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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 우먼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살면서 가족도, 친구도 잃은 '그웬 스테이시'(헤일리 스타인펠드). 그녀는 다른 평행세계의 스파이더맨이자 유일한 친구인 ‘마일스 모랄레스’(셔메이크 무어)를 그리워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우주에서 넘어온 빌런과 싸우던 그웬. 그녀는 또 다른 스파이더맨 '미겔'(오스카 아이작)과 '제시카(이사 레이)'를 만나고, 그들에게 합류해 우주를 넘나드는 빌런과 싸우기로 결심한다.
마찬가지로 그웬을 그리워하며 하루를 보내던 마일스. 그의 앞에는 자기도 의도치 않게 만들어 낸 빌런 '스팟'(제이슨 슈워츠먼)이 등장한다. 스팟 덕분에 마일스는 그웬과도 재회한다. 그웬 역시 스팟을 감시하러 왔기 때문.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그들은 스팟을 쫓아 다른 우주로 이동하고, 수많은 스파이더맨을 만나면서 예상치 못한 우주의 균열을 마주한다.
스파이더맨의 멀티버스는 다르다
또 한 번 멀티버스다. DCEU의 마지막 작품인 <플래시>가 개봉한 지 일주일 만에 멀티버스 히어로가 또 등장했다. 2018년에 개봉했던 애니메이션 영화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의 속편인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이하 <스파이더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플래시> 리뷰에서도 언급했지만, 멀티버스는 이미 관심을 끌기 어려운 소재가 됐다. 평행 우주든, 다중 우주든, 평행 다중 우주든 상관없다.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과거나 현재를 바꾸려다가 다른 우주의 '나'를 만난다. 그 만남을 통해 현실의 '나'는 현재의 중요성을 배우고, 한층 성장한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은 기대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스파이더맨'이니까. 수많은 우주의 스파이더맨이 한 데 만나는 사건인 '스파이더버스(Spider-verse)'는 멀티버스의 상징과도 같으니까. 전편인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와 실사 영화인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 멀티버스를 능숙하게 다룬 전력도 플러스 요인이었다.
<스파이더맨>은 기대에 완벽히 부응한다. 북미에서 개봉 9일 만에 2억 달러를 돌파하는 흥행을 기록한 이유를 제대로 보여준다. 멀티버스를 소재로 삼은 최근 히어로 영화 중 가장 뻔뻔하고, 감각적이며, 통쾌한 데다가 감동적이다. 마치 멀티버스를 다룰 줄 아는 셰프는 '스파이디' 밖에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멀티버스라는 공식을 깨부수다
멀티버스 영화는 대체로 비슷한 공식을 따른다. MCU의 피터 파커도, 닥터 스트레인지도, 완다 막시모프도, 가장 최근에 공개된 플래시도 유사한 경험을 했다. 주인공은 과거나 현재의 특정 사건을 바꾸려는 욕망이 가득하다. 하지만 멀티버스를 경험하면서 한 가지 가르침을 깨닫는다. 인생에는 필연적인 지점이 있으며, 그 사건이 현재의 나와 우주를 만들었다는 것. 운명에 순응하고 현실을 열심히 살아가는 게 최선이라는 것.
얼핏 보면 <스파이더맨>도 다르지 않다. 다른 차원의 스파이더맨인 미겔 오하라의 존재가 대표적이다. 그는 '스파이더맨 소사이어티'라는 팀을 결성해 차원을 넘나드는 빌런을 체포한다. 그들이 우주의 균형을 무너뜨리기 전에. 특히 그는 '공식설정 사건(Canon event)'을 수호하려 애쓴다. 모든 스파이더맨은 삼촌처럼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는 가족, 그리고 가장 가까운 경찰서장을 잃어야만 한다. 그의 신념은 확고하다. 미겔 본인이 공식설정 사건을 바꾸려다가 가족을 모두 잃는 가슴 아픈 경험을 했으므로.
그래서 그는 마일스를 질책하고, 통제하려 든다. 전편에서 마일스가 차원 이동기를 파괴했고, 그 과정에서 차원을 넘나들며 우주의 균형을 위협하는 빌런 스팟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마일스가 '스파이더 인디아'(카린 소니)의 우주에서 싱 경감을 구한 것도 문제다. 스파이더맨과 가장 친한 경찰서장이 죽어야 하는 공식설정이 깨졌으므로.
공식대로라면 마일스는 이쯤에서 변해야 한다. 자기 행동이 미성숙하다고 반성해야 한다. 가족이나 친구를 살릴 수 없더라도 우주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 가슴이 아프더라도 정해진 운명을 수용해야 한다. 그런데 <스파이더맨>은 공식을 거부하고, 과감하게 반기를 든다. 마일스는 미겔에게 말한다. 정해진 운명 따위는 없고, 무슨 일이든 처음은 있다고.
무슨 일이든 처음 있다
<스파이더맨>은 마일스의 선택에 힘을 싣는 반전도 선사한다. 미겔은 고집불통인 마일스에게 숨기고 있던 진실을 알려준다. 전편에서 방사능 거미에 물려 스파이더맨이 된 마일스. 알고 보니 그 거미는 지구-42라는 다른 우주에서 넘어온 것으로 밝혀진다. 즉, 본래 마일스는 스파이더맨이 될 운명이 아니었다. 그는 존재부터가 우주를 파괴할 수도 있는 원인인 셈이다.
이에 마일스는 미겔과는 반대로 행동한다. 애초에 스파이더맨이 될 운명이 아니었던 자기가 스파이더맨이 됐다면, 공식설정을 따라야 할 이유도 없다면서. 그래서 그는 이틀 뒤면 경찰서장으로 진급해 죽을 운명인 아버지를 구하러 간다.
"내 이야기는 내가 쓸 거야!"라는 마일스의 결심은 <스파이더맨>을 독보적인 영화로 거듭나게 하는 1등 공신이다. 앞서 봤듯이 멀티버스 영화에는 어느 정도 고정된 틀과 스토리가 있다. 그런데 이를 전면에서 부정한 결과 강렬하면서도 색다른 쾌감에 빠져들 수 있다. 모두가 운명 앞에서 겸손해지고 무거워지는 가운데 유일하게 반기를 드는 영화니까.
마일스의 결단은 멀티버스를 통해 더욱 확장된다. 그웬은 공식설정을 따르지 않을 이유를 찾아낸다. 경찰서장인 아버지가 경찰을 그만뒀는데도 공식설정이 어긋나지 않은 것을 확인한 그웬. 그녀는 전편에서 한 팀이었던 스파이더맨들을 모아 마일즈를 돕기로 결심한다. 새롭게 등장한 스파이더펑크, '호비'(대니얼 칼루야)도 인상적이다. 그는 마일스와 그웬을 알게 모르게 도와주며 펑크록에 심취한 아나키스트 스파이더맨다운 활약상을 보여준다.
이에 더해 마일스의 정체를 한 번 더 비틀어서 충격을 선사하는 결말도 인상적이다. <스파이더맨>은 <스타워즈: 제국의 역습>을 연상시키는 클리프 행어로 마무리된다. 그 덕분에 3편인 <스파이더맨: 비욘드 더 유니버스>에 대한 기대치는 한껏 커진다. 결말만 놓고 보면 2023년 영화 중 최고나 다름없다.
또 한 명의 주인공, 스파이더 그웬
숙명을 거부한 마일스의 선택은 그웬의 이야기를 만나 더 풍부해진다. 그들은 고집 센 부모님과 부딪힌다. 스파이더맨이 청소년 히어로의 대표주자라는 걸 고려하면 일종의 세대 갈등처럼 보인다. 마일스의 부모님은 그가 평범하고 안정적으로 살기를 바란다. 경찰서장인 조지 스테이시는 스파이더 우먼이 딸의 절친을 죽였다고 믿는다.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딸의 말은 무시한다. 그웬의 정체를 알게 되자 딸을 체포하려 들 정도다.
하지만 마일스와 그웬은 요즘 애들답다. 자신감과 쿨함으로 무장해 자기 꿈을 실현한다. 기존의 관습이나 고정관념을 벗어나 역동적인 삶을 그려 나간다. 차원 이동을 연구하는 물리학자가 되고 싶은 마일스. 자기 밴드를 만들고 싶어 하는 드러머 그웬. 그들은 스파이더맨답게 꿈을 이룬다. 마일스는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 스파이더 인디아를 돕는다. 그웬도 마일스를 비롯한 다른 차원의 옛 동료들과 재회해 자기만의 밴드를 꾸린다.
두 거미 인간의 패기는 감동도 안겨준다. 그들이 아버지의 고집을 꺾을 때, 결국 자식을 이기지 못하는 부모의 사랑이 가득 느껴진다. 끝까지 자기 정체를 숨기던 마일스. 그런 아들에게 엄마는 언제나 아들 편이라고 말해준다. 더 넓은 세상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격려한다. 조지도 마찬가지다. 오랜만에 집에 온 그웬과 화해한다. 아빠는 경찰을 그만뒀고, 딸의 선택을 전적으로 믿는다고.
이처럼 다른 듯 보이지만 맥락과 함의는 같은 그웬의 이야기 덕분에 마일스의 이야기는 더욱 진해진다. 그들의 유대감이 로맨스 코드로 자연히 이어지는 재미도 있다. 또 투톱 주인공 수준으로 늘어난 그웬의 분량이나 비중도 자연히 납득된다.
주제에 충실한 볼거리와 스타일
전편보다 발전한 볼거리와 스타일도 <스파이더맨>만의 개성을 한 층 끌어올려 준다. 전편의 가장 큰 특징은 새로운 기법이었다. 픽사와 디즈니 스타일의 3D 애니메이션 트렌드를 거부하고, CG와 2D 애니메이션을 합성한 기법을 선보였다. 그라피티 스타일의 그림을 조합하고 프레임도 낮게 잡으면서 스크린으로 만화책을 보는 듯한 착각도 불러일으켰다.
이번에도 과감함은 이어진다. 스타일은 유지하되, 한 가지 변화를 꾀했다. 색채다. 역동적이고 화려한 그림체에 다양한 색감을 더해서 이야기의 분위기를 시각적으로도 환기했다. 그웬과 아버지의 대화 장면이 대표적이다. 부녀 관계가 경색되어 있을 때는 화면이 전반적으로 푸른빛이다. 하지만 부녀가 포옹을 하거나, 둘의 관계가 회복되는 순간 영화는 분홍이나 노란색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스크린 전체를 환하게 만든다.
이에 더해 스파이더버스의 스케일을 키웠다. 덕분에 영화 곳곳에 팬서비스가 빼곡하다. 게임 시리즈 속 스파이더맨, 레고 스파이더맨 등 온갖 스파이더맨이 등장한다. 스파이더맨 실사 영화 시리즈도 스파이더버스에 포함됐다. 일례로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과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 중 몇몇 장면이 영화에 직접 등장한다. MCU와 소니 스파이더맨 유니버스도 합류한다. 미겔은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속 사건을 언급하고, <베놈> 속 조연인 첸 부인도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음악도 계승했다. 'Sunflower'나 'What's up danger' 같은 블랙 뮤직을 이번에도 적극 활용했다. 특히 메트로 부민이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해서 OST 간의 통일성이 높아졌다. 대니얼 펨버턴이 1편에 이어 참여한 스코어도 인상적이다. 드럼이 인상적인 그웬의 테마를 적극 활용해 영화에 신선함을 불어넣었다.
애니메이션이라는 한계
다만 애니메이션이라서 남는 아쉬움도 있다. 길다. 러닝타임이 140분이다. 전편에 비해 23분가량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특히 그웬과 마일스의 가족 이야기가 중심인 초중반부가 상대적으로 지루하다. 후반부에 몰아치는 액션과 허를 찌르는 전개로 만회하려 하나, 길다는 인상 자체를 지울 수는 없다. 일반적인 애니메이션 영화 러닝타임도 훌쩍 뛰어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화려한 그림체도 종종 어지럽게 보인다. 특히 액션씬은 호불호가 갈릴 만한 여지가 있다. 프레임이 자주 끊기고 스파이더맨들의 그림체가 제각기 다르다 보니 정리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 수 있다. 이에 더해 1편의 임팩트를 넘어서는 OST가 없어서 약간의 아쉬움도 남는다.
마지막으로 수많은 스파이더맨이 소모된다. 잠시 엑스트라로 스쳐 지나가다 보니 스파이더맨 하나하나의 임팩트는 크지 않다. 미겔과 제시카 드루 정도가 예외일 뿐이다. 모든 스파이더맨이 특유의 매력을 발산한 전편에 비하면 아쉬움이 크다.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다. 호불호와 취향의 영역이라서 영화의 완성도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의 독보적인 성취는 모든 아쉬움을 달래고도 남는다. 과감한 스토리텔링, 신선한 스타일, 팬 서비스와 세계관 연계까지. 이보다 완벽한 중간 다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1편인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는 놀라운 기록을 써 내려갔다. 2019년 골든글로브 최우수 애니메이션상,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석권했다. 평가에 비해 흥행이 조금 아쉬웠다. 국내에서는 관객 70만 명을 겨우 넘겼다. 그래도 북미 약 1억 9,000만 달러, 월드와이드 약 3억 8,400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했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의 흥행 성적은 이미 전편을 뛰어넘었다. 벌써 북미 2억 달러, 월드와이드 4억 달러를 돌파했다. 그러니 궁금하다. 과연 국내에서는 어디까지 질주할 수 있을지, 시상식 시즌에는 또 어떤 뉴스를 들려줄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Outstanding 출중함
정점에 다다른 스파이더버스의 황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