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3-03-16 07:41:26
뮤지컬 영화 그 이상
〈쉘부르의 우산〉 리뷰
8★/10★
뮤지컬 영화 그 이상을 본 것만 같다. 1964년에 제작되어 제17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쉘부르의 우산〉 이야기다. 이 영화는 통상적인 뮤지컬 영화와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대사가 노래다. 지금까지도 여기저기서 들릴 정도로 인상적인 사운드트랙을 갖고 있기도 하다. 영화를 연출한 자크 드미 감독도 이 영화를 ‘시네 오페라’라고 부르며 음악성에 자신감을 표했다. 그러나 〈쉘부르의 우산〉의 장점은 음악성에서 그치지 않는다. 아름다운 음악과 어우러지는 드라마 역시 굉장히 강렬하다. 여러모로 〈쉘부르의 우산〉은 음악과 이야기에는 ‘진보’가 없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전자제품처럼 나중에 만들어졌다고 자연히 더 좋은 품질이 보장되지 않는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기와 쥬누비에브다. 둘은 모두 프랑스의 조그만 항구도시 쉘부르에 산다. 기는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하고, 쥬느비에브는 어머니를 도와 우산 가게에서 일한다. 서로를 깊게 사랑하는 둘은 결혼을 약속한다. 하지만 그들 앞에는 여러 어려움이 있다. 우선 20살인 기는 아직 군대에 다녀오지 않았다. 더불어 16살의 쥬느비에브 역시 너무 어린 나이에 사랑만으로 결혼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는 어머니의 반대에 부딪힌다. 쥬느비에브의 가게 상황이 좋지 않은 것도 가난한 정비공 기와의 결혼을 가로막는 현실적인 이유다. 즉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 말고는 그 무엇으로부터도 지원받지 못하는 상태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둘은 모든 고난을 극복할 각오가 되어 있지만 말이다.
상황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에게 입영 영장에 날아오고, 둘은 급작스러운 이별을 맞이한다. 서로를 향한 둘의 마음은 여전히 굳건한데, 주변 상황은 자꾸 둘의 관계를 흔드는 상황도 반복된다. 부대 상황이 좋지 않아 자주 연락하지 못하는 기, 어머니의 설득과 핀잔에 점점 피로해져가는 쥬느비에브…. 그러나 결정적인 건 쥬느비에브의 임신이다. 임신으로 정신적‧신체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놓인 쥬느비에브는 결국 카사르라는 남자와 결혼을 결심한다. 카사르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남자로 기의 아이를 임신한 쥬느비에브를 아내로 받아들이기를 결심할 만큼 쥬느비에브에게 진심이다. 쥬느비에브 역시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으나 복잡한 상황과 불확실한 기와의 관계에 괴로워하기보다 자상한 카사르와 결혼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판단을 내린다.
알제리에서 돌아온 기는 뒤늦게 쥬느비에브의 소식을 듣고 좌절‧방황한다. 이제는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된 쥬느비에브의 우산 가게를 쓸쓸히 배회하고 술과 여자에 탐닉하기도 한다. 그러나 쥬느비에브가 카사르를 만나 위안을 얻었듯 기에게도 또 다른 여인, 사랑이 찾아온다. 기는 이제야 몸이 아픈 자신의 대모를 오래전부터 간호해온 마들렌의 존재가, 그리고 자신을 좋아하는 마들렌의 마음이 눈에 들어온다. 마들렌은 기가 쥬느비에브에게 실연당한 아픔을 자신에게서 보상받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지만 기의 진심을 확인하고는 그와 결혼식을 올린다.
서로를 누구보다 사랑했던 두 연인은 얄궂게도 서로 다른 사람과 결혼해 서로를 잊은 듯 살아간다. 영화의 마지막은 기와 쥬느비에브의 우연한(혹은 의도된) 만남으로 마무리된다. 각자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둘은 짧은 몇 마디 말로 제대로 매듭짓지 못한 지난 세월을 아련히 회상한다. 더불어 누군가는 서로가 여전히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을 조심스레 내보이고, 다른 누군가는 그 가능성을 단호히 잘라낸다. 운명과 사랑의 엇갈림을 절묘하게 포착한 이 장면은 비극(기와 쥬느비에브의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과 희극(새로운 사랑을 만나 행복하게 살아가는 둘)이 동시에 공존하는 삶이라는 드라마의 가장 극적인 순간을 함축적으로 전달한다. 〈쉘부르의 우산〉은 사랑, 음악을 다루는 영화의 계보에 오래도록 기록될 수작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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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피터 파커다운 스파이더맨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Spider-Man: No Way Home, 2021)
개봉일 : 2021.12.15.(한국 기준)
감독 : 존 왓츠
출연 : 톰 홀랜드, 젠데이아 콜먼, 베네딕트 컴버배치, 존 파브로, 제이콥 배덜런, 마리사 토메이, 알프리드 몰리나
쿠키 영상 : 2개
가장 피터 파커다운 스파이더맨
2016년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를 통해 처음 등장한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이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의 개봉 2년이 지난 2021년 12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으로 돌아왔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과연 올해 안에 볼 수 있을까?”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기다린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오래 기다린 만큼 팬들의 기대감도 컸기에 항간에 떠도는 소문도 참 많았다. 그 소문들을 믿거나 너무 기대하진 않으려고 했다. 기대하면 그만큼 실망할 이유들이 많아지니까.
처음 마블에 스파이더맨이 등장한다는 소식을 들릴 때쯤, 나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에 푹 담가져 있었다. 큰 눈을 가진 앤드류 가필드의 인간미 넘치는 스파이더맨이 좋았고, 비록 악역이었지만 치명적이었던 데인 드한의 연기가 좋았다. 거기에 삼부작으로 완성되지 못하고 끝나버리는 바람에 아픈 손가락처럼 더 애착이 갔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앤드류를 뒤로하고 새로운 스파이더맨의 등장이라니. 기대도 됐지만 살짝 못 미덥기도 했다. “과연 어떤 스파이더맨이 나오는지 보자-”싶었다고 해야할까?
하지만 톰 홀랜드는 자신이 가진 힘을 힘껏 뿜어내며 새로운 스파이더맨을 만들어갔고, 관객들은 자연히 그에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3대 스파이더맨이 된 톰은 ‘아기 거미’와 ‘톰스파’라는 애칭까지 꿰차며 당당히 어벤져스에 합류했다. 특히 인피니티 워에서는 스파이더맨 때문에 눈물 줄줄 흘리던 관객들도 꽤 많았으니.. 스파이더맨으로서 그의 존재감이 꽤나 톡톡했다는 걸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스파이더맨의 성장
토니 스타크가 떠나기 전까지 어벤져스에서 스파이더맨의 이미지는 완전한 히어로라기보단 막내와 어린아이에 가까웠다. 토니에게 수트를 달라고 어리광을 부린다거나, 토니와의 만남에 신나 셀프 카메라를 찍는다거나, 짝사랑하는 MJ 앞에서 어버버 말을 흐린다거나.. 등등. 히어로 캐릭터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어렸던 스파이더맨은 항상 조금씩 어설펐다. 나쁜 뜻은 아니라 딱 그 나이대의 감성이 풍부한, 서툰 소년 같았다는 말이다. (역대 스파이더맨 중에서도 가장 어린 나이대인 것도 한몫했다.)
<엔드게임>이후 개봉한 <파 프롬 홈>에서는 멘토였던 토니를 잃은 피터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다 토니의 뜻을 이을 수 있는 ‘히어로’로서의 길을 선택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이번에 개봉한 <노웨이 홈>에서는 스파이더맨의 눈앞에 닥친 위협 속에서, 스파이더맨과 피터 파커라는 두 개의 인생을 두고 갈등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피터 파커다운 스파이더맨
“큰 힘엔 큰 책임이 따른다.” “누군가를 돕는 일은 모두를 돕는 일이다.” 사실 이 두 마디 말이 스파이더맨이라는 히어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음을 살짝 잊어가던 참이었다. 역대 스파이더맨 시리즈에 비해 어벤져스 시리즈의 스케일이 범우주적으로 넓어지기도 했고, 상대하는 악당들과 스파이더맨의 슈트 능력치 또한 크게 상승했기에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은 내가 처음 접했던 스파이더맨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또한 매력적이었고, 가끔은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여전히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의 느낌보다는 ‘우주를 구한 히어로’ 스파이더맨의 느낌이 강했다.
서서히 새로운 스파이더맨에 익숙해지고 있던 찰나, <노 웨이홈>은 피터 파커를 다시 피터 파커답게 돌려놓는다. 토비 맥과이어와 앤드류 가필드가 연기했던 그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 사람의 선함을 믿고, 이웃을 구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소박하고 친절한 옆집 청년 같은 그 스파이더맨처럼 말이다.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 3부작
<노 웨이 홈>은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 3부작의 마무리로서 완벽했다고 말하고 싶다. 오랜 시간 만나온 친구, 스파이더맨의 마지막이자 새로운 시작을 이야기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특히 토비 맥과이어가 연기했던 시절부터 ‘스파이더맨’이라는 히어로와 오랜 시간을 쌓아왔기에 세 번째 마무리가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꾸준히 이야기를 진행해온 프랜차이즈 영화와 오랜 시간을 함께해 준 캐릭터가 가진 가장 큰 메리트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시간과 정이라는 게 이렇게 대단하다. 스파이더맨을 보면서 울고 웃었던 시간을 이렇게 한 번에 다시 선물 받다니. 이 영화를 어떻게 아끼지 않을 수 있을까?
사적인 감정을 모두 제외하고 본다면 영화에는 아쉬운 부분이 있다. 너무 많아 일회성으로 소모된듯한 빌런의 존재와 가장 임팩트 있어야 할 장면이 다소 심심하게 그려졌다는 것. 닥터 스트레인지의 포지션이 살짝 아쉬웠다는 것.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의미인가. 그게 대수인가! 스파이더맨이 이렇게 돌아왔는데. 실망할 시간 같은 것은 없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하고 싶지만 글의 상단에선 참겠다. 영화를 보기 전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라면 “그 어떤 스포도 듣지 말고, 아무것도 모른 채 감상하라.”정도가 있겠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시놉시스
‘미스테리오’의 계략으로 세상에 정체가 탄로난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는 하루 아침에 평범한 일상을 잃게 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닥터 스트레인지’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지만 뜻하지 않게 멀티버스가 열리면서 각기 다른 차원의 불청객들이 나타난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드디어 열린 멀티버스
앞선 스파이더맨 시리즈와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어벤져스 시리즈>를 거치며 꾸준히 언급됐던 ‘멀티버스’. 그 멀티버스가 드디어 <노 웨이 홈>에서 열렸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포탈을 통해서 말이다. 피터 파커가 스파이더맨이란 사실이 온 세상에 퍼지고 피터는 스파이더맨인 자신이 소중한 사람들의 인생을 망쳤다며 자책한다.
MJ와 네드의 대학 입시가 좌절되고 사람들은 피터의 집에 벽돌을 던진다. 죄책감에 마음 아파하던 피터는 닥터 스트레인지를 찾아가 기억을 지우는 주문을 부탁한다. 하지만 피터의 의도치 않은 방해로 인해 주문이 흩어지고 그 결과 평행 우주에서 ‘피터 파커’를 아는 온갖 인물들이 몰려오게 된다.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빌런 그린 고블린과 닥터 옥타비우스, 샌드맨.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빌런 일렉트로와 리자드맨.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역대 스파이더맨 두 명까지. 빌런들이 우르르 등장할 때부터 이 둘이 등장하지 않을까.. 기대하긴 했지만, 실제로 앤드류 가필드가 등장하는 순간 “내가 이걸 보려고 이 시간들을 견뎠나 보다..”싶으면서 감동이 밀려왔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가 이도 저도 아닌 채로 끝나버린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이걸 보려고 버텼나 보다.
삼 스파이더맨의 등장
(이하 톰 홀랜드 = 톰스파, 토비 맥과이어 = 샘스파, 앤드류 가필드 = 어스파로 표기)
메타버스를 통해 만난 스파이더맨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심장이 하늘로 솟았다 곤두박질치듯 강하게 뛰었다.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 걸까. 벅차오른다는 말밖엔 할 말이 없었다. 거기에 영화에 가득한 이전작들의 오마쥬 장면들과 고민하고 있는 톰스파에게 건네는 선배 스파이더맨들의 위로까지. 눈물이 안 날 수가 없었다.
같은 고민과 비슷한 아픔을 겪고, 결국엔 성장하는 스파이더맨들
‘두 개의 삶’은 역대 스파이더맨 모두가 공통으로 고민했던 문제다. 히어로 스파이더맨으로서의 삶 or 평범한 피터 파커로서의 삶. 스파이더맨은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수 없고 피터 파커로 산다면 내가 가진 특별한 능력을 세상을 위해 사용할 수 없다. 거기에 시시각각 닥쳐오는 위험과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선한 히어로이기 전에 분노할 줄 아는 인간의 본성까지 끄집어내게 된다. 하지만 이 사건들 속에서 흔들리는 피터와 끝까지 피터를 잡아주는 소중한 사람들의 말 한마디가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가장 큰 감동 포인트다.
“큰 힘엔 큰 책임이 따른다.” “한 사람만 노력해도 세상은 달라진다.” 그리고 피터는 누구보다 특별한 힘을 가졌다는 응원까지. 피터는 사랑하는 이들의 말을 양분 삼아 자신이 지니고 있는 특별한 능력과 선한 본성을 세상을 위해 사용하게 된다.
샘스파는 벤 삼촌과 친구 해리를 잃고 슬픔에 빠졌다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줬고, 어스파는 아버지와 거미에 대해 얽힌 비밀과 두 개의 삶 중에서 고민을 반복하다 선택을 하는 순간에 사랑하는 그웬을 잃게 된다. 포탈을 타고 다시 등장한 그는 여전히 아픔을 극복하지 못한듯한 모습을 보인다. MJ와 서로를 의지하고 있는 톰스파를 지켜보는 그의 눈빛이 다소 씁쓸하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의 한 장면처럼 먼 바닥으로 추락하는 MJ를 구해낸 어스파는 오랜 시간 자신을 괴롭혀온 죄책감에서 한걸음 벗어난다.
톰스파는 빌런들을 고칠 수 있다며, 인간의 선함을 믿다 메이 큰엄마를 잃는다. 선함을 믿고 모두를 도와야 한다던 메이의 말을 따르며 많은 이들을 도와온 피터의 믿음이 깨지고 그는 폭주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앞서 같은 아픔을 겪어본 선배 스파이더맨들은 톰스파의 분노를 막고, 마음을 되돌려놓는다.
도덕성과 선함은 약점이 아니다
피터가 여러 평행 우주에서 온 빌런들을 되돌려보내지 않은 이유는 그들을 고칠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사람의 본성과 운명은 바꿀 수 없다며 주문을 강행하려 하지만 피터는 달랐다. 피터는 메이 큰엄마의 말을 따라 빌런들을 고쳐놓기로 결심한다.
피터는 모두가 믿지 않고, 모두가 안될 거라 말한 일을 해낸다. 정확히 말하면 세 명의 피터 파커가. “너의 약점은 도덕성”이라고 비웃던 빌런을 고치고, 미스테리우스가 옳았다며 스파이더맨을 비난하는 세상을 한 번 더 구한다. 스파이더맨은 남들이 약점이라 생각하는 ‘선함’을 가슴 중심에 품고 오늘도 묵묵히 누군가를 구한다.
다시 처음으로
막을 수 없을 만큼 몰려오는 평행 우주의 존재들을 보며 피터는 큰 결심을 한다. 사랑하는 이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안전한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멋진 슈트와 비록 익명이지만 우주를 구한 스파이더맨이라는 명성, 집과 친구들. 모든 걸 포기한 피터는 소중한 친구들이 남긴 흔적을 들고 작은 방에서 새롭게 시작한다.
네드와 조립했던 레고 캐릭터와 MJ가 건넨 커피. 그리고 책상에 널브러진 천 조각들과 새로운 스파이더맨 슈트.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스파이더맨이 해야 할 일’은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하게 보인다.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 이렇게 자연스레 스파이더맨이 어벤져스의 세계관에서 퇴장하게 될 것인지, 아니면 발로 뛰고 구르며 다시 어벤져스의 스파이더맨이 될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3편을 추가 계약한 게 아니냐는 말도 있고, 톰 홀랜드의 말을 보다 보면 그의 피터 파커를 보내줄 때가 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또다시 만날 날이 온다면 <노웨이홈>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적절한 쉼표로 기억될 것이고, 이렇게 끝나게 된다면 아름다운 마침표로 기억될 것이다.
스파이더맨이라는 히어로는 어째 항상 짠하고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초월적 힘을 가진 히어로라기보단 어딘가 있을 것 같은 인간적이고 친절한 이웃의 느낌이 더 강해서 그런 걸까? 처음으로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접한 지 10년이 더 지났다. 나의 첫 번째 히어로 스파이더맨, 그와 쌓아온 시간이 내 마음속에 이렇게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앞으로 이 시리즈가 어떻게 될진 몰라도, 난 이 영화를 끊임없이 찾고, 또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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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두 멍청한 놈들이 만든 영화'라고?
7★/10★
괴상하고, 황당하고, 어이없게 웃기고, 그럼에도 감동적인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본격적으로 논하기 전에 언급할 내용이 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는 영화만큼이나 흥미로운 뒷이야기가 넘쳐난다.
•-제작사가 ‘A24’다. 〈문라이트〉, 〈킬링 디어〉, 〈더 랍스터〉, 〈미나리〉, 〈애프터 양〉을 제작한 바로 그 제작사 말이다. A24가 역량 있는 제작사인 건 분명하지만 기존 포트폴리오의 연장에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논하면 곤란하다. 이전 영화와는 결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2022년 3월에 미국의 단 10개 극장에서만 개봉했다. 그런데 극장 당 5만 달러의 수익을 냈다. 역대 극장 당 수입 기준 전체 3위에 해당하는 무시무시한 기록이다. 관객의 성원에 힘입어 3,000개 극장으로 상영을 확대했고, 1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냈다.
•-〈어벤져스〉 시리즈를 연출한 루소 형제가 제작했다. 멀티버스 소재를 활용한다는 점은 공통적이지만 결이 완전히 다르다. '정통 블록버스터' 멀티버스와 'B급 코미디' 멀티버스를 비교하며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화양연화〉, 〈라따뚜이〉 등을 오마주한 장면은 덤이다.
•-양자경이 할리우드 진출 20년 만에 단독 주연을 맡았다. 원래 성룡을 주인공으로 낙점한 후 양자경을 그 부인 역에 캐스팅하려 했으나 각본 과정에서 서사를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 여성 주인공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한다.
•-씨네필이 주로 활동하는 영화 평론 사이트 레터박스에서 ‘올타임 베스트 250’ 1위에 올랐다. 이전에는 〈대부〉, 〈기생충〉이 차지했던 왕좌다.
이제 영화 이야기. 그러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매력을 글로 설명하기는 영 어렵다. 줄거리가 있고, 설정이 있고, 웃음과 감동 포인트도 있지만 이 영화의 진짜 매력은 직접 봤을 때만 확인 가능하다. 블록버스터의 소재인 양자역학과 멀티버스를 B급 감성 가득한 코미디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거창한 설정 속에서 조금씩 웃음 타율을 높여나가다가 장대한 드라마로 결론 짓는 식이다.
세탁소를 운영하는 중국계 여성 에블린은 여러 모로 퍽퍽한 삶을 살아간다. 깐깐한 아버지와 유약하기만 한 남편, 레즈비언 반항아 딸만으로도 괴로운데 세무당국의 강도 높은 조사로 그나마 운영해오던 세탁소마저 문을 닫을 판이다. 심지어 자기가 먹여 살린다고 여겼던 남편이 이혼을 준비 중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스트레스가 절정에 다다른 순간 멀티버스가 열린다. 무한한 다중 우주에는 절대 악 조부 투파키가 있고, 에블린이 그에 대항할 유일한 인물이란다. 그녀가 최후의 희망인 이유가 가관이다. 그녀는 멀티버스의 수많은 에블린 중 가장 불행한 에블린, 즉 최악의 에블린이라는 이유로 저항의 아이콘이 된다. 더는 물러설 곳 없는 엉망진창 현실이 에블린에게 준 ‘깡’이 그녀의 무기인 셈이다. 그러나 아직 최악은 아니다. 조부 투파키가 사실은 에블린의 딸 조이라는 사실이 남았기 때문. 에블린이 딸 조이에게 권위적으로 굴며 윽박질렀기에 조이가 흑화해 조부 투파키로 변했단다. 이제 에블린은 선택해야만 한다. 우주의 운명을 위해 딸을 무찌를 것인가, 형편없는 엄마였지만 뒤늦게나마 제대로 된 ‘엄마 노릇’을 하며 다른 미래를 만들 것인가.
에블린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B급 코미디 요소도 폭발한다. 딜도와 애널 플러그, 장난감 눈깔, 베이글, 쇼킹한데 고급스러운 비주얼 등등이 적극 활용된다. 여기에 심각하고 진지한 의미는 ‘없다.’ 영화를 연출한 다니엘스의 말마따나 “농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에블린의 싸움은 진지하고, 그녀가 가족과 우주 중 그 무엇도 포기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우당탕탕 대모험 끝에 에블린이 도달한 그곳에서는 마침내 감동이 피어난다. 억척스런 사업가이자 가장이었던 에블린은 웃음을 되찾고 주변 사람과 이를 함께 나눈다. 무한히 넓은 멀티버스의 모든 것(에브리씽)과 모든 장소(에브리웨어)가 모두 함께(올 앳 원스) 어우러진다.
만약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코드가 자신과 맞을지가 고민이라면, 2016 선댄스영화제 감독상을 차지한 다니엘스의 전작 〈스위스 아미 맨〉으로 취향 테스트를 해봐도 좋다. 다니엘 래드클리프가 방귀만 뀌는 언데드로 나오는 이 황당한 영화는 B급 웃음과 감동이라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공식을 그대로 갖고 있다. 두 영화 모두 호불호가 갈릴 영화임은 분명하지만, 누군가의 가슴에 꽂힐 영화임도 분명하다. 모든 진지함은 잠시 내려놓고 다니엘스의 상상력을 따라가보시기를.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두 멍청한 놈들이 만든 영화"일 뿐이라는 다니엘스(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의 말은 다소 과한 겸손이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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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밀히 내통하는 '데이빗 로워리'의 세계
은밀히 내통하는 ‘데이빗 로워리’의 세계
데이빗 로워리의 필모그래피를 훑다보면 당혹스럽다. 일련의 영화들은 하나의 카테고리로 범주화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편차도 꽤 있는 편이라 한 감독 밑에서 탄생했다고는 도무지 믿기 어렵다. 텍사스의 풍광을 중심으로 서사의 밀도보다 고독과 우울의 뉘앙스를 전면화한 멜로드라마 <에인트 뎀 바디스 세인츠>, 가족을 잃은 소년과 온순한 드래곤 사이의 가족애를 그린 디즈니 실사 애니메이션 <피터와 드래곤>, 아내 곁을 부유하는 한 유령의 절절함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저예산 영화 <고스트 스토리>, 전대미문의 은행털이범을 범죄 코미디의 형식으로 느슨하게 전개한 <미스터 스마일>, 켜켜이 쌓아올린 상징의 구조와 초현실적 공간을 기반으로 신화적 모험담을 장엄하고 기이하게 풀어낸 <그린 나이트>에 이르기까지(심지어 그의 다음 작품은 <피터 팬>을 실사화한 디즈니 영화 <피터 팬&웬디>이다). 데이빗 로워리는 특별한 사조로 묶이거나 단일한 수사로 명명되길 거부하는 감독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내밀한 특징이 전무하다는 것은 아니다. 로워리만의 전략과 세계관은 서로 다른 외피로 포장된 필모그래피에 은밀히 내장돼 점차 확장되고 있다.
1.
로워리 영화의 도입부에는 서사의 기폭제 역할을 하는 순간이 등장한다. 그 순간은 항상 죽음의 얼룩으로 칠해져 있는데, 초기작의 경우 동료의 죽음(<에인트 뎀 바디스 세인츠>)이나 가족의 죽음(<피터와 드래곤)>을 위시한 2인칭 죽음에서 후기작으로 갈수록 자신의 죽음(<고스트 스토리>)과 낯선 존재의 죽음(<그린 나이트>)이라는 (각각) 1인칭, 3인칭 죽음으로 확장된다. 일차적으로 로워리의 영화를 추동케 하는 것은 자신 혹은 타인의 죽음, 그리고 그것이 지닌 매혹의 힘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죽음이 사건이 아니라 일종의 ‘가정’처럼 주어진다는 점이다. <에인트 뎀 바디스 세인츠>에서 로워리는 연인 관계인 밥과 루스가 어째서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지, 그들의 범행 계획은 어떻게 어그러졌으며 어떤 경위를 거쳐 경찰과 대치하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그들의 동료 프레디의 죽음을 슬그머니 밀어 넣는다. 프레디의 죽음으로 절망에 빠진 밥은 경찰에게 체포되고 루스는 그와 떨어져 뱃속의 아이와 외로이 생을 보내야만 한다. 관객에게 제시되는 정보는 밥과 루스의 사랑이 꽤 깊다는 것뿐이다. 그렇게 영화는 연인 관계의 두 사람이 동료의 죽음으로 인해 물리적으로 분리된다면 그 이후의 생은 어떻게 될지 질문한다. <피터와 드래곤>은 더욱 극단적인데, 시작과 동시에 피터는 교통사고로 부모를 모두 잃고, 자취를 감추고 사는 드래곤과 조우하여 유사 가족을 이뤄 살게 된다. 의아한 것은 차가 전복되어 성인 두 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할 정도의 대형 사고였음에도 불구하고 유아기의 피터는 별다른 상처 없이 살아남아 심지어 멀쩡히 숲으로 걸어간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로워리에게 인물의 과거와 현재의 정보를 배합하려는 시도, 그러니까 인물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일은 전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는 인물을 수식하는 최소한의 수사를 제시한 다음, 죽음이라는 가정법을 통해 죽음이 낳은 이후의 삶과 그 영향 하에 흘러가는 시간의 뉘앙스를 시각화하는 데 관심을 둘 뿐이다. <고스트 스토리>에서 C의 죽음 또한 교통사고라는 우연적 사건으로 덩그러니 제시되며, <그린 나이트>에서 상대에게 목 베임을 당하는 녹색 기사의 타살 퍼포먼스도 허무맹랑한 게임의 규칙으로 존재할 뿐 그 본질과 통하는 논리적 인과 관계는 부재하다. 그런 점에서 로워리의 영화를 ‘죽음의 가정법’이 추동하는 영화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로워리가 죽음의 가정법이라는 전략을 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로워리의 영화들을 보다 보면, 정황이나 뉘앙스가 우선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다르게 말하면 그의 영화에는 캐릭터가 부재하다. 캐릭터라이징에 앞서 위에 기술한 가정법이 선제적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관객에게 제공되는 것은 가정법의 성립을 위한 최소한의 정보뿐이다. 때문에 로워리의 인물들은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에인트 뎀 바디스 세인츠>에서 루스와 밥은 현실 세계의 연인처럼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곧 잊혀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는 속담의 진위 여부를 판별하기 위해 직접 실험을 감행하는 수행자처럼 보이며, <피터와 드래곤>에서 피터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접점에서 두 세계의 공존이 가능한지 확인하는 관찰자처럼 그려진다. 또한 <고스트 스토리>에서 C는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놓고 떠난 자의 시간성을 가늠해보기 위한 영화적 존재처럼 기능하고, <그린 나이트>에서 가웨인은 위엄과 재생의 신비함으로 무장한 영화적 존재 ‘녹색 기사’의 경지에 도달해야 하는 비루한 현실적 존재로 형상화된다. 로워리에게 중요한 것은 인물의 성격이 아니라, 그들이 수행하는 탐구와 그에 대한 주관적 응답이다. 로워리는 이 성실한 수행자들을 통해 특정 명제나 세계, 혹은 추상적 개념을 시각화하고, 그것의 진실을 풀어내는 데 애쓴다.
2.
로워리는 영화와 현실 간의 역학을 탐구하고 그것들을 질료 삼아 서사를 구축하는 시네아스트다. <고스트 스토리>, <그린 나이트>에는 무엇보다 초현실적인 존재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영화 그 자체의 환유처럼 형상화된다. <고스트 스토리>에서 C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고스트로 환생한다. 하얀 천을 머리에 두른 괴이한 형상은 추상적인 개념이나 자아를 체현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행할 수 있는 신체적 기능이 오직 응시뿐이라는 점이다. 그는 하얀 천에 뚫린 두 개의 구멍으로 시종일관 현실의 대상을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때로 접시를 집어 던지고, 피아노 건반을 내리치는 등 현실의 물질적 조건에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순간적이며 소박하다. M이 바닥에 누워 C에게 선물 받았던 노래를 들으며 과거를 회상할 때 머리맡으로 뻗힌 손이 고스트의 하얀 천과 거의 접촉되는 듯 보이는 쇼트는 그래서 외설적이고 신비롭다.
더불어 고스트는 줄곧 남겨진 아내 M의 행동을 관찰하고, 그가 머무는 집의 구석구석을 탐방하며 시간의 흐름을 감각하게 만든다. 가령, M이 상실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이웃이 선물한 파이를 우걱우걱 입에 집어넣는 긴 쇼트에서 프레임 가장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정지된 형상의 고스트는, 화면 내 유일하게 운동하고 있는 M의 처연한 몸짓과 대비를 이루며 시간의 흐름을 역으로 체감하게 만든다. 응시와 시간성이라는 감각 기능을 탑재한 고스트는 마찬가지로 관객에게 응시의 기회를 부여하고 시간성을 체감하게 해주는 ‘영화’와 유독 닮아 있다.
사랑하는 아내를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난 남자의 영적 멜로드라마처럼 보였던 영화는 의아하게도 중반부가 되자 그 둘을 완전히 떼어놓는다. 고스트는 집을 떠나는 M을 멀리서 바라볼 뿐 그녀를 따라가지 않는다. 왜 고스트는 그 집에 남아야만 했을까. 답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그녀가 문설주 틈에 새겨 넣은 메시지, 그러니까 현실이 남긴 진실을 발견해야 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고스트 스토리>는 현실이 남긴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영화의 숙명에 관한 영화다. 다만, 그 메시지의 내용은 중요하지 않다. 마침내 고스트가 쪽지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 그는 일순 하얀 천만 남기고 소멸된다. 현실의 진실을 알게 된 완전한 영화는 그 순간 영화가 아니며, 현실의 다른 버전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고스트 스토리>가 고스트로 분한 영화가 현실을 응시하며 그 물질적 조건에 대응하고 끝내 소멸하는 과정을 그린다면 <그린 나이트>는 비루한 기사 가웨인으로 대변되는 남루한 현실이 녹색 기사로 분한 성스러운 영화로 이행되는 과정을 그린다. 녹색 예배당으로 향하는 가웨인의 긴 여정은 현실이 영화로 이행되는 과정에 수반되어야 할 덕목들을 탐구하고 점검함으로써 종국에 영화가 현실과 분리되어 독자화되는 과정에 대한 거대한 은유이다.
<그린 나이트>는 크리스마스 연회가 열리는 예배당에 이르러 비로소 제대로 시작된다. 이때 카메라에 붙잡힌 가웨인은 예배당 상층부에 뚫린 원형의 창에서 사선 아래 방향으로 내려오고 있는 푸르고 투명한 빛을 바라본다. 빛은 원탁의 중심부를 성스럽게 비추는데, 이 형상은 마치 스크린에 투영되는 영사기 렌즈의 광원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원탁의 중심부는 그 빛이 가닿아 무대화된 스크린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 무대 위에 서는 녹색 기사는 스크린에서 퍼포먼스를 행하는 영화적 존재, 혹은 영화 그 자체이다.
사창가에서 유흥을 즐기는 게 일상인 부패한 기사 가웨인에게 왕은 “무용담 없이 왕위 계승은 꿈도 꾸지 말라.”는 일종의 압박이자 명령을 하사한다. 이로써 가웨인은 왕이 되기 위해 무용담이 필요한 현실적 자리에 머문다. 그는 방탕한 성적 유희로 얼룩져 있는 남자이고, 권력을 노리는 탐욕가이면서 한편으론 엄마와 여자 친구를 사랑하는, 남루하면서도 지극히 평범한 현실적 존재이다. 그런 그의 앞에, 즉 무대화된 스크린에 재생의 신비함으로 무장한 녹색 기사가 출연한다. 녹색 기사는 자신과 겨뤄 승리한 자에게 본인이 당한 만큼 다음 해 크리스마스에 똑같이 되갚아 준다는 황당무계한 목 베기 게임을 제안하고, 가웨인이 이에 동참하면서 남루한 현실이 성스러운 영화로 다가가는, 그 긴 이행의 과정이 시작된다.
녹색 예배당으로의 여정은 크게 네 개의 시퀀스로 구성되는데, 이는 곧 네 개의 시험대라고 말할 수 있다. 관문에서 요구되는 것들을 요약하자면 (피해자에 대한) 연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 상상력에 따른 생경함의 창조, 사랑의 윤리와 죽음의 두려움에 대한 극복이다. 각 시퀀스들은 매번 출제자처럼 보이는 인물 혹은 대상, 이를 테면 소년병, 성 위니프레드, 환각의 버섯, 성주와 성주부인을 내세워 문제를 출제하고, 가웨인이 그것들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짜여 있다. 정답과 오답을 오가며 마침내 녹색 기사 앞에 다다른 가웨인은 죽음 앞에서, 만약 지금 녹색 기사의 도끼를 피해 집으로 달아난다면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상상에 빠진다. 공교롭게도 상상 속 미래는 그간의 여정에서 끝내 체현하지 못한 덕목들, (전쟁 피해자에 대한) 연민, 사랑의 윤리,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의 문제가 고스란히 발현되며 끔찍한 결과로 치닫는다. 그런 점에서 이 몽타주 시퀀스는 필수 덕목들을 놓친 현실이 영화로 이행되었을 때의 결과를 상상 속에서 미리 상연해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침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진실을 알게 된 가웨인(현실)은 죽음을 받아들이고 영화로 이행될 자격을 얻는다. 그렇게 현실은 소멸되고 영화는 독자화된다.
로워리의 세계에서 그것이 영화든 현실이든 서로에 가닿을 때 그중 하나는 필연적으로 소멸한다. 두 세계가 등가적 관계에 있다면 어느 쪽이든 하나는 무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본질은 불완전함에 있다. 두 세계는 불완전하기에 영원히 존속된다. <미스터 스마일>에서 전설적인 은행털이범 포레스트 터커는 자신이 어디서 무얼 하는지 확신이 없을 때, 꼬마였던 과거를 떠올리며 그 아이가 노년이 된 현재를 자랑스러워할지 상념에 잠긴다. 그리곤 다행히 매일 그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다고 덧붙인다. 그러자 그의 연인 주얼이 답한다. “하지만 절대 완전히 다다를 순 없을 거예요, 그렇죠? 그건 죽어서나 가능하니까.” 영화와 현실의 관계를 바라보는 로워리의 시선은 이 대사로 명료히 설명된다.
3.
로워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보이지 않는 것이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피터와 그래곤>은 이 믿음을 일차원적으로 표면화한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숲에 사는 드래곤을 본 적 있다고 주장하는 미챔은 본인의 말을 믿지 않는 딸에게 “네가 못 봤다고 없는 건 아냐.”라고 단호히 말한다. 그리고는 그녀를 ‘눈앞의 것밖엔 못 보는’ 존재로 규정한다. <피터와 드래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려는 자와 보이지 않지만 그것의 실존을 믿는 자들 사이의 대립과 화해를 그린 이야기다. 다만, <피터와 드래곤>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문제는 그저 작중 인물들 사이에 국한된다. 관객은 도입부에서 작중 현실과 화면에 이질감 없이 동화되어 있는 드래곤의 형상을 이미 보았고, 실사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의 관습에 익히 훈련되어 있는 탓에 그 존재를 구태여 부정할 아무 이유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스트 스토리>에 이르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때 화목했으나 잠시 아내 M과 사이가 냉랭해진 C는 돌연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난 뒤, 하얀 천을 머리에 쓴 고스트의 형상으로 느닷없이 부활한다. 관객은 그간 한 번도 학습되지 않은 고스트의 부활 장면과 그 괴이한 형상을 직시하며, 심지어 그가 존재하지 않는 듯 행동하는 작중 인물들의 동선과 행동방식을 관찰하며, 이 황당무계한 존재의 실존을 믿어야 하는지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작중 인물 간의 문제를 관객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린 로워리는 이 구도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의 실존 가능성을 암시하며, 그 존재가 추동하는 서사의 가능성을 선보인다. 그리고 <그린 나이트>에 이르러 이 믿음의 유무가 영화의 존재 혹은 영화 제작의 실현을 가능케 하는 필수 덕목이라고 설파한다. (위에서 언급했듯) 남루한 현실적 존재인 가웨인이 영화적 존재 녹색 기사에 가닿으려는 이행의 과정에서 가웨인과 성 위니프레드의 만남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의 문제를 분명히 드러낸다. 그녀는 멀쩡히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머리가 허상이라는 듯 연못에 빠진 자신의 머리를 건져와 달라고 부탁한다. 두 눈에 명백히 보이는 그녀의 머리를 두고 혼란에 빠진 가웨인은 묻는다. “아가씨, 당신은 사람인가요? 정령인가요?” 달리 표현하면, “보이는 것을 믿어야 하나요?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야 하나요?” 가웨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기로 결심하고, 연못에서 그녀의 머리를 꺼내줌으로써 잃어버렸던 녹색 기사의 도끼를 보상으로 돌려받는다. 그렇게 로워리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을 영화의 근간으로 삼으며 이에 대한 공감을 관객에게 요청하는 방식으로 독창적 우주를 구축해 나간다. <피터와 드래곤>의 미챔의 말을 빌리자면, 로워리는 관객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는 것 같다. “그냥 마음의 눈을 열어보라고 말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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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더 배트맨]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비난은 늘 낯설고 새로운 것의 그림자 역할을 자처했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처음 007이 되었을 때만 해도 모든 사람들이 여태까지 이런 007은 본 적이 없다며 비난과 험담의 벽을 쌓아 올렸으니까.
그러나 첫 작품이었던 [카지노 로열]은 사람들이 쌓아놓은 미움의 벽을 시원하게 밀어버렸다. 덕분에 다니엘은 시리즈 사상 가장 마초적이면서 인간적인 요원으로 자리 잡았고. 15년 동안의 임무를 완수하고 기꺼이 우리에게 안녕을 고했다. (참고 1)
DC에서 가장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다고 과언이 아닐 배트맨 시리즈는.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잡기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손에서 가장 완벽한 3부작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희대의 악역인 조커를 낳았다.
이런 시리즈에 아직 물음표가 가득한 배우인 로버트 패틴슨을 앞세운 새 배트맨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매우 큰 모험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영화 [더 배트맨]의 시작은 새로운 것들로 가득했고. 덕분에 그림자인 비난 역시 짙게 깔려있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 [더 배트맨]은 이런 비난의 색을 가득 담았다. 어둡고 또 무겁다. 로버트 패틴슨은 우울하고도 생각으로 가득한 배트맨 역할을 여태 해 온 역할들과는 다른 분위기로 풀어내 영화의 깊이를 더했다.
제작진이 비난에 대처한 방식은 영화의 색깔과 같았고. 비난은 슬그머니 배트맨이 가진 고뇌의 무게에 합쳐져 긴 러닝타임 내내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9회 말 2아웃 상황의 DC가 드디어 해냈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이면 가벼운 마음만큼이나 영화 속 배트맨의 마음도 조금은 밝아졌음을 느낄 수 있다.
3,6,9는 진리다.;배트맨도 피할 수 없는 3년 차 성적표
사진 출처:다음 영화
3년 차.
일반 회사로 친다면 이제 슬슬 대리 달아야지?라는 덕담 같은 압박이 귓가에 쌓이기 시작할 때다. 불가능할 것만 같던 업무 짬도 차기 시작하고 전체적인 일의 그림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익숙해져 버린 자리 덕에 슬슬 회사 전체에 대한 불만도, 그리고 이직을 했을 경우의 "조건"들에 대해 점치기도 시작한다. 또한 근원적으로 내가 과연 이 일을 계속해도 될 것인가에 대한 의심과 물음도 하나둘씩 마음을 채운다.
올해 3년 차에 들어선 고담 시 (명예) 공무원인 배트맨의 위치가 정확히 이 지점에 있다. 이제 고담 시 전체도 제법 눈에 익었고. 모든 범죄에 출동할 수 없으니 Priority를 세워 선택적으로 야근할(?) 줄도 안다. 그럼에도 고담 시의 경찰들에게는 가면을 쓴 자경단들 중 하나 정도라는 생각에 그칠 뿐이지만.
그럼에도 경찰들이 이 혼돈의 배트맨을 잡아들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에게 기대하는 "능력"이 (연차 대비) 출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뛰지 않는다.
날아다니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현란하게 움직이지도 않는다. 배트맨은 자신의 정체가 그들의 코앞에 다가갈 때까지 천천히, 그리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밤이 만들어 낸 안개가 걷히면서 배트맨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에. 범죄자들은 그제서야 허공을 향해 빛나고 있는 박쥐 모양의 경광등을 떠올리며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어진다. 물론 그 마른침이 다 넘어가기도 전에 얻어맞고 바닥에 뻗어 있겠지만.
영화는 배트맨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위압감을 매우 잘 묘사하고 있다. 분명 다른 히어로들보다 휘황 찬란하다거나, 빠르지도 않지만. 배트맨이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오는 압박감만은 매우 대단하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그 발걸음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집념을 느낀 악당들에게 배트맨은 훌륭하고도 끔찍한 악몽이며.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지만 동시에 만나보고 싶기도 한 빌런이다.
세례 받은 배트맨;자신 스스로도 구원해 내기.
사진출처:다음 영화
영화 속 배트맨은. 마치 자신의 진정한 MBTI가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수많은 질문들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행하던 것이 복수였는지. 혹은 정의였는지에 대해 생각하듯이.(참고 2)
리들러의 공격은 너무도 현실에 착 붙어 있어서.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점을 파고들었다. 덕분에 외면하고 싶은 연좌제에 대한 이슈를 똑바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 또한 뒷골목의 사람과 다를 바가 없을 것만 같아서.
셀리나는 자신이 드러낼 수 없는 마음속 분노의 모습과 닮아있어 더 이상의 고아가 탄생하는 것도. 고아가 저지르는 잘못도 없기를 바라는 배트맨의 입장에서는 그녀가 어둠 속에서 사는 사람이 되는 것 또한 막아야 했다.
여기까지면 좋으련만. 브루스 웨인으로서의 삶은 일찌감치 박살 난 지 오래라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도 감을 잡을 수가 없는 상황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엉망인데. 배트맨은 자신의 앞에 놓인 질문에 답을 해야 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고 정확하게. 게다가 늦지 않게.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고담 시 사람들이 사상을 입을 수도 있는 그 순간에. 배트맨은 마지막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기꺼이 물속으로 뛰어든다.
마치 영화의 진행 내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던 복수와 정의 중 후자를 선택하기로 마음먹은 순간임과 동시에. 여태까지 지니고 있던 모든 고뇌를 세례를 통해 씻어내린 것처럼 느끼게 하는 장면이었다.
그의 MBTI는 결정되었고. 동시에 새로운 배트맨이 되었다. 그리고 배트맨은 망설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좀 더 가까이서 직접 돕는 것을 가장 먼저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그는 이 역할에 당위성을 고쳐 붙였다. 스스로의 힘으로.
다른 사람을 구하겠다고 생각했지만. 과연 그가 건져올린 것들에 자신도 있음을 알아주는 날이 오기를 빈다.
과연 이직에 성공할 수 있을까?;일단 야근부터 좀 어떻게 해보자.
사진 출처:다음 영화
영화의 말미에. 배트맨은 아주 잠깐이지만 그 지독한 어둠에서 벗어나 사람들을 도우는 일에 합류한다. 마치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가리기라도 하려는 듯 그 모습마저도 먼지 구덩이에서 한 번은 구르고 나온 것 같은 모습이지만. 배트맨의 눈길과 몸짓은 경직되어 있던 영화의 초반과는 조금은 달라 보이기까지 한다.
그전까지 자신에게는 어둠만 허락된다고 생각했다. 어둠을 먹고 사는 자들을 처리하는 것이 자신의 복수이자 고담 시의 질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밤의 지배자들에게는 두려움이라는 바이러스를 뿌려댈 수 있지만. 낮의 주인들에게는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낮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 희망이 전염될 가능성이 더 많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이제 배트맨은 고담 시를 떠날 수 없다.
3년 차가 갖고 있던 고민도 사라졌고, 자신의 MBTI도 명확해졌다. 그리고 야근만 하던 삶을 주간 근무로 바꿀 수 있는 희망도 이젠 갖게 되었다.물론 이런 각오가 무색하게 6년 차의 헛바람은 찾아올 것이고. 이 도시는 여전히 자신을 배신하겠지만. 게다가 잊고 있었던 야근도 종종 하게 될 테지만. 이제 배트맨의 눈은 바뀌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는 매일 다른 것을 하며 자극을 찾는 것이 아닌. 똑같은 일상을 견뎌내는 힘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눈으로.이 초보 공무원이 고담에서 보낼 영원한 시간들 중 딱 오늘 하루만이라도 부디 평온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야근도 안 하면 더 좋고.
마치면서;+좋아한 장면
호불호가 매우 강할 영화다. 액션이나 최첨단 무기, 혹은 브루스 웨인의 어마 무시한 부(Richness)를 기대한다면 한없이 지루할 것이고. 지울 수 없는 이름인 히스 레저를 떠올린다면 더더욱 실망할 영화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들을 지우고 새로운 배트맨에 집중한 것이 좋았다. 배트맨의 탄생이나 고담 시 7급 공무원 정도의 짬을 가진 타이밍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제 겨우 병아리 티를 벗고 뭔가 해보려고 하는 의욕은 많지만 처음 접해보는 문제들에 부딪쳐 시무룩해지기 쉬운 딱 3년 차의 모습이라서. 그냥 응원해 주고 싶었다.
최근 영화가 길어지는 추세에 대한 큰 반감이 있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닝타임이 길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다못해 리뷰를 어떻게 써야 할까 같은 쓸데없는 잡생각 없이 그저 이 야근만 하는 공무원의 고군분투 일처리를 보다 영화관을 나왔다. 그가 아주 조금은 행복.. 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음이 가벼워진 게 보이는 것 같아 다행이다.
[좋아한 장면]
중간에 나오는 자동차 추격전 장면과 천장을 박살 내면서 떨어져내리는 장면은 뭐 말할 것도 없지만. 글에도 쓴 홍수 난 광장으로 떨어지는 장면에서 그냥 자꾸 눈물이 났음. 기꺼이 고난으로 뛰어드는 자 만이 얻을 수 있는 재탄생을 잘 살린 것 같았음.
참고 1
007시리즈 말고 다니엘 크레이그가 연기한 007에 대해 쓰다가 저장해둔 글이 있었는데 거기서 조금 갖고 옴. 개인적으로 크리스찬 베일의 엄청난 팬이기 때문에 로버트 패틴슨이 배트맨을 한다고 했을 때 입에 거품을 물고 반대했던 사람이었으나. 이 영화 보고 나서 영원히 입다물기로 함.
참고 2
내 MBTI도 제대로 못 외우는 주제에 리뷰 쓰겠다고 찾아봄. 실제로 배트맨의 MBTI는 INTJ이며. 나는 INFJ임. 문제는 그게 무슨 뜻인지를 아직도 잘 모름.
[이 글의 TMI]
1. 영화는 (너무 무거워서) 내 취향이지만. 리뷰는 좀 가볍게 쓰고 싶었음.
2. 어두운 영화 좋아하는지 몰랐는데 내 OTT 서비스 보고 싶어요 한 목록 보니까 이건 뭐. 아포칼립스던데.
3. 샐러드 먹고 16시간 금식은 내가 봐도 너무 힘들다. 근데 그걸 두 달째 하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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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대적으로 착한 인간은 없다
한 여자가 법정에 등장한다. 하지만 그녀는 법정복을 입지 않는다. 수많은 재력가, 사교계 셀러브리티들의 환심을 사고, 그들의 돈을 뜯어간 당돌하다 못해 위험한 여자. 이 여자의 이름은 애나 델비. 본명은 애나 소로킨이다. 하지만 이 여자는 자신이 사기를 치고 다녔다는 증거가 이렇게도 많은데, 끝까지 자신은 소로킨이 아니라 애나 델비라고 우긴다.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각기 다른 상반된 입장을 표출하니, 애나를 취재하는 기자인 비비안은 점점 더 혼란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가 버린다. 과연 진짜 애나 델비는 어디 있는 걸까, 그리고 그녀의 측근들은 그녀의 어떤 매력에 매료되었던 걸까.
1. 셀러브리티의 시대, 셀럽의 이면.
애나 델비를 두고, 그 주변 인물들이 느꼈던 감정은 복합적이다. 누군가는 불여우로 보았고, 누군가는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연약한 여자로 보기도 했으며, 누군가는 거만한 여자로 보기도 했다. 그만큼 그녀는 하나의 키워드로 정의내릴 수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를 명확히 정의내릴 수 있는 단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셀러브리티". 그녀는 셀럽이었다.
셀럽이라는 단어는 그녀가 유명하다는 것을 뜻하지만 그녀가 유명하다는 사실은 그녀 한 명을 판단내리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의 쥐고 흔드는 잣대들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녀는 인스타 셀럽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외면을 부러워하며, 그녀를 추종했던 수많은 팔로워들이 있었지만 그녀를 질투하며, 그녀를 까내리려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그녀의 관종력에 박수를 쳤든, 비판을 했든 그녀를 판단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그녀라는 한 사람을 상대로 각자의 경험, 편견을 대입해 그녀를 판단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은 애나 델비가 제공한 제한된 정보로 그녀를 보고 싶은 대로 평가한다는 것이다. 셀럽들이 보여주는 한정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한 사람을 모두 이해했다고 볼 수는 없는데, 우리들은 인터넷에 나오는 정보들이 전부라고 "착각"하고, 그 한정된 정보들을 가지고, 한 사람의 인생, 행동 등을 단정짓는다. 마치 자신이 홈즈라도 되는 듯이, "내가 다 경험해 봤어"라고 으스대며, 경험의 늪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확증 편향의 동물이라는 것이다.
2. 하이에나들이 득실거리는 뉴욕 사교계
애나 델비라는 사람에 대해 각기 평가가 달랐지만 그녀에 대한 공통된 특징이 있었다. 그녀는 돈 많은 독일의 상속녀였다는 것이고, 그녀는 항상 자신의 부를 드러내어 상대의 호의적인 태도를 유도했다는 것이다. 항상 도도했고, 높은 수준의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애나의 일부 성격만을 보고, 그녀의 전체를 단정지어 섣불리 판단했던 그들, 이 드라마는 그들이 오히려 주인공인 드라마이다.
상류층들은 그녀의 높은 취향과 도도한 성격에 시선이 사로잡혀 그녀의 거짓말의 맹점을 보지 못헀다. 이런 걸 보고 있자면, 확증 편향은 사회적 지위, 경제적 지위와는 상관없이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범할 수 있는 오류인 것이다. 하지만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이 사람을 판단할 때, 그들이 범하는 오류는 그들이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기에 자신의 판단이 무조건적으로 옳을 것이라는 자신감, 오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누군가를 판단할 때에 내 판단이 전부 옳다는 오만 이전에 열등감이 더 크게 작용한 경우가 그녀의 친구인 네프였다. 그녀의 친구들 중 하나였던 네프는 그녀의 사기행각의 전말을 눈으로 보고도 그녀에 대한 애정을 놓지 못하고, 끝까지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이 되어준다. 그녀의 사기 행적의 증거들을 보고도 끝까지 그녀의 조력자가 되어준다. 그녀는 그 삶이 거짓이었다고 하더라도 애나가 선사한 상류층의 삶을 맛보게 해준 것만으로도 애나에 대한 충성심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애나가 네프에게 충족시켜 준 것은 가난한 자신의 삶에 한 줄기 화려함이었기 때문에 애나가 무너진다는 것은 자신이 누려온 화려함이 끝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애나의 실패를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다. 혹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던 그녀가 그 정도의 화려함을 이룩해내었다는 점에서 그녀를 존경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친구로 시작했지만 원수로 끝난 레이첼의 경우도 독특하다. 레이첼이 애나와 친구가 된 동기는 네프와 비슷하다. 애나의 화려한 삶의 일부라도 누리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레이첼은 네프와는 다른 결과를 만들어낸다. 레이첼은 애나와의 관계에서 피해자이자 가해자였다. 둘은 서로를 그저 이용당해 주고, 이용했을 뿐이었다. 애나는 레이첼을 시녀처럼 이용했고, 레이첼은 애나가 가진 이름값을 이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애나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모두 애나에게 이용당했다고 주장헀지만 사실은 그들도 애나를 이용하고 있었다. 사실 애나를 취재했던 비비안조차 사람들이 그녀의 이야기에 알 권리가 있기 때문에 정의로운 글을 쓰는 척했지만 사실 그녀도 자신의 망가진 커리어를 되살리기 위해 애나를 이용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3. 애나를 두고 드러나는 인간의 다양성
애나 델비는 자신이 되고 싶었던 fake self를 현실화하려고 노력했던 인물이다. 그 과정이 사기였지만. 그런 그녀의 처절한 노력의 근원에는 그녀 자신에 대한 열등감이 있다. 인스타그램에는 자신이 되고 싶은 fake self를 재창조해내는 사람들이 많다. 애나 델비는 그 수많은 인스타 스타들 중 안 좋은 쪽으로 배짱있는 인물이 아니었을까.
드라마를 보다보면, 상류층의 오만에 어퍼킥을 날렸다는 이유로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다. 비비안과 애나의 변호사,네프 등, 그런 사람들이 꽤 많다. 특히 애나의 변호사가 그녀에게 시달리면서도 그녀에 대해 안쓰러움을 느끼는 이유는 상류층의 오만, 판단에 지쳐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질려버린 상류층의 독단적인 태도에 폭탄을 던져버린 애나의 모습에 되려 그가 대신 통쾌함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비비안이 애나를 취재하면서 애나와 싸워가면서 정드는 모습, 그녀에 대해 인간적으로 호감을 느끼는 모습 등을 통해 애나 델비라는 문제적 인물을 두고,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모두 다르고, 그 감정들이 모두 입체적이라는 데에서 인간은 정말 복잡한 존재라는 것을 다시금 느낀다.
이 드라마에서 애나델비는 수많은 착한 사람들에게 범죄를 저지른 용서할 수 없는 나쁜 사람으로 설정하지 않고, 그녀에게 당한 사람들도 무조건적인 착한 사람으로 설정하지 않아 도대체 인간에게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이런 드라마를 보면, 나는 오히려 마음이 더 복잡해진다. 내 자신이 관계에 대한 불안으로 복잡한 생각을 오래하기 싫어 사람에 대해 쉽고 빠르게 단정지으려고 하지는 않는지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결국, 이 드라마는 한 여자의 사기극을 관망하기 위해 가볍게 시작하지만 관계에 대한 무거운 고민으로 끝맺게 되는 드라마인 것이다.
한 줄 평
사람은 인간을 평가내릴 때, 빠른 단정적 판단으로 안정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인간이 왜 다른 이들을 한정된 정보로 단정지으려 하는가에 대해 성찰해보면, 결국 인간의 복잡성에 대해 인지하고 있고, 그에 대해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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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찾는 여정, <걸후드>
인생은 끊임없이 나를 찾아가는 여정과도 같다. 우리는 살면서 보고 겪는 모든 존재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성장시킨다. <걸후드>는 셀린 시아마 감독이 보여주는 십 대 여성 청소년의 성장기이고, 그 단면을 통해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에게 물음을 던진다. 관객은 스스로 돌이키게 된다. 당신은 얼마나 스스로에 대해 알고, 찾았는가?
영화는 생계를 이끄는 모친을 대신하여 동생들을 돌보며 사는 여성 십 대 청소년인 `마리엠`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 영화에서 마리엠이 남성이 아닌 여성이라는 점의 극의 주제를 관통하고 있는 부분이기에 관객은 이를 간과할 수가 없다. 여성의 삶이라는 타이틀로도 고될 수 있는 주제는 십 대 청소년이라는 소재가 더해지며 더욱 주인공을 조인다. 평화로워 보이는 많은 청소년의 삶 중 특별히 흑인인 십 대의 여성 청소년을 그린 이유를 분명하게 인식하며 영화를 관람할 수밖에 없다.
<걸후드>는 마리엠이 성장하면서, 스스로가 그린 삶의 궤적을 더듬어가며 새 발자국을 남기는 과정을 세밀하게 보여주기 위해 세밀한 장치들을 마련해두었다. 친구, 가족, 주변인으로 뻗어나가며 겪는 감정 변화와 그에 따른 연기는, 우리가 이 영화를 감상하며 그 인물의 삶을 사는 것처럼 느끼고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에서의 성장은 마냥 고되거나 우울하지만은 않다. 성장은 삶의 일부 과정이기에 마리엠은 보통의 나날처럼 웃고, 울고, 화내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마리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또 누군가는 그의 삶에 흔적조차 남길 수 없는 미미한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그에 따라 마리엠은 한 그룹의 주요 인물이었다가 있는 듯 없는 듯 한 존재가 되기도 하며, 자신을 완전히 다잡은 사람이었다가 맥없이 무너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마냥 초조하지만은 않다. 삶의 일부이며 관객인 우리 자신이 그랬듯 마리엠이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거나 답을 찾아낼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 때문이다. 마리엠을 어떻게 살아갈지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도 온몸을 내던져 세상을 경험한다. 자신과도 타인과도 수없이 부딪혀가며 빛을 내며 단단해진다. 영화 속 다이아몬드 장면이 떠오른다. 러닝타임 내내 몸과 행동으로 외쳐오던 마리엠은 끝끝내 그런 인생을 싫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며 자신의 새 방향을 찾아낸다. 그 방향이 어디인지 관객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우리는 마리엠이 제자리걸음을 멈춰 나아가리라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결국 마리엠은 찾아낼 것이다. <걸후드>는 그렇게 믿게 하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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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남산의 부장들'과 관련된 3가지 이야기/예고편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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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베놈 2 : 렛데어 비 카니지> 첫번째 30초 예고편
'베놈'과 완벽한 파트너가 된 '에디 브룩' 앞에 클리터스 캐서디'가 '카니지'로 등장, 앞으로 닥칠 대혼돈의 세상을 예고한다. 대혼돈의 시대가 시작되고, 악을 악으로 처단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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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코다> 파이널 예고편
24/7 함께 시간을 보내며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가족을 세상과 연결하는 코다 '루비'는
짝사랑하는 '마일스'를 따라간 합창단에서 노래하는 기쁨과 숨겨진 재능을 알게 된다.
합창단 선생님의 도움으로 마일스와의 듀엣 콘서트와 버클리 음대 오디션의 기회까지 얻지만
자신 없이는 어려움을 겪게 될 가족과 노래를 향한 꿈 사이에서 루비는 망설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