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BBITGUMI2022-08-15 21:33:54
훌륭한 첩보 액션 그리고 캐릭터로 담은 변혁의 과정
-<헌트>(2022)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암울한 시기에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 애쓴다. 어떤 사람들은 그 상황에 맞추어 그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암울한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의 힘을 저금이나마 보탠다. 그 방식은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이다. 그 힘의 크고 작음은 중요하지 않다.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무언가 사회를 바꿀 행동을 시작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반전의 에너지는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퍼지기 시작한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사회를 바꾸려 애쓴다. 학생, 직장인, 주부 같은 평범한 우리 주변의 사람의 각기 다른 목적이 하나로 모이면서 사회 변혁이라는 큰 흐름을 만들어낸다.
한국사회가 정치적인 혼란기에 있었던 1980년대는 전두환이라는 인물의 군부독재가 계속 이어지던 시기였다. 그런 암울한 시기는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을 계기로 힘이 빠져간다. 완전한 해결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독재라는 껍질을 조금씩 벗을 수 있었다. 그 결과까지 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 다른 경험을 했고 일상 속에서 변화의 기회를 만났다. 그 변화의 기회는 사람들에게 각자의 목적을 만들어주었지만 그 목적에 도달하는 방법은 모두 달랐다. 각자의 목적이 같다는 걸 깨닫기까지에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
1980년대 군부독재 시절 속 가상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영화 <헌트>에는 1980년대 군부독재 시절의 안기부 안으로 카메라를 비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과 사건들은 그 당시의 시대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지만 대체적으로 허구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의 중심인물인 해외팀 박평호 차장(이정재)과 국내팀 김정도 차장(정우성)도 허구의 인물들이다. 이 두 인물을 중심으로 각자가 가지고 있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영상에 담았다. 두 인물이 영화 초반 가지고 있는 공통의 목표는 대통령 암살을 막는 것이다. 아주 단순한 그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부터 두 인물은 껄끄러운 관계를 드러낸다.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서로를 완전히 믿지 못한다.
처음엔 두 인물 모두 대통령을 보호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안기부라는 조직이 원하는 것이고, 두 사람 모두 그것을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 안기부 내부에 ‘동림’이라는 첩자가 있는 것을 알게 되고 동림을 찾기 위한 두 사람이 갈등을 겪는 과정이 이어진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동림이라고 의심하고 총구까지 겨누게 된다. 궁극적으로 이건 조직인 안기부의 목적에 더 가깝다. 두 인물은 그 조직의 목적인 ‘첩자 색출’ 임무에 부합하기 위해 서로 감찰을 피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렇게 서로를 견제하게 된 상황 자체는 안기부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두 팀장 중 누가 하나가 죽거나 조직을 떠나더라도 첩자를 찾아내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두 사람은 대체적으로 안기부의 목적에 충실한 인물들처럼 보인다. 필사적으로 첩자 동림을 찾아내기 위해 매달리기 때문이다. 영화는 두 사람이 의심을 시작하고 파국 직전까지 가는 과정을 무척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첩자 동림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고 각 인물들이 상대방을 추적할 때 전달되는 서스펜스가 끝까지 시선을 잡는다. 여기에 대규모 자동차 추격 장면과 총기 액션 장면을 넣으면서 더욱 흥미진진한 전개를 보여준다. 박차장과 김차장이 서로 의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 영화가 하는 이야기에서 시선을 돌릴 수 없게 만든다.
흥미진진한 첩자 동림을 찾는 과정
영화에서 더 훌륭한 건 후반부다. 후반부에는 첩자 동림이 누군지 드러나고 박차장과 김차장의 목적도 선명해진다. 결과적으로 두 차장은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지만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영화는 그렇게 각 인물이 가지고 있는 목적이 영화 초반에서 후반으로 오면서 드러나는 과정을 세밀히 보여준다. 영화 안에서 두 인물이 가지고 있는 목적이 교차되는 순간이 있다. 어떤 때는 김차장의 목적과 박차장의 목적이 정반대인 것 같아 보여 특정 인물을 의심하게 되지만 결국에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그만큼 영화는 각 인물이 어떤 곳을 보는지에 따라서 섣불리 첩자가 누군지 추측할 수 없게 구성되어 있다.
그러니까 스파이 장르의 특성을 과거 한국 현대사의 한 지점에 적용하여 훌륭하게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두 인물은 국내팀과 해외팀을 맡고 있는 팀장이다. 완전히 다른 곳을 바라보고 다른 방법으로 활동했던 이들의 목적이 같은 곳으로 모이는 모습은 마치 그 당시 사회 변혁을 시도하던 사람들을 보여주는 것 같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 다른 방법으로 군부독재를 끝내려 했지만 그들의 다양한 시도는 오히려 하나의 방법으로 귀결된다. 그 결과는 여러 인물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다양한 시도와 실패를 거듭한 끝에 얻어진 것이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의 목적은 마지막 순간 갈라져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몇 년이 지난 이후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그것이 결국 이루어진다. 영화 속 박차장과 김차장이 서로를 바라보고 대립하며 만들어낸 것들을 결국 후대에서 완전히 다른 삶의 모습을 만들어낸다. 영화 <헌트>는 그 귀결적인 결과까지 보여주진 않지만 관객들이 충분히 그 이후의 일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두 인물에 대한 연민을 느끼게 된다. 박진감 넘치게 구성된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면 꽤 오랜 시간 앉아서 두 인물이 지나온 길이 어땠을지, 그 이후엔 어떤 일들이 있었을지 생각하게 만든다.
현재의 거울처럼 느껴지는 박차장과 김차장 대립의 결과
영화에 등장하는 액션 장면들은 무척 박진감이 넘친다. 10,000발 이상의 총알과 520대의 차량을 이용해 만들어진 전투 장면은 마치 그 현장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세심한 미장센과 로케이션을 통해 보다 사실성을 높였다. 그렇게 탄생한 카체이싱과 총기 액션은 무척 역동적으로 느껴진다. 중반 중반 배치된 액션 장면들은 영화가 늘어질 때즘 한 번씩 등장해 관객이 끝까지 영화에 집중하게 만든다.
영화를 연출한 이정재 감독은 이번 영화가 첫 연출작이다. 오랜 배우 생활에서 터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카메라의 구도나 인물 배치 같은 사소한 것도 무척 완성도 높게 구성하였다. 촬영 전문 감독인 이모개 감독과 함께 만든 영화의 장면들은 무척 공들인 티가 난다. 또한 공동 주연인 정우성 배우를 몇 년 동안 설득한 끝에 캐스팅하였는데 김정도 차장 역할에 무척 잘 어울린다. 슈트가 잘 어울리는 이정재와 정우성이 한 화면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대결을 벌이는 모습은 눈을 즐겁게 한다.
영화 <헌트>는 한국에서 보기 드문 스파이 액션 장르를 제대로 보여준다. 여기에 군부 독재 하에서 사회 변혁을 위해 애썼던 다양한 인물들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갈등을 무척 잘 담아냈다. 현재에도 정치적인 갈등 속에는 다양한 목적들이 섞여있다. 그것은 한 방향으로 모아질 수도 있고 아예 다른 길로 빠질 수도 있다. 군부독재를 하는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좀 더 나은 나라로 만들어내려는 일은 현재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계속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현재와는 상황이 조금 다르지만 영화 속 인물들의 갈등이 현재의 거울처럼 느껴지게 하는 부분도 있다.
여러모로 영화 <헌트>는 이정재 감독의 훌륭한 데뷔작이다. 액션도 이야기도, 캐릭터도 무척 생동감 있는 영화다. 그 당시의 시대상과 북한과의 관계 등도 효과적으로 포함시켜 생각할 거리도 던져주고 있다. 올해 공개된 여름 기대작 중 가장 기대받지 못했던 영화였지만 가장 좋은 완성도와 재미를 가진 영화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정재 감독의 다음 연출작도 기대하게 만든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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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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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넷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베놈: 라스트 댄스>가 국내 개봉 첫 주 약 79만 관객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지만, 시리즈 최저 오프닝 스코어를 기록했습니다. 2018년에 개봉한 시리즈의 1편인 <베놈>은 첫 주 누적 관객 수 약 209만 명을 기록했으며, 2021년 개봉작인 <베놈2: 렛 데어 비 카니지>는 첫 주에 약 109만 명을 동원한 바 있습니다.
북미에서도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지만,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기존에 6,500만 달러로 예상되었던 수치를 훨씬 밑도는 약 5,100만 달러의 오프닝 스코어를 기록했습니다. 이는 1편의 8,000만 달러와 2편의 팬데믹 당시 9,000만 달러의 기록에도 크게 뒤처집니다. 소니 측은 뉴욕 양키스와 LA 다저스의 월드시리즈가 관객의 발길을 집에 머물게 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출처: Variety)
이러한 부진에도 <베놈: 라스트 댄스>는 64개 시장에서 53,700개의 스크린에서 상영 중이며, 중국에서는 4,600만 달러를 기록하며 가장 큰 성과를 냈다고 합니다. 이는 2019년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이후 중국에서 개봉한 슈퍼히어로 영화 중 가장 큰 오프닝이며 멕시코(730만 달러), 한국(580만 달러), 영국(570만 달러), 인도(470만 달러) 등 많은 나라에서 성적을 내고 있습니다.
한편, 여전히 순위권에 안착해 있는 <와일드 로봇>은 79개 시장에서 1,750만 달러를 추가해 해외에서 총 1억 2,090만 달러, 전 세계적으로는 2억 3,200만 달러를 기록하며 순항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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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첫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국내 박스오피스]
디즈니 100주년 영화 <위시>가 개봉 첫 주말 44만 관객을 동원하며 1위에 올라섰습니다.
한편 <노량: 죽음의 바다>는 400만 명을 돌파하면서 2위, <서울의 봄>은 총 관객수 1250만명을
기록했고, 대한민국 최초 41일 연속 일일 관객 수 10만 이상 동원, 총 217회 차의 무대인사를 기록하여
기존 영화계의 흥행 기록들을 갈아 치웠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
티모시 샬라메 주연 <웡카>가 다시 한 번 북미 주말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며 전 세계 매출액 4억 6000만
달러를 넘겼습니다. <웡카>는 개봉 첫 주말 1위에 올랐으나 2주차 주말엔 <아쿠아맨과 로스트 킹덤>에
밀려 한 계단 주저 앉았습니다. 그러나 3주차 주말에 다시 박스오피스 정상을 되찾고 4주차 주말에도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지켰습니다. 한편 제임스 완 감독의 새로운 공포영화 <나이트 스윔>이 2위,
<아쿠아맨과 로스트 킹덤>이 3위에 머물렀지만 글로벌 박스오피스 2억 6천만불을 넘긴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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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소녀가 자란다
이번 주말 태풍 링링이 왔다.(이 글의 초안은 2019년 9월에 작성 됐다.) 집 안에 틀어박혀 잠옷도 안 갈아입은 채로 커피를 내리고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연주하는 프로코피예프와 창 밖의 바람 소리를 동시에 들었다. 몇년에 한번 꼴로 유난히 많은 피해를 남기는 이 9월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얼마나 청명하고 맑은 가을 하늘이 되어있을지 상상한다.
가을은 아무리 생각해도 여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관문 같다. 매년 느끼지만 겨울은 깔끔히 사라지지 않고 3월이고 4월이 될 때까지 차가운 바람으로 길게 꼬리를 드리우며 물러가는데, 여름은 하룻밤을 기점으로 언제 그런 계절이 있었냐는 듯 자취를 감춰 버린다. 그래서 어느 날 현관문을 열었을 때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살갗을 때리면 허망한 기분마저 든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쓰며 한 분기를 살다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해야 갑자기 그 계절을 그리워하며, 여름이 어떤 의미였는지 차분히 돌아보게 된다.
사람들은 저마다 계절에 대해 총체적 감각을 버무린 하나의 이미지로 기억한다. 나에게 몇년 전부터 여름은 영화 <콜럼버스> 속 계절이었는데, 오늘은 거기에 <벌새>까지 더해졌다.
<콜럼버스> 속 케이시는 고향인 콜럼버스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떠나고 싶어한다. 콜럼버스의 모더니즘 건축물들을 사랑하고 아직은 자신이 엄마를 돌봐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도시에서의 삶이 얽매여 있는 것인지 자신이 선택한 것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는다. 답답하기도 하고 괜찮기도 한 일상 속에서 그녀는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진을 우연히 만나며 새로운 기회를 마주치게 된다. 가족, 현재의 일상, 지나온 삶들과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고민하는 두 사람은 푸른 잔디밭과 울창하게 잎사귀를 드리운 나무 아래에서 사리넨의 건축물을 바라본다. <콜럼버스>는 두 주인공 케이시와 진이 각각 선택을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성장 서사인 동시에, 두 사람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선택을 격려한다는 점에서 버디 무비이기도 하다. 두 동료는 뜨거운 여름의 열기와 쏟아지는 장대비를 머금고 있는 콜럼버스의 녹음 속에서 앞을 향해 나아간다.
<벌새> 속 중2 은희의 여름은 1994년 대치동이 무대다. 은희는 보편적이고 평범한 소녀다. 미도상가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부모님과 언니와 오빠와 대치동의 아파트에 살고 있다. 보편적인 은희의 이야기는 가능한한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묘한 향수와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나는 은희처럼 흰 반팔 블라우스와 체크 치마로 구성된 여름 교복을 입고, 머리는 학칙에 맞춰 단발로 자르고 발목을 덮는 흰 양말과 장식이 없는 검은 구두를 신고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영화에 나온 진선여중과 대청중을 졸업한 친구들과 함께 고등학교를 다녔고,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에는 미취학 아동이어서 기억이 희미하지만 동시에 삼풍 백화점과 세월호라는 사회적 비극의 간접 목격자다.
은희의 구체적인 일상은 그래서 비슷한 시대를 지나온 이들의, 그리고 그 나잇대를 지나온 모두의 성장 이야기다. 영화의 끝에서는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고, 춘추복을 입은 여러 소녀들의 얼굴이 비춰진다. 10대 소녀들에게 세상은 어떤 존재일까. 이해할 수 없고, 폭력적이고, 갑갑하지만 때로는 숨통이 트이는 순간이 있고, 즐겁고 행복하고, 그러다 또 갑자기 비극적이기도 한 세상. 비단 10대 소녀들에게만 그런걸까? 대학생인 영지에게도, 아이를 셋 낳은 숙자에게도, 여전히 세상은 그런 곳이다. 살아남은 우리는 그렇게 복잡한 세상을 응시하며 자라간다.
누군가는 여름을 축제의 계절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여름밤의 낭만이나 해변의 불꽃놀이로 기억할지 모른다. 케이시와 은희처럼, 나에게 여름은 도시의 녹음 속에서 차분하게 주시하는 계절이다. 자신을 주시하고 세상을 주시하는. 뜨거운 햇빛과 숨막히는 수분을 양분삼아 소녀들은 나무처럼 가만히 자라난다. 계절이 바뀌면서 햇빛은 한층 기울고 습도는 사라진다. 갑작스러운 찬바람에 당혹스럽고 허전한 기분이 들면 그제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여름 사이 우리의 키가 한뼘 자라있음을.
* 본 콘텐츠는 브런치 Good night and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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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건 럭키 - 스티븐 소더버그
로건 럭키 - 스티븐 소더버그
제목이 조금 특이하다 싶었고, 애덤 드라이버 얼굴이 보여서 재미있을 것 같아 보기 시작했는데, 이게 왠걸. 영화를 보고 나서 찾아보니 감독이 스티븐 소더버그였네. 어쩐지, 연출 솜씨가 대단히 훌륭했는데, 혹시 코언 형제의 손길이 닿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아, 이렇게 말하면 소더버그 감독이 기분 나쁘겠구나.
스티븐 소더버그라면, '오션스' 시리즈로 유명하지만, 나는 그의 데뷔작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부터 봤고, 최근에 가장 인상 깊었던 영화는 '사이드 이펙트'였다. '사이드 이펙트'는 몇 번을 봤는데, 볼 때마다 흥미진진한 영화다.
그런 스티븐 소더버그가 만든 영화였으니, 모르고 봤지만 '로스트 인 더스트'와 '친절한 금자씨'의 착한 버전을 결합한 듯한 기분 좋은 영화다. 등장하는 배우만 해도 알고보면 어마어마한데, 의외로 단역으로 나오는 것도 재미있다.
'007' 주인공 다니엘 크레이그와 영화 끝부분에 엄청 멋지게 나오는 힐러리 스웽크가 그렇다. 배우들 연기는 말할 것도 없이 훌륭하고, 시나리오가 뛰어나다. 시나리오는 레베카 블런트인데, 이 이름은 가명이고 '줄스 애스너'가 본명이다. 특이하게도 시나리오는 이 영화 한 편 뿐이고, 영화감독이자 배우가 본업이다. 주로 TV시리즈 쪽에서 활동을 많이 하고 있다.
웨스트 버지니아에 사는 주인공 지미 로건(채닝 테이텀)은 성실하게 일하던 직장에서 해고당한다. 그가 다리를 전다는 사실을 회사에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의자에 앉아 기계를 조작하는 일이라 다리를 저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지만, 그의 상관은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해고 사유가 된다고 했다. 더 정확하게는 '보험 고위험군'에 속하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지미는 아내와 이혼하고 따로 살고 있지만, 가까운 곳에 살고 있고, 엄마와 함께 사는 딸 세이디를 만나는 시간이 유일하게 행복한 시간이다. 지미의 아내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해 살고 있지만, 양육권과 공동소유의 주택 문제가 남아 있고, 딸이 중간에 있어 딸을 데리러 갈 때마다 얼굴을 본다.
지미는 학생 때 잘 나가던 미식축구 선수였고,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그는 졸업하고 평범한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가 갑자기 해고당한 것이다. 지미는 동네 술집에서 바텐더로 일하는 동생 클라이드를 찾아간다. 클라이드는 왼쪽 팔꿈치 아래가 없다. 중동에 파병나갔을 때 부상당했고, 지금은 한쪽 팔로 바텐더 노릇을 하고 있다.
클라이드의 부상에 관해서 나중에 진실이 드러나는데, 원래 클라이드는 뛰어난 투수였다. 그의 실력이면 내셔널리그에서도 가장 유망한 선수가 분명했는데, 형인 지미가 풋볼을 포기하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클라이드가 선수 생활을 포기하고 자원해서 군인이 되어 중동에 나갔다가 부상당한 것이다.
로건 집안은 징크스가 있는데, 뭔가 하는 일마다 잘 안되고, 악운이 겹친다는 것이다. 1983년 매기 이모가 로또에 당첨되었는데, 복권을 세탁기에 넣고 돌리는 바람에 그 엄청난 행운을 날려버린 것이다. 할아버지 다이아몬드 사건, 삼촌 감전 사고, 아버지가 사고를 당해 보험금을 받았는데, 그 직후 엄마는 병이 나서 앓아 누웠다. 지미는 다리를 다쳤고, 클라이드는 팔목을 날려버렸다. 유일하게 아무 일도 없이 건강한 사람은 막내 멜리 뿐이다.
클라이드가 일하는 술집에서 이야기를 하던 지미는 동생을 놀리는 사내들과 한바탕 싸움을 하고, 클라이드에게 '콜리플라워'라고 외치고 떠난다. 다음날 클라이드는 형이 만들어주는 아침을 먹으면서 '콜리플라워'에 대해 말한다. 이미 모든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던 지미는 클라이드와 함께 레이싱 경기장의 금고를 털자고 말한다.
이 경기장은 매립지 위에 지은 거라서 씽크홀이 발생하는데, 지미는 이 공사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일할 때, 지하 통로를 통해 현금이 오가는 파이프를 보았고, 그때부터 계획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지미와 클라이드는 감옥에 있는 조 뱅을 만나러 간다. 조 뱅(다니엘 크레이그)은 폭파전문가로, 지미 형제와 안면이 있다. 지미는 조 뱅을 설득해 함께 일하기로 한다. 조 뱅은 함께 일하되, 자기의 두 동생도 팀원으로 넣어야 한다고 말한다.
클라이드는 편의점을 자동차로 밀고 들어가 체포되고, 징역 90일의 비교적 가벼운 판결을 받고 '먼로 교도소'에 수감된다. 여기에는 앞서 면회한 '조 뱅'이 있었다.
지미는 딸 세이디를 데리고 막내 멜린이 일하는 미용실에 왔다가 바깥에서 우연히 한 여성을 만나는데, 자선단체에서 일하는 실비아는 같은 학교 후배라고 밝힌다. 하지만 지미는 그가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해고 당한 회사에 짐을 가지러 간 지미는 공사가 일찍 끝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감옥에 있는 동생 클라이드에게 계획을 일주일 앞당기자고 말한다.
레이싱 경기장의 대형 금고에서 일하는 글리마는 택배로 생일케이크를 받는다.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지만, 글리마는 고맙게 생각하며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케이크를 나눠 먹는다. 글리마에게 케이크를 보낸 사람은 미용실에서 일하는 멜리인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들의 인과관계는 밝혀지지 않는다. 어떤 경로든 멜리는 글리마가 레이싱 경기장의 대형 금고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조 뱅의 두 동생은 늦은 밤, 씽크홀 공사장으로 들어가 노출되어 있는 현금수송 파이프를 통해 바퀴벌레를 안으로 들여보낸다. 이 계획은 낮에 글리마에게 케이크를 보낸 것과 연결되는 내용이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한 직원들은 대형 금고 안에서 어제 먹었던 케이크에 바퀴벌레가 잔뜩 붙어 있는 걸 보고 기겁하고, 해충 관리회사 직원을 불러 소독한다. 이때 소독하는 직원이 조 뱅의 두 동생이다. 이들은 작업을 마치고 지미에게 전화해서 '코드 핑크'가 떴다고 말한다. 지미는 멜리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조 뱅은 감옥 동료 네이먼에게 제안을 한다.
연중 가장 큰 레이스가 펼쳐지는 날, 지미는 계획을 실행한다. 먼저, 감옥에서는 교도소장이 식당 점검을 하러 나오고, 모두 문제 없다고 말하는 상황에서 조 뱅이 갑자기 토하고, 병원으로 실려간다. 교도소 병원에서 조 뱅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하고, 그곳에서 일하고 있던 클라이드와 만나 탈옥한다. 이들은 교도소를 드나드는 수송트럭 아래쪽에 나무관을 짜서 붙이고, 그 속에 들어가 숨는다.
감옥에서는 네이먼이 동료들과 함께 폭동을 일으킨다. 교도소장은 '코드 레드'를 선언하고, 교도소를 외부로부터 차단한다.
식당에서 간수 몇 명을 포로로 잡고 농성하는 네이먼과 동료들은 요구조건을 내건다. 폭동의 이유가 웃기는데, 교도소 도서관에 '왕좌의 게임' 5권이 없다는 것이었다. 교도소장은 죄수들이 원하는 책을 곧 구입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네이먼은 6권과 7권도 가져오라고 말한다. 아직 나오지도 않은 책을 달라는 것인데, 교도소장이 아무리 설득해도 이들은 믿지 않는다. 오히려 식당의 폐쇄회로를 차단하고, 창문까지 모두 막은 다음 불을 지른다.
지미는 조 뱅의 두 동생을 깨워 레이싱 경기장으로 가라고 독촉한다. 경기장 바깥에 도착한 두 사람은 통신망이 있는 외부 건물에 폭탄을 제조해 터뜨리고, 경기장 상가의 통신망이 차단된다. 카드결제가 안 되면서 현금만 받는 상황이 벌어지고, 현금은 곧바로 파이프를 타고 대형금고로 모인다.
조카 세이디를 학교에 데려다 준 멜리는 이혼한 새언니의 남편 차를 훔쳐 어느 주유소 앞에서 기다린다. 이 주유소는 교도소를 드나드는 수송트럭이 항상 멈추는 장소를 멜리가 미리 확인해 둔 곳이다. 조 뱅과 클라이드는 수송트럭 바닥에서 내려와 멜리의 차로 옮겨탄다. 알고 보니 멜리는 스피드광이었다. 영화 초반에 이미 멜리가 과속했다는 말이 지미의 이혼한 아내의 말로 나왔지만, 멜리는 차에 대해서도 잘 알고, 스피드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조 뱅과 클라이드는 지하 공사장으로 내려가고, 미리 와 있던 지미와 합류한다. 조 뱅은 젤리, 소금, 펜 같은 평범한 물건들을 조합해 폭탄을 만들어 내는데, 이 장면은 '브레이킹 배드'에서 마약을 만들어내는 화학교사 월터 화이트를 뛰어 넘는, 대단한 화학 지식을 보여준다. 조 뱅은 화학식을 벽에 써가며 이 물질들이 결합해서 어떻게 폭발 효과를 내는지 지미와 클라이드에게 설명한다. 그렇게 튜브를 타고 들어간 폭탄이 터지고, 이들은 다시 튜브를 통해 돈을 빨아들이는 방식으로 대형금고에 있는 돈을 빼내기 시작한다.
돈은 쓰레기 봉투에 담아 밖으로 빼내는데, 조 뱅의 두 형제가 맡는다. 이들이 쓰레기차에 돈봉투를 싣고 나가는 과정에서 약간의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 잠깐의 시간이 매우 중요하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출입문이 열리지 않도록 만든 것도 지미였다.
돈을 다 밖으로 빼낸 이들은 조 뱅과 클라이드가 다시 멜리의 차에 타고 먼로 교도소 근처 소방서에 대기한다. 교도소에서는 네이먼이 식당에 불을 지르고, 화재 신고를 하자 소방차가 출동하고, 조 뱅과 클라이드는 소방차에 숨어 교도소 안으로 들어간다.
멜리는 다시 학교로 돌아와 조카 세이디의 머리를 만져주고, 조 뱅은 교도소 병원 침대에 여전히 누워 있으며, 지미는 세이디의 학교 발표회에 참석한다. 세이디는 원래 부를 노래 대신, 존 댄버의 노래 Take Me Home Country Roads 를 부른다. 이 노래는 영화 전편에 흐르며, 특히 지미가 즐겨 듣는 노래여서 세이디에게도 의미가 있다.
방송에서 경기장 강도 뉴스가 나오고, 경찰과 FBI가 투입된다. FBI 요원 세라(힐러리 스웽크)는 영화 뒷부분에만 나오지만, 영화의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멋진 역할을 보여준다. 세라 요원은 교도소장을 만나 감옥에 있던 조 뱅을 면회한 사람이 지미와 그 동생 클라이드라는 사실을 말한다. 이들은 조 뱅을 두 번 면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클라이드가 편의점을 차로 들이박고 감옥에 들어온 사실을 밝혀낸다. 하지만 교도소장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말한다.
세라 요원은 지미의 핸드폰과 자동차를 추적하지만, 핸드폰은 요금을 내지 않아 정지 상태였고, 자동차는 구형이라 GPS 수신기가 달려 있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90일이 지나면 클라이드가 출옥한다-교도소에서 나오는 클라이드를 멜리가 마중한다. 클라이드는 '국가보훈처'가 찍힌 큰 가방을 하나 받는데, 관객은 내용물을 볼 수 없지만, 그게 돈이라는 건 누구나 안다.
강도 당한 돈은 트럭에 담겨 발견되었고, 뉴스에서는 이들이 '촌뜨기 강도단'이라고 이름 붙인다. 즉, 갖지도 못한 돈을 털었다는 것이다.
조 뱅도 형기가 만료되어 교도소에서 나오고, 클라이드가 일하는 술집을 찾아간다. 조 뱅은 지미의 소식을 캐묻지만 클라이드는 지미가 어디 살고 있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조 뱅도 뉴스에 나오는 소식을 듣고, 빼돌린 돈이 전부 트럭에 실려 있는 걸로 알고 있었다.
조 뱅의 집에 누군가 삽을 놓고 가는데, 조 뱅은 잠시 생각하더니 마당의 큰나무 밑을 파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지미와 클라이드가 교도소로 조 뱅을 만나러 갔을 때 나온 이야기와 연결된다.
그 사이 FBI의 수사는 종결되는데, 돈을 도난당한 '스피드웨이'에서는 보험금을 받아서 만족한다고, 더 이상 수사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한다. 결국 피해자가 없는 셈이 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돈이 어떻게 빼돌려지는가를 보여준다. 단역에 불과했던 멜리가 큰 역할을 한다. 결국 이 모든 계획은 지미에서 시작해 클라이드, 멜리 세 남매가 완벽하게 호흡을 맞춘 것이다.
지미는 자신의 계획에 도움을 준 네이먼, 실비아, 글리마에게 선물을 보낸다. 지미는 엄청난 돈을 숨겨 놓고도 평상의 생활을 그대로 유지한다. 지미는 실비아를 만나고, 멜리는 조 뱅과 데이트를 하며, 클라이드는 술집에 처음 온 세라-바로 그 FBI 요원-를 만난다.
영화를 보고 떠오르는 생각은, 지미가 왜 '스피드웨이' 회사의 대형 금고를 털 생각을 한 것일까였다. 그가 갑자기 해고를 당했기 때문에 화가 나서? 이혼한 아내와의 법정 싸움에 필요한 변호사 비용을 마련하려고? 술집에서 싸운 건방진 레이싱 회사 사장 때문에? 아니면 그 모든 것들이 뒤섞여서?
사건이 발생하고 6개월이 지나 공식적으로는 사건이 종결되었지만, 세라 요원은 이 사건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세라 요원이 술집에 나타난 것은, 앞으로도 이야기가 계속 진행될 것이며, 지미를 비롯한 동료들이 조금만 실수하면 체포당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영화는 훈훈하게 마무리되지만, 세라 요원을 보여줌으로써, 결말을 열어 둔 것이다.
지미는 대기업이 번 돈을 훔치고, 대기업은 잃어버린 돈을 보험을 통해 더 많은 수익을 얻게 된다. 세라 요원이 스피드웨이 사장에게 하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잃어버린 돈의 총액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보험금을 산정할 수 있는가. 이들은 막대한 자본이 움직이는데 서로의 이익이 되는 쪽으로 행동한다. 보험사는 보험금을 지급하지만, 그 돈 역시 자기 돈이 아니며, 거액의 보험금이라 해도, 전체로 보면 푼돈에 불과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시나리오가 좋은 영화는 많은 제작비를 들이지 않아도 재미있게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다. 여기에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와 능력 있는 감독의 연출이 결합하면, 이렇게 재미있는 영화가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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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결말포함 해석 스포] 그레이스 [Alias Grace] 캐나다 드라마 vs 퀵샌드 : 나의 다정한 마야 [Quicksand] 스웨덴 드라마
지인의 추천으로 그레이스를 보고, 몰입감 높은 드라마에 대한 열망에 이런저런 작품을 기웃거리다 아껴놓은 작품 중 하나인 퀵샌드를 보게 되었다.
보통은 한 작품 정리해 놓지만, 이 두 작품은 함께 정리하고 싶은 내용이 많아서 묶어서 올린다.
그레이스와 퀵샌드는 모두 살인범으로 몰린 여주인공을 중심으로 스토리가 진행된다. 그래서 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비슷한 듯 보인다. 하지만 드라마를 깊게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면이 보이기 시작한다.
(앞으로 작성될 글에는 결말과 개인적인 작품 해석이 들어갈 예정)살인죄로 복역 중인 그레이스에게 한 정신과 의사가 찾아온다. 의사가 그레이스를 찾은 이유는 한 남자에게 그레이스가 풀려날 수 있게 정신감정을 내려 달라는 부탁 비슷한 압력을 받았기 때문. 하지만 의사는 어떤 편견도 없이 그레이스를 상담하기 시작한다. 그레이스는 그 의사에게 자신의 불후했던 과거를 하나씩 풀어내기 시작한다.
드라마를 보는 이들은 의사와 함께 그레이스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어머니의 죽음, 아버지의 성추행과 학대, 가장 친밀했던 처음 사귄 친구의 죽음까지. 의사는 그레이스가 선량한 피해자이기를 바라지만, 그레이스의 작은 행동과 이야기 속에서 그녀가 선량한 피해자가 아닐 수 있다는 찜찜함을 지울 수가 없다. 나 역시 주인공인 그레이스가 선량한 피해자이기를 원했지만 그녀가 의사를 통제하려는 행동과 모든 것을 자신의 관점에서 유리하게 전하는 과정에서 그녀에 대한 찜찜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레이스는 자신의 불행을 이야기하며 동정심을 얻는 한편, 죽은 친구의 이야기를 하며 자신 안에 그 친구의 영혼이 들어와 있다는 이야기를 자꾸 흘린다. 마치 자신이 살인을 했을 수 있지만 그건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는 식으로 말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그레이스는 선량한 사람이 아니다. 사실 처음부터 그레이스가 살인에 동조했을 것이라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봤다. 그저 시대가 만들어낸 희생양인가, 아니면 소시오패스인가가 작품을 보는 내내 나의 관심사였다.
그레이스에 대한 의심의 씨앗은 그녀의 가정에 있었다. 그레이스는 아버지 손에 팔려 한 귀족의 집에 하녀로 들어가게 된다. 그녀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에게는 동생들이 있었는데, 그레이스는 자신이 떠나고 가족을 돌보게 될 여동생을 걱정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레이스가 동생을 생각하는 것 같지만, 친구가 그레이스에게 "네가 돈을 보내봤자, 아버지가 그 돈을 탕진할 거야. 동생들은 돈을 받을 수 없어"라고 말하고, 그레이스는 마치 그런 말을 기다렸다는 듯 자신이 번 돈을 집으로 보내지 않는다. 그리고 그 뒤로도 동생들을 걱정한다거나, 동생들을 찾아가는 행동을 전혀 하지 않는다. 학대받았던 소녀가 집에 동생이라는 인질이 있는데, 이렇게 대쪽같이 학대자인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을 수 있을까? 어려운 일이라고 본다.
그레이스와 엮였던 사람들은 그녀의 미모에 가려진 악랄함을 말한다. 그레이스의 말도 믿지 않았지만 그들의 말도 의심했던 내가 마지막 화를 보고 나서야 그들의 말을 반쯤 믿게 되었다. 그레이스가 자신은 타인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준다고 한 것. 그렇다면 의사에게 했던 말들은 그레이스가 선량한 사람이길 바랐던 그의 바람을 이야기했던 것이 된다.
그렇다면 살인 공범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또 다른 여인 마야는 어떤 사람일까?앞에 몇 신을 놓친다면 퀵샌드는 로맨스 드라마처럼 보일 수 있다. 재벌집 소년의 사랑 고백을 받은 사랑스러운 평범한 소녀. 그리고 그 둘의 사랑 이야기. 마치 평범한 소녀가 왕자님을 만나 잘 먹고 잘 살았다로 끝날 것 같았던 드라마는 '사람이 늪에 빠진 것처럼 헤어 나오기 힘든 상황'이라는 뜻의 제목 '퀵샌드'처럼 스릴러로 끝을 맺게 된다.
재벌집 소년이 자신에게 고백했을 때 마야는 친구에게, 그는 원한다면 누구와도 사귈 수 있는 사람인데 왜 자신을 선택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 이야기를 한다. 마치 선택받았으니 그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듯 말이다.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돈 많은 남자가 자길 좋아해 준다고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거기에 한몫하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다. 성격적 결함이 있는 마야의 남자친구이지만, 사람들은 그가 많은 돈을 가진 아버지를 뒀다는 이유로 꽤 괜찮은 사람으로 봐준다.
모성애가 많은 마야는 어머니의 부재와 아버지의 학대 속에서 비틀어질 대로 비틀어진 재벌집 소년을 자신이 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로맨스였다면 소년은 사람이 되고 둘은 행복하게 살았겠지만, 퀵샌드는 매우 현실적인 드라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옛말처럼 재벌집 소년은 점점 더 비틀어지고 엇나가는 약쟁이가 된다. 그리고 그를 돌보는 동시에 그에게 지배당한 마야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점점 더 망가진다.
그레이스를 보면서 주인공이 악녀인가 아닌가를 알고자 했다면, 퀵샌드는 주인공 마야가 언제 정신을 차리고 수렁에서 벗어날지가 관심사였다. 마야는 수렁에서 벗어나려 노력했지만 주변에서는 아무도 그녀의 상황을 알아주지 않는다. 무뢰한인 남자친구 때문에 힘들다는 마야의 말에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가 한 말은, '그러니까 네가 그를 감싸주고 변하도록 도와줘야지'였다. 주변 사람들의 이런 태도 때문에 마야는 그에게 발목을 잡히게 된다.
남자친구의 약 중독과 무뢰한 적 행동이 계속해서 심해지고, 마야는 마지막 몸부림으로 그에게 헤어지자고 한다. 이때 그녀의 남자친구는 여느 심리조종자들처럼 자살시도를 하게 된다. 마야는 결국 그에게 다시 돌아간다. 사람들은 물론 마야 자신도 알고자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전형적인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였다. 더 이상 가해자인 남자친구를 떠날 수 없다고 느낀 마야는 그와 함께 점점 더 망가지고, 결국 그에게 휩쓸려 반친구들에게 총기를 난사한 살인 공범으로 몰리게 된다.
상황은 비슷했지만 성격이 전혀 달랐던 두 주인공, 그레이스와 마야.
몰입도 높은 그레이스와 퀵샌드를 보면 누구나 시간 순삭의 늪에 빠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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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동 결심하게 해주는 스포츠 영화 7선
"진정한 새해는 2월부터다!"를 외치는 건 에디터뿐이 아니겠죠...?
어김없이 올해도 신년 목표로 '운동'을 넣어두었지만, 에디터처럼 나약한 의지를 가진 동지들을 위해
단숨에 운동 결심하게 만들어주는 스포츠 영화 7편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딱 1편만 더 보고 운동하러 가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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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괴물 복싱 챔피언과 견자단의 대결 시간 순삭 무술 액션의 끝판왕 엽문2 [결말포함]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결말포함된 영상이니 시청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엽문2 이 영화는 원 저작권자의 사용허가를 받은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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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딜리버리 - 아이빼고 다 가진 금수저 부부 VS 아이빼고 다 부족한 MZ커플의 위험한 거래
*해당 리뷰영상은 영화배급사 마노엔터테인먼트를 통해 저작권 협의가 진행되어 제작된 영상입니다
유산 상속을 위해 아이가 필요한 금수저 부부 ‘귀남’(김영민)과 ‘우희’(권소현).
계획 없는 임신을 해서 난감해진 개털 백수 커플 ‘미자’(권소현)와 ‘달수’(강태우).
‘미자’와 ‘달수’는 생활고로 인해 안타까운 결심을 하고, 하필 ‘귀남’이 있는 산부인과를 찾게 된다!
그리고 ‘우희’의 아버지 ‘태식’(동방우)을 속이기 위해 금수저 부부는 임신 사기극을 계획하는데…
올 가을 가장 버라이어티한 공동 태교가 시작된다!
11월 20일 대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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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나의 흑역사 로맨티카> 30초 예고편
언제 죽을지 몰라도 뜨거운 사랑은 하고싶은 마르타.
데이트 앱을 켜 운명의 남자를 찾기 시작하는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어째 단 한 명도 없다!?
하지만 포기 직전의 마르타에게도 기적은 있었으니.. 이시대의 완벽남 아르투로가 눈앞에 나타났다!
첫눈에 사랑에 빠진 마르타는 아찔한 흑역사를 생성하고,
그 대가로 단 한번의 저녁 식사 기회를 얻게 되는데..!
우리가 사랑에 빠질 확률 9.5%
마르타의 목숨을 건 작전은 성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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