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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정2025-09-20 10:28:59

[30th BIFF 데일리] 우리에겐 파국의 시각화가 필요하다

영화 <암린의 부엌> 리뷰

DIRECTOR. 타니슈타 차테르지(Tannishtha Chatterjee)

CAST. 키르티 쿨하리(Kirti Kulhari), 샤립 하슈미(Sharib Hashmi), 인드라니엘 셍굽타(Indraniel Sengupta), 모니카 도그라(Monica Dogra), 사친 샤우다리(Sachin Chaudhary), 슈방기 부즈발(Shubangi Bhujbal), 압둘 라티프 쿠레쉬(Abdul Latif Qureshi)

PROGRAM NOTE.

요리를 잘하는 무슬림 암린은 남편 임티아즈가 사고를 당한 후 직접 생활비를 벌기로 한다. 가족의 반대와 검은 히잡에 대한 편견으로 일자리를 얻기도 쉽지 않은 중에 그녀는 비건인 파룰 부부의 집에서 조리사로서 첫 경력을 시작한다. 낯선 재료와 생소한 조리법으로 좌충우돌하던 암린이 능력을 인정받고 일정을 꽉 채워갈수록 가장인 남편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타니슈타 차테르지 감독은 18년 결혼생활 최대의 위기를 맞는 이 부부를 통해 관습과 전통의 억압에 도전하는 여성의 선택을 힘껏 응원한다. 간간이 암린의 상상이 삽입된 농담 같은 장면들은 암린에게도 관객에게도 숨 쉴 공간이자 명랑한 마법이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단지, 화사한 단 하나의 색깔이 필요할 뿐일지 모른다. 꿈인 줄도 모르고 늘 꿈꾸던 바로 그 색. (최은)

 

 

영화 <암린의 부엌>은 인도의 봄을 알리는 홀리(Holi) 축제를 부감하며 시작한다. 사람들은 색색의 가루를 뿌리고 춤을 추고, 암린은 그들과 같은 음악을 듣고는 있지만 축제의 일부가 되지 못하고 혼자만의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다. 해묵은 감정을 청산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어우러지자는 취지의 축제조차 참여할 수 없는 그 이름, 무슬림 여성이다.

 

암린이 처한 상황은 금방 어렵지 않게 파악된다. 작은 방 한구석에 조리대도 없이 화구 하나만 놓인 공간이 그의 부엌이다. 거기서 아이와 놀아주면서도 요리를 하고, 양파를 썰어 담으며 눈물을 흘리는 삶이다. 그러다 암린의 부엌이 확장될 계기가 생긴다. 홀리 축제에 뛰어나가 춤을 추던 남편이 다리를 크게 다쳤고, 때마침 동네 친구가 고향 방문으로 자리를 비우는 동안 일을 대타로 해줄 수 있겠냐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여유 있는 인도 가정들은 약간의 돈을 받고 요리만 하는 여성, 청소만 하는 여성을 고용한다. 이들은 보통 시간대를 나누어 여러 집을 다니면서 일한다. 암린의 친구 또한 암린이 요리를 잘하는 걸 알기에 제안한 것이다. 영화는 그렇게 암린이라는 무슬림 여성의 삶과 꿈을 대조해 보여주며 여성의 '사회인 발짝'을 지지해 보인다.

 

 

그래서 영화의 한 축이 암린의 가정 생활이라면, 또 다른 한 축은 암린의 직장 생활이다. 어느 하나도 쉽지는 않다. 남편은 골수 무슬림이라기보다 가부장적이다. 암린이 집 밖으로 나가는 것도 못마땅하고, 일을 하는 건 더더욱 못마땅하다. 동시에 채팅으로 섹슈얼한 관계를 맺을 '여성'을 찾아 헤맨다는 이중적 여성관도 우습지만, 가정 내에서 성별에 따른 역할을 공고히 해 봤자 스스로를 '돈 버는 기계'로 만드는 것밖에 안된다는 방향성 또한 얼마 되지 않는 급여조차 잃은 지금의 상황과 극히 모순적이다. 그 아래서 문제를 느끼며 엄마 편을 드는 큰아들과,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아래 두 아이까지 다섯 명이 사는 한 방은 문제를 한구석에 쌓아둔 공간이다.

 

반면 암린의 또 다른 부엌, 새로운 직장 또한 쉽지는 않다. 파룰과 비노드 부부는 아내 파룰의 강력한 의지로 비건 식단을 실천하고, 야채 세제를 사용하거나 '비타민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손질법까지 다 정해져 있다. 모두 암린에게는 낯선 일이다. 철저히 계산되고 제한된 식이의 세계, 처음 보는 야채와 낯선 찻잎까지 이 공간 또한 암린에게 친절하지 않게 느껴진다.

 

 

그 안에서 암린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시도하며 나아가는 과정은, 한편으로는 전근대적 세계와 현대 세계 사이를 나아가는 한 시대적 인간의 모습처럼도 보이고, 평범한 사회 초년생처럼도 보인다. 무엇보다 모든 것이 자본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돈을 버는 여자가 점차, 별다르게 목소리 내거나 여성 인권이라는 의제를 끄집어내지 않고도 조금씩 힘을 얻어가는 과정이 보인다. 때로는 잘 해내고 또 때로는 헤매면서 암린은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

 

암린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토대로 꿈꾸기 시작한다. 비록 언어의 오해는 있었지만 아들의 결혼은 자신의 세대보다 좀더 열린 결혼이 되기를 꿈꾸기도 하고, 파룰의 드레스나 히잡을 쓰고 운전하는 여자나 수선집의 화보를 보며 자신의 삶에 꿈의 색깔을 덧칠한다. 그 안에서 광대가 되어도 그저 좋은 이유는, 이미 일정한 틀에 자신을 맞추는 연기 같은 삶을 어느 정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렇게 현실과 꿈 안에서 성장한다.

 

 

암린이 속한 두 개의 부엌은 공간과 다루는 음식도 다르지만, 그 안에서 암린이 취해야 하는 스탠스 또한 다르다. 직장 생활에서 성장할수록 암린은 가정의 부엌에서 자꾸 턱턱 부딪힌다. 그러나 이 갈등은 '파국의 시작'이 아니다. 파국은 이미 그 부엌 한 구석에, 쪼그려 앉아서 도마도 없이 양파를 썰어야 하는 그 낮은 조리현장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기존에 있던 파국이 시각화된 것 뿐이다.

 

고도 제한이 명백한 곳에서는 반드시 파국이 시각화된 후에야 성장이 찾아온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파국의 시각화가 필요하다. 무너진 자리라야 새 꿈을 꿀 수 있는 사람들에게. 한 남자가 제한한 낮고 낮은 부엌에 앉아만 있지 않고, 자신의 걸음을 걷기 시작한 암린의 시간을 바라보자. 그리고 함께 꿈꿔 보면 어떨까. 원하는 만큼의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자리를 펼쳐 가는, 나의 부엌을. 이 영화는 그 성장을 힘껏 지지해줄 것이다.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2025.09.18-26) 상영일정]

2025.09.18 13: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4관 (상영코드 052)

2025.09.20. 16: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4관 (상영코드 210)

2025.09.25. 20:00 CGV센텀시티 5관 (상영코드 585)

 

 

작성자 . 선이정

출처 . https://brunch.co.kr/@sunnyluvin/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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