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DEOUS2022-11-25 17:02:48
한 잔의 달달하고 따스한 믹스커피처럼
영화 <창밖은 겨울> 리뷰
겨울 = 추억
겨울이라는 계절이 올때쯤이면 항상 몇 가지 냄새가 마중나온다. 솜으로 덮여진 패딩에서 나오는 작년 이맘때 쯤의 냄새. 이사 하기 전의 집에서 1층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나오는 엘리베이터의 냄새, 그리고 어렴풋이 기억만 남는 사람과 한 겨울에 재미있게 놀던 그 때의 웃음 냄새. 겨울을 알리는 낯익은 냄새를 맡게 되면 그 동안 잊고 지냈던 겨울의 추억들이 찬바람처럼 코 끝을 때리고 스쳐 지나간다.
<창밖은 겨울>은 이런 정겨운 냄새를 가득 품은 영화이다. 작년 겨울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 때가 찰나의 순간 동안 진하게 생각나는 것처럼, 과거의 추억이 스며드는 영화이다. 내 시절 이야기가 아님에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이 영화는 겨울을 추억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이상진 감독이 생각하는 추억의 의미는 무엇인지, 미련인지 소중한 기억인지 생각해보면서 보면 더욱 재미있을 것이다.
이상진 감독 <창밖은 겨울>
2022 년 11월 24일 개봉
추억을 담아내는 인물
석우 - 영화감독
석우는 영화감독을 준비했었다. '영화'는 현재의 상황을 카메라로 담아내는 의미도 있지만, 다르게 보면 과거의 아름다움을 간직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카메라가 기억 저장소라고 불릴만큼, 사진보다 더 강렬한 추억을 담아낸다. 석우는 영화감독을 하며 과거의 기억들을 담아내는 일을 하였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석우처럼, 그리고 영화를 그리던 시절이 담긴 석우의 방문이 여전히 열려있는 것처럼 말이다.
영애 - 유실물 보관서 직원
영애는 유실물 보관서에서 근무한다. 잃어버린 물건들은 곧 기억으로만 남은 추억들이다. 영애는 추억을 보관하는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추억이라는 것이 꼭 귀중하고 값진 것은 아니라는 흥미로운 접근을 한다. 어떨 땐 추억을 일부러 버리기도 하고, 추억이 아닌 후회와 미련으로 다가오기도 하다. 아무튼 이런 모든 일들을 영애는 관리하고 있다.
추억을 연결하는 방식
MP3
혹시 예전에 사뒀던 MP3가 지금도 있다면, 한 번 들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 영화는 MP3와도 닮았다. 그 때에는 죽어라고 들었던 명곡들, 대중가요들, 지금은 촌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노래들을 듣다보면 그 시절 열광했던 나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노래를 들으며 등하교 하던 모습, 친구와 컵볶이를 사먹던 모습, 부모님과 함께 수목원에 다녔던 모습. 지금은 볼 수 없는 모습들이 기억난다. 영애와 석우는 이렇게 만난다. 마치 추억을 그리워하듯, MP3에 집착을 하며 가까워진다.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추억을 그리워하며 서로의 겨울을 공유하는 듯하다. 고작 MP3 하나 때문에 이런 인연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그 때의 겨울이 인상 깊었고 추억으로 간직되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느낀 점
<창밖은 겨울>은 낡은 보따리에 담긴 소중한 추억을 먼지를 풍기며 하나씩 푸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럴때마다 그 때 그 시절의 냄새가 동시에 풍긴다. 마치 겨울을 맞이하듯. 그 속에는 어떤 추억들이 담겨 있을까.
이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같은 영화는 아니다. 작은 종이컵에 담긴 믹스커피와 같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2000년대 성인의 겨울을 담아내는 것 같지만 지금 세대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따스하다. 어쩌면 현재 어린 세대가 이 영화를 통해서 당시의 순정과 낭만을 느껴봤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무심히 떠나보내는 것은 후회와 미련이 아닌 추억으로 남는 과정이라는 것. 그리고 이것은 요즘 시대에 필요한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잔잔하게 위로하고 소박하게 사랑하며 순간을 추억으로 담아낸다. 어느 때보다 힘들고 추운 이번 겨울, 달달한 믹스커피와 같은 영화로 속 따듯하게 위로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씨네랩 크리에이터로 시사회 참여 후 작성하였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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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단어를 안 외우고 보는 토익 시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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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데 죽었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바지사장계의 슈퍼스타 이만재(조진웅)이다. 그냥 평범한 월급쟁이었던 만재. 갑자기 돈이 급한 일이 생겼다. 한 집안의 가장인 만재. 분투를 벌이나 쉽지 않다. 좌절하는 만재.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일어설 구멍은 있다. 어디선가 날아든 '바지사장' 공개 구인 명함을 본 만재는 바지사장 시장에 발을 들인다. 잘 나가는 만재. 바지사장 일을 하며 어느 정도 모은 돈을 가지고 사업을 기획하려고 한다. 이 일만 잘되면 아내와 아내 몸에 있는 아이 셋이서 함께 살 수 있다. 행복감에 부푼 만재. 하지만 만재에게 큰 위기가 들이닥친다. 어느 날, 만재가 외국으로 떠났다. 숙소에 들어가서 습관처럼 튼 TV. 만재는 아연실색한다. '벤처기업가 이만재 씨가 1000억을 횡령하고 사망했다'는 뉴스를 본 것이다. 동시에 어떤 남자들이 숙소에 침입해서 만재를 납치한다. '데드맨'이 된 만재. 과연 만재는 재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바지사장 처음 들어봐
이 영화는 ‘바지사장의 세계’라는 배경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리고 이 바지사장이라는 세계를 나름 경제적으로 잘 활용한다. 바지사장이 뭘까? 바로 이름만 사장이라는 뜻이다. 이 ‘이름’이 한국사회에서 주도적으로 사용되는 곳이 어디일까? 정치권, 돈을 버는 일(경제권), 매체에 등장해서 이름과 얼굴이 유명해지는 일이 그렇다. 이런 여러 상황 속에서 이름이라는 모티브를 성실하게 구현한다. 대표적으로 영화의 주인공 김희애 배우 맡은 심여사 캐릭터가 정치 컨설턴트다. 정치 컨설턴트? 어디서 이름은 들어봤는데 누구 잘 생각이 안 난다. 이는 곧 이름이 팔리지는 않지만 존재감은 세다는 의미다. 그리고 정치의 단면 중 하나는 ‘신뢰가 갈 만한 이름에게 지지를 보내는 것’ 아니겠어? 이 정치를 두고 컨설턴트 심여사를 중심으로 정치권에 대한 내용을 전개한다. 이 정치권에서 카메라를 재계로 옮겨가는 이야기 흐름도 아예 다른 차원으로 옮겨 다니는 수준(?)은 아니다. 나름 근거가 있는 전개를 통해 이야기를 보여준다. 적어도 이 <데드맨>이 흥미진진한 스릴러물이라는 것에는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름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나름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은 있다.
그중 글쓴이가 이름이라는 소재를 잘 활용한 경우로 뽑고 싶은 것은 존재라는 것의 탐구다. 영화는 이 수많은 이름의 의미들을 스쳐 지나면서 감정적으로 중요한 장면마다 중점을 둔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선 인물의 동기로도 활용하면서 캐릭터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글쓴이는 이 감정전달이 중요한 장면이 감독의 진심이 담겨있는 것 아닐까 싶었다. 정치인의 세계가 됐건, 돈을 버는 세계가 됐건 결국 이름의 의미에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관객에게 묻는 것이다.
할 말은 없는
이렇게 이야기를 전개해도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우리 인생을 살다 보면(전적으로 당연하지만) 이 <데드맨>의 이야기 전개가 빈번히 일어난다. 하지만 이 영화의 많은 장면들은 단계를 생략하고 겅중겅중 뛰어다닌다. 가령 이만재의 사무실에 관한 부분이 대표적이다. 시놉시스 단계에서 ‘1000억 먹튀범으로 지목된다’라는 말이 있고 제목이 ‘데드맨’이니까 이런 부분은 스포일러가 아니겠지? 원래 입주한 사무실 주인이 ‘데드맨’이 된다면 당연히 이 건물은 빈자리다. 그럼 빈 건물이 되면 일반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반대로 이만재가 있던 집도 마찬가지다. 방을 빼겠지? 그럼 방을 빼면 이 주위에 물건들을 다 치우는 게 인지상정이다. 근데 ‘방을 뺀다’라는 우리 일상의 법칙은 둘째로 치고 이 사무실에 대한 두 가지 설정이 있다. 이 두 설정을 모두 고려하면 이곳에 대한 이 영화의 설정이 과연 현실성이 있는가 의문이 든다. 이 의문점은 ‘이 영화의 기획의도와 부합하는가’와 모순되는 지점이다. 기본 설정이 판타지 같더라도 ‘이런 이야기가 진짜 일어날 것 같아!’라고 몰입하는 게 이런 기획 의도를 가진 영화들의 과제 아닌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도 한 집안의 지하실에 누군가가 산다라는 비현실적인 전개를 강력한 박력과 디테일의 힘으로 전개한다. 하지만 <데드맨>은 이런 측면에서 게으르다. 섬세하지 못한 것이다.
결정적으로 글쓴이는 이 영화의 토대가 빈약하다고 하고 싶다. 이 영화의 제목이 뭘까? ‘데드맨’이다. 제목에서부터 이만재가 가짜로 죽었다는 게 핵심인 걸 알려준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이 기본 전제 자체가 무의미하다. 이 기본 전제만?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어떤 것도 중요도에 비해 빌런들이, 주인공이 안일하게 행동한다. 이 것은 <데드맨>의 모티브 하에 속하는 것이라는 점, 또 이야기 내적인 관점에서 더 자세한 설명이 붙었어야 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줄거리에서 이 물건은 방치된다. 이러다 보니 영화에서 플롯을 전개하는 데 있어 도움닫기가 되는 몇 설정들이 빈약하다는 것이 체감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기본적인 설정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그냥 볼만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게 누군가가 글을 써서 형상화시킨 무언가라고 보기엔 아쉽지 않나?
모순에 빠진 주인공들
이 영화의 인물들은 흐름을 잃고 방황한다. 대표적으로 심 여사와 희주가 그렇다. 심 여사는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하다. 이를 뒷받침하듯 영화는 이 능력을 묘사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통일성이다. 이 능력이 과연 통일성이 있었나? 만재와 직간접적으로 소통하면서 영화를 이끄는 인물치고 중반부 이후의 사건들은 낡았다. 심지어 글쓴이는 후반부 전개를 위해 이 인물이 스스로 모순 속에 항복하고 들어갔다고 느꼈다. 그리고 다른 측면에서 이 정치인이라는 소재를 생동감 있게 살렸나? 그것도 아닌 듯하다. 왜? 심 여사와 마찬가지로 정치인이라는 직업인이 가진 역량이 디테일하게 서술된 건 또 아니다. 이수경 배우가 맡은 공희주 캐릭터는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돼도 감정적으로 공감되는 캐릭터는 아니다. 글쓴이 개인적으로는 이 캐릭터가 편집이 너무 많이 돼서 그랬다고 생각한다. 생략된 게 너무 많다 보니 캐릭터 자체가 기능적으로 변했다. 물리적인 분량에 비해 중요도가 체감이 덜 되는 것이다.
자기주장 강한 연출
글쓴이는 장면만 있고 이음새는 없다는 점에서 <더 마블즈>를 떠올렸다. 영화 자체가 어떤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그 나머지를 위한 장면들을 넣었다. 이는 영화에서 대사들을 보여주는 방식에서 그렇다. 가령 심 여사가 고전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다. 이 대사들은 분명히 인생의 단면 하나를 공격하는 지점이란 건 여지가 없다(글쓴이도 야한 영화 봤다고 말하기 좀 어려울 때가 있긴 했다). 하지만 이 대사들을 둘러싼 이 영화의 상황이 중요하다. 이 상황이 통렬하게 관통하지는 못한 것 같다. 왜? 사실 이 대사와 이 영화는 그렇게까지 잘 달라붙은 문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름의 모티브를 떠나 그냥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한국사회의 정치현실에 대해 덤덤하게 말만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 문장이 최동훈 감독의 전성기가 떠오르는 말 맛난 대사인 건 맞지만 사실 굳이 이렇게까지 보여주고, 또 이런 류의 단어를 김희애 배우의 입에서 나올 건 또 아닌 것이다. 이런 류의 강약조절 템포 조절에 실패한 연출로 인해 어떤 장면들은 좀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하다. 장면들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의 관점에서는 근거가 부족한 영화가 된 것이다.
이렇게 자기주장이 강한 연출을 보여주다 보니 영화의 기술적인 부분에서 느껴지는 허점이 아쉽다. 바로 사운드다. 한 때 한국영화에 대해 가장 많은 비판거리였던 ‘대사가 잘 안 들려요’가 이 영화에서 (글쓴이는) 느낄 수 있었다. 김희애, 조진웅 같은 배우들은 원래 대사 전달력이 굉장히 좋은 편인데 말이다. 이런 사운드의 완성도는 영화가 듬성듬성하다고 느끼는 강력한 이유 중 하나로 작동한다. 여러모로 아쉬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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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병기 카터도 결국 구해내지 못한 영화
아닌 밤중에 잠 안 자고 글을 쓰고 있다. 잠이 안 온다. 사회복무요원 근무지에서 꾸벅꾸벅 졸면 되는 일이라 사실 그렇게까지 급하진 않은 것 같다. 뭔가를 볼까? 하다가 갑자기 어제 본 영화가 생각난다. 제목은 <카터>. <비상선언>이 나에겐 영 아니었기 때문에 이번엔 괜찮을 거야 하며 재생 버튼을 누른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몇 주 전 <그레이 맨>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넷플릭스 발 때리고 부수는 영화에 나름의 신뢰가 생겼다.
그렇게 도입부가 시작된다. 팬티 바람의 주원 배우가 보인다. 뭐지? 갑자기 몸 좋은 남자가 전화를 받더니 자기 몸 옆에 있는 핏자국에 놀란다. 그리고 갑자기 기억이 안 난단다. 그렇게 카터에 이입해서 어리둥절한 상황을 같이 느낀다. 갑자기 폭탄이 터진다. 엑스트라 중 한 명의 머리가 터진 것으로 보인다. 뭐야? 이제까지 본 적 없는 한국영화 스타일에 화들짝 놀라 '계속 봐야지'싶다. 그런데 이 호기심은 점점 안타까움으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북햔 출신의 전직 CIA 요원이 있다. 싸움 하나는 끝내주게 잘한다. 요원 카터는 정해진 임무에 따라 미션을 해결해야 한다. 근데 미션의 결과와는 별개로 참 속상하게 됐다. 8월 5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카터>로 가보자.
멀지 않은 미래
한국의 어느 도시. 지금 대한민국은 어수선하다. 왜? 바이러스 때문이다. 이름은 DMZ 바이러스. 바이러스는 전 세계를 강타해 지구를 병들게 하고 있다. 치료제는 아마 없었던 것 같다. 영화 초반부에 이 치료제가 개발됐다는 뉴스가 나오기 때문이다. 남한의 한 과학자가 발견한 바이러스 항체. 남북이 협력해서 치료제를 만들 계획이었지만 무슨 이유엔가 여자아이가 실종됐다고 한다. 급박한 상황을 알려주는 뉴스를 뒤로하고 주인공 남자는 한 모텔의 침대에 누워 있다. 깨질 것 같은 두통과 함께 기상한다. 뭐지? 속옷 한 장만 달랑 입고 허리를 펴 일어나려는 찰나 총알이 TV에 박힌다. 주인공이 누워있던 침대 근처에 총기로 무장한 용병이 와르르 달려든다. 정병호 박사 어디 있어? 방금 TV에 나온 뉴스는 관객에게 정보를 주는 것이 목적이지 주인공 들으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일어나서 다짜고짜 모르는 사람을 묻는 상황에 이게 뭔가 싶었다. 주인공에게 보이는 건 핏자국이 군데군데 있다는 것이다.
귀신이 곡할 것 같은 상황. 맨발바닥에 피를 묻히며 잡생각에 빠질 찰나 전화가 울린다. 받는 주인공. 전화의 상대는 남자의 이름을 ‘카터’라고 설명한다. 전화 상대는 남자에게 뒤에 있는, 총기로 무장한 여자에게 전화를 바꿔달라고 말한다. 전화를 바꿨다. 그리고 폭탄이 터져 전화를 받은 이의 머리가 날아간다. 속옷만 입은 채로 옆 건물로 뛰어내린 카터. 귀에 들리는 소리에 어안이 벙벙하다. 전화랑 상관없이 들리는 목소리에 여러 가지를 질문한다. 그리고 쏟아지는 대답에 카터는 경악한다. 뛰어내린 옆 건물에 있던 수많은 이들을 비롯해 엄청나게 많은 인원들이 자기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목소리가 들린다. 기억은 하나도 나지 않고, 위험천만한 상황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카터는 자기가 누구인지 기억해 낼 수 있을까? 그리고 이 DMZ 바이러스라는 전대미문의 전염병에서 남과 북 그리고 인류를 구해낼 수 있을까?
드라마 잘 안 봐요
난 드라마 잘 안 본다. 그래서 사실 요즘 핫한 배우들 잘 모른다. 넷플릭스 순위권이 아니면 웬만하면 재생하지 않는 나. 그 유명한 <비밀의 숲>이나 <나의 아저씨>도 보지 않았다. 이에 호응하듯 당연히 <굿 닥터>도 보지 않았다. <앨리스>와 <엽기적인 그녀>라는 드라마도 이 글을 쓰면서 알았다. <제빵왕 김탁구> 말고는 사실 주원 배우의 이미지를 기억하고 있지는 않다. 예전에 <1박 2일>에 출연한 거? 그거 빼고는 배우 주원의 이미지가 별로 없다. 그래서 주원이란 사람이 뭔가 연기를 하는 것 자체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상기한 <제빵왕 김탁구>도 출연한 사실만 알지 본방을 본 적은 없다). 근데 이 영화에서 정말 고생 많았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몸 키우는 게 액션 영화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일단 그 몸도 예쁘게 키워야 한다. 그리고 몸 쓰는 게 어색하지 않아야 한다. 또 이 영화 액션 자체는 롱테이크 형식을 많이 쓰고 있어서 암기도 잘해놔야 한다. 떨어지고 부수고 쏘고를 2시간 동안 반복해야 하기 때문에 다치는 것도 많이 다쳤을 것 같다. 예전에 <굿 닥터>에서 좀 특별한 역을 맡아 연기 잘한다는 평을 들었던 것으로 아는데 내가 직접 그걸 확인할 수 있던 건 좋았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좋은 게 뭘까? 바로 기존 배우들의 새로운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거 아닐까? 주원 배우가 영화 필모그래피는 처참하던데 이 <카터>에서의 원맨쇼를 바탕으로 좋은 역할이 많이 들어왔으면 좋겠다. 올해 좋은 영화들이 많이 개봉했다. 다른 해 같으면 이름이 시상식에서 자주 불릴 텐데 올해가 워낙 죽음의 조라 이번 년에는 좀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다. 후술 할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주원 배우의 연기 하나는 정말 고생 많았고 박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묻히기엔 아까운 퍼포먼스였다.
칼 같은 여집합
얼마 전 같은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그레이 맨>이 개봉했다. 여기도 조직의 비밀을 파헤지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인물이 주인공이다. 근데 이 <그레이 맨>은 최소한의 서사가 있다. '비밀 발견 - 비밀 파헤치고 - 흑막과 전투 - 엔딩'이라는 전형적인 소재긴 하지만 루소 형제는 영화를 보여주기 위해 액션을 사용한 셈이다. 이를 위해 크리스 에반스라는 배우를 섭외했고 그의 퍼포먼스는 영화의 톤을 만들어 주는 좋은 연기였다.
이 영화 역시 액션이 중요하다. 초반부 속옷만 입고 맨몸액션을 보여주는 주인공. 촬영이 롱테이크 형식이기 때문에 쉬는 것은 없다. 액션을 열심히 보여준다. 낫 비슷한 것으로 빌런들을 무찌른다. 와. 이걸 한다고? 촬영과 주원 배우의 열일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피칠갑이 되는 카메라. 요리조리 흔들리며 카터의 처절한 싸움을 보여준다. 수십 명과 싸운 카터. 속옷만 입은 맨몸이었지만 왜일까 멀쩡하다. 이게 초반 20분 정도 되는 부분이다. 카터에게 과제가 있다. 바이러스의 전염병의 해결책이 될 수 있는 아이를 구출하는 것이다. 그럼 혼자서는 안되니까 당연히 도와주는 이들이 있어야 한다. 국정원과 접촉하는 카터. 그렇게 5분 대화한다. 그 5분 안에서 조용히 설명만 듣나? 아니다. 방해꾼들을 떨어트리는 장면이 몇 개 있다. 5분 대화하고 또 7분 정도 액션 신이 있다. 그러고 나서 또 주인공이 위기해 처한다. 대화하는 장면이긴 한데 총을 갖고 대화한다. 총을 갖고 대화하다가 도망가야 하니까 또 액션이 일어난다. 액션 하다가 지치면 멜로인지 드라마인지 모를 시퀀스가 있다. 근데 그 장면 중에서 갑자기 총을 맞는다. 보통 내가 아는 액션영화는 액션 비중이 엄청 높진 않았다. <범죄도시 2>나 <탑건 : 메버릭>만 봐도 전자는 강해상의 악랄함을 보여주는 시퀀스를 몇 개 넣었다. 후자는 아이스맨을 위시로 한 여러 인물 간의 이야기를 넣었다.
이렇게 서서히 쌓은 감정선을 부수고 난 후 관객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기 위해 액션 신을 넣었다. 근데 이 영화는 다르다. 러닝타임 중 한 70%을 싸우는데 쓴다. 그래서 서사는 30분 정도 할당하나? 그래서 같은 내용을 1시간 30분 넘게 보려니 지루할 수밖에 없다. 아 또 싸워? 난 이야기 좀 보고 싶은데. 근데 그 막상 만들었던 이야기가 잘 만들었냐? 그것도 아니다. 일례로 주인공의 정체성과 관련된 갈등이 있다. 이거 빼도 서사에 아무 문제가 없다. 이게 무슨 긴장감을 주거나 그런 것이 아니다. 어차피 러닝타임 거의 대부분이 액션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너무 큰 액션 비중 때문에 오히려 심심해 보인다. 인물끼리 대화하는 신을 볼 때마다 좀 방해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차피 또 싸울 거면서 왜 대화하지? 갑자기 또 총알 날아들 것 아닌가? 형식의 간단명료함이 러닝타임을 지배하지 못했기 때문에 보는 재미가 1/10으로 감소했다. 또 후반부에 주인공과 관련된 반전이 있다. 이 반전도 좀 많이 억지로 구겨 넣었다. 작위적인 느낌이 강하다. 근데 왜 작위적으로 느껴질까? 생각해보면 액션 때문이다. 액션에서 어떤 장면을 넣어서 이야기를 전개해야 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삐뚤빼뚤 엇갈린다. 이 외에도 거의 모든 게 다 불필요하다. 초반부 등장하는 마피아. CIA가 개입하는 이유. 굳이 넣어야 했던 남북관계까지. 바이러스라는 소재는 <테이큰>, <아저씨>와 비교하려고 넣었나?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원인을 생각해보면 주객전도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런 식으로 영화의 많은 요소들이 액션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극초반부를 제외한 나머지 러닝타임을 전속력으로 집어던진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무조건 장점도 아니야
근데 액션이 잘 뽑았다? 무작정 그렇다고도 볼 수 없다. 일단 초중반부에 오토바이 액션 신이 있다. 막 서로 쫓고 쫓기다가 어떤 사람의 오토바이가 폭발한다. 그럼 오토바이가 불타겠지? 오토바이가 불타면 주변 물질에 불이 붙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다르다. 옆의 그 어떤 것도 불에 그을리지 않는다. 또 카터가 오토바이 사이에 껴서 적을 상대하고 빌런들을 넘어트린다. 이때 오토바이 날아가는 형태가 CG 같다. 또 이 시퀀스에서 모든 인물이 다 검은색 옷을 입었기 때문에 누가 누구인지 구분도 안 된다. 촬영도 롱테이크 형식을 빌려왔다. 그러니까 카메라가 엄청 흔들린다. 그럼 액션이 보이지도 않아서 화려한 것만 눈에 보인다. 이 영화의 액션 신은 이런 것이다. 자세히 보면 장점이라곤 주원 배우의 열연만 남는 부분인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영화에서 카터가 비행기를 타는 장면이 있다. 이 시퀀스의 모든 것은 신기할 정도다. 일단 이 시퀀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인과관계가 갑작스러운 건 다른 우선순위를 두는 것으로 하자. 이 비행기엔 국적이 다양한 사람들이 탑승한다. 그럼 나라와 나라 사이에는 외교란 게 있다. 만약 어떤 나라 사람이 다른 국가의 누군가를 죽인다. 근데 그걸 밑도 끝도 없이 연이어 죽인다. 난리가 난다. 근데 그 조금의 후폭풍을 생각하지도 않고 그냥 무작정 총만 쏴댄다. 그리고 그 무작정 총만 쏴대고 조직을 배신하는 일을 사람들이 너무 쉽게 넘어가준다. 얘들은 목숨이 아깝지 않나? 너무 극단적인 것만 계속 보여주는 것 아닌가? 그렇게 영화를 보다가 비행기 아래로 떨어지는 시퀀스로 이동한다. 이 시퀀스는 모든 지점에서 CG 티가 난다. 하늘에 있는데 어쩜 그리 총을 잘 쏘는지, 떨어지는 속도 무시하고 총을 쏠 수나 있는지, 몸을 어떻게 저렇게 자유자재로 구사하는지, 저 높이에서 비행하고 살 수 있는지, 윤희는 과연 무슨 잘못인지 싶다. 떨어지는 인물들의 몸과 배경인 하늘이 안 맞는 건 둘째로 치고 나서라도 이 장면에 들어간 모든 부분이 이상하다. 이 지점에서 영화 창을 끄고 싶어질만큼.
고르지 못한 연출법
근데 그렇게 장면을 구상하다 못해 영화의 톤이 들쭉날쭉하기까지 하다. 일단 카메라가 엄청 흔들린다. 왜 흔든지 모르겠다. 근데 너무 흔들려서 사람에 따라 산만하다고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형식이 롱테이크 형식이다. 이거 롱테이크로 이야기 전개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냥 장면 장면마다 이어 붙여도 영화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이 <카터>는 그런 촬영기법을 고수하다 보니 일단 보는 것 자체가 어지럽다. 만약 극장에 걸렸다? 멀미 느끼는 분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또 중간에 CIA 책임자로 나오는 배우 말고 대사 처리가 다 뭔가 안 맞는다. 일단 주인공 주원 배우 대사 처리하는 톤이 좀 이질감이 들었다. 이 배우 나오는 영상물 처음 보는데도 이질감이 느껴졌다. 목소리 톤에 쇳소리가 들어가니까 톤이 일정해서 오히려 어색한 느낌이 강했다. 눈빛이랑 액션은 좋은데 대사 치는 톤만 유달리 이상한 것이 안 그래도 많은 장점을 부각하기까지 한다. 주원 배우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외국인 배우들이 자주 나온다. 음.. 어.. 물어보고 싶다. 이 부분이 최선이었는지. 사실 외국인 배우만 뭔가 이상한 연기법을 갖는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 배우도 마찬가지다. 근데 외국인 배우들 중 쓸데없는 대사가 많았어서 그게 더 도드라지는 경향이 있다.
극장에 걸렸으면
이 글을 쓰기 전에 과연 내가 솔직하게 할 말을 쓰는 게 맞나? 싶었다. 한 영화에는 많은 사람들의 돈과 노력이 들어간다. 미술팀도 섭외 팀도 장소 로케이션 팀도 다들 고생해서 영화가 만들어진다. 물론 다들 고생 많으셨을 것이다. 근데 아닌 건 아닌 것이다. 솔직히 올해의 한국영화 괴작 중 최고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이게 기대작 소리를 들었다면 주원 배우의 커리어에 영향이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다. 하물며 엔딩까지 이 영화는 과연 무엇을 위해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점이 있다. 특히 엔딩이 이 영화에서 가장 안 좋은 점이라고 생각한다. 엔딩까지 보면 그래서 뭐?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아. 넷플릭스로 시원한 액션 보고 싶은 분들에겐 추천하고 싶다. 그 외의 분들에게는 솔직히 추천하고 싶지 않다. 이 영화는 그런 영화다. 넷플릭스로 보는 재미를 보여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영화가 되어버렸다. 열연을 펼친 주원 배우와 고생한 스태프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그 대신 정병길 감독은 이 영화와 관련된 혹평을 잘 딛고 일어나시길 기원한다. 액션 연출 포트폴리오라면 이 영화는 교보재가 될 뻔했다. 아무튼 이 영화가 극장에 걸렸다면 아찔할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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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힘과 책임을 깨닫는 피터 파커의 이야기
이 리뷰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청소년 시기를 거치며 성인으로 성장한다. 성장의 과정은 쉽지 않다. 호르몬의 변화로 신체도 변해가고 생각도 복잡해진다. 그래서 그 성장의 시기는 주변 친구들이나 가족들과의 관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이 과정은 모든 청소년들이 겪는 과정이고 성인이 된 사람들도 그 과정을 거쳐 어른이라는 새로운 시기로 접어든다. 아직 주변에는 자신을 책임져 줄 수 있는 부모나 어른이 있고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면 친구들과 다툼이 벌어지기도 한다.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 아이 자신의 탓도 있겠지만 부모가 그 책임을 대신하기도 한다.
성장 과정을 통해서 우리들은 자신이 가져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된다. 각자가 가지는 책임은 다를 수 있다. 아주 큰 힘을 가지게 된 경우에는 그 힘을 어떤 방식으로 써 나가야 할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힘은 공부를 잘하는 노하우가 될 수도 있고, 부모로 부터 얻은 재력이 될 수도 있다. 아니면 신체적인 힘이 그 힘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각자가 가진 힘을 활용하는 것은 청소년 시기가 거의 처음일 것이다. 성인이 되기 직전까지 많은 청소년들은 그 책임의 범위와 자신이 가지는 힘이 어디까지 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장기 피터 파커의 고민
영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청소년기를 지나고 있는 피터 파커(톰 홀랜드)의 이야기를 담는다. 피터는 우연히 거미에 물려 신비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힘을 친구들에게 신체적 우월함을 돋보이는 도구로만 사용했지만 주변에 나타나는 악당들을 처치하기 시작하면서 사회에서 자경단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 피터는 알지 못한다. 아이언맨인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피터가 가장 좋아하는 영웅이었는데 그를 직접 만나면서 다른 영웅들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하기 시작했고 어벤저스의 일원으로 역할을 하게 된다.
사실 그동안 마블 시리즈에서 스파이더맨의 역할은 아주 작은 것이었다. 그저 조금 어린 청소년 영웅으로서 어벤저스에서 감초 역할을 하고, 토니 스타크와 유사 부자 관계를 만들게 되면서 그저 어린 영웅 정도로 다뤄질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토니 스타크의 죽음을 경험하고 본격적으로 홀로서기를 하면서 심적 괴로움이라는 고난을 맞게 된다. 전편이었던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은 본격적으로 마블의 스파이더맨이 정신적 고뇌를 겪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그는 아버지 같은 영웅인 아이언맨이 사라졌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를 대체할 수 있는 미스테리오(제이크 질렌할)를 통해 대체하려고 했다. 하지만 미스테리오는 스파이더맨이 피터 파커라는 정체를 공개함으로써 피터를 혼란의 정점으로 끌고 간다.
피터 파커라는 인물은 늘 청소년이었다. 나이가 어린 영웅이었기 때문에 가족의 죽음을 겪었고, 자신의 잘못으로 주변 사람을 잃게 되는 경우가 생겼다. 과거 샘 레이미 감독 버전의 <스파이더맨> 시리즈에서도 피터 파커(토비 맥과이어)는 벤 삼촌을 잃게 되었고, 마크 웹 감독 버전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에서의 피터 파커(앤드류 가필드)도 벤 삼촌과 여자 친구 그웬을 잃는 상황을 맞았다. 그리고 그런 상황 안에서 심적으로 엄청난 혼란을 겪는 과정이 영화 내내 이어졌다. 그 혼란은 어쩌면 그들이 얻게 된 힘을 쓸 때의 무게감을 알게 된 계기가 되었을지 모른다.
마블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피터 파커가 겪는 혼란
마블 <스파이더맨> 시리즈에서의 피터 파커는 그런 혼란을 제대로 겪지 않았다. 토니 스타크를 잃기는 했지만 그 주변에는 그의 마음을 챙겨줄 사람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그의 여자 친구인 MJ(젠데이아 콜먼), 절친 네드(제이콥 베털런)과 큰 엄마 메이(마리사 토메이)는 피터의 옆에서 그를 돕거나 그가 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번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 스파이더맨의 정체가 전 세계에 공개되면서 그가 공공의 적이 되는 것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영향력이 뻗어나가게 된다.
아마 이번 스파이더맨 영화는 마블 유니버스 시리즈 중에서 피터 파커라는 인물이 겪는 가장 힘든 고통이 담긴 영화가 될 것 같다. 그는 자기 자신이 가진 힘이 가져올 안 좋을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느끼게 되고 자신이 가져야 할 책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그의 축 처진 어깨는 그가 짊어진 짐을 그대로 보여준다. 또한 영화 내내 피터는 그가 가진 힘으로 파생된 부정적 영향을 막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무언가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에서는 피터가 자신이 겪을 부정적인 일들을 마법처럼 사라지게 하려는 노력이 담겨 있다.
그는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비치)를 찾아가 스파이더맨이 피터 파커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기억을 지우는 주문을 부탁한다. 기억을 지우는 행위는 영화 속에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어찌 보면 피터에게 가장 간단하게 자신이 가진 책임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그 주문에 문제가 생기면서 영화 속 세계는 붕괴 직전에 놓이고, 피터에게는 자신의 책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여러 문제들이 닥쳐온다. 각종 빌런들의 등장과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피터의 모습이 담기는데, 기본적으로 모든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피터 파커가 가지고 있는 ‘선함’이 이 영화에서도 핵심적인 내적 도덕적 갈등으로 발현된다.
지금까지 여러 배우가 연기한 세 종류의 피터 파커가 있지만 이 캐릭터들이 가진 고민은 모두 자신이 가진 책임에 대한 것이었고, 그들이 가진 특유의 선함을 활용한 해결 방식을 포기하느냐 아니면 고수하느냐가 중요한 문제로 포함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선하고 악당들도 다시 올바른 삶을 살 수 있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핵심적인 기재로 깔고 있다. 그래서 스파이더맨이 분노에 가득 차 누군가를 살인하게 되거나 개인적인 복수를 하는 것에 대한 심리적 고민들이 영화적 긴장으로 발현된다.
지난 <스파이더맨>,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팬들을 위한 헌사
피터 파커라는 인물이 하는 고민은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다. 청소년 시기에 누구나 할 수 있는 고민을 슈퍼히어로 영화 안에 녹여놓았을 뿐이다. 이제 성인이 되기 직전인 청소년이 가지게 될 책임과 자신의 힘 때문에 받게 될 영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스파이더맨>이라는 시리즈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현실의 청소년들이 거미 능력을 가지게 되지는 않겠지만 모든 청소년은 그 자신이 가진 능력과 책임에 대해 고민하는 시기를 반드시 거친다. 그런 성장기의 고민이 이번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도 잘 담겼다.
영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과거에 제작된 토비 맥과이어 버전의 <스파이더맨> 시리즈나 앤드류 가필드 버전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좋아하는 팬들이라면 만족할 만한 요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전 버전의 <스파이더맨>에서 등장했던 빌런들인 닥터 옥토퍼스(알프레드 몰리나), 그린 고블린, 일렉트로(제이미 폭스) 등이 모두 등장하고 과거 시리즈의 대사,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활용되고 있기 때문에 기존 팬들을 추억에 잠기게 할 요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큰 힘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명대사가 이번 영화에서도 등장한다. 또한 영화 음악도 기존 OST의 노래들을 활용하고 있는데, 특히 빌런이 등장할 때 각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빌런들의 테마가 배경으로 흘러 예전 영화를 보던 때를 떠올리게 한다.
영화를 연출한 존 와츠 감독은 <스파이더맨 홈 커밍>,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을 연출했었는데, 이번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까지 연출하면서 성공적으로 마블에서 시작된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마무리했다. 향후 대학생 버전의 스파이더맨 시리즈가 이어진다는 소문이 있기는 하지만 연출자가 바뀔지 어떤 방식으로 시리즈가 이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 피터 파커가 가진 고뇌와 책임을 제대로 정리했기 때문에 향후에 마블에서 시리즈가 더 이어진다면 그가 어떤 방식의 삶을 택했는지, 주변 사람들과는 어떤 식으로 생활하게 될지 알 수 있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캐릭터와 이야기들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스포일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영화를 관람할 계획이 있다면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최대한 빨리 극장에서 관람하는 것을 추천한다. 이야기의 플롯은 간단하지만 영화가 전개되는 과정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내용을 먼저 알기보다는 극장에서 직접 확인하는 것이 영화의 재미를 최대한으로 즐길 수 있는 방법이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유튜브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리뷰>
https://www.youtube.com/watch?v=FZkg4Fdi4x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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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연한 두려움이 일으킨 불안감의 파도.
- 500일의 썸머에 나왔던 그 영화를 보았다. 그 문제작(?)인 '졸업'은 1967년 마이크 니콜스의 미국 영화인데, 원작 찰스 웨브의 '졸업'을 바탕을 두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나니 썸머가 인상 깊게 보았던 장면과 톰이 인상 깊게 보았던 장면이 겹치지 않는 모습이 확연하게 보였다. 톰이 이 영화를 오해하며 자랐다는 말이 이를 뒷받침한다. 썸머는 '졸업'이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며 울고 톰은 우는 그런 썸머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 영화의 결말은 정말 톰이 생각했던 것처럼 모든 것을 극복한 운명적인 사랑의 영화일까.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벤자민은 주변의 기대와 막연함으로 인해 내면의 불안감이 휘몰아친다. 그렇게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던 그는 고민에 빠질 새도 없이 1차원적인 쾌락에 빨려 든다. 잘못됐다는 생각은 어느새 그 욕망에 잠식되어 소거된다. 대화 없이도 충분한 잘못된 만남은 언젠간 거리를 두어야 할 테지만 익숙해진 시간으로 인해 전과 다를 바 없는 수동적인 삶의 형태는 지속된다. 금단의 관계는 그의 일부분이 얽히게 만들며 동시에 벗어날 수 없게 한다.
허비한 시막 간으로 인해 삶의 방향성을 잃고 물 위에 부유하던 벤자민은 일레인을 만나며 서서히 변화를 맞이한다. 매번 선택의 순간의 기로에 놓이며 '사랑'과 연관된 일레인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의지를 통해 표현할 수 있었다. 끝내 쟁취하고도 벤자민의 공허한 표정과 그를 바라보는 일레인의 모습을 통해 계속해서 펼쳐질 흔들리는 불안함을 500일의 썸머의 '썸머'는 그 감정을 느꼈기에 눈물을 쏟았을 것이다. 수동적으로 자라왔던 이들에게 처음으로 졸업이라는 묵직함으로 다가온 순간을 목도한다.
그의 방황에 휩쓸린 이들에게 밀려오는 불안감의 파도는 청춘이라는 막연함으로도 덮을 수 없었다. 세대를 막론한 진정한 '졸업'은 불안감과 두려움이 동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인생은 정해진 답이 없는 큰 시험지 같다. 영화의 동화같은 이야기와 현실적인 이야기가 잘 버무려진 영화였다. 약간의 아쉬움은 분명히 있지만 청춘의 막연함을 물에 비유한 방식이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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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 너머의 언어로
언어를 배운다는 건 단지 말의 외형만을 익히는 일이 아니라, 다른 층위의 세계관을 맛보는 일이 아닐까. 프랑스어를 배우면 자동차, 달, 바다는 여성이 되고 비행기, 해, 땅은 남성이 된다. 모국어가 한국어인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낯설게도, 사물에 성별을 붙여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프랑스어를 배우기 이전과 이후의 관념은 은근하게 달라진다.
한편 일본어를 배우면 존댓말의 형태는 두 갈래로 번져간다. 자신을 낮추는 겸양어와 상대를 높이는 존경어. 우리말에서도 ‘나’를 ‘저’로 부르는 등 낮춤말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적다 보니, 동사를 3개씩 외우는 일이 힘든 건 둘째치고 마음이 갑갑하다. 결재 도장까지 깍듯하게 상사 이름 쪽으로 기울여 찍는 문화를 얼핏 느낀다.
언어는 사회성과 역사성을 갖기에, 쓰는 사람들에 의해 규정되고 변형되기 마련이다. 언어의 층위는 그렇게 오랜 시간의 마디마디가 쌓여 이루어진 것이다. 한 인물이 시간과 성별을 뛰어넘어 존재한 400년의 시간을 담아낸 영화 <올란도>는 그 모양을 잘 보여준다.
영화는 자못 간단한 구조로 보인다. 한 젊은 귀족 올란도가 여왕에게 찬사를 보낸 후, 여왕이 저택과 함께 내려준 ‘영원히 죽지도 늙지도 말라’는 말이 고스란히 이루어졌다. 영화에 담긴 400년의 시간은 연극 막처럼 명확한 텍스트 제목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타이틀은 올란도의 삶에서 주요 화두가 어떻게 이동하는지를 보여준다. 올란도를 둘러싼 세상의 언어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살펴보자.
영화가 시작되면 수직적인 관계를 고스란히 담아낸 언어들이 눈에 띈다. 여왕이 올란도의 아버지에게 “그대의 것은 이미 내 것이었다”라고 말할 때도 그렇지만, 올란도를 지칭하는 말은 모두 소유격이 도드라진다. “내 아들, 수족, 마스코트”이자 “나의 승리”. 변하지도, 병들지도, 늙지도 말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그래서였을까? 이 말은 단지 물리 법칙을 어겨서 이상해 보일 뿐, 말도 안 되는 명령들이 ‘까라면 까야지’ 안에서 이루어지는 현실과 그렇게 다르지도 않다.
이 수직성은 훗날 러시아 대사의 딸 사샤를 사랑하게 된 올란도에게서도 보인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에 너는 내 것”이라는 말에 사샤의 주권은 들어있지 않다. 사샤를 만나기 전 약혼했던 상대가 올란도의 “배신”을 탓할 때는 “남자는 자기 마음을 따를 줄 알아야 한다”라고 가뿐하게 넘겼으나, 얼음이 녹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고 분명하게 피력했던 사샤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는 “여자a woman가 배신했다”라고 한다. 고유명사였던 사샤는 일반명사가, 수많은 여자 중 하나가 된다. 소유도 박탈도 올란도의 의지로만 이루어졌다.
훗날 올란도에게 청혼하는 해리와의 대화에서도 비슷한 대사가 재현된다. 여왕이 했던 “집을 주겠다”는 말이나 “내가 곧 영국이고 너는 내 것”이라는 말. 올란도가 했던 “I’m offering my hand”라는 말. 해리뿐이 아니다. 남성 귀족들의 대화는 허세와 과시, 권위로 꽉 차 의미나 감정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다리가 아프다는 말을 들어도 공감과 위로는 없고, 과학이나 예술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저 성별에 비유한다. 폄하하고 재단하며,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수직적 우위를 점하고자 끊임없이 재배치를 꾀하는 대화다.
이러한 세상에서, 올란도는 소통의 가능성을 간직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세상과 공명할 수 있었다. 러시아어에서 프랑스어로, 프랑스어에서 영어로 언어를 바꾸며 사샤가 소통을 모색할 때 “그냥 영어를 더 크게 말했”던 대부분의 귀족과 달리, 올란도는 사샤와 프랑스어로 대화하며 둘만의 공간을 만든다. 사랑이 끝난 후 잠에 빠졌다가 새로운 챕터로 나아갈 때도 마찬가지다. 시를 탐구하고, 정치의 세계로 나아가 향한 오스만 제국에서도 아랍어 인사말을 익혀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고 있다.
올란도가 간직하고 있던 소통의 가능성은 전쟁을 겪으며 뜻밖에도 성별 전환이라는 방식으로 발아한다. 쓰러져 죽어가는 이를 “적”으로 규정하는 해리와 달리 올란도는 그냥 죽어가는 사람으로 바라보았다. 이것은 균열의 조짐이다. 피아의 위치와 높이가 ‘명징하게 직조’되어 있는 세상의 균열. 아기 울음소리와 비명 같은 고통의 소리들 사이, 전쟁이 낸 균열 사이로 걸어가며, 올란도는 이제 또 다른 언어의 세계로 건너간다.
먼지가 축복처럼 빛나며 내리고, 물과 볕이 얼굴을 적시는 모습은 마치 세례라도 받는 모양 같다. 프랑스어로, 아랍어로 타인과 계속 대화를 시도해왔던 올란도는 이제 전쟁과 지배의 언어를 버렸다. 그때 여성이 되었다는 점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책 제목을 떠올리게 한다. 단지 성별만 다른, 여전히 같은 사람이다. 평소 큰일이 있었을 때처럼 7일 간 자고 일어난 점도 같다. 그러나 이제 사회가 그를 다르게 대한다. 올란도는 언어의 수직선에서 자신을 끌어내리려는 끊임없는 도전을 받는다. 그 도전을 피하는 길은 남편, 아들처럼 사회가 정한 우산 아래로 들어가는 길이라는 종용을 받는다. 이에 올란도는 자기 자신으로 굳게 서는 방법으로 응전한다. 설령 자신과 닮아 있고 이해의 구석이 있는 셜머딘이 상대라 해도, 올란도는 타인의 일부가 되길 택하지 않는다.
그 무엇의 곁에도 머물지 않고, 올란도는 계속해서 박차고 달린다. 그가 박차고 달리는 것은 과거에 버리고 온, 전쟁과 지배의 언어다. 미로 같은 정원을, 안갯속 들판을 계속 달리며 그는 새로운 세상으로, 새로운 언어의 세계로 나아간다. 영화의 초입부터 불을 든 사람들의 반대 방향으로 걷고 뛰고 있었던 그는, 이제는 임신한 몸으로 전쟁의 포화 속을 달린다. 전쟁의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시기의 힌트조차 주지 않는다. 이건 보통 전쟁이 사용하는 언어와는 반대 방식이다.
전쟁은 전쟁만을 명시한다. 보불 전쟁이라든지 펠로폰네소스 전쟁 같은 식으로 승자와 패자를 딱 잘라 명시하고, 뒤켠에 있던 민간인과 피해자들의 기록은 남기지 않는다. 그렇게 모두를 익명성에 가두고 만다. 이 영화는 넘어지면서도 포화를 뚫고 가는 올란도만을 오롯이 비추고, 역으로 전쟁을 익명성에 가둔다. 이는 올란도의 달리기와 나란한 방향이다.
그렇게 영화 <올란도>는 시간을 따라 촘촘히 배치한-사회성과 역사성을 가진- 지배의 언어를 역방향 달리기로 틀어버린다. 억압적인 층위 안에서 유린되어 온 언어의 사필귀정을 꾀하는 시도다. 동시에 이 시도는 자체로 완성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점임을 명확히 한다. 출판사에 건넨 두툼한 원고 더미가, 딸의 손에 들려 있는 카메라가 그 방향성을 드러낸다.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소통의 수단으로만 기능하던 언어는 소통을 풍성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제 예술의 경지로 나아간다. 거기서 생명은 피어난다. “더 이상 운명에 붙들리지 않”고, “삶이 시작되는 것”이라는 대사는 그래서 유의미하다.
오토바이 사이드카에 딸을 태우고, 한때 자신의 것이었던 저택에 유유히 걸어 들어서는 올란도의 모습. 그 걸음은 딱딱한 액자 프레임에 갇힌 초상화와는 달리 분명하게 살아있다. 초상화 바깥의 인간 올란도의 얼굴. 남자의 얼굴도 여자의 얼굴도 아닌, 천사의 노래 가사처럼 “인간의 얼굴”이었다. 딸이 손에 든 카메라 속의 천사. 400년을 살아온 이는 앞으로도 “영원히 죽지도 늙지도 않”을 테고, 언어도 그러할 것이다. 발화와 문자 그 너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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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제사 이야기가 아니다
SYNOPSIS.
3대 대가족이 모두 모인 제삿날 일가의 명줄이 달린 가업 두부공장 운영 문제로 가족들이 다투는 와중, 장손 ‘성진’은 그 은혜로운 밥줄을 잇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설상가상 갑작스레 맞닥뜨린 예기치 못한 이별로 가족 간의 갈등은 극에 달하는데…
핏줄과 밥줄로 얽힌 대가족의 70년 묵은 비밀이 서서히 밝혀진다!
POINT.
✔️ 익숙한 한국 가족 관계, K-유교 문화와 제사와 명절 이야기...를 어떻게 이렇게 잘 풀어냈나 싶을 만큼 섬세하게 풀어내는 영화
✔️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이야기까지 당신을 데려갈 영화. 볼 때도 좋았는데 보고 나서도 자꾸 떠올라요.
✔️ 연기 경력이 어마무시한 배우들이 더없이 자연스럽게 펼치는 가족 연기 (정말 명절 풍경 같아서 사람에 따라서는 트라우마가 올라올 수 있을 정도...)
✔️ 작년도 부산국제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수상작으로 이미 인정 받은 영화
✔️ 개인적으로는 올해의 한국영화로 손꼽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 와중에 매우 아름답고 섬세한 로케이션과 미술! 촬영이 정말 아름다우니까 꼭 극장에서 보아주세요.
*아래 리뷰에는 <장손>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신 후에 읽어주세요.
영화 <장손>은 얼핏 제사와 명절 풍경, 그 안에 얽히고설킨 가족 갈등을 다루는 영화처럼 보인다. ‘장손’에 대한 조부모 대의 굳건한 믿음이 손녀에게는 분배되지 않는 모습, 차분하게 굄돌처럼 역할을 다하는 며느리와 큰소리만 뻥뻥 치는 아들, 큰 재산 없이 부모 곁을 지키는 큰딸과 ‘부잣집 며느리’가 되어 느지막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작은딸의 역할 차이 또한 더없이 익숙한 풍경이다. 영화 <이장>을 비롯해 우리는 이런 가족 드라마에도 꽤나 익숙해져 왔다. 지고지순 금슬 가족애 이런 단어들 아래서 누군가에게는 안온함을 또 누군가에게는 숨이 턱 막히는 시간을 안기는, 원앙 금침 같은 이 한국식 가족 관계.
연기 잔뼈가 굵은 배우들이 자연스럽게 펼쳐내는 초반부는 그야말로 명절 풍경 그 자체이고, 아직 철없는 ‘장손’을 포함해 적당히 유머러스한 분위기로 흘러간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두 노인은 두부 맛에 깐깐하게 굴고, 장손이 나타나니 그제야 에어컨을 켜거나 제사 시간을 바꾸는 (노인들로서는) 못마땅한 행위마저 은근슬쩍 눈감아 줄 만큼 익숙한 공기를 내뿜는다.
그 익숙한 풍경 안에는 유머러스한 장면만 있지는 않다.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는 아버지의 고성 뒤로, 할머니는 익숙한 듯이 좋아하는 노래 가사를 한글로 쓰는 연습을 흥얼흥얼 하고 있다. 그러나 외부인 눈에는 다소 그로테스크해 보일 수도 있는 이런 장면들이, 가족 안에서는 적당히 넘어가진다.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던 아버지를 장손은 괴로워하지만, 어머니는 지긋지긋할 만큼 익숙한 솜씨로 이불을 가지고 내달려 오고, 할머니는 베개를 놓고 선풍기를 돌려 놓는다. 어둑한 집안, 가족이기에 그 태연함이 이해되는 장면이다.
기실 가족 관계란 절대 단편적인 색깔로 칠해질 수 없다. 완벽한 인간은 없으니, 인간과 인간이 맞부딪는 순간 또한 완벽할 수 없기에. 오랜 세월을 머금은 관계는 어디에선가 반드시 삐걱이기 마련이고, 사건은 각자에게 다른 생채기를 남기고, 다르게 기억되고 해석된다. 가족 간에는 그런 사건이 지근거리에서 너무 많이 쌓이기 때문에, 복잡다단한 감정이 실꾸리처럼 돌돌 말려 그 끝을 파악하기 어렵다. 대충 애증이라고 눙치고 지나가기 쉬운 관계 속 감정이나 사건들을, <장손>은 훌륭한 솜씨로 풀어낸다. 기나긴 대하소설을 읽으며 파악할 법한 정보들을 잘 녹여내어, 한 가족의 전사를 관객이 쉽게 파악할 수 있게끔 잘 풀어냈다.
영화의 결이 뚝 바뀌는 것은 할머니의 죽음 이후이다. 마치 배우 이정은의 얼굴이 영화 <기생충>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뚝 갈랐던 것처럼, 배우 손숙의 얼굴이 담긴 영정 사진이 불에 오그라들면서 <장손> 또한 제사와 갈등 이면으로 관객을 깊이 데려간다.
이전에도 자식들은 서로 처한 상황이 달랐고 이해 관계도 달랐지만, 할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고모의 갈등을 주축으로 이해는 더욱 멀어져 간다. 다만 영화 <괴물>의 경우와 달리, 보면서 진실이 무엇일까 궁금해지지 않는다. 세상에는 흑 혹은 백으로 명확하게 정리되는 문제보다 입장의 차이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문제가 훨씬 많고, 가족 관계 안에서는 특히 그러하기에. 증조부 증조모의 무덤이 비어 있어도, 갑작스러운 화재가 발생해도, 범죄 스릴러처럼 범인을 찾기에 급급한 마음 같은 건 올라오지 않는다. 뭔가 이유가 있었으려니. 그리고 그런 이유의 가닥들을 하나하나 모아 틀어 쥐고 있던 것이, 이 집안 안에서 할머니가 해온 역할이려니.
제사의 아우라를 부여하려고 아무 말이나 하거나 장손이 올 때서야 에어컨을 켜주는 귀여운 일면도 있지만, 할머니는 분명 이 집안의 구심점이었다. 꼬장꼬장하게 두부 맛을 보며 가풍을 지키고, 통장이며 모든 대소사를 관할하고 있기도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모양대로 펼쳐내는 돌봄의 모양새가 그렇다. 큰고모네 의료비를 대주거나 월급을 조금씩 여투어 놓는 일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시든 장미꽃을 잘라 솥 아래 불에 쓸어 넣을 만큼 알뜰살뜰하게.
이 내내 ‘장손’ 성진은 관찰자처럼 한 걸음 멀리서 바라본다. 장녀였다면 갖지 못했을 거리감이다. 기묘한 죄책감과 불편함 안에서 갈수록 무거워지는 표정으로, 그럼에도 충실한 인터뷰어처럼 가족 구성원들을 하나씩 만나고 그들의 마음을 듣는다. 고모와 어머니, 누나까지 한 명씩 만나 속마음을 각각 듣게 되는, 서술자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은 오직 성진뿐인데, 독특한 점은 집안 식구 중 여성들만 만나고 있다는 점이다.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 고모부, 툭하면 고주망태가 되는 아버지와는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으며, 착실한 성품의 (그래서 누나 말대로 공장을 “신경 쓸” 예정이며 사실상 이미 쓰고 있는) 매형은 공장을 물려받을 대상으로는 거론되지 않아 사실상 집안 식구라 보기 어렵다. 성진과도 역할을 분담하는 동료 느낌의 대화만 주고받는다.
‘무능한 아버지’ 대신 현명했고 인내했던 어머니(들)를 하나하나 마주하고, 그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는 인물은 조부다. 마치 퀘스트를 하나하나 깬 후 최종 보스를 마주하듯이. 이 엄숙한 대화를 마무리하며 그는 무언가를 건네받는다. 최종 보스를 지나는 주인공이 다음 스테이지로 나아갈 열쇠처럼.
이것은 계승이다. 그동안 한 걸음 밖에서 관조적으로 맴돌던 장손은 이제 손에 쥐어진 것을 들고 계승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기구한 현대사 속에서 인물들의 삶을 찾아온 이리저리 꼬인 사건들, 그 안에서 서로 주고받은 말과 애정과 상처들, 그것들의 흔적을 손에 쥔 채, 그는 햇살 아래 눈을 찌푸린다. 영화 첫 장면이 연기로 희뿌연 공장 내부(“문 열어라, 문! 이러다 죽겠다!”)였음을 생각할 때, 영화 <장손>은 제사의 계승이나 갈등의 표출만이 아닌, 그보다 더 깊은 뿌리의 계승을 둘러싼 이야기다. 계승할지 말지 결정해야 할, 뿌리에 빛을 비추어 다각도에서 보여주는 영화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서 꼭 언급하고 싶은 건 아름다운 원경이다. 할머니의 장례 행렬에 꽃상여를 따라가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마지막에 눈 내리는 겨울 산으로 자분자분 걸어가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한 폭 그림처럼 펼쳐진다. 꽃상여는 불에 타오르고, 눈 내리는 소리는 어쩐지 불을 닮아 있다. 무언가의 죽음 뒤에는 불이 뒤따른다. 타고 남은 재를 앞에 두고, 우리는 이제 다음 걸음을 고민해야 한다. <장손>이 한 경상도 가정의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 세대의 어떤 것으로 읽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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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배고픔을 견디다 못한 아내는 회사에 대한 분노로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되고,
부패한 사회 복지과는 자신들의 이득만을 위해 두 아이들의 양육권을 부모에게서 빼앗아 버린다.
가족을 지키기 위한 힘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이들을 빼앗겨 버린 니콜라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한 단 하나의 일념으로
300km가 넘는 거리인 수도 베오그라드까지의 긴 여정을 결심한다.
모든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이들을 되찾을 권리와 정의를 위해
아버지 니콜라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