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2-11-21 14:08:57
11월 4주 차, 최신 씨네 뉴스
안녕하세요.
영화/ OTT 전문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최근 국내외 영화 / OTT계에 어떤 소식이 있었는지 정리하는
최신 씨네 뉴스 타임이 찾아왔습니다!~!
그럼, 최근에 어떤 이슈가 있었는지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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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범죄도시 4>, 18일 크랭크인
ⓒ 에이비오엔터테인먼트
마동석 주연의 영화 <범죄도시>가 18일 네 번째 시리즈 촬영에 돌입했다고 한다. 4편에서는
불법 온라인 도박 조직을 잡는 이야기를 담았다. 4편의 메인 빌러은 김무열이 맡았다고 한다.
김태리, 드라마 <정년이> 출연
ⓒ TVING
배우 김태리가 여성국극을 소재로 한 인기 웹툰 원작 드라마인 <정년이>의 출연한다고
밝혔다. 웹툰 '정년이'의 작화를 담당한 나몬 작가는 윤정년의 초기 이미지 구성 당시
김태리를 떠올리며 캐릭터를 완성했다고 밝혀 많은 이들이 김태리의 출연에 기대를 모으고 있다.
<커넥트>, 12월 7일 공개
ⓒ 디즈니+
배우 정해인, 고경표, 김혜준 주연의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커넥트>는 12월 7일에 전체
에피소드가 공개된다. <커넥트>는 죽지 않는 몸을 가진 새로운 인류, ‘커넥트’ 동수가 장기밀매
조직에게 납치당해 한쪽 눈을 빼앗긴 뒤, 자신의 눈이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연쇄살인마
에게 이식됐다는 것을 알고 그를 쫓는 지독한 추격을 담아낸 이야기를 담았다.
해외
<프린세스 다이어리>, 3편 제작 확정
ⓒ 네이버 영화
디즈니에서 <프린세스 다이어리> 시리즈의 세 번째 영화를 제작한다고 밝혔다. 1,2편의
주연 배우 앤 해서웨이의 출연 여부는 불분명하나, 이전에 출연에 대한 긍정적인 의사를
밝혔던 적이 있다.
한국계 스파이더우먼 '실크', 드라마 제작 확정
ⓒ 마블 코믹스
아마존 스튜디오에서 소니 픽처스 텔레비전 스튜디오와 손 잡고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스핀오프 실사 시리즈 <실크: 스파이더 소사이어티>를 제작한다고 발표했다. 실크는
스파이더맨인 피터 파커를 물었던 초능력 거미에 물려 히어로 '실크'로 거듭나는 한국계 미국인이다.
캐서린 오하라, <비틀쥬스2>로 복귀
ⓒ IMDB
영화 <비틀쥬스 2>에 1편에 '딜리아' 역으로 출연한 배우 캐서린 오하라가 복귀한다고 한다.
팀 버튼 감독이 다시 메가폰을 잡을지는 확정되지 않았다.
씨네랩 에디터 Hizy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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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미나리
다시, 미나리
'미나리'를 두 번 봤다. 처음 볼 때보다 감동이 더 크다. 처음에는 줄거리, 서사의 의미, 인물들의 관계와 생각, 풍경, 음악 등이 눈에 들어왔다면, 두 번째는 그 모든 요소들 가운데서 특히 상징적 의미를 지닌 장면들이 눈에 들어왔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희생'은 세계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걸작으로 꼽힌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이 영화는 지루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난해하고 느린 영화지만, 한국에서는 의외로 흥행에 성공하는데, 이 난해한 영화를 본 관객이 10만 명이 넘었다는 것이 외국에서 화제가 될 정도였으니, 한국 관객의 수준이 꽤 높다는 걸 알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희생'에서 마지막 장면에 주인공 안드레이는 자기의 집을 불태운다. 그가 자기의 집에 불을 지르는 까닭은 그가 신과 일방으로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알렉산더에게는 늦둥이 아들이 있는데, 실어증이 있다. 그는 아들을 데리고 죽은 나무에 물을 주며 정성을 다하면 죽은 나무도 살아날 수 있다고 말한다.
알렉산더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을 각오한다. 3차 세계대전의 위험이 다가오고, 세계가 멸망할 위기가 닥치자 알렉산더는 우체부의 말을 듣고 자기 집 파출부인 '마리아'와 동침한다. 이때 우체부는 예수를 인도한 '세례자 요한'의 상징이며, 파출부 '마리아'는 예수를 따르던 '막달라 마리아'를 상징한다. 알렉산더는 3차 세계대전과 지구 멸망을 막는 '예수'의 현현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런 모든 관계와 서사가 알렉산더의 망상일 거라는 암시도 없지 않다.
알렉산더는 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기 집에 불을 지르는데, 이때 '불'은 '정화'의 상징을 갖는다. 세상의 더러운 것들을 불태워 깨끗하게 만드는 상징으로써 불은 고대부터 현재까지도 은유와 상징으로 작용하는데, 불은 고대부터 신성한 존재이자 신의 현현이며, 불가사의하고 위대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불은 모든 것을 태우고, 폐허를 만들지만, 그 자리에 새로운 생명을 키운다는 점에서 혁명이기도 하다. 과거를 불태우는 혁명, 자기 자신을 태워 희생하면서도 그 속에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진정한 혁명성이 '불'이다.
불은 '악'으로 상징하는 모든 더러운 것들, 불길한 기운, 악령, 저주, 죽음, 원한 같은 부정적인 것들을 태우고 정화한다. 이창동의 '버닝'에서 '벤'은 불을 지르면서 쾌감을 얻는데, '더러운 것들을 태우면서 뼛속까지 울리는 베이스의 선율'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벤은 낡은 비닐하우스에 불을 지르겠다는 말을 종수에게 하는데, 종수는 벤이 방화범이자 여성들만 노리는 연쇄살인범이라고 판단하고 - 그럴만한 근거는 있지만 확실한 물증은 없는 상태에서 - 벤을 살해하고 그와 그의 차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른다.
벤이 쾌락을 느끼기 위해 지르는 불은 사실은 자기가 살해한 여성의 시신까지를 태워 범죄의 증거를 없애려는 행위였다면, 종수가 벤을 살해하고 그의 몸과 자동차를 불로 태우는 것은 '신'의 행위를 대리하는 복수의 행위라는 것이 다르다.
종수의 '불'은 해미의 실종과 벤의 수상한 행동들, 벤이 한 '이미 태웠다'는 의미심장한 말로 인해 해미의 실종은 벤이 해미를 살해한 것으로 연결되면서, '악'을 응징하는 수단으로 '불'을 선택한다. 벤이 했던 말,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과 해미의 시신까지 태웠을 거라는 암시로 분노와 증오의 마음을 담아 해미의 복수로 벤을 살해하고 그를 불태운다.
'미나리'에서 채소저장고에 불이 옮겨 붙는 건 할머니의 실수 때문이지만, 할머니는 가족을 위해 선의를 갖고 한 행동이었고 할머니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으로 번진다. 이때 제이콥과 모니카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불이 붙는 장면을 발견하고 급하게 수확한 채소를 꺼내려 하지만 결국 몸만 겨우 빠져나온다.
불을 발견하기 직전까지 제이콥과 모니카는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가족보다는 농장과 채소에만 온통 신경을 쓰고 있는 제이콥이 모니카는 못마땅하고, 제이콥은 결코 과거의 병아리 감별사로 인생을 끝내지는 않겠노라고 결심했기 때문에 농장을 꼭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두 사람의 갈등이 첨예한 상황에서 하필 할머니의 실수로 일어난 불이 채소저장고를 태우고, 이 불속을 뛰어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불과 연기 속에서 함께 고통을 겪으며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갈등이 불과 함께 타버리는 것을 알 수 있다.
제이콥의 피와 땀이 담긴 채소저장고는 불에 탔지만, 그로 인해 가족은 더욱 단단하게 뭉치고, 갈등은 스러지며, 삶의 한 고비와 단계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자신의 실수로 채소저장고가 불에 타자 할머니는 절망과 죄책감으로 가족을 떠나려 한다. 이때 데이빗이 달려가면서 할머니에게 '우리집으로 가요'라고 말한다. 데이빗이 뛸 수 있다는 것은 가족에게 커다란 희망이자 기쁨이다. 할머니는 뇌졸증을 앓지만 데이빗은 건강해지고, 제이콥의 채소 농사는 위기를 겪지만, 할머니가 심은 미나리는 '어디에서나' 잘 자란다. 미나리는 제이콥에게 희망이고 삶의 근거가 된다. 미나리와 함께 제이콥의 가족은 낯선 땅 미국에서 미나리처럼 뿌리내리게 될 것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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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식을 사랑한다면, 물속에 던져버려라
6★/10★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권위 있는 음악상을 받은 드니 뒤마르. 차근히 경력을 쌓은 그는 클래식 음악계를 대표할 차세대 기수로 손꼽힌다. 그런데 드니는 수상 소감을 말할 때 굳이 객석에 자리하지 않은 아버지를 언급한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 프랑수아가 같은 지휘자, 그것도 업계 최고로 꼽히는 지휘자인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드니는 미래가 창창한 지휘자이지만, ‘프랑수아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 수밖에 없는 지휘자이기도 하다.
시상식 다음 날. 드니의 아버지인 프랑수아 뒤마르가 자신이 지휘자로 일하는 악단으로 출근한다. 한 명, 두 명, 세 명… 프랑수아가 마주하는 모두가 웃는 얼굴로 드니의 수상을 축하한다. 프랑수아의 신경이 점차 날카로워진다. 그 자신 역시 명망 있는 지휘자인데, 사람들의 축하 인사가 프랑수아에게 이제는 ‘누군가의 아버지’로 밀려날 때가 되었다는 불안감을 주는 것이다.
그러던 중 프랑수아에게 전화 한 통이 온다. 모두가 꿈의 극장이라 부르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온 전화로, 그를 차기 지휘자로 모시겠다는 연락이다. 콧대 높은 아버지의 기분이 풀린다. 피할 수 없는 경쟁 관계에 놓인 부자는 그제야 서로의 성과에 박수 치며 웃는다. 그러나 그 전화는 잘못 걸려 온 전화였다. 라 스칼라의 제안은 프랑수아 '뒤마르'가 아닌 드니 '뒤마르'에게 갔어야 했던 실수였다. 관계자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드니는 고민에 빠진다. 의도치 않은 실수 탓이기는 해도, 결과적으로는 아들이 아버지가 평생 꿈꿔온 자리를 빼앗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부자 관계에 늘 흐르던 경쟁심이 깃든 긴장 관계 역시 진실을 밝히기를 어렵게 한다.
차일피일 진실을 밝히기를 미루는 드니와 날이 갈수록 라 스칼라를 향한 꿈에 부풀어 오르는 프랑수아. 영화는 둘의 갈등이 봉합되고 이들이 화합하는 과정을 담는다. 다소 지루하고 작위적인 전개와 결말이다. 부자 간 화해라는 보편의 메시지를 빌미 삼아 영화 전반에 흥미롭게 흩뿌려진 갈등을 너무도 손쉽게 봉합하려는 듯 보인다.
그러니 고개를 돌려보자. 진실을 알게 된 프랑수아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즉 그의 양육법 말이다. 프랑수아는 드니에게 어릴 적 휴양지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준다. 물을 두려워했던 프랑수아는 자신을 닮은 아들을 이해했고, 그런 아들에게 계속 물에 들어가 놀라고 말하는 아내에게서 드니를 보호하려 했다. 하지만 드니의 어머니는 그런 드니를 물속에 던져버렸다. 드니는 두려움에 질려 허우적거렸고, 프랑수아는 아내의 ‘폭력적’ 양육법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얼마 후. 물속에 던져진 드니는 자신의 공포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고는 이내 즐거운 표정으로 물장구를 치며 놀기 시작한다. 프랑수아는 충격을 받는다. 드니의 두려움에 대한 공감이 오히려 지금껏 드니의 성장을 막아온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프랑수아는 중년에 접어든 아들 드니가 마주한 문제가 수십 년 전 휴양지에서 있었던 일과 본질적으로 똑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드니가 자신에게 진실을 알리기를 주저한 진짜 이유를 간파한 것이다. 드니는 아버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과연 자신이 라 스칼라에 설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를 의심하기 때문에 진실을 빠르게 알리지 않았다. 아버지를 위한다는 선의로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고자 했던 것이다. 프랑수아는 수십 년 전의 깨달음을 발판 삼아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아들을 물속에 던져버린다. 드니는 수십 년 전에 물속에서 그러했듯, 이번에도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을 증명해 보인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 프랑수아와 함께다.
때문에 〈마에스트로〉는 부자 관계에 관한 영화라기보다는 양육법에 관한 영화다. 시대를 거스르는 절대적인 양육법은 없다. 지난 시대였다면, 두려워하는 아이를 물속에 던져버리는 양육법은 자녀에게 공감하지 않는 부모의 폭력을 상징하는 일화로 읽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아이에게 공감하는 양육과 과보호가 구분되지 않는 시대, 그리하여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성장하지 못하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는 아이를 물속에 던져버리는 양육법이 다시 필요할지도 모른다. 중년이 되어서도 자기 역량을 의심하며 회의하는 아들에게 후자의 양육법이 더 적합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자식을 사랑한다면, 그를 물속에 던져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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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우리들>, 우리들이 살아남은 역학관계
*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사회생활이란 말은 직장생활부터를 뜻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이미 사회생활에서만큼은 초짜가 아니다. 어린이집, 유치원, 초중고등학교, 대학교(동아리, 군대 등 포함)를 지나 그리고 직장으로 발을 들여놓기 때문이다. 물론 경험이 많다고 능숙하다는 건 아니다.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 사춘기니까 예민할 수 있지 정도가 변두리에 있는 어른들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영화 <우리들>을 보면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의 지난 '사회생활'이 떠올랐다. 친구들이 생각보다 잔인하다는 생각은 많이 했다. 우리들은 약점이나 빈틈을 마구잡이로 헤집을 수 있었다. 딱히 어른처럼 지켜야 할 선이나 체면이 명확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뭐든지 금방 습득했다. 초등학교를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친구들이 싸우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넌 키가 작잖아'하면서 놀리는 말에 할 말이 떨어진 친구가 "넌 아빠 없잖아, 아빠 없는 애잖아"라는 말을 하면서 승리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아니지. 그건 아니었다. 아빠가 있고 없는 게 자랑하거나 폄하받을 일인가. 그 말을 듣고 일그러진 얼굴이 머리채를 잡으면서 제대로 몸싸움이 시작됐다. 그때, 처음 사람이 무서웠다.
알지 알지 저 표정
<우리들>에 나온 친구들을 보면 어디서 다 많이 본 광경이다. 무리를 짓고, 이간질을 하고, 약점을 공유한다. 친구와 친하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영화에서 승자를 굳이 가리자면 보라 하나다. 선과 지아를 패처럼 들었다 놨다 한다. 보라는 1등을 놓치면서 약간의 데미지는 입었을지언정 여전히 교실의 중심이다. 아이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입맛에 맞게 떠들고 다니면서 선은 거지로, 지아는 도둑으로 추락시켰다. 보라의 코는 마음에 안 드는 사람에겐 나지도 않는 퀘퀘한 냄새를 맡는다. 주변에 시녀처럼 떠받드는 친구들이 맞장구를 친다.
선과 지아는 뭔가 잘못된 줄 알면서도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한다. 전학생인 지아가 선이와 절친이 되었다. 심지어 지아는 선이네 집에서 꽤 오래 먹고 자고 했다. 지아가 개학날 냉담할 줄 선이는 몰랐겠지만 관객들은 예감했을 것이다. 보라와 팔짱을 끼고 가는 그 순간부터. 친구 사이란 게 때론 연인 사이보다 무섭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면 보라와 같이 다니는 게 그렇게까지 큰 의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되겠지만 지금에 둘에겐 중요한 문제다. 보라의 눈밖에 나는 건 왕따가 되는 지름길이니까. 왕따를 당해봤기 때문에 둘도 어쩔 수 없이 침묵하거나 동조한 순간이 있으리란 건 짐작할 수 있다. 혼자가 되는 건 말도 안 되는 비아냥거림마저 도움 없이 견뎌야 하는 괴로운 일이다. 그게 싫어서 견디게 된다. 조금 치사하고 찜찜하더라도 보라가 원하는 대로 맞췄던 것이다.
같은 공간에서 의무적으로 시간을 보내는 학교는 우리에겐 정글과 다를 게 없다. 인싸와 아싸, 순화하면 주류와 비주류에 대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누군가는 관심의 중심에 있고 싶어 하고 그 사이에 자리를 잡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사이좋게 친하게 지내라고 말하기보다 온전히 살아남으라고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몸싸움은 나면 차라리 티라도 나지만 그 외의 것들은 선생님에게 말씀드리기도 어렵다. 선생님마저도 소외된 학생이 없도록 교실을 이끌기 힘들다. 교실은 결국 혼자 살아남아야 하는 곳이다.
물론 학교 밖이라고 전혀 상관없는 건 아니다. 경제적인 상황이 친구를 제약하기도 한다. 어떤 부모님들은 급이 맞는 친구들과 지내라고 아이들에게 조언을 한다. 어떤 아이들은 "너희 집은 전세야, 자가야?" 같은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물어본다. 지아에게 선은 조금은 같이 다니기 쪽팔린 친구였을지도 모른다. 좁은 집에 에어콘도 없고, 핸드폰도 없고 학원을 다니기는커녕 색연필을 사거나 같이 놀기에도 돈을 걱정하는 친구였다. 집이 부유하지 않은 것도 약점이 된다.
나 역시 초등학교 친구들의 생일파티에 가지 않았고 친구네 집에 놀러 가지 않았다. 물론 우리 집에서 생일파티를 하거나 집에 초대하지 않았다. 우리 집과 비교 대상을 머리에 남기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멋모르고 친구네 생일파티에 한 번 갔더니 불편했다. 주택인 우리 집과 달리 아파트였다. 그네가 있는 놀이터, 소파가 있는 넓은 거실, 내 방이 있는 친구들의 집. 생일이라고 맛있는 과자며, 치킨과 피자를 시켜놓고 친구들을 불러 선물을 나눠갖는 모습에 이질감이 들었다. 배배 꼬였는지 몰라도 자랑처럼 느껴졌다. 친구 자랑, 집 자랑. 나에게는 없는 것. 내가 부모님에게 요구할 수 없는 것. 게다가 생일에 초대받는다고 꼭 절친하다는 의미도 아니고. 학교에서만 친하게 지내도 되는 건 아닌가 싶고.
지금은 돌직구를 툭툭 던지곤 하지만 영화 속 선이와 초등학교 때 내가 무척 비슷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하면서 할 말은 못 하고 나중에 집에 와서 받아치지 못한 게 바보 같았다. 학교에서의 힘은 단순하다. 친구가 많거나 공부를 잘하거나, 재밌거나, 예쁘고 잘생겨서 인기 있거나. 시험에서 1등을 놓친 보라가 지아가 받는 박수와 칭찬에 아쉬워하며 혼자 우는 걸 보니 그랬다. 교실엔 수많은 학생이 있지만 1-2등 사이는 경마 시합처럼 경쟁을 부추긴다. 친구가 많고 매력이 넘치는 친구들이 내심 부러웠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가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대못을 박고 가면 눈물을 참느라고 고생했다. 속상하고 억울하면 눈물부터 차올랐던 건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더 속상했다. 화장실에 있던 낙서, 냉랭한 걸 넘어 심지어 역겨워하는 듯한 표정. 재수가 없다거나 말이 많다거나 표정이 이상하다거나? 이유가 뭐가 됐든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상처는 받겠지만 어느 정도 내려놓았다.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는 없는 거다. 내 탓만 할 필요는 없다. 특히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세상에 그런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 때문에 한 번 쓸쓸함을 느끼고 나면 쓸쓸해 보이는 사람이 저절로 눈에 들어오게 된다. 선이 자신에게 까칠하게 구는 지아가 계속 눈에 들어온 건 비슷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혼자 뻘쭘해하거나 겉돌고 있는 모습이 마음에 걸린다. 그 모습을 보면 확신이 생긴다. 왕따를 당하는 이유가 있다고들 하지만 완전히 동의할 수만은 없다. 이유 없는 왕따도 분명히 있으니까.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 다니는 사람 말고 아무런 잘못 없이도 왕따를 겪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기 때문이다. 조용하고 혼자라서 만만하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하다.
남보기에는 평범하고 내가 겪기엔 다사다난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제자의 의도와는 관계없는 순도 100% 진심을 담은 글을 제출했다. 학교폭력을 예방하는 글짓기 대회에서 '파'가 생기는 걸 조심하자고 썼다. 여러 명이 몰려다니는 친구들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대표가 있다. 그 친구의 이름을 따서 '00파'라고 이름 붙였다. 우리는 파를 이끌거나, 파에 속하거나, 어느 파에도 속하지 않은 주변인이 되거나 셋 중에 하나다. 파끼리 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파에서 주도권을 가진 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대체로 소외된 친구)을 괴롭힐 수 있는 가능성을 지적하는 글이었다. 상도 타지 못했고 어떤 선생님이 그 글을 읽고 흥미로웠다고 얘기를 눈앞에서 듣고선 민망함에 도망쳤다. 머릿속을 그대로 보여준 기분이었다.
10여 년이 지나도 여전히 내 생각은 비슷하다. 몸싸움만이 폭력이 아니고 눈에 잘 띄지 않은 말이나 행동 역시 폭력이다. 약간의 아쉬움이라면 조직폭력배같이 00 파라고 설명했던 점. '또래집단 간의 역학관계'로 바꿔서 말했으면 좀 전문성이 있었을까. 역학관계가 불균형해졌을 때 폭력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으니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나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애초에 학교폭력 예방에 선생님들이 기대하던 답이 무엇이었을까?
초등학교가 끝날 무렵 나에게도 희한한 일이 생겼다. 5-6명과 함께 다니는 친구가 있었다.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밝고 친구도 많았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 모임에 들어오지 않겠냐고 제안을 하더라. 좋으니 논의해보고 얘기해달라고 답했다. 그런 제안을 받은 게 신기했다. 같이 다니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논의 결과를 듣자 하니 한 사람이 반대해서 아쉽지만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거다. 그런가 보다 했는데 지나고 나니 궁금했다. 들어오라고 제안을 한 친구나, 반대를 한 친구나 무슨 의미로 그랬을까 하고. 아쉽지 않았다. 어쩌면 나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평가 내리진 않았을까 그런 상상이 들어서였던 것 같다. 마음에 안 든다든지, 같이 다니면 불편하다든지 등의 이유로 말이다. 만약 그랬다면, 내가 생각하던 친구와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윤 눈두덩이에 멍 발견)
"윤아, 너 왜 계속 연호랑 놀아."
"응?"
"아니, 연호가 계속 너 다치게 하잖아. 맨날 상처 내고 때리고, 장난도 너무 심하고."
"이번에 나도 같이 때렸는데."
"그래?"
"응, 연호가 나 때려서 나도 쫓아가서 연호(머리) 확 때렸어"
"그래서?"
"그래서? 연호가 일어나면서 여기를(눈)을 확 때렸어"
"그래서?"
"그래서 같이 놀았어."
"... 놀았다고?"
"어, 보물찾기 하러 나갔는데."
"야, 이 윤, 너 바보야? 그러고 같이 놀면 어떻게 해?"
"그럼 어떡해?"
"다시 때렸어야지"
"또?"
"그래. 걔가 다시 때렸다면 또 때렸어야지. "
"... 그럼 언제 놀아?"
"...... 어?"
"연호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연호가 때리고 그럼 언제 놀아? 나 그냥 놀고 싶은데"
-영화 <우리들> 중
선의 마음을 돌린 건 이 대화가 유력했다고 본다. 순수하게 서로에게 잘해주고 솔직했던 때와 다르게 지금 지아와 선이의 관계는 상처투성이에 정도를 한참 지나쳤다. 아무리 그래도 건드릴 게 따로 있지, 싸울 때 최대 약점이나 가족은 건드리지 말라는 메뉴얼이 있었으면 좋겠다. 지아는 보라와 지내려고 왕따인 선을 무시한다. 반면 자신이 소외되니까 선의 아버지가 알콜중독자라며 자극적인 거짓 정보를 털어놓고 왕따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선 역시 이판사판으로 지아가 전에 왕따 당한 경험이 있고 어머니가 영국에 있다며 거짓말한 것들을 떠벌린다. 어른의 입장으로도 관계를 유지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사이가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선이는 지아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남았다. 지아와 함께 들였던 봉숭아 물도, 보라에게 빌려 바른 매니큐어도 다 지워진 손톱에는 봉숭아 물이 아주 약간 남아있다. 딱 그만큼의 마음만큼 지아와 함께 지내고 싶었을 것이다. 분명 둘만 있었을 때는 즐거웠던 시간이었고 이 모든 건 학교에서 보라를 사이에 두고 시작된 것이니까. 나 역시 선이처럼 맞으면 또 때려야 하는 건 물론이고 2-3배는 더 때리자는 주의였는데 윤이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선이는 지아에게 상처받으면서도 여전히 지아를 놓지 않았다. 상처를 받았다고 언제까지 얼마나 돌려줘야 하는 걸까. 그 길로 다른 친구와 놀든지, 아니면 때리는 손을 멈추고 그 친구와 다시 화해하고 놀든지. 윤이에게 배웠다.
선이에게도 선택권이 생겼다. 영화의 마지막. 피구 시합에서 팀을 짜느라 한 사람씩 골라간다. 아, 저 기분 뭔지 알지. 내가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라 입이 탄다. 최후의 1인이 되면 아무도 원하지 않는 사람이란 걸 확인하고야 마니 마지막만 아니었으면 좋겠는 심정. 지아가 바로 그 찌끄레기가 된다. 찌끄레기에겐 사람들이 함부로 대한다. 선을 밟았으니 나가라며 고집을 피우고 아무도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영화 초반 선이 당했던 상황 그대로다. 여태까지 선에게 했던 걸 생각하면 지아가 그 꼴을 당하고 있어도 선이 역시 침묵해도 상관없었다. 선이 말고 다른 사람들도 입이 있지만 아무 말 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선이는 목소리를 내어서 지아가 선을 밟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살아남은 역학관계에서는 단 한 사람의 목소리가, 단 한 사람이 내 편이 되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꼭 주류에 속하는 게 아니라, 꼭 많은 사람을 알고 지내지 않아도 된다. 지아 역시 깨달았을 것이다. 가장 내가 보잘것없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준 선이야말로 진짜 친구라는 걸. 고마움이라도 담았는지 두 손 모아 쭈뼛쭈뼛 서있는 지아와 전보단 당당해 보이는 선의 모습을 보면 앞으로의 일은 모른다. 둘이 이 지경까지 온 건 보라 때문이란 걸 깨닫고 보라에게 벗어나려고 할지는 확실하지 않다. 선이 지아를 위해 목소리를 냈을 때처럼 지아가 그렇게 해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선과 지아가 보라를 부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 부러워할 필요가 없단 건 쉽게 알 수 있다. 근처에 있는 친구들은 언제든지 보라를 떠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필요해서 곁에 있는 거니까. 보라보다 더 공부를 잘하고 집안이 넉넉한 친구가 생기면 바로 갈아타고도 남을 것이다. 둘이 그렇다고 보라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보라가 했던 일을 증명하기는 어렵다. 가장 쉬운 방법은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다. 놀랍게도 그런 사이는 누가 알아서 망가뜨리지 않아도 스스로 끝난다. 세 사람 중 한 사람만 자리를 떠나도 그 사람을 욕을 맛깔나게 하다가 들킨다든지. 어떻게 아냐고? 직접 봤으니까. 그런 싸움은 팝콘이나 먹으면서 지켜보면 된다.
그러니 선이 아버지처럼 "애들이 고민이 뭐가 있어, 학교나 가고 공부나 하면 됐지"하시는 말씀은 참 속상한 이야기다. 공부할 땐 초등학교가 평생을 좌우한다고도 하는데 사회생활은 평생 좌우하지 못하리란 법도 없다. 어떤 학창 시절도 쉽지 않았다. 학교 가고, 공부하고, 친구와 교실에서 지내는 매일이 보이지 않는 힘 사이에서 우리가 비틀거리며 고민하던 시간이었다. 잔인하고도 한편으로는 즐거웠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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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추천작] 축구는 계속되어야 한다
축구에 대해 생각해본다. 둥근 공과 단단한 땅. 이 두 가지만 있으면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스포츠. 공 대신 깡통을 굴려 가면서도 할 수 있고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할 수 있는 축구.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으며 가장 열정적인 팬을 보유하고 있는 지구 상의 위대한 종목. 그래서 많은 아이들이 꿈꾸고 상상하는 게 축구. 축구라는 건 참 대단하구나.
축구에 대해 새삼스럽게 떠올리게 된 건 <자타리의 축구 선수들>(2020)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면서다. 포장되지 않은 흙바닥에 밤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촛불을 켜야 상대 얼굴의 윤곽을 볼 수 있는 곳. 중동의 요르단, 그중에서도 자타리라는 지역의 거대 난민 캠프. 이곳에도 축구를 하는 청년들이 있다.
10대 후반이자 절친인 파우지와 마흐무드는 학교에 가는 대신 축구를 한다. 이들의 꿈은 유명한 프로 축구 선수가 되는 것이다. 호날두 같은 세계적인 선수. 이 지독하고 열악한 환경을 유일하게 탈출할 방법이 축구다. 파우지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아스널 유니폼을 입고 있다. 둘은 흙먼지가 날리는 캠프 안 운동장에서 또래들과 구슬땀을 흘린다. 실력이 뛰어난 둘은 카타르 유명 축구 아카데미인 어스파이어 아카데미에 참가할 자격을 얻는다.
삶의 희망이 축구뿐인 둘을 카메라는 73분 동안 조용하게 보고 듣고 담아낸다. 구멍 난 운동화나 가난함에 힘겨워한다거나 비관적인 삶의 태도 같은, 인위적으로 감정을 끌어올리는 장면이 없는 게 이 다큐의 특징이다. 비극적이지도 않고 낙관적이지도 않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보여줄 뿐이다. 파우지와 마흐무드는 축구에 대한 열정으로 똘똘 뭉쳐 있는 청소년이자 이성에 관심 있는 평범한 10대이며 훈련이 다 끝나면 집에 전화해 안부를 묻는 아들이다.
하지만 둘은 난민이라는 정체성, 그 무게감을 항상 지니며 살아간다. 공부를 계속해 어떤 학위라도 받아놓으면 도움이 된다는 아버지의 말에 마흐무드는 “전 그저 난민이고 학위를 딴다고 해도 난민일 것”이라고 말한다. 어스파이어 아카데미의 초록 잔디 운동장과 체계화된 훈련을 받고 유명 축구스타들의 응원을 받다가도 파우지는 캠프 외부에 나가 있는 아버지의 건강을 확인한다.
축구 덕에 둘의 삶은 극적으로 바뀔 수 있을까. 대회 결승전. 무릎 부상으로 제 컨디션이 아닌 파우지가 선발 명단에 올랐다. 자타리 캠프의 가족들과 주민들이 옹기종기 TV 앞에 모여 중계를 본다. 파우지와 마흐무드의 플레이 하나하나에 호응하고 손뼉을 친다. 파우지가 골을 넣었고 팀은 승리를 거둔다. 이후 열린 기자회견. 마흐무드가 말한다. “전 세계 난민들이 기회를 얻게 해 주세요. 난민에게 필요한 건 동정이 아니라 기회입니다.”
감독은 이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계속 빌드업해 온 게 아닐까,라고 나는 추측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게 아니라 동등한 상황에서 주어지는 그 기회. 난민을 떠올렸을 때 우리의 시선은 어디로 향하는지 우리의 자격은 무엇인지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장면이자 한 마디였다.
축구는 끝났다. 파우지와 마흐무드는 다시 캠프로 돌아왔다. 아카데미에 다녀왔지만 둘은 스카우트되지 않았다. 삶은 극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바뀐 거라곤 흙먼지 날리던 운동장이 잔디 깔린 운동장으로 바뀌었다는 것 정도다. 그럼 이들의 축구는 끝난 것일까. 나는 기억한다. 기회를 만들어내기 위해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그 무게감을 짊어지고 차곡차곡 만들어갔던 그 담담한 여정을, 거기서 가능성과 희망과 의지를 조용히 다졌던 둘의 이야기를. 축구는 끝났지만 그럼에도 축구가 계속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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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그라들 줄 알면서도 영원함을 바라게 되는
좋아하는 가수로 주저 없이 스다 마사키를 말하던 때가 있었다. 장발, 넥타이, 통기타를 들고 목소리를 긁어가며 부르는 ‘사요나라 엘러지’ 영상을 족히 50번은 본 듯하다. 그의 노래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에 대해서 알기 싫었던 마음이 있었다. 노래에 대한 감상이 그 가수의 사생활이나 성격으로 인해 영향을 받아 변질되는 것이 싫었다. 그가 배우로 더 유명하다는 사실은 곧 죽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마치 오늘의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의 주인공 키누(아리무라 카스미)처럼 말이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내 감정을 덮지 마. 어젯밤의 여운 속에 있고 싶단 말이야.” 우연히 지하철 첫 차를 기다리며 가까워진 무기(스다 마사키)의 집에서 돌아온 후 키누가 한 생각이다. 같은 신발을 신고, 같은 가수를 좋아하고, 내가 읽고 싶었던 소설을 이미 그가 읽고 있다. 너무나도 닮은 그들은 서로를 속절없이 사랑하게 되었다. ‘전철을 탄다’라는 말 대신 ‘전철 속에서 흔들린다’라는 말을 쓰는 무기를, 평생을 의문스러워 한 가위바위보의 규칙을 똑같은 이유로 이상하다 여기는 키누를 말이다. ‘운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자연스레 그 사람을 떠올리게 되는 일. 무기와 키누의 첫 만남이었다. 21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떤 것이든 될 수 있는 나이에 만난 그들은 싱그러운 사랑을 나눈다.
비록 지하철역에서 30분 동안 걸어가야 하지만, 강이 한눈에 보이는 작은 빌라에서 같이 살게 된 그들은 20대 중반을 함께 마주한다. 녹록지 않은 현실 앞에 덩그러니 놓이게 되어도, 울고 있는 나의 앞에 슬리퍼를 신고라도 달려와 줄 당신이 있기에 그래도 괜찮은 날들이 이어진다. 인생의 목표가 ‘키누와의 현상 유지’였던 무기. 그러나 본격적으로 취업 전선에 나선 후, 그의 다짐은 어딘가 어긋나게 된다. 재미없는 인생은 살고 싶지 않은 키누와, 인생은 책임이라는 무기. 서로가 점점 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만 느끼고 있다는 생각에 키누는 점점 메말라간다.
끝내 헤어짐을 택한 그들은 함께 골랐던 커튼을 정리하고 가구를 옮기며 차근차근 서로의 흔적을 덜어낸다. 그 과정이 너무 아프지만은 않은 이유는, 매 순간 서로를 후회 없이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남김없이 모든 것을 다 준 이들은 뒤돌아보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별하고, 누군가는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미래를 약속하며 축하를 받기도 한다. 어떤 것이 좋은 결말이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알 수 없다고 얘기하고 싶다. 촘촘하게 얽혀있는 서로를 인생에서 분리해 내기란 당연하게 어려운 일이고, 함께했던 일상에서 혼자로 돌아가는 것은 쓸쓸한 일이다. 그러나 세상에 나의 젊음을 함께 나눴던 이가 있다는 것, 함께한 시간들이 나의 궤적이 되는 것 역시 값진 일일 것이다.
“시작이란 건 끝의 시작. 만남은 항상 이별을 내재하고 있고 연애는 파티처럼 언젠가는 끝난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이들은 좋아하는 것을 가져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수다를 떨면서 그 애달픔을 즐길 수밖에 없다.” 주인공 키누가 즐겨보던 블로그의 한 문장이다. 살아있는 꽃은 꺾는 순간 그 생명을 잃고 시간의 흐름을 느끼며 시들어간다. 메말라 버릴 미래를 그리며 안타까워하기에는 그 당장 눈앞에 놓인 싱싱함은 너무나도 아름다울 것이다. 이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언젠가 사그라들 줄 알면서도 영원함을 바라게 되는 사랑이 있기를, 찾아오기를, 있었기를 바란다.
Editor. I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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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도공간> - ‘지울수록 선연해지는 슬픔과 마주하다’
이도공간 (異度空間, Inner Senses)
개봉일 : 2003.06.05 / 재개봉 : 2021.07.21. (한국 기준)
감독 : 나지량
출연 : 장국영, 임가흔, 이자웅, 주가령
‘지울수록 선연해지는 슬픔과 마주하다’
2003년 4월 1일, 유명을 달리한 배우 ‘장국영의 유작’ <이도공간>이 19년 만에 롯데시네마를 통해 재개봉했다. 불에 타 유실된 필름을 아주 어렵게 구해 우여곡절 끝에 재개봉에 성공했다는 <이도공간>은 영화의 내용이나 완성도와는 별개로 ‘장국영의 유작’이라는 타이틀로 인해 짊어진 무게가 무거웠던 작품이다. 2003년 장국영이 삶을 마무리 지었을 때, ‘장국영이 이 작품을 찍고 귀신에 씌여, 우울에 빠져 죽음을 선택했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데.. 정말 연관성이 거의 없는 이야기지만 그들은 이렇게라도 장국영의 죽음을 부정하고, 합당한 이유를 찾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이도공간>은 장국영 필모 중에 유일한 공포영화다. 은근 무서운 장면들이 있다는 이야기에 걱정했는데, 몇 장면의 긴장감만 견디면 그럭저럭 괜찮았다. 귀신이나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공포보다 마음 깊이 숨겨뒀던 상처에 대한 두려움에 더 집중한 작품이기에 귀신에 대한 공포감때문에 감상하지 못하고 있다면 잠시 눈 딱 감고! 도전해보길 추천한다. (개인적으론 공포보다는 슬픈 영화라는 느낌이 더 강하기도 했다.)
아주 짧은 공포감을 견디고 나면 장국영의 아련하고도 아름다운 눈빛을 마주할 수 있으니.. ‘무섭지 않을까?’하는 걱정으로 이 순간을 놓쳐버리기엔 너무 아깝다.
<이도공간>은 사람이 아닌 영혼에게 시달리며 괴로워하는 짐과 얀의 이야기다. 얀은 자신이 귀신을 본다고 말하며 매일을 공포에 시달린다. 짐은 귀신같은 건 존재하지 않으며 모두 뇌에 저장된 정보들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말한다. 이 영화에서 짐과 얀이 마주하게 되는 귀신이란 존재는 ‘귀신’ 그 자체라기보단 오래전에 묻어둔 슬픔과 트라우마, 그리고 외로움의 산물이다. 부모님의 이혼과 반복된 재혼으로 인해 어릴 때부터 홀로 살아온 외로운 얀과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 알고 싶다며 책에만 집중하고 혼자 살아가는 워커 홀릭 짐. 두 사람은 외로움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허공으로 시선을 돌린다.
누구나 살면서 크게 부끄러웠거나 지독히 슬펐거나 또는 수없이 후회하게 되는 순간을 겪는다. 그런 순간들은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고 오래도록 사람을 괴롭힌다. 시간을 되돌릴 순 없으니 “차라리 잊고 싶다”고 생각하며 기억을 지우는 상상을 한 번쯤은 해본 적 있지 않은가. 하지만 고통은 무작정 지우려 할수록 선연해지기 마련이고 외면하고 묻어두려 할수록 더 무거워진다. 고통에 맞서는 건 분명 아주 두렵고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마주해야 한다. 가장 큰 슬픔인 이별 또한 마찬가지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래도록 아파하고 무조건 묻어두기보단 그를 받아들이고 아픈 만큼 그리워 하면 되는 것이다. 이 또한 무지 어려운 일이지만.. 슬픔이 속에서 곪아 새로운 고통을 만들어내기 전에, 무너져내리기 전에 그 순간과 직면해야 한다.
이도공간 시놉시스
부모의 이혼으로 홀로 남겨진 ‘얀’은 오래된 낡은 아파트로 새로 이사를 온다.
이사 온 첫날부터 아파트에 감도는 이상한 기운에 자신 말고 다른 존재들이 집에 함께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고 불안감을 느낀다. 불안해하는 자신을 위해 사촌 언니는 정신과 대학교수 ‘짐’을 소개 시켜주고 그녀가 보이는 건 자신의 과거 상처로 인해 비롯된 존재라는 말로 그녀를 안심시켜준다. 서서히 이상한 존재에게서 멀어지며 회복되어 가던 그녀는 ‘짐’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싹트게 되는데... 하지만 그에게 다가갈수록 ‘짐’은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이성적인 정신과 대학교수 ‘짐’은 같은 동료 교수의 소개로 ‘얀’을 만나게 된다.
모든 현상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고, 그녀가 부모의 이혼과 상처로 귀신이란 허구를 만들어냈다고 안심시켜준다. 상담 치료를 한 이후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지고 서로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그녀와 가까워질수록 ‘짐’ 주변에 알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계속된 불면증에 시달리던 ‘짐’은 자신이 잊고 있었던 과거의 사건이 떠오르기 시작하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제가 본 건 환상이 아니에요.”
운수 없게도 귀신을 보게 됐다는 얀과 귀신은 뇌가 만들어낸 정보의 집합체라는 짐. 얀은 사촌 형부의 소개로 짐을 만나게 된다. 정신과 대학교수인 짐은 불안에 떨고 있는 얀에게 약이 아닌 우유 캔디와 믿음을 담은 수면제를 건넨다. 모두가 얀을 “미쳤다”고만 말 하는데, 짐은 그들과 다르게 조용히 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얀의 일기장과 사진들을 살펴보던 짐은 얀이 귀신을 보는 건 ‘기억 속 어딘가 숨겨진 문제’때문일 것이라 확신한다. 얀이 마음 깊이 숨겨둔 문제는 어릴 적부터 겪어온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얀의 부모님은 얀이 어릴 때 이혼을 하고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난다. 그녀는 부모님에게 사랑 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다. 애정결핍에서 나온 불안감은 곧 상대를 위한 집착으로 바뀌고 얀은 점점 더 외로워진다. 그리고 죽은 이의 정보를 받아들여 곧 그것을 귀신으로 만들어낸다.
얀은 짐에게 의지하며 천천히 사랑에 빠진다. ‘귀신이라니, 미친 소리하네’같은 말이 아닌 ‘귀신은 없으니 두려워 말라’며 부드러운 눈빛을 보내는 따뜻한 사람. 그런 짐을 두고 어떻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짐도 얀을 만나며 호감을 느끼지만 선뜻 다가가지 못한다. 그는 의사와 환자의 사이엔 거리가 있어야 한다고, 얀이 자신에게 의존하게 둘 순 없다고 말한다. 가볍게 흘러간 ‘의존’이라는 단어는 짐의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그의 가장 큰 상처에 대한 힌트였다.
“제 친구가 되어주실래요?”
한참을 고민하던 짐은 상처를 극복한 얀을 보고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얀은 짐을 통해 외로움을 채워갔고 한 발짝 더 나아가 자신의 오래된 상처인 부모님과 눈을 맞춘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엄마의 손을 잡는다. 그렇게 얀은 자신을 오래도록 괴롭혔던 외로움과 고통을 극복했고, 더 이상 귀신을 보지 않게 된다.
짐은 얀을 만나며 첫사랑의 죽음 이후로 처음 연애를 한다. 첫사랑인 유에가 죽고 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사랑의 감정. 그리고 그 감정은 짐이 외면하고 묻어뒀던 죄책감과 고통의 순간을 떠올리게 만든다.
“잊기로 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결국 찾아버린 1982년, 유에가 자살하던 그날의 기억. 짐은 끝까지 유에의 죽음을 모르는척하고 싶어 했지만, 그가 마음 깊이 묻어뒀던 소년은 그러지 않길 바랐던 것 같다. 무의식 상태로 집을 뒤지던 짐은 유에의 흔적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유에의 흔적이 담긴 편지와 그녀의 기사가 담긴 신문.
짐은 가장 순수했던 그 시절,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소녀가 자신을 탓하며 바닥으로 추락하는 순간을 목격한다. 너무 충격적이고 고통스러웠던 순간이었기에 짐은 아예 그 순간과 유에의 존재를 지워버리고 만다. 그리고 오래도록 묻어뒀던 고통이 현실로 다시 떠오른 순간, 그것은 공포가 되어 짐을 조여온다.
얀과 짐은 서로에게 ‘기억 속 어딘가 숨겨진 문제’를 직면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한다. 얀은 짐을 통해 부모님을 다시 만나게 되고 짐은 얀을 만나며 첫사랑 유에를 떠올리고 그녀가 울린 알람에 눈을 떠 유에의 흔적을 마주한다.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다시 마주하고 슬픔과 상실을 인정하는 과정은 고통을 귀신이라는 공포스러운 존재를 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짐은 갑작스레 밀어닥친 기억에 괴로워하며 유에의 귀신으로부터 도망친다.
“난 지금까지 행복한 적이 한 번도 없었어..
내가 무슨 자격으로 행복할 수 있겠어.”
사랑하는 소녀 유에가 나 때문에 자살을 택했다는 죄책감.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슬픔과 고통. 짐은 밀려오는 충격에 힘없이 비틀거린다.
부끄럽지만 진심이었던 날들, 찬란한 오후에 함께할 미래를 약속했던 빛나는 순간. “네가 죽으면 함께 죽을 거”라고 말하면서 순수하게 웃던 소년소녀. 유에의 죽음으로 사랑과 약속들이 순식간에 깨지고 짐은 결국 모든 걸 잊는다. 그리고 고통과 더불어 유에와 함께했던 행복했던 순간들도 모두 묻어버린다.
짐은 유에처럼 옥상의 끝에 서서 유에의 귀신을 바라보며 유에와 함께했던 시간을 천천히 떠올린다. 끝은 고통이었지만 결코 되돌릴 수 없기에 더욱 소중한 기억. 그는 우리의 기억이 ‘사라진 아름다움’으로 흔적 없이 흩어지지 않도록 “이제부턴 아무것도 잊지 않을게”라고 다짐한다. 그날 밤, 짐은 괴롭다는 이유로 직면하지 못하고 도망치기만 했던 그리움과 사랑으로 물든 인생의 한순간을 되찾는다. 유에의 흔적이 사라진 자리엔 얀이 서있고, 짐이 유에에게 선물했던 새가 묻힌 무덤가엔 새 두 마리가 앉아있다. 짐을 오래도록 괴롭혔던 슬픔의 색이 옅어지고, 새로운 사랑이 그 기억과 흔적 위에 얹어진다. 오랜 외로움이 버티고 있던 자리에 새로운 인연이 생겼음에도 아직 환한 웃음을 되찾지 못한, 조금은 퍼석한 표정의 짐을 보며 여전히 위태롭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지만, 이젠 그의 옆엔 얀이 있으니까. 조금씩 괜찮아질 수 있겠지.
“지금 당장은 무서워도 내일은 웃어넘길 수 있어요. 그렇게 해볼래요?”
이별이나 갑작스레 들이닥친 충격을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다. 짐처럼 사랑했던 이가 갑자기 죽음을 선택하는 일을 겪었다면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정말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다.
나도 짐과 비슷한 일을 겪으며 “차라리 그를 모른 채 살았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며 모든 흔적을 외면하려 노력했던 시절이 있었다. 외면한다고 해서 고통이나 슬픔이 사라지는 건 아닌데 그때는 그게 최선인 줄 알았다. 이제는 그가 남긴 흔적을 따라 밟으며 건강하게 그리워하고 있지만, 슬픔을 직면하고 받아들이는 건 참 버거운 일이었다. 그렇게 슬픔에 젖어 아팠던 날들을 모으고 또 모으다 보니 결국은 웃으며 그를 추억할 수 있는 오늘이 왔다. 슬픔을 받아들여야 하는 지금 당장은 무섭겠지만 그렇게 마주한다면 내일은 조금 더 나아질 수도, 더 나아가 웃을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은 무서워도 내일은 웃어넘길 수 있어요. 그렇게 해볼래요?”
이 대사를 몇 번 곱씹다 보니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이젠 다른 세상으로 떠난 배우 장국영. 그와의 이별은 그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와 슬픔이 됐겠지. 하지만 그때의 상처를 극복하고 오늘도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실감할 때마다 참 놀랍다. 나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담은 박수를 보내고 싶다. 무사히 슬픔을 극복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보듬으며 살아가는, 용감하고 강한 그대들이 참 멋지다고, 그 마음 오래도록 변치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오래오래 함께 그리워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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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엔 두 사람 둘도 없던 친구 사이 아니었나?" 예고 없이 찾아온 절교 선언? 둘도 없는 친구가 남이 되기까지 절교 선언으로 시작되는 다크 코미디 [이니셰린의 밴시] 3월 15일 대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