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BBITGUMI2022-08-15 21:33:54
훌륭한 첩보 액션 그리고 캐릭터로 담은 변혁의 과정
-<헌트>(2022)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암울한 시기에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 애쓴다. 어떤 사람들은 그 상황에 맞추어 그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암울한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의 힘을 저금이나마 보탠다. 그 방식은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이다. 그 힘의 크고 작음은 중요하지 않다.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무언가 사회를 바꿀 행동을 시작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반전의 에너지는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퍼지기 시작한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사회를 바꾸려 애쓴다. 학생, 직장인, 주부 같은 평범한 우리 주변의 사람의 각기 다른 목적이 하나로 모이면서 사회 변혁이라는 큰 흐름을 만들어낸다.
한국사회가 정치적인 혼란기에 있었던 1980년대는 전두환이라는 인물의 군부독재가 계속 이어지던 시기였다. 그런 암울한 시기는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을 계기로 힘이 빠져간다. 완전한 해결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독재라는 껍질을 조금씩 벗을 수 있었다. 그 결과까지 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 다른 경험을 했고 일상 속에서 변화의 기회를 만났다. 그 변화의 기회는 사람들에게 각자의 목적을 만들어주었지만 그 목적에 도달하는 방법은 모두 달랐다. 각자의 목적이 같다는 걸 깨닫기까지에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
1980년대 군부독재 시절 속 가상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영화 <헌트>에는 1980년대 군부독재 시절의 안기부 안으로 카메라를 비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과 사건들은 그 당시의 시대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지만 대체적으로 허구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의 중심인물인 해외팀 박평호 차장(이정재)과 국내팀 김정도 차장(정우성)도 허구의 인물들이다. 이 두 인물을 중심으로 각자가 가지고 있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영상에 담았다. 두 인물이 영화 초반 가지고 있는 공통의 목표는 대통령 암살을 막는 것이다. 아주 단순한 그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부터 두 인물은 껄끄러운 관계를 드러낸다.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서로를 완전히 믿지 못한다.
처음엔 두 인물 모두 대통령을 보호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안기부라는 조직이 원하는 것이고, 두 사람 모두 그것을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 안기부 내부에 ‘동림’이라는 첩자가 있는 것을 알게 되고 동림을 찾기 위한 두 사람이 갈등을 겪는 과정이 이어진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동림이라고 의심하고 총구까지 겨누게 된다. 궁극적으로 이건 조직인 안기부의 목적에 더 가깝다. 두 인물은 그 조직의 목적인 ‘첩자 색출’ 임무에 부합하기 위해 서로 감찰을 피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렇게 서로를 견제하게 된 상황 자체는 안기부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두 팀장 중 누가 하나가 죽거나 조직을 떠나더라도 첩자를 찾아내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두 사람은 대체적으로 안기부의 목적에 충실한 인물들처럼 보인다. 필사적으로 첩자 동림을 찾아내기 위해 매달리기 때문이다. 영화는 두 사람이 의심을 시작하고 파국 직전까지 가는 과정을 무척 흥미진진하게 보여준다. ‘첩자 동림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고 각 인물들이 상대방을 추적할 때 전달되는 서스펜스가 끝까지 시선을 잡는다. 여기에 대규모 자동차 추격 장면과 총기 액션 장면을 넣으면서 더욱 흥미진진한 전개를 보여준다. 박차장과 김차장이 서로 의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 영화가 하는 이야기에서 시선을 돌릴 수 없게 만든다.
흥미진진한 첩자 동림을 찾는 과정
영화에서 더 훌륭한 건 후반부다. 후반부에는 첩자 동림이 누군지 드러나고 박차장과 김차장의 목적도 선명해진다. 결과적으로 두 차장은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지만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영화는 그렇게 각 인물이 가지고 있는 목적이 영화 초반에서 후반으로 오면서 드러나는 과정을 세밀히 보여준다. 영화 안에서 두 인물이 가지고 있는 목적이 교차되는 순간이 있다. 어떤 때는 김차장의 목적과 박차장의 목적이 정반대인 것 같아 보여 특정 인물을 의심하게 되지만 결국에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그만큼 영화는 각 인물이 어떤 곳을 보는지에 따라서 섣불리 첩자가 누군지 추측할 수 없게 구성되어 있다.
그러니까 스파이 장르의 특성을 과거 한국 현대사의 한 지점에 적용하여 훌륭하게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두 인물은 국내팀과 해외팀을 맡고 있는 팀장이다. 완전히 다른 곳을 바라보고 다른 방법으로 활동했던 이들의 목적이 같은 곳으로 모이는 모습은 마치 그 당시 사회 변혁을 시도하던 사람들을 보여주는 것 같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 다른 방법으로 군부독재를 끝내려 했지만 그들의 다양한 시도는 오히려 하나의 방법으로 귀결된다. 그 결과는 여러 인물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다양한 시도와 실패를 거듭한 끝에 얻어진 것이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의 목적은 마지막 순간 갈라져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몇 년이 지난 이후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그것이 결국 이루어진다. 영화 속 박차장과 김차장이 서로를 바라보고 대립하며 만들어낸 것들을 결국 후대에서 완전히 다른 삶의 모습을 만들어낸다. 영화 <헌트>는 그 귀결적인 결과까지 보여주진 않지만 관객들이 충분히 그 이후의 일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두 인물에 대한 연민을 느끼게 된다. 박진감 넘치게 구성된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면 꽤 오랜 시간 앉아서 두 인물이 지나온 길이 어땠을지, 그 이후엔 어떤 일들이 있었을지 생각하게 만든다.
현재의 거울처럼 느껴지는 박차장과 김차장 대립의 결과
영화에 등장하는 액션 장면들은 무척 박진감이 넘친다. 10,000발 이상의 총알과 520대의 차량을 이용해 만들어진 전투 장면은 마치 그 현장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세심한 미장센과 로케이션을 통해 보다 사실성을 높였다. 그렇게 탄생한 카체이싱과 총기 액션은 무척 역동적으로 느껴진다. 중반 중반 배치된 액션 장면들은 영화가 늘어질 때즘 한 번씩 등장해 관객이 끝까지 영화에 집중하게 만든다.
영화를 연출한 이정재 감독은 이번 영화가 첫 연출작이다. 오랜 배우 생활에서 터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카메라의 구도나 인물 배치 같은 사소한 것도 무척 완성도 높게 구성하였다. 촬영 전문 감독인 이모개 감독과 함께 만든 영화의 장면들은 무척 공들인 티가 난다. 또한 공동 주연인 정우성 배우를 몇 년 동안 설득한 끝에 캐스팅하였는데 김정도 차장 역할에 무척 잘 어울린다. 슈트가 잘 어울리는 이정재와 정우성이 한 화면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대결을 벌이는 모습은 눈을 즐겁게 한다.
영화 <헌트>는 한국에서 보기 드문 스파이 액션 장르를 제대로 보여준다. 여기에 군부 독재 하에서 사회 변혁을 위해 애썼던 다양한 인물들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갈등을 무척 잘 담아냈다. 현재에도 정치적인 갈등 속에는 다양한 목적들이 섞여있다. 그것은 한 방향으로 모아질 수도 있고 아예 다른 길로 빠질 수도 있다. 군부독재를 하는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좀 더 나은 나라로 만들어내려는 일은 현재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계속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현재와는 상황이 조금 다르지만 영화 속 인물들의 갈등이 현재의 거울처럼 느껴지게 하는 부분도 있다.
여러모로 영화 <헌트>는 이정재 감독의 훌륭한 데뷔작이다. 액션도 이야기도, 캐릭터도 무척 생동감 있는 영화다. 그 당시의 시대상과 북한과의 관계 등도 효과적으로 포함시켜 생각할 거리도 던져주고 있다. 올해 공개된 여름 기대작 중 가장 기대받지 못했던 영화였지만 가장 좋은 완성도와 재미를 가진 영화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정재 감독의 다음 연출작도 기대하게 만든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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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은 흐르지만, 기억은 여전히 우리의 내면을 뒤흔든다
영화 <하얼빈>이 개봉된 후 극장가와 온라인 커뮤니티 곳곳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어떤 관객은 이 작품을 ‘엄숙하게 다시 써 내려간 독립운동의 한 페이지’라고 평하고, 또 누군가는 ‘감정적으로 울컥하게 만들면서도 담담하게 흘러가는 독특한 분위기’에 주목한다. 개봉을 기다려온 사람들 중에는 앞서 안중근을 다룬 여러 작품을 기억하는 이도 있고, 이제 막 안중근이라는 인물과 그의 역사적 역할을 자세히 접하는 이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관객들이 공통적으로 ‘언제 이런 순간이 다시 와도 우리는 과연 옳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곱씹으며 극장을 나선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얼빈>은 단순한 역사극을 넘어, 현재를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무겁고도 절실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영화 속에서 안중근(현빈 분)과 독립 투사들은 러시아와 만주가 뒤섞인 복잡다단한 국경 지대, 그중에서도 하얼빈을 활동 무대로 삼는다. 시대는 1909년. 대한제국이라는 이름이 무색해질 만큼 이미 조선 땅은 일본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중근과 동지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걸고 필사의 싸움을 이어간다. 그들은 하얼빈의 얼어붙은 기차역, 어둡고 취약한 뒷골목을 거점 삼아, 비밀리에 정보를 교환하고 작전을 짜낸다. 눈 내리는 겨울, 혹독한 추위 속에서 고국으로부터의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고, 거대한 제국의 압박은 점점 더 거칠게 이들을 죄어 온다.
그러나 영화는 안중근과 동지들의 처절한 현실을 단순히 영웅적 의지로만 채우지 않는다. 필사적으로 맞서야 한다는 당위는 분명하지만, 눈앞의 죽음을 피할 방법이 마땅치 않고, 주변을 살펴보면 배신과 협잡이 난무하며, 내부에서도 서로 다른 노선을 주장하는 갈등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 <하얼빈>은 ‘독립 투쟁’의 표면 뒤에 묻혀 있는 수많은 난관과 엇갈린 이해관계, 인간적인 번민을 담담하게 그려낸다.독립 투사들의 인간적 번민
이렇듯 실제 역사적 사건인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향해 치닫는 과정이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이 안에서 새로운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거기서 관객은 ‘나라를 되찾기 위한 투쟁’이라는 거대 담론과, ‘한 사람의 인간 안중근’이 겪는 작고 숨 막히는 고민 사이에서 끊임없이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이런 부분에서 <하얼빈>이 이전에 안중근을 다뤘던 영화 <영웅>과 <도마 안중근>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보는 것은 흥미롭다. 영화 <영웅>은 뮤지컬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틱한 감정선에 강점을 두어, 안중근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결연한 의지와 함께 감동을 자아내는 노래들로 극의 정서를 극대화했다. 반면 <도마 안중근>은 안중근의 재판 과정과 그가 가톨릭 신자로서 품고 있던 신념, 그리고 ‘도마’라는 세례명을 부각해, 그가 총을 들 수밖에 없었던 신앙적·윤리적 갈등을 깊게 파고들었다. 완성도를 떠나 이런 시도들은 '안중근' 이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보려는 시도들이었다.
이에 비해 <하얼빈>의 안중근은 묵묵하고, 동시에 인간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자세히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는 안중근이 태생부터 ‘결단력으로 가득한 의인’으로 그려지기보다는, 처절한 현실 속에서 “과연 내가 옳은 길을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되뇌며 심리적 갈등을 겪는 존재로 나타난다. 스스로가 택한 길에 한 치의 후회도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길에 따라붙는 죽음의 그림자와 가족, 동지들의 희생, 그리고 실패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그를 옥죄인다. <하얼빈>의 안중근은 그래서 더욱 현실적인 감정을 이끌어낸다. 영웅서사로만 보면 희생과 결단이 낭만적으로 비칠 수 있지만, 정작 당사자는 ‘내가 정말 이 모든 걸 감당해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안고 있기 마련이다.그렇다면 안중근의 심리적 고민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을까. 영화가 비추는 장면들을 보면, 먼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길’이라는 명분 안에 어떤 감정이 담겨 있는지를 직시하게 된다. 독립운동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인간적인 두려움과 슬픔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지만, 이토록 거대한 상대를 저격하는 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 혹은 일이 성공한 뒤에 남아 있는 것은 과연 자유일까, 아니면 또 다른 폭력의 시대일까 하는 걱정 또한 안중근의 머릿속에 찾아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내부의 신념,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겹치며, 그는 스스로를 극한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영화는 이러한 심리를 매우 건조하고 진지한 톤으로 그려내며, 관객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라고.
안중근의 인간적 고민들
안중근이 이런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가 현실을 매우 또렷하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매 순간 실패와 죽음을 예견하는 일이다. 배후 세력이 든든히 버티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근거지를 안전하게 마련할 방법도 없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조국은 더욱 식민지화되어 간다. 반역자나 스파이의 위협도 끊이지 않는다. 이처럼 너무나도 불리하고 암울한 환경에서도, 개인이 할 수 있는 선택지가 거의 없다는 점이 그를 고뇌하게 만든다.
동시에, 그가 만일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에 총알을 꽂는다면, 적어도 전 세계에 조선을 도살장에서 끌려가는 짐승 취급하지 말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이토는 일본 제국의 상징적인 인물이자 침략 정책의 주체였으므로, 그를 제거한다는 행동이 동아시아의 정세에 어떤 충격을 불러올 수 있는지 안중근은 명확히 알고 있었다. 즉, ‘나라가 망할지언정, 우리 민족의 끈질긴 투쟁을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절박함이 그에게는 존재했다. 이는 단순한 애국심 이상의, ‘나와 동시대인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왜 다시 안중근을 떠올려야 할까. 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면, 안중근의 행위는 단순히 ‘역사적 의거’가 아니라, 억압받는 개인과 국가가 저항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과정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현재의 대한민국 정치는 여전히 치열한 대립 구도를 안고 있다. 서로 다른 이념과 이해관계 속에서, 때로는 법과 원칙이 무너지고, 부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쥐려는 움직임이 감지되기도 한다.
계엄령이나 내란과 같은 단어가 뉴스 헤드라인에 등장할 정도로 정세가 혼란스러운 상황이라고 가정해보자.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100여 년 전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고자 했던 안중근의 ‘간절함’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의 총성은 단순한 살상 행위가 아닌, 더 넓고 깊은 맥락에서 ‘정의를 외치는 나팔소리’였고, 그 울림은 우리 사회가 지금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점검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독립군은 어떻게 되었을까. 당장은 잔혹한 현실 앞에서 무너져내리는 듯 보이지만, 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선다는 암시를 영화는 마지막 장면까지 내비친다. 역사적으로도 알고 있듯, 안중근 이후로도 독립운동은 수많은 형태로 전개되었다. 만주 벌판을 누비는 무장투쟁 세력부터 해외 각지의 외교 활동까지, 일제강점기 내내 ‘해방’을 꿈꾸는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바로 그 끈질긴 의지를 오늘의 관객에게도 전해주면서, <하얼빈>은 우리에게 묵직한 메시지를 남긴다. ‘힘들다고 해서, 혹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멈춰 서선 안 된다. 어떤 형태로든 계속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길이다.’ 이러한 격려는 지금을 사는 이들에게도 분명히 힘이 된다.
영화에서 보이는 현실의 정치상황
물론 <하얼빈>은 이야기의 전개가 다소 느리고, 말 그대로 ‘건조한 듯 진지하게’ 흘러간다는 점에서 일부 관객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전투 장면이나 의거 장면에서 극적인 음악과 연출을 더해 감정선을 폭발시키는 방법도 있지만, 우민호 감독은 이를 절제하고 차분하게 상황을 쌓아 올리는 방식을 택했다. 이 덕분에 영화 전체가 허황된 영웅주의에 기댄다기보다는, ‘정말 그 시대에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살고 고민했겠구나’라는 현실감을 심어준다. 관객에게는 인내심을 요구하지만, 그 인내 끝에 오는 묵직한 감동이야말로 <하얼빈>이 가진 특별한 강점이다.
여기에 배우들의 연기도 큰 몫을 한다. 안중근을 맡은 현빈의 연기는 서사를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표현한다. 그는 안중근이라는 인물을 ‘말없이 굳센’ 동시에 ‘내면의 흔들림이 분명한’ 상태로 끌고 간다. 대사를 통해 감정을 일거에 폭발시키기보다는, 상황과 상황 사이에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 다짐을 되뇌는 듯한 미묘한 눈빛 변화로 캐릭터의 심리를 전달한다. 동지로 나오는 조우진, 유지태, 전광렬 등 중견 배우들의 연기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거창한 애국심을 노래하기보다, 항시 떠나는 자들의 슬픔을 눈빛으로만 보여주고, 은밀한 접선을 기다리는 초조함을 낮은 목소리로만 드러낸다. 그러니 영화를 보고 나면, 그저 웅장한 역사극 한 편을 본 것이 아니라, 한 세기를 뛰어넘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람들의 숨소리를 듣고 나온 듯한 느낌이 든다.
우민호 감독의 연출 스타일 역시 이런 연기에 잘 어우러진다. 그는 이미 <내부자들>, <마약왕> 등을 통해 인물의 내면을 깊숙이 파고드는 방식을 선호한다는 걸 보여주었다. 이번 <하얼빈>에서는 더욱 절제되고 묵묵하게, 시대의 풍경을 탁하게 그려내면서도 인물의 감정선을 놓치지 않는다. 때로는 극적인 클로즈업 대신 인물들을 배경에 작게 배치한 채, 눈 쌓인 하얼빈 거리나 기차역 풍경과 함께 묘사함으로써 시대적 고독과 혹독함을 배가시킨다. 덕분에 영화의 미장센이 매우 사실적이며, 동시에 서늘한 느낌을 전달한다.
결국, 지금 계엄과 내란의 기운이 감돈다는 뉴스가 흘러나올 정도로 정치적 혼돈이 이어지고 있는 이 시대에, <하얼빈>은 다시 한 번 우리가 어떻게 역사를 기억하고,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하는지를 되묻는다. 온전한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 누군가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투쟁했다. 그 정신을 잊은 채, 그저 분열과 힘겨루기에 빠져 있다면, 과연 우리는 100년 전 독립투사들의 발자취로부터 무엇을 배운 것인가. 영화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지는 안중근의 망설임, 결단, 그리고 최후의 총성은 지금 우리의 현실과도 끈질기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마지막 장면에서, 혹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우리는 이 작품이 단지 ‘역사 재현’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 여기’에서 여전히 유효한 독립군의 정신, 잃지 말아야 할 자유와 인간의 존엄, 그리고 무엇보다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용기가 진정한 <하얼빈>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그 메시지는 한국인들에게 특별한 공감대를 형성하며, 정치적 혼돈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기 쉬운 이 시점에 더없이 소중한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몇몇 관객에게는 결코 가볍게만 볼 수 없는, 그러나 반드시 마음 한구석에 새겨야 할 작품이다. 어쩌면 그것이 <하얼빈>이 우리에게 주는 ‘차분하지만 강력한 울림’의 진짜 의미가 아닐까. 이 영화를 지루하다고만 치부하기에는, 지금 우리의 현실에 너무나도 절실한 목소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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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추천작] 키즈 도슨트와 함께 애니메이션을!
이번 시간은 제10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씨네랩 크리에이터 기자단으로 참여한 일정 중 하나로, 영화에 대한 아이들 시선과 생각을 느낄 수 있는 키즈 도슨트와 함께한 국내외 단편 애니메이션 6편의 짤막한 리뷰입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에서 관람객들에게 전시물을 설명하는 안내인을 뜻하는 도슨트, 어리지만 열심히 준비한 정민규, 김한나 어린이가 상영에 앞서 ‘나쁜 친구’, ‘건전지 아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었고, 관심 있게 볼 포인트를 짚어주었습니다. 상상력 가득한 시선으로 색다른 관점의 재미를 찾을 수 있도록 차분히 설명해 주어서 아이들의 노력과 열정을 느낄 수 있었고, 각 작품의 다양성에 대한 접근이 좋아서 짧은 단편 애니메이션이었지만 즐겁게 볼 수 있었습니다.
01. 나쁜 친구
어린 시절, 주변에 있는 여러 사물, 생명체나 보이지 않는 존재에도 이름을 붙이고 말을 걸기도 하며 다양한 친구들을 만들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잊어먹게 됩니다. 이야기는 무엇과도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꿈같은 여섯 살 무렵의 시절을 보여줍니다. 한창 보살핌이 필요한 제연이, 며칠간 집을 비운 엄마와의 안부 전화에 친구 스위티를 언급하며 재잘거리지만, 상상 속 충치 벌레인 스위티는 결국 친해진 대가로 치과에 가게 되고 치료를 받은 뒤 둘 사이는 예전 같지 않게 되죠. 스위티가 전처럼 웃어도 고개를 홱 돌려 모르는 척하고 이제는 할머니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양치를 합니다. 그런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스위티는 어디론가 사라지죠. 하기 싫은 양치질에 생겨난 충치, 씁쓸한 치료의 기억과 함께 사라져가는 무형의 친구는 어떻게 됐을까요?
02. 건전지 아빠
털실과 구름 솜으로 제작한 인형 캐릭터가 눈길을 사로잡는 인간 가족을 위해 밤낮으로 일하는 건전지 아빠의 일상을 따라가는 작품입니다. 아침에 잠을 깨우는 시계의 자명종, 점심에는 아이가 가지고 노는 공룡 로봇, 저녁에는 아빠 손에 쥐어진 TV 리모컨으로 활약하고, 새벽에는 전자 모기채로 가족의 밤잠을 방해하는 모기를 퇴치하는 열혈 아빠의 모습을 담습니다. 그리고 야외로 놀러 갔을 때 갑작스러운 폭우에서 가족들을 구하게 되는 손전등으로 자신을 희생하죠. 그렇게 건전지로서의 운명이 다 했나 싶었지만, 힘겹게 돌아온 집에서 아이들의 사랑으로 다시금 충천되는 모습을 담습니다. 의인화를 통해 가족 생계를 위해 노력하는 아빠가 아이들에게서 힘든 하루를 보상받고 위로받는다는 보편적 이야기를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재미있게 풀어갑니다.
03. 내 친구 물방울
작열하는 태양의 열기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식물 용을 만난 물방울이 함께하는 여정을 그린 작품으로, 처음에는 도움을 받는 입장이지만 계속되는 더위에 식물 용 또한 생기를 잃어갑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오로지 자신만이 그를 구할 수 있음을 깨닫고 희생을 통해 다시금 생명을 지키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죠. 우정과 희생이라는 테두리에 자연 순환적인 생태계의 그림을 넣어서 아이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짧지만 인상적인 메시지를 전달해 줍니다. 파리의 디자인&애니메이션 사립학교 학생들의 작품인 만큼 표현에 있어서 더욱 간결하고 재미있게 그려져있습니다.
04. 두려움을 떨쳐낼 용기
바다를 무서워하는 해달이 자신에게 소중한 분홍색 조개 목걸이를 바다에 빠드리면서 두려움에 맞서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태어나고 가족의 품을 벗어나 새로운 환경과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저마다의 노력이 필요하고 낯설고 어색한 순간을 넘어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한 법이죠. 해달에게도 두려운 그 순간, 자신에게 손을 내밀며 용기를 주는 존재가 나타납니다. 결국 새로운 세계를 향해 발을 내딛게 되는 아이들 또한 그러한 용기가 필요하고 이를 잘 이끌어 줄 부모를 포함한 주변의 역할이 중요하며, 이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도 필요하다는 걸 말합니다. 누구나 처음은 어색할 수밖에 없고, 받아들이는 과정과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그 순간을 뛰어넘어 나아가는 아이들을 올바르게 이끌어 줄 우리의 역할이 중요함을 다시 느끼게 해줍니다.
05. 친구에게 양보를!
한 아이가 아빠와 같이 잡은 물고기를 혼자서 사냥을 하지 못하는 새끼 곰에게 나누어주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아빠는 힘들게 잡은 물고기를 나누어주는 아들을 혼내죠. 결국 몰래 나눠주다 들키게 되고 아빠가 새끼 곰을 쫓아내려는 걸 막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집니다. 아이는 그곳에 쌓여있는 물고기와 다친 엄마 곰을 보고 새끼 곰의 상황을 알게 되고, 아빠 또한 그 모습을 보고 구해주며 상처도 치료해 주죠. 이후 이야기는 전래 동화 속 은혜 갚은 까치처럼 상부상조하는 동물과 사람의 모습을 담습니다. 누군가를 돕는 것에는 사람과 동물, 개개인의 차별적인 모습은 필요하지 않겠죠?
06. 어떤 하루
서울 어느 공원의 물속, 2년간 기다림 끝에 유충에서 성충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온 하루살이 하루와 닐리를 담습니다. 서로를 좋아하지만, 사랑을 하면 곧 죽게 되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을 숨기고 각자의 꿈을 쫓아가려 하죠. 하루만 살기에 하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것도 많은 하루살이를 통해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비유합니다.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해 모든 욕망을 버리고 살아가는 것도, 하루를 살기 때문에 후회 없이 즐기는 것도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삶이니까요. 결국 하루와 닐리는 하루를 살아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복한 시간을 선택하는데, 아이들은 어떻게 보고 무엇을 느꼈을지 궁금해지네요.
나이대별로 ‘5 플러스’, ‘10 플러스’, ‘14 플러스’로 나누어진 섹션 중 언어장벽이 불필요한 작품들로 구성된 ‘5 플러스’를 통해 아이들의 도슨트를 듣고 6편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나보았습니다. 쉽게 접할 수 있는 작품들이 아니기에 더 좋은 시간이었고, 보편적이면서도 다채로운 시선들로 구성된 이야기들이 아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가고, 얼마나 공감하며 이해할지, 더불어 스스로 어떤 느낌으로 받아들일지도 궁금했습니다. 이제 다음 주면 행사가 끝이 나는데 남은 기간도 열심히 즐겨봐야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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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로 개수작을 부리는 감독이 있다?
나는 가끔 글을 쓸 때 힘이 들어간다. 그러니까 어떤 주제로 쓸 때 이건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여야만 한다. 정성일 씨가 와도 절대 쓸 수 없는 그런 것을 추구한다. 근데 막상 까 보면 타인의 것들과 별 다를 것 없다. 예를 들어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리뷰한 글을 보자. 나는 이 영화를 '아무것도 없는 영화'라고 썼다. 정말 솔직히 말해보자면 나는 이 문장을 쓰고 '와 진짜 전다. 내가 천재긴 해. 이거 아무도 생각 못할 듯.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 확인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쓴 거 읽고 싶었는데 무서워서 안 했다. 이미 알고 있거든. 영화 보고 느끼는 감정이야 사람들 간에 별 다를 바 없고, 홍상수 감독도 이걸 의도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 글은 별로 특별한 것 없을 거라는 그런 불안감 때문에 타인의 리뷰들을 읽지 않았다. 내 글이 특별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오로지 내 욕심 때문이었다. 이렇게 실제로는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 스스로가 특별해지고 싶은 순간을 나는 찌질함이라 부른다. 이 감정은 멀지 않은 곳에서 또 찾을 수 있다.
난 어디에서 자기 계발서를 대차게 깐 적 있다. 근데 사실 내가 영화를 보고 쓰는 글은 크게 보면 자기 계발서와 다를 바가 없다. 사람이라 느끼는 외로움이나 자아 찾기 뭐 그런 것들을 주제로 삼기 때문이다. 이런 장르의 책들 중 몇몇 권은 이런 것들을 토픽으로 삼지 않는가? 또 나는 1달 전에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읽었다. 일상 속 대화에서 소통능력이 구린 나는 이 책을 읽고 새로운 사람이 된 것처럼 굴었다. 인스타그램에 스토리를 올리면서 양심에 심각하게 찔린 나다. 그래도 나는 이 책이 좋다고 주변인에게 칭찬했다. 이렇게 나에게 합리화의 이유를 붙인다는 걸 뻔히 아는 것 역시 찌질함이라 부른다. 가끔 내 머릿속에서 내가 해온 허튼짓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럼 머릿속에 딱 들어오는 생각이 있다. 나에게서 이 두 가지의 찌질함을 빼놓으면 시체라는 것이다.
<옥희의 영화>는 찌질함에 관한 영화다. 영화는 네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문을 외울 날>, <키스왕>, <폭설 후>, <옥희의 영화>다. 이 네 편에 세명의 주연인 정유미, 이선균, 문성근 배우가 나온다. 지금이야 정유미-이선균 배우가 인기도 제법 있고 우리에게 친근하지만 이때의 이들은 풋풋한 모습이다. 풋풋함. 감독 홍상수는 이 풋풋함이라는 감정 머리 위에서 관객을 갖고 논다. 네 편의 단편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20대거나 대학 교수같이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지만 행동하는 건 초등학생의 풋풋함이 느껴진다. <주문을 외울 날>을 보자. 주인공 영화감독 진구는 송 교수에게 '당신 소문이 안 좋은 걸 아느냐?'라고 묻는다. 근데 곧이어 있을 GV에 누가 나타나서 '당신이 내 친구의 인생을 망쳤다. 어떻게 생각하냐'라고 질문을 듣는다. 전자 상황에서 진구는 '혹시나 해서 여쭤본 겁니다'라고 합리화를 하지만 후자의 경우에선 '이 상황에서 이 질문이 맞냐?'라고 역정을 낸다. 자기 자신을 위해 합리화를 한 것이다. 두 번째. 키스왕이다. 친구 옥희를 좋아하는 진구. 진구는 연애를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숙맥이지만 아무튼 옥희가 좋다. 옥희는 이런 진구의 마음을 전해 듣는다. 송 교수와 진구 사이에서 고민하는 옥희. 친구에게 송 교수와 함께 있을 때 즐겁다고 말해 이쪽을 택할 것으로 보였지만 결국 진구와 함께한다. 엔딩부에 둘이 함께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옥희가 진구에게 말하는 대사가 압권이다. '나는 네가 착해서 좋아'라는 말에 '착할게'라고 답한다. 아무튼 나는 너를 위해 착해질 것이라고 답하는 것이다. 이 쪽도 자기 스스로를 위해 합리화를 했다. 세 번째. 폭설 후는 굉장히 짧다. 송 교수는 누구보다 수업에 진심인 것으로 보이지만 막상 학생이 안 오니 우웨엑 토와 함께 애정을 뱉어낸다. 이 단편에도 스스로를 위한 합리화가 이뤄진다. 네 번째. 이 영화의 제목이 된 <옥희의 영화>다. 주인공 옥희는 젊은 남자와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나이 든 남자와의 추억을 떠올린다. 하지만 옥희는 나이 든 남자를 고르지 않았다. 산을 왔다 갔다 하는 거 빼곤 별거 없었던 추억이지만 옥희는 함께 했던 시간을 굉장히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 관객이 보기엔 그냥 진구와 송 교수 이상도 이하도 아닌걸. 떠나가는 추억을 회상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옥희는 스스로에게 특별했으면 하는 순간을 작품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영화는 4편의 이야기를 연달아 붙이며 인간이라면 있을법한 찌질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도 타 감독들이 하지 않았던 방법으로 말이다.
나는 이 찌질함과 합리화는 베스트 프렌드라고 생각한다. 남은 이해하지 못해도 나 자신은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내로남불'이 찌질함이라는 것의 본원이겠지. 첫 번째 <주문을 외울 날>은 이 자기모순에 대한 이야기다. 소문은 근본적으로 내가 보지 않은 것에 대한 이야기다. 누구나 자기의 소문에 관해 들을땐 이게 뭔 소린가? 싶다. 자기는 자기가 제일 잘 알거든. 근데 또 막상 믿기는 쉬워서 타인을 어렵지 않게 의심한다. 나는 사람이 이런 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 때 특정한 가치관 아래에 모든 것을 결정하며 사나? 아닐 것이다. 내가 직관적으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살고 거기에 우리 스스로는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면서 산다. 나이가 든다는 건 이런 자기모순에 익숙해지는 것이겠지. 이런 모순은 <키스왕>에서도 나타난다. 어쩔 줄 몰라 옥희의 집 앞에서 소주를 마시는 진구. 이 앞에서 했던 말이 재밌다. '나는 너랑 대화가 잘 통해서 좋아'와 '착할게' 이 두 마디다. 이 말과 진구의 행동은 본질적으로 모순적이라고 생각한다. 대화가 잘 통하는 거면 성격이 잘 맞는 거고. 착할 게는 안 맞는 부분이 있어도 맞춰주겠다는 것 아닌가? 이 말을 들으면 진구는 옥희를 배려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근데 진구는 타인을 존중하고 그런 거 없다. 숨기고 그럴 것도 없이 옥희와 입을 맞춘다. 연애경험이 없다는 점에서 진구의 이런 화법과 행동은 개연성을 갖긴 하지만 그냥 주인공은 무작정 옥희랑 사귀고 싶은 거다. 그래서 앞 뒤가 다른 행동을 일단 저지르고 본다. '내가 이 친구를 어떻게 대해야지'같은 체계가 아니라 생각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렇게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는 확실히 대비가 된다. 그러니까 소문의 속성과 짝사랑-연애로 이뤄지는 과정을 대치시킨 셈이다. 난 이 지점이 분명한 의도라고 생각한다. 모순을 느끼기 쉬운 소재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원래 앞 뒤 다르다. 신나게 전 애인 험담하다 그들의 전화에 혹하는 게 우리 똑은 우리 친구들의 이야기 아닌가? 또 남을 욕할 때의 우리는 스스로에게 관대하다. 남 험담하는 사람이라고 욕먹는 주위의 이야기는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타인과 갈등하거나 자기혐오의 빠질 때 주요 소재가 되기도 한다. 또 우리가 살다 보면 이 경험들 한 번씩은 해봤다. 영화는 이렇게 우리 인생에서 절대 별개가 아닌 이기심이란 감정을 일상의 에피소드로 표현해 공감을 얻는다. 즉 구로사와 기요시는 인간 내면에 대한 이야기로 <큐어>를 썼고 봉준호 감독은 어머니의 모성에 관한 작품으로 <마더>를 만들어 관객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면 홍상수는 인간의 이기심을 통한 코미디를 그냥 배우 세명에 4천만 원 제작비가 든 4편의 단편영화로 끝내버린 것이다. 일상 속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영화로 다가올 때 어떤 느낌인지를 500%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럴 수 없다. 완전히 미쳐버린 천재성인 셈이다.
이 천재성은 세 번째, 네 번째 이야기에서 더 뒷받침된다. 진구가 묻는다. '무얼 원하고 사세요?' 송 교수가 답한다. '오늘의 내가 원하는 것과 내일의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것은 앞에서 내가 썼던 이야기와 공통점이 있다. (그러고 바로 다음 장면에 '학교 때려치우기 잘했다'라고 말하는 송 교수의 대사가 웃겼다.) 네 번째 이야기는 젊은 남자와 나이 든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그냥 산 타고 왔다 갔다 하는 이야기가 끝이다. 근데 이 등산과 하산만으로도 영화라는 예술의 전부를 보여준다. 남이 보기엔 그냥 에피소드인 이야기를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의 무언가와 비교한다. 그리고 항상 무언가를 골라 다른 것과 작별한다. 이걸 겉으로 드러내 '나는 특별한 사람이야!'라고 티를 내면 찌질함이 될 수도 있다. 또, 어떤 것을 보며 '나는 그럴 수밖에 없었지'라며 자위한다. 심지어 이 영화를 보고 공감을 얻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 주인공의 행동이 나와 닮았기 때문에 나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영화에서 그 인물이 그렇게 행동하는 건 그 상황이니까 하는 것이다. 즉 다른 외적 요인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우리라고 해서 꼭 그렇게 행동하리라는 법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찌질해서인지 그 영화의 장면과 과거의 에피소드 하나를 같다고 여기거나 '내가 저거보다 낫지'라며 조소하기도 한다. 나 자신을 위한 합리화를 해 버리는 것이다. 또 내 어떤 것과 현재의 어떤 것을 비교해서 우선순위를 정한다. 비교는 아무 의미가 없고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는 네 번째 영화의 등산과 하산을 관통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왜 홍상수의 영화 내지는 영화라는 장르를 보며 공감하는가?라는 질문과도 닿아있다. 제목이 <옥희의 '영화'>인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세 가지 질문의 답은 굉장히 쉽다. 우리는 대체로 못나고 찌질하기 때문이다. 완벽한 인간은 없고 모두에게 소심한 구석 하나쯤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우리의 모습을 숨기고 싶어 하거나 남들과 다른 특별함이라고 여긴다. 잠깐, 이거 우리 모르나? 그럼에도 우리는 타인에게 엄격하고 상처를 호소하며 나는 착한 사람이라고 최면을 건다. 그리고 영화를 보면서 공감을 얻는다. 그래.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지. 그렇게 스스로와 합리화를 한 채로 무언가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또 영화를 본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비교하기 시작한다. 예전의 것들을 떠나보낸다. 무한 반복이다. 우리는 이 지루하고 귀찮은 일상 속에 산다. 내가 찌질하지 않다는 변명과 함께 말이다. 감독 홍상수는 이렇게 모순적인 우리의 모습을 포착해 또 네 개의 단편영화로 접근한다. '너 이런 거 내가 다 알아!'라는 말과 함께 관객의 마음을 얻는다. 하나의 장편이 아닌 네 가지의 단편을 통해 전체로서의 의미는 버리고 순간순간 느껴지는 공감을 영화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이 영화는 개수작 같은 영화다. 사실 까고 보면 되게 별거 없는데 그저 이성을 꼬시기 위해 사용하는 개수작 화법인 셈이다. 영화 전면에 주제의식은 사실 별거 없고 느끼는 감정만을 따르라는 대사가 나온다. 난 그것마저도 개수작이라고 생각한다. '나 너희들 마음 다 알아. 왜 영화를 좋아하는지도 안다고. 그러니까 내 영화에 의미 같은 거 찾지 마. 이건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영화가 아니니까. 그냥 니들 이야긴 거 아니까 너희들 마음은 이미 내 거야.' 뭐 이런 식의 개수작인 셈이다. 우리 대부분의 영화 아니 문학작품은 메시지란 게 있지 않은가? 근데 홍상수는 감독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있어 보이는 말로 주류와는 다른 본인의 세계를 확고히 한다. 내가 만든 세계를 관객에게 주입시켜 '와 이 사람 전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우리는 이 논리에 설득당하는 바보들이다. 조명도 별로고 화장도 안되어있고 관통하는 서사도 심심하며 예산도 작은 그의 영화를 보는 우리는 그에게 꼬인 물고기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 영화를 볼 필요가 없다. 이기적인 우리는 현재의 나와 과거의 무엇을 비교하지 않으면 온 몸이 쑤신다. 홍상수는 우리에게 좋은 솔루션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 진짜 인정하기 싫은데 나도 그에게 설득당했다. 아마 신작을 우리 지역에서 볼 수 있다면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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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루엘라 (2021)
* 이 리뷰는 영화 <크루엘라>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크루엘라 (2021) 정보
감독: 크레이그 길레스피 (아이, 토냐 연출)
출연: 엠마 스톤, 엠마 톰슨, 마크 스트롱 등
개봉: 5/26
장르: 범죄, 코미디
러닝타임: 134분
디즈니가 재해석한 빌런, 크루엘라
대중적으로 '크루엘라'는 디즈니의 <101마리 달마시안> 시리즈에 나오는 사악한 악녀라고 알려져 있다. '글렌 클로즈'가 '크루엘라'를 연기한 실사화 버전이 1996년에 개봉된 적이 있기는 하지만, 25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다시 '크루엘라'라는 인물에 스포트라이트를 준 디즈니의 선택은 살짝 의외였다. 지금까지 누구도 그녀의 서사에 관심을 주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디즈니는 이미 <잠자는 숲속의 공주> 애니메이션 속 빌런 '말레피센트' 실사화를 통해 선함과 악함이 공존하는 입체적인 캐릭터로 성공적인 재해석을 한 전적이 있어 2021년 버전으로 새롭게 그려질 '크루엘라'의 모습도 기대해볼만 했다. 더군다나 크루엘라를 연기하는 배우가 '엠마 스톤'이라니!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역할이라 캐스팅만으로도 흥분을 주었다.
도둑들 →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크루엘라
'크루엘라'의 러닝타임은 2시간 14분으로 제법 긴 편인데, 주인공의 서사를 꽤나 장엄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흑백 반반 머리로 남달리 태어나 사나운 성질과 남다른 재능으로 매사 트러블을 일으켰던 '크루엘라/에스텔라(엠마 스톤)'는 학교 생활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한다. 결국 퇴학을 당해 집을 떠나 엄마와 런던으로 향하던 도중 자신의 치명적인 실수로 엄마가 목숨을 잃게 되면서 한 순간에 고아가 된다. 엄마와 함께 가기로 약속했던 리젠트 공원에 홀로 가게 된 그는 도둑질을 하는 친구 '호레이스(폴 윌터 하우저)'와 '재스퍼(조엘 프라이)'를 만나게 되고, 이들과 절친이 되어 능숙한 강도로 성장한다.
크루엘라는 어려서부터 패션에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는데, 그의 디자인 실력은 도둑질에만 쓰이기 무척 아까웠다. 크루엘라의 재능을 높이 산 친구 재스퍼의 도움으로 리버티 백화점에 취직하지만, 그에게 주어지는 일은 청소 및 잡무 뿐이다. 우연히 예술성을 뽐낼 기회를 만든 크루엘라는 런던 최고의 패션 브랜드를 가진 '남작 부인(엠마 톰슨)'에게 디자이너로 발탁되고 본격적인 에술 혼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그렇게 남작부인의 능숙한 직원이 되어 꿈을 펼쳐나가기 시작할 때 즈음, 예상치 못한 진실과 마주하며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패션에 대한 광기, 화려한 미장센
'크루엘라'의 빌런으로서의 성향을 패션에 대한 광기로 해석한 시각은 상당히 신선한 접근이다. 충분한 서사가 부여되었기 때문이지 패션에 대한 집착을 통해 악행을 저지르는 크루엘라의 행동들은 왠지 모르게 악해 보이지 않고, 이해가 된다. 과격하고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지만, 명분 있는 그녀의 행동에 우리는 악하다는 비난을 가하기 보다는 공감을 할수밖에 없다. <말레피센트>처럼 실사화를 하면서 빌런이었던 캐릭터를 선역에 가까울 정도로 묘사하지 않고, 캐릭터 본래의 성격을 끝까지 잃지 않는다는 캐릭터에 대한 해석 방식도 맘에 들었다.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크루엘라'의 모습을 다룬 작품인만큼 극에 등장하는 수많은 의상의 퀄리티가 매우 높고 남작부인을 도발하는 크루엘라의 파격적이고 아티스틱한 의상들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렇게까지 주인공이 패션에 진심인 영화가 이전에 있었던가. 패션과 광기, 일에 대한 열정과 욕망을 표현함에 있어 절제 따위 하지 않고 감각적인 미장센과 함께 극한으로 표출하려 했다는 것이 가장 좋았던 부분이다. 카메라 무빙 역시 일반적인 기법을 따르지 않고, 현란한 방식들을 사용하며 런웨이를 보는 듯한 기분, 패션쇼를 관람하는 듯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에스텔라와 크루엘라 사이, 엠마 스톤의 아수라 백작 같은 연기
'엠마 스톤'이 '크루엘라' 역할로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들이 많았다. 원작의 캐릭터만을 생각했다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견해였고, '에바 그린'과 같은 배우들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에도 공감이 갔다.
하지만, '엠마 스톤'이 연기한 '크루엘라'는 원작의 캐릭터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의 인물이고, 그만의 색깔로 악녀로만 여겨졌던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극중 '에스텔라'와 '크루엘라' 두 명의 인격을 연기하는 엠마 스톤의 연기력을 가히 압도적이다. 미세한 표정 연기와 목소리의 떨림, 걸음걸이마저 차이를 두며 인물 스스로가 부여한 2명의 인격체를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표현한다. 특히 크루엘라를 연기할 때의 끈적한 악센트와 광기 어린 눈빛, 시선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는 가히 압도적이다. 자아도취적 인물로 그려진 캐릭터의 막장성은 부자연스러운 과장성을 자아낼 수도 있지만, 엠마 스톤의 크루엘라는 전혀 그렇지 않다.
크루엘라의 강렬함 때문에 인물의 본캐인 '에스텔라'의 존재감이 묻히는가? 이 또한 긍정할 수 없는 질문이다. 자극적인 크루엘라의 인격 때문에 인간미가 담긴 에스텔라의 성정이 상대적으로 무난해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광기와 분노 이외의 감정을 표출하는 에스텔라의 모습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특히 부모의 원수에게 모든 것을 잃은 채 분수 앞에서 눈물과 함께 쏟아내는 독백씬은 연기력의 절정을 보여준다. 꿈에 부푼 붉은 머리에 안경을 쓴 모습에서는 '이지 에이'에서의 매력적인 풋풋함이 느껴지고, 엄마의 죽음에 대한 사실에 직면하고 분노하며 빌런을 쓰러뜨리기 위해 모략을 세우는 과정에서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에서의 똘끼가 비춰진다. 그동안 차근차근 좋은 작품들로 출중한 연기력을 쌓아온 엠마 스톤이었기에 '크루엘라/에스텔라'라는 캐릭터가 탄생할 수 있던 것이다.
엠마 VS 엠마, 불꽃 튀는 연기 혈전
'크루엘라'에는 '엠마 스톤'이 아닌 또 한 명의 엠마, '엠마 톰슨'이 빌런으로 등장한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서늘함과 잔혹함을 가졌지만 패션에 대한 욕망만은 누구보다 큰 '남작부인'을 연기하며 크루엘라와 날선 대립각을 세운다. 이 캐릭터는 주인공의 각성을 불러내는 빌런으로서의 역할이 주된 포인트지만, 극 초반까지는 크루엘라의 재능을 알아봐주고 꿈을 실현시켜주는 멘토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양가적인 의미를 지닌다. 화려한 미장센과 서스펜스가 덜한 장면들이라 할지라도, '남작부인'과 '에스텔라'가 형성하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관계 또한 상당한 재미를 준다.
크루엘라의 카리스마가 광기와 저돌적인 태도에서 나온다면, 남작부인의 카리스마는 냉혹함에서 비롯된다. 타인의 죽음 앞에 눈 한 번 깜빡이지 않는 잔혹성을 지닌 인물을 '엠마 톰슨'이 훌륭하게 연기하며 뒷받침해주었기에 '크루엘라'의 캐릭터가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다. 두 캐릭터의 존재감이 워낙 세다 보니 나름 괜찮은 캐릭터임에도 조연들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엠마 스톤'과 '엠마 톰슨'이 함께 나오는 장면들이 가장 재밌고, 투샷이 잡힐 때의 몰입도가 굉장하다.
캐릭터의 완벽함만으로 채우지 못한 빈틈
의상, 연기력, 미장센, 비주얼, 캐릭터까지 모두 완벽하지만 스토리의 정교한 짜임새 면에서는 부족하다. 캐릭터의 서사에 지나칠 정도의 완벽함을 부여하다 보니 범죄를 다루는 장면들의 현실감과 스릴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애초에 '서스펜스'를 보여주기 위한 탄탄한 각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아닌 디즈니 원작의 캐릭터를 재해석하는데만 힘을 쓰다보니 나타나게 된 약점이라고 본다. 동일한 인물들이 계속해서 허술한 작전을 펼치는데, 경찰은 이들을 제대로 잡지도 못하고 계속 당하는데도 알아채는 사람은 없다. 비주얼적으로 보여줄 장면들이 많다 보니 세세한 부분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게 퍽 느껴진다. 12세 관람가이다보니 인물들의 잔혹성이나 빌런으로서의 악행 역시 수위가 낮고, 잔혹동화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부각되지 않는다. 차라리 제대로 된 수위로 <조커>이상의 빌런 서사를 꾸렸으면 좋았을 듯 한데, 디즈니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던 방안인 듯.
처음부터 끝까지 휘몰아치는 현란한 삽입곡의 향연도 피로감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다. 분명 연출의 긴박감과 스타일리쉬함을 강조하는 효과는 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산만하고 정신없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캐릭터의 연기는 과하게 다가오지 않았으나 연출적인 부분에서 과하다는 느낌이 조금씩 있었다. 물론, 감상을 해칠 정도로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러한 흠이 있기는 하지만 <크루엘라>의 캐릭터 구성은 완벽했고, 배우들의 연기력과 화려한 비주얼, 그리고 감각적인 연출로 디즈니 실사화의 성공작을 새로 쓰게 됐다. 흥행 하게 된다면, 속편을 기대해봐도 좋을 듯.
- 씨네랩 크리에이터 popofil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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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구찌가 될 상인가.
이 글은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얼핏 보면 "수선화"와 "나르시시즘"이란 단어 사이에는 매우 큰 간격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 두 단어가 이야기로 엮이게 되면 우리는 이들이 얼마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지를 알게 된다.
알쓸 신잡에서 김영하 작가님이 말씀하셨듯, 이야기는 그 무언가를 기억하게 하고, 잘 전달하게끔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이토록 다른 카테고리에 있는 무작위로 뽑은 단어들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살을 붙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얼핏 보면 "구찌"와 "살인"도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는 이 둘 사이의 거리도 좁혀질 수 있을 만큼의 접점이 존재한다고 속삭인다.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이 전해주는 이야기이니, 믿고 시간과 우리의 마음을 맡겨도 손해는 없을 것이다.
두 번째, 그 애매함을 넘어서기.;두 주연이 이뤄내는 반란.
사진 출처:다음 영화
숫자 2는 참 이상하다.
소수(Prime number, 참고 1) 중 유일한 짝수인 점도 그러하지만. 성공적인 영화의 2편(혹은 후속편)의 제작은 가장 많은 욕을 먹을 각오로 제작해야 하는 리스크를 암시하기도 한다. 그뿐인가. 형만 한 아우 없다는 속담만 들어봐도 이 2라는 숫자가 가진 위치와 애매함은 불완전함, 혹은 사족을 뜻하기도 한다.
두 주연 배우에게도 이 2라는 숫자는 여러모로 많은 부담을 안게 하는 숫자였을 것이다.
한 번 일한 배우와는 일을 안 한다는 말이 돌 만큼 캐스팅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는 리들리 스콧과 전작인 [라스트 듀얼]에 이어 두 편의 영화를 찍는 영광 아닌 영광을 가진 아담 드라이버에게도.
[스타 이즈 본]에서 성공적인 연기를 보였지만, 소포모어 신드롬(Sophomore syndrome, 참고 2)을 걱정해야 할지도 모르는 두 번째 작품으로 이 영화에 참여한 레이디 가가에게도 말이다.
두 번째.
하지만 자신의 진가를 확실히 보여줘야만 하는 단 한 번의 기회.
이 상황에서 두 배우는 서로의 손을 잡아 불안한 하나 보다 온전한 둘이 되는 것을 택했다. 숫자 2에 숨은 또 다른 의미를 슬며시 끌어온 것이다.
덕분에 영화는 걱정했던 불완전함이 묻어나 껄끄럽거나 삐걱거리지 않는다. 안정적이고 세련된 연기로 영화 내내 관객의 마음을 오롯이 구찌 가문의 안위만을 걱정하는데 쏟게 한다.
껍데기의 싸움.;결국 껍데기는 알맹이를 이길 수 없다.
사진 출처:다음 영화
화투.
꽃을 가지고 하는 싸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정마담이 영화 타짜 1편의 시초가 된 화투를 그렇게 정의했다면, 구찌 가문의 또 다른 축이었던 알도 구찌(알 파치노)는 이 모든 가족 싸움을 마치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구찌 가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껍데기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브랜드 구찌가 만들어낸 상품들이 보이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기도 했겠지만, 실제로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은 자신들이 원하고 탐하다 못해 선택해서는 안 되는 방법까지 기꺼이 행하게 하는 "Gucci"라는 껍데기를 차지하기 위한 사투를 벌인다.
혹자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혹자는 자신에겐 허락되지 않은 이름을 결혼을 통해서라도 갖기 위해.
또 누군가는 아들에게 이름을 물려주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독을 바른 손톱을 잔뜩 세워 희생양이 사정권 안에 들어오기를 몸을 낮춰 기다리며 상대를 찔러보는 싸움을 하고 있지만. 마우리치오 구찌(아담 드라이버) 만큼은 이 껍데기가 죽도록 싫어 벗어나려고 애쓰는, 혹은 사업을 위해 매진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자신은 이런 싸움은 관심이 없는 듯한 독야 청청한 자세로 목을 꼿꼿하게 세우고서. 나는 "당신들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몸으로 소리치듯이.
하지만 그는 단 한순간도 구찌라는 이름을 버린 적이 없었다. 소극적인 태도, 정면으로 나서지 않으려는 뉘앙스로 구찌를 원하지 않는 척했을 뿐. 그는 항상 그 안전한 테두리 안에서 "새로운 것"이라는 껍데기를 찾아 익숙한 것에서 도망치려 했다.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을 늘 가지려 애썼다는 점에서는, 어쩌면 그 역시도 같은 인물일 뿐이었던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그러나 언제나 결말이 그러하듯.
아무리 화려한 껍데기라도 알맹이를 이길 순 없었다.
구찌는 가짜들의 싸움이 아닌, 진정으로 구찌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품으로 돌아간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만 했던 "껍데기"구찌와 알맹이 구찌가 모두 같은 고귀한 모습을 지니기를 바란 사람들이 이긴 셈이다.
명감독은 명감독이다.;이걸 누가 이기니.
사진출처:다음 영화
가끔 캐릭터가 가진 모든 이야기의 끝까지 다 박박 긁어 쓰는 영화를 만날 때가 있다. 애석하게도 그런 캐릭터는 배우의 연기에 상관없이 불쾌감을 불러일으킬 때가 많다. 영화가 나눠 가져야 할 처절함이나 진중함을 캐릭터 하나 몽땅 갈아 넣는 것으로 됐지?라며 선심 썼다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가 조금은 다르다고 느껴지는 지점은 아마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그의 전작들도, 그리고 이번 영화에도 처절한 인물들은 늘 등장하지만, 어쩐지 그가 만들어낸(혹은 실존한) 인물들은 소모된다는 인상보다는 함께 숨 쉬고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게 한다.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귀를 기울이며 영화에 참여하다 보면, 감독이 만들어낸 영화에는 그 어떤 캐릭터도 소모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덕분에 인물들의 몸짓과 말 하나하나에 마치 폐부를 찔린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영화에서 나오지 못하게 한다.
그러면서도 감독은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는다.
레이디 가가, 아니 파트리치아 구찌가 마지막 대사를 내뱉을 때, 그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 지저분한 가족사를 관음증 환자처럼 끝까지 들여다본 관객은 어떤 껍데기에 집착하고 있느냐고 말이다.
참고 1
소수는 1을 제외하고 자신만이 약수가 되는 수를 말함. 즉 3은 1과 3. 5는 1과 5. 이런 식의 숫자를 말함. 2는 유일한 짝수인 소수임.
참고 2
소포모어 신드롬(Sophomore syndrome), 혹은 슈퍼 루키 증후군이라고 불리는 이 현상은 첫해에 정말 엄청난 활약을 보인 선수가 두 번째 해에는 그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내는 것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평균으로 회귀한다는 쪽으로 해석한다는 사람도 있으며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뭐 어떻게 매년 잘하냐.
[이 글의 TMI]
아직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한 2022의 새해 스케줄의 소용돌이에서 정신을 놓기 직전에 마치 휴식처럼 이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조금 빨리 입장한 영화관에서 내 자리를 찾던 도중, 어둑어둑한 상영관 안에서 작은 노트를 펼쳐놓고 글(이라고 추정함)을 쓰시는 분을 발견했다.
순간 아주 많은 생각과 감정이 머릿속을 스쳤다. 보통 기억력이 좋지 않고 타인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어서 대충 잊게 되는데, 이상하게도 며칠이 지나도 계속 잔상처럼 그분의 글 쓰시던 자세나 분위기가 마음에 남아 맴돌았다.
마치 알게 모르게 계속 글이 쓰고 싶었는데 그런 내 마음의 응어리가 모여 현실로 쨘 하고 나타난 것처럼.
결국 나는 글 쓸 시간을 짜내기 위해 앞으로 회사에서 대충 샐러드를 저녁으로 퍼먹고 집으로 오기로 했고, 덕분에 이번 주말에나 겨우 쓸 수 있을까 말까 점쳐야 했을지도 모를 영화 리뷰글을 쓰고 있다.
혹시라도 뭐 그럴 리 없겠지만.
그분이 이 글을 보신다면. 그것도 여기까지 읽으시는 불상사(?)가 생긴다면.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
롯데월드타워 금요일(1/14) 19시에 하우스 오브 구찌를 보시던 그분. 덕분에 약간 정신 차릴 수 있었습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리들리스콧 #하우스오브구찌 #레이디가가 #아담드라이버 #자레드레토 #구찌는커녕팔찌도없음 #영화인플루언서 #네이버인플루언서 #내일은파란안경 #브런치작가 #영화리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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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人生無常(인생무상)
영화 <숨>(2023, 윤재호)
“삶과 죽음은 끝나지 않는다.”
생사에 관한 고찰을 담은 다큐멘터리로 죽음을 다루는 이들인 장례지도사와 유품정리사,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중인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룬다.
장례지도사는 망자의 몸을 정성껏 닦아 장례를 치른다. 고인의 가장 마지막까지 기능하는 기관은 청각이라고 한다. 때문에 장례지도사는 항시 말을 조심하고, 유족들은 가지 말라고 통곡하며 붙잡기보단 마음 편히 가시라고 작별 인사를 건네는 것이 좋다. 대개 부자는 쪼그려 불편한 얼굴로 굳어간다고 한다. 자신이 가진 물질들을 두고 가고 싶지 않은 마음에 안간힘을 쓰듯 말이다. 반면, 가난한 자는 극락에 간다고 한다. 미련 없이 그 누구보다 편한 얼굴로. 유품정리사는 돌아가신 분의 물건과 집에 남은 부패의 흔적들을 지우는 역할을 한다. 돌아가신지 몇 개월 뒤에서야 좁은 방 안에서 홀로 발견된 분의 부패물과 물건을 정리하던 중, 과거 고인이 장영실과학상을 받은 상패를 발견한다. “이런 분이 어쩌다가.” 죽음을 다루는 일을 하며 깨닫는 것은 인생의 덧없음이다. 누구든 성공하고 망할 수 있고, 누구든 살고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죽지 못하고 살아간다고 말한다. 할머니는 잘 나가는 사업가였다가, 망한 뒤로 하루에 많이 벌어야 1,500원인 폐지를 주우면서 살아간다. 온몸 곳곳이 녹슬었다. 할머니도, 장례지도사도 병원에서 쇠약해졌음을 진단받는다. 불교, 윤회 사상을 믿는 장례지도사도, 하나님을 믿는 할머니도 죽음 앞에서의 태도는 비슷하다.
<숨>에서는 삶과 죽음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정답을 모르기 때문이다. 허나, 장례지도사 남편의 손을 잡고 잘 수 있냐는 둥, 돌아가신 분의 집을 정리하며 나온 쓰레기를 길에 두지 말라는 둥, 죽음을 불쾌하게 여기는 자들에게 전한다. 숨이 시작되고 멈추는 것은 ‘자연’스럽다는 것, 생과 사는 그 자체로 고귀하다는 것. 우리는 타인을 배웅하고, 자신이 떠날 날을 준비하며 살아가야한다고 말한다. 장례지도사는 훗날 추하지 않게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단식을 이야기하고, 연명치료거부 신청서를 작성한다. 숨은 붙잡기보다, 흐르는 대로 두는 것. 人生無常(인생무상)이기에 허무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의미있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하여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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