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3-11-13 11:54:57
11월 둘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비교적 낮은 스코어로 1위에 올라선 <더 마블스> 최근 몇 년간 지지부진한 흥행 성적에 기를 못 피고 있는데요. 젊은 감독과 뉴페이스 배우들의 활약을 기대했지만 아쉬운 수치입니다.
과연 마블은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국내 박스오피스]
마블 스튜디오 신작 <더 마블스>가 개봉 이후 첫 주말을 맞아 30만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모으며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했습니다. 영화는 지난 8일 개봉 이후 5일째 1위를 달리며 누적 관객 수
44만6천여명을 기록 중인데요.주말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긴 했으나 마블 영화로서는 실패라고 할 수
있는 수치로 현재 추세라면 100만 관객을 넘기지 못할 수도 있다고 보고있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
<더 마블스>는 10~12일 4700만 달러를 벌어들였습니다. 마블이 지난 15년 간 내놓은 영화 33편 중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는 <더 마블스> 이전엔 2008년에 나온 <인크레더블 헐크>가 가진 5540만 달러가 최저였지만 올해 나온 마블 영화 중 흥행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는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 가
개봉 첫 주말 성적도 1억600만 달러인점을 생각하면 상당히 낮은 수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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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매기> - '갈매기를 추락시킨 사랑이란 총성'
갈매기 (The Seagull)
개봉일 : 2018.12.13 (한국 기준)
감독 : 마이클 메이어
출연 : 시얼샤 로넌, 아네트 베닝, 빌리 하울, 코리스톨, 엘리자베스 모스, 메어 위닝햄
'갈매기를 추락시킨 사랑이란 총성'
매끈한 흰 털을 가진 갈매기가 푸른 하늘을 날고 있다. 사랑스러운 빛깔을 뽐내며 아주 자유롭게. 탕- 총성이 한발 울린다. 한 남자가 갈매기를 향해 총을 쏜다. 당장 굶어죽을 위기에 처했다거나 원수를 갚기 위한 총성 따위가 아니었다. 그냥. 화가 나서. 헤집고 싶어서. 갈매기가 너무도 사랑스러워 소유하고 싶어서. 그런 이유에서였다. 자유롭게 하늘을 누비던 갈매기는 그렇게 바닥으로 나가떨어진다.
안톤 체호프의 4대 희곡 중 하나인 <갈매기>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 <갈매기>. 원작은 아직 접해보지 않았지만 원작은 꽤나 다크한 분위기라고 하기에 ‘혹시 멘탈 와장창 스타일인가..?’싶어 걱정을 잔뜩 집어먹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는데, 생각만큼 많이 다크하고 깊숙한 영화는 아니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애정에 대한 갈구, 질투와 자기혐오가 적절히 뒤섞인 이 이야기는 꽤나 직선적인 플룻을 갖추고 있다.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주저하지 않고, 그에 얽힌 대가는 직통으로 그들을 관통한다. 연기력을 갖춘 중년의 여배우와 연기는 엉성하지만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소녀. 명성이 자자한 작가지만 강박을 갖고 있는 남자와 아직 인정받지 못한 소년. 그리고 사랑하지 않는 결혼생활을 지속하고 있는 중년의 여성과 외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그녀의 딸. 그 어디도 온전한 구석이 없는 애정의 방향은 얽히고설켜 새로운 고통으로 다가온다.
“모든 생명은 애절한 순환을 마치고 사라져버렸네.”
콘스탄틴이 써 내려간 희곡의 한 구절이다. 애절하게 돌아가던 애정의 순환이 멈춘 곳엔 무엇이 남아있을까. 모두 사라졌을까, 추락했을까, 그대로 남아있을까.
갈매기 시놉시스
달빛이 내려앉은 아름다운 호숫가, 무대 뒤에서 첫 공연을 준비하는 ‘니나’(시얼샤 로넌)와 ‘콘스탄틴’(빌리 하울) ‘이리나’(아네트 베닝)처럼 유명한 배우가 되길 원하는 ‘니나’는 촉망받는 작가 ‘보리스’(코리 스톨)의 등장에 설레고, ‘콘스탄틴’은 그런 그녀를 보며 애태우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네 희곡엔 살아있는 인물이 없잖아.”
한적한 시골집에 살며 작가의 꿈을 꾸고 있는 소년 콘스탄틴, 그리고 콘스탄틴이 애정 해 마지않는 사랑스러운 소녀 니나. 콘스탄틴은 희곡을 쓰고, 니나는 희곡의 주인공이 되어 연기를 펼친다. 습기를 머금은 나무들과 질척이는 진흙이 깔려있는 숲에서 콘스탄틴의 희곡이 처음으로 막을 올린다. 하지만 중년 배우인 그의 어머니 이리나는 아들의 연극에 틈틈이 딴죽을 건다. 어머니의 발언에 마음이 상한 콘스탄틴은 바로 공연을 마무리 짓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 앞에 앉아있는 성공한 작가 보리스의 존재도 버거운데, 그 옆에 앉아 내 희곡의 문제점을 짚어대는 어머니의 말은 콘스탄틴의 자존감을 하락시킨다. 마흔도 안된 젊은 나이에 성공한 쉬이 말하는 ‘재능 있는 작가’와 시골에 박혀 흥미롭지 않은 희곡을 만들어내는 작가 지망생인 자신. 게다가 콘스탄틴이 사랑하는 소녀 니나는 보리스의 등장에 설렘을 느끼고 있으니.. 콘스탄틴의 감정은 바닥 저 밑으로 가라앉는다.
보리스는 이리나의 젊은 연인이다. 사실 이 둘의 관계는 완전한 연인으로 표현하기엔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 관계를 유지하는 것 같을 때도 있고, 가벼운 연인처럼 느껴질 때도 있기 때문이다. 이 엉성한 연인 사이에 새로이 등장한 ‘사랑스러운 소녀’는 보리스의 마음을 흔들기 시작한다.
자기 관리에 철저한 이리나는 자존감이 꽤 높은 인물이다. 이 정도면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생각과 배우로서의 자부심으로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녀는 여전히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갈구하고 있다. 하지만 세월 앞에 장사가 있겠는가. 내 나이의 절반도 되지 않은 어린 소녀가 뿜어내는 사랑스러움은 자기관리로 가질 수 없는 특별한 것이었다. 이리나는 보리스와 니나 사이의 분위기가 묘하게 변해가는 걸 눈치채고 니나에게 질투심을 느낀다.
그녀는 20살 중반의 나이를 가진 마샤를 옆에 세워놓고 누가 더 젊어 보이냐고 질문하기도 하고, 노래를 들려달라는 청을 거절하다가도 니나에게 관심이 쏠리자 바로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니나를 의식해 더 화려한 옷을 찾아 입고 거울 앞에 선 그녀의 표정이 미묘하다. 막말로 다 큰 어른이 어린 소녀를 질투해서 뭐 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어린 소녀가 나의 사랑을 뺏어가려고 한다면 얘기가 좀 다르다.
질투와 분노의 감정은 갈수록 커다랗게 자라 파괴력을 갖게 된다. 콘스탄틴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멀리 날아가고 있는 갈매기에게 총을 발사한다. 힘없이 바닥에 툭- 떨어진 갈매기를 손으로 휘감아 올린 콘스탄틴은 무슨 의미냐고 묻는 니나의 앞에 말없이 갈매기를 던져놓는다. 하지만 니나는 콘스탄틴의 행동을 계속해서 궁금해하기보단 바로 앞에 놓인 멋진 작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선택한다. 꽃무늬 치마를 입은 소녀는 남자와 함께 호수로 향한다. 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보리스를 부르는 소리에 이내 뭍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앞에 놓인 죽은 갈매기의 몸. 보리스는 갈매기를 보고 떠오른 글을 수첩에 적는다.
‘갈매기처럼 행복과 자유를 느끼는 호숫가 소녀에게 한 남자가 찾아와 그녀를 파멸시킨다.’
엉켜버린 애정의 방향으로 인한 파멸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마샤는 오랜 외사랑을 미뤄두고, 나를 사랑해 주지만 내가 사랑하지 않는 남자 메드베덴코와의 결혼을 결심한다. 콘스탄틴은 우울과 분노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에게 총을 발사하고, 니나는 “내 생명이 필요하시다면 가져가세요.”라는 보리스의 책 속 한 구절을 보리스에게 전하며 사랑에 자신을 바치겠다고 맹세한다.
콘스탄틴의 자살시도 후 일주일이 지났다. 콘스탄틴의 머리엔 작은 상처만 남았지만, 어긋난 감정들은 여전히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이리나는 보리스를 데려온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며 보리스를 데리고 떠나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보리스와 니나는 이리나의 생각처럼 쉽게 마음을 접지 않았다. 보리스를 보며 무대에 서길 다짐한 니나는 보리스를 따라 모스크바로 떠난다. 콘스탄틴은 그 자리에 남아 니나를 그리워했고, 마샤는 결혼을 결심했지만 여전히 콘스탄틴의 곁을 맴돈다.
“난 그 갈매기야.”
시간은 생각만큼 많은 걸 바꿔놓진 못했다. 콘스탄틴은 작가가 되어 글을 쓰게 되었지만 여전히 니나를 그리워하고 있으며, 그녀의 소식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보리스와 아이를 가졌지만 아이를 잃고, 보리스에게 버려진 소녀는 울거나 죽는 연기만 곧잘 할 뿐이었지, 전체적인 연기엔 영 소질이 없어 배우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2년 전 여름, 그 시기에 모였던 인물들이 모두 모인 날 밤 니나는 콘스탄틴의 방 창문을 통해 조용히 집안으로 들어온다. 2년 전, 꽃무늬 원피스를 나풀거리며 식탁 의자에 앉던 밝은 소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차고 넘치게 지쳐버린 소녀는 이제 휴식을 바라고 있다. 나를 비웃고, 버린 남자에게 나는 ‘총 한방에 떨어져 버린 갈매기와 같은 존재’인가-? 니나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호기심에 사랑하고, 흥미가 떨어지자 버려진 ‘나’라는 존재는 무심결에 쏜 남자의 총에 맞아 떨어진 갈매기와 같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자니 나 자신의 존재가 너무 슬퍼지는 게 아닌가. 사실이지만 너무도 슬픈 이야기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슬픈 사실은 니나가 아직도 보리스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콘스탄틴은 돌아온 니나를 향해 내 곁에 있어달라며 사랑을 갈구한다.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상관없으니 그저 곁에 있기만 하면 모든 게 예전처럼 돌아올 것 같았다. 니나는 사랑을 고백하는 콘스탄틴에게 아직도 보리스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니나의 마음을 들은 콘스탄틴은 더 이상 니나를 잡지 않고,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다.
“좋았던 때를 기억해?”
처음으로 완성한 희곡을 무대에 올리던 날, 니나는 콘스탄틴의 방에서 나가기 전, 그날을 기억하냐고 묻는다. 첫 연극의 설렘, 사자와 뿔 달린 사슴과 같은 동물들을 만들어 그림자를 연출했던 천막, 높이 떠올랐던 달. 그 기억들은 어느덧 돌아올 수 없는 과거가 되어 순환의 끝에 서있었다. 니나가 다시 이 집을 떠나는 순간, 그것들이 영원히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던 건 왜였을까. 왠지 그녀가 이젠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둘 다 불속에 뛰어든 거야. 너는 작가, 나는 배우”
“우리에게 중요한 건 명예 같은 걸 꿈 꾸는 게 아니라 견디는 거야.”
명예와 영광을 쫓는 작가가 되고자 했던 콘스탄틴, 명예를 가진 작가를 사랑했던 니나, 명예에 쫓겨 강박을 갖게 된 작가 보리스, 명예를 놓지 못한 중년 여배우 이리나. 명예를 좇아 달리던 인물들 사이에서 빠르게 일그러진 사랑과 질투의 감정들은 그들을 한 마리 갈매기로 만든다. 그중 한 마리는 총에 맞아 추락했고, 다른 한 마리는 곧 다가올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는 듯 속도를 늦춘다. 그리고 사랑하지 않는 남편과 결혼한 폴리나와 그의 딸 마샤는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하며 또 다른 새가 되어 행복을 찾지 못한 채 여전히 헤매고 있다.
인간이 느끼는 원초적인 사랑과 그에 대한 갈구, 명예와 영광에 대한 욕망과 자신을 끝없이 추락하게 만드는 자기혐오의 감정. 이 모든 것이 호수 표면에 조용히 내려앉은, 출렁이는 물결이 눈부시게 빛나던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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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기다린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오는 사람 없지만
그는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기다린다 아무도 오지 않지만
영화 아무도 없는 곳
영화 "아무도 없는 곳"은 "창석"이 사람을 만나면서 겪게 되는 스토리를 엮어낸 영화입니다.
그 안에서 창석은 여러 그리움과 기다림을 마주하게 되는데요.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그를 처음 만난 장소에 항상 있는 창석의 어머니 "미영"은
그 곳에서 창석의 아버지를 처음 만났던 때를 항상 회상합니다.
창석은 아버지인 척하며 어머니의 회상을 도와주죠.
어머니에게 창석의 아버지는 그리움으로 남아있습니다.
작가인 창석의 후배이자 편집자인 "유진"은 전에 헤어진 인도네시아 남자친구를 추억하며 담배를 핍니다.
유진은 얼마 남지 않은 인도네시아산 담배를 피우며 그와 있었던 일을 덤덤히 말합니다.
사진작가 "성하"는 아내가 아픈 상황에서 기적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러다 그만 아내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됩니다.
바텐더 "주은"은 사고로 인해 기억을 잃었고, 현재는 손님들의 이야기로 시를 쓰고 있죠.
그런 그에게 창석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고,
주은은 창석을 기다린다고 말했기에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고 시를 씁니다.
그렇게 모두와 만난 창석은 혼자 남게 됩니다.
혼자 남은 시간동안 그는 여러곳을 다니면서도 그리움과 공허함에 휩싸이죠.
누군가를 잃어버린 충격과 아픔으로 공허한 일상을 살아가는 창석은
결국 오늘도 혼자 남아있습니다.
영화 "아무도 없는 곳"은 연우진 배우가 연기한 "창석"이라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총 4개의 에피소드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겪는 그리움과 공허함을 보여주는데요.
그러다 보니 영화 자체가 어렵다는 평이 많습니다.
하지만 김종관 감독 특유의 잔잔한 스토리와 영화 자체의 분위기만은 이 영화의 확실한 장점이 되었는데요.
지친 일상 속에서 휴식을 취하며 누군가를 추억하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였습니다.
이상,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 "아무도 없는 곳" 이었습니다.
* 본 콘텐츠는 임범영(크랭크 위드 미)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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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주하는 아이 도망가는 어른, <도주하는 아이>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주하는 아이> System Crasher , 2019 제작
독일 | 드라마 | 110분
감독: 노라 핑샤이트
도주하는 아이, 도망가는 어른
출처: 영화 <도주하는 아이> 스틸컷
여기 어느 누구도 보호해 줄 수 없는 아이가 있다.
핑크 공주 베니. 막대 사탕을 입에 물고 먹잇감을 노려보는 맹수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아이. 정신병원에는 너무 어려서 입원할 수 없고, 정부나 민간단체에서 운영하는 보호시설(기관)에서는 쫓겨나기 일쑤다. 어렵게 배정된 위탁가정에서도 아이를 향한 사랑 유통기한은 터무니없이 짧다. 초반부에 휘몰아치는 베니의 현실은 아이가 어른에게 사랑받을 수 없는 것인지, 어른이 아이에게 사랑을 줄 수 없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게 만든다. 그리하여 세상을 향한 베니의 거친 비명은 끝날 줄 모르고, 진행되는 모든 이야기는 매 순간 충격적이다.
핑크색 옷을 입은 작은 발이 첫 장면으로 등장하고, 이후 온몸에 의료기구를 달고 있는 베니의 무표정이 비친다. 아이의 무표정은 맹수가 사냥을 하기 전의 고요한 움직임이다. 누구를 물어뜯기 위함일까. 순간 등골이 오싹해질 때 그녀는 도끼 같은 눈을 한 채 고르지 못한 이빨을 드러낸다. 무표정의 베니가 사랑스러운 이빨을 내밀 때마다 <도주하는 아이>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심지어 반복적이다. 리셋 버튼이 주인공의 폭력에 의해 눌러지는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이야기는 멈추지 않고 숨 가쁘게 진행된다.
이 작품은 출구가 없는 베니의 비극적인 삶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양반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든 시스템에도, 인간적이고 따뜻한 이웃에게도 베니의 존재는 미쳐버린 개와 같다. 베니는 그들이 인정하기 싫은 인간성과 딱 정해놓은 도덕성의 한계를 폭로한다. 그래서 그들은 "전 할 만큼 했어요. 제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네요."란 말로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이미 초록불에 안전하게 횡단보도를 건넜기 때문에 매번, 불시에 빨간불에 뛰어드는 아이를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선 너무나도 당연한 항변인 셈이다. 이 얼마나 대단하고도 간단한 마음가짐인가.
선생님들 역시 베니를 감당하지 않으려 한다. 베니를 블랙리스트에 올려놓고, 베니와 거리를 둔다. 세상을 물어뜯는 아이는 착한 아이도, 착한 어른도 될 수 없으니까. 베니를 보호할 수 있는 어른이 부재한 건, 아이의 탓일까. 모든 아이는 어른의 관심과 사랑을 선택적으로 받는 존재인가? '착한 아이' 프레임과 '착한 어른' 코스프레가 어떠한 검증 없이 무차별적으로 견고해지자, 베니는 더 처절하게 소리 지른다. "전부 다 싫어!"라고. 그리고 그들에게서 미친 듯이 도망친다.
출처: 영화 <도주하는 아이> 스틸컷
어렸을 때 기저귀로 얼굴을 눌린 후 트라우마를 갖게 된 베니는 엄마에게만 자신의 얼굴을 만질 수 있도록 허락했다. 엄마, 베니에게 엄마란 존재는 모든 것이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 속에도 하루하루를 버티는 건 엄마와 다시 함께 살 수 있을 거란 희망 때문이니까. 베니는 자기를 만나러 오지 않는 엄마를 보고자, 보호소를 탈출한다. 도로 위에서 한참 동안 세워주지 않는 차에 쓰레기를 던지고 미친개처럼 왈왈 짖어대고 나서야 겨우 히치하이킹에 성공한다. 그렇게 어렵게 집에 온 베니를 맞이한 건, 낯선 아저씨. 사실 엄마도 딸을 자기 삶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베니가 또 폭력적으로 변해 자신을 때릴 거란 두려움과 작은 아들이 베니와 같은 행동을 학습해 학습해고 있다는 불안이 원인이었다. 충분히 베니를 다시 집에 데리고 올 수 있음에도 엄마는 직장을 구하지 못해 굶어 죽겠다는 말로 딸을 외면하고 있었다. 베니를 향한 엄마의 모성애에도 유통기한이 존재했다는 비극 앞에, 배니는 또다시 리셋, 리셋된다.
엄마의 등을 조각상으로 내리치며 "죽여버릴 거야!! 개년!!"이라 욕하고, 낯선 아저씨의 주먹에 얼굴을 몇 번 구타당한 후 바닥에 질질 끌려 장롱 속에 처넣어질 때까지 말이다. 베니는 광기를 내뿜으며 희망을 줬던 엄마를 향해 울부짖는다. 아이는 자신의 손을 물어뜯지 않고서는 분노를 표출할 수 없었고, 또 엄마는 도망치고 베니는 또 홀로 남는다. 반복되는 리셋, 사실 베니는 보호소 직원들에게 끌려갈 때마다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 유통기한이 정말 다했음을 매번 온몸으로 받아들였음에도 또다시 엄마의 품이 그리워 몸을 잔뜩 웅크려왔다. 엄마와 함께 사는 꿈을 꾸고, 엄마가 좋아할 만한 가방을 가게에서 훔치고, 또 만나러 오지 않는 엄마에게 분노 대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던 딸이었다. 잔인하게도, 이것이 <도주하는 아아>가 주는 유일한 희망이다.
출처: 영화 <도주하는 아이> 스틸컷
다행스럽게도 엄마를 제외하고, 베니의 웃음을 유일하게 볼 수 있는 두 명의 어른이 존재한다. '비파네'와 '미하'. 두 사람은 베니의 얼굴을 만져도 되는 어른이다. 비파네는 베니에게 안전한 가정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아동 보호사이고 미하는 비행청소년의 행동을 교정하는 일을 하는 전문가다. 이 두 사람만이 핑크 공주를 상처 입은 아이로만 바라본다. 함께 가슴 아파하고 안쓰러워하며 베니의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비파네는 베니를 끝까지 놓지 않는다. 어떻게든 아이를 위해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려 한다. 베니에게 엄마가 결국 너를 버렸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고, 대신 흐느끼는 그런 어른이다. 그래서 아이는 비파네만큼은 두 팔 벌려 안아주고, 함께 하고 싶어 한다. 비파네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외적으론 무기력한 인간이지만, 베니에겐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을 품어주는 몇 안 되는 어른이니까.
미하는 온몸이 묶인 채 병실에서 분노를 삼키지 못하고 씩씩거리는 베니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무엇이 저렇게 어린아이를 분노로 가득 차게 만들었을까. 겨우 아홉 살인 저 아이가, 얼마나 큰 고통과 슬픔을 품고 있는 걸까. 결국 그는 베니를 숲 속에 있는 자신의 오두막(상담소)에 3주 동안 데리고 있겠다고 자신 있게 선언한다. 그러나 베니를 경험한 자들은 미하를 믿지 않는다. '미하의 프로그램'이 아무리 효과적이어도 '베니의 리셋'은 막을 수 없음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그들의 말대로 미하는 실패한다. 시종일관 베니와 베니를 대하는 어른들의 자세를 확고하게 고수하던 <도주하는 아이>의 태도가 180도 바뀌는 순간이다. 영화는 이후부터 애매한 자세를 취한다. 일례로, 미하의 자발적인 포기가 정말 자의인지 아닌지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다. 모두 관객의 몫으로 남긴다.
미하는 베니의 리셋을 통제할 수도, 치료할 수도 없는 사람이 됐다. 그가 베니에게 가족(아내와 자식)을 보여주고, 오두막이 아닌 자기 집에서 베니를 재워준 순간, 그렇게 결정됐다. 베니가 미하에게 사랑을 갈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베니는 미하에게 아빠가 되어달라고 고집을 부리며 아무렇지 않게 얘기한다. "부인과 아이를 죽이면요? 그럼 완전 제 것이 되는데?"라고. 오랫동안 느껴보지 않았고 어쩌면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따라서 어떡해서든 갖고 싶었던 사랑, 베니에겐 반드시 필요했다. 미하는 평생 지켜오던 직업과 가족을 무참히 파괴해 버릴 것 같은 베니에게 큰 두려움을 느끼고 결국 비파네에게 고백한다. 자신을 과대평가해서 베니에게 희망을 줬고, 그 결과 통제블능이 되어버렸다고. 그렇게 베니는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잃고, 비파네와 미하는 본인들 역시 도망가는 어른임을 인정한다. 어른들은 베니를 정신과 치료가 가능한 케냐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케냐로 떠나야만 하는 베니의 상황, <도주하는 아이>가 남긴 마지막 말줄임표다.
출처: 영화 <도주하는 아이> 스틸컷
베니는 버려지기 전에 반드시 도주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다시 도주할 수 있다. 잡히고, 또 잡히면서 크지 않으면 아이는 삶을 살아갈 수가 없다. 이제 베니는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고, 더 쉽게 칼을 휘두를 것이고, 더 잔인하게 자신의 얼굴을 만진 이들에게 폭력을 가할 것이다. 그 아이가 어른이 될 수 있을지도 가늠할 수 없다. 반복되는 리셋에 스스로 폭주하는 일만 남았다는 것이 <도주하는 아이>가 처음부터 계속 보여줬던 명확한 진단이다.
아이를 포기한 어른의 탓인가. 어른도 포기하게 한 아이의 탓인가. 영화는 아이는 도주하고 어른은 도망간다는 결과만 내놓았다. 숲 속에서 베니를 향해 짖어대던 미친개만이 아이를 품어주는 장면이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겠지. 그래서 도주하는 베니의 얼굴에 띈 웃음이 가슴을 더 두근거리게 한다. 그 두근거림이 설렘이 아닌 두려움이란 사실을 <도주하는 아이>도, 우리도 모두 알고 있다. 또 한 명의, 도망가는 어른의 떨리는 두 눈을 봤을 테니까. 베니의 마지막 호소이자 세상을 향한 다신 없을 답변이 떠오른다.
"웃기시네!"
이제 베니의 얼굴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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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작은 행동이 세상을 바꾸고 있어.
얼마전 일하는 엄마들과 밥을 먹다가 육아와 일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돌아보면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엄마들이 사회생활을 한참 하던 때, 그러니까 불과 10년전만 해도 육아휴직이라는게 일반적인 단어가 아니었다. 대구에서 나고 자란 나는 ‘어디 여자애가 서울로 학교를 가냐는’ 외할머니의 반대에 부딪혀 외할머니집에서 걸어서 10분거리의 대학교를 가야 했다. 불과 25년전이었는데 외할머니는 아들이 아닌 ‘가시나’를 대학에 보내는 것도 못마땅해 하셨다. 아주아주 보수적인 지역의 보수적인 어른이었지만, 엄마와 아빠가 강력히 주장해서 대학을 보낸 것이다.
‘여자도 전문직을 해야해.’ 결혼해서도 원가족인 외할머니의 투병생활을 돌보고, 남동생들을 케어하며 평생을 전업주부로 살아온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했지만, 내 딸만은 그렇게 살게 하지 않겠다는 엄마의 결연한 의지 덕에 나는 외할머니가 그렇게 싫어 하셨던 이리 저리 떠돌아다니는 직업인 PD가 될 수 있었다. 꽤나 진취적인 직업군에 속하지만, 그래도 여자 PD가 육아휴직을 하고 다시 복직하는 게 일반적인 일이 된 것은 10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2000년 초에 결혼 한 여자선배들을 떠올려 보면 결혼과 출산으로 일을 그만 둔 선배가 더 많다. 회사에서 처음으로 육아휴직을 쓰고 돌아온 선배가 나보다 한살 많은 선배였던 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가 엄청난 변화 속에 놓여 있는 중이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은 미국의 여성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에 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마지막 씬에 직접 출연한다 )1950년대 하버드 로스쿨엔 전체 학생의 2%에 해당하는 9명의 여학생 밖에 없었고, 심지어 여자 화장실도 없었다고 한다. 수석졸업을 하고 두아이 까지 키웠지만, 로펌에서는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고 (거절하는 이유도 가지 가지다. 애나 돌봐야지 일은 언제 할거냐. 이미 작년에 여자를 뽑았다. 회사의 다른 여자들이 질투할거다? 등등 )그녀는 로펌 대신 결국 대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게 된다. 그리고 1970년대에 남성보육자와 관련된 한 사건을 접하고 이것이 남성의 역차별 사건이며, 성차별의 근원을 무너뜨릴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하게 된다. 모두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고 할때. 긴즈버그는 남편과 딸의 지지에 힘입어, 성별을 근거로 한 (On The basis of Sex (원제)) 178건의 합법적 차별을 무너뜨릴 재판을 시작하게 된다.
“백 년 동안 계속 져 왔다고 해도 이기려고 노력하는 걸 멈출 이유는 없죠.”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에서 딸 제인이 엄마 루스에게 하는 말이다. 이 대사는 <앵무새 죽이기>의 애티커스 핀치의 말을 인용한 것인데, 그러고 보면 인종차별만큼이나, 성별에 근거한 차별은 얼마나 말도 안되는 일인지… 의의도 정당하고, 의뢰인도 정당하지만, 여성들을 한세기 넘게 같은 논쟁에서 져왔다는 루스에게 딸 제인이 하는 저 말이 이 영화를 다 말해주는 것 같았다.
둘이 함께 택시를 기다릴 때 성추행 발언을 하는 남자들을 향해
“엄마, 남자들이 여자에게 저런식으로 말하게 두면 안돼.” 라고 시원하게 욕을 하는 딸을 보며,
“넌 자유롭고 두려움을 모르는 젊은 여성이야. 20년 전엔 이렇게 행동하지도 못했어.시대가 이미 변했어.“ 하고 말하는 엄마 루스.
차별이 차별인 줄도 모르고 지나왔던 시대를 지나, 우리 자녀들의 열망을 가로 막는 장애물이 되는 조항을 다시 검토하여 새로운 선례를 만들어 달라고 주장했던 법정씬에서는 여지 없이 또 울컥했다. 실패하고 절망하더라도 결국엔 변화한다는 희망에 대해 말하고 있는 영화.나는 어쩌면 이런 변화의 역사에 살아있는 증인일지도 모른다. 보수적인 지역에서 자라며 차별을 받았지만, 그걸 깨려는 엄마, 이모와 같은 어른들의 도움으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었고, 이제 딸을 낳고 엄마가 되고 또 나의 일을 하는 이 시간 속에서, 내 딸을 위해 나 역시 매일 매일 크고 작은 싸움을 계속 해오고 있는 중이니까.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한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시작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끝까지 해내는 것이 바로 용기 있는 모습이란다. 승리하기란 아주 힘든 일이지만 때론승리할 때도 있는 법이거든"
작은 행동이 모여 세상을 바꾼 다는 것을 이미 겪었으니까. 승리하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나아가야할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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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은 파동이었던 것들
성인이 되고도 한참 시간이 흘렀건만, 과학과 수학 과목에서 소외감을 느꼈던 고등학생 시절의 내가 가끔 고개를 들곤 한다. 미련 못 버린 연인의 흔적처럼 괜히 슬금슬금 넘겨보는 건 물리학이나 수학 대중서. 이제부터라도 중등교육 수준의 과학을 마스터하겠다며 중1 과학 문제집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 안되던 게 지금이라고 쉬이 될 리 없다. 중1 과학 문제집은 2장 정도 푼 채로 햇빛에 바래지고 있고, 친절한 대중서조차 다 이해하지 못하고 흐린 눈으로 보면서 시집 같다고 생각했다.
배운 게 있긴 하다. 특히 물질이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라는 것, 빛이 파동인 동시에 입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는 적잖이 놀랐다. 파동은 과학 책에 전파 모양으로 그려진, 보이지 않는 무언가라고만 생각했던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입자는 당연히 손에 쥘 수 있는, 물성을 가진 무언가라고 생각했는데 빛도 입자라니. 막연히 입자는 물건들처럼 그곳에 놓여있고, 파동은 멀리서 너울너울 전해져 온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틀린 감각은 아니다. 파동은 무언가를 매개체 삼아 다가온다. 물을 타고 파도가 넘실넘실 다가오고, 공기 속에서 소리는 퍼져 나간다. 그리고 오래 전의 별빛은 오늘의 밤하늘을 채우고 내 눈 안에 고인다.
시간과 기억도 마찬가지다. 역사 속의 어떤 순간도, 그 사건 속 사람들도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 속에 위치하는 건 아닐까. 꼭꼭 닫혀 교과서에 정리된 과거의 사건 같은 건 실은 없는 게 아닐까. 모두 단단한 입자 같지만 실은 파동이어서, 별빛처럼 파도처럼 어디선가 다가오고 있는 건 아닐까.
전태일 열사가 노동권을 부르짖으며 분신하고도 50여 년이 흘렀다. 그의 죽음은 이제 교과서에도 실린 역사가 되었다. 그의 죽음 이후 평화시장에는 청계피복노동조합이 생겼고, 못다 한 일을 이뤄달라는 아들의 유언을 들은 어머니는 모든 노동자의 '이소선 어머니'가 되었다. 한참 전의 일들이지만, 그 시기를 톺아보는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도 파동처럼 이제 우리에게로 온다. 1977년 9월 9일에 출발한 파동이, 2020년 부산국제영화제와 2021년 DMZ다큐영화제 등을 거쳐 2022년 1월 개봉하기까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미싱타는 여자들>은 푸른 하늘 아래 야외에서 해사하게 웃으며 미싱을 돌리는 중년의 여성들을 비추며 시작한다. 그러나 이들이 처음 미싱을 돌리기 시작한 때는 '여자들'이라기보다 '아이들'에 더 가까운 나이였다. 12세에서 16세가량의 소녀들. 더러는 가난 때문에, 더러는 여자아이에게 공부를 시킬 필요가 없다는 구시대의 편견 때문에, 평화시장에서 미싱을 돌리기 시작했다.
영화는 어린 여자아이들에게 찾아온 사건을, 그리고 그 안에서 이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천천히 함께 돌아본다. 객관적인 정보를 쏟아내듯 제시하기보다, 사진과 인터뷰를 풍성하게 활용해 그날의 그림을 그린다. 내겐 1977년 9월 9일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전혀 배경 지식이 없었지만, 영화를 따라가면서 이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선명한 그림이 남았다.
피로가 극도로 쌓여도 쉴 수 없던 시절. 졸다가 때로는 손을 드르륵 박기도 하며, 잠 깨는 약을 먹어가며, 부단히 일해야만 했던 시절. 노동자의 권리나 휴식이란 것이 보장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전태일 열사는 시계를 놀랍도록 앞당겼지만 모든 변화가 단숨에 오지는 않는다. 교복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어린 나이임에도 성인 요금을 내며 버스를 타던 시절, 한자를 알아야만 은행 계좌를 만들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씩씩하게 각자의 현실에 성실하였다. 학교 대신 공장으로 향했지만, 그간 배운 지식과 상식을 토대로 삼아 배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배움의 마중물이 되어준 곳은 노동교실이었다. 한자를 가르쳐주고 은행 계좌 만들기와 입출금 해보기를 숙제로 내주고, 서럽고 힘든 상황에서 외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깨닫게 해 준 곳. 공동체가 되어준 곳. 이곳에서 그들은 배움과 배움을 연결시켜 새로운 지혜를 만들어냈다. 자연스럽게 뭉치고 배우고 가르치고 어우러지면서, 어느새 그동안 당연하게 여기던 것에 의문을 던지고 사유하고 있었다.
사유, 그것은 마음속에 물음표가 물고기처럼 생생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다. 한나 아렌트가 그토록 강조했던 능력을 이들은 갖고 있었다. 그건 70년대엔 너무 위험한 능력이었다.
그럼에도 영화는 70년대 이들의 삶에 비극처럼 덮쳐온 삶의 조건들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 도전 앞에 이들이 어떻게 응전했는지에 집중한다. 그날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인간의 걸음에 초점을 맞춘다. 노동교실을 지키고 싶었을 뿐인 것, 노동교실 철거 예정일 하루 전날에 불안한 마음으로 모여든 날이 하필 9월 9일이었던 것, 하필 그날이 북한의 창립기념일이었던 것과 이소선 '어머니'라는 호칭마저 김일성 '아버지'와 대조된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 지금은 누구보다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지만 이들이 한때는 유리로 배를 긋거나 떨어질 각오까지 했던 것, 목소리 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
그 자리에 있었던, 혹은 없었던 이들의 기억은 말에서 말로 재구성되어 파동으로 전해진다. 여전히 말만 꺼내도 눈물 나는 기억, 생각만 해도 억울한 기억도 있다. 똑같이 경찰서에 잡혀 왔어도 기본적인 권리조차 챙겨주지 않아 속옷 한 벌 갈아입지 못하고 가족도 모른 채로 한 달을 구류되어 있는 채로, 사식과 면회가 허용되었던 대학생들의 모습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희미하게 지워져 가는 기억도, 따스하고 즐거웠던 기억도 있다. 공부할 수 있다는 기쁨과 희망, 공동체로 어우러지며 느꼈던 행복도 있다.
시대가 던진 크고 작은 부당함에 스러지지 않고, 이들은 그 모든 기억 너머 오늘에 이르렀다. 열심히 살아 오늘에 다다라서는 과거의 자신에게, 젊고 최선을 다했고 스스로의 목소리를 냈던 그 시절에 인사를 건넨다. 여전히 단단한 눈빛으로, 말간 미소로,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상념과 함께 눈가에 어린 눈물로. 그 모습을 보다 보면 이들이 왜 노동투쟁의 역사에 함께 남아야 하는지, 이 다큐멘터리 작업이 왜 시작되어야 했는지 원점에서부터 공감하고 이해하게 된다.
그 시절 감옥에서도 조그만 창문 너머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 달을 보았던 이들은, 지금도 환하게 웃고 차분히 말하고 서로를 본다. 그 모습을 잘 담아내어 재구성하고자 한 제작진의 노력이 영화 곳곳에서 엿보이는데, 그 장치들은 하나하나 파도가 되어, 별빛이 되어, 파동이 되어 멀리서부터 찾아와 관객의 마음을 두드린다. 함께 눈물짓게 한다.
21세기가 되면서 인류가 상실해가는 것 중에는 그 끈끈한 연대감도 있다. 연대로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들은 많다. 누군가가 겪는 부당한 대우부터, 심지어 쉼 없이 굴러가는 이 세대의 번아웃 현상까지 느슨한 연대로 풀어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연대는 점점 낯설고, 마음이 있어도 하기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 있다. 목소리 합쳐 구호를 외치고, 몸으로 바리케이드를 치는 현장은 점점 스포트라이트 바깥의 공간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거나 없다. 노동자는 스스로가 노동자임을 자주 잊고 산다. 그저 분주하고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나 이 영화 앞에서 나의 분주한 마음은 잠시 멈춰 선다. 많은 시간 바쁨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노동자로서, 새로운 정보를 접하고 흘리기 바빠 사유라고는 하지 않는 피로한 인간으로서, 이들의 단단한 눈빛과 미소 앞에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내 마음에는 세상을 보는 물음표가 물고기처럼 돌아다니고 있는가. 나는 나의 세상을 사유하는 눈으로 보고 있는가. 무엇보다도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가. 언젠가 지금 내 안에 있는 마음들이 파도쳐 어딘가에 가 닿을 때, 그 자리에서 조우할 이 앞에 부끄럽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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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모든 사랑을 불태워
<내 모든 사랑을 불태워>
제12회 스웨덴영화제 상영작감상평
'결혼은 미친 짓이다'
결혼을 하고 행복하고 평온하게 보내는 분도 많지만, 이 영화를 보고 떠오른 건 한국 영화 제목이기도 한 '결혼은 미친 짓이다'였다. 서로에게 지우지 못할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도 헤어지지 못하는 부부. 그 부부의 모습을 닮는 후손.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 등 앞으로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순간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카린과 스벤, 울라프를 연기한 배우들의 매력에도 푹 빠질 수밖에 없다.
줄거리 (스포 있음)
<내 모든 사랑을 불태워>의 원작《내 모든 편지를 불태워라》(Bränn ala mina brev)는 스웨덴의 유명 팟캐스터이자 작가 슐만이 2018년에 출간한 반자전 소설이다. 1930년대 슐만의 외조부의 이야기, 할머니 카린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할머니 카린은 젊은 시절 당시 유명 작가인 스벤과 결혼했지만 같은 재단에서 지원을 받으며 같은 숙소, 같은 층에 지내고 있는 올로프와의 은밀한 사랑을 나눈다. 영화의 초반에는 알렉스가 부인에게 자기가 어린 시절 할아버지인 스벤이 카린에게 하던 질투와 강압적인 태도를 하는 모습을 그대로 하는 모습이 나온다. 알렉스의 부인은 이에 질릴 대로 질려서 알렉스를 잠시 떠나고, 알렉스는 자신의 문제를 인지하고 꽁꽁 묻어두었던 외조부모의 과거 이야기를 파헤친다.
그렇게 세 사람의 사랑이야기는 카린을 중심으로 서사된다. 스벤과 카린의 첫 만남은 로맨틱했고, 누구나 꿈꾸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상상하며 서로의 평생의 짝이 되길 약속한다. 하지만 이상과 달랐던 결혼과 스벤의 모습은 카린이 다른 남자를 찾게 만들었고, 스벤은 그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게 된다. 하지만 팜므파탈의 카린을 힘들게 얻어낸 그이기에 그녀를 쉽게 놔주지 못하고, 그녀의 상처를 이용하여 본인의 작품을 만들어낸다. 카린은 자신의 아픔과 잘못을 이용하는 그에게 질려버린다. 그의 손길이 닿으면 구토가 나올 정도로. 카린은 위험하다는 걸 알지만 평생 동안 벌을 줄 것처럼 자기를 옥죄여오는 스벤과 달리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상처를 이해하고, 위로해 주는 올라프에게 깊이 빠져버린다. 둘의 은밀한 연애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숙소 사람들뿐만 아니라 스벤도 눈치를 챈다.
카린의 외도, 상간남의 아이를 임신, 또 다른 남자와의 외도는 상식적으로 보면 욕을 먹어 마땅하다. 하지만 카린은 완벽주의와 나르시시스트, 일밖에 모르는 스벤에게 이미 마음이 떠났고, 여러 번 이혼을 말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스벤은 가스라이팅을 시전 하며 그녀를 옥죄이고, 죄책감으로 그를 떠나지 못하게 한다. 그런 상황에 올라프는 카린이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다 보니 개인적으로는 카린의 행동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죽고 싶은 상황에 본인을 다시 사람처럼 살아가게 해 줄 사람이 있다면.. 또 스벤의 폭력적인 태도와 그녀를 놓지 못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이해가 되고 (영화가 끝나고도 여주가 잘못했다, 남주가 이상하다는 의견이 반반 들렸다) 신체적 폭력은 없지만, 스벤의 모습에서 예전 한국의 아버지들의 폭력적인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렇게 둘 사이의 딸, 아니 스벤이 딸이 아닐 수도 있는 아이가 생기며 부부는 스벤이 죽을 때까지 평생을 같이 살아간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카린이 모아둔 올라프의 편지가 발견되며 두 부부의 조금은 귀여운(?) 부부싸움이 나오는데, 한국의 부부들이 보이기도 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다 사람 사는 곳이다 보니 공감 가는 부분이 있어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세 사람이 같은 숙소, 층을 쓰고 식사와 여가 시간까지 보내는 장면들이 꽤 있는데 두 남자의 은근한 신경전과 그 상황을 조금은 즐기는 듯한 카린, 스벤의 옆에서도 서로를 탐하는 카린과 올라프, 카린의 미묘한 감정 표현들이 재밌었다. 배우들 각각의 매력이 넘쳐서 더 재밌게 봤다. 정말 문제적 남자 그 자체의 연기를 보여준 스벤 역할의 빌 스카스가드는 그 유명한 스카스가드 집안이라고!
*사진 출처 : 아트하우스 모모, 주한스웨덴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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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숨막히는 긴장감이라니! 파워 오브 도그!
제인 캠피온 감독의 파워 오브 도그 가 공개 되었습니다.
넷플릭스에 공개되었는데요.
서부극에 흔하게 등장하는 총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막히는 긴장감을 보여주죠.
대신 네 인물의 심리를 보여주는데요.
매우 긴장감있게 이들의 관계가 펼쳐집니다.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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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e Campion's Power of Dog has been released.
It was released on Netflix.
Guns that commonly appear in western movies do not appear.
Nevertheless, it shows a breathtaking tension.
Instead, it shows the psychology of four characters.
Their relationship unfolds with great tension.
Please refer to the video for detailed revi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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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촌지전문교사의 시골분교 탈출기 '선생 김봉두' - 라떼극장 EP.15
영화 흥신소 - 라떼극장 EP.15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영화 "선생 김봉두"를 보며 즐거웠던 추억을 떠올려보자
무리한 촌지 요구로 시골분교로 부임하게 된 선생 김봉두
1년만 버티면 다시 서울로 올라갈수 있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임해보지만
이 마을은 깨끗해도 너무 깨끗하다
촌지라곤 찾아볼 수 없는 클린 빌리지
촌지 금단 현상에 산내분교 탈출이 절실해진 '선생 김봉두(2003)' 과연 탈출 할 수 있을까?
흡연욕구를 뿌리치지 못한 김봉두의 최애담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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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어시스턴트> 메인 예고편
꿈에 그리던 영화사에서
보조 직원으로 일하게 된 ‘제인’
어떤 일도 능숙하게 처리하는
그녀의 일상은 평범해 보이지만,
사소한 사무실 정리부터 상사의 개인적인 스케줄 관리까지
하루 종일 몰아치는 잡다한 업무에 지쳐간다.
그러한 일상이 반복되던 중
어느 날, 신입사원으로 채용된 한 여성이 찾아오면서
회사 내 부조리함을 마주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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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엑소시스트 : 믿는 자> 1차 예고편
호러 명가 #블룸하우스 가 선사하는 공포의 바이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