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3-03-03 09:36:37
짙은 여운을 남기는 찰리 카우프만의 영화들
<존 말코비치 되기>, <이터널 선샤인>, <아노말리사> 등
안녕하세요! 영화/OTT 콘텐츠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눈 깜짝할 새에 또 한 주가 빠르게 지나가고 어느덧 주말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요, 이번 주말은 모두 어떻게 보낼 계획이신가요? 여러분의 고민을 줄여드리기 위해 씨네랩은 오늘도 재미있는 영화추천과 함께 돌아왔습니다!
이번엔 미국의 천재적인 영화감독이자 각본가, 찰리 카우프만(Charlie Kaufman)의 작품들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려고 해요. 카우프만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유명인의 머릿속에 들어가는 통로를 발견하기도 하고(존 말코비치 되기), 세상 사람들 모두의 목소리가 똑같이 들려 괴로워하거나(아노말리사), 이별의 고통 때문에 기억을 제거하는 시술을 받기도 합니다(이터널 선샤인). 카우프만의 매력은 인간의 다양한 욕망과 그로부터 비롯된 자아의 분열을 그만의 기발한 상상력으로 그려내는 것인데요, 기괴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카우프만의 작품세계에 한번 빠져들고 나면 좀처럼 헤어 나오기 어려우실 거랍니다.
찰리 카우프만은 누구?

먼저 찰리 카우프만에 대해 소개해 드릴게요. 카우프만은 원래 1990년대 초부터 후반까지 TV 코미디 시리즈와 시트콤 시리즈의 작가로 활동하다가, 1999년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의 각본을 쓰며 전 세계 영화인들이 주목하는 창작자로 떠올랐습니다. 해당 작품으로 그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에 오르고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각본상을 수상하기도 했죠.
뒤이어 <어댑테이션>, <이터널 선샤인> 등의 각본 작업으로 꾸준히 사랑받던 카우프만은 2007년 <시네도키, 뉴욕>을 통해 드디어 감독으로 데뷔하는데요, 안타깝게도 비평가들의 극과 극을 달리는 상반된 평가, 열악한 극장 성적으로 인해 이후 영화 제작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쓰는 족족이 제작에 실패하는 고배를 마시던 카우프만은 감독 데뷔 8년 만인 2015년, 듀크 존슨과 함께 애니메이션 영화 <아노말리사>를 공동 연출하는 데 성공해 해당 작품으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애니메이션 장편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이후 카우프만은 2020년 장편소설 <Antkind>를 출간하고,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한 영화 <이제 그만 끝낼까 해>를 통해 다시 한번 평론가들의 호평을 얻었습니다.
올해 1월 카우프만은 삼성이 기획한 'Filmed #withGalaxy'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갤럭시 스마트폰을 활용해 촬영한 단편영화 <자칼과 반딧불이>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해당 영화와 관련된 한 인터뷰에서 차기작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는데요, 라이언 고슬링을 염두에 두고 쓴 각본이 있으며, 라이언 고슬링이 실제로 제작 및 출연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제작이 무사히 성사되어 두 사람의 협업을 볼 수 있게 된다면 영화팬으로서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이 없겠네요 :)
찰리 카우프만의 영화들
존 말코비치 되기(1999)
Being John Malkovich

감독: 스파이크 존즈
출연: 존 쿠삭, 카메론 디아즈, 캐서린 키너, 존 말코비치 등
장르: 판타지, 코미디
러닝타임: 112분
불경기에 부르는 곳이 없는 인형술사 크레이그. 생계는 아내 로테에게 맡긴 채 거리에서 인형극을 하다가 행인에게 얻어맞는다. 절망에 빠져 새 일을 찾기로 한 크레이그는 어느 날 주특기인 손놀림으로 '레스터 회사'에 서류정리 사원으로 일자리를 얻게 된다. 회사는 뉴욕시의 한 빌딩인데 7과 1/2층(7층과 8층) 사이에 사무실이 위치하는 기괴한 곳이다. 첫날부터 동료 여직원 맥신에게 반하지만 그녀는 냉담하고, 낙심한 그는 어느 날 서류를 정리하다 사무실의 캐비닛 뒤에 숨겨진 문을 발견한다. 문을 열고 작은 통로 안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어둡고 습기 찬 터널로 빨려 들어가게 되는데 그곳은 바로 배우 '존 말코비치'의 뇌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15분 동안 존 말코비치의 뇌 속에 머물 수 있고, 그의 감각을 모두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크레이그가 이 사실을 로테와 멕신에게 알리자 맥신은 통로를 이용해 돈을 벌려하고, 로테는 통로에 직접 들어가 해방감을 느낀다. 얼마 뒤 맥신이 말코비치를 유혹하러 갔다가 그 안의 로테와 사랑에 빠진 것을 알게 된 크레이그는 질투에 사로잡혀 로테를 집에 감금하고 말코비치 속으로 들어간다. 한편, 말코비치는 이상함을 느끼고 맥신의 뒤를 밟았다가 사람들이 돈을 내고 통로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분노하지만, 곧 머릿속을 점령한 크레이그에게 조종당하고 마는데...
자아의 성질과 영혼의 실존 말이야,
내가 과연 나일까? 말코비치가 말코비치일까?....
이 관문이 얼마나 골치 아픈 형이상학적 문제인지 모르겠어?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는 영화 <그녀>로도 유명한 스파이크 존즈가 연출, 찰리 카우프만이 각본을 쓴 1999년도 영화입니다. 인형을 조종하는 남자가 우연히 배우 존 말코비치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발견하면서 벌어지는 블랙코미디 판타지로, 이루지 못한 꿈과 욕망 때문에 다른 사람으로 살아보려는 남자를 통해 인간의 욕망과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카우프만이 시나리오를 완성했을 당시에 할리우드 대부분의 제작사들이 '내용은 기발하지만 영화로 만들기 어렵다'라며 제작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에게 시나리오가 닿았고, 코폴라가 자신의 사위였던 스파이크 존즈 감독에게 연출을 맡기며 두 사람의 협업이 시작되게 되었다네요. 두 사람은 이 영화로 제7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각 감독상, 각본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독특한 카메라 워킹 또한 이 영화의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현실의 인물들을 비출 때 일반적인 눈높이로 고정되어 있던 카메라가 주인공들이 말코비치의 몸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핸드헬드를 활용한 1인칭 시점 숏으로 바뀌어 관객들 역시 말코비치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어댑테이션(2002)
Adaptation.

감독: 스파이크 존즈
출연: 니콜라스 케이지, 메릴 스트립, 크리스 쿠퍼, 틸다 스윈튼 등
장르: 드라마, 코미디
러닝타임: 114분
<존 말코비치 되기>로 명성을 얻은 시나리오 작가 찰리 카우프만(니콜라스 케이지)은 괴짜 난초 수집가 존 라로쉬(크리스 쿠퍼)에 관한 저널리스트 수잔 올리안(메릴 스트립)의 논픽션 책 <난초도둑>을 각색하라는 주문을 받는다. 소심하고 사색적인 찰리는 각색이 풀리지 않자 신경쇠약을 일으키는데, 찰리의 경박한 쌍둥이 동생 도날드(니콜라스 케이지 1인 2역)는 시나리오 강좌에서 배운 상업영화 공식에 맞춰 써낸 스릴러 각본이 비싼 돈에 팔리는 쾌거를 올린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찰리는 경멸해 온 시나리오 강좌를 청강하고 원작자가 숨긴 진실을 찾기 위해 올리안과 라로쉬의 뒤를 밟는다.
머리카락을 자르자. 머리칼이 많은 척 남들을 속이면 안 돼...
비참하잖아. 그냥 자신감을 갖자. 여자들도 그런 거 좋아하지.
남자도 매력이 필요해. 살아 있어서 죄송하다고 사과해야 할 거 같아.
호르몬 때문인가. 그럴지도 몰라.
호르몬 불균형하거나 뇌에 문제가 있어서 불안이 생기는 거지.
치료받아야 해. 그런데 못생긴 건 어떻게 하지.
그건 치료도 안 될 텐데...
<어댑테이션>은 <존 말코비치 되기>에 이어 스파이크 존즈와 찰리 카우프만이 다시 한번 손을 잡은 영화입니다. 수잔 올린의 소설 <난초도둑>을 각색한 작품으로, 찰리 카우프만은 이 작품을 통해 허구의 인물이자 자신과 똑같이 <존 말코비치 되기>로 명성을 얻은 시나리오 작가 '찰리 카우프만'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가 책 <난초도둑>의 각색 작업 중 고뇌에 빠져 상상과 일상이 혼합되는 내용을 다뤘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 내용이 모두 허구일까요?
찰리 카우프만이라는 각본가는 실재하고, <난초도둑>도 실재합니다. 게다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책의 원작자인 '수잔 올린', 난초 수집가 '존 라로쉬' 모두 실제 인물이죠. 그러나 영화 속 찰리 카우프만이 상상하고 쓴 것처럼 수잔과 존은 내연 관계였던 적이 없으며 카우프만의 쌍둥이 형제 도날드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입니다. 이렇듯 영화는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강박에 시달리는 찰리를 중심으로 진실과 허구를 넘나들며 창작의 고통 속에서 분열하는 시나리오 작가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문학 작품 원작의 영화를 떠올렸을 때 상상하기 어려운 방식의 독특한 접근이죠. 실제로 원작자 수잔 올린은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 정말 깜짝 놀랐다고 전하면서도 '삶과 집착'이라는 책의 주제에 충실함과 동시에 갈망, 실망과 같이 더욱 미묘한 부분들에 대한 통찰을 담은 것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해요.
영화 <어댑테이션>과 책 <난초도둑>에 등장하는 '유령 난초'는 정서경 작가가 쓴 한국 드라마 <작은 아씨들>에서도 등장합니다. 너무나 다른 성격의 작품들이지만 인간의 욕망과 개인의 파멸, 성공, 갈등을 주제로 했다는 점에서는 비슷할 지도 모르겠네요. 함께 감상하며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터널 선샤인(2005)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감독: 미셸 공드리
출연: 짐 캐리, 케이트 윈슬렛, 커스틴 던스트, 마크 러팔로 등
장르: 드라마, 멜로/로맨스, SF
러닝타임: 107분
조엘은 아픈 기억만을 지워준다는 라쿠나사를 찾아가 헤어진 연인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우기로 결심한다. 기억이 사라져 갈수록 조엘은 사랑이 시작되던 순간, 행복한 기억들, 가슴속에 각인된 추억들을 지우기 싫어지기만 하는데... 당신을 지우면 이 아픔도 사라질까요? 사랑은 그렇게 다시 기억된다.
제발 이 기억만큼은 남겨 주세요,
이것만큼은...
<이터널 선샤인>은 만드는 영화마다 환상적이고 독특한 영상미를 자랑하는 미셸 공드리와 찰리 카우프만이 협업한 두 번째 작품입니다. 미셸 공드리 감독은 뮤직비디오와 광고 연출로 먼저 주목을 받은 뒤 영화 <휴먼 네이처>로 영화감독 데뷔를 했는데요, <휴먼 네이처>가 찰리 카우프만과의 첫 번째 협업 프로젝트였으나 그리 좋은 평을 듣지 못했고, 두 번째로 함께한 작품인 <이터널 선샤인>이 두 사람 모두의 커리어에 큰 족적을 남기게 됩니다. 흥행과 비평 면에서 모두 성공을 거두었고, 그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각본상을 수상하는 등 공드리와 카우프만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됩니다.
제목인 '이터널 선샤인'은 영화에서 나오듯 알렉산더 포프의 시 'Eloisa to Abelard'의 한 구절인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무구한 마음의 영원한 햇빛)'에서 인용했다고 해요. 주연 배우로는 짐 캐리, 케이트 윈슬렛, 커스틴 던스트, 마크 러팔로 등이 출연했으며 전체적인 줄거리는 헤어진 뒤 서로의 기억을 삭제하지만 결국 또다시 사랑에 빠지고 마는 연인의 이야기입니다. 괴롭게 만드는 기억으로부터 도망치는 것, 망각하는 것은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요? 적어도 사랑에 관해서, 사랑했던 사람과의 추억에 대해서 찰리 카우프만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터널 선샤인>의 주인공 조엘은 연인이었던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지우던 중 결국 참지 못하고 제발 멈춰 달라고 애원하죠. 영화는 헤어진 연인을 완전히 잊고 싶기도 하고, 또 영원히 기억하고 싶기도 한, 연애가 끝난 뒤 복잡하게 꼬여버린 사람의 심리를 기괴하리만치 환상적인 영상미와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냅니다. 반복되는 연애, 사랑, 실패. 그럼에도 눈물 나게 아름다웠던 그때의 우리를 기억한다면 그 지긋지긋한 인생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되죠. <이터널 선샤인>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인생영화로 손꼽히며 개봉 이래 오랫동안 회자되는 로맨스 영화인 이유는 사랑을 경험해 본 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소재를 그 누구도 시도한 적 없었던 방식으로 아름답게 그려낸 찰리 카우프만의 글과 이를 뒷받침해 준 미셸 공드리의 뛰어난 연출력 덕분일 것입니다.
시네도키, 뉴욕(2008)
Synedoche, New York

감독: 찰리 카우프만
출연: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캐서린 키너, 새디 골드스타인, 미셸 윌리엄스 등
장르: 드라마, 코미디
러닝타임: 123분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사는 연극연출가 케이든. 교외에서 지역 극장을 운영하는 그의 삶은 황량해 보인다. 화가인 아내 아델은 자신의 경력을 쌓고자 어린 딸 올리브를 데리고 그를 떠나버린다. 묘하게 솔직해서 마음이 끌리는 극장직원 헤이즐과의 새로운 관계는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끝나고 만다. 그러던 어느 날, 인생의 무상함에 괴로워하던 그에게 거대한 연극무대를 올릴 일생의 기회가 찾아온다. 그는 뉴욕의 창고에서 실물 크기의 도시를 만들어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극으로 올려 잔인하리만큼 정직하고, 진실된 인생을 그려볼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연극 속의 삶과 케이든의 실제 삶의 경계가 뒤엉키며 그가 맺은 모든 관계들은 한계에 다다르게 되는데…. 케이든은 과연 이 위대한 예술작품을 완성할 수 있을까?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어요.
그리고 이들 중 아무도 엑스트라는 없어요.
그들 모두는 자기 나름의 이야기를, 삶을 살고 있어요.
그래서 그들 각자의 삶은 주목받아 마땅해요.
<시네도키, 뉴욕>은 그간 각본 작업만 하던 찰리 카우프만의 감독 데뷔작인데요, 제61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며 첫 선을 보였고 이후 토론토, 시카고, 오스틴, 런던, 시체스 등 전 세계 유수의 영화제들에 연이어 초청되며 평단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BBC 선정 21세기 가장 위대한 영화 20위에 랭크되었던 <시네도키, 뉴욕>은 찰리 카우프만의 영화들 중에서도 가장 난해하기로 손꼽히며, 그만큼 관객 평이 크게 갈리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강박에 사로잡혀 사는 연극 연출가 '케이든'의 연극 그 자체인 삶과, 또 삶 그 자체인 연극을 소재로 했으며 수십 년 동안 다양한 사건들을 거치며 늙어가다가 끝내 죽음에 이르는 주인공 역할은 2014년 약물 과다 복용으로 안타깝게 사망한 명배우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맡았습니다.
영화의 제목 중 일부인 '시네도키 Synedoche'는 사물의 한 부분으로써 그 사물 전체를 가리키거나, 그 반대로 전체로써 부분을 가리켜 비유하는 것을 뜻하는 '제유'라고 합니다. 찰리 카우프만의 이야기가 자주 그러하듯, <시네도키, 뉴욕>에서도 현실과 극의 경계는 수없이 여러 번 허물어지고 시공간 역시 제멋대로 왜곡됩니다. 상징과 은유로 가득한 영화이기 때문에 두 번, 세 번 볼수록 의미가 남달라 지는 작품이라고 많이들 이야기하는데요, 외로운 삶 속에서 끝없이 투쟁하는 주인공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가슴 한편이 아려오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아노말리사(2015)
Anomalisa

감독: 찰리 카우프만, 듀크 존슨
출연: 제니퍼 제이슨 리, 데이빗 듈리스, 톰 누난 등
장르: 애니메이션, 코미디, 판타지
러닝타임: 90분
남편이자 아빠 그리고 [고객을 어떻게 대할까]라는 저서로 존경받는 작가 '마이클 스톤'은 일상에 찌들어있다. 전문적인 고객서비스에 대한 연설을 위해 신시내티로 출장을 간 프레골리 호텔에서 마이클은 인생의 반려자가 될지도, 되지 않을지도 모를 제과회사 세일즈 담당자 '리사'를 만나면서 자포자기의 권태로운 삶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는데...
인간이란 무엇일까요?
아픔은 무엇일까요?
산다는 건 무엇일까요?
누구에게나 사랑할 사람이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아노말리사>는 찰리 카우프만이 2005년에 썼던 희곡을 원작으로 만든 스톱 모션 방식의 성인 애니메이션 영화인데요, 베니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상 후보에 오르는 등 평단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었습니다. 극 중에서 주인공 '마이클'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같은 사람이라고 인식하게 되는 병인 '프레골리 증후군'과 유사한 정신병을 앓고 있습니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가 똑같은 남자 목소리로 들리는 것입니다. 아내와 아들도 있고 커리어적으로도 훌륭한 삶을 살고 있지만 더없이 외로운 마이클은 출장을 간 곳에서 우연히 다른 사람들과 다른 목소리를 가진 여자 '리사'를 만나 순식간에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아노말리사>의 주인공은 찰리 카우프만의 손에서 탄생한 여러 캐릭터가 그러하듯 고독과 망상, 불안함에 빠져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끝까지 보고 나서의 감상이 관객마다 천차만별일 것으로 느껴지는 영화인데요, 찰리 카우프만의 다른 영화들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이 작품 역시 만족스럽게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매우 정교한 스톱모션 기술 또한 이 영화의 백미로,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만이 낼 수 있는 미묘한 분위기가 영화의 메시지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며 신선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2020)
I'm Thinking of Ending Things

감독: 찰리 카우프만
출연: 제시 플레먼스, 제시 버클리, 토니 콜렛, 데이빗 듈리스 등
장르: 드라마, 공포, 스릴러
러닝타임: 134분
우리는 언제 만난 걸까. 언제까지 만나게 될까. 새로 사귄 남자 친구와 여행을 떠나는 여자. 그의 부모님이 사는 외딴 농장에 가는 길.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흔들린다.
자신의 죽음이 필연적임을 아는 동물은 인간뿐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른 동물들은 현재에 산다.
인간은 그럴 수 없기에 희망을 발명한 거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는 찰리 카우프만이 2020년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한 스릴러 공포 영화입니다. 찰리 카우프만이 처음으로 호러 장르에 도전한 작품이기도 하며, 캐나다 작가 '이언 리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제시 플레먼스가 주인공 '제이크' 역을, 제시 버클리가 '제이크의 여자친구' 역을, 토니 콜렛과 데이비드 슐리스가 각각 '제이크의 부모님' 역을 맡아 열연을 선보였습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소 찝찝할 수 있는 우울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주인공들은 서로 아귀가 맞지 않는 대화를 나누고, 시간과 공간은 흐름을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알 수 없게 뒤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의 결말에 다다르면 여자 주인공이 줄곧 읊조렸던 "이제 그만 끝낼까 해"의 의미와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기이한 현상들의 전말이 밝혀집니다. 전개 방식 자체만으로도 영화적 성취가 큰 작품이며, 찰리 카우프만의 전매특허인 뒤틀린 인간 심리를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는 영화입니다. 제시 버클리와 제시 플레먼스, 그리고 정말 압도적인 토니 콜렛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고요.
이렇게 찰리 카우프만의 영화 여섯 편을 만나 봤는데요, 어떠셨나요?
이미 카우프만을 좋아하시는 분들께도, 처음 접해보시는 분들께도 좋은 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재미있는 영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즐겁고 평안한 주말 보내세요!
지금까지 씨네랩 에디터 YUMI였습니다.
우리 다음에 또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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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한국이 싫어서 Because I Hate Korea
감독 : 장건재
출연 : 고아성, 김우겸, 주종혁, 이상희, 오민애, 박승현, 김지영, 박성일, 김뜻돌, Morgan OEY, Trae TE WIKI
시놉시스 : 20대 후반의 ‘계나(고아성)’가 자신의 행복을 찾아서 어느 날 갑자기 직장과 가족, 남자친구를 뒤로하고 홀로 뉴질랜드로 떠나는 이야기
장강명 작가의 동명 소설 『한국이 싫어서』(2015년)를 원작으로 한 영화이자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인 <한국이 싫어서>는 ‘왜 한국을 떠났느냐’는 질문에 두 마디로 ‘한국이 싫어서’, 세 마디로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라고 답하며 이야기의 여정을 시작한다. 이후 세 마디로 요약한 ‘여기서는 못 살겠’는 이유를 의미 없이 일상을 반복하며 행복이 아닌 피로와 무력감만을 쌓아가는 계나의 한국 생활을 통해, 두 마디로 요약한 ‘한국이 싫어서’ 떠난 뉴질랜드의 (한국 생활 대비) 자유로운 생활을 교차로 보여주며 흔히 우리가 이야기하는 젊은 세대, MZ 세대의 어려운 현실을 소박하면서도 생생하게, 때론 치열하게 기록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에 나름의 답을 던진다. (혹은 직설하지 않고 답을 유보하기에 응한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독립영화의 열악한 환경(제작진 규모가 15명 내외 정도였다고 한다), 코로나19 이슈를 차치하더라도 작가로서 과거 한국에서 그리고 한국이 싫어서 떠난 뉴질랜드에서 계나가 느끼는 정서적 변화, 감각의 변이에 집중하며 작품의 주제가 되는 질문에 답을 유보하기 보다는 그래서 우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밀도 높은 고찰 혹은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적 현상에 대한 (원작과는 다른) 자신만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어쩌면 이 지점이 왜 이 작품이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이어야 하는지, 개막작으로서 갖는 의미에 대한 의구심을 갖는 이들에게 설득력 있는 반증으로 작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상영 일정 : 10-04 18:00 영화의전당 야외극장 / 10-05 20:00 CGV 센텀시티 3관 / 10-07 09: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3관
작성 : 민병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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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빛 말고 핏빛어린 디톡스 시청각자료!
이토록 끝까지 갈지 몰랐다. 생각 이상이다. 상영 중 옆에 앉은 중년 부부의 볼멘 소리가 나올정도록 불편한 이미지와 영상은 관객들의 눈과 귀를 괴롭힌다. 나이를 불문하고 노출된 주인공(들)의 몸을 보는 건 점점 힘들어져가고,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는 자리에서 일어날 힘조차 빼앗는다. 마지막까지 이 기조를 유지하는 감독의 뚝심은 핏빛 잔치를 벌이며 끝내 관객을 넉다운 시킨다. 어쩌면 <서브스턴스>는 왜곡된 미(美) 추구와 젊음을 쫓는 데 혈안이 된 사회적 풍토, 이를 조장하는 미디어의 횡포, 이 늪에 빠진 이들에게 전하는 공포의 디톡스 시청각자료와 같다.
별도 지기 마련이다. 오스카 상을 수상하고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입성할 정도 큰 인기를 얻은 엘리자베스(데미 무어)는 최고의 스타였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TV 에어로빅 쇼 진행자로 근근히 먹고 산다. 하지만 제작자 하비(데니스 퀘이드)는 그녀의 50세 생일을 축하(?)하듯 보란 듯이 해고를 전한다. 더 젊고 예쁜 진행자로 교체하려는 그의 속셈에 엘리자베스는 희생양이 되고, 업친데 덮친격으로 교통사고도 당한다. 실의에 빠진 그녀는 우연히 병원 남성 간호사로부터 의문의 USB를 받는다. 안에 담긴 건 한 번의 주사로 젊어지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신약 ‘서브스턴스’ 소개 내용. 거울에 비친 생기 없는 얼굴과 중력에 굴복하는 몸뚱이를 본 그녀는 고민 끝에 서브스턴스를 구매한다. 그리고 약물 주입후 자신의 몸에서 매력적인 20대 수(마가렛 퀄리)가 탄생한다. 예상대로 그녀는 하비의 관신을 받고, 엘리자베스가 진행하던 TV 쇼를 맡는다. 하지만 문제는 7일을 기준으로 둘 중 한 명은 잠들어야 한다. 이 균형을 잘 지킨다면 아무 일도 없었겠지만, 엘리자베스보다 더 나은 삶을 사는 수는 이 규칙을 어기고 만다.
<서브스턴스>는 바디 호러를 표방한 사회 풍자극이다. 그 중심에는 빛나는 순간을 영원히 지속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자리잡는다. 엘리자베스의 직업은 배우다. 스스로 빛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좋아하는 대중들이 있어야 빛나는 이 직업의 운명은 그를 행복하게 만들지만, 때로는 그를 옥죈다. 자신보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써야 하고, 그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다 보니 결국 남는 건 노화된 몸과 쪼그라든 자신감이다. 이 상황을 좀처럼 받아들일 수 없는 그녀는 과거 빛났던 순간을 다시 찾고 싶은 마음 뿐이다. 젊음을 그리워하고 되찾고 싶은 그녀를 이해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혐오에 빠지는 모습은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이는 ‘늙음이 곧 사회적 도태’라는 불안에 잠식된 현대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조금이라도 더 젊어져 사회의 가장자리에 남고 싶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현대인들처럼, 그녀 또한 돌이킬 수 없는 서브스턴스의 유혹에 빠진다.
‘기억하라, 당신은 하나다!’라는 말은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다. 이를 뒷받침 하듯 극 중 ‘서브스턴스’를 소개하는 영상에도 두 개의 노란자로 구성된 계란이 나온다. 엘리자베스와 수를 연상시키는 이 이미지는 완벽한 균형을 맞췄을 때 공존이 이뤄진다는 걸 의미한다. 하지만 이 균형은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둘은 규칙을 어기고 서로를 증오한다. 주사를 맞은 후 엘리자베스는 수를 탄생시키고, 젊음과 기회의 빛을 얻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 빛에 드리워진 그늘에서 7일을 보낸다. 이들의 간극은 점차 벌어지고, 서로를 증오하고, 결국 망가뜨린다. 결국 ‘당신은 하나’라는 명제를 잊은 채 자신의 삶을 더 영위하고자 하는 욕심으로 모든 일을 그르친다. 영원한 젊음을 원하며 이를 상징한 와인을 탐닉한 클레오파트라, 젊은 하녀의 피로 젊음을 유지했던 피의 백작 부인 엘리자베스 바토리를 따라하듯 엘리자베스 또한 욕망이란 늪에서 허우적 된다.
<서브스턴스>는 자신의 욕망에 자신이 결러든 여성의 참혹한 최후만을 그리지는 않는다. 올해 칸국제영화제 각본상을 받을 정도로 이야기의 힘을 가진 영화는 프랑스 여성 감독인 코랄리 파르쟈가 연출과 각본을 담당했다. 감독은 덫에 빠진 건 여성 자신이지만 더 아름답고 완벽한 나를 원한건 대중, 특히 젊음을 갈구하는 남성들의 시선이라 말한다. 그리고 이를 조장하는 미디어의 횡포도 꼬집는다.
하비를 비롯해 미디어 수뇌부와 자본가들이 모두 남성인 건 우연히 아니다. 이들의 시선에 응당 응해야 자신이 빛난다는 걸 알고 있는 엘리자베스는 이 미친 선택을 하며 또 한 번 그들이 마련한 무대에 오른다. 후반부로 갈수록 껍데기는 바뀌었어도 자신의 몸둥아리에서 나온 분신(들)이기에 그 욕망은 변함없다. 하지만 모습이 바뀐 후, 대중들은 사랑이 아닌 혐오의 시선을 보내고, 이를 확인한 그녀는 별빛처럼 빛나는 순간은 핏빛으로 바꿔버린다. 용솟음치는 핏빛은 화면 전체를 가득 메우는데,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엘리자베스를 이같은 괴물로 만들 게 한 건 그녀의 욕망만이 아니라 그렇게 만든 너희(대중)들의 시선도 한 몫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 장면에서 핏물의 방향이 어디로 향해있는지를 유심히 보면 감독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영화는 충격적이고 불쾌하다. 바디 호러 장르를 좋아하는 분들이 아니라면 상영관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이 계속 자신을 괴롭혔을 것이다. 그럼에도 두 다리를 묶고 엉덩이를 들썩이지 못하게 하는 건 데미 무어에 기인한다.
이는 단순히 혼신을 다한 그녀의 광기 연기 때문은 아니다. 엘리자베스는 곧 데미 무어처럼 보인다. <사랑과 영혼> 등 1990년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여배우였지만, 세월을 막을 수 없었던 그녀는 전신 성형을 시도한 바 있다. 거액을 들여 젊음을 유지하려 했던 과거는 물론, 연기와 작품 이야기 보단 온갖 가십 기사로 만났던 그녀의 삶은 엘리자베스와 닮아 있다. <서브스턴스>가 미키 루크의 삶을 투영한 <더 레슬러>의 여성판으로 불리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데미 무어의 삶을 간접 체험하는 듯한 그녀의 연기는 그동안 말하지 못했고, 말할 기회 조차 없었던 울분을 마구 마구 토해내듯 분기점이 될만한 연기력을 뿜어낸다. 골근글로브에 이어 이번 오스카의 유력 여우주연상 후보로 점쳐지는 건 당연한 결과다.
‘개미친 영화’. <서브스턴스> 런칭 포스터에 담긴 이 강렬한 문구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 이유는 단순히 가학적이고, 파괴적이며, 과감한 노출 등 수위가 높은 충격적 영화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여성으로서 살아가기 힘든 사회상을 정면으로 들이 받는 행동에 있다. 그리고 끝까지 간다. 우리의 마음 속 갖가지 욕망 덩어리를 터뜨리고, 잘못된 시선을 마취 없이 교정하는 그 고통은 생각보다 오래 간다. 이 통증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딱 하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카메라가 아닌 자신에게 키스 퍼포먼스를 날리면 된다. 애써 완성한 화장을 마구 마구 지우지 말고.사진제공: 찬란
평점: 4.0 / 5.0
한줄평: 데미 무어의 개미친 연기에 설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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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의 로망과 현실의 낭만을 잇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레이싱 게임 ‘그란 투리스모’의 덕후 ‘잔 마든보로’(아치 매덱)에게 꿈만 같은 기회가 찾아온다. 게이머를 레이싱 선수로 탈바꿈시키는 소니와 닛산의 야심 찬 프로젝트, ‘그란 투리스모 콘테스트’에 참가할 자격이 주어진 것. 잔은 혹독한 훈련을 버텨 내고, 치열한 경쟁을 이겨낸다. 아버지의 반대 때문에 이루지 못한 꿈에 도전하기 위해.
'잭'(데이비드 하버)의 열성적인 지도와 '대니'(올랜도 블룸)의 아낌없는 지원 덕분에 프로 레이싱 선수 자격을 얻어낸 잔. 그러나 그에게는 또 다른 역경이 닥쳐온다. 상대팀 선수들은 잔을 게이머 출신이라며 비하하고, 트랙 위에서 위협적으로 그를 밀어붙인다. 이에 더해 게임과 달리 리셋 버튼 없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위압감도 잔을 조여오기 시작한다.
우려를 보기 좋게 뒤엎다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같은 예외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게임 원작 영화는 걱정이 많다. 그간 여러 이유로 실패했기 때문이다. <워크래프트: 전쟁의 시작>은 투자자와 제작진의 갈등 때문에 각본이 산으로 갔다. <어쌔신 크리드>는 배우만 화려했고, <던전 앤 드래곤>(2023)은 평단 반응만 좋았다.
비디오 게임 '그란 투리스모' 시리즈를 영화화한 <그란 투리스모>도 우려가 컸다. 원작 게임 시리즈의 인기는 하향세를 그렸다. 제작사 플레이스테이션 프로덕션도 신뢰를 주지 못했다. 전작이자 첫 제작 영화인 <언차티드>가 게임과 무관한 오리지널 설정으로 점철돼 비판을 들었기 때문. 감독도 불안했다. <디스트릭트 9>로 데뷔한 후 <엘리시움>, <채피> 등으로 추락을 거듭한 닐 블롬캠프가 메가폰을 잡았다.
하지만 <그란 투리스모>는 모든 우려를 보기 좋게 뒤엎었다. 그 중심에는 색다른 접근법이 있다. 기존 작품들은 대게 원작의 영화화를 시도했다. 그러다 보니 현실과 게임 사이에서 자연히 발생하는 이질감 때문에 외면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란 투리스모>는 반대다. 게임 자체를 영화로 옮기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현실에서는 말이 안 되는, 게임에서나 가능할 실화를 스크린 위에 펼쳐 놓았다.
게임이 아닌 게임의 사연에 주목하다
사실 <그란 투리스모>의 줄거리는 엉망이다. 소설에서나 가능한, 누군가의 헛된 희망을 포장한 이야기 같다. '너도 호그와트에 입학할 수 있어!' 수준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실화다. GT 아카데미 졸업생 출신으로 2011년 GT 아카데미 유럽 챔피언이 된 잔 마든보로가 실제 주인공이다. GT 아카데미는 소니와 닛산이 합작한 프로젝트로, '그란 투리스모' 게이머를 진짜 레이싱 드라이버로 키워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란 투리스모>는 다른 게임 영화와 차별화된다. 게임만의 로망과 낭만을 현실 세계에 접합하는 데 성공한다. 사람들이 게임에 열광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대리만족이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꿈과 환상을 게임 속 세계에서 맛보는 재미다. 그런데 이 쾌감은 흔히 허무맹랑하고, 바람직하지 않다는 편견에 갇히는 경우가 많다.
<그란 투리스모>는 이 편견을 전복한다. 게임 자체의 매력이 아니라, 게임을 통해 현실에서 편견과 불가능에 도전하고 성공한 이야기에 집중한다. 덕분에 <그란 투리스모>는 게임의 낭만을 극대화할 뿐만 아니라, 게임을 통해 느끼는 쾌감을 현실 세계의 카타르시스로 승화하기까지 한다. 더 나아가 게임을 바라보는 일부 부정적인 시선까지 깨부순다. 현실의 무게감과 게임의 낭만이 조화를 이룬 셈이다.
특히 영화 구성이 인상적이다. 영화는 오프닝에서 원작 게임을 소개할 뿐, 어떤 정보도 주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그란 투리스모>는 그저 게임 기반 판타지나 소년 만화 같다. 정보를 미리 접하지 않으면 이 영화가 실화라는 사실을 알 수 없다. 대신 잔 마든보로가 게이머 출신 드라이버이고, 직접 영화 스턴트를 맡았다는 사실을 마지막 순간에야 공개한다. 그 결과 영화는 강렬한 임팩트를 남기며 쾌감과 감동이 극대화된 채로 끝난다.
신세대 레이싱 영화의 등장
게임의 매력을 현실 세계에 심으려는 노력은 레이싱 연출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란 투리스모>는 어설프게 게임을 재해석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원작 게임만의 효과를 레이싱 장면에 고스란히 삽입한다. 게임 속 시뮬레이션과 현장감, 게임 플레이어와 프로 드라이버의 간극을 없애 버린다. 그 결과 <그란 투리스모>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신선한 레이싱 영화로 태어난다.
일례로 차의 경로가 보이거나 플레이어의 현재 순위가 표시되는 식의 게임 속 효과를 현실에 입힌다. 현실 장면에 스톱 모션이나 슬로 모션을 걸어서 게임 세계로 이동시키기도 한다. 경기 도중 레이싱 카가 해체되고 잔이 게임 시뮬레이터 앞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경기 후 자축하는 장면도 게임 속 세리머니와 현실 세리머니를 교차해서 보여준다. 현란한 드론 촬영도 게임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거나 과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닐 블롬캠프 본래 연출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데뷔작인 <디스트릭트 9>부터 비디오 게임을 하는 듯한 카메라 워크와 연출로 유명했다. 또 필모그래피가 SF 영화로 가득한 데서 알 수 있듯이, SF 느낌을 주는 미술 프로덕션에 능숙하기도 하다. 블롬캠프는 평범한 레이싱이 아닌, 게임과 접목된 레이싱 경기를 보여주는 데 최적화된 연출자인 셈이다.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다. <포드 V 페라리> 같은 레이싱 영화와 필연적으로 비교될 운명이다. 이전까지의 레이싱 영화는 사람 가슴을 들뜨게 하는 엔진 소리에 주목했다. 운전자나 차의 측면에서 질주하는 차체에 집중하는 연출이 돋보이기도 했다. 레이싱 요소가 줄어도 <분노의 질주> 시리즈도 궤를 같이한 대목이었다. <그란 투리스모>에서는 이러한 아날로그적 감성을 찾아볼 수 없다.
확실한 목적을 위해 희생된 스토리의 개성
이처럼 <그란 투리스모>는 게임 원작 영화로서도, 레이싱 영화로서도 나름의 새롭고 신선한 접근법이 돋보인다. 물론 그 대가로 희생한 대목이 있다. 시나리오의 개성이 현저히 부족하다. 관객에게 최소한의 심리적 안정감을 주기 위해 관습적인 플롯을 답습한다. 완성도는 준수하다. 초중반부에 뿌려진 여러 복선은 다 회수된다. 기대할 법한 요소도 빠짐없이 담았다. 풀어가는 방식이 편의적이고, 왕도적일 따름이다.
실제로 <그란 투리스모>의 시나리오는 소년 만화 클리셰로 가득하다. 재능은 있지만 환경이 받쳐주지 않는 주인공에게 우연한 기회가 주어진다. 그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 기회를 잡는다. 레이스에서 꼴찌를 기록하거나 완주를 못하는 시련을 겪지만 끝내 이겨낸다. 멘토의 도움을 받아 한계를 극복하고, 한때 경쟁자였던 친구들과 힘을 합쳐 또 다른 라이벌을 꺾고, 승리자가 된다. 좋아하던 여자친구와도 연인이 된다.
그래도 도식적인 전개 속에서 나름 차별화를 시도한 흔적이 엿보이기는 한다. 여러 사연을 상당히 빠른 속도로 처리한 대목이 대표적이다. 가족사는 아버지와의 관계로 압축했다. 여자친구와의 로맨스도 으레 있어야 하니 삽입한 것에 가깝다. GT 아카데미에서 다른 후보들과 겪는 갈등도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그 덕분에 오히려 최근 트렌드에 부합한다. 개인의 영역에만 집중하면서 자연스럽게 관객을 끌어들인다. 예를 들어 라이벌과의 경쟁의식을 억지스럽게 부각하지 않는다. 대신 드라이버 라이선스를 따고, 포디움에 들기 위해 개인의 한계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중심에 둔다. 그 결과 잭과 잔의 멘토-멘티 관계는 의외의 울림을 주고, 게임의 로망과 현실의 낭만을 잇는 분위기도 한껏 살아난다.
완성도 대신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다
그래서일까? <그란 투리스모>는 마치 <트랜스포머> 1편 같은 매력이 있다. 차와 소년이라는 매력은 간직한 채로 로봇 대신 콘솔 게임에 주목한 것처럼 보인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 같기도 하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는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시리즈에 비해 완성도가 부족했다. 대신 팬들의 가슴을 감성적으로 휘어잡았다.
즉, <그란 투리스모>는 완성도나 작품성보다 더 중요한 목표를 이룬 영화일지도 모른다. '재밌다' '다시 보고 싶다' '가슴이 뛴다'는 느낌을 주면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으니. 닐 블롬캠프 입장에서도 멋지게 반등에 성공한 작품처럼 보인다. 데뷔작인 <디스트릭트 9>만큼의 충격이나 임팩트는 없어도 영화가 끝날 때 잔과 함께 레이싱을 한 것 같은 아드레날린을 뿜어내게 만들었으므로.
작은 흠을 꼽자면, 묘한 이질감이 있다. <더 울버린>이나 <불릿 트레인> 같은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듯하다. 일본 기업 광고로 보일 만큼 일본풍이 두드러지기 때문. 물론 소니픽쳐스가 배급사이고, GT 아카데미 자체가 소니와 닛산의 프로젝트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한국인의 관점에서는 부자연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Acceptable 무난함
더할 나위 없이 본분에 충실한 게임, 레이싱,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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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뻔하고 터져도 깊은 맛이 나는 만둣국처럼!
가족의 해체이자 가족의 탄생이다. <대가족>은 제목 그대로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혈연으로 묶인 관계이지만, 남보다 못한 사이가 가족이라는 말이 있듯 양우석 감독이 가져온 이 이야기는 가족 해체 시대에 던지는 그만의 답인 듯하다. 2000년대를 배경을 했듯이 영화 스타일은 올드하고, 이야기는 관객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지만, 오히려 정겹고 따뜻함이 베어 있다. 물론, 너무 많은 재료를 담아 터져버린 만두처럼 과하거나 수습이 어려운 부분도 더러 보인다.
만두 맛집 평만옥 사장 함무옥(김윤석)은 열심히 일한 덕에 돈도 많이 벌고 건물주까지 되었지만, 언제나 근심이 가득하다. 이유는 단 하나. 대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문석(이승기)이 출가해 스님이 된 이후, 무옥은 제사 때마다 조상들을 볼 낯짝이 없다. 하지만 세상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느 날 그에게 문석을 찾는 한 어린 남매가 찾아온다. 문석이 자신의 아빠라 알고 이곳을 찾아온 남매의 이야기에 무옥은 평생 없을 줄 알았던 손주가 생겨 뛸 듯이 기뻐한다. 반대로 헐레벌떡 집으로 온 문석은 잠시 잊고 있었던 과거의 일을 떠올리며, 업보라 말한다.
“가족 화두를 꺼내든 건 지난 세월과 비교했을 때 그때보다 풍족해졌는데 왜 가족 만들기는 더 힘들어졌느냐는 것이었다. 나름 생각한 결과의 답은 ‘욕망’이었다”
인터뷰를 통해 영화를 만들 게 된 계기를 말한 양우석 감독의 말처럼, 휴먼 가족 드라마처럼 보이는 <대가족>의 주재료는 바로 가족, 즉 자식으로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려는 부모 세대의 그릇된 욕망이다. 무옥이 그렇게 대를 잇고 싶어하 는 건 문석의 바람이 아닌 본인 자신의 욕심에서 비롯된다. 감독은 과거 한국전쟁을 관통하며 타향에서 홀로 살아온 세월, 하루라도 쉬지 않고 일해야 가족을 먹여 살린다는 책임감, 부모님은 물론, 여동생, 그리고 조상들을 챙겨야 한다는 K 장남 콤플렉스를 무옥에게 입힌다. 이로 인해 가족 관계가 소원해지고, 특히 아들과의 관계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상은 했겠지만 문석이 출가한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다.
이런 고지식한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려준 손자들이 오면서 점점 변한다.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은 기본이고, 아이들이 하자는데로 모든 걸 해주려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영락없는 손자 바보처럼 보인다. 마치 스크루지 영감이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녀온 후 개과천선한 것처럼, 무옥 또한 그렇게 변한다. 이 과정을 겪은 그는 아들에게 소홀히 했던 자신을 책망하고 진실한 화해도 이룬다.
문석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의대 재학 시절 불임부부를 위해 타의로 자신의 정자를 기증했다. 500번 넘게 기증한 결과, 생물학적 아버지로 400여 명의 아이들이 태어났다. 자신을 찾아온 남매와의 일화를 통해 문석은 자신의 과거를 되짚는 것은 물론, 비로소 부모의 입장이 되어본다. 그리고 그 비통한 슬픔과 힘겨운 인생을 살아온 아비를 그때서야 이해한다.
이처럼 <대가족>은 무옥과 문석을 통해 세대 간의 갈등과 화합을 보여준다. 비로소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각자의 입장이 되어보니 깨닫게 되는 이 부자의 이야기는 진부하지만 가족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부분이다. 감독은 다소 억지스러운 설정임 있음에도 이를 뚝심 있게 밀고 나간다.
여기에 또 하나의 재료를 첨가하는 건 가족의 의미다. 무조건 혈연으로 이어져야 가족이라는 건 옛말. 21세기를 알리는 2000년이란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면서 혈연이 아닌 정으로 이뤄진 이들도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감독은 무옥을 찾아온 남매, 평만옥에서 무옥을 항상 보살펴주는 방여사(김성령), 그리고 후반부 등장하는 수많은 가족을 통해 이를 증명한다.
이처럼 영화는 전반부에는 코믹한 설정에 따른 무해한 웃음을, 후반부에는 가족의 의미를 곱씹는 이야기에 집중한다. 문제는 다루려는 이야기와 인물들이 너무 많고, 이질적인 것들이 많음에도 이를 한꺼번에 담으려다 넘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흐름이 자주 끊기는 전개 방식과 편집에서 단점이 드러나는데, 이는 마치 좋은 재료를 너무 많이 넣어 터진 만두를 연상시킨다. 세 나라의 정상이 한데 모여 각각의 정치적 의견 대립을 그린 <강철비2: 정상회담>에서도 드러났던 양우석 감독의 단점이 이번에도 노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문현답 스타일의 불교적 가르침도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배우들의 연기는 영화의 맛을 살린다. 중심에는 김윤석이 있다. 진짜 만둣국집 사장처럼 보이는 그의 모습은 물론, 남매를 본 순간 그동안 고수했던 걸 본인 스스로 무너뜨리며 기분 좋은 웃음을 전한다. 방여사 역의 김성령 또한 그와 티키타카를 맞추며 코믹함은 물론, 중년의 로맨스도 펼친다. 여기에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되며 업보라 말하는 이승기와 극 중 과거 연인 사이였던 강한나, 그리고 두 팔을 다치면서도 이승기를 보좌하는 박수영의 맛깔난 양념 연기는 빛을 발한다.
“자식에게 부모는 우주이고, 부모에게 자식은 무능한 신이다”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상대를 여기는 시선은 아래가 아닌 위로 향해 있다. 우러러보는 마음, 곁에 있다는 안도감, 그리고 고마움. 이 작품이 연말 시즌에 잘 어울리는 건 너무나 흔하지만, 그래서 더 소중함을 알지 못한 의미를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뻔하고 터져도 깊은 맛이 나는 만둣국과 같은 <대가족>의 온기를 많은 이들과 나눠 보기 바란다.사진제공: 롯데엔터테인먼트
평점: 3.0 / 5.0
한줄평: 속 터져도 맛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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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가 로리를 사랑할 수 없었던 이유
작은아씨들(2019), 조가 로리를 사랑할 수 없었던 이유
루이자 메이 올컷의 소설,「작은 아씨들」은 일곱 번이나 영화화가 되었을 정도로 유명한 소설이다. 그 중 가장 최근에 나온 2019년 「작은아씨들」의 네 자매들은 현대시대에 맞게 더욱 입체적인 캐릭터로 그려지고 있다. 동시에 로맨스적인 부분들이 눈에 띄는 부분들이 많았다. 특히나 로리가 조에게 고백하는 장면은 여러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리라 생각된다. 조가 로리를 거절한 것에 대해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조는 로리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조는 원래 결혼하지 않았다. 하지만 독자들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결혼을 하는 결말로 끝맺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상대는 로리가 아니었다. 젊고, 잘생기고, 돈 많은 로리와 정반대인 프리드리히를 선택한 것은 차선책이고 조가 얼마나 자신의 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로리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이유는 조가 사랑보다는 꿈을 중요시여겼고, 끊임없는 자신의 성장과 발전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사실 로리와 조는 모두 고집이 세고 자유를 추구하며 감정적이라는 면에서 조와 비슷한 면이 많으며 가장 친한 친구로 지낼만큼 잘 통하는 부분도 많다. 하지만 로리의 집안 부잣집이며, 로리의 할아버지는 아들과 딸을 모두 잃어 이제는 손자, 즉 로리 하나뿐이다. 만약 조가 로리의 고백을 받아들였다면 그 시대에 조가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며 자신이 하고 싶던 꿈을 온전히 펼칠 수 없었을 것이며 이미 재산이 쌓여있는 집안에서 굳이 스스로 돈을 벌 필요조차 없어진다. 또한 로리는 할아버지가 시키는 일, 조가 시키는 일만 하는 수동적인 사람이다. 가문의 보호 아래에서 자란 로리는 자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는 인물이 되지 못한다.
반면에 프리드리히는 로리와 완전히 정반대의 인물이다. 프리드리히는 나이가 많았고 가난했으며 심지어 조의 글이 별로라고 말했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조가 프리드리히를 사랑한 것은 자신이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사람이었다. 프리드리히는 조에게 독일어를 가르쳐 주다 한계에 다다랐을 때도 끝까지 조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조의 글에 대한 평가로 인해 화가 난 조에게도 먼저 다가갔다. 프리드리히는 심지어 자신의 옷을 스스로 기워 입는 사람이었다. 조의 인생에 그런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내 몫은 내가 들게요, 프리드리히. 그리고 생계를 꾸리는 것도 도울게요. 그렇게 하기로 해요. 안 그럼 나 절대 안 갈 테니까.” 영화에서 떠나는 프리드리히를 잡고 그의 집을 나누어 들며 하는 말이다. 자기 몫은 자기가 들겠다는 조의 말은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프리드리히와 조는 동등한 위치에서 부족한 점을 보완해나가며 서로의 꿈을 이뤄나가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상대가 된다는 것이다.
위에서 조가 왜 로리를 사랑할 수 없었는지에 대해서 길게 설명했지만 한 마디로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여성은 꿈과 사랑을 동시에 이루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도 그러한 여성의 처지는 나아졌다고 할 수 없다. 아직도 여성들은 꿈과 사랑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를 선택하고 노력하는 우리 사회의 ‘조’들에게 응원을 보내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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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을 말한다는 것, 진실을 믿는다는 것
얼 모리스의 다큐멘터리 영화 ‘가늘고 푸른 선(The Thin Blue Line)’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불안이었다. 진실이란 언제나 명백한 것일 줄 알았다. 어딘가에는 분명 확실한 답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믿음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실제 범죄 사건을 다루면서도, 영화는 명확한 사실보다 누가 무엇을 말하느냐에 따라 진실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1976년 텍사스에서 벌어진 경찰관 살인 사건, 랜들 아담스라는 청년이 범인으로 지목된다. 그가 범인이라는 결론은, 경찰의 조사와 증인의 증언, 그리고 법정의 판결이라는 그럴듯한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그 결정들이 얼마나 허술한 기억과 편향된 시선 위에서 이루어졌는지 낱낱이 파헤친다. 감독은 수많은 인터뷰와 재판 기록을 차분히 들추며, 표면 너머에 숨은 조각들을 하나씩 꺼내어 놓는다. 관객은 그 잔해 속에서 사건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를 스스로 되짚어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실을 재구성하는 방법 자체를 이야기한다.
특히 인상 깊었던 장치는 재연 장면의 반복이다. 같은 사건을 각기 다른 인물의 증언을 따라 반복해서 재연함으로써, 영화는 하나의 고정된 진실이 아니라 끊임없이 달라지는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총이 발사된 순간, 자동차의 위치, 인물의 움직임까지도 매번 조금씩 달라진다. 그 차이들은 절대 사소하지 않다. 그것은 진실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다가서게 만드는 미세한 흔들림이자,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들이 얼마나 쉽게 조작되고 조형되는가를 증명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이 반복이 혼란스럽게 느껴졌지만, 곧 그것이야말로 영화가 던지는 가장 강렬한 질문임을 깨닫게 된다. 재연은 진실을 왜곡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영화 속에서는 오히려 진실을 구성하고 또 구성하면서, ‘우리가 믿는 진실은 누구의 시선을 통해 만들어진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영화는 이 질문을 통해, 진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진가는 잘못된 판결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더 나아가 법정에서 다루어지는 사실, 경찰 수사에서 제시되는 정황, 그리고 증인들의 증언 모두가 인간의 해석과 선택에 따라 뒤틀릴 수 있는 주관적 진실임을 드러낸다. 즉, 진실은 언제나 명확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감정 속에서, 혹은 의도 속에서 형태를 달리하며 조용히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진실은 때때로 감추어지고, 심지어 파괴되기도 한다. 그 감각은 영화 ‘추락의 해부’를 떠올리게 했다. 이 작품 또한 한 남성의 추락사를 둘러싼 재판 과정을 따라가며, 진실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때로는 부재하는가를 예리하게 보여준다. ‘가늘고 푸른 선’이 수많은 오류 끝에 결국 현실을 바로잡는 데까지 나아갔다면, ‘추락의 해부’는 끝내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음으로써 진실의 불확실성을 더욱 부각한다. 그 안에서 진실은 점점 모호해지고, 관계의 균열과 침묵의 의미만이 선명해진다. 두 영화는 서로 다른 결말을 향해 달려가지만, 공통으로 법정이라는 공간을 통해 진실의 허약함과 인간적 균열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닿아 있다.
감상 내내 마음 한편에는 묵직한 불편함이 남았다. 그 불안은 단지 영화 속 인물의 억울한 사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지금껏 믿어온 세계의 규칙들이, 사실은 허술한 기억과 틈 이야기들로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진실은 과연 존재하는가? 우리는 그것을 온전히 포착할 수 있는가? ‘가늘고 푸른 선’은 완전한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질문을 피하지 않고 끝까지 정면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진실을 향한 치열한 탐색이자, 우리가 믿어온 사실들에 대한 조용한 반박이 된다. 진실은 흔히 단단하고 분명한 것처럼 이야기되지만, 이 영화는 그 진실이 얼마나 연약하고 쉽게 바뀔 수 있는지를 집요하게 보여준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들이 과연 얼마나 믿을 만한 것인가? 영화는 그 질문을 마지막까지 놓지 않는다. 그리고 그 질문이 남긴 여운은, 현실을 조금 더 낯설게, 조금 더 깊이 바라보게 만든다.
사진 출처 : MUB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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