 가하는 존재가 된 폴은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사라져 버린다. 꿈에서 사라진 폴이 점차 잊힐 때쯤 그렇게 혐오했던 폴을 다시 마케팅 수단으로 사용하는 ‘노리오’가 개발된다. 긍정적인 꿈을 꾸게 해 줄 수 있는 제품이고, 폴 없이는 존재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의 꿈에 나타나는 힘을 사람들을 겁주는 데 사용해 안타깝다는 말을 통해 여전히 폴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폴이 타인의 꿈에 나타나 꿈의 주인을 죽인 것이 폴의 자의였다고 확정 짓는 대목이다. 사람들의 상상은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어 버렸다. 예전의 감정은 되살릴 수 없듯 인생 역시 되돌릴 수 없기에 더 이상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완벽한 혼자가 되어버린 폴은 무중력 상태가 되어 여전히 공중을 떠다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드림 시나리오>는 이러한 무의식이 현대 사회 속 혐오와 폭력이 ‘자기합리화’에 이를 수 있다는 결론을 낸다. 하지만 사실, 무의식에 근거한 혐오와 폭력이 자신에게만 합리화될 뿐 모두에게 실제로 합리화되지 않는다. 무의식에서 폭력을 당하는 것과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 당하는 것은 너무나 큰 차이다. 폴에게 폭력을 가한 사람들은 전부 무의식 속의 ‘누군가’가 아닌 의식이 명확히 존재하는 ‘인간’이다. 자신이 폭력을 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다. 피해자를 제외한 그 누구도 그것이 잘못되었다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 모두가 자기 행동에 동조하기 바쁘다. 세상은 변하지만, 사람의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의 근본이 변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수 있지만 세상이 변함에 따라 혐오를 대하는 방법은 변해가는 세상에 맞게 달라져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는 혐오가 난무하는 사회 속에서 혐오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누군가를 먼저 앞서서 혐오하기에 바쁘다. 누군가가 선동을 시작하면 개인 속에 잠재되어 있던 혐오가 기어 올라와 기어코 폭력을 휘두른다. 폭력을 휘둘러야 만족하고 만다.
꿈만큼 현혹되기 쉬운 것도 없다. 우리는 꿈을 꾸면 그 꿈에 대해서 의미를 해석하기에 바쁘고, 불쾌한 꿈을 꾼다면 그 무의식 속 불쾌함이 의식까지 영향을 미치며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지속된다. 하지만 이러한 ‘불쾌감’이 누군가를 혐오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는 없다. 그 누구에게도 혐오 받을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혐오 받을 권리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혐오할 권리는 존재하는가.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가. 생각이란 무엇이고, 또 이런 생각에 기초한 상상이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생각과 상상을 끊임없이 타인을 포함한 자신의 혐오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을까. 생각이 혐오의 수단으로 흘러가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인가? 생각은 사실 단순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기에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혐오로 흘러가지 않도록 막을 힘이 충분히 존재한다.
우리는 혐오가 유행이 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혐오가 밈이 된다. 우리는 정말 살면서 한 번도 타인을 혐오한 적이 없을까. 내가 사용하는 밈이 누군가를 혐오하는 문장이지는 않을까. 제삼자의 시선으로 본다면 그것이 명백한 혐오임에도 불구하고 혐오가 아니라고 자기합리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비판이라는 명목하에 비난이나 혐오를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어떻게 타인을 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혐오가 혐오라는 것을, 혐오를 그만둬야 한다는 사실을 더 많은 사람들이 소리 낼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어쩌면 이런 용기를 내기 위해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누군가를 혐오하기보다 우선 이러한 현상이 합리화되는 사회를 충분히 의심하고 경멸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이 더 이상 폭력적이지 않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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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과 끝이 무한히 반복되는, 깨지 못할 한때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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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Queer, 2025)
시작과 끝이 무한히 반복되는, 깨지 못할 한때의 꿈
개봉일: 2025.06.20.
관람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장르: 드라마
러닝타임: 137분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
출연: 다니엘 크레이그, 드류 스타키, 레슬리 맨빌, 제이슨 슈왈츠먼, 엔히 자가
개인적인 평점: 3.5 / 5
쿠키 영상: 없음
나에게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영화는 딱 이 한 문장으로 정립되어 있다. ‘펄떡이는 것들로 그득한, 살아있는 영화’. 들끓는 욕망과 한순간 솟아오르는 치기, 따가운 햇살, 뜨끈한 피, 생생한 피부의 촉감. 온갖 감각이 넘치는 그의 영화는 매번 내 둔해진 감각을 새롭게 재생시킨다.
이 모든 감각들의 시작점엔 바로 ‘사랑’이 있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그리는 사랑은 맹렬하고 솔직하기에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추하고 외롭다. 개인적으론 이러한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영화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라고 생각하며 당연하게도 나의 루카 구아다니노 최애작 또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이후로도 온전한 소유를 목적으로 한 카니발리즘 로맨스 <본즈 앤 올>, 세 주인공 사이의 다자간 사랑의 랠리 <챌린저스>처럼 여러 독특한 사랑을 주제로 한 영화들을 쉼 없이 발표했고 나는 그때마다 그의 뜨거운 욕망과 변태력에 큰 박수를 보내곤 했다. 하지만 마음 한 편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같은 영화.. 어떻게 한 번 더 안 되는 걸까…’하는 그리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퀴어>를 정말 오래 기다렸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닮은 구석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진 채. 그런데 영화가 끝나자마자 들었던 생각은 이거였다. “뭐지? 이건 또 봐야 알 것 같은데?”
<퀴어>는 언뜻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닮아있는 듯하면서도 매우 다르다. 본격적으로 영화 <퀴어>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같은 느낌을 기대하고 있는 감독의 팬들에겐 이렇게 말하고 싶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언제 떠올려도 아름다울 한여름 밤의 꿈이라면 <퀴어>는 마음을 걸어 잠가도 비집고 들어오는 칼바람 같은 꿈이라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생생한 감각들을 떠밀어주는 영화라면 <퀴어>는 스스로 인물의 감각을 더듬어내야 하는 버석한 영화에 가깝다고.
<퀴어>는 동명 소설 [퀴어]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기존 질서에 반항하고 기행을 일삼았던 비트 세대의 주요 인물이었던 원작자 ‘윌리엄 버로스’는 다이내믹했던 자신의 생을 그대로 투영한 문학 작품들을 주로 발표했다. [퀴어]는 그중 한 편으로, 약물 금단증상에 시달리던 그가 멕시코에서 한 청년을 만나며 겪은 경험을 담은 책이다. 영화의 전체적인 줄기는 원작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영화 <퀴어>는 원작에 비해 주인공의 감정이 비교적 아름답게 표현되었고, 이야기 사이 공백이 느껴질 때도 있지만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갔던 원작에 비해 갈피가 잡혀있는 편이다. 하지만 원작과 영화 모두, 한 번 놓치면 길을 잃어버리기 쉬운 어지러운 작품이니 약간의 주의가 필요하다. (대략 피곤한 날 관람은 피하시라는 말이다.)
영화 <퀴어>의 주인공인 작가 ‘리’는 마약 단속을 피해 미국에서 멕시코시티로 이주한다. 그는 모아둔 돈으로 방탕한 생활을 즐기며 인생을 함께할 짝을 찾는 중이다. 그런데 곱게 말해 ‘짝을 찾는다’고 표현한 거지, 그는 사실 아름다운 청년들에게 열심히 추파를 던지는 중이다. 하지만 리에게도 명확한 기준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상대방이 자신과 같은 퀴어여야 한다는 것.
하지만 리와 같은 퀴어, 그것도 진심으로 사랑을 나눌 퀴어를 찾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처음 등장하는 앳된 청년은 퀴어가 아닌 것처럼 보이고 퀴어임이 확실해 정사를 나눈 청년은 육체적인 사랑. 그 이상을 원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 더해 퀴어가 아닌 이들은 리를 대놓고 괄시하니 리는 항상 사랑을 하면서도 외롭다.
그러던 어느 날, 열기 가득한 길거리. 리는 수많은 인파 너머로 지나가는 유진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는 모든 걸 내려놓고 노골적인 표현과 거짓말까지 동원하며 유진의 옆자리를 사수한다. 리는 지금껏 다른 청년들에겐 퀴어인지, 퀴어가 아닌지. 말과 몸을 동원해 거침없이 질문해왔지만 유진에겐 같은 질문을 던지지 못한다.
그렇게 설레면서도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가득한 날들이 지나가고 리는 온갖 노력 끝에 유진과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몸을 맞췄으니 이제 마음을 맞춰갈 순서가 아닐까. 리는 기대감에 부풀어 유진을 다시 찾는다. 하지만 유진의 태도는 점점 미스터리하게 변하고 유진을 향한 리의 갈망과 애정. 외로움은 쉼 없이 몸집을 키운다. 그리고 그것에 짓눌린 리는 유진의 사랑을 얻기 위해 또 다른 것에 집착하게 된다.
- 아래 내용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Queers가 아닌 Queer
영화의 중심인물은 리와 유진, 두 사람이고 영화의 사건 또한 두 사람의 관계를 중심에 두고 이어진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제목은 ‘퀴어들(Queers)’이 아닌 ‘퀴어(Queer)’다. 그 이유는 리의 이야기 속에서 동성인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한 퀴어는 리뿐이기 때문이다.
극 중에서 유진의 신체, 행동, 젊음은 리의 시선에 의해 끊임없이 대상화되지만 리의 모습은 그렇게 표현되지 않는다. 리는 유진에게 욕망을 느꼈지만 유진은 리에게 진짜 욕망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진이 퀴어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후, 리는 유진이 퀴어일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갖고 그의 몸에 손을 얹는다. 유진은 리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함께 밤을 보낸다. 리는 이를 유진이 퀴어이고 자신을 허락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유진은 리와 같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유진을 향한 리의 마음이 사랑이라면 리를 향한 유진의 마음은 호기심에 가깝다. 유진에게 리는 ‘가보지 않은 다른 동네 퀴어바’ 처럼 그저 궁금한 것. 딱 그 정도인 거다.
유진은 리와의 관계를, 퀴어와의 관계를 체험한다. 그는 리와 나란히 앉아 함께 술을 마시고, 같은 메뉴로 저녁 식사를 하고, 같은 영화를 보며 발을 맞춘다. 하지만 리가 그토록 바랐던 순간이 지나간 후, 유진의 호기심은 급속도로 사라진다. 유진은 첫 정사 이후 리가 여운에 빠져있는 사이 리의 성기에 닿았던 손을 리의 셔츠에 닦거나 키스를 나눈 후 입술을 닦거나, 더 이상 리와 같은 메뉴를 먹지 않는 -첫 정사 이후 장면들에선 리 앞엔 술. 유진 앞엔 콜라가 놓여있다.- 등 거리를 두는 행동을 보인다. 금전으로 얽힌 2장 이후의 관계는 예를 들 필요도 없을 만큼 한눈에 봐도 건조하고 일방적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실제인지 리의 환상인지 경계가 모호하긴 하지만 영화의 끝에 가선 유진이 ‘저는 퀴어가 아니’라 말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사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첫 정사 전, 저녁 식사 장면에서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리가 식사를 미뤄두고 진지하게 퀴어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동안 유진은 리의 말에 집중하지 않고 게걸스레 식사를 이어간다. 이 때 카메라가 식당 밖에서 두 사람을 비추는 컷에선 유진이 앉아있는 쪽은 벽으로 가려져 있고 리가 앉은 쪽만 유리로 되어있어 마치 리가 앞에 앉은 유진이 아닌 두꺼운 벽에 대고 홀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리는 영화 내내 통할 수 없는 벽, 유진을 향해 열심히 사랑을 이야기했고 또 자신과 같길 바랐다. 하지만 유진에게 리와 리의 사랑은 구토를 불러오는 술 같은 존재였다. 유진은 리의 집으로 가던 날 밤. 리에게 맞춰 술을 마셨고 마지막으로 집에서 리가 직접 따라준 술을 한 잔 마시고는 결국 토를 하고 만다. 리는 ‘술은 별로 안 마시지 않았나?’라며 유진을 걱정함과 동시에 약간의 의아함을 가진 채 화장실 밖에서 그를 기다린다. 리는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아무리 유진을 사랑하고 또 사랑해도 만족하지 못하지만 유진은 리가 건넨 술과 사랑을 구역질과 함께 뱉어낸다. 그렇게 유진이 사랑을 뱉어내는 동안 리는 유진이 그어놓은 선 밖에서 괴로워할 뿐이다.
무한히 새로 시작되는 잘못된 사랑과 그것을 향한 진심
리는 유진을 위해 자신이 그어놨던 선을 하나 둘 넘는다. 리는 첫 번째로 만난 청년에겐 “너 퀴어 아니지?”라고 물으며 그를 추궁하고 청년이 거짓말을 한 것이라 판단한 후 자리를 뜬다. 두 번째로 만난 청년과 밤을 보낸 후엔 돈을 줘서라도 그를 잡을까 고민하다가 이내 지갑을 닫는다. 그런데 유진을 처음 본 후, 리는 거짓말을 쳐 유진을 십아호이에 불러내고, 하룻밤을 보낸 남자들에게 집을 털렸다는 친구 조에게 “털리기 싫었으면 집이 아닌 모텔로 가지.”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은 유진을 집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유진에겐 지갑을 여는 걸로도 모자라 십아호이의 일부를 인수하기까지 한다. 더 나아가 리는 텔레파시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식물, 야헤에 집착하고 다시 약에 손을 대며 또 다른 선을 넘게 되는데 이 모든 건 유진과 얽힌 사랑, 외로움이라는 감정 때문이다.
리는 선을 넘으면서까지 진심으로 사랑을 쟁취하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를 잘못 골라도 너무 잘못 골랐다. 리와 유진이 여행을 떠나기 전, 1장의 후반부에서 리는 메리와 함께 있는 유진에게 찾아가 돈을 줄 테니 자신과 함께 남미로 떠날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유진은 그의 제안에 이렇다 할 반응을 하지 않는다. 그때 메리가 두 사람 쪽으로 다가와 리와 유진 사이에 있는 체스판에 손을 뻗는다. 그리고 조금 전에 리가 손댔던 체스 말을 옮기며 “이거 여기 아니잖아.”라고 말한다. 둘 곳이 아닌, 두면 안 되는 칸에 자리를 잡은 체스 말처럼 리는 ‘퀴어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유진의 세계에 잘못 발을 들여버린 것이다.
하지만 리는 유진을 포기하지도, 그를 죽이지도, 자신을 죽이지도 못한다. 유진을 미워하고 또 사랑하기 때문에. 리가 마지막으로 본 환상 속엔 방 안에 누워있는 유진과 ∞ 모양의 지네 목걸이와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빨간 뱀이 나온다. 이 뱀은 꼬리를 삼키는 자 ‘우로보로스’를 떠오르게 하는데, 이는 ‘시작이 곧 끝’이라는 의미와 영원성을 상징한다고 한다.
리의 사랑은 이 뱀과 지네처럼 시작과 끝이 영원히 반복되는 ∞ 모양을 따라 움직인다. 리는 지독한 외로움에 벌벌 떨다가도 무심히 얹어진 유진의 발에 안정감을 느끼고 환상 속에서 유진을 죽이고도 그를 껴안고 눈물을 흘린다. 사랑하기에 미치도록 증오스럽고 사랑하기에 감히 죽일 수도 없었던 외로운 그의 사랑은 매일같이 부서졌다가 또 새롭게 시작된다. 심지어는 숨을 거두는 날까지도 말이다.
리는 침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며 유진과 함께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왼쪽으로 돌아누운 리의 발 위로 같은 방향으로 누운 유진의 발이 겹쳐지고 리는 마지막 숨을 뱉는다. 과거 현실에선 벌벌 떨면서 허락을 받고 나서야 겨우 자신을 등지고 있는 유진과 발을 한 번 겹칠 수 있었는데.. 리는 혼자만의 상상 속에서나마 잠시 유진과 자신의 자리를 바꿔본다.
사랑을 지켜줄 것이라 믿었던 여행의 끝
리에게 남미 여행은 사랑을 지킬 마지막 기회였기에 그는 여행에 최선을 다했고 죽을 때까지 이 여행을 잊지 못한다. 반면 유진에게 이 여행은 당시 하고 있었던 신문사 아르바이트와 다름없는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일 정도로 인식된다. 그래서인지 유진은 여행이 마무리되자마자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이러한 여행의 결말은 1장에서 두 사람이 영화관에서 함께 봤던 영화 <오르페>의 흐름과 비슷하다. <오르페>는 장 콕토의 영화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신화를 재해석한 작품이다. 신화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사랑에 빠진 오르페우스과 에우리디케가 결혼을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에우리디케가 뱀에 물려 죽는다. 슬픔에 빠진 오르페우스는 저승의 신에게 아내를 돌려달라 간청해 저승에서 에우리디케를 데려올 단 한 번의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오르페우스는 앞서 신이 걸었던 조건을 잊고 실수를 저지르고 또 한 번 에우리디케를 잃는다. 유진을 얻었다 잃고, 다시 그를 얻기 위해 야헤가 있는 정글로 뛰어들었지만 영영 그를 다시 볼 수 없게 된 리의 이야기는 오르페우스 신화와 닮아있다.
의식을 한 겹 깨부수고 심장을 토하고도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은 파편화된 감정만을 남긴다. 혼자 남은 남자, 리는 그 파편들을 끌어안는다. 그것들은 리의 마음을 날카롭게 찌르지만 그는 절대로 그것을 포기하지 못한다. 정말 끝 맛까지 참 쓰디쓴 드라마다.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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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어떻게 살다 갈 것인가
왜 우리는 살면서 잔인한 기억을 한 번쯤 겪게 될까요? 월요일에 들었던 질문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금새 나는 한 가지의 끔찍한 순간이 떠올랐다. 그래서 이번 주의 내가 그 시간에 고통받았냐? 아니다. 지금의 나는 19과 20에 겪은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다. 너무 멀리 돌아왔다는 생각을 한 300번째 한 후, 내가 겪었던 고통은 과연 무엇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사실 별 것 아니다. 별 것 아니었다는 결론에 달한 것이 나의 트라우마 극복의 전부다. 이겨냈기 때문에 이런 말을 머릿속에 새기는 것일 거다. 근데 이것과 별개로 내가 무언가에 휘둘려 살았던 기억은 나의 행동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대체 왜 그랬지. 이 트라우마가 만든 창피한 경험은 역설적이게도 그 사건과 아무 상관이 없다. 난 누군가를 생각하는 법 자체를 몰랐다. 사랑받는 법도 주는 것도 몰랐기 때문에 방황했던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내가 미쳤지.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바보 같은 순간이 머릿속에 스쳐가는 오늘이다. 그때의 시간은 어리다는 말로 전부 수식할 수 없으니 오늘 밤도 이불을 뻥뻥 차게 생겼다.
다행인 점은 있다. 내가 미쳤지 싶었던 때에서 얻은 건 있으니 말이다. 이 얻은 것은 두 가지다. 사랑받는 인생은 무엇이고, 그걸 주는 삶이란 또 어떤 것인가? 에 관한 것이다. 이건 살면서 굉장히 중요했다. 내 정신연령이 죽을 때까지 10대에 머무를 순 없잖아? 세상의 모든 애정이 이성 간의 사랑과 그것이 아닌 무언가로 나뉜다면 삶이 퍽퍽해질 것이다. 물론 선을 넘는 건 나 역시 부담스럽겠지만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보내는 따뜻한 무언가를 잘 보듬으려고 한다. 살다 보니 정말 사랑이 전부였다. 내가 무언가를 위해 노력할 때는 보통 내가 좋아하는 타인에게 더 당당해지기 위함이었다. 또 언제는 그가 한 말 한마디가 내 동기부여의 전부가 되기도 했다. 이런 시간들을 보내고 나니 이성 간의 무언가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누구에게 진심인 편이 된다는 건 굉장히 어렵다는 걸 알았다. 진정성은 사소한 것에서 왔었다. 내가 지키는 소소한 것에서 섬세함이 생기고 그 사람의 말에 설득력이 만들어진다. 그러면 상대방은 보통 '이 사람이 진정성을 갖고 행동하는구나'라고 느껴 나를 좋아해 준다. 보통 그런 지레짐작은 맞는 말이다. 난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기 때문이다. 진정성이 없이 나 스스로의 이미지를 속이는 것처럼 행동하는 건 싫다. 진실된 사람이라는 말에 유달리 집착했던 나는 앞과 뒤가 다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 태도에는 단점이 있다. 마음이 깊어진다는 것이다. 짝사랑을 심하게 한다는 게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에 취해있으면 그 사람에게 맞춰진다. 그러면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어 진다. 사랑받기 위해서다. 정서적인 무언가를 받기 위해 계속해서 어떤 행동들을 하는 것이다. 언젠가 끝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러다가 크게 다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점점 뒤가 없어진다. 모 아니면 도인 내 방식이 가끔 질린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마음을 막을 수 있느냐. 글쎄. 아마 아닐 것이다. 지극히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나는 진정성을 위해 내 언어로만 행동하고 말한다. 그리고 두려워한다. 이 사람이 언젠가 날 떠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날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떠나간 후의 기분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것이다. 잃고 나서 난 이런 것들을 배웠다고 자위하는 건 이제 질렸다. 점점 나이가 들수록 무서운 게 많아지는 셈이다. 차라리 누군가를 아껴주지 않는다면 다칠 일도 없을 텐데. 난 오늘도 일어나지 않은 일을 무서워한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필연을 운명에 빗댄 영화다. 내가 영화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이유에는 인생에 대한 절묘한 비유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영화는 좀 심각하게 극단적이다. 아버지에게 알맞은 애정을 받지 못한 채로 자란 마츠코. 시크한 아버지가 웃음을 주지 않은 것에 마음이 답답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마츠코는 일찍 취업에 성공해 선생님이 된다.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서다. 교사로서의 일과 도중, 마츠코가 재직하던 중학교 제자가 누군가의 돈을 훔치는 사건이 벌어진다. 마츠코는 이 사건으로 인해 억울하게 학교를 떠나게 되고 작가 지망생인 남자와 동거를 하게 된다.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지도 못했고 믿었던 학교에서까지 배신당한 마츠코. 이번에는 정말 날 사랑해주는 곳을 찾은 것 같았다. 근데 그건 잠깐 뿐이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재림이라는 말과 함께 미래가 밝았던 첫 번째 남자 친구는 예술가의 지나친 우울함 때문인지 자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두 번째 남자 친구는 첫 번째 남자 친구에게 열등감이 가득했던 인물이었다. 마츠코를 얻음으로써 이 열등감을 해소하려 했었다는 이유로 결별을 선언한다. 자기 내적의 무언가 때문에 마츠코를 이용한 것이다. 연이은 이별 후 직장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마츠코. 새로운 일터는 마사지방이었다. 업계 톱으로 잘 나갔던 그녀지만 이내 회사가 무너지게 되고 다시 위기에 봉착한다. 이 시기에 원래 살던 집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일기를 읽고 '마츠코 연락 없음'이란 글을 읽게 된다. 아버지의 애정을 재확인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다시 홀로 집을 나와 독립을 시작하고 세 번째 남자 오노 데라를 만나게 된다. 이 남자의 정체는 사기꾼이었다. 후에 마츠코를 배신하자 결국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네 번째 남자를 만나 삶을 살던 도중 경찰에 잡혀가게 된다. 8년형을 선고받고 만기출소로 나온 마츠코.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 남자는 교사 시절 도둑 누명을 쓰게 만든 제자였다. 제자 류와의 사랑에 빠지는 데는 성공하지만 정작 끝은 좋지 못했다. 범죄자가 되어 감옥에 갔다 온 후 마츠코를 돌보기를커녕 주먹 한대 쳐버리고 류는 도망친다. 결국 버림받게 되는 마츠코. 히키코모리처럼 집에서 은둔하며 TV만 보다가 우연히 본 아이돌에게 빠지게 된다. 하는 거라곤 그 아이돌에게 편지 보내는 것 빼곤 아무것도 없던 마츠코. 감옥 동기가 재기할 수 있을 거라며 건넨 명함에 행복 회로를 돌리다 후반부에 허무하게 객사하게 된다. 그게 영화의 끝이다.
이 영화는 많이 비극적이다. 선생님이란 좋은 직업으로 시작해서 결과적으로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한 여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과할 정도로 사랑을 찾는다. 2021년의 우리가 보기엔 '굳이 저럴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다. 영화의 주인공이 보여준 행보와 같은 질문을 우리의 삶에 던질 수 있다. 과연 사랑이 그렇게나 중요할까? 주인공의 자존심까지 다 팔아가며 받고 싶을 만큼 관심과 애정이 우리 삶에서 중요할까? 정말 중요한 질문은 이거 말고 하나 더 있다. 그거 받는다고 해서 우리 삶이 극적으로 나아진다는 보장이 있는가? 어차피 누군가는 어떤 인물의 삶에서 떠나갈 수밖에 없다. 겉보기엔 오해로 멀어지는 경우는 부지기수다. 누군가는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당연하다. 모든 영화에는 엔딩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필연적인 끝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다. 불륜이든 풋풋한 첫사랑이든 우리는 끝이 어떤 결말로 이뤄질지 뻔히 아는데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 연인이 아니고 친구관계이거나 형이나 누나로 불려지는 사이여도 마찬가지다. 단 한 가지의 예외라도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마지막을 향하고 있다.
잘 알면서도 우리는 운명을 잊어버리며 살아간다. 우리 주변의 누군가를 생각해보자.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단지 섹슈얼한 무언가가 아니라 존경과 우정, 공감의 의미여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 감정이야 말로 우리 인생의 전부다. 내가 느끼기엔 -내 기준- 이성 간의 사랑보다 이 감사함의 표시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어려울 때 도와준 형들이 멋있다고 생각해서 난 게이가 아닌 것처럼 세상은 다양한 감정들로 이뤄져 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때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존경이라는 말이 식상해질 때 누군가에 대해 '내가 어떤 존재가 되어봐야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순수한 동기부여는 이런 것들이다. 나를 믿어주는 존재가 있다면,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내 모습을 사랑해줄 인간이 있다면 그제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가족이 소중한 이유가 이거 아닐까? 거의 대다수에게 가족이란 어떤 일을 겪어도 내 편인 존재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가족들에게 잘하는 것일 테지. 나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근데 난 이기적 이게도 이들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사랑받고 싶다. 가족이 주는 무언가는 항상 고마운데. 나는 그 외에서도 쓸모를 찾고 싶다. 난 개 같던 20대의 일상 속에서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았던 것 같다. 그 뭐 같던 순간에서 제일 찌질한건 나였단 걸 깨달은 후에도 다른 뭔가를 찾았던 것 같다. 이런 인간관계의 결말? 항상 같았다. 난 정말 나밖에 모른다. 친해지는 걸 못해 별것 아닌 것에도 이상한 사람 취급당했던 기억이 생생하고, 또 정신상태가 무너져 있을 때 본능적으로 사랑을 갈구하던 모습이 선하기 때문이다. 알고 있다.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은 나란 걸. 남 탓 열심히 해도 어차피 원인은 나에게도 있다. 정말 타인이 100% 잘못해서 무언가 발생한 경우가 없다고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그 경우가 절대다수라고 하면 그건 추한 남 탓이 될 것이다. 과연 나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인가.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외부에서 우리의 쓸모를 증명받고자 한다. 우리 엄마나 아빠만 해도 자기 직업에 진심인 사람이다. 심지어 아빠는 방송에도 여러 번 나왔고 몇 박사들의 책에도 참여한 바 있다. 단순히 엄마 아빠가 돈을 벌기 위해서 이런 걸 하는 건 아닐 것 같다. 대학생 때 보이는 학생회, 대외활동 뭐 이런 것들도 그 예시다.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회 활동과 여의도 중앙정치는 사실 (물리적으로만) 거리가 멀고, 대외활동과 같이 외부의 일은 끝이 다 정해져 있다. 해단식 하면 자주 못 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활동을 한다고 해서 취업문이 활짝 열리지는 않는다. 이렇게 시시하고 재미없게도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정해져 있는 결말로 향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이 모든 걸 벌였고 또 넘어지며 좌절한다. 같은 행동을 두 번 세 번 반복하게 되고 비슷한 순간을 마주한다. 씨발. 왜 나는 이거밖에 안 되는 인간이지. 나의 출생만으로도 세상에게 사과할 이유가 생기는 것 같다. 아무도 모르게 잠수 타다 죽을 때가 되면 내 머리를 방망이로 쳐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싶다.
근데 우리 거의 대부분은 이 미련을 잊어버린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엔 다를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걸 부정한다는 게 아니라 이제 그런 필연이 중요해지지 않아 진다는 뜻이다. 왜? 그게 행복하기 때문이다. 자주 못 보는 사람이더라도, 애초에 표현하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도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 산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기약하며 말이다. <중경삼림>과 <노매드 랜드>를 봤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난 항상 이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다. 아름다웠던 순간을 다시 돌이키는 것만큼 인생에서 즐거운 건 없다. 토익 공부를 해도, 유럽에 가도, 사고 싶었던걸 사도 항상 무언갈 상상하고 있었다. 현실은 아니었다. 어떤 선택지를 골라서 내 결과 중 아무것이 바뀌었다 하더라도 난 지금과 크게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마음 한편으론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자. 영원한 건 없다. 뭔 선택지를 골라도 나는 아팠을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사랑받을 줄 몰랐고 하는 것도 서툴렀다. 이 문제의 해결책은 간단하다. 영원히 혼자 사는 것이다. 그럼 외롭기만 하지 사람에게 상처 받는 일은 없어 좋을 것이다.
이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이 당연한 정답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건넨다. 과연 그게 맞아?라고 말이다. 아니다. 당연히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한심한 순간을 반복한다. 나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홍상수나 윤종신을 좋아하는 이유 역시 우리 인생에서 이것에 공감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차피 끝이 정해져 있는 생인데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갈 것인가. 우리는 실패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미워하는 경향이 있다. 퍼주지 말걸. 비극적인 사건에 놓인 우리를 위로하기보단 학대한다. 영화는 이런 우리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넨다. 극도로 비극적인 인물 설정? 현실적이지 않은 게 맞다. 근데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이것에 공감한다. 상처 투성이에 그 아무도 찾지 않는 모습이야 말로 우리의 현실이다. 사람에게 상처 받아 사과받으면 그게 다 없던 일이 되나? 또 그 사람들이 사과를 과연 몇 번이나 했나? 또, 뮤지컬을 중심으로 영화를 전개한 이유? 비비드한 색감? 우리에게 이 마츠코의 삶을 비극이라고 재단할 권리가 있을까? 그 때 만큼은 행복했을텐데. '왜 굳이 3자 주인공이 나왔는가'나 '뮤지컬+색감배치'의 이유는 우리의 인생을 대변한다. 우리는 원래 이 모양 이 꼴로 살 수밖에 없다. 근데 이런 영화와 현실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베풀면서 살아야 한다. 왜? 인간의 가치는 무얼 받느냐가 아니라 무얼 주느냐에 따라 달려있기 때문이다. 비록 비극적인 사건이 연이어 겹쳐 좌절하는 삶일지라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극단적인 비극을 보여준다. 근데 어떻게 전개하나? 도 중요하다. 바로 주인공을 따로 설정해 그 인물로 하여금 마츠코의 일대기를 좇게 만든 것이다. 이럼 뭐가 되냐? 어느 정도 객관화가 된다. 극한의 비극적인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면 마츠코가 어떤 인물인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너무 타인의존적인 측면도 있었던 건 맞지만 당연히 좋은 부분도 많이 볼 것이다. 이 사람은 누군가를 품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 원인이 사랑의 결핍이더라도 괜찮다. 마음의 구멍 한 구석을 인정하게 되는 것도 다 좋으니까, 무서워서 숨지는 말자. 그게 우리가 인생을 사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한동안 병의 마수에 빠져 방황하고 나서 얻은 결론도 이와 비슷하다. 어차피 결론이 똑같다면 한 번쯤 또 한 명에게 모든 사랑을 다 가져다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나 자신이 인기가 없더라도 누군가의 인생이 옳다는 증명이 된다면 그 나름대로 성공한 삶일 것이다. 난 나에게 이 말을 해준 사람의 이 문장을 이루기 위해 그 20대를 보내왔고, 한 번도 진정성이 없었던 적 없었으며 나름대로 행복했다. 그래서 난 내가 한 말에 당당하다고 생각한다. 내 인생이 혐오스럽게 느껴지더라도 한 번쯤은 필연에 부딪히는 시도가 필요하다. 그게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겪는 난제를 돌파하는 방식일 것이다. 영원한건 없다 하더라도 그 순간 만큼은 나를 믿고 앞으로 나아가자. 마음이 괴롭다면 병원에라도 꼭 가자. 그것이야 말로 구멍이 난 사람에게 좋은 터닝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400% 확신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모름지기 이 영화가 말해주는 바와 같이, 인간의 가치는 무얼 받느냐가 아니라 뭘 해주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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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ONJU IFF 데일리] 그 땅에 영화가, 사람이 있다
DIRECTOR. 가자의 영화감독들
SYNOPSIS. <그라운드 제로로부터>는 팔레스타인 영화감독 스물두 명이 전쟁 중인 가자 지구에서 그들 각자의 삶을 포착한 이야기의 모음집이다.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픽션의 혼합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인간 정신의 굳건함을 강력하게 증언한 작품.
“내가 죽는다면, 세상에 울림이 있는 죽음이 되길 바란다. 그저 한 줄 속보에 실리거나, 희생자 숫자로만 남고 싶지는 않다. (…) 나는 세상이 듣는 죽음, 세월이 흘러도 영원히 묻히지 않을 불멸의 이미지로 남고 싶다.”
지난 4월 가자지구 북부에 있는 자택에 있던, 이스라엘군의 로켓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팔레스타인 여성 파티마 하수나(25세)의 말이다. 그는 사진 기자인 동시에 다큐멘터리 작가로, 그의 삶을 담은 이야기가 칸영화제 독립영화 병행 섹션에 초청된 다음 날 사망했다. 일곱 명의 일가족이 함께. 영화 <그라운드 제로>를 보며 얼마 전 보도로 접한 그의 소식을 떠올린 건, 마치 그에 이어지는 느낌의 편지로 이 영화가 시작했기 때문이다.
익명의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상정한 <셀카>는, 본인이 살아 있는 동안에 이 편지가 상대에게 전해지기를 바란다. “아름다운 도시에서 멋지게 살았던 걸 알아 줬으면 해. 그곳의 삶과 사랑을 사랑했음을.”이라는 말은 파티마 하수나의 말에 화음처럼 울린다.
사실 22개의 작은 이야기 조각이 모여 있는 <그라운드 제로> 자체가 거대한 화음처럼 울려퍼진다. 뉴스 보도 속 숫자와 통계, 머나먼 남의 일처럼 느껴지기 쉬운 가자의 소식은 22개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피부에 서늘하게 와 닿는다. 그 중에는 땅에 떨어진 밀가루를 두 손으로 주워담으며 스스로의 삶을 비참하다 말하는 순간, 폭격으로 시신이 분해될 경우에 대비해 아이들의 팔과 다리에 이름을 굵직하게 남기며 우는 엄마들의 마음 (그리고 그건 이름이 아니라 죽음임을 알고 함께 우는 아이들의 마음), 24시간 안에 3번이나 폭격을 당해 몇 번이나 구조된 사람의 마음, 종일 줄을 서고 또 서도 물과 음식과 전기를 얻지 못한 하루를 보내는 마음, 건물 잔해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울부짖는 마음, 심지어 가족의 죽음 소식을 듣고 영화 촬영을 멈출 수밖에 없던 감독의 코멘트로 영화를 닫는 (그야말로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 마음…처럼 우리가 마음으로 그려볼 수밖에 없는 깊은 절망과 참담함도 있다.
이 절망은 아주 거대하지만 동시에 아주 미시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폭격을 피해 도망가느라 두고 갔던 고양이를 다시 만났을 때 터지는 눈물, 좋은 평가를 받았던 미술 과제들을 먼지 덮인 잔해 속에서 하나씩 끄집어내는 착잡한 손길, 과거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이 현실에서 재현되는 기분이 들고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주인공들의 상황에 자꾸 내 상황이 겹쳐 보이는 공포, 설거지와 목욕과 청소 마지막으로 변기 물까지 한 동이 물을 여러 차례 재활용하는 손길…
재난은 언제나 거시적인 동시에 미시적이다. 산불 피해가 닥쳤을 때 사라진 건 집과 과수원만이 아니었던 것처럼, 가자지구를 덮친 전쟁은 건물을 부수고 가족만 앗아가는 것이 아니다. 당장 얼굴에 바를 로션이 없는 것, 피난하느라 두고 온 책이 생각나는 것, 아침에 마실 차 한 잔이 없어진 것, 북적거리는 텐트 한가운데서 아침을 맞는 것… 삶에서 사라진 것들을 추어 보면 언제나 손끝에 닿는 작은 것까지 변해 있다. 그곳에서 절망은 일상 언어이고, 현실이 악몽처럼 느껴지는 날들은 너무나 많다.
22개의 작품 절대 다수가 3개 로케이션으로 거칠게 요약되는 상황은 이 제약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건물의 잔해로 덮인 길거리, 텐트촌, 그리고 잃어버린 시절을 상징하는 듯한 바다. 허락된 장소가 없어 옴짝달싹 할 수 없는 가자지구 사람들의 삶이 집약된 장소들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영화인들은 목소리 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생존을 위해 달려야만 하는 상황에서도 카메라를 꼭 쥐고 있었고, 모든 것이 한정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삶이 어떠한지, 가자지구가 지금 어떠한지를 영화라는 틀 안에서 보여주려 애썼다. 다큐멘터리도, 극영화도, 아이들과 함께 만든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나 인형극도 모두 마찬가지다.
22개 중 편지를 상정한 <셀카>를 상영 첫머리에 넣은 것은 아무래도 이 영화가 하나의 유리병 편지로 이곳에 도달했다는 의미 아닐까. 그렇게 시작한 영화는 차라리 기억을 잃고 싶을 만큼 끔찍한 현실, 악몽 같은 현실, 눈뜬 이곳이 어제의 미래인지 과거인지 헷갈리는 현재를 노래로 덮으며 마무리한다. 평화와 꽃, 음악과 예술 안에서 아이가 천천히 글쓰기를 배우고 노래는 계속된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하나의 선언이다. 그 땅에 영화가 있다. 목소리가 있다. 사람이 있다. 너와 나와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다. 평화를 갈구하고 있다. 이 목소리, 이 선언은 더 울려 퍼져야 할 것이다. 가자지구를 둘러싼 목소리는 기이하리만큼 그 비극에 대해 침묵하고 있거나, 아니면 인간의 생명과 가장 먼 이야기를 끌어오며 과장된 크기로 발화되고 있지만… 이제는 이 목소리를 들어야 할 때다. 이 영화의 영문 제목은 “the untold stories from Gaza”, 가자 지구에서 (아직)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이제는 말해져야 할, 이야기들이다.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2025.04.29-05.09) 상영일정]
2025.05.01 메가박스 전주객사 10관 (상영코드 160)
2025.05.05 메가박스 전주객사 10관 (상영코드 519)
2025.05.09 CGV전주고사 3관 (상영코드 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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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와 믿음에 대한 피상적 접합을 벗어나다
신은 있을까. 신의 존재는 ‘믿음’으로써 현현해질 수 있을까. 당신의 앞에 두 개의 문이 있다. 왼쪽에는 ‘믿음’, 오른쪽에는 ‘불신’이다. 신을 믿고, 그의 존재를 믿는다면 왼쪽 문을 열면 된다.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없고, 온전히 이를 과학의 영역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자라면 오른쪽의 문을 열어라.
<헤레틱>은 외딴집에 몰몬교를 전도하는 두 소녀가 방문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친절해 보이지만서도 한편으로는 수상해 보이는 집주인 ‘미스터 리드(휴 그랜트)’는 영화의 초반부부터 관객들을 긴장시킨다. 아내가 음식을 대접하려고 한다며 시간을 끄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수상케 생각하기 쉽다. 수상한 미스터 리드의 모습을 두 소녀가 눈치채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금세 이야기는 팽팽한 긴장의 줄 위에 놓인다. 카메라는 완전히 두 소녀 ‘반스(소피 대처)’와 ‘팩스턴(클로이 이스트)’를 비추고, 관객은 그들이 느끼는 긴장감에 온전히 빠져들어야만 한다.
자신이 종교를 ‘연구’했다며 자신이 알아낸 이야기를 공유하려는 미스터 리드와 두 소녀 간의 이야기는, 공간이 점점 집의 내부로 들어갈수록 미스터리 속으로 빠져든다. 미스터 리드는 집의 안쪽에 있는 방에서 그 둘을 맞이하며 종교가 가지고 있는 ‘허점’에 대해 설파하고, 두 소녀의 믿음을 흔든다. 수상한 남자의 집에서 그들은 도망쳐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선 양쪽에 놓인 문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믿음’, 혹은 ‘불신’. 그들은 어느 문을 열고 수상한 집에서 탈출하게 될 것인가. 탈출은커녕 자신들의 목숨마저 놓칠 것인가.
<헤레틱>은 종교에 대한 믿음의 담론을 소재로 영화의 서사를 전개한다. 믿음이란 무엇일까. 그 내면에는 수많은 철학적 고민이 내재한다. 미스터 리드는 반스와 팩스턴의 몰몬교를 향한 믿음을 계속해서 반박한다. 스스로 의심하게 만든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진정한 믿음에서 온 것인가.’, ‘신은 믿을 수 있는 존재가 맞는가.’ 수수께끼 같은 미스터 리드의 시험이 반복되고, 반스와 팩스턴은 계속해서 그 시험에서 물러나지 않으려 한다. 미스터 리드의 시험과 의심들에 빈틈없이 채워진 서스펜스들은 단순히 두 소녀만을 긴장시키지 않는다. 관객들마저 완전히 동화시킨다. 오히려 관객들 자신도 그 상황에 놓인 듯이 질문하게 만든다. ‘내가 반스와 팩스턴이라면 어떤 선택과 도전을 할 것인가.’
영화가 어쩌면 믿음과 불신이 아닌 ‘제3의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작품 속에서 ‘나비’의 존재가 꽤 중요한 입지를 가진다. 워낙 많은 종교적 요소가 엮여 어떤 것에 집중해야 할지 때론 혼란스럽다. 그러나 나비를 염두에 두는 것은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나비는 ‘호접지몽’을 배경에 두고 있다. 장자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깨고 나니 자신이 인간의 몸을 한 것이 믿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지금의 모습이 나비로서 꾸는 꿈의 일부인지 혼란스러워한다. 이러한 점에서 삶의 덧없음이 드러난다는 의미가 전해져 내려왔다. 미스터 리드도 이에 관한 내용을 언급하고, 영화의 엔딩에서도 나비가 프레임 안으로 날아든다. 엔딩이 일종의 ‘결론’의 역할을 한다는 영화 텍스트 분석적 관점에서 보면 이 나비의 존재가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헤레틱>은 믿음과 불신 그 너머의 ‘무용함’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봄 직하다. 믿음 혹은 불신의 감정을 느끼고 그것에 매여 살아가는 삶은 얼마나 무용한 것인가. 결국 태어나고 죽는 것까지의 그 과정에서 믿음 혹은 불신이 할애되는 과정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겠는가. 생존과 죽음의 경계에서 반스와 팩스턴이 자신들의 믿음에 관해 딜레마를 느끼듯, 삶의 본질 앞에서 믿음이라는 존재는 그 얼마나 한없이 초라해지는가.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이 이교도라는 뜻을 가진 ‘헤레틱’이라는 단어를 제목으로 사용한 점이 더욱 눈길을 끈다. 우리가 속히 말하는 ‘사이비’에 빠진 이들에게 삶과 죽음 그 사이에서 자신보다 믿음이 더 중요케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존재하는지 알 길이 없는, 심지어는 자신이 신의 전령이라며, 신의 대행이라는 궤변을 늘어놓는 사이비 교주들에게 자신의 삶을 모두 바치는 것이 진정한 삶다운 삶이라 볼 수 있는가. 그런 점에서 영화 종반부에 접어드는 과정에서 보이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반스와 팩스턴을 찾기 위해 마을을 돌던 목사가 그들은 뒷전에 둔 채 미스터 리드의 집 앞에서 그에게 몰몬교를 전파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는 긴장감을 풀어주고, 약한 웃음을 유발하는 일종의 환기 역할을 하는 장면인데, 그 하위 텍스트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덧없음’의 가치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이런 텍스트적 의미를 떠나서도 영화가 서스펜스로부터 공포를 유발하기 위한 여러 장치들을 교묘하게 배치한 것이 인상적이다. 호러 장르에 맞게끔 종교와 믿음에 관한 소재를 적절히 뒤틀어낸 것도 놀라운 점이다. 빈틈없이 치고 나가는 이 작품에는 어떤 단점이 존재하는지 궁금해질 정도다. 개봉 전 관람을 한 관객들의 반응 중에는 “영화가 후반으로 갈수록 힘을 잃고 갈팡질팡한다”는 평이 있었다. 영화의 텍스트가 아닌 전반적인 조화를 눈여겨본다면 충분히 가능할 만한 지적이었다. 심지어 글에서 언급한 텍스트적 논점들 또한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징검다리는 상실한 채 띄엄띄엄 연결된 이야기들이 눈에 밟힌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소재와 장르의 혼합이 꽤 눈부신 작품으로 관객 앞까지 오게 된 것은 호평할 일이다. 종교와 호러는 흔히들 결부해 영상으로 만들어 왔지만, <헤레틱>은 어찌 보면 1차원적이라 할 수 있는 피상적 접합에서 벗어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볼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호러 작품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니 여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듯하다. 극장에서 잘 만들어진 호러 영화 한 편으로 올해도 무더울 여름을 준비해 보는 것은 어떨까. <헤레틱>은 4월 2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 자격으로 시사회에 참석한 뒤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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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랜75 - 또 다른 의미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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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영상은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써 2월 8일 개봉하는 '플랜75'의 개봉전 시사회를 다녀온 뒤 제작된 영상입니다]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가까운 미래의 일본. 청년층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정부는 75세 이상 국민의 죽음을 적극 지원하는 정책 '플랜 75'를 발표한다. 명예퇴직 후 '플랜 75' 신청을 고민하는 78세 여성 '미치' 가족의 신청서를 받은 '플랜 75' 담당 시청 직원 '히로무' 개인별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플랜 75' 콜센터 직원 '요코' '플랜 75' 이용자의 유품을 처리하는 이주노동자 '마리아' '플랜 75'의 세상,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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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흥신소-라떼극장] 산장 내 노이즈 캔슬링 특화가족 '조용한 가족'
영화 흥신소 - 라떼극장 EP.09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영화 "조용한 가족"에서 소중한 추억을 떠올려보자조용하고 소박하게 운영할 산장을 오픈한 가족
하지만 자꾸 시끄러운 일들이 발생하고 외부로 새나갈 잡음 차단을 위해 노력하는데...산장내 비친된 유머와 상상력을 키워줄 그 시절 잡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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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에밀리, 파리에 가다> 시즌 2 공식 예고편
오직 나만을 위해, "Say Oui!" 이번 크리스마스, 마음 가는 대로 즐기는 거야. 돌아온 《에밀리, 파리에 가다》, 곧 공개 예정. 오직 넷플릭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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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보이저스> 메인 예고편
2063년, 극심한 지구 온난화로
미래 세대가 살아갈 새로운 행성을 개척하기 위해
‘인류 이주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완벽한 우성 인자로 태어나 철저하게 격리 훈련을 받은 ‘30명의 탐사대원들’과
이들을 이끌 대장 ‘리처드’는 ‘휴매니타스호’에 탑승해 우주로 향하게 된다.
한편, 일부 탐사대원들은 자신들의 임무에 대해 떨칠 수 없는 의문을 갖게 되고
그들의 생활 속에 밀접한 ‘블루’를 가장 먼저 의심하기 시작한다.
의심의 시작과 함께 비밀과 음모가 하나 둘 밝혀지게 되고
대원들은 곧 겉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인류를 위한 새로운 행성까지 앞으로 86년,
과연 이들은 ‘인류 이주 프로젝트’를 완수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