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2-09-13 13:55:06
환상 속의 썸머에서 현실의 어텀으로.
영화 <500일의 썸머> 리뷰
마크 웹의 '500일의 썸머'는 조셉 고든 레빗과 조인 데이셔넬을 중심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이다. 처음부터 너무 달랐던 그들이 언제나 그 계절에 머무를 수 없는 시간 같은 사랑을 담았다. 겹겹이 쌓였지만 조각조각 흩어진 500일의 시간은 어떤 계절을 담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사랑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부분들과 그렇지 않은 부분들을 톰과 서머의 관계를 통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을 듯하다.

남자 주인공의 시점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같은 계절에 있지만 사뭇 다른 온도에 머무는 톰과 썸머의 모습을 보여준다. 썸머에게 운명을 느끼며 조금씩 다가가는 톰, 자신만의 신호를 알아채지 못하는 썸머에 좌절감을 느낀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해서 지나가고 어떤 계기에 의해 관계가 진전되며 그들은 시작하게 된다. 온도는 다르지만 사랑하는 마음은 같아서 좋은 기억이든, 좋지 않은 기억이든 함께 할 수 있었다. 톰의 500일 중에 어떤 날도 썸머가 빠지지 않지만 함께할수록 환상이 조금씩 벗겨지며 현실로 바뀌며 그 운명은 조금씩 깨져간다. 하지만 그 운명이 깨지는 것을 아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엔 아직 어리석었기에 한참 후에 깨닫게 되었다. 운명은 없지만 우연은 언제든지 만들 수 있기에 계절이 바뀌면서 여름을 놓아주고 가을을 맞이한다. 링고 스타보다 건축이 더 잘 어울리는 계절로.

지극히 톰의 관점으로 비치는 이 영화는 서머를 나쁜 사람으로 규정한다 라기 보다는 그때 나이의 미숙했던 톰이 서머를 환상 속에 가두어놓고 생각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특히 현실과 이상을 구분하는 장면이 그를 뒷받침한다. 늘 나서지 않고 소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그렇고 가볍다고 생각했고 결핍을 채우기 위해 톰을 이용한다고 생각했지만 깊고 진했던 썸머의 사랑을 다 이해하지 못함을 보여준다. 썸머의 취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장면을 통해 운명 같은 사랑에 빠진 자신에 취해있다는 것이 썸머의 시선에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다만 남자 주인공의 시점으로 시작하는 만큼 그의 시선에 가려진 여자 주인공의 시점도 궁금해진다. '500일의 톰'을 보고 싶어졌다.
Relative contents
-
- 구원하러 온 파멸
브랜든 프레이저의 뛰어난 연기로 주목받고 있는 영화 <더 웨일>의 서사는 지극히 단순하다. 동성 연인의 죽음 후 자제력을 잃고 272kg의 거구가 된 찰리(브랜든 프레이저 분)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오래 전에 연락이 끊긴 딸 엘리(세이디 싱크 분)와의 관계를 회복하려 한다. 연극을 원작으로 하는 만큼 영화의 공간 변화는 거의 없다시피 하며 주된 서사는 찰리의 집 내부에서 진행된다. 또한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수도 손가락에 꼽을 만큼 적고, 그렇기에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에 상당 부분을 기대는 영화이기도 하다. 주연인 브랜든 프레이저 이외에도 딸 엘리를 연기한 세이디 싱크, 영화의 후반부까지도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 토마스를 연기한 타이 심킨스와 찰리의 거의 유일한 친구 리즈 역을 맡은 홍 차우마저도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이행한다. 소수의 인물이 등장하는 연극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대개 그렇듯이 배우들의 연기가 스크린을 넘쳐 흐를 듯이 관객을 위협하는데 덕분에 관객은 모든 등장인물에 이입할 여지를 획득한다.
올해 남우주연상 후보들 모두 하나같이 쟁쟁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브랜든 프레이저의 연기가 돋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개인적으로 아직 <이니셰린의 밴시>를 관람하지 못한 입장에서 솔직히 말하면 <애프터썬>의 폴 메스칼에 한 표를 던진다). <미이라> 시리즈 이후 개인적인 사건들로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본인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캐릭터를 연기해 극적인 효과를 자아내며 지지를 얻어낸 측면이 우선 크다. 거기다 남우주연상 한 부문에만 후보를 냈을 만큼 강하지만 작은 영화 <애프터썬>과는 달리(신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뛰어난 성취를 보인 감독 샬롯 웰스는 바로 이 신인이라는 점 때문에 시상식의 피해자가 되었다) 대런 애로노프스키라는 감독의 이름을 얻고 상대적으로 홍보에서 우위를 점하기도 했다. 이러한 외적인 요인들을 모두 제거했을 때, 브랜든 프레이저는 도저히 이입할 수 없을 만한 캐릭터를 연기하면서도 관객의 공감과 응원을 이끌어 내는 난제를 해결해 내는 괴력을 발휘하며 엄청난 지지를 이끌어 낸다.
찰리라는 인물을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찰리는 스스로 파멸을 가져온 인물이지 타인의 연민을 살 만한 인물이 아니다. 동성 연인이 생겼다는 이유로 가족을 버리고 떠난 데다 연인의 죽음을 핑계로 폭식을 일삼아 스스로를 사회에서 고립시킨다. 그나마 남은 유일한 친구 리즈조차 찰리에게서 등을 돌리도록 만드는 비밀마저 영화 후반부에 드러나는데, 이런 찰리는 기실 아무리 객관적으로 보아도 관객의 입장에서 연민의 시선을 보내기는 쉽지 않다. 찰리가 돈을 줄테니 가끔 방문해달라는 부탁에 응하는 차가운 엘리도 사정을 알고 보면 외려 찰리보다도 딱한 인물이다. 엘리가 찰리를 역겹다고 하는 건 단순히 찰리의 외모 때문이 아니며 이는 관객의 오해를 사지 않도록 엘리의 대사로 직접 언급된다. 보다 호리호리했던 찰리의 모습이 간간이 드러나는 바닷가 플래시백 장면에서조차 엘리와 찰리의 시선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고 있는 엘리와는 달리 찰리는 바다를 향해 전진하는데, 이는 찰리가 의도하든 그렇지 않았든 엘리의 삶에 거의 개입하지 못했음을, 그리고 스스로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찰리는 엘리의 삶의 일부가 되고 싶었고 최선을 다해 경제적인 부양을 하려 한 것으로 드러나지만 엘리에겐 그 무엇도 충분하지 않았던 셈이다.
찰리의 자기 파괴적인 면모는 영화 초반보다 후반에 더욱 두드러진다. 찰리가 거구가 된 이유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초반에는 자기 힘으로 일어서는 것조차 힘겨워하고, 샌드위치를 먹다가 질식할 뻔한 찰리의 모습에 얼마간 관객이 연민의 시선을 보낼 만한 여지가 남는다. 하지만 리즈의 걱정과 계속되는 경고에도 피자를 두 판씩 주문해 먹어치우고 병원을 죽어도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관객은 찰리에게서 서서히 정을 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관객은 끝까지 찰리가 스스로 일어나 엘리에게 다가가길 응원하게 되는데 이는 전적으로 브랜든 프레이저의 섬세한 연기에 기댄 결과물이다. 때론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워하고, 상처받은 아이인지 사이코패스인지 구분조차 가지 않는 엘리를 향한 지속적인 애정을 드러내며, 경계할 법도 한 의문의 방문객 토마스에게도 친절하지만 리즈의 말은 결코 듣지 않는 모순적인 인물 찰리는 브랜든 프레이저를 통해 이해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 학생들의 에세이를 서둘러 채점해야겠다던 찰리는 작은 스트레스에도 민감하게 반응해 수업을 하다 말고 노트북을 던져 버리기도 한다. 이런 세심한 감정선을 포착해 낸 브랜든 프레이저는 특수 분장을 뚫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침마저 연기해낸다.
<더 웨일>에서 구원은 파멸을 통해 다가온다. 모순적이지만 응원하게 되는 주인공 찰리를 제외하면 특히 엘리와 토마스가 이에 해당된다. 돈은 둘째치고 낙제를 면하기 위해 찰리에게 에세이 대필을 부탁한 엘리는 결국 찰리의 농간 아닌 농간으로 낙제를 당한다. 하지만 찰리가 엘리에게 건넨 그 낙제 에세이는 결국 엘리의 구원으로 이어지며, 엘리의 구원은 찰리의 구원으로도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해석은 관객의 몫이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었던 엘리는 그 파멸 속으로 아버지를 함께 이끌고 들어가려 하지만 결국엔 그 파멸이 본인과 찰리, 그리고 토마스라는 외부인마저 구해낸다. 의도치 않게 엘리에게 자신의 과거를 밝힌 토마스 또한 스스로 막장까지 내달렸던 캐릭터다. 하지만 엘리의 농간 덕에 구원의 길이 열리고 토마스는 다시 한번 살아갈 기회를 얻는다는 점에서 <더 웨일>은 파멸이 구원을 이끄는 모순적인 서사 구조를 띤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구원하고자 하는 직접적인 시도들은 거의 대부분(어쩌면 전부) 실패한다. 엘리 덕분에 새로운 기회를 얻은 토마스는 이것을 신이 자신에게 준 기회로 여기고 찰리를 구원하려 든다. 하지만 찰리가 토마스로부터 구원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찰리가 구원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리즈가 찰리의 유일한 친구인 이유는 찰리를 구원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결국 말실수를 하게 된 토마스는 자신의 시혜적인 태도에 있는 문제점을 끝까지 자각하지 못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찰리는 무엇보다도 솔직함을 중요시하는데 이는 토마스와 엘리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토마스는 찰리가 밀어붙일 때까지 찰리의 외양이 역겹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엘리는 처음부터 찰리에게 역겹다는 말을 쏟아내며 발화하는 것과 동시에 sns를 통해 찰리에게 상처주기를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엘리가 찰리를 상처줄 수 없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대단히 솔직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도 제발 솔직한 글을 써달라 호소하는 찰리에게 솔직함은 대단히 중요한 자질이기에, 이를 갖추고 있는 엘리는 어떤 방법으로도 찰리에게 상처줄 수 없다.
구원을 원하지 않았던, 구원받기보다는 자신의 연인과 함께 지옥에 처박히길 원했던 찰리는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와중에 한 줄기 빛을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건 그저 사랑하는 딸에게 스스로 다가가는 것뿐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구원의 길이 열린다. 찰리도 엘리도 스스로가 아닌 서로를 구원하려 했고, 이는 단순히 부녀지간을 뛰어넘는 인간 간의 신뢰와 애정에 기반한다. <더 웨일>이 단순하면서 복잡한 이유는 이렇듯 파멸과 구원이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객이 찰리의 한 걸음을 복잡한 심경으로 지켜보면서도 응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한 걸음이 단순히 찰리의 무게뿐 아니라 인생을 담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엘리는 찰리가 다가오길 바라면서도 결코 먼저 다가가지 않을 것이기에, 찰리를 구원하는 건 결국 찰리 자신이며 이것이야말로 관객을 전율시키는 메세지다.
*본 리뷰는 씨네랩 시사회 초청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 크기의 진실
두 여자가 대화한다. 학생 인터뷰어와 작가 인터뷰이. 작가는 자꾸 인터뷰 내용에서 벗어나려 한다. 자신의 이야기보다 학생의 이야기에 더 관심이 많아 보인다. 인터뷰가 채 끝나기 전, 시끄러운 음악이 들린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그 음악은 작가의 남편이 튼 것이다. 작가는 또 저런다며 한숨을 내쉬고, 인터뷰를 급하게 끝낸다. 쿵쿵거리는 음악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움직이는 각자를 잡아내는 카메라. 그리고 작가의 남편이 죽는다. 남편의 죽음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한 재판이 시작된다. 쟁점은 작가가 남편을 죽였는가.
『추락의 해부』는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크기를 활용한다. 크게, 시각과 청각이라는 두 요소에서 크기 대비를 잘 관찰할 수 있다. 먼저, 시각적 크기를 살펴보자. 감독은 의도적으로 클로즈업 쇼트와 롱 쇼트를 번갈아 사용하며 사실의 증거와 진실의 구성 사이를 유려하게 오간다. 인물의 감정이 드러나는 순간은 아주 가까이에서 촬영하여 눈의 미세한 떨림을 포착하는가 하면, 떨어진 남편의 모습이나 설원의 풍경을 아주 멀리서 촬영하여 전체를 조망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각적 크기는 영화가 취하는 진실에 대한 태도와 밀접하게 관련 있다. 영화에서 표현된 시각적 크기는 한 규칙을 중심으로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다. 사실은 롱 쇼트로, 진실은 클로즈업 쇼트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를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사실’과 ‘진실’의 차이를 먼저 규정할 필요가 있다. ‘사실’은 있는 그대로의 증거라면, ‘진실’은 사실을 바탕으로 구성되는 숨은 의미라고 규정할 수 있다. 즉, 사실은 현상을 포착하는 것이라면, 진실은 그것들을 조합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추락의 해부』는 사실보다는 진실에 집중한다. 즉, 분절된 과거들이나 발견한 증거가 아니라, 각 인물이 알고 있는 것들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기억과 상상에서 진실을 파악하고자 한다. 그렇기에 영화는 롱 쇼트와 클로즈업 쇼트를 대비적으로 이용하며 관객이 사실보다는 진실에 관심을 가지도록 의도한다.
롱 쇼트는 대상보다는 배경을, 대상의 세세한 움직임보다는 큰 이동을 포착하는데 유리하다. 이러한 특성은 사실을 드러내는 것에 있어 용이하다. 롱 쇼트가 가장 흥미롭게 이용된 장면은 남편의 죽음에 대한 두 가지 가설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영화는 여타 법정 드라마와 달리, 플래시백이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편의 죽음을 설명하는 두 상반된 가설만은 플래시백으로 표현한다. 이때, 롱 쇼트를 이용하여 남편이 죽는 과정을 아주 멀리서, 부감으로 포착하며 그 사건의 전말을 관조하고 있다. 영화는, 이러한 부감으로 표현한 시퀀스를 통해서,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검사와 부검의에 의해 남편의 죽음을 설명하는 과정이, 인물의 감정과 의미는 거세하고 그 움직임만 포착하는, ‘사실’을 찾아내려는 시도일 뿐이라고 보여준다.
특히, 이 장면에서 미니어처를 이용하여 상대적으로 일상적인 스케일의 화면을 마치 롱 쇼트인 것처럼 표현함으로써, 재판에서 인형처럼 이용되고 있는 인물들의 처지와, 그들과 어떠한 감정적 연결 없이 관조하고 있는 관객의 모습을 상기한다. 게다가 서로 상충된 두 설명을 모두 비슷한 방식으로, 또한 비슷한 분량으로 시각화하여 무엇이 사실인지조차 모호하게 한다.
즉, 영화는 롱 쇼트를 통해 진실이 거세된 사실의 무상함을 표현한다. 그리고 이때 아주 무미건조한 목소리, 이미지와 상충되는 사운드를 오버랩하여, 관객이 제시된 사실들을 믿을 수 없게 만들 뿐만 아니라, ‘사실이 과연 모든 것을 드러내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도록 만든다. 많은 시각 정보를 담는 롱 쇼트가 오히려 사실의 부분만을 보여줄 뿐이다.
클로즈업 쇼트는 특정 인물 혹은 사물이 강조한다. 특히, 익스트림 클로즈업의 경우에는 눈의 미세한 움직임 등 아주 작은 움직임조차 포착한다. 그리고 이렇게 포착하는 이미지는 인물의 감정으로부터 기인한 변화들이다. 특히, 시각장애를 가진 아들이 사진을 가까이 들여다 보는 장면은, 아들의 볼 수 없는 눈 자체가 카메라가 되어, 자신과 사진을 클로즈업하며, 사실의 증거를 넘어 진실의 구성으로 이어지는 클로즈업이 잘 드러난 장면이다. 생각에 잠긴 인물의 모습, 선택을 해야 하는 인물의 모습 등을 아주 가까이서 면밀히 뜯어보는 것은, 관객으로 하여금 사건의 전말보다는 인물에게 사건이 가지는 의미를 궁금하게 만들고, 추리하게 한다. 즉, 서사의 중심이 인물이 스스로 구성하는 진실로 옮겨지는 것이다.
또한, 아주 제한된 것들만을 보여주기에, 관객은 시각 외의 정보를 요구한다. 숨소리, 목소리와 어조 등 청각 정보에 귀 기울이게 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장면에서 청각 정보의 내용보다는 분위기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인물이 하는 대화의 구체적인 단어, 내용 보다는 그들의 목소리의 높낮이, 말과 말 사이의 쉼 등에 더 신경을 쓰게 된다. 이 또한, 사실보다는 진실을 파헤치는 것과 관련이 있다. 클로즈업 쇼트를 통해 자극되는 다른 감각은 구체적인 사실의 단순한 나열 너머의 분위기, 감정, 관점 등이 훨씬 더 두드러지게 만든다. 그리고 앞도적으로 롱 쇼트보다 클로즈업을 많이 쓰며, 심지어는 전반적으로 다른 영화에 비해 인물을 가까이서 담으며, 감독은 사실보다 진실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시각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청각으로도 확장된다. 첫 장면에서부터 강렬한 음악은 큰 소리로 인물의 대화에 끼어들며 신경을 곤두세우게 한다. 영화에서 큰 소리는 두 가지의 역할을 한다. 하나는 방해이고, 다른 하나는 표출이다. 큰 소리는 음악, 대화 등에서 자주 나타나는데, 이는 종종 다른 사람 또는 상대와의 대화를 방해한다. 이로 인해 소통에서 단절이 발생하고, 이 요소들은 오해를 만든다. 충분한 정보가 부재하게 됨으로써, 그 뒤에 숨은 의미가 가려지는 것이다. 또한, 큰 소리는 발화하는 사람의 감정을 표출하는 수단이 되거나,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거나 왜곡하는 계기가 된다. 남편은 자신의 불만을 큰 음악 소리나 목소리로 표출하고, 아내는 자신의 불만을 또 다른 큰 소리로 표현한다. 이것이 폭발하는 장면이 부부가 싸우는 장면이다. 반면, 아들은 부모의 다툼 소리를 들었다고 말하는 것을 통해 자신이 구성한 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표출하고, 실험을 통해 그것이 부정되었을 때, 자신이 구성한 진실을 의심하고 왜곡하기도 한다.
반면, 영화는 아주 작은 소리를 통해, 인물의 진심을 드러낸다. 살아 있는 인물인 엄마와 아들은 자신의 진실을 이야기할 때 상대적으로 작은 소리로 말한다. 혼잣말이나 둘 사이의 대화를 통해서만, 심지어는 음소거를 통해서, 진심을 드러내고, 자신의 진실을 표출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두드러지는 장면은 아들이 개를 통해 실험하는 장면과 자신만의 진실을 선택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진실을 이야기하는 그들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또한 너무 개인적이고, 때로는 고요해서 그것들은 외려 왜곡되고 무시되며 방해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아들과 엄마의 대화가 차단되고, 아들 혼자 방에 들어가고, 엄마와 떨어져 있는 시간을 갖기를 요청하는 모습에서 이러한 불통이 표현된다. 하지만 시끄러운 첫 시퀀스와 대비되며 끝나는 고요한 마지막 시퀀스는 소리가 거세되고 아들의 심리이자 아빠의 분신으로써 역할하는 개와 함께, 잠에 드는 엄마의 모습에서 그들의 소음과 고요에 의한 불통이, 적요에 의한 소통으로 변한다. 말로써 이어지던 단절이, 행동으로서 연결된 것이다.
법정에서 검사는 아내가 쓴 소설의 일부를 인용한다. 주인공은 20장과 300장의 대립을 강조하고, 소설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이는 남편과 표절 문제로 싸울 때도 드러난다. 영화는 끊임없이 크기를 대비하며, 진실의 부분과 전체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탐구한다. 영화는 이렇게 크기의 대비를 통해 사실의 모호함과 진실의 개별성을 직시하게 한다. 이를 통해, 과연 전체는 부분의 집합에 불과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진실은 구성됨을 아들과 그를 관찰하는 카메라의 거리, 아들을 둘러싼 소리의 크기로 표현한다. 시각장애를 가진 아들이 느끼는 시각적 비합리와 청각적 모순성을 통해 영화는 진실이란 무엇인지 질문하는 것이다.
-
- 멸종된 순수에 대하여
이 글은
영화 [9명의 번역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을 퍼가거나 인용 시 출처를 반드시 남겨주세요.
코로나의 기세가 꺾일 줄 모르던 불과 1년 전 그때.
많은 국민들은 코로나로 인해 불철주야 일하던 의료진들을 향한 <덕분에 챌린지>를 펼쳤었다.
터진 댐에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방대한 물을 맨몸으로 막는 듯한 불가항력을 느꼈던 의료진들에게, 이 수줍지만 진심을 담은 챌린지는 아주 잠깐 숨을 돌릴 수 있는 도피처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이 챌린지의 뒤에는 간접적으로 코로나의 종식에 힘쓰고 있지만 그 어떤 혜택이나 칭찬에서도 한 발짝씩 멀어져 있었던 연구원들도 있었다.
냉정한 잣대를 들이밀자면 의료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코로나의 기세를 꺾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기에. 늘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보다는 그림자 안이 더 편하다며 씁쓸하게 웃어야만 하는 연구진들의 알 수 없는 섭섭함은 지금도 풀지 못한 숙제처럼 마음속에 쌓여있을 것이다.
영화 [9명의 번역가]들은 출판업계에서 독자들에게 가장 원색적인 모욕을 많이 들으면서도 늘 영광의 중심에서는 슬그머니 멀어진. 마치 영화처럼 벙커 속에 있는 듯한 번역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심지어 그런 푸대접을 받는 것도 억울한데 아직 출간되지도 않은 신간의 원고를 누출시켰다는 누명까지 쓴 채로.
해커의 정체를 밝혀가는 과정은 고전적인 밀실 추리 방식을 지니고 있고. 9명의 용의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스스로의 알리바이를 증명하는지 살펴보는 재미도 함께 느낄 수 있다.
2인자의 삶;숨어 있는 것들을 향해.
사진출처:다음 영화
번역가들은 신간 <더덜리스>의 번역을 완성할 때까지 계약서의 비밀유지 조항 때문에 벙커 밖으로 나올 수 없다.이 갑갑한 벙커 안에서 번역가들이 받아야 하는 대우는 사실 사는 데는 아무 지장 없지만, 한편으로는 참 서운하고 비참하다 불러도 할 말은 없어 보인다.
절대 빛이 들지 않을 것만 같은 벙커(지하)에서 영원히 2인자의 삶을 살아야만 할 것 같은 번역가들의 처지는 그들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숨겨놓은 욕망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그 욕망이 헬렌의 경우는 작가가 되는 것이고. 카테리나(올가 쿠릴렌코)는 작가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 로즈메리에게는 아름다운 문학의 정점에서 일하는 것. 그리고 알렉스(알렉스 로더)에게는 에릭의 멸망.
이들 마음속에는 자신 안의 욕망이 벙커에서 빠져나와 빛을 보기를 바라면서도. 자격 미달이라거나. 혹은 아직 때가 아니었다는 말을 들을까 봐 두려워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비밀스러운 장소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최소한의 선은 지키려 하지만. 에릭(램버트 윌슨) 만은 다르다.
에릭은 이 영화를 통틀어 거의 완벽하게 자신의 속과 겉이 같고. 스스로의 모습을 숨기는데 가장 적은 힘을 들이는 사람이므로. 번역가들이 안전하게 숨겨 놓은 마음속의 비밀스러운 욕망을 맘껏 비웃는다.
자신의 위치가 물리적인 장소인 벙커 안의 번역가들을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다는 생각과 동일하게. 그들의 꿈마저도 휘두를 수 있다고 착각해 무차별적 폭언을 일삼는다.
그러나 자신의 꿈을 해석하고 곰곰이 들여다볼 장소가 없었던 에릭의 행동은 그 누구보다도 성급하고 깊이가 없었으며 예측 가능했기에. 악인에게 허락된 예정된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꿈은 실패할 가능성도 많지만. 그만큼 성공할 가능성도 많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자신이 그렇게 무시해 마지않던 알렉스의 꿈은 보기 좋게 에릭을 추락시켰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순수한 것들은 모두 죽었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영화에는 크게 두 부류의 집단이 등장한다.
한 집단은 문학에 대한 순수한 마음을 상징하고 있다. 에릭의 비서이자 책임감 외에는 인간적인 면을 많이 볼 수 없는 로즈메리와, 작품에 대한 애정으로 책 속 인물인 레베카처럼 꾸미고 다니는 카테리나. 번역가로서의 삶 이외에도 작가로서의 삶을 꿈꾸며 몰래 소설을 쓰던 헬렌이 이 집단에 속한다.
악, 혹은 속세로 대변되는 인물은 두말할 것도 없이 에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존재하는 순수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죽이거나 해를 가한다.
충실한 로즈메리는 에릭을 결국 가장 필요한 순간에 떠났고. 헬렌은 에릭의 차가운 말에 스스로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벙커 안에서 목숨을 거두었다. 카테리나의 생사는 에릭의 총알에 의해 알 수조차 없게 된다.
거침없는 에릭만큼이나 참을성이 없는 총알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기어코 <더덜러스> 원작자의 가슴팍에도 한 발의 총알을 명중시킨다.
카테리나보다도 먼저 사경을 헤매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위치였지만. 알렉스는 자신이 가슴팍에 품었던 책으로 인해 목숨을 건진다. 마지막 순간까지 알렉스의 목숨을 구해준 책은. 알렉스에게도. 또한 <더덜러스>의 창조주에게도 마지막 순수를 상징하는 책(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었다.
결국 에릭은 자신의 눈길이 닿는 모든 곳에 있는 순수의 존재를 모조리 말살시켜 버렸다.
결말에 대하여;처벌은 합당한가.
사진출처:다음 영화
표면적으로 봤을 때 모든 죄를 뒤집어쓰는 쪽은 에릭이다. 첫 장면에서 강렬하게 타오르는 서점의 살인마저도 에릭의 짓인 것이 자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벌이라는 면에서 보면 알렉스도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단지 두 사람의 처벌이 그들의 처지와 살아온 모습에 맞게 변형된 것일 뿐이다.
에릭에게 내려진 처벌의 형태는 그 어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세속적이며. 벗어날 수 없고. 또한 적절하다. 에릭은 감옥에서 소위 하는 말처럼 썩게 될 것이고. 자신이 한없이 견고하다 생각하며 쌓아올린 명성은 녹슬다 못해 삭아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알렉스에게 내려진 처벌은 이에 비하면 형태가 없어 보이지만. 오히려 더 가혹해 보인다.
작가로서의 삶으로 본다면, 이 가명을 쓰는 작가는 두 번 다시는 <더덜러스>같은 책을 쓸 수 없을 것이다. 아니.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할 것이라 말해도 좋다. 이 베일 속의 작가는 늘 숨어 있을 누군가가 필요했고. 자신에 대한 용기가 없었다. 그는 스승의 뒤에 숨어있을 때야 자신의 모습을 겨우 드러낼 수 있었고. 그 뒤에서의 삶에도 겨우 만족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을 위한 방파제가 사라진 지금. 글을 쓸 베짱이 있었다면.이라는 말이 평생 그의 벙커 속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질 것은 명약관화하듯 뻔하다.
또한 알렉스로서의 삶도 비참하다.
알렉스의 가장 큰 자부심이자 스스로를 감추는데 적합했던 투명 망토인 <더덜러스>의 원작자라는 사실은. 에릭의 총알 한 발에 의해 숨통이 끊어져 버렸다. 그는 이제 맨 얼굴인 채 세상을 살아가야 하지만. 이미 불법 번역을 했다는 사실로 인해 경찰서에 출입한 경력이 있고. 이번 사태로 인해 경찰의 의심을 일정 기간 동안은 받으며 살아야만 한다.
멀고 먼 인생의 종점을 바라보며 현재의 알렉스 상태를 진단해 본다면. 에릭의 미래보다도 암울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치면서
많은 반전을 두고 있는 영화는 좋다. 관객들이 가진 고정관념을 깨는 것도 좋다.
에릭에게서 원고를 뺏기 위해 벙커에 갇히기 전부터 계획을 세워왔다는 설정이 기발하긴 하지만. 그 후반부는 전반부의 정통 추리와는 결이 달라 많은 감정을 깨뜨린다.
또한 해커의 이메일에 대한 설정 추리도 조금 아쉽다. 물론 에릭의 바보 같음, 혹은 후반부의 결이 달라지는 장면을 위한 것이었겠지만. 그 상황에서 이메일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은 외부밖에 없으므로 가장 먼저 의심했어야 한다.
또한 에릭의 경우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 있어서는 모조리 처벌을 받았지만(혹은 이제 받겠지만) 알렉스의 경우는 마음이 매우 복잡해진다.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다른 번역가들을 모두 이용했다는 점에서 보면. 주인공도 결국은 번역가들을 가장 앞장서서 도구로 사용했음에는 틀림이 없고. 이것이 과연 에릭과 비교했을 때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은 알렉스가 울컥이며 외롭게 길을 걷는 모습을 비춘다.
그 복잡한 표정에 담긴 감정은 다행이라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에릭의 여생을 성공적으로 감옥에 저당잡혔음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뉘우침과 참회의 감정이 지배적이다. 알렉스의 마음이 궁금해진다. 에릭의 총알이 책에 박혀 목숨을 구했을 때. 분명 자신은 살았다고 안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자신의 비극이 시작될 것이란 걸 알았을까.
에릭의 형벌과 함께 스스로의 형벌도 그의 생을 관통하며 시작된다는 것을. 알렉스는 그 길을 걸으며 어렴풋이 느꼈으리라.
[이 글의 TMI]
1. 보는 내내 속도감이 꽤 빨라서 긴장이 많이 되었음.
2. 두 시간짜리 영화가 귀해지는 마법이라니.
3. 이제 추워져서 슬슬 가을 옷 정리도 해야 할 듯.
4. 친구랑 보러 가기로 했는데 얘 늦잠 자서 인생 하직할 뻔함.
#9명의번역가 #레지루앙사르 #올가쿠릴렌코 #알렉스로더 #램버트윌슨 #프랑스영화 #추리영화 #밀실추리 #영화추천 #최신영화 #영화리뷰 #영화리뷰어 #영화해석 #결말해석 #영화감상평 #개봉영화 #Munalogi #브런치작가 #네이버인플루언서 #네이버영화인플루언서 #내일은파란안경 #메가박스 #영화꼰대
-
- 7월 넷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데드풀과 울버린>이 개봉 후 첫 주말을 맞아 70만 명을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습니다.
1위에 오른 <데드풀과 울버린>의 누적 관객 수는 100만을 넘기고, <슈퍼배드 4>가 2위에 오르며 누적관객 수 58만 명을 기록했습니다. <탈주>는 꾸준한 인기를 보이며 누적관객 수 228만 명을 돌파했습니다.
<탈주>는 손익분기점을 넘긴 것은 물론 2024 전체 박스오피스 5위에 안착했습니다.
<데드풀과 울버린>은 북미에서도 1위를 기록했고 첫 주말 수익 2억 달러를 돌파하며 역대 R등급 영화 가운데 가장 높은 기록을 세웠습니다. <데드풀과 울버린>은 전체 영화 흥행 기록으로 8위에 오르며 침체된 ‘마블’영화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트위스터스>는 <데드풀과 울버린>에 밀려 2위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흥행 강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슈퍼배드 4>는 3위를 기록했고 누적수익 2억 9천만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
- 전부 애거사 짓이야 | 작품성도 세계관도 챙긴 스핀오프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완다에게 모든 마력을 빼앗긴 후, 기억마저 삭제되어 웨스트뷰에 남겨진 '애거사 하크니스'(캐서린 한). 스스로를 형사라고 착각하며 참견쟁이 이웃으로 살아가던 애거사 앞에 난데없이 소년 마법사 '틴'(조 로크)이 나타난다. 애거사를 감싸고 있던 봉인을 해제한 틴은 애거사에게 '마녀의 길'로 데려가 달라 애원하고, 원치 않던 애거사도 잃어버린 마력을 되찾기 위해 함께 '마녀의 길'을 걸을 다른 마녀들을 찾아 나선다.
애거사의 악명에도 불구하고 '릴리아'(패티 루폰)와 '제니퍼'(사쉬어 자마타), '앨리스'(알리 안)와 '샤론'(데브라 조 럽)까지 마녀들을 모으는 데 성공한 애거사와 틴. 하지만 '마녀의 길'에 들어서자마자 그들은 목숨을 건 장애물을 마주치며 위기에 빠진다. 심지어 애거사와 악연인 죽음의 여신 '데스'(오브리 플라자)가 나타나고, 미지의 마법사였던 '틴'이 완다의 아들 '빌리'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애거사의 집회는 자중지란에 휩싸인다.
마침내 주인공이 돋보이는 멀티버스 사가
개국공신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멀티버스 사가의 최종 빌런인 '닥터 둠'으로,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메가폰을 잡았던 루소 형제를 <어벤져스: 둠즈데이>와 <어벤져스: 시크릿 워즈>의 감독으로 복귀시킨 MCU. 팬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지만, 마냥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그간 멀티버스 사가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방증이었기 때문. MCU에서 은퇴했던 영웅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멀티버스 사가의 영화 11편과 드라마 10개는 공통적인 문제가 있다. 바로 새 캐릭터를 소개하느라 바쁜 나머지 본래 주인공이 잘 안 보인다는 것. <닥터 스트레인지: 광기의 멀티버스>만 보더라도 새로운 캐릭터인 아메리카 차베즈가 주동인물이었고, 닥터 스트레인지는 그녀의 성장을 도와주는 조력자 역할에 그쳤다. 그 결과 멀티버스 사가에서는 인피니티 사가 속 아이언맨과 같이 관객들의 이입을 도와줄 길잡이를 찾을 수 없었다.
<완다비전>의 스핀오프 <전부 애거사 짓이야>도 겉보기에는 마찬가지다. 이 드라마는 완다에게 마력을 봉인당한 마녀 애거사의 후일담을 보여준다. 완다의 쌍둥이 아들 중 하나인 '빌리', 죽음의 여신인 '데스' 같은 새로운 캐릭터와 함께. 하지만 <전부 애거사 짓이야>는 다행히도 멀티버스 사가의 문제를 피해 가는 데 성공했다. 본편의 메시지를 영리하게 확장하면서 스핀오프 역할에 충실한 결과 주인공이 가려지지 않았으니까.
보이는 것과 봐야 하는 것
<전부 애거사 짓이야>에서는 시나리오가 가장 눈에 띈다. 본편인 <완다비전>의 작법을 똑 닮았기 때문. 특히 반전을 활용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완다비전>보다 진일보한 듯 보인다. <완다비전>은 겉과 속이 다른 드라마였다. 겉으로는 완다와 비전의 일상을 다룬 시트콤이었다. 그들이 이웃들과 시간을 보내고, 두 쌍둥이 형제를 낳으며 겪는 여러 에피소드를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미국 시트콤 형식을 빌려 보여줬다.
하지만 <완다비전>의 진짜 이야기는 달랐다. 마녀와 로봇 부부의 시트콤은 완다가 마법 장벽 '헥스' 안에서 꾸며낸 환상에 불과했다. 마지막 가족이었던 비전을 잃은 슬픔과 절망을 외면하려는 그녀의 피난처였다. <완다비전>은 이 겉과 속의 괴리를 완다의 환상 속에 침투한 마녀 애거사의 음모를 비롯한 여러 복선을 통해 암시했다. 그렇기에 이 모든 복선을 회수하며 진상을 보여주는 반전의 충격도 그 어떤 MCU 작품보다 강렬했다.
<전부 애거사 짓이야>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보이는 이야기와 실제로 진행시키는 이야기가 다르다. 전자는 애거사가 주인공이다. 완다에 의해 모든 마력을 봉인당했던 그녀는 기억을 되찾은 후 자신만 아는 '마녀의 길'을 통과해 힘을 되찾으려 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완다의 아들 중 하나인 빌리가 사실 생존했고, 그가 애거사의 봉인을 풀어 이용했다는 것. 쌍둥이 형 토미를 찾기 위해서.
그러나 '마녀의 길'의 끝에서 토미를 되살리는 데 성공한 빌리는 놀라운 진실을 깨닫는다. '마녀의 길'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 장소였고, 단지 본인이 마법으로 만든 가상의 공간이었다는 것을. 이처럼 빌리의 시점에서 모든 복선이 맞아떨어지는 전개는 <완다비전>의 반전을 연상시키에 충분하다. 아니, 그 이상처럼도 보인다. <완다비전>에 비해 <전부 애거사 짓이야>는 명확한 복선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사랑과 마법
본편 <완다비전>처럼 가족애와 마법의 비틀린 관계를 강조하기에 반전은 더욱 인상적이다. 그 중심에는 애거사와 아들 니콜라스가 있다. 애거사는 니콜라스를 출산한 직후에 그들 앞에 나타난 데스를 만나고, 데스에게 사정해서 간신히 아들과의 시간을 추가로 얻어낸다. 이후 애거사와 니콜라스는 마녀들을 유인해 그들의 힘을 빼앗는 삶을 살았고, 니콜라스는 그들의 일상에 멜로디를 붙여서 '마녀의 길'이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하지만 '마녀의 길' 노래를 완성한 그날 새벽에 데스가 니콜라스를 데려가자, 애거사는 이별의 아픔이 담긴 아들의 마지막 선물을 악용하기 결심한다. 마녀의 길 끝에서 힘을 얻으려면 마녀의 집회를 모아야 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린 뒤, 집회에 모인 마녀들의 마력을 강탈하면서 더 강한 마녀로 거듭난 것. 멀티버스를 엉망으로 만든 완다만큼이나 삐뚤어진 방식으로 가족을 잃은 슬픔에 대처한 셈이다.
사랑이 남긴 아픔을 잘못된 마법으로써 극복하는 이야기는 빌리의 서사에서도 반복된다. 완다가 헥스를 닫을 때 유대인 고등학생인 윌리엄의 몸에 깃들어서 홀로 생존한 빌리. 가족을 포기한 엄마에 대한 원망과 형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한 그는 자기도 모르게 현실 조작 능력을 활용해 토미를 되살려 낸다. 다만 그 과정에서 다른 마녀들을 희생한 만큼, 빌리의 여정도 사랑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한 결과물이나 다름없다.
흥미롭게도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면서 아픔을 극복한다. 죽을 위기에 처한 빌리와 아들을 겹쳐 본 애거사는 자신을 희생해 그를 구한다. 완다를 원망하던 빌리는 아들을 만나기가 두려워 죽어서도 유령이 된 애거사를 보면서 모성애의 힘을 배운다. 그렇게 아들을 잃은 마녀와 부모를 잃은 마법사는 둘만의 집회를 만들고 토미를 찾아 나선다. 이는 <완다비전>에서 끝내 혼자가 된 완다와 절묘한 대비를 이루기에 더욱 의미심장하다.
다양성이라는 잔을 반만 채우다
이처럼 <전부 애거사 짓이야>는 본편을 성공적으로 계승한, 착실한 스핀오프라 할 수 있다. 다만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완성도가 만점에 가깝지만, 만점이라고 할 수 없다. 인종, 문화, 성적 지향성 등과 같은 다양성 관련 코드를 다소 편의적으로, 또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MCU에서는 백인 남성이 아닌 히어로나 조력자들의 수가 늘어났다. 여성 히어로의 수도 늘었고, 중국이나 파키스탄 등 여러 문화적 배경을 활용하고 있으며, 동성애자나 장애인 히어로도 하나둘씩 조명받고 있다. <전부 애거사 짓이야>도 마찬가지다. 단적으로 '애거사의 집회' 구성원만 보더라도 백인, 흑인, 동양인 마녀가 모두 포함됐다. 애거사와 데스, 빌리와 그의 애인처럼 동성애자 커플도 전면에 등장한다.
문제는 <전부 애거사 짓이야>가 다양성이라는 메시지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이번 드라마는 다양성이 중요하다는 신호는 보내고 있지만, 그 신호를 작품 속에 온전히 녹여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인상적인 지점이 없지는 않다. 일례로 애거사와 데스를 레즈비언 커플로 설정한 선택은 효과적이었다. 새로운 캐릭터를 등장시키고, 극적 긴장감을 고조하고, 애거사와 아들의 서사를 비극적으로 만드는 역할과 기능이 분명했다.
그에 반해 빌리와 그의 애인을 등장시킨 의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빌리의 동성애 성향이 강조되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 빌리가 애거사를 이용해 토미를 되살리고자 하는 전개에 빌리의 애인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도 빌리의 이야기와 애거사의 서사는 완성도의 깊이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전부 애거사 짓이야> 속의 다양성이 절반 가량은 공허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세계관도 챙기는 일석이조
그렇지만 <전부 애거사 짓이야>는 여전히 멀티버스 사가에서 오랜만에 접한 성공작이다. 본편에서 등장했던 주인공의 과거사와 후일담, 새로운 캐릭터의 성장 서사를 한 묶음으로 유려하게 풀어냈으니 그 자격은 충분하다. 이에 더해 MCU의 미래를 기대케 하는 여러 암시도 효과적으로 보여줬기에 이번 성공은 더 뜻깊다.
우선 빌리의 본격적인 데뷔는 캐시 랭, 케이트 비숍, 미즈 마블 등이 모일 <영 어벤져스>로 나아가는 중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데스'의 등장도 인상적이다. 초월적 존재로 묘사된 그녀는 <어벤져스> 쿠키 영상에서는 대사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토르: 러브 앤 썬더> 등에서는 배경으로 등장한 바 있다. 그런 그녀가 전면에 나서면서 <이터널스>처럼 더 초월적인 존재가 엮이는 큰 스케일의 이야기의 발판도 마련된 듯 보인다.
마지막으로 MCU 작품이나 세계관 외적으로도 기대할 만한 변화도 흥미롭다. 사실 MCU는 <전부 애거사 짓이야>를 시작으로 마블 스튜디오에서 제작하는 모든 실사 드라마에 '마블 텔레비전'이라는 별도 레이블을 사용할 예정이다. 과연 이러한 변화가 수년간 만족감이 낮아진 팬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 있을지 지켜보는 새로운 재미가 생긴 셈이다. 확실한 것은 <전부 애거사 짓이야>가 그 초석을 단단히 다졌다는 사실이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닥터 스트레인지의 멀티버스보다 흥미롭고 애절한 마녀의 길
-
- 떡밥 회수 성공! 딱 그만큼만
<외계+인 1부>가 공개되고, 1년 반 만에 2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초반 스타트가 좋지 않았던 터라 반환점을 돌고 마무리를 향해가는 길이 쉽지 않아 보였지만, 2부는 1부에서 뿌려 놓은 떡밥을 회수하는데 성공한다. 액션, 코믹 등 보는 재미도 괜찮다. 하지만 딱 그만큼 만이다. 멋지게 결승점으로 들어오기에는 태생적으로 힘이 부족하고, 뿌려 놓은 떡밥을 거둬드리는데 급급하다. 마치 2부가 할 수 있는 역량을 최대치보다 높게 잡고 가다 마지막에 가서야 이 모든 사실을 깨닫고 회수에 무게 중심을 두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2022년 외계인 죄수들에게 쫓기던 중 가드(김우빈), 썬더(김우빈)와 함께 고려 시대로 도망친 이안(김태리)은 홀로 성장하며 신검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신검을 찾아야 미래로 복귀하고, 외계인의 지구 침공을 막을 수 있기 때문. 외계인 자장(김의성)은 이안을 계속 추격하고, 무륵(류준열)은 이안을 도와 적들을 막는다. 흑설(염정아)과 청운(조우진)은 무륵 안에 뭔가 있음을 직감하며 그를 계속 쫓고, 맹인 검객 능파(진선규)는 눈을 뜨기 위해 신검을 찾아 나선다. 한편, 2022년 서울에서는 외계인의 정체를 알게 된 민개인(이하늬)은 자신만의 대결을 준비하기 위해 채비를 한다.
1부가 방대한 세계관을 소개하고, 인물들의 전사를 소개하는 등 빌드업에 치중했다면, 2부는 이를 발판으로 사건을 마무리하기 위한 스피디한 전개와 화끈한 웃음, 그리고 이안과 무륵의 관계에 집중한다. 여기에 약간의 반전이 추가되면서 1부와 다른 2부만의 면모를 보여준다. 1부를 안본 관객들을 위한 서비스로 초반 이안의 내레이션을 통해 전사를 확인할 수 있으니 스토리를 따라가는 데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2부는 1부의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50여 가지의 편집본을 완성한 최동훈 감독의 노력이 엿보인다. 이전보다 더 많은 이들이 쉽게 이 세계관에 빠져들 수 있도록 스토리와 액션 등 장르 영화의 재미를 부각시켜 진입장벽을 낮췄다. 하지만 1부의 단점이 2부에서 충분히 메워졌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가장 큰 아쉬움은 최동훈 감독이 그동안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중심 주제가 이 시리즈에서는 너무 가볍게 다뤄지거나 아예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최동훈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여러 인물이 각자의 이익을 위해 하나의 물건을 가지려는 케이퍼 장르의 특장점이 도드라져 있다는 것, 현실감 넘치는 캐릭터와 말맛이 넘치는 대사,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과 이를 알아가는 진득한 과정에 있다.
감독이 창조한 캐릭터의 공통점 중 하나는 가명 혹은 1인 2역 이거나, (본의 아니게) 남을 속이는 데 일가견이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범죄의 재구성>의 최창혁(박신양), <도둑들>의 마카오박(김윤석), <암살>의 안옥윤(전지현), 후자는 <타짜>의 고니(조승우), <암살>의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이 왜 가명을 쓰고 남을 속이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면 저마다 각자의 이유가 있지만,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찾아가기 위함에 있다. 특히 안옥윤은 후반부 쌍둥이 자매로 연기하며 자신은 친일파 집안의 딸임에도 이를 부정하고 독립군으로 사는 것을 결정한다. 고니는 구라가 판치는 도박 세계에서 발은 담근 후, 마지막 아귀(김윤석)와의 승부에서는 구라가 아닌 진실로 승부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는다.
이 시리즈에서도 이안과 무륵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펼친다. 인간의 몸속에 외계인이 들어가는 설정에 기반, 자신의 몸에 설계자 혹은 누군가가 들어간 것으로 여기는 무륵은 계속 자신의 정체성에 물음표를 갖는다. 얼뜨기 도사인지 설계자인지, 그렇다면 부채에서 검을 집어 든 도술은 누구의 힘에서 비롯됐는지에 대한 궁금증 말이다. (스포일러라 밝힐 수 없지만)후반부 그는 이 모든 실타래가 풀린 후 멋지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성장한다. 이안도 무륵과 같은 내면의 여정을 겪은 후 똑같은 결과물을 얻는다.
다만, 그 과정이 너무 얕고 빠르다. 무륵과 이안의 내면과 그 고민을 들여다보려고 하면, 어디선가 코믹함이 가미되고, 액션이 난무한다. 그리고 말 한마디와 장면 한마디로 모든 걸 해결하려 든다. 관객 또한 두 인물의 고민에 동참하고 그의 심리를 따라가려고 하지만, 그런 틈이 없다. 물론, 장르 영화에서 이런 부분은 부가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장면 마다 캐릭터와 상황이 붕 뜬 느낌을 주는 시리즈 특성상 조금이라도 지면에 발을 딛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는 꼭 필요했다. 그래야 캐릭터에 마음이 가 닿으니까 말이다.
극 중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만남에는 헤어짐이 정해져 있고 떠남이 있으면 반드시 돌아옴이 있다)의 활용도 아쉽다. 영화는 이 말을 빌려, 서로 다른 시간과 세계에서 온 이들이 관계를 맺고 힘을 합쳐 외계인을 물리치는 이들의 관계, 더불어 결국 자신의 세계로 남고 떠나야 하는 이안과 무륵, 이안과 유사 가족(가드, 썬더)의 관계를 설명한다. 함축적으로 그 의미와 메시지 전달에 용이하지만, 주마간산의 느낌은 배제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 이 시리즈와 가장 닮은 <전우치>가 다른 전작들보다 완성도가 낮게 평가되는 건 이번 시리즈가 간과한 이 부분이 결여 되어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전우치>에서 마음이 가는 건 주인공 전우치(강동원)도, 자신의 전생을 알게 된 인경(임수정)도 아닌 치매 걸린 노파의 예언(운명)에 굴복하는 화담(김윤석)이다. 도사인 줄 알았지만, 요괴였고, 운명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 운명에 따라가게 되는 이 인물은 전우치와 인경보다 더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이는 전우치와 인경과 달리, 화담이란 캐릭터가 가진 무게감과 생각할 거리가 더 많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결과적으로 <외계+인 2부>는 재미있게 즐기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외계인이 나오고, 신선, 도사가 나와 한바탕 신나게 노는 영화가 이 세상 어디 있으랴. 최동훈 감독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마음에 걸리는 것뿐이다. 아쉽다. 360억 원의 제작비를 떠나서, 그동안 다수의 작품을 통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정립해 나갔던 감독의 영화라서 더 그렇다. 인생은 ‘회자정리 거자필반’ 아니던가. <외계+인> 시리즈는 이제 떠나보내고, 감독의 장점이 담긴 작품으로 돌아오길. 갈고 닦은 그만의 신검으로 관객의 가슴에 '콱' 찍어주길 바란다.
사진 제공: CJ ENM
평점: 2.5 / 5.0
한줄평: 떡밥 회수 성공! 딱 그만큼만
-
- 들어본 적은 있는데 본 적은 없는 영화 #4
환몽(幻夢) CINE 리뷰 4화_ 영화 '원스'!
** 영상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아름다운 음악들로 유명한 영화 원스!
Falling Slowly도 알고, 들어본 적도 많지만
혹시... 보셨나요..?- 한국에서 영화 '원스'가 갖는 중요한 의미!
- 30초 영화상식 : ‘슬리퍼히트’가 무엇인가요?
- 이거 실화냐? 주연 배우끼리 실제로 사랑에 빠진 사랑영화
- 음악과 사랑 사이
- 우리가 꼽은 명장면
- 몽's 한줄평
영화 '원스'를 보고나서 마구 생각하고, 마구 떠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
-
- 영화 <캐논볼> 메인 예고편
예상치 못한 사고로 형을 잃은 ‘현우’.
‘현우’는 모든 원인이 담임 선생님 ‘연정’의
동생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편, 동생이 저지른 사고로 힘든 일상을 보내던
‘연정’은 ‘현우’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선생님 동생 감옥에 있죠?”
난감하기만 한 ‘연정’은 ‘현우’에게
이해할 수 없는 부탁을 받게 되는데…
“선생님이랑 바다에 가고 싶어요”
-
- 넷플릭스 <먹보와 털보> 공식 예고편
의외의 찐친 먹보(비) X 털보(노홍철) 전국을 누비며 릴랙스! 좌충우돌 찐우정 로드트립 버라이어티 《먹보와 털보》 12월 11일,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