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oHa2023-02-15 22:12:29
내게 미결로 남는 완전한 사람
영화 <헤어질 결심>리뷰
때론 인생이 너무 보잘 것 없어 보일만큼
아슬아슬 줄타기를 탈 때 내 안에 더욱 깊게 파고드는 사람이 있다
비록 우리 사랑의 결과는 미결로 남았을지라도
그 사람은 이미 내 마음 속에 완전하게 남아버렸다
마음 속에서 그를 떼어내고 완전히 헤어지기 위해서
결국에는 마음 먹을 결심이 필요한 수준까지 와버린 것이겠지
그렇게 온전히 내 모든 민낯까지
전부 내놓을 만큼
모든 것을 주고 싶을 만큼
간절한 사람
우리를 둘러싼 서사 속
수많은 의심을 잠재울 만큼
나에게는 그 자체로 완전한 사람
그렇게 작은 의심은 관심이 되고,
마침내 완전한 결심이 되버린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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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나는 캐릭터와 아쉬운 관계성
- 6★/10★
복권에 당첨되었으나 그 돈을 금세 말아먹는 사연은 흔하다. 직접 목격하진 못했더라도 누구나 해외 토픽에서 한두 번쯤은 들어봤을 이야기다. 레슬리도 그중 하나다. 〈레슬리에게〉는 한 작은 마을의 술집 앞에서 레슬리가 기쁨에 겨워 환호하는 장면을 담은 뉴스 화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6년 후. 레슬리는 철저한 빈털터리가 되었다. 숙박비를 내지 못해 모텔에서 쫓겨난 후 여기저기 부탁을 하고 연락을 돌려보지만 그녀를 받아주는 사람은 없다. 레슬리는 복권 당첨 후 이미 마을의 유명 인사가 되었고, 당첨금 19만 달러를 빠르게 탕진해 빈털터리가 됨으로써 또다시 화젯거리(조롱거리)가 되었다. 망가질 대로 망가진 알코올중독자를 받아줄 사람은 이제 마을에 없다.
결국 레슬리는 다른 도시에 있는 아들 제임스에게 간다. 이제 막 성인이 된 제임스는 육체노동을 하며 차근히 자기 삶을 꾸려나가는 중이다. 제임스는 레슬리를 따뜻하게 안아준다. 맛있는 밥과 깨끗한 옷을 주고 새로운 계획이 생길 때까지 얼마든지 집에 머물라고 다정하게 말해준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제임스가 집에 머무는 동안 지켜야 할 단 하나의 규칙으로 ‘술 마시지 말 것’을 요구하는 장면이 보여주듯이 말이다.
짐작 가능하듯, 레슬리는 제임스가 제시한 단 하나의 규칙조차 지키지 못한다. 심지어 술을 마시기 위해 제임스의 하우스메이트 돈에 손을 대기까지 한다. 결국 제임스는 폭발한다. 제임스가 어릴 때, 레슬리는 제임스를 친구에게 맡겨둔 채 술을 마시다 그를 두고 떠난 적이 있다. 때문에 레슬리의 ‘규칙 위반’은 아들의 상처를 또 한 번 후벼 파는 일이다. 제임스가 과거 일을 묻지 않고 따뜻하게 받아줬는데도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한 레슬리에게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결국 레슬리는 다시 자신이 떠나온 마을로 되돌아간다. 과거 제임스를 맡겼던 친구 집에 신세를 지지만 금세 쫓겨나고 술집, 길거리, 폐건물을 전전한다. 정말 이제 레슬리가 갈 곳은 아무 데도 없는 듯 보인다.
이후 영화는 막다른 길에 몰린 레슬리가 모텔 주인 스위니의 호의로 조금씩 책임감을 배우고 자기 삶을 다시 꾸리는 과정을 담는다. 알코올중독 아내가 있었던, 자신 역시 누군가의 호의로 ‘괜찮은’ 삶을 꾸려나가던 스위니는 다른 사람들처럼 레슬리를 조롱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스위니의 호의를 어떻게든 빼먹을 생각만 하던 레슬리도 조금씩 그의 기대에 부응해나가며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았던 미래를 모색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늘 술 마실 궁리만 하며 폭력적으로 구는 레슬리에게도 남들이 보지 못한, 보지 않은 면이 있음을 드러낸다. 레슬리는 마을 사람들의 짓궂은 조롱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기거나 들이받는 식으로 ‘시원하게’ 응징하지만 속으로는 언제나 자신이 ‘괜찮은 사람’일 수 있기를 갈망했다. 그리고 벼랑 끝에서 이를 알아봐 주는 스위니를 만나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으나 오랫동안 마음 한편에 남겨둔 꿈을 펼쳐낸다.
스위니가 레슬리의 관계에서 의구심이 드는 부분도 있다. 영화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자격’을 묻고 따지지 않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믿음에 기반한 호의가 가능케 하는 아름다운 순간들을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쓰레기’가 된 삶이라도 누군가가 손 내밀어주고, 그로 인해 관계가 시작된다면 ‘괜찮은’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섬세하고 치밀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둘의 관계가 ‘신데렐라’와 ‘백마 탄 왕자’의 노동계급판 변주로 읽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곁을 묵묵히 지키며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과 더 높은 위치에서 누군가를 ‘구원’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는 한끗 차이로 결정되기도 한다. 〈레슬리에게〉는 분명 전자의 관계 양상을 지향한 듯하지만, 후자의 의구심을 완전히 지울 만큼 탄탄하지는 않다. 결국 이런 유의 영화에서는 스위니 같은 ‘비현실’적인 인물을 설득력 있게 재현하는 데 그 성패가 달려 있기 마련인데 〈레슬리에게〉가 여기에 성공했는지는 의문이다. 분명 적당한 감동을 준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레슬리에게〉가 끝내 자기 메시지를 온전히 전하는 데 실패한 듯 보이는 것이 유독 아쉬운 이유는, 레슬리 캐릭터의 힘과 이를 연기한 안드레아 라이즈보로의 빼어난 열연 때문이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자의 공허함, 허탈함, 분노 그리고 동시에 아주 깊은 곳에 깃들어 있는 희망을 응축한 캐릭터와 이를 설득력 있는 리얼한 연기로 선보이는 안드레아 라이즈보로는 영화의 성취에 대한 개인의 판단과 별개로 분명 많은 사람에게 인상적으로 다가갈 것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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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 더 하이츠> 음악과 춤을 곁들인 라티노의 미나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가족들과 이민 온 워싱턴 하이츠에서 잡화점을 하고 있는 ‘우스나비(안소니 라모)’, 동네 미용실에서 일하는 ‘바네사(멜리사 바레라)’, 엘리트로 온 동네 사람들의 기대를 받으며 스탠퍼드 대학에 진학한 ‘니나(레슬리 그레이스)’. 세 주인공이 각기 자신의 꿈과 현실 사이에서 깊은 고민을 하는 사이 워싱턴 하이츠에는 무더운 여름과 함께 우스나비의 가게에서 판매된 복권이 당첨됐다는 소식이 찾아온다. 그러나 복권에 당첨된 이가 누군지 좀처럼 밝혀지지 않는 사이 하이츠 전역에 정전이 찾아오고, 거리의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뒤바꿀 이별을 맞이한다.
할리우드의 뮤지컬 영화에게는 일관되게 기대하고 또 실망하는 대목이 있다. 이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인간사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한다. 주인공들의 시련과 아픔은 해피엔딩을 위한 밑거름일 뿐이며, 종국에 그들은 원하는 꿈을 성취하고 보상을 받는다. 흥겨운 음악과 춤, 세련된 만듦새는 그 기쁨과 행복을 배가한다. 대신 결말에 이르기 위한 갈등의 해결 과정과 방식은 휴 잭맨 주연의 <위대한 쇼맨>처럼 지나치게 간략하고 도식화되어 얄팍하다는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이는 달리 말해 뮤지컬 영화가 일부의 변화만으로도 훨씬 다채로운 매력을 보여줄 수 있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데이미안 셔젤 감독의 <라라랜드>는 여전히 해피엔딩을 표방하면서도, 플롯을 살짝 비틀어 모든 것이 완벽한 유토피아적 결말의 반대쪽으로 향한다. 실제로 꿈을 성취하기 위해서 미아와 세바스찬이 필연적으로 져야 하는 현실의 무게감을 재즈 피아노의 건반에 담은 결말에는 씁쓸함이 한 스푼 더해져 있다. <스텝 업> 시리즈와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존 추 감독이 뉴욕시 맨해튼에 위치한 라틴계 이민자들의 동네, 워싱턴 하이츠에서 3일간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룬 동명의 뮤지컬을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 <인 더 하이츠>도 마찬가지다.
<인 더 하이츠>는 겉보기와 달리 마냥 희망적이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다양한 장르의 비트와 선율 위에는 라틴계 이민자들이 열망하는 꿈과 환상보다 현실을 묘사하는 가사가 먼저 얹혀 있다. 우스나비의 잡화점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일면을 포착한 오프닝처럼 영화는 크고 거시적인 사회적 구조와 문제가 아닌 개개인의 소소한 삶을 하나씩 짚어나간다. 그래서 우스나비, 바네사, 니나 등의 중심인물들에게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 우스나비는 고향 도미니카 해변에 있는 아버지의 상점을 다시 열겠다는 의지를 현실의 난관과 함께 음악에 담는다. 바네사는 동네 미용실에서 일하면서도 늘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픈 꿈을 위해 도시로 나가고 싶지만 많은 돈이 필요한 현실을 읊조린다. 니나는 스탠퍼드 대학에 진학하기 전, 특히 어릴 적 자신의 모습으로 회귀하고 싶은 심정을 노래한다.
하늘에 떠 있는 꿈과 환상보다 땅에 붙어 있는 현실에 주목하는 영화의 전반적인 태도와 정서는 주요 소재 중 하나인 복권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분명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복권에 주목할 수밖에 없도록 유도한다. 대부분의 캐릭터들은 바삐 출근하는 와중에도 복권을 잊지 않고 사가며, 주인공들의 대사에서도 복권은 끊임없이 언급되면서 그 존재가 부각된다. 복권 당첨자가 우스나비 잡화점에서 나왔다는 소식에 수영장에 모인 사람들은 제각기의 희망을 화려하게 자랑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복권으로 이룰 수 있는 꿈을 신나게 보여준 뒤, 정작 복권은 갑작스럽게 자취를 감춘다. 이미 그들은 세 주인공의 노래에서 드러났듯이 그런 꿈이 결코 가능하지 않을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단순히 노래와 춤만으로, 곧 우연한 복권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환상 또한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인 더 하이츠>는 주인공들의 공간인 워싱턴 하이츠를 통째로 정전 속에 빠뜨리면서 그들이 손에 잡히지 않는 꿈과 노래만으로 바꿀 수 없는 현실을 살아가게 만드는 진짜 힘을 선보인다. 그 힘은 존재 자체의 소중함이다. 설령 현실이 너무나 어두울지라도 그들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한, 그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소중하며 더 나아가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전기가 끊겨서 더운 여름날 무기력해진 워싱턴 하이츠의 사람들이 본래 늘 하던 대로 어제와 같이 오늘과 내일도 살아가자고 노래하고 춤추는 이유다. 비록 노래와 춤 그 자체가 직접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해도, 그 자체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늘 거리에서 그래피티를 그리던 '피트(노아 카탈라)'로부터 바네사가 옷 디자인의 영감을 얻는 것, 우스나비가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하이츠에 남는 것, 니나가 스탠퍼드 대학에서 버티기로 결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메시지는 특히 워싱턴 하이츠에 사는 모든 이들을 마치 자신의 아이들처럼 키워 온 '클라우디아(올가 메레디즈)'의 삶에 집약되어 있다. 모두의 할머니였던 그녀는 정전으로 말미암아 거리가 혼란에 빠진 바로 그 순간 워싱턴 하이츠의 사람에게 가슴 아픈 이별을 고한다. 하지만 쿠바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온갖 잡일을 하며 자신의 자리를 만들고 기어코 지켜낸 그녀의 인생사는 현재의 삶에 지치고 본래의 자리를 이탈해 과거로 돌아갈까 고민하는 청춘들에게 그 자체로 삶의 버팀목이 되어준다. 실제로 주인공들은 일확천금을 노릴 복권이 아닌 클라우디아가 수십 년 간 간직해온 손수건을 보면서 그녀가 그랬듯이 자신의 자리에서 다시 한번 일상을 살자고 결심한다.
이 지점에서 <인 더 하이츠>는 마치 라틴계 이민자들을 위한 <미나리>처럼 느껴진다. 이민자들의 소소하고 평범한 삶의 일면을 다루고, 또 할머니가 이민자들의 험난한 적응기를 지탱해주는 힘이자 존재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일맥상통한다. 무엇보다도 메시지를 담은 소재가 각각 복권과 미나리로 다를 뿐, 미국 사회에서 비주류인 이민자로 살아남기 위한 조건으로 존재함으로써 일구는 변화의 중요함을 말하는 것 역시 똑같다. 자신의 꿈이 결국 실패로 귀결되었지만 할머니가 심은 미나리를 보면서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는 것을 배운 제이콥처럼, <인 더 하이츠>의 주인공들도 꿈꾸는 일들이 기적처럼 이루어지지만은 않는 평범함의 힘을 마음 깊이 간직한다.
다만 <인 더 하이츠>는 <미나리>만큼의 뭉클함이나 따스함까지 전달하는 데는 실패한다. 일단 철저히 라틴계 이민자들의 구체적인 삶과 일상을 들여다보는 작품이기에 한국인의 입장에서 공감하기 어렵다.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 더 나아가 미국의 히스패닉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이상 접근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러닝타임 내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고 느껴질 여지도 있다. 영화의 이야기는 사실상 '자신의 꿈을 가로막는 문제들이 하나씩 있는 라틴계 이민자들이 뉴욕에서 열심히 살아가며 문제를 해결하고 꿈을 이루려고 한다'는 문장 하나로 축약 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주인공들이 돌아가면서 털어놓는 여러 고충은 실상 크게 다를 게 없고, 오히려 캐릭터들의 감정선이나 사연을 도중에 뚝뚝 끊을 뿐이기에 영화는 자연히 늘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현실 안에서 꿈을 꾸며, 실제적인 해결책과 방안을 고민하는 라틴계 이민자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매혹적이다. 이는 존 추 감독의 몫이 적지 않다. 존 추 감독은 <나우 유 씨 미 2> 같은 영화에서 각본의 짜임새와 볼거리 중 후자를 중시한다고 비판받아 왔는데, 이 대목이 역으로 주인공들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꿈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장점이 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들의 눈앞에 있을 수 없지만 그들이 무엇보다도 바라고 있는 것들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바네사가 꿈을 노래할 때 맨해튼의 건물을 형형색색의 천들이 뒤덮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니나와 베니가 건물 벽을 걸어 다니며 춤을 추고, 니나가 자신의 현실을 한탄하며 노래할 때 거리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목격하는 것, 우스나비가 잡화점 한 구석에 마련한 공간이 진짜 해변처럼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또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전개가 유발하는 지루함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계속 귓가를 스치는 음악과 음악에 스펙터클을 더하는 군무가 그나마 상쇄해준다. 수영장에서의 군무 장면은 물이라는 소품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측면에서 감독의 전작인 <스텝업 3>를 떠올리게 하며, 싱크로나이징을 본 딴 수중 댄스의 등장은 한 발짝 발전한 것처럼 보인다. 정전된 직후나 오프닝 시퀀스에서 거리를 가득 매운 채 선보이는 칼군무는 해당 장면이 함축하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물론 그 자체로 열정과 흥분을 뿜어내는데, 이 역시 전작인 <스텝업 4>에서 플래시 몹을 활용한 댄스 장면들을 보는 듯하다.
따라서 <인 더 하이츠>는 현실을 더해 지나치게 뮤지컬스러운 정서는 덜어내고, 그러면서도 뮤지컬 고유의 스타일을 극대화시킨 결과 더 큰 매력을 뽐내는 영화로 재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더해 미국의 히스패닉과 라티노들의 존재와 이야기가 할리우드 영화에서 전면에 나서는 경우가 결코 많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흥미롭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설령 무시당하고 보이지 않는 대우를 받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위치와 자리를 지키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고 격려하는 <인 더 하이츠> 역시 그 존재 자체로 가치 있기 때문이다.
A(Acceptable, 무난함)
<라라랜드>의 형식에 <미나리>의 메시지를 더해 라틴 팝으로 버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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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없이 보기 힘든 어른과 아이의 관계를 그린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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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아이와 어른의 관계를 그린 영화들
오늘 추천작들은 혈연관계가 아닌 다양한 사회적 관계에서 형성된 어른과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들을 가지고 왔는데요. 위탁모, 조폭, 엑스맨, 유모 등 혈연이 아니더라도 끈끈한 관계로 형성된 의미가 깊은 영화들 같이 만나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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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에겐 최악이었을지라도 당시의 나에겐 최선의 선택이었다.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시사회를 관람한 후 작성한 리뷰글입니다.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개인적으로 내가 작년부터 국내개봉만 기다려왔던 작품이다.
여러 영화제의 수상 후보에 오르고, 실제로 이 영화의 주인공인 레나테 라인스베는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탔다.
하지만 사실 수상여부와는 별개로 '이 영화는 왠지 내가 깊이 사랑에 빠질 것 같은 작품이다'라는 느낌이 올 때가 있지 않나.
이 영화가 내겐 그런 경우였다.
그리고 이런 내 느낌은 적중했다.
영화의 도입부부터 나는 이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고, 영화의 매 순간순간을 그저 즐기면서 관람했다.
영화는 의학을 공부하던 주인공 '율리에(레나테 라인스베)'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오는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자신의 인생에서 자신이 조연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느낀 율리에는 끊임없이 다음 챕터로 나아간다.
의학을 전공하다가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꾸기도 하고, 사진을 배우다가 만화가 악셀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서점에서 일하기도 하고, 이후에 우연히 에이빈드를 만나 서로에게 강하게 끌리기도 하고.
그녀는 정해지지 않은 길을 끊임없이 달려가고, 또 나아간다.
이 영화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12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챕터들을 통해 율리에의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까지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각본을 소설 작품처럼 12개의 챕터로 만든 이유에 대해 감독 요아킴 트리에는
'인생의 챕터들 사이의 공간이 실제로 보이는 공간만큼 소중하다는 걸 보여주는 게 목적이었다.
이 작품은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한 영화지만,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이기도 하다.'
라고 답했다.
율리에와 '악셀(안데르스 다니엘슨 리)'은 서로를 매우 사랑했지만, '아이를 가지는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의 생각이 확연히 달랐다.
나이차가 어느 정도 있는 둘은 삶의 다른 단계에서 서로를 만났다.
성공한 만화가로서 비교적 뚜렷한 목표와 앞날이 있는 악셀과 달리, 율리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선택을 하고, 또 방황하곤 한다.
율리에는 자신에게 안전망은 없지만 머무를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이다. 또 머무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복잡한 자기 자신을 명확히 정의내리고,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사람이다.
율리에는 악셀을 떠나 이전에 우연히 만나서 서로에게 강한 끌림을 느꼈던 '에이빈드(할버트 노르드룸)'에게로 향한다.
우연히 한 파티장에서 처음 만났을 당시, 둘은 서로에게 애인이 있는 상태였기에 당시에 차마 바람을 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종의 선을 정해두고 그 선을 넘는 말과 행동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우연히 율리에가 일하는 서점에서 재회한 둘은 여전히 서로에게 강한 끌림을 느끼고 있음을 발견했다.
에이빈드는 이런 자신을 '최악의 인간이 된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라고 표현한다.
율리에는 자기자신을 괴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어느 하나 끝까지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율리에는 에이빈드에게 '이런 자신을 참아줘서 고맙다'라고 말하곤 했다.
율리에에게 에이빈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율리에는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옛연인인 악셀이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도 듣게 된다.
율리에는 병실에 있는 악셀을 찾아가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개인적으로 이 시점에서 악셀과 율리에가 나누는 여러 대화들의 내용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악셀은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 자꾸 지난 날을 곱씹고 되돌아보게 되었는데, 이건 '예술'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아이를 가진 율리에가 악셀에게 '아이를 가지고 부모가 되는 것에 대한 확신이 있었냐'고 묻자 악셀은 자기자신도 불안했지만 율리에가 좋은 엄마가 될 확신을 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악셀은 항상 율리에가 좋은 엄마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악셀은 율리에에게 '내가 너와 헤어지고 나서 가장 후회되는 한 가지는 네가 얼마나 멋진지를 깨닫게 해주지 못한거다'라는 말을 건넨다.
그리고 율리에를 평생 동안 제일 사랑했다고. 자신은 죽어서 추억으로, 목소리로만 남는 게 싫다고. 자신의 집에서 율리에와 같이 살고 싶다고.
악셀과 율리에는 삶의 다른 단계에서 만났고, 서로 다른 걸 원했다.
악셀은 비교적 안정적인 삶 속에서 보편화된 다음 단계로 나아가길 원했고,
율리에는 지금 자기 자신이 어떤 단계인지도 명확하게 정의내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수시로 꿈과 목표가 바뀌는 사람이었다.
서로 다른 삶의 단계 속에서 각자가 생각한 최선의 선택을 했기에 어긋날 수밖에 없던 사랑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챕터인 12장은 '모든 이야기에는 끝이 있다'이다.
악셀은 결국 세상을 떠나고, 율리에도 아이를 유산하게 된다.
에이빈드와 헤어진 율리에는 사진작가로서의 일을 계속 이어나간다.
그리고 우연히, 에이빈드가 새로운 여자와 결혼 후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이전과 확실히 달라진 율리에의 눈빛은 더 깊고, 복잡하고, 또 평화롭다.
영화의 긴 호흡을 따라가면서 그저 율리에의 삶을 지켜보며, 율리에가 하는 고민과 선택들을 복잡한 생각 없이 단순히 마주하며 끝까지 관람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 뒤 괜히 눈물이 나고 공허한 기분이 드는 나 자신을 마주했다.
아마도 인생은 그래도 살아진다, 살만하다는 생각과 한편으론 인생은 너무 덧없다는 생각이 공존하기 때문이겠지.
사실 영화를 보면서 조금은 부끄럽지만 '조금은 내 얘기 같고, 어쩌면 앞으로 이어질 내 얘기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내 운명이길 바라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그 무언가를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 '무언가'는 오지 않기도 하고.
이게 적합한 길이라고 생각해서 선택했는데 그런 선택을 한 내가 너무 최악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어느 하나 끝까지 이루어내는 일이 없어서 나 자신이 엉망이 된 것 같고.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나의 선택들이 후회가 되어 한꺼번에 밀려오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나 자신이 너무 괴짜같고.
나는 나 자신이 최악으로 느껴질 때가 너무 많다.
그럴 때마다 나 스스로에게 위로삼아 자주 건네는 말이 있다.
그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었잖아.
이 영화는 이런 말을 건네주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제는 나 혼자 나 스스로에게 위로 한 마디를 건네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 위로를 직접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영화는 단순한 사랑영화가 아닌, '한 인간의 성장담'을 이야기하는 영화이다.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제일 사랑했기에 최악이라고 느껴질법한 선택을 했고, 또 그 선택들에 후회했고, 이 과정을 겪으며 성장했다.
이 한 사람은 수많은 사랑과 이별, 좌절 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위한 선택을 했으며, 무수히 많은 그 선택의 결과를 마주하며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고, 또 이 과정 속에서 온전한 '자기 자신'을 지켜냈다.
감히 타인의 선택에 대해 '최악'이라고 정의내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살다보면 누구나 최악이 된다고 생각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최악'이라는 지점에 도달한 후, 그 다음에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도약하는지'인 것 같다.
그러다보면 그 당시에는 그게 스스로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
무한하지 않은 생애 속, 끊임없이 도전하고 갈망하는 율리에의 이야기를 담은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25일 개봉한다.
이 영화는 반드시, 꼭 영화관에서 보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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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가 질문을 던질 때
좋은 영화는 답을 주기보다는 질문을 던진다고들 한다. 하지만 철학적인 논쟁이나 윤리적인 이슈가 있는 주제를 다루는 영화들은 대부분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감독의 의견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서복> 이전에도 복제인간을 다룬 영화는 있었고 한국에서만 대성공을 거두었던 <아일랜드>의 경우 복제인간의 인권을 인정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아일랜드>가 복제인간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액션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것인지 논의의 여지를 주려고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황우석 박사의 논문이 발표되며 복제 이슈가 뜨거웠던 당시로서는 소재만으로도 질문을 던지는 것이 가능했다. 이후 여러 논란을 거쳐 생명체를 복제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이전처럼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지금 이용주 감독은 복제인간 소재를 꺼냈다. 소재가 낡았다고 해서 영화까지 낡으라는 법은 없지만 <서복>은 소재를 가지고 논의에 들어가기보다는 소재와 논의를 보여주는 데서 그친다. 복제인간 서복(박보검 분)이 기헌(공유 분)에게 하는 질문들은 질문 자체로는 의미가 있지만 영화의 맥락과 어울리지 않아 기헌을 당황시킬 뿐이다.
<서복>이 던지려고 했던 질문들은 서복의 존재에서 파생된다. 서복은 인류의 질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탄생했지만 뜻밖의 부작용으로 염력을 가지게 됐다. 영화에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아 아쉽지만 서복을 만들어낸 임세은 박사(장영남 분)는 별도의 목적이 있었다. 임 박사의 서복 제작 동기에 대해서도 논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깊이 들어가지 못하며 서복의 정체성의 근간을 이루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고뇌를 잠깐 보여주는 선에서 머무른다. 비슷한 논의는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레플리카>에서 시도된 적이 있는데 역시나 액션영화로 마무리되었을 뿐이다. 아마도 임 박사의 동기에 대해서는 관객과 제작진 모두가 비슷한 의견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더 파고들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임 박사는 서복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감정적인 캐릭터가 되어버렸고 장영남이라는 배우치고 영화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고 퇴장한다. 서복의 탄생 동기를 둘로 나눈 건 확실한 패착이었다.
연구소의 실장 신학선(박병은 분)이 서복에 대해 던지는 질문은 '서복이 과연 인간인가'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고 사람처럼 말을 하고 성장하지만 서복은 실험실에서 태어났고 인간과는 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다. 애초에 탄생 동기가 인류의 복지 향상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서복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 신 실장의 의견이다. 따라서 실험체로서 서복이 겪어야 하는 고통들은 신 실장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관객에게 서복이 인간이냐고 묻는다면 대다수는 인간이라고 대답할 것이며 인간이 아니라고 대답하더라도 서복이 인류의 복지를 위해 영원히 고통받아서는 안된다고 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대답을 기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서복이 박보검의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서복이 인간의 형상이 아닌 생명체였다면, 혹은 서복이 박보검이 아닌 다른 배우였다면 다른 대답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서복이 기헌과 함께 시장을 돌아다니는 장면에서 사람들은 모두 서복을 인간이라 인지하며 심지어 기헌에게 동생을 잘 챙기라는 연민섞인 시선마저 보낸다. 그렇기에 서복이 인간이냐는 질문은 논의를 넘어서지 못하고 관객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거나 공감을 얻지 못한다. 동물실험마저 윤리적이지 않다는 논의가 나오는 시대에 복제인간이 인간인가/복제인간은 이용되어도 좋은가에 관한 질문은 신학선의 무자비한 캐릭터를 설정해주는 데 머무를 뿐이다.
서복을 탄생시킨 연구소 서인의 회장인 김천오(김재건 분)는 서복을 가지고 신의 역할을 하려 한다. 서복이 줄 수 있는 영생을 나눠줄 이를 악인이 선택하겠다고 한다는 발상은 꽤 낡았으며 그다지 유효하지도 않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런 일은 이미 현실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의료 시스템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자와 받지 못하는 자로 나뉘는 사회에서는 이미 평균수명에서 차이가 나며 의료 혜택이 동등하게 분배되는 곳에서는 정작 의료진이 희생을 강요당하거나 의료 수준의 질이 낮다. 자세한 논의는 이미 <식코>에서 마이클 무어의 무자비한 카메라가 다룬 적이 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의 생명을 다룰 수 있는 시대는 오래 전에 도래했으며 관련 논의도 마무리된지 오래다. 차라리 사형제도 폐지 쪽이 이제는 동일 주제를 다루는 쪽에 가까워 보일 정도다. 영생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영생의 무의미함에 대해서는 뱀파이어물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기록이 있어 <서복>은 늦은 감이 있다. 결국 회장이 다루는 주제도 마찬가지로 회장의 판에 박힌 캐릭터를 만들어 주는 역할 이상을 하지 못하며 돈에 환장한 늙은이 캐릭터조차 식상해 주제도 캐릭터도 서사에서 별다른 특이점을 제공하지 못한다.
기헌이 서복에게 갖는 질문들은 보다 복합적인 편이다. 다만 기헌의 질문들은 본인 스스로가 갖는 의문이기보다는 서복이나 다른 캐릭터들이 던지는 질문을 흡수하는 것에 가깝다. 기헌은 서복을 통해서든 아니든 자신이 가진 질병을 치료하고 더 살고 싶어하는데 정작 그이유는 알지 못한다. 서복은 기헌에게 "내가 왜 민기헌 씨를 살려줘야 하는데요?"라고 묻지만 기헌은 대답하지 못한다. 이외에도 서복은 기헌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데 기헌은 잠시 생각해 보지만 결국엔 단 하나의 질문에도 스스로 답을 도출해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헌은 서복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삶에 대해 생각해 보지만 이를 통해 기헌이 한 단계 성장했다는 증거는 서사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기헌은 서복에게 연민을 느끼지만 이는 앞서 언급한 대로 서복이 인간의 형상, 특히 박보검의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복에게서 채취한 치료제로 삶을 연장하려던 기헌은 채취 과정을 알고 나서야 서복을 보호하려 든다. 서복에게서 치료제를 채취하는 과정이 고통스럽지 않다면, 서복이 실험실에서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정도라면 서복에게서 치료제를 채취하는 것은 정당한가? 기헌은 서복에게 세상을 보여주고 도로 실험실로 데려오지만 스스로는 질문조차 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캐릭터다.
마지막으로 서복이 서복 자신에게 갖는 질문들은 꽤나 심오하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관한 질문에서 시작해서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삶의 의미에 대해서까지 질문한다. 서복은 자신이 누구의 DNA로부터 탄생했는지 알고 있었으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 기원을 탐구하고자 한다. 서복을 연기한 박보검은 연민을 자아내면서도 때로는 무자비하고, 사회적 규칙을 배우지 못한 어린아이이면서도 철학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하는 서복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이는 배우의 역량 부족이라기보다는 서복이라는 캐릭터를 만들면서 서사에서 자리가 온전히 잡히지 않은 데 원인이 있다. 서복은 자신의 기원을 찾아내고 인류에게 영생을 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탐구하면서도 결국엔 실험실로 돌아가길 자청한다. 단순히 기헌을 살려주기 위한 것이라면 영화 후반 서복이 내리는 결정을 납득할 수 없다. 서복은 서사에서 가장 복잡하고 철학적인 인물이지만 순간의 감정에 휘둘려 행동하는 경향이 짙다. 서복의 질문들은 시사점이 많지만 논의를 시작하기보다는 철학수업 첫시간에 듣는 질문을 나열할 뿐이다.
<서복>이 비록 낡기는 했지만 매력적인 소재를 발견한 건 사실이다. 서복을 통해 인간의 정체성과 존재의 의미에 대해 탐구하고 나아가 연구 윤리와 트롤리 딜레마까지 다루려 했던 노력은 영화 곳곳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영화가 시사하려 하는 바가 캐릭터 설정에 머무른다면 박보검과 공유의 조합으로도 커버할 수 없다. 이용주 감독이 이전작들에서 보여주었던 밀도 있는 서사가 <서복>에서는 드러나지 않아 아쉽다.
*이미지 출처는 모두 네이버영화입니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레이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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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겨 뒤집어지는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작 <더 스퀘어>로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고 블랙코미디의 진수를 보여준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이 한충 더 업그레이드된 영화를 선보였다. 여기서는 이를 비롯한 화려한 영화의 배경보다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영화는 모델 오디션을 보는 남자들의 인터뷰를 따라가면 기존의 임금격차 문제와는 다르게 모델계에서는 남성 모델의 수입이 더 적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알리며 시작한다. 임금뿐만 아니라 더 ‘잘 나가는' 모델인 여자친구 야야와 남자친구인 칼은 데이트 비용 문제로 한바탕 갈등을 겪고 칼은 차라리 이 상황이 반대면 좋겠다는 발언과 함께 영화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뒤집어 나간다.
영화는 위와 같이 한 커플의 젠더 갈등을 시작으로 3부로 나누어 진행한다. 1부에서 개인과 개인의 격차를 보였다면 2부에서는 크루즈에 승선하여 계급 간의 격차를 보여준다. 특히나 공간을 통한 연출이 두드러지는데, 크루즈는 사실상 3층의 구조로 나뉜다. 부유한 소비자인 백인이 있는 3층, 이들을 위한 보기 좋은 유니폼을 입은 백인 노동자들의 2층, 그리고 그 아래에 백인 노동자들은 손대지 않는 위험하거나 지저분한 일을 처리하는 ‘진짜' 일복을 입은 유색인종 노동자들의 지하에 가까운 1층이다. 흥미로운 점은 최상위 계급자는 이 계급 구조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영화 초반에 3층의 한 중년 여성은 수영을 하다가 2층의 노동자에게 함께 수영하자며 1층부터 모든 노동자들을 끌어올리지만 이들은 이내 미끄럼틀을 타고 다시 내려가며 다시 아래층에 위치하고 이들은 유희로 이용될 뿐이다. 이러한 형식은 영화의 후반부에서 동일하게 작용한다. 섬에 갇혀 생존 능력으로 리더(최상위 계층)를 선점하게 된 필리핀 계 노동자 애비게일은 섬에서 가장 능력 없는 최하위 계층의 칼을 자신의 옆에 두게 되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는 최상위 계층의 ‘유희'로 밖에 전락하지 않는다.
3부에서는 섬에 갇히게 된 8명이 크루즈와는 정반대로 새로운 서열을 만든다. 섬 밖에서 부, 명예, 인기가 상위 계층의 필요 능력이었다면 당장의 생존에 대한 능력으로 권력의 구조가 탄생한 셈이다. 영화는 이 과정에서 어떻게 힘을 가지는지, 그 권력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며 충분한 설득력을 가진다. 그렇게 후반부로 흘러가며 이 영화의 초반 트리거가 된 칼의 바람과는 조금 다른 형태지만 바라던 형태를 이룬다. 하지만 칼은 사실상 어떤 능력도 없고 바라던 대로 자신이 노력하지 않고 얻은 능력으로 리더의 옆에 앉게 되는 일종의 소망을 이루게 된다. 더불어 계급이 전복되며 구축한 이 구조에서 흥미로운 점은 권력 간의 관계와 권력자들이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점이다. 애인을 빌려준(?) 야야는 리더 애비게일을 견제하지 않고 이는 크루즈 위에서 야야가 노동자에게 웃어줬다며 논쟁을 일으킨 칼의 모습과 대조된다. 마찬가지로 섬에서 최고 권력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일종의 권력을 일시적으로 얻기 위해) ‘성'이 아닌 자신의 시계를 건네는 장면은 크루즈 위에서 여성 파트너를 둘이나 데리고 올라탄 남성과 대조된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사실은 누구든 권력을 쥐게 되면 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게 영화는 3층의 구조를 가진 크루즈를 뒤집으며 젠더, 계급, 인종 모든 구조를 뒤집어엎는다.
결론적으로 영화의 맨 처음 이 구조를 바꾸고 싶다던 칼은 아이러니하게도 원래의 계급 구조로 돌아가기 위해 앞만 보며 달려간다. 시간제한이 있는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칼의 모습에 간절함을 느끼는 동시에 묘한 웃음이 터져 나오게 된다. 엉망진창으로 흘러가는 코미디 같지만 그 안에는 개인으로 시작해 사회로 확장하며 정교한 연출과 구조에 분명 웃고 있지만 어느새 그 어떤 영화보다 논리적인 질문을 받게 된다. 모두가 생각해 보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들을 꺼내고, 상황들을 전개해 가며 실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재치를 가진 감독이다. 뒤집어지게 웃긴 이 영화를 ‘슬픔의 삼각형'을 펴고 웃으며 즐기길!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초청을 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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