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2-12-12 07:48:08
경이로운 생生의 의지로 창조해낸 ‘페르시아어’
〈페르시아어 수업〉 리뷰
6★/10★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유럽, 나치의 호송차 한 대에 유대인 여럿이 타 있다. 호송차 안에서 옆에 앉은 유대인 남자와 대화를 나누던 ‘질’은 남자의 간절한 요청에 자신의 샌드위치 반쪽과 그가 가진 페르시아어 책을 교환한다. 나치에게 잡혀가는 와중에 책이 무슨 소용인가 싶기는 하지만 초판본이라 귀한 책이라는 남자의 말과 그가 너무 배고파 보인다는 점이 질의 마음을 약하게 했다. 이때만 해도, 질은 샌드위치 반쪽과 교환한 페르시아어 책이 자신의 목숨을 구하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호송차가 한적한 숲속 어딘가에 멈춰 선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가방을 한쪽으로 몰아놓고 넓은 구덩이 앞에 일렬로 세운다. 그러고는 대수롭지 않은 일을 처리하듯 총을 쏜다. 그렇게 무리의 절반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는다. 이제는 질의 차례다. 질은 총을 맞기도 전에 쓰러지는 척 연기하지만 나치 병사는 그런 질을 가소로워하며 겁박한다. 바로 그때, 질의 목숨을 보전케 한 거짓말이 시작된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다, 나는 페르시아인이다.” 품속의 페르시아어 책이 그 근거다.
페르시아어 책이 질을 살릴 수 있었던 건 독일군 대위 코흐의 꿈 때문이다. 병사들의 식사를 담당하는 코흐는 전쟁이 끝나면 테헤란에서 식당을 열고 싶다는 꿈이 있다. 그래서 늘 페르시아어를 배우기를 원했고, 병사들에게 페르시아인을 데려오면 적절한 보상을 하겠다고 제안해둔 상태였다.
이제 위험한 동행이 시작된다. 코흐도, 질을 코흐에게 데려온 나치 병사도 질이 진짜 페르시아인인지 의심한다. 독일군 부대에 페르시아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진위를 따지기는 어렵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의심 가는 구석이 보인다면 바로 목숨을 잃거나 끔찍한 노역을 견뎌야 한다. 질은 코흐에게 하루에 네 개씩 가상의 페르시아어 단어를 알려주며 임기응변으로 버텨나간다. 코흐뿐만 아니라 질도 이 모든 걸 기억하고 외워야 한다. 이전 페르시아어 수업을 완벽하게 기억해야 의심받지 않고 더 안정적으로 미래를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흐와 병사들의 의심이 시도 때도 없는 시험으로 이어져 질은 포기하기 직전까지 몰린다. 임기응변만으로 도저히 이 상황을 지속할 수 없겠다는 절망감에 빠진 것이다. 그런 질에게 페르시아어책에 이은 두 번째 구원이 찾아온다. 조금씩 질을 신뢰하기 시작한 코흐가 그에게 수용소에 수감된 유대인 명단을 정리하는 일을 맡겼기 때문이다. 질은 유대인들의 이름에서 가짜 페르시아어 단어를 만들어낼 규칙을 찾는다. ‘마르크스(Marx)’라는 이름에서 ‘M’을 빼고 ‘아르크스(arx)’라는 단어를 창조하는 식이다. 나치에게 희생된 유대인 명단이 질의 생명을 구하는 아이러니로 이어지는 것이다.
코흐와 질의 불안한 동행은 꽤 오랫동안 이어진다. 사실 코흐 역시 유대인일지도 모르는 페르시아인을 끼고돈다는 부대 내 소문 때문에 곤란했던 적이 있는데, 코흐는 페르시아어를 배우고 싶다는 간절함으로 이를 감내하면서까지 질을 감싼다. 수용소 상황이 변해 질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야 하거나 여러 위기에 처할 때도 코흐가 질을 구해준다.
어느덧 수천 개의 단어를 암기한 코흐가 ‘페르시아어’로 시를 지어 질에게 들려주는 장면이 있다. 질은 더 나아가 이제는 대화 연습이 필요할 때라며 과감하게 가상의 페르시아 단어로 짤막한 대화를 시도한다. 존재하지 않는 언어를 기반으로 한 사람은 꿈과 우정을 키우고 다른 한 사람은 생명을 연장한다. 질이 죽은 유대인의 명단으로 목숨을 구하는 첫 번째 아이러니에 이은 지독한 역설이다.
인간의 삶이 거짓 위에서 어디까지 지탱될 수 있는지를 가늠해보는 건 이 영화를 보는 재미 요소 중 하나다. 종전 후 테헤란으로 향하는 입국 심사에서 마침내 진실을 알고 폭발하는 코흐와 가짜 페르시아 단어를 만들면서 기억해둔 포로 명단을 연합군에게 알려주는 질의 모습은 거짓 위에 구축된 삶을 단순한 선악 이분법으로 재단할 수 없음을 보인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영화가 재현하는 둘 사이의 긴장감의 크기가 한껏 더 증폭되기도 한다. 다소 전형적인 구석이 있는 영화임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페르시아어 수업〉은 간절한 생의 의지에서 비롯한 거대하고 처절한 아이러니를 맛볼 수 있는 영화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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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아이캔스피크>
* 이 영화는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간단한 감상을 원하시는 분은 처음 두 단락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 아래부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니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은 영화를 감상하신 후에 다시 보러 와주시기 바랍니다.
간만에 좋은 영화를 봤다.
이 영화는 말하자면 아주 잘 차린 가정식이라는 인상을 준다. 너무 맵거나 짜지도 않고, 적당히 감칠맛이 도는, 거창하지는 않지만 맛있고 자꾸만 생각나는. 그리고 건강하고 배부른 한 끼 식사.
성급한 일반화일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영화를 보고나서 이토록 개운한 기분으로 영화관을 나서 본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이 영화는 한국민들에게 아주 중요한 사건을 다루고 있으면서, 그것을 자극적이지도, 신파적이지도 않게 완급을 잘 조절했다. 사건의 진행은 나름의 개연성을 가지고 있고, 인물들 간의 관계도 촘촘한 편이다. 영화 중간 중간에 숨어 있는 위트들은 어떤 사람도 공격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다. 그래서 편하다.
아래에서는 영화 전반에 관한 간단한(혹은 두서없는) 감상을 다룰 것이다.
1. 인간적인 원칙주의자들의 만남이 영화의 두 주인공은 철저한 원칙주의자의 양 끝단에 서 있다. 나옥분(나문희 분)은 도깨비 할머니라고 불릴 정도로 구청 직원들과 시장 사람들을 벌벌 떨게 하는 극성스러운 민원인이며, 유민재(이제훈 분)는 그런 옥분을 상대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서류부터 제출하시라'는 말을 하거나, 자신보다 높은 지위의 상대에게 당당하게 그의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원칙주의적인 직원이다.
이런 원칙주의자들은 사실 적이 많다. 사람들은 원칙에 벗어나길 좋아하니까. 옥분에게는 시장과 구청 사람들이 그렇고, 민재에게는 그의 하나 뿐인 동생이 그렇다. 그들이 겪는 갈등은 원칙을 지키려는 자와 그것을 피해 가려는 자의 대립에서 피어나게 된다. 카메라는 그들의 이런 모습을 먼저 조명한다.
언뜻 보기에 옥분과 민재, 이 두 사람은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도 보인다. 옥분은 할 일 없어 허구한 날 구청을 찾아와 민원이나 넣는 극성스러운 할매고, 민재는 토익 950점에, 업무처리까지 탁월해 구청장에게까지 인정받는 능력있는 인재다. 그런 민재는 정도도 모르고 구청 직원들을 성가시게 하는 옥분이 못마땅하다. 더군다나 뜬금없이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억척스럽게 달라 붙으니 그녀에 대한 인상이 좋을 리가 없다. 그러나 사실 이런 원칙주의자들은 오히려 합이 잘 맞기 마련이다. 사실 상 두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원칙주의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옥분의 원칙주의는 그녀의 인간에 대한 애정과, 불의에 대한 저항감에 기인한다. 무척 깐깐하고 무작스러워 보이지만 사실 그녀는 사람을 너무 좋아한다. 설령 그것이 오지랖이고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욕을 먹을지언정 그녀는 그 뜻을 굽히지 않는다.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불의와 불합리함들이 사람을 어떻게 다치게 하는지를 그녀는 이미 겪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억척스러움이, 마냥 밉게만 보이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그녀의 사정에 있다. 그녀의 결핍, 그러니까 가정의 부재와 아픈 과거로 인한 상처는 도리어 그녀를 강하게 만들었다.
민재의 원칙주의는 다소 엘리트주의적으로 보인다. 옥분이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할 때 일부러 어려운 단어들을 숙제로 내주고 외워오라고 하거나, 건물 재건축(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과 관련된 일로 구청장에게 편법을 제안하는 것은 얄밉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모습은, 타고난 본성일 수도 있겠지만, 어린 동생을 홀로 부양해야 하는 그의 사정과도 크게 떨어져 있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부모님이 부재한 상황에서 그는 좀 더 단단해지고, 좀 더 능청스럽게 그의 삶을 살아나가야 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옥분의 등장은 그를 난감하게 한다.
결국 두 사람의 원칙주의는 그 성질이 다소 달라보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한다. 두 사람은 인간적이다. 이러한 원칙주의와 인간미는 두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게 하면서, 동시에 서로에게서 닮은 점을 찾고,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이는 관객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두 주인공들의 만남을 애정 어린 눈으로 감상할 수 있게 돕는다.
2. 나는 말하고 싶다!
민재와 옥분의 기나긴 실랑이는 민재가 그녀의 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서 끝이 난다. 민재는 온갖 재치있는 교수법을 동원해 그녀를 효과적으로 가르치고, 열정적인 학생인 옥분은 그를 통해 아주 유창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훌륭한 한 사람의 영어 화자로 거듭난다.
이러한 모습은 언뜻 많은 영화에서 그려온 멘토와 멘티의 이야기들을 떠올리게 한다. 재능은 있지만 상황은 여의치 못한 제자가 좋은 스승을 만나서 그의 꿈을 이룬다는 플롯은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다. 말하자면 전형적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좀 더 특별한 것은, 단순히 영어를 능란하게 구사하는 것이 옥분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영어는 말하자면 수단이다. 그녀에게는 많은 동기가 있다. 영어를 할 수 있어야 먼 타지에서 떨어져 사는 그녀의 남동생과 소통할 수 있고, 세계에 그녀와 그녀의 벗들이 겪었던 억울한 사연을 알릴 수도 있다. 그렇기에 그녀는 더 절실했고, 더 열정적이다. 민재가 한 일은, 그런 그녀를 살짝 보조(Nudge)해준 것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재는 아주 좋은 교사다. 그는 학습자의 수준에 맞춰 그녀에게 필요한 것을 적절하게 파악해 가르쳐주는 방법을 알고 있다. 노래를 통해 가사를 외우는 것은 꽤 구시대적인 교수학습법의 일종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효과적이다. 그의 이런 모습은 옥분이 먼저 찾았던 학원 강사의 모습과 대비된다. 그러나 강사의 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반에는 너무 많은 학생이 있었고, 따라서 학생 개인에게 관심을 두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 바람직한 방법은 학원에서 그녀를 위한 특별반을 마련해주는 것일 텐데, 학원의 입장에서는 그것은 수지가 맞지 않는 일이므로 그다지 끌리는 조건이 아니다. 그러므로 영어 과외를 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최적의 환경인 셈이다. 사실 전문 과외 선생도 아닌 민재를 영어 과외 선생으로 들인다는 것 자체가 좀 넌센스이기는 하지만 영화적인 장치로 이해해 보자.
사족 같이 덧붙이자면, 사실 그녀는 이미 상당한 영어 실력의 소유자다. 그녀는 영어학원에서 민재와 원어민 화자가 대화하는 것을 얼추 이해할만큼 능력이 좋다. 영어를 차치하더라도, 그녀는 각종 민원을 꼼꼼하게 지적해 제출할 정도로 법에 대해서도 잘 아는 편이다. 그녀는 단순히 노력만 열심히 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아주 영민하고 또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그녀는 그녀의 잘못을 잘 시인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줄 안다. 이는 좋은 학습자의 자세이며, 그녀가 끊임 없이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임을 시사해준다.
한편으로 드는 생각은, 그녀가 만약 그녀의 아픈 과거가 아니었더라면, 어쩌면 더 많은 것을 꿈꿀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너무나 가슴아팠다. 그러나 현실의 그녀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충분히 멋있기 때문에, 너무 아파하지만은 않을 수 있었다.
3. 사건이 아닌, 인간 나옥분
이 영화에서 특히 높이 평가하는 것 중 하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그녀를 단순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사건'의 대상이 아닌, 그러한 아픈 과거를 지닌 한 사람의 인간의 이야기를 다루고자 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녀는 누군가의 어머니도, 아내도 아니다.
물론 이는 그녀의 아픈 관거에 기인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점은 오히려 그녀를 누군가의 보조자가 아닌, 그녀의 삶의 당당한 주체로서 바라보게끔 한다. 그녀는 매일 같이 구청을 찾아 또 하나의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는 한 사람의 영웅이자, 정심과 진주댁에게는 소중한 벗이, 그리고 민재와 그의 동생에게는 의지를 하면서도 또 의지가 되는 사랑스러운 이웃이자, 새로운 가족이 되어 준다. 비록 그녀는 일제에 의해 그녀의 삶의 일부를 강제로 빼앗긴 적이 있었지만, 그래서 남들은 다하는 시집도 가지 못하고 속을 앓으며, 죄인처럼 스스로를 숨기면서 살아가야 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녀의 의지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을 해 나가며 살아간다.
영화의 카메라는 그녀의 이러한 모습을 조심스럽게 쫒아간다. 관객은 우선 한 사람의 인간인 나옥분을 조명하고, 그녀의 삶을 하나씩 나열해 나간다. 그리고 그것을 천천히, 강압적이지 않게, 개연성있게 그녀가 가지고 있는 아픔으로 끌고 간다. 그리고 그러한 아픔을 무대의 전면으로 내보내면서 소위 '위안 부 피해자'의 문제가 단순히 우리와 동 떨어진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가장 내밀한 이웃에게 벌어지는 일일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이 겪는 아픔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3. 우리에게는 우리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이웃들이 있다.
옥분이 스스로가 위안부 피해자임을 신문을 통해 알렸을 때, 그녀의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그녀를 쉬쉬하고 그녀의 아픈 과거를 덮으려고만 했던 그녀의 어머니와 그 시대의 옛날 사람들과는 다르게, 사람들은 좀 뻣뻣하고 어색하지만 그럼에도 애정어린 방식으로 그녀의 아픔에 함께 고통스러워하고, 그녀를 돕고자 애쓴다. 그녀를 끌어 안는 진주댁과 민재의 모습, 그리고 몰래 문틈에 돈봉투와 편지를 끼워 넣고선 먼 발치에서 허리 굽혀 이사하는 족발집 처녀, 그리고 증언을 위해 미국으로 가는 그녀에게 이것저것 많은 선물을 챙겨주는 다른 시장 주민들이 그러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우리 사회의 이웃들의 모습은 그녀가 위안부 증언대에 서지 못할 위기에 처했을 때 다시금 나타난다. 민재를 중심으로 하여 구청 직원들과 주민들로부터 시작된 탄원서는 국민적인 관심을 이끌어 그녀가 그녀의 말을 할 수 있게끔 돕는다. 이러한 전개는 영화 '마션'에서 보았던 것과 또 조금 다른, 한국적인 인간미가 우리 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것 같은 기분 좋은 쾌감을 안겨준다.
인생은 때론 고달프고, 때론 원망스러울 정도로 야박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 안에는 남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를 돕고자 하는 인간애가 있다. 이 영화는 그런 것을 조명한다. 다소 식상한 전개임에도 이것이 싫지 않은 이유다.
4. 사이다 썰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해피엔딩
결국 옥분은 친구인 정심의 소원을 위해, 그리고 그녀가 그녀 자신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해, 미국으로 가 위안부 피해자 사건이 실존함을 세계에 알린다. 그녀의 증언은 충격적이면서 감동적이다. 그녀는 일본군에게 무조건적인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조목조목, 그녀의 억울함을 논리적으로 토로한다. 그녀가 한 사람의 증언자로 나섬으로써, 그녀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원칙주의적 면모의 사연을 이해하게 되고, 그녀는 그녀 스스로에게 떳떳한 사람으로서 거듭난다. 그리고 그녀의 아픔으로만 남았던 사건은 세상에 공식적인 범죄로서 공표된다.
건물 상가를 철거하려던 건물주와 시장 주민들(사실 주민'들'이라고 말하기는 좀 어렵다. 나서서 해결하고자 했던 인물은 여태 옥분 하나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만이 유일한 민원인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영화 표면상에 나타난 것은 그렇다.)의 갈등은 민재의 중재를 통해 잠정적으로 중단된 것처럼 보인다.
엄밀히 말하면, 이건 시원스러운 '사이다 썰'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일본은 아직까지도 그들의 선조들이 벌인 만행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이러한 까닭에 이 이야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현재 진행형의 것으로 머문다. 또, 건물 철거 건도 사실은 해결된 것이 아니다. 영화는 건물주가 그의 고집을 철회하겠다 하는 장면 같은 것은 집어 넣지 않았다. 다만 유예될 뿐이다.
이렇듯 영화를 이끌어 가던 두 가지 큰 사건은 사실 상 명확하게 끝맺음 지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화장실을 갔다가 볼 일을 시원스레 마무리하지 못한 듯한 찝찝함은 남아 있지 않다. 왜일까? 그것은 옥분과 민재라는 인물이 이러한 사건들을 언젠가는, 조금씩, 설령 그것이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더라도 그러한 불의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그만큼 믿음직스럽고, 사랑스럽다.
그리고 사실, 이 두 가지 큰 사건을 제외한다면, 이 영화의 자잘한 사건들은 꽤 순조롭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옥분과 구청 직원들, 시장 사람들과의 갈등, 그리고 민재와 민재 동생의 갈등은 사그러들었고, 옥분은 또 다른 증언을 준비하고 있으며, 민재는 준비 중이던 7급 공무원이 된다. 희망적이다.
5. 좋은 배우들, 좋은 연출. 삼시 세끼 먹어도 좋은 영화이제훈과 나문희의 조합, 정말 좋다. 나문희는 우리네 삶 속에서 일상적으로 만나는 할머니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냈고, 이제훈은 그런 그녀의 훌륭한 보조자이자, 그 개인의 이야기에서는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고, 그리고 개선해나갈 줄 아는 입체적인 인물로 잘 소화해냈다.
연출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언급했으므로 더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겠다. 눈물짓게 되는 장면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는 불쾌하지 않다.(불쾌한 신파의 한 예로, '7번방의 선물'은 너무나 고통스럽게 관객의 눈물을 쥐어 짠다.) 억울해서 마지못해 짜내는 종류의 눈물이 아니다. 그것은 순수하게 그녀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민, 그리고 감동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이다. 좋은 눈물이다. 필자는 영화관에서 우는 것을 사실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영화라면, 충분히 울 가치가 있다.
이 영화는 여러 사건을 차근차근 놓아서 하나의 큰 사건으로 끌고 가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과정은 지루하지 않다. 뒷 이야기가 자꾸만 궁금해진다. 뻔하지만 뻔하지 않다. 물론 옥분과 민재의 만남을 위한 장치들(가령 민재의 동생과 영어 학원에서의 만남)나, 옥분을 둘러싼 사건들이 희망적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다소 인위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이 정도는 애정어린 시선으로 봐줄만 하다. 중간 중간에 담긴 위트는 재치있다. 재미있는 영화가 되기 위해서 차별과 혐오를 담아야 한다는 것은 괴변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 영화는 몸소 증명해준다. 그것이 없어도 충분히 영화는 재미있을 수 있다. 만약 건강한 영화의 교과서가 필요하다면, 나는 자신 있게 이 영화를 추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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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나은 커뮤니케이션으로
수평적 교환을 통한 소통의 성취
현대 사회 구성원 가운데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유동하는 정보들과 부유하는 자의식이 어지럽게 얽혀있는 불안정한 사회에서 나를 둘러싼 다른 존재와의 소통은 매우 중요하다. 사회에서 인간은 고립된 존재가 아니므로, 늘 누군가와 소통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외계인과 인간의 소통을 그리는 다양한 텍스트들은 소통을 둘러싼 맥락 변화에 수반되는 자연스러운 문화적 징후이다. 드니 빌뇌브의 SF 영화 <컨택트(Arrival)>(2016)에서 외계의 존재를 상대하는 임무를 맡은 웨버 대령은 “그들이 뭘 원하고, 어디서 왔는지” 반드시 알아내야 한다며 언어학자들을 다그친다. 상당수의 인간은 웨버처럼 지구를 방문한 불청객을 향해 의구심과 불안감을 표출할지도 모르겠다. 불가해한 타자와 대면하는 순간에 인간은 어떻게 선택하는가. 이때 <컨택트>의 루이스 박사는 낯선 타자와의 소통에 있어 어려움을 겪는 현대인들에게 시사점을 제공해 줄 수 있다.
루이스는 외계의 존재와 원활히 대화하고 싶다. 웨버 대령에게 ‘캥거루’ 일화를 드는 루이스는 오역 없는 명확한 상호 의사전달을 위해서 기본이 되는 사항을 놓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외계인이라는 타자를 적 혹은 침략자와 동등한 층위로 인식하지만, 루이스는 편견을 접어두고 소통의 가능성을 최대한 확보하고자 한다. 전문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헵타포드로부터 특별한 반응을 끌어내지 못하자 군인과 분석관들은 조바심을 느끼지만, 루이스는 이내 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그들의 언어를 감지할 수 없다면, 우리의 언어를 그들에게 제시하는 방식 말이다. 루이스는 군인, 과학자들과 대비된다. 그녀가 수평적인 교환을 지향한다면, 후자의 집단은 수직적인 질문 혹은 강요에 매달린다. 루이스는 타자를 향한 편견을 완전히 거둔 채 그들 앞에 나서고, 나머지 인원은 몇 겹의 벽을 세우느라 소통의 성취와 멀어진다. 영화에서 루이스는 그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오염 방지 슈트를 벗어던지고 헵타포드를 찾아간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루이스를 보며 놀라워한다. 루이스가 선형적인 인간의 개념 대신 헵타포드의 비선형적 개념, 언어와 시간에 관한 낯선 형태의 사유를 수용하여 그들의 사고 체계에 적응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컨택트> 스틸컷
관계의 전도가 만들어내는 소통의 형태
구로사와 기요시의 SF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2017)에는 발화된 언어를 학습하려는 외계인이 등장한다. 이 영화의 외계인은 지구를 침략하려고 한다. 이들은 인간보다 훨씬 고등한 존재들이다. 극 중 한 외계인은 인류를 멸망시키는 일이 며칠 걸리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하고, 지구의 기술력이 형편없다며 불평하기도 한다. 이때 외계인들이 굳이 인류 절멸을 위한 사전 답사라는 명분으로 인간에게서 뭔가를 찾으려고 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인간의 관점에서 타자와의 소통 가능성을 그렸던 <컨택트>와는 다르게 이 영화는 관계의 역학을 다르게 묘사한다. 외계인이 주체고 인간이 객체로 전도된 인상을 풍긴다. 더 나아가 영화에서는 외계인에게 신체를 뺏긴 신지의 아내인 나루미가 매우 흥미로운 인물로 묘사되는데, 인간과 외계인 사이의 전도된 관계에서 나루미가 어떤 존재로 기능하는지 들여다본다면 타자와의 소통 가능성에 관한 흥미로운 논점을 추출할 수 있기도 하다.
외계인이 인간에게서 개념을 탈취하는 목적은 의외로 간명하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파악해서 효율적으로 정복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다. 이 침략자들은 어딘가 엉성하게 지구를 침공 계획을 세운다. 인류를 절멸시키겠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던지면서도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탐구해보겠다는 모순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이들은 인간에게서 주요한 가치를 뺏는다. 이를테면 ‘가족’. ‘소유’, ‘일’과 같은 개념들이다. 기묘한 소통의 형태, 양방향이 아닌 뒤틀린 단방향의 커뮤니케이션이 반복되면서, 두 개체 간의 관계 양상에 변화가 생긴다. 우리 처지에서 철저한 타자인 외계인이 주체인 인간과 유사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생긴다. 외계인의 관점에선 주체(외계인)의 객체(인간)화라고 볼 수 있겠다. 영화 속 세 명의 외계인 중에서 주인공 격인 신지는 이러한 모호성을 내포한 존재다. 이 관계의 역학은 다소 폭력적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단방향 소통 구조는 흡사 원주민의 문명을 지워내는 제국들의 만행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기묘한 관계를 규정하는 데 있어 방금 사용한 예시는 적절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비록 폭력적인 단방향의 소통이긴 해도, 정체성이 모호하게 묘사되는 존재인 신지를 통해서 타자성을 수용하는 개체의 심리를 고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신지의 아내인 나루미는 외계인과 기존 신지의 의식이 융합된 포스트휴먼 격인 새로운 남편을 바라보면서 혼란에 빠지는데, 영화에 묘사된 나루미의 대응 방식에서 또 다른 낯선 타자와의 소통에 있어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발견된다는 점도 지나칠 수 없다. 신지의 정체를 파악한 당국에서 신지를 잡아가려고 하자, 나루미가 이를 눈치채고 신지와 함께 도망친다. 나루미는 인류를 위기에 몰아넣을 수 있는 위험한 판단을 내린다. 하지만 주체성과 객체성의 분리가 모호해진 존재인 신지를 향한, 그러니까 탈경계화된 존재를 향한 인간의 손길은 다층적인 소통의 층위가 생성되는 기회를 만든다.
관계의 전도가 촉발하는 새로운 소통의 형태는 <산책하는 침략자>뿐 아니라 <컨택트>에서도 발견된다. 시간성에 관해서 새로운 인식 체계를 받아들인 루이스는 일종의 포스트휴먼이다. 그녀에게 과거-미래-현재는 모두 동일선상에 놓인 채 공존하는 시점들이다. 미래를 엿보는 ‘현재의 나’는 곧 그 대상인 ‘미래의 나’와 정신을 공유할 수 있다. 단순한 미래 예지 능력을 갖춘 존재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시간관념을 장착한 포스트휴먼으로 진화한 셈이다. 이런 루이스는 모호한 존재성을 떠안은 채, 헵타포드에게 그랬던 것처럼 인류에게 손길을 내민다. 이 루이스의 행동들이 단순히 결정론적 관점에서 예정된 행동이 아닌, ‘선택’처럼 묘사됐다는 점이 타자를 향한 루이스의 심리와 행위가 내포하는 지점을 다변화한다. 루이스에게 다수의 평범한 인류는 일종의 타자처럼 기능할 수 있지만, 이 전도된 관계에서 피어나는 루이스의 선택들로 또 다른 소통의 기회가 열릴 수 있다. 미지의 영역처럼만 보이던 우주는 21세기 들어 더욱 선명해졌고, 미디어에서 소비되는 외계 존재와 같은 불분명한 타자는 우리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외계의 존재와 맞닥뜨리는 먼 미래의 순간을 상상하면서, 우리는 불가해한 타자와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사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산책하는 침략자> 스틸컷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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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편적이지만, 그래서 특별한 K 엄마의 독립선언!
살고 있는 집이 내 집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적 있나? <다섯 번째 방>의 주인공인 김효정씨는 그렇다고 말한다. 3대가 사는 집에서 겪은 30년간의 시댁살이, 여기에 남편과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삶 속에 놓인 그녀는 안타깝게도 자기만의 공간이 없다. 이 부재는 눈덩이처럼 커져 본인 자체가 내 집이라는 개념을 부정한다. 알게 모르게 김효정씨와 비슷한 삶을 산 엄마들은 이 부분에 고개를 끄덕일 듯. 이같은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룬 이 다큐멘터리는 보통의 K 엄마의 특별한 독립 과정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것도 딴 사람이 아닌 실제 딸이.
김효정씨가 사는 집은 시부모 소유의 2층 양옥집이다. 여기서 30년 동안 시부모, 남편, 그리고 3명의 아이와 함께 살았다. 살고 있으니 내 집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던 그녀지만, 이게 바보 같은 자기 합리화라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계기는 남편의 소파 사업이 실패하고, 전문 상담가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 역할을 하면서다. 일을 하면서 자신만의 업무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절실하게 필요한 그녀는 자신만의 방이 필요했고, 힘든 설득 후 2층에 그 공간을 마련한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남편은 불쑥불쑥 그곳을 침범하는 일이 잦아지고, 급기야 실소유주인 시어머니가 자신의 딸에게 집 지분을 상속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는다. 그녀는 가장임에도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이 집과 가족에게 서운함을 느낀다. 그리고 비로소 독립을 선언한다.
날 돌봐주는 사람은 이 집에 아무도 없어.
김효정씨의 이 말 한마디가 다큐의 시작이었다. 엄마의 뼈 있는 말을 듣는 순간 카메라를 든 전찬영 감독은 지난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너무나 몰랐던 엄마를 카메라에 담았다. 단편 <바보 아빠> <집 속의 집 속의 집> 등 아빠의 이야기를 담은 전작들과 달리, 감독은 이 집에서 위기에 처한 엄마를 보여준다. 보통의 엄마, 가족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보이지 않았던 가족간의 미세한 균열이 보이고, 그 틈 사이로 보이는 진짜 엄마, 아니 자신이 아닌 가족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버렸던 김효정이란 여성을 마주한다.
김효정씨가 자아를 찾는 방법은 ‘방’이다.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다섯 번째 방’은 비로소 엄마가 찾은 자기만의 공간을 뜻한다. 시댁살이를 하면서 타의로 방을 3번 옮겼고, 자의의 노력으로 2층 방을 사무 및 휴식 공간으로 만든 그녀이지만, 결국 자기만의 공간이 되지 못한다. 사랑하지만 너무나 가까워서 그 공간을 엄마의 방이라 인지하지 못하는 가족들의 침범은 이 공간과 공간의 주인인 그녀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아이러니 한 건 엄마가 가장이 되어 가정을 이끄는 주체가 되었음에도 가족들은 이를 인식하거나 인지했어도 그렇게 행동하기를 꺼린다는 것에 있다. 가부장적 체계에 익숙해져 있는 구성원들에게 엄마는 돈을 버는 가장인 동시에 집안의 살림살이를 도맡아 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고, 설거지도 안 하는 가족들의 모습, 노동을 하고 와서도 집안일을 해야 하는 엄마의 모습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엄마의 독립은 자기 공간을 갖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도 보인다. 자신의 욕망을 잠재우고 가족을 위해 헌신했지만, 알아주는 이 하나 없이 가장의 역할까지 부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그녀의 울분은 후반부로 갈수록 이내 폭발한다. 시어머니에게 집 처분에 대한 울분을 토하고, 친정아버지 장례식에서 술 마시고 소란을 핀 남편에게 그동안 쌓였던 불만을 퍼붓는다. 감정의 파고를 넘나드는 후반부를 보면 전반부는 태풍의 눈 안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모든 집에서 비일비재한 사건처럼 보이는 작품 속 이야기지만, 이 다큐가 조금 특별하게 다가오는 건 뒤늦게라도 가부장적 제도에 용기 내 목소리를 낸 엄마와 이를 카메라로 독려하며 연대의 손을 내민 딸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심리상담사이자 가정폭력 예방 강사인 김효정씨는 많은 이들 앞에서 얘기하는 바를 비로소 실천한다. 견고하게 쌓인 가부장적 제도에 맞서 내는 작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는 여성인 딸의 카메라에 가감없이 담긴다. 화려한 카메라 워킹이나 편집 없이 사실적으로 보여지는 엄마의 모습은 그 자체로 큰 울림을 준다. 피하지 않고 부딪히고, 어떻게든 소통하며 합일점을 찾는 그 과정을 결혼 후 30년 만에 처음한 그녀는 비로소 자유를 찾고, 자기 공간을 찾는 동력을 얻는다. 한 명이 희생하면 가족 모두가 편하니까 딸이자 여성임에도 엄마의 책임과 힘듦을 묵인했다 말한 감독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듯 딸로서, 여성으로서 그 누구보다 강한 엄마와 김효정씨의 모습을 오롯이 담는다.
제24회 부산독립영화제 관객심사단상, 제20회 EBS국제다큐영화제 시청자&관객상을 받는 등 <다섯 번째 방>은 보편성의 힘이 강한 작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이야기를 공감케 하는 인물은 악역을 자처하는 아버지 덕분이다. 그의 행동은 자연스럽게 이 집의 문제를 들여다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엄마, 아빠를 객관화하기 어려웠다는 감독은 최대한 부모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이들을 대하는데, 이 노력으로 아버지는 단순히 문제의 온상으로만 비치지 않는다. 후반부로 가서는 좀 더 입체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는 이 다큐가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의 가족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보편성을 확보하게 만든다.
영화를 보면 애정과 애증의 눈빛으로 이들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김효정씨의 인생이자 전찬영 감독의 가정사이며, 우리가 모두 공감하는 삶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사진제공: 씨네소파
평점: 3.5 /5.0
한줄평: 보편적이지만, 그래서 특별한 K 엄마의 독립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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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를 지켜라, 그리고 고통을 넘어 초인이 되어라
※영화 〈지구를 지켜라!〉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병구(신하균 분)는 어느 날 유제 화학 사장 강만식(백윤식 분)을 납치하여 고문하기 시작한다. 병구에 따르면, 강만식은 지구 침입을 획책하고 있는 안드로메다 행성에서 온 외계인이다. 개기월식 전까지 지구를 지키기 위한 병구의 외계인과의 사투는 그렇게 시작된다. 하지만 결국 병구는 지구를 지키지 못한다.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는 병구의 황당한 편집증적 망상과 함께 서사를 따라가던 관객의 불신과 감정 이입을 충격적 반전으로 전복하는 기묘한 영화다. 그리고 <지구를 지켜라>는 니체가 말하는 허무주의와 권력에의 의지, 그 너머의 초월적 인간의 형성 과정을 병구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넌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몰라.”라는 병구의 첫 대사는 자신의 광기에 대한 병구의 자조적 고백이자 관객에게 일러주는 암시이다. 그러면서 영화는 망상에 사로잡힌 병구가 벌이는 황당하고 신체 훼손이 공공연한 장면들을 아무렇지 않게 이어간다. 잔인한 방법으로 강만식을 고문하는 병구와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탈출하려는 강만식의 사투는 영화 종반 자신의 정체를 밝힌 강만식이 (병구가 '믿는' 외계인의 실체) 강릉공장에서 지구의 파괴를 막으려 하나 이를 믿지 않았던 병구는 강만식과의 결투 끝에 결국 죽음을 맞는다. 그렇게 영화가 끝나나 했지만 여기서 감독은 반전의 카드를 제시한다. 실제로 강만식이 안드로메다의 외계인이었고 심지어 왕자였던 것. 병구가 지금까지 겪었던 고통의 삶은 인간이 가진 공격 유전자를 변형하여 지구를 지키기 위한 왕자의 실험이었고, 마지막 희망이었던 '실험 표본 1787호' 병구의 실패로 왕자는 실험을 중단하고 지구를 폭파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출처 | 다음 영화
병구가 보이는 폭력성과 광기의 원인은 과거 그가 겪었던 끔찍한 폭력에 있다. 아버지는 탄광 사고로 한쪽 팔을 잃고 가족에게 지속적인 폭력을 일삼다 병구의 종이우산이 머리에 박혀 죽는다. 같이 일하던 애인은 회사가 고용한 용역 깡패의 몽둥이에 맞아 죽는다. 어머니는 같은 공장(강만식이 운영하는 유제 화학)에서 일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물질에 중독되어 5년째 식물인간이 되어 기약 없는 치료로 연명 중이다. 그 모든 사건을 눈으로 확인하며 납부금을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생에게 매질을 당한다. 병구에게 이어진 폭력은 곧 병구의 폭력으로 전이된다. 어머니가 시장에서 건달에게 당하는 모습을 본 병구는 우발적인 사건으로 살인자가 된다.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전환된 것이다. 이후 감옥에서도 그는 교도관의 폭행에 시달린다. 강렬한 이미지로 재현되는 병구의 기억은 1980년대가 개인에게 가했던 끔찍한 폭력의 트라우마이다.
니체가 보기에 현대인의 고통의 본질은 염세주의 철학과 과민증이다. 하나같이 고통을 피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더 고통에 빠지고 길을 잃는다. 하지만 고통은 '삶에 이탈'함으로써 오는 것이니 받아들여야 한다고 니체는 말한다. '부정과 거부는 무거운 자들의 정신'이라며 고통에 의연해질 것을 충고한다. 그리고 모두를 위한, 하지만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처방을 내린다.
고통에 대한 처방은 고통이다.
보통의 인간들은 이러한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날 궁리에 낑낑대다가 그만 힘에 부치면 삶을 통째로 부정해 버린다. 니체는 현실적인 고통의 처방도 제시한다. 사상적 열광, 평온한 상황, 좋고 나쁜 추억들, 장래 계획, 희망, 거의 마취제 같은 효과를 지닌 수많은 종류의 자부심과 공감 등. 병구가 먹는 향정신성 약물 역시 이러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는 단기적 해법일 뿐 본질적인 고통의 처방전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병구는 암울한 세상 속 허무주의로 고통을 극복하려 한다. 흔히 현대사회를 허무주의의 시대라고 칭하기도 한다. 니체가 말하는 '신의 죽음'에 누구도 놀라지 않는, 세속화 시대에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신이 죽었다는 의미는 우리가 필연적으로 믿고 있던 절대적 가치가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믿어온 최고의 가치, 즉 신이 사라진 자리에 바로 허무주의가 들어오게 된다. 허무주의는 모든 손님 중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손님이라고 니체는 표현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가가 니체가 원하는 궁극적 삶의 목적이다.
니체는 허무주의를 수동적 허무주의와 능동적 허무주의로 나눈다. 수동적 허무주의자는 ”왜?”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며 무능력한 인간상을 표현한다. 이는 약자들에게 흔히 보이는 징후로서 정신력이 지칠 대로 지쳐버리고 고갈되어 현실을 외면하는 상태이다. 왜 사냐는 질문에 이들은 생존 자체가 이유이자 최고의 목표라고 대답한다. 니체는 이들이 능동적 허무주의로 변화하기를 바란다. 이 세상에는 목표나 의미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적 가치는 전복되어 우리 곁에서 사라져 죽어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능동적 허무주의자들은 이것이 비극적인 사건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Nothing is true.” 그 어떤 것도 진리는 아니다는 말은 동시에 내 삶의 목표와 진리를 스스로 설정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의미 없는 존재인 인간이 의미 있는 이유이다.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질 줄 아는 것, 진리란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며 절대적이 아님을 깨닫는 과정이 능동적 허무주의의 입장이다. 고통과 폭력 속에서 극한의 좌절과 허무 속에 몸부림치던 병구는 자신의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외계인으로부터 푸른 별 지구를 지키는 새로운 삶의 목표이다.
아무도 없어, 네가 지구를 지켜야 해.
식물인간인 어머니가 일어나 병구에게 말을 건네는 상상의 장면은 어머니가 대신 전하는 병구의 내면의 소리를 지지하는 자신과의 대화이자 다짐이다.
모든 세상의 고통과 불행은 외계인의 소행이라는 진리를 깨달은 병구는 외계인에게 광적으로 연구하고 파헤친다. 대부분의 일상은 집 안에서 지낸다. 깊은 산속에서 양봉을 하고, 마네킹을 만들며 생계를 이어가고 '외계인'을 잡아 고문하며 연구하는 일이 병구의 일상이다. 관객의 눈에는 그야말로 광인의 집착에 지나지 않는 행위다. 하지만 니체의 입장은 다르다. 진리 탐구의 끝은 자기 삶을 의미 있게 해석하는 것이다. 니체는 진리보다 진실성을 더 높이 평가한다. 위험을 직시하고 자신이 무엇을 하는가를 온전히 알고 따라가는 것이 진실성의 요체이다. 그는 실존에 대한 불쾌가 예전보다 더 크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악, 즉 실존 속에 들어있는 의미에 대해 의심하기 때문에 허무주의가 지금 나타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극단적으로 된다는 뜻은 내가 가진 문제의 뿌리까지 파고듦을 의미한다. 삶의 문제를 내 안에서 찾으려고 노력하며 존재의 고통을 인정하지 않거나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사유하는 것이다. 왜 사는지에 대한 삶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허무주의가 나타나는 것이지 신이 죽었기 때문에 허무주의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병구의 집착은 삶의 실존적 의미와 목표가 있기에 허무주의에서 탈피하게 된다.
맹목적으로 추구하여 온 절대적 가치가 더는 가치가 없다고 인식할 때 비로소 자아를 찾게 된다. 즉 자아를 찾기 위해 병구는 외계인을 믿는 것이다. 여기에 외계인의 존재에 대한 절대적 가치는 없다.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병구는 외계인을 선택했지만, 외계인이 있고 없고는 병구에게 중요하지 않다. 신은 죽었다는 명제는 결국 '자신의 삶의 예술가가 되어라'라는 말로 대치된다. 자신의 삶을 인정하고 충동, 본능, 감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본래의 나로서 존재할 수 있다. 강만식과 병구의 관계는 본래 고용주와 노동자의 관계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고용 관계는 갑을 관계를 넘은 지배-피지배 관계로 심화한다. 그를 외계인으로 믿는 이유 중에는 그와의 악연도 포함되어 있다. 병구는 강만식의 공장에서 연인과 어머니를 잃는다. 보상도 제대로 해 주지 않았던 강만식에 대한 증오는 점점 고통과 외계인, 그리고 강만식을 함께 엮는다. 이렇게 둘의 악연으로 이어진 권력관계는 납치와 감금으로 역전된다.
자아탐구의 과정에서 이렇게 극단적으로 고통의 뿌리까지 들여다보면 그 아래 숨겨진 지배계급의 부정한 권력을 쉽게 발견한다. 일반적으로 권력은 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정치적 관점에서 인간은 권력의 유무에 따라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 혹은 명령하는 자와 복종하는 자 둘로 나누어 인식한다. 여기서 소위 '99%'는 지배받는 자, '1%'는 지배하는 자이며 약자는 항상 억압받고 착취당하며 순응하고 복종하는 개체로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은 권력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권력을 추구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 부분에서 니체는 다수가 생각하는 권력의 속성을 전복한다. 권력은 그 자체로 악하냐는 의문에 니체는 살아있는 모든 것에는 권력에의 의지가 있다고 말한다. 니체는 권력은 악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 전체의 생명을 지탱하는 속성이라고 보았다. 그는 권력의 내면적 요소에 주목하였다. 진정한 힘은 내면으로부터 나온다. 권력의 내적 동기인 욕망, 충동, 생존은 삶에의 의지를 달성하기 위한 과정이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권력에의 의지로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세상과 관계 맺고 동화한다. 니체는 생명에의 의지에서 권력에의 의지를 발견한다. 인간 내면의 본질에 담긴 권력은 악하지 않다. 단지 생명의 근본적 속성일 뿐이다.
우리의 의지는 권력을 향해 있다. 약자 역시 권력을 추구한다. 그 가치를 창조하는 방식이 강자와 다를 뿐이다. 니체는 도덕 현상을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으로 나누었다. 주인 도덕은 명령하는 자의 가치 창조이다. 지배하는 자의 발현 방식은 능동적 active 일 수밖에 없다. 인류의 역사는 승자의 역사. 노예 도덕은 복종하는 자의 가치 창조이며 상대적으로 반동적 reactive이다. 실질적인 행동은 하지 않으나 정신적으로는 반란을 꾀하는 것이다. 이때 노예들이 반란을 꿈꾸며 ‘원한’이라는 감정이 생긴다. 원한은 지배받는 사람들의 핍박이 권력에의 의지로 뭉쳐져 창조적인 가치를 창출해 낼 때 실제적인 반응으로서 발현한다, 즉 ‘행위에 의한 반응을 포기하고, 오로지 상상의 복수를 통해서만 스스로 해가 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복수’이다. 병구의 원한 감정은 그의 인생 전체를 통틀어 자신을 지배해 온 주인이자 지배자인 자본주의와 이와 수반된 파편화된 인간성에서 기인한다. 병구는 그 원한을 납치와 감금으로 실현한다. 자신이 목표로 하는 권력, 다시 말하면 생존을 위해 물리적, 정신적 수단을 이용한 것이다. 병구는 강만식을 비롯하여 이전에도 많은 '외계인들'을 잡아 왔다. 영화는 그들의 잔혹한 최후를 보여주며 병구가 가진 원한의 실체를 극대화한다.
권력에의 의지는 그 정도를 확인한 다음 '권력 감정'으로 드러난다. 권력 감정은 저항을 느끼면서도 결국 이를 관철했을 때의 뿌듯함 내지 희열로 나타난다. 감정이 수반되지 않는 권력은 진정으로 이를 소유했다고 볼 수 없다. 병구는 고문을 통해 권력 감정을 느낀다.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린 상징과도 같은 존재들이 하나둘씩 자신에게 비참한 모습으로 생을 구걸하고 때로는 저항하는 모습을 보며 병구가 느낀 권력 감정은 지속적인 외계인 납치의 원동력이 되었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권력의지의 정도를 알고, 그 권력에 대한 감정을 느끼고, 더 나아가 지금의 감정을 넘어 더 큰 권력을 가지려는 권력 증대의 과정을 반복한다. 이는 다시 자신을 넘어서려는 의지가 존재할 때 가능하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병구가 양봉하며 꿀벌이 모아 놓은 꿀을 채취하듯 결국 누군가의 것은 나의 것으로 넘어와야 생존할 수 있고 이것이 생존하는 모든 것들의 정신적, 물리적 운동의 삶이다. 권력은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며 동시에 생명의 근본 현상이기도 하다. 권력은 그 속성에 따라 항상 새롭게 해석되고 생성되며 팽창하는 과정을 지속한다. 그렇다면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자는 어떤 인물인가. 복종의 구조 속 가장 밑바닥에 있는 약자는 항상 자유의지를 추구하고 이를 꿈꾸며 산다. 니체가 생각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사람은 권력이 흘러넘쳐서 상대방이 아무리 저항을 하고 복종을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관용하고 허용할 수 있는 정도의 넉넉한 힘을 가진 사람이다. 다시 말해 사랑하고 포용하는 힘을 가진 사람이 진정한 권력자이다.
이는 지독히 외롭고도 고통스러운 긴 싸움이다. 무수한 수수께끼와 느닷없이 덮친 우연을 '의미'로 재창조하는 것은 무한한 고통을 수반한다. 자기 보존이 아니라 자기 극복의 지난한 과정을 기꺼이 수행하는 것.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한 '창조의 고통'이다. 삶에 대한 최대의 긍정이자, 고통에 대한 최고의 처방이다. 이를 이루는 인간인 초인 Übermensch은 형이상학적 가치와 결별한 사람이다. 그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며, 자신을 넘어서는 가치를 창조하는 능동적인 삶을 살고 고통의 무의미성, 고통마저도 사랑으로 감싸 안는 아모르파티 Amor Pati에 이른다. 하지만 병구는 이 단계에 이르지 못한다.
안드로메다 왕자 강만식은 병구의 삶을 두고 인류의 미래를 담보로 한 실험을 진행한다. 병구에게 내린 고통은 인간의 유전자를 변형시키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이는 니체의 '창조의 고통'과 맥을 같이 한다. 고통을 통해 강만식과 니체는 인간의 생의지를 판단한다. 강만식은 개기월식이 일어나기 직전 병구에게 마지막 실험 과제를 부여한다. 진정으로 생의 의지를 갖고 나의 가치 창조를 믿고 고통마저도 초월한 초인이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 단계에서 병구는 자신 설정한 삶의 의지와 목표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고통을 초월하지 못하고 강만식이 외계인임을 부정하며 순이의 죽음이라는 극도의 고통을 이기지 못한다. 영화에서는 인류의 미래를 둔 마우스 버튼으로 표현했지만, 이는 니체의 말을 빌리면 초인의 경지에 오르는 마지막 관문이다. 결국, 병구는 고통을 넘어 사랑하고 관용하지 못한다.
여기서 순이는 병구의 조력자이자 그를 초인과 짐승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영화 초반 순이는 병구의 계획에 눈물을 흘리며 두려움을 표현한다. 하지만 순이는 영화에서 계속 외줄을 탄다. 니체는 평범한 인간과 초인 사이에서 외줄을 타며 인간들에게 '운명을 사랑하라'라고 선언한다. 외줄 위 인간은 두렵고 약한 존재이지만 순이는 인간과 초인 사이 그 긴장을 감수하면서 병구에게 계속 외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순이의 죽음으로 병구는 이성을 잃고 짐승이 된다.
강만식은 병구가 초인이 되어 위태로운 고통의 푸른 별 지구를 지키길 바랐다. 하지만 실패로 끝난다. 영화는 지구 멸망이라는 자극적인 결말로 고통을 받아들이는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그 모든 고통 안에서 진정한 사랑의 중요성을 엔딩 크레디트에서 병구의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며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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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억으로 살아나는 부녀의 시간
‘문라이트’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배리 젠킨스 감독이 제작에 나서고 샬롯 웰스 감독이 본인의 경험이 담긴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데뷔작으로, 2022년 칸 영화제 비평가주간,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를 포함해 전 세계 유수 영화제 56개 부문 수상, 154개 부문 후보에 오른 영화 애프터썬입니다. 성인이 된 주인공 소피가 낡은 캠코더에 담긴 20여 년 전 아버지와 함께한 빛바랜 튀르키예 여행 영상들을 보며 누구나 가지고 있을법한 부녀간의 추억과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을 전달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기억을 곱씹어 그리워하는 통속적인 구조를 그리기보다 그때 여행에서 자신이 못 보았던 모습을 돌이켜보며 묘한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여기서 비롯된 어딘지 모르게 불안함이 깃든 미묘함은 극 후반부까지 이어지며 관객에게 평범하지만 독특한 경험을 만들어주죠. 그렇기에 지루할지도, 특별할지도 모르는 추억 여행은 아마 보는 분들마다 다양한 시선이 존재할 것 같습니다.
※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우리 여기 놀러 온 거 맞지?”
어느 날, 소피는 꿈속에서 아빠를 만나고 다음날 아침에 자신이 11살 때 아빠와 함께 떠난 튀르키예 여행지에서 찍은 비디오테이프를 꺼냅니다. 부모님의 이혼 후 떠난 부녀의 여행, 버스를 타고 어느 휴양지 리조트로 향해 일주일간 함께한 여정. 밥을 먹고, 수영도 하며, 포켓볼을 치거나 오토바이 게임도 했던 여름날의 행복해했던 추억을 천천히 돌이켜봅니다.
예고편│Trailer
원제: Aftersun│감독·각본: 샬롯 웰스
출연진: 폴 메스칼, 프랭키 코리오, 실리아 롤슨-홀 외 多
장르: 드라마│상영 시간: 101분
국가: 영국, 미국│등급: 12세 관람가
평점: 왓챠피디아 예상 3.4, 로튼토마토 신선도 96% 팝콘 82%, IMDB 7.8, 메타 스코어 95점
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주)
상영 일정: 개봉일 2023년 2월 1일
수상 내역: 48회 LA 비평가 협회상(편집상), 87회 뉴욕 비평가 협회상(신인작품상), 57회 전미 비평가 협회상(감독상), 48회 도빌 아메리칸 영화제(그랑프리, 국제 비평가 상), 39회 뮌헨 국제영화제(시네비전상) 등 유수 영화제 56개 부문 수상, 154개 부문 후보
“가장 사적이고 평범한 이야기의 특별함”
성인이 된 한 여성이 20여 년 전 아빠와 함께 떠났던 여행의 추억을 꺼내보는 내용은 감독의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에 두고 있어 지극히 사적이고 사소합니다. 시간이 지나 사회의 경험을 쌓은 지금에 다시 떠올려보려 보니 각별한 의미를 가진 추억이 되었다는 전개는 그때 미처 알지 못했던 부모님의 그림자를 알아간다는 현재를 살아가는 어른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경험해 봤을 삶의 이야기지요. 그렇게 일주일 간의 튀르키예의 한 리조트에서 지내며 보낸 아주 사사로울 수 있는 순간이 감독의 상상력이 더해져 확장됩니다. 소피의 기억과 상상한 장면들은 일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어른, 아버지의 뒷모습을 본 어린 소녀는 훨씬 더 성숙했었기에 그때 느낀 불안감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그렇지만 그때의 행복을 그리워하거나 지금의 부재를 아쉬워하는 마음을 담아 어떤 슬픔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클럽 조명 사이로 어른이 된 딸과 과거 아버지 모습이 몇 번 교차할 뿐 오롯이 어린 11살의 모습만이 스크린에 전달되죠. 정신없이 살아온 시간에 잠시쯤 쉬어갈 수 있는 존재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인지, 혼재된 시간의 기억에서 잠시나마 자신에게 빛이 되어준 아빠를 찾아가는 여정임을 상징하는 것인 굉장히 모호한 부분이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상상 속 시끄러운 클럽을 벗어나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 찾아오는 여백은 그저 진실한 마음과 대화를 통해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고 이해하려 했던 부녀의 이야기, 그렇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임을 확인시켜줍니다.
영화 애프터썬은 가타부타 할 자초지종은 생략하고 오로지 어린 시절 여름날의 애틋하고 따뜻한 기억을 담는데 집중합니다. ‘노멀 피플’로 멋진 모습을 선보인 폴 메스칼은 캘럼 역으로, 8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캐스팅된 프랭키 코리오는 소피 역으로 그러한 부녀의 온기를 세세한 표현으로 전합니다. 어른이 되어서야 받았던 사랑의 소중함을 헤아리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대변하듯 빛바랜 영상을 보며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그녀의 추억처럼 뒤늦은 깨달음을 함께하는 묘한 분위기를 말입니다. 감춰진 불안감이 무엇인지 느끼고 온전히 서로를 이해하며 더 깊어지는 애틋함일지도 모르는 그러한 평범한 기분, 감독이 느꼈던 개인적인 감정이 그대로 이어집니다. 잔잔하기도 하고, 때로는 지루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안하기도 한 그때의 감정, 그러나 일반적으로 관객에게 어디까지 전해질지는 의문이 드네요. :)
한 줄 평 : 빛바랜 영상, 되살아나는 기억, 스며드는 애틋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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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 북유럽 복수극의 창조적 파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중동으로 파견되어 가족과 떨어져 지내던 덴마크군 군인 '마르쿠스(매즈 미켈슨)'. 그는 아내와 딸 '마틸드(안드레아 하이크 가데버그)'가 열차 충돌 사고에 휘말렸고, 아내가 끝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한다. 좀처럼 아내와의 사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 지내던 그의 앞에 어느 날 아내와 같은 열차 칸에 탔던 통계학자 '오토(니콜라이 리 카스)'가 등장한다. 그는 데이터 분석가 '에멘할러(니콜라스 브로)', 해커 '렌나르트(라르스 브리그만)'와 함께 분석한 자료를 근거로 열차 충돌 사고가 계획된 범죄였음을 알려준다. 이에 분노로 가득 찬 마르쿠스는 직접 범인들을 심판해 아내의 복수를 이루려 한다.
여기까지가 덴마크의 국민배우 매즈 미켈슨이 주연을 맡은 앤더스 토마스 옌센 감독의 영화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의 줄거리다. 사실 줄거리만 보면 이 작품은 리암 니슨의 대표작인 <테이큰> 시리즈나 최근에 개봉한 <캐시트럭>을 연상시키는 전형적인 복수극이다. 이들 영화 속 주인공은 자신 혹은 사랑하는 이의 신체나 정신을 파괴할 정도로 강력한 범죄를 경험한다. 이후 주인공은 자신의 피해를 되갚아 주기 위해서 범인을 추적하고 계획을 세운다. 마지막으로 그는 범인과 대결하고 피비린내 나는 계획을 실천에 옮긴다.
하지만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를 앞서 언급한 예시들과 동일한 범주에 놓는 것은 부적절하다. 영화의 궁극적인 목표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는 복수의 결과를 보여주기보다는 일반적인 상업 영화 속 복수극의 단계를 뒤틀어 복수의 이면과 본질을 드러내는 데 집중한다. 이를 위해 옌센 감독은 복수극의 공식을 파괴하는 네 장의 카드를 꺼내 보인다.
첫 번째 카드는 복수극의 단축과 서스펜스의 실종이다. 작중 복수의 계획과 범인의 추적은 막힘 없이 진행된다. 마르쿠스는 직접적인 범인으로 판단한 이를 이렇다 할 저항 없이 죽인다. 범인이 속한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라는 이름의 갱단 구성원과 보스가 누구인지, 그들의 집합 장소와 시간을 알아내는 작업도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궁극적인 범인이라고 할 수 있는 갱단 보스와의 대결도 총알이 그의 머리에 꽂히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고 깔끔하게 끝난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숙명의 대결은 없다. 그 결과 영화는 러닝타임을 30분가량 남겨둔 상태에서 이미 마르쿠스의 복수를 일단락시킨다.
두 번째 카드로 영화는 일단 복수가 끝난 극의 전개를 해피엔딩과 새드엔딩 중 어느 것에도 도달하지 못한 충격과 혼란 속에 빠트리면서 복수의 이면과 의미에 대한 고찰을 풀어놓는다. 성공적인 복수를 자축하던 찰나에 마르쿠스와 동료들은 지나치게 수월히 진행된 복수가 열차 충돌 사건과 무관한 이를 죽이고, 관련 없는 갱단을 공격하는 것으로 귀결되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들의 복수는 완벽한 헛발질이었고, 더 나아가 그들의 위치를 복수의 주체로부터 아무 이유 없이 봉변을 당한 갱단의 복수 대상으로 뒤바꿨을 뿐이다.
그 순간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마르쿠스의 반응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깊이 절망한다. 단지 자신이 잃은 것을 되갚아 주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에게 복수는 구원을 얻기 위한 속죄 행위이기 때문이다. 중동 파견 군인이라서 아내와 딸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미안함, 그리고 그들이 사고가 발생할 기차를 타는 원인을 직간접적으로 제공했다는 죄책감을 떨치지 못하던 그. 그의 입장에서 성공한 복수의 아이러니한 실패는 아내와 딸에게 사죄하고 스스로 구원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길이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
이에 더해 그가 복수만을 바라보며 아등바등한 모든 시간이 무의미하다는 진실도 그의 절규를 더 비참하게 만든다. 사실 마르쿠스의 복수극은 명백한 팩트(fact)가 아닌 한 가지 전제 위에서 이루어진다. 바로 모든 사건에는 우연이 아닌 인과관계가 존재하며, 그 인과관계를 파악하면 특정 사건을 예측할 수 있고 동시에 특정 사건의 원인도 밝혀낼 수 있다는 가설이다. 그래서 오토, 렌나르트, 에멘할러는 마르쿠스에게 수상한 탑승객의 행적이나 갱단의 보스와 관련된 이슈 등을 근거로 내밀며 단순한 사고로 보이는 열차 충돌 사건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것으로 예정되었던 테러라고 주장할 수 있었고, 이는 그가 복수에 나서는 방아쇠가 된다.
따라서 그들의 총알이 과녁을 완전히 벗어난 것을 깨닫는 순간, 열차 충돌 사건이 테러가 아니라 의도가 섞이지 않은 우연이 낳은 사고라는 것을 알아챈 순간 복수는 역으로 그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 복수는 본질적으로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현재에 전복하는 행위이기에 과거의 사건들이 현재 상황에 영향을 끼쳤다는 근거가 있어야만 복수의 대상이 특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는 마르쿠스의 절규를 통해 복수극을 지탱하는 전제를 파괴하고 기존 복수극의 전개와 구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의미심장하게 연출되었던 자전거 도둑 사건이나 값비싼 샌드위치를 그냥 버려버리던 수상한 남자 등도 이 시점부터는 전부 아무 의미 없는 맥거핀이 되어버린다.
대신 옌센 감독은 복수극의 의미가 없어진 자리에 한 편의 힐링 드라마를 채워 넣는 세 번째 카드를 꺼낸다. 그 중심에는 마르쿠스와 함께 복수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 오토, 렌나르트, 에멘할러 삼인방이 위치한다. 그들은 마르쿠스와 계획을 세우고 범인을 찾아다니는 동안 예상치 못한 기행을 하나씩 저지르면서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를 마주한다. 원하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신체적 콤플렉스에 시달린 이, 헛간에서 가정폭력을 경험한 피해자, 자신의 실수로 가족을 떠나보낸 아버지까지. 여기까지만 보면 그들이 처한 상황은 아내와 딸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분노로 삭히지 못해 폭력을 자제하지 못하는 마르쿠스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아픔을 숨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르쿠스와 결정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서로에게, 또 한 팀을 이룬 마르쿠스와도 자신들의 상처를 공유한다.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고, 아닌 척 서로 신경 써주며 웃음과 유머로 고통과 상처를 보듬어 안으며 마치 가족과도 관계를 이룬다. 이는 삼인방 서로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렌나르트와 에멘할러는 자신들이 받은 심리치료를 바탕으로 아버지 마르쿠스와의 관계가 무너지진 마틸드의 콤플렉스를 발견하고 치유해주며, 오토는 엄마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그녀의 죄책감을 덜어준다.
영화에서도 언급된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슬픔의 5단계' 안에서 삼인방과 마르크스의 차이는 더 분명해진다. 삼인방은 상실과 슬픔을 받아들이고 현실을 새롭게 살아가는 법, 즉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고 보듬어주는 방법을 깨우치고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 중 마지막인 '수용' 단계로 넘어가 있다. 반면에 마르쿠스는 여전히 절망과 슬픔 같은 강렬한 감정을 느끼며 다른 사람들과의 거리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우울' 단계에 머무르는 데 그친다. 다만 그 역시 마지막에는 오토에게 안겨 울면서 자신이 외면하던 과거와 진실을 받아들이고, 서로가 서로의 목숨을 구해주면서 온전히 상처와 고통을 나누고 서로 보호하는 관계에까지 이른다. 이는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가 이미 지나간 과거를 붙잡고 형체 없는 대상을 쫓는 복수극 대신, 현실의 아픔을 수긍하고 받아들이면서 보다 나은 미래를 다짐하는 힐링 드라마로 거듭나려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카드로 영화는 덴마크, 곧 북유럽권의 고유한 정서를 부각하며 분량의 절반 가량을 맥거핀으로 만드는 플롯을 매끄럽게 다듬는다. 그 독특한 분위기는 비장함과 황량함, 그리고 이를 버텨내는 일상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뛰어난 북유럽 범죄소설에 주는 유리열쇠상을 '해리 홀레' 시리즈로 수상한 노르웨이 작가 요 네스뵈가 2014년 방한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작품이 "북유럽 특유의 슬픈 감성"을 담고 있으며, 그 감성은 "커다란 재난이 일어나서 겪게 되는 슬픔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축적된 슬픔"이고, 사람들이 "그 슬픔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소설에 주로 담는다고 밝힌 것이 단적인 예시다. 이러한 북유럽 고유의 감성은 일 년 내내 춥고 거친 황량한 환경에서 생존해야만 했던 사람들의 심성적 측면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동일한 정서는 북유럽 신화에서도 느낄 수 있다. 북유럽 신화는 신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극복할 수 없는 세계의 종말인 라그나로크에서 대부분의 신이 사망하는 결말을 맺는다. 신보다 운명이 더 우위에 있고, 신이라 해도 세계의 운명을 극복할 힘은 없다. 단지 운명과 현재를 받아들이면서 견뎌낼 뿐이다. 다만 북유럽 신화는 일말의 희망을 놓지 않는다. 라그나로크를 피한 몇몇의 신과 단 한 쌍의 인간이 새롭게 황금시대를 만들 것이라고 노래하며 종말 그 너머에 있을 미래에 대한 작은 희망만큼은 간직한다. 이처럼 운명에의 순응과 실낱같은 기대가 담긴 신화는 신과 운명에 저항하는 영웅을 사랑하는 그리스 신화 및 비극의 전통과 뚜렷이 구분된다.
영화는 이러한 감정들을 주인공들의 서사에 깊숙이 녹여낸다. 성당 장례식에서 모든 비극은 우연이라는 추모사를 모두 부정하며, 신과 산타클로스 따위는 없다던 마르쿠스가 태도를 바꾸는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피에타 상처럼 동료의 품에 안기는 그는 아내의 죽음을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우연에 가까운 확률이 빚어내는 현실과 운명에 순응한다. 그러면서도 세계의 멸망 속에서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희망과 낙관을 버리지 않는 신화처럼, 마르쿠스와 동료들은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날에 프렌치 호른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각자의 슬픔과 아픔을 딛고 지금보다 따뜻한 미래를 다짐한다. 이처럼 북유럽만의 감성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마무리와 함께 <라이더스 오브 저스티스>는 복수극이라는 껍질을 깨부수면서 한 편의 진중하고 따뜻한 힐링 드라마로 온전히 탈바꿈한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플롯의 공식과 장르의 관습을 깨부수는 노르딕 복수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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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못건드리는 양아치가 탄 버스에 하필 동석이형이 ㅋㅋㅋㅋ [결말포함]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영화:원더풀 고스트
결말포함된 영상이니 시청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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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와로 VS 11명의 용의자 ✨ 나일강 위 여객선에서 벌어진 완벽한 살인 사건! 2월 9일, 진짜 범인은 누구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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