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3-03-21 12:11:47
3월 4주 차 개봉작, 공개 예정작 추천
안녕하세요!
영화/OTT 콘텐츠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오늘은 이번 주 개봉, 또는 공개 예정인 작품들을 소개해 드리는 시간을 가질 거예요!
스티븐 스필버그의 자전적 영화로 주목받는 <파벨만스>부터
전종서의 할리우드 데뷔작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까지!
영화팬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개봉작들을 지금 바로 만나보실까요?
파벨만스
The Fabelmans

개요: 드라마 | 미국 | 151분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출연: 미셸 윌리엄스, 폴 다노, 세스 로건, 가브리엘 라벨 등
개봉: 2023.03.22.
배급: CJ ENM
시놉시스
난생처음 극장에서 스크린을 마주한 순간부터 영화와 사랑에 빠진 소년 ‘새미’(가브리엘 라벨). 아빠 ‘버트’(폴 다노)의 8mm 카메라를 들고 일상의 모든 순간을 담기 위해 열중하던 새미는 우연히 필름에 포착된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되고 충격에 휩싸인다. 진실을 비추는 필름의 힘을 실감한 새미에게 크고 작은 삶의 변화가 일어나고 엄마 ‘미치’(미셸 윌리엄스)의 응원으로 영화를 향한 열정은 더욱 뜨거워져만 가는데… 영원히 간직하고픈 기억, 영화의 모든 순간과 사랑에 빠진다!
CINE PICK!
<파벨만스>는 수많은 명작들을 배출한 할리우드의 명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감독 본인이 "이 영화는 내가 가진 기억 그 자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스티븐 스필버그가 성장 과정 속에 겪었던 에피소드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고 하는데요, 단순히 그의 영화제작 일대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이혼,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 등 한 개인이 그의 삶을 통해 투영해 낼 수 있는 다양한 감정을 녹여내 수많은 영화인들과 평론가의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특히 <듄>, <컨택트> 등으로 유명한 드니 빌뇌브 감독은 이 영화를 '기적'이라고 평가하며 시네마의 힘을 다룬 영화들 중 가장 위대한 영화라고 극찬했다고 합니다.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작품상, 감독상을 포함해 총 7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화제가 되기도 했었지요. 일평생 영화를 사랑했던 감독의 삶을 그린 영화다 보니, 영화와 관련한 레퍼런스가 많이 등장하고 시네마 자체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나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에게는 선물 같은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
Mona Lisa and the Blood Moon

개요: 판타지, 미스터리, 스릴러 | 미국 | 107분
감독: 애나 릴리 아미푸르
출연: 전종서, 케이트 허드슨, 크레이그 로빈슨 등
개봉: 2023.03.22.
배급: 판씨네마(주)
시놉시스
붉은 달이 뜨던 밤, 폐쇄병동에서 스스로 탈출한 '모나'(전종서)는 화려한 조명에 이끌려 도착한 낯선 도시에서 자신의 특별함을 알아챈 기묘한 사람들을 만난다. 모나의 능력으로 일확천금을 꿈꾸는 댄서 '보니'(케이트 허드슨), 모나한테 첫눈에 반한 로맨티시스트 DJ '퍼즈'(에드 스크레인), 모나에게 락 스피릿을 가르친 11살의 소울메이트 '찰리'(에반 휘튼), 그리고 모나를 뒤쫓는 언럭키한 경찰 '해롤드'(크레이그 로빈슨)까지. 완벽한 밤… 완전한 자유? 완성된 운명!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모나'의 모험이 펼쳐진다.
CINE PICK!
<모나리자와 블러드 문>은 독보적인 분위기와 눈빛으로 <버닝>의 '해미', <콜>의 '영숙' 등 매번 전례 없는 개성을 지닌 캐릭터를 탄생시켜 온 배우 전종서의 할리우드 데뷔작으로, 폐쇄병동을 도망친 의문의 존재 '모나'가 낯선 도시에서 만난 이들과 완벽한 자유를 찾아 떠나는 미스터리 펑키 스릴러라고 합니다.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와 베니스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수상작 <더 배드 배치>로 단 두 작품만에 전 세계에 자신만의 색깔을 확실하게 각인시킨 애나 릴리 아미푸르 감독이 연출과 각본을 맡았으며 <유전>, <미드소마> 등 다수의 작품들을 함께한 아리 애스터 사단의 촬영감독 파웰 포고젤스키가 합세해 화려하고 독창적인 영상미를 선보였다고 하는데요, 일찌감치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경쟁 부문에 노미네이트 된 것을 시작으로 BFI런던국제영화제, 취리히영화제, 로테르담국제영화제, 멜버른국제영화제 등 유수의 영화제에 공식 초청되며 작품성을 입증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감각적인 영상과 더불어 EDM과 블루스, 하우스, 락 등 장르를 넘나드는 다채로운 사운드트랙이 깔려 영화의 펑키하고 매혹적인 분위기를 한층 배가시켰다고 전해지며, 전종서 배우의 넘치는 에너지와 도발적인 연기가 시선을 사로잡는 독보적인 매력의 영화일 것으로 기대가 됩니다.
웅남이
Woong Nam

개요: 코미디, 액션 | 대한민국 | 97분
감독: 박성광
출연: 박성웅, 이이경, 염혜란, 최민수, 오달수 등
개봉: 2023.03.22.
배급: CJ CGV
시놉시스
태초에 마늘과 쑥을 100일 동안 먹고, 곰에서 사람이 된 최초의 인물이 있었으니 그 이름 웅녀… 아니 웅남이??!! 인간을 초월한 능력을 가졌지만 얼마 남지 않은 곰의 수명을 우연히 알게 된 충격에 경찰을 그만두고 빈둥빈둥 곰생인생을 살게 된다. 하지만 자신과 머리부터 발끝까지 똑같이 생긴 테러 조직의 2인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엄마의 소원인 경찰 복귀를 위해 형사, 구독자 10명의 유튜버, 동네 순경과 공조하여 국제 범죄 조직을 소탕하는 공조 수사대에 합류하게 되는데…
CINE PICK!
<웅남이>는 개그맨 박성광이 감독한 네 번째 연출작이자 첫 장편 상업 영화로, 인간을 초월하는 짐승 같은 능력으로 국제 범죄 조직에 맞서는 '웅남이'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단군 신화를 모티프로 해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된 쌍둥이 곰'이라는 참신한 설정으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영화인데요, <신세계>, <내안의 그놈>, <젠틀맨> 등으로 느와르부터 액션, 코미디까지 폭넓은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박성웅이 전직 경찰이자 동네 백수인 '웅남이', 그리고 그와 180도 상반되는 모습의 국제 범죄 조직 2인자 '웅북이'를 동시에 연기해 화제가 되었는데요, 어떤 모습도 찰떡같이 잘 해내는 배우이기에 이번 영화에서도 그런 그의 매력이 여과 없이 나타날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코믹 대세 배우 이이경과 베테랑 배우 염혜란, 최민수의 출연으로 더욱 다양한 재미를 첨가해 침체된 한국 영화계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작품이 되길 기대해 봅니다.
틸
Till

개요: 드라마 | 미국 | 131분
감독: 치노늬 추크우
출연: 다니엘 데드와일러, 제일린 홀, 헤일리 베넷 등
개봉: 2023.03.22.
배급: 유니버설 픽쳐스
시놉시스
1955년 시카고. 엄마 메이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14살 흑인 소년 에밋 틸은 미국 남부에 사촌을 만나러 갔다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온다. 메이미는 에밋의 참혹한 모습을 세상에 공개해 억울한 죽음을 알리기로 결심하는데… 피부색으로 정의를 가리던 시대, 그녀의 용기 있는 외침이 시작된다.
CINE PICK!
영화 <틸>은 195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에밋 틸 피살 사건' 이후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세상에 알려 남부 전역에 민권운동의 확산을 불러일으킨 엄마 '메이미'의 감동 실화를 담고 있습니다. 제76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 주연상 후보를 포함하여 전 세계 영화제 81개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렸고 21개 부문에서 수상해 작품성을 인정받았으며, 아들의 충격적인 죽음을 목도하게 된 엄마 메이미의 참담한 심경부터 아들을 잃은 비극에 침잠하지 않고, 스스로 용기 있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강인한 엄마이자 여성의 모습을 단단하게 그려내 가슴 아픈 공감과 묵직한 감동을 안겨주는 영화입니다.
실제로 메이미의 행동은 지역 사회의 분노와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북부와 남부의 흑인들이 연대하는 계기가 되어 수많은 투쟁 끝에 1964년 인종과 피부색, 종교, 성별, 출신 국가에 의한 차별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미국 연방 민권법이 제정되는 데 일조하였고, 나아가 2022년 3월에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에밋 틸 안티 린칭 법안(The Emmett Till Antilynching Act)으로 이름을 붙인 반린치 법안에 서명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특히,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023년 2월 16일 백악관에서 <틸> 상영회를 개최하며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좋은 것과 나쁜 것, 진실, 국가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조명하는 것. 그래서 이 영화가 중요하다. 우리는 침묵해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이웃집에 신이 산다
The Brand New Testament

개요: 코미디 | 벨기에, 프랑스, 룩셈부르크 | 115분
감독: 자코 반 도마엘
출연: 브누와 뽀엘 부르드, 욜랜드 모로, 까뜨린느 드뇌브 등
개봉: 2015.12.24.
공개: 2023.03.24.(왓챠)
배급: (주)엣나인필름
시놉시스
유럽 브뤼셀의 수상한 아파트, 그곳에는 못된 심보의 괴짜 신이 살고 있다. 어엿한 가정까지 꾸리고 있지만 인간을 골탕 먹이기 좋아하고, 아내와 자식들에겐 소리 지르기 일쑤, ‘진상’ 그 자체가 바로 ‘신’이다! 심술궂은 아빠 ‘신’의 행동에 반발한 사춘기 딸 ‘에아’는 아빠의 컴퓨터를 해킹해 지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죽는 날짜를 문자로 전송하고, 세상은 일대 혼란에 빠진다. 세상을 구원할 방법은 오로지 신약성서를 다시 쓰는 것뿐! 에아는 새로운 신약성서에 담을 6명의 사도를 찾아 나서는데 …
CINE PICK!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는 인간을 괴롭히기 좋아하며 아내와 자식들에겐 진상 짓을 서슴지 않는 고집불통 괴짜 신과 그로부터 세상을 구하려는 사춘기 딸 에아가 새로운 신약성서를 쓰기 위해 6명의 사도를 찾는다는 독특하고 위트 넘치는 설정의 이야기로, <토토의 천국>, <제8요일>, <미스터 노바디> 등을 연출하며 재치 있고 기발한 상상력으로 유럽을 대표하는 거장 감독으로 인정받는 자코 반 도마엘이 연출한 작품입니다. 다크한 블랙코미디 장르의 특성과 초현실주의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독창적 표현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영화인데요, 지난 2월 28일 넷플릭스에서 서비스가 종료된 뒤 왓챠로 넘어온 것으로 보이며 혹시 눈여겨보고 있었지만 관람 시기를 놓친 분들이 계시다면 이번 기회에 감상해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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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극장 개봉 영화, OTT 신작 등 총 다섯 편의 영화를 소개해 드렸는데 어떠셨나요?
그럼 남은 한 주도 건강하게 보내시길 바라며, 지금까지 씨네랩 에디터 Yumi였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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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적 시간의 재구성
1.
<인셉션>(2010)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세계 속 시간을 재정의한다. 이 영화는 내러티브의 도구인 시간을 스크린 위로 불러내서, 영상 언어로서의 시간을 구축한다. 각각의 꿈속에선 단계별로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이 편집 기법을 통해 시각화된다. <미행>(1998), <메멘토>(2000)에서 시작한 ‘플롯 게임’을 지탱하는 내러티브적 시간의 혼재된 배열이 <인셉션>에서는 다른 형태의 지위를 획득한 셈이다. 대놓고 시간 흐름의 상대성을 논하는 <인터스텔라>(2014)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셉션>의 변주라고 할 수 있겠다. 이때 시간이라는 관념을 향한 놀란의 집착이 후속작에서도 이어진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덩케르크>(2017)의 시간은 <메멘토>와도, <인셉션>과도 다르다. 이 영화는 잔교에서의 일주일, 민간 어선에서의 하루, 전투기에서의 한 시간이라는 서로 완벽하게 어긋나는 세 시공간대를 과감하게 교차한다. 그간 놀란이 구상해 온 비선형적 플롯 구조 가운데 <덩케르크>만큼이나 비정형적인 사례는 없다.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가한 <메멘토>의 플롯조차도 컬러의 역순행과 흑백의 순행이 섞이는 최소한의 규칙을 전제로 하지만, <덩케르크>는 플롯을 연결하는 관습적인 규칙마저도 최대한 느슨하게 구축한다. 더 나아가 <덩케르크>의 시간은 <인셉션>처럼 시각화된 물리량 변환이 아닌 다른 형태로 정의되길 바라는 듯 보인다. 이 영화는 물리적 길이가 다른 세 시간대를 교차하는데, 교차된 장면들 총합의 길이가 장편 영화 포맷의 러닝타임에 부합해야 하므로, 잔교의 일주일보다 민간 어선의 하루가, 어선의 하루보다 전투기의 한 시간이 영화상에 더 많이 노출되도록 편집될 수밖에 없다. 즉, 시간대 구간이 짧을수록 각 쇼트마다 더 많은 지속 시간을 할당받는다. 다시 말해 상대적 길이에 따라 재배치된 시간이 필름에 새겨진다. <덩케르크>는 수용자의 관습적인 지각 체계가 작동하기 힘든 영화이다. 관객은 마침내 편집을 통해 재구성한 비선형적 시간 개념을 인식한다. 몽타주로 피어나는 도상적인 운동감과 이미지 간의 리듬을 유도하는 새로운 시간적 개념 또한 동시에 정의된다.
<덩케르크>에서 정의된 영화적 시간은 그간 펼쳐왔던 놀란의 시간 게임 중에서 가장 독특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테넷>(2020)이 공개되기 전까지 말이다. <테넷>의 시간 여행은 다른 영화에서 표현됐던 시간 이동에 관한 무의미한 기술적 반복이 아니다. <백 투 더 퓨처>(1985) 등이 불연속적 시간 이동을 서사적으로 활용한다면, <테넷>은 시간의 역전이 형상화되는 과정 자체를 표현하는 데 집중한다. 이 영화에는 <닥터 스트레인지>(2016) 등에 쓰인 단순한 되감기 기법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존재한다. 놀란은 역방향 촬영과 더불어 배우들을 거꾸로 연기하도록 디렉팅했다. <메멘토>에선 되감기 기술을 활용했던 놀란은 이번에는 촬영된 영상을 되감을 뿐 아니라, 피사체(주로 인물)가 직접 거꾸로 행동해서 시간의 역행을 재현하는 장면을 많이 동원한다. <덩케르크>에서 재정의된 시간처럼 <테넷>도 관습적으로 감각하기 어려운, 새로운 형태의 시공간을 제시한다. 시간 순행과 역행이 공존하는 세상 말이다. 영화적 시간을 재정의하려는 많은 작품이 있지만, 감각 불가능한 시간의 역전 관계를 시각화하는 <테넷>의 실험만큼이나 생경한 사례는 지금까지 없었다. 놀란 본인이 단편 <두들버그>(1997)에서 각기 다른 시간 선후 관계에 놓인 세 명의 남자(the man)를 동일한 공간에 중첩해서 표현한 점은 <테넷>의 전조로 볼 수 있지만, <테넷>은 분명 영화적 시간을 재구성하는 방식에 있어 기존 영화들과 다른 양상을 띤다.
'테넷' 촬영 현장 스틸컷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주)
2.
문제는 놀란 영화에서 포착되는 시간의 변주나 재정의가 목표하는 지점이 불분명하다는 데 있다. 영화적 시간을 재구성해온 놀란의 세계는 매번 부산스럽게 규모를 늘려가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하지만 그 세계의 매혹적인 표층을 걷어내면, 근간에서 발견되는 건 지적 유희를 향한 감독의 개인적인 욕망뿐이다. 이토록 편집증적인 면모로 시간 재구성에 관한 영화를 생산하는 연출자가 누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놀란이 기획한 영화적 시간의 특징적 표지를 읽어내는 순간에 촉발되는 매력 자체는 부인할 수 없다. 그의 영화가 머금은 지적 유희를 탐닉하려는 수용자의 몸부림이야말로 놀란 영화가 가치를 획득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놀란의 영화가 형식을 통한 영상적 구현의 극한을 추구하는 사례라면, 동시대 감독들 가운데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몇몇 영화들은 놀란의 다소 피상적인 결과물들이 가닿을 수 없는 깊이에 도달한다. <보이후드>(2014)는 기술 자본을 등에 업고 욕망을 구현하는 놀란의 영화에서 절대 성취될 수 없는 결과를 제시한다. 링클레이터는 이 영화를 12년 동안 연출했다. <보이후드>의 인물들이 실제로 성장하고 늙어가는 과정은 분장이나 특수효과로 구현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처한 삶의 순리가 그대로 반영된 결과다. 사실 태생적으로 영화는 편집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가두기도 하고 확장하고, 제멋대로 주무를 수 있는 매체 수단이다. 그런 점에서 링클레이터의 기획은 현실과 영화의 시간적 경계를 무너뜨리고 삶의 재현 수단으로써 영화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비포 삼부작(<비포 선라이즈>(1995), <비포 선셋>(2004), <비포 미드나잇>(2013))’ 역시 주연 배우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노화 과정이 그대로 반영된 시간성이 필름에 각인된 사례다. 링클레이터의 영화적 시간은 곧 삶과 예술의 관계에 관한 작가의 견해처럼 보인다.
영화적 시간을 사유하는 또 다른 사례는 크리스티안 펫졸드의 영화에서 찾을 수 있다. 링클레이터의 영화가 현실과 영화 사이의 시간성을 탐구하고 있다면, 펫졸드의 <트랜짓>(2018)은 과거와 현재를 중첩하는 기묘한 설정을 통해 특정 시기에 구속된 시간 논리로부터의 탈피를 주장한다. 펫졸드는 그의 작품에서 주로 역사의 흔적을 응시한다. <트랜짓>은 시공간성의 해체가 현대 사회에 산재한 이슈(난민 문제 등)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줄 수 있는지 사유하는 작업이다. 펫졸드의 사유는 시간의 재구성을 넘어, 시공간성이 반영된 역사에 관한 논점을 제공해 준다. 물론 <덩케르크>의 시간은 전쟁 현장에서 생존하려는 자들의 모습을 관객이 체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시공간성의 무화를 유도하는 <트랜짓>과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 하지만 <테넷>에서의 과시적 유희는 그 깊이에 도달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게다가 <인셉션>은 <트랜짓>에 비해 시공간의 다층적인 관계가 매력적으로 구축된 작품이지만, 그 형식적인 틀이 <트랜짓>의 사례처럼 사회 문제나 현실 요소와 소통할 기회를 마련해 주지는 않는다.
3.
한편 형식적인 관점에서 왕가위의 시간과 놀란의 시간을 비교해보는 시도는 흥미로운 논점을 생산할 수 있다. 왕가위의 영화는 시공간을 필름에 붙잡아두려고 한다. 왕가위는 <중경상림>(1994), <타락천사>(1995) 등에서 스텝프린팅 기법을 적절히 응용하여 형식의 층위에서 그 점을 강조한다. 왕가위는 흘러간 시간과 그 흔적의 공허함, 질감 등을 매력적으로 시각화하는 데에도 탁월한 센스를 보인다. 왕가위의 영화에는 주로 어긋나는 관계와 실패하는 사랑의 순간들, 공간을 맴돌거나 홀연히 떠나는 인물들, 기억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왕가위가 주로 천착하는 소재들은 형식과 긴밀히 맞물려서 영화를 통해 다양한 형태로 가공된다. 왕가위의 영화는 형식을 통해 작가적인 관점을 구현하려는 좋은 사례처럼 보이지만, 놀란의 영화에서는 그 연결고리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왕가위는 시간을 통해 자신을 표출하지만, 놀란은 시간을 통해 영화의 구조를 매혹적으로 만드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건 아닌가.
다른 영화들도 유의미한 쟁점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샘 멘데스와 로저 디킨스는 <1917>(2019)의 의도된 롱테이크 촬영을 통해 영화적 시간을 현실로 전이시켜 관객에게 생생한 몰입의 기회를 제공하려고 했다. 하지만 <1917>의 기술적 성취만으로 서사 화법의 지위를 대체하기엔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는 놀란의 영화가 갖는 한계점과 유사하게, 채택된 기술의 당위성에 관한 논의를 만들어낸다. 되감기의 변주 등을 동원한 <테넷>의 시간 역행 묘사는 그 자체로 매력적인 형식적 산물이지만, 그 목적성을 따지기 시작할 때 영화는 급격히 동력을 잃는다. 서사적 측면에서 되감기 기법을 영리하게 활용한 이창동의 <박하사탕>(1999)은 <테넷>이 놓친 요소들을 알뜰하게 챙기면서 작품의 유기성을 강화하는 데 성공한 사례다. 이와 다르게 <테넷>에서는 작품 내적 요소 간의 호응보다는 기술의 발달을 통해 형상화한 감독 자신의 가공된 욕망과 자의식만이 느껴진다.
4.
각각의 영화에서 다르게 표현되는 영화적 시간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카메라로 시공간을 담아내는 영화예술의 태생적 근간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분석이다. 영화적 시간을 재구성하는 놀란의 작품들은 관객의 흥미를 유발하는 텍스트로 기능한다. 그렇지만 그의 영화는 명확한 한계를 안고 있기도 하다. <인셉션>을 기점으로 구체화된 그의 욕망은 <덩케르크>에서 가장 흥미로운 논점을 만들어냈지만, <테넷>에서는 기존의 매력마저 잃어버린 듯 방황하는 면모를 드러냈다. <덩케르크>의 비선형적 시간 개념은 형식을 조작해서 관객의 지각 체계에 균열을 가한 뒤, 역사의 흔적과 영화와 현실을 매개하여 사유할 수 있게 하는 담론을 유도할 수 있다. 하지만 <테넷>은 국가적인 위기 상황을 전제한 채 다시 한번 조작된 시간을 들이밀지만, 어쩐지 표층에만 머무른 채 심도 있는 담론의 장을 제공하진 않는다.
놀란을 향한 상당수의 지적은 생각보다 가혹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그가 극복해야 할 숙명과도 같다. 놀란은 현대 영화 산업의 첨단에서 독특한 기질을 발휘하고 있는, 거칠게 말하면 포스트-스필버그처럼 보이는 보기 드문 유형의 창작자이다. 그에겐 16mm 필름 대신 아이맥스 필름이 있고, 열악한 로케이션 현장 대신 특별 제작된 회전 세트나 폭발해도 상관없는 비행기가 있다. 워너브라더스의 전폭적인 지원과 믿음을 토대로 자신만의 세계를 펼쳐내는 자본주의적 연출가 놀란에겐 고삐 풀린 창작욕의 구현과 대중성 기반의 안정적 수익 구조의 창출이 모두 요구된다. 놀란이 영화 산업의 자본 논리에 종속된 이상, 자의식 과잉과 상업성 확보 사이에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영리한 줄타기를 선보여야 한다. <덩케르크>는 장르적 서사 코드를 마냥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메멘토> 이후 정체된 듯 보였던 그의 작가적 역량을 재입증한 사례였지만, <테넷>의 실험이 만들어낸 산물은 영화사와 감독, 대중과 평단 사이의 다층적인 이해관계에 반영된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한 사례로 보인다. 놀란이 재구성하는 영화적 시간은 과연 <테넷> 이후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 그가 시간 실험을 지속할지 집착하던 소재에서 손을 뗄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 천재 감독의 다음 연출작을 기다리는 일이다.
'인셉션' 촬영 현장 스틸컷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주)
* 본 콘텐츠는 씨네리와인드에 게재 후 씨네랩에 업로드된 글입니다.* 브런치 드플레 님의 자료를 받아 작성하였으며,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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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을 잃었다. 어딜 가야 할까.
이 글은 영화 [스펜서]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생물 교과서에 나오는 혈우병(Hemophilia)은 유전병들 중 가장 슬픈 병임과 동시에 왕가의 집념이 보이는 병이기도 하다. 혈통 보존이라는 미명 하에 왕실에서는 사촌 간에 결혼을 하거나, 정략결혼을 통해 권력을 더 유지하려는 움직임이 많았다. 덕분에 빅토리아 여왕의 유전자 하나는(참고 1) 온 대륙의 왕자들이 피를 멈추지 못해 죽어가는 것을 눈뜨고 지켜보아야만 하는 비극을 불러오기도 했다.
왕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이렇게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되어 넘지 못할 것만 같던 두꺼운 담을 꾸역 꾸역 넘는다. 그리고 기어코 보통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 조심스럽고 비밀스러웠던 크기만큼이나 쾌감을 주는 이야기로 떠돌게 된다.
21세기인 지금도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왕족의 이야기는 이제는 대중 매체의 힘을 빌려 손쉽게 담을 넘는다. 가장 매력적이고 국민적인 인기를 끌었던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이야기를 덕분에 우리는 이렇게 극장에서 만날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이다.
영화 제목과 일치하는 자신의 성(Family name)인 [스펜서]로 남기 위해 발버둥 쳤던 다이애나의 이야기는 생소하면서도 신비롭다. 영화 속을 가득 채우는 아름다운 장면마다 인간 다이애나 스펜서의 슬픔이 묻어져 나오지만. 그녀의 고통과 용기도 함께 느껴져 마음이 몇 번이고 부서져 내리는 두 시간을 보내게 한 영화다.
윈저라는 이름의 왕관, 혹은 금고아;그것을 너무도 잘 표핸해낸 크리스틴 스튜어트
사진 출처:다음 영화
왕관을 쓰려는 자 무게를 견디라 했다. 그것도 영국 왕실의 왕관이라면. 목이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꼿꼿하게 지탱하려 애쓸 것이다.영화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스펜서의 모습은, 머리 위에 얹어진 원치 않는 왕관을 버텨내느라 얼마나 고군분투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자신의 차를 혼자 운전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스펜서는 어딘가 경직되어 있는 동시에 안절부절 해 보인다. 무엇보다 그런 불안한 상태를 감출 수 없는 듯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그녀의 손은 마음과 동기화되어 있는 것처럼 제멋대로 움직이고. 스펜서의 한 손은 언제나 다른 한 손에 의해 꾹 눌러진 채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겨우 잠자코 숨을 죽인다. 두 손을 맞잡아야 자신을 진정시킬 수 있는 그녀의 의기소침한 어깨는 안쓰러울 정도로 작아 보인다.
모든 사람들이 다이애나 머리 위의 반짝이는 것을 가리켜 왕관이라 했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그저 손오공의 머리를 옥죄이는데 쓰는 금고아(긴고아)에 불과했던 셈이다.
난생처음 보는 다이애나의 모습을 이토록 잘 표현해낸 데는 틴에이지 영화배우라는 왕관을 쓰고 있는 줄 알았던 크리스틴 스튜어트 개인의 울분도 한몫했으리라 생각한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로 스타덤에 오르는 데는 성공했지만. 배우라고 부르기엔 한없이 모자랐기에. 그녀는 이번 작품에서 자신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는 금고아를 벗어던지고 싶었을 것이다.
배우와 스펜서가 가진 공통된 욕망은, 영화 속에서 모든 것을 뒤로하며 달리는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다른 무수한 영화 속 장면에서도 그러하지만. 특히 그 지점에서는 크리스틴과 스펜서 두 사람 사이의 구분선이 완벽히 사라진다.
두 여인은 자신을 통제하고 가둬두려던 그 무언가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이 왕관이라 부르며 칭송하던 것을 벗어던지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달리기의 끝에 그녀들이 기어코 얻어낸 것에도 손뼉 쳐줄만하지만. 미친 듯이 달리느라 발을 다치지는 않았는지. 숨이 너무 차 기댈 곳이 필요하지는 않은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목걸이, 허수아비, 그리고 꿩;스펜서의 모든 모습을 나타내는 것들
사진 출처:다음 영화
진흙탕이라는 단어에서 딱 한 뼘 정도 모자라는 땅에 혼자 서 있는 허수아비.
스펜서는 자신이 궁에서 속한 위치가 딱 허수아비 정도라고 생각했다. 남편 찰스는 바람까지 피운 주제에 불륜 상대에게 준 것과 같은 진주 목걸이를 선물했고. 그것은 자신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내려놓으려 할수록 옷에 가장 잘 어울리는 화려한 장신구가 되어 스펜서의 목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펄럭이면서, 아름다운 족쇄에 목을 맡긴 채 스펜서는 자신의 인생이 그렇게 끝나리라 조금은 믿어버렸다.
하지만 스펜서는 자신의 두 아이만큼은 그렇게 키우고 싶지 않았다. 왕가의 전통이라는 이유로 하고 싶지 않다는 아들의 마음은 가볍게 묵살당한 꿩 사냥에서. 아이들을 해방시키고 싶었다.
꿩은 영화 속에서 아름답지만 도망갈 머리는 모자라는 짐승 정도로 그려진다. 확실한 이유 없이 희생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지점에서 스펜서는 자신의 모습과 꿩이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들의 꿩 사냥을 더 말리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이 아들의 총을 맞아 죽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을 것이고. 윈저가문의 이유 없는 전통에 의해 스펜서가 희생당하는 것을 막고 싶었을 테니까.
허수아비이자 꿩이었지만. 운명 같았던 진주 목걸이를 없애버린 스펜서는 그렇게 자신이 원하던 대로 두 아들의 손을 잡고 신나게 도망을 친다. 벌판에 버려져 있던 그 허수아비에게는 스펜서의 옷이 아닌 윈저의 옷을 선물한 채로.
지금의 찰스를 보고 있자면. 다이애나의 저주(?)를 톡톡히 받고 있는 듯하다. 윈저 가문은 가장 매력적인 왕세자비를 영원히 잃었으며. 스펜서의 마음을 가지고 논 죄로 찰스는 왕위에서 어머니의 그림자로 남아있다. 이제 누가 정말로 허수아비가 되어버렸는지. 그 당사자는 알겠지.
스펜서, 길을 찾다.;메리크리스마스, 스펜서.
사진 출처:다음 영화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 심판]의 김혜수 배우는. 판사들이 걸어가는 긴 복도가 그 사람들이 가진 끊임없는 일들을 상징하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많은 대사들이 복도에서 이뤄지는 것도 판사들이 가야 할 길 중간에 있는 일들 같게 느껴져서 좋았다고. 영화 [스펜서]에서 복도, 혹은 길이 상징하는 바도 이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스펜서는 영화에서 늘 길을 잃고 헤맨다. 그것이 자신이 살던 동네 근처였건. 혹은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이한 미로 같은 궁궐이건 상관없이.
애처롭게도 스펜서는 그녀를 그 운명의 길고 긴 길 위에 어디에 두어야 할지 알지 못해, 몇 년을 가도 낯선 길 위에 정처 없이 눈물을 흩뿌리며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옮긴다. 모든 것을 토해내기 위한 화장실을 찾아서 겨우겨우.
그녀는 스스로를 죽여 이 길을 더 이상 걷지 않기보다, 자신을 죽이려 하는 이 길에서 도망치기로 했다. 덕분에 세 모자(母子)의 신나는 도망기(?)에서만큼은 스펜서는 망설이지도. 길을 잃지도 않는다. 그녀는 정확히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었고. 주저하지 않고 엉망진창이지만 그대로 완벽한 채로 뒤 한번 돌아보지 않은 채 궁과 멀어진다. 다 큰 어른이 되어버려 산타는 더 이상 그녀에게 내어줄 것이 없었을지 모르지만. 이번 크리스마스만큼은 스펜서는 자신에게 아주 큰 선물을 준 셈이다. 두 아들에게도 빼놓지 않고.
스펜서는 영화 말미에 아이들이 그토록 먹고 싶어 하던 패스트푸드를 먹이며 홀가분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내겐 그 모습이 마치 영화 [졸업]과 같아 보였다.
우리는 보통 [졸업]의 결말을 사랑하는 남자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도망가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제 정말로 현실이 되어 버린 이 탈주극에 대한 대책 하나 없는 두 남녀의 소위 "현타"온 표정을 비추는 것이 영화의 "진짜"끝이다.
스펜서도 지금 이 순간이 지나고 밤이 되면. 잠든 두 아들을 보며 과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현재 가진 것으로는 얼마나 버티며 궁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될 것인지에 대한 숫자 놀음을 멈추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스펜서]는 졸업의 결말보다 약 5초 정도 앞에서 끊은 기분이다. 스펜서의 눈에 언뜻 현실을 자각하는 순간이 비치지만. 아직까지 그녀는 홀가분하며,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울컥하고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그 행복이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그 5초만이라도. 자신이 스스로에게 선사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만끽할 수 있었으면 한다.
마치면서+좋아한 장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가 왔다.어차피 우산이 없었기에 나는 주저 없이 빗속으로 발걸음을 내디뎌야 했다. 모든 사람이 우산을 쓰고 있었고. 그들은 나를 흘깃흘깃 쳐다보았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기꺼이 이상한 사람이 되기를 택했고. 한순간이었지만 스펜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그 모든 시선을 받아야 했을 그녀의 마음도 조금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영화는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웠다.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도 그 장면들에 묻히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또 대단했다. 어차피 역사가 스포일러이긴 하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혹은 그녀의 마음이 십분 느껴지는 영화였기에 보는 내내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스스로에게 준 미래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 조금 더 크고 길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현실에 대한 아쉬움마저 남는 영화였다.
[좋아한 장면]
정말 무수하게 많은 장면들이 마음에 날아와 꽂혔지만. 그중에서도 한 장면을 꼽으라면. 단체 사진을 찍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총총거리며 걸어와 여왕 외에는 아무개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많은 가족들 사이에 섞여버리는 장면. 다이애나는 그때 자신의 마음속에서 무럭무럭 커가는 스펜서를 눌러 담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까. 영화 가득 그녀만의 색이 묻어나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순간만큼은 스펜서를 지워내야 했다. 모르겠다. 그냥 이 영화 자체가 계속 눈물이 났다.
참고 1
혈우병은 남자가 걸리기 쉬움.(성 염색체 유전). 여자의 경우 혈우병에 걸릴 경우 embryonic lethal 한 경우가 많다고 알려져 있음. 그 당시 왕자들은 말 타다가 넘어져서 멍이 든 게(내출혈) 아물지 않아 죽었다고도 하고. 처형 당했는데 피가 멈추지 않고 계속 쏟아져내렸다고도 하고,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다고도 함. 아 물론 후자의 경우는 파상풍일 가능성이 더 높음.
[이 글의 TMI]
1. 코로나 격리가 끝나고 회사 갔지만. 여전히 회사는 싫군요.
2. 컨디션은 평소의 70% 정도밖에 안됨.
3. 입맛 없는 게 제일 힘듦.
4. 약 먹어야 되니까 꾸역꾸역 먹고 다시 빠졌던 3Kg 회복함(응?)
#파블로라라인 #크리스틴스튜어트 #스펜서 #최신영화 #영화추천 #실화영화 #영화리뷰 #영화리뷰어 #네이버인플루언서 #브런치작가 #내일은파란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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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린 모두 사랑받고 싶어 해
줄거리
인생 모든 것이 한심해 보이고 매사 불만이 가득한 사춘기 디제이의 최대 관심사는 앞집에 사는 수상쩍은 이웃, 네버크래커 씨를 관찰하는 것이다. 삐쩍 마른 네버크래커씨는 어린 꼬마 아이에게도 자신의 잔디를 밟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고, 잔디로 발이라도 내밀면 곧장 튀어나와 물건을 있는 족족 뺏어가는 괴팍한 할아버지다.
디제이는 친구 차우더의 농구공을 가지러 잠깐 네버크래커의 잔디를 밟았다가 그를 마주치게 되고, 흥분한 할아버지는 쓰러져서 구급차에 실려가고 만다. 네버크래커 씨가 집을 비우자, 집 주변에서는 수상쩍은 일들이 연속해서 일어난다. 집이 창문 눈을 부릅뜨고 카펫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사람들을 잡아먹는다니!
저 집에 분명 무언가 있어...
우연찮게 집에 잡아먹힐 뻔한 제니를 구한 디제이와 차우더는 다 함께 집을 잠재우기 위한 계획을 짠다. 할로윈이 다가온다. 누군가 그 집 벨을 누르기 전에 집을 잠재워야 한다!
감상 포인트
1. 애니메이션 치고는 그림체나 발상이 상당히 공포스럽다.
2. 눈물 날 정도는 아니지만, 마지막 장면이 감동+슬픔이다.
3. 명작 애니메이션.
감상평
영화 [몬스터 하우스]는 어릴 적에 DVD로 저녁 먹을 때마다 돌려보던 영화 중 하나다. 아마 공포를 좋아하는 이 취향은 어릴 때부터 쭉 이어져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는 충격받을 정도로 무서웠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동생과 부둥켜 안은 채 조마조마하면서 봤다.
어린아이들이 보기에는 확실히 공포스럽다. 집이 살아 움직인다는 발상부터 아이들이 할 법한 생각이긴 하지만, 그 표현을 기가 막히게 잘 했다고나 할까. 나도 어릴 때에는 아무도 없는 주차장을 지날 때마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나를 노려보는 눈처럼 느껴진 적도 많았다. 자동차의 얼굴을 상상하며 나에게 갑자기 달려들진 않을까, 걱정을 했더랬다. 그런 아이들의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해 호러스럽게 잘 풀어낸 영화가 바로 [몬스터 하우스]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몬스터 하우스]는 아이들의 기막힌 발상으로 시작되는 영화이지만, 그 끝에는 애절한 사랑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어른들이 보기에도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본다면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웃으며 끝나겠지만, 어른들이 본다면 그 속에 숨겨져있는 감정들을 모두 이해하고 눈물을 훔치며 끝날 것 같다. 내가 아이일 때 봤던 감상과 지금의 감상이 매우 다른 것처럼.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앞집 주인인 네버크래커 씨에게는 따라다니는 괴담 같은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자신의 아내를 뚱뚱하게 살찌워서 잡아먹었다는 것. 이는 극 중에서 디제이의 부모님이 집을 비운 사이, 그를 돌봐주러 온 베이비시터 '지'의 남자친구, '본즈'가 알려준 것이다. 터무니없는 소문을 몇몇 어른들도 믿고 있었던 걸 보면 네버크래커가 동네 괴짜 노인으로서의 입지를 단단히 다진 모양이다.
사실 콘스탄스는 '집채만 한 여자'로 서커스단에 끌려다니며 평생 남들의 구경거리로 살았다. 그러던 중 네버크래커를 만나 구출되어 사랑에 빠진다. 둘은 넓은 터에 함께 살 집을 지으며 행복한 상상에 빠졌다. 하지만 할로윈에 사탕을 받으러 온 아이들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한 콘스탄스가 도끼를 들고 난동을 부렸다.
"내가 지켜줄게. 누구도 해코지 못하게."
네버크래커는 말리려 했지만 콘스탄스는 발을 헛디뎌 지하로 떨어져 버렸고, 그 과정에서 시멘트를 뒤덮게 된 것. 결국 집을 완성하고, 콘스탄스의 영혼은 이 집에 깃들었다. 네버크래커는 자신의 아내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또 아내로부터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장장 45년간 아무도 이 집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왜 하필 할로윈일까?
영화 [몬스터 하우스]는 할로윈이라는 특수한 날을 통해 콘스탄스가 받아온 미움과 사랑의 모양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사랑과 미움의 모양은 다르다. 보통 자신이 받은 사랑이나 바탕으로 사람들은 남에게 나누어줄 사랑의 모양을 만들어간다. 종종 타인에게 격하게 미움을 표현하거나 세상에 분노만 가득한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을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연민의 감정을 가지게 된다. 자신이 받은 것이 미움뿐이라서, 미움밖에 몰라서 남들에게 베풀 수 있는 것도 미움밖에 없는 것이다.
"사탕 없는 가정에 할로윈의 짓궂은 테러가 발생할 확률이 55%를 넘는답니다. 집에 사탕 없으면 이런 장난의 집중 표적이 되죠."
익히 알고 있듯이 할로윈에는 아이들이 분장을 하고 여러 가정집을 돌아다니며 'trick or treat!'하고 외치고선 사탕이나 초콜릿을 받는다. 이때, 먹을 것을 나눠주지 않는 집에 아이들은 계란을 던지는 등 장난을 친다.
콘스탄스에게 집이란 더할 나위 없이 아주 완벽한 형태의 사랑이다. 평생 자기 집 없이 철장에 갇혀 살았던 콘스탄스는 네버크래커가 짓고 있는 집에서 안정과 평화를 찾았다. 함께 살면서 가정을 이루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그녀가 꿈에 그리던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런 콘스탄스에게 할로윈에 집에 행패를 부리는 아이들은 자신의 행복과 사랑을 망치려 드는 괴물과도 같은 존재였다. 결국 콘스탄스는 자신의 분노에 잡아먹혀 스스로 괴물이 되고 만다.
"잘 가요."
지금 와서 보니 콘스탄스가 참 애잔했다. 어떤 의미로는 콘스탄스 역시 이 집을 지키기 위해, 네버크래커와 자신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폭파된 집 근처에서 콘스탄스의 영혼과 춤을 추다가 흩어지는 연기를 멍하니 바라보는 네버크래커의 표정 역시 애틋했다. 흐느끼는 네버크래커에게 디제이는 집을 폭파시켜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장장 45년이야. 45년간 꼼짝없이 갇혀 있다 이제 풀려났어."
하지만 네버크래커는 속 시원하다는 듯 웃는다. 오히려 고맙다고 한다. 삐뚤어진 자신의 사랑에 갇혀 죽은 아내마저 가두고 있던 지난 45년의 세월. 그는 이제야 아내의 죽음을 인정하고 콘스탄스를 보내준다.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에는 시간이 걸린다. 네버크래커는 45년 만에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디제이는 이 비밀들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차우더와 분장하고 사탕을 받으러 다니는 일이 지겹다며 어린아이 취급을 했다. 엄마가 극성을 부리며 자신에게 애정표현하는 것도 낯부끄럽게 여겼고 말이다. 하지만 끔찍한 밤을 보내고 나니, 자신도 그저 평범하고 철없는 어린아이로 돌아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고 나서 어린 날로 돌아가고 싶은 나처럼 말이다.
유쾌하게만 봤던 옛날 영화가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날이 오다니. 디제이 말마따나 "나도 나이 들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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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없는 농담에 가려진 소비와 환경에 대한 메시지
사실 프랑스 영화에 대한 편견이 있다. 철학을 논한다는 명분 아래 귀신 씨나라까먹는 소리하는 것 아닌가 싶었던 영화도 꽤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다분히 주관적이고 편견 가득한 말이다. 인정한다.) 하지만 철학도 현실에 적용할 수 없다면 그저 한 사람의 궤변이 될 수 있고, 누군가 정의를 외치며 극단적으로 도덕을 들이밀게 된다면 그는 내 말을 들어달라고 떼쓰는 어른으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정의로운 명제일지언정 현실 사람들에게 크게 와닿지 않는 외침이 얼마나 정의로울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기도 한다. 이처럼 프랑스 영화들은 수많은 철학적인 관점에서 고민하게 하는 영화들을 많이 만들어낸다는 인식이 있다. 환경 문제, 채식, 인종차별, 젠더갈등 등 수많은 문제들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대처해야할까 고민하게 되는 그런 영화들, 말이다. 가끔 딱히 서사가 있지 않으면서 대사에 온갖 철학적인 내용으로 가득한 내용의 영화를 볼 때의 길을 잃어버린 내 눈동자는 어떻게 숨길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간만에 적당한 유머와 함께 가볍게 볼 수 있으면서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고민하게 되는 영화를 만났다. 영화의 주인공은 3명이다. 대출빛에 허덕이며 가족들에게 짐 취급 받고 있는 브루노와 알베르 그리고 과도한 소비를 하는 현대인의 문제를 꼬집으며 인간의 소비가 환경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시위를 주도하는 비영리단체장인 캑터스다. 인간의 과도한 소비의 결과를 대표하는 두 남자와 극단의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캑터스의 상반된 모습이 의외로 웃기다. 당장 돈이 없으니 온갖 방법으로 돈을 벌기 위해 악착같이, 어쩌면 비굴해 보일만큼 살아가는 두 남자에 반해, 넓은 집에 살면서도 흔한 소파와 의자 마저 없어 바닥 생활을 하는 캑터스를 보고 있자면 정말 세사람 다 별나다 싶다.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당장 밥먹을 돈도 없어서 비영리단체를 돕고 있으면서 이 와중에 알베르는 캑터스를 이성적으로 좋아하기까지 하다니, 참 이 남자 살만한가 싶었다. 철이 없는 것인지, 즉흥적이라고 해주어야 할지 참 어이가 없으면서도 막판에 귀여워보이기까지 한다. 참 한심하다 싶다가도 또 무슨 사고를 칠지 지켜보게 된달까. 그 장단을 브루노가 맞춰주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참 두 사람 죽이 잘 맞는 커플 같아 보인다. 러브라인은 알베르와 캑터스가 그리고 있는데, 왠지 내 눈에는 이 두 남자가 찐사랑이다.
그리고 이 영화 속에서 웃긴 장면을 꼽아보자면, 두 남자의 채무 면제를 도와주는 남자 마저 알고보니 도박 중독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는 사람이었다는 설정이다. 매번 카지노에 입장 금지 당하면서도 끝까지 들어가보려고 온갖 변장을 하는 모습이 꽤나 코믹하다.
캑터스 캐릭터도 참 특이하다. 인간의 소비로 인한 환경 문제를 꼬집는 사람인 만큼, 극단의 미니멀리스트를 추구한다. 개인적으로 캑터스는 아예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게 캑터스의 맹점이라고 생각하는데, 미니멀리스트를 '생활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다는 물건을 하나 구매하고, 그 하나를 잘 관리하면서 사는 사람'이라고 규정짓고 있는 나로서는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긴 했었다.
<주의! 여기서부터는 개인적인, 편견에 가득찬 주관이 가득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취향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을 충족하고 사는 것도 인간다움의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캑터스의 논리는 환경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며 인간의 기본적인 취향 찾을 권리 조차 묵살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물론 인간의 과도한 소비는 환경을 망친다는 대전제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블랙프라이데이의 소비자들을 막아가며 돈 쓰지 말라고 앞을 막는 행위는 도를 넘는 것 아닌가 싶었다. 정말 필요한 물건을 사러 왔을 지도 모르는데, 무조건적으로 소비는 나쁘다고 규정짓고 당신들도 참여하라고 강요하는 듯한 강력한 시위를 계속하는 것은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지 않나 생각했다.
어느 나라든 환경운동이든 젠더 갈등이든 도덕적 잣대로 내가 맞네, 네가 맞네 끊임없이 토론하게 되는 운동들을 주도하는 운동가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과격한 운동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이 동요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내 나름대로 생각해본다면, 극단성에 있지 있나 생각한다. 그들이 요구하는 도덕적 기준이 너무 극단적이어서 일반적인 사람들이 전적으로 동의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환경 문제의 경우, 환경을 지켜야 한다는 큰 명제에는 동의하지만 환경을 지켜보겠다고 이미 만들어진 제품들을 사지 않고 극단적으로 소비 지출을 줄이라는 요구에는 응해줄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캑터스가 진두지휘하는 이 비영리단체에서 정말 환경운동만을 위해 참여하는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될까. 브루노, 알베르 외에도 다른 한 명의 회원도 캑터스를 좋아해서 맴돌기 위해서 하는 거 아닌가 싶은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삼각 관계가 아닌, 사각관계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캑터스만이 진심이고, 모두가 약간의 군중심리로 움직이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되는 장면도 있었다. 인간의 신념은 생각보다 유약하고, 신념이라고 외치는 사람들 중에서 진짜 신념은 몇 명이나 될지 이런 쓸데없는 생각도 스쳤다.
무엇보다 빛더미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랑스 은행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두 남자의 허술함이 참 웃기다. 그 사기를 칠 머리로 돈을 벌었다면 진작에 갚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알베르가 돈이 궁해서 공항에서 압수된 중고 물품을 파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뭐라도 해서 먹고 살았겠구만 싶은데, 또, 프랑스 은행에서 공적 문서의 중요 정보를 화이트로 지우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면 '내가 괜한 인간에게 기대를 걸었다' 싶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친구와 했던 말이,
'영화 속의 인물이니 웃고 재밌어하지, 실제로 내 주위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미쳐 돌아버리고, 끝내 손절치지 않았겠냐'였다. 이런 사람들은 픽션에서만 엮였으면 좋겠다.
총평
가끔 심각한 서사만 찾아다니다 보면, 이런 가벼운 영화를 찾게 된다. 킬링타임으로 적당한 영화다. 그리고 캑터스 역의 여배우가 예쁘게 나온다. 이 배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도 인상적으로 봤었는데, 현대물에서보니 새롭고, 자연스럽게 예뻐서 보기 좋았다. 가벼우면서도 가볍지 만은 않게, 토론을 유발하는 적당히 괜찮은 영화를 만나게 되어 기쁘다.
*해당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참석 후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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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내 우리가 만날 때
오래 품은 소원에는 힘이 있다. 흩어지지도 해지지도 않고, 모양을 오래도록 유지했다는 그 자체로. 그 끝에 이루어진 소원은 거의 성공 신화가 된다.
그만큼 쉽지 않으니까. 소원이라는 단어는 얼핏 강해 보이지만 현실이 되기 전까지는 흐릿한 안개 같다. 흐지부지 밀려나기도 하고, 세파에 깨지기도 하고, 문득 스스로 폐기할 수도 있다. 오래 품은 소원을 이룬다는 것은 뚝심과 에너지, 자기 확신은 물론 행운까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이룬 이야기에는 거의 마법에 준하는 힘이 있다. 무심코 떠오른 강렬한 생각 하나를 한참 바라본 끝에 확장한 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처럼, 남들에게 인정받는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끝내 꿈꾸던 장면을 만들어낸 영화 <라라랜드>처럼.
그런데 <매드 맥스> 시리즈로 이미 반열에 오른 조지 밀러 감독에게도 그런 숙성의 시간이 필요했나 보다. 20년 전 읽은 단편소설을 토대로 빚은 영화를 마침내 가지고 왔는데, 공교롭게도 소원을 소재로 한 이야기다.
세상 모든 이야기를 섭렵한 서사학자 알리테아(틸다 스윈튼)가 학술 대회 차 방문한 튀르키예에서 기념품으로 작은 병을 구입한다. 그런데 별안간 병에서 지니가 튀어나오고, 세 가지 소원을 묻는다. 알리테아는 이런 이야기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안다며 거절하려 하지만, 지니는 알리테아를 설득하기 위해 자신이 세 번이나 병에 갇히게 되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건 환상일까 진실일까? 이야기는 크게 지니의 이야기 세 편과, 알레티아의 세 가지 소원 두 가지 축으로 굴러간다고 볼 수 있다.
과학이 이야기를 만날 때
영화는 튀르키예로 이동하는 비행기 안의 알리테아에서 시작한다. 오래전 이야기들처럼 ‘옛날 옛적에…’ 식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데, 무미건조한 현대 사회 풍경을 묘사하는 문장들에 전혀 다른 색을 입혀, 마치 다른 시공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공항에서 내려 발걸음을 옮기는 알리테아를 봐도, 온통 무채색 옷을 입은 사람 중 유일하게 다른 색깔 옷을 입은 사람이다.
서사학자로 학회 발표 자리에 선 알리테아는 정작 이야기가 이야기일 뿐이라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데, 일상의 태도를 보면 사실은 이야기 그 자체인 사람이라 물건을 고르는 기준조차 세간의 가치보다는 이야기가 묻어나는 지 여부를 본다. 빈티지 물건들이 다시 사랑받는 세상, 알리테아와 같은 이들은 여전히 꽤 많아 보인다. 이 영화는 그런 사람들이 좋아할 영화다. 작은 물건 하나에 깃든 이야기로 기뻐하는.
그런 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장소가 튀르키예인 점은 매우 적절하다. 행정 수도로 기획된 도시 앙카라 말고, 천년 고도 이스탄불이어야 한다. 오래된 도시에는 골목마다 이야기가 숨어 있으니까. 벽면에도, 발코니에도, 옛 연인의 단꿈이나 누군가의 한숨, 피, 배신, 눈물 같은 것들이 속속들이 배어 있으니까.
더없이 적절한 풍경에서 알리테아와 지니는 만나고,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에 의존해 영화는 진행된다. 지니의 이야기 속에는 다양한 시대가 등장한다. 시바 여왕의 시대, 오스만 제국의 시대, 제피르라는 여자가 살았던 중동의 어느 시공간까지. 각 시대는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뒤섞어 매끄럽게 연출되어 있어, 눈과 귀에 화려하게 감긴다.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아야 하는 이유다)
실제 역사에 마법이 존재하던 시대 같은 것은 없지만, 그저 꿈에 불과하지만, 지니의 이야기 속 세계는 마치 "옛날 먼 옛날 어딘가"에는 마법이 존재했을 것만 같아 보인다. 생각해 보면 이야기란 원래 존재였다. 아직 식량 생산이 충분하지 않고 전쟁과 기아가 코앞에 있던 그 옛날에도 사람들은 황금빛 이야기를 통해 괴로움과 척박함 속에서 살아 버텼을 것이다. 병 속의 지니처럼.
불안한 미지의 세계에서 이야기는 우리가 가진 유일한 힘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은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면 과학이 발달한 지금, 과학은 이야기를 대체했는가? 어떤 설명은 과학에게 자리를 내주었겠지만, 여전히 이야기는 나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자기 이야기는 별로 없다는 알리테아에게 지니는 정색하고 말한다. It’s always a story. 우리의 삶은 언제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어떻게 써내려 가고 어떤 식으로 편집할지 차이가 있을 뿐, 이야기가 아닐 수는 없다. 삶의 이야기, 그것은 과학이 대체할 수 없는 이야기의 영역이다.
애당초 이야기와 과학은 서로 배척하는 단어가 아니라 연결된 별개의 무언가이다. 지니의 이야기 속 제피르를 보아도, 최초의 영화와 상당히 닮은 것을 만들어냈다. 이야기와 과학이 만나는 지점에 영화도 있고 인간도 있는 것이다.
인간이 이야기를 만날 때
알리테아는 자기 이야기를 쓰기보다는 수많은 이야기를 읽고 파악하고, 요약하고 정리하여 갈래로 기억하는 사람이다. 떠나버린 사람의 기억은 상자 하나에 말끔하게 담아 넣고, 상처로 기억되는 순간들도 담담하게 축소해서 기술한다.
반면 이야기를 풍성하게 풀어내는 지니는 상대적으로 더 인간 같다. 소원을 들어주는 정령이라 하나, 전지전능한 존재는 아니다. 더 강한 존재에게 붙잡히기도 하고, 미래도 모른다. 한 치 앞도 모르고 갈망하는 존재, 그것이 인간다운 것임을 깨닫게 한다.
바로 이 지점에 이야기의 매력이 있다. 사실 세 가지 소원에 대한 이야기는 알리테아가 말하듯 흔한 장르다. 우리도 어릴 때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도 이토록 오래된 이야기가 여전히 흡입력을 갖는 이유는 거기에 갈망이 있기 때문이다.
세 가지 소원이란 결국 마음이 진정으로 갈망하는 게 무엇인지 깊이 들여다보아야만 알 수 있는 질문이다. 한 가지도 아니고 세 가지라는 점에서 더욱 세밀하게 속내를 드러낸다. 위험을 느끼면서도 끝내 손을 뻗게 만드는 것, 그 손끝에 무엇이 닿을지 집중하고 보게 되는 것. 마음이 편하기보다 외줄 타기를 바라보는 것처럼 위태롭다. 어쩌면 괴로울 수도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사랑하은 지니 또한 이야기를 괴로워한다. "희망은 괴물 같고, 이야기는 희망의 노리개"라는 그의 대사에서, 우리의 이 괴로운 갈망 끝에 무엇이 있는지 보인다. 이야기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끝내 희망을 찾아 헤매 온 것이었다.
절망의 중심을 직시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희망의 한 갈래 길을 찾는 것. 이야기는 이야기를 믿는 인간에게만 그렇게 존재한다. 그냥 인간이 그렇다. 인정 없이는, 사랑 없이는, 대화 없이는, 그래서 그것들로 희망을 바라보지 않고서는 이 어둠을 헤치고 살아갈 길을 알지 못한다. 힘들어 죽겠는데 한 번 더 무릎을 펴게 만드는 것이 "괴물 같"은 희망. 포기할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것. 이야기는 그래서 존재한다.
이 점은 현대 사회가 이야기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 깨닫게 한다. 이야기조차 그저 지식의 파편으로 간주하며, 재산화되어야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는 세상. 이야기는 갈망의 산지가 아니라 무수한 심심풀이 도구 중 하나로 간주되어 간다. 화려한 보석 같던 이야기들이 이제는 굴러다니는 돌이 된다.
현대 사회는 이야기의 찬란한 빛이 많이 감춰진 시대다. 사람들은 “콘텐츠를 소비”하지 “이야기를 듣”거나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지 않는다. 괴로워도 희망을 향하기보다, 그저 아는 절망을 늘어놓으며 절망을 절망의 핑계로 삼는 게으른 창작도 "콘텐츠"로 훌륭하게 기능하는 시대가 되었다. 지식과 이야기의 의미는 변한다.
옛날 같았다면 환영받았을, 이야기가 풍요로운 땅에서 온 이들은 불청객 취급을 받고 있다. 알리테아가 사는 런던의 길거리에도 터번을 쓴 남자와 차도르를 두른 여자가 돌아다니는 세상인데, 알리테아의 이웃집 할머니들은 자기네 문화권이 아닌 이야기를 찾아 다닌다며 알리테아를 못마땅해 한다. 이들은 모른다. 자신들의 조상이 게으르게 그려낸 이야기가 그들의 절망에 기여했다는 걸. 아니었다면 그들은 지금쯤 전혀 다른 이야기를 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만날 때
그러나 이 척박해 보이는 시대에도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여, 여전히 이야기를 들이마시는 사람들이 있다.
이야기로 의미를 찾고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 삶의 어떤 부재 가운데서도 그 위로를 찾아 버틸 수 있는 사람. 이를 위해 이야기 끝을 뾰족하게 다듬고 섬세하게 방향을 잡는 사람. 괴로워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 심지어 이야기를 사랑하다 못해 이야기의 일부가 되고 마는 사람들이 있다. 가끔은 광인처럼 보일 수도 있다.
알리테아의 이야기도 그렇다. 사실 모든 이야기는 진실인 동시에 광기이다.
그래서일까. 이야기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본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존재처럼 방황한다 해도, 언젠가 어떤 이야기와 반드시 공명할 것이다. 그 이야기를 통해 마주친 누군가의 눈이 반드시 알아볼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살아 버텨야 한다. 극장의 어둠 속에서 기꺼이 기립근에 힘을 주고 끝도 없이 영화를 보며, 나의 영혼에 다정하게 공명할 이야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마침내 만날 것이다. 그리고 말하겠지. “And yet here you are, my Impossible.”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영화의 개봉일은 2023년 1월 4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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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남 못 준 제 버릇
[주의사항]
이 글은 영화 [엘리멘탈]과 비교하는 영화인 [에에올]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을 퍼가거나 인용 시 출처를 반드시 밝혀주세요. 구독과 댓글은 미천한 리뷰어에게 참 많은 힘이 됩니다.
어린이들에게도 다양성, 혹은 현재가 아닌 미래에는 보편화되어야만 하는 가치를 가르쳐줘야 할 때가 있다. 꽤 오랫동안, 아이들에게 무거울 수도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안내자의 역할은 애니메이션이 도맡고 있었다. 물론 메시지보다 포장이 재빨리 가닿는 바람에 거의 모든 아이들이 푸른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렛잇고를 열창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애니메이션만큼 아이들에게 빠르게 메시지가 흡수될 수 있는 매체는 아직까지는 없다고 보는 것이 무방하다.
스펀지에 비유되곤 하는 아이들의 습득력 때문에, 애니메이션은 다른 작품들보다 꽤 혹독한 검열을 거쳐야 했고. PC(Politically Correct)라 불리는 많은 "넘어야 할 산"들을 다루느라 고전적으로 내려오는 동화들도 다시 들여다보는 기회들이 많아지고 있는 요즘. 픽사에서 만들어낸 [엘리멘탈]은 과감하게도 이민 2세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메인 줄거리로 내세웠다.
언뜻 보면 [에에올]의 애니메이션 버전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픽사의 이번 선택은 그다지 현명하지도. 그렇다고 새롭지도 못했다.
소수자, 혹은 이민 2세로의 삶
그림출처:다음 영화
비록 원소의 형태를 빌리긴 했지만. 엠버의 가족은 앞 구르기를 하면서 보아도 소수자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향을 떠나 새로운 도시에 정착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부모(이민 1세대)의 모습, 옮겨 온 새 터전 안에서도 제대로 수용되지 못하는 모습들. 그러면서도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과, 돌아가지 못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상징하는 불꽃의 정수가 집에서 타오르고 있는 장면들에서는 일종의 슬픔마저도 느낄 수 있다.
부모 세대의 인생을 남김없이 빨아먹고 자란 가게인 파이어 플레이스는 불이라는 족속(?) 들에게야 쉼터처럼 보일 수 있었겠지만, 사실 도시에서 주류의 삶을 살았을 다른 원소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그저 흔한 잡화상에 불과한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소수에게는 절대 허락되지 않았을 도시에서의 기회들은 엠버에게도. 그리고 가족들에게도 보이지는 않지만 명백히 존재하는 벽이 되어 넘어가지 못했을 것이고. 이런 넘을 수 없는 좌절감과 자신의 인생을 바쳤다는 아버지의 자긍심은 주류를 향한 날카로운 칼이 되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기도. 또한 가족들을 향한 사랑과 헌신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엠버가 사는 동네가 물난리가 났을 때 가장 취약한 곳이라는 점에서는 영화 [기생충]이 떠오르기도 한다. 삶의 터전이 배 한 척의 움직임 한 번으로도 완벽하게 몰락해 버릴 수 있는 곳. 다수를 상징하는 물이 소수민족인 불을 쓸어버릴 수 있다는 점을 내포하고 있는 설정만 보더라도 엠버의 주거 환경이 화려한 도시 속에서도 슬그머니 응달에 위치하고 있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너무 많은 시간을 소수자의 삶을, 더 정확하게는 엠버의 일상을 브이로그 마냥 보여주는데 쏟았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 가뜩이나 집중력이 짧은 아이들을 위한 작품이 가진 이 단점은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치명적인 결점을 갖게 한다.
바로 주인공의 매력이 없어진다는 점이다.
(K-) 장녀?:주인공의 매력 없음에 대하여.
그림출처:다음 영화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방.
엄마 없으면 네가 엄마야. 그러니 (주로) 남동생 챙겨야 해.라는 말에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 위치. 자신을 제대로 돌보거나 돌아볼 여유조차 없어 사춘기가 20대를 훌쩍 넘겨서 격하게 찾아오는, 부모님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자 절대 아파서는 안 되는 손가락인 장녀. 부모님의 말을 거역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엠버의 모습은 K-장녀의 삶을 고대로 빼다 박은 듯하다.
상대적으로 나약해 보이는 웨이드와 비교를 했을 때 모든 일들을 해결하는 듯 보이는 엠버의 모습이 씩씩하고 당차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엠버의 모습은 자신이 친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영화 내내 뛰어다닐 뿐. 자신의 미래나 감춰진 능력을 알아내기 위한 고뇌를 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엠버의 미래, 혹은 적성이 "정해지는"과정 또한 조금은 의문스럽다. 엠버의 능력이 정말로 특별한 것인가.라고 물어본다면 쉽게 대답할 수 없다. 엠버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관문을 통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능력에 대한 비교 대상조차 영화에서 등장하지 않았으며 반드시 그녀만이 지닌 능력인가.라고 물어보았을 때조차 그런 능력을 가지지 못해 단념하는 엠버와 같은 소수 집단을 소개하지도 않는다.
자신과 정 반대인 남자친구와는 절대 어울릴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 주류가 선사해 준 사다리를 얼떨결에 부여잡는 것을 보며, 과연 엠버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주체적으로 한 일이 있기는 한 걸까.라고 생각해 보면. 정답은 아니오에 가깝다. 그저 타인의 인정을 받아야 스스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엠버의 마음에 동질감 정도는 느낄 수도 있겠으나. 동화되기는 어렵다. 그렇다 보니 K장녀인 나조차 스스로의 기억에 기반한 공감의 눈물은 흘릴 수 있었지만. 감동의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여전한 신데렐라 이야기;행복에 대하여.
그림 출처: 다음 영화
[엘리멘탈]은 앞서 잠시 언급한 에에올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극 중 에블린(양자경)은 쿵후 마스터가 될 수도, 유명한 배우로서의 삶도, 하다 못해 소수자로 치자면 이보다 더한 소수자가 있을까 싶은 손가락이 소시지로 된 인종(?)의 삶도 살 수 있었지만. 코인 세탁방을 하고 있는 현재의 삶 그대로 그 어떤 것도 바꿀 것 없이 행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에에올은 행복의 전형적인 조건을 구걸하지 않는다.
또한 삶의 변화가 필요할 때 누군가의 허락도 구하지 않는다. 또한 내 인생이 변화해야 할 때 필요한 것이 나를 구하러 와 줄 완벽한 왕자님이 아님을 명백하게 못 박는다.
아무리 거의 모든 동화의 끝이 그래서 두 사람은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이라고는 하지만. 최소한 소수자의 삶에 대해 애니메이션에서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결말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의 각오는 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행복의 조건으로 반드시 이성으로 이뤄진 커플이어야 할 것. 또한 주류의 삶으로 편입하는 것이 행복의 조건일 것. 임을 결말에서 전시하듯 보여준다. 정 반대의 누군가에게 끌린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기에 불과 물이라는 원소의 형식을 빌리고는 있지만.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타인의 인정과 사랑이 아니다.
현재를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 개인은 자신의 인생을 바꿔 줄 그 누구도 기다리지 않는다. 이 비루하고 못나 보이는 현재의 자신만이 조부 투바키와 싸워야 하는 유일한 사람임을 알고 무서워도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갈 뿐.
행복은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어른이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알려줘야 한다.
마치면서
영화관에는 아이들이 많았다. 꽤 좋은 시간대였기에 아이들이 많은 건가.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더빙판이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더빙판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였기에 나의 무신경함에 조금 짜증이 났고, 한 편으로는 과연 이 아이들이 금쪽이가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슬그머니 내 옆자리에 앉힌 채 영화를 보아야 했다.
그러나 어린이들은 지킬 수 있는 매너를 최대한 지키며.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영화를 즐겼다. 머릿속에서 나 스스로에 대한 바보 같음을 느낌과 동시에. 과연 이 결말을 아이들이 보아서 되는 것인가. 에 대한 의문도 떠올랐다.
마음이 복잡했다.
나는 이제 어른이 되어 어느 정도의 필터링이 되는 사람이 되었(다고 믿고 싶)지만. 이 아이들이 과연 이 영화를 보고 무엇을 어떻게 받아들일까.라는 약간의 두려움도 들었다.
찝찝한 마음을 마음 한 구석에 담은 채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닥의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나 역시 자라는 동안 몇 번이고 내가 읽은 동화에 담긴 의미를 곱씹고, 때로는 깨부수며 어른이 되었으니까.
나와 함께 영화를 본 이 아이들 역시. 영화를 보았을 때의 행복함과 즐거움은 오래 가지더라도. 나중에 반드시 이 영화에 대해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픽사의 게으른 선택에 조금은 입맛이 쓴 주말이었다.
[이 글의 TMI]
1. 대장 용종 떼내서 커피도 없이 영화를 봤다.
2. 이제 겨우 보식 끝나가는 중
3. 다행히 다음 주부터는 밥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엘리멘탈 #픽사 #피터손 #레아루이스 #마무두애시 #웬디맥렌던커비 #애니메이션 #최신영화 #영화리뷰 #영화리뷰어 #Munalogi #네이버인플루언서 #내일은파란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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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직관하는 남자 영직남의 “블랙 위도우” 후기입니다.
당연히 꼭 봐야할 쿠키영상이 있습니다.#스칼렛요한슨, #블랙위도우, #나타샤, #레드가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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