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2023-02-06 19:40:46
살갗이 타고난 뒤에 바르는 선크림
영화 <애프터썬> 리뷰
*이 게시물은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여해 작성했습니다*
지난 1월 31일, CGV용산 아이파크몰에서 열리는 <애프터썬> 시사회에 갔다.
2월 1일 개봉한 영화 <애프터썬>은 샬롯 웰스 감독의 데뷔작으로 20여 년 전 아빠와 보낸 튀르키예 여행이 담긴 캠코더를 보며 그 해 여름의 이야기를 회상하는 영화다. 202년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초청되었으며 주연을 맡은 폴메스칼은 이번 2023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그뿐만 아니라 해외 영화 평가 사이트 '로튼 토마토'에서 신선도 96%를 기록하며 해외 언론과 평단의 찬사를 받았으며 사이트 앤 사운드(Sight&Sound), 인디와이어(IndieWire), 메타크리틱(Metacritic), 시네유로파(Cineeuropa), 더 스키니(The Skinny)등 6개의 해외 매체로부터 '올해 최고의 영화 1위'에 뽑힌 영화다.
개인적으로 작년 <애프터 양>을 봤을 때와 비슷한 여운이 몰려왔다.
(제목에 애프터 들어간 영화들은 보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아빠의 내면
이 영화가 특별하게 다가왔던 점은 '과거 회상'이라는 다소 흔해 보이는 주제를 천천히 쌓아올리다가 마지막에 거대한 여운을 준다는 점에서다. 단순히 딸과의 여행의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리는 게 아니다. 여행 당시의 아빠의 내면, 우울함; 늘 안아주고 싶었던 아빠의 내면을 어린 딸의 시선 그 뒤에서 애틋하게 보여준다.
볼 때는 몰랐지만 극장을 나오고 나니 두 명의 주인공들이 느꼈던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마 애초부터, '단순히' 즐기려고 간 튀르키예 여행이 아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금방이라도 바다에 잠식될 것 같던 아빠의 감정은 소피의 행복에 가려져 있었고, 그 햇빛에 의해 서로가 상쇄된 느낌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다. 캘럼(배우 폴메스칼)은 본인의 우울함에을 오로지 껴안은 채, 여행을 갔지만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내면의 혼란이 애써 잠재워진 것처럼 보였다. 소피(배우 프랭키 코리오)의 입장에서 영화를 보면 한없이 애틋해 보이지만 캘럼의 마음으로 영화를 보면 밑도 끝도 없이 무거워진다.
사실 이 영화를 보고나서 고등학생 시절, 엄마와 종종 말다툼하던 나에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던)언니가 해준 말이 생각났다, "부모님들은 우리에게 절대로 깊은 슬픔을 보이지 않아." 이 영화를 보며, 그리고 캘럼에게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던 소피, 침대에 앉아 목 놓아 울던 캘럼을 보며 왠지 모르게 엄마에게 철없이 행동하던 나의 10대가 생각났다. 어른은, 그것도 하나의 자식이 있는 부모는 아이에게 절대 본인의 우울함을 비추지 않는다는 것.
한편, 소피가 의연하게 여행을 즐기는 모습을 보며 어쩌면 아이는 아빠의 내면을 알고 있었던 걸까 싶기도 하다.
?Aftersun 애프터썬 제목의 의미
제목 'Aftersun'의 의미는 원래 햇볕에 살갖이 타고난 뒤에 바르는 선크림이라고 한다.
어쩌면 샬롯 웰스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면서 느끼는 감정을 완벽히 표현하는 단어다. 소피는 10대 시절, 튀르키예 여행을 하며 분명 '설렘'의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앞에 나가서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싶었을 것이고, 본인 나이 또래의 언니/오빠들과 함께 즐겁게 놀고싶었을 것이다. 여느 아이들처럼 사랑에 빠지고 싶기도 하고. 그러나 어른이 된 후에 다시 캠코더로 본 아빠의 모습은 본인의 감정과는 정반대였다. 그걸 다시 펼쳐 본 소피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 뜨겁던 여름의 태양에 한없이 그을리기만 했던 아빠의 마음을, 태양을 있는 그대로 즐겼던 본인의 마음에 다시 한 번 선크림을 바르고 싶었을 것이다. '동상이몽', 우리는 늘 같은 곳에 있어도 '우리들'은 늘 다른 생각을 한다. 그러므로 향후에 각기 다른 기억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때의 기억을 재구성하여 타인의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그대의 '선크림'이다.
?추억을 다시 열어본다는 것
사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개인적으로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났다. 그들도 분명 캘럼처럼 힘들었던 본인의 내면을 숨기고 있었을 것이다. 7살, 8살 등 그 어린 나이의 '나'는 무엇을 알 수 있었겠나. 그저 재밌게 놀고싶었던 나와 상반된 감정을 애써 숨겨야 했던 부모님의 그 당시의 기억과 감정을 지금이라도 소피처럼 열어보고 싶다. 추억을 열어본다는 것, 영화 <애프터썬>을 통해 이의 아름다움에 휩싸일 수 있었다.
인간은 기억으로 살아간다. 특정 순간에 머릿속에 생긴 기억 하나로 내일로까지의 삶을 영위하고 또 평생을 살아간다. 소피가 10대 시절에 느꼈던 감정은 어른이 되어 캠코더를 열어본 후, 다시 재성립되었다. 그리고 또 그는 새로운 기억으로 아빠를 기억하고 살아가겠지. 캘럼과 함께 했던 그 여름과 아빠의 슬픔이 겹쳐서 떠오를 것이다.
여름의 그 한 순간을 통해 우리의 '기억'이라는 존재에 다시 생각할 수 있었던, 가벼워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던 영화 <애프터썬>. 두 번째로 보면 캘럼의 첫 번째 등장부터 슬플 것 같다.
Relative contents
-
- 북으로 간 남한 스파이
보통 첩보물이라고 하면 어디에 몰래 숨어 들어가 주인공 버프로 100명이 총을 쏴도 치명상을 입지 않는 무적으로 많이 묘사가 되곤 하는데, 이번 영화 공작의 경우 총성 없이 쫄깃함을 선사하고 있어요. 이 영화의 경우 북으로 간 남한 스파이 흑금성을 실화를 담고 있어서 더욱더 쫄깃하고 몰입하며 볼 수 있어 가지고 왔습니다~
그럼 영화 공작 리뷰 시작해 보겠습니다!
기본 정보
장르 : 드라마, 첩보, 스릴러, 시대극
감독 : 윤종빈
각본 : 권성휘
출연진 : 황정민, 이성민, 조진웅, 주지훈
개봉일 : 2018년 8월 8일
평점 : 7.86
스트리밍 : 티빙, 넷플, 웨이브, 왓챠
기획 의도
1993년, 북한 핵 개발을 둘러싸고 한반도의 위기가 고조된다. 정보사 소령 출신으로 안기부에서 스카우트된 박석영(황정민)은 '흑금성'이라는 암호명으로 북핵의 실체를 캐기 위해 북의 고위층 내부로 잠입하라는 지령을 받는다
안기부 해외 실장 최학성(조진웅)과 대통령 외에는 가족조차도 그의 실체를 모르는 가운데 대북사업가로 위장해 베이징 주재 북 고위 간부 리명운(이성민)에게 접근한 흑금성.
조국을 위해 굳은 신념으로 모든 것을 걸고 공작을 수행했던 그는 걷잡을 수 없는 강등에 휩싸이는데...
여담
영화 공작은 첩보물에 흔히 사용되는 총격 신이 없음에도, 연출과 디테일 덕분에 완성도가 매우 높아 몰입하며 볼 수 있습니다.
영화 공작은 실제 흑금성을 이야기를 바탕으로, 영화 내용의 절반 이상은 사실이라고 해서 더욱 놀라움을 자아냈습니다.
후기 및 결말
영화 공작의 결말을 살펴보자면
안기부에서는 박석영의 꼬리를 자르기 위해 언론사에 흑금성의 정체를 폭로하게 되면서 위기에 놓은 박성영은
호연지기를 맺은 리명훈 덕분에 박석영을 살려주게 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박성영은 납북 합작 광고를 통해 리명훈과 재회하게 되며 예전에 서로에게 선물로 줬던 시계와 넥타이핀을 서로에게 보여주며 인사를 하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영화를 보면서 정말 쫄깃함을 선사해 줬는데, 이 장면들이 대부분 실제라고 생각이 되니 이 당시 흑금성은 혼자서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게 공작을 펼쳤을지 상상이 될 정도였습니다.
한줄평 : 총성 없는 쫄깃한 첩보물
-
- 인생은 함부로 판단되는 게 아니다
경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답을 줘! vs. 못 줘!
<시리어스 맨> 등 코엔 형제의 작품을 관통하는 딜레마는 세상이 인간의 지혜를 통해 이해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세상이 살만한 곳인가 하는 현실적인 질문과 연결된다. 하지만 코엔 형제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속에서 많은 돈을 노리다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주인공 르웰린(조시 브롤린)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삶은 언제든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우연에 의해 뒤집힐 수 있다는 씁쓸한 결론을 제시한다. 영화를 보면 르웰린이 똑단발을 한 악당, 안톤 쉬거(하비에르 바르뎀)의 추격을 받고, 르웰린에게 안톤이 가족을 전부 죽일 것이라 협박하지만 르웰린의 목숨을 뺏은 사람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시리어스 맨> 속에서 코엔 형제가 선사하는 고난을 겪을 사람은 수학자 래리 고프닉(마이클 스털먼)이다. 그는 대학에서 종신교수 직을 약속 받았었다. 그런데 그한테 여러 재난이 찾아온다. 아무런 이유 없이. 딸이 성형을 하겠다고 돈을 요구하고, 아내가 이혼을 하고, 사무실에서 성적 조작을 해달라고 돈뭉치와 편지가 오기까지. 그리고 영화 중반에는 래리의 동생이 범죄를 저지르고 체포되기도 했다. 그래서 위자료를 요구 받는 상황에 처한다. 그 상황 속에서 래리는 자신한테 오는 고난이 왜 찾아오는지를 알기 위해 랍비들을 찾아가지만 허탕만 친다. 심지어 마지막 랍비는 래리랑 만나줄 시간이 있음에도 래리와 만나주지 않는다.
<시리어스 맨>을 보면 코엔 형제가 래리를 너무 막 대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게 된다. 그나마 처음에는 래리의 허둥지둥한 모습에 묘하게 웃음이 일었지만, 점점 웃음은 지워지고 그 빈 자리에는 씁쓸함이 남게 되었다. 불확실성과 인과관계의 부재가 인생의 본질이라고 싸늘하게 말하는 듯해서 말이다. 그나마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나온 르웰린의 죽음은 르웰린의 탐욕 때문에 일어났다고 결론을 지을 수 있다. 그러나 래리의 불행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근무하는 학교 칠판에 자신만만하게 수학 공식을 써내려가는 래리의 모습은 그의 불행의 불확실성과 대조되어 래리의 초라한 모습을 더욱 드러낼 뿐이다.
래리가 끝내 성적 조작을 하는 모습에 면죄부를 주고 싶은 이유도 이에 기인한다. 그렇게 부도덕한 짓을 저지르더라도 재난을 피하고 싶은 래리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니. 하지만 반전은 영화의 마지막에 나타난다. 래리는 영화 시작에 건강 검진을 받고 있었는데, 그 결과가 래리한테 통보된 것이다. 한편 래리의 아들은 학교 앞에 불고 있는 허리케인과 마주한다. 르웰린의 경우처럼 악행이 실제적인 결과를 만든 '듯한' 모습이다. 그러나 <시리어스 맨>은 이 재난에 대해서도 끝내 침묵한다. 결국 <시리어스 맨>에서 모든 재난에 대해 영화는 아무런 답도 주지 않았다. 최소한 답을 찾으려는 노력도 보여주지 않는다.
인생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할 이유
안타깝게도 그것이 처음부터 <시리어스 맨>이 노리던 것이었다. 그래서 영화 시작에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단순하게 받아들여라"라는 유대인 성서학자의 말이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불행이 그 악행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겪고 있는 불행에 대한 판단도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되면 그것이 본인의 잘못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닌 이상, 래리처럼 '시리어스'하게 그것에 대한 답을 찾는 데 골몰하는 대신 그것을 받아들이는 여유로움도 필요하다고 코엔 형제는 래리의 촌극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한편 코엔 형제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늙은 보안관 에드가 그랬듯, 이러한 본질을 관망하면서 한탄만 하고 있지는 말라는 것도 은연중에 강조한다. 코엔 형제가 <시리어스 맨> 마지막의 2가지 재난(건강검진, 허리케인)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속 르웰린의 탐욕 통해 인간의 잘못된 행동이 여전히 재난의 근원이 된다는 암시를 심어줬기 때문이다. 코엔의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불확실 속에서도 인간 속의 악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끝없는 좋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을 통해서. 그래야 악행으로 비롯된 재난이라도 막아낼 수 있으니까. 이것이 르웰린이나 래리가 당했던 예상외의 재난을 최대한 줄이는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
- 고통에 귀를 막고 복수에 홀리다
복수는 나의 것
청각장애가 있지만 성실하고 착한 공장 근로자인 류(신하균)는 아픈 누나에게 자신의 신장을 이식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류의 혈액형은 누나와 다른 B형이었고, 다른 기증자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류는 일방적으로 해고 통보를 받는다.
때마침 장기 기증자가 나타나 수술비 천만원만 있으면 누나를 살릴 수 있게 되었으나 류는 장기밀매 업자들에게 속아 한순간에 전재산과 신장까지 빼앗기고 만다. 스스로를 '혁명적 무정부주의자'라 칭하는 류의 연인 영미(배두나)는 류에게 '착한 유괴'를 하자고 권한다. 이들은 동진(송강호)의 딸 유선을 유괴하고 2600만 원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들의 착한 유괴는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죽음과 복수의 거센 물살 앞에서 이들의 운명은 속절없이 휘말리고 만다.
복수에 잡아먹히다
완벽한 복수는 가능한 것일까? 내 딸을 죽인 놈, 내 장기를 빼간 놈, 내 애인을 죽인 놈, 우리 리더를 죽인 놈.... 복수할 대상은 언제나 있다. 복수의 성공은 곧 또 다른 복수의 시작이 되어 끝없이 이어진다. 흔히 목표를 달성을 위해서는 구체적인 목표 설정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구체적인 개인을 향한 날카로운 복수는 이따금 성공적으로 수행된다.
가까운 존재의 불가해한 죽음 앞에서 인간은 언제나 책임을 물을 누군가를 찾는다. 상실감의 자리에 가득 찬 분노는 외부를 향해 뻗어나가고, 복수만이 소중한 이의 죽음을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반응처럼 여겨진다. 그렇게 복수는 한 사람의 인생을 건 목표가 된다. 이 맹목적인 목표는 자신의 발밑이 온통 피투성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뛰어들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복수는 스스로 정한 길처럼 보이지만 실은 피할 수 없는 비극적인 운명과도 같다.
감독은 누나의 죽음을 마주한 류의 울부짖는 얼굴은 화면 밖으로 보내고 TV 애니메이션 화면으로 대신한다. 물에 빠져 숨을 헐떡이는 '너부리'의 모습은 류의 최후와 닮아있다. 손으로 얼굴을 장난스레 찌르던 것이 반복되다 마침내 누군가 물에 빠지는 결말의 애니메이션은 사실 영화 <복수는 나의 것>과 같은 이야기다.
류는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은 장기밀매 업자들을 몰살한다. 동진은 딸 유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류를 죽이고자 한다. 이들은 복수할 대상을 찾고 죽이기를 반복한다. 영화 속 복수는 성공의 연속이다. 다만 그 성공을 기뻐할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복수는 나의 것>은 복수에게 잡아 먹히는 인간들의 이야기다.
“백 프로, 확실히”
<복수는 나의 것>에서 삶은 돈과 끊임없이 교환된다. 누나의 수술비, 유선이의 몸값, 굶어 죽은 팽기사의 가족. 이들의 삶은 돈 때문에 위기에 처했으나 복수할 길이 없다. 세상의 부조리, 계급 체계, 시스템의 맹점과 같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대상을 향한 복수는 성공하기 어렵다.
영미는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의 리더로 "미군 축출, 재벌해체"를 외치는 인물이다. 영미는 "백 프로. 확실히" 사과하는 동시에 동진의 죽음을 장담한다. 영미의 예언은 보란 듯이 실현된다. '무산계급의 이름으로 사형을 언도한다'는 판결문은 결국 유산계급인 동진의 가슴에 꽂힌다. '나한테 왜 이러느냐'는 동진의 물음과 자신의 가슴에 꽂힌 판결문을 읽으려 애쓰는 모습은 우습기까지 하다. 우리는 사실 자신의 심장에 칼을 꽂는 게 누구인지조차 모른다.
고통을 듣지 못하는 사회
박찬욱 감독은 고통과 폭력의 행위보다 이어지는 반응에 주목한다. 그 반응은 인물의 감정과 태도이기도 하고 물리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예컨대 칼로 배를 긋는 행위와는 거리를 두고, 배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가까이 보여주는 식이다. 카메라는 시신을 부검하는 모습 대신 동진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다. 동진의 태도는 유선이와 다른 이를 확실히 구분한다. 고통과 죽음의 무게는 누구에게 닿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우리는 사실 가까운 이의 고통에도 귀 기울이지 못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는 귀를 막고 살아간다. 청각장애인인 류는 누나를 아끼지만 누나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소리쳐도 듣지 못한다. 옆집의 남자들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성적 만족감을 채우는데 쓸 뿐이다. 고함소리, 성행위를 나누는 소리, 라디오 소리 모든 소리가 들리지만 이들은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는 류와 무엇이 다를까. 고통을 듣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려고만 하는 태도는 우리 모두를 외롭게 만들었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코두codu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 과거로의 여정 속에서 찾는 '나'라는 존재
과거로의 여정 속에서 찾는 '나'라는 존재
영화의 제목 "이다(Ida)"는 안나의 본명이다. 안나는 서원식 전에 자신에게 혈육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유일한 혈육인 이모를 찾아간다. 그리고 이모에게 두 가지 사실을 듣게 된다. 자신의 실제 이름이 "이다(Ida)"라는 것과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 이모 또한 그녀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이다. 쌀쌀맞은 이모의 태도와 그녀가 전하는 정보에 혼란스러우면서도 자신의 부모에 대해 알고 싶어진 안나는 이모와 함께 그 흔적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이 영화는 일종의 로드무비 형식을 취한다. "이다"라는 한 이름의 제목이 주는 강렬한 인상과는 다르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사실 이다(안나)와 완다 두 명이라 할 수 있다. 안나는 부모에 대해 알아가며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에 대해 알게 되고, 그 진실들을 하나씩 마주한다. 그러나 안나가 부모에 대한 진실에 점점 다가갈수록 완다는 잊고 싶던 과거의 기억을 점차 떠올리며 그것에 잠식되어간다. 두 사람의 동행은 안나가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임과 동시에 그녀의 이모 완다가 자신의 과거 기억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과정이다.
수녀원의 제한적인 정보와 환경 속에서 격리되다시피 살아오던 안나에게 바깥세상은 신기하기만 하다. 안나는 바깥세상에 대해 두려워하면서도 호기심을 가진다. 수녀원 측의 배려로 서원식을 앞두고 직접 완다를 찾아가지만 이모 완다는 그녀를 쌀쌀맞고 퉁명스럽게 대한다. 이모는 안나가 유대인이라는 것과 그녀의 실제 이름과 부모의 이름, 그리고 사진 한 장을 주고는 그녀를 수녀원으로 돌려보내려 한다. 첫 만남부터 비밀로 싸여있던 완다는 안나가 수녀원에서 그녀에 대해 아무 정보도 듣지 못했다는 것을 알자 안나에 대한 경계를 늦춘다. 판사인 완다는 법정 재판 중에 생각이 잠기더니 이다를 데리러 버스터미널로 가고, 이때부터 그녀의 태도는 상반되게 온화해진다. 이다를 보고 마주하기 힘들던 과거를 떠올려서일 수도,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들에 대한 죄책감이나 후회 때문일 수도, 혹은 온전히 이다에게 뿌리를 알려주기 위해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계기가 어떻든 간에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다시 만나 서로의 과거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안나 가족의 죽음은 1941년 독일의 폴란드 점령 당시 폴란드 민간인들이 유대인 수백여 명을 죽였던 예드바브네 학살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추측해보건대 안나의 부모와 함께 죽은 어린 남자아이는 아마도 그녀의 아들일 것이다. 과거의 비극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죽은 가족들의 유골을 마주한다. 완다는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스탈린 정부 하의 폴란드 공산당원이 되어 살아남았고, 안나는 갓난아이라 유대인 티가 나지 않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들 가족을 죽인 남자는 무덤을 판 구멍에 앉아 죄의식을 보이긴 하지만 끝까지 이들에게 사과를 하지는 않는다. 자신들을 더이상 괴롭히지 않고 집에서 계속 살게 되는 조건으로 유골이 묻힌 곳을 알려주는 거래를 했을 뿐이다. 완다는 아들의 유골을 소중히 끌어안는다. 그녀는 자신이 판사로서의 권력을 휘두르며 저질렀던 과거의 행보를 되돌아보면서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히고, 결국에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반면 이다의 선택은 어떠한가. 이 영화의 엔딩씬을 그녀의 선택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엔딩씬은 무척 독특하다. 내내 정적이던 카메라는 엔딩씬에서 급작스럽게 흔들린다. 감독은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는 이다의 모습을 핸드헬드로 잡는다. 핸드헬드 자체가 특별한 연출기법은 아니다. 다만 앞선 모든 장면에서 감독이 유지해오던 연출 방식과는 상반되게 끝나기 때문에 이 영화의 엔딩씬은 특별해진다. <이다>는 여백을 통해 스토리텔링하는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점은 파벨 포리코브스키 감독의 연출 특징이기도 하다. 차기작 <콜드 워>에서도 이어지는 1.33:1의 풀 프레임 화면비와 흑백의 이미지, 헤드룸을 많이 남기며 전통적인 미장센을 깨는 과감한 시도까지 그의 영화는 형식 자체가 의미하는 바가 크고, 그는 형식을 통해 많은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감독이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언제나 화면의 중심이 아닌 사이드에 위치하고 카메라는 여백이 많이 보이도록 대상을 비춘다. 그럼으로써 영화 속 인물들은 어딘가 위태롭고 불안해 보인다. 마치 세상의 구석으로 내몰린 느낌까지도 든다. 이 점을 <이다>에서 <콜드 워>까지 이어지는 그의 영화 속 시대 배경과 연결 지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대와 운명이 반기지 않는 가운데, 세상으로부터 내쳐지는 인물들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다시 엔딩씬으로 돌아와서, 내내 무표정하던 그녀의 표정이지만 그 순간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그 의지의 분위기가 엔딩씬 전체를, 관객을 압도시킨다. 안나는 어쩌면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삶을 제대로 찾게 된 건지 모르겠다. 아니, 그 길을 비로소 시작하는 건지도. 지금까지 살아온 '안나'로서의 삶을 계속 살아가든, 새롭게 알게 된 '이다'로서의 삶을 살아가든 중요한 것은 그녀의 이름이 무엇인가와 같은 사소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어딘가로 묵묵히 걸어 나가는 그녀의 모습은 우리에게 그녀의 결연한 의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제 어떤 선택을 하든 그녀의 선택은 오로지 그녀의 의지와 발길에 달렸다. 이다는 자신의 길을 계속해서 묵묵히 걸어갈 것이다.
-
- [JEONJU IFF 데일리] 영화의 무덤 앞에서, 다시 영화를 묻다.
영화 정보
감독: 라두 주데 (Radu Jude)
제작국가: 루마니아
제작연도: 2024년
상영시간: 62분
장르: 다큐멘터리
상영 형식: DCP, 컬러/흑백
상영 섹션: 특별전 : 가능한 영화를 향하여
아시아 프리미어
시놉시스
꽃잎 하나가 떨어지네
어, 다시 올라가네
나비였네
- 모리타케리뷰
라두 주데(Radu Jude)의 2024년작 <잠 #2>은 앤디 워홀(Andy Warhol)의 1963년 실험영화 <잠(Sleep)> 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실험 다큐멘터리다.
“The most wonderful thing about living is to be dead.”라는 워홀의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그의 무덤을 1년간 실시간으로 비추는 웹캠 스트리밍을 데스크톱에서 녹화하고 편집해 만든 62분 분량의 작품이다. 영화에는 서사도, 인물도, 대사도 없다. 단 하나의 고정된 프레임 속에서 계절과 날씨, 낮과 밤이 교차하고, 사람과 동물들이 등장하고 사라진다. 그러나 그 정적 속에, 우리는 이미지의 탄생과 소멸, 감시와 연출, 존재와 소비라는 복잡한 층위를 발견하게 된다.
워홀의 무덤 앞은 ‘영원한 잠’의 공간이지만, 그곳은 좀처럼 조용하지 않다. 낮에는 무덤을 관리하는 이가 등장하고, 밤에는 고라니나 다람쥐 같은 동물들이 어슬렁거린다. 방문자들은 이곳에서 사진을 찍고, 담배를 피우며, 때로는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고 손을 흔든다. 이들은 추모객이 아니라, ‘자신이 찍히고 있음’을 인식한 퍼포머다. 누군가는 캠벨 수프 캔이나 금발 가발처럼 워홀을 상징하는 오브제를 놓고 가기도 한다. 이 반복적 행위는 워홀 생전의 작업인 반복, 복제, 이미지화를 무덤이라는 장소를 통해 역설적으로 재현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이 ‘영화’로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을 재구성한다는 점이다. 감독은 전통적인 촬영 장비 없이, 단지 컴퓨터 데스크톱 화면을 1년간 녹화하는 방식으로 영화를 완성했다. 화면에는 Earth Cam이 보이고 화면을 녹화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디지털 매체의 물리성과 흔적이 숨김 없이 드러난다. 영화는 움직임보다 시간의 밀도에 집중하며, 관찰과 기다림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시네마의 감각을 되살린다. 마치 뤼미에르 형제가 <열차의 도착(1896)>에서 처음으로 카메라를 들고 '기다림을 기록했듯,
<잠 #2>은 질문한다. 영화는 반드시 움직여야 하는가? 이야기해야만 하는가? 관객은 이 영화에서 무덤을 찾는 이들과 동일시된다. 무언가를 보고, 찾고, 의미를 부여하려 애쓰며, 결국 그 행위 자체가 하나의 영화적 체험이 된다.
감독은 단 한 번의 카메라 이동도 없이, 시간의 흐름과 반복을 통해 죽음과 생명, 정지와 운동, 감시와 연출, 기록과 망각 사이의 긴장을 구축한다. 정점은 가장 격렬한 자연 현상인 비바람과 천둥이 일어나는 장면에서 도달한다. 자연이 소란스러울수록, 무덤은 더욱 고요하고 단단하게 그 자리를 지킨다. 이 정적은 영화의 본질이 움직임이 아니라 ‘시간을 밀도 있게 담아내는 형식’임을 다시금 일깨운다.
웹캠이라는 감시 장치가 자동적으로 영상을 기록하고, 감독이 그것을 선택해 편집하며, 관객이 다시 관람하는 이 삼중 구조는 관찰, 노출, 프라이버시를 둘러싼 현대적 감각을 불러낸다. <잠 #2>은 다큐멘터리 윤리와 창작 주체의 위치에 대해 묻는 동시에, 영화라는 예술이 ‘기록’ 이상의 어떤 감각을 전달할 수 있는지 묻는다.
2025년 전주국제영화제 ‘가능한 영화를 향하여’ 섹션에 이 영화가 초청된 것은 단지 형식 실험의 결과가 아니다. <잠 #2>은 영화가 될 수 있는 것의 경계, 영화가 지속될 수 있는 방식, 그리고 동시대 관객이 감각하는 감수성을 정면으로 탐색하는 작품이다. 장르와 상업성으로 포화된 동시대 영화 환경 속에서, 이 작품은 영화의 존재 이유를 근본적으로 다시 묻는다.
앤디 워홀은 생전 ‘관람거리’를 생산하던 이미지의 작가였다. <잠 #2>은 그가 죽은 후, 어떻게 하나의 이미지로 고정되어 다시 소비되는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영화라는 매체 또한 그러한 반복 소비의 경계에 놓여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조롱도, 찬양도 아닌 침묵 속의 응시로 답한다. 마치 관처럼 정적인 프레임 속에서, 우리는 영화를 다시 시작한다. 워홀의 무덤 앞에서, 영화의 무덤을 조용히 열어젖히며.
상영 일정
2025년 5월 1일 10:30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
2025년 5월 3일 21:00
메가박스 전주객사 1관
2025년 5월 5일 10:00
메가박스 전주객사 4관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 2025.04.30 ~ 05.09
-
- 퀴어로부터 '보편'으로
여성들의 관계‧감정‧경험을 포착해 섬세하게 재현함으로써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 온 셀린 시아마 감독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또 다른 관점은 퀴어다. 셀린 시아마의 영화 인물 중에는 여성인 동시에 퀴어인 자들이 많다. 감독은 이들이 마주한 고난과 그 고난을 헤쳐 나가는 인물들의 강인함을 놀라운 관찰력으로 포착해 낸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젠더 이분법과 이성애규범성 너머를 상상하게끔 한다. 슬픔이 깃든 퀴어 존재가 어떻게 삶을 이어가는지를 그녀의 영화를 통해 따라가 보자.
먼저 〈톰보이〉(2011)다. 주인공은 10살 ‘소년’인 미카엘이다. 짧은 머리에 날렵한 체구를 가진 미카엘이 새로 이사 온 동네 친구들과의 놀이에서 축구, 수영, 힘 싸움 등을 능숙하게 해내자 친구들의 관심이 쏠린다.
하지만 정작 놀이에 나가기 전의 미카엘은 걱정 투성이다. 축구를 하는 남자아이들은 상의 탈의로 팀을 나눈다. 미카엘을 불안케 하는 건 자신이 윗옷을 벗은 팀과 그렇지 않은 팀 중 어디에 속할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사실 미카엘은 로레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진 ‘생물학적 여성’이다. 그래서 상의를 벗었을 때 자신의 가슴이 다른 남자아이들과 달라 보일까 걱정한다. 수영도 마찬가지다. 이번에는 수영복 앞섬이 문제다. 원피스 수영복을 잘라 남자 수영복처럼 만든 미카엘은 수영복 앞섬이 불룩 튀어나오지 않자 고민 끝에 찰흙을 길게 만들어 페니스의 대용물로 수영복 속에 넣는다. 다른 남자아이들처럼 괜히 놀이 도중 침을 뱉는 것도 찰흙으로 만든 페니스와 더불어 미카엘이 ‘부족한’ 남성성을 메꾸는 방식 중 하나다. 이런 것들이 뛰어난 놀이 실력을 가진 미카엘을 위축되게 만든다.
영화 〈톰보이〉 스틸컷
흥미로운 건 미카엘이 찰흙 페니스를 보관해 두는 장소다. 미카엘은 찰흙 페니스를 자신의 빠진 이와 함께 보관한다. 빠진 이는 ‘자연’이고 찰흙 페니스는 ‘인공’이지만, 몸에서 떼어 보관할 수 있다는 점에선 같다. 그러나 미카엘에게는 빠진 이와 별 차이가 없는 찰흙 페니스가 누군가에게는 ‘결핍’의 기호로 읽힌다. 미카엘의 ‘진짜 이름’이 로레임이 드러난 후, 친구들은 잔인한 방식으로 미카엘의 성별을 확인한다. 미카엘을 ‘남자’로 알고 좋아했던 리사가 직접 미카엘의 성기를 만져 보게 함으로써 말이다. 미카엘의 페니스 ‘없음’은 그저 놀러 나가기를 망설이게 하는 일상적 불편함이었으나 성별 이분법이 군림하려 드는 상황 속에서는 수치심의 근거가 된다. ‘있고 없음’의 차원이 아닌 신체의 다름으로 독해되어야 할 미카엘의 음부가 결정적 낙인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잘못 짝지어진 인과관계다. 엄마의 강압으로 파란 원피스를 입고 친구 집에 찾아가 자신의 성별에 관한 ‘사실’을 말하는 미카엘을 수치심에 휩싸이게 하는 건 그/녀의 성기 모양이 아닌 그 모양에 대한 세상의 폭력적인 독해다. 미카엘은 눈물 흘리며 파란 원피스를 숲에 버린다. 찰흙 페니스와 마찬가지로 파란 원피스 역시 쉽게 몸에서 떼어 낼 수 있는 물건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아무것도 아닌 찰흙 페니스와 파란 원피스에 과한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리사가 미카엘이 미카엘인 동시에 로레일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말을 걸어 주기 전까지 미카엘/로레가 감당해야 할 슬픔은 너무 커다란 것이었다.
미디어는 늘 아이를 과잉보호의 대상으로 표상하지만, 성별이 모호하게 읽히는 아이는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다. 아이는 어긋난 결핍감으로, 부모는 편견 가득한 수치심으로 괴로워할 뿐이다. 〈톰보이〉는 성별 이분법이 존재에게 얼마나 큰 폭력으로 다가갈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영화 〈톰보이〉 스틸컷
다음은 성적 지향과 이성애규범성의 문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굉장히 세련되고 치밀한 방식으로 성적 지향과 평등의 문제를 사유한다. 관계의 평등을 위해 영화가 주목하는 건 시선이다.
마리안느는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의뢰받는다. 결혼에 대한 거부감에 초상화를 그리기 위한 포즈 취하기를 거부하는 엘로이즈에게는 산책 친구로 거짓 소개된다. 마리안느는 자신에게 주어진 6일 동안 엘로이즈를 면밀히 관찰한다. 생김새뿐만 아니라 사소한 동작까지도 관찰의 대상이다. 일상에서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지만, 그림을 그릴 때는 사소한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어려움에 봉착할 때면, 마리안느는 엘로이즈가 된 것처럼 포즈를 취하기도 한다. 엘로이즈의 성격과 몸짓, 표정을 자신의 몸에서 재현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꼼꼼한 관찰과 다른 존재 되기의 과정을 거치는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사랑하게 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전개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가까워진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에게 자신이 왜 이 집에 왔는지를 솔직히 털어놓는다. 그리고는 엘로이즈에게 자신이 그린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보인다. 그런데 엘로이즈의 반응이 시큰둥하다. “이게 나에요?”라고 되묻는다. 생명력, 존재감이 없다고 냉정히 평가한다. 마리안느는 발끈하여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규칙‧관습‧이념을 철저히 따라 초상화를 그렸으며 그러다 보면 엘로이즈가 제기한 문제가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도 있다고 반박한다. 그러나 마리안느의 자부심은 회복되지 않는다. 그녀는 자존심이 상해 자신이 그린 그림을 스스로 망치고 엘로이즈의 어머니에게 두 번째 기회를 달라고 부탁한다. 이번에 주어진 시간은 5일이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첫 번째 6일이 익숙하고 관습적인 방식으로 엘로이즈를 관찰하고 그려 내는 시간이었다면, 두 번째 5일은 마리안느만이 그릴 수 있는 엘로이즈를 그리는 시간이다. 이 기간 동안,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외양, 습관뿐만 아니라 감정을 읽는 법까지 배운다.
둘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깊어지는 건 마리안느가 엘로이즈 또한 자신을 관찰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 후다. 엘로이즈는 화가가 그림을 완성하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는 시선의 객체가 아니었다. 엘로이즈 역시 마리안느와 함께하는 모든 시간 동안 그녀를 관찰했다. 화가와 대상이라는 일방적인 관계는 허물어지고 서로의 존재를 존중하며 신중히 탐구하는 상호적 시선이 생성된 것이다. 둘의 사랑이 만개하는 건 바로 이 평등한 시선 위에서다. 이성애자들이 젠더 권력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해 사랑에 실패하고, 그러면서도 규범적 사랑 바깥에 있는 성소수자의 사랑을 경멸하는 동안,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모든 위계적 시선을 거부하고 서로를 동등하게 만드는 시선을 교환함으로써 평등한 관계에 기반한 사랑을 창조해 냈다. 나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만큼 사랑 문제에 있어 이성애자의 무능과 레즈비언의 유능을 극명하게 대비하는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가 공유하는 평등한 응시의 의미와 가능성을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장면이 있다. 가사노동을 돕는 하녀 소피는 원치 않는 임신으로 낙태를 하려 한다. 이에 엘로이즈와 마리안느가 소피를 돕는다. 18세기 프랑스에서 낙태는 큰 위험을 동반하는 의료 조치였다. 마리안느는 괴로워하는 소피를 보고 고개를 돌리지만, 엘로이즈는 그런 마리안느를 돌려세우며 그녀의 고통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엘로이즈에게 시선은 사랑하는 존재를 탐색하는 관능적인 수단일 뿐만 아니라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윤리적 도구이기도 하다. 레즈비어니즘과 그리 연관되어 보이지 않는 낙태라는 주제가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시선으로 인해 주목할 만한 고통, 즉 동등하게 다뤄져야 할 정치적 의제로 부상하는 것이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그러나 누구보다 뜨겁고 윤리적인 사랑을 나눈 둘은 끝내 함께하지 못한다. 엘로이즈는 예정대로 결혼을 해야 하고, 마리안느는 새로 완성한 초상화를 넘긴 후 눈물로 뛰쳐나올 수밖에 없다. 그들이 구축한 세계는 확장되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남은 건 둘이 함께한 11일의 기억과 그 아름다운 시간을 기록한 그림뿐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그림으로 남겨진 사랑을 ‘보며’ 서로를 추억한다. 그럼으로써 기억을, 서로가 나눈 경험과 관계를 연장한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연상케 하는 압도적인 엔딩 장면은 엘로이즈가 마리안느가 일깨워 준 감각을 여전히 소중히 간직하고 있음을 알려 준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가 들어 보지 못한 소리를 들려주었고, 엘로이즈는 몇 년 후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연주를 들으며 격하게 흐느낀다. 마리안느가 일깨운 엘로이즈의 감각이 여전히 닫히지 않은 것이다. 불평한 젠더 권력에 기댄, 편견에 가득 찬 이성애규범성은 여기서 또 한 번 조롱당한다. 사랑이 개인의 의도가 배제된 정략 이성애 결혼이 아닌 이를 금지당한 레즈비언 연인 사이에서 피어올랐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랑에서 배제된 레즈비언에 의해 ‘보편’의 경지로 승화된 사랑이라는 테마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품은 황홀한 아이러니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셀린 시아마의 영화에는 여성의 가슴과 성기를 비추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그런데 이 장면을 비추는 방식은 다른 영화와 확연히 다르다. 셀린 시아마는 이성애 남성의 시선으로 늘 과잉 성애화되어 온 여성 신체를 퀴어 슬픔과 수치심, 여성의 고통, 쾌락을 환기하는 방식으로 담는다. 그녀의 영화에서 여성의 몸은 멋대로 분절되어 흩뿌려지지 않고 몸의 주인이 느끼고 감각하는 바를 전달하는 데 충실하다. 그리고 이런 재현이 영화의 모든 장면에 이어진다. 그녀가 담아낸 밀도 높은 여성들의 세계가 다른 관점으로 여성을 촬영한 장면이 차곡차곡 쌓인 결과물이란 소리다.
거창한 주제를 다루는 영화가 어깨에 힘만 들어간 채 헛발질하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이와 반대로 셀린 시아마는 페미니스트답게 구체적 삶 경험에서 추상적‧보편적 명제로 나아간다. '보편'이란 게 정말 있다면, 이는 관념과 공상이 아닌 구체적 경험과 감정에서만 도출될 수 있는 것일 게다. 그렇지 못한 보편은 구체적 경험과 감정을 억누르는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 셀린 시아마 영화 속 성별 이분법과 이성애규범이 그러하듯이.
-
-
- 압도적인 캐스팅에도 아쉬움을 남긴 원더랜드 / 눈과 귀가 즐거운 / 로맨틱 드라마 / 탕웨이 박보검 연기는 굿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원더랜드" 후기입니다.
*엔드크레딧 전 재미난 쿠키영상이 있어요~^^
-
- 영화 <쿠폰의 여왕> 메인 예고편
명품백, 슈퍼카, 최신 무기까지 쿠폰으로 찢었다! [#쿠폰의여왕] 메인 예고편 공개!
-
- 영화 <고질라 VS 콩>
세상의 운명을 놓고, 지구상 가장 거대한 신화적 존재들의 스펙터클한 대격돌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