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end Choice Movie2022-10-06 16:03:46
넷플릭스 10월 신작
넷플릭스 10월 신작 한국드라마, 영화
넷플릭스 2022년 10월 신작
한국드라마,영화 추천5편
20세기 소녀
1999년, 단짝 친구가 홀딱 반한 남학생을 친구 대신 관찰해 주기로 한 10대 소녀
하지만 소녀에게도 애기치 못한 사랑이 찾아오는데...
감독: 방우리
출연: 김유정, 변우석, 박정우, 노윤서 등
장르: 청춘영화, 로맨스 드라마
공개: 10월 21일
예고편 보러가기
글리치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남자친구를 찾으려는 여자
UFO 커뮤니티 회원들과 손잡고 사건을 조사하면서
황당한 음모론에 발을 담게 되는데...
크리에이터: 진한새, 노덕
출연: 전여빈, 나나 등
장르:미스터리, 스릴러, SF
공개: 10월 7일
예고편 보러가기
슈룹
기백 넘치는 중전마마
사고뭉치 아들들을 길들이려 치열한 왕실 교육에 돌입한다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는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아들 중 한 명을 조선의 차기 왕으로 키워야 하는데...
크리에이터: 김형식, 박바라
출연: 김혜수, 김해숙, 최원영, 김의성, 문상민, 옥자연, 강찬희 등
장르: 시대물, 드라마
공개: 10월 15일
예고편 보러가기
네가 빠진 세계
악플에 시달리던 톱스타 유재비
로맨스 소설을 읽고 있던 어느 날,
소설 속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데...
크리에이터: 손예은, 김보라, 신소영
출연: 김재원, 나나, 현석, 금동현, 하선호
장르: 로맨틱, 청소년
공개: 10월 20일
예고편 보러가기
테이크 원
내노라하는 뮤지션들이 각각 선택한 단 한 곡의 노래를
최고의 라이브로 남기기 위해 모든 걸 쏟아붓는다
기회는 단 한 번
이 모든 것이 원 테이크에 담기는데...
크리에이터: 김학민
출연: 조수미, 임재범, 유희열, 박정현, 정지훈, AKMU, MAMAMOO
장르: 다큐, 음악
공개: 10월 14일
예고편 보러가기
Relative contents
-
- 좋아한다는 이유로 다 용서해야만 하는가
어릴 적 봤던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의 집 앞에서 하루종일 기다리는 것을 낭만적으로 연출하는 경우가 종종 보고는 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낭만적인 상황도 아니며 설렌다고 느껴서도 안된다. 사랑은 상호 의사소통이며 서로를 이해하는 행위인데 상대의 의사를 무시하고 무조건적으로 나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사랑이 아닌 집착이다. 또한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았으며 거절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연락하는 것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명백한 스토킹이며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공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매체에서 이런 구애 행위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았는지 그리고 이것을 보며 과거의 나는 왜 그것을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매체의 힘은 상당히 강하다고 생각한다. 일방적인 구애행위를 통해 끝끝내 상대방이 나의 사랑을 받아줬다고 생각했을 때 그것이 과연 건강한 사랑, 건강한 의사소통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만약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공포심을 느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의 범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영화 미저리에서는 폴에 대한 애니의 표현을 옳지 않은 방식, 왜곡된 사랑으로 표현했는데 나는 이처럼 미디어에서 스토킹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 때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며 스토킹에 대해 알아보다가 현재 한국에서는 스토킹이 법적 용어가 아니기 때문에 스토킹 자체만으로는 범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연인과 같은 친밀한 사이에서 일어나는 폭력, 살인과 같은 범죄가 스토킹의 연장선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간 나는 이런 친밀한 사이, 혹은 일방적인 구애행위가 범죄로 이어지는 뉴스들을 접하면서 피해자의 입장이 아닌 가해자의 이야기, 가해자의 목소리에 더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닌가 반성하게 되었다. 이런 범죄의 피해자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굉장히 어렵고 쉽게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영화 미저리를 보면서 스토킹이 얼마나 심각한 범죄행위인가를 알 수 있게 되었고 성범죄 교육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것처럼 스토킹에 대한 교육, 건강한 사랑은 무엇인가에 대한 다양한 교육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하루빨리 스토킹과 관련된 법을 제정하여 피해자를 보호하고 이것이 2차 범죄로 이어져 더 많은 피해자가 발생하는 일이 없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
- 나는 어른인가 아이인가
한 남자의 비리 사건이 터진다. 이 남자는 죄책감 때문인지 회피하고 싶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가족들을 남겨두고, 죽어버린다. 유일하게 집에 남은 딸아이는 경찰의 표적이 되어 중요한 참고인이 된다. 경찰은 아이가 아버지의 남은 비리 재산의 행방을 알고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아이를 보호라는 명목 하에 감시를 하기 시작한다. 아이는 미성년자이지만 이미 다 커서 알 거 다 아는 어른 이임을 감안하고 이 아이에게서 아버지가 남긴 남은 지산에 대한 힌트를 얻고자 아이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한다. 그런 그 아이는 자살을 기도하고, 그 자살사건에 현수가 투입된다. 그런데 과연 이 아이는 아버지의 비밀을 알고 있었을까? 이 답을 하기 전에 우린 이 18살을 더 자세히 이해해보아야 할 것 같다.
1. 어른 아이, 18세를 대하는 어른들의 자세
이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두 가지 상반되는 대사가 있었다.
"18살이면 다 큰 거죠."
"아직 어린애잖아요."
비리 사업가의 딸을 두고 내린 상반된 평가. 과연 이 아이는 정말 다 큰 걸까.
요주의 아이, 세진은 경찰의 시선으로는 다 큰 아이로 간주되어 어른의 세계로 인도되었다. 경찰은 세진을 다 큰 아이로 간주되었지만 여전히 어린 나이로 인해 어른에게 물어보듯이 취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세진에게 뭔가 더 확실한 정보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세진이 머무는 집 곳곳에 cctv를 심어놓았다. 하지만 세진은 사생활 침해라며 항의했지만 정보가 더 나올 수도 있는 상황에서 세진의 이런 항의는 세진에 대한 의심만 더 높아지게 하는 행동일 뿐이었다. 경찰의 입장에서는 세진을 섬으로 보내 요양도 시켜주고, 원하는 요구조건을 모두 들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고작 cctv 단 거 가지고 항의를 하는 세진이 정말 거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경찰은 참고인으로서 당연히 감수해야 할 부분을 다 커서 알 거 다 알만 틈 성장한 세진이 어린 나이를 내세워 미운 어린아이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세진이의 자살 소식에 태풍을 핑계로 시신을 찾으려는 노력은 별로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고, 귀찮은 아이니 빨리 사망 처리하려고 했던 것일 수도 있다. 이 아이가 죽은 이유에 경찰의 지분이 아예 없지 않음을 경찰 집단이 이미 빨리 간파하고, 이 아이의 잔상을 빨리 잊고 싶은 진짜 다 큰 어른들의 비정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비슷하게, 어른들은 고등학생 나이 때의 아이들의 성장을 평가할 때, 어른 특유의 '내가 다 살아봐서 알아'라는 식의 관점과 함께 상황적 요소와 자신의 주관을 섞어 평가한다. 예를 들면, 집안의 웃어른이 돌아가셨을 때, 혹시 웃어른이 유산 상속자를 18세 미성년자 손자에게 몰빵하셨을 때, 18세 아이에게 무엇인가 설득하려는 주위 친척 어른들이 이 아이를 회유하는 타이밍에 잘 나오는 멘트 중에 "너도 이제 다 컸으니, 알 거 아니냐"라는 뉘앙스의 멘트를 날리시는 분들이 있다. 요맘때 학생들이 주요하게 쓸모가 있을 때에는 머리는 커버렸지만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임을 어른들은 잘 인정하려 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세진이를 두고 보이는 경찰의 태도를 두고, 이 미성년자가 필요한 존재일 때에는 어른 취급을 해주며 존중하는 척해주다가도 아이의 쓸모가 다하면 버려버리는 모습에서 아직 완벽하게 성인이 되지 못한 아이가 어른에게 느꼈을 환멸은 어느 정도였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유일하게 세진을 아껴주던 형사 형준마저 자신을 이용했고, 새엄마도 자신을 찾아주지 않는 이 상황에서 18세 아이가 느꼈을 좌절을 그 시기를 거쳤지만 그 시기에 대해 잊어버린 어른들은 이해할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어른들의 비정함과 다 컸지만 아직 어른이 되진 않은 18세의 연약함을 비교하게 만들어 준다.
필요에 의해 어른들은 18세 미성년자를 다 컸으니, 어른의 세계에 협조하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그 다 큰 아이는 여전히 아이였고, 어른이 요구하는 덕목은 아직 갖지 못한 것이 당연했다. 어른들은 ' 다 컸다'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어 본인이 18세였던 시기를 망각하고, 세진을 다 큰 '아이'임을 무시해 버렸고, 그 무시의 결과는 아이에게 더한 못을 박았음을 세진의 경찰에 대해 표시한 반감을 통해 알 수 있다.
2. 아무것도 몰랐냐는 말의 비정함
이 영화에서 세진과 그녀의 죽음을 쫓는 경찰, 현수는 비슷한 심리적 상태를 보인다. 희미해져 가는 정신을 붙잡고자 자신의 몸을 해하면서까지 정신을 차려보려고 하고, 악몽을 꾸면서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고, 허한 동공으로 분노에 이글거리는 듯한 표정을 짓는 세진을 통해 현수는 자신의 과거를 본다. 그래서였는지 직감적으로 이 아이는 다른 경찰의 예상과는 다르게 경찰이 혹할 만한 정보는 가지고 있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아빠가 비리를 저지르고, 오빠가 감옥에 가있는 상황에 아무것도 모르고 해맑게만 살아온 자신의 잘못도 일정 부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자책감으로 인해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있음을 알았다.
"너는 내가 어떻게 남편이 그렇게 오래 바람나도록 아무것도 모를 수 있냐고 물어봤었지. 근데 있지, 나 진짜 아무것도 몰랐었다. "
이 현수의 대사에서 정말 모르고 살았던 나에게 어떻게 그렇게까지 모를 수 있냐는 상식 가득한 주변인의 대사는 참으로 가슴 아플 수밖에 없다. 그 말은 내 바보 같음을 비난하는 것 같기도 하거니와 해맑게 살았던 나 자신을 자책하며 반추하게 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세진의 경우도 같았다. 아빠가 비리를 저지르고 있는지도, 오빠가 감옥에 갈 만한 일을 저지르는 줄도 모르고 나만 행복하게, 해맑게 살아온 것에 대해 어린아이가 얼마나 자책을 하고 살았는지 세진의 cctv 속 얼굴과 팔에 상처가 그 시간의 암울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나마 새엄마는 세진의 연약함을 잘 알았지만 본인의 상황의 불안정함을 이겨내는 데에 치중하느라 세진은 잠시 뒤로 미루어진 존재였다. 오히려 마주한 적도 없는 현수만이 세진의 외로움, 자책감, 무력감을 이해했다.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경험을 겪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동질감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어도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는데, 다 큰 사람 취급을 당한 아직 어린아이는 주변 사람들의 배신이 얼마나 크게 다가왔을 것인지 우리도 예상만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결코 공감까지는 이루어낼 수 없을 것이다. 겪어보지 않는 한.
사건의 주인공이 아닌 주변인들이 쉽게 내뱉는 말들은 생각보다 상처가 많이 된다. 당하고만 있었던 나의 바보 같음을 저주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주변 사람들의 위로라는 가면을 쓴 팩트 폭력들은 생각보다 위로가 안된다. 이처럼 다른 이들이 그들이 살아온 인생에서 기반한 편견이 담긴 팩트 폭력은 전혀 상처 받은 이에게 위안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인생에서 큰 현타를 얻고, 무너지기 일보직전의 사람에게는 각자의 상식을 담은 충고, 조언보다는 그저 입을 닫고, 조용히 옆에 있어주는 사람이 최고의 사람이다. 혹시 당신의 인생에도 아무 충고, 평가도 없이 밥 먹자고 끌고 나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내 사람이니, 붙잡으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3. 내 몸에 흐르는 피를 확인해 내가 살아있음을 깨닫는다.
현수와 세진 모두 타인의 시선에서 바라볼 때, 자해와 비슷한 행위를 한다. 타인이 바라볼 때, 팔에 상처를 내는 행위는 자살 기도로 해석할 수도 있고, 고통에 몸부림치다 정신을 놓고, 자신의 몸을 해하는 정신병적 행위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현수의 대사를 보면, 자해성 행위의 또 다른 정의를 고려해보게 된다.
"넌 내가 죽고 싶어서 그랬던 것 같아? 징계 피하려고 내 팔을 그렇게 찧었던 것 같아? 아니, 일이라도 해야 잠깐이라도 잊을 수 있는데, 마비 때문에 일까지 못하면 나 진짜 어떻게 될까 봐. 제발 마비가 풀렸으면 해서 그랬어. 죽으려고 그랬던 게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그랬다고. 그 애도 그랬을 텐데, 아무도 없어."
다른 이들은 자신의 몸을 해하는 일은 죽을라고 하는 일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몸을 해하는 이유 중에 정신적인 고통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에 상처를 내서 피를 봐서라도 살아있음을 확인하려고 하는 경우도 꽤 많다. 정신의학에서도 이런 분석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오래도록 무감각하고 무기력한 일상 속에서 공허함에 시달린 이에게, 자해를 할 때의 고통과 피가 흐를 때 느껴지는 일련의 자극적인 감각들은, 마치 살아있음을 깨닫는 감각으로 다가올 수 있다. 아무런 의미 없는, 마치 죽은 듯한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 스스로를 상처 내고 다치게 하는 행위, 죽음으로 가까워지는 행위로 인한 자극이 역설적으로 살아있다는 자각을 되살려 주는 것이다.
[출처] 내 몸에 피가 흐르면, 나는 살아있음을 느껴요.; 자해 속에 숨겨진 마음|작성자 두두
그리고 비슷한 예시로, 일본 소설 중에서 스트로베리 나이트라는 소설이 있는데, 그중에서
야구라고는 손에 꼽을 정도로 거의 해본 적이 없었지만 눈동냥으로 배운 기억을 되살려서 가슴을 공이라 상상하고 있는 힘껏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방망이는 쩍 인지 철석인지 모를 소리를 내면서 멋지게 가슴 위를 떄리고 정확히 턱에서 멈췄다.
“으아아아아아아!”
덜커덩덜커덩, 침대 채로 쓰러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여자는 거칠게 몸부림쳤다. 왼쪽 가슴은 한입 베어 먹은 토마토처럼 살덩이가 쑹덩 날아가고 없었다.
환호성과 피비린내가 뒤섞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빨간색이었다. 나도 기분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살아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출처] 스트로베리 나이트 : 혼다 데쓰야
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은 살인자가 살인을 저지를 때에 심리를 묘사하는 부분이다. 현수와 세진은 자신의 몸을 해치지만 이 소설 속에서는 그 반대로 살인자가 사람을 죽일 때에 느끼는 쾌감의 근원이 피를 보고, 피의 색깔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끼는데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현수와 세진이 살인자와 같은 부류로 분류한 것은 아니지만 현수와 세진이 자기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행위를 한 사람이라는 점과 몸을 해쳐서 피를 보고서라도 살아있음을 느끼려고 한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이 살인자가 피를 통해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부분을 떠올리게 되었다. 다른 이나 자신의 몸을 해쳐야만 볼 수 있는 피라는 존재는 참 아이러니하게도 색깔 때문인지, 인간의 몸속에 존재한다는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참 기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몸을 죽이는 일이 나의 생존을 확인하는 일이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현수와 세진은 희미해져 가는 맨 정신을 붙잡기 위해서 피라는 매개체를 생각해낸 거라면, 살인자의 경우, 피를 자신의 쾌락으로 여기는 점이 다르다. 현수와 세진에게는 생존의 문제라면, 살인자에게는 쾌락의 도구인 것이다.
4. 그럼에도 살아가다.
영화 속에 이런 대사가 있다.
생각보다 인생은 길다.
이 대사가 결국 영화의 궁극적 메시지다. 인생이 잠시 망가졌을지언정 당신의 전체 인생은 아직 진행형이다. 자신이 문제 생겨 곪아 터질 때까지도 해맑게 모르고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자책하고 해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배신한 다른 이에게 맞설 힘을 길러야 함을 이 영화는 외치고 있다. 내가 나를 해하고 싶을 만큼 자괴감이 드는 문제는 분명 나만 잘못해서 생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남 탓하지 말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이렇게 자신을 해할 만큼 자책만 하는 것도 결코 손뼉 쳐 줄 일은 아니다. 자책하고, 자신을 해할 시간에 문제를 이렇게 만든 다른 인간들을 응징하거나 문제를 말끔히 잊고 살아갈 깡, 패기, 똘끼가 조금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영화는 말하고 있다. 다른 이들도 함께 만들어낸 문제에 본인만 파괴당하는 것은 너무 억울한 것 아닌가. 나에게 해를 끼쳐 존재 이유를 찾지 말고, 이젠 소소하더라도 꾸준한 성과로 존재 이유를 찾으시길. 우린 아직 죽을 이유보다는 살 이유가 더 많을 테니까.
-
- 기준선이 모호한 범죄 스릴러
윈드폴 (Windfall, 2022)
“기준선이 모호한 범죄 스릴러”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범죄, 드라마, 스릴러
러닝타임 : 92분
감독 : 찰리 맥도웰
출연 : 릴리 콜린스, 제시 플레먼스, 제이슨 세걸
개인적인 평점 : 3/5
윈드폴 줄거리
한적한 별장을 무대로 위험한 대치 상황이 벌어진다. 한쪽은 원한을 품은 평범한 사람. 다른 한쪽은 IT 업계의 콧대 높은 억만장자와 그의 아내.
Windfall : 우발적인 소득이나 횡재, 낙과
넷플릭스에 새롭게 공개된 영화 <윈드폴>은 제목 뜻 그대로 꽤나 우발적으로 돌아가는 영화다. 사실 포장하자면 ‘우발적’인 거고 안 좋게 말하자면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정확한 기준선이 없다. 얼마간의 긴장감과 어느 정도의 메시지를 갖췄으나 ‘어느 정도’에서 끝나는것이 못내 아쉽다.
영화의 이름 없는 세 주연은 배우 릴리 콜린스, 제시 플레먼스, 제이슨 세걸이 맡았다. 얼떨결에 시작된 납치 상황 속에서 세 주연 배우는 각자의 파트를 잡고 극을 이끌어간다. 오만방자하고 모든 걸 다 가진 IT 기업의 CEO, 우연한 기회에 그를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 직원이었던 와이프, 그리고 떠돌이로 추정되는 남자까지. 세 사람은 우연히 벌어지는 사건 앞에서 각자의 불편함과 선택에 대해 변명한다.
세 주인공은 부자 백인 남자와 부자가 아닌 백인 남자. 부자 백인 남자의 액세서리처럼 여겨지는 여자로 해석될 수도 있고, 기회를 잡지 못한 사람들을 실패자라 기만하는 기득권층, 조용히 상황이 흘러가길 기다리거나 기다릴 수 밖에 없었던 보통의 사람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윈드폴>은 소리 없이 다가오는 선택의 순간과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지켜야만 했던 선(Line)에 대해 이야기한다. 결국 이 영화는 선택을 억눌렀던 보이지 않는 선을 넘는 영화다. 공평하게 다가오는 선택의 순간과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 선택지. 그 선택지의 선을 넘는 것이다. 이렇게 느낀 이유는 영화의 엔딩에 가서 알 수 있다. 약간의 루즈함을 참을 수 있다면 말이다.
기준선이 모호한 이야기
<윈드폴>의 장점은 명확하다. 주연 배우 릴리 콜린스, 제시 플레먼스, 제이슨 세걸. 그리고 단점도 명확하다. 이야기의 기준선이 없다. 영화의 처음은 집 없는 남자가 끌고 가는 납치극의 모양새를 하고 있고, 중반은 오만한 CEO의 헛발질, 아내와 남자의 감정적 교류로 채워진다. 그리고 후반부에 가선 약간의 충격을 가미한 누군가의 선택으로 마무리된다. 흐름 자체의 어색함은 없지만 어째 딱 집중할 만한 포인트가 없다. 납치극이 가진 특유의 팽팽한 긴장감보다는 느슨함이 느껴지는 분위기 속에서 집중할 만한 포인트는 릴리 콜린스가 연기한 아내 캐릭터 하나뿐이다.
캐릭터의 특성
이야기의 흐름은 전적으로 세 인물들에게 기대어 진행된다. 이들은 각자의 특성에 맞춰 상황에 대처한다. CEO는 위험성을 고려하지 않고 도움이 될만한 기회를 잡기 위해 배팅을 하고, 아내는 움츠린 채 자극보다는 안전한 길을 찾으려 한다. 남자 또한 그렇다. 이들의 이러한 태도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따라 갈린다. 어쩌다 또는 어쩔 수 없이 선을 지키며 살아왔는지, 아니면 극적으로 쟁취했는지에 따라서 말이다.
등에 과녁을 달고 있다고 생각하며 물불 가리지 않고 일에 뛰어들었던 CEO는 납치가 된 상황에서도 거만하게 남자를 깔보는 모습을 보인다. 어쩌다 CEO의 아내가 되어버린 여자, 그 또한 남자에게 큰 위협을 느끼지 않지만 간혹 남편이 만드는 아슬아슬한 상황을 수습하기 바쁘다. 어쩌다 강도가 되어버린 남자는 이 상황을 크게 키우지 않고 마무리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초조함과 불안감을 숨기지 못한다.
항상 누군가의 윗선에서 살아온 사람의 여유와 오만함,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며 살아왔던 사람이 가진 초조함이 대비되며 극에 어느 정도의 텐션을 만든다.
이야기의 배경
이야기는 깔끔하지 못한 행색의 남자가 억만장자의 텅 빈 별장에서 ‘어쩌다’ 별장의 주인과 마주치면서 시작된다. 식사도 챙겼고, 잠시간의 휴식도 즐겼으니 이제 나가보려는 찰나~에 딱 마주친 거다. 지문까지 닦고 조용히 없었던 일로 묻어두려 했던 상황이 어쩌다 보니 본격 강도 사건이 되는 순간이다. 아름다워 보였던 별장은 그렇게 별안간, 납치극의 배경이 된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겉보기와 다른 현실
납치극의 배경이 되는 초호화 별장의 상황은 CEO와 아내, 남자의 상황과 닮아있다. 지상 낙원 같지만 알고 보면 주인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아 잊혔던 별장은 CEO와 아내의 알맹이 없이 겉만 멀쩡한 결혼 생활, 별장에 침입한 남자의 존재는 CEO와 아내의 사이에서 여자의 속마음을 들어주는 비슷한 처지의 남자로 비유된다.
CEO 부부는 겉으로 보기엔 완벽하다. CEO는 엄청난 부를 축적했고 아내는 남편의 도움을 받아 빚을 갚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회사를 설립했다. CEO는 바쁜 와중에도 아내를 위해 스케줄을 취소하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얼핏 보면 부족할 것 하나 없는 사이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이 두 사람의 사이엔 부부 사이에 가장 중요한, 진실한 감정이 없다.
CEO는 아내와 2세를 계획하고 있지만 아내는 아이를 원하지 않는지 피임약을 소지하고 다닌다. 별장에 도착했을 때도 CEO는 아내와의 잠자리를, 아내는 별장 구경을 원한다. 아내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꽃, 장미를 발등에 새겼지만 CEO는 그것을 정말 못생긴 타투 정도로 생각하고 제거 시술을 받게 한다. 평범한 직원이었던 아내는 자신의 빚을 갚아준 CEO와의 결혼을 선택했지만 결혼 이후부터는 선택권을 박탈당한 삶을 살게 된다. 행복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 행복해 보이기만 하는 삶으로 이어진 것이다.
CEO는 남자 앞에서도 ‘난 아내가 먼저’라고 외치며 겉으로는 아내를 위하는 척하지만, 알고 보면 보기에만 좋았을 뿐, 바람까지 피우고 있는 상당히 못된 남편이었다. 아내의 타투를 알아보고, 아내의 마음을 들어주는 인물이 남편이 아닌 납치범인 남자인 게 조금 애잔한 부분이다. 어째 남편보다 남자와 더 잘 통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릴리 콜린스는 영화 속 커플을 연기하기 위해 사회 엘리트에 대한 다큐멘터리와 레드 카펫 위에 오른 커플의 사진을 보고 여성이 정말 행복해 보이는지, 그의 감정은 어떠한지 분석하는 연습을 했다고 한다.
선을 넘다. 결말 해석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어떤 것인진 대략 알 것 같다. 선택엔 반드시 결과가 따르고, 스스로 선택한다는 건 일련의 선(Line)을 넘는다는 뜻이다. 영화의 후반부, ‘아무도 다치지 않고, 없던 일처럼 일을 끝내겠다.’고 했던 남자의 다짐은 정원사의 죽음과 함께 깨지게 된다. 이전에도 손과 발을 떨며 초조함을 내비치던 남자는 CEO와 아내에게 총을 들이밀며 고민한다. 억울한 누명을 덮어 쓸 수도 있으니 이들도 함께 죽이는 게 안전할 거라는 생각과 아무도 다치지 않도록 하겠다는 생각. 남자는 훅 다가온 선택의 순간을 두고 고민한다.
고민하는 남자에게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선을 넘지 말아요. 당신은 살인자가 아니잖아요.”
남자는 아내의 말에 설득되어 결국 선을 넘지 않고 조용히 떠나기로 결정한다. 후반부 내내 무언가를 고민하던 아내는 결국 선을 넘는 선택을 한다. 부부를 위협했던 남자의 머리를 치고, 억압된 결혼 생활을 하게 만든 남편을 총으로 쏜 후 아내는 자신의 발을 바라본다. 아내의 발 앞엔 옅은 턱으로 된 정원과 현관의 경계선이 있다. 아내는 죽은 두 사람을 남겨두고 경계선을 넘어 걸어간다. 아내는 그렇게 어떤 선택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만들었던 보이지 않는 선을 벗어난다.
선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나쁘지 않은 상황 속에서 내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있는 선택과 아슬아슬한 상황속에서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선택. 후자에 해당하는 선택만 가능했던 아내는 영화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온전하게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게 된다.
백인 남성으로서 많은 선택지를 가졌던 CEO와 여성으로서 몇 가지의 선택지를 받은 아내. 그리고 아무런 선택지를 받지 못하고 허무하게 하차한 유색 인종 정원사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닥치는 선택의 순간, 선을 넘어설지 보이지 않는 선에 갇혀 어쩔 수 없는 선택을 반복할지는 내가 정하는 것이다. 다만 그 선택지가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지는 않는것이 현실이다.
TRANSLATE withx
EnglishTRANSLATE withEnable collaborative features and customize widget: Bing Webmaster Portal
-
- [BIFF 데일리] 무진에서도 성찰이 필요하다
감독: 김수용
출연진: 신성일,윤정희,김정철,이낙훈
시놉시스
서울에서 제약회사의 전무로 있는 윤기준은 직장 일의 피로 때문에 1주일 휴가를 내고 무진으로 내려간다. 무진은 안개가 자욱한 곳인데 그 동네는 윤기준이 6.25 전쟁 때 있었던 고향이다. 무진에 도착한 윤기준을 반기는 건 중학교 동창이자 성공한 세무서장인 조한수였고 둘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모임 자리에 가게 된다. 그 모임 자리에서는 서울에서 예술 대학을 나와 무진에서 음악 교사로 일하는 하인숙이라는 여자를 처음 보게 되고 윤기준과 하인숙은 서로 가깝게 지내게 되는데...
윤기준은 자신의 내면을 되돌아보면서 과거와 현재를 떠올린다. 현재의 자신에게 독백으로 말하며 지금은 무진에서 가장 성공한 동창들 중 한 명이지만 과거에는 초라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복잡하고 심리적인 압박이 있다. 그런 윤기준에게 하인숙이라는 여자는 보통의 여자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자신의 불안정한 욕구를 채워줄 여자였던 것이다. 둘은 만난 지 얼마 안 돼서 사랑에 빠지지만 아내가 있던 그에게도 이 여자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여자였고 그의 이모에게도 자신의 아내라고 칭할 만큼 한마디로 말하자면 두 번째 아내였다.
그런데 하인숙의 입장은 과연 어땠을까? 윤기준에게 서울로 같이 데려가달라고 하고 오빠라고 친근감을 보이면서 무진에서 벗어나고픈 간절한 심정 말이다. 서울의 예술 대학에서 성악을 공부했지만 무진으로 내려와 모임자리에 나가면 주야장천 유행가만 부르는 자신이 필자가 봐도 윤기준과 상황이 똑같았다. 그런 답답함에 접점이 있었던 걸까? 영화 안개는 복잡한 내면의 심리 관계를 해결하고픈 윤기준과 하인숙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복잡한 내면으로 인한 사랑 그리고 성찰
2023. 10.06 (금) 12:00 CGV 센텀시티 2관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2023. 10.04 (수)~ 2023. 10.13 (금)
-
- 젊은이는 더 이상 희생하지 않는다
캐빈 인 더 우즈
줄거리
다 함께 깊은 숲 속 별장에 놀러가기 위해 모인 다섯 친구들.
별장의 지하실에는 이상한 물건으로 가득 찼고, 숲의 분위기는 심상찮다.
그 사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수상한 사람들까지.
그들은 무사히 이 숲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아래 내용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는 더 이상 희생하지 않는다
숨은 의미 찾기
"사회는 무너져야 해. 우리가 너무 나약해서 그걸 허용하지 못할 뿐이지."
친구들은 마약쟁이 마티의 투덜거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하지만 이 말은 영화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대사다.
기관의 존재를 모르고 이 영화를 중반부까지 본다면 아마 누구나 한 번쯤은 봤을 법한 뻔한 공포영화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안 어울리는 여러 명의 친구들이 갑자기 뭉쳐서 여행을 간다. 그들은 20대의 청춘인데, 그 중 한 명은 늘 무언가 고민을 가진 상태지만, 발랄한 친구들에 의해 마지못해 여행에 동참한다.
사진 참조 : 네이버 영화
엄청 큰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꼭 길을 잃어버리고, 어쩐지 음산한 분위기의 가게를 찾아가서 꼭 길을 묻는다. 그럼 가게 주인은 거의 90%의 확률로 친구들이 가는 곳에 대해 부정적인 발언을 한다. 혹은 '돌아가라' 같은 표지판 같은 게 있지만 그런 것 쯤은 싸그리 무시해버린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딱 봐도 허름하고 으스스한데 주인공들은 거부감도 없는지 멀쩡히 그곳에 들어간다. 심각한 고민이 있던 주인공은 갑자기 새로운 사랑에 빠지고, 서브 커플은 자기들끼리 물고 빨면서 급 19금 영화를 상영하고, 외로운 분위기 메이커는 중간중간 산통을 깨는 방식으로 환기를 시켜준다. 그러고 있다 보면 주인공들은 스스럼없이 어둡고 쾌쾌한 지하실을 들락날락거리며 뻔질나게 하면 안 될 것 같은 짓들만 골라서 한다.
사진 참조 : 네이버 영화
뒷 내용은 안 봐도 알 것 같은, 뻔한 클리셰란 클리셰는 다 때려박은 공포영화 아닌가.
이 상황을 조종하는 건 비밀리에 감춰진 기관이다. 그들은 마치 익숙한 듯이 이런 상황들을 연출한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생기 없이 타자기를 두들기는 회사원이 떠오른다. 그들은 그저 근무를 하는 중이다. 그러니 이 상황이 다섯 명의 주인공에게는 진행 중인 현실이지만, 기관 사람들에게는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불과한 것이다.
마티의 말마따나 이 세계는 구속되어 있다. 싸구려 B급 영화를 공장처럼 찍어내는 과정이 바로 그 증거다.
"이런 의식은 문화마다 다르고 세월에 따라 변하기도 했지만, 항상 젊은이들을 제물로 바쳤지."
무엇을 위한 구속이냐? 젊은 세대의 반란을 막기 위함이다.
영화에서 '과거에 지구를 지배했던 고대의 신들'을 실제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말은 즉 신이라는 존재들은 명확한 형체가 있는 실제 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저 지금 이 사회를 통솔하고 권력을 쥐고, 세상을 멋대로 주물럭거리는 기득권자들을 말하는 것 뿐.
사진 참조 : 네이버 영화
그들은 자신을 위한 제물로 젊은이들의 뻔하디 뻔한 B급 영화를 원한다. 그 안에서 그들이 감정을 소모하고, 성적 대리만족을 주고, 고통스럽게 죽길 바란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헛짓거리를 하게끔 그들을 조종한다. 기관은 금발염색 혹은 가스 살포 등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주인공들에게 약물을 주입한다. 인지능력을 떨어트리는 방법이라면서. 아무리 똑똑한 젊은이라도 시야를 가린 채로 절벽에 내놓으면 걸을 수 없다. 그 상황에서 이어폰을 통해 '이렇게 움직여, 저렇게 움직여' 하고 조종하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다.
"네 말이 맞아. 인류는 다른 누군가한테 기회를 줄 때가 됐어."
그러나 그 틀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두 명의 젊은이는 담배를 피우며 말한다. 자신들이 죽으면 지구를 살릴 수 있지만, 그들은 치열하게 살아남고자 몸부림친다. 기꺼이 지구와 타인을 위해 희생하기보단 지구의 종말을 택한다. 그들은 '어른'이나 '기성세대'라는 표현보다는 '인류'라는 포괄적인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단순 기득권자들을 넘어 인류 전체에 대한 자기반성이나 다름없다.
사진 참조 : 네이버 영화
영화는 인간의 입장에서 치면 전혀 희망적이지 않다.
그저 기본 공포영화의 클리셰를 몽땅 깨버리는 엉망진창 얼렁뚱땅 흘러가는 영화다. 하지만 혼돈 속에서도 돋보이는 이러한 날카로움은 영화를 '짱구'가 아닌 '영화'로 만든다. 단기적으로 보았을 때, 결국 인류가 멸망하는 엔딩이기 때문에 배드엔딩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굳건한 시스템, 구속된 사회를 모조리 무너뜨린다면 폐허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이 싹 틀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2인분 같은 1인분 영화
감상평
일단 이 영화에서 가장 놀랐던 건 토르님의 강림. 나는 마블 세계관을 전부 들여다볼 엄두도 안 날 뿐더러, 히어로물에 큰 관심이 없다. 옛날에 로다주의 토니 스타크를 보면서 "아이언맨 넘 멋쪙!" 하긴 했지만, 그것도 다 옛날 얘기.
아무튼 그러하니 어벤져스도 그냥 스쳐가듯 연휴에 방영하는 걸로 스토리나 알고 있을 뿐이지만, 어쨌든 토르가 토르인 건 안다. 아니, 망치 들고 세상 천지 다 부수고도 남을 양반이 왜 저기서 저러고 있대.
SCP를 알게 되고 이런 저런 영상을 찾아보다가 이 세계관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도 있다길래 궁금해서 봤다. SCP096도 재밌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가 더 재밌다. 비관적이고 비꼬는 듯한 전개 방식이 신선하고 우스웠다. 그냥 재미있으려고 봤는데 갖가지 메세지까지 던져줘서 혜자스러운 영화.
-
- 은밀히 내통하는 '데이빗 로워리'의 세계
은밀히 내통하는 ‘데이빗 로워리’의 세계
데이빗 로워리의 필모그래피를 훑다보면 당혹스럽다. 일련의 영화들은 하나의 카테고리로 범주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편차도 꽤 있는 편이라 한 감독 밑에서 탄생했다고는 도무지 믿기 어렵다. 텍사스의 풍광을 중심으로 서사의 밀도보다 고독과 우울의 뉘앙스를 전면화한 멜로드라마 <에인트 뎀 바디스 세인츠>, 가족을 잃은 소년과 온순한 드래곤 사이의 가족애를 그린 디즈니 실사 애니메이션 <피터와 드래곤>, 아내 곁을 부유하는 한 유령의 절절함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저예산 영화 <고스트 스토리>, 전대미문의 은행털이범을 범죄 코미디의 형식으로 느슨하게 전개한 <미스터 스마일>, 켜켜이 쌓아올린 상징의 구조와 초현실적 공간을 기반으로 신화적 모험담을 장엄하고 기이하게 풀어낸 <그린 나이트>에 이르기까지(심지어 그의 다음 작품은 <피터 팬>을 실사화한 디즈니 영화 <피터 팬&웬디>이다). 데이빗 로워리는 특별한 사조로 묶이거나 단일한 수사로 명명되길 거부하는 감독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내밀한 특징이 전무하다는 것은 아니다. 로워리만의 전략과 세계관은 서로 다른 외피로 포장된 필모그래피에 은밀히 내장돼 점차 확장되고 있다.
1.
로워리 영화의 도입부에는 서사의 기폭제 역할을 하는 순간이 등장한다. 그 순간은 항상 죽음의 얼룩으로 칠해져 있는데, 초기작의 경우 동료의 죽음(<에인트 뎀 바디스 세인츠>)이나 가족의 죽음(<피터와 드래곤)>을 위시한 2인칭 죽음에서 후기작으로 갈수록 자신의 죽음(<고스트 스토리>)과 낯선 존재의 죽음(<그린 나이트>)이라는 (각각) 1인칭, 3인칭 죽음으로 확장된다. 일차적으로 로워리의 영화를 추동케 하는 것은 자신 혹은 타인의 죽음, 그리고 그것이 지닌 매혹의 힘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죽음이 사건이 아니라 일종의 ‘가정’처럼 주어진다는 점이다. <에인트 뎀 바디스 세인츠>에서 로워리는 연인 관계인 밥과 루스가 어째서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지, 그들의 범행 계획은 어떻게 어그러졌으며 어떤 경위를 거쳐 경찰과 대치하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그들의 동료 프레디의 죽음을 슬그머니 밀어 넣는다. 프레디의 죽음으로 절망에 빠진 밥은 경찰에게 체포되고 루스는 그와 떨어져 뱃속의 아이와 외로이 생을 보내야만 한다. 관객에게 제시되는 정보는 밥과 루스의 사랑이 꽤 깊다는 것뿐이다. 그렇게 영화는 연인 관계의 두 사람이 동료의 죽음으로 인해 물리적으로 분리된다면 그 이후의 생은 어떻게 될지 질문한다. <피터와 드래곤>은 더욱 극단적인데, 시작과 동시에 피터는 교통사고로 부모를 모두 잃고, 자취를 감추고 사는 드래곤과 조우하여 유사 가족을 이뤄 살게 된다. 의아한 것은 차가 전복되어 성인 두 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할 정도의 대형 사고였음에도 불구하고 유아기의 피터는 별다른 상처 없이 살아남아 심지어 멀쩡히 숲으로 걸어간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로워리에게 인물의 과거와 현재의 정보를 배합하려는 시도, 그러니까 인물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일은 전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는 인물을 수식하는 최소한의 수사를 제시한 다음, 죽음이라는 가정법을 통해 죽음이 낳은 이후의 삶과 그 영향 하에 흘러가는 시간의 뉘앙스를 시각화하는 데 관심을 둘 뿐이다. <고스트 스토리>에서 C의 죽음 또한 교통사고라는 우연적 사건으로 덩그러니 제시되며, <그린 나이트>에서 상대에게 목 베임을 당하는 녹색 기사의 타살 퍼포먼스도 허무맹랑한 게임의 규칙으로 존재할 뿐 그 본질과 통하는 논리적 인과 관계는 부재하다. 그런 점에서 로워리의 영화를 ‘죽음의 가정법’이 추동하는 영화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로워리가 죽음의 가정법이라는 전략을 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로워리의 영화들을 보다 보면, 정황이나 뉘앙스가 우선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다르게 말하면 그의 영화에는 캐릭터가 부재하다. 캐릭터라이징에 앞서 위에 기술한 가정법이 선제적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관객에게 제공되는 것은 가정법의 성립을 위한 최소한의 정보뿐이다. 때문에 로워리의 인물들은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에인트 뎀 바디스 세인츠>에서 루스와 밥은 현실 세계의 연인처럼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곧 잊혀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는 속담의 진위 여부를 판별하기 위해 직접 실험을 감행하는 수행자처럼 보이며, <피터와 드래곤>에서 피터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접점에서 두 세계의 공존이 가능한지 확인하는 관찰자처럼 그려진다. 또한 <고스트 스토리>에서 C는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놓고 떠난 자의 시간성을 가늠해보기 위한 영화적 존재처럼 기능하고, <그린 나이트>에서 가웨인은 위엄과 재생의 신비함으로 무장한 영화적 존재 ‘녹색 기사’의 경지에 도달해야 하는 비루한 현실적 존재로 형상화된다. 로워리에게 중요한 것은 인물의 성격이 아니라, 그들이 수행하는 탐구와 그에 대한 주관적 응답이다. 로워리는 이 성실한 수행자들을 통해 특정 명제나 세계, 혹은 추상적 개념을 시각화하고, 그것의 진실을 풀어내는 데 애쓴다.
2.
로워리는 영화와 현실 간의 역학을 탐구하고 그것들을 질료 삼아 서사를 구축하는 시네아스트다. <고스트 스토리>, <그린 나이트>에는 무엇보다 초현실적인 존재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영화 그 자체의 환유처럼 형상화된다. <고스트 스토리>에서 C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고스트로 환생한다. 하얀 천을 머리에 두른 괴이한 형상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자아를 체현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행할 수 있는 신체적 기능이 오직 응시뿐이라는 점이다. 그는 하얀 천에 뚫린 두 개의 구멍으로 시종일관 현실의 대상을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때로 접시를 집어 던지고, 피아노 건반을 내리치는 등 현실의 물질적 조건에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순간적이며 소박하다. M이 바닥에 누워 C에게 선물 받았던 노래를 들으며 과거를 회상할 때 머리맡으로 뻗힌 손이 고스트의 하얀 천과 거의 접촉되는 듯 보이는 쇼트는 그래서 외설적이고 신비롭다.
더불어 고스트는 줄곧 남겨진 아내 M의 행동을 관찰하고, 그가 머무는 집의 구석구석을 탐방하며 시간의 흐름을 감각하게 만든다. 가령, M이 상실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이웃이 선물한 파이를 우걱우걱 입에 집어넣는 긴 쇼트에서 프레임 가장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정지된 형상의 고스트는, 화면 내 유일하게 운동하고 있는 M의 처연한 몸짓과 대비를 이루며 시간의 흐름을 역으로 체감하게 만든다. 응시와 시간성이라는 감각 기능을 탑재한 고스트는 마찬가지로 관객에게 응시의 기회를 부여하고 시간성을 체감하게 해주는 ‘영화’와 유독 닮아 있다.
사랑하는 아내를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난 남자의 영적 멜로드라마처럼 보였던 영화는 의아하게도 중반부가 되자 그 둘을 완전히 떼어놓는다. 고스트는 집을 떠나는 M을 멀리서 바라볼 뿐 그녀를 따라가지 않는다. 왜 고스트는 그 집에 남아야만 했을까. 답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그녀가 문설주 틈에 새겨 넣은 메시지, 그러니까 현실이 남긴 진실을 발견해야 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고스트 스토리>는 현실이 남긴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영화의 숙명에 관한 영화다. 다만, 그 메시지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마침내 고스트가 쪽지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 그는 일순 하얀 천만 남기고 소멸된다. 현실의 진실을 알게 된 완전한 영화는 그 순간 영화가 아니며, 현실의 다른 버전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고스트 스토리>가 고스트로 분한 영화가 현실을 응시하며 그 물질적 조건에 대응하고 끝내 소멸하는 과정을 그린다면 <그린 나이트>는 비루한 기사 가웨인으로 대변되는 남루한 현실이 녹색 기사로 분한 성스러운 영화로 이행되는 과정을 그린다. 녹색 예배당으로 향하는 가웨인의 긴 여정은 현실이 영화로 이행되는 과정에 수반되어야 할 덕목들을 탐구하고 점검함으로써 종국에 영화가 현실과 분리되어 독자화되는 과정에 대한 거대한 은유이다.
<그린 나이트>는 크리스마스 연회가 열리는 예배당에 이르러 비로소 제대로 시작된다. 이때 카메라에 붙잡힌 가웨인은 예배당 상층부에 뚫린 원형의 창에서 사선 아래 방향으로 내려오고 있는 푸르고 투명한 빛을 바라본다. 빛은 원탁의 중심부를 성스럽게 비추는데, 이 형상은 마치 스크린에 투영되는 영사기 렌즈의 광원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원탁의 중심부는 그 빛이 가닿아 무대화된 스크린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 무대 위에 서는 녹색 기사는 스크린에서 퍼포먼스를 행하는 영화적 존재, 혹은 영화 그 자체이다.
사창가에서 유흥을 즐기는 게 일상인 부패한 기사 가웨인에게 왕은 “무용담 없이 왕위 계승은 꿈도 꾸지 말라.”는 일종의 압박이자 명령을 하사한다. 이로써 가웨인은 왕이 되기 위해 무용담이 필요한 현실적 자리에 머문다. 그는 방탕한 성적 유희로 얼룩져 있는 남자이고, 권력을 노리는 탐욕가이면서 한편으론 엄마와 여자 친구를 사랑하는, 남루하면서도 지극히 평범한 현실적 존재이다. 그런 그의 앞에, 즉 무대화된 스크린에 재생의 신비함으로 무장한 녹색 기사가 출연한다. 녹색 기사는 자신과 겨뤄 승리한 자에게 본인이 당한 만큼 다음 해 크리스마스에 똑같이 되갚아 준다는 황당무계한 목 베기 게임을 제안하고, 가웨인이 이에 동참하면서 남루한 현실이 성스러운 영화로 다가가는, 그 긴 이행의 과정이 시작된다.
녹색 예배당으로의 여정은 크게 네 개의 시퀀스로 구성되는데, 이는 곧 네 개의 시험대라고 말할 수 있다. 관문에서 요구되는 것들을 요약하자면 (피해자에 대한) 연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 상상력에 따른 생경함의 창조, 사랑의 윤리와 죽음의 두려움에 대한 극복이다. 각 시퀀스들은 매번 출제자처럼 보이는 인물 혹은 대상, 이를 테면 소년병, 성 위니프레드, 환각의 버섯, 성주와 성주부인을 내세워 문제를 출제하고, 가웨인이 그것들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짜여 있다. 정답과 오답을 오가며 마침내 녹색 기사 앞에 다다른 가웨인은 죽음 앞에서, 만약 지금 녹색 기사의 도끼를 피해 집으로 달아난다면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상상에 빠진다. 공교롭게도 상상 속 미래는 그간의 여정에서 끝내 체현하지 못한 덕목들, (전쟁 피해자에 대한) 연민, 사랑의 윤리,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의 문제가 고스란히 발현되며 끔찍한 결과로 치닫는다. 그런 점에서 이 몽타주 시퀀스는 필수 덕목들을 놓친 현실이 영화로 이행되었을 때의 결과를 상상 속에서 미리 상연해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침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실을 알게 된 가웨인(현실)은 죽음을 받아들이고 영화로 이행될 자격을 얻는다. 그렇게 현실은 소멸되고 영화는 독자화된다.
로워리의 세계에서 그것이 영화든 현실이든 서로에 가닿을 때 그중 하나는 필연적으로 소멸한다. 두 세계가 등가적 관계에 있다면 어느 쪽이든 하나는 무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본질은 불완전함에 있다. 두 세계는 불완전하기에 영원히 존속된다. <미스터 스마일>에서 전설적인 은행털이범 포레스트 터커는 자신이 어디서 무얼 하는지 확신이 없을 때, 꼬마였던 과거를 떠올리며 그 아이가 노년이 된 현재를 자랑스러워할지 상념에 잠긴다. 그리곤 다행히 매일 그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다고 덧붙인다. 그러자 그의 연인 주얼이 답한다. “하지만 절대 완전히 다다를 순 없을 거예요, 그렇죠? 그건 죽어서나 가능하니까.” 영화와 현실의 관계를 바라보는 로워리의 시선은 이 대사로 명료히 설명된다.
3.
로워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보이지 않는 것이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피터와 그래곤>은 이 믿음을 일차원적으로 표면화한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숲에 사는 드래곤을 본 적 있다고 주장하는 미챔은 본인의 말을 믿지 않는 딸에게 “네가 못 봤다고 없는 건 아냐.”라고 단호히 말한다. 그리고는 그녀를 ‘눈앞의 것밖엔 못 보는’ 존재로 규정한다. <피터와 드래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는 자와 보이지 않지만 그것의 실존을 믿는 자들 사이의 대립과 화해를 그린 이야기다. 다만, <피터와 드래곤>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문제는 그저 작중 인물들 사이에 국한된다. 관객은 도입부에서 작중 현실과 화면에 이질감 없이 동화되어 있는 드래곤의 형상을 이미 보았고, 실사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의 관습에 익히 훈련되어 있는 탓에 그 존재를 구태여 부정할 아무 이유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스트 스토리>에 이르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때 화목했으나 잠시 아내 M과 사이가 냉랭해진 C는 돌연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난 뒤, 하얀 천을 머리에 쓴 고스트의 형상으로 느닷없이 부활한다. 관객은 그간 한 번도 학습되지 않은 고스트의 부활 장면과 그 괴이한 형상을 직시하며, 심지어 그가 존재하지 않는 듯 행동하는 작중 인물들의 동선과 행동방식을 관찰하며, 이 황당무계한 존재의 실존을 믿어야 하는지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작중 인물 간의 문제를 관객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린 로워리는 이 구도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의 실존 가능성을 암시하며, 그 존재가 추동하는 서사의 가능성을 선보인다. 그리고 <그린 나이트>에 이르러 이 믿음의 유무가 영화의 존재 혹은 영화 제작의 실현을 가능케 하는 필수 덕목이라고 설파한다. (위에서 언급했듯) 남루한 현실적 존재인 가웨인이 영화적 존재 녹색 기사에 가닿으려는 이행의 과정에서 가웨인과 성 위니프레드의 만남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의 문제를 분명히 드러낸다. 그녀는 멀쩡히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머리가 허상이라는 듯 연못에 빠진 자신의 머리를 건져와 달라고 부탁한다. 두 눈에 명백히 보이는 그녀의 머리를 두고 혼란에 빠진 가웨인은 묻는다. “아가씨, 당신은 사람인가요? 정령인가요?” 달리 표현하면, “보이는 것을 믿어야 하나요?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야 하나요?” 가웨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기로 결심하고, 연못에서 그녀의 머리를 꺼내줌으로써 잃어버렸던 녹색 기사의 도끼를 보상으로 돌려받는다. 그렇게 로워리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을 영화의 근간으로 삼으며 이에 대한 공감을 관객에게 요청하는 방식으로 독창적 우주를 구축해 나간다. <피터와 드래곤>의 미챔의 말을 빌리자면, 로워리는 관객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는 것 같다. “그냥 마음의 눈을 열어보라고 말하고 싶어.”
-
- 이걸 못봤다고? 시간을 순삭 시켜 버리는 송혜교의 복수극 [더글로리] 완결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넷플릭스에서 바로보기
-
- [우리의 감독을 찾아서_#4] 나를 위로하는 나의 영화 (with. 민가람 & 심석우 감독)
‘우리의 감독을 찾아서’는 단편 영화 감독을 만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팟캐스트입니다. 영화를 통해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영화란 무엇인지,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술이란 무엇인지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눠봅니다.
00:00 인트로 03:07 [시네도키, 뉴욕]에 관한 짧은 이야기 05:37 자전적인 이야기에 관해 13:54 연출로서의 영화 21:20 추천 영화 [결혼 이야기] 28:41 [참가상] 이야기 30:05 다시 이 영화들을 찍는다면? 32:51 [내가 사랑하는 나의 자존감 도둑] 이야기 37:07 딸과 엄마의 관계 43:19 그가 재미없는 이유 48:48 마무리
-
- 넷플릭스 <길복순> 파이널 예고편
글로벌 사업이 된 살인 그리고 이 무법세계를 관통한 하나의 규칙. 죽을 때까지 숨기거나, 모두를 죽여버리거나. 전 세계를 뒤흔들 최정상급 킬러들의 가장 스타일리시한 킬러액션 《길복순》
-
- 왓챠 <최종병기 앨리스> 티저 예고편
'무늬만 핑크빛 핏빛 추격이 시작된다!' 예측불가 하드코어 액션 로맨스의 탄생 왓챠 오리지널 ⟨최종병기 앨리스⟩ 6월 24일 오직 왓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