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3-02-03 08:46:22
그 모든 엄마와 언니를 위한 기도
〈라인〉 리뷰
7/10
모녀 관계, 자매 관계는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 관계의 복잡한 역동이 가장 명료하게 드러나는 장소 중 하나다. 이들은 서로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안다. 아들, 남자 형제는 ‘바깥 일’만 잘하면 가족의 자랑이 되지만 딸, 여자 형제는 여기에 더해 관계를 유지하는 물질적·감정적 노동까지 잘 수행해야만 인정받는다. 불리한 위치에서 불평등한 노동을 떠맡은 이들은 서로를 깊게 이해하지만, 서로를 닮기는 거부한다. 이 관계만 벗어나면 더 좋은 삶이 가능하다는 듯 자꾸 그 관계 밖으로 나가려 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얽힌 혈연이라는 관계는 지겹도록 끈끈한 것이어서 이들을 쉽게 놔주지 않는다.
〈라인〉은 바로 이 모녀, 자매 관계를 다룬다. 영화는 딸 마르가레트가 엄마 크리스티나를 구타하기 위해 미친 듯이 쫓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엄마가 딸을 때리려는 게 아니다. 성인이 된 딸이 엄마를 때리려는 거다. 격렬한 난투극 끝에 두 사람 모두 큰 부상을 당하고(심지어 크리스티나는 장애를 얻는다), 마르가레트는 경찰로부터 석 달간 크리스티나에게 100미터 이내로 접근하지 말라는 행정 명령을 받는다.
또 다른 주인공이 있다. 마리옹은 마르가레트의 막냇동생이자 크리스티나의 딸이다. 앳된 얼굴의 마리옹은 언니와 엄마를 모두 사랑한다. 둘 사이에 더 큰 문제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집 주위 100미터를 파란색 페인트로 동그랗게 칠해 ‘라인’을 그리기도 한다. 화가 많은 마르가레트와 예민한 크리스티나가 또다시 맞붙으면 두 사람과 함께하기가 영 어려울 것 같기 때문이다.
모녀 관계와 자매 관계는 아슬아슬하게 길항하며 좁힐 듯 좁혀지지 않는다. 영화에는 마르가레트와 크리스티나가 왜 몸싸움을 벌였는지는 분명하게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유를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늘 남자를 바꾸며 연애하느라 어린 마리옹에게 소홀한 크리스티나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쉽게 주먹다짐에 휘말리는 마르가레트가 모녀로 만났다면, 갈등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크리스티나는 딸 셋을 출산한 이후 경력이 망가졌다. 앨범까지 발표한 촉망받는 피아노 연주자였던 그는 출산과 육아를 하며 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피아노 강습으로 근근이 세 딸을 키웠다. 크리스티나는 딸을 사랑하지만 딸들의 존재로 자기 삶이 망가졌다는 생각을 떨치기가 영 어렵다. 크리스티나가 애인을 자주 갈아치우며 세 딸보다 그에게 더 많이 의존하는 데서도 그녀가 딸들에게 느끼는 거리감을 짐작할 수 있다. 크리스티나는 불안하고 예민하다. 반면 마르가레트는 어머니의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았으나 쉽게 분노하는 성격 때문에 동료들과 원활한 팀 활동을 이어가지 못한다. 크고 작은 싸움으로 작고 조용한 마을에서 늘 문제아 취급을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동생 마리옹만큼은 끔찍이 아낀다. 매일 마리옹이 그려 놓은 선 밖을 서성이며 동생에게 음악을 가르쳐주는 마르가레트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런 둘을 모두 사랑하고자 하는 마리옹의 마음은 간절하다. 마리옹은 ‘유일한 친구’인 하나님에게 애타게 기도한다. “엄마와 언니를 동시에 사랑하고 싶어요.” 마르가레트가 파란 선을 넘지 못하도록(엄마와 새로운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엄격하게 감시하던 마리옹은 3개월의 분리 기간이 끝나자마자 가장 먼저 나서 자신이 힘들게 그린 선을 지운다. 마침내 어색한 표정으로, 별일 없었다는 듯 대면하는 마르가레트와 크리스티나의 뒤에는 마리옹이 있다. 서로를 향한 애증으로 잔뜩 엉킨 크리스티나와 마르가레트가 모녀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건, 미성숙하고 불안한 어른을 보듬고자 온 힘을 다한 마리옹 덕분이다.
마리옹이 짊어진 책무는 그녀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이다. 모녀/자매 관계의 복잡다단함은 당사자 간의 내밀한 소통과 더불어 그녀들의 실존 조건 역시 바뀌어야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다. 언젠가 어른이 될 마리옹이 부담에 짓눌리지 않기를, 자신이 품은 성숙함의 깊이를 더할 수 있기를, 엄마·언니와 조금은 더 편안히 공존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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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혹하게 친절한 '플레이그라운드'
* 2022년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플레이그라운드 Playground, 2021
벨기에 / 드라마 / 72분
감독: 로라 완델
가혹하게 친절한, <플레이그라운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자기 자신을 위한 도구로만 사용할 때, 우린 그 끝에서 말살된 인간성을 발견한다.
그 이후 우리가 경험하는 건, 지독한 폭력과 끝나지 않는 후유증의 활기.
과연 도구란 무엇을 의미할까. 인간에게 도구란 무엇일까. 언제부터 우린 서로를 쓸모 있는 물건으로만 인식하게 되었을까. 도구화되어버린 인간은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올 수 없을까? 인간이 인간을 도구로 만들어버리는 가장 원초적인 이유는 또 뭘까. 결국 우린 죽을 때까지 서로를 짓밟고 살아가지 않으면 살 수 없을까? 하나의 질문엔 답이 아닌 수백 개의 질문이 따라온다.
하지만, 우린 매번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는다.
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아니 확신을 목도한 적이 있다.
바로 앞에서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몇 번을 입으로 소리 내며 따라 했지만, 결코 믿기지 않은 대답.
동시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해버린 대답.
'본능'.
살아남기 위한 본능, 존재의 증명을 위한 본능, 심장이 뛰고 있음을 확인하기 위한 본능 같은, 모든 본능.
<플레이그라운드>는 인간이 가진 폭발적인 본능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오직 아이들의 세계를 통해.
출처: 영화 <플레이그라운드> 스틸컷 (다음)
일곱 살 노라는 학교 정문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오빠, 아벨은 불안해하는 동생에게 쉬는 시간마다 꼭 놀아주겠다 약속한다. 그러나 노라는 선생님의 손을 잡고 학교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계속 뒤를 바라보며 아빠에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다시 날 데려가 달라는 간절한 신호를 보낸다.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 노라의 불안한 눈빛. <플레이그라운드>는 어른을 대변하지 않는다. 처음으로 등교하는 딸을 조마조마하게, 한편으론 대견스럽게 보는 아빠의 얼굴 대신 아이의 패색 짙은 얼굴을 보여주기 시작했을 때부터, 영화는 가혹하게 친절하기로 마음먹는다.
중심에는 아이들의 세계가 있다.아이러니한 건 그들의 세상이 사실상 모든 어른이 겪었던 '과거'란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나의 아이가 겪었던 현재가 나의 과거였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않으면서, '나는 그랬었다'란 과거의 향수를 들먹인다. "누구나 다 그런 시절이 있어."라고 말이다.
쉬는 시간, 전교생이 뛰어노는 운동장으로 노라가 첫 발을 뗀다. 운동장 구석에서 친구들과 있는 아벨을 찾지만, 오빠는 노라를 어떻게든 멀리 떨어트리려 애쓴다."여기 오지 마 전학생 패고 있어, 여기 있으면 너도 맞아."
툭- "점심 뭐 먹을래?" 같은 말투로 아무렇지 않게 폭력을 말하며 노라를 밀어내는 아벨. 하지만 노라는 이미 얼굴도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한 일진에게 목이 잡힌 채 고통스러워한다. 아벨은 자신의 동생이라며 일진을 말리지만, 포식자는 결코 예외를 두지 않는다. 이 공간에서 왕은 자신이며, 따라서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없음을 명확히 전달한다. 결국 아벨은 노라를 구하기 위해 일진에게 주먹을 휘두르다, 땅바닥으로 고꾸라진다. 일진은 마치 동물의 왕국에서 자신이 사자인 게 당연하다는 듯, 약자는 강자의 먹이가 되는 게 순리라는 듯 아벨을 사냥감으로 설정한다.
감히 권력자의 업무를 방해한 죄로 아벨은 포식자의 무리에서 추방된다.출처: 영화 <플레이그라운드> 스틸컷 (다음)
노라는 일진들의 새로운 타깃이 된 아벨을 어떻게든 구하려 애쓴다. 선생님께 일진들이 오빠를 괴롭힌다고 열심히 소리치지만, 아벨의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 낯선 환경 속에서 마음 편히 친구도 사귀지 못해서 속 시끄러운데, 거기에 오빠는 아빠에게 괜히 심각해진다며, 사실을 숨길 것을 주문한다. 노라는 오빠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고갤 말없이 끄덕인다. 침묵,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진실. 아벨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고, 노라는 아직 그 본능이 주는 공포와 무력감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오빠는 이미 자신이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 안다.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아이들에게서 시작돼 끝난다는 현실. 자신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일진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 일진의 유희를 위한 도구로 자신이 쓸모없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역할. 어른들의 도움이 필요 없어서가 아니라, 어떠한 방식으로도 효과적이지 않을 거란 확신. 그 확신을 본능적으로 느껴버린 자신의 직감.
아벨의 침묵인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출처: 영화 <플레이그라운드> 스틸컷 (다음)
반면 노라에게 학교는 새로운 세계다. 온전히 안정적이고 안전한 가족이란 '울타리'에서 나와 처음 맞이하는 사회. 우린 사회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나'와는 다른 '타인'을 만난다. 타인의 언어와 행동에 충격을 받기도 하고,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반대로 뿌듯함을 얻기도 한다.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들을 온몸으로 받아낸 후엔 반드시 한 번은 사회적인 관점으로 가족을 의심한다. 전에는 늘 완벽하고 좋았던 나의 울타리가 어딘가 이상해 보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인간은 성장과 후퇴를 반복적으로 경험한다. 신발끈을 묶는 법을 모르고, 매일 엄마가 아닌 아빠가 학교 앞에 서 있는 일이 이상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노라처럼 말이다.
변기에 머리가 처박혀 고통스러워하는 오빠를 무력하게 보고만 있어야 하는 노라. 아이는 잠깐의 생각할 여유조차 주지 않는 파도에 힘들어한다. 눈에 보이고, 피부로 느끼는 아벨의 발버둥과 비웃는 친구들의 눈빛도 더는 견딜 수 없다. 결국 노라는 등교를 거부하는 오빠를 억지로 학교 안으로 밀어 넣는 아빠에게 오빠가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며 진실을 고백한다. 나름 노라에겐 최선의 방법이었다.
아빠가 움직이면 지금까지 걱정했던 일들이 다 사라질 거라 믿는 아이의 순수한 맹목에서 나오는 마음.
그러나 집 안에서 느꼈던 당연한 것들은 집 밖을 나오는 순간 먼지로 사라져 버리는 법이다. 노라는 내 세상의 중심에 서서 고민들을 시원하게 해결해줬던 아빠가 더 이상 영웅이 아니란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
아벨은 일진들을 자신을 앞에 세워놓고 사과를 강요하는 아빠의 대처에 얼어붙는다. 아직 어린아이들이니 무섭게 소리치고, 따끔하게 혼을 내면 착한 아이가 되어 내 아들과 친구가 되진 못해도, 다신 괴롭히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아빠의 허망을 눈앞에서 봐야 했기 때문이다. 어린 아들보다 더 순진하고 무능력한 아빠의 문제 해결 방식은 사건을 더 잔인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고 만다.출처: 영화 <플레이그라운드> 스틸컷 (다음)
<플레이그라운드> 속 어른들의 대처엔 전부 그러한 망상이 숨어있다. 어른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스스로를 격려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 자위하고, 앞으로의 일은 다 괜찮을 거라 착각한다. 울타리 밖으로 나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정체도 알 수 없는 괴물에게 쫓기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은 원래 그래'란 태도를 고집할 수 있는 이유도 전부 여기에 있다. 시간이 해결해줄 거란 얄팍한 믿음 아래 정작 자신의 아들은 오줌싸개와 쓰레기로, 딸은 더러운 오빠의 동생으로 또 함께 놀기 싫은 애가 된 것도 당연히 몰랐겠지.
어른이 되면, 진짜 문제를 모르는 척 등가죽에 숨길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내 의지로 꺼내지 않으면 절대 어둠 속에서 고갤 내밀 일이 없는 그런, 본능, 심보."문제 해결했어, 또 그러면 말해."
"오빠한테 문제가 좀 생겼어, 하지만 아빠가 오셨으니 괜찮아."
"누구든 도움받고 싶은 대로만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것 같아."
"넷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도록 모두 노력하는 거지?"
"그럼 이제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악수해."
"그 일을 막을 수 있었으면 막았을 거야."학교란 작은 공간이 세상을 배우는 가장 좋은 환경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라 해서 진짜 아이들의 세계를 모를까? 아니, 우린 다 알고 있다. 단지 마음가짐을 다르게 먹는 거지. 최대한 긍정적으로, 최선을 다해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또 연마했기에 가능한 거다. <플레이그라운드>는 이 지점을 꼬집는다. 카메라의 시선이 노라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를 보호하고 도와줘야 할 어른들이 세상을 초월한 말을 내뱉을 때도 화면 속엔 항상 아이들의 불안한 낯빛뿐이다.
정말 좋게 생각한다고 좋아지는 비극이 있나? (솔직히 그런 비극은 한 번도 본 적 없으면서.)
처음부터 그들의 말이 가진, 겹겹이 쌓인 시간의 층을 이제 막 무리에 들어간 아이들이 어떻게 알까.
노라의 아빠가 기다려야 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시간의 내성이란 말조차 알아들을 수 없는 아이들이 직접 겪어야 할 현재를 함께 해아 한다. 부단히 아프면서 또 후회하면서 세상을 사는 법을 배우는 일이, 정작 아이였던 자신에게도 무척 힘든 일이었다는 걸 인정하면 더 좋고. 본래 인간이 인간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감'이 필수다. 눈앞에 있는 벽을 넘지 못하고 주저앉는 후배에게, 선배가 해야 할 가장 좋은 위로법이 "나도 그랬어, 아니 너보다 더 최악이었지."인 것처럼 말이다.출처: 영화 <플레이그라운드> 스틸컷 (다음)
그러나 어느 누구에게도 공감과 해결책을 받아보지 못한 노라는 모래사장에서 죽음을 생각한다.
재미있게 모래를 만지며 장난치는 친구들 사이에서 떠도는 괴소문에 몰입한다. 자신이 앉아있는 모래 아래에 얼마나 많은 시체가 잠들어 있을까. 운동장이 거대한 무덤이 되어버린 순간, 아이는 묘비 하나 없는 공동묘지에서 두려움보다 더한 공포를 느낀다. 뛰어놀기 좋고 떠들기 좋았던 광활한 땅엔 어떻게든 벗어날 수 없는 폐쇄성이 깃들여져 있었다. 오빠의 사건을 두고 "가끔은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는 일도 있거든"라며 뻔한 변명을 반복하는 선생님처럼, 아벨보다 어린 노라에게 계속 오빠를 위해 전부 다 말해달라는 아빠처럼.노라는 결국 그토록 원했던 친구의 생일 파티에도 초대받지 못하자 꾹 참았던 감정을 오빠에게 터트린다. 친구의 초대장을 찢어버리면서 다시 외톨이가 되고, 친구들 앞에선 오빠를 옆에 두고 "내 오빠 아니야."라고 선언한다. 동생의 말 한마디에 아벨은 아무 말하지 못하고 고갤 숙인다. 죄인처럼, 다신 웃을 수 없는 형벌을 받은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노라에게 주어진 선택은 아벨 밖에 없었다. 아벨이 자신과 유일하게 놀아준 친구(이스마엘)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그것은 애석하게도 본능이었다.
아이가 먼저 배운 게, 옆 사람과 함께 사는 법이 아니라 인간을 도구화하는 방식이라니.
노라는 아벨에게 화를 내며 자신의 죄책감과 실망을 해소하려 하고, 아벨은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어둠에서 나가기 위해 친구를 모래 구덩이에 넣는다. 일진이 자신의 영역을 확인하기 위해 아벨을 괴롭혔듯, 아이들은 제각각의 본능을 무기 삼아 남을 옭아맨다. 누구도 나서서 알려주지 않았던 행동들을 네 발로 기어 다니다가 두 발로 일어나 걷듯이 자연스럽게 혼자 습득한 것이다. 정작 어른들이 원했던 것은 이게 아니었을 텐데.출처: 영화 <플레이그라운드> 스틸컷 (다음)
아벨은 자신을 말리는 노라에게 날카롭게 묻는다. 다시 내가 맞는 게 좋냐고. 차라리 맞는 것보다 때리는 게 낮지 않냐고, 나의 폭력이 이 거지 같은 상황을 잊게 해 준다고, 나쁘고 좋고를 떠나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노라는 아벨의 변화가 전부 자기 탓인 것 같아 죄책감에 시달린다. 단숨에 오빠를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만든 장본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왜 노라가 그런 프레임에 갇혀야 할까.
더구나 오빠는 이스마엘을 괴롭히면서 자신을 자해하고 있다. 본인 스스로 느끼지 못할 뿐이지.
마지막까지 어른의 역할은 보이지 않는다. 뚜렷하게 드러나는 건, 일련의 사건들을 전부 지나갈 과거로 치부하는 그들의 행보다. 결국 아벨을 막아선 건 동생 노라였다. 아무도 관여하지 않았던 아이들의 폭력 세계에 아이인, 노라가 선택한 건 두려움에 터져 나온 호소와 몸을 던진 애원이었다. 아벨은 이스마엘을 모래 구덩이 안으로 넣으려는 자신을 막는 노라를 밀어내려 하지만, 제발 이러지 말라는 동생의 외침에 마침내 멈춰 선다. 이윽고 자신을 꽉 안고 있는 노라를 안으며 억눌렀던, 참아야만 했던 참담한 슬픔을 토해낸다.
아벨 역시 이 현실이 노라만큼이나 버겁고 두려웠을 테니까. 돌고 도는 악순환을 끊어내지 못하고 휩쓸려가 버렸던 오빠의 손을 잡아끈 노라의 용기가 <플레이그라운드>의 정점을 찍는 동시에 마지막을 장식한다.<플레이그라운드> 메인 포스터
살아남기 위한 본능은 필요하다. 존재의 증명을 위한 것도, 내가 살아있게 하는 것도 당연히 삶을 사는 데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완벽이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폭력을 실수로 포장하곤 한다.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본능을 당연한 특권으로 받아들인다. 사람이 사람을 이용하고 버리고 또다시 이용하려 애쓰는 것을 자연현상처럼 여긴다. 자연재해로 얼렁뚱땅 넘겨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세상에 너무나도 많다.
<플레이그라운드>가 보여준 노라의 용기는 인간의 본능을 가치 있게 활용한 결과이다.
우리가 계속 추구하고 바라보고, 따라가야 하는 본능. 나를 위해 남을 도구화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한 일이란 걸 먼저 아는 본능. 그것은 습득이 가능하다. 그러니 분명히 가치 있는 일이지.
학교폭력에 무감각한 어른들의 모습도 영화가 보내는 중요한 메시지겠지만, 인간으로서 인간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곱씹게 만드는 것이 제일 귀중한 메시지가 아닐까.결말이 주는 씁쓸함은 폭력의 고리를 끊은 주체가 어른이 아닌 아이란 점이다.
다행스럽단 느낌은 결국 노라가 해줬단 마침표의 영향이다.
하지만 <플레이그라운드>가 끝까지 남긴 건 불편함이다. 우리가 조금의 희망을 발견했다며 안도하고 '그래 다 끝났다' 생각한 순간을 예상하고 기다렸기 때문이다.
가혹하게 친절한 건, 아벨의 침묵을 이해한 것처럼 다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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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피엔드 (2024)
근미래의 도쿄, 지금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진 시점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해피엔드>의 배경이 된 일본은 겉보기에 현재와 크게 다른 사회처럼 비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거리 곳곳에서 얼굴 인식으로 신원을 파악하는 경찰이라던가, AI 시스템으로 학생들을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벌점을 매기는 학교 등 사회적 요인들을 통해 지금보다 기술적으로 발전을 이룬 미래를 무대로 삼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끔 한다.
초반부까지만 해도, 극의 주축인 학생들의 삶 또한 현시대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소꿉친구인 '유타(구리하라 하야토)'와 '코우(히다카 유키토)'는 친구들과 함께 약간의 일탈을 일삼으며 한밤중 학교에서 음악을 즐기는 십 대들일 뿐이고, 아무도 없는 학교에서 자유롭게 낭만을 만끽하며 학교생활을 보내는 게 전부일 듯했다.
하지만, 학교에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한 것을 계기로 '유타'와 '코우'가 살아가던 세계는 달라지기 시작한다. 교장은 학생들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감시 카메라 시스템을 도입하고, 학교는 일종의 작은 판옵티콘 사회가 되어버리고 만다. 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며 수시로 벌점이 매겨지고, 주인공들의 아지트와 같던 동아리실마저 빼앗긴다. 그제서야 '코우'는 재일 교포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거리에서 신분을 증명해야만 했던 일본 사회 나 자신의 위치를, 그리고 권력의 부조리함을 체감하기 시작한다.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세상이 뒤바뀐 게 아니었다. 눈앞에 있음에도 보지 못했던 현실에 눈을 뜬, 철없던 10대 소년의 시야가 한 발짝 넓게 확장되었을 뿐이었다.
극중 정권을 잡기 위한 극우 세력은 투표권을 가진 국민들의 표심을 잡기 위해, 외국인을 배척하는 정책을 내세워 불안감을 조성한다. 시민들의 '안전'을 지키겠다는 그럴싸한 프레임을 짜기 위해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도구화하고, 갈라치기를 통해 권력을 다잡겠다는 의도가 분명히 담겼다. 재일 교포 4세인 '코우'는 일본에서 태어나, 평생을 일본에서 살았음에도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노골적인 차별을 받는다. 거리에서 음악을 크게 틀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과 집까지 동행해 영주권자임을 증명해야 했고, 교장에게는 출신을 빌미 삼아 차량 파손 사건의 범인으로 의심받았으며, 어머니가 운영하는 가게가 혐오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알 수 없는 분노와 답답함에 혼란을 겪고 있던 그는 교장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던 여학생 '후미(이노리 키라라)'와 부당한 체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사회 운동가들을 접한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이들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고, 비슷한 감정을 공유한 '코우'는 더 이상 한밤중 학교에서 테크노 비트에 맞춰 춤추던 해맑은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지진을 계기로 학교에서 벌어진 사건사고, 그리고 이를 꼭 빼닮은 사회의 모습으로 인해 '코우'의 가치관은 송두리째 흔들리고, 바뀌었다. 하지만, 그와 달리 절친 '유타'는 여전히 친구들과 밤을 지새우고, 음악과 함께 노는 게 좋은 이전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사고의 차이는 결국 관계에 균열을 불러일으키고, 극 초반부의 천진하게 '사랑해'를 외치던 소꿉친구들은 서로에게서 난생처음 느낄 법한 거리감을 경험한다. '코우'는 지금 당장 웃고 즐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생각하지만, '유타'는 집회 따위로 세상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며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고뇌하지 않는다. '음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같은 꿈을 키우며 함께할 줄 알았던 두 사람에게 앞으로 가는 길이 달라질 수도 있겠다는 균열의 틈새가 벌어지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친구들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도 컸기에, 그들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던 '유타'의 삶도 결국은 흔들림이 찾아든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각자의 길을 향해 떠날 친구들과의 이별이 다가오고 있었고, 음악 장비를 함께 옮기던 '코우'가 사소한 이유로 또다시 경찰에게 신원 확인을 목적으로 붙잡혀 가는 광경을 무력하게 마주한다. 이는 일본인인 자신과 처지가 극명하게 달랐던 친구의 입장을 처음으로 헤아릴 수 있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며 무거운 서브우퍼를 낑낑대며 옮겼으나 폐쇄된 클럽 앞에서 허탈감을 맞아야 했던 '유타'는 분명 몸소 느낀 바가 많았을 것이다. 자신의 짐을 덜어내주었던, 소중한 존재를 부당한 권력에 의해 잃게 될 수도 있다는 것. 그는 비로소 '코우'가 왜 자신과 다른 길에 발을 내디뎠는지, 작은 가능성에도 몸을 던져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는지 조금은 이해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는 <해피엔드>라는 제목과 모순되게 '코우'와 '유타'의 끝없는 우정, 학생들이 자유를 되찾은 학교의 모습, 혼란스러운 일본 정부에 찾아든 평화 등 무엇 하나 뚜렷하게 행복한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소 어설프지만 용감한 연대로 교장실에서 농성을 펼친 외국인 학생들이 거둔 약간의 성과만을 비출 뿐 '그런다고 달라지는 게 있어?' 같은 냉소를 받아칠 만한 극적인 마무리는 없다. 그럼에도 '해피엔드'라는 타이틀이 참으로 잘 어울리는 작품인 이유는, 같은 길로 함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 반드시 새드 엔딩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메시지를 남기기 때문이다. 엔딩 신에서 친구들과 헤어진 '코우'와 '유타'는 서로에게 인사를 건네며 각자의 길로 향한다.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잠시 프리즈된 화면처럼 끝나버릴 수도, 다시 움직이는 장면처럼 문제 없이 지속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두 사람은 십 대의 끝자락에서 서로가 너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제는 결코 같은 길을 걸어갈 수 없음을 안다. 함께 갈 수 없다는 건, 관계의 끝을 의미하는 걸까? 두 친구는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상대와의 차이를 깨닫기도 했지만, 동시에 각자의 해피 엔딩을 위해 자신의 방식대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 또한 알게 됐다. 비록 함께할 수는 없을 지라도, 미소 띤 응원과 함께 멀리서 지켜봐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렇기에 마지막에 '코우'와 '유타', 그리고 다른 친구들이 나누는 작별에는 '해피엔드'라는 제목을 붙이기에 부족함이 없다.
* 씨네랩 크리에이터 자격으로 시사회에 참석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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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 하면 생각나는 영화 모음.zip
안녕하세요! 씨네랩입니다.
벌써 12월의 반절 이상이 지났네요. 그 말은 새해까지도 얼마 남지 않았고,
그 이전에 크리스마스도 곧 다가온다는 이야기겠죠?
그래서 오늘은 '크리스마스'하면 생각나는 영화
총 디섯 편을 추천드릴까 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씨네랩이 추천하는 크리스마스 하면 생각나는 영화 모음집!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٩( ᐛ )و
당신이 잠든 사이에
ⓒ 네이버 영화
synopsis
짝사랑하던 남자가 코마 상태에 빠져 위기에 처하자 이를 구해낸 루시는 본의 아니게 그의 가족에게
약혼녀로 소개되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가족과 어울리면서 불안하면서도 행복감을 느끼는데…
cine pick!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하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당신이 잠든 사이에>. 영화를 보고 난 사람들
모두가 제목에 대한 호평을 보냈는데요. 90년대의 감성과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끼고 싶다면
<당신이 잠든 사이에> 추천 드립니다.
노엘 다이어리
ⓒ 네이버 영화
synopsis
크리스마스 무렵, 어릴 때 살던 집을 정리하려고 고향에 돌아온 소설가가 생모를 찾고 있는 여자를
만난다. 과연 낡은 일기장이 두 사람의 과거와 마음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줄까?
cine pick!
베스트셀러 작가 리처드 폴 에번스의 소설 <노엘의 다이어리>가 원작인 영화 <노엘 다이어리>는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인간 관계를 다룬 따뜻하고 훈훈한 영화이다.
클라우스
ⓒ 네이버 영화
synopsis
편지 6천 통을 배달하라고요? 소통은커녕 싸움만 일삼는 마을에서요?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에
좌절한 우체부. 그냥 포기하려던 차, 장난감 장인을 만나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줄 테니 편지를 쓰라고 하는 거야!
cine pick!
제73회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에서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한 <클라우스>는 산타클로스를
소재로 한 독특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애니메이션 영화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영화이다.
캐롤
ⓒ 네이버 영화
synopsis
1950년대 뉴욕, 맨해튼 백화점 점원 테레즈와 손님으로 찾아온 캐롤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서로에게 강한 끌림을 느낀다. 그리고 두 사람은 통제할 수 없이 서로에게 빠져들기 시작한다.
cine pick!
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고,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비롯해 감독상,
촬영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 받았다. 영화 속 필름의 질감과 50년대 뉴욕의 풍경이 영화의
매력을 더하였다.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
ⓒ 네이버 영화
synopsis
반복되는 할로윈 준비가 지겨운 호박 왕 잭은 모두에게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전하고 싶다. 하지만
잭의 신나는 임무는 산타를 위험에 빠뜨리고, 온 세상의 착한 아이들에게는 악몽이 되고 만다!
cine pick!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 <크리스마스 악몽>은 개봉된지 13년 만에 3D
작업을 통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었다. 따뜻한 감성과 뮤지컬의 요소가 곳곳에 들어가 재미를
더하였다.
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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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쏟아지는 금빛 토사물, <슬픔의 삼각형>
이 리뷰는 하이스트레인저 씨네랩에서 초대받은 시사회에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참석 및 관람한 후 작성되었습니다.
지난 전주 국제영화제에서, 루이스 부뉴엘 감독의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을 보고 나오는 길에 친구에게 질문했다. ”부르주아들을 놀려 먹는 영화들은 왜 이렇게 재밌을까?” 더 넓게는 인종적, 젠더적 권력을 전복하는 내용이 구미가 당길 때도 있다. 어떤 영화들은 그들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고, 조롱하며 어떤 때에는 특별한 잘못이 없음에도 죽여 버리기도 한다. <슬픔의 삼각형>은 이렇게 ‘위에서 아래로 올라가는’ 유머를 ‘블랙 코미디’라는 장르를 단 채 스크린에 걸렸다. 결과는 8분 간의 기립박수와 완전히 압도당한 채 용산역 지하철 플랫폼을 터덜터덜 걷는 나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슬픔의 삼각형>이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부터, 도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이런 멋진 제목을..!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고편과 황금색의 무언가를 토해내는 포스터를 보고는 저 사람들이 과연 어떻게 해서 벼랑 끝까지 떠밀릴지 확인하게 되기만을 기다렸다.
보기 전에는 구토를 하는 장면이나 침몰하는 요트, 식탁 앞에서 사진을 찍어대는 젊은 남녀의 모습 같은 이미지 때문에 <더 메뉴>처럼 긴강감을 높이면서 조금 더 신랄한 유머를 구사하는 정도를 예상했다. 그리고 요트 위가 가장 중요한 공간일 거라는 상상도 했다. 그런데 젊은 커플과 그들의 유치하기 그지없는 (그러나 너무나 시의성 있어서 미치도록 웃긴) 갈등에서 시작해 요트, 무인도로 옮겨 가는 파트 분배가 흥미로웠다. <슬픔의 삼각형은> 너무 고지식하지도, 지나치게 가벼워서 생각을 못하게 만들지도 않는 적절한 유머를 구사한다. 그러면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깔깔 웃을 수밖에 없는 장면, 놀람과 역겨움, 웃음을 동시에 토해내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도록 만드는 장면들로 빈틈없이 들어차 있다.
<슬픔의 삼각형>은 루이스 부뉴엘의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처럼 반복적이고 연극적으로 우스꽝스러운 연출을 이어나가거나, <더 메뉴>처럼 하나의 소재를 붙들다 이내 불타 없어져버리지 않는다. 고통을 주기보다는 오물을 뒤집어씌우면서 조롱하고, 제 업보 때문에 바보같이 죽어버리는 캐릭터보다는 깔끔하게 수장해버리는 방향을 택하면서 구조를 하나씩 전복해나간다. 거기에 매끄러운 촬영과 과장된 캐릭터를 그렇지 않게 연기하는 배우들이 더해지면서 세련된 영화가 된다.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이 직접 말했듯, 동시대 관객들이 극장에서 한꺼번에 웃음을 터뜨리며 즐길 수 있는 영화로 거듭났다. 먼 미래에 누군가가 21세기를 비틀어 묘사한 가장 신랄하고 웃긴 영화를 찾는다면 주저 없이 추천해 주고 싶다. 바위를 든 채 번뜩이는 눈을 한 가모장제 사회마저.
실은 시사회를 처음 가봐서 티켓 수령할 때부터 엄청 우왕좌왕했다… 줄이 두 개로 나뉘어 있는 데에서 1차 당황, 직원분께서 내게 ‘구토 방지용 봉투’만 주시고 팜플렛은 안 주셔서 2차 당황. 하지만 출석체크를 무사히 마치고 이 넓은 용산 CGV에서 내가 해냈다..!! 하는 기분으로 영화관을 나섰다. 상영관에 들어갔는데 자리도 너무 마음에 들었다ㅎㅎ 비록 옆에 앉은 남자분이 지각 + 상영관 안에서 음주 + 중간에 퇴장하기…를 모두 해내셨지만 영화도 정말 재밌었고 첫 시사회 경험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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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숨바꼭질해, 그리고 다신 잡히지 마
<행복한 라짜로>(2018)와 <키메라>(2024) 이후에야 우리에게 도달한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초기작 <더 원더스>(2014)는 어쩌면 그의 작품 중 가장 놀랍고도 아름다운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 <키메라>까지 무르익어 간 로르바케르의 재능이란 주로 노골적이면서도 섬세한 대비를 활용하는 재주에 있었다. 이쪽과 저쪽, 차안과 피안, 도시와 시골, 빈자와 부자, 순수와 교활을 빈번히 오가며 비추는 데에 누구보다 능숙했던 로르바케르이기에, <더 원더스>의 모호하고 꿈과 같은 상징들은 더욱 예상 밖의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의도된 침묵, 도망친 벌들과 낙타, 빛을 마시는 동작과 동굴에서의 춤 등은 메인 플롯인 고립된 아이들의 성장 서사에 불쑥불쑥 난입하며 알쏭달쏭한 풍경을 연출한다. 그러면서도 관객을 속이기 위해 철저히 계산되었다거나 일부러 에둘러간다는 느낌 없이 순진하고 투명한 이야기를 전한다. 실증에서 출발해 환상을 얹은 것이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임을 생각해보면 대개 직관적이고 거칠은 쪽에서 부드러운 은유 쪽으로 나아가는 게 많은 창작자들이 밟는 전철일진대, 알리체 로르바케르는 처음이 가장 은유적이었고 지금이 가장 직설적인 화법을 발전시키면서 일종의 역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더 놀랍다.
<더 원더스>는 군견을 데리고 밤길 수색을 나온 군인들이 등장하는 이색적인 오프닝부터 ‘이야기’에 대한 집중력을 단번에 끌어올린다. 이 군인들은 나머지 서사의 진행과 전혀 무관하며 주연 인물들과 엮이지도 않는다. 이야기 바깥에 위치한 그들은 외딴 곳의 민가를 발견하고 “저런 곳에도 집이 있다”고 소리치기 위해서 아주 짧은 순간만 등장할 뿐이다. 눈이 침침한 어둠 속에서 불을 비춰 시작을 알리는 이들은 곧 우리에게 전해져 올 ‘이야기’를 낭독할 전기수의 바람잡이, 연극의 첫 막이 시작할 때 열리는 무대의 장막, 세헤라자데의 천일야화를 이끌어낼 동생 두냐자데와 같은 역할을 하는 도구다. 군인의 외침 덕에 우리는 “저런 곳”의 거주민인 주인공들을 마주하는 즉시 그들의 ‘이야기’가 해석될 수 없는 동화처럼 미완으로 남으리란 사실을 직감한다.
그 이야기란 이렇게 시작된다. 한밤중 군인들의 수색으로 집 밖이 훤해지자 여자아이들이 하나씩 깨어난다. 큰딸인 젤소미나는 화장실에 가겠다고 떼쓰는 동생 마리넬라를 단도리하고 더 어린 쌍둥이 동생들은 덩달아 깬 금발의 젊은 어머니에게 매달린다. 젤소미나는 동생들을 달래는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거실의 하나뿐인 TV를 점령하고 소파에서 잠든 아버지를 익숙한 듯 일으켜 침실로 올려보낸다.
양봉업자인 아버지 볼프강은 문명과의 단절을 추구하는 기이한 라이프스타일을 나머지 가족들에게도 강제하는 가부장이다. 장녀답게 눈치 빠른 젤소미나는 벌을 돌보고 채밀기 밑의 꿀 양동이를 한밤중에라도 갈아줘야 하는 큰 책임을 자연스레 지게 된다. 딸이라기보단 특급 일꾼을 대하는 듯한 아버지의 태도에서도 젤소미나는 부녀 간의 유대를 찾아내고 나름의 뿌듯함을 느낀다. 어머니 안젤리카(알바 로르바케르)는 대체로 다정하지만 더 어린 아이들을 돌보느라 젤소미나에게 면밀히 신경써줄 겨를이 없고, 남편의 기행, 일방적인 통보, 대책 없는 금전 감각에 질리고 포기한 듯 대체로 반기를 들지 않는다.
양봉과 가사에 밀려 학교는 제대로 다니고 있을지 혹은 다녀본 적은 있을지 걱정스럽고, 직접적인 폭력이나 악의는 없더라도 정황상 아동학대와 노동 착취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척박한 환경에 불과 열두 살의 젤소미나는 덜렁 놓여있다. 종종 창고에서 젤소미나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동생 마리넬라와는 살짝 터울이 지고, 또래 친구 조이아와는 많이 다른 가정환경 탓인지 살짝 어색한 거리감이 있기에, 그애는 너무나도 철저히 혼자다. 언제나 고독했 라짜로와 아르투처럼.
토스카나의 새파란 바다와 드넓은 평야는 무척 아름답지만 그것을 ‘자연 상태 그대로’ 보존하는 것은 그 시점에 이미 불가했다는 걸 현대의 관객은 알고 있다. 그러나 볼프강은 아직 다가올 운명을 모르거나 모르는 체 하고 있다. 전통적 농법과 양봉을 고집하느라 늘 돈도 모자라고, 이웃들과도 척 지고, 아침마다 집 밖 침대에서 깨어나 사냥꾼의 총성에 미친듯이 화내며 모두를 쫓아내려 한다. 볼프강은 외부에서 밀려들어온 자본에 ‘농민끼리 단결해 맞서야 한다’고 펄펄 날뛰면서 거대한 흐름에 홀로 맞서고자 한다. 굳건한 반골의 의지만큼은 존경스러우나, 아직 미성년인 자식들마저 투쟁에 억지로 동원되고 있다는 게 문제다.
외골수 아버지와 힘이 부친 어머니 사이, 과중한 노동과 외로움에 조용히 짓눌려가는 젤소미나에게 어느날 갑작스레 외부로부터의 충격이 두 번이나 가해진다. 하나는 그 시골의 계곡까지 커머셜 쇼 프로그램 광고를 찍으러 온 인기 배우 ‘밀리’, 다른 하나는 아버지가 가족들과 상의 없이 데려온 독일 소년 ‘마틴’이다.
아름다운 백금발에 여신 같은 차림의 밀리(모니카 벨루치). 그는 네 자매의 이름을 물어봐주고 가장 수줍어하는 젤소미나를 다정히 쳐다보며 예쁜 머리핀을 선물한다. 밀리와의 만남으로 인해 젤소미나는 바깥 세상과의 교류를 더욱 갈망하고 밀리가 홍보하던 ‘전원의 기적’ 쇼에 출연하고 싶다는 소망을 남몰래 품게 된다. 그 와중 소년원에 다녀온 아이들의 재사회화를 위한 위탁 가정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마틴이 이 가족에 배정되는데, 기관 담당자가 “어긋난 아이들이 흔히 그렇듯” 방화나 절도 전력이 있다고 태연하게 부연하자 엄마 안젤리카가 딸들이 걱정되지도 않냐며 볼프강에게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한다. 네 딸들은 커가는데 진정한 일꾼이 되어줄 ‘후계자’ 아들은 태어나지 않자 부족한 노동력에 초조해진 볼프강이 제멋대로 위탁(이라고 말하고 합법적 아동착취라고 불러도 모자라지 않을)을 신청해놓곤 당일이 되어서야 말하는 걸 잊었다며 실토한 것이다.
휘파람으로 노래할 줄 알지만, 이탈리아어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 불청객인 마틴. 마리넬라가 “잘생겼다”며 소근거릴 정도로 진한 외모로 소녀들에게 이상한 긴장을 불러일으킨 마틴. 로르바케르 영화 속 꾸준히 수수께끼의 존재로 그려지는 ‘이방의 남자’에 대한 아이디어가 여기서도 발견된다. 직계 가족이 아닌 성인 여성 코코 외에 한 사람의 군식구가 더 늘자 젤소미나 가족의 역학은 빠르게 변화한다. 키는 작지만 힘센 마틴을 보며 아버지가 흡족해하는 표정, 자기들을 보며 “계집애들이란!”하고 내뱉는 표정을 비교하며 젤소미나와 마리넬라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진다.
단박에 아버지의 신뢰를 뺏어간 마틴을 향한 젤소미나의 질투, 아버지를 향해 피어나는 반항심, 그런 딸을 두고 “쟤가 없으면 난…” 안될 거라며 친구에게 조용히 드러낸 볼프강의 진심, 마틴과 젤소미나처럼 외로운 이들끼리 필연적으로 품게 되는 서로를 향한 호감 어린 호기심, 잠깐씩 어그러지는 젤소미나와 마리넬라의 우애까지. 어지러이 뒤섞이는 감정들 속 아버지는 여전히 강경하게 젤소미나가 나가고 싶어하는 ‘전원의 기적’ 쇼에 신청하지 말라고 명령하지만 아이는 이미 멈출 수 없는 격정에 몰래 신청서를 써낼 각오도 불사한 채다. 꿀을 팔러 나갔던 어느 날 시내에서 마주친 폭풍우는 잦아들지 않고, 바람에 날리지 않게 몸으로 벌통을 꽉 누른 트럭 안에서 젤소미나는 돌연 “우리 거기 참가해요”라며 눈물을 흘리고 만다. 그러니까 그건 더이상 삶의 고독과 혼란을 혼자 감당할 수 없어진 아이의 몸을 뚫고 나온 절규에 가까웠을 것이다.
결국 가족은 우여곡절 끝에 ‘전원의 기적’ 쇼에 양봉업 대표로 출연하게 되긴 한다. 젤소미나가 몰래 신청하고 심사위원이 다녀갔단 걸 뒤늦게 알게 된 볼프강이 말을 잃을 정도로 분노하고 상처받긴 했지만. 여기서 알리체 로르바케르 특유의 아주 섬세한 터치가 정념을 제대로 건드린다. 아이들이 꿀을 엎고 마리넬라가 다치고 심사위원을 맞이하고 난장판을 수습하는 한나절 동안 볼프강이 시내에 나가 큰딸에게 선물할 낙타를 사서 의기양양하게 돌아왔기 때문이다. 감정적 위기가 최고조에 달한 이때, 마틴의 등장 이후 소원해진 큰딸과의 사이를 풀고자 아버지가 기껏 드물게 다정을 발휘했는데 이 ‘선물’을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다. 안젤리카는 힘겹게 모은 돈을 고작 낙타 따위에 다 써버린 남편에 분노하며 이번에야말로 헤어지겠다고 선포하고, 젤소미나는 아버지가 가장 싫어할 만한 유형의 외부인 - 지적 권위를 갖고 자본의 호위를 받는 남성 심사위원 -을 들였다며 고백하는 것이다.
어릴 때는 낙타를 갖고 싶어했던 큰딸은 이제 그게 ‘불법’이란 걸 알게 됐고, 아버지가 뭔가 이상한 사람이란 걸 의식하며 바깥 세계로의 탈주를 염원하게 됐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무엇이 됐든 분명 자신이 질 싸움이란 걸 차차 직감하고 있는 중이다. 코코가 볼프강에게 맞서며 젤소미나가 불쌍하다고 했을 때, 친구 에이드리언이 젤소미나를 밀라노로 데려가겠다고 농을 던지고 젤소미나가 수줍게 좋다고 할 때, 볼프강의 고집 센 얼굴 위로 스쳐가는 회한이나 자기의심을 카메라는 놓치지 않는다.
젤소미나의 반항에 볼프강은 망연자실 밖으로 나가 낙타를 끌어내려다 포기하고 추적추적 비를 맞으며 혼자 노동을 계속한다. 이를 멀리서 바라보는 젤소미나의 표정 역시 말이 아니다. “아빠 제가 뭘 할까요? 저 뭘 하면 되나요?” 그렇게 받고 싶던 아버지의 사랑이 주어지던 바로 그 순간 그걸 단박에 기뻐하며 받지 못했다는 미안함에 눈물 흘리며 외치지만 아버지는 “하지 마”라며 불퉁하게 거절할 뿐이다. 자기 쓸모를 증명해야만 부모의 관심을 끌 수 있다고 여기는 아이를 보며 서럽기도 하지만, 이 어른의 마음도 어렴풋이 짐작되는 우리가 과연 볼프강의 속좁음을 탓할 수 있으랴. 그도 안젤리카도 ‘바깥’의 세상에서 된통 두들겨맞고 자신들만의 낙원을 구축해보려다 실패한 어른들임을 영화는 곳곳에서 암시하고 있다.
<더 원더스>는 아이의 혼란과 상처뿐 아니라 어른들의 상처도 조밀히 들여다보는데, 네 딸들의 부모만큼이나 코코라는 어른의 존재도 흥미롭게 다뤄진다. 처음에는 코코가 안젤리카의 사촌 혹은 먼 모계 친척인가 싶었지만, 에트루리아인의 흑발 흑안과 로마인의 도드라진 ‘금발’을 늘 코드화하는 로르바케르의 습관을 생각하면 아마 친척은 아닐 듯 싶다. 그렇다면 볼프강과 안젤리카, 코코와 에이드리언은 모두 원래 밀라노 출신의 소꿉친구였다가 각자의 방황 끝에 긴 사연을 안은 어른이 되어 토스카나 시골로 찾아들었을 거라고 짐작된다.
‘얹혀살려면 밥값을 해야 한다’며 볼프강에게 싫은 소리를 듣던 군식구 코코는 분명 제대로 된 어른은 아니다. 젤소미나 편을 들며 “아이들을 그만 부려먹으라”며 이제는 ‘바깥’으로 내보내야 한다고 볼프강에게 화를 내긴 하지만 정작 코코는 부모의 부재시 보호자 노릇을 젤소미나만큼도 해내지 못한다. 이상한 요가 동작에 심취하느라 마리넬라가 채밀기에 손을 베일 때에도 아이들 옆에 없었고, 병원이나 방송사 관계자 같은 ‘진짜 어른’들 앞에서는 당황한 나머지 변명도 못하는 식이다.
그러나 아기들과 함께 집에 남은 엄마 안젤리카를 대신해 섬에서 촬영하는 ‘전원의 기적’ 프로에 함께 참가한 코코는 바로 그곳에서 진가를 드러낸다. 가난하고 힘 없는 목축업자, 양봉업자, 낙농업자 등등 가지각색의 가구를 불러다놓고 우스꽝스럽게 치장시킨 쇼 프로. 그 옛날 고래의 무덤으로 불렸다는 자연 동굴 안에서 인공적인 불빛과 스탭들의 말소리가 울려퍼지고, 마치 가장 무도회처럼 동물 탈이며 월계수 화관을 쓴 농민들은 얼빠진 채 긴장한 채 서있다. 사회자인 밀리는 시골 소녀들을 불러내곤 과장된 말투로 “귀여운 에트루리아인”이라 호명하더니, 정작 그 지역에서 평생 살아온 할머니들이 아름다운 전통 민요를 부를 때는 살며시 옆으로 빠져 피곤한 얼굴로 귀를 막아버린다.
또 가족들 사이에선 그토록 폭군 같던 볼프강은 십수 대의 카메라와 양복 입은 도시인들 앞에서 굳은 채로 “돈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더듬거리며 허망한 믿음을 역설한다. 몸으로 익힌 신념이, 무언가 포기할 수 없는 가치가, 가장 천박한 자본이 가장 고귀한 노동을 파괴하는 것을 목격한 후 굳어진 “세상은 곧 멸망할 것”이라는 깨달음이, 그의 단단한 육체 안에서 부글거리고 있지만 비극적이게도 볼프강에겐 그것을 ‘제대로’ 설파할 만큼의 학식이 없고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이어 “보여줄 공연이 있다”며 젤소미나가 황급히 밀리를 불러세운다. 밀리를 다시 보길 몇 달 내내 바라온 젤소미나가 입안에서 벌을 꺼내 얼굴에서 춤추게 하는 자신의 특기를 선보인 것이다. 그러나 그애의 진지한 예술은 아버지가 방금 전 기인 철학자처럼 더듬거린 신념과 함께 무참히 무시당한다. 부녀는 ‘수습’의 대상으로 격하될 뿐이다.
그 모든 기이한 난장판을 지켜본 코코는 누구보다 먼저 알게 된다. ‘진짜 이탈리아인의 전원생활’을 조망하고 격려한다는 TV 쇼의 명분은 다 허울 뿐이고, 이제는 농민 개개인의 삶까지 (볼프강이 보던 TV 속 조잡한 재연 프로그램처럼) 서사화되어 도시인들의 한낱 유흥으로 무참히 착취되고 무시당할 거란 진실을. 그래서 코코는 돌연 울기 시작한다. 방금 전 밀리와 도시인들에게 민망하리만큼 외면당한 젤소미나를 바깥으로 끌고 나온 코코는 “넌 정말 예뻐, 그 무엇보다 아름다웠어”를 몇 번이고 말해준다. 그 순간 코코는 진실을 먼저 깨닫고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외마디를 외치는 선지자다. 그 외침은 젤소미나에 투사한 자기 젊은 시절에 보내는 위무이기도 하다. 곧이어 “나도 아름다워. 난 정말 아름다운 여자야”라고 발작적으로 반복하는 그를 보며, 관객은 코코 또한 정말이지 고단하고 외롭고 아픈 여자였단 걸 비로소 알게 된다.
코코는 젤소미나의 (가장 불행한) 미래를 암시하는 인물로서 존재한다는 게 이 장면에서 비로소 명확해진다. 동생 마리넬라, 루나, 카타리나처럼 엄마의 아름다운 금발을 물려받지 못한 큰딸이 계속 제 의지에 반해 유폐된다면 곧 맞이하게 될 운명을, 불쌍한 흑발의 미친 여자 코코가 대신 보여주고 있던 것이다.
에트루리아인 이웃들에 찰싹 붙어 엮여있으면 먹고살 길이 열린다고 말하던 볼프강. 우리 ‘밀라노인’들은 누가 신경 써준 적 있냐는 볼프강의 서러운 고함에 에이드리언은 ‘밀라노인!’이라 곱씹으며 한 번도 그렇게 분류된 적 없다는 듯 낄낄 웃는다. 익숙지 않은 호명은 곧 그들이 표준화된 복지 체계 내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지방/민족/인종 출신이란 의미다. 도시 생활과 자본의 침범에 상처 받고 그 어떤 ‘문명’의 덕도 보지 못한 어른들은 스스로를 고립시키거나, 때론 애완견을 부르는 듯 ‘귀여운 에트루리아인’이란 모멸적 호칭을 빌려서라도 생계를 이어가려 한다.
섬에서 코코에게 기습적으로 키스 당한 마틴이 온 힘을 다해 도망친 다음 실종되자, 기관 담당자가 방문해 볼프강과 언쟁을 벌이다 “상식적인 규율이란 게 있는데 알기를 거부하시네요. 세상 물정도 모르시고요”라며 잔인한 선고를 내린다. 하지만 그는 바로 직전 자기 관리상의 허점을 숨기기 위해 “아이에 대한 기록은 싹 덮어서 지워버렸다”고 부끄럼없이 자료 조작과 공모 행위를 털어놓은 직후다. 위선자 같은 그가 잘 안다던 ‘세상 물정’이란 과연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 법칙일까.
또한 이 담당자는 앞서 마틴을 데려왔던 날, 허술한 농가를 한 차례 둘러보곤 제대로 된 교화를 위해 ‘체계성’ 있는 기록과 교육을 제공하라고 당부한 바 있다. 즉 다시 요약하자면 <더 원더스>는 결국 재래성과 체계성의 대립에 관한 영화다. <키메라>를 제작하며 에트루리아의 유적과 무덤가에서 자매와 뛰놀던 유년기 기억을 참고했다고 밝힌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은, 초기부터 ‘발전’된 문명이 미처 고려하지 못한 어두운 구석의 시간에 깊이 천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그의 질문은 누가 어떻게 정상성을 정했는가부터 시작된다. 어떤 질서가 문제와 문제 아닌 것, 익숙한 것과 이질적인 것, 발전한 것과 낙후된 것, 문화재로 보존될 것과 쓰레기로 퇴거당할 것을 구분하고 있는지, 우리가 뭔가를 스스로 판단한다고 착각할 때 그 권위에 실은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더 원더스>는 농민들이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기 직전, <행복한 라짜로>는 밀려나는 중, <키메라>는 밀려난 직후를 다루는 연작이라 해도 좋겠다. <키메라>의 톰바롤리들이 “일만 하다 돌아버린 노인”이라고 조롱하던 피로의 삼촌에게서 우리는 늙은 볼프강의 최후를 본다. ‘효과 좋은’ 최신 농약도 볼프강에겐 땅과 벌을 다 죽일 끔찍한 화학 무기에 지나지 않는다. 가족들과 평온히 자족하는 생활을 추구하고 싶지만 세상은 아이들에게 자꾸만 화려하게 빛나는 것들을 보여주고 아이들은 부모의 질서로부터 탈주를 꿈꾼다. 피할 수 없는 결과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볼프강과 안젤리카의 강경한 자세에서 이상하게도 품위를 느낀다. 도시의 방송사 카메라로는 잡아낼 수 없었던 그것을.
바로 그래서 마틴이 젤소미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영원히 그 동굴에 남는 것이다. 여전히 포착되지 않고 언어화되지 않은 이탈리아 시골의 생동처럼, 도시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품위처럼, 끝까지 문명의 규칙에 포섭되지 않으려고 도망친 ‘밀라노인’ 가족처럼 마틴 역시 영원히 붙잡히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잃어버린 과거의 언어나 노래 혹은 유적을 찾아내면/기록하면 필연적으로 도굴꾼의 돈벌이가 되고 부자들의 눈요깃감으로 소비되며(키메라) 믿는 자들의 맹목을 부른다는 것(라짜로)을 알리체 로르바케르는 처음부터 알았던 듯하다. 그래서 그는 마틴을, 아이들을, 가족들을 잡히지 않는 유령으로 만들어버린다.
화내고 싸우고 경계하는 어른들의 말이 흘러넘칠 때 아이들은 오히려 한 마디 말도 없이 소통한다. 아이들의 대화는 아직 무음의 신체 언어 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젤소미나가 마틴에게 벌의 춤을 보여줄 때도, 두 아이가 동굴 안에서 고대인의 그림자잡기처럼 춤을 출 때도, 마리넬라가 젤소미나의 무반주 노래에 맞춰 춤을 출 때도, 젤소미나의 ‘빛을 마셔보라’는 아름다운 주문을 마리넬라가 순순히 따를 때도(이 장면은 자연스럽게 <키메라>의 무덤 속 아르투가 맞이한 베니아미나의 빛을 연상시킨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젤소미나는 어떻게 그 험한 바다를 서핑보드에 의존해 맨몸으로 다녀왔는지 별다른 설명 없이 들판에 놓인 가족의 침대로 파고든다. 모든 게 젤소미나의 꿈 같았던 시간. 엄마도 아무 질문 없이 그애가 잘 다녀올 줄로 믿었다며 따뜻이 안아주고, 처음으로 엄마 품에 안긴 아이는 그제야 비로소 어린 아이처럼 보인다. 젤소미나는 마틴처럼 속을 알 수 없이 그윽한 눈빛의 알파카를 바라보며 마틴의 휘파람을 따라한다.
이윽고 그들은 뼈대만 있는 침대를 남기고 증발한다. 그들을 지켜보던, 남루하지만 어딘지 다정한 시선을 보내는 것처럼 느껴지는 집도 벽 몇 개만 남기고 낡아버린다. 언젠가 그 집은 흰수염고래의 무덤처럼 먼 과거의 시간을 상징하는 스펙타클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 ‘현대인’을 얌전히 기다릴 것이다. 하지만 거기 살던 사람들은 이제 다시는 탐욕스러운 카메라에 붙잡히지 않는다.
영화관을 나오며 <고스트 스토리> 또는 <퍼스트 카우>에서 보여준 탁월한 애도를 겹쳐보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서부를 개척한 이들의 유골을 통해, 그들이 살았던 집의 잔해나 이를 지켜보는 지박령 같은 존재를 통해 억겁 같은 시간을 애처로이 붙잡아두고 재소환하려던 영화들. <더 원더스>는 조금 다른 쪽으로 애도의 개념을 확장한다. 이건 이탈리아에 마지막 남았던 순수를 영원히 해방시켜 영영 잡히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게 하는 선택을 감행한 영화다. 아마도 그것이 언제나 피안으로, 신성의 영역으로 인물을 숨게 했던 로르바케르 식의 사랑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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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AN 데일리] 남의 행복을 가져다가 나의 행복을 기웠다
- Summary간호사 시험을 앞두고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온 소녀.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오랜만의 재회를 기뻐하는 것도 잠시, 소녀는 고향 집에 있는 ‘무언가’를 감지하고 점차 불쾌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어느 날, 그녀가 살아왔던 ‘행복한’ 나날들을 송두리째 공포로 몰아넣는 진실을 알게 되고 마는데... (출처: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Cast감독: 시모츠 유타출연: 후루카와 코토네, 마츠다이 코야 외공포 영화라면 치를 떨었는데, 언젠가부터 자꾸 공포 영화에 손이 갑니다. 서서히 증폭되는 공포감, 긴장이 풀리며 찾아오는 안도감, 그리고 공포라는 포장지 안에 감춰둔 비극적인 드라마가 조금씩 드러나는 과정에 매료되었달까요? 지금도 여전히 눈을 반쯤 가리고선 벌벌 떨면서 보고, 한동안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 괜히 TV나 유튜브를 큰 소리로 켜놓곤 하지만요.'장르 영화의 축제'라고 불리는 이번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도 영화제 인생 처음으로 공포 영화를 골라 보았습니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제시한 키워드는 #식인, #깜짝놀람, #하드고어, #유령, #스릴러인데, 제목은 <모두의 행복을 위해>라니! 떨림과 설렘을 안고 이 작품과 만났습니다.⊙ ⊙ ⊙<모두의 행복을 위해>는 도쿄에서 간호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마치고, 조부모님을 뵈러 시골 마을을 찾은 주인공에게 벌어진 이야기입니다. 조부모님 댁을 찾은 주인공은 왠지 모르게 자꾸만 꺼림칙합니다. 어렸을 때 들었던 것과 같은 괴이한 소리가 여전히 들려오는 위층 뒷방의 존재도 그렇지만, 이상하리만큼 부담스럽게 행복하냐고 묻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그렇죠. 별일 아니라고 넘겨보려는데, 조부모님은 왠지 점점 더 기이하게만 행동합니다.(※스포일러 주의) 그렇게 불안감이 커지는 가운데, 주인공은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하는 조부모님의 등 뒤로 어기적어기적 기어가는 나체 상태의 한 남자를 목격합니다. 그는 이목구비가 모두 실로 꿰매진 상태였습니다. 충격에 빠진 주인공을 더 공포에 몰아넣는 것은 조부모님의 예사롭지 않은 반응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그에게서 비롯된 거야." 주인공은 동네 친구의 도움을 받아 기어이 그 남성을 탈출시킵니다. 실성한 듯 걸어 나가는 남성의 뒤로 주인공과 조부모님, 그리고 뒤늦게 집에 도착한 부모님과 동생이 뒤따릅니다. 그때, 탈출한 남성이 하필 차에 치여 쓰러지고 말죠. 그러나 그의 죽음에 기겁하는 것 역시 주인공뿐입니다. 심지어 지나가던 마을 사람은 이렇게 묻습니다. "이'거' 너희 거야?"줄거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명랑하게 모두의 행복을 찾아가는, 한 마디로 '이상적인 행복을 향한 여정'을 그리는 영화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제한된 행복을 타인으로부터 빼앗아 취하는 작은 시골 마을 사람들의 위선을 그리는 무겁고 잔인한 영화죠. 그들은 사람 한 명을 제물로 삼고, 집안에 가둬둔 채 행복을 착취합니다.⊙ ⊙ ⊙영화는 우리네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행복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을 계속해서 묻습니다. "지금 행복해?" 마을 사람들은 이 질문에 당연하게 "행복해."라고 답하고자 무시무시한 관념과 관습을 만들어 따릅니다. 관객을 더 두렵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행복을 향한 비뚤어진 갈망과 그에 따른 관행을 부정하는 주인공의 모습에 동요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행복이라는 가치를 갈취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상정한 설정과 종국에는 모두 이 관념과 관습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이야기 전개가 참으로 무섭습니다. 이 작품은 이렇듯 이야기와 플롯만으로도 공포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일본 공포 영화 특유의 호러 분위기 조성 방식도 한몫했지만요. 덕분에 <리틀 포레스트>처럼 평화롭고 한적하기만 한 일본의 목가적인 시골 풍경이 이 작품 속에서는 그저 괴상하고 기이하게만 느껴집니다.행복을 빼앗는 이 마을의 관행은 왜 생겨난 걸까요? 현실에 빗대어 생각해 보면, 공포라는 포장지 안에 감춰둔 알맹이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무시무시한 관습을 행하는 주체인 노부부는 현실에선 사회의 약자이자 소수자입니다. 고령화 시대를 맞이하면서 노인 인구의 절대적 숫자는 점점 더 증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보다 한 발 앞서 초고령화 시대를 맞이한 일본은 고령화 대책을 위해 애를 쓰고 있죠. 대표적인 고령화 대책 중 하나가 의료비를 줄이기 위해 노인의 건강을 적극적으로 관리하는 것입니다. 건강해야 오래 살고, 건강해야 행복할 수 있으니까요.마을 사람들이 행복을 빼앗는 관습을 계속해 온 것도 그들 자신의 건강 그리고 행복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영화가 아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계속해서 늘어나는 수명에 매달려 있는 노인들은 과연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에서는 약 15,000명의 노인들이 고작 하루에 1만 원을 벌기 위해 폐지를 줍습니다. 노인 인구는 계속해서 늘어나는데, 모든 노인 인구의 삶이 행복하지는 않죠. '모두의 행복을 위해' 나아가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이면을 떠올려 볼 때, 행복을 가져다가 내 것으로 취하는 노부부의 모습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그러나 영화 속 노인들의 모습에 안타까움이나 연민이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기괴한 관습을 주도하는 인물들이니만큼 영화는 그들에게 일말의 동정도 느껴지지 않도록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어찌나 많은 행복을 탈취해 냈는지, 단순히 건강을 유지할 뿐 아니라 임신까지 해버리는 노부부. 잡아온 사람의 이목구비를 꿰맨 것은 희생자를 얌전히 묶어두기 위한 조치였겠지만, 그 행위는 어쩐지 남의 삶을 가져가다 자신들의 구멍 난 행복을 기워내는 이상한 관습을 상징하는 것처럼 비쳐 보였습니다.⊙ ⊙ ⊙행복과 함께 이 작품에서 무게감 있게 다뤄진 또 다른 가치는 희생입니다. 남을 구하고 싶어서 간호사를 준비하던 주인공은 처음엔 가족들의 기이한 관습을 알고 그들을 경멸합니다. 그러나 결국엔 자신이 직접 다음 희생자를 찾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말죠. 놀랍게도 희생자가 사라지자 가족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가기 시작했거든요. 신념을 저버릴 수 없어 자기 자신을 희생자로 바쳐보려고도 하지만, 남의 행복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일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는 간호사가 되었지만, 자신의 신념을 저버리고 누군가를 희생시킨 기억을 평생 가슴에 안고 살게 됐죠. 의협심 넘치던 주인공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과정을 지켜본 관객에게는 씁쓸함만이 남습니다.배우 후루카와 코토네는 행복과 희생 사이에서 괴로움을 느끼며 갈등하는 주인공 역할을 잘 소화했습니다. <우연과 상상>의 첫 번째 에피소드를 통해 깊은 인상을 남긴 후루카와 코토네는 충격과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며 극한의 감정을 표현하는 연기로 이번에도 관객에게 단단히 자신을 각인시켰습니다. 순수하고 순진하지만 이면에는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는 그만의 분위기는 이 작품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죠. 앞으로의 활동이 더욱더 기대되는 매력적인 배우입니다.⊙ ⊙ ⊙제목만 보고 이 영화를 고르셨다면, 약간의 고어함까지 느껴지는 <모두의 행복을 위해>를 보고 많이 놀라셨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상해도 괜찮'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독특한 장르 영화라는 점에는 모두 공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글을 마치며, 여러분께도 묻고 싶습니다. 지금 행복하신가요? 혹시 타인의 행복을 가져다가 행복의 빈자리를 기우고 계시진 않나요?Schedule in BIFAN2023.07.01(토) CGV소풍 6관 13:302023.07.08(토) 부천시청 어울마당 10:30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기간 : 06월 29일 - 07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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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차티드」 플스 게임이 제작비 1,500억의 넷플릭스 영화로?? | 언차티드 예고편 게임 비교 영상 | 언차티드 영화 게임 | Uncharted |
? 언차티드(Uncharted) 영화 예고편 분석 영상(*스포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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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 제작사 너티 독의 게임 언차티드 시리즈의 게임 원작 실사영화로 소니 픽처스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작
언차티드 시놉시스
'네이선(톰 홀랜드)'과 '설리(마크 윌버그)'가 함께 트레저헌터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미스터리와 보물을
찾아나서는 액션 어드벤처 블록버스터 영화
언차티드 영화 정보
감독: 루벤 플레셔
제작: 아비 아라드, 찰스 로븐, 알렉스 가트너
각본: 아트 마컴, 맷 할로웨이
출연: 톰 홀랜드, 마크 월버그, 안토니오 반데라스
장르: 액션
제작사: 컬럼비아 픽처스, 플레이스테이션 프로덕션, 너티 독, 아라드 프로덕션, 아틀라스 엔터테인먼트
배급사: 소니 픽처스 릴리징, 소니 픽처스 코리아
촬영 기간: 2020년 3월 16일 ~ 2020년 10월 29일
촬영 감독: 정정훈
개봉일: 미국 2022년 2월 18일
원작: 너티독의 언차티드 시리즈
제작비: 1억 2,000만 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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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피어 오브 레인> 메인 예고편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10대 소녀 ‘레인’
어느 날, 옆집에 살고 있는 학교 선생님의 다락방에 감금되어 있는 어린 소녀를 보고 납치라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누구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지만 유일하게 전학생 ‘케일럽’만이 그녀를 믿고 도와준다.
‘레인’은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몰래 옆집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과연 소녀의 정체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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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즈니+ <베이맥스!> 공식 예고편
. 안녕하...??? 안녕하세요! 전 베이맥스예요 (●—●)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베이맥스!] 7월 Coming soon, 막대사탕 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