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케2023-02-12 23:37:37
우리 사랑이 향기로 남을 때 시사회 후기(스포있음)
이 모든 사건이 일어나게 된 이유가 있다.
바로 첫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향수를 개발하는 것에서 시작되는데 영화 중간에 한 노부부가 등장한다.
치매에 걸린 아내가 자신을 못 알아보자 자신을 알아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런 향수를 개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중에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창수와 아라의 사연을 듣고 자신의 바램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아픔을 겪는 건 싫다고 연구를 중단시키게 된다.
향수를 개발하게 된 계기는 사뭇 슬프기도 했지만 향으로 첫사랑을 떠올리게 한다는 설정은 새로웠다.
이야기의 전개는 다른 로코랑 큰 다른 점은 없어서 가볍게 웃으며 볼 수 있는 로맨스 코미디 영화였다.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청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ive contents
-
- <크루엘라> 여자 오이디푸스의 화려하고 안전한 탄생
태어난 순간부터 특별해서 좀처럼 일반적인 삶에 녹아들지 못한 '에스텔라(엠마 스톤)'는 엄마 '캐서린(에밀리 비샴)'과 함께 런던으로 가서 패션 디자이너 교육을 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어머니와 이별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런던에 도착한 그녀는 새로 만난 친구 '재스퍼(조엘 프라이)', '호레이스(폴 월터 하우저)'와 함께 런던 길거리를 주름잡는 도둑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패션 디자이너라는 어릴 적 꿈을 잊지 못해 무작정 리버티 백화점에 일자리를 구한 그녀는 운명처럼 런던 최고의 디자이너 '바로네스(엠마 톰슨)'를 만나고, 즉시 재능을 인정받은 후 특채로 채용되며 그 꿈을 이룬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바로네스의 끔찍한 과거와 진실을 알게 된 에스텔라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 크루엘라를 바로네스와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로 결심하고 모두를 놀라게 할 패션쇼를 준비한다.
악역을 주인공으로 삼는 영화들은 필연적으로 같은 난관을 마주한다. 어떻게 악역을 악인으로 남겨두면서도 관객들을 그에게 빠져들게 만들까 하는 문제다. 많은 영화들은 빌런에게 인간적인 뒷이야기를 선사한다. 어릴 적 불우한 가정환경이나 사회적으로 피해를 당했던 경험들을 나열하면서 관객들의 감정이입을 용이하게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역으로 빌런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들고, 애매해진 캐릭터로 인해 영화의 전개에 좀처럼 흡인력이 붙지 않는다는 또 다른 문제를 낳을 수 있다. 디즈니의 <말레피센트 2>나 DC의 <수어사이드 스쿼드> 같은 작품이 대표 사례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실사화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101마리 달마시안>에서 등장한 빌런 '크루엘라 드 빌'의 탄생을 그린 스핀오프 겸 프리퀄 <크루엘라>가 마주한 딜레마도 다르지 않다. 어떻게 하면 관객들이 달마시안의 가죽을 벗겨서 코트를 만들려고 하는 잔혹한 패션 디자이너의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을까. 이 난관을 넘어서기 위해 <크루엘라>는 누구나 접해 봤을 법한 한 영웅의 이야기를 빌려온다. 바로 오이디푸스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의 주인공인 그는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라이오스는 아버지를 죽일 운명이라는 그의 미래를 두려워해 아들을 태어나자마자 버렸고, 가까스로 한 신하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은 오이디푸스는 다른 양부모를 만나 평화로이 살아간다. 어느 날 자신이 아버지를 죽일 운명이라는 내용의 신탁을 들은 그는 무작정 양부모를 떠나 여행길에 오르고, 우연히 만난 라이오스와 시비가 붙어 그의 정체를 모르는 상태에서 그를 살해한다.
이러한 오이디푸스의 인생사는 크루엘라의 그것과 유사점이 많다. 친엄마인 바로네스가 버린 딸, 크루엘라도 친모의 하인인 캐서린을 엄마로 안 채로 살아간다. 그러던 중 엄마와 사별한 그녀는 유전적으로 타고난 재능을 발휘해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여정에 나서고, 그 길 위에서 운명적으로 바로네스를 만난다. 그녀가 자신의 재능과 길을 가로막고 있다고 판단한 크루엘라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길을 막은 라이오스를 죽였듯이 바로네스의 명성과 경력을 제거하기 시작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크루엘라는 오이디푸스만큼이나 기구하고, 크루엘라와 바로네스의 관계는 오이디푸스 부자의 관계에서 성별만 바뀐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와 크루엘라 사이에는 결정적 차이점이 있다. 스핑크스를 물리친 공로로 공석이 된 테바이의 왕좌에 앉은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를 죽인 범인을 밝혀 나가던 중 자신이 그 범인이라는 것을, 친불르 죽인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순간에 스스로를 테바이에서 추방시키며 “그것은 아폴론이었소, 아폴론이오, 친구여. 나의 불행을, 불행을, 나의 고통을 완성한 것은. 하지만 눈을 직접 찌른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가련한 나 자신이었소.”라고 외친다. 그는 신이 정해준 운명을 거부하고 자신의 의지로 비극을 끝맺으면서 '친부를 죽인 파렴치한 오이디푸스'가 아니라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웅 오이디푸스'로 거듭난다.
크루엘라는 다르다. 그녀를 키운 양모 캐서린은 그녀가 본래 모습인 '크루엘라' 대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모습인 '에스텔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오이디푸스가 진실을 깨달은 것처럼 바로네스와 캐서린, 자신의 관계에 대한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후 그녀는 이미 정해진 자신의 운명, 곧 크루엘라의 삶에 순응해버린다. 크루엘라라는 캐릭터 자체는 자신의 앞길을 막는 방해물이나 규범 등에 개의치 않는 저항적인 인물이지만, 정작 그녀는 자신의 운명 앞에서 그 어떤 저항 의지나 시도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공유하는데도 크루엘라가 그와 달리 빌런이 된 결정적인 이유라고 볼 수 있다.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면 죽게 될 거라는 예언을 듣고도 트로이에서 용맹을 떨치다 죽은 아킬레우스처럼 그리스 신화에서 영웅이란 주어진 운명에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을 추구한 존재다. 즉, 운명에 저항하는지 순응하는지를 기준으로 볼 때 크루엘라는 정확히 영웅의 대척점에 위치한다. 이처럼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살짝 비튼 결과 <크루엘라>는 공감의 여지가 있는 설득력 있는 서사를 빌런에게 부여하면서도 빌런을 빌런답게 만드는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다.
이때 <크루엘라>의 메가폰을 잡은 크레이그 길레스피 감독은 자신의 광고 및 뮤직비디오 감독 경력을 살려 익숙한 듯 다른 이야기를 화려하고 강렬하며 매혹적으로 포장한다. 이는 단지 디즈니의 자본력으로 무장했기 때문만은 아니며, 패션과 음악을 통해 캐릭터의 정체성을 감각적으로 제시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우선 크루엘라의 옷은 주어진 운명과 만들어 나갈 운명 사이에서 고뇌하는 그녀의 서사를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각각 '크루엘라'와 '에스텔라'를 의미하는 흑백의 조화가 두 정체성 간의 갈등을 암시하는 가운데, 포인트가 되는 빨간색은 쓰레기로 옷을 만들거나 옷을 불태우는 등 반항기 넘치는 그녀의 성정을 강조한다. 반면에 상류층에게만 허락된, 일류 디자이너가 만드는 고급스럽고 우아하며 예술성에 치중한 오트쿠튀르 패션에 충실한 바로네스의 옷은 자기중심적이고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전무하며 안하무인인 그녀의 성품을 보여준다. 이렇게 작중 옷과 패션은 그 자체로 두 캐릭터의 상반된 정체성과 그들의 갈등을 시각적으로 각인시킨다.
또한 적재적소에 존재감을 뽐내는 음악들, 특히 펑크 록 음악의 활용도 빼놓을 수 없다. 영화는 1970년대 후반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진행된다. 당시 영국의 노동계급은 오일쇼크, 이민자들의 증가로 인한 일자리 감소, 혁신 없는 기업과 자본가들로 인한 비효율적인 경제 구조 때문에 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다. 이는 1970년대 런던이 반체제적인 가사와 강렬한 사운드, 허름한 듯 반항적인 패션 등으로 대변되는 펑크 록 음악의 열풍으로 가득한 도시였던 이유다. 따라서 영화 곳곳에 삽입된 펑크 록은 가진 것 없는 하층 계급으로서 살다가 자신의 능력만으로 기존 체제에 도전하고 균열을 일으키는 크루엘라를 단적으로 표현할 최적의 장치라고 할 수 있다. 크루엘라의 패션쇼가 록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것은 이러한 시대적, 문화적 배경이 녹아든 결과다.
다만 작품의 매력과는 별개로 <크루엘라>를 보다 보면 한 가지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이 영화는 휘발성이 강하다. 전개는 매우 급하고 내실은 부족하게 느껴진다. 예를 들어 크루엘라가 수많은 직업 중 왜 하필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정했는지에 대해서 영화는 그녀의 타고난 핏줄, 재능, 운명 외에 별다른 설명을 제시하지 않는다. 또한 바로네스의 지위를 위협할 정도로 뛰어난 디자이너가 되기까지 그녀가 자신의 선천적인 재능 외에 어떤 노력을 기울였지 그 과정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그녀가 화려한 옷들로 바로네스를 짓밟고 그녀에게 복수하는 일련의 장면들은 화려하고 짜릿하지만 일면으로부터 느껴지는 공허함까지 떨쳐내지는 못한다. 성장 과정이 빈약하기에 그녀의 성취는 눈부시지만 진정으로 다가오지 못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태생적인 한계라고 볼 수도 있다. <크루엘라>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속 빌런의 기원을 다루는 동화와 가족과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한 아이가 그들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1970년대 영국의 현실을 동시에 풀어내는 영화다. 그러면서도 당시 시대상의 한계를 조명하고 모순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일탈하게 되는지를 깊이 탐구하는 대신 그 시대의 분위기와 문화만을 취사선택해 동화를 뻔하지 않게 포장하는 데 몰두한다. 그 결과 마치 아웃사이더의 음악이자 문화였던 펑크 록이 주류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순간 정체성을 잃었던 것처럼, <크루엘라>도 디즈니의 안정적이고 체제 순응적인 동화가 구체적인 현실의 맥락 안에 담기는 순간 빚어지는 모순을 피하지 못한다.
이러한 모순은 <크루엘라>에서 유독 배우들이 눈에 들어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쁘게 보면 배우들의 개인기에 의존하고 좋게 보면 그들의 역량을 극대화하는 연출 덕분에 영화의 본질적인 한계와 단점이 효과적으로 가려지기 때문이다. 당장 영화의 가장 큰 전환점이라 할 수 있는, 크루엘라가 출생의 비밀을 모두 깨닫고 마음을 다잡는 분수에서의 독백 장면을 보자.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철저히 엠마 스톤만을 원 테이크로 잡아내면서 그녀의 카리스마와 연기력에 모든 것을 맡긴다. 이에 <이지 A>나 <헬프>와 같은 작품에서 이미 기존 질서나 방식에 순응하는 것을 거부하는 반항적인 캐릭터를 기가 막히게 소화했던 엠마 스톤은 기대대로 배신감, 충격, 혼란, 분노, 복수심 등이 뒤섞인 복합적인 감정선을 손에 잡힐 듯이 표현해낸다. 그 순간 크루엘라가 대변할 수 있는 여러 현실과 상황, 맥락은 시야에서 제외되고 단지 그녀의 다음 행보와 선택만이 눈에 들어온다.
예고편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크루엘라>는 디즈니의 <조커>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받았다. 흑백의 대비가 가득한 헤어스타일과 의상, 주위를 압도하는 주인공의 카리스마, 반사회적인 분위기가 가득했던 장면 하나하나의 첫인상은 그만큼 강렬했다. 그러나 큰 기대 속에 모습을 드러낸 <크루엘라>는 결코 <조커>가 될 수 없는 영화였다. 빌런을 빌런답게 묘사하면서 관객들과 캐릭터 간에 강력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그 이상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려는 태도는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커>는 한 개인으로서 아서 플렉이 어떻게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조롱당했는지, 그의 분노가 얼마나 강렬했고 그의 공격적인 태도에 왜 수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었는지를 관객들이 불편해할 정도로 깊숙이 들여다본 영화였다. 그러나 <크루엘라>는 그 불편함의 자리에 원작 애니메이션과 연결고리를 확보하기 위한 여러 팬서비스를 집어넣으며 <조커>와 대비를 이루는, 너무나도 안전한 길을 선택했다. 그 결과 <크루엘라>는 큰 기대에 비하면 디즈니가 빌런을 주인공으로 삼아 제작한 영화들 중 가장 위험하고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주는 데서 만족할 뿐, 그 이상의 성취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A(Acceptable, 무난함)
주인공도, 영화도 진짜 도전은 하지 않는다
-
- 가면을 벗어야 보이는 것들
슈렉
줄거리
자신만의 늪에서 아늑한 집을 짓고 살아가는 초록 오거 슈렉.
평소처럼 느긋한 저녁을 즐기려는데, 동화 속 주인공들이 갑자기 슈렉의 늪에 쳐들어온다.
알고 보니 듈락의 통치자, 파콰드 영주가 그들을 모조리 쫓아낸 것.
완전 열받은 슈렉은 파콰드를 찾아가 늪을 내놓으라 따지고, 파콰드는 한 가지 제안을 하는데...
가면을 벗어야 보이는 것들
숨은 의미 찾기
‘오거’라는 단어는 슈렉 전과 후로 완전히 다르게 다가온다. 영화 개봉 시기가 2001년인데, 그 당시에 ‘괴물’을 주인공으로 삼는 것도 모자라 영웅으로 만들어버린 것은 실로 과감한 시도였다.
“이해가 안 돼, 슈렉. 왜 오거처럼 안 했어?”
“넌 잘 모르겠지만 세상에 알려진 게 다가 아냐. 어디 보자, 오거는 양파와 같지.”
슈렉은 탑 꼭대기에서 피오나를 구출하고 계단을 뛰어내려오면서 서사시 따위는 사치라고 말한다. 그런 슈렉이지만, 왜 오거처럼 굴지 않느냐는 동키에게만은 ‘괴물은 양파다’라며 지리는 비유를 한다. 깊은 문학적 비유 따위를 알 리 없는 동키는 ‘냄새가 고약해?’라고 묻지만.
슈렉은 양파처럼 겉으로는 맵고 눈물 나게 하고 냄새도 나지만, 속을 까고 까고 까다 보면 정의롭고 여리고 순수한 면도 있다. 양파의 생김새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참으로 요상하다. 반으로 잘라내지 않는 한, 둥근 막을 완전히 벗겨내야만 그 속의 다른 겹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양파와 같은 슈렉의 매력, 참모습을 보기 위해선 오랜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소리다.
(사진 참조 : 네이버 영화 '슈렉' 스틸컷)
“그런데 모두가 양파를 좋아하는 건 아니야.”
괴물과 양파는 똑같이 겹이 있다는 슈렉에게 동키는 깐족거리며 굳이 할 필요 없는 말을 덧붙인다. 물론 생양파도 물에 한 번 헹궈서 연어랑 홀스래디쉬 소스에 찍어 먹거나, 라이스페이퍼에 각종 야채와 넣어 월남쌈으로 먹으면 꿀맛이긴 하다. 하지만 생양파를 우적우적 씹어먹을 만큼 양파를 사랑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렇기에 슈렉이 말한 ‘괴물의 겹’은 결코 파르페나 케이크와 같은 달콤한 음식에 비유될 수 없는 것이다.
양파는 속을 까보지 않아도 누구나 좋아하는 달콤하고 아름다운 것들과는 다르니까.
“케이크는 다들 좋아해! 게다가 층으로 되어있지.”
(사진 참조 : 네이버 영화 '슈렉' 스틸컷)
슈렉이 양파라면 피오나는 케이크나 파르페 쯤일 것이다.
구태여 속을 까보지 않아도 모두가 달콤한 향기와 황홀한 생김새에 마음을 홀딱 뺏기고 마니까. 양파가 제대로 속을 까보지도 않고 판단해서 문제라면 케이크는 속에 얼마나 많은 겹이 있는지 아무도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그 속에 초코시트가 들었는지, 바닐라 시트가 들었는지, 딸기가 들었는지, 생크림이 들었는지 따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위험에 처한 공주를 구해서 결혼하고 왕이 되는 이야기는 전형적인 ‘남성형 신분 상승’ 이야기다.
피오나를 권력 취득의 ‘수단’으로만 여긴다는 점에서 파콰드나 성에서 불타 죽은 이름 모를 기사들은 전부 동일 인물이다. 동화 속에서 여성이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드는 것은, 남성이 주인공일 때든 여성이 주인공일 때든 마찬가지였다.
“밤과 낮에 따라 모습이 달라질지어다.
진정한 사랑의 첫 키스로 사랑의 참모습을 따를 때까지.”
그런 점에서 슈렉 속 마녀의 저주는 다른 마녀들의 저주와는 달리 참으로 특이하다. 진정한 사랑의 첫 키스가 ‘저주를 풀어준다’고는 하지 않는다. 피오나의 겹은 파르페나 케이크와 같다 했던가. 낮에 비치는 아름다운 공주의 모습은 모두가 독점하려 달려드는 케이크의 겉모습이지만, 그 속에 들은 진정한 모습은 괴물이었다.
내면이 괴물이라고 해서 그것이 추하다거나, 못났다고 이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울퉁불퉁 못난 괴물이라는 생김새는 피오나 내면의 아픔을 형상화 한 것이다. 공주라고 항상 아름답고 행복하고 즐거운 것은 아니다. 성에 갇혀 홀로 살면서 느낀 외로움과 슬픔, 슈렉은 그 상처마저도 피오나의 것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한 마디로, 슈렉은 케이크 속을 들여다본 것이다.
표면상으로는 슈렉이 피오나를 구한 것 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로가 서로를 구해준 셈이다.
슈렉과 피오나는 아주 두꺼운 가면을 쓴 채로 서로를 만났다. 슈렉은 까칠하고 투덜거리면서 자신의 상처받은 마음을 숨겼다. 피오나는 '공주다운' 외모와 지위로 자신을 포장하며 아픔을 숨겼다. 가면은 자신을 가리는데에는 꽤나 효과적이지만, 상대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가면이 너무 두터우면 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기 때문이다. 가면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게 자기 가면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 했던가.
때론 그 가면을 벗어던져야만 진실되게 바라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사진 참조 : 네이버 영화 '슈렉' 스틸컷)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페르소나다.
슈렉이라는 영화를 두고 대부분은 괴물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기 위한 도전장이라고만 해석한다. 하지만 슈렉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 모두 슈렉과 같지는 않는지 묻는다. 우리 내면에 겹겹이 쌓인 아픔과 상처들이 만들어낸 가면은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라고 말한다.
우리는 슈렉처럼 깊숙한 늪지에 스스로를 가두고는, 자신을 건드리지 말라며 거칠고 위협적인 가면을 쓴다. 사실 그 가면을 쓰는 이유는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닌가? 물론 이 험난한 세상에서 뒹굴기 위해서는 맨 얼굴을 가리는 게 필수라고들 한다. 어쩔 수 없다고. 그렇다면 적어도 남들이 나의 가면만 보고 나를 판단한다고 말하지는 말자. 나 역시 남들을 그렇게 바라보았을 게 뻔하니까.
조금이나마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일단 나부터 가면을 벗고 마음을 열어보는 게 우선 아닐까.
어른에게 더 필요한 동화
감상평
어릴 적 엄마는 나의 영어공부를 목적으로 수많은 애니메이션 DVD를 구매해서 끼니마다 틀어주었다. 정말 영어공부가 되었느냐고 묻는 사람은 없길 바란다. 당연히 효과 없다. 아, 완전히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다. 이번에 영화를 보니 나도 모르게 대사를 줄줄 읊고 있더라. 아주 허튼짓을 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1시간 30분짜리 영화의 대사를 거진 다 외울 정도라면 얼마나 돌려봤을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아리라 믿는다. DVD 케이스 안에 꽂힌 무수히 많은 영화 중에서도 슈렉은 늘 새로운 영화였다. 나 역시 그 영화를 볼 때는 어린아이였으므로, 사회가 규범처럼 내밀던 진부한 공주와 왕자 이야기가 정답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 어린아이의 생각을 일깨워준, 그야말로 인생 영화라 할 수 있겠다.
나이를 먹고 슈렉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어릴 땐 저녁밥 먹을 때마다 틀어보던 영화였다지만, 이제는 나도 모르게 세상과 벽을 쌓고 싶을 때, 의기소침해질 때마다 보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사진 참조 : 네이버 영화 '슈렉' 스틸컷)
-
- 게임 산업에 진출 예정인 '넷플릭스'
넷플릭스가 최근 게임회사인 일렉트로닉 아츠(EA)의 임원과 페이스북 부사장을 지냈던 마이클 버듀를 영입하며 게임 산업까지 넘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버듀의 채용 소식을 처음 접한 블룸버그(Bloomberg)에 따르면, 넷플릭스가 내년 안에 비디오게임을 서비스 목록에 추가시키려 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넷플릭스는 이러한 새 시스템에 대한 추가 요금을 부과할 계획이 없다고 밝힌 적 있죠.
마이클 버듀는 넷플릭스 입사 전, 페이스북 리얼리티 랩스(Facebook Reality Labs)에서 근무하며 오큘러스 가상현실(VR) 헤드셋을 이용한 게임 콘텐츠 개발을 진행한 적 있습니다. 또한 일렉트로닉 아츠(EA)의 임원으로 지내며 ‘심시티(SimCity)’와 ‘식물 대 좀비(Plants VS Zombies)’ 등을 운영하는 모바일 스튜디오를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넷플릭스에서 그레그 피터스 최고집행책임자(COO)의 직속으로 일할 예정입니다. 블룸버그는 또 넷플릭스가 이미 게임 개발 관련 직원 모집을 진행하고 있어 수개월 안에 비디오게임 전담팀을 꾸릴 계획이라고 합니다.
넷플릭스는 비디오 게임 진출을 통해 춘추전국시대에 이른 OTT 시장에서 새로운 가입자 확보의 기회를 마련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현재 국내의 쿠팡 플레이, 왓챠, 티빙, 웨이브의 성장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유입될 예정인 디즈니 플러스의 존재까지 감안하면, 이는 좋은 시도라고 볼 수 있겠죠.
현재 넷플릭스의 경쟁사인 디즈니 플러스는 자체 콘텐츠를 지닌 기업들을 인수하는 전략을 나서고 있으며, 아마존도 최근 영화 제작사 MGM을 인수했죠. 그러나 게임 시장에 발을 들여놓은 OTT 플랫폼은 없기에, 넷플릭스의 가장 큰 장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씨네랩 에디터 Moon
-
- [30th BIFF 데일리] 우리에겐 파국의 시각화가 필요하다
DIRECTOR. 타니슈타 차테르지(Tannishtha Chatterjee)
CAST. 키르티 쿨하리(Kirti Kulhari), 샤립 하슈미(Sharib Hashmi), 인드라니엘 셍굽타(Indraniel Sengupta), 모니카 도그라(Monica Dogra), 사친 샤우다리(Sachin Chaudhary), 슈방기 부즈발(Shubangi Bhujbal), 압둘 라티프 쿠레쉬(Abdul Latif Qureshi)
PROGRAM NOTE.
요리를 잘하는 무슬림 암린은 남편 임티아즈가 사고를 당한 후 직접 생활비를 벌기로 한다. 가족의 반대와 검은 히잡에 대한 편견으로 일자리를 얻기도 쉽지 않은 중에 그녀는 비건인 파룰 부부의 집에서 조리사로서 첫 경력을 시작한다. 낯선 재료와 생소한 조리법으로 좌충우돌하던 암린이 능력을 인정받고 일정을 꽉 채워갈수록 가장인 남편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타니슈타 차테르지 감독은 18년 결혼생활 최대의 위기를 맞는 이 부부를 통해 관습과 전통의 억압에 도전하는 여성의 선택을 힘껏 응원한다. 간간이 암린의 상상이 삽입된 농담 같은 장면들은 암린에게도 관객에게도 숨 쉴 공간이자 명랑한 마법이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단지, 화사한 단 하나의 색깔이 필요할 뿐일지 모른다. 꿈인 줄도 모르고 늘 꿈꾸던 바로 그 색. (최은)
영화 <암린의 부엌>은 인도의 봄을 알리는 홀리(Holi) 축제를 부감하며 시작한다. 사람들은 색색의 가루를 뿌리고 춤을 추고, 암린은 그들과 같은 음악을 듣고는 있지만 축제의 일부가 되지 못하고 혼자만의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다. 해묵은 감정을 청산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어우러지자는 취지의 축제조차 참여할 수 없는 그 이름, 무슬림 여성이다.
암린이 처한 상황은 금방 어렵지 않게 파악된다. 작은 방 한구석에 조리대도 없이 화구 하나만 놓인 공간이 그의 부엌이다. 거기서 아이와 놀아주면서도 요리를 하고, 양파를 썰어 담으며 눈물을 흘리는 삶이다. 그러다 암린의 부엌이 확장될 계기가 생긴다. 홀리 축제에 뛰어나가 춤을 추던 남편이 다리를 크게 다쳤고, 때마침 동네 친구가 고향 방문으로 자리를 비우는 동안 일을 대타로 해줄 수 있겠냐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여유 있는 인도 가정들은 약간의 돈을 받고 요리만 하는 여성, 청소만 하는 여성을 고용한다. 이들은 보통 시간대를 나누어 여러 집을 다니면서 일한다. 암린의 친구 또한 암린이 요리를 잘하는 걸 알기에 제안한 것이다. 이 영화는 그렇게 암린이라는 무슬림 여성의 삶과 꿈을 대조해 보여주며 한 여성의 '사회인 첫 발짝'을 지지해 보인다.
그래서 영화의 한 축이 암린의 가정 생활이라면, 또 다른 한 축은 암린의 직장 생활이다. 어느 하나도 쉽지는 않다. 남편은 골수 무슬림이라기보다 가부장적이다. 암린이 집 밖으로 나가는 것도 못마땅하고, 일을 하는 건 더더욱 못마땅하다. 동시에 채팅으로 섹슈얼한 관계를 맺을 '여성'을 찾아 헤맨다는 이중적 여성관도 우습지만, 가정 내에서 성별에 따른 역할을 공고히 해 봤자 스스로를 '돈 버는 기계'로 만드는 것밖에 안된다는 방향성 또한 얼마 되지 않는 급여조차 잃은 지금의 상황과 극히 모순적이다. 그 아래서 문제를 느끼며 엄마 편을 드는 큰아들과,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아래 두 아이까지 다섯 명이 사는 한 방은 문제를 한구석에 쌓아둔 공간이다.
반면 암린의 또 다른 부엌, 새로운 직장 또한 쉽지는 않다. 파룰과 비노드 부부는 아내 파룰의 강력한 의지로 비건 식단을 실천하고, 야채 세제를 사용하거나 '비타민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손질법까지 다 정해져 있다. 모두 암린에게는 낯선 일이다. 철저히 계산되고 제한된 식이의 세계, 처음 보는 야채와 낯선 찻잎까지 이 공간 또한 암린에게 친절하지 않게 느껴진다.
그 안에서 암린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시도하며 나아가는 과정은, 한편으로는 전근대적 세계와 현대 세계 사이를 나아가는 한 시대적 인간의 모습처럼도 보이고, 평범한 사회 초년생처럼도 보인다. 무엇보다 모든 것이 자본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돈을 버는 여자가 점차, 별다르게 목소리 내거나 여성 인권이라는 의제를 끄집어내지 않고도 조금씩 힘을 얻어가는 과정이 보인다. 때로는 잘 해내고 또 때로는 헤매면서 암린은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
암린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토대로 꿈꾸기 시작한다. 비록 언어의 오해는 있었지만 아들의 결혼은 자신의 세대보다 좀더 열린 결혼이 되기를 꿈꾸기도 하고, 파룰의 드레스나 히잡을 쓰고 운전하는 여자나 수선집의 화보를 보며 자신의 삶에 꿈의 색깔을 덧칠한다. 그 안에서 광대가 되어도 그저 좋은 이유는, 이미 일정한 틀에 자신을 맞추는 연기 같은 삶을 어느 정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렇게 현실과 꿈 안에서 성장한다.
암린이 속한 두 개의 부엌은 공간과 다루는 음식도 다르지만, 그 안에서 암린이 취해야 하는 스탠스 또한 다르다. 직장 생활에서 성장할수록 암린은 가정의 부엌에서 자꾸 턱턱 부딪힌다. 그러나 이 갈등은 '파국의 시작'이 아니다. 파국은 이미 그 부엌 한 구석에, 쪼그려 앉아서 도마도 없이 양파를 썰어야 하는 그 낮은 조리현장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기존에 있던 파국이 시각화된 것 뿐이다.
고도 제한이 명백한 곳에서는 반드시 파국이 시각화된 후에야 성장이 찾아온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파국의 시각화가 필요하다. 무너진 자리라야 새 꿈을 꿀 수 있는 사람들에게. 한 남자가 제한한 낮고 낮은 부엌에 앉아만 있지 않고, 자신의 걸음을 걷기 시작한 암린의 시간을 바라보자. 그리고 함께 꿈꿔 보면 어떨까. 원하는 만큼의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자리를 펼쳐 가는, 나의 부엌을. 이 영화는 그 성장을 힘껏 지지해줄 것이다.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2025.09.18-26) 상영일정]
2025.09.18 13: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4관 (상영코드 052)
2025.09.20. 16: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4관 (상영코드 210)
2025.09.25. 20:00 CGV센텀시티 5관 (상영코드 585)
-
- 오해가 희망을 낳은 순간
팀 버튼 감독식의 독특하고 약간의 그로테스크함도 느껴지는 연출이 잘 묻어 나온 영화이었다. 인간보다 정 있고 어쩌면 더 인간 같은 면모를 보여주는 유령들의 존재는 우리가 생각하는 무서운 존재라는 프레임을 벗어나는 모습들이었다. 중간마다 등장하는 뮤지컬스러운 모습들도 영화를 보며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장치였다.
#사진 밑으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유령신부> 스틸컷
유령
당신은 유령을 믿는가? 여기서 잠깐 귀신과 유령의 차이가 궁금해할 거 같은 글을 읽는 당신을 위한 부가설명으로 차이점을 적어보겠다. 네이버 국어사전에 의하면 귀신은 「1」 사람이 죽은 뒤에 남는다는 넋.「2」 사람에게 화(禍)와 복(福)을 내려 준다는 신령(神靈).「3」 어떤 일에 남보다 뛰어난 재주가 있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4」 생김새나 몰골이 몹시 사나운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5」 오직 외곬으로 어떤 일을 하거나 어느 한 곳에만 붙어 있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뜻이고, 유령은 ㉯ 유령(幽靈) 「1」 죽은 사람의 혼령.「2」 죽은 사람의 혼령이 생전의 모습으로 나타난 형상.「3」 이름뿐이고 실제는 없는 것.이라는 뜻을 적용한다. 즉, <유령신부>는 '유령 「2」'에 가까운 모습들이 보이기 때문에 유령신부라고 명칭을 취했다.
색
영화의 나오는 유령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무섭고 공포스러운 존재가 아닌 인간계 보디 더 쾌활하고 활기찬 모습들로 나온다. 인간계와 유령계의 차이는 색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인간계는 탁한 회색과 어두운 계열의 색상으로 암울해 보이는 풍경과 속세적인 대사, 의욕 없어 보이는 네거티브적 분위기가 흘러나온다. 반면 유령계는 파란 피부에 다양한 색상이 드러나는 공간 속에서 축제와 연회를 즐기는 유령들의 유쾌한 모습이 등장한다. 이러한 인간계와 유령계 간 색의 대비로 생명이 있는 인간계보다 더 활기차 보이는 유령계를 드러내어 그동안 공포스러운 존재로 등장하는 유령의 이미지를 벗어나게 해 준다.
오해
그들은 처음에 오해를 낳았다. 망쳐버린 결혼식 예행연습으로 마음이 상한 '빅터'가 숲 속에서 계속 결혼식 예행연습을 한다. 그러던 중 무심코 '에밀리' 손가락 뼈에 결혼반지를 끼어넣어 빅터는 얼떨결에 지하세계로 들어가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된다. 빅터는 원하지 않게 청혼을 해버렸고 에밀리는 자신에게 건 청혼인 줄 알고 예행연습 청혼을 받아들인다. 그들이 원하는 바는 서로 다르다. 빅터는 '빅토리아'와의 사랑과 만남을 원하기 때문에 결혼을 원하고 에밀리는 그녀가 살아있을 때 이루지 못한 결혼이라는 한(恨)을 풀기 위해 결혼을 원한다. 하지만 에밀리는 빅터와 결혼할 수 없는 사실과 빅토리아의 존재를 알아채며 자신은 점차 이루질 수 없는 사랑임을 짐작한다. 끝끝내 결혼식을 진행하지만 에밀리는 자신의 부케를 빅토리아와 빅터에게 주고 에밀리는 그녀만의 자유를 얻으며 나비가 되어 날아간다.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것은 결혼이라는 한이 아닌 결혼이라는 굴레로부터 벗어던진 자유이다. 오해로 빚은 순간이 에밀리에게 자유를 주고 빅터에게는 빅토리아와의 사랑을 주는 희망적 결과가 돼버린 셈이다. 약간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
- [제10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추천작] 위대한 작가 이전에 어머니가 되어가는 한 여성의 성장기
20세기 가장 유명한 아동문학 작가 중에 한 명으로 손꼽히며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삐삐 롱스타킹의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인생을 통해 잘 알려지지 않은 10대 시절 성장기를 그리면서 집필한 작품의 기반이 된 모습을 비추는 실화 영화 <비커밍 아스트리드>! 전체적인 이야기를 구성하기보단 일부에 초점을 맞춘 작품으로 한 여성이 어머니로 변화하는 과정을 담백하게 보여주는데, 아마 이런 부분은 연출을 맡은 여성 감독 크리스텐센의 섬세함이 돋보이는 점일 것입니다. 여기에 주연을 맡은 알바 어거스트 배우의 완벽한 내면 연기는 그 섬세함에 힘을 실어주는데, 이제 막 연기를 신인이라고 하기에는 무안할 정도로 극의 무게 중심을 잘 이끌어줍니다. 그럼, 본격적인 영화의 후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10대 소녀의 세상 살아가기
1920년대 초, 스웨덴 시골 마을에 농장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애정 어린 대가족의 구성원인 16살 아스트리드. 그녀가 쓴 에세이는 지역에서 꽤 알려지게 되고 아버지의 소개로 지역 신문사에서 인턴 기자로 일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신문사에서 일하며 기자로서의 역량을 꽃피우려던 때, 아내와 이혼 소송 중인 신문사의 편집장 레인홀드 블롬버그와 연애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 결과는 뜻하지 않은 임신을 하게 되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덴마크로 건너가 아이를 낳은 후 위탁 가정에 아이를 맡기고 스웨덴과 덴마크를 오가는 생활을 이어가게 되는데...
예고편│Trailer
감독 : 페르닐레 피셔 크리스텐센
각본 : 킴 풉즈 아케손, 페르닐레 피셔 크리스텐센
출연진 : 알바 어거스트, 마리아 보네비, 트린 디어홈 외 다수
장르 : 드라마, 전기
상영 시간 : 123분
개봉일 : 국내 2021년 5월 12일
국가 : 스웨덴
등급 : 15세 관람가
평점 : 관람객 6.0, 네티즌 8.67, 기자ㆍ평론가 6.0, 로톤 토마토 프레시 96% 팝콘 80%, IMDB 7.1
어머니가 되어가는 그녀의 삶
영화를 오롯이 혼자서 이끌고 가는 아스트리드 역을 맡은 알바 어거스트 배우의 연기력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인물의 전기를 그리고 있음에도 그녀의 10대부터 20대까지의 이야기를 함에 있어서 그녀가 쓴 삐삐 롱스타킹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짐작이 갈 만큼 주체적인 캐릭터를 보여줍니다. 가부장적 당시 시대상을 탈피하며, 사랑에 대한 솔직함, 아들에 대한 사랑, 블롬버그와 가족과의 갈등까지 그녀가 헤쳐나가는 복잡하고 다사다난한 삶의 여정을 멋지게 표현해 줍니다.
그럼에도 페미니즘에 치우친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맞지 않습니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여성이 중심이 되기보다 소녀가 어머니가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곁에는 사랑했던 블롬버그도 있었고, 묵묵히 바라봐 준 아버지 사무엘, 어머니 한나도 있습니다. 그리고 추후에 인연이 될 스투레도 있지만, 이야기는 아들 라세와 아스트리드의 관계, 모성애를 보여주는 데 치중하고 있고 그 속에서 한 아이의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통해 성숙해가는 그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들을 맡아준 마리가 더 큰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을지 모르겠네요.
현대 여성에게 전해주는 메시지
전 세계적으로 수십 년간 수많은 구독자가 이어진 삐삐 롱스타킹의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전기는 그녀가 힘들었던 청년기를 보고 있습니다. 시작점에 아이들이 보내준 생일 편지와 엽서를 보며 그 안에 적힌 질문에 답하는 형식을 보여주는 데, 아마도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이 이 영화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녀가 겪었던 개인적, 사회적 문제가 밑바탕 되어 쓰였다고 말입니다. 이것을 풀어가는 과정을 통해 위대한 작가의 모습이라기보단 한 사람으로서의 모습으로 더욱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이렇게 따뜻한 이야기가 지금 같은 시기에도 잘 어울린다 생각 듭니다. 제가 너무 감상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중심에서 보이는 깊은 모성애와 더불어 한 여성의 성장, 그 캐릭터의 눈빛, 미소는 정말 매력적으로 다가와 줍니다. 그리고 이런 부분들이 과거의 여성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그 과정에서 보이는 메시지는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이입되게끔 만들어져 충분히 만족하고 관람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일부 불필요해 보이는 노출이나 따뜻함을 강조하며 늘어지는 전개는 개인에 따라 호불호가 있을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보여줘야 할 한 인물의 일부분은 착실히 전달되었다 느낍니다.
-
-
- [2021 CINEPICK AWARDS] 최고의 외국영화를 pick하라!
? 씨네픽 연말 EVENT!
2021 국내 개봉 외국 영화 중
최애 3편에 투표하면
커피 기프티콘이???
영화 정보도 얻고 상금도 받고!
영화를 즐기는 새로운 방법, 씨네픽!
? 기간 : ~ 12월 31일
? 응모는? 씨네픽 어플에서 부탁드려요
? 씨네픽 큐큐(Quote Quiz) 절찬리 진행중!! ?
? 씨네픽 숏-퀴즈 절찬리 진행중!! ?
아이폰 다운로드 https://apps.apple.com/kr/app/%EC%94%...
안드로이드 다운로드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
#씨네픽 매주 목요일 밤 11시 59분 오픈
#CINEPICK #영화 #추천 #박스오피스 #예측 #상금 #20만원 #클릭비 #김태형 #오윤희
TRANSLATE withx
EnglishTRANSLATE withEnable collaborative features and customize widget: Bing Webmaster Portal
-
- 영화 <분노의 질주 : 라이드 오어 > 어셈블 영상
대한민국 전세계 최초 개봉 확정! 5월 17일, 시리즈 역대 최강의 캐스트로 컴백?
-
- 넷플릭스 <O2>
[2021년 5월 12일, 넷플릭스 공개]
극한의 공간에 갇힌 리즈,
살아남기 위해선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해 내야 한다
남은 시간과 산소가 모두 사라지기 전에...
한 젊은 여성이 동면 캡슐에서 눈을 뜬다.
사라진 기억과 폐쇄된 공간, 그리고 급속도로 고갈되어 가는 산소.
살아남으려면 자신이 누군지 기억해내야 한다.
이곳이 그녀의 관이 되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