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2-12-05 16:17:08
생명의 불이 꺼져도 멈출 수 없는 사랑의 힘
영화 <본즈 앤 올>
자신의 모습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살갗을 파고들듯 마음에 상처를 끊임없이 되새겨야 하기에 더욱 고통스럽다. 그 순간을 이들만의 사랑의 화법으로 이때까지 본 적 없었던 상상 이상의 로맨스를 펼쳐낸다. 사랑의 의미를 잃어가는 요즘과 딱 어울리는 이 영화는 어떤 색의 사랑을 띌지라도 함께하고 싶었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담아내어 더욱 강렬하게 느껴진다. 티모시 샬라메와 테일러 러셀이 출연하는 영화 '본즈 앤 올'은 11월 30일에 개봉했다.
평온한 풍경과 그림, 그리고 적막과 함께 흐르는 피아노 소리 속 잔잔한 목소리가 들린다. 모두가 잠든 밤, 몰래 빠져나와 친구들을 만나러 간 자리에서 자신도 모르게 내면에 자리 잡아 있는 미지의 존재와 마주하게 된 매런이 본능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홀로 남게 된 매런은 그동안 숨겨왔던 비밀을 알게 되며 내면에 휘몰아치는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떠난 아빠의 목소리를 노래 삼아 들으며 사라진 엄마를 찾아 떠난다. 매런은 자신과 비슷한 존재의 '이터'를 알게 된다.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 매런은 같은 종족의 사람들을 만나며 그동안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알게 된다. 종족의 이름은 ‘이터’이며 일종의 규칙으로 같은 종족이지만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과 함께하며 비밀을 공유함과 동시에 이유도 없이 찾아오는 식인성을 마주한다. 기억에 남지 않던 욕망의 기억을 떠올리며 죄책감을 느낄 새도 없이 모든 것을 공유하게 된다.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다른 규격의 공간을 명확하게 했다. 서로 다른 영향력이지만 장면 장면 겹치는 사랑과 살해의 기억이 매런으로 하여금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바로잡게 한다.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했지만 그가 느꼈던 따뜻한 온기는 피로 번져가도 놓을 수 없는 명확한 사랑의 형태로 바뀌고 뼈째로 집어삼켜도 괜찮을 사랑은 앞으로의 여정이 어떤 형태를 만들어갈지 궁금해지게 만든다.
카니발리즘을 통한 이야기 전개가 다소 낯설고 징그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받아들이는 순간을 넘어 그 존재 자체의 인식에 초점이 맞춰지며 개연성을 충족시킨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에 대한 물음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핏빛으로 얼룩진 배경과 대치되는 아름다운 풍경이 대비되며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Relative contents
-
- 아무도 없는 곳, 2021 김종관 감독작품
가끔은 사람을 만나면서 동시에 이별을 떠올린다. 자유롭게 나다닐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나서, 오히려 인연이라는 것에, 또 세월이라는 것에 많이도 덤덤해졌다. 사람들은 그렇게 만나고 또 헤어지고, 또 만난다. 그렇게 헤어져도 꼭 다시 만날 것 같은 사람들은 아마도 가족들뿐 일 것이다. 이 영화는 일상인 가족들과의 가볍고, 또 무거운 이야기들이다. 우리가 잃고 얻은 게 개개인의 틀 안에서 모두 다 달랐을 코로나와 함께한 시간들. 공기처럼 물처럼 옆에 있어준, 혹은 떨어져 있는 가족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싶었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고운 시선으로 조용히 책을 읽는다. 사람을 기다리는 것 같지만 만나야 할 사람은 바로 앞에서 눈을 감고 있다. 문득 주변을 비추어보니 모든 사람들이 다 혼자서 자신만의 방식대로 커피 한 잔을 두고 시간을 보내고 있다. 공간 속에 수많은 시간이 떠다니는 것만 같다.
첫번째 이야기는 사람들이 너무나 분주해 보이고, 모든 것이 재미없다 말하는 한 여인. 그녀에게 호텔에 들어오려는 노숙자의 이야기를 해 주는 남자. 그녀는 어느덧 그 이야기에 빠져든다. 이야기는 사실인 듯 하나 사실은 아닌 허구이지만, 그 안에 있는 공허함은 저릿하다.
두번째 이야기는 글을 쓰는 그 남자와 편집자와의 만남. 담배를 끊은 남자에게 인도네시아 산 담배를 권하는 그녀는 자신의 헤어진 남자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상실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화면이 너무 어두워 밤이라는 어둠에 갇힌 사람 둘을 보는 것 같다. 둘이 걷는 덕수궁 돌담길 같은 끝없이 이어진 길에서, 둘 사이를 뚫고 등장하는 정신이 온전치 않아 보이는 한 여인이 말한다.
'바람의 방향을 따라 가야해'
'손을 잡아야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어'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상해 보였던 그녀가 가장 정상으로 사는 사람은 아니었을까. 어른은 참 어려운 존재다.
세번째 이야기 그와 사진사와의 우연한 만남. 청산가리를 품에 안고 다니는 이 사내에게는 유방암이 전이된 아픈 아내가 있다. 그녀의 간병에 지치고 괴로운 그는, 우연히 마주친 남자를 보며 병을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네번째 이야기 바텐더와의 만남. 손님들의 이야기로 시를 쓰는 기억상실증 바텐더를 만난다. 그녀는 그에게 말을 시킨다. 위스키 병에 담을 만한 추억을 나누어 달라 한다. 남자는 그 바텐더에게 바스락거리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이어 나간다.
감독님은 아마도 이런 생각으로 영화를 만드시지 않았을까. ‘어떤 힘든 일에도 사람은 쉽게 희망을 버릴 수 없다는 사실’. 영화 속 사진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기적은 안 믿어요ㅡ 하지만 기적이라는 게 있어요!” 라는 말에 얼만큼 동의해야 할지 생각해 봤다. 영화를 보고 있는 현실 속 내가, 여기까지 잘 버티고 더 긍정적으로 살아있는 게 기적이라면 기적인 것 같다.
어둡고 무겁다 했는데 영화가 벌써 한 시간 이상 흘러가 있었다. 어떤 사람이 살며 겪는 모든 이야기들에는 "관점의 차이" 에 따라 소설이 될 수 있는 것들이 아주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본 그 날이 나의 생일이기도 했고, 많은 축하들을 받으며 혼자서 충만했던 건, 그간의 내 삶과 이야기의 경계는 한해한해 더 나이가 들 수록 점점 더 모호해져 가는 게 아닌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의 추억들도, 또 지금의 나날들도 나의 관점에 따라 부감샷이 될 수도 클로즈업이 될수도 있는 건 아닐는지 싶었기 때문에. 내 삶은 내가 원하는 것만큼 시가 될 수도 소설이 될 수도 영화가 될 수도 있는 건 아닌지. 참으로 오랜만에 앞으로의 나날들이 기대된다.
영화 속 남자는 바텐더의 표현처럼 '기다린다는 말로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지구 건너편에 두고 온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마음을 고백하는 그 남자를 보며, 보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지구 건너편에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안전하게 피신해 있었던 그 외로움에서 나와서. 희망이라는 걸 노래해 보고 싶어졌다.
"바람을 따라가야지”
“손을 잡아야 길을 안 잃어"
그 말씀을 해 주신 건 그 남자의, 엄마였다. 그 남자는 늘 자신의 주변에서 엄마를 만났다.
한껏 공허함과 쓸쓸함 뒤 희망을 노래하는 게 바로 인간. 인간은 희망을 먹고 산다. 하루가 지나도 영화가 푹 우린 곰국마냥 생각난다ㅡ 이 영화는 희망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였다ㅡ 그게 부끄럽기도 듣기 싫기도 거북하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는 왠지 어딘가 모르게 다 닮아있다. 신기한 사람들의 삶, 과 희망의 노래. ‘아무도 없는 곳’ 이었다.
-
- 어느 가족 (Shoplifters, 2018)
- 어느 가족 (万引き家族, Shoplifters, 2018)
개봉일 : 2018.07.26. (한국 기준)
감독 : 고레에다 히로카즈
출연 : 릴리 프랭키, 안도 사쿠라, 마츠오카 마유, 키키 기린, 죠 카이리, 사사키 미유
‘서로를 선택한 진짜 가족의 이야기’
가족이란 무엇일까? 함께 밥을 먹는 사이? 아니면 한 집안에 사는 사이? 깊은 신뢰감을 가진 사이 또는 혈육을 말하는 걸까?
<바닷마을 다이어리>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등 여러 작품을 발표하며, 가족과 인생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서정적이고 아름답게 풀어내기로 유명한 ‘고레에다 히로카즈’감독은 <어느 가족>이라는 영화를 통해 또 다른 가족의 의미를 전한다.
제3자가 바라보기엔 불완전하고, ‘가족’이란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가족. 하지만 또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면 너무도 단란한 가족. 조금은 가난하고, 또 난잡한 집안이지만 가족들 사이엔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물건을 훔치고, 아빠는 일용직으로 근무하며, 엄마는 마트에서 근무한다. 노쇠한 할머니는 느릿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아이들의 손을 어루만진다. 이 가족은 완전하진 않지만 행복하다.
행복해 보이는 이 가족엔 숨겨진 비밀이 있다. 사실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리고 가볍지도 않다. 그 비밀은 새로운 가족인 ‘유리’의 등장과 함께 조금씩 가족들에게 다가온다. 어깨가 움츠러들 만큼 추운 겨울밤, 어리고 가냘픈 아이 ‘유리’는 누군가를 기다리듯 길거리를 헤매고 있다. 그리고 오사무와 노부요, 아키, 하츠에, 쇼타는 작은 아이를 복작이는 집안에 앉히고 밥을 먹인다. 아직 겨울이 오진 않았지만, 찬바람이 부는 날 밤 따스한 국물 요리를 먹는듯한 포근한 느낌이 들 만큼, 이 가족의 분위기는 따스하다.
어느 가족 시놉시스
할머니의 연금과 물건을 훔쳐 생활하며 가난하지만 웃음이 끊이지 않는 어느 가족. 우연히 길 위에서 떨고 있는 한 소녀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와 가족처럼 함께 살게 된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각자 품고 있던 비밀과 간절한 바람이 드러나게 되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마트에서 손발을 맞춰 음식을 훔치는 아이와 아빠로 보이는 남자. 두 사람은 아이의 가방에 먹을 것을 담고, 저녁으로 먹을 고로케를 사서 집으로 돌아간다. 따스한 집이 그리울 만큼 차가운 늦겨울 밤, 오사무는 며칠째 집 앞을 헤매고 있는 작은 소녀를 집안으로 들인다. 옹기종기 모여앉은 한 가족의 저녁상에 새로운 변화가 생긴다.
할머니 하츠에는 작은 아이를 살펴보던 중, 아이의 몸에 상처가 가득한 것을 발견한다. 아이의 이름은 ‘유리’. 오사무는 유리를 데려다주기 위해 유리를 업고 집을 나선다. 그렇게 도착한 집앞, 그리고 안에서 들려오는 부부 싸움 소리. 오사무와 노부요는 유리를 업은 채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오사무는 건설 일용직, 노부요는 마트 직원, 아키는 접대를 하고, 하츠에는 전 남편의 위자료와 연금으로 생활비를 충당한다. 집은 하츠에의 집인듯하다. 가난하고 불안정한 집안의 상태. 학교에 가야 할 나이인 쇼타는 학교에 다니지 않고, 마루에 걸터앉아 책을 읽는다.
“집에서 공부할 수 없는 애들이 학교에 가는 거야.”라며 발보다 큰 슬리퍼를 질질 끌고 걸어가는 쇼타의 모습이 의연해 보이면서도 짠하다. 오사무는 다 지어지지 않은 아파트의 문턱을 지나며 “나 왔어-”라고 말해본다. 평생 가져볼 일 없을듯한 번듯한 아파트. 이 가족은 가난하다. 그리고 사회의 끝에 간신히 걸쳐진 채 위태롭게 버티고 있다. 뜨거운 여름 날씨와 땀에 흠뻑 젖은 가족들의 티가 그들의 숨 가쁜 하루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듯하다.
버거운 하루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건 ‘가족’이라는 존재뿐이다. 오사무, 노부요, 아키, 하츠에, 쇼타, 그리고 유리. 6명으로 늘어난 만큼, 이 가족은 조금 더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하츠에와 쇼타는 밀개 떡을 좋아한다는 유리를 위해 음식을 양보하고, 오사무는 유리를 쇼타의 ‘여동생’이라고 말한다. 어딘가 어색하고 군데군데 구멍이 보이는듯하지만, 이들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 가족은 전 부모에게서 고통받았을 ‘쥬리’를 ‘린’이라는 단발머리의 소녀로 만들어준다. 쥬리라는 이름의 소녀가 TV에 나온 날, 노부요는 유리의 머리를 잘라준다. 아키는 “언니도 다른 이름이 있어”라며 유리와 자신 사이의 유대감을 표시한다. 유리는 “린이 더 좋아.”라고 답하며 머리를 자른 자신의 모습과, 현재 가족들에 대한 만족감을 표시한다.
“부모는 선택할 수 없으니까,”
대부분의 ‘가족’들은 서로의 선택이 아닌, 혈육으로 이루어진다. “가족 같은 사이”라고 표하는 가까운 사이 말고,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진짜 가족’의 경우 말이다. 하지만 이 가족은 서로를 ‘선택’했고, 새로운 가족이 된다. 노부요는 유리가 처음 만나던 날 입고 있었던 옷을 불태우며 “사랑한다면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말한다.
노부요와 유리가 함께 목욕을 하던 날, 노부요는 다리미에 데인 상처가 있는 유리의 팔을 보게 된다. 유리는 내게도 같은 상처가 있다며 노부요를 바라보고, 노부요의 상처를 말없이 쓰다듬는다. 노부요는 그런 유리를 바라보며 “괜찮아, (상처는) 다 나았어.”라고 말하지만, 유리는 아직 나은 게 아니라고 말한다. ‘아직 다 낫지 않은 건’ 노부요의 상처였을까, 아니면 유리의 마음이었을까?
노부요는 유리가 더 이상 상처받지 않으며 ‘린’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가족이 되고, 행복하길 바란다. 노부요가 처음 본 유리는 그저 집 앞에 앉아있던 어린 여자아이였지만, 이젠 딸과도 같은 소중한 존재가 된다. 노부요는 유리를 위해 직장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습한 여름날, 노부요와 오사무는 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을 보낸다. 직장을 잃었다는 노부요에게 오사무는 옛날처럼 술집을 하거나, 다른 일도 있다며 일부러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오사무의 이야기를 듣던 노부요는 “나 지쳐버렸어.”라는 한마디로 분위기를 무겁게 누른다. 그 순간 소나기가 내린다. 그 후, 노부요와 오사무는 평소와 다른 특별한 시간을 보낸다. 이 특별하고 행복하고, 또 평화로운 순간은 소나기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버린다.
행복했던 마지막 바다 나들이. 하츠에는 손을 맞잡은 채 파도를 피하고 있는 다섯 명을 바라본다. 행복한 엄마 아빠와 3남매로 보이는 모습. 그녀는 평온한 표정으로 고마웠다고 속삭인 후, 조용한 죽음을 맞이한다. 하츠에는 오래된 집과 계좌 속 11만 6천엔, 보석함에 든 3만엔. 그리고 ‘어느 가족’의 존재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하츠에가 떠난 후, 이 가족은 순식간에 흩어지기 시작한다.
쇼타가 경찰에 붙잡히고, 남은 가족들의 도주는 무산된다. 이 가족의 생활은 엽기적인 유괴와 살인 사건으로 세간에 소개된다. 전 남편을 죽이고 묻은 여자와 남자, 남편을 빼앗은 가족에게서 돈을 받은 할머니, 그리고 그 할머니와 살고 있던 남편을 빼앗은 가족의 딸. 유괴된 듯 보이는 어린아이 둘. 할머니는 집안에 묻힌 채 발견된다. 사람들은 그 누구도 이들을 하나의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버린 걸 주웠습니다.”
형사들은 하츠에의 시신을 유기한 것이라며 노부요를 몰아붙인다. 노부요는 형사에게 이렇게 답한다. 내가 유기한 것이 아닌, 누군가 버린 걸 주웠다고 말이다. 이건 사실이다. 오사무는 차 안에 버려진 쇼타를 ‘아들’처럼 키웠고, 집 앞을 헤매던 유리를 ‘딸’로 맞이한다. 그리고 전 남편과 그의 가족으로부터 버려져 혼자 살고 있는 하츠에와 아키의 가족이 된다. 누군가에게 버려지고, 사회가 외면하고 있는 인물들. 그들은 함께 모여 서로를 보듬고, 가짜 가족이 아닌 진짜 가족이 된다.
“두 아이는 당신을 뭐라고 불렀어요?”
오사무는 쇼타에게 자신을 ‘아빠’라고 불러보라고 말하고, 유리를 ‘여동생’이라고 불러보라고 한다. 하지만 쇼타는 ‘아빠’라는 말을 하지 못한다. 노부요는 고민하고 있는 쇼타에게 그 말이 중요한 건 아니라며 위로한다. 하지만 노부요도 ‘엄마’라는 말을 듣길 바랐을 것이다. 쇼타와 함께 시장을 걸어가며 “어머니, 저녁 반찬으로 고로케 어떠세요?”라고 묻는 상인의 말에 노부요는 웃음을 숨기지 못한다. 쇼타는 웃고 있는 노부요를 바라보며 “어머니라고 불리면 좋아요?”라고 묻는다. 불임으로 인해 아이를 낳지 못한 노부요에게 쇼타와 유리는 가슴으로 낳고, 사랑으로 키워낸 아이들이었다.
노부요는 남은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홀로 죄를 뒤집어쓴다. 모든 일은 혼자 꾸민것이며, 다른 이들은 몰랐다고 진술한 그녀는 5년형을 받게 된다. 그 후, 옷을 흠뻑 젖게 할 만큼 습한 여름이 지나고, 겨울이 찾아온다. 노부요는 더 이상 이 가족을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닫고, 우린 쇼타에게 역부족인 사람이라고 말한다. 눈이 잔뜩 쌓인 날 밤, 등을 기대고 누운 오사무와 쇼타는 ‘가족’이라는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한다.
“아빠에서 아저씨로 돌아갈게.”
오사무는 더 이상 쇼타에게 아빠라는 말을 바랄 수 없음을 느낀다. 쇼타는 오사무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버스를 타고 떠난다. 오사무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떠나는 버스를 따라 달린다. 버스는 멈추지 않았고, 둘 사이의 거리는 점점 벌어진다.
‘쇼타’는 끝까지 오사무를 ‘아빠’라고 부를 수 없었다. 오사무와 쇼타는 성장기인 쇼타의 고민을 공유하고, 위로하고, 또 함께 저녁 찬거리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여느 ‘부자’와 다르지 않은 일상을 보내지만 ‘사회적 통념’상 오사무는 쇼타의 아빠가 될 수 없었다. 오사무가 아빠이기를 포기한 마지막 순간, 쇼타는 오사무가 들을 수 없는 거리에서나마 ‘아빠’라는 단어를 소리 없이 읊어본 후, 입속으로 삼킨다.
그리고 뒤이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간 유리의 모습이 나온다. 유리는 쇼타에게 배운 대로 삼 형제, 육개장.. 등을 함께 말하며 숫자를 세고 있다. 숫자 셈이 반복되고, 유리는 누군가를 다시 기다리듯, 계속해서 집 앞을 서성이고 있다. 유리는 오사무와 쇼타가 다시 자신의 앞에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늦겨울에 서로의 손을 잡으며 만들어진 진짜 가족은 끈적한 공기와 뜨거운 햇살이 비치는 여름을 보내고, 다시 차가운 겨울을 맞이한다. 소나기처럼 짧았던 행복한 가족의 시간이 지나가고, 사회는 이들에게서 ‘가족’이라는 타이틀을 앗아간다. ‘아빠’ ‘엄마’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불러보기도 전에 끝나버린 ‘어느 가족’의 이야기였다.
<어느 가족>을 보면서 아빠, 엄마, 가족이라는 존재는 정확히 어떠한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로 가득한 6명이 함께 모여 만든 이 가족 또한 ‘진짜 가족’이다. 전 남편에게서 도망쳐온 노부요와 노부요를 사랑하는 오사무. 자해를 일삼던 소녀 아키, 전남편과 가족에게서 버림받은 노인 하츠에, 도박장 앞에 버려진 아이 쇼타, 학대와 방치를 일삼던 부모에게서 버려진 유리. 사람들은 이 가족을 보며 ‘가족’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는다. 뉴스를 보는 이들에게 하츠에는 희생된 할머니, 노부요와 오사무는 유괴범, 아키와 쇼타, 유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붙잡힌 아이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함께해서 행복했다. 서로에게 숨기고 있는 비밀이 있었을지라도 말이다. 함께 저녁을 먹으며 서로를 바라보고, 손발의 따스함으로 당신의 하루가 어땠을지 짐작해보고, 미워하기도 하고 서로를 의지하기도 하는 이들은 진짜 가족이다.
* 본 콘텐츠는 블로거 Kyung film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 낭만으로 가득한 비현실적인 세상
-비전문가의 개인적인 감상 및 해석
-영화 <무드 인디고> 스포일러 포함 / 기억에 의지해 쓰느라 실제 영화와 다른 부분이 존재할 가능성 있음.치즈 (CHEEZE) - 무드 인디고 (Mood Indigo)
사랑은 추상적인 개념인만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무드 인디고는 색감과 독특한 연출로 감정을 전달한다. 알록달록하고 따뜻한 색감으로 가득하던 나날이 흑백으로 변해버린다거나. 뭐 그런. 내 기준에서 이 영화의 연출은 상당히 직관적으로 다가왔다.
무드 인디고의 세상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존재한다. 스케이트를 타다 간단한 이벤트에서 우승하기 위해 몸이 풍선인형처럼 길어져도, 말하는 새가 이벤트를 담당해도, 음악을 틀어놓으니 방이 둥글게 변해도, 어떤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의 다리가 고무마냥 길어져 마음대로 움직여도, 다리 달린 자명종이 사방을 기어다녀도 신경 쓰지 않는다. 보는 이들의 비현실이 곧 그들의 현실이기 때문에. 그 세상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서. 우리의 자명종이 움직이지 않고 요란한 소리를 내는 것처럼, 팔과 다리가 마구잡이로 길어지지 않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라서다.
무드 인디고는 낭만을 이야기한다. 인연의 시작과 슬픈 끝까지 그토록 낭만적이고 아름다울 수가 없어서 오히려 끝맛이 씁쓸하다.
폐에 핀 수련. 수련을 죽이기 위해 필요한 꽃들. 몸에 대고 있는 것만으로 시들어버리는. 수련을 확인하기 위한 장치. 콜랭이 불량품을 만들어낸 일자리까지. 영화의 후반부에는 온갖 비현실적인 것들이 가득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내내 나는 콜랭의 옆에 서 있었다. 어떤 영화는 영화가 끝남과 동시에 보는 이를 내쫓는다. 개인적으로 무드 인디고는 그렇게 잘 만든 영화는 아니지만, 내가 스스로 콜랭의 곁에서 벗어날 때까지 기다려주는 영화였다. 콜랭과 클로에, 시크 그리고 나. 나는 인물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며 나의 내면을 살펴본다. 어떤 영화는 과거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솔직히 말해서 클로에와의 첫만남에서 콜랭은 썩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공감성 수치를 느끼다 못해 영화를 중간중간 멈추면서 봐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둘은 서로에게 이끌렸고, 다음날 데이트를 했다. 어딘가 이상하면서도 낭만적인 데이트를. 공사 현장에서 구름을 타고 날아다니는 둘은 정말 행복해보였다. 현실과 가장 동떨어져있으면서 인물들의 행복을 잘 느낄 수 있는 장면이 아닌가 싶다.
나는 이 영화를 보기 전부터 그들이 구름 모양의 무언가를 탄다는 걸 알았기에, 이 장면을 봤을 때는 가장 먼저 반가웠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두 번째. 이게 대체 무슨 내용일까 고민하는 게 마지막. 나는 영화의 끝까지 무드 인디고의 독특함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영상미에 시선이 빼앗겨 홀린 것처럼 영화를 보다가도 의미를 찾기 위해 시간을 들였다. 그렇게 했는데도 아직까지 이해할 수 없는 장면도 많다.
실제로 초중반부는 꽤 지루하다. 영화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면서 봤고, 또 이야기가 이렇게 됐는데 이 정도가 남았다고? 라는 생각도 종종 했다. 그러나 색을 잃은 후반부는 나름 몰입하면서 봤다. 내가 콜랭이 된 것처럼 찌푸려진 미간이 펴질 생각을 않더라.
시크와 알리즈에 대해서도 몇 마디 얹자면 보는 내내 시크는 참...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인물이었다. 우상을 좇느라 현실을 뒤로 하고, 그 현실에 속한 알리즈는 상처 받고. 그럼에도 둘은 사랑을 했다. 시크의 우선순위가 우상이었을 뿐. 알리즈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을 하고 싶은 건지 뭔지 돈이 생기면 있는 족족 그 우상한테 부어버리는데 어떻게 계속 만났지?
시크가 죽는 장면... 이 마음에 들어서 여러 번 돌려봤다. 총을 맞은 시크의 머리에서 흐르는 피가 꽃과 비슷한 무언가가 되는 연출이 좋았다. 알리즈는 자신을 위해 파르트르를 죽이고, 시크는 파르트르에 의해 죽는다. 딱 봤을 때는 죽은 줄 알았던 파르트르가 튀어나와 의문이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자아의 실존성'과 관련 있지 않을까 싶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알리즈의 이야기도 궁금하다. 시크의 죽음 이후 알리즈는 어떻게 살았을까. 감옥에 들어갔을까? 아니면 시크의 뒤를 따라갔을까. 그것도 아니면 지금 알리즈는 무엇을 하고 살까.
영화를 다 보고 일상을 살아가던 중 문득 책에서 본 구절이 생각났다. 내가 처음으로 책에 밑줄을 그은 문장이었다.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문장. 무드 인디고와 결이 비슷한, 사랑에 대한 프레드릭 베크만의 정의. 솔직히 이 책과 맞지 않아 읽다 관뒀는데, 다시금 문장을 곱씹으니 책을 끝까지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나면 처음부터 도전해봐야겠다.
생각이 나는 대로 막 쓰다보니 가독성도 떨어지고 내용도 별로인 리뷰가 되어버렸다. 세상 어딘가에는 이런 리뷰도 하나쯤 있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다음에 볼 영화를 찾아야겠다. 이터널 선샤인을 보고 싶은데 보다가 울 거 같아서 고민 중.
사람들은 오베가 세상을 흑백으로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색깔이었다. 그녀는 오베가 볼 수 있는 색깔의 전부였다.-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베크만 中-
에디터 : 고삼_한국코알라
-
-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에 남긴 어떤 것
올해 봄에 팀 마샬의 <지리의 힘> (원제: Prisoners of Geography)을 읽었다. 책 내용을 효과적으로 설명해주는 영어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지리가 인류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개인적으로도 매우 동의하는 주장이라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난다. 중남미와 아프리카에 대해 다루는 부분에서는 특히 유럽인들이 억지로 그어버린 직선의 국경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아프리카는 영국과 프랑스가, 중남미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원래 살고 있던 사람들에 대한 일말의 존중도 없이 통치 편리성만 중시하면서 멋대로 국가의 경계를 만들어버렸다. 둘 중에서도 아프리카는 더 심각한 편이라 아프리카 고유의 기후에 직선의 국경선에 의한 분쟁이 더해져 세계에서 가장 낙후한 지역 중에 하나로 남아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상황이 언제쯤 개선될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아프리카 지도 출처: maps.com
이런 아프리카의 가나 아크라와 케냐의 나이로비가 내 첫 출장지였다.
(Borading Pass와 Kenya Airways)
친구들은 위험한 것 아니냐며 걱정했지만 나는 철없이 가보지 못한 대륙, 아프리카 땅을 밟을 수 있다는 것에만 설레 들떠있었다. 입사 약 1년 만에 떠난 첫 출장, 그리고 안전을 고려해 묵게 될 비싼 5성급 호텔, 아프리카 내에서 이동할 때만 탈 수 있다는 비즈니스석. 철없는 신입 직원을 설레게 할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부끄럽지만 ‘일은 선배가 많이 하겠지’라는 무책임한 생각과 함께. 그리고 중남미 배낭여행하면서 워낙 열악한 환경은 많이 접해봤으니 딱히 걱정이 되거나 두려울만한 것도 없었다.
케냐의 수도인 나이로비는 동아프리카의 대표 도시이다. 심지어 유엔본부가 있는 이 도시는 아프리카에 대해 가질만한 나의 선입견을 다 날려주기에 충분했다. 물론 사무소 소장님께서 좋은 식당, 비싼 카페에 데려가 주신 것을 안다.
(같은 도시라는 게 믿기지 않는 상반된 풍경)
출장 마지막 날, 사무소 소장님께서는 출장 소감을 물으셨다.
“이주임, 아프리카 와보니까 어때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발전하기도 했고 훨씬 좋은데요?”
“사실 이주임이 호텔이랑 사무실만 왔다 갔다 했는데, 사무실이나 호텔이나 다 여기서 제일 동네에 있는 것이라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뭐라 반박할 만한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부끄럽게도 정말 일부분의 모습만 보고 좋다고 말해버렸다. 당시에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매우 낯 뜨거워지는 대답이다. 할리우드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도 내게는 낯 뜨거워지는 대답이다. 영화는 커피 농장을 경영하기 위해서 덴마크에서 온 카렌과 그곳에서 만난 데니스와의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루었다. 케냐에서 현지 촬영을 했다는 이 영화는 드넓은 아프리카의 초원을 보여주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려준다. 흥행에도 성공했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7개 부문의 상까지 탔다.
그런데 이게 이 영화의 전부일까? 커피 농장은 거기 원래 살던 사람들이 경영해야 맞을 텐데, 왜 덴마크인이 여기까지 와서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커피 농장을 운영한 걸까? 러브스토리에 초점이 맞춰져있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유럽인들의 제국주의, 케냐 침략을 미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프리카 전역이 엄청 찌듯이 더울 것이라는 편견과 달리, 나이로비는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날씨가 한국보다도 훨씬 좋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중에서 특히 케냐에 많이 몰려왔던 데에는 이 기후도 한몫했을 듯하다. 영화 원작 소설의 작가이자 실제 주인공인 카렌의 농장이 위치했던 지역도 케냐에서 가장 서늘하고 커피 농사에 좋았다고 한다. 덕분에 이 곳에서 살던 원주인들은 유럽인들에 쫓겨나 다른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카렌이 케냐를 떠나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면서 영화가 끝나기 때문에 제목을 Out of Africa라고 지은 걸까?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제목처럼 유럽인들은 결국 아프리카에서 떠나야(Out)했다. 삶의 터전을 뺏긴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포기하지 않고 독립을 위해 투쟁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케냐와 아프리카에 무엇을 남기고 갔을까. 아프리카에서 내전이 끊이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서로 다른 부족을 인위적인 국경선으로 하나의 국가로 묶어놨기 때문인데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에 이런 상흔만을 남기고 갔구나.
-
- 코고로는 거들 뿐
스포일러 주의!
<명탐정 코난: 척안의 잔상>(이하 <척안의 잔상>)은 10개월 전, 국립천문대 노베야마에 침입한 괴한을 추격하다가 눈사태로 인해 왼쪽 눈을 잃은 야마토 칸스케의 사연을 들려주며 시작한다. 그렇게 10개월이 지난 어느 날, 모리 코고로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전화의 주인은 '와니'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사메타니 코지라는 인물로, 형사 시절의 코고로의 동료였다. 와니는 코고로에게 나가노현에 있었던 눈사태 사고에 대해 알려주고 싶다며 급하게 약속을 잡게 된다. 약속 당일, 공원에서 코고로를 기다리던 와니는 누군가에 의해 총상을 입고 사망하고 만다. 이로 인해 코고로는 친구를 잃은 슬픔과 분노에 차오르면서 다른 형사들과 함께 필사적으로 범인을 추격하려 한다. 그와 동시에 코고로를 따라 현장에 있었던 에도가와 코난은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공안의 도움을 받아 범인을 밝혀내려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명탐정 코난>의 28번째 극장판이다.
시즈노 코분이 떠난 이후, <명탐정 코난> 극장판은 회복기에 들어선 모양새다. 본격적으로 부활의 신호탄을 알린 <명탐정 코난: 할로윈의 신부>(이하 <할로윈의 신부>)를 시작으로 <명탐정 코난: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이하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까지 최근에 나온 극장판들은 과거에 비해 나쁘지 않은 완성도를 이어왔다. 이번에 개봉한 <척안의 잔상> 역시 비슷하다. 이번에도 무난하게 잘 만들었다. 가장 긍정적인 지점은 추리 부분에서 많은 향상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전까지의 극장판들, 그중에서도 완성도가 좋은 영화들조차 추리에서 약점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 <척안의 잔상>의 경우에는 추리에 상당한 공을 들인 것이 눈에 띈다. 소소한 개그처럼 지나갔던 대목(모든 캐릭터들이 코고로에게 왜 코지로를 와니라고 부르는지 의문을 가지는 부분)이 결정적인 단서가 되거나, 중간에 오토모 타카시라는 캐릭터를 추가하여 이전까지의 추리를 꼬는 방식은 근래 극장판에서 찾아볼 수 없는 미덕이다. 다만 캐릭터들이 무더기로 쏟아지다 보니 용의자를 특정하기 어렵고, 여러 사연들이 얽혀 있는 각본의 구조 때문에 추리에 집중하기 힘들다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추리 부분은 가까스로 회복했지만 여전히 회복되지 않은 구간도 있다. 바로 액션이다. 물론 이제 이 시리즈에서 (정도는 지킨) 과장된 액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는 일이다. 아예 제작진이 극장판의 전매특허로 내세우려는 심상인지, 뻔뻔하게 밀고 가는 듯한 태도가 몇 년 간에 걸쳐 여실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포부는 좋다. 그러나 초반부에 나오는 액션은 이를 감안해도 실망스럽다. 초반에 코난이 범인을 쫓기 위해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추격하는 장면이 있다. 여기서 코난이 오토바이를 향해 정면으로 돌격하는 부분이나, 공중에서 두 바퀴를 돌고 축구공을 차는 모습이 나오는데, 지나치게 과장된 것은 둘째치더라도 너무나 유치한 연출에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초반의 액션을 지나고 나면 후반의 액션은 상당히 흥미진진하게 연출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범인의 이동식 관측 차량을 쫓던 코난과 코고로가 함께 "절대 놓치지 않겠다."라고 말하며 둘의 모습이 겹쳐지는 장면, 코고로가 범인의 차량을 향해 결정적인 한 발을 쏘는 장면은 코고로의 서사를 따라온 관객이라면 짜릿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하게 연출되었다. 이전까지 폭탄을 쓰거나, 비행기 위에서 칼싸움을 하는 액션보다 이런 식의 깔끔한 하이라이트를 원했던 관객에게는 나름의 갈증을 해소시켜준 대목이기도 하다.
캐릭터의 경우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고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이렇게 갈리게 된 이유는 이야기 때문인데, <척안의 잔상>의 각본은 전반적으로 난잡하다. 추리를 위한 복선도 넣고, 캐릭터들 활약도 챙기고, 액션도 넣고, 주요 인물의 드라마도 넣다 보니 내용이 산만해진다는 점은 다른 극장판들과 비슷하지만 <척안의 잔상>은 이게 유독 심한 편이다. 중심인물을 무려 네 명이나 세팅한 것이 원인이다. <할로윈의 신부>는 아무로 토오루, <명탐정 코난: 흑철의 어영>(<이하 <흑철의 어영>)은 하이바라로 스포트라이트를 줘야 할 인물이 명확했는데 <척안의 잔상>의 경우에는 나가노 3인방에 모리 코고로까지 합세해버렸다. 이 때문에 피해를 보는 캐릭터가 생겼다. 나가노 3인방은 드라마가 상당히 잘 표현됐지만, 코고로는 작품의 중심을 차지하게 될 거란 초반의 기대와 달리 중반 이후부터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되다가 결말부에 가서야 잠깐 존재감을 발휘하고 활약이 끝나버린다. <명탐정 코난: 수평선상의 음모>처럼 코고로가 직접 추리를 해서 사건을 해결하는 식의 활약은 안타깝게도 이번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챙겨야 할 캐릭터들이 너무 많으니 마땅히 스포트라이트를 줘야 할 캐릭터를 챙기지 못한 각본 탓이다. 차라리 나가노 3인방과 코고로의 이야기를 별개의 극장판으로 제작했으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그래도 <척안의 잔상>의 혼란스러운 각본을 지탱하는 것은 '상실'이라는 키워드다. 작중 캐릭터들 중 대부분이 주변 사람을 잃은 것으로 인한 상실감으로 가득하다. 나가노 3인방 중 한 명인 타카아키는 동생 히로미츠를 잃었고, 코고로는 절친인 와니를 잃었다. 작중 피해자로 등장하는 에이조는 자신의 딸 마키를 잃었고, 마키와의 혼인을 약속한 아츠노부 역시 상실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범행을 저질렀다. 나가노 3인방 중 남은 인물인 칸스케와 유이는 실질적으로 누군가를 잃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서로를 잃어버렸다고 봐도 될 만큼 서로 간의 관계에 흠집이 나 있는 상태다. <척안의 잔상>은 이러한 캐릭터들이 서로 아픔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그럼에도 상실을 딛고 일어서는 용기'라는 주제로 나아간다. 이러한 대비가 범인 아츠노부와 그에 대적하는 인물들을 통해 형상화되어 있으며, 결말부에 경찰의 직업윤리를 읊는 장면에서 이러한 주제를 훈계에 가까운 수준으로 강하게 드러낸다. 물론 여타 상실을 그리는 영화에서는 수도 없이 반복된 주제이지만 이걸 작품의 주요 소재인 '사법거래'라는 사회 문제와 엮어서 하니까 나름 색다르게 다가온다. <흑철의 어영>에서 인종주의 텍스트가 발견된 것처럼 확실히 최근 들어 이 시리즈가 시대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자세가 엿보인다.
<명탐정 코난: 척안의 잔상>은 충분히 만족스럽게 볼 수 있는 재미있는 극장판이다. 최근작들과 비교하면 <할로윈의 신부>, <흑철의 어영>보다는 살짝 아쉽지만 <100만 달러의 펜타그램>보다는 나은 완성도로 나와준 것 같다. 이전의 문제점들을 차례차례 해결하고 있는 노력에 대해서는 칭찬이 아깝지 않지만, 다음 작품은 무난한 정도를 넘어서 수작의 완성도로 나와주기를 바란다. 이제 엄청난 극장판 하나 보여줄 때도 되지 않았나.
별점: ★★★
-
-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을 지탱한 사랑의 진면목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촉망받는 작곡가 겸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인 '레너드 번스타인'(브래들리 쿠퍼). 우연히 뉴욕 필하모닉 지휘를 맡게 되면서 스타덤에 오르기 시작한 그는 어느 날 파티에서 '펠리시아'(캐리 멀리건)를 만난다. 마에스트로가 되고 싶은 남자와 배우를 꿈꾸는 여자는 첫 만남에 눈이 맞는다. 사랑이 꽃피면서 둘은 승승장구한다. 한 명은 미국을 상징하는 지휘자이자 작곡가로서, 다른 한 명은 미국의 TV 드라마를 대표하는 배우로서.
하지만 모든 좋은 일 뒤에는 나쁜 일이 따르는 법. 그들의 결혼 생활은 점점 파국으로 치닫는다. 양성애자였던 레너드는 매일 같이 남자 파트너를 찾아다니고, 펠리시아는 물론 큰 딸 '제이미'(마야 호크)도 그의 애정행각을 좀처럼 견디지 못한다. 그와 동시에 레너드는 음악적으로도 원하던 만큼의 성취를 이루지 못했다는 좌절감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전기 영화가 아닌 초상화를 꿈꾸다
브래들리 쿠퍼가 주연, 연출, 각본, 제작을 맡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마에스트로 번스타인>는 미국의 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인 레너드 번스타인의 생애를 다룬다. 이 작품은 일견 모범적인 전기 영화다. 한 인물의 생애를 잘라서 다시 이어 붙이는 아론 소킨 스타일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연대기 순으로 레너드 번스타인의 커리어 시작부터 그의 말년까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마에스트로 번스타인> 속 번스타인의 삶은 실제 번스타인의 일생과 차이가 크다. 매카시즘의 피해자로서 활동에 타격을 입은 아픔도 없고,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뮤지컬인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에 관한 에피소드도 없다. 그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의 관계, 지휘자 세계의 더 내밀한 이야기도 등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를 스타덤에 올린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도 간략하게만 언급하고 넘어간다.
그렇기에 <샤인> 같은 음악 영화를 생각했다면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기대에 못 미치는, 그저 평범한 전기 영화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에게는 예상외의 매력이 있다. 인물을 있는 그대로 찍는 사진 대신, 인물의 숨겨진 내면을 최대한 끄집어 내 자기만의 화법으로 그려낸 초상화를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그 중심에는 번스타인의 아내, 펠리시아가 위치한다.
캔버스 번스타인, 연필 펠리시아
그림을 그리려면 캔버스가 있어야 하고, 그 캔버스를 스케치로 채우려면 연필이 있어야 하기 마련.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번스타인이라는 캔버스에 펠리시아라는 연필로 이야기를 그려낸다. 실제로 영화는 그들의 낭만적인 사랑과 굴곡진 결혼 생활로만 러닝타임을 가득 채운다. 번스타인의 생애 중 펠리시아와 함께 한 순간에만 숨결을 불어넣은 셈이다.
이 지점은 얼마 전 개봉한 <나폴레옹>을 연상시킨다. 물론 번스타인의 삶이 나폴레옹만큼 극적이지는 않지만, 화법 자체는 유사하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속 조제핀이 나폴레옹의 행운을 상징했듯이, 레너드에게 펠리시아는 일생의 기회를 뜻하는 듯 보인다. 그녀를 만난 후 레너드는 커리어가 풀리고, 그녀와의 관계가 꼬이는 순간부터 다방면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다만 조제핀과 펠리시아의 역할은 미묘하게 다르다. 조제핀은 수동적이다.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의 빛을 그저 반사하는 데서 그친다. 반면에 펠리시아는 주도적이다. 그녀는 밖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그러나 진정한 번스타인에 더 가까운 자아를 끄집어낸다. 더 나아가서는 그녀 자체가 레너드의 또 다른 자아를 대신하는 듯 보이기까지 한다. 이는 브래들리 쿠퍼가 로맨스로써 번스타인의 내적 갈등을 시각화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번스타인의 양면성을 스케치하다
이때 펠리시아라는 연필이 캔버스에서 끄집어낸 번스타인의 본질은 양면성이다. 브래들리 쿠퍼는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번스타인의 다재다능함에 주목한다. 그는 다재다능함을 양면성으로 규정한다. 실제로 극 중 번스타인은 인터뷰마다 비슷한 말을 한다. 그는 세상과 사적으로 소통하는 작곡가와 공적으로 소통하는 지휘자의 자아를 함께 갖추기 어렵다고 자조한다. 외향성과 내향성이 동시에 존재하면 곧 정신분열을 야기할 테니까.
그런데 레너드에게는 또 하나의 양면성이 있다. 바로 그의 성적 지향이다.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번스타인이 양성애자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임시로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아야 한다는 전화를 받을 때 그의 옆에는 동성 애인이 누워있다. 그러니 겉으로 보기에 그는 자유분방하고, 어떤 면에서는 문란하기까지 하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 여인만 사랑한다. 그 여인이 죽을 때까지 그녀에게만 의지한다.
쿠퍼는 이 공통점을 놓치지 않는다. 레너드의 연애사와 정신분열을 하나로 잇는 스케치를 그려 나간다. 그는 항상 펠리시아와 싸운다. 매번 약속하지만, 파티 때마다 새로운 동성 애인을 찾아 나서기를 반복한다. 이는 작곡가와 지휘자의 갈등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마음 한편에 항상 작곡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휘자로서 화려하게 주목받고 명성을 쌓는 일을 그만두지 못한다.
그가 대표작 '미사'를 완성한 순간은 이 갈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갓 완성한 악보를 자랑하는 순간, 펠리시아는 누구보다도 기뻐한다. 심지어 레너드 본인보다도 좋아한다. 갑자기 수영장에 몸을 던질 정도로. 얼핏 보면 과한 리액션이다. 그러나 펠리시아와 지휘자 레너드의 자아를 함께 생각하면 자연스럽다. 동성애자 지휘자 번스타인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작곡가와 아내가 오랜만에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순간이니까.
로맨스로 채색해 초상화를 완성하다
스케치가 끝났다면, 이제는 색을 칠할 차례다.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흥미롭게도 직관과 반대되는 형태로 색을 칠한다. 펠리시아와의 첫 만남부터 행복한 신혼 생활까지의 전반부는 흑백으로 남겨둔다. 반면에 아내와의 갈등이 본격화되고, 결혼 생활이 파국을 맞는 중후반부는 컬러로 전환된다. 아름다운 기억은 흐릿한 흑백 사진에 남겨두고, 그들의 갈등을 오히려 더 첨예하고 아프게 묘사한다.
그 덕분에 번스타인이 내적 갈등을 봉합하는 과정도 오히려 더 생생히 전해진다. 그가 1973년 영국 엘리 성당에서 말러 교향곡 2번 연주를 지휘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는 이혼 직전의 부부가 서로의 필요성을 겸허히 인정하고 용서를 비는 순간이다. 동시에 수많은 가능성에 마모되던 한 예술가가 마침내 방향성을 잡았음을 보여주는 자리이기도 하다. 번스타인의 지휘가 어느 때보다 열정적이고 광적인 이유다.
결말은 남편과 아내, 작곡가와 지휘자가 어떻게 화해했는지를 함축적으로 암시한다. 번스타인은 펠리시아의 말을 인용한다. "내면의 여름이 노래를 멈췄다면 모든 노래가 멈춘 거야. 모든 노래가 멈췄다면 작곡은 끝이지." 그는 한 마디를 덧붙인다. 아내가 죽은 후 소리가 약해졌고, 어쩌다 한 번이기는 하지만 여름은 여전히 노래한다고. 로맨스가 번스타인이라는 마에스트로를 완성시켰음을 간단하지만 명확하게 짚어준다.
그렇기에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평범한 로맨스, 전기 영화 이상의 작품이다. 많은 이야기를 생략해도 레너드 번스타인이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머릿속으로 충분히 그려낼 수 있으니까. 오히려 그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을 때 영화가 만들어 낸 캐릭터로서 번스타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이처럼 매력적인 초상화를 보고 있으면 왜 이 작품이 제80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 후보였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아름다운 기술적 성취
이에 더해 기술적 성취와 완성도는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다. 인간 버스타인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가능한 수단을 총동원한다. 일례로 다양한 극형식을 차용해 그의 화려한 음악적 재능은 알려준다. 뮤지컬과 연극 형식을 빌려 사랑을 꽃피우는 순간을 연출하 대목처럼.
그간 알려지지 않은 브래들리 쿠퍼의 연출 능력이 돋보이는 순간도 많다. 컬러에서 흑백으로, 흑백에서 컬러로 전환되는 순간, 번스타인의 자취방에서 카네기 홀로 공간이 연결되는 장면의 유려함은 감탄을 자아낸다. 서사의 전개는 물론 시대 상황까지 반영해 흑백과 컬러를 전환하고 화면비를 조정할 때는 순간 클래식한 <라라랜드>를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분장술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브래들리 쿠퍼라는 배우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청년부터 노년까지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냈다. 캐리 멀리건의 변화 역시 인상적이다. 아직 <드라이버>나 <위대한 개츠비> 속 캐리 멀리건을 떠올리는 이들에게는 특히나 놀랍다. 물론 연기력으로 두 말하면 입이 아픈 배우의 열연 덕분에 분장 효과가 더 빛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음악을 빼놓을 수 없다. 뮤지컬과 재즈, 클래식을 오가면서 각 장면과 상황의 감정과 변화를 암시한다. 엘리 성당 시퀀스에서 느낄 수 있듯이 고전적인 영상미와 번스타인이 지휘한 음악의 조화가 클래식한 흥취를 한껏 북돋는다. 서로 다른 장르의 음악 사이에서도 질서를 찾아내는 솜씨도 인상적이다. 괜히 연출 데뷔작이 음악 영화가 아니구나 싶다. 종합하면, 넷플릭스가 오래간만에 사고를 친 듯 보인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생략, 압축, 추상으로 그려 낸 마에스트로의 사랑
-
- 우리들의 교복시절 - 아는 맛이 더 무서운 법, 작지만 찬란한 대만 청춘 영화의 뉴 제네레이션
“우리 교복 하나씩 교환하자!” 엄마의 강요로 대만 최고의 명문인 제일여고 야간반에 입학하게 된 ‘아이’는 짝퉁 엘리트가 된 것 같아서 부끄럽다. 학교의 전통에 따라 같은 책상을 공유하는 주간반의 책상 짝꿍 ‘민’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가까워지던 중, ‘민’이 주간반과 야간반의 교복을 교환해 함께 땡땡이를 치자고 제안한다. 평범한 자신과는 달리 공부도, 놀기도 잘하는 ‘민’과 어울리며 다채로운 세상을 경험하던 어느 날, 첫눈에 반한 제일고의 인기남 ‘루커’를 ‘민’ 역시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두 사람과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것만 같은 못난 열등감에 ‘루커’의 앞에서 주간반 행세를 시작하는데...
-
-
- 영화 <어시스턴트> 메인 예고편
꿈에 그리던 영화사에서
보조 직원으로 일하게 된 ‘제인’
어떤 일도 능숙하게 처리하는
그녀의 일상은 평범해 보이지만,
사소한 사무실 정리부터 상사의 개인적인 스케줄 관리까지
하루 종일 몰아치는 잡다한 업무에 지쳐간다.
그러한 일상이 반복되던 중
어느 날, 신입사원으로 채용된 한 여성이 찾아오면서
회사 내 부조리함을 마주하게 되는데…
-
- 넷플릭스 <전, 란> 공식 예고편
왜란이 일어난 혼란의 시대, 함께 자란 조선 최고 무신 집안의 아들 ‘종려’(박정민)와 그의 몸종 ‘천영’(강동원)이 ‘선조’(차승원)의 최측근 무관과 의병으로 적이 되어 다시 만나는 이야기 넷플릭스 영화 《전,란》 10월 11일,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