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2021-03-19 00:00:00
감독 케네스 로너건과 배우 캐이시 애플렉의 완벽한 조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Manchester by the Sea, 2016
해소할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방법
행복했던 기억들은 어려운 현실을 힘들게 하고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은 트라우마로 남는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상실로 인한 아픔을 지닌 채 살아가는 리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의 상실, 아픔을 회상과 연기력으로 보여주는 영화이다.
제목의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맨체스터와는 다른 지역으로 바다 근처에 있는 지역이다. 이러한 바다가 주는 공간적 느낌은 고요하고 평화롭게 보이지만 고통을 겪은 리의 모습을 보고 나서는 모든 것을 삼켜버린 채 언제 그랬냐는 듯한 평온이 더욱 밉게 느껴진다. 단순히 형(가족)의 죽음을 감당하는 것도 어려운데, 주인공인 리에게는 형이 남긴 것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또 한 번 아픈 기억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패트릭을 통해 상실을 처음 겪는 모습과 깊은 비애에 빠져 현실을 받아드리지 못하고 무덤덤한 상태에서 현실을 받아드리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장면은 리가 그 당시 사건을 받아들이기 얼마나 어려웠는지, 얼마나 슬펐을지 떠올릴 수 있도록 한다.
연출 뿐만 아니라 각본까지 쓴 로너건 감독은 전작에서도 죽음, 상실, 트라우마와 관련된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고 있다. 특히나 부모의 사로고 인한 부재부터 영화의 막을 올리는 <유 캔 카운트 온 미>는 낚시 장면 등을 통하여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가 얼마나 감독과 닮아있는지를 아는 데에 도움을 준다.
Flash Back, 일반적인 영화 기법으로 과거를 회상하거나 관객에게 보여줘야 할 때 쓰는 쓰는 기법으로 많은 영화들이 회상 장면이나 과거를 보여줄 때 이용한다. 본 영화에서는 리의 과거를 플래시 백으로 보여주지만 지금까지의 여느 영화와는 조금 다르게 보여준다. 본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고 두드러진 형식이자, 리가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 불쑥불쑥 떠오르는 고통으로 보여주기에 너무나 적합하다.
보통의 플래시 백은 영화의 절정 부분, 영화의 중반부 이후 혹은 후반부에 위치하여 이야기를 극대화시킨 뒤 정점을 찍지만 본 영화는 초반부부터 보여 주며 관객이 리의 아픔을 함께 체감할 수 있도록 한다. 일반적인 형식으로 보면 영화의 흐름의 키가 되는 플래시 백을 앞부분에 위치한다는 것은 단순히 분석하면 비효율적, 비경제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초반에 보여줌으로써 관객도 리와 함께 고통을 떠올릴 수 있도록 한다. 감독은 이야기의 흐름에서 절정을 보여주는 것보다 인물 감정을 따라가는 것을 더 중요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플래시 백의 길이 또한 굉장히 중요하게 이용한다. 리에게 짧게 짧게 떠오르는 기억들도 있지만, 가장 긴 기억인 리의 집이 불에 타고 딸들을 잃는 장면은 한 덩어리마냥 연결될 수 밖에 없는, 단편적으로는 떠올릴 수 없는 고통인 것이다. 리의 회상은 주로 리가 부정적인 감정의 상태일 때 찾아온다. 리의 과거의 상실이 핵심내용인만큼 그 고통이 떠오르는 것 자체가 이 영화의 핵심인 것이다. 다른 영화들과는 다르지만 플래시 백을 가장 있어야하는 순간에, 가장 적합하게 이용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리의 고통을 체감하게 한다. 여름, 월척을 낚은 어린 패트릭과 장난을 치며 형과 셋이서 보트에 올랐던 영화의 첫 씬에서, 고통스러운 겨울을 지내고 형을 장례를 치룬 뒤, 성장한 패트릭과 보트에 앉아 낚시를 하는 장면의 대조를 통해 행복했던 과거를 재생할 수는 없지만 다시 살아내어 가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영화는 보는 내내 마음이 아리지만, 지속되는 쏟아낼 수 없는 우울함이 고통으로 다가오는 그런 영화이다. 인물의 감정을 고조시켜 절정을 이루지않고 그 아픔을 계속 끌고 가는 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자 감독의 의도이다. 해소할 수 없는 아픔을 지닌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격려가 아닌 공감으로 통하여 위로를 하는 영화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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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사랑 중독자' 앨리스는 유부남 마이크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불륜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앨리스는 정신을 딴 데로 돌리려다가
화상으로 끔찍한 상처를 입은 여자 청소부 셸리와 가까워진다.
너무나 다른 겉모습과 달리 예상치 못한 유대감을 공유하는 두 사람.
그러나 셸리는 사실 외면보다 내면에 더 충격적인 상처를 안고 있었고,
앨리스를 '완벽하게' 만들어 주려는 셸리의 시도는 파국으로 치닫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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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마이 뉴욕 다이어리> 30초 예고편
1995년 작가를 꿈꾸는 조안나는
뉴욕에서 가장 오래된 작가 에이전시에
CEO 마가렛의 조수로 입사한다.
출근 첫날, ‘호밀밭의 파수꾼’의 작가 J.D. 샐린저의
팬레터에 기계적으로 응대하라는 지시를 받지만,
조안나는 그들에게 진심 어린 답장을 보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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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작과 비교하면 한없이 부족하고 모르고 본다면 그저 로맨스인 영화
제가 이번에 본 영화<조제>때문에 최근에 원작 소설과 일본영화<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라는 작품을 봐왔었는데요. 이제서야 한국판 리메이크로 재탄생한 영화 <조제>를 보고 왔습니다. 아무래도 똑같은 작품을 3번 연달아 봐서 그런가 같은 내용에는 이제 무감각적으로 변하긴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한국판으로 재탄생한 영화<조제>는 원작들과 비교한다면 확실히 부족한 부분이 많더라고요. 오히려 저는 개인적으로 같은 설정으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갔더라면 지금과 같은 느낌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한국판 조제는 원작을 엉성하게 따라 하려다 보니 원작의 장점이 퇴색되버린 부분이 많은 작품인듯하네요. 자세한 건 리뷰로 시작하겠습니다.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집,
그곳에서 책을 읽고 상상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살고 있는 ‘조제’.
우연히 만난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영석’은 천천히,
그리고 솔직하게 다가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처음 경험해보는 사랑이 설레는 한편 가슴 아픈 ‘조제’는 자신에게 찾아온 낯선 감정을 밀어내는데…
기억할 거야 너와 함께 한 모든 순간을
이번에 한국판으로 새롭게 리메이크 된 영화<조제>의 스토리는 기존 원작과 별반 다르지 않는 전개를 보여주는데요. 원작에서 츠네오의 경우에는 배우 남주혁이 영석의 이름으로 연기하고 조제는 배우 한지민이 연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스토리라인은 몇몇의 사건의 나열을 다르게 보여줄 뿐 전체적인 맥락은 별반 다르지 않는데 작중 초반 영석(남주혁)이 휠체어에서 넘어져있는 조제(한지민)를 발견하는 것을 계기로 첫 만남을 가지게 되고 그렇게 영석은 매일 조제의 집에 찾아가서 조제에게 밥을 얻어먹으며 둘 사이의 관계가 가까워지면서 로맨스 드라마를 그리고 있다는 점은 원작과 똑같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1) 새로운 비주얼 - 남주혁과 한지민이 보여주는 한국판 조제
이번에 한국판으로 새롭게 탄생한 영화<조제>는 원작 소설<조제와 호랑이와 그리고 물고기들>의 작품을 토대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그래서 이미 한차례 일본에서 영화화 한 적도 있는 작품이죠. 그런 점에서 보았을 때 이번에 새롭게 보여주는 영화 <조제>는 새로운 비주얼로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이긴 해요. 일단 기본적으로 배우 한지민과 남주혁의 이 두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색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으며 배경 자체가 한국이다 보니 한국의 정서가 느껴지는 부분도 적게 남아 표현되고 있어서 원작을 알고 있는 저로서는 이러한 새로운 비주얼 만으로도 새로운 영화를 보는듯한 느낌은 있었던 것 같아요.
2) 각색 아닌 각색 - 원작의 사건들을 똑같이 나열
일단 영화<조제>에 관해서 할 이야기는 많지만 가장 근본적으로 해야 될 건 바로 원작에 대한 각색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요. 한국판으로 새롭게 리메이크된 이번 영화<조제>는 솔직히 말해서 각색이라고는 말하기 힘들 정도로 원작 영화와 흡사한 부분이 상당히 많아요. 리메이크란 점에서 조제가 다리를 쓰지 못하는 하반신 장애라는 점, 그리고 영석이 우연히 조제를 만나서 사랑을 나눈다는 점 이건 기본적인 설정이니 당연히 써야 되는 부분이긴 하지만 그 이외에도 원작 영화에서 가져온 내용들을 상당히 많이 가져다 써요. 심하게 말하면 거의 영화 전체적인 부분을 그대로 가져와 썼다고 해도 될 정도죠. 예전에 영화 <골든슬럼버>가 이렇게 영화를 리메이크했다가 혹평을 상당히 많이 하기도 했었죠.
이번 영화<조제>는 원작 영화의 내용들을 사건 하나하나 나열해서 그대로 배열한 느낌인데 각색 아닌 각색이라고 한 이유가 그러한 사건들에서 그저 사물을 바꾼다거나 등장인물을 바꾸는 식으로 등장할 뿐 내용적으로 새롭게 해석한 부분은 전혀 없다는 부분이 가장 아쉬운 부분이에요. 원작 영화에서는 그 사건들, 그리고 상황에 따른 대사 하나가 영화의 전체적인 의미를 갖는데 그걸 그저 사건의 나열로만 사용했다는 건 확실히 영화<조제>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를 버렸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죠.
3) 사라진 의미들 - 대사, 물건 하나하나가 중요한 작품인데...
영화<조제>의 스토리는 원작 영화의 사건들을 그저 나열만 하고 있으니 조제라는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 그리고 사물에 대한 의미들이 퇴색되버리고 있는데요. 예를 들어 원작에서는 휠체어라는 장치를 어떻게 보면 조제 본인의 미숙한 마음을 표현했다는 부분이라던가 호랑이, 물고기 더 나아가 영석의 대학교 후배와 조제와의 관계 등 그런 모든 상황들이 대조되면서 영화 <조제>는 감정적인 서사가 중요한 작품이 되었는데 이번에 리메이크된 한국판 <조제>그러한 의미들이 사라지고 그저 로맨스 드라마, 신파극으로서 보이고 있는 건 조제라는 작품의 존재 의의를 없애버린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이 되네요. 가장 어이없는 부분은 호랑이와 물고기에 대한 부분인데 처음엔 왜 제목이 조제만 있을까 생각했는데 그 이유를 영화를 보고 나서야 호랑이와 물고기에 대한 부분은 한국판 <조제>에서는 아무런 의미 없이 그저 사용될 뿐이더라고요.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번 영화 조제가 기존의 원작들과 차이점을 둘려 했는지 결말에 대한 부분을 바꿨는데 이 부분은 일본 영화에서도 이미 한차례 새롭게 재해석한 부분이기 해요. 원작 소설에서는 조제와 츠네오가 끝까지 함께 살아간다는 느낌으로 결말이 나고 일본 영화에서는 츠네오가 조제에게서 도망치는 결말을 보여주죠. 이번 한국판 조제에서도 영석이 조제에게서 떠나는 건 맞지만 그 이유가 조제가 영석을 놓아준다는 느낌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조제는 이제 혼자서 자동차 운전을 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간다는 연출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끝이 나죠. 이점만 본다면 확실히 각본의 의도가 어떤 식이었는지는 알 것 같은데 애초에 이럴 거면 영화의 전체적인 서사를 조제의 초점으로 새롭게 재해석을 했어야 했다고 봅니다.
4) 중요한 영화의 주체 - 자꾸만 바뀌어 버리는 이상한 연출
원작<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는 엄밀히 말해서 영화의 주체는 저는 남자 주인공 '츠네오'였다고 생각해요. 그렇기에 작중 초반부터 츠네오의 시점으로 시작해서 조제와의 모든 관계 상황들이 츠네오로서 진행이 되어서 모든 상황과 감정들이 공감하기 쉬웠습니다. 하지만 이번 한국판 영화<조제>는 그러한 영화의 전체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섬세히 연출되어 있지는 않더라고요. 작중 초반에는 영석의 시점으로 진행되다가도 가면 갈수록 조제의 시점으로 바뀌는듯하면서 다시 영석의 생각으로 돌아가고 자꾸만 이렇게 영화를 이끌어 가야 될 중요한 주체가 애매하게만 연출되고 있으니 제가 방금 말한 결말부에 대한 감정이입이 잘 공감이 되지 않는 것 같아요.
차라리 조제의 입장에서 오히려 조제의 성장으로만 초점을 맞췄다면 이해되지 않는 감정선이 조금 더 편했을 거예요. 당장에 영석과 조제의 갈등 부분도 어떻게 보면 두 사람의 갈등보다는 할머니로서의 갈등인데 할머니를 사용하는 방식도 그렇게 섬세하지 않다는 거에 이미 영화<조제>의 방향성은 그저 로맨스 드라마라는 거에 치중되어 있다고 봐야겠죠.
5) 그저 로맨스 신파 - 이렇게만 본다면 그나마 볼만
원작을 보지 않았다는 가정하에서 보면 그래도 나름대로 볼만한 로맨스 신파극 드라마로 그나마 볼만한 수준이었던 영화이긴 해요. 일단 우연히 만난 두 사람 그리고 여자는 다리를 쓰지 못하는 하반신 장애 이러한 설정들을 고려해보면 확실히 흥미를 끌만한 소재에 대가 그것을 연기하는 배우마저 남주혁과 한지민이니 정말 가벼운 로맨스 영화를 본다는 시점으로 본다면 볼만한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저는 이러한 진부한 로맨스 영화가 취향도 아니거니와 애초에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라는 작품을 그저 볼만한 작품으로 만들어졌다는 건 확실히 원작을 본 사람들 입장에서는 추천해드리고 싶은 작품은 절대 아니긴 하네요.
1) 배우 한지민, 남주혁
영화 <조제>가 스토리적인 면에서는 애초에 원작을 따르는 작품이기도 하고 영화 자체의 스토리도 그저 로맨스 신파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크게 매력 없지만 그래도 그러한 스토리에서 한국 배우 한지민, 남주혁이 연기를 하고 스크린을 채워간다는 점은 어떤 이들에겐 그래도 나름의 관점 포인트이지 않을까 싶어요. 저의 경우에는 배우를 보고 영화를 선택하는 비중은 거의 2할 정도라서 크게 메리트는 없지만요.
2) 엔딩크레딧 노래
관점 포인트라고 하기도 머 한데 엔딩크레딧 삽입곡에 아이유 노래인 자장가가 나옵니다. 잔잔하게 영화만 보다가 갑자기 엔딩크레딧에서 아이유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영화를 너무 재미없게 봐서 그런가 아이유 노래가 그나마 위안이 되긴 하더라고요. 애초에 엔딩크레딧에 아이유 노래가 삽입된다고 이슈가 된 적도 있던데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엔딩크레딧이 저는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관점 포인트가 아니었나 싶네요.
자 이제 저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원작 소설부터 영화화된 모든 작품들 보기 프로젝트가 애니메이션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소설도 읽고 영화도 2편이나 봐서 그런가 이제는 내용에 한해서는 감흥이 없어진 것 같긴 하네요. 그래도 이번 한국판 조제는 개인적으로 다행이라고 생각이 드는 점도 있긴 해요. 원작을 몰랐다면 그저 로맨스 신파극으로만 리뷰를 작성했을 건데 이렇게 원작을 알고 보니 더 많은 게 보인 건 사실이니까요. 이제는 애니메이션판 조제만 남겨두고 있는데 이건 아무래도 내년 1월에 개봉을 하겠죠. 이건 이것대로 기다리고 이상 조제에 관한 리뷰를 마치겠습니다.
* 본 콘텐츠는 블로거 민케이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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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적지 잃은 배는 멈출 수밖에.
이 글은
영화 [늑대사냥]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을 퍼가거나 인용 시 출처를 반드시 표시해주세요.
가장 골머리를 싸매면서 쓰지만 이제는 살짝 포기한 서문과 맞바꿀 정도로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전하는 말.
최근 영화관 관크(다른 관객들이 작품을 관람하는 데 있어 방해하는 모든 행위 및 행위자자들을 일컫는 말)가 많아지고 있다. 그것이 코로나로 인해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다 보니 집에서 해도 되는 행동과 사회에서 허락되는 행동의 범위가 모호해져서 그렇든, 개인의 성향이 둔감한 편이든 상관없이. 종종 뉴스거리로도 나올 정도의 불쾌한 행동이 많아지는 추세임은 감출 수 없다.
일주일에 최소 한 번은 영화관을 찾는 본인 역시 꽤 많은 관크를 당했다고 자부하는(?) 데도 불구하고. 이번에 소개할 영화인 [늑대 사냥]을 관람할 때는 불법 촬영하는 사람을 만나는 관크를 당했다.
비록 남루하고 초라한 문장을 리뷰랍시고 나열하는 삶을, 곁다리 삶 중 하나로 영위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것”에 애착을 느끼는 사람이기에. 다른 사람의 것도 최소한의 존중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분노를 느끼며 영화의 초반부에 소리를 지르며 그 행동을 제지해야만 했다.
영화 관람 후 스스로의 평가에 따라 작품이 정말로 “돈값”을 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평가를 할 수는 있겠으나. 그 어떤 작품이라 해도 불법으로 보아야 할 운명을 지닌 채 태어나지는 않는다. 애초에 그런 운명 외에 허락되지 않는 작품이라면. 만들어진 의도부터가 불순한 영상물에 불과하며 그것을 관람 및 유포한 사람들은 모두 법의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부디 다음번에는 경찰서로 간 다음에야 반성했다며 질질 짜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그 알량한 반성은 경찰서를 나오는 순간 안도의 한숨으로 바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유튜브 영상 조회수 올릴 때나 쓰는 말인 줄 알았던 “역대급” 관크 덕분에 나 역시 영화의 초반부 15분가량을 관람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겼다. 덕분에 영화 초반부의 이야기에 대한 것은 제외 후에 리뷰를 작성해야 하는 어려움까지 얻은 채로 말이다. 참 여러모로 도움되지 않는 관크임에는 틀림이 없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영화의 전반부는 승리에 취한 범죄자들을 비춘다. 배를 “접수”하기까지 벌어지는 폭력의 향연은 경찰들을 향한 응축된 분노만큼이나 잔인하고 집요하다. 그들은 상대방을 향한 그 어떤 배려도 하지 않은 채.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둔기, 칼)을 이용해 반복적인 타격으로 상대방의 숨을 끊어놓는다.
또한 망망대해 위의 배라는 설정상. 도망칠 곳이 한정되어 있다는 두려움은. 이 무자비한 범죄자들에 의해 점점 수세에 몰려 너나 할 것 없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경찰들의 두려움과 살육자들의 잔인함을 동시에 배가시킨다.
범죄자들의 행보는 거침이 없고. 그로 인해 영화의 속도는 두려움도 앞지를 만큼 빠르고 급박하다. 피가 묻은 얼굴에서 떠오르는 미소는 이제 더 이상 상대를 가리지 않는 순수한 악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짧은 초반부의 영광도 잠시. 영화는 알파(Alpha, 최귀화)의 운송이 숨겨온 진짜 목적임을 드러내는 순간부터 급속도로 빛을 잃는다.
이 초월적 알파라는 존재가 영화를 누비며 벌이는 실수들은. 영화 [마녀 2]에서 언급한 문제와 거의 동일하다. 밸런스가 붕괴된 밸런스 게임인 셈이다.
영화는 초반 시퀀스에 매우 공을 들여 종두(서인국)를 구축점으로 만들어 놓았지만. 이마저도 알파 앞에서 힘없이 무너뜨리는 선택을 해버렸다. 그것도 스스로. 이로 인해 관객들은 애초에 알파에게는 그 누구도 상대가 되지 않음을 느낌과 동시에.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그 어떤 긴장감도 없을 것임을 짐작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알파는 종두로도 모자라 도망갈 곳 없는 배.라는 밀실에 가까운 장치도 무너뜨린다. 그 어떤 곳에 있어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선택임은 알지만. 문제는 알파가 후반부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피로할 정도로 모습을 내비친다는데 있다.
이로 인해 남은 시간들은 그저 알파가 가동하는 살육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덜덜 떨고 있는 사람들을 순서대로 처단하는 장면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 잔인함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 어떤 감흥도 두려움도 주지 못한다. 그저 심하다.라는 생각만 들게 할 뿐.
[늑대사냥]은 또 다른 영화인 [랑종]이 범했던 실수를 떠올리게 한다. 곡성의 후속작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내걸었던 표제어(중심 단어)는 “무서움”이었다. [늑대사냥]의 경우는 메인이 되는 단어가 “수위를 넘는”과 “(클리셰를 포함한) 모든 것을 부순다”정도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영화가 가지는 통상적인 흐름이 어떤지 유추해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주인공은 결국 (가장 오래) 살아남는다. 일 것이다.
그렇게 치면 과연 이 영화의 주인공은 누구일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영화는 초반에는 경찰(박호산, 정소민;왜 캐릭터 이름이 공식 페이지에 조차 없나요?) 쪽이 주인공인 것처럼 비추다가 나중에는 결국 도일(장동윤)의 생존으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이는 도일 및 개조 인간들의 존재를 반전으로(라도) 볼 수 있지 않느냐의 문제와도 맞물리는데. 안타깝게도 반전으로 보기에는 깔아놓은 밑밥의 수준과 정도가 빈약하며. 애초에 이 부분을 억지로 반전으로 만들기 위해 포커싱을 의도적으로 잘못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초반부의 도일은 종두와의 크고 작은 마찰을 겪으면서도. 그다지 큰 무리 없이 죽음의 그림자를 피해 가는 맑은 눈의 광인에 불과하다. 뚜렷한 능력을 보여주는 장면은 거의 없다.(꼭 하나 집어 말한다면 누군가를 죽이려 하는 도일의 손을 저지하는 장면 정도.)
도일이 숨겨진 주인공임을 알게 되는 지점은, 더 이상 알파의 무자비한 행동으로 죽여댈 인물이 거의 없을 때가 등장하는 성동일과, 파편처럼 등장하는 과거의 그림자가 합쳐지는 거의 극 후반부쯤이다.
그러나 그 지점까지 이르는 동안. 도일은 그 어떤 임팩트 있는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저 한 대 맞고 어딘가 널브러져 있다 정신을 차린 듯한 몽롱한 얼굴로 슬그머니 생존 신고를 할 뿐이다. 이 장면을 보며 누가 도일이 진짜 주인공임을 알고 환호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개조 인간들과 도일이 벌이는 결투마저도 진짜 주인공의 신고식이나 자기소개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조잡하다 못해 빼버려도 부족하다 느끼지 않을.
영화는 자신들이 넘고 싶었던 수위와 클리셰를 없앴다는 허황된 꿈에 젖어 정작 설명해야 할 것들과 엮었어야 했을 모든 것들을 건너뛴다. 그러니 애초에 보려고 한 영화가 아닌 다른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관객들이 느끼는 심정은 “속았다”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이쯤 되니 제목에 대한 생각도 떨칠 수 없다.
과연 누가 늑대인가.라고 물어보았을 때 제대로 된 대답을 하기 힘들어진다. 영화는 늑대"를"사냥하는 것에 집중하기보다 늑대"가" 사냥하는 모습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늑대라 불릴 정도로 대단한 그 무언가가 존재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두 시간 남짓의 항해 동안 그 어떤 명확한 목적도 없이 안으로 곪아가는 것만 선택한 배의 최후는. 침몰밖에는 없는 것이겠지.
마치면서
한두 명을 제외한 거의 모든 연기자들의 연기가 아까울 지경이었다.
특히 서인국과 성동일 배우의 연기는 섬뜩함을 넘어서서 초월적인 존재인 알파 보다도 더 두려움을 자아내는 연기를 보여줬기에 더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새로운 시도임에는 분명했으나, 영화가 마치 두 조각난 배처럼 완벽하게 나뉘어서 융합하는 장면은 단 한 번도 마주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 연기로는 그 어떤 흠도 잡을 수 없는 배우들을 그저 소모품으로 써버린데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것도.
잔인한 영화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단어 외에 뒤에 붙을 말이 없다는 사실은 영화를 평가하는 데 있어 좋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잔인한데도 불구하고 잘 만들어진 영화들의 예가 많기 때문에.([악마를 보았다] 라던가. [킬빌] 이라던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영화가 가져갈 수 있는 수식어는 그 외에는 없다.
[이 글의 TMI]
1. 이제 추워서 긴 팔을 입어도 아무렇지 않다.
2. 이럴 때 걸어 다니는 거 좋아서 괜히 출근할 때도 빙 둘러가는 중.
3. 아 물론 회사 가기 싫어서 그런 것도 있음.
4. 커피를 끊어볼까 하고 깝죽거리다가 지옥 같은 일주일을 보냈다.
5. 앞으론 그냥 안 까불고 하루 한 잔만 먹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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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듄' 리뷰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았습니다.
**주로 영화 자체의 이야기보다는 세계관에서 파생되는 생각을 쓰겠지만,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SF 영화에서 던지는 주제의식은 언제나 미래지향적일까? 21세기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지금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듄은 이런 생각들이 자유롭게 떠올랐던 영화였다. 나는 정확하게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영화가 마음에 들었다. 내가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를 신뢰하는 이유는 경계 없는 사유의 여지를 만들어두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원작 소설에서도 내가 생각했던 부분의 이유가 나오는지는 모르겠으나 나온다면 영상화를 굉장히 잘 해낸 것이라 생각한다. 실물로 구현해낸다고 했을 때 원작에 구체적으로 묘사된 내용을 표현하는 것보다 구현하기 어려운 건 저 세계관에서 통용되는 상식이나 통념, 구조를 시각화하는 일이다.
이게 말이 쉽지 단지 몇 마디로 퉁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인물들의 대사나 자막 몇 개로 설득할 수는 없다. 극 중에 등장하는 사건-대화-도구를 종합해서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어려운 일이지만 그 사고방식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면 관객들은 그 세계에 몰입한다. 스크린이라는 벽을 넘어서 주인공의 여정에 함께하는 느낌을 받는다. 여기서 드니 빌뇌브 감독은 긴 호흡으로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 길다는 특징에서 의견이 엇갈리는 부분도 있었다. 나는 이야기 자체를 까다롭게 고르지 않는 편이라 필요하다는 생각이었지만 주변에선 몰입이 아예 어려웠다고 말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내가 이 영화에 재미를 붙이고 몰입할 수 있었던 근거는 영화에서 묘사하는 사회 구조에 있었다. 영화에는 제국과 공작, 남작과 같은 작위가 등장하며 향신료와 '상호 간의 계약'을 이야기한다. 나는 이 지점이 영화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키라고 생각한다. 유럽의 봉건제 구조를 SF 배경으로 옮겨놓았다. 귀족 집안 사회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역학 관계의 현실감이 굉장히 핍진했다. 현실 세계의 역사를 상징으로 치환해서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 소설을 읽어보면 더욱 명확해질 거 같지만, 이런 이유로 배경은 익숙하지 않아도 인물들의 행동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했다.
저 봉건적 구조의 작동 원리를 안다면 아트레이데스 가문의 가주인 레토 공작의 행동은 당연하게 느껴진다. 봉건제는 계약을 통해 형성되는 주종 관계다. 유럽의 봉건제는 아시아의 봉건제와는 다르기에 레토 공작의 행동도 그런 배경을 염두하고 보면 이해가 쉽다. 그가 함정임을 알면서도 임무를 수행했던 이유는 충성과는 거리가 멀다. 아들인 폴의 생모인 레이디 제시카와의 관계도 그렇다. 그녀는 레토 공작의 연인이지만 부인은 아니다. 정략혼인은 봉건적인 정치 체제 아래에서 동맹을 확보할 수 있는 확실한 수단이니까 레토 공작은 부인의 자리를 비워둘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사건이 벌어지는 배경은 머나먼 미래지만 그 사회를 이루는 구조는 고전적이라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웠다. 생각해보면 SF를 다루는 다양한 문학이나 영상 작품들을 보면 꼭 '은하 제국'이 등장한다. 각 행성마다 지적 생명이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서 은하계를 다스리는 제국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다. SF 세계 속의 정치 체계가 전제군주정이라는 점은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 만약 행성 간 여행이나 이동이 자유로워지는 시점이 오게 된다면 우리가 소속감을 느끼는 집단의 규모도 달라질 것이다. 행성 단위로 주거의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생활양식이나 사고방식에 차이가 발생할 것이고 국가라는 단위의 인식 체계 또한 바뀔지 모른다. 혹시 모르지 그때가 되면 한국 사람이라는 설명보다 '지구 사람'이라는 표현이 더 자연스러울지도.
자유로운 이동의 수준에 따라 수많은 시스템이 바뀐다. 성간 이동의 연료가 되는 스파이스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갈등을 다룬 이 장대한 서사시는 그래서 매혹적이다. 이권을 중심으로 인물 간의 당위와 목적이 명확하게 엿보인다. 저 스파이스의 유통권을 쥐고 있는 입장에서는 그렇기에 유통시켜야만 한다 '스파이스는 흘러야 한다'. 성간 이동이 어려워지면 궁극적으로는 저 체제를 유지하는 게 어려울 테니까. 그만큼 귀중한 자원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권력이 명확하게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 자원의 생산부터 정제, 활용까지의 과정이 막히면 곤란하다. 그런 점에서 민주정, 공화정은 행성 규모의 생명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체제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듄을 보면서 오래전에 읽었던 소설 '은하영웅전설'도 생각이 나고 게임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도 생각이 났다. 은하영웅전설을 통해서는 카리스마를 지닌 걸출한 한 인물에 집중해서 정치 체제를 고찰해볼 수 있고 크루세이더 킹즈를 통해서는 가문의 존속을 위해 감당해야 하는 것들을 알아볼 수 있다. 아무래도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이라고 생각하고 보니 그런 작품들이 떠올랐다. 이 시리즈 자체가 거대한 프로젝트인 만큼 이번 편은 주인공인 폴의 기원을 다루고 있지만 앞으로 나올 내용에는 정치적인 내용이 더 많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우주 사극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근사한 영화였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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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민족과 부족, 국가와 가족 사이에서
파더 앤 솔저|Father and Solider
마티유 바드피에|Mathieu VADEPIED
France, Senegal|2022|101 min|DCP|Color|Fiction|12|Asian Premiere
시놉시스
1917년, 바카리 디알로는 강제 징집된 17세 아들 티에르노의 곁을 지키기 위해 프랑스군에 입대한다. 두 사람은 함께 전선에 투입되고, 전쟁에 직면한다. 티에르노가 남자가 되는 법을 배우는 동안 바카리는 그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프로그램 노트
1차 대전 당시 프랑스령 세네갈. 프랑스인들은 세네갈인들을 징집하여 유럽의 끔찍한 전쟁터로 보낸다. 척박한 땅에서 아들 티에르노와 가축을 치며 가족을 먹여 살리는 아버지 바카리는 프랑스 군인이 나타난다는 소문만 들리면 징집 대상인 아들을 은신처로 보내 숨어 있도록 하지만 아들은 결국 세네갈에 있는 신병교육대로 끌려간다.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탈출하기 위해 자원입대를 하고, 탈출을 시도하지만 실패하여 부자는 유럽 전선으로 끌려간다. 한 전투에서 100만 명이 넘는 전사자가 발생할 정도로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한 곳, 같은 아프리카인들끼리도 서로를 속이고, 강도 행각을 벌이는 전선에서 어떻게든 아들을 찾아 탈출하려는 아버지와 프랑스어를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지휘관의 눈에 들어 영웅이 되려는 아들은 서로 다른 전쟁을 겪게 된다. 2022년 칸영화제 Un Certain Regard 섹션의 개막작이었던 이 작품은 아버지의 애틋한 정과 덧없는 전쟁이 남긴 상처를 보여주는 휴먼 드라마다. (전진수)
평범한 부자 이야기가 아니다
어디서나 익숙하게 쓰이지만 의외로 오래되지 않은 말이 있다. 일본 메이지 유신 시대에 만들어진 단어, 민족이다. 민족은 'Nation'을 한자로 번역한 말이다. 언어나 문화, 국기나 국가(國歌) 같은 상징을 공유한다고 여겨지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유럽에서는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민족 개념이 퍼졌다. 한 민족이 한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도 널리 퍼졌다. 실제로 새롭게 생겨난 나라도 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대표적이다. 즉, 민족은 혈통과 관련된 말이 아니다. 자연적으로 존재한 개념도 아니다. 근대 국가가 만들어질 때 생성된 새로운 관념이다.
그런데 민족을 만드는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프랑스의 경우 월드컵 성적이 좋지 않거나 대표팀에 내분이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 정부가 청문회를 연다. 축구에 미쳤기 때문이 아니다. 아프리카 출신 선수가 많은 축구 대표팀은 그 자체로 프랑스의 통합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드피에 감독의 <파더 앤 솔저>는 특별하다. <파더 앤 솔저>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한 부자의 이야기를 통해 민족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그 과정에서 땅에 뿌려진 피와 땀의 의미도 들려준다.
눈물겨운 부성애
얼핏 보면 <파더 앤 솔저>는 평범하다. 아들을 보호하려는 부성애 이야기는 익숙하다. 물론 그만큼 호소력이 짙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군은 병력이 부족해지자 세네갈 땅에 사는 부족민을 강제로 징집한다. 티에르노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카리는 아들을 빼돌리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그러자 그는 자원입대한다. 아들을 보호하고, 집으로 보내기 위해서. 방법도 여러 가지다. 티에르노를 후방에 남기기 위해 취사병 보직으로 보내려 로비하고, 은신처를 찾거나 탈영 계획을 짜기도 한다.
모든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자 자기 한 몸을 희생한다. 전투 중 독일군 포로가 된 아들을 구하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독일군 진지에 침투한다. 아들을 구출해서 프랑스군 참호로 돌려보내는데도 성공한다. 비록 자기는 총 맞아 쓰러지지만.
이처럼 <파더 앤 솔저>는 다른 길로 새지 않고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시점에서 묵직하게 이야기가 흘러간다. 그러니 설사 흔한 스토리라 해도 심금을 울리기에는 충분하다.
세네갈 부족민, 프랑스 군인이 되다
반면에 아들의 시점에서 보면 <파더 앤 솔저>는 전혀 다른 영화다. 원치 않게 프랑스군에 입대한 티에르노. 그도 처음에는 집을 그리워한다. 전선에서 친구가 총에 맞아 죽고, 자기도 죽을 위기를 여럿 넘기면서 귀향을 꿈꾸는 마음은 더 커진다.
그는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달라진다. 프랑스군과 독일군 참호 사이에 방치된 친구 시신을 수습해 오는 등 무공을 보여준 결과 상병으로 진급한다. 다른 병사에게 명령을 내리고 프랑스 지휘관들과 교류하면서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보호 때문인 걸 알면서도 아버지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대신 자기를 증명하려는 만용을 부린다.
여기까지만 보면 흔한 사춘기 아들의 반항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 가지 특별한 요소가 끼어든다. 바로 프랑스다. 이등병 티에르노가 상병을 거쳐 하사까지 진급할 수 있었던 데에는 무공 외의 무기가 있었다. 의사소통 능력이다. 티에르노는 아버지와 달리 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안다. 그는 프랑스군 장교와 아프리카 출신 병사들 간의 가교였다. 그 결과 티에르노의 변화에는 전혀 다른 의미가 깃든다. 그는 단지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려고 반항하는 게 아니다. 그는 프랑스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따라서 제1차 세계 대전을 두고도 아버지와 아들은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다. 바카리는 부족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을 아직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 독일과의 전쟁도 무의미한 살육일 뿐이다.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한 탈영도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티에르노는 다르다. 그에게 이 전쟁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탈영은 하나의 공동체인 프랑스를 배신하는 선택이다. 그가 아버지와 달리 전선으로 복귀하고 프랑스를 위해 싸운 이유다.
민족과 부족, 국가와 가족 사이에서
아들의 입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면 바카리의 부성애도 달리 보인다. 그의 죽음은 이제 단순한 희생이 아니다. 마냥 가슴 아픈 감동도 아니다. 질문이다. 한 민족이라는 자각도 없이 참호에서 죽어간 이들에게 국가와 민족을 위한 전쟁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가족을 잃고, 가족이 찢어진 채로 그들이 지켜낸 국가와 민족은 또 무슨 의미인지. 식민지에서 끌려와 파리 개선문 밑에 묻힌 이름 모를 군인들이 던지는 질문이다.
다른 부자 관계도 바카리가 던지는 질문에 힘을 실어준다. 영화에는 프랑스군 장성 아버지와 중위 아들이 등장한다. 이 아들은 아버지가 자기 능력이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푸념한다. 실제로 아버지는 병사들을 독려하기 위해 아들 부대를 방문했을 때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그러나 아들이 작전 중 전사하니 아버지는 마침내 그를 인정한다. 성대한 장례식을 열고 아들에게 훈장을 수여한다. 가족 대신 민족과 국가를 선택했다고 칭찬한다. 과연 이 아들은 아버지의 칭찬에 기뻐할까? 의문이 남지 않을 수 없다.
<파더 앤 솔저>는 얕은 영화일 뻔했다. 이야기는 전형적으로 흐른다. 내용을 예상할 수 있는 제목도 한몫한다. 하지만 우려는 기우였다. 결말의 맥락은 복잡하다. 그만큼 여운은 길다. 2022년 칸영화제 Un Certain Regard 섹션의 개막작답다. 익숙함을 뒤집어 고뇌의 시간을 선사한 바드피에 감독의 재능도 빛난다.
영화 <파더 앤 솔저> 상영시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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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도 모르는 감정의 세계를 풀어내다
영화관에서 보지 않을 것을 굉장히 후회했던 영화 《인사이드 아웃》. 감정에 세계를 다룬 영화 《인사이드 아웃》은 정말 재밌었고, 가슴 찡했던, 그리고 나의 감정에 대한 왜곡을 함께 돌아볼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 시놉시스“괜찮아, 다 잘 될 거야! 우리가 행복하게 만들어 줄게”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감정 컨트롤 본부. 그곳에서 불철주야 열심히 일하는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 다섯 감정들. 이사 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라일리’를 위해 그 어느 때 보다 바쁘게 감정의 신호를 보내지만 우연한 실수로 ‘기쁨’과 ‘슬픔’이 본부를 이탈하게 되자 '라일리’의 마음 속에 큰 변화가 찾아온다. '라일리'가 예전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는 ‘기쁨’과 ‘슬픔’이 본부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엄청난 기억들이 저장되어 있는 머릿속 세계에서 본부까지 가는 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과연, ‘라일리’는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까?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인물마다 주된 감정이 다르다는 설정
라일리에게 초점을 맞춰 영화를 감상하다가 엄마와 아빠의 감정세계가 등장하면서 의아했던 부분이 있다. 처음 보기 시작했을 때는 ‘기쁨’이가 모든 사람들의 감정을 컨트롤 하는 수장(?)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엄마는 ‘슬픔’이가 아빠는 ‘분노’가 주된 감정을 제어하는 역할로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영화를 볼 때 모든 사람들의 감정을 조절하는 그 주체가 되는게 ‘기쁨’이라면 사람들의 텐션은 왜 각각 다른 것일까 조금 의문이 들었었는데 그 부분이 해결되는 장면이었다. 각 인물마다 결정권을 가진 감정들이 다르되 모든 감정들의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슬픔’이는 민폐 캐릭터가 아니었다
영화를 보면서 초반에는 굉장히 불편했다. 아니 왜 ‘슬픔’이는 저렇게 민폐 캐릭터로 나오는 것일까? 보는 사람마저 답답할 정도로 왜 저리 우울할까?하면서 ‘슬픔’이에 대한 안쓰러움과 분노를 함께 느꼈다. 그런데 ‘슬픔’이와 ‘기쁨’이가 제어센터를 벗어나 기억창고에 떨어지면서 ‘슬픔’이의 역량이 빛나기 시작한다. 빙봉이 울고싶어 할 때 울게 만들어주면서 덕분에 슬픔으로부터 벗어나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슬픔을 표출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다른 감정을 유발해 긍정적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 초반 ‘슬픔’이는 왜 저럴까?하고 민폐라고 생각했던 내 자신을 뉘우치기도 하고, ‘슬픔’이라는 캐릭터에 애착이 생기고 말았다. ‘슬픔’이라는 캐릭터를 통해서 슬픔을 표현하는 게 나쁜 것이 아니고, 슬픔을 애써 기쁨으로 감출 필요성이 없다는 것을 잘 알려주고 있었다.
에필로그가 너무 귀엽더라
모든 감정의 존재는 각각의 역할이 있다는 것. 쓸모 없고, 민폐인 감정은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었던 영화 《인사이드 아웃》. 그렇게 감동과 여운을 느끼며 쿠키영상을 보고 있는데 잔잔한 이 감정을 끊고 폭소를 하게 만든 장면이 있었다.
바로 고양이의 감정상태였다. 고양이들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감정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감정들 중 '소심'이가 감정제어장치 이곳저곳을 흐느적흐느적 다니면서 이상한 버튼을 누르는 통에 갑자기 고양이는 발작을 일으키고 집사들이 내 고양이는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왜 저러나? 할 때가 많은데 왜 그런지 그 이유를 너무나도 적절하게 설명해주고 있어서 깔깔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마음 속 감정의 세계. 어려운 심리학이 아닌 모두가 이해하기 쉬운 소재로 풀어낸 영화 《인사이드 아웃》. 잔잔한 감동과 이해를 선사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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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 재팬무비페스티벌 ATG 특별전 개최 및 라인업 공개
2015년 '이와이 슌지 감독전’으로 시작된 재팬무비페스티벌이 올해 10주년을 맞아 '반항과 혁신: 1960-80년대 ATG 특별전’으로 돌아왔습니다.
1961년에 설립된 ATG(Art Theatre Guild)는 일본 영화사에서 가장 실험적이고 혁신적인 제작·배급사로,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격동의 시대를 관통했던 일본에서 기존 상업영화의 한계를 뛰어넘어
실험적인 작품들을 과감히 지원하며 일본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고도성장기 일본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내재된 모습,
세대 간의 갈등을 예리하게 포착해 동시대 일본의 자화상을 담아낸 대표작 6편을 상영하며,
3월 15일부터 3월 23일까지 아트나인에서 관람할 수 있습니다.
과감한 실험정신과 미학적 도전을 시도하며 일본 뉴웨이브의 정수를 보여주는
ATG의 대표작들을 극장에서 만나보세요!
*image | article @artninecine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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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쁜 부모밑에서 자란 귀여운 천재소녀 마틸다(결말포함 영화리뷰)
영화 마틸다 입니다.
결말포함 영화리뷰 추천영화 가족영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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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클리닝 레이디> 예고편
자칭 '사랑 중독자' 앨리스는 유부남 마이크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불륜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앨리스는 정신을 딴 데로 돌리려다가
화상으로 끔찍한 상처를 입은 여자 청소부 셸리와 가까워진다.
너무나 다른 겉모습과 달리 예상치 못한 유대감을 공유하는 두 사람.
그러나 셸리는 사실 외면보다 내면에 더 충격적인 상처를 안고 있었고,
앨리스를 '완벽하게' 만들어 주려는 셸리의 시도는 파국으로 치닫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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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마이 뉴욕 다이어리> 30초 예고편
1995년 작가를 꿈꾸는 조안나는
뉴욕에서 가장 오래된 작가 에이전시에
CEO 마가렛의 조수로 입사한다.
출근 첫날, ‘호밀밭의 파수꾼’의 작가 J.D. 샐린저의
팬레터에 기계적으로 응대하라는 지시를 받지만,
조안나는 그들에게 진심 어린 답장을 보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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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작과 비교하면 한없이 부족하고 모르고 본다면 그저 로맨스인 영화
제가 이번에 본 영화<조제>때문에 최근에 원작 소설과 일본영화<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라는 작품을 봐왔었는데요. 이제서야 한국판 리메이크로 재탄생한 영화 <조제>를 보고 왔습니다. 아무래도 똑같은 작품을 3번 연달아 봐서 그런가 같은 내용에는 이제 무감각적으로 변하긴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한국판으로 재탄생한 영화<조제>는 원작들과 비교한다면 확실히 부족한 부분이 많더라고요. 오히려 저는 개인적으로 같은 설정으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갔더라면 지금과 같은 느낌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한국판 조제는 원작을 엉성하게 따라 하려다 보니 원작의 장점이 퇴색되버린 부분이 많은 작품인듯하네요. 자세한 건 리뷰로 시작하겠습니다.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집,
그곳에서 책을 읽고 상상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살고 있는 ‘조제’.
우연히 만난 그녀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영석’은 천천히,
그리고 솔직하게 다가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처음 경험해보는 사랑이 설레는 한편 가슴 아픈 ‘조제’는 자신에게 찾아온 낯선 감정을 밀어내는데…
기억할 거야 너와 함께 한 모든 순간을
이번에 한국판으로 새롭게 리메이크 된 영화<조제>의 스토리는 기존 원작과 별반 다르지 않는 전개를 보여주는데요. 원작에서 츠네오의 경우에는 배우 남주혁이 영석의 이름으로 연기하고 조제는 배우 한지민이 연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스토리라인은 몇몇의 사건의 나열을 다르게 보여줄 뿐 전체적인 맥락은 별반 다르지 않는데 작중 초반 영석(남주혁)이 휠체어에서 넘어져있는 조제(한지민)를 발견하는 것을 계기로 첫 만남을 가지게 되고 그렇게 영석은 매일 조제의 집에 찾아가서 조제에게 밥을 얻어먹으며 둘 사이의 관계가 가까워지면서 로맨스 드라마를 그리고 있다는 점은 원작과 똑같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1) 새로운 비주얼 - 남주혁과 한지민이 보여주는 한국판 조제
이번에 한국판으로 새롭게 탄생한 영화<조제>는 원작 소설<조제와 호랑이와 그리고 물고기들>의 작품을 토대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그래서 이미 한차례 일본에서 영화화 한 적도 있는 작품이죠. 그런 점에서 보았을 때 이번에 새롭게 보여주는 영화 <조제>는 새로운 비주얼로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이긴 해요. 일단 기본적으로 배우 한지민과 남주혁의 이 두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색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으며 배경 자체가 한국이다 보니 한국의 정서가 느껴지는 부분도 적게 남아 표현되고 있어서 원작을 알고 있는 저로서는 이러한 새로운 비주얼 만으로도 새로운 영화를 보는듯한 느낌은 있었던 것 같아요.
2) 각색 아닌 각색 - 원작의 사건들을 똑같이 나열
일단 영화<조제>에 관해서 할 이야기는 많지만 가장 근본적으로 해야 될 건 바로 원작에 대한 각색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요. 한국판으로 새롭게 리메이크된 이번 영화<조제>는 솔직히 말해서 각색이라고는 말하기 힘들 정도로 원작 영화와 흡사한 부분이 상당히 많아요. 리메이크란 점에서 조제가 다리를 쓰지 못하는 하반신 장애라는 점, 그리고 영석이 우연히 조제를 만나서 사랑을 나눈다는 점 이건 기본적인 설정이니 당연히 써야 되는 부분이긴 하지만 그 이외에도 원작 영화에서 가져온 내용들을 상당히 많이 가져다 써요. 심하게 말하면 거의 영화 전체적인 부분을 그대로 가져와 썼다고 해도 될 정도죠. 예전에 영화 <골든슬럼버>가 이렇게 영화를 리메이크했다가 혹평을 상당히 많이 하기도 했었죠.
이번 영화<조제>는 원작 영화의 내용들을 사건 하나하나 나열해서 그대로 배열한 느낌인데 각색 아닌 각색이라고 한 이유가 그러한 사건들에서 그저 사물을 바꾼다거나 등장인물을 바꾸는 식으로 등장할 뿐 내용적으로 새롭게 해석한 부분은 전혀 없다는 부분이 가장 아쉬운 부분이에요. 원작 영화에서는 그 사건들, 그리고 상황에 따른 대사 하나가 영화의 전체적인 의미를 갖는데 그걸 그저 사건의 나열로만 사용했다는 건 확실히 영화<조제>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를 버렸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죠.
3) 사라진 의미들 - 대사, 물건 하나하나가 중요한 작품인데...
영화<조제>의 스토리는 원작 영화의 사건들을 그저 나열만 하고 있으니 조제라는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 그리고 사물에 대한 의미들이 퇴색되버리고 있는데요. 예를 들어 원작에서는 휠체어라는 장치를 어떻게 보면 조제 본인의 미숙한 마음을 표현했다는 부분이라던가 호랑이, 물고기 더 나아가 영석의 대학교 후배와 조제와의 관계 등 그런 모든 상황들이 대조되면서 영화 <조제>는 감정적인 서사가 중요한 작품이 되었는데 이번에 리메이크된 한국판 <조제>그러한 의미들이 사라지고 그저 로맨스 드라마, 신파극으로서 보이고 있는 건 조제라는 작품의 존재 의의를 없애버린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이 되네요. 가장 어이없는 부분은 호랑이와 물고기에 대한 부분인데 처음엔 왜 제목이 조제만 있을까 생각했는데 그 이유를 영화를 보고 나서야 호랑이와 물고기에 대한 부분은 한국판 <조제>에서는 아무런 의미 없이 그저 사용될 뿐이더라고요.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번 영화 조제가 기존의 원작들과 차이점을 둘려 했는지 결말에 대한 부분을 바꿨는데 이 부분은 일본 영화에서도 이미 한차례 새롭게 재해석한 부분이기 해요. 원작 소설에서는 조제와 츠네오가 끝까지 함께 살아간다는 느낌으로 결말이 나고 일본 영화에서는 츠네오가 조제에게서 도망치는 결말을 보여주죠. 이번 한국판 조제에서도 영석이 조제에게서 떠나는 건 맞지만 그 이유가 조제가 영석을 놓아준다는 느낌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조제는 이제 혼자서 자동차 운전을 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간다는 연출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끝이 나죠. 이점만 본다면 확실히 각본의 의도가 어떤 식이었는지는 알 것 같은데 애초에 이럴 거면 영화의 전체적인 서사를 조제의 초점으로 새롭게 재해석을 했어야 했다고 봅니다.
4) 중요한 영화의 주체 - 자꾸만 바뀌어 버리는 이상한 연출
원작<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는 엄밀히 말해서 영화의 주체는 저는 남자 주인공 '츠네오'였다고 생각해요. 그렇기에 작중 초반부터 츠네오의 시점으로 시작해서 조제와의 모든 관계 상황들이 츠네오로서 진행이 되어서 모든 상황과 감정들이 공감하기 쉬웠습니다. 하지만 이번 한국판 영화<조제>는 그러한 영화의 전체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섬세히 연출되어 있지는 않더라고요. 작중 초반에는 영석의 시점으로 진행되다가도 가면 갈수록 조제의 시점으로 바뀌는듯하면서 다시 영석의 생각으로 돌아가고 자꾸만 이렇게 영화를 이끌어 가야 될 중요한 주체가 애매하게만 연출되고 있으니 제가 방금 말한 결말부에 대한 감정이입이 잘 공감이 되지 않는 것 같아요.
차라리 조제의 입장에서 오히려 조제의 성장으로만 초점을 맞췄다면 이해되지 않는 감정선이 조금 더 편했을 거예요. 당장에 영석과 조제의 갈등 부분도 어떻게 보면 두 사람의 갈등보다는 할머니로서의 갈등인데 할머니를 사용하는 방식도 그렇게 섬세하지 않다는 거에 이미 영화<조제>의 방향성은 그저 로맨스 드라마라는 거에 치중되어 있다고 봐야겠죠.
5) 그저 로맨스 신파 - 이렇게만 본다면 그나마 볼만
원작을 보지 않았다는 가정하에서 보면 그래도 나름대로 볼만한 로맨스 신파극 드라마로 그나마 볼만한 수준이었던 영화이긴 해요. 일단 우연히 만난 두 사람 그리고 여자는 다리를 쓰지 못하는 하반신 장애 이러한 설정들을 고려해보면 확실히 흥미를 끌만한 소재에 대가 그것을 연기하는 배우마저 남주혁과 한지민이니 정말 가벼운 로맨스 영화를 본다는 시점으로 본다면 볼만한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저는 이러한 진부한 로맨스 영화가 취향도 아니거니와 애초에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라는 작품을 그저 볼만한 작품으로 만들어졌다는 건 확실히 원작을 본 사람들 입장에서는 추천해드리고 싶은 작품은 절대 아니긴 하네요.
1) 배우 한지민, 남주혁
영화 <조제>가 스토리적인 면에서는 애초에 원작을 따르는 작품이기도 하고 영화 자체의 스토리도 그저 로맨스 신파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크게 매력 없지만 그래도 그러한 스토리에서 한국 배우 한지민, 남주혁이 연기를 하고 스크린을 채워간다는 점은 어떤 이들에겐 그래도 나름의 관점 포인트이지 않을까 싶어요. 저의 경우에는 배우를 보고 영화를 선택하는 비중은 거의 2할 정도라서 크게 메리트는 없지만요.
2) 엔딩크레딧 노래
관점 포인트라고 하기도 머 한데 엔딩크레딧 삽입곡에 아이유 노래인 자장가가 나옵니다. 잔잔하게 영화만 보다가 갑자기 엔딩크레딧에서 아이유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영화를 너무 재미없게 봐서 그런가 아이유 노래가 그나마 위안이 되긴 하더라고요. 애초에 엔딩크레딧에 아이유 노래가 삽입된다고 이슈가 된 적도 있던데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엔딩크레딧이 저는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관점 포인트가 아니었나 싶네요.
자 이제 저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원작 소설부터 영화화된 모든 작품들 보기 프로젝트가 애니메이션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소설도 읽고 영화도 2편이나 봐서 그런가 이제는 내용에 한해서는 감흥이 없어진 것 같긴 하네요. 그래도 이번 한국판 조제는 개인적으로 다행이라고 생각이 드는 점도 있긴 해요. 원작을 몰랐다면 그저 로맨스 신파극으로만 리뷰를 작성했을 건데 이렇게 원작을 알고 보니 더 많은 게 보인 건 사실이니까요. 이제는 애니메이션판 조제만 남겨두고 있는데 이건 아무래도 내년 1월에 개봉을 하겠죠. 이건 이것대로 기다리고 이상 조제에 관한 리뷰를 마치겠습니다.
* 본 콘텐츠는 블로거 민케이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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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적지 잃은 배는 멈출 수밖에.
이 글은
영화 [늑대사냥]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을 퍼가거나 인용 시 출처를 반드시 표시해주세요.
가장 골머리를 싸매면서 쓰지만 이제는 살짝 포기한 서문과 맞바꿀 정도로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전하는 말.
최근 영화관 관크(다른 관객들이 작품을 관람하는 데 있어 방해하는 모든 행위 및 행위자자들을 일컫는 말)가 많아지고 있다. 그것이 코로나로 인해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다 보니 집에서 해도 되는 행동과 사회에서 허락되는 행동의 범위가 모호해져서 그렇든, 개인의 성향이 둔감한 편이든 상관없이. 종종 뉴스거리로도 나올 정도의 불쾌한 행동이 많아지는 추세임은 감출 수 없다.
일주일에 최소 한 번은 영화관을 찾는 본인 역시 꽤 많은 관크를 당했다고 자부하는(?) 데도 불구하고. 이번에 소개할 영화인 [늑대 사냥]을 관람할 때는 불법 촬영하는 사람을 만나는 관크를 당했다.
비록 남루하고 초라한 문장을 리뷰랍시고 나열하는 삶을, 곁다리 삶 중 하나로 영위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것”에 애착을 느끼는 사람이기에. 다른 사람의 것도 최소한의 존중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분노를 느끼며 영화의 초반부에 소리를 지르며 그 행동을 제지해야만 했다.
영화 관람 후 스스로의 평가에 따라 작품이 정말로 “돈값”을 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평가를 할 수는 있겠으나. 그 어떤 작품이라 해도 불법으로 보아야 할 운명을 지닌 채 태어나지는 않는다. 애초에 그런 운명 외에 허락되지 않는 작품이라면. 만들어진 의도부터가 불순한 영상물에 불과하며 그것을 관람 및 유포한 사람들은 모두 법의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부디 다음번에는 경찰서로 간 다음에야 반성했다며 질질 짜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그 알량한 반성은 경찰서를 나오는 순간 안도의 한숨으로 바뀔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유튜브 영상 조회수 올릴 때나 쓰는 말인 줄 알았던 “역대급” 관크 덕분에 나 역시 영화의 초반부 15분가량을 관람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겼다. 덕분에 영화 초반부의 이야기에 대한 것은 제외 후에 리뷰를 작성해야 하는 어려움까지 얻은 채로 말이다. 참 여러모로 도움되지 않는 관크임에는 틀림이 없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영화의 전반부는 승리에 취한 범죄자들을 비춘다. 배를 “접수”하기까지 벌어지는 폭력의 향연은 경찰들을 향한 응축된 분노만큼이나 잔인하고 집요하다. 그들은 상대방을 향한 그 어떤 배려도 하지 않은 채.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둔기, 칼)을 이용해 반복적인 타격으로 상대방의 숨을 끊어놓는다.
또한 망망대해 위의 배라는 설정상. 도망칠 곳이 한정되어 있다는 두려움은. 이 무자비한 범죄자들에 의해 점점 수세에 몰려 너나 할 것 없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경찰들의 두려움과 살육자들의 잔인함을 동시에 배가시킨다.
범죄자들의 행보는 거침이 없고. 그로 인해 영화의 속도는 두려움도 앞지를 만큼 빠르고 급박하다. 피가 묻은 얼굴에서 떠오르는 미소는 이제 더 이상 상대를 가리지 않는 순수한 악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짧은 초반부의 영광도 잠시. 영화는 알파(Alpha, 최귀화)의 운송이 숨겨온 진짜 목적임을 드러내는 순간부터 급속도로 빛을 잃는다.
이 초월적 알파라는 존재가 영화를 누비며 벌이는 실수들은. 영화 [마녀 2]에서 언급한 문제와 거의 동일하다. 밸런스가 붕괴된 밸런스 게임인 셈이다.
영화는 초반 시퀀스에 매우 공을 들여 종두(서인국)를 구축점으로 만들어 놓았지만. 이마저도 알파 앞에서 힘없이 무너뜨리는 선택을 해버렸다. 그것도 스스로. 이로 인해 관객들은 애초에 알파에게는 그 누구도 상대가 되지 않음을 느낌과 동시에.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그 어떤 긴장감도 없을 것임을 짐작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알파는 종두로도 모자라 도망갈 곳 없는 배.라는 밀실에 가까운 장치도 무너뜨린다. 그 어떤 곳에 있어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선택임은 알지만. 문제는 알파가 후반부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피로할 정도로 모습을 내비친다는데 있다.
이로 인해 남은 시간들은 그저 알파가 가동하는 살육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덜덜 떨고 있는 사람들을 순서대로 처단하는 장면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 잔인함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 어떤 감흥도 두려움도 주지 못한다. 그저 심하다.라는 생각만 들게 할 뿐.
[늑대사냥]은 또 다른 영화인 [랑종]이 범했던 실수를 떠올리게 한다. 곡성의 후속작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내걸었던 표제어(중심 단어)는 “무서움”이었다. [늑대사냥]의 경우는 메인이 되는 단어가 “수위를 넘는”과 “(클리셰를 포함한) 모든 것을 부순다”정도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영화가 가지는 통상적인 흐름이 어떤지 유추해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주인공은 결국 (가장 오래) 살아남는다. 일 것이다.
그렇게 치면 과연 이 영화의 주인공은 누구일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영화는 초반에는 경찰(박호산, 정소민;왜 캐릭터 이름이 공식 페이지에 조차 없나요?) 쪽이 주인공인 것처럼 비추다가 나중에는 결국 도일(장동윤)의 생존으로 영화를 마무리한다.
이는 도일 및 개조 인간들의 존재를 반전으로(라도) 볼 수 있지 않느냐의 문제와도 맞물리는데. 안타깝게도 반전으로 보기에는 깔아놓은 밑밥의 수준과 정도가 빈약하며. 애초에 이 부분을 억지로 반전으로 만들기 위해 포커싱을 의도적으로 잘못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초반부의 도일은 종두와의 크고 작은 마찰을 겪으면서도. 그다지 큰 무리 없이 죽음의 그림자를 피해 가는 맑은 눈의 광인에 불과하다. 뚜렷한 능력을 보여주는 장면은 거의 없다.(꼭 하나 집어 말한다면 누군가를 죽이려 하는 도일의 손을 저지하는 장면 정도.)
도일이 숨겨진 주인공임을 알게 되는 지점은, 더 이상 알파의 무자비한 행동으로 죽여댈 인물이 거의 없을 때가 등장하는 성동일과, 파편처럼 등장하는 과거의 그림자가 합쳐지는 거의 극 후반부쯤이다.
그러나 그 지점까지 이르는 동안. 도일은 그 어떤 임팩트 있는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저 한 대 맞고 어딘가 널브러져 있다 정신을 차린 듯한 몽롱한 얼굴로 슬그머니 생존 신고를 할 뿐이다. 이 장면을 보며 누가 도일이 진짜 주인공임을 알고 환호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개조 인간들과 도일이 벌이는 결투마저도 진짜 주인공의 신고식이나 자기소개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조잡하다 못해 빼버려도 부족하다 느끼지 않을.
영화는 자신들이 넘고 싶었던 수위와 클리셰를 없앴다는 허황된 꿈에 젖어 정작 설명해야 할 것들과 엮었어야 했을 모든 것들을 건너뛴다. 그러니 애초에 보려고 한 영화가 아닌 다른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관객들이 느끼는 심정은 “속았다”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이쯤 되니 제목에 대한 생각도 떨칠 수 없다.
과연 누가 늑대인가.라고 물어보았을 때 제대로 된 대답을 하기 힘들어진다. 영화는 늑대"를"사냥하는 것에 집중하기보다 늑대"가" 사냥하는 모습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늑대라 불릴 정도로 대단한 그 무언가가 존재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두 시간 남짓의 항해 동안 그 어떤 명확한 목적도 없이 안으로 곪아가는 것만 선택한 배의 최후는. 침몰밖에는 없는 것이겠지.
마치면서
한두 명을 제외한 거의 모든 연기자들의 연기가 아까울 지경이었다.
특히 서인국과 성동일 배우의 연기는 섬뜩함을 넘어서서 초월적인 존재인 알파 보다도 더 두려움을 자아내는 연기를 보여줬기에 더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새로운 시도임에는 분명했으나, 영화가 마치 두 조각난 배처럼 완벽하게 나뉘어서 융합하는 장면은 단 한 번도 마주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 연기로는 그 어떤 흠도 잡을 수 없는 배우들을 그저 소모품으로 써버린데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것도.
잔인한 영화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단어 외에 뒤에 붙을 말이 없다는 사실은 영화를 평가하는 데 있어 좋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잔인한데도 불구하고 잘 만들어진 영화들의 예가 많기 때문에.([악마를 보았다] 라던가. [킬빌] 이라던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영화가 가져갈 수 있는 수식어는 그 외에는 없다.
[이 글의 TMI]
1. 이제 추워서 긴 팔을 입어도 아무렇지 않다.
2. 이럴 때 걸어 다니는 거 좋아서 괜히 출근할 때도 빙 둘러가는 중.
3. 아 물론 회사 가기 싫어서 그런 것도 있음.
4. 커피를 끊어볼까 하고 깝죽거리다가 지옥 같은 일주일을 보냈다.
5. 앞으론 그냥 안 까불고 하루 한 잔만 먹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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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듄' 리뷰
*원작 소설을 읽지 않았습니다.
**주로 영화 자체의 이야기보다는 세계관에서 파생되는 생각을 쓰겠지만,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SF 영화에서 던지는 주제의식은 언제나 미래지향적일까? 21세기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지금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듄은 이런 생각들이 자유롭게 떠올랐던 영화였다. 나는 정확하게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영화가 마음에 들었다. 내가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를 신뢰하는 이유는 경계 없는 사유의 여지를 만들어두는 감독이기 때문이다. 원작 소설에서도 내가 생각했던 부분의 이유가 나오는지는 모르겠으나 나온다면 영상화를 굉장히 잘 해낸 것이라 생각한다. 실물로 구현해낸다고 했을 때 원작에 구체적으로 묘사된 내용을 표현하는 것보다 구현하기 어려운 건 저 세계관에서 통용되는 상식이나 통념, 구조를 시각화하는 일이다.
이게 말이 쉽지 단지 몇 마디로 퉁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인물들의 대사나 자막 몇 개로 설득할 수는 없다. 극 중에 등장하는 사건-대화-도구를 종합해서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어려운 일이지만 그 사고방식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면 관객들은 그 세계에 몰입한다. 스크린이라는 벽을 넘어서 주인공의 여정에 함께하는 느낌을 받는다. 여기서 드니 빌뇌브 감독은 긴 호흡으로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 길다는 특징에서 의견이 엇갈리는 부분도 있었다. 나는 이야기 자체를 까다롭게 고르지 않는 편이라 필요하다는 생각이었지만 주변에선 몰입이 아예 어려웠다고 말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내가 이 영화에 재미를 붙이고 몰입할 수 있었던 근거는 영화에서 묘사하는 사회 구조에 있었다. 영화에는 제국과 공작, 남작과 같은 작위가 등장하며 향신료와 '상호 간의 계약'을 이야기한다. 나는 이 지점이 영화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키라고 생각한다. 유럽의 봉건제 구조를 SF 배경으로 옮겨놓았다. 귀족 집안 사회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역학 관계의 현실감이 굉장히 핍진했다. 현실 세계의 역사를 상징으로 치환해서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 소설을 읽어보면 더욱 명확해질 거 같지만, 이런 이유로 배경은 익숙하지 않아도 인물들의 행동을 이해하기에는 충분했다.
저 봉건적 구조의 작동 원리를 안다면 아트레이데스 가문의 가주인 레토 공작의 행동은 당연하게 느껴진다. 봉건제는 계약을 통해 형성되는 주종 관계다. 유럽의 봉건제는 아시아의 봉건제와는 다르기에 레토 공작의 행동도 그런 배경을 염두하고 보면 이해가 쉽다. 그가 함정임을 알면서도 임무를 수행했던 이유는 충성과는 거리가 멀다. 아들인 폴의 생모인 레이디 제시카와의 관계도 그렇다. 그녀는 레토 공작의 연인이지만 부인은 아니다. 정략혼인은 봉건적인 정치 체제 아래에서 동맹을 확보할 수 있는 확실한 수단이니까 레토 공작은 부인의 자리를 비워둘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사건이 벌어지는 배경은 머나먼 미래지만 그 사회를 이루는 구조는 고전적이라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웠다. 생각해보면 SF를 다루는 다양한 문학이나 영상 작품들을 보면 꼭 '은하 제국'이 등장한다. 각 행성마다 지적 생명이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서 은하계를 다스리는 제국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다. SF 세계 속의 정치 체계가 전제군주정이라는 점은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 만약 행성 간 여행이나 이동이 자유로워지는 시점이 오게 된다면 우리가 소속감을 느끼는 집단의 규모도 달라질 것이다. 행성 단위로 주거의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생활양식이나 사고방식에 차이가 발생할 것이고 국가라는 단위의 인식 체계 또한 바뀔지 모른다. 혹시 모르지 그때가 되면 한국 사람이라는 설명보다 '지구 사람'이라는 표현이 더 자연스러울지도.
자유로운 이동의 수준에 따라 수많은 시스템이 바뀐다. 성간 이동의 연료가 되는 스파이스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갈등을 다룬 이 장대한 서사시는 그래서 매혹적이다. 이권을 중심으로 인물 간의 당위와 목적이 명확하게 엿보인다. 저 스파이스의 유통권을 쥐고 있는 입장에서는 그렇기에 유통시켜야만 한다 '스파이스는 흘러야 한다'. 성간 이동이 어려워지면 궁극적으로는 저 체제를 유지하는 게 어려울 테니까. 그만큼 귀중한 자원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권력이 명확하게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 자원의 생산부터 정제, 활용까지의 과정이 막히면 곤란하다. 그런 점에서 민주정, 공화정은 행성 규모의 생명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체제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듄을 보면서 오래전에 읽었던 소설 '은하영웅전설'도 생각이 나고 게임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도 생각이 났다. 은하영웅전설을 통해서는 카리스마를 지닌 걸출한 한 인물에 집중해서 정치 체제를 고찰해볼 수 있고 크루세이더 킹즈를 통해서는 가문의 존속을 위해 감당해야 하는 것들을 알아볼 수 있다. 아무래도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이라고 생각하고 보니 그런 작품들이 떠올랐다. 이 시리즈 자체가 거대한 프로젝트인 만큼 이번 편은 주인공인 폴의 기원을 다루고 있지만 앞으로 나올 내용에는 정치적인 내용이 더 많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우주 사극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근사한 영화였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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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FF 데일리] 민족과 부족, 국가와 가족 사이에서
파더 앤 솔저|Father and Solider
마티유 바드피에|Mathieu VADEPIED
France, Senegal|2022|101 min|DCP|Color|Fiction|12|Asian Premiere
시놉시스
1917년, 바카리 디알로는 강제 징집된 17세 아들 티에르노의 곁을 지키기 위해 프랑스군에 입대한다. 두 사람은 함께 전선에 투입되고, 전쟁에 직면한다. 티에르노가 남자가 되는 법을 배우는 동안 바카리는 그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프로그램 노트
1차 대전 당시 프랑스령 세네갈. 프랑스인들은 세네갈인들을 징집하여 유럽의 끔찍한 전쟁터로 보낸다. 척박한 땅에서 아들 티에르노와 가축을 치며 가족을 먹여 살리는 아버지 바카리는 프랑스 군인이 나타난다는 소문만 들리면 징집 대상인 아들을 은신처로 보내 숨어 있도록 하지만 아들은 결국 세네갈에 있는 신병교육대로 끌려간다.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탈출하기 위해 자원입대를 하고, 탈출을 시도하지만 실패하여 부자는 유럽 전선으로 끌려간다. 한 전투에서 100만 명이 넘는 전사자가 발생할 정도로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한 곳, 같은 아프리카인들끼리도 서로를 속이고, 강도 행각을 벌이는 전선에서 어떻게든 아들을 찾아 탈출하려는 아버지와 프랑스어를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지휘관의 눈에 들어 영웅이 되려는 아들은 서로 다른 전쟁을 겪게 된다. 2022년 칸영화제 Un Certain Regard 섹션의 개막작이었던 이 작품은 아버지의 애틋한 정과 덧없는 전쟁이 남긴 상처를 보여주는 휴먼 드라마다. (전진수)
평범한 부자 이야기가 아니다
어디서나 익숙하게 쓰이지만 의외로 오래되지 않은 말이 있다. 일본 메이지 유신 시대에 만들어진 단어, 민족이다. 민족은 'Nation'을 한자로 번역한 말이다. 언어나 문화, 국기나 국가(國歌) 같은 상징을 공유한다고 여겨지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유럽에서는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민족 개념이 퍼졌다. 한 민족이 한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도 널리 퍼졌다. 실제로 새롭게 생겨난 나라도 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대표적이다. 즉, 민족은 혈통과 관련된 말이 아니다. 자연적으로 존재한 개념도 아니다. 근대 국가가 만들어질 때 생성된 새로운 관념이다.
그런데 민족을 만드는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프랑스의 경우 월드컵 성적이 좋지 않거나 대표팀에 내분이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 정부가 청문회를 연다. 축구에 미쳤기 때문이 아니다. 아프리카 출신 선수가 많은 축구 대표팀은 그 자체로 프랑스의 통합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드피에 감독의 <파더 앤 솔저>는 특별하다. <파더 앤 솔저>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한 부자의 이야기를 통해 민족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그 과정에서 땅에 뿌려진 피와 땀의 의미도 들려준다.
눈물겨운 부성애
얼핏 보면 <파더 앤 솔저>는 평범하다. 아들을 보호하려는 부성애 이야기는 익숙하다. 물론 그만큼 호소력이 짙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군은 병력이 부족해지자 세네갈 땅에 사는 부족민을 강제로 징집한다. 티에르노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카리는 아들을 빼돌리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그러자 그는 자원입대한다. 아들을 보호하고, 집으로 보내기 위해서. 방법도 여러 가지다. 티에르노를 후방에 남기기 위해 취사병 보직으로 보내려 로비하고, 은신처를 찾거나 탈영 계획을 짜기도 한다.
모든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자 자기 한 몸을 희생한다. 전투 중 독일군 포로가 된 아들을 구하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독일군 진지에 침투한다. 아들을 구출해서 프랑스군 참호로 돌려보내는데도 성공한다. 비록 자기는 총 맞아 쓰러지지만.
이처럼 <파더 앤 솔저>는 다른 길로 새지 않고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시점에서 묵직하게 이야기가 흘러간다. 그러니 설사 흔한 스토리라 해도 심금을 울리기에는 충분하다.
세네갈 부족민, 프랑스 군인이 되다
반면에 아들의 시점에서 보면 <파더 앤 솔저>는 전혀 다른 영화다. 원치 않게 프랑스군에 입대한 티에르노. 그도 처음에는 집을 그리워한다. 전선에서 친구가 총에 맞아 죽고, 자기도 죽을 위기를 여럿 넘기면서 귀향을 꿈꾸는 마음은 더 커진다.
그는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달라진다. 프랑스군과 독일군 참호 사이에 방치된 친구 시신을 수습해 오는 등 무공을 보여준 결과 상병으로 진급한다. 다른 병사에게 명령을 내리고 프랑스 지휘관들과 교류하면서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보호 때문인 걸 알면서도 아버지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대신 자기를 증명하려는 만용을 부린다.
여기까지만 보면 흔한 사춘기 아들의 반항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 가지 특별한 요소가 끼어든다. 바로 프랑스다. 이등병 티에르노가 상병을 거쳐 하사까지 진급할 수 있었던 데에는 무공 외의 무기가 있었다. 의사소통 능력이다. 티에르노는 아버지와 달리 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안다. 그는 프랑스군 장교와 아프리카 출신 병사들 간의 가교였다. 그 결과 티에르노의 변화에는 전혀 다른 의미가 깃든다. 그는 단지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려고 반항하는 게 아니다. 그는 프랑스인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따라서 제1차 세계 대전을 두고도 아버지와 아들은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다. 바카리는 부족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을 아직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 독일과의 전쟁도 무의미한 살육일 뿐이다.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한 탈영도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티에르노는 다르다. 그에게 이 전쟁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탈영은 하나의 공동체인 프랑스를 배신하는 선택이다. 그가 아버지와 달리 전선으로 복귀하고 프랑스를 위해 싸운 이유다.
민족과 부족, 국가와 가족 사이에서
아들의 입장에서 영화를 보고 나면 바카리의 부성애도 달리 보인다. 그의 죽음은 이제 단순한 희생이 아니다. 마냥 가슴 아픈 감동도 아니다. 질문이다. 한 민족이라는 자각도 없이 참호에서 죽어간 이들에게 국가와 민족을 위한 전쟁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가족을 잃고, 가족이 찢어진 채로 그들이 지켜낸 국가와 민족은 또 무슨 의미인지. 식민지에서 끌려와 파리 개선문 밑에 묻힌 이름 모를 군인들이 던지는 질문이다.
다른 부자 관계도 바카리가 던지는 질문에 힘을 실어준다. 영화에는 프랑스군 장성 아버지와 중위 아들이 등장한다. 이 아들은 아버지가 자기 능력이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푸념한다. 실제로 아버지는 병사들을 독려하기 위해 아들 부대를 방문했을 때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그러나 아들이 작전 중 전사하니 아버지는 마침내 그를 인정한다. 성대한 장례식을 열고 아들에게 훈장을 수여한다. 가족 대신 민족과 국가를 선택했다고 칭찬한다. 과연 이 아들은 아버지의 칭찬에 기뻐할까? 의문이 남지 않을 수 없다.
<파더 앤 솔저>는 얕은 영화일 뻔했다. 이야기는 전형적으로 흐른다. 내용을 예상할 수 있는 제목도 한몫한다. 하지만 우려는 기우였다. 결말의 맥락은 복잡하다. 그만큼 여운은 길다. 2022년 칸영화제 Un Certain Regard 섹션의 개막작답다. 익숙함을 뒤집어 고뇌의 시간을 선사한 바드피에 감독의 재능도 빛난다.
영화 <파더 앤 솔저> 상영시간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