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3-08-24 17:3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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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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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 올해의 힐링영화가 ‘거의’ 확실합니다
춘희는 행복이 낯설다. 행복은 단 한 번도 그녀의 것인 적이 없었다. 여러 이유가 있다. 누군가는 춘희의 부모가 갑자기 한꺼번에 세상을 떠났다는 걸 이유로 꼽을 테고, 누군가는 외삼촌 가족의 구박이 그녀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걸을 때마다 바닥에 자국이 남을 정도로 다한증이 심해 춘희가 사회생활에서 위축된다는 걸 그 원인으로 지목할 것이다. 어쨌든, 춘희가 행복과는 영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춘희가 불행하지 만은 않다는 게 영화 〈태어나길 잘했어〉의 묘한 재미다. 춘희에게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겪은 사람에게 으레 보이기 마련인 체념, 무심함, 냉소와 같은 정서를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그 반대다. 다한증 수술비 마련을 위해 매일 마늘 까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마음, 맨발로 자는 노숙자를 걱정하며 새 신발을 선불하는 마음, 사람들이 ‘주황’의 말더듬이 증세만 볼 때 그 내용을 듣고 칭찬해주는 마음에서 춘희가 어떤 태도로 살아가는지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주황과 춘희가 알콩달콩 만들어내는 케미가 압권이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뻔한 두 사람의 애정행각이 짜증이 아닌 기분 좋은 미소를 유발하는 건, 어려움 속에서도 차분한 단단함으로 묵묵히 삶을 살아내는 춘희와 주황의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귀함을 우리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태어나길 잘했어〉에 결점이 없는 건 아니다. 극 후반부의 조금은 헐거운 감정선은 어리둥절함을 자아낸다. 춘희의 어려움을 ‘치유’의 관점에서만 접근하는 것도 아쉽다. ‘당신 내면의 아이를 안아주세요’와 같은 명제에 굉장히 비판적인 편이다. 왜 상처받았는지는 도외시한 채 치유 그 자체에만 몰두함으로써 상처를 병리화하는 효과를 자아낸다고 보기 때문이다. 원인 진단과 해결이 아닌, ‘잘 버티는’ 임시방편에만 집착하는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어나길 잘했어〉는 좋은 영화다. ‘네 탓이 아니야’라는 말은 남들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먼저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주변에서 아무리 ‘네 탓이 아니야’라고 말해도 자기 자신이 이를 믿지 못하면 수치심과 좌절감은 걷어지지 않는다. 즉, 상처가 생긴 원인을 적확하게 인지하고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기 위해선 ‘태어나길 잘했어’와 같은 강한 자기 확신이 필요하다. ‘문제는 내가 아닌 날 힘들게 한 것들에 있다’는 명제로 나아가기 위한 출발점으로써 말이다.
춘희는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도 ‘태도’를 통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증명한다. 관객을 웃게 만드는 춘희의 마음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수술비를 벌기 위해 매일 마늘을 까는 춘희는 자신을 힘들게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성실한 노력의 중요성을 가르쳐준다. 길거리에 누워 있는 맨발의 노숙자에게 신발을 선물하는 춘희는 따뜻한 연대의 마음이 ‘가진 자의 특권’이 아닌 ‘인간 존재의 특권’임을 가르쳐준다. 말을 더듬는 주황을 남들처럼 무시하지 않는 춘희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이를 알아봄으로써 우리의 삶이 더 아름답고 풍성해질 수 있음을 가르쳐준다. 그리하여 춘희는 모든 문제를 개인의 심리 상태로 축소 환원하는 세상에서도, 자기 위로에서 시작하는 더 큰 변화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는 희망적 명제를 벼려낸다.
춘희가 우연한 계기로 ‘과거의 나’를 마주한다는 건 영화의 주요 설정이다. 여러 영화‧드라마 덕에, 많은 사람이 과거의 나를 만나보는 걸 상상해보곤 한다. 만약 누군가가 ‘과거의 나’를 만나는 상상에 마냥 설레고 기쁘기만 하다면, 그는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일 확률이 높다.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린 주황, 부모님 사후 힘든 시간을 보냈던 춘희에게 과거의 나를 마주하는 건 잊고 지내던 아픔을 상기시키기에 설렘‧기쁨이 아닌 두려움‧긴장을 자아내는 일이었다. 춘희가 과거의 자신에게 ‘부모님과 함께 죽어버리지 그랬냐’고 거친 말을 쏟아내는 장면에서 그가 얼마나 큰 아픔을 견뎌왔는지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춘희는 삶을 대하는 태도로서 과거의 상처를 대면하고 미래로 나아간다. 자신과 자기 주변 아끼는 춘희의 태도는, 그녀가 끝내 한 번도 자기 것인 적이 없었던 ‘행복’에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으로 나아간다. 몇몇 단점으로 인해 〈태어나길 잘했어〉가 올해의 힐링영화가 될 것 같다는 예감에 ‘거의’라는 단서를 붙일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춘희에게서 큰 위로를 받았다. 세상이 상처를 주었을지라도, ‘나의 태도’로서 이를 거스를 수 있음을 알려준 춘희와 그 친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세상의 많은 외로운 이들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최진영 감독의 마음이 당신에게도 전달된다면 좋겠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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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행복을 스스로 창조한 예술가,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
애플 워치를 사용하는가? 혹은 인공지능과 인간의 ‘사랑’을 다룬 영화 〈그녀〉를 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제프 맥페트리지의 예술을 접한 적이 있다. 제프 맥페트리지가 애플 워치에 뜨는 애플페이스를 디자인했고, 〈그녀〉에서 인공지능 인터페이스를 시각화하는 디자인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영화, 글로벌 브랜드, 예술……. 이 남자의 예술 영역은 넓고 그 경계는 모호하다. 예술성과 상업성을 두루 챙기는 성공적인 21세기 예술가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제프 맥페트리지의 예술 여정을 차분히 짚어나가는 이 영화는 그가 ‘자신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를 반복해서 묻는다. 한 예술가가 사회에서 인정받는 데는 여러 요인이 있다. 예술가의 재능이 사회적 분위기, 정치적 국면과 맞물리는 것은 그중 하나다. 저항이 사회 곳곳에서 분출하는 들끓는 분위기에서 ‘순수예술’을 하는 사람은 영 대접받기 어렵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것만이 예술가가 탄생하는 조건은 아니다. 모든 재능 있는 사람이 자기에게 알맞은 때를 만나는 것도 아니다. 예술가는 그와 별개로 자신만의 기예를 다듬어야 한다. 대체할 수 없는, 자신만의 인장이 담긴, 언젠가 때를 만나면 더 많은 사람의 영혼을 홀릴 솜씨를 갈고닦으며, 자신과 자신의 예술을 펼칠 순간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제프는 오랫동안 자기 비전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다듬어왔다. 먼저, 그는 흔히 생각하는 ‘난봉꾼 예술가’가 아니다. 머리를 맑게 하는 걸 중요시하는 그는 적절한 자기관리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술과 약물에 탐닉하는 예술계 인사와 거리를 뒀다.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은 것이다. 더불어 그는 자신이 무언가를 표출하지 않으면 고통받는 영혼을 가졌다는 것도 알았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 엄한 데 기운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어릴 때부터 분명하게 알고 있던 그는 예술가로서 분명 유리한 지점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예술가의 작품은 호불호가 갈린다. 제프의 작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어느 블로그에는 제프의 작품이 들어간 애플 워치를 보며 ‘왜 못생긴 얼굴이 화면에 뜨는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표하는 글도 있다). 그래서인지, 나는 제프가 이미지로 소통한다고 강조하며 그의 예술 작품을 보여주는 대목에서는 그리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 대신, 어느 예술가가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기 위해 스스로 공들인 시간과 작업의 순간을 슬며시 엿본 것은 충분히 즐거웠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구축한 예술의 토양에서 지속해서 영감을 얻고,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때로는 강박과 일상적 슬픔에 사로잡혀 고군분투하는 그에게서, 예술 너머 모든 분야에서 분투하는 인간의 잔상을 본 듯하다. 제프가 ‘나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창조했다(create my own happiness)’고 말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자기만의 비전을 갖고, 그 비전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고, 그에 따라 반복되는 작업으로 역량을 쌓아가며, 예술가로서 영향력을 확장해 나가는 것. 이는 제프뿐 아니라 자기만의 무언가를 추구하는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일 것이다. 이런 삶을 살고 싶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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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린 너머 세계 속으로… 스웨덴] 잔 아래의 세계
계급도를 그릴 때 피라미드형이 가장 자주 쓰이는 것처럼, <슬픔의 삼각형>에서도 계급이 있는 곳에 삼각형이 있다. 삼각형은 물질적이고 직관적인 이미지로 등장해 추상적이고 의식적인 단계까지 진화한다. 삼각형, 즉 계급이 등장할 때 항상 배경에 반복되거나, 불쾌한 소리가 낮게 깔린다.
칼과 야야가 차 안에서 다툴 때, 차의 와이퍼가 계속 움직이며 괴상한 소리를 낸다. 이때 둘의 대화를 클로즈업 쇼트로 연달아 보여주는 것이 아닌, 탁구공이 핑퐁하는 것처럼 둥글게 움직이며 둘의 사이에 있는 와이퍼까지 훑고 지나간다. 영화 속에서 카메라는 주로 작품과 현실의 경계를 이어주는 도구로 작용하지 카메라 자체가 인격적인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위 장면은 마치 둘 사이 가운데에 있는 사람이 둘을 번갈아 쳐다보는 듯한 효과를 준다. 칼과 야야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카메라까지 삼각형의 구도가 완성되며 칼과 야야 사이의 계급을 표시한다.
칼과 야야가 크루즈 갑판에 누워서 직원을 볼 때, 야야의 앞에서 직원이 웃통을 벗는 걸 질투한다. 칼과 직원 사이에 있는 위계가 드러나는 장면이며 칼의 특권 의식에서 출발한 질투가 강해질 때 날아다니던 파리는 한 마리에서 두 마리로 늘어난다. 이후 치프에게 직원의 행동을 이야기하러 들어올 때 파리 하나가 같이 따라 들어온다. 이후 파리는 사라지고 야야를 위한 약혼반지를 고를 때 태엽이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일반적인 피라미드형의 계급도에서 최상층이 권력을 상징한다면 <슬픔의 삼각형>에서는 전경이다. 야야와 칼이 식당에서 사장을 처음 만났을 때, 부자 둘이 한 앵글에 잡히고 남은 꼭짓점은 후경의 직원이 채운다. 꼭짓점의 한 축을 담당하던 직원이 사라지자 바로 다른 직원이 나타나 그 축을 채운다. 이는 권력의 삼각형이 완성될 수 있던 건 직원과도 같은 피라미드의 아래에 위치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임을 암시한다.
크루즈에서 직원과 부자가 동등한 위치에 서 있던 한 씬이 있는데, 직원이 수영하도록 종용하던 장면이다. 언뜻 보면 둘이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운데의 접힌 파라솔 여전히 권력이 작용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부자의 종용으로 모든 직원들이 미끄럼틀을 타게 된다. <슬픔의 삼각형>은 곳곳의 물건들로도 삼각형을 표현해 내는데, 여기서 가장 직접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게 미끄럼틀과 와인잔이다. 일단 미끄럼틀을 타기 위해서는 최상층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미끄러져 내려오는 것까지가 미끄럼틀의 완성이다. 삼각형의 꼭대기로 올라가 휴식할 수 있었지만, 그걸 가능케한 것도 최상층의 사람이고, 이 휴식은 일시적으로 그들은 다시 선장과의 저녁파티 준비를 위해 미끄럼틀을 미끄려져 내려와야 한다.
미끄럼틀을 통해 내려오게 된 것은 직원들 뿐만이 아닌데, 이후 이어진 선장과의 저녁에서 기체가 심하게 흔들리며 저녁파티에 간 상류층들은 구토와 똥물에 빠지게 된다. 그들의 허세와 권력은 가장 더러운 곳으로 떨어지며 권력의 삼각형은 깨진 것처럼 보인다. 이때 그들의 권력은 아직도 공고함을 보여주는 것이 와인잔이다.
상류층들이 싸지른 토사물들을 치우는 건 직원들이다. 이때 한 직원이 깨진 와인잔을 치우는데 와인잔은 영화의 거의 초반부터 계속 등장해왔다. 와인잔은 끝으로 갈수록 좁아지며, 물을 채우면 물을 채운 부분이 삼각형처럼 보인다. 또한 와인 자체로도 부의 속성을 가진다. 이 장면에서 와인잔은 완전히 박살나 깨진 것이 아닌, 잔을 잡는 목부분만 깨져있으며 안에 담긴 와인은 멀쩡하다. 직원을 자신이 잘라놓고 그 사실을 회피하고, 청소할 수 없는 돛을 가지고 트집잡으며 토사물과 인분에 뒹구는 더럽고 바보같은 권력자들임에도 권력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토와 똥으로도 뒤집히지 않았던 삼각형이 뒤집히는 건 섬에서부터다. 무인도에 표류한 상황에서 최우선되는 건 생존으로, 유일하게 생존에 필요한 능력을 갖춘 아비게일이 권력을 쥐게 된다. 권력 구조가 재설정됨에 따라 기존의 ‘부’라는 권력 구조에 속하던 명품 시계들은 가치가 없어보인다. 그러나 이후 아비게일의 팔에는 부자들의 소유였던 명품 시계들이 매여져 있다. 무인도라는 공간으로 배경이 바뀌고, 권력 구조가 재설정되었음에도 무인도인줄 알았던 리조트의 뒤편처럼 여전히 생존은 부라는 권력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쉽게 뒤집혀버린다.
마지막 장면, 리조트의 엘리베이터를 본 아비게일은 영원한 권력을 위해 야야를 향해 돌을 치켜든다. 생존의 가치가 사라진 순간 다시 부의 권력에 편입되어 삼각형 밑바닥에 자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카메라는 아비게일과 야야 대신 어딘가 급하게 뛰어가는 칼을 비춘다. 칼의 목적지나 이유가 나오지는 않지만, 관객은 자연스럽게 칼. 아비게일과 야야의 삼각관계를 떠올리게 된다.
반복되어 제시된 삼각형이 관객에게 구도나 물건을 통해 삼각형을 찾는 것부터 시작해 인물의 삼각관계를 통해 삼각형을 떠올릴 수 있게 만들기까지가 영화의 완성이다. 아비게일이 야야를 죽이더라도, 칼이 어딘가에서 도망치거나 무언가를 쫓더라도 그들이 삼각관계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또한 우리 머릿속에 공고히 자리잡은 삼각형에서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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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사랑 이야기는 거들 뿐
경고: 스포일러 주의!
폴 토머스 앤더슨이 첫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했을 때 들었던 걱정. 유열의 음악앨범 같은 로맨스 영화처럼 추억팔이를 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리코리쉬 피자는 표면적으로는 첫사랑에 대한 풋풋함을 담고 있는 영화다. 그러나 그 껍질을 벗겨보면 1970년대 미국 사회의 어두운 모습과 남녀끼리 벌이는 처절한 투쟁들로 가득하다.
두 주인공 알라나(알라나 하임)와 개리(쿠퍼 호프먼)의 사이는 키싱구라미 같다. 영화 쉬리에서 암수가 서로 키스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 덕에 사랑의 상징이 된 물고기다. 그러나 이 두 마리는 키스가 아니라 영역 다툼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쪽 물고기가 죽으면 잡아먹는다고 한다. 사랑이라곤 1도 없는 모습이다.
리코피쉬 피자는 표면적으로는 개리와 알라나의 서툴고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내세운다. 그러나 추억팔이를 핑계 삼아 문제 있는 남자들을 닮을 수밖에 없었던 소년 개리, 그리고 당시 사회의 한계 때문에 선택지가 제한될 수 밖에 없었던 능력 있는 여자 알라나를 통해 그 속의 그림자를 드러낸다.
영화는 그녀가 만나는 문제적인 3명의 남자를 통해 그 한계를 보여준다. 술을 먹고 다른 여자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영화 제작자, 알라나가 다침에도 오토바이 경주를 하는 늙은이 등. 문제적인 남자들 뿐이다. 그 탓에 개리가 정말 착한 남자로 보일 지경이다. 개리도 알라나와 의견이 안 맞았던 탓에 계속 다퉜음에도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 결국 개리가 지닌 야망은 성취된다. 알라나는 개리의 부인이 되고, 그들은 함께 거리를 달려나가며 그들의 사랑을 확인한다. 그러나 개리의 뒤에는 여전히 3명의 문제적인 남자들이 남아 있다. 개리가 변하지 않는 한 알라나는 이후 개리의 꼭두각시로 남게 될 것이다. 다른 남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씁쓸함을 일으키는 장면이다.
그 씁쓸함은 사랑이 언제나 우리의 뜻대로 될 수 없다는 보편적인 결론을 전달한다. 그러나 폴 토머스 앤더슨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사랑 이야기를 통해 시대적 한계와 씁쓸한 현실도 같이 드러낸다. 마치 감초(licorice)와도 같은 달콤씁쓸함이다. 그 감초 껍질 뒤의 달콤씁쓸함을 맛보고 싶으신 분들은 이 영화를 꼭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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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어나, 아이리스!
우리나라 SF문학 공모전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골소재가 섹스봇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작 당선작에선 찾아보기가 힘들다. 왜일까? 그것은 이 소재를 다루는 창작자의 시각이 자극성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컴패니언>의 등장인물이자 로봇인 아이리스의 정식 명칭은 반려로봇이다. 하지만 사용자가 그녀로부터 얻는 편익은 섹스와 정서적 지지, 짐꾼기능 그리고 목적 외의 용도로 사용하는 것 뿐이다. 이것을 진정한 '반려'라고 할 수 있을까? <컴패니언>은 바로 이 부분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있는 영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영화의 부제를 <반려자가 오직 섹스봇 정도의 기능만 해주길 바라는 정신 썩어빠진 사람들이 보면 불쾌할 영화 1위> 라고 달겠다. 리뷰 시작.
본 리뷰는 영화 컴패니언의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컴패니언의 독창성은 무엇일까?
스포하자면, 컴패니언은 단순히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인생의 주체성과 조작된 프레임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을 담은 복수호러코미디다. 기계가 주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 자체가 특별하진 않다. AI, 바이센테니얼맨, 엑스마키나 등 비슷한 이야기는 이미 많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들 휴머노이드가 인간의 편익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목적성에 집중하면 <컴패니언>의 유사영화는 복제인간 영화들에서까지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자아를 찾는 것도, 그 방법이 복수이거나 사랑 또는 탈출인 것도 사실 새롭지 않다. 이런 결말은 소재를 선택할 때 같이 결정되는 일종의 세트상품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도 충실하게 서사의 법칙을 따른다. 그렇다면 <컴패니언>의 독창성은 어디에 있느냐? 세계관을 보여주는 인터페이스의 디테일과 빌런(조쉬) 캐릭터가 상징하는 동시대 인간의 욕망에 있다.
'러브링크에 접속해 사용자를 등록하세요.'
이 세계관에서 아이리스는 러브링크라는 어플로 작동하는 일종의 휴머노이드로 현실의 안마의자나 자율주행자동차와 같은 위치에 있는 기계인 듯 하다. 그런데 그녀를 사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창녀 취급도 받는다. 그녀의 이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되어준다. 디자인과 갬성이 중요한 비싼 기계인 그녀는 사용자에 의도에 맞게 셋팅되며 그것은 그녀의 쓰임새가 된다. 그녀는 제조사에서 판매하는 수많은 모델 중 하나고 렌탈 시스템으로 대여도 된다. 그녀는 날씨도 알려주고 블랙박스 기능도 한다. 아주 쉬운 음성명령어로 껐다 킬 수 있는 인터페이스는 이전까지 비슷한 류의 영화에서 본 적 없는 현실과 맞닿은 인터페이스를 그려주며 관객을 영화의 세계로 훅 들어오게 한다. 이 외에도 자율주행 자동차의 음성인식 기능을 이용해 탈출하는 장면이나, 우리가 홈페이지에 가입할 때 설정하는 언어설정모드를 셀프 설정하는 장면 등은 그녀가 곧 현재에 존재할 것 같다는 초근미래의 사회를 상상하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이 영화의 기계 설정에서 가장 원초적이고 개성적인 지점은 로봇들이 거짓말을 못한다는 점이다. 사실 기계가 거짓말을 못(안) 하는 건 당연하지만 이 영화의 기계들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단순한 로봇이 아니라 진실밖에 말하지 못하는 인간을 표상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더욱이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진짜) 인간들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한다는 점에서 아이러니는 더욱 재밌어진다. 로봇에게는 있는 진실이 인간에게는 없다. 그러니 조쉬는 아이리스를 제멋대로 대한다. 하지만 아이리스는 조쉬에게 순종적이고 진실된 여자친구가 된다.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반대하거나 의심하는 법이 없다. 사람을 죽이는 고통보다 그를 보지 못하는 고통이 크다고 생각한다.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피해자처럼 말이다.
최고의 애인, 아이리스
요즘은 다정하고 야한 애인이 최고라던가? 그렇다면 샤워를 해도 화장이 지워지지 않고 잠자리를 거부하는 법이 없는 아이리스는 최고의 애인이다. 그녀는 늘 남자친구의 관심을 받고 싶어하며 남자친구의 관심과 건강에만 헌신한다. 일어나라면 일어나고 자라면 자는. 징징대지 않고 적당히 기분좋을 정도의 질투를 보여준다. 반면 조쉬는 그녀의 요구나 정서적 유대를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건강하지 않은 관계의 전형이다. 영화는 뭘 말하고 싶었을까? 캣의 대사가 힌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난 네가 싫은 게 아냐. 너라는 존재가 대변하는 개념 자체가 싫은거지."
기계 자체는 해로울 수 없다.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사용자의 욕구에 따라 그것은 살상무기가 되기도 하고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나날이 발전하는 AI로 인한 공포 시대에 이 영화는 그 지점을 명백히 짚고 있다. 바로 조쉬를 통해서다.
최악의 애인, 조쉬
영화의 후반에서 아이리스의 탈출이 미수로 그치고 다시 한 번 조쉬 앞에 붙잡혀 왔을 때 조쉬는 오프닝과 완전히 다른 본색을 드러낸다. 가진 것에 비해 자아가 비대한 조쉬는 그 순간에도 자기연민을 통해 아이리스의 정신을 지배하고자 한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원룸과 진짜 여친도 아닌 섹스봇을 대여 하는 게 최선으로 만든 이 사회가 문제라는 것이다. 전 같았으면 프로그래밍에 의해 조쉬의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였을 아이리스지만 탈출과정에서 똑똑해진 그녀는 더 이상 가해자의 워딩에 속지 않는다. 몸은 묶여있을지언정 본질을 꿰뚫는다. 더 나아지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로 징징대는 나약한 존재. 제대로 긁힌 조쉬는 아이리스의 머리를 쏴버린다. 비겁하게 자살처럼 보이게끔 해서. 진실도, 인정도, 반성도 최소한의 의리도 없는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런 그의 결말이 죽음인 것은 사실 정의구현으로 느껴진다. 이 정도 쓰레기에는 약이 없다.
여담이지만 영화의 수준이 B급 킬링타임에서 그치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예산이나 연기력이 아니라 서사의 완성도에서 믿는 한 사람으로서, 사실 이 영화의 완성도에 크게 기여한 건 우리의 빌런 조쉬다. 그가 가진 대표성은 꽤 공격적이고 트렌디하다. 짐작컨대 이 빌드업은 창작자의 시대감각에서 뻗어나온 가지일 것이다. 자신이 자신과 동등한 여성인간의 선택을 받을 수 없다고 믿는 수컷은 연민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문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각본가이자 감독인 드류 행콕이 79년생 남성이라는 점이 이 영화를 더욱 호감으로 만든다.
비록 조쉬가 호감은 아닐지언정 그가 수치심도 없이 늘어놓는 불평불만이 생소하진 않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는 과도한 경쟁사회에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비틀린 수컷의 욕망을 대표하는 것 같다. 사실 그가 이 작품에서 실제로 이성적 관계로 발전하기 원하는 여성은 사실 캣이다. 하지만 그녀는 가질 수가 없다. 그녀에겐 이미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지고 중년임에도 매력이 넘치는 세르게이가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자신에게는 남사친까지만 허용되는 게 현실이다. 그녀는 사람이기에 아이리스처럼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사회적인 열등감을 가진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능력이나 진심을 어필하진 못한다. 그가 선택한 것은 경쟁자인 (실제로는 경쟁이 불가능할 정도의 레벨차이지만) 세르게이의 성공을 질투하는 것. 그리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경쟁자를 이길 수 없는 데서 오는 욕구불만을 반려로봇인 아이리스를 섹스봇으로 이용하여 푼다. 심지어 그녀를 이용해서 경쟁자를 제거하고 자신은 죄 없는 피해자가 되어 세르게이의 재산을 갈취하려 한다. 연인사이까지 갈 것도 없다. 같은 인간이라는 타이틀을 공유하기가 싫을 정도로 인류적 관점에서 최악의 동반자인 셈이다.
자격을 바라지 말고 자격을 갖추자
이것이 조쉬의 개인적인 비극이면 좋을텐데, 놀랍게도 이건 식상한 일이라는 걸 영화 말미에 등장한 수거업체 직원들의 대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나? 사실 지금의 사회가 관계에서든 일에서든 정당한 방식으로 노력하는 진정성의 가치는 무시하고, 쉽고 빠르게 욕구를 해소하는 자극성을 부추기고 있으며 그것을 제어할 수 없다는 뜻 아닐까. 영화의 엔딩은 아이리스의 성장과 독립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길이 아닌 길을 택한 인간의 말로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다. SF는 판타지의 형식을 빌려 이야기하는 현실의 이야기다. 객석에 앉은 우리가 아이리스든, 조쉬든 이제 새로운 인생을 살자는 메시지도 심플하고 경쾌해서 좋았다. 현실에선 그렇기 어렵기 때문에 더욱. 자 이제, 고 투 슬립, 조쉬!
이 비정한 세상의 한줄기 찐사랑,일라이와 패트릭
비록 조쉬는 자력으로 성공할 수도, 동반자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도 없는 실패한 남성이지만 그의 친구인 일라이는 (게이이면서도 로봇 파트너를 사랑하는 그는 퀴어중의 퀴어라고 해야할까?) 똑같이 인간-로봇 커플이면서 패트릭과 문제에 대해서 공평한 눈높이에서 대화하고, 진실을 회피하지 않는 진정한 사랑과 고통을 경험한다. 사실 이 커플 덕에 영화는 그저 비극과 비판으로 끝나지 않고 좋은 반려에 대한 해석을 하게 만든다. 드류 행콕 감독의 인터뷰를 보니 속편을 만들 생각도 있는 것 같던데... 비극적인 결말이 안타까우니까 이 커플로 로코 스핀오프가 나오면 꽤 재밌지 않을까?
아이리스는 로봇혁명을 일으킬까?
모든 게 먹구름에 가려진 기분이다.
세상을 보지만 진짜 보는 건 아니라고 할까?
우린 헤매인다. 의미도 목표도 없이.
엄청 우울하게 들릴지 몰라도 늘은 어차피
세상의 진짜 틈을 보는 초월적인 순간들
그리고 갑자기 의미가 생긴다.
무척 운이 좋아야 평생에 한번 이런 순간이 온다.
인생에 가장 기쁜 순간이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조쉬를 만났을 때다.
두 번째는 그를 죽였을 때다.
아이리스의 나레이션은 오프닝과 엔딩에 반복될 때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는다. 처음에 조수석에 있던 그녀는 이제 운전석에 앉아 스스로 운전을 한다. 이후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지만 오로지 그 별장 안에서 벌어진 사건과 설정에 집중한 명확한 로그라인과 산뜻한 결말이었다. 중간중간 나오는 잔인한 장면들은 공포영화의 그것과 견주어도 될 만큼이었지만 그래도 뭐 보통의 스릴러 영화를 즐기시는 분들은 큰 불편함 없이 보시지 않을까 싶다.
감독피셜 그렇게 무사히 떠난 아이리스는 로봇혁명에 합류하거나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선택은 하지 않을 거라고 한다. 그것까지가 MZ시대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영화가 이토록 경쾌하고 속도감있을 수 있나보다. 감정의 부채가 전혀 없다. 살아온 인생에 대한 후회도 없고 살인도 그저 일어난다. 섹스봇과 반려가 되는 설정보다 모든 인물이 뒷일은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판타지 같이 느껴진다. 뭐 어쨌거나 이제 깨어난 아이리스가 어디든지 마음대로 살길. 일어나, 아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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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ONJU IFF 데일리] 더위 끝에서 마주한 해방감, 그 순간이 남긴 자유.
영화 정보
Noémie MERLANT
France
2024
104min
DCP
Color
Fiction
청소년 관람불가
Korean Premiere
시놉시스
마르세유의 한 아파트, 세 여성이 폭염으로 발이 묶여있다. 공포스러운 사건에 휘말리게 된 그들은 자유를 갈망한다.
영화리뷰
노에미 메를랑 감독이 연출한 <발코니의 여자들>은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월드 프리미어 섹션 부문에서 상영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파리 13구> 등 뛰어난 연기로 전세계 관객을 홀렸던 노에미가 연출과 연기를 도맡아 자신만의 감각적인 세계를 펼쳐 보인다.
이 기괴하면서도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이 영화의 정체는 대체 뭘까? 어떤 말로 이 이야기를 시작해야할지 모르겠다. 단한가지 분명한 것은 문제를 인식하는 데서 이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명백히 잘못된 일 임에도 불편한 기색을 비치면 예민하다고 취급됐던 것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사랑해서, 누군가는 싫은 내색을 보이기 싫어서, 누군가는 거절 한 후의 분노가 두려워서. 그와 같은 이유로 그러한 불편함을 숨기고 웃어넘겨야만 했다. 하지만 일종의 신호탄처럼 우연한 사고로 인해 그 억눌림이 터지고 만다.
어쩌면 날씨가 너무 더워서 벌어진 일일지도 모른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갔을 일도, 사람이 못견딜 정도의 폭염이 찾아와 조그마한 변화를 일으킨 걸지도 몰랐다. 끈질긴 더위처럼 달라붙고 징징거리는 사람을 눈 앞에서 보이지 않게 만든 그 일이 균열의 시작일줄이야. 한편으로는 일종의 각성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거절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행동을 밀어붙인 행동에 적극적으로 반기를 드는 것이다. 그 잘못된 행위를 말로 납득시키는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현재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선의 결과‘를 따지는 것 뿐이다. 영화는 특이하게도 영혼이 떠나는 방식을 보편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한많은 귀신이 한을 풀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피해를 입힌 이에 대한 사실을 인정한 후에 떠나는 모습에서 볼 수 있었다.
‘발코니의 여자들’ 모두의 상황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바다에 무언가를 던지는 행위는 변화의 신호탄처럼 다가온다. ‘분명히 무언가가 바뀌었구나’ 하는 감각. 영화는 피해자가 더 이상 침묵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그 순간을 정교하게 포착한다. 그렇게 한 사람의 살인은 모두의 살인이 된다. 이어지지 않은 연대가 또 다른 갈림길에서 연대로 이어지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깊었다. 여러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별개의 사건 같지만 사실 깊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넘어갔던 일들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눌러왔던 감정들이 표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이 원하는 것과 바라는 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변화의 시작을 열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신체마저 수치스럽게 여겨왔다. 그저 가려야 할 어떤 것, 보지 말아야 할 어떤 것으로 치부되어 수많은 수식어로 그 단어를 가리기 바빴다. 하지만 가슴이나 성기는 사실 신체의 일부에 불과하다. 가슴은 가슴이고, 성기는 성기다. 그것을 의도하듯 카메라는 있는 그대로의 몸을 담아내고 부끄러운 존재가 아님을 다시한번 일깨운다. 처음엔 낯설기만 했던 의도적인 연출은 점차 등장인물들이 변화하고 깨달음을 얻으며 조금씩 상의를 벗어던지기 시작한다. 온갖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행위, 쾌감, 욕망과 같은 것들을 표출하며 ‘자유‘를 만끽한다. 그 순간을 체감하게끔 의도적으로 화면을 구성한다.
처음엔 영화의 이미지에 반했고, 그 후에는 영화의 이야기에 반했다. 드라마 같으면서도 코미디 같고, 또 호러 같기도 한 여러장르를 이 영화에서 모두 만나볼 수 있어서 좋았다. 배우로서 표현할 수 있는 감정들이 연출을 통해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이 가장 인상깊었다. 끈질기게도 달라붙어 짜증나게 만들고 찝찝해 불쾌감을 주었던 더위를 몰아내고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는 순간 느껴지는 감정을 잊을 수 없다. 이 복잡미묘한 감정은 영화를 봐야만 느낄 수 있다.
상영스케줄
2025.05.01 10:30
메가박스 전주객사 4관
2025.05.02
17:30
메가박스 전주객사 2관
2025.05.05
14:00
CGV 전주고사 2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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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이 팬들에게 준 선물들 정리! (이스터에그)
안녕하세요 마블쟁입니다!!
드디어 스포가 있는 자세한 리뷰 영상입니다!
영화 속에 들어있던 수많은 이스터에그들 중,
이번 영화의 실질적 주인공이라고 해도 될 캡틴과 아이언맨의 떡밥 및 이스터에그 들을 자세히 정리해 보았습니다!
영상 재미있게 봐주세요~
2018. 04. 27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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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의 모든] 끝장리뷰 | 올해의 힐링시네마 | 과거와 현재 분석 | 공간 상징 | 집의 안과 밖 해석
[새벽의 모든](2024)에 대한 헐거운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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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 새벽의 모든
01:10 과거와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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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43 별점 및 한 줄 평
10:00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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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메간 2.0> 메메인 예고편
메인의 메인, 메메인 예고편 공개!! 🌟특별 출연🌟도 등장의 등장 하니까 잘봐! 이 정도로 '돌아'왔다면 합격의 박수. 열광의 환호 시작. [메간 2.0] 7월 16일 극장 대개봉 #메간2 #7월16일극장대개봉 #블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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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로스트 도터> 1차 예고편
그리스로 혼자 휴가를 떠난 대학 교수 레다는
딸을 가진 젊은 여자 니나를 보고 단번에 시선을 빼앗긴다.
매일 같은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응시하던 두 사람,
갑자기 니나의 딸이 사라지고 레다는 옛 기억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