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건2023-02-02 13:11:36
보이지 않는 사냥꾼과 사냥감
[영화] 헌트 스포일러 리뷰
처음 헌트라는 영화의 포스터를 보았을 때, 1980년대를 다룬 시대극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감상 전에 스포일러나 해석을 전혀 보지 않고 이 영화를 봤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밌게 봤다. 칸 영화제에 초청되고 거의 모든 평론가들에게 호평을 받은 데뷔작이라는 점 때문에 꽤 기대를 한 상태로 영화를 봤음에도 그 이상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시나리오 자체가 흥미롭기는 하나 지금까지 없던 독창적인 얘기라고 볼 수는 없을 텐데, 연출을 통해 더욱 긴장감 있고 새로운 느낌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 출신 감독의 데뷔작이라는 배경을 전혀 모르고 봐도 센스 있게 잘 만든 영화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후 스포일러)
1980년대는 우리나라에서 영화의 배경으로 쓰기 가장 좋은 시대이기도 하면서, 아직까지도 다루기 조심스러울 수 있는 시대인 것 같다. 영화 헌트에서는 '5.18 민주화 운동',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 '이웅평 귀순 사건'등 실제 80년대에 발생했던 역사적 사건들의 재해석을 발견할 수 있다. 1980년대는 한국 현대사 속 민주주의의 암흑기이면서 경제적으로는 세계 경제의 긍정적 흐름과 3저 호황에 기반한 여유가 있었던 시기이다. 공권력에 의한 폭력이 절정해 달해 수많은 아픔을 낳았기 때문에 영화 제작에 있어 조심스러울 수 있지만, 눈치 보지 않고 까내릴 수 있는 절대 악 한 명이 있다는 점에서 편한 면도 있을 것이다. 이는 타란티노의 오락 영화에서 악역을 나치로 설정해서 얻을 수 있는 효과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해당 시기를 다룬 한국 영화들은 '1987'. '변호인', '화려한 휴가', '26년', '박하사탕' 등이 있는데, 대부분의 영화들이 사건 자체의 참혹함을 강조해 감정적 동요를 이끌어냈으며 그 정도가 과해 오히려 비판을 받기도 했다. 반면에 헌트는 1980년대를 배경 정도의 비중으로 설정해 놓고 이에 기반해 한국에서만 만들 수 있을 첩보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기존의 시대극들과는 다른 훌륭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위의 이유들 때문에 이 영화는 큰 감정 소모 없이 볼 수 있는 오락 영화이다. 하지만 영화가 아무 의미 없는 장면들로 채워져 있거나,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작중 어디서 왔냐는 질문에 '남산에서 왔다'라며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이나 '우리는 혁명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들을 총칼로 위협하는 독재를 끝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국민을 학살한 살인자를 인정하고, 조국을 등지고 살라니... 매우 모욕적이군요.'와 같은 대사들은 뻔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으며, 영화 속 등장인물의 개성을 완성시키는 좋은 대사들이었다고 느껴진다. 역시 영화 속 불의에 대한 저항과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강조는 우리 모두에게 항상 감동을 주는 것 같다. 영화를 보면서 놀랐던 점은 당시 남산에서 행해지던 고문들에 대한 묘사가 꽤나 직접적이었다는 것이다. '이 선생'으로 짧게 등장하는 고문기술자의 모습은 보너스.. 너무 적나라해 흥행에 실패했던 '남영동 1985' 정도는 아니지만 통닭구이와 같은 고문들이 여과 없이 등장해 이 영화가 1980년대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개인적으로 선혈이 낭자한 장면들은 밥을 먹으면서도 아무 타격 없이 볼 수 있지만, 고문 장면은 어느 영화에서 나와도 쉽게 쳐다볼 수가 없다.
시대극이 아닌 첩보 액션으로 이 영화를 보았을 때도 훌륭한 점이 많다. 시대의 특징을 잘 녹여낸 등장인물들의 설정은 이 영화 속 공기를 항상 긴장감 있게 유지시켜주며, 안기부라는 조직과 공간은 이 영화를 가장 한국적인 첩보 영화로 만들어주었다. 이 영화는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국가안전기획부의 국내 담당과 해외 담당 두 차장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첫 장면부터 두 차장의 갈등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헌트'라는 제목처럼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물어뜯으려 하는 사냥개들의 이야기를 그리는 척을 하다가 어느 한 장면을 기점으로 사냥의 대상을 바꿈으로써 신선함을 주고 있다. 영화 속 반전이 드러나며 마치 영화의 장르가 바뀌는 듯한 신기한 느낌을 받았으며 지난 장면들 속의 복선이 떠올라 더욱 신나게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안기부의 두 차장이 알고 보니 모두 대통령의 적이라는 설정은 배우들의 연기와 등장인물의 배경 때문인지 허무맹랑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위에서 설명했듯 이 영화는 역사적 사건들을 캐릭터 확립에 자연스럽게 활용해서 시나리오의 설득력을 높인 것 같다.
배우들의 연기 역시 훌륭했다. 한없이 가볍게 표현했을 때 '똥줄 타는 연기 갑'인 이정재 배우는 이번 영화에서 안기부 차장이면서 북측 간첩이라는 긴장 상태를 러닝타임 내내 표정으로 보여주고 있다. 항상 스트레스와 경계심이 강해 보이면서도 치밀한 성격을 가진 사람의 연기를 자연스럽게 잘 소화하신 것 같다. 정우성 배우의 연기 역시 놀라웠는데, 작중 김정도는 국민을 지키는 것이 목적인 군인이지만 5.18 민주화운동을 진압했다는 것에 대한 PTSD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미국 CIA 요원이 김정도에게 베드로 사냥을 그만두라고 했을 때 짓는 표정이나 동지를 자기 손으로 고문해야 할 때 보이는 표정은 이 영화 속 최고의 연기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여담이지만 이정재 배우의 감독 데뷔작이라 그런지 정말 많은 스타 배우들이 카메오로 출연했기 때문에 한 명 한 명을 알아보는 소소한 재미도 있었다.
물론 장점만 가지고 있는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반전이 드러나는 그 시점까지 정말 손에 땀을 쥐고 영화를 보았는데, 그 이후 결말까지의 전개는 초반부에 비해 좀 힘이 빠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결말을 예측할 수 있어서 그랬던 것도 있고, 모두가 기대했던 장면이 나오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다. 추가적인 갈등이나 위기가 하나 더 발생했으면 결말까지 긴장감이 유지되지 않았을까...? 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또 이 영화가 투톱 영화이기 때문인지 다른 등장인물들이 모두 너무 기능적으로 활용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위에서 말했던 결말 부분이나 반전의 순간에 조연들이 활약할 수 있는 부분이 좀 더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위 두 가지를 제외하면 딱히 흠잡을 곳이 없는 영화이다.
마지막으로 결말을 보았을 때 나는 '손에 피를 묻힌 자는 이루거나 되돌아갈 수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정도와 박평호는 결국 자신의 대의나 목적을 위해서 손에 피를 묻히고 타인을 이용했던 인물들이다. 결말에서 두 명의 계획이 실패하는 것을 보면 결국 평화라는 것은 특정인 몇 명이 아니라 평범한 사회 구성원 대다수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점과, 독재자 한 명이 죽거나 엘리트들끼리 협상을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감독이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평화적 수단과 과정을 통해 이룩한 평화만이 정당화될 수 있으며, 더 길게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에 박평호는 유정에게 자신과는 다른 삶을 선물함으로써 시대의 변화를 약간 앞당겼다고 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