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블러2025-05-02 17:21:57
[JEONJU IFF 데일리] 기록과 역사의 경계에서 풀뿌리 기억을 말하다.
영화 <호루몽> 리뷰
시놉시스
호루몽: ‘버리는 것'이라는 어원을 가진 곱창구이의 일본 말. 도축하고 남은 쓰레기 내장을 주워다 먹은 사람들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건너간 한국인들. 일본인들은 내장을 주워다 구워 먹는 모습을 보며 멸시했지만 지금은 모두가 사랑하는 음식이 되었다. 호루몽은 일본에서 살아온 자이니치에게 삶과 역사이다. (출처: 전주국제영화제)
Cast
감독: 이일하
출연: 신숙옥, 케이코
리뷰
역사학과 고고학의 가장 큰 차이점은 과거 사건을 추론하는 방식에 있다. 고고학이 토기나 건축물, 뼛조각 등 물질적인 흔적을 바탕으로 과거를 추론한다면, 역사학은 기록된 문헌에 기반하여 과거를 탐구한다. 교육과정은 물론이거니와 일상생활에서 우리에게 훨씬 더 친숙한 단어는 역사다. 달리 말해 인간은 대부분 기록에 의존하여 과거를 재구성한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기록할 권한을 지닌 자는 언제나 힘 있는 자였으며, 그러므로 기록되지 못한 자들의 목소리는 너무도 쉽게 스러졌다. 그것이 21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가능해진 풀뿌리 기억의 정의다. 역사 속에 미처 기록되지 못한 자들의 목소리. 망각된 사건과 잊힌 기억들. 그리고 이름없이 쓰러진 사람들.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관동 대지진 당시 사망한 조선인의 수는 231명이지만, 대한민국 임시 정부 산하의 독립 신문 특파원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전국 각지에서 6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그러나 일본어를 못하는 조선인 여성을 묶어놓고 트럭으로 깔아뭉개 죽였다는 생존자의 증언이 존재함에도 이제와서 정확한 피해자 수를 집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가, 어디서,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 짐작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들이 왜 죽었는지뿐이다. 다만 그들은 조선인이라서 죽었다. 이름도, 무덤도, 기록도 없이.
<호루몽>은 러닝타임 내내 자신의 역할을 주인공인 자이니치 3세, 신숙옥의 목소리를 빌려 천명한다. DHC TV와 명예훼손 재판을 추적하는 이 영화의 목적은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서라고. 기록이 없어 한국인도, 일본인도, 심지어는 북한 사람도 될 수 없었던 자이니치들의 삶을 지켜본 그로서는 본능적으로 기록 없는 역사의 서러움을 체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신숙옥은 오키나와 평화시위대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그가 돈을 벌기 위해 사람들을 선동한다는 소위 우파 논객들의 발언을 일본 법정의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소송을 시작한다. 그러나 풀뿌리 기억을 기록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는 참혹했다. 신숙옥은 이 사건으로 가족들이 공격 받을까 봐 거의 연을 끊다시피 살았고, 그 자신도 만연한 협박과 미행 때문에 도망치듯 독일로 떠나야 했다.
그러나 영화가 지향하는 바는 자이니치와 우익, 일본인과 조선인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그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이러한 구분선의 틈새에 사는, 또는 살았던 사람들의 연대를 통해 이러한 구분선 자체를 지울 수 있음을 말한다. 신숙옥은 독일에 있는 동안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발자취를 따라 걷고, 한국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숨결을 따라 마시며 오직 자이니치만을 위해 싸우는 대신 일본의 공식적인 기록에서 밀려난 사람들과 연대를 택한다. 마지막 대법원 재판에서까지 일본 사회는 신숙옥을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 또는 조선학교(일본에 있는 북한계 민족학교) 출신으로 규정하려 하지만, 그는 인간의 정체성이 그렇게 단순하게 네, 아니오로만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래서 기꺼이 똑같이 억압받는 풀뿌리 기억들을 위해 맞서 싸운다. 단 하나의 들풀은 바람에 쉬이 쓰러지지만, 땅 속 뿌리로 단단하게 얽힌 들판은 짓밟히고 짓밟혀도 또다시 새싹을 틔울 수 있기에.
실제로 자이니치나 한국인에 대한 혐오 감정이 얼마나 만연하냐는 관객의 질문에 신숙옥은 영화 속에서 열정적으로 자이니치에 대한 혐오 발언을 쏟아내는 여중생이 사실은 BTS의 팬이라는 사실을 밝히며 일본 내 K-POP 및 K-Drama의 인기와 혐한 감정은 절대 배타적인 관계에 있지 않다고 설명한다. 너와 나를 구분지으려는 노력이 무색하게 그들의 혐오는 모순 위에 세워진 모래탑과도 같다. 그래서 신숙옥은 그 모든 원색적인 비난과 협박 속에서도 한 걸음 더 내딛기를 멈추지 않는다. 일본 사회의 아주 작은 양심이라도 함께 손을 잡고 전진한다면, 그것이 비단 5mm에 불과할 지언정 다음 세대를 위한 전진의 발걸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호루몽>을 보는 내내 영화의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영화는 근대 러시아 영화인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관객의 행동 변화를 유도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고, 현실의 일부분을 잘라내어 확대하는 돋보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호루몽>은 영화의 또다른 가능성을 외친다. 대 생성형 AI의 시대에, 영화는 망각된 자들을 위한 기록으로서 역사, 그 자체가 될 수 있다고.
상영스케줄
2025.05.01(목) CGV 전주고사 3관 14:00 (상영코드:125)
2025.05.03(토) CGV 전주고사 4관 17:00 (상영코드:345)
2025.05.04(일) 메가박스 전주객사 2관 10:30 (상영코드:412)
2025.05.07(수) CGV 전주고사 8관 17:30 (상영코드:721)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기간
2025.04.30~2025.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