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작가2023-01-06 15:40:57
복수라는 이름의 덫
넷플릭스 [더 글로리] 리뷰
[더 글로리]라는 작품을 보기 전에도, 다 보고 난 후에도, 이게 김은숙 작가의 작품이라는 게 새삼 놀랍다. 내가 제대로 챙겨 본 김은숙 작가의 작품은 '시크릿가든'에서 멈춰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꾸준히 봐온 사람들이라면 변신이랄 것도 없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행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촘촘하게 짜인 스토리 속에서 '복수'라는 단어가 더 빛을 발한다. 자극적인 이야기와 양산형 막장 드라마가 판을 칠수록, '복수'의 무게감은 점점 줄어만 갔다. 본디 복수란 '원수를 갚는다'라는 뜻. 그리고 원수란 '원한이 맺힐 정도로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나 집단'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원한이란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하여 응어리진 마음'.
살면서 우리가 누군가에게 원한을 가질만한 일이, 물론 생겨서도 안 되지만, 몇 번이나 될까. 때때로 마음속에 어떤 분노가 응어리지려고 할 때마다, 나약한 우리 자신은 주변의 누군가에게 반드시 도움을 받아서 그것을 덜어내며 살아간다. 그래서 복수라는 단어는 흔하지만, 결코 흔한 일은 아니어야만 한다.
누군가 '복수'를 다짐했다면, 그 무게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너무 묵직하고 무거워서, 누군가 덜어내주길 바랐지만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더 글로리]가 좋았던 이유는 '복수'라는 단어를 결코 쉽게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작품 속의 주인공이 복수를 다짐할 때를 보라. 소중한 사람이 죽임 당했을 때, 자신이 공들여 만들어 온 것들을 망가뜨렸을 때. 요즘은 사회적으로 그 시선이 한 층 성장하긴 했지만, 여전히 학교폭력은 다른 고통에 비해 별것 아닌 듯 취급당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와중에 학교폭력과 복수라는 단어가 만나다니. 그렇게 씁쓸하고 안타까울 수 없다. 한 사람의 인생이 망가지고 짓밟혔지만, 누구도 그 원한을 덜어줄 수 없었기에, 결국 동은은 복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복수를 하지 않으면, 동은의 인생은 의미가 없을 테니까.
"세상 사람들은 다 알아도, 내 딸은 알면 안 돼."
[더 글로리]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삶을 극명하게 대조시켜 보여준다. 물론 피해자가 고통의 수렁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가까스로 살아남을 때, 가해자는 편하게 호의호식한 것만이 대조는 아닐 것이다. 박연진에게는 문동은이 가지지 않은 딱 한 가지가 있다. 바로 그간 살아온 삶에 대한 '책임'.
돈이 많고 백이 있다고 해서 그 책임이 무효화되지는 않는다. 회피할 순 있지만, 영영 책임을 소멸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 증거가 바로 박연진의 딸, 하예솔이다. 연진은 예솔이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 이는 가해자 역시 자신이 저지른 과오에 대해 결코 마음의 짐을 완전히 덜어낼 수는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용서는 없어, 그래서 영광도 없겠지만."
[더 글로리], 영광이란 뜻이다. 영광은 '빛나고 아름다운 명예'라는 뜻인데 여기에서 명예란 '세상에서 훌륭하다고 인정되는 이름이나 자랑, 또는 그런 존엄이나 품위'를 말한다. 명예란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 인간은 개개인의 존엄을 인정받고 살 권리가 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삶은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건축가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던 동은은 존엄성을 잃고 땅에 뒹굴었다. 김은숙 작가는 학교폭력의 피해자들이 원하는 것은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를 통한 삶의 회복, 즉 잃어버린 존엄성을 되찾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연진을 비롯한 가해자들은 동은의 존엄을 돌려줄 생각이 없다.
동은의 말은 반대로도 성립한다. 그 영광을 돌려받지 못할 테니 용서도 없는 것이라고. 김은숙 작가는 '동은의 복수를 옹호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긴다. 그 말인즉슨, 동은이 바라는 복수는 곧 가해자들이 누리고 있는 영광을 처참히 부수고 그들의 존엄성도 꺾어버릴 예정이란 뜻. 그렇게 되면 어느 쪽에도 영광은 남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면, 가해자들의 존엄성은 이미 동은에게 폭력을 가하던 그 순간 사라져버린 것은 아닐까? 인간은 자신의 존엄성을 지워버린 후에야 타인의 존엄성을 앗아갈 수 있다. 인간이 좀비처럼 타인을 물어뜯을 수 없는 이유는 상대의 고통을 통해 나 역시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다. 남의 존엄성을 짓밟으며 내 존엄성을 지킬 수는 없다.
외적으로 반짝이는 것은 꾸며낼 수 있다. 하지만 내면의 반짝임은 돈으로 살 수 없는 법이다. 메인 포스터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글로리'라는 단어는 다 타고남은 재처럼 하늘을 향해 날아가며 사라지고 있다. 모두의 이름에서 빛나는 영광은 이미 지워지고 있다. 폭력을 다짐한 동은에게도 더 이상의 존엄성과 영광은 남지 않을 거라는 비극적인 결말이 예상된다.
OTT 시장에 유명한 작가와 감독이 내놓은 작품이 학교폭력에 대해 심오하고 진지하게 다룬다는 것이, 슬프면서도 한편으로는 희망적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찝찝한 마음을 들게 하는 작품이라서 시즌 2 역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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